[스크랩] 사도행전 강해(2)-(이장우 목사)
사도행전 강해(2)
(이장우 목사)
사도행전 강해(2)
41. 성령으로 세례 11:1-18
42. 그리스도인
43. 흉년과 부조
44. 살든지 죽든지
45. 헤롯의 죽음
46. 성령이 가라사대
47. 마귀의 자식
48. 바울의 설교
49. 도무지 믿지 못할 일
50. 작정된 자
51. 분 리
52. 구원 얻을 만한 믿음
53.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54. 주 예수의 은혜로
55. 짐 지우지 말고
56. 자기부인
57. 성령의 인도
58. 주 예수를 믿으라
59. 다른 임금
60. 철학과 복음
61. 내 백성
62. 하나님의 뜻이면
63. 성령세례
64. 따로 세우고
65. 소 동
66. 위 로
67. 사 명
68. 감독자
69. 주의 뜻대로
70. 하나님이 하신 일
71. 변 명
72. 담대하라
73. 염 병
74. 부활에 대하여
75. 우선순위
76. 소 망
77. 나와 같이
78. 인 도
79. 성도의 삶
80. 말씀대로 28:23-31
사도행전 11:1-18 성령으로 세례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3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가로되 내가 욥바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바울 사도가 성령의 지시를 따라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에게 임한 동일한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서 누가 감히 주님의 일하심을 막으리요, 하면서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곳에서 수일 더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들었습니다. 1절을 보시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전에 사마리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도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방인이니 더 펄쩍 뛸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고넬료의 집에 함께 갔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자 이 일로 인하여 힐난을 하는 것입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무할례자의 집에 가서 먹었는가 하고 따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벽이 이렇게 높은 것입니다. 자기들은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율법을 받았고 그 율법을 지키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있고,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는 자기들만이 구원 받을 만하지, 다른 이방인들은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무할례자의 집에 가서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기 집에 이방인을 초대는 하지만 다른 집에 가서 먹지는 않는 이유가 그들의 음식규례가 율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 일에 대하여 차례대로 설명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기도하고 있는 중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큰 보자기 같은 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안에 온갖 부정한 짐승들이 들어 있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잡아먹으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였는데 세 번이나 이런 환상이 나타났고 나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넬료가 사람을 보낸 것과 성령의 지시를 따라 가서 복음을 증거하였는데 그 때에 성령이 임하시는데 자기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과 동일한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을 보고서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는 말씀이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절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이 말씀이 기억이 난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 것이 자기들만이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전에 먼데 있는 자들까지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들에게는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37-39절을 봅니다. "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3)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여기서 '너희가'를 유대인으로 보고 '먼데 있는 자'는 이방인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여 놓고도 막상 이방인에게 가라는 주님의 말씀에 꺼려하는 베드로였습니다.
사도행전 11:16-17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물을 이방인에게도 주시는 분이 주님이신데 내가 어찌 막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종인 것입니다. 주인이 주시는 것을 종이 거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싫어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도 이방인에게 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고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받은 성령을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선물을 주시는데 내가 누구관대 능히 막겠느냐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유대인들과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거저 우리 편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나라들은 다 어려워도 우리나라는 어렵지 않도록 구국기도회를 하지 않습니까? 다른 회사는 어려워도 우리 회사는 잘 되기를, 다른 교회는 어려워도 우리 교회는 잘 되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있으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은 바로 우상 하나님인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미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면 우상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에스겔서 36:22-32절을 봅니다.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찌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1)굳은 마음을 제하고 2)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29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30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니 31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찌어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도 무너지고 성전도 파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반역한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회복시켜주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까?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더럽혀 놓은 나의 이름을 위하여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하여 맑은 물로 뿌려서 정결케 하고 모든 더러운 것과 우상을 섬긴 것에서 정결케 하고 또 새 영과 새 마음을 너희 속에 두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결과 회복된 백성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기억하고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며 자기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자기의 행위가 다 죄악이었음을 인정하며 잠잠할 뿐입니다. 오직 주님의 일하심만을 말할 뿐입니다. 이런 모습을 성령이 임한 자들에게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성령이 임하였지만 그러나 아직도 자신들의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고넬료가 성령을 받는 것을 통하여 그들의 우월감을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드디어 어떤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까?
사도행전 11:18절입니다. "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이렇게 다른 사도들과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지만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에게 무엇이 임하였기 때문입니까?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여기서 더 할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확정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3:7-12절입니다.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요한이 자기가 주는 물세례는 앞으로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을 맞이하기 위한 회개라고 증거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요한에게 오는 것을 보고서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 당시 가장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 사두개인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구원받는 백성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나님께서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하면서 유대인들의 근본을 흔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너희도 이방인들과 똑 같이 구원이 필요한 자들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씻어야 하는 자들이다, 회개하여야 하는 자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기에 구원이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신데 그런데 한 가지 더 있습니다. 11절에 보시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불처럼 뜨겁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은 구원이지만 불로 세례를 받는 것은 심판인 것입니다. 12절에 보시면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것입니다. 알곡은 창고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알곡은 성령으로 세례요 쭉정이는 불로 세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지금 증거하기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보니-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17절에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선물을 받는 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자기의 행함이 죄인 줄 알기에-주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그 만을 믿고,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고백이 우리의 삶이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도행전 11:19-26 그리스도인
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1)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2)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예수 믿는 사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무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예수쟁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안디옥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뭐라고 불렀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진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함께 큰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한 핍박이었습니다. 이러한 핍박을 피하여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흩어진 곳에서 도를 전하는데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대인에게만 전하는 것입니다. 벌써 사마리아와 이디오피아 내시,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아직도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할 정도로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벽이 높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흩어진 곳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 중에 몇 사람이 안디옥에 들어간 것입니다.
20-21절을 봅니다. 구브로와 그레네에서 온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개념은 유대인 아니면 다 이방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헬라인이라면 이방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헬라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자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소문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하여지자 교회에서 어떻게 된 사실인지를 알기 위하여 바나바를 파송한 것입니다.
23절을 봅니다. 바나바가 와서 보니 제대로 복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을 보고서 기뻐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안디옥의 전도도 역시 이름 없는 몇 사람이 전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 중심의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으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큰 무리가 더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사울을 데리고 와서 함께 안디옥에서 1년간 가르친 것입니다. 이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인 어떤 의미에게 부름을 받았을까요? 안디옥은 로마 제국의 세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로마시가 제일 크고, 그다음은 이집트 북부의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지중해 바다를 중심으로 보면 세 개의 큰 도시가 삼각형으로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곳은 수리아의 총독이 거주하는 곳이며 로마의 군단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로마는 한참 번영을 누리고 있는 시대였기에 지배계급은 수많은 노예들을 거느리며 쾌락을 일삼고 살았습니다. 로마가 제국으로 세계를 지배하기 전에 일어난 나라가 알렉산더 대왕으로 세계를 지배한 것입니다. 이 제국이 헬라제국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환경은 헬레니즘의 바탕인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주로 섬긴 신이 바쿠스와 다프네라고 합니다. 바쿠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디오니소스이고 별명이 바코스인데 로마신화에서 바쿠스로 불리는 것입니다. 즉 술의 신입니다. 다프네는 신은 아니지만 신들의 경쟁에서 희생된 여자입니다. 결국 나무로 변하게 되는데 그 나무가 월계수입니다. 그래서 올림픽 마라톤에서 승리하면 월계수 잎으로 만든 관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숲의 요정이라는 님프의 이야기도 성적인 이야기들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도 그리스 신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박카스를 마시고 넥타를 마시지 않습니까? 박카스는 술의 신이고, 넥타는 신들이 마시는 음료수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신들을 섬기는 안디옥의 문화적인 환경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이윤기씨의 ‘그리스.로마 신화’라는 책에 보면 디오니소스 즉 박카스신에게 바쳐지는 제사는 상당히 무절제하고 음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고 합니다. 이러한 헬레니즘의 문화에 로마의 힘과 부가 더하여진 도시의 타락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문화재들에 보면 박카스의 신도가 술에 취하여 몽롱한 상태로 있는 조각물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안디옥에 복음이 증거되고 믿는 자들이 늘어나게 되자 그들과 구별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불려진 것입니다.
그 당시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들과 다른 기준의 삶을 살게 되었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호칭을 그저 윤리 도덕적으로 바르게 착하게 산다는 차원에서만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가 세상에서 착하게 바르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그런 차원에서만 그리스도인을 확인한다면 예수 믿는 사람보다 훨씬 더 착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회사에 충실하고 가정에서 자상한 남편으로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가 윤리 도덕을 전하는 것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착하게 살자, 바르게 살자, 이런 것으로 교회가 나가면 세상의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종교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다 착하게 살고자 종교를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나는 부처를 믿고 착하고 바르게 살고, 너는 예수를 믿고 착하고 바르게 살면 되지! 왜 그리 독선적인가! 이러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신 집사님이 부산의 어느 목사님과 전화로 통화를 하였다는데 우리는 다 똥 걸레라고 하더랍니다. 중광 스님은 자신이 걸레라고 하면서 더러운 것을 닦아 내는 걸레라고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그 목사님은 우리가 더러운 똥 걸레가 되어 있으니 무엇을 닦는다고 하면 닦는 게 아니라 더 더럽히는 것이지요! 무엇을 바르게 살자 착하게 살자하면 그 안에 또 다른 교묘한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가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은 결국 우리는 괜찮은 사람들이야, 우리는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어, 그러니 우리 힘으로 한번 잘해보자,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가 무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인간을 무어라고 합니까?
로마서 3:9-19절입니다. "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1)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한바 ㄴ)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ㄷ)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ㄹ)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ㅁ)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ㅂ)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ㅅ)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을 인정하십니까?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자기 스스로 의를 행하고 착하고 바르게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인정한다면 자기의 의나 자기의 선을 말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믿고 사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이세상의 가치관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세상을 바꿀만한 이야기라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의에만 관심이 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3:19-24절을 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이제 세상에서 그동안 우리 한번 잘해보자고 한 모든 일들에 관심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들을 나도 좋아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창회도 하고, 계모임도 가고, 취미생활도 하고, 바르게살기운동도 하고, 구제도 하고, 그렇게 살았는데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알고 나니 다른 이름에는 관심이 없어진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기 전이나 믿고 난 후나 동일하게 땅에 발붙이고 살고 있지만 너무나 목표와 방향이 다른 것입니다. 어제까지 재미있게 사이좋게 지낸 가족과 친구가 갑자기 원수처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수를 삼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원수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속이 달라진 증거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8-19절을 봅니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소속이 달라진 것입니다. 어제까지 동지였는데 오늘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34-39절입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2)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세상 사람들이 무슨 재미로 삽니까? 자기 사랑하는 재미로 삽니다. 그래서 남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그것이 자기 사랑으로 되돌아올 때에 하는 말입니다. 이런 세상에 주님은 무엇을 주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까? 가정을 파괴하러 오신 것입니다. 기존의 가정을 다 부수어 버리고 새로운 가정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새 가정에 속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살고자 한 것이, 나를 사랑한 것이, 결국 예수님을 죽였구나 하는 죄를 깨닫고 자기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 가정, 이런 사람이 있는 단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완전히 눈에 가시입니다. 딱 없어졌으면 좋은 사람입니다.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노래하는데 주로 무슨 노래합니까? ‘남행열차’ 부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곳에서 ‘봄 처녀’나 ‘비목’을 부르면 무어라고 합니까? 분위가 망친다! 쫓아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를 사랑하고 삽니다. 가정을 이루어도 종교단체를 만들어도 남을 돕자고 하여도 결국 자기 사랑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가 속한 단체를 미워하면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 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온 자들을 세상이 어떻게 부르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별종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와는 다른 부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불리고 있습니까? 예수쟁이 저들은 이상한 자들이야, 이렇게 재미난 세상을 떠날 생각만 하고 사는가? 이런 의미에서 예수쟁이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보다 더 악착같이 눈에 보이는 것과 땅에 집착하기에 불립니까? 참으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종,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도행전 11:27-30 흉년과 부조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3)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사람들이 종교를 왜 가지려고 합니까? 사람들마다 종교적 본능과 욕구가 들어 있습니다. 그 본능 중에서 피할 수 없는 것 한 가지를 들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원화소복(遠禍召福)입니다. 나에게 닥치는 재앙과 화는 멀리하고 복은 불러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환난과 재앙을 만나면 내가 신에게 무슨 잘못을 하여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꾸 재앙이 닥치면 누구를 찾아갑니까? 점치는 사람이나 무당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어보면 조상신을 섭섭하게 하였다면서 제사상 한번 거나하게 차려서 굿을 하여 그들의 노여움을 풀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무슨 좋은 일이 닥치면 자기들이 조상신에게 또는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지극 정성을 바쳐서 이런 복이 주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는 이런 분위기가 없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무언가 잘되면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무슨 복 받을 짓을 했는지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나는 이렇게 하여 이런 복을 받았다고 간증하러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서 재앙을 당하고 환난을 당하면 무언가 하나님께 잘못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아직도 팽배한 것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올 여름에 폭우와 태풍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피해를 입은 가운데 예배당도 있고 목사도 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의 집과 논도 다 들어간 것입니다. 홍수가 예수 믿는 사람의 집만을 피하여 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가 그렇게 당하였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다고 이러는 겁니까? 그래도 내가 교회에서 하라는 것은 빠지지 않고 다 했습니다, 십일조도 하고 주일 성수도 하고 봉사도 하였는데 그러면 하나님도 나의 재산을 지켜주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뭡니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입니까? 지난주에 ‘신앙클리닉’ 성경공부 반에서 교회의 책임과 본질에 대하여 공부를 하였습니다. 평소에는 한 시간 정도로 마치는데 그날은 두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중에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교회가 종말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세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전도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를 믿으면 행복해진다는 목표가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로 나온 사람들이 "나 이제 예수 믿었으니 빨리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투정만 하는 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내세를 준비하는 곳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는 방향과 목표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와 방향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인데 그저 교회 나와서 내 행복이나 달라고 하고 있다는 것은 다른 세상의 종교들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안디옥에 복음이 증거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사람들이 부르게 되고,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증거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안디옥이 선교기지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가는 중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왔는데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사람이 성령으로 말하기를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것이라고 합니다. 그 예언대로 글라우디오 때에 천하가 흉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글라우디오는 주후 41-54년에 재위한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로 봅니다. 그러자 안디옥의 교회가 힘을 다하여 부조를 하여 예루살렘 교회로 보냈다고 합니다.
지금 사도행전의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까? 비록 핍박이 있고 순교가 있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복음이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평안하고 순조롭게 열어주셔서 복음이 잘 증거되게 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온갖 핍박과 환난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만이 아니라 12장에 보면 요한의 형제 야고보도 순교하고 베드로도 감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난 중에 흉년까지 닥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 현재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환난과 핍박이 닥치는 것이 불행입니다. 그러나 성도로 하여금 영원을 준비하게 하고 내세를 준비하기 위함이라면 환난이나 핍박이나 고난은 복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본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부르고 주님께 메어 달리게 됩니까? 등 따시고 배부를 때 입니까? 아니면 어렵고 힘들 때 입니까? 후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영적이 감각이 무뎌지고 내세에 대한 관심과 영원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세상사는 재미에 빠지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돈 모으는 재미, 시집가고 장가가는 재미, 자식 낳고 기르는 재미, 사업 확장하는 재미에 푹 빠져서 다른 것에 눈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유혹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에 만족하여 자기 영혼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 불행이고 어리석은 자의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12:13-21절을 봅니다.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2)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자기 형이 아버지의 유산을 다 가로챘기에 나누어 주라고 예수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온 목적은 땅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가 너희의 재산이나 나누어 주는 재판장인줄 아느냐고 하시면서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정당한 요구일 수 있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생명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이 사람은 영혼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밤에 내 영혼은" 여기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까마귀로 하나님께서 기르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12:33-35절입니다.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너희 소유를 팔아서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교회에 헌금 많이 하면 하늘에 상급이 많다는 식으로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탐욕만 죄가 되고 교회의 탐욕은 죄가 되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니 교회 헌금 많이 하면 복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보물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물이 땅에 있는 사람이라면 땅의 것만을 생각할 것이요 보물이 하늘에 있는 사람이라면 하늘의 것을 생각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보물이 하늘에 있는 사람은 땅에 있는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구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을 소망 두고 사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사도행전에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그들의 형제의 환난에 힘을 다하여 연보한 것입니다. 부조라는 말씀이 봉사인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연보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형편이 좋아서 한 것이 아닙니다. 천하에 흉년이 들리라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때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의 것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물가만 오른다고 하여도 사재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흉년이 든다는데 어떻게 힘을 다해 부조를 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3:1-5절을 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1)진노가 임하느니라"
이런 말씀을 드리면 틀림없이 여러분 중에 부담을 가지시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축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보험도 들지 말라는 말인가, 노후는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그러나 부담이 되셔야 합니다. 안색이 변하여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여러분이 기분이 좋거나 나쁘거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무어라고 하시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믿음이 없는 자들아, 까마귀와 백합화를 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가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늘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과 목표를 알기는 하여도 갈 실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목숨 걸고 지키려고 한 것들이 하루아침에 날아감으로 새롭게 눈을 뜨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으로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많은 환난과 시련을 당하는 것입니다. 시련을 통하여 불순물을 제거시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쓸모없는 것들을 빼내시는데 고난의 풀무를 통하여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면 환난을 면하고 고난을 피할까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세상에서 담대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으면 어떻게 할까 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오늘밤 내 영혼은, 이라는 생각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성도에게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30-39절을 봅니다. "봉독" 성도의 이름과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수준이 안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연단을 시키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과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과 칼이 성도에게 허락됩니다. 그러나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내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란 세상의 난리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는 것이 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지 아니함이 복인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2:1-19 살든지 죽든지
1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쌔 때는 무교절일이라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쌔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줄 알겠노라 하여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18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헤롯왕이 교회를 핍박합니다. 이 헤롯은 예수님 탄생 시에 있었던 헤롯의 손자입니다. 헤롯이 야고보를 칼로 죽이자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마저 잡아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요구하는 유대인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여 사형에 해당할 만한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내어준 빌라도의 모습을 기억나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시대 때에 로마가 여러 지역을 통치하였지만 그중에 가장 골치 아픈 나라가 유대지역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통치자가 율법에 반대되는 정책을 펴게 되면 목숨을 걸고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헤롯왕도 유대인들과는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그중에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이니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이 하는 일을 보게 됩니다. 단순히 로마가 통치하기 위하여 그것에 방해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처형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다른 배후 세력이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로마보다 더 큰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7:15-22절을 봅니다. "15 나 다니엘이 중심에 근심하며 내 뇌 속에 이상이 나로 번민케 한지라 16 내가 그 곁에 모신 자 중 하나에게 나아가서 이 모든 일의 진상을 물으매 그가 내게 고하여 그 일의 해석을 알게 하여 가로되 17 그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라 세상에 일어날 것이로되 18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 19 이에 내가 네째 짐승의 진상을 알고자 하였으니 곧 그것은 모든 짐승과 달라서 심히 무섭고 그 이는 철이요 그 발톱은 놋이며 먹고 부숴뜨리고 나머지는 발로 밟았으며 20 또 그것의 머리에는 열 뿔이 있고 그 외에 또 다른 뿔이 나오매 세 뿔이 그 앞에 빠졌으며 그 뿔에는 눈도 있고 큰 말하는 입도 있고 그 모양이 동류보다 강하여 보인 것이라 21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22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합니다. 그 꿈은 왕이 꾸고도 잊어버린 것인데 거대한 신상입니다. 머리는 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놋, 종아리는 철, 발은 철과 진흙이 함께 섞여 있는 신상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신상이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은 뜨인 돌이 날아와 그 신상의 발을 치니 그 신상은 가루가 되어 날아가고 그 돌은 큰 태산을 이룬다는 꿈이었습니다.
이것은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니엘 자신이 직접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네 짐승이었습니다. 이것도 역시 장차 나타날 왕들이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나오는 나라의 이름은 바벨론과 메데-바사 헬라제국입니다. 그러므로 네 번째 짐승과 신상의 네 번째 부분은 로마로 보는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며 영원히 망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의 피로 만드신 것으로 봅니다. 이 나라는 세상의 나라들과는 다른 영원한 나라이며 그 권세가 흔들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나라의 출현 자체를 세상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온갖 왕들과 나라들이 일어나면서 하나님과 그 기름 부으신 자를 대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은 이미 창세기 3:15절에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을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권세와 유대인들의 합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였던 것은 결국 이 세상이 누구의 지배아래 있었던 것인가를 공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의 세력들은 예수님만 핍박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여전히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7:21-22절을 다시 봅니다. 네 번째 짐승 이후에 계속하여 뿔들이 나옵니다. 뿔이란 세상의 권세로 봅니다. 그러면 계속하여 이들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죽는 것은 세상의 권세가 성도들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김이 영원한 이김은 아닌 것입니다. 사단이 세상의 권세와 유대인들 사주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신 사건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의 그 깊은 경륜을 결코 다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단의 진영에서는 환호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로서 사단의 권세는 꺾어져 버린 것입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까지는 아직도 이들의 활동들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하시면 이 모든 대적들을 영원한 지옥 불에 던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대적들이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것처럼 야고보를 죽일 수 있으나 그러나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신원하여 주고 계심을 교회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 위하여 베드로는 구출하여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순교함으로 대적들이 성도들을 이기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 반면에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구출됨으로 주님의 신원하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로서 세상은 여전히 성도들을 이길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여도 아무른 일이 없다는 착각에 빠짐으로 영원한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오히려 주님의 뜻의 성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전능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대적에게서 이기게 하시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손 되다간 손이 마비되어 버리고, 뒤에서 욕하다가는 벙어리가 되어버리는 그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구출되는 것처럼 나도 멋있게 기적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우리에게 다 있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기도하면 능력 받아서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다고 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어머니 마리의 집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기도만 하면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말씀을 봅시다. 베드로는 감옥에서 무얼 하였습니까? 그냥 누워 잤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평안입니다. 내일 죽는다는데도 쇠사슬에 묶여서도 이렇게 깊이 잘 수 있으니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죽었으니 자기도 죽을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누워 잔 것입니다. 누워 자다가 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깨우는 것입니다. 일단 베드로는 기도하거나 찬송하거나 철야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기도하였기에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베드로가 그 기도하는 집 앞에 왔을 때 왜 믿지 못하였을까요?
야고보서 1:6-7절에 보시면 의심하고 구하는 것은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베드로가 감옥에서 탈출하기를 전심으로 믿고 기도하였다면 계집아이가 베드로가 왔다는 말을 듣고서 달려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천사일 것이라고 하면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혹시 베드로가 탈출하도록 기도하였다고 하여도 그들의 믿지 않았기에 그들의 기도의 응답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였을까요?
야고보는 이미 죽었습니다. 교회의 기둥과 같이 여기는 베드로도 잡혀서 이제 처형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기도하시겠습니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소서, 하는 기도가 되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기도라고 봅니다. 우리가 무슨 목표를 정하여 놓고서 데모하듯이 하는 강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아니면 우리는 한걸음도 갈 수가 없나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도란 날마다 쉬지 말고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들의 지식으로 자기들의 목표를 설정하고 나가는 종교사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많이 기도하는 나라는 세계상에 없을 것입니다. 새벽기도회를 하는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많이 기도하면서도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나가는 교회도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4:27-31절을 봅니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4)종 예수를 거스려 28 하나님의 5)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3)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들이 핍박을 받고 나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핍박이 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당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러나 자기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담대히 증거하게 하옵소서, 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죽으면서 베드로는 구출됨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를 당하든 기적적으로 구출을 당하든 주님께서 실패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일을 하고 계심을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11절의 말씀입니다. "봉독" 이런 인식을 하고나서 자기의 구출사건을 간증하러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사라집니다. 이후로 베드로가 어디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살았는지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위하여!
사도행전 12:19-25 헤롯의 죽음
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5 ○바나바와 사울이 1)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헤롯이 야고보를 칼로 죽이자 유대인들이 기뻐한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마저 감옥에 가두었다가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와서 베드로를 탈옥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능력이 있으신데 왜 자기의 종들을 죽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하는 생각이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세상의 어떤 힘과 권세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보호하셔서 주님의 일을 멋지게 이루어 내도록 하시면 되실 텐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에 있어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생각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도 잘 되어야 전도도 잘 되지, 네가 지금 고3인데 그렇게 교회 일만 하다가 대학에 떨어지면 하나님의 영광 가린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합니다. 공부해야 될 학생이 공부는 안하고 예배당에 모여서 무슨 축제니 찬양연습이나 하면서 세월 보내는 학생도 문제이고, 그렇게 말하는 부모도 문제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영광인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보아도 자기의 영광을 구하고 세상의 영광을 구하니 하나님의 영광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 영광을 구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오죽 못났으면 자기를 믿지 못하고 남을 믿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가 정말 못난 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는다면서 자기 잘남을 증명 해보고자 한다면 이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이나 잘못 찾은 것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하고 야고보가 순교하는 것보다 베드로처럼 멋지게 탈옥하는 것이 더 전도가 잘 될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이 사건 이후로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집니다. 나중에 성경에서 한두 번 더 언급이 됩니다만 다른 곳으로 피하여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베드로 역시 순교한 것으로 압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웅적인 방법으로 전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이 세상으로 하여금 자기들이 하나님을 이겼다는 착각 속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물과 같고, 겨자씨 한 알과 같고, 가루 속에 들어 있는 누룩과 같은 것입니다. 밖으로 드러나게 과시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귀하고,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증거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영웅적인 모습이 아니라 세상에서 싫어하는 모습으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백성만 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물질적인 복을 주는 곳으로 바뀌어 버리니 아무나 다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환난의 바람이 한번 불면 다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극심한 어려움의 환난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으로도 환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서 이런 방식으로 와 있건만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의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헤롯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고자 합니다. 헤롯은 에서의 후손이랍니다. 정통 유대인이라고 자부하는 야곱의 후손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정치를 잘하였는지 로마의 인정을 받아 유대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된 것입니다. 로마가 다른 지역에 통치자를 보낼 때는 자기 나라의 관리자를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데 유대만은 헤롯을 통치자로 인정한 것입니다.
이 헤롯이란 성경에서 네 명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태어났을 때에 두 살 이하의 아이를 죽이라고 한 헤롯대왕입니다. 이 사람이 헤롯 왕가의 기초를 마련한 사람입니다. 로마의 실권을 장악한 사람과 줄타기를 잘한 것입니다. 시저와 옥타비아누스의 편을 듦으로 로마에 충성하는 자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래서 늘 반란을 잘하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막아낼 적임자로 인정하여 유대지역의 왕으로 임명을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로마에도 충성을 하여야 하지만 미우나 고우나 유대인의 왕이기에 유대인들의 환심도 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가아사랴 도시도 건설한 것입니다.
오늘 분문에 가이사랴로 내려갔다는 이 도시는 헤롯 대왕이 시이저 황제를 기념하여 건설한 로마풍의 도시입니다. 그래서 시저리아라는 도시 이름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옛날에 번역할 때 시이저를 가이사로 번역을 해서 가이사랴로 이름하고 있는 곳입니다. 두 번째 헤롯은 세례요한의 목을 자른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세 번째 헤롯이고 나중에 사도 바울을 재판하는 헤롯은 네 번째 헤롯입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은 헤롯 대왕의 손자로서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이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었던 자입니다.
이제 사도행전 12:19절을 봅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찾아도 찾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파수꾼을 심문하여도 무언가 단서가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천사가 밤에 베드로를 탈옥시켰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몇 일전에 동일하게 예수를 믿는다는 야고보를 칼로 죽인 헤롯입니다. 그러므로 헤롯은 유대인의 왕이면서도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께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권력과 쾌락에만 관심이 있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헤롯 왕이 주로 거처하던 곳이 이곳입니다.
가이사랴는 지중해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을 대단히 노여워하고 있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가이사랴 지역보다 북쪽의 해변가에 위치하고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상업이 발달하여 돈을 많지만 양식이 부족한 곳입니다. 그래서 곡식을 사 먹어야 되는 입장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두로 왕 히람에게 나무를 달라고 하면서 대신 밀과 기름을 주던 것을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이곳에 두로와 시돈의 지도자들이 헤롯에게로 나아왔습니다.
화친하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헤롯의 왕국에서 나오는 곡식을 수입하지 않고서는 안 되기 때문에 헤롯에게 아부하러 온 것입니다. 헤롯도 이들이 밉지만 정치상 못이긴 채 하고 그들의 환영 행사장에 왕복을 입고 나간 것입니다. 헤롯이 그곳에서 일장 연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크게 외치기를 이는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고 자기가 영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자 주의 사자가 치니 벌레가 먹어 죽었더라고 합니다.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전쟁사’에 보면 이 헤롯에 죽는 모습을 자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헤롯에 온 몸에 병이 들어 성한 곳이 없었고, 온 몸에 열이 나고, 피부에 참기 어려운 가려움 증세가 있고, 결장에 계속적인 통증이 있었고, 발에는 수종, 배에는 염증, 게다가 은밀한 부분이 썩어 들어가는 바람에 그곳에서 벌레가 나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호흡이 곤란하여 똑 바로 앉아 있을 때를 제회하고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였으며 온 몸에 경련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겠습니까? 이보다 더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왕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모두가 왕이 되고 싶은 사람이다.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서 그럴 뿐이지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에 모두가 스스로 신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절의 말씀을 따라 자기의 원수를 정복하십니다.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순간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이제 그의 제자들에도 같은 모습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무시합니다. 발로 밟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시를 당하고 밟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견디지 못하여 아우성입니다. 힘을 달라고, 물리적인 힘을 달라고, 그래서 세상에서 당당해 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의 물리적인 힘이란 결국 헤롯의 모양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재림하기까지는 성도는 언제나 세상의 감추어진 모습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처럼, 야고보처럼 기적적으로 탈옥한 베드로도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주님의 일군들은 오늘도 이렇게 쓰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는 아닙니다. 영원히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하여진 모든 세력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헤롯이 교만하여 졌을 때 심판받는 것과 같이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주님과 함께 낮은 곳으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좁을 길로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십자가의 길로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에서 왕이 되고자 합니다. 자기의 왕국을 만들어 호령하고 싶은 것입니다. 가정에서, 회사에서, 교회에서도 자기의 목소리 한번 내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헤롯의 정신이고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우리 누가 헤롯의 모습에서 예외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스데반과 야고보의 모습을 실패로 보고 헤롯을 성공으로 보는 세상에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고린도전서 4:9-13절을 봅니다.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사도들이 세상에서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십자가의 방법입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의 사도들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믿고 따르겠습니까?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줄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이란 주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어떠하였겠습니까?
히브리서 11:32-40절을 봅니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
지난주 오후에 믿음의 조상들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이라는 증거를 받았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오늘의 말씀에 의하면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을 이기고, 적을 물리치고 사자의 입을 막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으로 세상이 항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여전히 주의 백성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모습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성도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성도가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13:11-14절을 봅니다.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예수님께서 영문 밖에서 죽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서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영문 밖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서 살고 싶은 것입니까? 가이사랴 같은 곳에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로마 풍을 딴 신도시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즐기며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하여 얼마나 줄타기를 잘 해야 합니까?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어떻게 투자를 하는 것이 돈을 버는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다 헤롯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이 하나님처럼 살고자 하는 모습이 모든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정도 차이이지 모두가 헤롯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는 찬사를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은 무어라고 합니까? 사람들이 신처럼 대접하려고 하였을 때 자기들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옷을 찢으면서 자기들이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울 놀라운 말씀은 헤롯이 이렇게 핍박을 가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여간 것입니다.
사도행전 12:24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 하더라" 이 세상은 주님 오실 때까지 이런 모습으로 갈 것입니다. 말씀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은 받는 대로 영구한 도성을 더욱 사모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헤롯과 같이 살다가 갈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씀의 조명을 받고 삶의 방향을 바르게 정하여 살아 가도록합시다. 어떤 길을 사람의 보기에 바른 것 같으나 필경은 멸망하는 길이요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실패하고 망한 것 같아도 생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1-12 성령이 가라사대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도 감옥에 잡아넣었던 헤롯의 최후를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헤롯이 교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함으로 벌레가 먹어서 죽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자들은 계속 핍박을 당하였습니다. 핍박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림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12:24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입니다.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고 가두고 핍박을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인 것입니다.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고 할 때에는 누가 감히 헤롯의 권세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의 최후는 하나님의 저주로 인하여 벌레가 먹어 죽어간 것입니다.
유대의 온 땅을 벌벌 떨게 하던 헤롯이 벌레에 먹혀 죽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삶의 방향을 잡아 나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벌레가 먹어 버릴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것인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19-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보물을 땅에 쌓아두면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절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에 헌금 많이 하면 하늘에 쌓여져서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부자로 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생각은 옛날 사람들도 다 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시신을 땅에 묻으면서 세간을 함께 매장한 것입니다. 부자는 돈도 넣고 심지어 자기의 종들을 순장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승에 가서도 편하게 살라고 입안에 보물을 넣어서 장사 지내기도 한 것입니다. 진 나라 시 황제 같은 경우에 그 무덤이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 무덤이 얼마나 대단한지 지하에 흙으로 만든 사람 모형의 인형과 말과 병거가 얼마나 많은지 흙으로 된 인형만 발견된 것이 7,000개랍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이 사람이 사후에 보물을 쌓아둔 것입니까? 역시 썩어질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사람이 스스로 보물로 생각하는 것들은 다 벌레가 먹는 것입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자기 몸도 다 벌레에 먹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썩지 아니할 보물,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 나라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말씀이 모두 "성령이 가라사대"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비록 사람의 손으로 기록이 되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지금도 이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이 성령의 지시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는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에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성령께서 가라사대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한 것을 전달하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성령의 지시를 따라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안수하고 선교사로 파송을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만 먼저 이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들을 보고자 합니다.
1절입니다. 바나바는 이미 아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자기의 밭을 팔아 바친 사람이며 권면하고 위로하는 자라는 별명이 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울을 추천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니게르라는 사람은 흑인입니다. 루기오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로 보기도 하고 바울의 친척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입니다. 헤롯의 젖동생이라면 왕궁에서 함께 자란 자일 텐데 그 왕궁을 마다하고 예수 믿고서 이들과 함께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이었습니다.
무언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모임이란 무두 자기들의 취향 따라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학연을 따라 모이든, 지연을 따라 모이든, 혈통을 따라 모이든, 같은 취미라서 모이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입니다. 흑인도 함께 있고, 헤롯의 젖동생도 함께 있고, 기독교를 핍박하던 사울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인종도 국가도 신분도 모두 뛰어 넘는 모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따라 모인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고백들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들이 다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 곳에서는 자기의 과거가 문제가 안 되는 곳입니다. 과거의 자랑스러운 이력도 소용없고 과거의 어떤 잘못도 허물이 되지 않는 곳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는 그런 모임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모습이 있습니까? 자기의 어떠한 과거의 이력과 공력과 대다한 선행들이라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부끄러운 것뿐이며, 어떠한 죄악이라도 용서 받았기에 허물이 되지 않는 그런 모임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곳이 성령으로 인하여 모인 자들이 모임인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복음이 본격적으로 이방으로 향하게 되는 전초기지가 되는 것입니다.
2절을 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께서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섬기고 금식하는 것은 금식하였기에 금식기도의 능력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금식이라는 것이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주님을 섬기며 주님을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선교사로 지원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불러서 시키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시키실 일이 있어 따로 불러 세우는데 이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선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미리 열두 제자들처럼 불러서 훈련을 시키시지 않으시고 왜 그렇게 핍박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이제야 부르시는 것입니까?
디모데전서 1:12-16절을 봅니다.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수요일 저녁에 디모데전서를 보면서 보았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역자를 부르실 때에 하나님께서 힘이 없고 능력이 없어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격이 있어서 부름을 받은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성경의 인물들 앞에서 기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잘남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부르신 분이 얼마나 은혜가 풍성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지를 드러내시는 차원에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능력이 많아서, 열심이 특별나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훼방한 포행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세움을 입은 것은 오직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 자신이 딱 맞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은혜를 입고 보니 죄인을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이 얼마나 좋았던지 자기가 죄인중의 괴수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의인을 구원하려 온 줄 알았을 때에는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였는데 이제 자신이 주님을 만나서 죄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자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드러내기 위하여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불러 세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 늘 자신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이런 꼴을 가지고 예수님을 증거한단 말인가?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데, 내가 무슨 예수를 전한다고 하는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성령의 인도가 아닙니다. 이런 생각은 아직도 세상의 지혜입니다.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께서 미련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혜로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 십자가의 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도 성령의 인도와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성령을 거스르고 근심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성령을 받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방향과 목표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또 본성적으로 세상의 것들을 더 좋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이 임하시게 되면 이러한 우리를 결국 주님의 뒤를 따르게 만들고 마시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가 살아야 되는 방향으로 나가는데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이 간섭하게 되시면 나를 죽이는 방향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면 성령은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님께로 인도함을 받고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는 방향과 목표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일하시는 모습을 잠시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8절에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지금 사도행전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수님이 증거되도록 성령께서 적절하게 조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넘기 힘들었던 이방인의 경계를 어떻게 넘었습니까? 성령께서 빌립 집사를 사마리아로,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증거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방인 고넬료에게 전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들이 자기들의 본성을 거슬러 이런 일을 하게 되는 것은 성령께서 그들을 강권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가라사대, 하는 말씀 안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일들이 사도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내가 원하고 바라는 방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방향으로 삶이 인도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 자랑하는 재미로 살았다면 이제는 자기는 죄인임을 알기에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재미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남을 죽이면서도 자기는 살려고 했다면 이제는 자기는 죽을지라도 남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자들의 모습이 이런 모습으로 간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가 나타나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따로 불러 세워서 일을 시키시는 모습이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 술술 풀리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게 만들어서라도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은 은혜만을 붙들고 살게 하시기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믿을 만 합니까!
사도행전 13:4-12 마귀의 자식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쌔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불러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구브로로 갑니다. 구브로는 지중해에 있는 섬입니다. 키프로스 섬입니다. 이 섬의 동해안이 살라미이고 서해안이 바보입니다. 이 구브로 섬에도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항상 먼저 전하여지는 곳은 유대인들의 회당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배척하면 다시 이방인에게로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구브로의 살라미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별 결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섬을 가로질러 바보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서 가면 초능력이 나타나서 모든 사람들이 복음 전하는 자 앞에 나아와 벌벌 떨면서 영접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13장 1-4절을 분위기를 보시면 성령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불러 세우셔서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금식하고 기도하며 두 사람을 안수하여 성령의 보내심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역사로 출발이 된다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령의 지시를 따라서 세움을 입고 보냄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가는 곳 마다 핍박이 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백지 상태에서 복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대적의 세력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겠다고 나오는 것은 전하는 사람의 능력과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미 적의 세력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으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통하여 적의 실체를 드러내면서 자기의 백성들을 구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구브로의 동쪽에서 별 결실이 없었고 이제 서쪽인 바보에 왔습니다.
이곳에서 ‘바예수’라는 자를 만나는데 이 사람은 유대인이면서 거짓 선지자 박수입니다. 유대인이 거짓 선지자 역할을 하는 것은 많이 들어 보았지만 박수라는 말은 생소할 것입니다. 박수는 남자무당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사마리아의 시므온과 비슷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로마의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로마의 총독 서기오 바울은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을 청하여 그들이 전하는 것을 듣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바예수라는 사람이 바나바와 사울을 대적하며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이 바예수란 자를 향하여 그 실체를 드러내며 저주를 합니다.
9-12절을 봅니다. "봉독" 사울이 이제부터 바울로 말하여 집니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사울이 바울로 바뀌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이방지역에 로마가 지배하고 있는 지역들에 복음을 전하면서 그 이름이 바울로 불려지는 것입니다. 이름이 두개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 사울이라고 하는 바울이 바예수를 향하여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자식의 특징이며 또한 마귀의 속성인 것입니다. 궤계란 속이는 것입니다. 악행이 가득하고 의의 원수이며 바른 길을 굽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저주하니 곧 소경이 되어 얼마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들어가면 마귀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귀들의 일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하여 보고자 합니다. 오늘날 마귀니 귀신이니 악마니 하는 것들을 세상은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이런 것들을 코미디로 만들고 있습니다. 코미디 프로에 지옥과 염라대왕이 나와서 재판을 받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지 지옥이니 악마니 하는 것들을 코미디로 여기는 것입니다. 또는 무시무시한 공포 영화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드라큐랴나 오멘 같은 영화에서 나오는 악마의 모습으로 마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악마는 결국 사람이 장악할 수 있는 악마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지옥이니 하는 개념은 철저하게 권선징악적 차원에서 이야기되는 것입니다. 나쁜 짓 하면 지옥에 가고 지옥에서도 착한 일 하면 다시 천상으로 올라가고 하는 것들입니다. 결국 세상에서 악마니 마귀니 지옥이니 하는 것들도 결국은 마귀의 조종 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마귀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제일 먼저 창세기 3장에서 나타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 먹으면-하나님께서 오직 이것 한 가지를 금지하셨는데-너도 하나님처럼 된다는 유혹을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사단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증거하는 사단, 마귀란 하나님 없이 인간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게 하는 것이 사단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온 세상이 누구의 손아래 들어 있는가를 알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의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땅과 우주의 신비를 다 풀어 헤쳐서 모든 것을 다 알고 다스리게 되기를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발전이라고 하고 인류의 진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단의 속임수를 제대로 알게 되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15절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원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뱀의 후손을 여자의 후손이 이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나 여자의 후손의 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예 사단이 그 발꿈치를 상하게 하기 이전에 박살을 내어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을 상하게 하는 것을 통하여 마귀의 세력을 다 드러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이 창세기로부터 계속되는 것입니다.
먼저 가인과 아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선택하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아 주시니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피가 하늘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인의 역할이 뱀의 후손의 역할이며 아벨의 역할이 여자의 후손의 역할이 되는 것입니다. 가인에게 스스로 죄를 다스릴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죄의 소원이 너에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르시라고 하셨지만 죄의 능력, 죄의 욕구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스마엘과 이삭을 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힙니다. 그러나 약속의 자식은 이삭이기에 이스마엘은 약속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태중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런즉 구원이나 영생이란 것은 인간 편에서 달음박질 하고 애쓰고 노력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내려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셔야 합니까? 이미 죄의 권세아래 마귀의 지배하에 있기에 그렇습니다. 스스로 탈출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을 통하여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 어떻게 전개 될 것인가를 보이신 것입니다. 우선 능력이 있어 보이고 힘이 있어 보이는 세력은 가인과 이스마엘과 에서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약속을 받은 자를 괴롭히지만 결국은 약속 받은 자의 승리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비록 희생되어 피를 흘릴지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피를 신원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창세기로부터 성경전체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과 그 실현을 방해하려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배후를 누가 조종하고 있는가를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면서 핍박받음으로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의 최종적인 모습이 바로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대적들이 누구였습니까? 악하고 나쁜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유대인들이며 제사장들이며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세상의 권력인 로마의 힘을 빌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합동으로 못 박아 죽인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사단의 일시적인 승리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시키심으로 예수님이 옳으심을 만천하에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로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모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마귀가 무슨 짓을 하고 있겠습니까? 주님의 재림 시에 이들이 모두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 갈 것입니다만 그날까지 마귀가 하는 일은 복음이 증거되지 못하도록 대적하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이러한 마귀의 활동이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서기오 바울이라는 사람은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입니다. 구브로 섬 전체의 총독이라면 그의 권세와 힘이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지혜롭기까지 합니다. 이런 사람이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는 것입니까? 거짓 선지자요 박수인 바예수의 말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가 마귀의 자식이라고 사울이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총독이요 지혜가 있는 사람인 서기오 바울이 마귀 들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인정하시겠습니까? 교양 있고, 예의 바르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가정 잘 돌보고,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 지금 마귀의 권세아래 있습니다. 그곳에서 나와야 삽니다, 라고 한다면 누가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겠습니까? 전도 하는 사람이 정상으로 보이겠습니까? 전도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귀의 속임수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간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나가는 방향은 언제나 하나님 없이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고자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간섭을 받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두려워하였지만 이제는 그러한 것의 원인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무서운 자연재해들을 얼마든지 분석하고 대처하고, 우주와 신비의 세계까지 다 분해하고 해체할 수 있다는 것이 현대 인간의 보편적인 정신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약속의 세계를 믿지 못하게 하고 눈에 보이는 과학적 사실만을 믿고 살게 하는 것이 마귀의 지배아래 있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현실로 보입니까?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현실로 보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약속하신 그 나라가 현실로 보입니까? 전자라면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마귀는 교묘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하는 일이며 마귀에게 속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계에서 빠져 나와서 예수를 믿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울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적의 실체, 마귀의 실체까지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그렇게 죽도록 붙들고 있었던 것들이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는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조용배 집사 이야기).
사도행전 13:13-31 바울의 설교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1)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2)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 오십 년간)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ㄱ)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26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지난주에 바울사도가 구브로(키프로서) 섬 바보에서 복음을 전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총독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배를 타고 지금의 터키지역인 밤빌리아 버가에 갑니다. 이곳에서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이 문제로 나중에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서게 됩니다. 아마 가는 길이 너무 힘들고 험하여 바나바의 친척인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사도행전 15자에서 다시 나옵니다. 그리고 버가(항구도시)에서 내륙으로 들어간 곳인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안식일날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이니 그곳에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안식일 날 회당에 모여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잠시 그 말씀에 대하여 말하는 기회를 줍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은 4장에서 이런 기회가 있었습니다. 마침 회당장이 내어온 성경이 이사야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는 말씀을 읽고서 이 말씀이 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사도도 지금 이러한 경우로 보면 되겠습니다.
15절을 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고서 바울의 일행에게 백성들에게 권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작되는 설교가 41절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의 설교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이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약속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구원을 줄 수가 없고 오직 그 아들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구약의 역사를 들어가면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를 바울이 옛날에 들었을 때에 어떻게 하였습니까? 이런 설교하는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가담한 사람이고 이렇게 믿는 사람을 잡아서 옥에 가두는 일을 앞장서서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그렇게 거부하던 그 내용을 그대로 설교합니다.
우리가 이미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율법과 선지서가 증거하고 있던 그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라는 사실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분노하여 이를 갈면서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그때 바울 사도가 그 곁에 있으면서 스데반 죽이는 것이 옳다고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돌에 맞아 죽을 그 설교를 바울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데반, 베드로, 바울이 도대체 어떤 설교를 하였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여 죽이려고 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인간이 한 일은 모두 악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선한 일을 한다고 하여도 결국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열심과 헌신과 희생을 알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정죄하고 나서는 것이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들을 방해만 하였기에 하나님은 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내셨다는 이야기가 성령 받은 자들의 설교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 흥분할 만하지요. 그렇다면 자기들이 지금까지 목숨 걸고 생명처럼 지켜 왔던 모든 전통들과 이력들을 전면 부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감당하시겠습니까? 나 행한 것 죄뿐이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자기의 행위를 부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니 우리는 매사에 말이 많은 것입니다. 그 말들의 거의 전부가 모두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틀리고 당신이 옳다는 말을 제대로 합니까? 인간관계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나서지 않습니까? 모든 불평과 원망이 자기 정당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용어로 하자면 자기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들의 설교를 들으면 철저하게 자기의 의를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만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성령이 임한 자가 그런 설교를 들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멘인 것입니다. 자기의 행한 것이 다 더러운 것임을 처절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의만 사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0:2-4절을 봅니다.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을 쓰면 쓸수록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는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서서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목표점과는 더 멀리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현실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울의 설교를 들어 보고자 합니다. 우선 17-20절까지 내용은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들을 택하셨다고 합니다. 그 중심에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신을 섬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믿음을 주시고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그네 된 그들을 하나님께서 큰 권능으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독립운동 하여서 출애굽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용사가 되셔서 싸우신 결과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얼마나 자주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까? 그런데도 그러한 소행을 참으셨다고 합니다. 그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고 그 땅을 주셨습니다. 사사시대 약 사백 오십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였습니다. 왕을 구한 것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왕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라고 사무엘을 통하여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워진 왕이 사울입니다. 그러나 이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다윗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을 우선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평소에 하나님을 잘 섬겼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기름 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평소에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 주어도 인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세상의 학문이나 교회에서 설교나 간에 결국은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긍정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에 마음에 들게 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아서 아들도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만 한다면 얼마든지 복을 받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이치에 맞는 말 같습니까?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시니 사람들이 어떻게 대접하였습니까? 자기들의 마음에 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합한 분이신데 사람들의 마음에 도대체 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택하여 기름을 붇기 위하여 제사에 초대하였습니다. 누구에게 기름을 부어야 할지는 사무엘도 모릅니다. 그래서 첫 아들을 보니 용모가 준수하고 힘과 능력이 있어 보여서 이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니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십니다. 너는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시니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은 그 중심이 제대로 된 사람이구나! 또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인간이라도 인간의 선행조건이 있어서 쓰임 받는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왜 다윗을 세우시는 것입니까?
다윗은 형제들이 다 참여하는 제사에 참여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이새도 형제들도 다윗은 아직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양떼나 돌보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소 먹이러 가는 일을 누가 합니까? 집안에서 제일 농사일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 아이들도 소 먹이러 많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사에 참여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은 다윗을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것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 사고방식이란 힘의 체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 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힘 있는 왕을 구하여 하나님께 매일 매달리지 말고 우리 일은 우리가 스스로 알아서 하자는 것이 사울을 구한 그들의 모습이고 오늘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아직 소년 다윗이었습니다. 그가 순수하고 착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힘을 원하는 세대에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어린 아이들이 오는 것을 왜 막았겠습니까? 힘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씨에서 나오시는 구주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을 긍정해 주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마저 당신이 오실 메시아가 맞습니까? 하고서 물어 보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자기는 그분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과연 메시아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물어 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11:2-6절입니다.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예수 믿으면 병 고침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이 내용은 인간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어떻게 해 볼 수 없기에 전적으로 외부에서 구원하여 주어야 하는 상황이 인간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1:7-9절입니다. "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8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9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돌아오는 자들을 묘사하기를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라고 합니다. 자기 힘으로 바벨론에서 유다까지 오기에 힘든 자들입니다. 그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돌아온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로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 주셔야만 되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구원을 받는 자들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이것은 꼭 외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스스로 자기의 심령을 가난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비록 여건이 좋지 않으면 허세를 부려서라도 자기를 포장하고 자아를 고양시키고 싶은 것이 본능인데 나 이렇게 불쌍한 사람입니다, 도와주세요! 하는 것이 죽기보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도 있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상대방이 엄청난 능력과 힘이 있을 경우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잠시 엎드리더라도 내가 자존심을 꺾고 엎드린 것보다 더 나은 대가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엎드려 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까?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것입니다.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습니다. 그러니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는 것입니다. 보통 인생보다 더 상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출신이 시골의 목수출신입니다. 좋은 배경도 없습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어기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러한 예수님께 살려 달라고 빌겠습니까?
사도행전 13:26-27절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구원의 말씀이 사람들이 평소에 선호하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마다 율법과 선지서를 읽고 외우기까지 하였지만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정죄한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선지자들의 말이 응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여론으로 몰아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 것이라고 사도들이 증거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설교입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행한 것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정죄하고 죽인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인간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스데반과 바울의 설교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 화가 나는 자가 있을 것이고,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사도행전 13:32-42 도무지 믿지 못할 일
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ㄴ)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ㄷ)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35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ㄹ)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쫓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 일렀으되 ㅁ)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찌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스데반의 설교나 베드로의 설교나 바울의 설교의 핵심주제를 말하라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끝에 보시면 이러한 일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서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는 뜻이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나는 예수를 믿었는데 너는 왜 믿지 못하는가 하면서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그냥 탁 믿으면 되는데 왜 그리 믿지 못하느냐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믿게 된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바울의 설교를 들어 봅니다. 13절에서 31절까지는 아브라함의 선택과 출애굽, 가나안 정복과 사사시대, 그리고 사울 왕과 다윗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을 시키고 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요한이 증거하였고, 성경에서 증거한 대로 죄 없이 죽임 당하시고 무덤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간 자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증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2절에서 바울 자신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도들이 증거한 것과 같이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32절을 봅니다.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도 한 것은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가서 전하니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을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33절입니다.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성경을 근거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2:7절을 봅니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 말씀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른 인용을 보고서 말씀드리겠습니다.
34절에서 "내가 다윗에게 허락한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는 말씀은 이사야 55:3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문자대로 인용을 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앞뒤를 보시면 값없이 나와서 마시라는 말씀과 다윗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는데 이것이 확실한 은혜, 은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을 만민의 인도자, 즉 왕으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죽었습니다. 다윗의 무덤이 있는데 어떻게 영원한 언약이 되고 만민의 왕과 인도자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윗에게 국한된 말씀이 아니라 다윗의 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시편 16:10절을 인용합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다윗의 이 시편이 예수님을 예언한 것으로 봅니다. 다윗은 죽어서 썩음을 당하였으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8-39절을 봅니다. "봉독" 이렇게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예수를 믿음으로 무엇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무엇을 얻는 것입니까? 죄 사람과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볼 때는 어떻게 보겠습니까? 아니 여기에 예수라는 이름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고 이 본문을 바울사도가 메시아를 증거하는 본문이라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지 여러분이 시편 2편과 이사야 55장과 시편 16편을 읽으면서 이것이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다, 라고 알게 되었습니까? 제가 시편 2편을 자주 인용하면서 사단의 일이란 세상의 왕들과 관원들이 일어나서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는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는 것이 사단의 일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비웃으시면서 자기의 일을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아들을 보내심으로 모든 권세를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철장 권세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면 망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말씀을 바울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망한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씀으로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참으로 이상합니다. 평생토록 성경을 외우다시피 하면서 살았던 유대인들 늘 하나님을 잘 섬긴다던 그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못하였을까요?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누구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까? 하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습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거부반응이 별로 없습니다. 이미 왜곡된 하나님에 대한 상들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하나님 그러면 옥황상제로 생각하든지 조물주로 생각하든지 인간을 이롭게 하는 그런 신으로 떠받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들마다 창조신화가 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러면 크게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기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도 합니다. 내일 교회가면 우리 회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사람들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모두가 우상이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상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의 세계에서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개념이 마귀에게 속고 있었음을 참되신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심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평소에 상상하던 하나님과 너무나 다른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잘 되게 해주고, 우리 회사를 잘 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오히려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내 나라는 이곳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누가 좋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은 좋아해도 예수님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나라에서 선전되는 예수님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수님으로 선전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평소에 상상하던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그런 생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기쁨이 됩니까? 다른 아무것도 주시지 않으신다고 하여도 이것으로 영원토록 감사하시겠습니까? 무좀은 낫지 않고, 비염은 계절만 되면 돌아오고, 승진은 되지 않고, 자식은 공부도 못하고, 무엇하나 나아지는 것이 없어도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은 것으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과연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예수님을 제대로 소개하면 좋아하면서 따라 갈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1절에서는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선지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이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41절을 봅니다.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찌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요! 너무 쉽게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아셨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나왔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2천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설교하는 예수가 어떤 사람입니까? 얼마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입니다. 십자가에 목 박혀 죽은 것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성경에서 저주받아 죽은 죽음입니다. 성경이 아니라도 그 당시에 십자가 처형은 가장 처참한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로마를 반역하거나 살인 강도하던 자들의 처형방법입니다.
그곳에 힘없이 달려 죽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도 제자들과 수백 명에게만 보이시고 다 보여주시지도 않으시고 하늘로 가버린 것입니다. 그런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를 죽인 자들이 모든 권세를 쥐고서 예수 믿으면 잡아 가두고 죽이겠다는 세상입니다. 야고보도 스데반도 순교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정말 믿지 못할 일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믿지 못할 일이 없습니까? 복음이란 믿지 못할 일로 들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걸림돌을 제거합니다. 믿지 못할 만한 내용은 빼 놓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내용이 아니라 순전히 간증들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믿어서 어떻게 잘 되었다더라, 나도 예수를 믿고서 이렇게 잘 되었단다,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여도 내가 따름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는 자기 사랑에서 따라 나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전부 우상이요 죄라고 우리가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로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 사랑에 매달려 사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고 따른다고요?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가끔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사랑하고 살던 사람이 그것이 죄임을 알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주님 내가 나를 사랑하고 살았기에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 죽으신 것이군요!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이 죄임을 알아 주님을 의지하겠습니다. 주님의 대신 죽으심이 나의 의로움이 되신다면 이제 내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할 이유도, 나의 삶에 가치를 둘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이제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군요! 이런 고백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믿지 못할 일들이 오늘도 일어나도록 주님께서 조치하고 계십니다. 이 주님을 믿고 삽시다.
사도행전 13:42-52 작정된 자
42 저희가 나갈쌔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ㅂ)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지난주 제목이 기억나십니까?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왜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율법에 의하면 저주 받은 죽음이요, 이방인들이 보면 흉악한 범죄로 인하여 죽은 죽음-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였는데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을 믿는 자는 결국 사람의 실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작정된 자만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바울이 회당에서 설교를 하고나자 다음 안식일에도 다시 설교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따릅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것이지요! 그러자 그들과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합니다.
그 다음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그 성읍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시기가 나서 바울을 변박하고 비방합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50절을 봅니다. 경건한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게 하여 쫓아내는 것입니다. 경건한 귀부인들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귀부인들입니다. 이들의 남편과 자녀들은 정치와 경제와 종교계에서 모두 유력한 자들입니다. 이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이들의 시기란 이방인들이 먼저 율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얻는다면, 즉 율법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면 자기들은 무엇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길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이란 것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율법을 받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들을 저주 받은 자로 보고 있는데 감히 이방인들이 예수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율법이 업신여김을 받을 것이며 자기들의 전통과 역사와 혈통, 성전과 제사, 할례와 안식일 등이 모두 무시되는 것이기에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고 쫓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자면, 여러분 가운데 보통사람이 감히 가질 수 없는 특별한 회원권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한 회원이 되기 위하여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가지고 있는 회원권인데 아무나 가질 수 있다면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요즈음 서울의 비싼 아파트는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답니다. 출입할 때 마다 신분을 확인하고 외부인은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입니다. 자장면 배달도 할 수없다고 합니다. 이런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사람들인 줄 알 것입니다. 아무나 이런 곳에 살수 있는가! 적어도 나 정도는 되어야지! 그런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우리들도 그럴 형편과 여건이 되지 못하여 이렇게 살고 있지, 그럴 형편만 된다면 그들보다 더할 사람들일 것입니다. 아예 유럽에 있는 성채처럼 짓고 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상승되기 위하여 그렇게 주야로 애를 쓰면서 살고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의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거지들의 세계에도 자기들의 구역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개척한 사람들과 뒤에 들어온 사람들이 잘 융화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들의 자존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내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쫓겨나는 바울과 바나바가 아주 당당합니다. 전혀 비굴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쫓아내지 마십시오, 그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타협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물건 팔러간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단지 목숨이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영생이냐 영벌이냐,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결정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지 않는 자들에게 빌지 않습니다. 매달리지 않습니다. 제발 믿어줘, 그러면 이런 복도 저런 복도 준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가 나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고 쫓겨나면서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것입니다.
46절을 봅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지만 그러나 너희가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는 자로 자처하기에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49:6절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듣고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믿는 것이 아니라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작정된 자들은 다 믿더라는 말씀을 우리가 과연 좋아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 복음 앞에서 싫어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복음을 들으면 어떤 반응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자들만 믿더라는 것은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선행이나 결단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을 배제(排제)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자만이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반응이 나옵니까?
그렇다면 내가 애써 믿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구나! 내가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하여도 작정되지 않았다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고, 내가 개판으로 놀아도 작정되었다면 결국 구원 받을 것이 아닌가? 작정이란 말, 예정이란 말을 들으면 이런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결국 이것은 자기가 마음대로 놀고 싶은데 그동안 마지못해 교회도 나오고 헌금도 하였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옥 가기 무서우니 보험 드는 셈 치고, 교회도 오고 헌금도 해두는 것입니다. 만약 지옥이 없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지옥이 있다면 들어 놓은 보험 혜택 좀 누리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종교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무슨 말씀을 하여도 자기가 생각하고 이해하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적용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정 된 자만이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을 옳습니다, 라고 하면서 기뻐하는 자들이 또한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정말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고 구원받을 어떤 자격도 없다는 것을 아는 자들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들이며, 유대인이라도 율법을 알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애초부터 자격이 없음을 알기에 하나님께서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부르시는 분에 의하여 결정이 된다는 말씀에 아멘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난주가 종교개혁주간입니다. 종교개혁의 핵심단어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믿음의 내용이 지난주에 바울 사도가 설교한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며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던 자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 복음을 여러분이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자들입니까?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을 믿고 있는 것이기에 작정 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믿고 구원을 얻은 것이 여러분의 실력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무능하며 구제 불가능한가를 동시에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오죽이나 못났으면 자기를 믿지 못하고 남을 다 믿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란 결코 자기를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 마다 자기 자랑하는 재미로 살고 있는데 그런데 이제는 자기의 부족과 연약함을 자랑하고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랑할 것들이 그렇게 많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단 한마디도 할 수가 없고,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는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는 내 힘으로 말하고, 내 힘으로 걸어 다니고, 내 힘으로 일하여 먹고 산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정당하다고 봅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아를 실현하고 자아를 고양시키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자기를 고양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방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성경은 타락한 현실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사는 인생, 스스로 세워가는 인생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 이런 가치관 속에서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나는 무능한 자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이런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입니까?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까? 거지가 되는 마지막 관문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존심입니다. 사람마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데 자존심 무너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이란 작정된 자만이 받을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9:11-16절을 봅니다.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ㄷ)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ㄹ)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ㅁ)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에베소서 1:3-6절입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왜 하나님께서 작정 한 자만이 믿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까? 사람이 힘쓰고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 택하신 자를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어떤 인간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죄의 실상을 보이시면서 그 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해결하시고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심으로 그 모든 공로가 오직 주님께만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대로 되어지는 일, 작정 된 자만 믿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4:1-7 분 리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1)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바울사도가 본격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오늘 보고자 합니다. 우선 지난주에 보았던 말씀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는데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의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기로 작정된 자는 믿고 기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계속 핍박하자 바울과 바나바가 발에 티끌을 털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고니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두 사도가 역시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을 것이요,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던 일에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음이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누가 반발을 하는 것입니까? 자신들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이 반발한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하여 묵상하여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나 자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택함을 입을 자격이 전혀 없는데 택함을 입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택함을 유대인들은 율법적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신명기 7:6-8절을 봅니다.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보다 작다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택하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택함을 받을 만한 무엇이 있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로 가득한 사람들에게 복음이란 그야말로 자기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복음전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를 갈겠습니까?
사도행전 14:2절을 봅니다.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자기들만 복음을 믿지 않으면 그만이지 왜 믿는 형제들에게 악한 감정을 품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복음이 좋습니까? 나의 공로나 나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십자가로 죄 사함을 얻고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 한 가지 사실로 인하여 평생토록 감사하고 기뻐하시겠습니까? 그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지금 복음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복음은 좋지만 그러나 복음이 복음 되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을 다 부수어 버리고, 우리의 자랑거리를 다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래도 정말 복음이 좋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 같은 취급을 받아도 마땅하게 여기십니까?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하는 자세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미 배불렀습니다. 세상 것에 배가 불렀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배가 불렀는지 모르지만 이미 배가 불러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배가 불러졌다면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텐데 그런 모습도 없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배가 부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미 포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상상임신처럼 헛배가 부른 것이 아닙니까?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나는 부요하다, 부족함이 없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실상은 가련하고 불쌍한 처지인데도 그것을 모르고서 다른 교인들을 보고 '복음도 모르는 것들이 잘난 체 하기는'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으로 자기의 흉물스러움을 모르는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교만과 자존심들이 펄펄 살아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좋다고 합니다. 그저 주시는 은혜를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것은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만과 악함을 지적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복음의 능력이란 죄가 무엇인지도 함께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죄가 말씀을 통하여 고발을 받으면 우리의 인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고양시킬만한 디딤돌이 필요한데 복음이란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날마다 죽으라고 합니다. 입을 닫으라고 합니다.
처음에 복음이니 뭐니 할 때는 십일조는 예수님께서 완성하셨고, 안식일도 예수님이 완성하셨고, 모든 율법을 예수님이 완성하셨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라고 하니 여러분이 좋았습니까? 그런데 동일하게 증거된 죄의 지적들은 하나도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고 자기편하고 유리한 것들만 여러분의 것으로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부담되지 않는 말씀들은 챙겨 듣습니다. 그러나 부담이 되는 것은 밀쳐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내가 이해하고 해석하고 내 수준에 맞추어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진리의 기준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이미 우리 자신이 진리의 기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진리냐 아니냐를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란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 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익의 기준은 물론 경제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자존심을 채워주는 마음과 정신적인 이익까지도 다 계산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발들이 우리의 상황에 적용을 하였습니다만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서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으면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다니면서 핍박하고 죽이려고 달려들었겠습니까? 5절을 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믿지 않는 자들의 선동을 받아서 바울과 바나바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이들이 돌로 치려는 것은 율법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24: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찌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가 한다고 하니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한 참람 된 죄이기에 돌로 쳐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가 도망을 갑니다. 3절에 보시면 그 성에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서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돌로 치려고 하는 상황에서 표적과 기사는 없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6-7절을 봅니다. 도망하여 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기에 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작정된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에 대하여 두 가지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4절을 봅니다.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두 무리로 나뉘어 집니다.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복음을 전하러 가는 곳에는 늘 일어나는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분리가 일어나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오늘의 현장인 이고니온에서도 쫓겨납니다. 그래서 루스더라와 더베로 갑니다.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고침을 받습니다. 그러자 성안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고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그렇게 대적하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9절을 봅시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사람들을 끌고 와서는 바울을 돌로 칩니다.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내다 버리니 형제들이 둘러서 있으니 다시 일어나서 그 성으로 또 들어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극명한 대조와 분리가 일어나는 것이 복음이 선포되는 현장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이러한 분리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복음으로 구별하여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이방인 중에서도 오직 한 가지 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길입니다. 이것이 종말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복음으로 불러낸, 종말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결단코 자기의 자랑이나 공로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 되듯이, 양과 염소를 분리시키듯이 주님께서 지금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가 양이고 염소입니까?
마태복음 25:31-46절을 봅니다.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염소는 자기 행한 일이 있다는 자들입니다. 언제 자기들이 하지 않았는가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양들은 자기들이 행한 것이라고는 없다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정말 한 것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행한 것이란 참으로 주님의 은혜로 행한 것들이기에 자기들의 공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도록 충성하고도 무익한 종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행전 14:8-18 구원 얻을 만한 믿음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11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13 성밖 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이 돌로 쳐 죽이려고 하자 도망을 갔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말 그대로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왜 사람들이 환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복음 안에 분명히 걸림돌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세상에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핍박을 받고 도망을 가야하는 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복음을 받고 믿는다는 것은 같은 고난 속으로 들어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고니온에서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 들어갑니다. 이곳에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되어서 단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사도가 그 사람을 주목하여 보니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네 발로 일어서라고 하니 그 자리에서 일어나 뛰고 걷는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일어나는 내용들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세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구원 얻을 만한 믿음입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로 태어나서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자가 일어나버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누구의 능력으로 일어난 것입니까? 앉은뱅이가 믿음이 좋아서 일어난 것입니까? 바울 사도가 능력이 많아서 일으킨 것입니까? 그러나 언제나 성경은 사람의 능력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은 앉은뱅이의 믿음도 아니요 바울의 능력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보이신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한 것입니다.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날 때부터 앉은뱅이요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모델이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자기들은 의롭다고 온전하다고 여긴 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지만 그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한 창기와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 사건과 같은 사건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3:16절을 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역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베드로가 일으키는 사건입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일어나자 사람들은 사도들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이 왜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란 주님께서 주신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란 사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기도 다른 사람도 바라보지 아니합니다. 오직 주 예수만을 바라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에베소서 2:8-9절의 말씀처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의 행위에서 나오는 믿음이나 구원이 아니기에 아무도 자랑치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이 한다고 하여도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이고니온 사람들에게 여실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일어나자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본능과 속성이 우리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에도 늘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초자연적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나타나면 하나님을 잘 믿을 텐데,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자 진리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적 일으킨 사람을 신으로 여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얼마나 이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까? 교인들은 목사를 기적을 일으켜 주는 능력 있는 자를 원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적을 원하는 것입니까? 자기들에게 닥치는 재앙들은 물리치고 복을 불러다 주는 그런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종교를 가지려하고 신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마음을 교주들이 모르겠습니까? 그러므로 복 받는 비결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오든 절에 가든 자기를 사랑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헌금을 한들, 정성을 바치든, 봉사를 하고 구제를 한들 자기를 사랑하여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정성을 바쳐도 별 효력이 없으면 은근한 압박을 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나 이렇게 해도 복 안주면 재미없어, 하는 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조그마한 신기한 일이라도 일어나면 자신의 능력으로 권능으로 된 것처럼 자신을 신격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인들이 꼼짝하지 못하고 교주의 말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에 종사하는 자들은 되도록이면 자신을 신비화시키려고 합니다. 무언가 보통 사람들보다 다른 몸짓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복장, 행동, 말투, 걸음걸이조차 다른 분위기가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를 봅시다.
둘째로, 우리도 사람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자 그곳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기고 섬기려고 합니다. 바울은 말을 하니까 허메라고 하고 바나바는 쓰스라고 합니다. 쓰스는 우리의 음역이고 제우스입니다. 허매는 제우스신의 명령을 전달하는 전령의 역할로 헤르메스입니다. 그리스 최고의 신이 제우스인데 아마 바나바는 의젓하게 뒤에 서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제우스신이라고 하고 바울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니 헤르메스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자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을 가지고 와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경우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금만 폼 잡고 있어도 신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바울은 바로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들어가서 소리 질러 외칩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합니까?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고 밥 먹고 똥 누고 살다가 죽는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러한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지으신 만유를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간신히 뜯어 말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으로 섬기려고 하는 자들이 결국에 자기들에게 좋은 것을 주는 자들이 아님을 알게 되자 나중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쳐 죽일 때 묵인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 때 환영하다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자 모두가 돌아서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되고, 주의 이름만 부르면 무엇이나 해결이 되고, 승리하고, 행복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핍박받고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 어두움에 갇혀 있기에 빛을 받은 자가 가면 싫어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과 전혀 구별됨이 없이 오히려 세상과 더 잘 어울리고 세상이 좋아서 예수님을 오심이 연기되었으면 하는 상태가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는 것은 잘못된 하나님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헛된 일에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을 섬기는 자리에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한 관념의 신, 사변적인 신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전에는 묵인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복음이 증거되는 지금은 돌이키라고 합니다.
셋째로,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16-17절을 봅니다.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거 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자기를 증거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증거하신 것입니까? 하늘에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일입니다. 그 결과 음식과 기쁨이 주어져서 우리의 마음이 만족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믿으십니까?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비를 내리셔서 곡식이 자라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먹고 살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도 의인에게도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는 것을 기적으로 여기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더 나은 힘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생각해도 자기에게 힘을 보태어 주는 하나님을 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특별하게 신을 잘 대접하여 다른 사람들이 감히 넘겨다 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마다 서로 신에게 잘 보이기 경쟁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바친 만큼 복을 받으리라는 생각이 바로 우상을 섬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도행전 17:23-25절입니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신에게 잘 보여야 자기가 복 받고 살게 된다고 여기는데 혹시 자기가 알지 못하는 신이 있어서 그에게 섭섭하게 대접해서 혹시 해코지를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 하는 제단도 있는 것입니다. 혹시 이름을 모르지만 신이 있다면 섭섭해 하지 마시고 이곳에 와서 얻어먹으시오,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지킨다는 절기들이 이런 모양은 아닙니까? 성경에서 지키라고 하지도 않는 절기들을 만들어 지키고 있으면서 자, 내가 이만큼 바쳤습니다, 감사헌금 하였으니 더 많은 감사가 있게 하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재미없습니다,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무엇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합니다. 그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분명한 증거를 보이신 것입니다(30,31).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이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사도행전 14:19-28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노래가 있지요!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여기에 모든 것을 다 넣어도 되겠지요! 참으로 복음적인 가사입니다. 그런데 거듭나고 믿음으로 간다는 이 내용도 나의 신념이나 의지적인 결단이 아니라 은혜로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22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신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닥칠지 모르는 환난을 피하기 위함인데 오히려 환난이 온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것도 눈에 보이지도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면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간다는 것은 좋지만 환난을 싫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요일 저녁의 말씀에서도 디모데후서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도대체 왜 복음, 기쁜 소식을 증거하는데 핍박이 오고 환난이 오고 고난이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 세상이 어떤 곳인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요한복음 1장식으로 말씀드리면 빛이 어두움에 비추이자 사람들이 어두움을 사랑하기에 빛을 미워하고 싫어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누가 빛인지 어두움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참 빛 곧 우리의 생명 되시는 분이 오시니 이 세상의 사람들의 실체가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자 어두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합동으로 뭉쳐서 예수님을 배척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세상의 죄를 고발하고 있는 증거물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려 왔습니다. 성경에서 증거하고 예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 오자 배척한 것은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이유입니다. 병을 고쳐주고 떡을 주는 것은 좋은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은 싫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메시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세우시는 메시아가 싫었기에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 배척하게 될 것입니다. 워낙 포장기술이 좋아서 사람들이 많이 속고 있지만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설교하고 전도한다면 아무도 따라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 자만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구원 얻기로 작정된 자들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마귀가 싫어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있는 인간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핍박과 환난이 따르게 되어 있고 복음을 받아들인 자에게도 동일한 핍박이 임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미 예언된 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 당연히 핍박이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하였습니다. 누가복음도 누가가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가행전이라고 하여 함께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특징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누가복음에서 예언된 대로, 즉 예수님의 하신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기록방식입니다.
누가복음 21:12-19절을 봅니다. "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2)증거가 되리라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3)영혼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종말이란 메시아 오심으로 종말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종말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 핍박과 회당과 옥에 넘겨주고 임금들과 관장 앞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형제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몇을 죽게 하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이 누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바울사도입니다.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는데 받는 자도 있었지만 그러나 반대하는 자들이 훨씬 많았고 강경하였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핍박하여 이고니온으로 갑니다. 이고니온에서 돌로 쳐 죽이려고 하자 루스드라로 갑니다. 루스드라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자 신이라고 하면서 루스드라 사람들이 제자를 지내려고 하자 겨우 말렸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기 위하여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사람들까지 동원하여 와서 루스드라에 바울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신이라고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는데 그런 기적과 권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들에게 주고자 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니 루스드라 사람들도 바울에게 돌아섰고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하였기에 그 성에서 돌로 치는데도 가만히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에 세상의 모습입니다. 나에게 덕이 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준다면 부처도 공자도 예수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손해가 되고 우리 집안과 나라에 덕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배척하겠다는 것이 이 세상의 실상입니다. 우리나라가 많은 나라에 선교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증거되어야 할 복음보다는 구제사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면서 복음도 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한의 지하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데도 달라고 하는 것이 성경이랍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서 기절을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끌어다 내쳐버립니다. 그러자 바울을 따르던 다른 사람들이 그 곁에 둘러 서있었는데 죽을 줄 알았던 바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성으로 들어갑니다. 그리도 다음날 더베로 가서 또 복음을 전하고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갑니다. 왜 돌로 쳐 죽이려하는 곳으로 다시 가는 것입니까? 발에 먼지를 털어버리고 온 지역으로 다시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2-23절입니다. "봉독" 비록 바울을 돌려 쳐서 죽이려고 하는 곳이지만 가면 다시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는 곳이지만 그러나 그곳에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핍박한 곳이라면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도 당연히 핍박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가서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핍박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장로들을 택하여 세우며 금식기도하며 주님께 부탁합니다. 방금 돌에 맞아서 죽었다고 버려진 그 성으로 또다시 들어가는 바울이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이미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다시 누가복음 21:16-19절을 봅니다. "봉독"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는데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바울이 돌에 맞았을 때 피도 나지 않고 머리카락 하나도 다치지 않고 보호를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몸을 죽여도 영혼을 어찌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의 성취를 보는 것입니다. 누가 핍박이 두렵지 않고 매 맞는 것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환난과 핍박이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매 맞으면서 환난 당하면서 더욱 분명하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도로 하여금 소망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스스로 좋아서 환난을 당하는 자들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신병일 것입니다. 자기를 학대함으로 쾌감을 느끼는 병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로 부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로마서 5:1-4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1)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2)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환난을 당하거나 고생을 하거나 해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리에서 화평의 자리, 은혜의 자리에 들어감을 이미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다 얻었는데 3절에서 환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왜 환난을 즐거워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환난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산다고 하여도 평소에는 늘 하늘에 소망보다 눈에 보이는 소망을 더 좋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심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소망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소망을 분명하게 보도로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의 자녀들이 공부 잘하는 것이 소원일 것입니다. 그러나 중병을 앓게 되면 공부보다 건강하기만 하여도 감사하겠다고 합니다. 초등학생이 공부에 시달려 자살하지 않았습니까? 이 부모가 그 집에서 이사를 하려고 한답니다. 공부가 제일인줄 알았는데 자식을 일어버리는 환난을 당하고 나서 공부가 다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성도에게 환난이 오는 이유는 우리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사랑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초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행하시는 사랑의 간섭인 것입니다. 성경 한곳만 더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8-9절을 봅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자들은 반드시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옛 습성이 잠시 있다가 없어질 신기루 같은 것들에 현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의 손길로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의지 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만 소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도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약1:2-4).
사도행전 15:1-21 주 예수의 은혜로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1)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16 ㄱ)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까? 행함으로 받습니까?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면 다시 질문을 합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믿어서 구원받고 구원받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 믿음이란 역시 행함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구원 얻을 믿음이라는 것은 나의 의지적 결단이거나,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다거나, 나의 조건적 선행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무엇과 대비가 되어야 하는가 하면 행함과 대비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19-22절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율법이란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기에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 대비가 되어야 그 의미가 분명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로마서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이 약 2천년 전에는 얼마나 대단한 논란이 일어났는지를 오늘 말씀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계속하여 일어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교회 안에 어떤 사람이 몇 대째 믿는 집안의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어머니 배속부터 예배당에 다녔습니다. 이런 사람을 모태신앙이라고 하는데 그런 신앙은 없습니다. 어떻든 그런 분위기에서 태어나고 어려서부터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철저히 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웃에 살던 사람이 교회로 나왔다고 합시다.
그것도 대대로 우상을 섬기던 집안의 사람이 그것도 인생의 황혼기에 와서 예수를 믿었다고 합시다. 이제 장로투표를 할 때가 되어서 투표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누구에게 표를 주겠습니까? 만약에 뒤에 온 사람이 장로가 되고 먼저 있었던 사람이 장로에서 떨어졌다면 누가 제일 분노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감사하면서 주님을 섬기겠습니까?(차별화전략?)
1-3절입니다. 지금 안디옥 교회에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이 몇 사람 내려왔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말이 예수를 믿어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으로 부족하니 모세의 법을 역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가 이들을 반박합니다. 그래서 여러 형제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요즈음도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노회나 총회로 상소하는 것처럼 예루살렘의 사도회의에서 어떻게 결정하는지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중요한 회의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베니게와 사마리아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올라갑니다. 이 교회들은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일어나자 추방당한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렇게 기뻐합니다. 그러나 전통 유대인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은 이방인들이 돌아왔다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의 중심에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4-5절을 봅니다. 바리새파 중에서 믿는 자들이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서 이 일을 의논합니다. 그리고 많은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먼저 이 일에 대하여 결론적인 말을 합니다.
7-11절입니다. 베드로 자신이 이미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을 자신이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주님께서 깨끗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고넬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자기들이 받은 것과 동일한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어떻게 자기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미 베드로에게 미리 이방인이 예수를 믿고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거하면서 그들이나 우리나 주님께서 분간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차별대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와 우리 조상이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고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나 그들이나 간에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고 합니다.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간에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무리가 잠잠하여 집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하신 일을 이렇게 증거하니 잠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의 하신 일을 증거합니다. 이방인들이 어떻게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는지를 보고하자 최종적인 결론을 야고보가 내립니다.
13-18절입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베드로가 이방인이 복음을 받는 것은 이미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한 것과 합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 예수를 믿고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더 이상의 반론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다음주에 보겠습니다만 결국 예루살렘 회의에서 최종적인 결론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계속하여 돌아다니면서 예수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니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할례와 모세의 율법이 무엇입니까? 할례가 먼저입니까? 율법이 먼저입니까? 할례가 먼저입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430년 이후에 주어진 내용입니다. 그러면 할례가 먼저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먼저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먼저입니다.
이미 전에 할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이란 후손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믿고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기다리지 못하고 사라의 권고를 받아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동안 나타나지 않으시다가 아브라함 99세에 나타나셔서 할례를 행하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할례를 행하고 이삭을 주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아브라함 너희 혈통이나 너의 육정이나 너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오직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시는 것을 보이시고자 할례를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할례를 자기들의 아브라함의 후손된 자격이이라고 믿고, 또 이방인이라고 할례를 받아야만 유대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으려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또한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죄 사람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주 예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어떠한 조건을 보시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구원받고 나서 무언가 잘 할 것 같아서 구원하신 것도 아닌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두면 나중에 갚아 줄 거라는 식으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선물을 하고 잔치에 초대하여도 누구를 초대합니까? 내가 은혜를 입었거나 아니면 나중에 무언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계산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은혜는 은혜가 아니라 삯이고 대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가 잔치를 열고 사람을 접대 하고자 하면 갚은 능력이 없는 자들을 초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언가 갚아 낼 것을 기대하고 대접하는 것은 이미 은혜의 대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의 식탁에 초대된 자들은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무언가 갚아낼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잘난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는 어느 누구도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은혜 받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개인이 자랑되지 않는 곳입니다. 어떤 공로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이것 하나가 교회의 하나 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새 편이 갈라집니다. 파당이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가 시끄러워지고 분리가 일어나고 하는 내용을 들여 다 보면 모두가 자기 잘났다고 하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은혜를 입은 자라면 자기의 못남을 아는 자들입니다. 자기의 못남을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교회입니다.
바울 사도와 십자가의 강도가, 베드로와 거지 나사로가, 바리새인과 이방인이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여기에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는 삶이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도행전 15:22-29 짐 지우지 말고
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25-26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지난주에 예루살렘 회의를 보았습니다. 이 회의는 아주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하여 율법적인 조건을 지키라고 하여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논란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베드로 사도와 야고보 사도에 의하여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안디옥 교회에 가서 이방인 형제들이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자들을 책망합니다.
24절에 보시면, 그들은 사도들이 보낸 자들이 아니라 임의로 나가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미혹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기들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을 너희에게 보내기로 일치 가결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모든 이방인들이 오직 예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해결이 된 것입니다. 이 결정이 나기까지 빌립의 전도와 베드로의 전도와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이 정도로 이방인의 복음이 이방인의 경계를 넘는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커다란 벽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은 어떠한 벽이라고 넘어서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결정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서 나온 결론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결정되었다고 하는 것을 28절에서 '성령과 우리는'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다 성령을 받은 자들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결정한 것입니다. 이제 그 회의의 결론에 따라 이방인들에게 공식적인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입니다.
다시 15:19-21절을 봅니다. "19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이방인이 아무른 율법적 조건이 없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최종결론으로 내립니다. 그래서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그들이 복음을 듣고서 주 예수에게만 소망을 두고 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것은 예수를 믿어서 무언가 덕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기웃거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기록될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던 바울사도가 돌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나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다른 짐을 지워서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주 예수의 공로만이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는 유일한 길임을 듣고서 믿고 나온 자들에게 다른 요구를 하지 말라고 하면서 요긴한 몇 가지만 금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른다고 해 놓고서 왜 몇 가지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선 지키라고 하는 내용을 15:20-21절을 보시면,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의 율법을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살 때 유대인 성인 10명이면 회당을 하나 지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마다 그곳에서 모세의 율법을 낭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이 잘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어도 그것을 지키고 있는 것인데 반하여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한 공동체가 되었지만 그들은 우상의 더러운 것에 참여하는 것과 음행과 피 채 고기를 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만 금하도록 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금령은 율법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지켜야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이 아니라 서로 배려하는 차원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금하라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이란 이방의 신들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다른 신은 거짓이요 헛것인데 이러한 곳에 참예를 하면 그 우상도 신으로 인정하게 되기에 그런 곳에 참예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행이란 역시 그러한 이방인의 제의 후에 일어나는 음행들입니다. 그러한 음행이란 근친상간까지 있기에 그러한 것을 금하는 것이며 목매어 죽인 것과 피란, 유대인들의 짐승 잡으면 칼로 목을 쳐서 피를 흘리게 합니다. 그런데 목을 매어 죽이면 피가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방인 지역에서 고기가 시장에 나오는 것은 모두 그들의 신에게 먼저 제사로 드려졌던 것을 시장에 내다 놓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금하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씀을 찾아봅니다.
고린도전서 8:1-13절입니다.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9 그런즉 너희 1)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방금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은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런 것을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금하는 것입니까? 연약한 자를 위하여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시험에 들고, 실족케 될까봐 금한다는 것입니다. 고기가 이방신에게 제사한 후에 나오는 고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줄 알고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임을 알고 감사함으로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지식과 믿음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그 자유를 약한 자의 거침이 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2절에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것이나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언가 좀 안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라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좀 안다고 말한 그것이 약한 자로 시험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고 주님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형제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내 자유니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음행이나 목매어 죽인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도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게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기에 서로가 배려하는 차원에서 서로 교제하기 위한 조치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들어왔을 때 무엇을 주로 금하였습니까? 주초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담배피우지 말라는 말씀은 없는데 마치 율법처럼 담배 피우지 않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표시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면 담배 끊고 술 끊고 나서 예수 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교사들이 처음에 왜 그런 것을 금하였을까요?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올 때만 하여도 조혼이 있었지요. 그러니 열 살짜리라고 장가를 가면 상투 틀고 곰방대 물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술이란 한두 잔이 아니라 말로 마시는 것을 보고서 이것을 금하여야겠다고 한 것입니다. 중국에 선교사들이 아편을 금하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이 어떤 식이 되어 버렸습니까? 율법보다 더한 금령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제 저녁에 고향친구의 부친상에 가면서 CBS를 들으면서 갔는데 박영선 목사님 설교가 나왔습니다. 그 중에 교회도 흡연실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담배를 피우라는 말이 아니라 담배 피운다고 교회도 못나오게 되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느 집사의 주머니에 담배가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면 당장 그 날 안에 소문이 다 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 사람이 교회에서 무엇을 해도 아직 담배도 못 끊은 주제에 하면서 아니꼬운 눈길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믿는 자의 모습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말씀이 나오면 또 어떻게 나옵니까? 나는 우상에 함께 참예하지 않는다, 너는 아직 제사를 거부 못한다면서, 하며 또 자기 의로 남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이혼을 하지 않고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이혼을 하거나 바람을 피우게 될 때 그저 남을 비방하기에 앞장서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마음으로 이혼하고, 마음으로 바람을 피우면서도 남을 정죄하기 바쁜 것입니다. 봐라, 은혜로 구원을 얻어도 이것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그런데 어떻게 너는 개고기를 먹니?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아예 가면무도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자기의 약함과 실수와 범죄가 노출되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 떼고 있습니다. 만약에 무슨 일의 낌새만 있어도 누가 어떻더라는 말이 얼마나 빠르게 도는지 마음 놓고 말한 마디 못하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속내를 털어놓지는 못하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도 어제 밤에 그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심각한 문제가 있으면 한숨이 나오는 것이지요! 예배 중에 살짝 내신 한숨을 옆의 권사님께 들켜 버린 것입니다.
예배 마치고 ㅇ집사가 무슨 문제 있지? 그러면 아니요, 아무른 문제없습니다. 아니야! 사실대로 말해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못해 심정을 털어놓으면 그 봐라, 내가 기도하라 그랬지, 그러니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 기도해! 그런데 그 다음의 말을 그대로 옮겨놓겠습니다. "지랄 육갑을 떨어서 그 사람이 절에 가버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외모를 따라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 수준에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상대방을 섬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상대방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것이요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물론 진리와 비진리는 날카롭게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 연약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께 돌아오는 자들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섬기라고 우리를 먼저 세우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23-33절을 봉독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무엇을 먹든지 입든지 말하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1-5 자기부인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줄 다 앎이러라 4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 분이라면 따분한 이야기입니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자세가 되면 잠밖에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제 우리 회사의 노사회의에서 구조조정이나 임금협상의 결정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눈이 번쩍 뜨이는 이야기가 됩니다.
성경의 말씀은 현실감이 없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이야기는 현실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성경 이야기만 한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하는 미련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현실이란 하나님의 말씀이지 변화무쌍한 이 세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일들이란 새것이 없습니다. 연말이 되고, 새해를 준비하고, 새 대통령을 뽑는다고 하여도 이미 해 아래 새것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이미 다 있었던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허무한 것들입니다.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1:23-25절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일들이라는 것이 다 풀과 같고 그 영광이 풀의 꽃과 같은 것입니다. 풀이 시들면 꽃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 개인의 일이며 동시에 모든 인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을 합니다.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이방인이 할례나 율법지킴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확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혐오스럽게 여기는 이방의 풍습들 중에 몇 가지를 금하게 하고서 다른 짐을 지우지 말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결론을 가지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와서 성도들을 모아놓고 이 회의의 결론을 전하자 기뻐하는 것이 15:30-36절입니다.
15:37-41절입니다. 그리고 수일 후에 바울사도가 바나바에게 전도여행을 할 것을 제안합니다. 전에 복음전한 곳으로 다시 방문을 하자고 합니다. 그러자 바나바는 마가라는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반대합니다. 마가는 1차 전도여행 때 중도에서 바울을 따르는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를 다시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문제로 바나바와 바울이 심히 다투고 갈라서 버립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꺼려하였는데 바나바가 천거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갈라서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요? 바나바는 온유한 편이고 바울 사도는 아주 열정적인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중도에 포기하는 그런 사람은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하고서 실라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이들의 갈라섬은 진리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바울사도가 마가를 다시 불러서 동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부터 주된 사역의 일선에는 바울이 드러납니다. 바나바는 조용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과 성격의 문제를 잠시 짚어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나면 성격이 바뀌는가?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습니다만 사람은 자기 성격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격을 죽여야 된다고 말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를 보면, 불같습니다.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자기를 지금까지 인도하여준 바나바와 대판 싸우고 헤어져 버립니다. 나중에는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유대인들이 들어오자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보고 마구 책망합니다. 그런 성격처럼 주님의 사역도 열심히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 하다가 가장 많이 부딪히는 부분은 성격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급하고 어떤 사람은 천하태평입니다. 어떤 사람은 속에 담아두는데 어떤 사람은 도저히 담아두지를 못합니다. 뜨거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가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름에는 여름대로 겨울에는 겨울대로 온풍기, 에어콘을 조절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알아서 자리를 조절하여 앉으면 될 텐데 무슨 지정석처럼 꼭 그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불평과 원망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불같은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을 한번 봉독합니다. "봉독" 이 말씀을 한 바울 사도는 이 말씀에 걸리지 않습니까? 많이 걸리는 것입니다. 성내지 아니하고 하고서도 얼마나 성을 내었습니까? 진리에 관한 문제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자기가 완벽하게 지켰기에 기록한 것이겠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를 받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 자신도 이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고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은사란 결국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16:1-5절을 봅니다. 2차 전도여행입니다.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르러 거기서 디모데를 만납니다. 그 모친이 믿는 유대 여자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헬라인과 하였습니다. 우리가 수요일 디모데전?후서를 보고 있습니다만 바울과 디모데가 여기서 만난 것입니다. 유대여자이지만 이방인과 결혼하여 디모데를 낳았는데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할례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이방인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확정하였는데 왜 다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입니까? 유대인들이 겁이 나서 그랬을까요?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이미 1차전도 여행 때에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할례를 행하게 하였을까요?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디모데의 부친이 이방인인줄 그 지역의 유대인들이 다 알기에 만약 디모데가 복음을 전한다면 유대인들이 처음부터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행하는 것은 할례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거나 안하거나 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의 모습입니다. 할례가 아니라고 그렇게 싸운 사람이 할례를 행하게 하는 것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사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상황에서는 결코 할례를 행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5절입니다. "1 십 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 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와 전혀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방인 지역에서는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고 정작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디도에게는 할례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할례를 행하지 않게 한 것입니까? 그것은 가만히 들어온 거짓형제 까닭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유를 엿보고 다시 종이 되게 하는 일에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한 것입니다. 이는 복음이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할례를 행하는 경우고 있고, 안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까?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자기가 사는 것을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9:19-23절을 봅니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이것이 자기부인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자유를 다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약한 자 앞에서는 함께 약한 자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한 자 앞에서 강한 척 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못하느냐며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약하면서도 약하지 않은 척 하면서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가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더 똘똘 자아의 껍질을 두껍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자기의 약함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도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자세이며, 약함을 드러낼 때 함께 약하여지지 않고 자기는 강한 것처럼 하는 것도 역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기는커녕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살리려고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피곤하였습니까? 다른 사람 눈치 보아야지, 자존심 챙겨야지, 나중에 자존심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장래도 철저하게 대비하여야지, 참으로 피곤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될 수 있었음을 날마다 죽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이렇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면서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여러 사람을 구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도 복음에 참예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목표와 방향이 복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평신도인데 무슨 그런 삶이 필요하나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런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일일이 가르쳐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예배 참석도 겨우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연보도 아까워서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획일적으로 이렇게 하라고 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율법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임을 알고 믿는다면 각자에게 주의 성령이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며 살게 하실지 알게 하시고 행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6:6-15 성령의 인도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1)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4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장로교단이라면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 다음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는 여러 이견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은혜로 믿게 되었으니 내 힘으로, 내 책임으로 성화되어 가야 하는가 아니면 예수 믿고 난 이후에도 계속 은혜를 구하여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에 강조점을 둡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임하심은 예수만 믿게 하시고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세상 끝 날까지 성령께서 친히 동행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예수를 믿게 하셨다면 이제는 너희가 알아서 천국까지 오너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성도의 마음에 자리를 잡으시고 떠나시지 아니하시며 늘 인도하시고 간섭하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기에 우리가 믿음을 잃지 않고 주님을 향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바울을 봅니다. 바울사도가 3층천까지 갔다 온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얼마나 엄청나게 받았는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교만하지 않도록 육체의 가시까지 줄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사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친히 계시를 받은 바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전한 복음을 부인하는 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할지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자신 있게 증거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사도가 이제 2차전도 여행을 아시아 쪽으로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시아 쪽이란 중국과 한국의 방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길이 열리지 아니함은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 줄로 알고 마게도냐 지역으로 갑니다. 마게도냐는 지금 그리스 지역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유럽으로 먼저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유럽을 지나 지구 한바퀴를 돌아 지금 우리에게도 복음이 증거된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인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바울사도의 헌신이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고 헌신하였습니다. 이러한 헌신과 엄청난 계시를 받았다고 하여도 역시 인도하심과 이끄심과 쓰시는 것은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의 욕망과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렇게 엄청난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날 안도와 주시는가? 그러는 것입니다. 돈만 주시면 내가 이것도 저것도 해 드릴 텐데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실력과 능력이 아니라 비움입니다.
바울사도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드디어 마게도니야에 이르게 됩니다. 적어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갔다면 준비된 영혼들 수십, 수백 명이 대기하고 있다가 복음을 듣고 영접하고 그래야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천지를 만드신 주님의 사도로서 인도를 받아 가는데 조그마한 나라 대통령 후보가 가는 것 보다 못해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대통령 후보가 연설을 하기 위하여 다닐 때 비서들이 분초를 따져가며 준비해 놓는 것입니다. 어떤 장소에서 몇 분간 연설하고 분위기는 어떻게 띄우고 하는 것을 다 준비하여 놓습니다. 그래서 가서 연설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성령의 인도를 받아가는 사울의 모습을 봅니다.
16:11-13절입니다. 마게도니야 지경 첫 성 빌립보에 이르게 됩니다.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그런데 누구 하나 영접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때 복음을 증거하는 방식은 어느 곳에 가든지 그곳에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는 곳을 찾아 갑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모이기에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곳은 로마의 식민지로 회당도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성에서 며칠을 유하면서 어디에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강가로 나가보니 그곳에 여자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합니다.
유대교에서 여자들과 아이들이란 별 대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수를 헤아릴 때 성인 남자만 수에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먼저 아담을 유혹하였다고 늘 여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얼마나 세상적으로 별 볼일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마치 겨자씨처럼, 가루 속에 숨겨진 누룩처럼, 한 알의 썩는 밀알처럼 그렇게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루디아라는 옷감을 만들어 팔고 하는 여자의 마음을 주님께서 여셨습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증거하여도 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음을 여셔야만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 같이 말씀을 듣지만 주님께서 마음을 열어 주셔야만 주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나 잘해라, 하면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자 바울이 전하는 말을 청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루디아와 저의 집이 다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로 보건데 루디아는 유족한 독신 여인으로 가내공업을 하는 주인으로 보아집니다. 고대의 대가족은 생활공동체이면서 생업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종교공동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그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가정도, 16장에 나오는 간수의 가정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가장이 없는 것입니다. 누가 가장이 되어 있습니까? 경제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 가장입니다. 그러니 말세인 것입니다. 아무도 가장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가장이 예수를 믿고서 믿음으로 살자고 하면 당신이나 그렇게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살겠다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편들이 가정의 화목을 위하여 예수를 버리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가정을 한번 돌아봅시다.
마게도니아까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왔지만 몇 일만에 겨우 예수 믿는 여자 한사람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유럽의 최초의 신자요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초대교회는 거의 다 개인의 가정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루디아가 언제 바울과 복음 전하는 자의 일행을 보았다고 자기의 집에 강권하여 유하게 합니다.
15절을 봅니다. ‘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울이 실라만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일행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라고 하는 사람은 누가가 기록하였기에 누가 자신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제법 일행이 되었을 것이고 또 이곳에 유하면 계속 사람들이 모이게 될 텐데도 루디아가 강권하여 자기 집에 유하라고 합니다. 방도 내어 주어야 할 것이고, 식사도 공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권하여 자기 집에 유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여셔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 복음의 가치를 인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강권함이 무어라고 합니까?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합니다. 만약 그 집에 들어가 유하지 아니하려면 나를 예수 믿지 않는 자로 여기는 것이라는 정도로 강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성령의 인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전혀 반대되는 상황도 나옵니다. 성령의 인도라고 하여서 화려한 영접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 같이 모여드는 것도 아니고 겨우 여자 한 사람이 영접을 하였습니다. 그곳을 기지로 삼아 그 도시에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중에 어떤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과 일행을 따라 다니면서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 여종은 귀신의 힘으로 점을 쳐주고서 주인에게 이익을 주는 그런 여종입니다. 귀신 들린 이 여종이 무어라고 하면서 따라다니는 것입니까? 나쁜 말로 욕하면서 따라다니지 않습니다.
17절을 보시면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좋은 말이지 않습니까? 귀신이 알아보고 이렇게 높여준다면 대단한 효과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초점이 바울에게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종에게 명하여 귀신을 쫓아 내어버립니다.
그러자 그 종의 주인들이 자기 이익이 끊어진 것을 보고서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시장거리고 관원들에게 끌어가서 유대인들이 이곳에 와서 로마 사람들인 우리가 받지도 못할 풍습을 전한다고 하면서 고발합니다. 그러자 재판도 열지 않고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하여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성령의 인도로 마게도니아까지 왔는데 겨우 여자 한사람 영접하여 이제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중에 귀신 들린 여종 고쳐놓고서 매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극명한 두 경우를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은 바울을 강권하여 자기 집에 유하게 하는데 한 사람은 단지 자기의 이익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귀신들린 여종이 온전하게 된 것은 상관없이 바울과 실라를 매로 치고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이익이 끊어지는 것이 귀신에 들린 자가 고침을 받는 것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사는 이 세상이 귀신들린 세상인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이란 방향성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약속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 돈을 믿지 않고 자기의 생활능력을 믿지 않고 사는 것이 구원받는 백성의 사는 모습입니다. 목사는 교회에서 월급 주는 것 믿지 않고 살고, 여러분은 직장 믿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살기 좋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시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나오듯이 구원이란 방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어디나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자과 주 예수를 믿는 것은 자신의 이익이 끊어지는 것처럼 보이지 배척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하여 있습니까? 루디아 편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여종이 귀신이 떠나버리자 이익이 끊어진 것을 보고서 바울과 실라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사람들과 같습니까?
누가복음 8:26-39절을 봅니다. "봉독" 8:37절에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합니까? 떠나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와서 손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돼지 떼가 몰사하였으니 저 예수를 모셨다가 무슨 손해를 더 볼지 모르니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영을 받는 바울도 꼭 같은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익이 끊어진 것을 보고서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귀신에 들려 있는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복음보다 돈이 더 좋은 것입니다. 이것이 말세의 현상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감옥에서 구원받을 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감옥에서 찬송과 기도 중에 감옥의 문들이 다 열린 것입니다. 간수가 자결하려고 하자 바울과 실라가 우리가 여기 있으니 자결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결하여야 하는 순간임을 아는 사람에게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입니다. 주 예수를 믿고 삽시다.
사도행전 16:25-34 주 예수를 믿으라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오늘이 2002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해의 마지막과 시작이 예수 믿는 자들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그 달을 새로운 해의 첫 달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기존의 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만의 새로운 달력을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 하다가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나온 것을 새로운 출발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짜가 바뀐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인이 바뀐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그 유명한 사도행전 16:31절의 말씀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인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냥 예수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주 예수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있기에 자기에게 이익이 되어야만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라고 그러면 당장 믿으면 무얼 주는데, 하는 질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또는 교회오라고 하면 노골적으로 묻습니다. 그 교회 가면 무얼 주는데요? 워낙 교회들이 선물공세를 하니까 더 좋은 선물 주는 곳으로 골라서 가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름성경학교 같은 행사를 하면 치열하게 선물 공개하는 것입니다. 전도 몇 명이상 하면 무엇을 주겠다고 실물을 전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길들여진 교회 출석이 어른이 되어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처럼 노골적으로 무엇을 주는데 말하지는 않아도 내가 교회 나가서 무슨 덕이 되는가를 계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종교사업가들이 번듯하게 간판을 내어 거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생활 세미나, 지역주민을 위한 예식장 개방, 도서관 운영, 공부방 운영, 영어 주일학교 등을 운영하면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어라고 하신 것입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가정도 부인되는 것이고, 자기의 직장도 부인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주인이 되어 나의 행복을 위한 가정, 직장, 종교였다면 이제는 그러한 주인이 심판을 받았기에 참된 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셔야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우주의 주인이 오셨기에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다는 것은 참된 주인을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은 주인을 바꾸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믿어오든 것들을 믿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정생활도 하지 말고 직장도 그만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그러한 삶이란 결국 자기 사랑이었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삶의 목표와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목숨을 걸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온 모든 삶의 형태를 회개하고서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람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떻게 스스로 주인을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인을 바꾸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것입니다. 어떻게 주 예수를 믿는 기적이 일어나는지 지난주와 연결하여 다시 살펴봅니다.
바울과 실라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아시아에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고 마게도니아로 와서 루디아를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데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의 일행을 괴롭게 하므로 귀신을 쫓아내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여종의 주인이 자기의 이익이 끊어져 버린 것을 알고서 바울과 실라를 잡아서 매로 치고 감옥에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이 여종의 주인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자기의 이익이 진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실라를 고소하면서 무어라고 하면서 고소합니까?
사도행전 16:20-21절입니다.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이들의 고발은 우리가 지금 잘 먹고 잘살고 있는데 유대인들이 와서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한다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고발이 오늘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24:5절을 봅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합니다. 복음을 증거하는데 나오는 반응들입니다. 물론 적은 수가 예수를 주로 믿는 자들이 나왔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복음이란 걸림돌이요 받지도 행하지도 못할 풍습이요 극히 위험한 걸리면 죽고 마는 염병과 같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인이 바뀌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믿고 살아왔던 것은 내가 주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하가 다 나의 뜻대로 나의 이익대로 움직여져야 진리로 인정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내 자신과 가정과 직장과 나라가 더 안정되게 발전되고 행복하게 되는 것으로 알고 예수를 믿어 왔는데 거기다가 죽어서도 천국에 간다고 믿어 왔는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면 누가 그렇게 믿을 수 있겠나 하는 반발이 여러분에게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한 반발이 일어나는 또 한편으로는 당신은 목사니까, 그러말 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니까, 그런 말 하지, 당신이 교회에서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믿음으로 살라는 말을 하겠는가! 하는 분도 아마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여러분은 여러분의 목숨줄을 여러분의 직장이나 가정이나 국가에 두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면 목사는 목사의 목숨도 교회나 교회의 월급에 두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직장생활을 하여도 그 모든 수익이 주님의 은혜로 고백되는 자가 신자이고, 목사가 교회에서 월급을 받아도 교인들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임을 알고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직장상사가 여러분의 주인이 되어 버리고 목사의 주인이 월급 주는 교인이 되어 버린다면 우리가 주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여러분이 받고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의 마음이 여러분에게 들지 않습니까? 나의 이익과 소망을 끊어버리려는 저 원수를 물리치자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장래에 대하여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지만 목사 당신의 장래는 교회에서 보장해주니 그런 말 하지, 하는 생각이 드시는 분이 계실 것 같아서 제가 연말마다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복음을 듣게 되면 돌로 치든지 회개하든지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돌로 치고 싶어도 어찌 치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음주 시무투표 할 때에 돌로 치고 싶으시면 무기명 비밀투표를 하니까 마음껏 돌로 치셔도 될 것입니다.
목사가 예수 믿고 삽시다고 하면서 자기는 위임을 받아서 70평생을 모든 생활의 보장을 다 받아 놓고서 예수 믿고 살자고 하면 무언가 다른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렇게 말하지 할까봐서 가끔씩 시무투표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목사가 교인 믿지 않고 예수 믿고 살 것입니다. 그러면 또 문제가 되는 것이 교인들에게 좋게 하면 쫓겨나지 않기에 잘 보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래나 저러나 간에 우리가 주 예수를 믿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있고 기보하고 정성을 바치면 알라딘의 램프처럼 주인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하면서 나오는 그런 예수가 아니라 이제 내가 사는 것도 주님의 은혜요 죽는 것도 주님의 은혜임을 알아 사나 죽으나 이제는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하고 사는 것이 주 예수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주인이 죽으라면 죽는 것이고 살라면 사는 것입니다. 하게 하시면 하고, 막으시면 안하고, 아시아로 막으면 가지 않고 마게도니아로 열리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를 믿는 자세요,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8:5-13절입니다.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1)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2)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5,6,7장이 산상수훈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모든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유대인들조차 모두 부정한 자가 되어 버리는 말씀입니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지적하셨기에 아무리 완벽한 율법을 지켰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문제는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 이후에 처음 등장하는 사람이 문둥병자입니다. 자신이 문둥병자처럼 부정한 자임을 아는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구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에 백부장이 나옵니다. 이 백부장이 예수님을 주로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알아보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방인 백부장은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둠에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이방인이 들어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면서 목사, 집사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전히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있다면 유대인들이 받은 책망을 동일하게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와 의와 심판관에 대하여 책망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님 내가 정말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어찌 하여야 합니까? 하는 탄식이 나올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며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는 이 말씀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자신이 바르게 신앙생활 하고 있다고 여기고, 그 안정된 생활을 좀더 확실하게 보장하여 줄 그러한 신을 기다린 자들에게는 결코 주인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정말 자기 자신에게 절망할 대로 절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남에게 피해를 입힌 것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정말 사는 것이 죄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주여 어찌 하여야 합니까,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누구입니까?
간수입니다. 지진으로 감옥의 문이 다 열려버리고 이제는 자기가 사형을 당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고문을 당하고 사형을 당하느니 깨끗하게 자결하고 말자고 칼을 빼들고 자결하려는 순간 바울이 말리는 것입니다. 이때 엎드려 간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주 예수를 믿으라고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래서 예수를 주로 믿고서 자기 온 집안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죽음의 상황에서 예수를 믿고 나니 그 구원으로 인하여 온 집안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동안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나를 갈무리 해온 피곤함에서, 예수를 주로 믿는 기쁨과 홀가분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사도행전 17:1-15 다른 임금
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 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오늘이 2003년 첫 주일입니다. 대부분 새해의 교회 비전과 계획을 발표하고 또 개인의 꿈들을 이루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러한 꿈과 희망을 말하기 전에 오늘의 현실을 종말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수요일 저녁에 두 번이나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 또 다시 보고자 합니다.
디모데후서 3:1-4절입니다.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여기서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그 목록이 19가지입니다. 이 목록 가운데 저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 한 가지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저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긍하고 교만하고 하는 모든 말씀이 다 저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세의 고통 하는 때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세에 이 땅의 꿈과 희망을 말하기 전에 "오늘밤에 내 영혼은?" 이라는 생각을 늘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할 때마다 이 설교가 저의 마지막 설교라고 생각하고 설교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말씀 전하고 제가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 둘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이 설교를 듣고서 돌아가시다가 영원히 돌아가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에서 새해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 하면서 교회의 비전과 개인의 비전에 대하여 이루어 한참 말하고 성공하는 방법까지 배워서 기분 좋게 가다가 어리석은 부자처럼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13-20절입니다.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2)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우리가 2003년 새해를 맞이하여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무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그 모은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이란 언제나 종말론적입니다. 그러면 이 말세의 고통 하는 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무엇을 하신 것입니까?
사도행전 17:1-3절을 봅니다. "봉독" 바울이 빌립보에서 감옥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한 후에 데살로니가로 왔습니다. 이곳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세 안식일에 걸쳐서 성경을 강론하였습니다. 그 주제는 성경의 뜻을 풀어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자신이 전하는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란 나사렛에서 자라나시고 공생애 3년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후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입니다. 이 분이 바로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이 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그래 그런 정도는 이미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과연 이 말씀에 생명을 걸겠습니까?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를 죄에서 사하시고 부활하게 하실 것임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슴 뛸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말씀에 관심이 없이 시큰둥한 반응이라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든지 아니면 심각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동일하게 들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를 따르지만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여 몰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말씀을 들었는데 이렇게 두 가지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17:4-7절을 봅니다. "봉독"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바울과 실라는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아 바울과 실라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사람들은 오히려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발의 내용이 6-7절입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든 자들이 이곳에서 와서도 소동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고발하는 내용은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한다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세계는 로마가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만이 왕인데 어떻게 로마의 식민지에서 다른 임금이 있다고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왕이 있을 때에 만약 다른 임금이 추대하려고 하다가 발각되면 역모 죄로 삼족을 멸하고 구족을 멸하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감히 로마의 황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임금 곧 예수라는 임금이 있다고 하니 이런 자들은 로마의 황제를 거역하는 자들이기에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미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으실 때 이미 빌라도는 정치적인 죄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종교적인 죄라면 너희의 법이 있으니 너희 법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의 법대로 하면 사형에 해당되는데 자기들이 로마의 통치하에서 사형권이 없으니 허락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여론에 못이긴 것입니다. 만약 민란이라도 일어나면 로마에 문책을 받으니 나는 책임이 없다하면서 손을 씻고 사형에 처하도록 넘겨준 것입니다. 이때 빌라도의 심문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고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네 말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빌라도가 정치적인 메시아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이 땅에 속한 것이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지 않게 하였으리라고 하셨습니다(요18:33-37). 그런데 왜 예수를 그렇게 고발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의 임금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시편 2:1-6절입니다. "1 어찌하여 열방이 1)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여기서 두 종류의 왕이 나옵니다. 세상의 왕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따로 세우시는 왕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왕들과 관원들이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은 자 즉 그리스도를 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따로 세우신 왕이 철장권세를 가지고 세상의 왕들을 질그릇 깨뜨리듯이 부수어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왕들과 관원들아, 너희가 그 아들에 입 맞추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이 급하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요 주이심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종말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아십니까?
사단은 이러한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예수만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왕들이 하는 일들입니다.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가능성을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주와 왕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결단코 주님을 의지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3절입니다.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1)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여기서 권세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세상의 권세 이 세상의 신, 즉 마귀가 왕노릇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과 방향이란 오직 이 세상의 임금에 속한 내용이었습니다. 즉 땅의 것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 있는 자들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10절입니다. "봉독" 정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왕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왕이 이루어내신 일입니다. 이것을 믿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의 임금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그동안 말씀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제대로 공부하시면 결국 두 편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어디를 가더라도 두 편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인하여 시기하고 배척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과연 그러한가 하고서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7:10-15절입니다. "봉독" 데살로니가에서 바울과 실라를 밤중에 베뢰아로 보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람들이 신사적이라서 말씀을 상고하니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도 많이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유대인들은 또다시 이곳까지 와서 소동을 하자 바울을 또다시 다른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에 대한 관심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죄인임을 알아 갑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참으로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 갈수록 다른 것에 관심이 덜하여 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의 임금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한 임금이신 예수님을 믿고 섬긴다면 함께 주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세상의 임금이 아닌 다른 임금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16-34 철학과 복음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믿는다는 예수님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말하는 예수가 다르고 집사가 말하는 예수가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다들 자기 눈에 좋은 대로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 성경을 안다고 하여도 자기가 알고 좋아하는 예수만을 원하고 있다면 이것은 정말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뢰아 사람들처럼 신사적으로 과연 성경이 그러한가 하고서 상고를 해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인 것은 우리가 성경을 열심히 본다고 제대로 아는 것 또한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모두 선입견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철학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철학 그러면 딱딱하고 어려운 학문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만 그러나 철학을 아주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내가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전부 철학이라고 보면 됩니다. 철학이 진리를 추구하고 신에 대하여 논의를 하고 신을 섬긴다고 하더라고 결국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양철학의 발원지가 되는 아테네에 신상과 반신상과 영웅들의 상이 가득하고 신전이 가득하였습니다. 신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신들의 비위를 잘 맞추어서 자기들이 소원하는 바를 얻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신상과 신전을 만들어 신을 섬기는데 혹시 자기들이 아직도 잘 알지 못하는 신이 있어서 자기들에게 화를 주면 어떻게 하나 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신전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신들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신들입니다.
바울사도가 이러한 아테네에 들어가 보고서는 분이 가득하였습니다.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한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덴에서도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변론하고 또 광장에서는 철학자들과 변론을 하는 것입니다. 변론하는 목적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변론을 위한 변론은 무익합니다.
유대인들과의 변론은 자주 언급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부활하셨다, 그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오늘은 이방인들에게 변론을 통하여 참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증거되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고 요한복음 17: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는다고 하는 예수가 과연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인가? 아니면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던 철학적인 예수인가를 구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들이 나오는가 하면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입니다. 요즈음 말로 번역을 하면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입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철학의 주제들은 완전한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신이란 어떤 것인가? 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결국 절대불변의 진리를 추구하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리를 추구한다고 하는 이들의 도시에 온갖 우상과 신전들이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진리를 찾아낸 결론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철학과 과학의 이론들이 쏟아져 나옵니다만 그러나 이미 칸트라는 사람이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말하였습니다. 초월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손을 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의 관심사가 실존적인 문제만 다루게 되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과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마저 무너져 내린 것이 2차세계대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신에게 귀의를 하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9.11테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시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시 평화로워지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란 것이 나의 필요에 의하여 찾아지고 섬기게 되는 것이라면 결국 인간이 여전히 주인이요 주체로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의 특징 중에 자기들의 이론이 맞는다는 고집 또한 대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고집들이 전문적인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아무리 있는 그대로 증거하여도 꼭 끝에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만" 이라고 하면서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하 그렇구나! 하는 분도 간혹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몇 시간을 성경을 근거로 복음을 전하여도 "그렇지만" "그래도 내 생각에는" 하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값없이,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이 주어지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에서 나온 종교라든가 신이라는 것이란 결국 인간이 주인입니다. 겨울에 연을 날리면 멀리서 보면 가느다란 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연만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가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까? 연 날리는 사람이 다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줄을 감았다가 풀었다가 방향을 바꾸기도 하는 것은 모두 누구 손에 달린 것입니까? 연을 날리는 사람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내가 신에게 정성을 바치는 것만큼 신이 감동하여 나에게 복을 더 주시겠지! 설마 이정도로 내가 헌신하는데 가만히 있겠나! 지성이면 감천이지, 하는 것이 바로 종교성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이 팽배한 아테네 도시에 오히려 온갖 신전과 신상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은 복음과 정 반대입니다. 철학이란 철저하게 인간의 주체와 인간의 능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자신 모두가 철학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철학이나 학문이나 종교라는 것이 모두 인간의 창작물이며 결국에는 자기들이 스스로 주인이요 신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불가능이란 없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사상들이 모두 인간의 능력을 믿음으로 나오는 사상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이러한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을 고발하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최고의 사상으로 나타낸 것들이 모두 우상이요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자연스럽게 생각한 진리나 종교나 신이나 간에 모두가 자기를 위하는 우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복음이란 얼마나 낯설고 생소한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이들에게 내가 참된 신을 소개하겠다고 증거합니다.
그 내용이 사도행전 17:22-31절의 내용입니다. 너희가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그러므로 온갖 신을 다 섬기고 있는데 그 중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단도 보았는데 너희가 알지 못하고 섬기는 신들을 내가 바르게 알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예수를 수십 년 믿어 왔다고 하지만 날마다 말씀 앞에 부딪히지 아니하면 어느새 내 안에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신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1:9-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날마다 뽑히고, 파괴당하고, 파멸되고, 넘어 뜨려지고 나서 건설하며 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적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얼마나 나의 고정된 하나님과 예수님이 들어 있습니까? 선입견과 편견으로 가득 찬 우상 하나님과 우상 예수님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말씀으로 부수어지고 날마다 다시 건설되고 심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 안에도 날마다 철학과 종교로 위장된 우상이 들어앉고자 합니다. 내가 믿고 있다는 하나님,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이 정말 사도들이 증거한 분과 일치하는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24-25절을 봅니다. 사람들이 신을 위한다고 하는 것은 신을 이용하기 위하여서이지 정말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왜 엄청난 돈을 들여서 신전을 지어 바치겠습니까? 신을 사랑하여 섬기기 위함이 아니라 결국 신을 기쁘게 함으로 내가 잘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신과 적당히 흥정하고 거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인간과 합작하거나 의논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홀로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섬김이나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24절과 25절의 말씀입니다. 우주와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지금까지 자기들이 그렇게 헌신하고 희생하면서 신을 위한다고 엄청난 대리석으로 모양을 내고 거대한 신전을 지어 바쳤는데 그런 곳에,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신이 거하지 아니한다고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아니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 다닌다고 하는 우리에게도 이 본문의 말씀은 너무나 생소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께 많이 바치면 복을 받는 줄 알았는데 정성도, 돈도 많이 바치면 많이 복을 받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아예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랍니다. 황당하지 않습니까? 낯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동안 복음을 들었기 보다는 자기 철학이요 자기 종교였던 것입니다. 나를 위한 신이었지 내가 사랑해서 복종하고 순종하여야 할 신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되신 신을 사람들이 고안해낸 형상물로 조각을 하거나 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증거합니다. 우리는 형상물을 만들어 섬기지는 아니한다고 해서 이 말씀에 해당이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형상물을 만들지 않아도 무언가 고안해 내는 것은 사고방식일 수도 있고, 가치관일 수도 있습니다. 삶의 목표와 방향도 다 우리가 고안해 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참된 신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신에 대한 생각들을 고발하면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고발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왜 배척당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었던, 철학 즉 내가 주체가 되어 나의 능력을 배가 시키면서 영원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즉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것 때문에 참되신 주인인 예수님이 배척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회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치라, 말라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란 반성일기 쓰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표와 방향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를 위하여 살아온 것이 죄임을 알고 이제는 주님을 향하여 사는 것으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31절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의 철학과 종교성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일하심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기능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죽으신 것입니까? 우리 죄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전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모두가 죄인으로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말만 하여야 마땅하겠습니까?
할말이 없어질 것입니다. 조용하여 질 것입니다. 겸손하여 질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돌아보니 부끄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용서를 알면 입을 가릴 뿐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로 인하여 그 용서의 힘으로 감사하며 용서하며 살아 갈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도행전 18:1-11 내 백성
1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6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지난주에 바울사도가 아덴에서 전도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서양사상의 발원지라고 하는 아테네에서 얼마나 종교성이 대단한지 이름모를 신에게까지 단을 쌓아서 신을 위하는 모습을 보고서 바울사도는 참되신 신을 소개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신에게 무엇을 먼저 드려서 신으로부터 보답을 받는 그러한 신은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이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아니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종교와 복음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께서 이제는 온 세상에 분명한 증거를 주셨는데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다신 살아나신 예수가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한 날을 정하셨기에 회개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하여 사람들은 희롱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다시 듣겠다고 합니다. 그런 중에 바울사도가 그 곳에서 떠나자 친하여 믿는 자들이 몇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아레오바고 법정의 관원과 마라리라는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사도가 가는 곳마다 핍박하고 조롱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바울사도를 영접하며 그의 전하는 복음을 믿는 자들도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핍박하고 희롱하는데 어떻게 믿는 자들이 나옵니까?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오늘은 바울사도가 아덴에서 고린도로 갔습니다. 고린도에서 있었던 일들입니다. 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아가야 주의 수도이며 총독의 거주지였습니다. 고린도는 부유한 상업 도시이며 부도덕성 때문에 악명을 떨치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그들의 사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곳에 도착한 바울사도는 외롭고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후원하는 자가 없어서 스스로 일을 하여야 했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입니다.
이들은 아마도 주후 49년에 로마에서 추방당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한 내용이 없이 함께 일한 것으로 보면 이들은 이미 로마에서 복음을 듣고 믿는 자가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바울사도와 이들 부부의 만남을 보시면 둘 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바울사도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소아시아 지역으로 가지 않고 마게도니아 지역으로 왔는데 가는 곳마다 핍박이 심하여 이제는 고린도지역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로마의 본토에서 추방이 되어 왔으니 어렵기는 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함께 만나고 함께 일하면서 복음을 증거하는데 이들 부부는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사도행전 18:24-26절. "봉독" 로마서 16:3-4절. "봉독" 아볼로에게 성경을 풀어 해석, 바울의 동역 자됨. 이렇게 이들 부부와 함께 일하면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들과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증거합니다. 이러는 중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바울에게 옵니다. 이들이 빌립보 교회에서 연보한 것을 가지고 바울사도에게 왔기에 이제부터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만 증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후서 11:9절에 보시면 고린도 교회에서 연보를 받지 않고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바울의 부족을 보충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4:15-16절에도 바울의 사역에 후원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5절에 보시면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바울사도에게 내려오며 바울사도가 더욱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합니다.
이제 후원도 있고 복음만 증거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믿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군대도 전쟁 중에 보급품이 떨어지면 사기가 떨어집니다. 그러다가 보급품이 들어오면 사기가 진작이 됩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복음의 증거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서 복음이 가는 곳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부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유대인들이 극렬하게 반대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 일행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때로는 죽을 고비를 당하고 감옥에도 갇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골라내시는 일에는 실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감옥에서 간수장을 만나게 하시고, 아덴에서 법정의 관리가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증거되는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13:10-17절입니다.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너희와 저희를 구별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제자들을 말씀하고 저희란 알아듣지 못하게 하신 자들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예언한 말씀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눈뜨고, 스스로 알아들어서 올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가 있을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능력이 있고 지혜가 있어서 보고 듣고 깨달아 온 사람이 있다며 그런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긍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도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들어 올수 없기에 전도라는 미련한 방법을 통하여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전도는 스스로 도를 깨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미 택하신 자에게, 복음전하는 자를 보내어 십자가의 도를 듣게 하시고, 그 듣는 자의 귀와 마음을 열어 믿게 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지 못하는 자는 철저하게 듣지 못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전도 방법인 것입니다.
그 내용이 사도행전 18:6절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밝히 유대인들에게 증거를 하자 유대인들이 대적하여 훼방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우리는 어떤 마음이 듭니까? 더 오래참고, 겸손하게 기다리며 복음을 더 잘 전해야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서 믿을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어떻게 합니까? 옷을 털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갑니다. 옷이나 발에 먼지를 털어버리는 것은 분리와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가리라 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거부한 자들이 마지막 종말의 심판에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또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고 믿지 않고를 결정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정이 아니라 누가 주의 백성인가를 골라내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을 훈련시켜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누가 주의 백성인가를 골라내는 것이 복음의 기능인 것입니다.
정말 그러한지 다음 말씀을 봅니다. 7-8절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옷을 털어버리고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에 거합니다. 이 사람은 회당 바로 옆에 사는 사람인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기에 바울을 영접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대적하며 반대하는데 오히려 회당장은 온 집안 사람과 함께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믿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적대해야 할 회당장이 믿는 것을 보면 정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따로 있음을 보게 됩니다.
9-10절입니다. "봉독" 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격려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대적들의 훼방이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3절을 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여 심피 떨었노라"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지금 고린도에 있으면서 약하며 두려워 심히 떨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바울사도에게 두려워말라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두려워말고 잠잠하지 말고 전하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유대인들의 대적을 인하여 옷을 떨쳐버렸지만 고린도 지역을 떠나지 않은 이유가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이것을 묻기 전에 과연 나는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입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십니까? 어떤 예수를 믿으십니까? 내가 무언가 갖다 바치면 복주는 그런 예수입니까? 아니면 나의 시간과 재산과 생명까지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 예수로 믿으십니까? 후자라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주시라고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내 인생을 내가 쥐고 가려고 하고 있다면 내가 과연 주 예수를 믿는가 아니면 내가 주인이고 예수를 종으로 삼고 있지 않는가? 자문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인지를 한 번 더 점검해봅니다. 우리의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인정하십니까? 주님의 말씀처럼 사람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인 줄 인정하십니까?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소화가 되고 뒤로 배설되기에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정작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속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마태복음 15:19절에서 악한생각, 살인, 간음과 음란, 도적질, 거짓증거와 훼방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씀에 비추어보면 남을 미워하여도 살인, 음욕을 품어도 간음, 도적질해서가 아니라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임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이러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의롭다하여 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백성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달리 소망이 없다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할 틈이 없습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하는 이방여인이 예수님께 네 믿음이 크도다! 라는 평가를 받은 것처럼 자기의 부족과 연약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는 비록 못 낫지만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사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만 이야기 할뿐입니다. 자기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것임을 알기에 주님만 자랑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부쳐주실 것입니다.
아직도 이 창원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망하지 아니한 것은 아직 하나님의 백성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제는 바울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기대와 기쁨으로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18:18-23 하나님의 뜻이면
18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19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20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21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22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지난 목요일 차 집사님 심방을 하였습니다. 차 집사님의 모친이 와계시는데 연세가 90세였습니다. 심방예배를 드리면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빨리 죽어야 되는데 빨리 죽지 않아서 자식들에게 폐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인생이 70이요 강건하여도 80십인데 90인데도 이렇게 정정하게 살게 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모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저 빨리 죽어야 한다는 말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있는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죄인이라면 죽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살아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어느 목사님이 목사가 안 될 사람이 목사가 되면 사고 친다고 하였습니다. 사고가 무언가 하니 네 가지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목사 자신이 괴롭고, 가족이 괴롭고, 교인이 괴롭고, 하나님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를 더 살면 더 괴롭게 할 일뿐이니 빨리 죽는 것이 났다는 생각을 요즈음 더 실감나게 합니다. 그런데 빨리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회개하고 예수 믿게 하시려고 이렇게 오래 살려 두셨다고 봅니다.
다시 차 집사님 모친이야기를 합니다. 할머니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시니 이제 늙어서 무엇을 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믿겠느냐고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미리 그 이야기를 들었기에 집을 나간 탕자 이야기며, 38년 된 중풍병자 이야기며, 십자가의 강도 이야기를 하고나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믿으시겠느냐고 하시니 예라고 하였습니다. 왜 90까지 살게 하신 것입니까? 예수 믿게 하시려고 저는 그렇게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를 이렇게 살려두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면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입술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과연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사느냐! 하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하면서도 왜 구하는지 자세히 조사해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로, 직장, 사업, 결혼 등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일이 잘 안 풀릴 것 같으니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만 하면 모든 일들이 술술 풀리고 만사형통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일이 꼬이고 고난과 어려움을 당한다고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성이 우리 안에 뿌리깊이 박혀 있기에 결국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도 내 뜻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펼치는 하나의 도움으로 구하고 있지 않는 가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사도행전에서 바울사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자신은 아시야 지역으로 가고 싶었지만 성령께서 막으셔서 마게도니아 지역으로 왔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왔는데도 일이 잘 풀리기는커녕 가는 곳마다 핍박과 대적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심지어 돌에 맞아 죽었다고 내어버린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빈틈없이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형통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나의 일과 나의 뜻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형통이라고 보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형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내용만 십자가의 도가 아니라 증거되는 방법도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고 꺼리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천국의 비밀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알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몰라야 할 사람에게는 모르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데도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아주 쉽고 확실하게 확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작정을 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구하며 그렇게 순종하여 살려고 하면 당장 핍박이 오게 될 것입니다.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게서, 또는 교회 안에서 올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가족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그러나 믿는다는 가족에게서나 믿는다는 교인들 사이에서도 왕따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얼 그리 별스럽게 믿느냐고 할 것입니다. 너 혼자 잘났느냐며 집단 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외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외로워질 때 어떤 분이 다가오실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따돌림을 당했다는 주님의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는, 주님만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하시는 고난을 통하여 주님만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것은 고생스럽습니다. 죄인이 고생스럽게 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을 위하여 고생스럽게 사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으로 당하는 고난과 얼마나 질이 다르겠습니까? 사람의 일생이 주님의 분노 가운데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시편 90편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이런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고생을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9-19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백성이 고린도 지역에 많기에 두려워말고 잠잠하며 복음을 증거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2-17절의 말씀을 보시면 역시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바울을 고소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분명히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다고 하시고서는 또 대적이 일어나 재판정으로 끌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갈리오 총독이 고소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비록 고소를 대적들에게 고소를 당하였으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방인 총독 갈리오를 사용하셔서 바울이 해를 받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여전히 계속되고, 고생 다 하는데 무슨 해를 당하지 않는 것입니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는 방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받아들여집니까?
여기에서 여러 날 더 유하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수리아로 떠나면서 브리스길라과 아굴라가 함께 동행을 합니다. 겐그리아를 지나 에베소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사도가 하나님 앞에 무슨 서원하는 바가 있어서 머리를 깎고 에베소에 이르게 됩니다. 이곳에서도 회당에 먼저 들어가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러자 다른 곳보다 복음을 잘 받아 들일뿐 아니라 더 있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 사도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하면서 그곳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남겨 두고 다른 곳으로 가게 됩니다.
핍박받는 곳에서는 더 있어야 하고, 더 있어 달라고 하는 곳에서는 오히려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제 자기가 사는 것이 자기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사는 종일뿐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만나게도 하시고, 헤어지게도 하시고 교회를 정하게도 하시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질 뿐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만들고 계획을 세우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람의 뜻들은 결국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만이 세워질 것입니다.
바울이 떠난 에베소 지역에 아볼로라는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왔습니다. 학문도 많고 구약성경에도 능통하고 언변에도 능하여 성경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었으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러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이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와 함께 생활하면서 이들 부부가 이미 복음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에서 일년 육 개월을 함께 지나고 에베소까지 온다고 하여도 약 2년 미만인데 아볼로 같은 학문이 많은 사람이요 구약성경에 해박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도에 대하여 자세히 풀어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겠습니까? 벌써 선생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젖을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게 되어 버린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고 아볼로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도를 자세히 풀어 가르치니 이 사람이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여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아볼로를 영접하라고 하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기는 것입니다.
바울이 떠나도 하나님의 일은 빈틈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드러나는 인물이라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또는 아볼로 같은 사람은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보다 전혀 못하지 않는 복음의 증인들인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말에는 어눌하였습니다. 글에는 그렇지 않지만 말은 잘 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말에도 능통하여 성경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하여 유대인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동역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9절입니다. 아볼로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는지 아볼로파가 다 나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무어라고 합니까? 자기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을 뿐이고 자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결코 자기의 잘남이나 우월감을 가지고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2절입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하여 얼마나 애쓰고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7:10절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린도 교회가 바울사도의 책망을 받고서 회개한 것입니다. 그러고 열심히 주님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지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의 뜻 성취에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말씀뿐만이 아니라 성경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보고 듣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는 것이 성경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도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는 것임을 확인하시고 예수님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38-40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으며 그 하나님의 뜻이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지상 최대의 선물입니다.
사도행전 19:1-7 성령세례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 두 1)사람쯤 되니라.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성령을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울사도가 에베소지역으로 들어가자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공동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언가 빠진 듯한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으니 성령이 있음을 들어 보지도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으니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란 세례요한이 회개를 외치면서 세례를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볼로와 같은 입장입니다.
사도행전 18:24-25절입니다.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성경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기는 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아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자세히 하나님의 도를 전합니다. 무엇을 증거하였을까요? 바울사도가 에베소 사람들에게 증거한 것처럼 세례요한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에 대하여 봅니다.
마태복음 3:11-12절을 봅니다.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요한의 세례란 자기 뒤에 오실 성령으로 세례주실 분을 소개할 뿐입니다. 자신은 그 분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불과 성령으로 세례주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과 성령이란 심판과 구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은, 즉 성령세례를 받는 사람은 알곡처럼 곡간에 들이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는 자는 쭉정이로 꺼지지 아니하는 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에베소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만 알고 성령의 세례를 모르는 자들에게 세례 요한이 무엇을 증거한 것인지를 다시 증거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성령의 보내심 등을 다 증거한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안수를 하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어떤 교단에서는 성령 받은 증거가 방언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고 중생하는 것은 저급한 신자이고 예수 믿고서 성령 받아 방언해야 더 고급한 신자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의 방언과 예언이란 아직 계시의 기록이 완성되기 전의 상황으로 보아야 합니다. 계시의 기록이 완성되고 난 지금은 예수 믿는 것과 성령의 세례가 동일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은 자는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사단의 권세아래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다르게 기록된 곳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유대의 경계를 넘어선 것을 사도들에게 확인을 시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한다는 것을 베드로와 요한이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예수를 믿고 성령이 임하는 것도 또한 확인을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도 얼마든지 주님께서 부르신다는 것을 확정합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오직 주의 선택과 긍휼로 불러내신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오늘 내가 성령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 받은 증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도신경을 암송하실 것입니다. 무슨 주문처럼 어려서부터 외우고 아는 것이라고 해서 믿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다릅니다. 알기는 알지만 믿지는 않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압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압니다. 이 세상이 심판을 받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믿지는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건이 이미 종말론적인 사건이라고 자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여 예수를 믿게 되면 반드시 종말론적인 삶의 자세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삶이 이러한 갈등들이 있을 것입니다. 갈등조차 없다면 성령이 임한 자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라면 갈등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성령의 인도보다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갈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이 없음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라고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8:14-17절을 봅니다.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아빠란 어린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버지가 있는 아이는 염려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기에 걱정과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로만 하나님 아버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라면 장래에 대한 걱정과 염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성령이 임한 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늘에 속한 기업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기 까지는 고난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소속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이 사랑하겠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식구가 되었기에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처럼 성도를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살기에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고 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성령이 임한 증거입니다(롬8:18-25).
그런데 우리가 늘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육체의 소욕 역시 강합니다. 땅에 것들이, 세상의 것들이 떨어져 나가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섭섭해 하는 것입니다. 좀더 즐길 수가 있었는데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셔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하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시고 계시기에 믿음이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기에 믿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고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언약의 핵심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입니다.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 믿기 이전에는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신에 노예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아니하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초적인 죄가 주가 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에 모든 인간은 모두가 다 자기가 최고인줄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나 말고 다른 한 사람을 그것도 십자가에 죽었다는 한 사람을 나의 주님이라고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예수를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육되거나 그냥 지식으로 주라고 부르는 것은 여전히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있고서 자기를 위해주는 예수를 부르면 말로는 주 이지만 내용으로는 종을 부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아니고서는 자기가 주인 된 자리를 예수님께 양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7-14절을 봅니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성령이 임하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란 윤리도덕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죄란 다 용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의에 대하여는 자기에게는 일체의 의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는 이미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도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기에 우리의 두려움과 심판의 주가 되시는 분은 주님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성령이 임하셔서 하시는 일이며 그리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에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그 내용을 바르게 알고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성도란,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란 하나님의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기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고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을 소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16절입니다.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제 다시 묻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성령이 임한 자만이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한 자만 주님의 약속의 세계를 믿고 기다립니다.
사도행전 19:8-20 따로 세우고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2)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3)시험적으로 2)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고향을 잘 다녀오셨습니까? 명절에 모여서 주로 무엇을 하고 무슨 이야기들을 하다가 오셨습니까?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자기 자랑일 경우가 많습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것들은 감추고 자랑거리들은 더 과장하여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랑들이 결국은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자랑하고 왔습니까? 나는 비록 세상적인 자랑거리가 없어도 예수 믿는 것이 기쁨이요 감사요 자랑이 되었습니까? 예수 믿는 집안이라고 하여도 그러한 분위기가 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여전히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고 부러워하는 것들이 대화의 중심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지난주일 설교가 성령세례였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회개의 모습이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아담을 후손으로 아담아래 있는 것입니다. 아담 아래 있다는 것은 아담의 죄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 죄란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면서 사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마지막 아담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아담의 죄악을 끊어버리시고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들을 찾아내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 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믿는 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구하는 것임을 로마서 8장에서 보았으며 결론적으로 히브리서 11장에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모습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 명절을 지나면서 우리 안에 어떤 분리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습니까? 함께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교회에 다닌다고 하지만 정말 복으로 여기고 관심사가 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의 은혜와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들이 자랑이 되었습니까? 아직도 전혀 그러한 분위기가 아니라면 아직도 우리에게서 수많은 분리와 따로 세워짐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단락이 됩니다.
첫째, 8-10절에 보시면 따로 세우는 것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회당에 들어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합니다. 회당이란 유대인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과 율법에 대하여 충성스러웠으면 이방인의 땅에서 회당을 지어놓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회당에서 바울사도가 3개월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아니라고 이 도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이 도란 바로 바울사도가 증거한 복음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굳어 복음에 순종치 아니라고 오히려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 사도가 그들을 떠나서 복음을 받는 자들을 따로 세우고 강론하는 것입니다. 3년을 날마다 두란노서원에서 강론한 것입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분리, 따로 세우는 것이 어떤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거룩이라고 하면 바리새인을 따라갈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얼마나 분리를 잘 하였으면 바리새인이라는 말자체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모세의 율법만이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까지 정확하게 생활에 적용하면서 메시아의 약속에 대하여 인간 편에서의 성취를 확보하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라고 하신 것입니다. 종교적인 율례로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애씀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거루하게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도하에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예수님 안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종교에서 복음으로, 주인의 자리에서 종의 자리로, 낡은 옷에서 새 옷으로, 자기 의에서 주님의 의로 분리가 일어나고 따로 세워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리와 따로 세워짐이란 예수님의 사역에서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너희와 저희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두 편으로 나누어지듯이 바울사도의 복음을 듣고서도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서 모두 믿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는 자들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8:23-27절을 봅니다. "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ㄱ)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이 말씀이 사도행전의 결론입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증거하여도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사도행전의 끝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끝 날까지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내 안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안에서도 여실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식을 잘 하든지 못하든지, 빠르든지 느리든지 간에 분명하고 확실하게 분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겠습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추구하고 자랑하고 이야기하는 쪽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것을 소망하는 것과는 너무나 분명하게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후자가 너무나 적고, 또 본인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그렇게 살지를 못한다고 하여도 마음속에서는 분명한 반응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 예수 믿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닌데' 이러한 마음들이 예수를 믿는 다른 사람들이 모인 가족이나 교회 안에서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희한하게도 그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주님께서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인하여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리되어지는 소외감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나야 하는 일이기에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희한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11-16절입니다. "봉독" 바울사도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니 병이 났고 악귀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자 돌아다니면 마술하는 유대인들도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며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 중에 유대인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악귀들이 무어라고 합니까?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며 달려드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도망간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희한한 능력을 행한 것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종으로서 시킨 것을 한 것뿐입니다. 이 일 후에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지고 다니면서 병자들 위에 계속하여 놓지 않았습니다. 그때그때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이 바울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이름이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아들들은 이러한 바울의 기적과 능력을 이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자기들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그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에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의 주인이 아닙니다. 자기는 이미 죽은 자요 또한 날마다 죽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종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희한한 능력이 나오더라고 그것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고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부족과 연약을 자랑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리된 자의 모습입니다.
심지어 그러한 희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질병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육체의 가시를 인하여 세 번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를 어떤 사람은 안질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간질로 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에 보면 자신의 육체에 사람들이 보면 시험이 들 만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대접하였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의 육체를 보면 시험에 들 만한 질병이 있었습니다. 만약 간질이라면 자기의 손수건만 가져놓아도 병이 나아버리는데 정작 자기 자신은 설교하다가 입에 거품 물고 벌벌 떨며 쓰러진다면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바울사도의 능력이나 유명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능력이 주님의 손에 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만 스게와의 아들들은 이용하기 위하여 불렀던 것입니다. 믿지도 아니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귀가 얼마나 잘 알아보겠습니까? 거라사의 어떤 사람이 귀신이 들려 사람들이 제어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안에 들어있던 귀신이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우리를 벌써 멸하려고 오셨나이까? 하면서 귀신들이 먼저 알아 볼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나서 믿는 자들이 나와서 마술 책들을 불에 태워버립니다. 에베소에 이 마술 행위가 급심해서 마술 서적을 에베소 문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마술사들이 사용하는 책들은 아주 비싸서 은돈 하나가 노동자 하루 품삯이 되는데 은 오만이라면 엄청난 양의 책들을 불살라 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마술을 하면서 주술적으로 신의 이름을 불러가며 행하던 일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흥왕하여 세력을 얻어 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게서 분리되기 위하여 주님을 부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더 가지기 원하여 주여, 주여 부른다면 아직도 분리가 되기는커녕 마귀아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돼지떼 2천 마리가 물에 빠져 죽어버리자 그 동네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마을에서 떠나가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사람들은 은 오만이나 나가는 마술 책을 불살라 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기쁨이 그것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이러한 분리와 따로 세움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사도행전 19:21-41 소 동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 뿐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이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 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 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교회가 부흥하려면 은혜롭고 평안하여야 한다는 말을 우리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여 교회는 부흥하게 될지 모르지만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언제나 분리가 일어나고 소동과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난주에 본 말씀에서도 에베소의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하는데 마음이 굳어져서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복음을 비방하니 바울사도가 복음을 듣는 자들을 따로 세워서 증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선 이러한 소동과 요란함과 소요들이 일어나는 상황을 먼저 보고서 왜 그런 소동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도 틀림없이 소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1-3절입니다. "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1)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예수님의 탄생부터 이 세상은 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미 유대의 왕으로 헤롯이 통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왕이 탄생하였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충격인 것입니다. 헤롯의 아들이 태어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왕이 태어났다는 것은 구족을 멸할 모반이요 반역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소동은 이미 구약에서 다 예언이 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특히 시편 2편에서는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서로 힘을 합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심 자체가 가장 큰 소동인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건과 소동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러한 일을 아주 작은 사건으로, 미미한 사건으로, 관심 밖의 일로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외에는 예수님의 출생과 생애와 사역에 관하여 거의 기록이 남아 있지도 아니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역사가들이 있었습니다마는 그들의 역사의 중심은 로마의 황제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식민지에 있는 유다의 왕으로 있는 헤롯과 그의 부하들은 왕의 탄생소식을 듣고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모아서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겠느냐고 물으니 정확하게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박사들인데 그 정도를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경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이세상의 실상이었습니다. 이때로부터, 물론 더 넓게는 구약에서도 끊임없이 메시아의 오심을 방해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여호와의 언약은 파기될 수가 없기에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부패하고 반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들을 통하여 언약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가 온통 소동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올무에 걸어 죽여 버릴까 하면서 여러 가지 애매한 질문들을 하면서 말에 책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질문하고,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자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하고, 때로는 정치적인 문제를 들고 나와서 올무에 걸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잡아 죽일 도리가 없자 성전을 파괴하려고 한다고 하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처형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빌라도에 의하여 거부당하자 민중들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리고서는 데모를 하는 것입니다. 소동이요 소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압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하는 수 없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넘겨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동이 계속하여 일어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복음이 증거되는 현장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사렛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소식입니다. 죽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시고 하늘 보좌에 앉으셨다는 소식을 증거하는 곳마다 소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회개하는 소동으로 어떤 자들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복음 전하는 자들을 죽이려고 소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아오면서 그러한 내용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 분리가 일어나고 소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소동이 일어나는 것인지를 오늘 말씀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19:21-22절은 사도행전 마지막 대단원인 19:21-28:31절의 내용을 알려줍니다. 바울사도가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면서 연보한 것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 그리고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합니다. 이 로마에서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받고서도 그곳으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사도행전의 끝이 됩니다.
그러나 아직은 에베소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곳에서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여러 직공들을 거느리고 아데미 신전의 은감실을 만들어 파는 사람입니다. 아데미란 신은 헬라어이고 라틴어로는 다이아나입니다. 그런데 다이아나는 수렵의 처녀신인데 비하여 에베소서에서 다이아나 즉 아데미라고 섬기는 신은 소아시아 지역의 다산의 여신인 '위대한 어머니'를 숭배한 것입니다. 이러한 여신상들은 주로 가슴이나 배가 풍만합니다. 그래서 다산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자식도 잘 낳고, 짐승들도 새끼를 잘 낳고, 모든 생산물이 많이 나오도록 하는 신입니다. 이런 신의 형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데메드리오입니다. 이 사람이 소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23-29절을 봅니다. "봉독" 우리가 섬기고 있는 아데미 신을 인하여 우리가 부자가 되었는데 그리고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난데없이 이상한 놈들이 와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하니 우리의 직업이 천하게 될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동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자기의 이익문제입니다. 자기들에게 손해가 오는 일이라면 막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보다 더한 움직임은 자기들의 신들을 거론하는 것입니다. 신의 뜻이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소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경제적인 이익과 종교심까지 들어가면 이것은 말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자 사람들이 드디어 구호를 외치면서 소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커다란 데모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구호는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면서 소동이 일어나는데 무려 두 시간이나 한 목소리로 외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꼭 어떤 사람들이 함께 하는가 하면 영문도 모르고 그냥 따라나서는 자들이 있습니다. 지게지고 장에 가듯이,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군중심리인 것입니다. 그냥 휩싸여 가는 것입니다. 찰리 채플린이라는 사람이 나온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었답니다. 어떤 데모대가 깃발을 들고 몰려가는데 깃발 든 사람이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영문도 모르고 찰리 채플린이 주워서 들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을 보고서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32절에 보시면 태반이나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로 휩쓸러 가고 있습니까? 어떤 소동에 요동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이 얼마나 소란하고 난리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난리와 난리의 소문들이 있고, 처처에 지진과 기근이 일어나고, 온갖 재난과 재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는 이런 세상에서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소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것이 신이 아닌데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것들을 ?아 가느라고 소동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을 섬기지 않는다고 안심하시겠습니까?
절에 나가는 사람이나 성당에 나가는 사람들이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지 나는 교회 다니니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스님들이나 신부들이 그런 형상물이 우상인줄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없애지 아니하는가 하면 신심이 부족한 대중들의 신심을 도와주기 위한 방편으로 있는 것이지 그것을 섬기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상물에 절하지 아니한다고 우상숭배자가 아니라고 장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5절을 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1)진노가 임하느니라"
탐심이 우상숭배입니다. 탐심을 품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만이 땅의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위엣 것을 찾는 것입니다.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것이 있습니다. 땅에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란 단지 형상물만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관 사고방식 윤리와 도덕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결국 사람들의 이익과 편리를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익에 조금이라고 손해가 온다면 그냥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 올 때도 순교가 일어났습니다. 천주교가 들어올 때도 순교가 일어났습니다. 기독교가 들어 올 때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연 이러한 소동들이 있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벌써 다 토착화 된 것입니다. 이 땅의 민중들이 소동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다 타협되어진 것입니다. 불자이든, 천주신자이든, 기독교인이든 거저 나의 이익을 보장하여 주고, 적당하게 종교생활 하면 극락도 천국도 보장하여 주는 그렇고 그런 종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잘되고, 죽어서도 좋은 곳에도 가고 이 정도라면 보험 드는 셈치고 한번 종교 가져보는 것도 괜찮아 보이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인기 있는 연예인, 운동선수들, 정부의 높으신 분들도 집사니 장로라고 하니 교양도 있어 보이고, 사회적인 신분도 있어 보이니 기독교도 괜찮아 보이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동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의 소요가 일어나 모인 군중들의 태반이나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따라 나선 것처럼 오늘 우리가 예배당에 이렇게 모이는 이유를 제대로 모르고 따라 나서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을 추구하고 원하고 있다면 그것이 어떤 눈에 보이는 것이든지, 아니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옳다고 하는 가치관이든지간에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 안에 소동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자 하고 목표와 방향을 잡은 모든 것이 사실 나의 손으로 만들고 손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들이 아닙니까? 그러한 것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날마다 소동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소동이 일어나야합니다. 이 세상의 이해득실을 따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참된 생명을 주는 복음을 배척하기 위하여 데모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고서 회개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사도행전 20:1-12 위 로
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4 1)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에베소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는 바울의 전도의 내용으로 인하여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소요가 그치자 마게도냐를 거쳐 가면서 여러 말로 제자들을 권면하고 헬라에서 3개월을 있다가 여기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려고 합니다. 수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배를 타지 않고 다시 마게도냐로 돌아가기를 작정하고 돌아가는 중에 드로아에 이르러 일주일간 머물게 됩니다.
이제 내일이면 바울사도가 떠나게 되는데 떠나기 전날 저녁식사를 위하여 함께 모였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사도가 강론을 시작하여 밤중까지 계속되니 유두고라는 사람이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보니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그 사람을 안고서 떠들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한 것입니다.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살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지금 대구 지하철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위로가 무엇이겠습니까? 얼마나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이 있겠습니까? 어린 학생들도 있고 대학생들도 있고 그들의 계획하고 꿈꾸어 오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 자녀들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보상금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가장 큰 위로란 죽었다고 알았는데 다시 살아났다면 그것이 최고의 위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서의 위로란 단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어있는 것으로 봅니다. 숨쉬고 밥 먹고 일하고 사회구성원으로 성실하고 바르게 산다고 하여서 그 사람이 살아있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있기에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 상태 그대로 있다면 이것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것입니다. 진노와 저주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의 관점에서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 성경전체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5:28-29절을 봅니다. "28 라멕은 일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1)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노아라는 이름의 뜻이 안위하리라는 뜻입니다. 안식과 위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안식과 위로가 왜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17-19절입니다.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수고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범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창조의 영광을 위하여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이 창세기 3:15절에서 여인의 후손입니다.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인의 후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안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안식을 기다리는 최초의 계시가 노아입니다. 이것이 노아가 받은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왜 안식과 위로가 필요합니까? 이 세상이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세상이라고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상태이기에 참으로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도 세상은 끊임없이 좋은 세상, 아름다운 세상, 인간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좋은 인간관계, 좋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거짓된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 발 딛고 살고 있으니 그러한 약속이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약속이란 성경만이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90편 1-12절을 봅니다.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1)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창세기에서 저주아래 있음을 시편 90편에서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일생이 주님의 분노 중에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주님의 진노를 제대로 알겠습니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세상과 인생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분노와 진노 중에 있는 세상과 인간이기에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여기에서 무엇이 안식과 위로이겠습니까?
다시 노아시대를 생각해 봅시다. 시편 90편 5절에서도 홍수처럼 쓸어 가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 무엇이 위로였겠습니까? 부자 되는 것이 위로였겠습니까? 결혼하는 것이 위로였겠습니까? 사업의 성공이 위로였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존경받는 것이 위로였겠습니까? 교회 부흥과 성장이 위로였겠습니까? 자녀가 좋은 대학 진학한 것이 위로였겠습니까? 모두가 홍수로 다 죽어 가는 현장에서 참된 위로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서 방주에 탄 것이 위로였습니다. 그 방주 안에서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은혜가 참으로 위로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세상사는 재미가 너무나 좋았던 것입니다. 노아가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미친놈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성의 롯의 사위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농담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슨 위로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사야 40:1-11절입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1)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3)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4)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어떤 위로입니까? 죄 사함이 위로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모든 육체가 보게 될 것이 위로입니다. 목자가 양 무리를 먹이고 안으시고 인도하심이 위로입니다. 이 모든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이 구약의 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자들이 이러한 위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계속되는 반역과 징계 속에서도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그 위로를 기다린 자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그런 위로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위로를 기다린 사람들은 땅에 속한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인생이 풀과 같고 그 영광이 풀의 꽃과 같음을 알기에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의 위로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 위로가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누가복음 2:25-35절입니다.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로서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합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았는데 죽기 전에 이스라엘의 위로인 그리스도를 보리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니 마치 아기 예수를 결례를 행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오는 것을 보고서 그 아기를 안고서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씀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그리스도를 봄으로 이제 죽는데 죽은 것이 아니라 참된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로를 우리가 좋아하고 기다리고 있기는 합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위로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분 나쁜 소식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34절에서 많은 사람의 패함과 흥함의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패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흥하게 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위로로 오신 분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고 합니다. 마리아의 고통이기도 하거니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에서 여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는 어떤 것입니까? 과연 저주 받은 이 세상에서 무엇이 위로입니까? 부자가 되고, 여유롭게 웃고, 모든 사람의 칭찬을 듣는 것이 위로이겠습니까? 아니면 가난하고, 울고,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욕을 얻어먹고 악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위로입니까? 전자는 이미 위로를 다 받았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6:20-26절을 봅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6:19-31절을 봅니다.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6:20-26절에 대한 일종의 예증과 같습니다. 나사로는 히브리어의 엘레아자르='하나님이 도우신다/도우셨다'를 그리스어화한 형태입니다. 이는 모든 가난한 사람을 대표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유대의 빈자-경건성의 의미에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하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가난이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자기에게는 어떠한 의가 없기에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 주님의 위로만 바라는 자입니다. 이러한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이 성도들이고 성령이 임한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위로를 원하십니까? 저주 받은 이 땅위에서 무엇이 진정한 위로가 되겠습니까? 주 예수의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쏟아질 저주를 대신 지신 그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참된 위로는 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성령이 임함으로 자신의 죄와 악함을 알기에 심령이 곤고한 사람, 자기의 자랑이 없고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 그래서 주님의 위로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더 이상 외모로 사람을 취급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기에 다른 것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의 위로나 세상의 자랑이나 세상의 썩어질 것들에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장차 나타날 영원한 위로와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4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의 때가 남아 있기에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이러한 안식과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다시는 저주가 없는 곳에서 모든 위로의 주님께서 그 눈의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20:17-27 사 명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바울사도가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이르기 위하여 서둘러 가는 중에 밀레도에서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부탁을 하는 내용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 사도가 가장 오랜 기간 활동한 교회입니다. 이제 바울사도가 다시는 에베소에 들리지 못할 것을 알고서 마지막 유언처럼 장로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은 사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다가 보면 세상에서 사는 것이 허무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왜 허무하게 여겨지는가 하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15-17절을 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쫓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의 본성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즉 선악과 따 먹고 난 이후의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이는 것이 이 세상이지만 그러나 이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안개요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세상이 허무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허무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의 사명을 말하기 전에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사명에 충성하여 이 세상이나 세상이 있는 것들이 더 나아지고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벌써 방향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잘 믿으면 땅에 속한 것들을 받는다고 간증들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를 잘하니 무병장수하고 만사형통하다는 식입니다. 교회가 선교를 잘하니 더 부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믿지 아니하고 예수님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하신 것들을 바라고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절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우리는 너무나 좁게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습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가지고서 늘 사용하는 것이 전도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개념도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거저 무슨 세상의 단체에 회원 모집하듯이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증인이라는 것은 자기 교회 교인 늘이기가 목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교회 증인이 되거나 자기교회 목사 증인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가 잘 되려면 교회도 자랑하고 목사도 자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어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자랑하고 예수님만 증거 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임하여 증인이 되는데 이것은 특정한 사람에 한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한 모든 자에게 모두 사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목사나 선교사처럼 다른 직업이 없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만의 사명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면 모든 사람이 다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직업을 가지고 일하든지, 어디에 종사하든지 무엇을 드러내는 것이 증인이겠습니까? 이 세상보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세상이 더 좋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영원한 것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전도를 하면서 땅에서 보이는 것을 약속하고 있다면 전도의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을 봅니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성도라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장막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 장막이란 우리의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탄식하며 새 몸을 덧입기를 원하는 자는 고린도후서 4:16절 말씀처럼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운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몸, 죽을 몸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것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생 땅만 바라보고 살았는지,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살았는지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다 전도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에서 바울사도가 전도한 내용을 다시 살펴봅시다. 20:17-21절을 우선 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고난과 핍박을 에베소 장로들이 다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을 말하면서 성도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공중 앞에서나 개인에게서나 무엇이나 다 전하여 가르쳤다고 합니다. 성도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비전이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를 전하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더 핵심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기들이 평소에 생각한 하나님이 아님을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모두가 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섬겼지만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이었습니다.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 것입니다. 그들이 신이라고 섬긴 것들이 모두 피조물인 것입니다. 썩어질 사람과 짐승과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꾼 것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들을 또는 가치관들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전부 우상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장님이었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죄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이 세상이 창조주를 몰라보고 죽여 버렸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서 주인이 세를 주었는데 세를 바치기는커녕 세를 받으러 보낸 종들을 죽이고 마지막에 아들까지 죽여 버린 자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진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전도가 이러한 죄의 지적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전도할 때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죽인 사람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사실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전도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전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과연 전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라고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합니까?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습니까? 이 세상의 부귀, 명예, 행복, 즐거움보다 예수님이 더 귀합니까? 이것이 전도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방향과 목표가 이렇게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짐 다 내려놓고 주님이 만드신 그 나라를 사모하고 소망합시다, 하는 전도가 되고 있습니까?
이런 전도가 좋습니까? 싫습니까? 믿음이 없으니 싫은 것입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약속을 믿는 것인데 그런 믿음은 없고 오직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니 얼마나 이런 전도가 싫겠습니까? 그러므로 제대로 전도하는 사도들에게 무엇이 따르는 것입니까? 환난과 핍박이 따르는 것입니다.
22-27절입니다. "봉독"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무슨 일을 만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증거하시기를 결박과 환난과 핍박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기에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복음을 증거 한 곳의 모든 사람들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도가 꺼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피하고 좋아하는 것만 전하자, 하는 것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성령이 임한 자이면 모두가 이러한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목숨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하여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허무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 대하여서는 허무하여 지더라도, 그러면 무엇을 하라는 말입니까? 라는 질문에는 대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되어서 자기 교회를 우상으로 만들어 예수님보다 자기가 속한 교회가 더 커보이도록 만들지 말고, 이 눈에 보이는 교회보다도 주님의 나라가 더 좋습니다,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 가지 직업에 종사하면서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더 잘 살아남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드신 나라만이 영원합니다, 하는 것이 전도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몫을 다 행하였습니다. 이제 이 복음의 소식을 지키는 것, 그것에 따라 살며 가감 없이 그것을 계속 전하는 것은 교회들의 몫입니다. 성령이 임한 모든 자의 몫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제는 허무하여지지 마시고 분명한 사명이 있음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보다 주님의 나라가 더 좋다는 것을 증거하시면서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면서 사는 것이 사명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에 관계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목숨보다 귀합니다.
사도행전 20:28-38 감독자
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3)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지난주와 연결된 분문입니다.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서 마지막 유언처럼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까?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명이란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아예 하나님을 몰랐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피조물로 바꾸어 버렸으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계시하셨지만 참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이 죄 아래 갇혀 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짓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여 증인이 되는 것이며, 또한 성령이 그 마음을 열어야만 복음을 받게 되는 것임을 사도행전을 통하여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우리의 힘과 노력과 의지적 결단으로 한다면 우리가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였기에 무언가 반대급부를 요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기에 생명에 관하여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참된 생명이 오셨으나 그 생명을 배척하여 버렸다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인간의 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를 모르기에 우리는 다만 나의 생존을 연장시키고, 확대하는 것만이 관심사였지 내가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상에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주 예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무엇이 일어나야 마땅한 것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이 일어나는 것이 바른 교회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란 하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로 모인 성도란 늘 최대의 관심사가 하나님의 피 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사람들이 돈을 내어서 만들어낸 건물이나 사람들의 조직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로 값을 주고 무엇을 사셨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란 성도가 교회입니다. 너무나 분명한 이 사실을 놓쳐버리면 사람들은 자기들의 피땀으로 만들어놓은 조직체를 더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정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왜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피와 땀이 배여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가정만이 아니라 회사나 또 다른 여러 가지 조직에 속하여 있다면 그 조직에 대한 충성도나 열의가 무엇과 비례합니까? 나의 피와 땀, 나의 헌신과 희생에 비례합니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얼마든지 세상의 다른 조직단체처럼 되어 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는 몰라도 우리교회는 잘 되어야 한다는 무조건적인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진리보다는 단지 내가 속하여 있다는 것으로 인하여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를 세상의 조직들처럼 만들고자 하는 의도들이 얼마든지 일어나는 것입니다.
화평교회 홈페이지에 '버리기 아까운 휴지통'이라는 글모음에서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이 세상은 어떤 조직이든 애써 부드러움과 웃음과 서비스를 가르친다. 친절과 인내와 온유를 가르치고 훈련시킨다. 그래야 조직이 인정받고 사람들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즉 찾아들게 하는 것이 각각의 조직이 모인 이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것은 살길이 되고 돈이 되는 것을 넘어서, 태초에 하나님을 떠나게 된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자아충족을 누리는 길이고 나의 존재가 드러나는 기쁨으로 인하여 살 맛 나게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애쓴 열매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인간이 불어나고 조직화될 때 얼마나 뿌듯할 것인가? 성장에 대한 탐심과 유혹은 개인으로 보나 조직으로 보나 끝없이 펼쳐진 미로이다."
교회도 사람이 모인 단체이기에 이러한 유혹에 얼마든지 빠지게 됩니다. 이런 유혹에 빠지게 되면 결국 설교와 교회의 초점이 교회자체의 존립으로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신랑을 기다라는 것이 아니라 신부가 자기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신랑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나르시스가 물에 비친 자기 미모에 빠져버리는 것처럼 자기 의와 자기 조직과 자기 교회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감독자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감독자를 세우시는 것은 무엇을 감독하라고 세우시겠습니까?
사도행전 20:28절을 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3)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감독자는 자기를 위하여 또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합니다. 삼가라는 것은 자기와 양떼를 위하여 잘 살피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어떤 사본에서는 주께서,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감독자란 교회가 하나님의 피, 즉 예수님의 피의 공로가 제대로 드러나고 있는가를 늘 살피고 감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헌금을 잘하나 안하나, 봉사를 잘하나 안하나, 목사에게 잘하나 안하나 하는 것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정말 사람의 피와 땀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피로 세워지는 것임을 목사 본인을 위하여서도 양떼들을 위하여서도 삼가 감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교회의 목사나 장로가 해야 할 마땅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목사가 개척을 하였다고 합시다. 자기가 돈을 들여서 건물도 마련하고 자기가 수고하고 애써서 개척을 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에게 이 교회가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것이니 당신의 권리는 없습니다, 하면 아멘 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는 그런 교회에 부목사가 와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것이기에 인간의 노력이나 땀이 아닙니다, 어느 누가 수고하고 애를 썼다고 하여도 그것은 종이 마땅히 해야 할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대로 몇몇 교인들이 모든 것을 다 마련하고서 목사를 청빙하였을 경우에 목사가 교인들의 입맛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문제로 교회들마다 싸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두가 무엇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마음도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피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33-35절을 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에베소 교회를 개척하고 3년 동안 밤낮 겸손과 눈물로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자기 손으로 일하면서 개척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수고하면서도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기에 이것을 본을 삼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저 자신에게 적용을 해야 되겠지요? 과연 내가 이렇게 수고하고 개척한 교회가 있다면 아무른 대가없이 후임자에게 오직 한 가지 부탁,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부탁하는 것만 하고 떠날 수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제 자신에게 숙제입니다. 언젠가 개척을 하게 될지, 아니면 이곳에서 얼마를 있을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정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정말 깨끗하게 주의 피만 증거하고 떠나게 되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저나 여러분이나 언제나 관심사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정말 피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피나 땀이 아니라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관심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조직은 여러 가지 상품을 소개합니다. 모든 조직들이 다 자기들 조직의 우월성을 자랑하고 그 조직을 키우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조직을 만들지 아니합니다. 아니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어떠한 노력을 다 합하여도 그것은 죽어야 하는 죄인이기에 예수님의 거룩한 피에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살피는 것이 감독자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오직 피의 능력에 의존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 저주와 진노뿐임을 아는 자들이 모임이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로 모인 사람들은 오직 한 가지 소원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데 관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 모이는가에 대한 관심도 없어야 합니다. 얼마나 구제를 잘하고 선교를 잘하는가도 전부 이차적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십자가 외에는 달리 관심이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의 백성 되는 그 소망과 그 기업과 그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처음부터 하나님의 피로 사셔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7-23절입니다. "봉독" 교회의 영광을 아시겠습니까?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 약속입니까? 이 엄청난 기업의 영광의 무엇 안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이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약속들이 땅의 것이 아니고,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는 자들, 이들이 바로 성령이 임한 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피가 보배임을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1)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여 은이나 금 같은 것으로 안 됩니다. 오직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됩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러한 보배로운 피의 능력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29-31절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떠나면 흉악한 이리들이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흉악한 이리가 외부에서만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서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 흉악한 이리란 양의 탈을 쓰고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 외에 다른 것에 관심 같게 하는 흉악한 이리들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자꾸만 피 외에 다른 것을 썩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상한 것들로. 신기한 것들로, 세상의 보암직한 것들로, 사람들이 다 흠모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으로 예수를 믿든지 아니 믿든지 모두 좋아할 만한 것들로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도 속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이것저것을 안다거나 무엇이 더 낫다거나 하는 조건들을 우리 스스로에게서 찾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뿐임을 아는 자들이라면 다른 말 할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32절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마지막 부탁이 주님과 은혜의 말씀께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를 든든히 세우고 기업이 있게 하시는 것은 말씀의 능력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그 피가 능력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1:1-14 주의 뜻대로
1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쌔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7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성령께서 교회에 감독자를 세우시는 것은 무엇을 감독하라고 세우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산 교회를 돌보라고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피,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이 제대로 증거되고 있는지를 감독하라는 것입니다. 그 피가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 능력인지를 사람들이 모르기에 자꾸만 자기들의 피와 땀을 섞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흉악한 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자기를 따르게 하는 자들이 나오기에 감독자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또 어떻게 부탁하는가 하면 20:32절에서 "주와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감독자에게만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은혜의 말씀에 메여있는가 아니면 특정한 사람에 메여있는가, 자기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부탁하고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들어가지 전에 먼저 정리를 하나 하고자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예배당에 모인 사람이라면 주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주님의 뜻을 알고자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을 알고서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기에 주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해 한용운의 ‘복종’이라는 시에서는 남들이 자유를 사랑하지만 자신은 복종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 복종하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복종하고 싶어서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더 달콤하기에 그것이 나의 행복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복종이 사랑하는 사람이든 사랑하는 조국이든 부처이든 간에 그 대상을 사랑하기에 복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님의 뜻을 알아서 그것을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요 행복이기에 주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뜻을 왜 알고자 합니까? 주님을 사랑하기에 스스로 복종하기 위하여 알기 원하십니까? 왜 이런 복잡한 질문을 처음부터 하는 것입니까? 그저 쉽게 주님의 뜻을 순종하면 만사형통하고, 주님의 뜻을 어기면 만사불통 하니 알아서들 하시오, 하면서 주님의 뜻이 무엇 무엇이니 이렇게 저렇게 순종하라고 하면 알아듣기가 쉽고, 적용도 쉽고, 열심을 낼 텐데 왜 그렇게 어렵게 시작을 합니까? 이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 복을 받고 모든 일들이 잘 풀려지는 것으로 들어왔습니다. 또 그런 것이 우리의 상식에도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풀리지 않고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이 겹치게 되면 무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여서 저렇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무슨 실패를 하면 교회 안에서 말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그런 고생을 하지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면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이 헛된 것임을 알도록 하루 아침에 날아가 버리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된 것이 실패가 아니고 오히려 성공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버려두신 경우는 그러한 어려움이 닥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에 보시면, 악인이 평생 형통하고 죽을 때도 고통도 없고 그의 후손들도 잘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평소의 기준대로 삶을 해석하지 말고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보고 듣고 믿는 것이 바른 신앙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관심사는 주님의 뜻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잘되는가에 관심이 있으니 주님의 뜻을 물어도 내가 어떻게 세상에서 잘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로문제, 결혼문제, 무슨 사업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려고 하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정말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기 위하여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손해나고 고생하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고생하고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들어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여서 일을 할 때 고생하지 않으려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 후자가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므로 고난이 닥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 마음 안에 이런 생각이 또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수고하고 고난당하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고, 인정하여주고, 순교자라고 기념하여 주고, 박수치는 그런 고난이라면 감당을 하겠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오해와 핍박과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이라면 과연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따라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가봅니다. 내가 주님의 뜻을 순종함으로 어떤 핍박과 조롱과 멸시가 오더라도, 오직 주님만 알아주시면 된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주님께서 알아주시지 아니하신다고 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 그럴 수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였다면 주님께서 알아주시고 상주시고 현세에서는 몰라도 내세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특별대우를 해 주어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런 반발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종이 당연히 할 것을 한 것 가지고 그것을 주인이 사례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 놓고서도 저는 단지 무익한 종입니다. 마땅히 종으로서 할 것을 한 것뿐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에 대한 주님의 대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주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주님의 뜻이라면 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말이 되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성경을 보는데도 사장이 보는 성경과 사원이 보는 성경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장이 보면, 종들아 상사들에게 주님께 하듯이 순복하라는 말씀이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하나님의 뜻이 이런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원들은 너희도 위에 상관이 있음을 기억하고 공갈을 그치라는 말씀이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편과 아내사이도 마찬가지이고 부모와 자식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자기중심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목사와 교인도 꼭 같이 적용을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각양 좋은 것을 함께 하라거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자를 배나 존경하라는 말씀을 목사가 강조하면, 교인들은 바울은 자비량하였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도대체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중간 중간 들리는 곳에서 다른 제자들이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면 잡혀서 이방인에게 넘겨질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기에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극구 만류합니다. 성령께서 미리 알게 하신 것은 그러한 고난을 피하라는 사인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오히려 그러한 길로 들어가라는 사인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주님의 뜻입니까?
21:4절과 10-11절을 봅니다. "봉독" 두로에서도 바울사도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말립니다. 돌레마이에 이르러 하루를 지내고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는데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수족을 잡아매고서는 이 띠 임자가 이렇게 결박되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울면서 만류를 합니다. 제발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친히 알려주신 것은 그것을 피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부러 죽으려고 그러느냐며 말리는 것입니다. 아직도 당신은 할일이 많은데 왜 그러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의 죽이려는 음모를 알고는 일부러 다른 길로 피하여 오기도 하였는데 왜 이제는 그렇게 죽는다는 곳으로 가는 것인가, 하고서 말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을 사랑하여서 말리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닥쳤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뜻이라면 바울 같은 전도자를 더 살리시고 능력도 더 베풀어서 더 많이 복음을 위하여 쓰임 받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사도는 무어라고 보는 것입니까? 예루살렘으로 가야하는 것은 자신도 알았지만 그러나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될 것까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체포를 당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그길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13절을 봅니다. "봉독" 왜 울면서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뿐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주님의 뜻이라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서 더 이상 만류하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잘하면 어려움이 없어지고, 안되는 일들이 잘 풀리고, 만사형통하다는 식의 생각들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뜻대로 가는 길인데 어렵고 고난당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조차도 장엄하게 모든 사람들이 추앙하는 가운데 영광스러운 죽음이아니라 멸시와 천대 속에서 비참하게 힘없이 그렇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영화 같은 곳에서나 순교자가 장엄하게 그려지지만 제자들이 순교하는 데는 그런 장엄한 모습이 없습니다. 그냥 조용하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뜻은 전혀 위축되거나 포기되지 아니하고 자신의 뜻을 완벽하게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십자가의 방법입니다. 세상의 영광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우리가 주님의 일을 위하여 충성하면 주님도 우리의 일을 멋지게 성공시켜 준다는 단체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다락방 운동’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전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좁은 문이며 좁은 길입니다. 넓은 문 넓은 길은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멸망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 태도로 주님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내가 주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주님을 사랑해서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뜻을 따라야만 세상에서 성공하고, 성공은 아니더라도 평안하고 형통하기 위하여 주님을 뜻을 묻고 따르려고 합니까? 이제부터 생각을 고쳐먹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자기가 잘못 하여서 욕을 얻어먹는 것을 핑계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편하고자, 어려움을 피하여 가고자 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갑시다.
사도행전 21:15-36 하나님이 하신 일
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22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23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 된것을 고하니라.
지난주 말씀에서 주님의 뜻과 나의 뜻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았습니다. 서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경을 동원하면서까지 자기주장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우리나라의 어떤 사람이 인터뷰를 하면서 아주 분노한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사람들의 머리위에 폭탄을 퍼부을 수 있는가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제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여러분도 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이기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사람에게 맡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홀로 하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항상 두 편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환영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하는 쪽에서도 무어라고 하면서 반대하는 것입니까? 자기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면서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면 붙잡혀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고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마땅히 가야하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미리 알게 하신 것은 피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 고난과 죽음의 길이라도 그 길로 가라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예루살렘에 와서 환영을 받습니다.
17-20절입니다. "봉독" 예루살렘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기꺼이 영접을 받습니다. 이튿날 야고보에게로 돌아가니 다른 장로들도 다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하신 일에 바울 자신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자신은 그저 심부름꾼으로서 시키는 대로 봉사하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행하신 일을 고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봉사가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의지를 가지고 개척하는 정신으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주 금요일 성경공부시간에 순종에 대하여 공부를 하였습니다. 자신의 뜻을 따라 개척하는 삶에서는 자신의 의지가 드러나는 것이지만 순종이란 하나님께서 개척하시고 자신은 그 뒤를 따라가기에 순종이 보이는 것이라는 공부를 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이 개척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개척하시는 일에 봉사한 것뿐이며, 이것은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특히 이방인들에게 하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바울사도가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를 듣고서 야고보와 장로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행하신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증거하는 바울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동일한 사건을 동일한 유대인들이 극명하게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사도행전의 앞부분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인하여 수많은 장벽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에서 사도들이 직접 목격한 사실을 보고함으로 야고보가 결론을 내립니다. 이방인에게 하나님께서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어떻게 우리가 막을 수 있는가 하면서 이방인들이 아무른 율법적인 조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유대 기독교인들과의 교제에서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자 이방인의 악습인 몇 가지만 피하게 하도록 합니다.
사도행전 21:25절에 보시면,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결의는 이미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 다른 짐을 지우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유대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율법에 열심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러 다니면서 사도행전 21:21절에 보시면, 바울이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바울이 예루살렘에 왔으니 이제 충돌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도들이 바울에게 유대인 중에 믿는 자가 수만 명이 되는데 그들이 다 율법에 열심이 있으니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자기들 중에 서원한 사람 네 명이 있으니 저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세계를 돌아다녔으니 부정하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머리를 깎고 한 주일을 결례기간으로 지나고 나서 성전에 가서 제사를 지내면 유대인들이 바울도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알면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제안을 합니다. 그러자 바울 사도가 그렇게 하기로 합니다.
여기서 바울사도가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율법의 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른다고 전하였으면서도 왜 이렇게 타협하는 것처럼 행동하는가 하는 것은 많은 쟁점이 있습니다만 바울이 원하는 바는 자기 동족들이 구원에 이른다면 자기가 버림을 받아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결례를 행하는 것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자들, 율법에 메여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사도행전 21:27-36절입니다. "봉독"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서는 무리들을 충동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로 다니면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 즉 성전을 훼방한다고 무리를 충동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성안에 있는 것을 보고서, 성전에도 이방인을 데리고 온 줄로 안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성전 밖으로 끌어내면서 성전 문을 곧 닫아 버립니다. 그리고 바울을 죽이고자 끌고 가니 온 성이 요란합니다. 그때에 로마군대의 천부장이 와서 바울을 잡아 결박하여 그들의 수비대 안으로 데려갑니다.
바울사도가 각처로 다니면서 하나님의 하신 일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일이 이방 가운데서 나타나 이방인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유대인들이 이렇게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민족적 선민의식입니다. 특히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에 들어간 시기는 주후 57년입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가 등극한 것은 주후 54년입니다. 이 당시에 유대인들의 민족주의 정신이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를 물리치고자 하는 민족적 단체들이 생긴 것입니다. 열심당들입니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로마를 반항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자객의 역할도 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유대인들은 반 유대적인 사상들을 철저하게 배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유대인들의 목숨과도 같은 전통들을 다 무너뜨리니 가만히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전통이 무엇입니까? 선택받은 민족이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가지고 있으면, 율법을 가지고 있으며, 율법에 따라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는 자부심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보면 완전히 매국노요 하나님의 적으로 여겨서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그 시대적인 상황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도 사람들은 본성상 하나님이 하신 일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죄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은혜로 받지 아니하는 것이 죄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하신 일을 잊어버리면 그것이 죄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함은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주지 않고 드러낸 것입니다.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시는 중에 거듭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지 3일 만에 물이 없다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큰 구원을 보고서도, 너희는 가만히 서서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홍해가 갈라지고 그들은 육지처럼 건너게 되었는지 추격하던 애굽의 군대는 물에 빠져 죽었는지를 목격하고서도 3일 만에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행한 일은 커 보이고 남이 행한 일은 적게 보이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든지 칭찬 듣는 일이 아니라 욕을 듣는 자리는 언제나 자신은 작은 잘못이 있고 다른 사람이 큰 잘못을 했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것입니까?
에덴동산으로 가봅시다. 인간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모든 것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 안에서 사는 모든 것이 전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으로 그 은혜를 버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겠다고 독립 선언한 것입니다. 이후로부터 인간은 그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 결과 누구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고자 하는 것도 남에게 꿀리지 않게, 기죽지 않게,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기 위하여 하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이 신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미 만 가지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모두가 빚진 자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모르고 받지도 아니하려는 태도가 세상은 팽배합니다. 무엇을 받아도 당당한 자세로 나의 노력과 공로로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의 자존심이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자기의 의로 삼았기에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힘써 거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상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여야 자기가 불쌍한 죄인임을 알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사도가 주님을 만남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이러한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크신 일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어떻게 주장합니까? 이방인들이 아무른 율법의 조건 없이 의롭다함을 받는다면 하나님을 불의하게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께 대하여 불충실하게 된다고 반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만 증거하게 되면 늘 받는 질문이 그러면 사람들이 자기들 편한대로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19-26절입니다. "봉독"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자신도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자도 의롭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피로 인한 화목제물이며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자랑할 수가 없고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2:1-23 변 명
1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2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4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12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1)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줄 저희도 아나이다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22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23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사람들에게 잡혀서 죽기 직전에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건짐을 받습니다.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로마군대에 의하여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로마군대는 무슨 소요가 일어난 줄 알고 바울을 체포하였으나 그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섭리하신 것입니다.
23:11절에 보시면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 대하여 담대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의 뜻대로 돌아가고, 그로 인하여 모든 것이 통일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군대에 체포되어 그들의 수비대 안으로 데려가는 중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말할 기회를 달라고 하자 허락을 합니다. 그래서 수비대로 가는 계단위에 서서 히브리말로 자기 말을 들어보라고 합니다. 1절에서 자기의 변명을 들어보라고 합니다. 자기가 이렇게 복음을 증거하게 된 까닭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변호이기도 하고, 자기의 간증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를 그의 동족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사도행전 9장에서 일어난 내용입니다.
오늘 바울의 변명에서 자신의 간증이기도 한 회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기를 자랑하거나 우월하다는 것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수많은 간증을 들어보았습니다만 간증을 듣고 나면 대부분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다르게 보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말하여도 결국 자기 자신이 드러나고 결국은 이렇게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받았다는 은혜란 실패에서 성공으로, 가난에서 부자로, 질병에서 건강으로 무언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간증에 귀를 기울입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까? 하면서 그 방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였다면 기도를 하고, 금식을 하였다면 금식을 하고, 헌금을 하였다면 헌금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도 간증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많은 간증을 들으면서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지금은 내가 저 간증을 듣고 있지만 그러나 앞으로는 내가 저런 간증의 주인공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변명, 바울의 회심체험기, 바울의 간증을 다 듣지도 아니하고서 듣다가 중간에 나오는 반응이 어떻습니까?
22:22-23절입니다. "22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23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다 듣지도 아니하고 이런 놈은 살려두면 안되겠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간증을 하였길래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까?
다시 1절을 봅니다. 부형들아 들어라, 이렇게 시작합니다. 자기들의 아버지요 형제들이라고 호칭을 하면서 변명을 합니다. 자신이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율법에 열심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지금 자신이 전하는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까지 죽이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자기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 열심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다메섹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조차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노상에서 대낮에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멀게 되고, 다른 사람에 손에 끌려가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안수하여 눈을 뜨면서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사도가 이 말을 증거하면서 어떤 자세로 하겠습니까? 자기가 알고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그 유대인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나도 전에는 그러하였습니다. 여러분처럼 하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그 예수가 그리스도였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자기 동족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긍휼의 마음으로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을 살려둘 놈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째로, 지금 유대인들이 이 도 전하는 것을 핍박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화나는 일입니까? 로마서 10:3절입니다. "봉독"
두 번째로는,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이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드디어 바울을 죽일 놈이라고 하면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모든 기득권으로 여긴 것이 다 사라집니다. 서열파괴!
이제 여기에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을 다 가지고 태어납니다. 범죄 한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이 다 동일하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태어난 인간은 자기의 문화와 환경에서 자라나면서 여러 가지를 배웁니다. 그러다가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형성됩니다. 이제부터 자기들이 옳다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이 옳다는 생각 속에 가장 큰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사람이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할 수 있어! 무엇이나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어! 그래서 노력하였더니 놀랄만한 업적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과학도 발달하고, 우주도 개척을 하고,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천국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선을 행하기란 전혀 가능성이 없고, 그저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악한 것밖에 없다는 것을 누가 인정하겠습니까? 자기는 신을 위한다고, 선한 일이라고, 착한 일이라고, 옳은 일이라고 열심과 충성을 다하였는데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이 성경의 평가를 여러분이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사람이 가끔씩 악한 생각도 하고 나쁜 생각도 하지만 그래도 착한 사람이 많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있으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이미 인간의 가능성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우리가 좋은 세상 만들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을 믿든지 무슨 종교를 가지더라도 내가 어느 정도는 해야지 신도 반응을 보여서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대표적인 속담이 무엇입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열심히 고기잡이를 하고 있을 때 불렀고, 세리도 세무서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 불렀고, 삭개오도 뽕나무에 올라갔을 때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평소에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였기에 그 열심을 보시고 부르셨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가던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 마음속이라도 예수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었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얼마나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니던 사람이 오히려 그 예수님께 붙잡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도 선행도 예수 믿고 구원 얻는 일에 보탬이 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것입니다. 포로로 잡힌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은 듣기 싫은 이야기입니다. 모든 인간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반발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속에서 일어나는 갈등도 자존심 싸움입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서로의 자존심 싸움입니다. 그 안에는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이익들을 챙기기지만 끝까지 전쟁해보자는 것은 자기의 자존심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다 구겨지는 일입니다. 얼마나 못난 인간이면 다른 분을 믿어야 합니까? 그 정도로 못난 사람이어야 예수를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똑같이 성경공부하고 나와서도 모두가 다른 이야기합니다. 서로 말씀을 잘 깨달았다는 것으로 또 싸우는 것입니다. 서로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것으로 또 자기 변호합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자기변명과 자기변호에 열심입니다.
때로는 얼마나 자기가 엉망으로 살았는가를 경쟁하기도 합니다. 전과 3범이었는데 극적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하면, 나는 전과 5범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한 일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것도 가지고 나는 이만큼이나 잘못하였다는 것으로 또 자기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변명하지 아니합니다. 그저 주님의 은혜만 증거할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4:6-7절입니다.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우리가 언제부터 복음을 들었습니까? 날 때부터 가지고 나왔습니까? 아니면 다른 교회 교인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지만 우리교회 교인들은 다 똑똑하여서 잘 알아들었습니까? 도대체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도 주님께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땅이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인데 자기들 마음대로 사고파는 것입니다. 주인을 몰라보고 주인의 은혜를 몰라보니 우리는 자기변명에만 빠릅니다. 바울에게서 배운 자들이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는 일들이 일어나는 고린도 교회가 우리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았다는 것을 제대로 아신다면 그 은혜를 주신 주님만 자랑하고 증거 할 뿐입니다.
사도행전 23:1-11 담대하라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1)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ㄱ)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훤화가 일어날쌔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하여 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 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사도가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사람들에게 간증을 하는 중에 그 말을 듣던 유대인들이 저런 놈을 살려 둘 수 없다고 하면서 달려들어 잡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로마군의 수비대가 나와서 바울을 체포하여 들어갑니다. 그러자 천부장이 바울을 묶어서 치라고 합니다. 이때 바울사도가 로마 시민을 죄도 묻지 아니하고 치느냐고 하자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여기서 바울사도가 복음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가는 중에 자기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으로 자기의 위험을 벗어나려고 하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그러한 구차한 말하지 말고 대담하게 죽이려면 죽여라, 하고서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결단과 용맹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무모하게 만용을 부리지도 아니합니다. 경상도식으로 됐나? 됐다는 식으로 일을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삶의 방향과 목표가 자기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인이 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과 바울의 싸움이 이것입니다. 나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이었는데 주님을 만나보니,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한다는 그 열심이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도 도대체 무엇이 목표로 설정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언제나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말과 생각과 행위가 나를 증거하는 쪽으로 나가는가? 주님을 증거하는 쪽으로 나가는가를 말씀으로 비추어보면 언제나 나를 변명하고 나를 변호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보면 자기를 변호하고 변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지만 그것을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절을 봅니다. 바울이 공회 앞에서 자신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을 하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이란 언제나 두세 증인의 증거로 죄를 확정짓고서 벌을 주는 것인데 죄를 묻지도 아니하고 치라고 하는 교권을 공격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을 합니다. 그러자 곁은 사람들이 저 사람은 대제사장이라고 하자 자기가 대제사장인줄 모르고 욕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무서워서 사과한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하면 백성의 관원을 비방하지 말라고 하였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율법에 얼마나 정확하며 율법에 열심이 있었던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가지고 판단한다고 앉아있는 너희들이 율법을 자기 입맛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한 부분은 바리새인이요 한 부분은 사도개인들인 것을 보고서 자기는 바리새파라고 합니다.
바리새파는 부활도 영도 천사도 다 믿지만 사도개인들은 다 믿지 아니합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갑자기 바울 편을 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을 죽이려고 하다가 사두개파를 견제할 기회로 잡았는지 바울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나섭니다. 그러자 이 둘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 서로 밀고 당기고 하면서 바울이 찢겨질 지경에 이릅니다. 그러자 천부장이 군사를 명하여 무리 가운데서 바울을 빼앗아 그들의 수비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이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십니다.
11절을 봅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이런 상황에서 주님께서 담대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죽음의 위협이 있고 체포되고 갇혀 있지만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증거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거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사도행전 19:21절에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그러므로 바울이 이렇게 체포되는 일이 결국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담대하라고 하시는 그 뜻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셔서 담대하라고 하시면서 무엇을 주었습니까? 로마 황제의 친필사인을 준 것이 아닙니다. 김두한은 이승만 박사의 사인 한 장 들고 부자들에게 애국성금 내어 놓으라고 하는데, 주님은 그러한 사인 한 장 주시지도 않으시고 그냥 담대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여기에서만이 아니라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비록 체포가 되었지만 바울이 로마에까지 복음을 증거하여야 되는 주님의 뜻이 가장 안전하게 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한 유대인이 40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죽일 기회를 얻기 위하여 천부장에게 다시 심리를 하라고 요청한다는 정보를 바울의 조카가 듣고서 바울에게 알리고 천부장에게 알려집니다.
그러자 천부장이 가이사랴에 있는 유대의 총독인 벨릭스에게 보내기 위하여 군인을 보명 200명, 마병 70명, 창병 200명, 무려 470명을 죄수 하나 호송하기 위하여 동원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의 황제에게 송사를 하였기에 결국 로마까지 죄수로 체포되어 갑니다만 그 당시의 여행은 여러 가지 위협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까지 가는 길이 비록 죄수로 체포되어 가는 형식이지만 가장 안전하게 로마에까지 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모든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고, 못하실 것이 없으신 분인 줄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환난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하면 주님께 그 문제를 해결하여 달라고 메어 달립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주든가, 아니면 돈을 주시든가, 그도 아니면,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켜주시든가 하시면 쉬울 텐데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무어라고 하십니까? 내가 너하고 함께 있으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로가 됩니까?
여호수아를 봅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나안을 정복하여야 합니다.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럴 때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여호수아 1:1-9절을 봅니다. "봉독" 6절, 7절, 9절에서 거듭 무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습니까? 모세의 종으로서 있을 때는 모세가 있으니 든든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그동안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하던 행위를 다 보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이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들이겠는가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 번이나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도 여호수아에게 우리가 모세를 청종한 것처럼 당신의 말도 청종하겠으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17-1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시면서 무엇을 주셨습니까? 가나안을 정복할 첨단 정밀 무기를 주셨습니까? 기관총을 주시든지, 탱크를 주시든지, 아니면 델타포스 요원들이나 공수 특전단을 보내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무엇만 주시는 것입니까? 여호수아 1:5절입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성도에게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살아가면서 무엇을 주셨으면 가장 좋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솔직하여 봅시다. 돈만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할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도 돈만 많으면 외국으로 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전쟁의 소문이 들리고, 경기가 어렵다고 아우성인 이런 세상에서 주님께서 "내가 너하고 함께 하마 그러니 담대하라" 이것이 위로가 됩니까? 그저 공중에 뜬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 입니까? 위로가 되지 않고 그저 공중에 뜬 이야기처럼 들리는 사람이라면 아직도 무엇이 제대로 필요한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가까운 이야기를 해봅니다. 백경미 집사가 지금 어려움 가운데 있는 것을 여러분이 이미 아십니다. 남편은 팔을 수술하여 입원하여 있고, 집사님이 교통사고를 내어서 환자가 심각한 상태에 입원하여 있습니다. 이럴 때 무엇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마하시는 이 말씀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남편도 몇 일만에 퇴원하고, 교통사고로 다친 사람이 기적적으로 일어나고, 아니면 유능한 변호사나 돈 많은 사람이 나타나서 내가 다 해결 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는 것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늘 후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아무것도 해결하여 주시지 아니하시고 내가 너와 함께 하마, 이렇게 하시는 것이 정말 위로가 되는지 안 되는지는 집사님 혼자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창원병원에서 세광병원으로 차를 타고 오면서 제가 벚꽃이 보이는가 하면서 물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벚꽃이 피는데 벚꽃놀이는 언제 갈까? 하다가 어려움이 닥치니 벚꽃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외에는 달리 바라볼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4절입니다.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러 가지 시험이 옵니다. 이것은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시련이 오고 환난이 오는 것을 누가 기쁘게 여기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는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환난을 통하여 보아야 할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벚꽃은 보이지 않아도 주님이 함께 하심은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을 통하여 인내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 인내를 훈련하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인내를 통하여 우리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이 반드시 닥치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주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기신 것입니까? 죽으심으로 이기신 것입니다. 그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심의 자리까지 가셔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세상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도 환난당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그 환난을 단번에 없애주시는 방식으로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방식으로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려움에 처하고 환난 중에 있을 때 여러분 가까이 누가 함께 하고 있습디까? 가난과 질병과 환난을 당하고 있을 때 끝까지 곁에 함께 있어 주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혹시 가족이 친구가 함께 있어 줄 수 있습니다. 똥, 오줌을 갈아주면서까지, 죽을 때까지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식에게 부모에게 헌신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죽고 나서도 함께 하겠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랜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어렵고 힘들 때 곁에 사람이 떠납니다. 모든 형편이 좋을 때는 오지 말라고 하여도 오지만 어려울 때는 오라고 해도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8:7절에서 참된 금식이란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의 자리에까지 무덤에 묻히시기까지 하신 주님의 함께 하심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담대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우리가 평소에 형편이 좋을 때는 의지하지 않습니다. 찾지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여러 가지 시련이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련이 오는 것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환난이 올수록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고린도후서 1:8-11절입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을 더욱 의지 하도록 환난이 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19절입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1)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환난을 당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에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 받는 자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 받는 자들은 무엇을 주님께 부탁하겠습니까? 그 영혼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을 때는 영혼에 관심이 없는데 고난 가운데서 그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환난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환난이 오지 않으면 자꾸만 엉뚱한 것을 구하고 찾습니다. 그러나 환난이 닥치면 우리에게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를 제대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만 의지하게 되고 위로도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담대하라, 위로하시는 주님은 세상의 그 어떤 환난과 핍박과 권세와 죽음과 현재와 장래의 모든 일에까지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31-39절을 봅니다. "봉독" 주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어려움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당하지 아니하는 고난도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난과 시련들이 결단코 그리스도의 사랑,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이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한다는 이것이 힘이요 위로가 되셔서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24:1-9 염 병
1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2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3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하옵나이다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6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7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8 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지금 세상에는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끝은 아닙니다. 끝은 아니지만 끝을 예고하는 사인이기에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있어야 할 사인입니다. 그 끝은 천국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되면 그제야 끝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들리는 것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눈에 보이는 이런 세상이 아님을 알라는 사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나는 여전히 내 사는 방식대로 살겠다고 고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 끝을 알고 준비하며 깨어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살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의 난리의 소문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전쟁이고 하나는 사스입니다. 병명이 밝혀지기 전에 이 병을 괴질이라고 하였습니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전염이 되고 사람들이 죽어가니 괴질이라고 하였으나 이제 밝혀져서 사스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적인 타격이 전쟁보다 이 전염병이 더 심각하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온 힘을 기울여서 사스를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공항마다 검색을 강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에서도 염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울을 보고서 염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스를 막아 내듯이 막아 내어야 할 염병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바울이 무엇을 증거하였기에 염병이라고 하는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지경에 로마의 수비대에 의하여 구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계속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하자 천부장이 가이사랴에 있는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보냅니다. 무려 470명의 군인으로 하여금 바울을 가이사랴까지 갑니다. 벨릭스 총독에게 천부장이 바울을 보내는 이유를 편지로 써서 보냅니다.
사도행전 23:23-30절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변사 더둘로를 데리고 바울을 고소하기 위하여 가이사랴에 왔습니다. 이 당시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와 로마인 역사가 타키투스에 의하면 아나니아 대제사장은 매우 교활하고 거만하며 성직을 이용하여 축재를 한 부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자리도 자객을 보내서 전임 대제사장을 암살하고 차지한 그런 사람이기에 경멸받아야 마땅한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벨릭스는 노예출신으로서 총독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로마의 역사상 가장 타락한 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와 정치권력이 가장 타락한 자들에 의하여 바울사도가 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벨릭스 총독 앞에서 송사를 합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데리고 온 변사 더둘로가 온갖 아첨을 다하면서 벨릭스 앞에 바울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 아첨의 말이 3절입니다. "봉독" 유대인들의 자존심이란 목숨과 맞바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처단하기 위하여서는 온갖 아부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을 고소하는 전체적인 제목이 염병이라고 합니다. 왜 염병인가 하는 것은 세 가지 죄목으로 고소하는 것입니다. 이 고소가 사실로 입증이 되면 로마의 형법으로도 처벌을 받아야 할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세 가지는 5-6절입니다. "봉독" 1) 바울은 전 세계적으로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국가권력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게 했다(16:19-21; 17:6-7; 18:12-13 참조. 눅 23:2에 기술된 예수의 고소와도 상응한다). 2) 바울은 나사렛 이단 종파의 괴수이다(나사렛 종파는 일찍이 그들의 창설자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위험한 존재이다). 3) 바울은 성전을 더럽히려고 시도한 죄를 저질렀다(21:27-29, 로마인들은 스스로 성전 보호 세력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러한 범법 행위도 역시 재판에 회부했다)-독일성서공회 주석. 이러한 목록으로 고소를 하자 여기에 참가한 유대인들도 다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고소에 대하여 바울사도가 대답을 합니다. 10-23절입니다. "봉독" 그들의 고소가 증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벨릭스가 재판을 연기하여 버립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내용은 왜 바울을 염병이라고 고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바울이 증거한 복음을 듣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염병에 전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이 복음을 싫어하는 것입니까? 말 그대로 복된 소식이요 기쁜 소식이 염병처럼 들리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더둘로의 송사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 없어도 평안하게 잘 살고 있는데 왜 갑자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 예수, 나사렛 이단의 괴수를 메시아라고 증거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안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온 천하를 소란스럽게 하고,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이런 놈을 살려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종교에 도움도 안 되고 국가에도 도움이 안 되기에 염병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에 정말 좋은 소식으로 들립니까? 아니면 염병의 소식으로 들리는 것입니까? 변질된 복음은 사람들에게 좋게 들립니다. 신이 우리를 도와준다는 것을 다 좋아합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질서를 더 안전하고 평안하게 해주고, 내 삶의 목표, 내 자아의 실현을 더 잘 도와주는 신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하고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종교성입니다.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종교가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그래서 호국불교가 나오고 호국 기독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 안정과 발전을 주는 그런 종교라면 환영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도 하실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들을 때나 하실 때에 예수 믿으면 어떻게 된다고 듣고 말하십니까? 예수 믿으면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하십니까? 그리고 또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우리가 다 외우다시피 하는 요한복음 13:6절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한 부분만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믿기만 하라, 그러면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은 은근히 감추고 있습니까? 믿지 아니하면 멸망이라는 이야기는 감추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멸망이니 심판이니 이러한 말들을 좋아하지 아니합니다. 그렇다고 멸망과 심판의 이야기가 없다면 반쪽입니다. 반쪽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는 왜 멸망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하게 들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범죄하고 나서의 본성이란 자기 보호본능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삶의 목표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죄를 범하고 나니 주님은 간곳없고 자신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어서 그 어떤 신이라도 나의 생존과 번영과 영생을 주어야 좋은 신으로 대접하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살고 있는 인생들에게 주인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가 싫은 것입니다.
더더구나 우리의 욕심과 죄가 그 주인을 죽여 버렸다는 사실이 증거되어야 이 세상이 왜 심판의 대상인지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제대로 증거되면 반드시 염병이라고 막아야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습니까? 자기를 그저 예뻐하고 긍정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종이 되고자 하겠습니까? 더 잘살고 멋있게 살고 싶은데 그렇게 안 되니 죽고 싶은 심정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하여 봅시다. 복음이 정말 좋습니까? 아니면 염병으로 들립니까?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였으면 복음이란 염병으로 들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 어느 한 구절인들 우리의 본성에 좋아할 만한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좋아한다는 말씀도 그 앞뒤를 함께 보면 결코 좋아할 그런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얼마나 싫었으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그를 증거하는 사도들을 죽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이 염병으로 들리지 아니하고 복음으로 들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이 세상이 심판아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요한복음 3장 16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이 전제가 되어 있습니까? 멸망이 전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 함으로 멸망 받아야 마땅함이 노아 홍수로 소돔과 고모라의 성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드러내신 것입니다. 홍수 속에서, 소돔과 고모라 속에서 노아와 롯이 염병이었습니다. 그 살기 좋은 곳이 멸망이라니요!
누가복음 20:9-18절입니다. "봉독" 자기 아들이 죽임을 당하였다면 이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그 비유를 들은 사람들이 16절입니다. 진멸할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은 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하는 말씀이 성취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19절에 보시면 자기들에게 말하는 것인 줄 알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잡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런 세상임을 알고 하나님의 진노와 그 멸망을 아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이 진멸당하여야 마땅하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나의 죄를 인한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그야말로 이 세상에 그 어떤 소식보다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재미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란 염병인 것입니다. 전염되지 아니하도록 철저하게 차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멸망 받을 세상에서 주의 구원을 사모하고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봄이 되었으니 새 옷도 장만하고, 집안 분위기도 바꾸어 보는 것으로 관심이 있습니까? 성도란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구하고 찾는 것들과 다른 것을 찾고 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염병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마땅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말만 많고, 이기적이고, 세상에 더 악착같다는 것으로 인하여 염병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세상과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른 세계를 말하는 모습으로서의 염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디도서 2:11-14절을 봅니다.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복스러운 소망 때문에 염병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그 염병에 전염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영광의 자리입니까? 이 소돔과 고모라 속에서!
사도행전 24:21-27 부활에 대하여
21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 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3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24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27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바울사도가 고소를 당하였습니다. 고소의 타이틀을 염병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죄목은 세 가지로서 천하에 있는 유대인들을 소요케 하고, 나사렛 이단의 괴수인 예수를 전하고, 성전을 헤치려는 자라고 고발을 합니다. 이러한 고발에 대하여 바울은 전부 부인합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 간지 12일밖에 되지 않았고 성전이나 회당이나 성읍에서 아무른 소동을 일으킨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증거가 있다면 증인을 세워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정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에 대한 증거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14-15절입니다. "봉독"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의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나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21절도 봅니다. "봉독"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였기에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 변명에서 바울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유대인의 방식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도, 즉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과 선지자의 기록된 모든 것을 믿는데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가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라고 증거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분명히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물론 사두개파는 믿지 아니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성경대로 믿고 산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다 믿었는데 왜 바울이 전하는 부활의 이야기를 인하여 이렇게 죽이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부활의 이야기는 예수님 중심입니다. 그래서 싫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계셔서 일하고 계신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 증거가 자기처럼 예수를 핍박하는 자를 회개시켜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예수의 증인이 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한다고 핍박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는 단지 한때 잠시 나타나 사람들을 미혹시킨 이단으로서 무덤 속에 꽁꽁 묻어두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사망이 잡아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증거한 것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경대로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증거한 것은 부활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증거한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서 일하시고 계시는 주님을 증거한 것입니다.
오늘 카톨릭이나 개신교나 간에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춘분이 지나고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자는 것은 성경에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4세기경에 교회에서 정한 것입니다. 그 이전에 부활의 절기를 지켰다는 증거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4세기 이후로 교회 안에 정착이 되기 시작한 부활절이 부활의 주님이 증거되기보다는 이방의 축제들이 더 성행하게 된 것입니다. 부활절 전야는 잠을 자지 말고 촛불을 켜고 깨어 있을 것, 그리고 양초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다섯 곳의 상처를 기념한다면서 다섯 조각의 향나무 조각을 넣어서 초를 만들기도 하였답니다. 기독교가 일찍 들어간 나라들은 부활절 축제가 요란합니다.
영어로 Easter Day라고 하는데 이것은 봄과 새벽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봄에 만물이 소생한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겨울에 죽었던 것처럼 보이는 대지가 새싹이 나오는 것과 부활의 개념을 함께 섞어 놓고서 축제를 벌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활절 토끼가 나오고 부활절 계산이 나온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사라지고 이상안 축제들만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성탄절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마구간에 오신 예수님은 사라지고 온갖 이방 축제로 변하여 버린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어느 백화점에서 부활절 계란을 크게 만들어 놓고서 그곳에 그림을 그리게 하는 이벤트를 마련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부활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이 있으려면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활이 두 종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4:15절처럼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21-29절입니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2)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29절에서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이요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여기서 선한 일과 악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5:24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이며, 그에게 모든 권세가 주어졌음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원하는 자를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왜 사람의 선행과 악행에 따라 영생과 영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닌 것으로 결정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미 죄로 인하여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리 움직여도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죽은 자가 뒤척거릴수록 썩은 냄새만 진동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지 않고서 행하는 모든 선한고 아름다운 일이라도 주님께는 악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죄인이기에 아무리 내 스스로 선하고 옳은 일을 많이 하여도 죽어서 지옥가야 마땅한 죄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하고 옳다고 고집하며 행한 그 일이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결과가 나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자가 스스로 의롭게 살고자 한 최종적인 모습이 십자가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인정하며 예수를 믿는 것이란 사람의 노력이나 애씀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인하여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참예하는 자는 그 죽으심에 참예하는 자입니다. 그 죽으심에 참예하지 않고서 부활은 없는 것입니다. 그 죽으심의 참예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우리 안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살과 나의 피, 나의 혈육의 노력으로는 영생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52-58절입니다. "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보시면서 그들이 따라 온 것은 먹고 배불러서 따라 온 것이지 표적을 보고서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적이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아니하는 양식을 위하려 일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하고 묻습니다. 영생의 양식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요한복음 6:2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하신 것입니까? 자신의 살과 피를 자기 백성들에게 주심으로 그 살과 피를 먹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6-17절입니다. "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잔과 떡을 떼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피 받아 한 몸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예 되어야 부활에도 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주님 오실 때까지 이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23-27절입니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1)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1)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이것이 성만찬으로 우리가 성례라고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기가 아닙니다. 성도가 모일 때마다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일 년에 한두 번 행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예식으로서의 의미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살 찢으심과 피 흘리심이 무슨 의미인지 모일 때 마다 성찬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는 것이 성찬식인 것입니다.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이 영생의 양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틈이 나면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시간이 있으면, 여유가 있으면 그때 이런 이야기를 듣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사도행전 24:24-27절입니다. "봉독" 벨릭스가 바울을 불러서 자기 아내와 함께 바울의 설교를 듣습니다.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하여 듣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고 최후의 심판도 증거한 것입니다. 그래서 벨릭스도 유대의 총독이고 그의 아내도 유대 여자입니다. 그러니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무어라고 합니까? 틈이 나면 듣겠다고 하면서 미루어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을 자주 불러내어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울이 돈을 낼까 하여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려 2년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지 아니합니까? 그렇게 돈을 바라다가 돈과 함께 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의와 심판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악인의 부활과 의인의 부활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천천히, 틈나면, 나중에 믿으시겠습니까? 오늘 밤에 내 영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도행전 25:13-22 우선순위(優先順位)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어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저희가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 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 뿐이라 20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가로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우선순위로 정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마 중요하고 급한 것을 일순위로 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요하고 급하다는 기준이 누구의 기준입니까? 나의 기준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의 기준입니까? 당연히 주님께서 중요하고 급하다고 하시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은 하지만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지금 예배시간입니다. 이 예배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아마 이 예배시간에 오지 않았을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결석하신 분들에게 전화를 해보면 여러 가지 사정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여러 가지 사정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다음에 드려도 되고, 말씀도 다음에 들으면 되지만 그러나 이것은 우리 집안에 평생에 한번 있는 일이기에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18-22절을 봅니다.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 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는다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런데 아버지 장사를 지내고 오겠다는 것을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일을 죽은 자의 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혼식이든, 돌이든, 회갑이든, 장례이든 간에 생명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가장 기본이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약속의 세계를 믿는 것인데도 우리는 늘 마귀에게 속고, 자기 욕심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우선순위가 아직도 정하여지지 않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꼭 누구와 같습니까? 지난주에 본 벨릭스와 같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24:25절을 봅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그런데 이 벨릭스가 무려 2년이나 바울을 연금시켜 두었지만 그 틈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교체됩니다.
벨릭스 총독 다음으로 부임하여 온 사람이 베스도입니다. 이 사람이 가이사랴 총독으로 부임하였다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부임행차이겠지요.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베스도에게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겠다는 사람이 40명이나 되었는데 아직 살아있는지 모르지만 바울을 죽이려고 지금 새로 부임한 총독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스도가 자기가 가이사랴에 곧 내려가니 그곳에 와서 송사하라고 합니다.
드디어 가이사랴에 돌아온 베스도가 바로 다음날 재판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송사하는 자들이 여러 가지 송사를 하지만 그러나 형벌을 줄만한 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스도가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9절)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겠는가, 하면서 바울에게 묻습니다. 바울사도가 자기는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것이 없으니 그들에게 재판을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입니다. 베스도도 유대인의 민심을 고려하여 바울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주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시민권이 있으므로 로마의 법대로 상소를 하니 베스도가 어쩔 수 없이 가이사에 보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것은 단지 자기의 목숨을 유대인들에게서 구하고자 함이 목적이 아니라 사도행전 23:11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가 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러는 중에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가이사랴의 베스도에게 옵니다.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아그립바 왕에게 보고합니다. 그 보고의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보고를 하면서 무어라고 합니까? 자기가 예루살렘에 갔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바울을 죽여야 할 놈이라고 하여 무슨 흉악한 범죄를 하였는지 알아보려고 심문을 하여 보니 자신이 짐작한 악행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24-25절입니다.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저가 1)황제에게 호소한고로 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 베스도 총독이 심문하여 본 결과 무엇 때문에 잡혀왔는가 보니 그들의 종교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각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9절을 봅니다.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한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한 것 뿐이라" 어떻게 들립니까? 별것 아닌 것 가지고 그렇게 요란을 떨고 있었다는 식입니다. 정말 로마를 반역하거나 하는 의도가 있었다면 아주 심각하게 처리하여야 할 문제이지만 단지 예수라는 자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런 이야기는 그저 광신도들이나 하는 정신 나간 이야기 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자기도 예수에 대하여 들었으니 바울을 불러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그러자 베스도가 내일 듣자고 합니다(22).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면 내일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자기들의 왕의 직분과 총독의 직분과 직결된 문제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자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런 시시한 이야기는 나중에 들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과연 예수님의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 소식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그런 이야기는 단지 1년에 한번 부활절에만 듣는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날마다 가장 중요한 소식으로 들리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사신 것하고 내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과연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2주전의 극동방송이나 기독교방송을 들으면 대부분의 내용이 고난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악도 평소와는 달리 장중하고 무거운 음악이 방송되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절과 함께 밝고 경쾌한 음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1년에 한번 고난을 생각하고 부활절 지킴으로 고난이 끝나버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부활과 함께 우리의 경제가 부활이 되고, 우리의 무엇이 새로워지고 등등의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하시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시고 본격적으로 십자가로 밀어 넣으시는 것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베드로전서 4:12-14절입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부활하신 주님의 영, 즉 영광의 영이 지금 누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는 자 위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시시한 이야기입니다. 광신도들이나 하는 이야기쯤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를 보고서 무어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26:23-24절을 봅니다.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바울을 보고서 미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미친 것이 아니라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미친 사람입니까? 정상적인 사람입니까? 정상적인 사람보다 더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닙니까? 세상에서 정상적이라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을 목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내세를 준비하면서 선하게 착하게 바르게 산다는 종교인들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나와 아무른 상관도 없는 저 조그마한 나라 이스라엘,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이단이라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그 예수가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무엇이 그리 중요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별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나 척척 해결하여 준다면 한번 믿어 주겠다는 정도이지 별 관심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우리에게 기쁨의 소식이 됩니까? 내 삶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 되어 있습니까?
빌립보서 3:7-11절입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2)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성공과 영화를 누린다고 하여도 그것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비추어 보면 쓰레기처럼 여겨지십니까? 반대로 아무리 실패하고 고생을 하더라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삶의 목표와 방향은 다른데 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하려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목표였습니다. 이것이 빠져버리면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여전히 썩어질 것을 쫓아가는 불쌍한 인생일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5:12-19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고 여전히 죄 가운데 붙들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 죄 가운데 있다는 증거는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만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를 그 안에서 해방시켜서 보이지 아니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위엣 것을 찾고 사시기를 바랍니다(골3:1-4). 이것이 삶의 우선순위가 되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26:1-8 소 망
1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 아그립바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쫓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바울사도가 감옥에 갇혀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원래의 고소 내용이 근거가 없는 것으로 증명되어서 더 이상 논쟁거리가 아니기 때문에(25:18,25 참조) 바울은 자기 송사의 종교적 측면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3절)를 아는 유대인인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기뻤습니다. 아그립바 2세는 예루살렘 성전에 관계된 일과 대제사장직 임명 문제와 관련하여 로마인들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그립바 왕은 아그립바 2세로서 헤롯왕의 증손자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의 풍속과 모든 문제들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자신이 이렇게 체포되고 고소를 받는 그 일을 자세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출신과 배경을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이 다 자기를 안다고 합니다. 자신의 종교 중에서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를 따라 생활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심문을 받는 것에 대하여 증거 합니다.
그 내용이 6-7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에 자기가 심문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바라는 것은 자기만 바란 것이 아니라 유대인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면서 얻기를 바란 그 소망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바라고 바란 소망이라면 모두가 환영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한풀 꺾였습니다만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를 월드컵 4강에 오르게 하였다고 온 국민이 환영하고 명예 시민권도 주고 훈장도 수여하는데 왜 유대민족이 그렇게 바라던 소망을 이야기하는 바울은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오늘 여기 모인 우리의 간절한 소망은 무엇입니까? 각자의 소망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한다고 하면-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만-오늘 말씀은 찬물을 끼얹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평소의 소망을 죄라고 정죄하는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증거하는 이 소망이 나의 소망이 되는지 아니 되는지를 점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 자기도 처음에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에게 권세를 얻어서 더욱 열심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다가 다메섹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들을 잡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권세와 위임을 받아 가지고 가다가 주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13-16절입니다. "봉독" 이렇게 주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울을 주님의 사환과 증인으로 삼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제까지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가던 사람이 이제는 오히려 예수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증거하는 것입니까? 소망에 관한 것입니다.
22-23절입니다. "봉독" 선지자와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을 증거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선지자와 모세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한 내용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일어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이 되리라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선지자와 모세의 증거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은 그러한 소망을 모두 간절히 기다려 왔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실패한 인생이요 저주받아 죽은 인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바울 사도는 아니다, 예수가 정말 그리스도라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도들의 복음의 내용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소망의 내용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소망과 사도들의 소망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소망은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메시아 왕국을 원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 다녔던 제자들조차 늘 관심사가 언제 주의 나라가 임하는가 하는 관심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장관자리 하나 차지할 생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소망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에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간 것입니다. 메시아 왕국은 이러한 모습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마저 예수님은 실패한 것으로 보고 다시 옛날 직업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물론 십자가 이전에도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게 되자 제자들이 드디어 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나사렛 예수가 바로 메시아아고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그렇게 기다려온 소망이라고 증거 한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은 이방인에게 까지 이 소망의 증인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바울이 고소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소망이란 눈에 보이는 현실적이고 가시적이고 메시아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사도들에게는 그러한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이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20-21절입니다.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는가 하면서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하나님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국가들처럼 영토가 있고 백성이 있고 왕이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주님께서 영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이기에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 안에서는 그 나라가 임하여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성령이 임하고 나서는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 싸움인 것입니다.
8절을 봅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하면서 자기에게 나타난 살아계신 주님을 간증하면서 성경이 증거한 그 소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바울이 증거하는 이 내용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줄 압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18절을 봅니다.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내용들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까? 믿음의 세계입니까? 믿음의 세계입니다. 세상은 알 수도 받을 수도 없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어두움 아래 죄 아래 사단의 권세아래 갇혀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사단의 권세아래서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 그저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향하여 달려 왔던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러한 우리를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의롭다 하시고 이제는 주님을 믿는 거룩한 무리에게 영원한 하늘의 기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소망도 여기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눈에 보이는 소망인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인가 하는 갈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 갈림이 일어나는 것처럼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과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점검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것이라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라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하여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왜입니까? 아직도 이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왜입니까? 내일에 대한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이웃에게까지 인색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 제대로 소망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이 세상의 신에 사로잡혀서 일생동안 죽음의 두려움에 붙잡혀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2:14-15절을 봅니다.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혈육에 속한 모습으로 오신 것은 사망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는데서 해방인 것입니다.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는 자기 백성을 해방시켜서 생명 안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여 죽음의 종노릇이란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돼! 다른 회사는 다 문 닫아도 우리 회사는 든든해야 돼! 우리 사업은, 우리 가정은, 우리 교회는 망하지 아니하고 늘 번창해야 돼! 하는 식으로 살고 있는 것이 죽음에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조금도 쉼이 없습니다. 지금 어려움이 없어도 앞으로 어려움이 닥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평생 내일에 대한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서 자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자기 스스로도 괴롭고 주변사람도 괴로운 것입니다. 늘 불평과 원망이 따르는 것입니다. 도대체 만족과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자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내일에 대한 염려, 1년 후의 염려, 평생의 염려를 하고 있으니 어떻게 스스로를 졸라매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기 살아남기만 챙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대하여도 인색하고 사람에게 대하여도 인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몇 년 동안만 눈 딱 감고 지금 내가 소망하는 눈에 보이는 소망하나 이루기까지 하나님 좀 참아주세요! 봐 주세요! 라는 식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게 과연 영원한 소망에 들어 있습니까? 그런 어리석은 삶은 오늘도 살고 있으면서 과연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이 세상에서 담대하였습니다. 죽인다고 하여도 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죽어도 사는 세상이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로 인하여 흔들리지 아니한 것입니다. 재산을 빼앗기고,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하고, 원통함을 당하여도 넉넉히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이러한 일들은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하니 소망이 없으니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이니 동성아파트에서 남편과 어린 아이 둘을 두고서도 뛰어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그렇게 하고 싶으신 분은 계시지 않으십니까?
로마서 8:18-28절을 봅니다. "봉독" 지금 온 세상이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데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로 탄식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날이 주님의 재림의 날입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도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을 믿고 기다리기에 성령께서 기도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 바랍니다. 오시리라 약속하신 그분이 영광중에 임하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26:24-29 나와 같이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27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1)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이 가로되 2)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뻔하였다 하니라.
바울사도가 가이사랴에서 최종심문을 받고 있는 내용입니다. 유대인 왕 아그립바와 로마의 총독 베스도 앞에서 심문을 받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지난주에 보았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거로 갇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로마법에 저촉이 되는 사항이 아님을 최종 심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30-32절에서 바울이 사형이나 결박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풀어줄 수가 있었으나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였기에 가이사에게 보낼 수밖에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자 하는 내용은 바울사도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와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들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자기처럼 이렇게 결박이 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있기에, 얼마나 자신이 처지가 감사하고 행복하였으면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어린이들에게 누구를 닮고 싶으냐고 물으면 영웅적인 위인들을 예로 듭니다. 이야기를 들었던지 소년 소녀 세계위인전기를 읽었든지 간에 그 안에 닮고 싶고, 되고 싶은 인물들을 마음에 그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존경하고 닮고 싶은 인물들은 전쟁영웅이거나 남을 위해 희생을 한 사람이거나 간에 인류에게 감동을 줄만한 가슴 뭉클한 이야기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런 영웅을 그리지도 아니합니다. 더욱 현실적이 되어서 아주 구체적입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라든가 백댄서라든가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인물 중에 누구를 닮고 싶으십니까? 역시나 우리가 어려서 세계위인전기를 읽으면서 꿈꾸었던 그러한 영웅적인 사람들을 닮고 싶은 것입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사무엘, 다윗, 솔로몬 등등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물들 역시 우리가 세상의 위인을 보듯이 보고 있기에 자주 말하는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결코 영웅이나 위인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피상적으로 보지 아니하고 구체적으로 그 생애를 살펴보면 모두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1:32-40절입니다. "봉독" 우리는 흔히 믿음의 영웅들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영웅적인 모습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고 하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고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고 하며, 전쟁에 이방 사람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부활로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영웅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내용들을 과연 우리가 환영하고 따라갈 만한 내용입니까?
희롱,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힘, 돌로 침, 톱으로 잘림, 시험, 칼에 죽는 것,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닮고 싶습니까? 물론 고진감래라고 처음에는 고생하여도 나중에 성공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적인 영웅이나 성공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이 약속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사람들이 구약의 증인들입니다. 이들이 다 증거는 받았으나 약속은 받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실체는 받지 못하였지만 모형과 그림자의 증거만을 받고서도 환영하며 죽음도 불사하고 그 약속을 기다린 것입니다.
사도행전 26:6-7절입니다. "6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우리 조상들이 밤낮으로 연구하고 살펴서 기다려온 그 약속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왜 못 믿을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자기변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 질 때 그 사람의 본색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사람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는 형편이 좋을 때가 아니라 정말 어려움에 처하여 보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사도는 자신이 심문을 받고 있는 자리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그렇게 기다리던 약속의 실체인지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약속,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도대체 무슨 일을 이루신 것입니까?
그 내용은 18절입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22-23절입니다. 이것은 이미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 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는 내용입니다.
여기까지 증거하자 베스도가 무어라고 합니까? 바울을 미쳤다고 합니다. 네 많은 학문이 너로 미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러 가지 많은 공부를 하다가 정신이 돌아가지고 미쳐서 이야기를 한다고 베스도가 말 합니다. 로마의 총독으로 있는 베스도가 세계를 보는 시각에서는 미친 소리로 들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때 바울사도가 베스도에게 내가 미친 것이 아니고 참되고 정신 차린 소리를 한다고 합니다. 베스도가 볼 때 바울은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는 베스도가 마귀에게 사로잡혀 어두움 안에 있는 불쌍한 인간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아그립바 왕에게 전도를 합니다. 아그립바 왕은 유대인의 왕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한쪽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입니다(26). 세계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아주 한쪽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적어도 유대 땅 안에서는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이렇게 분명한 일을 믿지 못하고 있으니 바울사도는 다시 선지자를 언급합니다. 유대인들이라면 선지자의 말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증거를 들면서 왜 믿지 못하나이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바울을 보고서 네가 말 몇 마디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유대인의 왕인데, 성경도 알고, 선지자도 알고, 배울 만큼 배웠는데 감히 나에게 말 몇 마디로 이 짧은 시간에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하느냐고 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해보면 이런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가 아직 젊은데 인생을 다 안다는 말이냐? 천국과 지옥을 네가 봤느냐? 네가 전도하는 그 말 몇 마디로 지금까지 내가 열심히 추구하여온 내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수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느냐는 것이지요! 그러자 바울사도가 말이 적으나 많으나 결박된 것 외에는 당신들 모두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말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라면 어떻게 말합니까? 내가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믿으라고 하는가 하는 말을 합니다. 자신이 조금도 떳떳하고 완벽하게 되고 나면 예수 믿으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말씀대로 살지도 못하고 내 형편도 어려우니 내가 모든 형편이 나아지면 그때에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해도 해야지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몰라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예수님을 증거하겠다는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형편이 나아진 것을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단지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당신들이 왕이고 총독이고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행복이 아니라 내가 만난 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참된 행복이요 자유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성공할 만큼 성공한 그 사람들이 부럽기는커녕 너무나 불쌍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옥으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형편이 어떤 지경입니까? 물론 나중에 고난 받은 것까지 다 포함이 되는 내용입니다만 얼마나 고생하였는지 한번 봅니다.
고린도전서 4:9-13절입니다. "봉독"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이 당한 그 고난과 같은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자랑하고 내세울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 자기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바울을 이렇게 변화시킨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참된 빛이 오자 그동안 빛이라고 여긴 것이 모두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동안 진리라고 여겨왔던 모든 것이 거짓이며 속아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생명을 얻었기에 자기가 지금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수로 고발되어 있고, 결박되어 있으면서 오히려 나처럼 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인한 생명 얻음이, 죄 사함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오게 됨이 얼마나 좋은지 자기를 욕하는 자를 향하여 축복하고, 핍박을 하면 참고, 비방을 당하면 오히려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사도가 증거한 이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동일한 기쁨과 감사가 나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옥에 있을지라도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은 잠시 잠간 후면 지나가는 것입니다.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면 다 얻은 것입니다. 천하를 얻어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천하를 주고도 얻을 수 없는 참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렇다며 다 얻은 것입니다. 다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른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3-14절에서는 예수 믿는 다는 것이 어떤 복이 주어졌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을 다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복이란 창세전에 택하심과 예수 그리스로 흠이 없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알아가는 것이 에베소서 3장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감옥에서도 기뻐하라고 하며 왕에게 죄수가 하는 말이 당신도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겠습니까? 복음성가 가사 중에 '너도 나처럼'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자기의 기쁨과 소망과 행복의 비밀을 알고 싶지 않느냐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면, 이제 이 세상 어떤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보고 당신도 나처럼 되기를 소원한다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27:20-26 인 도
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23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몇 주 전에 금요성경공부 시간에 시편 23편으로 양과 목자라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목자요 우리는 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이란 목자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짐승입니다. 자기를 방어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 그러면 목자가 떠오를 정도로 양과 목자는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를 양으로 비유하는 것은 한시도 주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주님의 인도를 받아가려고 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 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에서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의 양떼를 마음대로 가도록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인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도하시는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하시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자기 마음대로 목표를 정하여 놓고서는 그 목표를 이루는 일에 성공적인 인도를 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인도와 우리가 인도되었으면 하는 것이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적 본성상 하나님에게 잘 보이고 순종을 하면 만사형통한 길로 인도되지만 불순종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리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하였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또 교회에서도 주로 그렇게 말하고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로 모인 사람들이 어렵고 힘들고 고난이 있는 것은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들이 나가면 자기의 자존심도 문제이지만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여 그렇게 되었지 하는 그런 눈초리들이 싫은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가면무도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어떻게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죄수의 모습으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사도가 자기 사사로운 욕심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열심을 낸 것이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한 결과가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과거의 모든 잘난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며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많은 고난과 핍박이 왔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로마로 가는 길은 하나님께서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죄수로 잡혀 가는 신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방법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바울처럼 인도를 받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도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으로 인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자기 영광이 드러나는 방향으로 인도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고생을 하더라고 나중에는 영광을 누린다면 초반 고생은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도를 받아간 사람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세상 사람들이 환영하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인도하시는지를 바울사도를 통하여 보고자 합니다.
바울사도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최종 심문을 마치고 이제 로마로 압송이 되고 있는 중입니다. 배를 타고 가는데 그 배가 제법 큰 상선입니다. 배에 탄 사람이 276명이고 무역을 위하여 밀과 여러 가지 화물도 싣고 가는 배입니다. 여기에 로마의 백부장이 바울과 다른 죄수들도 압송하여 가는 것입니다. 백부장에 바울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항구에 들릴 때는 바울의 친구들에게 대접을 받도록 허락도 합니다. 그러나 항해가 어려워서 겨우 그레데 섬의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과동하기가 불편하다고 뵈닉스로 가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자 바울사도가 말립니다.
9-11절입니다. "봉독" 바울이 화물과 배만 아니라 생명도 위태하겠다고 만류를 하여도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고서 항해를 고집한 것입니다. 겨울철에는 아예 항해를 하지 않는데 아직은 항해를 할 수 있다고 보고서 간 것입니다. 마침내 남풍이 순하게 불자 저희가 때를 만났다면서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면서 항해를 합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갑자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몰아쳐서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가 바람에 밀려 가는대로 두는 것입니다. 풍랑으로 심히 애를 쓰고 이튿날에는 배의 짐을 바다에 버리고 배의기구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러 날 동안 풍랑이 계속되고 해와 별도 보이지 않게 되자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바울사도가 자기 욕심과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항해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나처럼 불순종해서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사도행전 23:11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로마로 향하고 있는 중인데 풍랑을 만나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진 것이라고 누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 바울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요?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니 죽지 아니하라는 마음으로 담대하였을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오고 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로마로 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실 때에도 담대하라고 하셨고, 이 풍랑가운데서도 담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도 두려웠기에 주님께서 담대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분명한 말씀을 다시 하셨습니다. 그것은 로마에 가서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7:21-27절을 봅니다. "봉독" 바울이 사람들에게 자기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을 것이라고 하자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심하라고 합니다. 생명은 한 사람도 잃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나타나 말씀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그래도 되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곧 한 섬에 배가 걸리게 될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상선에 여러 사람들이 타고 갑니다. 장사를 하여 이익을 보고, 여러 가지 사업을 위하여 가는 사람들이 그 배에 타고 갈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꿈들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 무리들 가운데 바울사도는 죄수의 모습으로 끌려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보이는 희망을 가지고 꿈에 부풀어 떠나는 중에 바울을 보았을 때에 어떤 모습으로 보였겠습니까? 무슨 죄를 지어서 저렇게 죄수로 끌려가는지,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고 죽게 될 불쌍한 인생이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꿈을 가진 사람들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을 가지고 가는데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풍이 몰아쳐서 모든 물건들을 바다에 던져 버리게 되고 목숨마저 위태로운 지경에서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들의 목숨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믿고 가는 사람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살고 죽는 일이 바울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광풍이 몰아치기 전에는 바울은 한낮 죄수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광풍을 만나고 죽게 되자 아무것도 없는 사람, 보통사람보다 더 비천한 죄수로 가는 바울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위대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울을 자신의 사도를 부르신 주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바울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자기들만 살려고 도망가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계속하여 배가 이리 저러 쫓겨 가는 중에 사공들이 육지에 가까워지는 것을 짐작하고 줄을 재어보니 점점 얕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초에 걸릴까봐서 배를 정지시키는데 일부 사공들이 닻을 내리는 체 하면서 거룻배를 내려서 도망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이 배에 있지 않으면 죽으리라고 하자 그 거룻배의 줄을 군사들이 끊어버립니다. 그리고 날이 새자 바울이 기도하고 음식을 먹게 합니다.
그러자 이제 안심하고 음식을 먹고 나서 배에 있던 밀들을 모두 바다에 버리고 배를 가볍게 하고 섬으로 가까이 가는데 배가 모래톱에 걸려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죄수들이 도망갈까 봐 죄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고 저희의 뜻을 막아서 헤엄치는 사람은 헤엄치게 하고 물에 떠는 것을 잡고서 섬으로 가게 합니다. 그리하여 한명도 남김없이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사도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방법을 보게 됩니다. 배에서 선장이나 선주나 백부장처럼 대접받으면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수의 모습으로 갑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살려내는 것입니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죄수, 비천한 죄수의 모습을 가던 바울이 그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잡혀가던 요셉,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기에 더욱 미움을 받아서 형들의 손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그의 형들과 부모의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런 방식으로 이끌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형들은 자기들의 죄와 은혜를 동시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모두가 고개를 흔들며 침 뱉고 돌아선 그 십자가, 저주 받아 죽었다는 그 십자가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도하시는 것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영광들이 헛된 것임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들은 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따라 인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이 없는 길로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아니합니다.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몰라서 그렇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나가게 하십니다.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아름다운 꽃밭이 되도록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은 의의 길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고난과 어려움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보다 더합니다. 그래서 골짜기를 눈물로 더듬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붙들지 말아야 할 것을 붙들지 않게 하시고 분명히 붙들어야 할 것을 붙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광풍이 몰아치는 곳입니다. 미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과 전쟁과 실업과 경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어떤 인도를 받고서 사시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안전지대란 없습니다. 미친바람이 몰아치듯이 몰아치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들을 스스로 내어 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15-20절입니다. "봉독" 광풍정도가 아니라 바벨론 자체가 망하는 것입니다. 무역으로 인하여 치부한 모든 것이 망하는 그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헛된 것을 생명처럼 여기지 마시고, 예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의 약속의 말씀만이 우리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사도행전 28:1-15 성도의 삶
1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3 바울이 한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 7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11 ○석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우리가 타고 떠나니 그 배 기호는 1)디오스구로라 12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13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난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14 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 15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예수 믿는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로서 세상에서 구별된 자라는 것입니다. 그 구별의 기준은 세상의 그 어떤 조건이 아닙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경제력이나 가문이나 착함이나 사람됨을 가지고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 일은 이미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하나님의 뜻이 때가 되어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이런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발 딛고 살고 있는 동안은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대부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무엇이나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 좋은 자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차지하여서 예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아무른 말도 못하도록 큰소리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속마음이 다 있으니 예수 믿는 것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마음에 거슬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호의적으로 보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하였는가를 보시면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에 무엇을 유혹하였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것,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의 영광을 다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다 거절하시자 세상이 어떻게 예수님을 대접한 것입니까? 배척하였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은 반드시 어떤 대접을 세상으로부터 받겠습니까?
요한복음 15:18-19절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것이 성도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이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들고 아니 들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뜻만이 이루어 질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바울에게서 보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내고 산다고 하는 삶이 오히려 하나님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을 돌이켜 세운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바울 마음대로 살수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가치관이 완전히 뒤집어 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유대인들만의 메시아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세상의 영광이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일들이 모두 죽은 자의 일임을 알았기에 참된 생명이요 참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는 죄수로 몸으로 잡혀서 로마로 향하고 있는 중입니다. 죄수는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하였기에 소망을 증거하였기에 잡혀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결코 환영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입을 막아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있기에, 사단의 권세아래 있기에 그저 눈에 보이는 세상만이 다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른 세상이 있음을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빛을 본 자들을 죽여 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폐쇄된 나라가 북한입니다.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신문도 인터넷도 전부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나 외국의 정보를 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혼자서는 살수가 없으니 외국에 나가고 새로운 세계를 접한 사람들은 자꾸만 탈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단속을 강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라크가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공보장관은 끝까지 큰소리 친 것입니다. 무너질 것을 알았기에 후세인은 벌써 도망하여 꽁꽁 숨어 있는 것입니다. 6.25전쟁 때 북한군에 서울에 쳐들어 왔는데 국군이 이기고 있다고 안심하라고 하면서 대통령은 피난 간 것입니다.
이 세상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단과 그의 부하들이 다 주님 재림하시면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누가 잘 알고 있습니까? 사단과 그 부하들은 다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에 귀신들이 먼저 알고서 벌써 때가 되었나이까, 하면서 벌벌 떤 것입니다. 마귀들은 자기들이 망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망하는 것을 결코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소식을 접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어떻게 하든지 온갖 핍박을 가하고 죽여서라도 복음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 세상의 일입니다.
그러나 마귀도 교묘하고 사람의 지혜보다 뛰어나기에 핍박 일변도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 세상의 영광을 다 준다는 식으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유혹한 그 마귀가 지금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면서 간증하는 많은 내용들이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스코리아도, 가수도, 영화배우도, 운동선수도 무슨 시상식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으로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이란 언제나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상식에서 한 번도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십자가와 그들의 영광과는 얼마나 어울리지 아니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을 모르면 자기가 마귀에게 속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작전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고생하고 죽는 것으로 비추어지게 하여서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헛된 세상 영광을 구하게 함으로 가짜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9-20절입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성령을 받고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아서 살았던 바울의 삶을 보면서 성도가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엇으로 살고 무엇이 증거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성도란 자기 고집과 자기 뜻대로 살수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신분이 되어 버린 사람입니다. 바울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로마에까지 복음이 증거되리라는 그 말씀 때문에 바울이 로마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는 길이 늘 꽃가마 타고 환영받고 영광을 받으며 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시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죄수로 잡혀서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모양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의 찌기 같은 대접을 받고 천사들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도하심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방해할 수가 없음을 보이시면서 동시에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님도 보이시는 것입니다.
처음 로마로 항해할 때 죄수인 바울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광풍 속에서 다 죽게 되었을 때에 바울의 말을 믿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에게 나타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배와 화물은 잃었지만 생명은 하나도 잃지 아니하고 멜리데 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섬에서 원주민들이 이들을 영접하여 줍니다. 그곳에서 비가 오고 날이 차서 불을 피우는데 나뭇가지를 집어넣다가 바울이 뱀에 물립니다. 아주 독한 독사였기에 원주민들이 생각하기를 저 사람은 진실로 살인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다에서는 살아 나왔으나 뱀에 물린 것을 보니 공의로 심판받는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곧 죽거나 몸이 부어오를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아니하니 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과 죽음의 위험과 풍랑과 뱀에게 물릴지라도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주님의 일을 방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고난의 길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목표로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님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고생을 하면서도 더욱더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소망이 뚜렷하여 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고난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멜리데 섬에서 그 원주민 추장의 아버지를 고침으로 더욱 사람들이 바울과 그 일행에게 잘 대접하여 주고 3개월이나 지나서 배를 타고 가는데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배에 오르는 순간 바울은 어떤 신세입니까? 여전히 죄수의 몸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외로운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의 위로와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받은 자들의 위로와 격려와 교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멜리데 섬에서 로마로 향하여 로마의 수도에 들어가기 전 보디올이라는 항구에서 일주일간 머물게 되는데 이곳에 예수 믿는 형제들이 바울의 소문을 듣고 와서 교제를 합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예수 믿는 사람만이 아니라 압비오 저자와 삼관 지역에 있는 성도들도 바울에게 오자 바울사도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됩니다.
성도가 가는 길에 외롭고 두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약속을 받은 자들이 서로 교제하면서 함께 격려하고 세워가는 것입니다. 목사만 일방적으로 격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차 권면하고 서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무엇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까? 영원한 나라가 따로 있음을 증거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삶을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8-31절입니다. 세상의 부족하고 못난 것들을 택하여 그리스도의 부요하심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아무도 자기 육체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직 우리에게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예수님만 자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성도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고후6:1-9).
사도행전 28:23-31 말씀대로
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ㄱ)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29 2)(없음)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사도행전 1장을 2001년 11월 25일 시작하여 만 1년 6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사도행전으로 설교를 약 90번 설교를 한 셈이 됩니다. 오늘 마무리를 하면서 무엇이 남았습니까? 저는 이렇게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주님께서 신실하게 이루어내셨고 그리고 지금도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전체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복음서의 내용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주님의 약속한 것들을 이루어 내시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절을 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시면, 이라고 약속하신 대로 성령이 오순절 날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이 권능을 받았습니다. 방언을 하고 병 고침이 일어나고 권세와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증인이 되기 시작하는데 누구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나사렛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고 이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결코 사도들의 권세나 능력을 가지고 자기들을 증거하지 아니합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성전미문에서 구걸하던 자를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베드로와 제자들을 보면서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들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이 어찌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일어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하면서 자기를 부인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온전케 된 것은 예수의 이름이 온전케 하였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증거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내 증인이라고 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자기의 권세와 능력을 증거하거나 자기의 열심을 증거하거나 자기의 교회를 증거한다면 참된 증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며 이 증거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주님의 약속은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인데 사마리아와 이방인의 경계를 넘어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납니다. 그 핍박의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 핍박으로 인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할 수 없이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 핍박의 결과 사람들이 사마리아로 들어가게 되고 사마리아에도 복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가, 하면서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개같이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에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니 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사도들이 안수하니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그들이 임하였던 성령이 동일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것과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 다르게 나타난 것은 사도들로 하여금 복음이 사마리아에도 증거되는 것임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성령이 임하는 것을 놀랐다면 사마리아보다도 더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로 여긴 이방인이 성령이 임하는 것을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이 들었는지 그들의 다툼과 요란함과 회의를 통하여 결론이 겨우 난 것이 무엇입니까? 이방인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것을 드디어 인정한 것입니다.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도록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사도들로 하여금 목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증거되는 것을 가장 싫어한 사람들의 중심에 누가 있었습니까? 바울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로 보고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싫어하였는지 스데반 순교 시에 스데반이 죽어야 마땅하다고 가편 투표를 하였고 그 현장을 지켜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가다가 오히려 예수님께 사로잡혀 버린 것입니다. 전에는 핍박하다가 이제는 증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바울사도로 하여금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되는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셔서 사도행전의 후반부를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의 지역을 돌면서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수많은 죽음의 고비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한 고난에 비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또한 나타났습니다. 온갖 불치병이 고침을 받고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만 병자 위에 가져다 놓아도 병자가 낳고 악귀가 떠나버리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바울이 가는 곳마다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 앞에서 항복을 하고 모두가 예수 믿겠다고 나오는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기대를 합니다. 바울 사도가 자신이 사사로운 욕심을 따라 일하는 것도 아니고 목숨을 걸고 주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데 하나님께서 능력을 더하셔서 계속 기적을 일으키시면 엄청난 일들이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사도행전 초반에서도 성령이 임하고 사도들이 능력을 행할 때 그런 기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죽을 때 그냥 돌 맞아 죽습니다. 야고보가 순교를 합니다. 그러나 아무른 기적이 일어나지 아니합니다. 다른 사도들도 갈수록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기 보가는 복음을 증거하다가 죽어간 것입니다.
왜 복음이 이렇게 증거되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칠만한 사회적인 위신과 체면과 권위가 세워지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 속담에 무어라고 하는 것입니까?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하는 것이지요!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원님 덕분에 큰 소리 한번 쳐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세상에 오실 때에도 마구간에 오신 것입니다. 집안도 학벌도 없었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 어떻게 예언하고 있습니까? 보통 사람들 보다 더 낮은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그래서 멸시를 받는 모습을 오셨습니다. 실제로 온갖 멸시와 조롱을 다 당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까?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오신 것입니다. 죄를 담당하시면서 우리의 죄를 고발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떠나서 모두가 하나님처럼 살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니 어떻게 생각하고 사는가 하면 모두가 자기가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없이 고난당하신 주님 앞에서 우리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가 모두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으셨음을 아는 사람을 입을 닫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제대로 알고 동시에 주님의 십자가의 위력이 모든 죄를 이기고도 남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들에 의하여 복음이 증거되는데 세상의 영광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는 모습으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셨고, 또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기에 세상의 것들이 방해할 수 없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의 유혹이나 반대로 세상 그 어떤 위협과 고난과 죽음까지라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협하고 고문하고 죽이는데도 무엇이 좋다고 예수님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그렇게 죽어 가는가, 하는 것을 보이는 것이 증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사는 목적이 눈에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살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을 마다하고 사는 그들은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저렇게 사는가? 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이며, 겨자씨이며, 가루 속에 들어있는 누룩과 같은 것입니다. 모두가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만 찾아내시기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로 하여금 세상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복음이 세상의 영광을 전하는 것이라면 누구나 환영하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이 세상에서 분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대동단결하여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휴머니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사도행전에서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28장까지 진행이 되면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대로 성취가 되는 과정에서 바울이 로마에 도착을 합니다. 비록 죄수의 몸으로 잡혀가지만 그러나 복음은 막히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풍랑이 일어나 배가 깨어져도, 뱀에게 물려도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드디어 로마에 도착합니다. 무려 2년 정도를 가택 연금 상태로 있으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먼저 유대인들의 지도자를 초청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러자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믿는 자들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도 나오는 것입니다. 이때 바울사도가 하는 말이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결론입니다.
사도행전 28:23-28절입니다. "봉독" 믿지 아니하는 사람을 믿는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복음으로 찾아내는 것입니다. 전도, 즉 십자가의 도로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내는 것이기에 감옥에 있어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지하에 있어도 상관이 없고,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자라도 주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는 전혀 방해를 받지 아니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되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에 약 1,9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음이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 우리도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똑똑하거나 잘나서 복음을 알아들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어떤 가능성이나 행함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영생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자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이 전한 이 복음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귀한 생명을 선물로 얻었기에 다 얻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현재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것으로 인하여 교만하거나 주눅 들지 아니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고 이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은 가상현실입니다. 시뮬레이션이며, 매트릭스 상황입니다. 오직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현실이기에 말씀대로 성취될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2007.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