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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도행전 강해(1)-(이장우 목사)

kds7778 2008. 1. 20. 22:42
 

 

사도행전 강해(1)

(이장우 목사)



사도행전 강해(1)

01. 약속을 기다림

02. 이스라엘의 회복

03. 증거의 내용

04. 증인이 되리라

05. 다시 오시리라

06.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07. 성경이 응하였으니

08. 오순절 성령강림

09. 성령강림과 방언

10. 예언 환상 꿈

11. 부활의 증인

12.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

13. 어찌할꼬?

14. 초대교회

15. 내게 있는 것

16. 그 이름

17. 부활을 싫어하는 자

18. 모퉁이 돌

19. 예수의 이름

20. 열방의 분노

21. 한 마음과 한 뜻

22. 아나니아와 삽비라

23. 표적과 기사

24. 생명의 말씀

25. 고난을 기뻐함

26. 집사를 세움

27. 스데반

28. 아브라함과 할례

29. 모세와 율법

30. 성 전

31. 스데반의 죽음

32. 큰 핍박 큰 기쁨

33.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34. 사마리아도

35. 성령의 전도

36. 사울아 사울아

37. 다시 보게 됨

38. 힘을 더 얻어

39. 주님의 일하심

40. 누가 금하리요!

사도행전 강해(2)

41. 성령으로 세례 11:1-18

42. 그리스도인

43. 흉년과 부조

44. 살든지 죽든지

45. 헤롯의 죽음

46. 성령이 가라사대

47. 마귀의 자식

48. 바울의 설교

49. 도무지 믿지 못할 일

50. 작정된 자

51. 분 리

52. 구원 얻을 만한 믿음

53.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54. 주 예수의 은혜로

55. 짐 지우지 말고

56. 자기부인

57. 성령의 인도

58. 주 예수를 믿으라

59. 다른 임금

60. 철학과 복음

61. 내 백성

62. 하나님의 뜻이면

63. 성령세례

64. 따로 세우고

65. 소 동

66. 위 로

67. 사 명

68. 감독자

69. 주의 뜻대로

70. 하나님이 하신 일

71. 변 명

72. 담대하라

73. 염 병

74. 부활에 대하여

75. 우선순위

76. 소 망

77. 나와 같이

78. 인 도

79. 성도의 삶

80. 말씀대로


사도행전 1:1-5  약속을 기다림 


1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오늘부터 사도행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그러면 가장 많이 기억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서 전도를 하니 하루에 3천 명, 5천 명씩 전도가 되었다는 내용들과 방언을 행하고 기적을 행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능력 있게 행하도록 하자, 라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우리 교회도 한번 크게 성장하고, 그와 더불어 우리 가정과 우리 회사와 우리나라도 한번 크게 쓰임을 받자는 식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그러면 성령 충만의 비결, 전도의 비결, 교회의 부흥, 이러한 제목들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그러면 늘 기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의 영웅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빈틈없이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일에 사도들이 부름을 받았고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 자신의 경건이나 기도를 통하여 능력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구걸하던,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베드로와 요한이 보고서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제자들을 주목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 사람이 온전케 된 것이 어찌 우리 개인의 경건과 능력으로 되어진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는가 하면서 이 사람이 온전케 된 것은 주 예수의 이름이 이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셔서 지금도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 가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치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말씀을 출애굽기에서 여호수아서에 이르기까지 이루어 내시는 것처럼 복음서에서 약속하신 내용을 사도행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1절부터 차근차근히 보도록 합니다. 수신자가 '데오빌로'입니다. 데오빌로의 뜻은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자'라는 뜻인데 이것을 개인의 이름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에서 데오빌로 각하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모든 자들이 사도행전의 수신자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에 이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사람 아무나 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긍휼과 사랑을 입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결코 아님을 압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용서를 받았기에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데오빌로인 것입니다. 그러니 한 말씀도 놓치지 말고 귀담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는 바울 사도와 선교여행을 같이 한 사람입니다. 의사 누가라고 알려진 사람입니다. 누가복음이 전편이고 사도행전이 후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쓴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과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요한복음을 보았습니다만 복음서의 내용이 예수님의 행하신 일과 가르치심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이 오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3절을 봅니다. 해 받으신 후, 즉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40일 간을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예수님께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하신 바가 무엇입니까?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러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세례에 대하여 참으로 많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중생과 성령세례가 같다, 다르다는 논란이 장로교와 오순절 계통에서 서로 대립된 주장을 하였습니다. 장로교는 중생, 즉 거듭남이 성령세례라고 보는데 오순절 계통은 거듭나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제2의 축복인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로 방언을 해야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바람이 불어서 사람들마다 방언 받으려고 산으로 쫓아다닌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니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무언가 화끈하지 않고 밋밋하니까 그것을 견디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니 성령이 임하고 나니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는데 왜 우리는 그렇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에서 인위적으로 성령의 일을 만들어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이 오심으로 사도들과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능력을 행한 내용만으로 사도행전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니 오히려 핍박을 받고, 쫓겨나고, 돌 맞아 죽고, 순교하는 모습으로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죽는 모습으로 결론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능력이란 예수님처럼 죽는 것이 능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죽으려고는 하지 않고 능력 받아서 종교적인 슈퍼스타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다시 보면서 과연 주님의 약속하신 바가 무엇이며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통하여 신실하신,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에 참으로 신실하신 주님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24:44-49절입니다.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이것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자신의 완전하신 구속을 이제 부활, 승천하셔서 주의 자리에 오르시고 주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성령의 임하심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 약속하신 바를 지금도 주님께서 신실하게 이루어 내심으로 약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도 주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얻는 회개가 이 도시에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성령을 받아서 대단한 능력을 행하였다더라, 누가 병을 고쳤더라, 누가 방언을 하였더라가 중심이 아닙니다. 얼마나 주님의 약속하신 바가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사도행전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바가 약속하신 바고, 사도행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도행전은 현재진행형입니다. 계시가 더 추가된다는 차원이 아니라 땅 끝까지 주의 복음이 증거되리라는 말씀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증거되면 그때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신의 약속하신 바를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가를 제대로 파악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목표와 방향이 제대로 잡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은 단지 복음서에서만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에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라는 그 약속이 성령의 임하심을 기다리는 것인데 이것을 구약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를 봅니다.

예레미야 31:31-34절입니다. "3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2)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언약의 내용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합니다. 33절에 보시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것이 언약의 중심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어서 손을 잡고 나왔는데도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한 것입니다. 남편의 손을 잡고 가면서 마음은 다른 곳에 가는 것입니다. 남편에 손의 이끌려 가나안으로 가고 있으면서 마음은 늘 애굽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천사의 손에 끌려 나오면서 롯의 아내는 그 마음이 소돔과 고모라로 향한 것입니다. 이러하기에 새 언약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새 언약으로 구원하여 내시지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된 상태가 어떠한지를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잡혀가면서도 마음은 다른 곳으로 달려가는 오늘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새 언약은 어떻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도망갈래야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하고 원하는 바가 늘 세상적인 것들로 채워지기에 성령께서 따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내시는데 그러한 성령의 일하심을 우리의 일로 간주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새 언약의 내용입니까?


우리는 각자 제 길로 갔지만 주님께서 그 무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언약입니다. 단번에 영원히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 언약 안에서는 여호와를 알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보지도, 듣지도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가르쳐 주어도 모르던 것을 이제 주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의 최대치가 무엇입니까?


34절 끝입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이 임하심을 자신의 죄와 비참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그 이름의 능력을 알고 믿게 된 사실이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이 임하심으로 알게 되고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또한 요엘서 2장에서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행전 2:16-21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말세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심이 이미 말세입니다. 지금이 말세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령이 임하시게 됨으로 예언하고 환상을 보게 되고 장래의 일을 말하게 됩니다. 이러한 예언과 환상과 장래의 일이란 '젊은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내용이 아닙니다.


장래에 피와 불과 연기가 닥칠 것입니다. 주의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세상의 종말을 알게 되는 것이 성령이 임하신 능력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나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장래가 어떻게 될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무엇이 능력이고 복입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이 약속을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까? 그렇다면 세상의 종말을 아시고 그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주의 약속을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사도행전 1:6-8  이스라엘의 회복



6○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 당장 설교의 결론이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 본문의 말씀을 읽고 나서 벌써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린 생각이 무엇입니까? 그래 뻔하지 뭐, 전도하라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방해물들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로 하여금 나의 증인이 되도록 하고야 말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시고 증인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은 마땅히 주의 증인이 되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단지 우리가 주님의 증인이 되자, 전도를 많이 하자, 잘하자는 결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자는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무슨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왔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증인이라는 의미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6절입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40일이 지났습니다. 이제 승천하시기 직전에 너희가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말씀을 하시자 그러면 이제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가 된 것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구약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종말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요엘서의 말씀을 사도행전 2장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말세에 하나님의 신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시자 이제 이스라엘의 회복이 다 된 것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주님께서 그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어떤 것인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국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입니다. 그 이후로는 가끔씩 번창하기도 하였습니다만 대부분 이웃 강대국들에게 시달려 왔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돌아왔지만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었지 다윗시대와 같은 회복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선지자들이 주로 활동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를 호되게 책망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늘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을 말씀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그리고 12소선지서 등에 아주 많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무너진 천막이 다시 세워지고 이스라엘은 온 세계 가운데 가장 위대한 왕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방은 이스라엘에 굴복하고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도 전쟁 중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오니즘인 것입니다. 다윗의 별을 그리면서 다윗시대 같은 왕국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들을 한 곳만 찾아봅니다.


이사야 60:4-9절을 봅니다.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 것이라 5그 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6허다한 약대, 미디안과 에바의 젊은 약대가 네 가운데 편만할 것이며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7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여지고 느바욧의 수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1)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8저 구름 같이,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오는 것 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뇨 9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원방에서 네 자손과 그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2)내가 너를 3)영화롭게 하였음이니라"


이러한 말씀이 선지서에서 아주 많이 나타납니다. 온 열방이 금과 은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오며 이스라엘에 나아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것을 문자대로 보고서 자기 혈통적인 이스라엘 국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나 바울을 유대인으로 보기는 하지만 유대인의 이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의 혈통중심의 국가가 아니라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열방이 이스라엘에 항복하고 금과 은을 가지고 벌벌 떨면서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자라고 보고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가장 많이 핍박을 받은 것은 유대인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단이라고 처형한 예수가 그렇게 기다린 메시아라고 하면서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십자가로 무너졌다고 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얼마나 원수로 여겼겠습니까? 그러니 오직 했으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밥도 먹지 않겠다고 결의한 사람이 40명이나 되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제자들이 지금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물어보는 것은 이러한 구약의 예언된 이스라엘의 회복이 지금입니까? 하고서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자기들은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우리의 옳음을 증명하여 주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원받은 자들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라를 회복시키시면 자기들을 괴롭히는 모든 대적들은 심판받고 자기들은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들어있는 종교적인 본능입니다.


우리가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우상 섬기는 자들은 모두 지옥에 들어가고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상이란 탐심이 우상숭배입니다. 물론 형상물에 절하는 것이 우상이지만 왜 형상에 절하겠습니까? 자기 욕심을 따라 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당에 와서도 자기의 욕심을 따라 빌고 있다면 동일하게 우상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무어라고 말합니까? 나중에 한번 두고 보자, 예수님 재림하시면 너희들 어떻게 되나 보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하시면 바로 자신이 심판의 대상이 되는 줄도 모르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요일 저녁에 데살로니가전․후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하여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수요일 저녁에 불법자에 대하여 보았더니 불법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모습이지 않았습니까? 범사에 교만하여 자기를 하나님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목사는 목사대로 성도는 성도대로 모두가 하나님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데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심판을 받지 않겠습니까?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지독하다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교회에서조차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복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교회 나오면서 가난하거나 실패하거나 어려움을 당하거나 병이 들면 무언가 저주 받은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더욱 악착스럽게 돈을 모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자신들의 열심과 힘으로만 돈을 모으려고 합니다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과 열심뿐만이 아니라 무엇까지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다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동원합니까? 자기 왕국의 강성함을 위하여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오늘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거나 간에 결국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목숨을 걸고 승부를 거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주님 임하시면 불타버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나오고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형편이 되면 하는 것입니다. 즉 잉여분으로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시간이 나면 말씀 듣고 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귀만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리라, 그렇지 내가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증인이 되게 하셔야 증인이 되지, 하고 앉아있습니다. 말은 맞습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말로서 자기의 게으름을, 안일을, 죄성을 정당화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께서 지금 말씀하시는데도 거부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인위적으로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만 그렇습니까? 헌금이나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살 길 다 챙겨두고서 잉여분으로 종교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아니면 나는 죽는다는 식으로 행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시간 나면 성경보고, 시간 나면 예배드리고, 내 쓸 것 다 쓰고 여유가 있으면 헌금하고, 그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우리나 간에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언제입니까? 언제 주님의 나라가 임하십니까? 언제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까? 나는 들어가겠지? 어림도 없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그날이 캄캄함의 날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지금 주님의 지배와 다스림을 받지 않는데 무슨 수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이 얼마나 한심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러한 것은 너희의 알바가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고유 권한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 시험 칩니까, 하는 아이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시험공부를 평소에 잘하고 그래서 늘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시험 치는 것이 즐거울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실력이 인정받고 드러나기에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시험이 겁이 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의 삶의 상황이나 교회 안에서나 화가 나는 때가 언제 입니까? 자기가 옳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싸우다가 불리하면 무어라고 합니까? 길을 막고 물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 하자는 것입니까?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편도 안 되면 신에게까지 자기 정당성을 하소연 하고서 죽는 것입니다. 두고 보자, 누가 옳은지, 그러한 싸움이 우리에게 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성경도 끌어 되고 자기의 종교 경험도 끌어 되고 자기의 기도 많이 하는 것도 끌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학벌, 집안, 사돈의 팔촌까지 다 끌어 됩니다. 전에 한번 설교 예화 중에 우리가 싸울 때 온갖 것을 다 동원하여 적을 물리치고 나서 보니 거기에 죽어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왕국의 회복을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메시아라고 하면서도 자기들의 왕국을 거부하니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증인이 되리라고 하시는 말씀은 어떤 증인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전도 많이 해서 우리 교회 부흥시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셨는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부활과 다시 오심에 대하여서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무엇의 증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신 것인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꿈을 꾸고 있는 유대왕국의 기다림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는 인간의 혈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만들어지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자신의 땀이요 열심이요 의지입니다. 이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이라는 것은 왜 예수님께서 죽으셨는지를 아는 자만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사람으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왜 죽으셔야 하는지를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3:13-15절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1)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2)이 일에 증인이로라"


이 말씀에 회개하는 자는 이스라엘이 회복된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회복된 나라입니다.



사도행전 1:6-8  증거의 내용 



6○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지난주에는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를 보았습니다. 어떻게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이 나왔습니까? 제자들이 언제 이스라엘에 회복됩니까? 하는 질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한 것은 너희가 알바 아니고 너희는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바라고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다윗왕국 같은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정치, 경제, 사회 같은 현실적인 부분에서 독립된 국가일 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을 지배하는 그러한 국가로의 회복을 열망한 것입니다.


그러한 배경들이 구약에 많이 있음도 보았습니다. 그러한 문자적인 해석이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또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기 왕국의 회복을 원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려고 하니 왜 내 나라는 안 만들어 주느냐며 배척하여 죽여 버렸다는 것이 증거의 내용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여기에 무엇을 구하러 왔습니까? 내 나라를 구하려 오셨다면 잘못 찾아 오셨습니다. 나의 왕국을 구축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파괴되어지는 곳이 말씀을 듣는 자리여야 합니다. 목사도 목회를 통하여 자기의 왕국을 구축하려면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 많은 교회들이 사설왕국이 되어가고 있고 교주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목회 세습이 대형교회들에게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들의 잘못만이 아니라 교인들의 잘못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교회에 나와서 나의 왕국은 무너져야하고 주님의 나라가 세워져야 합니다, 라고 해야 할 텐데 자기 왕국구축 하려고 나오다 보니 목사가 자기 왕국을 건설하려는 방법을 제시하여 주는 것입니다. 축복받는 비결, 성공하는 비결, 위기극복의 비결 등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서를 통하여 리더쉽 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최고 경영자 예수’라는 책을 만들어 냅니다. 도대체 성경이 증거하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정말 한 걸음도 들어가지 않은 모습들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과 순전히 거래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해 드릴 테니 이만큼은 해주시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헌금의 자세를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추수감사헌금을 구제헌금으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작년에 오십여 만 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한두 번 강조를 하였더니 백여 만 원이 나왔습니다. 꼭 옆구리 찔러서 절 받는 기분입니다. 그런데 구제헌금 하는 날에 주일 헌금은 평소의 삼분의 일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였겠지요.


평소에 천 원씩 하는데 오늘은 구제헌금으로 몇 만원하니 주일 헌금이야 안 해도 상관없겠지 뭐! 이런 생각이 아니었습니까? 저도 그런 생각으로 한 적이 많습니다. 그러니 알지요. 우리가 이 정도로 장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성경 열장 보고 기도 한 시간 하였으니 오늘 이정도의 죄는 봐 주시겠지! 아니면 오늘 죄를 좀 지었으면 평소보다 훨씬 더 성경보고 기도하고 헌금해서 안심하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장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래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진리가 증거 되겠습니까? 그러나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증거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우리가 이미 요한복음 5:39절에서 보았듯이 성경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입니다. 성경을 들고서 다른 것을 증거하면 안 됩니다. 세상의 성공의 방법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이 세상이 불타 없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영원한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하여 복음이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제대로 증거하여야 바른 길을 찾을 것이요, 바른 진리를 만날 것이요,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증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선 성경이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1-8절입니다. “1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1)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5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말씀을 전파하는 일, 즉 증인의 일이 어떤 근거로 인하여 주어지는 것입니까? 1절에 보시면 4중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 그의 나타나실 것,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증거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심판을 근거로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발 딛고 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차 주님께서 심판주로 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나라가 확연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한 근거로서 말씀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을 어떠합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지 않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나의 세계만 발전되고 보호되고 영원하기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려면 나의 나라와 나의 의는 부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의 형태는 어떠합니까? 장차 나타날 심판주와 영원한 그의 나라를 사모하기 보다는 지금 나의 나라를 사모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귀가 가려져 있어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게 되자 오히려 하나님을 모른다하고 타락하여 갔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먹고 배가 불러서 버리는 음식쓰레기만 일년에 8조원인가 한다고 합니다. 오히려 배가 고팠을 때는 이 세상이 살기가 힘이 들어서라도 화려한 천당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물론 그러한 천당 사모가 모든 여건이 좋은데도 주님이 좋아서 사모하는가 하는 것과  질적인 차이가 있을지라도 먹고 배부르게 되어 사실 손해를 보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고 합니다. 이 기준에 의하면 우리 중에 족하지 아니한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어렵다고 합니다. 어렵다 어렵다고 합니다. 왜 어렵습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서 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사욕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일 아침시간에 만화영화에 이런 노래가 나옵니다. '욕심 버리면 즐거워요' 욕심으로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히 명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전파에 힘쓰라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자들은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증거하여야 하는지 그 내용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증거하여야 할 내용을 모르면서 단지 전도 많이 하자 사람 많이 교회로 데리고 오자, 그러면 이 세상에서도 상 받고 하늘나라에서도 상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교회로 데리고 오는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교회 한번 가주면 점심주고 차비까지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 많이 모으면 전도왕 시상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전도입니까? 전도란 십자가의 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죽임당한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렇다면 전도를 제대로 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돌을 던지든지 회개하든지 하는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도 있는데요? 제대로 증거하지 않아서 아직 알아듣지 못해서 그렇겠지요.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전도되지 않고서 무엇을 전도하겠습니까? 우리가 전도의 내용을 제대로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어떻게 전도한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설교란 전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시는 전도라는 것이 설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이 전도를 받았습니까? 여러분이 전도를 받고 있을 때 기분이 좋습니까? 안색이 변하여 집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들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교훈하면 회개합니까? 안색이 변하여 돌을 들어 치려고 하십니까? 차마 돌을 던지지는 못하지만 뒤에서 말로 된 돌을 던지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제대로 돌을 던지든지 회개하든지 하는 반응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제가 전도를 잘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참으로 증거하여야 할 내용이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사도행전 3:14-15절을 보았습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이것이 증거의 내용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고발하는 장치입니다. 사람들이 싫다고 죽여 버린 자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으니 이 세상은 어떻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시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세상에서 무엇을 기대하시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증거의 내용을 제대로 알게 되면 무엇을 하게 됩니까?


사도행전 3:18-19절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시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회개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신의 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으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서 가장 큰 복이 무엇입니까? "죄 사함"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유쾌함이 없습니다. 메가패스 깐다고 유쾌 상쾌 통쾌한 것이 아닙니다.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합니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거하여야 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들이 보는 가운데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리우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하늘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때 천사들이 무어라고 합니까?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에 대한 증거를 받습니다. 이것이 증거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증거를 받게 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것을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증거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26-28절입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의 피를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23-2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마실 때 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


바울 사도는 마지막 만찬 때에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께 받아서 전한 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의 의미였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증거의 내용이며 주님오실 때까지 우리가 믿고 증거할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1:6-8 증인이 되리라


 

6○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같은 본문으로 세 번째 말씀을 드립니다. 잠시 앞의 말씀을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을 받으리라고 하시자 성령이 임하면 종말이기에 그러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이때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러한 시기와 때는 너희의 알바가 아니고 너희는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증거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증거의 내용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를 주님 오실 때까지 증거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증인이 되도록 주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에 오늘 우리가 사는 이곳까지 복음이 증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입니까. 약 2,000년 전에 말씀하신 그 말씀이 지금도 틀림이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오늘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게 되는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증인, 즉 제자 삼는 일에 대하여 살펴보고 그러한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8:16-20절입니다. “16○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7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18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사도행전 1:8절과 함께 거의 외우다 시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란 말만 나오면 이 두 본문은 반드시 언급되는 것입니다. 증인되라고, 전도하라고 이것이 주님의 가장 큰 명령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에게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기에 가장 위대하고 큰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증인이 되자, 라는 것이 변질이 되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동원하면서 결국은 우리교회 사람 많이 모으자는 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많이 모아서 주님의 일도 멋있게 크게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증인이 되면 되는 것을 가지고 우리교회의 교인 만들기에 나서 버린 것입니다.


회원확보하기 위하여 온갖 선심정책을 펴는 기업체들처럼 교회마저 자기교회의 회원확보를 위하여 온갖 프로젝트가 동원되는 것입니다. 몇 일전에 이런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떤 여자분이였는데 다짜고짜 '차량운행 합니까' 하고서 묻는 것입니다. 거기가 교회입니까, 하고 묻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런 전화는 어디에 해야 됩니까? 백화점에 하는 것이지요. 백화점 셔틀 버스 운행합니까, 라고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로 전화를 했으면 그곳이 교회입니까? 말씀을 제대로 전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차량운행 합니까? 지하는 아닙니까? 그렇게 물어 보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까? 전도를 잘 못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는 곳이라면 거리와 장소가 문제입니까? 단지 나 하나 편하게 종교생활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죽어서 천당이나 가면 좋고 없으면 말고 하는 부스러기 모아서 보험하나 들어 놓은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시간도 물질도 내 마음대로 쓰고 남으면 교회 한번 가주고 헌금도 하고 하는 것은 취미생활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말씀이 우리는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천하를 얻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천하를 얻고도 지옥가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증인이란 제대로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증거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지난주에 증거의 내용을 어떤 식으로 증거하는 것인지를 마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에 의하여 위임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증인이 된 사람이 어떻게 또다시 증인을 세우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첫째 너희는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가서'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이 증인이 되는 자리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느 자리에서든지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가서 무엇을 합니까? 제자를 삼아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스승도 제자도 너무 많습니다. 얼마나 많이 양산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속성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 스승과 제자란 장인(匠人)과 도제(徒弟)의 관계로 스승과 제자가 됩니다. 예를 들자면 도자기 만드는 스승에게 가서 배우려면 어떻게 합니까? 그 도자기 배우기를 열망하는 사람이 유명한 도자기 스승에게 가면 받아 줍니까? 본체만체합니다. 그러면 집밖에서 무릎을 꿇고 제자로 받아 달라고 몇 날 몇 일을 간청합니다. 그러면 마지못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바로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삼년은 흙도 한번 만져보지 못하게 하고서 그저 청소나 시키고 밥이나 하고 빨래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겨우 배우고 익히게 합니다. 그리고서는 완전히 자기의 기술이 전수되면 제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30분만 하면 도자기 하나 만들고 오는 것입니다. 도자기 체험학습교실에 가면 30분 만에 반죽되어 있는 흙을 물레에 올려서 성형하는데 전문가가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스 불로 구워서 자기 이름 하나 새기고 오면 유약 발라서 구워 보내줍니다. 그런데 제대로 도자기 만드는 장인은 30년 걸려서 만들었는데 30분 걸려서 만들고 와서는 무어라고 합니까? 자기도 도자기 만들어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러한 모습은 아닙니까? 그러므로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기술의 전달이 아니라 한 인격의 전달인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가 같은 모습이 나와야 제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결국 예수님의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를 삼고, 입니다.


그 다음에 무엇입니까? 세례를 줍니다. 제자가 다 되고 나면 세례를 준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신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고난과 직결됩니다. 심지어 죽음까지 각오해야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예수 믿으면 바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란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의미는 연합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과 연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묶여 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힘과 의지와 능력으로 살아온 인생은 죽어버리고 이제는 모든 일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나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 세례인 것입니다. 단지 물 몇 방울 머리에 찍어 바르면서 하는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것이 세례인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요 증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 복음서에서 다 나와 있습니다. 그 많은 것을 어떻게 가르치고 지키라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기억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가르치고 지켜야 할지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가르침 가운데 몇 가지만 보고자 합니다. 이웃을 몇 번까지 용서하면 됩니까?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라고 하였을 때 주님께서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한한 용서입니다. 이러한 용서를 우리가 받았기에 마치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자이기에 용서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무한한 용서를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 우리는 용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벌써 12월 중순입니다. 아직도 무엇이 용서가 되지 않고 있습니까? 우리가 용서를 하지 않고 있다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 받고 오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 탕감하여 주지 않았다가 다시 잡혀 간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내용의 죄를 빚으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주는 것처럼 우리 빚을 탕감하여 주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이미 탕감 받는 자이기에 다른 사람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만이 아닙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ㅅ" 받침을 쓰는 것이 아니라 "ㅈ"받침을 쓰는 것입니다. 왜 나보다 남이 나은 것입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자비로 용서받은 죄인이기에 나보다 못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30분 만에 도자기 만들고 온 사람처럼 자기도 도자기 만들 줄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이루어지기 보다는 남을 가르치기에 바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제일 걸리는 사람이 물론 목사입니다. 그러나 목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얼마나 자기 잘난 맛에 사는지 모릅니다.


성경공부를 하든, 회의를 하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의 말이 먹혀들어야 기분이 좋은 것이 우리 모두의 모습인 것입니다. 자신의 말이 무시당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기분 나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과 동등 되시나 스스로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마땅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세상과 전혀 다른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이 천국을 맛보는 것입니다. 죽어서 좋은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천국을 맛보는 것입니다. 지금 천국과 연결이 되어 있지 않고서 어떻게 죽어서 천국을 가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것입니까? 내가 너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 그러므로 너희도 서로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숨은커녕 형제를 위하여 휴지 하나도 줍지 않는데 무슨 사랑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제대로 제자훈련을 받으려면 얼마나 걸리는 것입니까? 평생이 걸려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제가 좀 성급한 말을 하였습니다. 설교를 벌써 수백 번을 하였는데 무엇이 변화가 되었습니까,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떤 집사님께서 평생가야 하는 문제 아닙니까?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맞습니다, 평생 걸립니다. 그러니 만큼 다시 마음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안되면 다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무슨 운동을 하더라도 기본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기본이 되어 있지 않으면 나중에 고치기란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는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언제 제자가 되어서 남을 제자 삼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이렇게 제자가 되는 과정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제자 삼는 것입니다. 내가 완벽하게 제자가 되었기에 남을 제자 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 앞에서 제자의 삶, 증인의 삶이 나타나는 것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다시 제자로 삶는 것입니다. 마치 다섯 살 형이 세 살 난 동생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생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참된 선생은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자를 통하여 복음이 증거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이 이곳까지 오는데 약 2,000년이 걸린 것입니다. 요즘같이 통신이 발달한 세상에서 인공위성으로 복음을 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전 세계에 한꺼번에 전하여 버리면 하루아침에 전하게 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복음이란 결코 그렇게 전하여 지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전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도 주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셔서 자기의 복음의 증인이 되도록 친히 하늘에서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주님의 증인으로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날마다 주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 말씀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그 이후에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말씀으로 우리에게까지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또 증거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바로 땅 끝입니다. 물론 복음을 듣지 못한 지역에 복음을 전하여야 하기도 합니다만 우리가 사는 곳이 바로 땅 끝이라고 보면 가는 곳 마다 전도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회식자리에서 우리 단체 잘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증인이 우리의 삶의 목표여야 합니다. 증인의 삶입니다. 나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왜 죽으셔야 하셨는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증거가 성령이 임하시고(2장), 예루살렘(3-7장)과, 유다와 사마리아(8-12장), 땅 끝까지(13-28장)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 길목에서 우리가 복음을 들은 것입니다. 이 주님의 한 마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들리고 그래서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이 말씀은 아직도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약속하신 대로 되고야 말 것입니다.



사도행전 1:9-11 다시 오시리라



9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은 너희의 알바가 아니고 너희는 성령이 임하게 되면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서 그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올리워 지신 것입니다. 그때 구름이 가려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때 두 천사가 나타나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가셨다는 것은 우리가 보는 비를 머금고 있는 구름과 다른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빽빽한 구름이 가리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데 그러한 구름이 나타난 것입니다. 엘리야가 승천할 때에 불수레를 타고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러한 초자연적인 영광의 모습인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천군천사들을 대동하시고 이러한 영광의 주로, 심판의 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의 말씀을 믿으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사람들과 다르게 살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삶의 목표요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악착같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방향과 목표와 초점이 땅만 바라보는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단지 윤리 도덕적으로 조금 착한 것입니까? 그러나 요즈음은 이러한 말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지독하고 더 악착같다는 말을 우리가 다 듣고 있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까? 우리 모두가 예수 믿고서 이 세상을 떠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어가면서까지 이 세상에서 더 살아남으려고 하고 있기에 그렇다고 봅니다. 그러니 어떻게 주님의 재림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말로서는 믿는다고 하면서 행위로는 부인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표를 다시 분명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이 하늘로 쳐다보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이제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 천사들이 지금 무엇을 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는 것은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셨는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도 역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관심사는 언제 예수님께서 오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치 제자들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것이 이때입니까, 라고 물은 것처럼 언제 오시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실컷 놀다가 예수님 오시기 직전에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세상 끝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4:1-14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오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의 건물을 자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고 합니다. 그리고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언제 이런 일이 있겠으며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유혹할 것이며 또 세상은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전쟁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이러한 일이 마구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지금까지 세상은 늘 기근과 지진과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늘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도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재림예수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 직전에 이러한 일이 마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종말이란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종말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한 시점에 이러한 일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종말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미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PD수첩에서 정명석씨에 대하여 다루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정명석씨에게 빠진 사람들이 정명석씨를 재림예수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11절 말씀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반박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자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그 구름이 하늘의 구름이 아니라 허다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절에 구름같이 둘러선 허다한 증인들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정명석의 곁에 얼마나 허다한 증인들이 둘러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이단들이 자신을 재림예수라고 하지만 초림예수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림 예수가 이 땅에 왔을 때 핍박받은 것을 가지고 자기들이 핍박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재림예수님은 핍박받으시려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려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영광 중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어느 누가 재림예수라고 하여도 믿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증거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를 찌른 자들도 그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미혹에도 흔들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영적인 부분이라고 본다면 기상재해나 전쟁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처처에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뉴스를 보면 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징조를 통하여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하였다고 모든 직장도 그만두고 기도원에 모여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상의 기근과 지진과 전쟁들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보아라, 이 세상은 영원히 살 곳이 못되지, 그러니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라는 종말적 사인인 것입니다.


지금 아르헨티나의 사태를 보셨습니까? 우리나라와 별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사태가 우리나라에 닥치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저러한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래, 저런 일이 언제 닥칠지 모르니 안전한 은행에 적금을 많이 해두고, 보험도 들어두자, 그리고 그러한 조짐이 있으면 미리미리 사재기라도 해놓자, 그런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전에 컴퓨터가 2,000년을 인식하지 못하면 혼동이 온다고 하였을 때 예수 믿는 다른 사람이 생수를 사다 놓고 라면을 사다 놓았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어떤 환난이 닥친다, 그러면 아르헨티나의 꼴이 왜 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흉흉한 세상에서 어떻게 헌금을 하고 구제를 하고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믿든지 아니 믿든지 간에 주님의 말씀은 이미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하신 바대로 이루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재림이 오고, 믿지 않는다고 재림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32-39절을 봅니다. "봉독" 노아홍수 때에 사람들이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든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죄가 아니라 그것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땅의 일만 생각한 자들입니다. 노아가 배를 만드는 것을 보고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알뜰살뜰 결혼 준비하고 결혼하여 살림장만하고 주택부금 넣고 자녀 교육시키고는 있었는데 홍수로 다 멸하여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심판당할 날이 있음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이 선포되어도 우리는 노아의 시대와 꼭 같습니다. 인자가 임하는 날이 노아 시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자가 임할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처에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고 나라가 부도가 나는 것을 보면서 떠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알뜰살뜰 모아놓고 살아도 나라가 부도가 나면 모두가 휴지조각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부동산을 붙드는 것입니다. 동산보다 부동산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신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 땅이라고 하면서 교만하게 자기 것처럼 행사하는 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베드로후서 3:1-13절입니다. "봉독" 땅이 영원하리라고 믿습니까? 동산은 불안하지만 부동산은 영원하리라고 보십니까? 전쟁이 일어나면 아무른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그 땅에 살던 사람이 다 죽어버리는데 누가 자기 땅이라고 주장할 것이 있습니까? 삼국시대 때 창원은 어느 땅이었습니까?


죽자고 피 흘리며 싸웠지만 누가 이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전쟁과 기근과 지진을 보면서 결국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은 영원하지 않는 것이구나,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후서는 아주 직접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은 불에 타버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여러분이 어떻게 듣고 계시는지 주님과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도 알게 됩니다. 노아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주님의 재림을 믿는다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듯이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고 있는 모습이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그 삶의 모습은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고 하니 교회에 많이 바치면 됩니까? 그런데 교회도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축재를 하게 되면 역시 땅에 보물을 쌓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선한 사업에 부요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부요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지 여러분이 몰라서 하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이 망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결국 믿음이 없기에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종말적인 삶을 살지 않는데 어떻게 죽어서 천국 갈 생각을 하십니까? 지금 그 나라를 소망하지 않는데 어떻게 영원한 기업에 들어갈 생각을 하십니까? 정말 천국이 있음을, 지옥이 있음을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믿는다면 결단코 우리의 삶이 이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청년 때에 저의 부모님이 도시로 이사를 왔습니다. 농사를 짓다가 나이가 드시고 자녀들은 도시에 있으니 도시로 이사를 왔습니다. 제가 가서 이삿짐을 꾸려서 내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농사짓던 농기구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 버리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소를 끌고 오겠습니까? 헛간을 가지고 오겠습니까? 이러한 정리를 하루 만에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미리미리 정리를 하면 동네사람들이 눈치를 채는 것입니다. 저 집도 이사를 가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는 영원한 집으로 이사를 가야할 사람들입니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온갖 죄악만 가득한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젠가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떠날 준비를 도대체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분은 왜 빨리 안 오시느냐고 합니다. 왜 아직 주님이 오시지 않으신 것입니까? 주님의 택하신 자들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되고 주의 백성이 모두 주께로 돌아오면 그제서야 주님께서 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들이 다 회개하고 돌아오기까지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만약 일년 전에 주님이 임하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지금 당장 주님께서 임하신다면 우리 가운데 얼마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해 보시기를 지금 우리 성도들 가운데 누가 천국에 지금 들어가도 되겠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세상의 미련을 버리는 정도만이 아니라 성품적으로도 주님을 사모하는 수준이 되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히브리서 11:13-16절입니다. "봉독"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주님은 재림하십니다.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떠한 자가 되어야 하겠는지를 이번 성탄주간에 들뜨지 마시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깊이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1:12-14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1)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2)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서는 기도에 전혀 힘을 씁니다. 기도에 전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였을까요? 1:4-5절 말씀을 봅니다. "4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곳입니다.


그리고 1:8절에 보시면 복음의 진원지가 예루살렘입니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원을 그리며 나가듯이 복음의 진원지가 예루살렘인 것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 예루살렘의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도 증거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약속의 위력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에서 약속하신 것을 받기까지 그 성을 떠나지 않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 약속이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가장 큰 오해가 무언가 하면 무엇이나 기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만사형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다가 안 되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하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기도하여 능력 받아서 이루어 내자고 하는 것입니다. 올해에 이루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하지 못하여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반드시 여러분의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40일 특별새벽기도회를 합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면 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번 연말연시의 특별기도회를 통하여 여러분의 소원하는 바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광고하고 설교하면 아마 거의 다 오실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박영선 목사의 설교에서 그대로 인용을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완성에 자리에 가기까지는 죽지도 못합니다. 절대로 못 죽습니다. 신자는 이렇게 되고야 마는 존재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기 위하여 우리에게 인생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써 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겪는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을 이루시고 거룩을 이루시고 영광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의 인생에 비극은 없습니다.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그것도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요, 사업이 망하면 그것도 우리의 축복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축복이지 예수 믿고 기도했더니 어제 산 증권이 오늘 배로 오르고 어제 잠만 자고 간 아이가 백점을 받는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그런 축복이 생기기 시작하면 남포 증권거래소로 교회 간판을 갈아야 됩니다. 속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가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이런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어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들이 종교부지를 신청하였습니다. 창원시 기독교연합회에서 추천을 하여야 종교부지를 받을 수 있는데 여러 가지 항목을 점수화하여 가장 높은 순위가 받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연합회에서 그렇게 하다 보니 부작용이 많아서 올해부터 다르게 선정을 한 것입니다. 기본적인 자격이 되는 교회들을 선정하여 제비뽑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제비뽑기를 한다는 연락을 받고서 교회로 왔는데 어느 교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 교회는 봉곡동에서 개척한지 10년이 되었고 봉곡동 지역을 전도하리라는 뜻을 가지고 교회 이름도 ‘봉림교회’라고 지었고 그리고 봉곡동의 종교부지가 나왔을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것이라고 100% 믿고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설계도까지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연합회 회비도 내고 활동도 하였기에 자기들이 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제비뽑기를 한다고 하니 우리교회에 전화를 해서 자기들은 100% 될 줄 믿고 신청하였다는 말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은근히 당신 교회에서 취소하여 주면 어떻겠는가 하는 암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100% 믿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래서 전도를 하였지요. 저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성도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100% 된다고 하였다가 되지 않으면 성도들에게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종교부지가 주어지고, 아니고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지 않습니까?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확률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12월 27일 오전 7시에 제비뽑기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교회가 당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럴 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우리교회가 안되는 것은 상관이 없는데 그 교회가 되면 어떻게 되나, 걱정을 하였습니다.


오히려 다른 교회가 되었더라면 하였는데 그 교회가 당첨이 된 것입니다. 이제 더욱 확신에 확신을 거듭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고 준비하였더니 우리에게 이 땅이 허락이 되었습니다, 이제 건축을 시작합시다, 비록 땅값도 제대로 되지 않지만 주실 줄 믿고 시작합시다. 그렇게 시작하여 부도가 난 교회가 한두 곳이 아닙니다. 아마 그 목사님은 오늘 설교시에 저는 100% 될 줄 믿었는데 어느 교회 목사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확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교회는 안 되고 우리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설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이 무엇을 위하여 전혀 기도에 힘 써야 할지를 말씀드리고자 이러한 예화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까? 주님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기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 것들은 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은 자기들이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러니 그러한 것들을 구하고 염려하고 근심하고 걱정합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그러한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됩니다. 자녀에게 부모가 공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강조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세상을 살아보니 공부 잘하는 것이 그 아이의 장래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부모 돕는다고 길에 다니면서 빈병 주워 팔아서 부모님께 용돈 드리는 것을 기뻐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무능력하여서 우리에게 이것저것을 하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적이 생각과 방법으로 이 세상에 통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보탬을 줄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신 마태복음의 말씀에서 그리하면 무엇을 주신다고 하셨습니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좋은 것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것이란 언제나 세상적인 것입니다. 땅의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신령한 것들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구하고 찾고 두르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누가복음 11장에서 봅니다.


누가복음 11:1-13절입니다. "봉독" 이 본문의 말씀은 제자들이 기도에 대하여 가르쳐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간단히 살펴보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내 이름이 높아지기를 기도합니다. 능력을 주셔도 우리 교회에 주시고, 우리 교회에서도 나에게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나라이 임하옵시며, 입니다. 주기도문에 ‘나라이’가 되어 있는데 주격조사에 은,는,이,가가 붙는데 여기에 이를 붙인 것입니다. 요즈음 알아듣기 쉽게 하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민국이 없습니다. 통일문제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인양 여기는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입니다. 미국에서도 이러한 생각의 골수분자들이 백인이며 앵글로색슨이며 청교도들이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부시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우리나라를 건드리다니 하면서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클린턴은 비록 바람을 피워도 무어라고 합니까? 미국이 반성해야 된다고 합니다. 얼마나 커다란 시각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까? 카터 같은 경우는 침례교입니다.


그러니 부시와는 전혀 다른 정책을 편 것입니다. 이러한대도 우리는 늘 기도하기를 우리나라 우리나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대한민국의 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사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이러한 주님의 가르쳐주신 기도를 하는 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그리고 밤중에 손님이 왔는데 빵이 없어서 옆집에 빌리러 간 것입니다. 간청하여 받았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식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겠으며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자가 있겠는가 하시는 것입니다. 생선처럼 생긴 뱀을 아이가 생선인줄 알고 달라고 한다고 뱀을 집어서 줄 아비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떡처럼 생긴 돌멩이를 보고서 떡인 줄 알고 달라고 한다고 아비가 돌을 먹으라고 주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악한 아비라고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천부께서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주님의 약속인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하였기에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라 약속 때문에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기도를 하라고 한 것입니까? 이것은 성령이 임하는 것이 사람들이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애를 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까? 힘써서 기도하는 것이 노력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기도란 노력이 아니라 자기 부인입니다. 나에게서 신령한 것이라고는 결코 나올 수가 없다는 고백이 기도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들은 철저하게 아버지로부터 오는 선물이어야 하는 것이기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기도하여서 무엇을 받았다고 할 때 그 사람의 기도가 자기의 행위나 공로인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인지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기도 자체가 자기의 공로와 자기의 의가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제대로 하면 할수록 자신이 더욱 없어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자기의 공로나 의로 알고 있는 자들은 기도 많이 한 것으로 남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얼마나 많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합니다. 기도에 전념한다는 것입니다. 1:24절에 제자를 보충하는 일에도 기도합니다. 2:42절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합니다. 6:4절을 봅니다. 사도들의 주 임무가 기도와 말씀입니다. 이처럼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고서 무어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3:12절입니다.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이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일어나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여, 무엇을 기도하시겠습니까? 성경에 주님의 약속들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땅에 속한 것을 위하여 생각하지 마시고, 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위엣 것을 찾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안개 같은 것들을 찾느라고 온 인생을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렇게 살려 두심을 땅에서 잘 먹고 잘살라고 살려 두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을 준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오늘 밤에 안녕할 준비를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참으로 힘써, 애써 기도에 전무하여야 할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힘을 써서 돈을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철야도 하고 금식도 하시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있는 바를 족한 줄 알게 하옵소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으매 감사하게 하옵소서! 이러한 것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요 내용인 것입니다.


오늘이 2001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해를 돌아보면서 참으로 주님의 크신 은혜로 지내 왔습니다. 우리의 행한 대로 갚으셨다면 벌써 끝장이 났어야 될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러함에도 긍휼과 자비가 무궁하시기에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 왔습니다. 이제 새해를 어떻게 사시렵니까? 오늘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을 따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 밤에 우리의 영혼을 찾으실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15-26  성경이 응하였으니


 

15○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16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3)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19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ㄱ)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ㄴ)그 4)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바 되어 25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새해 첫 주일입니다. 새해에 대부분 인사를 하면 무슨 인사를 합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합니다. 그러한 인사를 하면서 몇 마디 더 덕담을 하면 무슨 말을 합니까? 새해에는 계획하는 일들이 다 잘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연말에 몇 곳에서 성탄카드와 연하장이 왔습니다. 그 중에 이인제씨와 한화갑씨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정보가 빠른지 저의 이름으로 카드가 왔습니다. 그 인사말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망과 꿈과 기대가 우리가 모두 소원하고 바라는 것이기에 인용을 하는 것입니다.


"아쉬움 속에 한해가 저물고 꿈과 사랑 가득한 새해가 밝아 옵니다. 평소 베풀어 주신 성원에 감사드리며, 우리 모두 땀과 정성을 한데 모아 희망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승리의 한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즐거운 성탄과 복된 한해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연하장을 한 사람은 두 번이나 똑 같은 것으로 보냈습니다. 좋은 인사말 아닙니까?


우리 모두 땀과 정성을 모아 희망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승리의 한해가 되기를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두가 꿈꾸며 바라는 것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해맞이를 하면서 소원을 빌고 양력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음력에도 하고 태양에게만 빌어서 부족하니 정월 대보름날에 달에게도 빌고 그것도 부족하니 하나님 부처님 다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꿈과 소망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소망과 복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주보가 새롭게 나왔습니다. 주보 뒷면에 무슨 제목이 있습니까? 탈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이 세상에서 탈출시키는데 목적이 있어서 이 땅에 왔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사말이 기분이 좋습니까? 여러분들이 새해에 소원하는 일들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송구영신예배 감사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해에 좋은 것을 주실 줄 믿고 미리 믿음으로 신년감사헌금도 바치라, 그러면 헌금 안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회마저도 주지 않으려고 송구영신예배도 없고, 신년감사헌금 봉투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소원은 탈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마시고 한시라도 탈출을 준비하며 삽시다. 어떤 인사가 여러분에게 기쁨이 됩니까?


여러분이 무엇을 기뻐하든지 간에 이미 주님의 말씀은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나의 뜻과 꿈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기 보다는 우리가 주로 고백하는 예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사셨기 때문에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을 때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여, 주여 라고 하면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구하는 것이어야지 내 뜻이 이루기 위하여 주여, 주여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안에 주님의 말씀이 거하심으로 주님의 뜻대로 간구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입으로 나올지라도 주님의 뜻이기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주님의 말씀이 응하였으니 하는 것에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보기에 좋든, 좋지 않든, 합리적이던, 아니던 간에 주님의 말씀이 응한다는 것을 믿고 사는 사람이 성도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뽑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신하고 은 30에 팔아넘기고 자신은 목매어 자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은 30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마태복음 27:3-10절을 봅니다. "3○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ㄱ)저희가 그 정가 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예레미야서가 아니라 스가랴서 11장의 내용입니다. 왜 예레미야라고 하였는가 하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대표적이기에 그렇게 보았다고 합니다. 스가랴 11장의 은 30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를 싫어한다는 내용입니다. 목자를 싫어하여 은 30에 팔아넘긴다는 선지자의 예언을 가룟 유다가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만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다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12사도 중에 가룟 유다만인가 모두가 배신을 하였지 않습니까?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무어라고 합니까?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긴다고 말씀하십니다. 토기장이가 자기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은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공평하지 못한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면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여 주셔야지 왜 누구는 버려두고 누구는 구원하여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한 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인간의 죄된 사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한 자는 자신이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이 오직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만이 당연한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은 다른 것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얻는다는 것만이 가장 귀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인중의 괴수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아니라면 벌써 우리 안에 어떤 교만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성경이 응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 응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베드로가 시편을 인용하여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의탁하여 가룟 유다에 대하여 예언하였다는 것입니다. 시편 69편 25절과 109편 8절을 인용합니다.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가룟 유다 대신에 보충할 자를 천거하였습니다. 이러한 것까지 말씀이 응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응하였다는 것이 성경전체의 흐름이고, 역시 사도행전의 흐름인 것입니다. 몇 곳의 말씀을 봅니다.


2:16절.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성령이 임한 것을 술취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하자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20-26절. "봉독" 선지자들의 예언한 내용들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씨, 사무엘 때로부터 말해온 선지자들이 모두 이 때를 말하여 한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4:11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시편 118:22절의 말씀의 성취인 것입니다. 4:25-26절. "25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ㄴ)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시편 2편의 인용입니다.


더 많지만 여기까지만 봅니다. 결국 이러한 말씀대로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가 없어졌다고 왜 한 사람을 더 추가하여 열둘을 채우는 것입니까? 이것은 주님께서 처음 열둘을 부르실 때를 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3:13-19절입니다. "13○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16이 열 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1)가나안인 시몬이며 19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


열두 제자를 세우시는데 주님이 원하시는 자들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왜 열둘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지파가 열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수세기 전에 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앗수르에 망하여 혼혈이 되어 버렸습니다. 남쪽 유다와 베냐민만 조금 남았다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열둘은 구약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고 있지만 구약 그대로의 열두 지파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열둘을 새우심은 이제 주님께서 새롭게 이스라엘을 창조하신다는 것입니다.


14절에 "세우시니"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창조하셨다" "만드셨다"로 번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둘을 불러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결원된 한명을 세우는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제비뽑기를 하여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선택하는데 두 사람 다 자격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3년을 동행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고 죽으심과 부활의 목격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 중에 두 사람이 추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제비를 뽑았는데 맛디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요즈음도 제비뽑기를 합니다. 저희 교단에서 총회임원을 제비뽑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이다, 아니다로 갑론을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서는 제비를 뽑았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밝히 인도를 받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요즈음 제비뽑기가 나오는가 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할 만큼 우리의 영적인 안목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얼마나 부정이 많고 타락한 선거였으면 제비뽑기를 해야만 선거가 깨끗하여 진다고 여기고 제비를 뽑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 가룟 유다도 부르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강퍅하게 하여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바로왕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의 그릇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성경이 응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8-35절입니다. "봉독" 성탄 메시지였습니다만 한 번 더 봅니다. 예수님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패함과 흥함을 위한 것입니다. 모두 다 흥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비방의 표적이 됩니다.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한다면 비방 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늘도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을 드러내어 버립니다. 어떤 생각입니까? 우리 모두 힘을 합하여 새해에는 더욱 뜻하는 일들이 잘 되도록 해 봅시다. 우리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러니 인류가 발전하고 잘되는 일이라면 마음을 합하여 잘해 봅시다. 이러한 세상을 두 쪽으로 나누어 버리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아닌가로 나누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응하는 모습니다.


새해에 소망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것이 소망이요 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2:1-4  오순절 성령강림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늘 말씀에 보니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그동안 사도행전 1장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는 사도행전 그러면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엄청난 일들을 감당하였다, 그러니 우리도 기도하여 성령 충만을 받아 큰 능력을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식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하여 오다 보니 성령이 임하셔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시는지는 등한히 하게 되고 자꾸만 외형적이고 물량적인 면으로 흐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주 수요일 저녁에 데살로니가후서를 마치면서 바울사도가 마지막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부하는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하지 말라는 지극히 사소하여 보이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서 성령강림이 무슨 의미인지를 다시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선 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게 되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먼저 구약에서 오순절이 무슨 절기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3대 절기가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입니다.


신명기 16:1-17절을 봅니다. "봉독" 유월절은 무교절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누룩 없는 떡을 먹는 것입니다. 이 무교절로부터 7주를 계산합니다. 그러면 49일이 됩니다. 다음날이 오십일이니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순은 십을 뜻합니다. 그래서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때 여름곡식을 거둘 때이기에 맥추절 또는 초실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다음에 가을 추수를 거두는 때가 초막절입니다. 이러한 절기를 왜 지키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아 나온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여 너와 네 자녀와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3:15-21절을 봅니다. "15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16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17 너희 처소에서 에바 십분 이로 만든 떡 두개를 가져다가 흔들찌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 18 너희는 또 이 떡과 함께 일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 수양 둘을 드리되 이들을 그 소제와 그 전제와 함께 여호와께 드려서 번제를 삼을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며 19 또 수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며 일년 된 어린 수양 둘을 화목제 희생으로 드릴 것이요 20 제사장은 그 첫이삭의 떡과 함께 그 두 어린 양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 것이요 이것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인즉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며 21 이 날에 너희는 너희 중에 성회를 공포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여기서 안식일 이튿날,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이 무교절 지난날, 곧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7주를 계산한 날이 오순절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절기가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연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사역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9절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며 무어라고 합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거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은 바로 유월절 어린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10가지 재앙 중에서 마지막 재앙이 장자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살아남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의 규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언제 잡히시는 것입니까? 유월절과 무교절에 잡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 만찬인 것입니다. 그 날로부터 일주일간 무교절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은 안식 후 첫날입니다. 무교절 다음날입니다. 그리고 40일을 지상에 계시다가 승천하시고 10일 만에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절기가 언제입니까? 수장절이라고 합니다. 7월10일 대속죄일을 지나고 나서 7월 15일간 곡식을 거두어들인다는 뜻에서 수장절이고 이때 초막을 지어서 일주일간 거한다고 해서 초막절입니다. 초막을 짓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3대 절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과 연결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남은 절기라면 수장절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사건이 나중에 어느 특정한 날이 아니라 이미 시작이 된 것입니다. 물론 주님 재림으로 확정이 되겠지만 이미 지금 여기서 그러한 종말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 오심이 종말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요엘 선지자를 인용하면서 말세에 하나님의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이 임한 사건은 이제 말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세라고 해서 세상의 난리와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되는 것이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고 끝내시면 그것이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성령이 임하니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와 불의 혀 같은 것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흉내 내기 위하여 오늘도 이상한 바람소리를 마이크로 내면서 불 받아라, 그러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이야 많이 시들하여 졌습니다만 한동안 오순절 계통에서 그러한 일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자 장로교 계통에서도 그러한 일들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습니다만 성령이 임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성령을 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사도행전 2:33절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의 현상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특정인이었습니다. 그것도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임하기도 하였고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종말에 임하신 성령의 강림은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람소리란 하나님의 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호흡을 불어 넣으셨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람이다, 숨이다,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란 하나님의 영이 임하신 것입니다.


마치 에스겔서에서 마른 뼈다귀들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고서 살아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바람, 숨, 영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불의 혀와 같다는 것은 불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소멸하고 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내용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오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처소 삼고 함께 살기 위하셔서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4절입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1)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을 처소를 마련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처소란 천국의 아파트가 아니라 성령이라고 전에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구속하시고 부활 승천하여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 더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을 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심은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하신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함께 살기 보다는 나는 내 마음대로 살겠는데 가끔씩 내가 도움을 요청할 때 도와주는 스폰서로만 계셔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17-20절을 봅니다.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세상은 성령을 받지 못합니다.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성령이 성도와 함께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날에, 즉 오순절 날에 알게 될 것이며, 그 다음은 성령이 임하게 되면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주와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지금 주님과 함께 살고 있어야 성도입니다. 그러면 지금 내게 과연 주의 성령이 임하였는가? 질문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급한 바람소리도 못 들었고, 불도 보지 못하였고, 방언도 하지 못하였는데 과연 성령이 임한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 날 일어난 사건들이 오늘도 일어나야 한다면서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순절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성령의 취임식이라고도 합니다. 대통령이 취임식을 할 때 요란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날마다 취임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대통령이라면 자기의 직무에 말없이 충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께서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로마서 8:14-15절입니다.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자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끝난 '피아노'라는 드라마에서 친 아버지가 아닌 사람을 아버지로 들어왔고 그 때문에 자기 어머니가 죽게 되자 얼마나 분개합니까? 그런데 그 아버지가 끝까지 자식들을 사랑합니다. 결국 그 아들대신에 죽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아들이 오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세력 안에 붙들려 있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가 구출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얻게 된 신분과 지위를 성령이 임하셔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사람은 걱정 근심이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걱정과 염려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임한 사람은 날마다 우리 안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니 그 영광의 기업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이란다, 그러니 지금 당하는 고난들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란다, 이러한 위로와 힘을 받고 사는 사람이 성령이 임한 자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을 봅니다.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입니다, 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닙니다. 나의 시간도 몸도 물질도 모두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을 내가 주장하는 것이 주님께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는 것이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안되지요?


그러나 이러한 것이 오늘날 성령이 임한 사람이고 이러한 자들은 지금도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갈등이 일어나고 고민이 되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성령이 임하였기에 그러한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수록 더 예민하여 질 것입니다.


에베소서 2:20-22절입니다. "봉독" 이러한 주님의 약속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2:5-13  성령강림과 방언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2:4절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방언에 대하여 한번쯤은 생각하여 보았을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방언을 하게 되는가? 그렇다, 아니다, 논란도 많았습니다. 오순절 계통에서는 방언을 해야 고급한 신자처럼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면 아직도 초보이고 방언을 해야 성령의 충만을 받은 증거이고 능력 있는 신자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너도 나도 방언을 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말을 빨리 해보기도 하고 같은 말을 빠르게 반복하여 보기도 하다가 이상한 말이 터져 나오면 방언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언을 훈련해서 받도록 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70년대에 이러한 바람이 기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나자 장로교단에서도 여러 가지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방언이란 횡설수설 하는 말이나 종교적인 엑스타시에 빠져서 황홀경에서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외국어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통역이 필요한 방언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도 복음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방언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거의 모두가 분명한 외국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방언에 대하여 먼저 구약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보고 사도행전의 방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 인류는 하나였고 그래서 언어도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바벨탑 사건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이후에 땅에 흩어져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흩어지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높은 탑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흩어짐을 면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해버리심으로 흩어 버리신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인간의 언어가 여러 가지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더욱 다양한 사투리가 생겼을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방언들이 하나로 된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즉 성령이 임하심으로 언어의 장벽이 넘어 섰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큰 일이 유대인에게만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대로 땅 끝까지 증거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언어가 다른 민족이 쳐들어오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곧 심판이기도 한 것입니다.


신명기 28:49절. "곧 여호와께서 원방에서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의 날음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함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언어가 다른 민족이 이스라엘을 치러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28:11절에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구약에서 다른 방언이 나타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외국 나라가 쳐들어오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방언이 다른 나라가 쳐들어오게 됨을 통하여 심판과 회개의 촉구가 들어 있기도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고를 하나님께서 여러 번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스라엘이 방언을 쓰는 나라에 의하여 망하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 유다는 바벨론에 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 하는 동안에 그들의 언어가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일상적인 언어들이 바벨론 언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단지 민족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하는 회복인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방언이란 심판의 징조를 의미하고 은혜 받은 이방인에게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더불어 새로운 이스라엘에 참여하게 된다는 징조라는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미 예수님께서 방언에 대하여 예언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17절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라고 합니다. 새 방언을 말한다고 합니다. 새로운 언어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취가 언제 일어납니까? 오순절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서 방언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신비한 말이 아니라 분명히 알아듣는 말이었습니다. 이 오순절 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합니다.


유대인으로서 각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들이 무려 15개 지방에서 모였습니다. 엄청난 인구가 몰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외국에서 태어났기에 히브리어 보다 외국어를 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주로 갈릴리 사람들인데 어떻게 자기들이 태어난 곳의 말을 그렇게 잘하는가 하고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제자들이 방언을 한 것은 신비한 말이 아니라 외국어인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민족과 혈통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만들어진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안에는 언어와 종족과 문화의 벽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방언이 심판의 기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의 방언도 역시 심판의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어 자체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도대체 제자들이 전하고 있는 그 방언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는도다" 방언이 어느 나라의 말로 되었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언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큰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큰일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이어서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오늘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이미 요엘서에서 예언 된 대로 성령이 임하신 것이며 그리고 성령이 임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큰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방언을 한다고 이상한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는 것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서 그러한 경험들을 하신 분이 있을 줄 압니다만 성경을 보니 방언이란 그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현상으로 황홀경에 들어가서 이상한 말을 하는 일들이 오늘날 여러 종교에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현상들에 마음 두지 마시고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14-36절입니다. “14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ㄱ)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1)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ㄴ)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2)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ㄷ)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것이 베드로가 증거한 하나님의 큰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증거를 받고도 아무른 느낌이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제가 방언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심판의 소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알아듣는 자는 어찌 할꼬, 하면서 회개합니다. 그때 하는 말이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3)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러한 반응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큰 일이 증거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이 없는 것은 생소한 방언 한마디 들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외국인의 말을 못 알아들으면 솰라 솰라 한다고 말합니다. 무엇이라고 말은 하였지만 못 알아들으니 그러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여 보십시오, 그러면 두 가지 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사도행전 2:12-13절의 내용처럼 놀라는 사람과 조롱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입니다. 놀라는 사람들은 그러면 어찌할꼬, 할 것이고 조롱하는 자들은 돌로 치려고 할 것입니다. 직접 돌로 치지는 못하니 배척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복음이란 방언처럼 증거되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에서 방언을 쓰는 자들이 들어오는 것이 심판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4:20-25절을 봅니다.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바 ㄱ)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3)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복음이 증거 되면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이상한 말들이 튀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증거 되면서 우리 속의 것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죄임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나의 자존심을 위하여, 내 살기 위하여, 내 가정 지키려고, 내 교회 잘되게 하려고 예수를 불렀는데 그런데 그것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임 당한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이 말씀 앞에 우리는 어떤 자로 서 있는 것입니까?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2:14-21  예언 환상 꿈 



14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ㄱ)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고 제자들이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증거합니다. 여기서 방언이란 분명한 외국어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하나님의 큰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술이 취하면 아주 소심하던 사람이 갑자가 큰 소리 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도 아주 황당한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마치 자기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큰 소리를 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큰일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메시아라고 하면서 그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그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셔서 성령을 보내셨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술이 취하여 헛소리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과 베드로가 성령이 임하게 된 것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14-15절을 봅니다. 아주 큰 소리로 외칩니다.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삼시란 우리 시간으로 환산을 하면 아침 아홉시입니다. 그러니 아침 아홉시부터 새 술에 취하여 이러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침에는 고기와 술을 먹지 아니하는 전통이 있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아침에는 만나를 주시고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주신다는 말씀이 있지요. 그러니 그들은 아침에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는데 어떻게 아침 아홉시인데 술이 취하여 이렇겠느냐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방언을 하면서 하나님의 큰일을 증거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요엘 선지자의 예언한 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17-21절입니다. "봉독" 이 말씀이 성취가 된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방언을 이상한 말하는 것처럼 오해 하듯이 성령이 임하면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꾼다는 내용을 또 어떻게 오해하는가 하면 점쟁이들이 입신하여 과거를 말하고 장래를 말하고 꿈을 해몽하고 하는 식으로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면 기도 받는다고 합니다. 유명한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예언기도 받는다고 합니다. 말로는 주여, 주여 하고 하나님을 거론하지만 점쟁이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가는 것이 예언, 환상, 꿈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신비주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오해는 자녀들이 예언하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늙은이가 꿈을 꾼다고 하니 인간의 희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그렇게 자주 말하는 비전인 것입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그런 내용으로 예언과 환상과 꿈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학생회 수련회 주제가 '예수 우리의 희망'이었습니다. 주제는 좋습니다. 소망이라는 말이 더 성경적이지만 젊은 학생을 배려하여 희망이라고 말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강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꿈을 가져라, 장래 희망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학생들을 불러내어서 장래 희망이 무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꿈을 말하는 아이들도 있고 아직 없다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 하나가 장래 희망이 무어냐고 물으니 '의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엄마는 정신과 의사가 되라고 하는데 하면서 말을 흐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말을 중단시켜서 더 듣지는 못하였습니다만 아마 다른 희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초등학교 6학년이 정신과 의사가 무언지가 알겠습니까? 제일 돈 많이 버는 의사가 아니겠습니까? 요즈음 의사도 힘든 과는 지원을 안 한다고 합니다. 편한 과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장래의 희망이라는 것이 엄마의 욕심과 자신의 욕심이 한데 어울려 나오는 욕망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누가 꿈을 가지라고 하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아주 대단한 꿈들을 다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꿈이란 이 세상이 모두 자기 것이라는 꿈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그 꿈이 좌절이 되어지지만 그러나 결국 그러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헛됨 꿈의 포로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 대는 비록 이렇게 희생을 하고 고생을 하지만 그러나 나의 자식 대는 빛을 보아야지 아들아 내가 몸이 부수어 지는 한이 있더라고 너의 뒷바라지를 할 테니 너는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 하여라' 이것이 또 다른 꿈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야망들이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에게서부터 생긴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을 때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너도 할 수 있다. 선악과만 따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유혹을 지금도 모든 인류가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인데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왜 내 꿈을 이루어 주지 않느냐고 금식과 철야로 농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목회 성공의 욕망을 가지고,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 성공의 꿈을 가지고, 각자가 각양의 소원을 가지고 환상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 환상, 꿈을 크게 두 가지로 오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와 인간의 야망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과 환상과 꿈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요엘서는 선지서입니다. 그러면 선지자들이 꿈꾸어 왔던 내용들이 무엇이었습니까?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시대는 주로 구약의 왕들의 시대입니다.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하면 백성들이 복을 받지만 왕들이 잘못하면 백성들은 함께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선지자들이 나와서 왕과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심판의 와중에서도 늘 하나의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들이 바로 예언이요 환상이요 꿈이었습니다. 


그러면 선지자 그러면 누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납니까? 이사야가 생각날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이러한 선지자들입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살피고 그들이 꿈꾸어 오던 내용들이 무엇이었을까요?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고 적이 쳐들어오고 포로로 잡혀가는 상황에서 무엇을 예언하고 어떤 환상을 보고 꿈을 꾸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메시아의 통치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사야 3:16-4:6절을 봅니다. "16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17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18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19 귀 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20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21 지환과 코 고리와 22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23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24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25 너희 장정은 칼에, 너희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26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무하여 땅에 앉으리라 1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우리로 수치를 면케 하라 하리라 2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3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4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5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 6 또 천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


심판과 회복을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선지서의 주된 흐름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선포함과 동시에 회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갖 사치와 향락 속에 있는 자들을 심판하고서 회복하시는데 주님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을 딸들을 정하게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의 꿈이었습니다. 한 곳을 더 봅니다.


이사야 11:1-10절입니다. "봉독"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상함과 해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환상이고 꿈인 것입니다. 다시는 상함과 해함이 없는 그러한 통치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 선지자들의 꿈인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실 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이었습니다. 불이란 이사야서에서 무슨 역할입니까? 심판하고 소멸하여 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모든 이방인까지 정하게 하여 자기 백성으로 불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신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알기에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엘 선지자가 꿈꾸던 내용인 것입니다. 또 다른 선지자들이 꿈을 꾸고 환상을 보면서 예언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요엘서의 종말의 현상이 피와 불과 연기입니다. 그리고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천지개벽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만이 종말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살게 될 자를 골라내는 작업도 종말에 속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이란 메시아가 왔고, 성령이 임하였고, 그 결과 교회가 지상에 나타난 것이 바로 종말의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종말에 무엇이 예언이며 무엇이 환상이며 무엇이 꿈인 것입니까?


21절을 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이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어온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만이 우리의 구원주가 되심을 믿고 부르는 것이 선지자들의 예언과 환상과 꿈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제자들이 마구 전합니다. 이제 종말이다, 지금 주 예수를 믿으라고 외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은 곧 심판에 들어간다는 것을 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술 취한 자들의 소리처럼 황당하게 들리겠습니까? 오늘 여기에 앉아 계신 여러분은 이러한 말씀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러분만이 아니라 노아 홍수 때에도 그러하였고,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리고 2천년 전에도 제자들에게도 조롱한 것입니다. 무슨 종말이냐, 이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데 그러느냐고 웃기는 이야기도 들리지는 않습니까?


에베소서 3:1-12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경륜과 비밀을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알리시고 이제 교회에 그 비밀을 알렸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인까지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선지자들의 꿈이요 환상이요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13절을 봅니다. "봉독" 2절을 봅니다.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도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예언하고 꿈꾼 것이 무엇입니까? 이 땅이 불타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황당하고 술 취한 자의 소리처럼 들리겠습니까? 그러므로 조롱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조차 이상하게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교회가 있다는 것은 종말을 보여 주는 기능입니다. 그러므로 이 종말의 시대에 참으로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자는 누구 입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2:22-32  부활의 증인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1)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ㄴ)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2)이 일에 증인이로다.


베드로의 설교 내용의 계속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큰일을 증거하자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합니다. 그러자 그런 것이 아니라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하면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선지자의 예언과 환상과 꿈이란 바로 종말에 메시아가 올 것이며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은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음주는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베드로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영생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히 살까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이 현실로 와있기에 누구나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 죽음을 피하여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예외 없이 죽음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자기의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그 죽음에 일생동안 종노릇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끝 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싫어하는 것입니다. 상남 시장에 병원이 들어서는 것은 좋아하면서도 영안실을 갖춘다는 것은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도 집단으로 반대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죽지도 않고 장애를 입지도 않는 자들입니까? 그러나 그러한 님비현상보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현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아미 예식장이 들어선다면 반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어라고 합니까?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지만 미련한 자의 마음을 잔치집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은 왜 왔으며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죽음이란 죄의 결과입니다. 처음 사람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을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영이 함께 사람과 거하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육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거하지 않으니 이제 흙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히게 됩니다. 그리고 흙으로 분해가 되는 것입니다.


매장을 하던, 화장을 하던 그 요소들이 모두 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땅에서 나서 땅에 난 것을 먹고 살다가 땅으로 돌아가는 인생입니다. 이것이 생물적인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왜 그리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느냐고 하면서 초연하게 살자는 것이 동양적 사고방식입니다. 여기에 반해 서양식 사고방식은 죽음도 우리가 극복하여 보자, 하면서 온갖 과학을 발달시켜서 늙음과 죽음을 막아 보고자 애써왔습니다. 이제는 인간을 복제하여내는 기술까지 발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라도 자기의 죽음을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단지 생물적인 육체의 죽음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존재의 사라짐을 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사람은 한번 죽는 것이니 나의 존재는 잊혀지게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자기의 존재를 영속화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하나 낳아서 나의 대를 이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며느리가 교회 나간다면 시어미 되는 사람이 교회보다 성당에 나가라고 합니다. 왜요? 성당에는 제사를 지내니까 자기 제삿밥 챙겨줄 자식을 원하기에 성당에 나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뿐만이 아닙니다. 자기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입신양명하는 것이 부모에게 효도가 되는 것은 자식 때문에 부모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고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두려움은 나를 알아주지 않는 두려움이 또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죽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취미단체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기분 좋은 것입니다. 그러한 곳의 하나로 교회가 전락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생물적 죽음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사회적인 죽음도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생동안 죽음에 메여 종노릇하고 있는 인생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생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담대하여 지는 것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위협도 통하지가 않습니다. '너 예수 믿으면 죽어'라는 협박이 오히려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잡혀서 매를 맞고 나오면서 오히려 기뻐한 것입니다. 옛날에서 두려워서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러한 담대함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까?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이제 새롭게 눈이 뜨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이미 목격하였으나 고기 잡으려고 가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이 실제적인 사건으로 제자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시대입니다. 종말의 현상입니다. 성령이 육체에 부어진 것입니다. 범죄함으로 육체가 되어버린 인간에게 종말론적인 현상으로 성령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2:17절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산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하신 그 말씀이 성취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 예언과 환상과 꿈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임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이제 이들은 새 생명이 임한 것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육은 영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제일 먼저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22절부터 24절까지 봅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여 증거 하셨지만 너희가 그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죽임 당하는 것이 정하여진 대로 된 것이지만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죽였다고 고발합니다. 그러나 그 사망의 고통에 메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풀어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과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과 생명이 사망에 메여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베드로 사도가 다윗을 인용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시편을 인용합니다.


25절에서 28절입니다. 시편은 16:8-11절의 내용입니다. "봉독" 이 시편에 대하여 베드로가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 해석이 29절에서 31절입니다. 다윗은 죽어서 장사되어 그 무덤이 우리 중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육체가 희망에 거하며 자신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이라고 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다윗의 이 시편은 다윗이 선지자로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에게 맹세하사 그 왕위에 앉게 할 자를 그 자손가운데서 일으키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기에 미리 보는 것입니다. 그 미리 본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시편이 되는 것입니다. 저가 음부에 버림을 받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치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에 대한 미리 봄이 아브라함도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히브리서 11:17-19절입니다.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1)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ㄱ)네 2)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


이삭을 바칠 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입니다. 이미 태어날 때도 사라의 죽은 몸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려짐도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내용이었습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는 형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육신이 음부 즉 무덤에서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내다 본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나 다윗만이 아니라 율법의 제사에서도 제물이 썩지 않도록 유월절 어린 양의 고기가, 화목제물로 드려진 고기가 다 먹지 못하여 남으면 반드시 불로 사르게 하였습니다. 이미 출애굽기에서 우리가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썩음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의 소망을 인하여 다윗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28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2-2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도, 모든 것도 헛될 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죄 아래 사망아래 사로 잡혀서 일생동안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갔을 것입니다. 단지 육체적인 죽음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죽음인 무명함도 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름을 한번 날려보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며 이것은 자신의 존재가 소멸하여 간다는데 대한 두려움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버려진 여인보다 잊혀진 여인이 더 비참하다는 이야기를 하지요. 자신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음에 대하여 참을 수 없어 때로는 엉뚱한 일을 저지르면서까지 자기의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망아래 행하는 모든 것들이 모두가 헛되고 헛된 것들입니다. 모두가 썩어지고 쇠하여 지고 더러워지는 것들입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을 봅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러한 약속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라고는 없는 것입니다. 해 아래 모든 것은 썩고 더러워지고 쇠하여 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썩어질 것들에 대하여 미련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명예나 부나 존귀가 모두 부질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아직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면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 우리 안에 부활의 생명이 들어 왔습니다.


단지 죽어서 부활하고 영생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함께 거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이 분이 영으로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우리는 이 세상 다 준다고 하여도 그것이 기쁨이 아니라 주님 한분만으로 기쁨으로 살게 됩니다.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여 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사도행전 2:33-36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ㄷ)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의 집에서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십자매라는 새 두 마리를 사다가 키웠습니다. 몇 달 동안 잘 키웠습니다. 그런데 청소를 하다가 그만 한 마리가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남은 한 마리가 3일 만에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죽은 새의 책임까지, 청소하다가 날려버린 제가 원망을 다 들었습니다. 왜 원망하는 겁니까? 새가 주는 즐거움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새에게 모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고 청소도 해 주었는데 새가 주는 즐거움이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아마 애완용 동식물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주고 물을 주고 정성껏 기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정성을 기울여 키우는 것입니까? 그 동물이나 식물을 섬기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지요. 조금의 수고를 함으로 결국 나의 즐거움과 나의 만족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귀찮아지면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교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나의 만족과 나의 유익을 위하여 믿고 있지 않습니까? 일요일 마다 예배드리고, 십일조도 하고, 교회 봉사도 하는 것은 과연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렇게 하면 나에게 더 큰 이익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나는 현실적이 이익을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니다, 천국 갈려고 믿는다고 하는 것도 결국은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모두가 자기의 만족과 자기의 배를 위하여 섬긴다고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처음에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들을 때 예수 믿으면 어떻게 된다고 들어 왔습니까?


예수 믿으면 죄 사함 받고 천국 간다는 이야기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만사 형통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종교가 가장 잘 꽃피울 수 있는 심성을 가진 이 땅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예수를 믿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예수는 단지 나의 즐거움을 위하여 새를 키우는 것이나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모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고 똥을 치워야하는 수고로움은 있을 지라도 그것보다 더 나은 이익이 있기에 키우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결코 사랑하거나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을 때에 주 예수를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복 받습니다,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누가 주가 되셨는가 하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믿으라고 사정하지 않습니다. 이제 주가 확정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소식입니다. 그동안 구약에서 줄기차게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 메시아가 이제 왔다는 것입니다. 그 메시아가 누구 인가, 하는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으로 확정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내용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결국 메시아와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이 됩니다. 단지 이단자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것이 아니라 주와 메시아가 되시는 분을 처형하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으세요, 복 받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큰일 났다, 세상 끝이다, 심판이다, 이것의 선포인 것입니다. 얼마나 다른 내용입니까?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에서 여호수아, 호세아라는 이름으로 불려집니다. 신약에서 예수라는 이름과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역사 속에 나타난 인물에 대한 호칭인 것입니다. 물론 태어나시기는 베들레헴에 태어 나셨지만 자라기는 나사렛에서 자라 나셨기에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름도 역시 계시로 주어진 이름입니다. 천사를 통하여 주어진 이름인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처녀의 몸으로 오신 분이 예수라는 구체적인 인물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음성이 하늘에서 들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공생애가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들이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병을 고쳐주고 떡을 주었을 때는 잠시 기뻐하여 따라다녔지만 그러나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시자 너무나 싫어하였습니다. 땅에 속하였기에 하늘에 속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참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자기들이 지금까지 섬기고 온 하나님이 엉터리였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보고서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너희의 주인이 마귀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물론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누구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보니 너희가 마귀의 종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예수를 어찌 가만히 둘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를 없애 버림으로 자기들의 체제를 옹호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거대한 종교집단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예수를 죽여 버리는 것이 백성들을 위한다는 것입니다. 그냥두면 자꾸만 소동이 일어나서 로마가 군대를 파견하여 다 죽일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사실을 자기들의 배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든지 예수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 고신 교단에서 주일성수 문제로 목사 한 사람이 고발을 당하고 있습니다. 대구에 있는 언약교회의 박길현 목사인데 대구의 고신 노회에서 전권위원이 결성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감히 주일성수가 성경적이 아니라고 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내용은 뉴스엔조이라는 인터넷 신문에 나와 있습니다.


만약에 주일성수가 무너지면 교단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것과 같으니 성경적인 논의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단죄를 하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제거함으로 교단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날과 달과 절기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에 왜 화가 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모든 언행을 다 조사합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죽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잡아서 죽일 수가 없었던 것을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혀 주신 것입니다. 누가 감히 예수님을 잡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심으로 성경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잡히시고 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재판장이 죄가 없다고 하여도 민중들이 소리가 이긴 것입니다.


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그렇게 합심으로 고함을 질렀을까요? 당신이 주가 되는 것이 싫다는 것이지요! 이미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이 주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나의 뜻대로 돌아가야 기분이 좋아지는 그러한 주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적인 상황에서 내가 주로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회사의 말단 직원으로 있다고 하여도 그러나 늘 꿈꾸는 것은 자신이 사장이 되는 것이고,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더라고 내 말이 먹혀야 하고, 나를 알아주어야 하고, 나의 뜻이 이루어져야 기분 좋은 인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 된 인간의 본성입니다. 너도 선악과를 따 먹으라 그러면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권세가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인 것입니다. 그들이 주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윤리적이고 도적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죄들은 인정하지요 인생이 피조물로서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와 정치와 사회 속에서 언제나 인간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아브라함 링컨의 대통령의 연설을 아십니까?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1809-1865)은 그의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의(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부는 결코 이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 나라는, 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결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나라와 단체의 모습입니다. 누구에 의하여 누구를 위하여 누구의 나라와 단체입니까? 결국 그 안에 자기입니다. 자기가 주인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어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2:32-33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높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낮아 지셨다가 다시 높아지신 것입니다. 하늘 영광과 그 보좌를 버려두고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죽음의 자리에 까지 낮아 지셨다가 이제 등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부어 주시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즉 주의 자리에 앉으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사도들이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이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죽은 그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이 소식은 경악스러운 소식이었습니다. 결코 기분 좋은 말이나 복 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제 큰일 났구나, 어찌 할꼬, 하는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그 내용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내신 것이라는 겁니다. 온 세상이 다 달려들어서 그 일을 방해하려고 하였지만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세상은 하늘과 땅의 모든 주권과 권세는 예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믿어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하지 않는 자는 주님에 대한 반역인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된 자세입니다. 그렇다고 나는 이렇게 잘나서 믿었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어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떻게 이 세상을 사시겠습니까?


사도행전 2:34-35절입니다. "봉독" 다윗은 이미 예수님이 주 되심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지만 주님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는 하나님이시고 또 주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원수를 발아래 밟아 버리실 때까지 예수님께서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세상은 모두 새롭게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0-28절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ㄱ)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1)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께서 이제 모든 세상을 통치하시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가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다 멸하실 것입니다. 또한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실 것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입니다. 이미 사망의 권세를 십자가와 부활로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물이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역사와 우주 만물의 결론입니다. 결국 주님께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복음 안에서 밝혀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과 교회란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로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받을 사람만 받는 것입니다. 설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대회 한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서 택하시고 예정하신 자들이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주로 되어 있는 세계를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이 주가 되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어느 누가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에베소서 1:7-14절입니다.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2)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3)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비밀을 교회에 알리신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그 때가 찬 경륜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골로새서 1:13-18절을 봅니다.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나라가 아닙니다. 아들의 피로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예수님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계신 자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된 것입니다. 모든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와 권세가 다 주님으로 인하여 나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만물의 으뜸이 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성령이 임하심으로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들뜬 것이 아닙니다. 이상한 분위기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았다면 가짜 주인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짜 주인에 속아온 것으로 족합니다. 세상의 헛된 것에 붙들려 살았던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에게도 기죽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없어도 주눅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허세를 부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복음이 설날의 선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2:37-42  어찌할꼬? 



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3)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14절에서 36절까지가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엘서의 예언의 성취로 성령이 임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도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의 기둥인데 이러한 설교를 듣고서 들은 자들이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하는 반응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날에 회개하고 예수 믿어 제자가 된 자가 3천명이나 더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설교를 잘 하니 3천명이나 회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능력 있게 전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자,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하라가 이런 부분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 일이 전도하는 일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도 능력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세상에서도 성공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는 결국 무엇을 위한 회개입니까? 나의 성공을 위하여 꺼림칙한 것들을 제거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회개하다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은 죄가 영화처럼 지나가서 죄를 다 회개하였더니 이렇게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어릴 적에 엄마 젖꼭지를 깨물었던 것까지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설교를 듣고 나면 우리가 회개하려고 애를 씁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는가 하면서 자기를 돌아보면서 마구 회개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눈물이라도 흘리게 되면 회개했다고 합니다. 회개를 하였으니 이제는 복을 받으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미가 집안에서 일어난 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아들이 어머니의 돈을 훔치자 어머니가 저주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들이 내어놓게 되자 그것으로 우상인 드라빔과 제사장의 예복인 에봇을 만들어 놓고서 자기 아들로 제사장을 삼았다가 지나가던 레위 소년 하나를 제사장으로 세우고서는 이제 복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내가 이러한 조건을 갖추었으니 이제 복을 받으리라는 것을 사사기에서는 무어라고 합니까? 그 때에 왕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각자 제 길로 간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증거하고 있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이스라엘이라도 별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설교를 한편 들을 때 어떤 자세로 듣고 계십니까? 그리고 듣고 나서 어떤 반응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설교를 들을 때 그렇지, 내가 저렇게 하면 성공 하겠구나, 내가 실패한 것은 저렇게 하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구나 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실천 계획을 마음속에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여 이렇게 되었구나, 그러니 이제부터 십일조는 꼭꼭 하고 물질만이 아니라 시간도 도적질하였구나, 그러니 주일은 꼭 지켜야지, 하면서 마음에 다짐을 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힘과 비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 이제 나도 성공할 수 있다, 두고 보라, 나도 이 분야에서 성공하고야 말리라, 그런 다짐을 하게 됩니다. 이런 설교에서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하는 회개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회개한다고 하여도 자기의 성공에 걸림돌이 되었던 것들을 제거하는 차원에서의 회개인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는 회개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단지 자기가 복을 받기 위한 회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면서 또다시 땅의 것을 찾고 자기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청중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난 것입니까? 그들의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반응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설교를 들었길래 이러한 반응이 나타난 것입니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하늘 보좌에 앉히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설교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면 복을 받는다는 식의 설교가 아닙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인가를 알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원하였던 바를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시지 않자 배척하여 버린 것에 대한 고발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예배를 드립니까?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기대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이 예배를 잘 드리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예배를 잘 드리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마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고 헌금은 어떻게 하여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헌금을 할 때 새 돈으로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헌 돈일 때는 물로 씻어서 다리미로 다려서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나의 마음과 정성을 드린다는 차원에서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지극정성을 바침으로 내가 복을 받는다는 것이라면 이것은 예배 자체가 또 하나의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정성과 열심이 부족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나친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충성하고 열심이었던 사울이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여야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모든 인간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모습이 어떤 것 인줄 알겠느냐? 주인이 왔으나 주인을 돌로 쳐 죽여 버린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왔으나 사람들이 어두움을 더 사랑하여 빛을 배척하여 버렸다는 것이 십자가의 고발인 것입니다. 이러한 설교에 사람들의 반응이 그러면 어찌할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렇게 설교 하였더니 마음에 찔려 3천명이나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역시 베드로의 능력이 대단해, 그러므로 우리도 베드로처럼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하루에 3천명 5천명 전도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직도 성경을 너무나 단편적이고 피상적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54-60절을 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 7장은 그 유명한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베드로보다 능력이 부족하여 돌 맞아 죽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을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더라고 합니다. 그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이 났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하고나서 어떻게 됩니까? 동일하게 마음에 찔리는데 이를 갈면서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이라는 청년은 이것을 마땅히 여기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는 3천명이 회개하는데 동일하게 성령이 충만하여 설교한 스데반의 설교에서 나타난 반응은 돌로 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였고 스데반은 일개 집사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역시 능력의 차이입니까? 아닙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시면 베드로가 여기 와서 설교하여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의 설교를 사람들이 듣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을 통하여 증거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어찌할꼬, 하는 회개가 일어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이란 내가 회개하여 받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선물로 주여야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것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의 일하심을 통하여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주시지 않으시면 어느 누구도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구원을 이루어 놓았으니 이것을 믿어서 가져가는 것은 사람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근거를 말씀을 인용합니다.


사도행전 2:38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는 말씀만 보면 내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성령을 선물로 받는 조건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미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하는 회개가 일어난 자들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것은 내가 구원을 받아내는 조건이 아니라 구원이 임한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예수를 믿는 자들이란 결국 하나님께서 부르셔야 되는 것임을 39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야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데 있는 자들까지라도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회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가까이 스데반 곁에 있던 자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능력 있게 설교를 잘 하였나, 아니냐로 믿는 자가 일어나거나 아니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누가 반응을 잘 하였나, 아닌가로 나타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결국 부르시는 자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9:16절에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설교 잘하였기에 구원 얻는 것도 아니고 잘 들었기에 구원 얻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셔서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여러분의 실력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항복시키셔서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자기 자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도 말씀을 듣고서 나왔다,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하여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는 자기 자랑이 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죄로 알고 있었던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뉘우치고 눈물 흘린 것을 지금도 가지고 있으면서 나는 회개 하였노라고 말하지 마시고 날마다 회개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좌절하면서 어찌할꼬, 하는 회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여 회개가 일어난 자들에게 대하여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회개한 자가 무엇을 또 다시 회개하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면 회개가 나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40절을 봅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하니"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 세대를, 이 세상을 악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개한다고 하면서 무엇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악한 세대에서 한번 눌러 붙어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도 화려하고 우아하게, 고상하고 멋있게, 성공적인 인생으로 살고 싶어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회개입니까?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란 하루라도 빨리 이 세상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러한 회개는 성령이 임하여야만 가능한 회개입니다. 회개한다고 하면서도 이 패역한 세대에서 탈출한 의사가 없으시다면, 아직도 회개란 이 패역한 세대에서 더 살기 위한 미신적인 주술에 불과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4-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사도행전 2:42-47  초대교회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3 ○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1)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그런데 여러분의 마음은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떻습니까? 또 아는 소리한다, 늘 하던 소리 또 하구만, 도대체 언제 한번 그런 이야기 말고 나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이야기한번 해주면 안 되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 정도는 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었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부활하게 되는 것인 줄 안다, 그러니 늘 아는 그런 이야기 말고 나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는 그런 이야기 좀 하면 어디가 덧나나, 그런 마음은 혹시 아니십니까?


아마 대부분이 이러한 생각인가 봅니다. 그러니 설교하는 사람들이 청중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예수 믿으면 죄 사함 받고 천국 갑니다. 이것은 이제 따 놓은 당상이니 이제부터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멋있게 하여 봅시다, 하면서 사업을 벌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이 말씀을 듣고 3천 명씩 5천 명씩 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동일하게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는데 한 쪽에서는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하는데 한쪽에서는 그것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하든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어야하겠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어떤 엄청난 일을 하셨는가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셨다, 그러므로 온 세상의 주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모든 창조가 주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주님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의 으뜸이 되셨고 주인이 되셨기에 누구든지 주를 믿으면 구원을 얻지만 이 주님을 대적하면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주의 자리에서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의 주인이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떻게 일하시고 어떻게 마무리 하실 것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내가 하는 사업이나, 내가 하는 목회나 잘 되기를 바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고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42절입니다. 사도의 가르침과 교제와 떡을 뗌과 기도에 전혀 힘쓰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하는 무리가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이러한 회개는 성령이 임하여 나온 회개입니다. 단지 자신이 복 받는 일에 꺼림칙한 것들을 제거하는 차원에서의 회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근원적으로 무너지는 회개입니다. 나 이제 큰일 났다, 하는 것입니다. 나 이제 망하였다, 어찌할꼬?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는 탄식입니다. 이때 천사가 제단의 숯불로 입술에 대니 죄가 사하여 진 것입니다. 그리고서야 주님의 계획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이러한 회개가 일어났다는 것은 구약에서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으나 배척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회개가 일어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성령을 보내셨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를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7-11절입니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복음 선포에 회개하는 무리들이 모인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미리 말씀하신대로 성령이 임하게 되니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기준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여 죄를 정하고 의를 정하고 심판의 유무를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보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가지고 오히려 예수님을 정죄한 것입니다. 자기들은 옳다고, 의롭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정죄한 것입니다. 안식일을 어기고,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고, 자기를 하나님의 친 아들이라고 하는 참람 된 말을 하고,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죄와 의와 심판의 기준이었습니다.


유대인들만이 이러한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다 자신의 죄와 의와 심판의 기준이 다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대한민국을 이롭게 하는 사람은 선으로 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헤치는 자는 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부시가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면 좋은 사람이지만 손해만 끼치면 악의 축이 되는 것입니다.


동계올림픽 심판이 우리나라 선수에게 불리하게 심판하면 나쁜 심판이고 유리하게 심판하여 주면 좋은 심판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각자가 죄와 의와 심판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모습입니다. 좁혀서 자기의 가정을 대입하여도 되고, 자기의 속한 교회를 대입하여도 됩니다. 전부 자기들의 죄와 의와 심판의 기준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나에게 어떤 도움이, 이익이 되는가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의 설교는 이러한 죄와 의와 심판의 기준을 일시에 무너뜨려 버린 것입니다. 죄가 무어냐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다. 의가 무어냐 예수님만이 의인이신데 그분이 떠나 버리셨다. 그러므로 의란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아 버렸다. 세상의 어떠한 심판의 기준도 쓸모없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증거였고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러한 선포 앞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돌로 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는 자기의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아직도 자신의 죄와 의와 심판의 기준을 가지고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결국 영원한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포와 가르침 속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종말을 맛보았습니다. 그렇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로 일하시는 것이구나! 그러면 예수 믿는 이 일보다 더 중요하고 귀한 일이 없는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 온 세상을 누가 다스리는가를 제대로 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알게 된 사람끼리 모여서 교제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뗐습니다. 이것은 식사형태의 성찬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념하라고 하시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전혀 힘썼습니다. 이 초대교회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이 어떤 것인지 두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43-47절을 봅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소유를 팔아서 필요한 자들에게 주는 것과 그러함에도 기쁨이 넘친 것입니다. 이것은 강요나 의무가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 자원하는 일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때에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이기에 아무라도 사거나 팔거나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사는 자가 어려움에 처하면 경작권은 팔수가 있지만 언제라도 되 물릴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능력이 없으면 친척이 물려주면 됩니다.


그것도 안 되면, 희년이 되면 자동으로 돌아오게 법으로 제정하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심지어 들짐승에게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법이 미치도록 조치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빈익빈 부익부가 일어나지 못하는 제도적 장치가 됩니다. 부동산 투기란 결코 일어날 수가 없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욕심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여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동산 투기가 일어나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이스라엘 안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5:7-8절입니다. "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8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땅에 심으신 것은 좋은 열매를 원하셨습니다. 공평과 의로움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나온 열매란 포학과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가옥에 가옥을 전토에 전토를 더하다 보니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포학에 시달려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12절에 보시면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옥에 가옥을,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간 자들은 잔치를 하고 온갖 악기와 포도주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않았습니다.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가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멸하여 버리신 가나안 사람들의 모습이며 바알을 섬기는 자들의 모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지, 어떻게 다스리는지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거저 내 아파트 평수 늘리고 나의 부동산 늘리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 올리시고 주의 자리에 앉히신 일에 대하여 어떤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높아 지셨으니 그저 나에게 좋은 자리 하나 주십시오, 그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이 소식을 듣고서 참으로 회개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주의 자리에서 성령을 보내셨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니 무엇이 죄며 의며 심판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주와 그리스도로 계신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주와 심판주가 되셨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세상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메시아를 기다려 왔는데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내신 주와 메시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그렇게 법으로 제도를 만들어도 되지 않았던 경제적인 평등이 이제 누가 강요하고 의무 규정을 만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자기의 재산을 교회 공동체에 내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니 자기의 소유를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행전 4:32절을 봅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성령이 임하게 되니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하나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증거입니다. 전에는 자기의 재물이 자기의 것인 줄 알고 악착같이 끌어 모았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됩니까?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살리고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에 돈이란 가히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가 되셨다는 선포 앞에서 회개하고 자기의 재물을 조금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들이 억지나, 마지못해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었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자도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참으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 이런 일들은 기쁨으로 행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고 또한 백성들에게 칭송을 들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말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삶은 전혀 예수님이 나의 주와 그리스도가 아닌 삶을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 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에게서 칭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악착같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까?


조정래씨의 ‘한강’이라는 소설에 보면 이북에서 내려와서 구호물품을 빼돌려 장사를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정말 악착같이 벌어서 알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서울대학교 보내기 위하여 가정교사를 채용하면서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도 주님께서 돌보셨고 그리고 자기 아들이 5대 공립을 거쳐 서울대학에 들어가야 자기들의 고생한 보람도 생기고 교회에서 자기의 체면도 선다는 것입니다. 자기 보람과 교회에서의 체면을 말하고 있는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내가 잘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을 하면서 세상 사람보다 더욱 악착같아지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교회는 세상의 그 어떠한 힘, 권세이든 부귀이든 지식이든 재주이든 어떠한 힘도 큰소리 칠 수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모두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나온 자들이고 모인 무리입니다. 모두가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나왔다면 서로 서로 같은 신세이니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이 안에서도 서로의 체면을 세우기 위하여 세상의 것들로 비교하고 경쟁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실적으로는 얼마나 이러한 모습이 많이 있습니까? 자기의 보람과 자기의 체면을 세우기 위하여 사람들은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 교회도 재산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러한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단체나 간에 결국 일만 악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디모데전서 6:3-21절을 봉독하고 말씀을 맺습니다. (새번역) “그대는 이런 것들을 가르치고 권하십시오.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가르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경건에 부합되는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 4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병이 들어서 논쟁과 말다툼을 일삼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데서,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의심이 생깁니다. 5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3) 6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이 큰 이득을 줍니다. 7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4)없습니다. 8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9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합니다. 10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11 ○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 악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십시오.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원한 생명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대를 부르셨고, 또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13 나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훌륭하게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대에게 명령합니다. 14 그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그 계명을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15 정한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실 분이시요,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이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16 오직 그분만이 죽지 않으시고,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고, 사람으로서는 본 일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존귀와 영원한 주권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17 ○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하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18 또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주라고 하십시오. 19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 20 ○ 디모데여, 그대에게 맡긴 것을 잘 지키십시오. 속된 잡담을 피하고 거짓된 지식에서 나오는 반대 이론을 물리치십시오. 21 이 반대 이론을 내세우다가, 믿음을 잃은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이 말씀의 능력이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사도행전 3:1-10  내게 있는 것 



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자본주의 국가입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자본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 마다 모두가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경제를 살리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나라에서 자본이 없는 사람은 사람대접 받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마다 자본을 모르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본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돈이 되는 모든 것은 자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돈이 되지 않는 일이란 가치 없이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허용되는 종교도 경제적 가치를 따지고 있습니다. 종교가 주는 심리적 안정이 경제활동에 가치를 주기에 국가에서 종교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국가를 헤치는 종교라면 국가에서 금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본을 더 소유하기 위하여 지금 세계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보다 더한 기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은 성경에서 증거하는 대로의 예수를 믿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성경대로 증거하지 않는 예수를 증거하게 되면 나의 자본, 나의 소유를 확대하여 주는 우상 예수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세상의 것을 구하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얻으려고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고상한척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8장에서 어떤 부자 관원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계명을 아나니, 하시면서 십계명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어려서부터 그런 것은 다 지켰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네게 부족한 것 한 가지가 있다고 하시면서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이 부자는 경제적인 자본은 아주 넉넉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챙길 것이라고는 영생을 챙겨보고자 한 것입니다. 영생을 위하여 무엇을 하면 됩니까?


이것은 또 다른 자기의 소유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 자본이 넉넉하니 종교적 자본까지 확보하자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의 말씀 앞에서, 영생 앞에서 돌아서고야 만 것입니다. 이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단지 부자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있는 자는,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돈이 없으면 안 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여, 주여 부르면서 나도 한번 이 세상에서 멋있게 살아남고 싶어요, 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요즈음 학교 교사들이 암웨이 하느라고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PD수첩에서 취재하는 중에 어느 암웨이 하는 교사에게 질문하니 그의 대답이 자기는 상류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교사의 월급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 것입니다. 교사의 직위를 이용하여 학부모들에게 물건 팔고 회원 가입시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그들에게 증거한다면 교회에는 발도 들여 놓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있는 바를 족한 줄 알라고 한다면 어찌 씨가 먹힐 말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기도하려고 올라갑니다. 아직도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성전에 시간 맞추어 기도하러 가는 것입니다. 제 구시는 오후 3시입니다. 성전으로 가는 문, 그 문의 이름이 미문입니다. 아름다운 문입니다. 이곳에 아름답지 못한 한 장애인이 구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자본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가족이 부유하였다면 그를 돌보았을 텐데 단지 자기의 장애를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것이 유일한 자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부는 구걸할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라고 말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장애인은 성전 길목에 앉아서 그들의 자비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들에게서도 한 푼 얻고자 쳐다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은 던져주는 동전 한 닢에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보았을 때 부자가 아니었기에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한 푼이라도 던져주기만 하면 그것으로도 감지덕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기대가 완전히 무너집니다. 이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 하다가 행색이 초라해 보이니 간절히 구하지 않았던 같습니다. 당신들도 보니 행색이 그렇게 넉넉하여 보이지 않으니 주면 고맙고 안 주면 너희도 형편이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눈칫밥 먹는 사람의 눈치가 보통 빠릅니까? 


4절부터 봅니다.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구걸을 하면 간절히 구걸하여야지 보는 둥 마는 둥 하면 안 되지요? 그런데 우리를 주목하여 보라고 하자 이 사람이 무엇을 얻을까 하면서 마지못해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있기나 하겠는가 하면서 바라보는 분위기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무어라고 합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이 말까지 들었을 때 이 사람의 마음에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럴 줄 알았다, 당신들이 행색을 보니 금과 은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다음에 놀라운 내용이 선포됩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그러면서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그러자 곧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들의 없는 것은 무엇이며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없는 것은 금과 은입니다. 그런데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입니다. 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금과 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것도 금과 은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의 요구는 금과 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 다른 것은 다 없어도 있어야 하는 것 한 가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없어도 되는 것은 그렇게 찾고 구하면서 정작 있어야 하는 것은 구하지도, 찾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로 인하여 죽어 있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지난 수요일 호세아서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왜 망하게 됩니까?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만 가득하였기에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원하시는 것은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원하시는데 이스라엘 땅에 가득한 것은 저주와 거짓말과 살인과 훔치는 것과 간음과 강포만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망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가 교회가 정말 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정말 이름만 있고 그 내용은 금과 은으로 채워지고 있다면 이것이 망한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하여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병도 낫고 부자도 되는 것이 아닌가? 왜 당신은 성경을 그렇게 밖에 보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병이 낫고 부자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압니다. 병이 낫고 부자가 되어서 지옥가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범죄 한 손을 찍어 내어버려 장애가 될지라도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범죄 한 눈을 빼어버려 장애가 되더라고 지옥에 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열 명의 문둥병자가 다 고침을 받았지만 주님께 감사하러 온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병이 낫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부른 것이 참된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니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바로 십자가의 표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란 죄와 사망에 메여 있던 자를 살려내시는 능력인 것입니다. 마치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자기는 원하지도 않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았듯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능력을 행하시자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귀신의 힘을 입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같은 나라끼리 싸우겠느냐, 그러면 그 나라가 망하리라고 하시면서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임한 모습이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 승천하셔서 자기의 사도들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오늘날도 이러한 기적들이 일어나는가 하는 관심일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불치병이 나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그것이 성경의 권위나 계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거나 또는 기도 받거나 하여서 병이 낫게 되었을  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 사람은 이제 성경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체험을 절대적으로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고침을 받지 않느니만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여! 주여! 하면서 능력을 행하고 큰 역사를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그날에 주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결국 주의 이름을 자기들의 능력 행함에 이용한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였지만 참으로 자기의 의가 없고, 오직 죄 짓는 일밖에 없었음을 탄식하며 어찌 할꼬 부르짖는 자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죄에 대하여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죄에 대하여 책망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주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믿을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는 어떠한 믿음도 나올 수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16절을 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하게 낫게 하였느니라." 어떤 믿음입니까? 주 예수께로 말미암아 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 믿음입니다. 나에게 금과 은은 없습니다. 지식과 명예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지 나사로와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있는 것은 주 예수의 이름입니다. 나는 이것으로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이 예수의 이름이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어 생명의 나라로 옮기신 이름입니다. 예수의 이름 안에 생명과 지혜와 지식과 영생의 기업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12절을 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이러한 놀라운 이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까? 이것이 기적입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 나의 소유를 늘리고, 나의 자본을 늘리는 예수라면 이것은 오히려 저주입니다. 예수의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썩어질 세상에서 망할 세상에서 영원한 기업과 생명의 나라로 옮기신 그 이름 예수, 우리에게 모든 것이 다 날아가더라도 이 이름 하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하고 기쁜 사람이며 가장 성공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3:11-26  그 이름



성전미문에서 구걸하던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베드로가 일으켰습니다. 대단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놀라며 달려가서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여 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사건입니까? 아마 오늘날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다면 사진 촬영하고 비디오로 찍어서 홍보하였을 것입니다. '드디어 능력의 종이 혜성처럼 나타나다. 보라 기적의 현장을. 은사 대 집회' 이런 포스트가 나붙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베드로가 무어라고 합니까?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이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라고 말합니다. 한 때는 누가 서로 크냐고 다투던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다면 서로 자기의 경건과 권능인 것처럼 말하여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된 것은 바로 예수의 이름이 이렇게 한 것이라고 하면서 회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19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무언가 좀 생소하지 않습니까? 기적이 일어난 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이, 예수님께로부터 난 믿음이 이렇게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이해가 되는데 왜 이러한 기적의 사건 앞에서 회개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회개하라는 말을 내가 복을 받는데 꺼림칙한 것들을 제거하는 차원에서 회개하였습니다. 회개하지 않았기에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온갖 죄를 다 기억하여 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회개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회개하면 이러한 기적이 더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회개하면 병도 고치고, 부자도 되고, 자식도 남편도 잘되기 때문에 회개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회개하라는 뜻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것은 이제 새 세상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부활 승천하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러한 일을 일으켰다는 것은 주님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온 우주 만물을 예수, 그 이름이 다스린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13-15절을 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2)이 일에 증인이로라"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여 보고 있는데 베드로가 이 기적에 대하여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 빌라도는 놓아주기를 결안 한 것을 너희가 부인하고 죽였다고 고발합니다. 그러나 그 예수를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기에 그 이름이, 그로부터 난 믿음이 이렇게 되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자세와 베드로의 말을 직접 듣고 있는 청중들과는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서 그래 그 유대인들은 나쁜 놈들이라서 그렇게 하였고 우리는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고, 잘 믿어 주었으니 이제 예수 믿고 예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자는 식으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할 수 있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앞에 서 있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바로 몇 일전에, 길게 잡아도 두 달이 걸리지 않은 때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질렀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죽인 그 예수가 지금 주와 그리스도가 되어서 이러한 일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듣고서 어찌할꼬?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자는 돌로 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기적의 사건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바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다시 16절을 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그 이름이 이렇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 앞에서 조용하여 졌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자기들이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자기들의 율법과 종교를 부수려던 이단의 괴수를 정당하게 처형한 것이 아니라 살인자가 되는 것이고, 더구나 메시아를 죽인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27-28절을 봅니다.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니 감옥에 가두기도 하고 위협을 하여도 계속하여 증거하니 대제사장이 제자들을 심문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하였는데 너희가 계속 증거하는 것은 예수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다면 당연히 그들이 살인자가 되고 메시아를 죽인 자가 되기에 제자들을 가만히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증거를 듣고 있는 2천년 전의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실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분위기가 숙연하여 졌을 것입니다. 죄를 지은 자가 자신의 죄로 확연하게 들어나면 대부분 고개를 푹 숙이고 자숙하는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는 더 펄펄 뛰기도 합니다만 베드로 앞의 이 사람들은 기적을 보았고 그 기적이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이 이렇게 하였다고 하는 말을 듣고 있는 중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17-26절의 내용입니다.


17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너희가 알지 못하여 그렇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렇게 될 것을 미리 말씀하셨고 그 말씀하신 바를 이루어 내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꼭 요셉의 경우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기에 더욱 미워하여 죽이려고 사막의 물 없는 웅덩이에 던져 버립니다. 그러다가 직접 피를 흘리기가 꺼림칙하니 노예로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죽인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를 이방인의 손에 넘겨서 죽이려고 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세월이 지나고 보니 형들이 요셉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형들이 용서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요셉이 무어라고 합니까?


창세기 45:5절에서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리고 야곱이 죽고 나자 형들이 또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자 요셉이 또 무어라고 합니까? 50:20절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그렇게 이루셨다고 합니다. 물론 요셉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구나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팔았으나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생명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을 들은 형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날마다 회개하면서 감사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모인 청중들에게 무어라고 합니까? 너희가 모르고 그랬다, 그렇다고 너희가 정당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렇게 될 것을 예언하셨고 그렇게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24-25절.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사무엘 때로부터 모든 선지자들이 이 때를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의 씨를 통하여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는 그 언약이 지금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1-3절의 내용이 이렇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베드로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취를 위하여 선지자들이 예언하였고, 이제 그 성취로 인하여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온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20-21절을 봅니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 하늘에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만유를 회복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점점 살기 좋아져서 지상의 낙원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다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택한 백성을 다 골라내시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시는 것입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다시는 죄가 없는 곳입니다. 죽음이나 눈물이나 애통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피곤함이 없습니다. 감기도 없습니다. 죄로 인하여 생긴 모든 저주와 재앙들이 없는 곳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곳입니다. 이러한 약속의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도행전 3:22-23절입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킬 것이라고 한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모든 선지자가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듣지 아니하면 어떻게 됩니까?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지금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28-29절을 봅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모세와 선지자가 예언한 그 선지자, 미리 예언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접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신다고 말하고 믿기는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고자하는 일에 도움을 주는 예수로 믿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셔서 온 세상의 만물을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대로 이루어 가심을 믿고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주님의 뜻에 맞추어 가려고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회개란 내가 살아왔고 그리고 앞으로 살아 가려고하는 삶의 방향과 목표가 잘못 되었으니 돌이키라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나의 삶의 목표, 나의 자아실현을 위하여 예수님을 동원하기 위하여 믿는다, 회개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목표와 방향으로 잡고 있는 모든 것들이 썩어질 것들이고 안개와 같고 바람과 같은 것입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는 것입니다.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영생이 무엇인지 그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믿고 따라가는 것이 회개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심초사 하던 사람이 이제는 다 잃어버려도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상쾌하고 가벼운지를 버리지 않았으니 맛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온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뉴스를 보아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뉴스, 굿뉴스인 복음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선지자의 때로부터 이루어 오신 그 하나님의 역사가 이렇게 분명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끝으로 26절을 함께 봅니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날마다 주께로 돌이키면서 그 이름을 통하여 주어지는 참된 복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4:1-4  부활을 싫어하는 자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1)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백성을 가르침과 2)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3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목격하고서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여 봅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왜 우리의 권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이 일어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말하면서 이 사람이 온전하게 된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고 다시 사신 분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이러한 일을 일으키신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들이 죽여 버린 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죽여 버린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심으로 세상이 얼마나 악한 세력에 붙들려 있었는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오후에 부산에서 설교 테이프를 듣던 사람이 전화로 물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세상을 악하다고 하셔서 미움을 받으셨는가 하면서 데레사 수녀 같은 사람은 착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 착한 사람도 있었을 텐데 왜 다 악하다고 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저의 대답이 이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이란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이레에 두 번이나 금식하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기를 힘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자 그들의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착한 사람이었다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였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은 이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정말 죄와 사망 아래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교육도 종교도 모두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로 새롭게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낡은 부대에 새 술을 담으면 부대가 찢어져서 새 술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의 소식은 온 세상의 가치 체계를 완전히 둘러 엎어버리는 사건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부지런히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무엇을 위한 부지런과 열심입니까? 이미 심판과 정죄아래 있는 세상에서 썩어질 것들에 대한 부지런과 열심인 것입니다. 도대체 다른 세상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기득권층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 열심히 그들끼리 뭉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득권층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부류에 들어가기 위하여 온갖 연줄을 다 갖다 됩니다. 그리고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자기 자녀를 일류대학에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가운데 예수도 하나의 도움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의 부활이 싫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을 때에 누가 함께 듣고 있는 것입니까? 1절에 보시면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이 들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자들입니다. 로마의 통치하에서 그들과 결탁하여 최고의 부귀를 누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 살기 좋은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이 세상을 좋아하는가 하면 이렇게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만 세상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는 속담이 있는 것입니다. 저승은 싫다는 것입니다. 물론 죽음으로 끝이 나고 지옥에 들어갈 사람은 죽음이 싫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죽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지 못한 것은 주께서 맡기신 사명이 있기에 죽지 못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부활을 좋아하고 있습니까? 싫어하고 있는 것입니까?


부활 좋지요, 죽어도 사는 것이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 내가 일요일마다 교회 나오고 헌금도 하고 해서 부활에 대한 보험 하나 들어놓은 것 아닙니까? 그러니 죽고 나서 부활은 챙기기로 하고 우선은 이 세상에서 내가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아야겠습니다, 하는 사람들이 과연 부활을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까?


3월 31일을 전 세계의 기독교가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절이 자꾸만 한번의 형식적인 절기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거창하게 한상 차려 드리고서는 이제 일년 동안 잘 봐주시오, 하는 식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다른 세상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절 잘 지켜 드릴 테니 부활절에만 부활이야기 하고 그 다음부터는 조용히 계셔 달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마치 성탄절 하루만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말하고 나머지는 자기 높이는 일에 분주한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진주만’이라는 영화에서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미국은 2차대전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두 남자는 친한 친구인데 두 남자가 한 여인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여인은 한 남자를 선택합니다. 선택받은 이 남자가 비행실력이 뛰어나서 영국 공군에 지원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전투기를 몰고 전투 중에 추락을 합니다. 그리고는 실종이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사망통지서가 날아온 것입니다.


그러자 이 아픔을 죽은 남자 친구가 여자를 위로하다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 사랑하고 있는데 죽은 줄 알았던 남자가 제3국의 어부들에게 구조가 되어서 살아온 것입니다. 이 여인과 남자의 친구가 얼마나 황당하였겠습니까? 죽은 줄 알았는데 사망통지서를 받았는데 멀쩡히 살아 온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멀쩡히 살아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자기 교회를 챙기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죽은 것처럼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정말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기획과 프로젝트들이 과연 주님의 원하시는 것인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간곳이 없고 사람들의 위신과 자존심을 세우는 곳이 되어 버렸다면 이곳 역시 부활을 싫어하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일하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믿고 싶지가 않을 것입니다. 나를 도와주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면 좋겠는데 성경은 내가 하는 일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계속 세상을 사랑하고 싶은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하는데 도움을 주시고 또 죽어서도 부활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면서 살아가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실상 부활을 싫어하는 자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바리새인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바리새인은 부활을 믿지만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가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현재의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할 때 일곱 명의 형제가 아들이 없어서 차례대로 한 아내를 취하였다면 나중에 부활하여서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몰라서 오해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천국에는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아니하고 천사처럼 산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대하여 싫어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이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부러울 것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불행한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려우면 다른 세상이 없을까 하고 찾아보기라도 하겠지만 모든 것이 만족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렵고 힘든 사람이 예수를 잘 믿게 되는 것은 또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부활의 도를 싫어하는 자가 우리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7-48절을 봅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2)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이 말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고 난 이후에 하는 말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어차피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늘 말씀을 생활 속에 실천하면서 살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은 어떻습니까? 역시 부활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증거 하신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지금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는데 다시 살리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부활의 생명임을 증거하셨는데 부활을 평소에 믿지 않는 사두개인만이 아니라 부활을 믿는다는 바리새인과 제사장들마저 결탁하여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명분은 무엇입니까? 점점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가면 반역이 일어날 것이고 그러면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애국자 같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천만의, 만만의 말씀입니다. 지금 그들은 로마와 결탁하여 로마 덕분에 잘 먹고 사는 자들이 되어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일제시대 때에 친일파를 생각하시면 되겠고, 오늘날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늘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말하는 국가와 민족이란 기득권을 가진 소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왕조시대에 종묘사직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백성들의 피땀을 빼어내는 왕들과 다를 바 없는 행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배를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교회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이나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만 교회를 위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속하여 있는 교회이기에 다른 교회보다 우리 교회가 잘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집사든 주일학교 학생이든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견 교회를 위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열심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사용된 것입니다.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말씀이 응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상당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귀족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기득권자들이 대거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가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국가와 힘겨루기를 하면서 자기의 이권을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월드컵 성공적인 개최를 위하여 국가 조찬기도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잘되어야 우리도 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기 좋게 만드시려고 하셨다면 부활 승천하시지 말고 지금 대통령 후보들이 내세우는 비전보다 더 확실한 사회변혁 프로그램을 제시하여서 지상낙원을 만들면 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바도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은 떠나 버리신 것입니다. 자신의 백성을 다른 세상으로 옮기실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좋습니까? 싫습니까? 솔직해 집시다. 그리고 회개합시다.



사도행전 4:5-12  모퉁이 돌 


 

5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ㄱ)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성령이 임하시고 제자들이 권능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일어난 것입니다. 시작이 이러하다면 갈수록 어떻게 되어야 정상적입니까? 갈수록 이러한 능력들이 증폭되어져서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항복하고 기적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체포였습니다. 체포하였을 때 날이 저물어서 가두어 두었다가 다음날 재판이 열린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재판하는 자들의 심문과 사도들의 대답이 그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고 마태복음 28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권세로 제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을 세상의 권세가 어떻게 할 수 없어야 하는데 감옥에 갇히고 매 맞고 죽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거의 다 순교하는 것입니다. 가끔씩 기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결과는 흐지부지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른 사람들도 별 볼일 없이 사고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완전한 구원이 못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집단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통일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게 됨으로 완전한 구원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의 하나가 저희 게시판에도 올라와 있습니다. 삭제하려다가 그대로 두었는데 일간지 신문에 광고로 나온 내용입니다. 가끔씩 통일교가 자기들의 교리를 교묘하게 감추어 복음을 전하는 것처럼 광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에 현혹되어 그들의 가르침을 받게 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통일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통일교의 원리강론을 듣는 것과 별다를 바가 없는 내용입니다. 흔히 이런 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 대신 나의 손과 발을 드리자,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 믿는 자들이 여전히 죄의 유혹에 넘어지고, 세상의 권력에 붙잡히고 고문당하고 죽기까지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8-25절을 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미련한 방법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지혜란 것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란 두개의 커다란 축이 있는데 그것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동양학도 부상을 하고 있습니다만, 헤브라이즘은 유대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들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것은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란 저주 받아 죽은 실패의 표적이지 그들이 바라던 표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헬라인들은 지금 온 세계의 교육과 사상의 바탕이 되는 철학입니다. 그들은 논리적이고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러한 지혜로 십자가를 보니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미련하고 어리석고 거리끼는 십자가의 도를 누가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예수를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게 되고, 안 되던 일이 술술 풀리고, 병이 났고, 부자가 되고 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잘 해결이 되는 것이라면 아마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고 약한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지도 못할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의 문턱이 높다고 야단들인데 만약 세상이 볼 때에 지혜로운 모양이었다면 요즈음 서울의 오피스텔 입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입니다. 인기 있는 오피스텔 분양권 받기 위하여 밤을 새우고 수천 대 일의 경쟁이었습니다.


아마 교회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현실적인 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세상의 영광을 약속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드는 것은 과연 십자가의 도, 미련하고 어리석고 거리끼는 십자가를 증거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때의 구성원들이 고린도전서 1:25절 이하에 보시면 육체를 따라 보니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고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가 믿음에 지혜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는 것입니다. 역시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자신들의 문벌이 좋은 사람들이 무엇이 아쉬워서 핍박받는 예수교 이단을 따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미련한 자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무언가 지혜나 재산이나 육체로 자랑한 만한 것들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말씀이 너무나 기분 나쁜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정말 어느 누구라고 자기의 육체를 자랑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지혜요 우리의 의요 거룩함이기에 그분만 자랑할 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가 증거되는 성경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복음은 시대가 흘러도 달라지지 않지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달라져야 한다고 많이들 말들 합니다. 그러나 전하는 방법도 달라져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내용이 미련하게 보이는 것을 미련하게 보이지 않게 하려고 온갖 포장을 한다면 십자가의 도가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래도 지혜롭게 하자고 합니다. 일단 선물을 주든지 연예인을 부르든지 사람을 교회 안으로 불러 모아서 복음을 전하면 되지 않겠는가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믿으면 이것이 좋고 저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무어라고 하신 것입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자기 깃들일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증인이라면 역시 주님처럼 증거하는 것이어야 하고 주님이 받으신 대접을 우리도 받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사도들에게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모습과 꼭 같은 모습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5-7절을 봅니다. 사도들을 가두어 두었다가 이튿날 종교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까? 관원과 장로와 대제사장과 그 가문이 다 나온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최고의 권력자들이 다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는 것입니다. 감히 우리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설교를 하다니 너 교단이 어디냐 어느 노회 소속이냐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자기들의 권세가 위태로울까봐서 미리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이미 예수님께 한 질문입니다. 그러니 사도들도 같은 질문을 받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23절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꼭 같은 질문입니다. 너 무언데 성전에서 가르치느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너에게 권세를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대어보라는 것입니다. 이곳은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면 설 수 없는 곳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대답을 하면 나도 대답하겠노라고 하시면서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냐?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냐? 고 질문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을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로서, 라고 하면 왜 그의 말을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라고 하면 백성들이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있으니 백성들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질문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신의 권위나 권세를 스스로 말하는 자들은 이들과 다름이 없는 자들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였다던가. 나는 개척멤버라든가, 목사니 장로니 권사니 하면서 자기의 권위를 말하는 자들은 가짜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의 권세로 하느냐의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역질문을 하시고서 두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는 두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포도원에 일하러 가라고 하였을 때 큰 아들은 예, 하고서는 가지 않았고, 작은 아들은 싫소이다! 하고서는 그 후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면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둘째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하고 있지만 첫째 아들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존경한다고 하나 마음으로 자기 배만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들은 싫다고 하였으니 그러나 뉘우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의의 도를 전할 때 세리와 창기들은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그들은 끝까지 뉘우치지 않고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모퉁이 돌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모퉁이 돌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세를 받을 때가 되어서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세를 주기는커녕 하나는 잡아서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친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이 더 많은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역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제 주인이 자기 아들을 보내면 공경하리라 하고서 자기 아들을 보내었는데 그들이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서 그 주인이 그 종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들이 대답하기를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시편 118:22절 이하를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거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자신이 모퉁이 돌이 되신 것입니다.


여기서 비유를 잠시 보자면, 악한 농부들은 유대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돌로 치고 죽이고 내어 쫓아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의 주동자들이 누구였는가 하니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권세를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권세를 배척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자기의 종들을 보내셨으나 박해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자기 아들을 보냈으나 이 아들마저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미 자신이 어떻게 버림받아 죽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세상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진멸하여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는데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아, 나는 죽이지 않았는데요! 그러나 인류란 하나라면서요. 지구는 한 가족이라면서 올림픽도 하고 월드컵도 하지 않습니까? 지금 만약에 외계에서 외계인들이 쳐들어온다면 온 세계는 전부 하나로 뭉쳐서 대항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니 참으로 주인이 오셨건만 영접하기는커녕 오히려 죽여 버린 것이 이 세상의 죄 된 모습, 죄의 권세에 붙들려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이 모퉁이 돌로 오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모퉁이 돌입니까?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입니다. 사람들마다 자신들의 꿈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꿈을 하나의 집으로 본다면 그 여러 가지 재료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필요하고 좋은 친구도 필요하고 배경 좋은 아내도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주변의 것들을 자기의 꿈을 이루는 일에 도움이 되는 디딤돌로 여기는 것입니다. 도움이 되지 않으면 배척하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까지도 버리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혼하면 자식을 서로 차지하려고 하였지만 요즈음은 서로 자식 맡지 않으려고 한다면서도 거치적거리는 것은 나에게 도움 되지 않는 것은 버리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를 이렇게 나오고 헌금도 봉사도 하노라고 하지만 죽을 때까지 예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예수를 믿으면 지극 정성을 다하면 언젠가 쨍하고 해뜰 날이 있을 거야! 하면서 기다려 왔는데 끝까지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면 어떻게 하여야 현명한 것입니까? 버려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버림받은 돌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들이 증거하는 것이 바로 이 내용인 것입니다. 살기등등한 자들이 그들의 권세를 가지고 험악한 분위기로 몰아세웁니다. 너희들이 무슨 권세와 누구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들이 너무도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10-11절의 내용입니다. 너희와 온 이스라엘 사람들아, 알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일어났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죽인 나사렛 예수라는 것입니다. 이 나사렛 예수를 너희가 죽였다면서 그 죽으심을 시편 118편 말씀,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을 그대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도움이 안 된다고 버린 돌이 이제 새로운 모퉁이 돌이 된 것이라는 겁니다. 새로운 집을 지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롭게 창조되는 주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교회입니다. 주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돌들로 집을 다시 지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20-22절입니다.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님께서 모퉁이 돌이 되어서 새로운 집을 짓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어 버려진 모퉁이 돌에 붙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 돌을 믿는 자는 세상 살아갈 때 현실적이 도움이 되겠습니까? 되지 않겠습니까? 사도들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감옥에 가고, 잡혀서 매 맞고, 결국 대부분이 죽음에 넘기 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왜 이런 방법으로 증거되어야 합니까?


구원은 십자가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임을 반복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받으신 대접과 꼭 같은 대접을 제자들이 받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전도와 선교를 잘하면 자기 자신도 현실적인 복을 받고 교회도 부흥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돌을, 우리도 도움이 안 된다고 버린 그 돌을 우리가 지금 믿는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만약 이 돌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그 돌이 사람에게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마태복음 21:4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돌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벧전2:1-10). 



사도행전 4:12-22  예수의 이름 


 

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3)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22 이 3)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세나 되었더라.


오늘 세례를 받으실 때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목사의 이름이나 교회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나 목사는 심부름꾼일 뿐이며 세례를 베푸시는 분은 주님이신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세례란 이 사람이 우리와 함께 형제 되었습니다하는 공식적인 선포인 것입니다. 이미 성령이 임하셔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아니면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에게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마태복음 28장에서 명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세로 자기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이름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까? 오직 예수의 이름 만이어야 한다는 것에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이전에 요한복음을 통하여서도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서 예수님 외에 다른 것으로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사도행전 4:12절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다른 어떠한 이름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로 구원이라고 하면 될 텐데 왜 "그 이름"이라고 하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고자 합니다.


최초의 이름을 받은 자는 아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아담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름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이름을 지어주신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창조주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자기 자녀의 이름을 지어 주지 않습니까? 자식만이 아니라 새로운 이론이나 새로운 별들을 발견하면 그 사람의 이름을 붙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사람이라고 이름을 주시고서는 다른 피조물에 대하여 이름을 짓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대접하여 주신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다른 피조물은 인간에게 종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의 지위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범죄함으로 인하여 아담의 후손은 아담의 형상이 되었습니다(창5:3). 아담의 형상으로 나온 인간의 운명은 죽음이었습니다. 무려 일천년 가까이 살았지만 모두가 죽었더라, 죽었더라는 족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세계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녹 같은 사람은 3백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죽음의 세상에서도 죽음을 이기는 능력은 하나님의 이름에 달린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에녹에게만이 아니라 노아에게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노아 홍수가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신이 사람에게서 떠남으로 사람이 육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죄 속에서 만들어진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전에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였다고 합니다. 죄악이 관영한 곳에서 나오는 인간은 역시 죄 된 인간인 것입니다.


오늘 유아 세례도 받았습니다. 유아 세례란 부모의 신앙고백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아이가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직 어리니 무슨 죄를 지은 게 있나요? 그렇게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부모는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물으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 된 부모에게서 나오는 자식은 당연히 죄인인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예라고 하여서 유아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이것은 나는 죄인이기에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고 오직 예수의 이름이 나를 구원합니다, 하는 그 신앙이 이 어린아이에게도 필요합니다, 하는 부모의 고백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하면서 주의 말씀과 훈계로 키우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장성하여 자신의 입으로 신앙 고백하는 것이 입교문답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아담의 형상이기에 죽음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자기의 이름으로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고 높이고자 하는 교만이 죄 된 인간의 속성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세계를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가운데서 노아의 가족은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세례를 받을 때에 무엇으로 머리를 적셨습니까? 물입니다. 물이란 노아 홍수도 물이고, 홍해 바다도 물이고, 요단강도 물입니다. 물속에 들어가면 다 죽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물속에서 살았습니다. 애굽 군대는 홍해 물속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은 살았습니다. 역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물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침례교는 세례를 침례라고 합니다. 그래서 온 몸이 완전히 물속에 잠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실감이 날 것입니다. 물속에 눕혀서 좀 천천히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성부와 하고서, 한 일분씩 있다가 올리고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면서 한참 담가 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물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단지 씻는다는 의미보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름은 이제 죽었습니다, 이제 예수의 이름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하는 고백, 이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주님이 내 안에 사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있다, 이것이 세례인 것입니다.


세례 받으신 분 손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거의 다 세례 받으셨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누구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누구 이름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아직도 여전히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자존심을 위하여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세례란 한 번이 아니라 날마다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의 이름은 물속에 장사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왜 나의 이름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까? 나의 이름, 우리 집안의 이름, 우리 교회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버린 것이 인류의 역사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이름이 들어 있는 곳은 무조건 잘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는 관심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이름을 위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자기 집을 세우는 일에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방주를 만드는 일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이름을 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 세상은 이렇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전히 이 세상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서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가 임할 때에도 노아 때와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심판의 재료는 다릅니다. 물이 아니라 불인 것입니다. 지금은 노아 홍수 이후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어떤 세상일까요?


창세기 11:1-4절입니다. "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이 모습이 노아 홍수 이후의 인간세계의 모습입니다. 자, 우리 이름을 내자. 하나님의 이름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은혜로 살려내신 것인데 인간은 또다시 자기의 이름을 위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름에 기대를 거는 자, 자기의 이름에 기대를 건다는 것은 단지 이름 세 글자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사상, 의지, 판단력, 지식, 가치관, 인격, 인생의 목표 같은 것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필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 이름을 인하여 복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이름으로 천한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꼭 아브라함의 이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자신의 이름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씨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씨가 이삭에게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 대신에 희생하는 자의 모습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도 모형이고 그림자이지 실체는 아니었습니다. 이삭이 늙어서 에서를 축복하려고 하다가 크게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자신이 변개하려고 하다고 놀라는 것입니다. 결국 야곱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야곱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실 때 항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름을 모세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부름을 받아 나아갈 때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이름이 무어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시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그 씨가 누구입니까?


갈라디아서 3:1-16절입니다.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1)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6 ㄱ)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8 또 하나님이 2)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ㄴ)모든 2)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ㄷ)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ㄹ)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것이 아니라 ㅁ)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ㅂ)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ㅅ)아브라함과 그 3)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3)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3)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의 복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누구를 믿는 것입니까? 대신 저주 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왜 이 이름 때문에 복을 받는 것입니까? 어떤 인간도 자기 이름으로 구원에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3:15절의 약속대로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것입니다. 남자의 혈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인 것입니다. 천하 인간에 이러한 이름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라는 이름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죄 없이 십자가를 지신, 자신의 죄 없이 저주를 받으신 이름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갈라디아 3:13절의 말씀처럼 저주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저주 받으심이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시고 불로서도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3:11절을 봅니다.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시면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런데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흔히 말하는 불세례를 받았다고 하면서 뜨겁다고 펄펄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어서 나오는 말씀을 보시면 불이란 곧 심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러므로 불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말씀하실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49-50절입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께서 이미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시고서도 또 받으실 세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례란 무슨 세례이겠습니까? 


요한일서 5:5-9절입니다.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1)진리니라 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물과 성령과 피로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물세례, 성령세례를 받으시고 아직도 이루실 세례란 바로 피의 세례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의 피란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불 심판을 받아 내시는 세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과 피가 하나라고 하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령도 이것에 대하여 증거하시고 하나님도 이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십자가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일하신 모습입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시23:3).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심판도 행하시고 구원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분명하고 새로운 심판의 기준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지 않고 다른 이름이나 자신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스스로 자초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이 외치는 이야기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은 다 달려들면서 예수의 이름만은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18절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 한 가지만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의 심판의 기준이 완연하게 드러났는데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오늘 성찬식을 행합니다. 일년에 한두 번만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살 찢으심과 피 흘리심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자기 이름을 부정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자의 이마 위에 예수의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계22:4).



사도행전 4:23-31  열방의 분노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24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ㄴ)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4)종 예수를 거스려 28 하나님의 5)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3)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지난주에 예수의 이름에 대하여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제 나의 이름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이름에 대하여는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대도 하지 않는 반면에 실망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백과 삶이 신자의 고백이며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커다란 오해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의 이름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이름을 끼워 넣기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 저런 능력도 행하고 큰 업적도 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자기의 이름에 대하여 포기하지 못한 오기가 가득 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예수의 이름이란 무슨 도깨비 방망이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라고만 하면 도깨비 방망이 두드리듯이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근거를 성경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아라!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이름으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여로보암 왕이 선지자를 잡으라고 하다가 손이 굳어 버린 사건이 있고, 엘리야를 잡으러 왔던 오십 부장과 오십 명의 군사가 두 번이 하늘에게 불이 내려와 죽어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 선지자를 대머리라고 놀렸다가 42명의 아이들이 곰에 찢겨져 죽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시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훨씬 많아 질 텐데 사도들이 왜 갇히고 매 맞고 순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련하고 어리석고 거리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이 십자가가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전도는 미련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진행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경우를 보고자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 하면 가장 기억에 나는 것이 갈멜산의 기도일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특심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니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나면 비가 오지 않는다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엘리야가 자기의 말이 없으면 비가 오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3년 6개월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때 누가 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가를 내기하자고 합니다. 제단에 제물을 놓고서 인공적인 불을 붙이지 않고 하늘로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면 그 신이 참신이라고 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러자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온갖 주술을 행하며 몸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리면서 자기들의 신을 불러도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드디어 엘리야가 통 넷에 물을 떠다가 세 번이나 부으라고 합니다. 물이 흘러넘치는데 엘리야가 기도하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다 살라버린 것입니다. 이때 바알의 선지자를 다 잡으라고 합니다. 아세라 선지자까지 하면 850명입니다. 이들을 다 잡아서 죽여 버렸습니다.


불로서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저 악한 아합과 이세벨이 사는 왕궁도 불로 태워버리리라고 생각하고서는 아합의 마차보다 더 빨리 달려갔습니다. 마치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 성이 망하기를 기다린 심정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성은 여전히 그대로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세벨이 자기의 선지자들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엘리야를 내일 이맘때에 잡아 죽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능력이 많던 엘리야 선지자가 도망을 가다가 로뎀나무 아래서 자기는 조상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고 호렙산으로 40주야를 걸어서 갑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서라고 하시고서는 하나님께서 지나가시는데 처음에는 크고 강한 바람이 지나갑니다. 얼마나 센지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바람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로 지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로는 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이 지나간 후에 세미한 음성이 임하였습니다. 네가 왜 여기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때 엘리야가 저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선지자는 다 죽었고 자기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너 외에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칠천을 남겨 놓으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까? 크고 강한 바람이 다 둘러 엎어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지진이 나서 다 흔들어 버리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살라버리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직 그렇게 일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조용하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여전히 튼튼하게 서있는 것입니다. 아합의 궁궐이 기세등등하게 버티고 있고,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방금 엄청난 기적을 보았고 자기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여전히 거대한 세력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을 봅시다. 예수의 이름을 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관원들도 분명한 증거 앞에서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서 항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위협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잘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적조차 없애버리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났을 때 나사로 까닭에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아지자 나사로를 죽여 버리려고 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고 있으니 역시 이들에게도 동일한 협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4:19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합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대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들과 관원들은 위협하고 협박하면서 예수의 이름만은 증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구 세상은 이 하나의 싸움인 것입니다. 오늘도 이 전쟁은 소리도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허용하며 그러나 예수의 이름만은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것입니까? 사도들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4:23-28절입니다. "봉독" 사도들이 그들의 동료들에게 가서 그동안의 일을 말하면서 이렇게 된 것이 성경의 예언대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시편 2편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분노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왕들과 관원들이 한가지로 분노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한 분노인 것입니다. 세상에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일을 보면 우리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이라고 합니다. 하늘과 사람이 함께 분노할 일이라고 하면서 온 세상 사람이 다 분노할 일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2편에서는 온 열방이 분노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다 하나로 마음을 합하여 모든 세계협력기구가 하나로 통일하여 분노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이익단체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모두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세계가 하나가 되자고 하여 올림픽을 하여도 참가하지 않는 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이익집단들이 있는 세상이 갑자가 한 마음이 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갑자가 한 마음이 되어 합동으로 분노하면서 한가지의 일을 이루어 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2편에서 온 열방이 분노하면서 일어나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면서 그 메인 것을 끊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을 위하여서는 온 세상이 언제나 하나로 합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적하는 것이 예수의 이름입니다. 이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기 위하여 헤롯과 빌라도가 동원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이 동원이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서로 서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이합집산을 일삼던 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합동으로 뭉치는지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서 사도들이 시편 2편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예수의 이름이 들리면 우리는 어떠한 반응이 나와야 당연한 것입니까? 분노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죽을 동 살 동 애를 쓰면서 살아 남아보려고 애를 쓰는데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함께 죽자고 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오는 예수가 흉측스럽지 않습니까? 우리의 조상들은 얼마나 죽음을 싫어하였는지 끝, 마지막, 이런 말조차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함께 죽자니 말이나 되는 소리 입니까? 분노하고 돌을 던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서 아 은혜롭다 하면서 앉아있다면 대단히 믿음이 좋거나 아니면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어떤 집사님의 말씀처럼 뛰어 나가고 싶어야 당연합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는데 성경은 다르게 말하니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숙달이 되는지 이제는 아무른 이야기를 하여도 아주 여유 있게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인간이 별수 있겠어! 다 죄인이니 그렇지! 사람인데 별수 있겠어!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하면서 아무리 충격적인 말씀이 증거 되어도 튼튼하게 버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친근하고 부드럽고 호의적인 예수의 이름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에 대하여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세상에 지치고 힘드십니까? 이제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서 다른 사람보다 능력 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십시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얼마나 널리 유포되었는지 다이어트 광고문구에 '네 시작은 뚱뚱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날씬하리라'는 광고 문구를 보았습니다.


호의적인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도와주는 예수, 나의 가정과 사업을 지켜주고 번창시켜주는 예수, 우리 교회를 잘 되게 하여주는 예수, 그래서 우리나라도 덩달아 잘되게 하는 예수의 이름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라면 왜 열방이 분노를 하겠습니까? 열방이 환영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히 열방이 분노하는 예수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제자들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이 합동으로 결정한 일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신 것입니다. 거부하신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합동으로 결정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간 일에 대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2:3-6절입니다.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이제 주와 그리스도에 대하여 분노한 열방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열방이 주인의 아들을 배척하고 죽여 버린 일에 합동이 되어 버린 이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매일 분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회개치 않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칼을 갈고 계시는 것입니다.


시편 7:11-12절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시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이것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날마다 회개하는 자입니다. 주여 내가 살려고 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저 주와 함께 죽게 하옵소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행전 4:32-37  한 마음과 한 뜻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6)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교회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12:27절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고 여기에 모인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다 누구의 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합니다. 머리란 모든 지체를 주장하고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자기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든 성도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한 몸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13절입니다.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성령을 마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행할 때 함께 떡을 떼고 잔을 받습니다.


떡은 그리스도의 살 찢으심을 말하고 잔은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성찬에 참예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 한 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한 성령을 마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하게 되자 모두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까?


옛날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아들이 친구를 사귄다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서 너에게 진실한 친구가 몇이나 되는가하고서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주 많다고 자신 있게 대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진실한 친구인지 시험을 해보자고 하며 돼지를 한 마리 잡아서 지게에 지고 친구라는 집에 찾아가서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는데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우선 너에게 왔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이지요! 그러자 한결같이 문을 닫아 걸어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한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친구에게로 간 것입니다. 두말없이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잘못 하였으면 신고를 해야지 숨겨주면 되는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 이야기가 그런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정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정말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누가 진실한 친구인지가 드러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세상의 우정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조폭들의 세계에서도 의리라고 하면서 혼자 다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면서 노래는 하는데,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자매들이여' 라고 노래는 하는데 저녁에 차 한 잔 하러 가도 됩니까?에 얼마나 부담스러워 하고 있는 것입니까? 세상의 시인도 지란지교를 꿈꾸며 산다고 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벽이 너무나 높은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창원에 이사 와서 살려고 직장에 면접을 보러 가면서 택시를 타고 갔습니다. 기사에게 창원에 살기가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니 자기는 창원 본토백이인데 창원이 인정머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입니까? 한 몸이라고 하면서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여전히 끼리끼리 모이고, 나의 취미와 성격과 분위기 맞추어 가면서 놀고 있지 않습니까?


창원이라는 문화적 환경 때문에 그렇습니까? 모두들 고향에서 떠나와서 객지에서 살다보니 나 아니면 누가 나를 지켜주랴! 하는 생각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은 믿는 것이고 나의 삶은 내가 쥐고 가겠다는 것입니까? 어느 정도까지는 형제들에게 마음을 열어도 어느 선까지는 절대로 넘어 오지 못하도록 방어 막을 치고 있는 것은 그러니 예수님도 나의 삶을 주장하지 마소서, 내가 십일조 하고 있고 감사헌금 절기헌금 주정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도 하고 있으니 더 이상 요구하거나 간섭하면 나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이러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봅니다.


사도행전 4:32절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 말씀은 사도행전 2:43-47절에서도 나온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의 이러한 유무상통의 모습이 단회 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오늘 우리가 듣기에 현실에 맞는 말입니까? 허황된 것 같습니까? 현실에 맞지 않으니 사람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임박한 종말론 때문에 이렇게 살았다, 마치 이단들이 임박한 종말론에 빠지면 재산을 다 팔아서 갖다 바치듯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내일 세상의 끝이니 재산 모아서 무얼 하나! 그러한 심정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부담감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사도행전 2장에서 보았습니다만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 무슨 사건입니까? 종말적 사건인 것입니다. 말세에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신다고 하셨으니 성령이 임하신 것이 종말인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세계,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 졌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가 나를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확실하게 자기 백성을 구하여 내셔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버려진 모퉁이 돌로서 새로운 건물, 새로운 나라의 기초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 부름을 받은 자들은 이제 더 이상 과거 자기의 삶의 방향과 가치를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여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것도 나의 것, 네 것도 나의 것'이라고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세상은 여전히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악착같이 자기 것 확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고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 그렇게 살아서는 못 산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돈 없이 어떻게 살겠니? 교회 가도 돈 있어야 큰 소리 치지 돈 없으면 교회가도 대접 못 받지 않느냐!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서로 서로 공범으로 눈감아 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 목사도 그렇고 장로도 그렇고 집사도 그러니 우리인들 별수 있는가!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지금 우리의 모습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안된다고 타협하지 말고 안 되면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자본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본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살 수 있는가에 대하여 쟈크 엘룰의 ‘돈이냐 하나님이냐’를 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곳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을 받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은혜를 베풀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저 받았으니 그저 주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단 말입니까? 성령이 임하였고,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한 것입니다. 무슨 공동체 운동한 것이 아닙니다. 헌금하라고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바치면 복 받는다, 그러니 복 받을 짓을 해야 복을 받지, 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33절에서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러한 선포 앞에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죽음의 세계는 자기가 자기의 것을 확보해야만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세계란 주고 또 주고서 죽을지라도 상관없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내어 주셨지만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에 세계에서 살던 원리를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을 들은 성도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듣고 믿었기에 서로 나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한 몸이기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밭과 집이 있는 자들은 팔아서 그것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것을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삶이 천국의 삶이요 성령이 임한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주님께서 사셨기에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그러한 모습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1-14절을 봅니다.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쫓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6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 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 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찌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한것 같이 ㄱ)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의 연보나 구제나 형제 사랑이나 어떤 봉사도 결국 무엇이 드러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보의 정신이고, 이것이 천국의 모습입니다. 하루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하루 열두 시간 일한 사람이나 모두가 놀고 있는 자들이었기에 포도원에 불러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뻐할 일입니다. 누가 누가 잘했나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주의 긍휼을 입고 나온 자들입니다. 그러니 한 형제요 한 몸이요 한 뜻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한 뜻이란 한 영혼으로 번역이 됩니다. 다 한 영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혈통보다 더 귀중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 몸이 되었다면 무엇을 부끄러워 할 것이 있으며 위장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많이 거둔 자도 남는 것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는 세상, 하나님의 은혜가 그만큼 풍성하고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세상에 우리가 초대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움켜진 손을 놓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계십니다.



사도행전 5:1-11  아나니아와 삽비라



아나니아, 삽비라 하면 이미 선입견이 있을 것입니다. 아, 오늘 말씀은 헌금 떼어 먹다가 죽은 부부 이야기이구나! 오늘도 헌금 강조 하겠구나, 하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교회 교인들 같으면 아마 이런 생각도 하실 것입니다. 우리 목사는 십일조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니까 아마 이 말씀도 헌금 잘하라는 말이 아니라 다른 뜻이 있을 것이야 하면서 추측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라고 설교하면 그러면 그렇지, 헌금 떼어 먹는다고 죽을까? 그렇다면 죽지 않을 사람 누가 있겠는가 하면서 안심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헌금 떼어 먹고서 죽었으니 여러분들이 똑바로 헌금 하시오, 라고 설교를 한다면, 역시 당신도 별수 없이 헌금 강조하는구먼! 그러면 그렇지 별수 있겠어! 이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들 다 내려놓으시고 과연 말씀이 어떠한가를 살펴봅시다.


초대교회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고 사도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회개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위협하고 협박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계속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 다시 살아 나셨으며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선포를 합니다. 이 복음으로 인하여 회개하고 모인 자들이 초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무리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대부분이 각 지역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곧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인데 복음 안에서의 교제로 인하여 빨리 떠나지 못하고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면서 이집 저집에서 떡을 떼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행경비는 다 떨어졌을 것입니다. 빠듯하게 마련하여 온 사람들은 먹을 것을 살 형편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넉넉한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들 사이에서 서로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지난주에 말씀을 보았습니까?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한 성령을 마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자기의 것을 조금도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밭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두었습니다. 아마 아주 요긴하게 사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사도들이 이 사람에게 다른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 이름이 ‘바나바’라는 뜻입니다. 바나바를 번역하면 권위자라고 4:36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권위자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권세가 있는 자라는 뜻이 아니라 권할 권(勸) 위로할 위(慰)입니다. 아주 명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 바나바가 나중에 바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하고 동역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칭찬을 듣는 바나바를 보고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밭을 팔아서 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밭을 팔아서 현금을 가지다 보니 아까운 것입니다. 손에 목돈이 생겼는데 아깝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돈보다 명예가 가치 있다고 생각이 되면 명예를 돈 주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돈도 좋고 명예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돈의 일부를 감추어 두고서 밭을 판 전부인양 사도들 앞에 가져온 것입니다. 사도들 앞에 돈을 가져다 놓은 순간 베드로가 무어라고 합니까? 어떻게 이런 거액의 헌금을 합니까? 더 큰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고서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주의 선포가 나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그리고서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 하는 말을 듣고서 그 자리에서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지내고 세 시간쯤 지났는데 그의 아내가 옵니다. 우리 남편도 사도들에게 좋은 칭찬을 받았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왔을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묻습니다. 


그 땅 판값이 이것뿐이냐고 묻자 이것뿐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미 부부간에 서로 합의가 된 것입니다. 2절에 보시면 그 아내도 알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 가리라 한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져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떻습니까? 성경에서 쩨쩨하게 헌금 좀 떼먹었다고 부부를 다 죽여 버리다니 이거 너무한 것 아닌가,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떼먹어도 죽기는커녕 감기도 한번 안 걸리고 잘 살아왔다는 자기의 경험으로 아무 일 없다고 안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를 지을 때 즉각 보응이 오지 않으니 죄를 짓는 일에 담대하여 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 되어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사건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아나니아가 헌금하였는데 그것도 상당한 액수를 하였는데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다고 합니다.


왜 이런 말을 듣는 것입니까? 아나니아가 헌금하는 정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행한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 만큼 하니 나도 이만큼은 해야지 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됩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아나니아 삽비라처럼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임의로 할 수 없더냐? 는 말씀과 성령을 속였다는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밭을 팔기 전에도 아니니아의 것이었고 팔고 나서 현금을 가졌을 때에도 그의 것이었는데 네 임으로 할 수가 없더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재산을 여러분 마음대로 처분이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라도 마음대로 됩니까? 물론 확실하게 재산을 증식하는 일이라면 이리 저리 처분을 하면서 재산을 불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 아무런 조건 없이 돕는 일에 재산의 일부를 내어 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함부로 못할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 재산인데도 마음대로 처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돈이라는 게 무슨 힘이 있는 것처럼 위력을 떨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 사람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의 사건을 기억나게 합니다.


창세기 4:4-8절을 봅니다.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2)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정확히 모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으로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가인은 믿음으로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인의 제사를 당연히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받지 아니하시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받아 주신 것이라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의 제사를 받아 주지 않자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가 왜 안색이 변하느냐고 책망하시면서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느니라, 그러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가인이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아벨을 죽여 버리고 맙니다. 죄가 가인보다 강하였습니다. 여기서 죄 대신에 돈을 대입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돈을 이기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다스리는 것처럼 착각할 뿐이지 우리가 돈을 다스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돈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드리는 것은 어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헌금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다 돈의 지배와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고 나자 한 성령을 받은 형제자매들 안에서 돈의 지배를 극복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서로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와 돈의 권세를 이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주의 신실한 백성들은 이러한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자기의 재산만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마저 기꺼이 형제를 위하여 내어 놓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귀하기에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직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습이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하여 애통하고 회개하여야 하는 것이지 다 그런 거지 뭐, 하고 안심하고 지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악을 제대로 알고 주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았다면 이러한 모습이 나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왜 즉각 죽지 않는 것입니까?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도 다칠까 하여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속인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죽는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두 번이나 성령을 속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내용입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나자 사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지금 친히 자기 교회를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눈동자 같이 다 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자세가 주님 앞에서냐, 아니냐를 점검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헌금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고신대학교의 교훈이 코람 데오(CORAM DEO)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서 가르치는 신학교와 대학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고신대학교에 어떤 사람이 가 보았더니 책상마다 빽빽하게 요점정리가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연습장이 없어서 그곳에서 공부하느라 그런 것을 아닐 테고 아마 시험 치를 때 커닝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요? 물론 일부 신학과에서는 시험 감독 없이 시험 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라는 교훈과 뱃지를 달고 다닌다고 하여도 우리의 의식에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고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고 아나니아 삽비라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연보를 합니다. 그런데 주보에 명단을 내지도 않고, 예배시간에 이름 불러 가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잠자리채라고 부르는 연보 주머니도 돌리지 않습니다. 강조도 하지 않습니다. 연보만이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하여서도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규칙을 정하지 아니합니다. 단지 증거하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펴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각자가 주님 앞에서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목사 눈치 보고, 다른 집사들 눈치 보고서 헌금을 하든지 봉사를 하든지 하는 것은 모두 성령을 속이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의 이름 내기를 위하여 하는 것도 역시 주님을 믿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약하니 강조를 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초대교회 때 누가 강조하였습니까? 법으로 정하였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를 인하여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인색함으로 남의 눈치 보면서 경쟁하면서 한다면 벌써 땅을 사고 예배당을 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자리에 들어서는 순간 다 죽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보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신앙의 자세와 중심이 지금 주님께서 보신다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금송아지를 섬기면서 뛰어 놀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 기적과 이적을 보고서도 모세가 40일간 보이지 않자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주님 앞에서 하느냐, 사람 앞에서 하느냐에 따라 죽고 사는 길이 갈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주님 앞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는 어떻게 하더라! 안 하더라! 하지 마시고 우리 무두가 지금도 살아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돌보시는 주님 앞에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사도행전 5:12-16  표적과 기사 



12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1)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16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사도들로 인하여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세 번째 기록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2:42-47절과 4:32-37절 다음에 나오는 이 세 번째 '상황 보도'는 모든 점에서 더욱 확대되어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의 말씀을 다시 한번 봅니다. "봉독" 사도의 가르침과 떡을 떼며 교제함과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고 믿는 사람들이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백성들에게 칭송을 듣습니다. 그리고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자기의 재물을 조금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도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습니다. 그리고 남녀의 큰 무리가 믿고 병자들이 치유됩니다. 여기서 무엇이 표적과 기사입니까?


우리는 흔히 병자가 낫는 것만을 표적과 기사로 봅니다. 그러나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저는 더 큰 표적과 기사로 보입니다. 이보다 더 큰 표적과 기사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두 사람이라도 하나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두가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심지어 부부라도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서로 어느 정도씩 양보하니 살아가는 것이지 정말 마음이 찰떡같이 하나로 뭉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씩은 한 마음 한 뜻이 되기도 합니다. 공동의 적이 나타나면 두 사람은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은 이러한 일, 그것도 율법이나 억지가 아니라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된다는 것이 결국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역사이기에 참으로 놀라운 표적과 기사인 것입니다. 오늘은 무엇이 참된 표적이며 기사인지를 봅니다.


우선 병자의 치료를 봅니다. 15-16절을 보시면 놀라운 표적들이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라는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허다한 병자들이 나아와 고침을 받고 귀신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자들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면 생명의 주가 되셨음을 나타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6:53-56절입니다.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지금 사도들의 치유가 예수님의 치유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수님께서 승천 직전에 사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14-18절을 봅니다. "14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2)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3)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이러한 표적들이 사도들에게 직접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귀신들이 쫓겨나가고, 새 방언이 일어났고, 병자가 나았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 같은 경우에 뱀에게 물렸어도 죽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표적과 기사가 사도들에게 국한 되는가, 오늘날도 계속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복음은 땅 끝까지 증거되고 있지만 복음과 함께 사도들의 이러한 표적과 기사가 계속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표적과 기사를 사도적 권위로 제한하여 봅니다. 사도시대에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들로 인하여 성경이 완성되고서는 복음이 계속하여 땅 끝까지 증거되지만 표적과 기사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로 복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사도시대에 왜 이러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난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단이 물러가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난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끝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도 이러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면 예수를 믿는 자가 많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지금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한다고 하여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성경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어떤 표적과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그것 때문에 믿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만약 지금도 사도적 권세가 나온다면 성경은 계속하여 추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역사에서 기적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을 다 추가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카톨릭에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성경의 완결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시대 이후에는 어떠한 사도적 표적과 기사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 시대 이후를 ‘속사도’시대라 합니다. 그때 활동하던 자들을 교부라고 하는데 로마의 클레멘트가 주후 95년에 기록한 글입니다. "사도들은 우리를 위한 복음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았다"고 합니다. 주후 117년의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나는 죄수이기 때문에 내가 사도인 것처럼 너희에게 쓸 수가 없다. 나는 베드로나 바울처럼, 너희에게 명령을 발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도들이시다. 나는 다만 정죄 받은 죄인일 뿐이다."


이들은 사도들로부터 직접 복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사도들과 자기들의 구분을 확실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도들과 같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교부들의 기록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기적들이 서서히 나타나는가 하면 교회가 처음 50년(100-150년)에는 거의 아무른 이적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50년(150-200년) 동안에는 조금 그리고 대수롭지 않는 이적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세기(3세기) 동안에는 상당히 풍성한 이적들이 나타나고 4세기에는 더 많이 정밀하게 나타나고 5세기 이후로는 계속하여 증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모든 종류의 미신들과 불가사의와 초자연적인 사건들이라면 어떤 한 것들이라고 쉽게 믿어버리는 세계로 증거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화 하면서 기적이 교회사에 더욱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가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한 것입니다. 무력으로 정복하여 형식상 기독교로 개종은 하였어도 그들이 평소에 행하던 종교적인 주술들도 그대로 도입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중세에는 온갖 기적들로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역사를 통하여 흐르고 있는 이적역사는 교회에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교회로 흘러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점점 더 심화되어지자 교회가 이제는 이방의 분위기로 젖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가 그러한 것들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방의 세력들이 교회를 정복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 한 것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신오순절 운동’이라고 하여 지금도 사도들과 같은 계시적 은사들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은사운동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개혁주의 신행협회에서 나온 ‘신오순절 운동비판-장로교회의 계시와 이적관’이라는 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에도 교회나 기도원 등에서 기도하여 불치병이 낫는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넓게 보아서 계시적 은사는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하여 특별한 체험을 하게 하실 수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온건한 편이지요. 그러면 절에서도 기도하여 병 고침 받습니다. 중국이나 인도에서도 신비한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질병은 의술로 고치지 못하였는데 걸어 다니다가 나은 경우도 있고, 자연 치유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나와서 병을 고쳤다는 것만을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지 않고 다른 종교, 또는 전혀 종교가 아닌 방법으로 치료가 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표적과 이적을 보고서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증거하는 것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거저 내 병이나 낫고, 부자 되고 하는 식이 결코 아닙니다. 더구나 사단도 얼마든지 표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12절입니다. "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1)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1)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단도 얼마든지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적과 기적을 쫓아다니는 자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차원에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예수님, 예수님을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적을 쫓아가는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24절을 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표적과 이적을 인하여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선교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기적들이 지금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을 믿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들도 여러 권 나왔습니다. 그런데 직접 필리핀에서 선교를 5년 동안 하고 돌아온 한 강도사님과 이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분도 놀라운 일들을 많이 체험하고 경험하고 돌아왔습니다.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수지침을 배워서 나갔습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사역을 하면서 치료를 하는데 여러 수십 명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중에 몇 가지만 이야기 하자면, 한 사람은 버스 운전수인데 다리가 아파서 일년을 꼼짝을 못하고 누워 있었던 사람입니다. 물론 다른 약도 써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단 한번 침을 놓았는데 바로 일어나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정말 걷기도 하고 뛰기고 하면서 그 당시에 전도사님이신데 쫄쫄 따라다닐 정도였답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은 경찰관인데 다리에 반기부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교회로 왔습니다. 오른쪽 다리를 다쳤는데 수지침을 잘못하여 왼쪽 다리를 치료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일어나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깁스도 풀고 목발도 버려두고 걸어 간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잘 해야겠지요?


버스 운전수는 열심히 온 가족이 다 교회로 나오더랍니다. 열심히 3개월을 나오더니 다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런가 하고 가보니 3개월 나가 주었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더랍니다. 역시 경찰관도 나오지 않고 이렇게 고침 받은 수십 명 중에 교회 나오는 사람은 겨우 한두 명이었고, 이들도 제대로 예수님을 믿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당시에 왜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였을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금은 자신도 좌골 신경통으로 병원에서 치료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표적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지만 표적과 기사로 구원을 이루어 내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적과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인자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 3일을 있다가 나온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표적은 십자가의 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란 사람들이 원하는 표적과 기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어떠한 초월적인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실패한 모습이요, 힘없는 모습이요, 사람들이 싫다고 고개를 흔들며 침을 뱉고 저주하며 돌아서는 십자가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표적과 기사를 보고서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보고 기뻐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 온 것은 먹고 배불러서 따라 왔지 표적을 보고서 따라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적이란 십자가를 증거하는 표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먹고 배불러서 따라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영생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따라온 자들을 향하여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빵을 얻어먹어도 죽습니다. 병이 고침 받아도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으면 죽어도 삽니다. 영생의 양식과 영생의 음료수는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표적과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8-25절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ㄱ)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1)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목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미련하고 어리석고 거리끼는 것입니다. 표적이 아닙니다. 기적도 아닙니다. 실패입니다. 죽음입니다. 그러나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미련한 전도, 십자가의 미련한 선포를 통하여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여서 고개를 흔들며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표적과 기사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됨을 믿는다면 이보다 더 큰 표적과 기사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이 세상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날마다 못을 박고 있습니까?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로 살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의 성공이나 실패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범사에 넉넉하며,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처럼 보이고 있습니까? 믿지 않는 이웃과 비교해 보면 배운 것도, 가진 것도 변변찮은데도 세상에 주눅 들지 아니하고 자기의 소유에 집착하지 아니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까?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이 모든 조건을 보아도 내가 저 사람보다 훨씬 나은데 나는 왜 이렇게 괴롭고 답답하게 살고 있는가! 하면서 우리가 가진 소망에 대하여 물어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분명히 세상은 성도를 칭찬할 것입니다. 물론 상종도 하지 않는 자들이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나오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할 것입니다. 당신은 정말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맛보며 살고 있군요! 나에게도 좀 알려 달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고서 무어라고 합니까? 천국까지 예수 믿어서 확보해 놓고서도 하나님의 힘까지 빌려가면서 이 세상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하는 당신들과 함께 천국 가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시대의 참된 표적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기에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선포하며 살아가는 그런 표적이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사도행전  5:17-32  생명의 말씀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2)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23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 성전 3)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 성전 3)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 27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4)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5)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사도들에게서 표적과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다 항복하면서 사도들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기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사도들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사두개파 당파들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란 유대사회에서 정치 종교 경제적인 면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사도들을 감옥에 가둬버렸는데 밤중에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끌어 내어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사도들이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백성들에게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공회를 엽니다.


공회란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여기서 사도들을 재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감옥을 지키는 자들은 그대로 지키고 있었는데 사도들은 감옥에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있는데 사도들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서는 사도들은 다시 잡아서 공회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서 심문을 합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즉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는데 너희가 예수교를 전하고 있으니 그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하는 것이냐며 위협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권세들입니까? 그러나 그 권세 앞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이 무어라고 대답합니까?


29-32절이 그 대답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과 너희가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이 일에 증인이요 성령도 또한 그러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대답을 담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 기적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먼저 보고자 합니다. 기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면 왜 기적이 또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다 전하라고 한 것입니다. 19-20절을 보시면 감옥에서 내어 놓는 이유가 생명의 말씀을 다 전하라고 한 것입니다. 세상에 말이 참으로 많습니다. 위대한 성인들의 말도 많고, 유명한 철학자들의 말도 많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는 말들도 참으로 많습니다. 이러한 말들을 문자로 옮겨 놓은 것이 책입니다. 대형 서점에 가보시면 어마 어마한 책들이 쌓여 있고, 날마다 수십 종류의 신간서적이 출판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과연 생명을 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생명의 말씀입니다. 더 요약하면 오늘 본문에서 30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고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신 것입니다. 구주로 삼으신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다 증거하도록 감옥에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옥에 갇히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을 다 벌벌 떨게 만들면서, 표적과 능력과 기적을 행사하면서,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자들의 손발이 굳어 버리든가 갑자가 벙어리가 된다든가 하는 기적을 행하면서 멋있게 증거 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납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사람들이 놀리면 제일 많이 생각나는 것이 능력과 기적입니다. 그런데 전도를 하지 않으니 그런 마음조차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만 사도들의 전도를 계속하여 살펴보면 갈수록 매 맞고 감옥에 갇히고 쫓겨나고 순교당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니 갈수록 더욱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역시 생명의 말씀의 위력입니다. 우리 다 생명의 말씀을 믿고 증거합시다, 이렇게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옥에 갇혔다가 나온 기적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죽였으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 내신 사건과 비교하여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욕하였다고 하여서 우리도 덩달아 욕하면 안 됩니다. 바리새인들이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최고 최선의 종교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따라 갈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율법의 체계 속에서 살았습니다. 모든 율법을 다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려내심으로 유대인들이 틀렸다는 것이 증거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도들을 대제사장들과 권세자들이 감옥에 가두었으나 감옥에서 풀어내심으로 사도들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옳다는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이 그렇구나! 감옥에서 기적으로 나왔으니 우리가 틀렸구나, 하면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히려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33절에서 저희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가장 많이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에 대한 오해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능력을 어디에 전능하게 나타내고 계시는가에 대하여는 우리가 너무나 무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옥문은 열어주시지 않으셔도 그저 우리 남편 돈 많이 잘 벌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 자식 공부 잘하게 하여 주옵소서, 전능하신 주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이번에 한 건 크게 성공하여 헌금 듬뿍하겠습니다. 이러한 일에 하나님의 전능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이란 자기 약속에 대한 전능입니다. 하나님의 언약하신 바를 이루어 내시기에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다른 일에는 무능하셔서가 아니라 그러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텅 빈 것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0:12-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13 누가 여호와의 신을 5)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6)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16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17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의 티끌로, 통속의 한 방울 물로, 심지어 텅 빈 것으로 없는 것처럼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관심두지 않는 것에 목숨 걸고,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시는 생명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는 것,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두든가, 아니든가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들에게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감옥에 가두어도 생명의 말씀을 갇히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 무슨 능력을 이야기합니까? 감옥 문을 열고 나와야 능력이 아닙니까? 때로는 감옥 문이 열려도 도망도 가지 않습니다. 간수가 졸다가 감옥 문이 열린 상황을 보고서 자결하려는 것을 말립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감옥에 갇히던, 쫓겨나든, 병이 들던, 죽든지 간에 생명의 말씀은 갇히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왜 이렇게 증거되는 것입니까? 사도행전의 결론을 먼저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8:23-29절입니다. "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ㄱ)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일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치고 증거하여도 믿을 자만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글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긴 것입니다.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만 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명에 관심이 없다면,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면 이미 물 건너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서 나는 복음을 안다, 말씀을 안다고 하면서도 정작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서는 별 관심이 없이 다른 것에 눈 돌리고 있다면 구원이 다른 데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자신의 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늘푸른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정 행복을 위하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사업이나 내 인생의 성공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 아들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중, 고등학교에 보내시거나 군대에 보내셨을 때 학교를 가거나 면회를 가면 모두 다 같은 교복이나 군복을 입고 있으면 자기 아들을 잘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그 많은 학생이나 군인들의 아들들을 자기 아들처럼 여깁니까? 아니면 그 많은 아들들은 없는 것처럼 여깁니까? 다른 아이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막 스쳐지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른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그 아들들 각자는 다 자기 집에서 귀한 아들들입니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내 아들만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 드디어 찾아내면 이제 되었다 하지 않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명이란 다른 데서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아들의 피로 인하여 공급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의 피에 대하여 회개하는 자를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30-32절을 다시 봅니다.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4)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5)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이 세상이 거대한 감옥입니다. 이 감옥에서 생명 얻는 유일한 길이 나무에 달려 죽으신, 그러나 다시 살아나신 그분 앞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말씀 안에 거하면 이 세상의 어떠한 권세와 유혹에서도 탈출하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 함께 이 감옥에서 탈옥합시다.  


사도행전 5:33-42  고난을 기뻐함



33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쌔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36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사도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자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는데 왜 크게 노하여 죽이려고까지 하는 것입니까? 자기들이 죽이기로 결의하였기에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면 그들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지만 그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살인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사도들의 입을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배후에는 사단이 장악하여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러한 유대인의 회를 사단의 회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8-11절을 봅니다.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오늘날도 사단은 끊임없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기는 하되, 십자가는 증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게 된다는 것을 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무언가 예수를 잘못 믿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부자 되고, 축복이라고 하면서 그런 축복을 받을 만한 조건을 그 사람이 갖추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시간에 수많은 세상의 성공한 자들이 소개가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성공이야기도 도입하면서 성공하는 방법 강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마다 그러한 것에 세뇌가 되어서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나도 저렇게만 하면 성공할 수가 있구나! 하면서 매어 달리는 것입니다. 마치 다단계 판매하는 사람들이 회원을 모집하여 집중 강의를 하여 세뇌시키는 것처럼 세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로 어렵게 공부하는 대학생들이 자기들의 등록금을 투자하면서 나도 성공해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고난은 피하고 복을 받자는 것입니다. 화는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자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독신문에 총회 합동 부흥사회에서 '성공적인 월드컵개최를 위한 기도대성회'라는 광고가 나오는 것이 부자연스럽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왜 예수를 믿는다고 여기에 앉아 있습니까? 모든 종교의 보편적이 가치가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적인 복만이 아니라 마음이 깨끗하게 되는 것, 욕심을 버리는 것, 해탈하는 것, 이러한 것도 복이라고 보고서 고행을 통해서라도 이러한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러한 복이 아니라 천국 갈려고 합니다. 영생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욕심이 아닙니까? 죄인이 벌을 받고 지옥에 가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만 구원받아 천국 가고자 하는 것 역시 종교적 본능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에서는 천국이라고 하고, 다른 종교에서는 다른 말로 할 뿐입니다.


지난 토요일 동아일보 전면광고에 그리스도의 비밀인 4단계 회개에 대하여 나왔습니다. 4단계 회개를 하여야만 조상의 죄와 자신의 죄로부터 사함을 받고 모든 복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일간지에 전면광고를 낸다고 하여도 결국 자신이 복 받고 영생 얻고자 하는 종교적 열망 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받고자 하는 열망까지도 정죄당하는 곳이 십자가의 현장입니다.


사도들의 모습을 봅시다. 십자가 이전의 사도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하면서 따라 다녔습니다. 왜 고생을 하면서 따라 다녔겠습니까? 나중에 한 자리 하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 비록 고생이더라도 나중의 성공을 위하여 따라 다닌 것입니다. 심지어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도망갔습니다. 죽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하여 따라 나섰기에 십자가아 앞에서는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죽기위하여 주님을 따라 나서는 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 있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 것이 본능이고 그것도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욕망으로 안 사람들은 이러한 욕망에서 해탈하고자 온갖 고행을 다 하면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애를 쓰는 것입니다.


혹시 ‘성 프란시스’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오래된 영화인데 프란시스가 자기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심지어 속옷까지 다 벗어 버리고 수도의 길을 나섭니다. 그리고 거지처럼 밥을 얻어먹으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도원 단체가 중세에는 많았습니다. 교회들이 타락을 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고자 철저히 금욕적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청빈, 순결, 금욕적인 수도원단체가 많았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아시시의 프란시스입니다. 프란시스가 청빈, 순결 금욕적인 생활을 하자 많은 사람들이 프란시스를 따라 나서서 하나의 수도원단체가 되는 것입니다. 프란시스가 엄청난 고행과 수도를 통하여 마침내 성흔을 받는 모습이 영화에 나옵니다. 성흔이란 예수님의 상처난 흔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카톨릭적 기적입니다.


바울 사도도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흔적이 어떤 흔적인지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프란시스는 다섯 곳에 흔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양손과 양발과 허리입니다. 그러자 프란시스는 아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흔적이 자신의 수도로 이렇게 된 것이라고 보면 보통사람들은 정말 힘든 과정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정도로 수행할 수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한국에서 수도하는 곳이라면 절이든 교회든 어디든지 찾아가서 직접 기자가 체험하면서 쓴 책입니다. 요약된 것을 보았는데 인간 스스로 인간의 마음을 비우고 수련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수양하는 방법은 다 달라도 공통점은 욕심을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이 스스로 해탈의 경지,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수행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미리 택하신 것입니다. 자기들이 자원해서 도를 닦기 위하여 따라 나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성령을 보내시기까지는 아직 복음을 제대로 몰랐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니 복음을 제대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주님의 대신 고난 받으심으로 주어지는 의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한 것을 회개하고, 자기 의를 회개하고-복음을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당시의 지도자들이 이들을 체포하여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너무나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이 열린 것입니다. 죽이고자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공회원들 가운데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사도들 죽이는 것을 말립니다. 복음을 믿어서가 아니라 만약 저들의 주장이 진리라면 자신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전에도 드다나 유다 같은 사람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추종하였으나 결국 흩어져 버린 역사적 사실을 거론하면서 저들도 사람들에게 난 것이라면 곧 흩어지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일이냐, 사람의 일이냐를 판단하는 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자 공회에서 채찍질 하고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아줍니다. 이 채찍질이란 회당법에 의하면 40에 하나 감한 매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엄청난 고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채찍을 맞고서 나오면서 무어라고 하는 것입니까?


41절을 봅니다. "사도들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채찍 맞고 협박받아 나오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남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힘이 들어도 얼마나 싫어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손해 보고서 참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때 속이 상합니까? 기쁩니까? 그런데 사도들은 어떻게 이런 고난 받음을 기뻐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고난을 기뻐하고 있다니 정신병이 아니라면 무슨 이유 때문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5:18-20절입니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예수 믿는 사람을 세상이 미워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소속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모두 한 통속입니다.


다 마귀의 권세아래서 세상의 풍속을 따라 자기 욕심에 끌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도와가면서 때론 미워하고 다투더라도 화해하면서 우리는 그래도 같은 인류라고 하면서, 그래도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야, 악인보다 의로운 사람이 많아, 하면서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 싫어하고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들에게 무슨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물론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고 잘못해서 오는 욕을 예수님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성령이 임하시게 되면 자기는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나를 천국 보내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저 회개할 뿐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러는 것입니다. 처분대로 하옵소서! 그런데 천국으로 가게 하신다면 거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이 생기지 못하도록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하면 나도 예수님께 소속이 되었구나하는 기쁨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6:22-23절입니다. "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따돌리고, 욕을 먹고, 악하다고 버릴 때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복을 받고 싶습니까? 정말 피하고 싶은 복이 아닙니까? 이런 복 주실까봐 겁이 나지 않습니까? 아 주님! 이런 복 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도 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다가 내 남편이 내 아내가 집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버리면 안 됩니다, 그러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복을 거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사도들에게 임하니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 고난 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4:12-16절입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도에게 고난이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는 것이며, 또 성도에게 믿음의 시련이 연단을 낳고 소망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들이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에 고난을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6:1-7  집사를 세움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1)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2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2)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3)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4)도에 복종하니라.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지난 목요일 ‘신앙클리닉’ 성경공부하면서 화두로 던진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각자의 기준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날 대답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는 교회, 따뜻한 교회, 세상에서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라고 천대하지 않고 모두를 따뜻하게 맞이할 수 있는 세상과 다른 모습이 있는 교회, 멋진 건물도 나왔습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들은 평소에 좋은 교회란 어떤 교회인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교회 생활을 해보니 어떻습니까? 모두가 천사표만 모였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여전히 시기도 있고, 질투도 있고, 수군수군 되는 것도 있고, 끼리끼리 모이는 것도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럴까요?


초대교회를 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자주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하였고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고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아니하고 유무상통하였더니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마구 늘어났다, 그러므로 우리도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이러한 말을 많이 합니다만 그러나 초대교회가 아무리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도 역시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부족하여 이러한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아직 부족하여 그런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도들이 있어도 교회 안에 구제 문제에 있어서 불평과 원망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성령이 충만하면 말 한마디로 척척 움직여지고 아무른 잡음이 없이 일이 잘 진행되는 것으로만 압니다. 


예를 들자면 지난주에 야외에서 운동을 하면서 앞에서 진행자가 목청껏 나오라고 하는데도 별반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신 분이 계십디다. 그래서 일사분란하게 척척 움직이게 하면 좋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어진다면 그곳은 절대 군주나 절대 독재자가 강압적으로 다스리는 곳이거나 아니면 이단의 교주가 움직이는 곳일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 반장을 하면서 중간에 그만 두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말을 잘 듣는데 중학교에 오니 다른 초등학교 학생들도 오니 말을 잘 안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 두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적어도 지도자가 되어서 인도를 하면 모두가 척척 따라 주어야 된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다 따라온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길 정도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도 다 따라 오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성경 전체에 나오는 것입니다. 무두가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도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왕을 주소서, 라고 한 것입니다. 외국나라는 그런 왕에 의하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군대가 있는데 이스라엘은 오합지졸 같아 보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를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목사가 말 한마디면 모두가 척척 모이고 시키면 무어라 핑계 없이 하는 그러한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교회는 대부분 어떤 특정인의 카리스마적 지배가 너무 막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카리스마를 받은 사도들이 있던 초대교회에 구제문제로 인하여 소란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교회 내부에서 최초의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특별히 민감한 문제점을 두고 생겼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두 개의 집단이 있었다는 것이 갈등의 원인이었습니다. 한 집단은 히브리파 유대인들, 즉 히브리어 내지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고 다른 한 집단은 헬라파 유대인들, 즉 헬라어(=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들은 인생의 말기에 성전 근처에서 살기 위하여, 즉 하나님 가까이에서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왔습니다.


그들 가운데 남편이 죽고 나면 과부가 된 그들의 아내들은 흔히 생계의 도움을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 과부들은 대개 정착하여 사는 유대 가족에 소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함께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두 공평하게 구제가 시행되어야 하는데 히브리파 과부들은 구제의 명단에 다 들어있는데 헬라파 과부들은 명단이 빠진 것입니다. 그러자 헬라파에서 불만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식으로 말하자면 개척멤버하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하고 알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세력의 문제만이 아니라 돈이 직결되는 구제문제가 대두된 것입니다. 아주 민감한 사안인 것입니다. 교회에서 구제를 할 때 곤란한 문제들이 생깁니다. 어떤 가정을 구제하면 자기들과의 인정에 따라서 왜 누구는 안 해주고 누구는 해 주는가, 저 집보다 저 집이 더 어려운데 하는 그런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가 나오면 사도들이 알아서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면 될 텐데 오히려 자기들은 발을 빼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나니아, 삽비라는 성령을 속이다가 현장에서 죽어 버렸는데 그러한 권세로 한마디만 하면 이런 문제정도는 쉽게 해결이 될 텐데 자기들은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겠다고 하면서 구제문제를 집사를 뽑아서 해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이 구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전파에 있는 것임을 사도들이 직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제도 귀한 일입니다만 그러나 구제로 목숨을 잠시 연장하기는 하여도 생명을 구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모퉁이돌선교회’를 저희가 조금이라도 지원하고 있습니다만 그 선교회에서 늘 주장하는 것이 이런 내용입니다. 북한에 빵보다 더 시급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구제헌금을 하여서 북한에 빵 공장을 차리고 국수 공장을 차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긴급하다는 것입니다. 초점을 제대로 맞추었다고 봅니다. 실제 현장에서도 성경을 더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말씀으로 영생을 얻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 매월 십만 원이지만 성경 공급하는 일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잘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관심과 초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구제를 하는 것도 정말 모든 것이 주의 은혜로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서 감사함으로 구제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구제를 받는 사람은 그것이 형제의 땀과 수고로 된 것임을 알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사를 세우고 구제를 하는 일에 있어서 바울 사도는 과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1-16절입니다. "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하고 2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 3 참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것이니라 5 참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7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9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것이요 11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13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 다니고 게으를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15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


구제의 대상이 되는 참 과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과부의 조건이 참으로 까다롭습니다. 교회에서 명단에 올려서 구제하여야 할 참 과부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서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60세 이상이어야 하고, 자녀나 손자나 도울 친척 없는 자입니다. 그리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여야 하고 재혼을 하였다면 안 됩니다. 그리고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교회로 하여금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누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입니까? 집사들이 살펴보고서 자기의 인정이나 이해관계에 끌리지 않고서 마땅히 구제를 하여야할 사람에게 구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을 할 때에 모두가 어떠한 심정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를 다시 보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2:1-11절입니다.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2)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3)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언제 이러한 마음을 품으라고 하는 것입니까? 권면, 사랑,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 자비가 있거든, 이라고 말씀합니다. 좋은 내용입니까? 나쁜 내용입니까? 참으로 좋은 내용입니다. 교회 안에 이러한 열매들이 가득하여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제를 하고 선교를 하고 봉사를 하고 전도를 하고 성령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중에서도 무엇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다툼이나 허영으로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기와 경쟁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편 네 편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모습이 정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여 찰싹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하여 결국 우리를 더 깊은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훈련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정말 보기 싫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저 사람만 없으면 우리교회가 잘 될 텐데, 아니면 저 사람만 안 보이면 내가 살맛이 날 텐데,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만약에 없다면 자기는 늘 착한 사람인줄 착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들을 우리에게 붙여 주심으로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나밖에 모르는 인간인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문제이구나, 나만 없어지면 오히려 일이 잘 될 텐데 내가 오히려 방해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뛰쳐나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결국 더 무릎을 꿇고 주님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답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늘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제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죽기까지 낮아지는 것입니다. 구제하면서 허영이나 다툼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목사가 말씀으로 봉사하는 것도, 집사가 구제나 다른 것으로 봉사하는 것도 언제나 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교회로 부른 것입니다. 예수 믿고 바로 천국가게 하시지 않고 교회로 부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집사로, 봉사자로 세움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성령과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맡겨진 직분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증거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6:8-15  스데반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5)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쌔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11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 집사가 돌 맞아 죽었습니다.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돌을 던져서 죽이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고통인지 상상이나 가십니까? 죽을 때까지 돌팔매질을 하는 것입니다. 눈이 터지고 코가 깨어지고 머리가 터지면서 돌에 짓이겨져서 죽은 것입니다. 얼마나 미웠으면 이렇게 죽였겠습니까?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 죄가 있습니다. 우상에게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자(레20:2), 여호와를 저주하는 자(레24:10-23),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자(신13:10), 부모를 거역하는 자(신21:21), 간음하는 자(신21:21,24)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나무하다가 잡혀 온 자에 대하여 돌로 쳐 죽였습니다(민15:36). 그렇다면 스데반 집사가 이러한 죄를 범하였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스데반 집사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8절에서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혜와 성령으로 복음을 증거하니 유대인들이 상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의 증거를 듣고서 회개하여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키고 공회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 거짓 증인을 세워서 성전과 율법을 거스려 말한다고 하면서 고발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모세가 자기들에게 준 규례를 고치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와 같이 빛이 났습니다. 이러한 고발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할 때도 같은 죄목을 걸었습니다. 성전을 헐고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발에 이르면 곧 죽는 것입니다. 성전을 헐고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사형에 해당된다면서 예수님을 처형한 자들이 스데반도 동일한 죄목으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와 같이 빛이 났습니다. 도대체 스데반에게 무엇이 있기에 죽음 앞에서 천사의 얼굴처럼 빛이 날까요? 우리 옆의 사람들의 얼굴을 한번 볼까요. 천사처럼 빛이 납니까?


전도서 8: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전도서의 지혜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그 얼굴에 광채가 나고 평소에 사납게 생긴 사람이라도 아름답게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그 얼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우리의 얼굴에 진리의 광채가 나옵니까? 아니면 세상의 탐욕이 가득하여 보입니까? 내일에 대한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인하여 오히려 사나워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죽음 앞에서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이 난 사람이 목사가 아니라 집사랍니다.


여러분이 집사라는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스데반 집사 정도는 당연하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무슨 스데반 집사 정도식이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스데반이 받은 주님의 은혜와 성령은 고급하고 우리가 받은 주님의 은혜와 성령은 저급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스데반 집사보다 못하지 않는 집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단지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누가 나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데도 주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러면서 천사같이 빛나는 얼굴로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가장 복된 모습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십자가가 증거 되는 유일한 모습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스데반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보다 더 약게, 더 악착같이 세상의 성공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가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처럼 점점 가속이 더 붙어 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남보다 뒤쳐져서는 안 되니 자신을 다그치고 다그치면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까지 자기의 자녀들까지 들들 볶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향하여 달려가는지 그 방향성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저 남이 달리니 자기들도 달리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하나님, 예수님의 도움까지 받고자 주여! 주여! 기도하고 교회 봉사에도 왕 열심을 내니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모습이 천사처럼 빛나는 것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얼굴들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사람들에게 스데반 집사를 본 받읍시다, 하면 돌 맞을 일이겠지요!


이제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봅시다. 이들이 이방인들이거나 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전과 율법에 대하여 얼마나 뜨거운 열의가 있는 사람들인지 9절에 보시면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인의 회당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외국에서 살다가 성전 가까이 살기 위하여 온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온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열심이 대단한지 유대인 성인 열명이면 회당을 하나씩 지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물론 스데반 집사도 이러한 곳에서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전과 율법에 열심이던 이 사람들이 스데반의 말을 들어보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성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열심이 자기 의를 세우는 잘못된 열심이라고 지적하자 그들이 분노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설교는 다음주에 보겠습니다만 스데반이 죽은 이유와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가 같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7:7절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 함이라" 세상의 행사를 일부는 악하지만 일부는 착하다고 하셨다면, 이방인들의 행사는 악하지만 율법을 잘 지키고 성전에서 제사를 잘 드리는 유대인들은 착하다고 하셨다면 죽으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전부 다 악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죄의 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행사란 예수님을 보기를 고대하다가 보고서 기뻐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네 나이가 오십도 못되었는데 어찌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믿지 못할 말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러한 유대인들을 보고서 그러므로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입니까? 자기들만은 선택을 받았고, 자기들만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민족으로 간주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권능이 충만하였던 스데반 집사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방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 율법을 생명처럼 지킨다는 이들이 예수님을 죽였고 스데반을 죽였다는 것은 죄가 어느 정도인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이 악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여 온 사람들이 이방인이 아니라-그들은 아예 모르는 것입니다-유대인들입니다. 이를 통하여 죄의 심각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느 정도로 죄로 가득한지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대전에 동물원을 새로 짓고, 동물들을 옮겨놓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물에 사는 동물들을 풀어 놓기 전에 미꾸라지를 먼저 풀어 놓는 것입니다. 시멘트 독을 담수로 세 번을 씻어 내었는데도 시멘트 독이 있다면 미꾸라지가 살지 못하는 것이고, 미꾸라지가 살아 있다면 독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스데반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이 임한 자들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위한다는 사람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잘 살아 보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치십니까? 오히려 이 세상은 악인이 형통한 곳입니다. 의인은 핍박받고 고난 받는 곳입니다.


시편 73편이 그러한 고민의 시편입니다.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1)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2)거만히 말하며 9 저희 입은 3)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악인이 얼마나 형통한지 그렇다면 내가 매일 마음을 정하게 하고 손을 씻어 무죄하다고 하는 일이 헛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수록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고민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하박국 선지자도 같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박국 1:12-2:4절입니다. "12 선지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14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15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16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17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륙함이 옳으니이까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1)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 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2)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세상이 그렇게 보이느냐, 그러므로 보이는 것으로 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이 세상에서 능력 있게 잘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돌 맞아 죽었습니다. 우리도 스데반 집사처럼 됩시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 땅에 무슨 미련을 두시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들으시고도 또 예배당에 오시겠습니까? 그래도 오신다면 참으로 주의 은혜입니다. 우리 함께 주님 오시기를 더욱 소망하며, 또 하루라도 빨리 떠나기를 소망하며 살아갑시다.


마치 경상여전도회 친목회 게임시간에 의자에 앉기 게임을 하듯이 그렇게 살면 어떻겠습니까? 호루라기 소리만 나면 의자에 먼저 앉아야 살아남는 게임입니다.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고 빙빙 돌고 뛰면서도 관심사는 호각소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호각소리가 나지도 않았는데 먼저 앉으니까 모두 정신없이 앉기 쟁탈전을 하는 것입니다. 노래도 손뼉도 뛰는 것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의자에 앉는 것이 관심이었습니다. 직장도 성실하게 주님께 하듯이 하십시오. 가정 살림도 잘하십시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천사장의 나팔소리를 기다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죽임 당하신 땅입니다. 



사도행전 7:1-16  아브라함과 할례



1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7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 두 조상을 낳으니 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11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들어 큰 환난이 있을쌔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12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13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14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5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스데반 집사가 이 설교를 하고서 돌에 맞아 죽습니다. 도대체 어떤 설교이기에 이를 갈면서 돌로 쳐 죽이는 것인지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에 걸쳐서 보고자 하는데 오늘은 7:1-16절까지 아브라함과 할례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이 내용은 창세기 전체의 내용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18절에서 45절까지는 모세와 율법에 대하여 보고자 하는데 출애굽기로부터 다윗시대까지입니다. 그리고 46절에서 53절까지는 성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다윗부터 예수님의 죽으심까지입니다. 그 다음 54-60절은 스데반의 순교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이 설교 한편이 구약 전체를 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 한번에 창세기로부터 다윗시대까지 몇 분에 걸쳐서 설교를 하여도 알아듣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서는 모르더라도 그 전체적인 역사는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동일한 성경을 말하는데 한 쪽은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죽고, 한 쪽은 그러한 자를 이를 갈면서 죽이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확연하게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고서 치료를 받습니다. 다 나았다고 붕대를 푸는 날 거울을 보니 피부가 완전히 쭈그려든 것을 발견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오겠습니까? 십중팔구 거울을 깨트려 버린다고 합니다. 자기의 흉측한 모습을 보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거울인 성경을 제대로 보게 되면 우리의 더러움과 죄악이 낱낱이 드러나기에 성경을 던져버리든지 아니면 회개하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으면 자랑하게 되지만 그러나 성경이 나를 읽어 버리면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이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포장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경을 가지고 남을 누르고 자기를 높이는 일에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어두움을 좋아하여 빛으로 나아오지 않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자 그동안 인간 스스로 빛이라고 진리라고 주장하고 따르던 것들이 모두 어두움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회개하고 빛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깨트리는 것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메달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시대에 살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유대인들도 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핍박하였으나 자기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조상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음이 예수님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 유대인들에게 나타난 반응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고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다윗을 왕으로 두었다고 자랑합니다.


오늘 우리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우리가 무슨 차이가 납니까? 단지 일요일 날 예배당에 나오는 것과 헌금하는 것 봉사하는 것 등을 예수 믿는다는 근거로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것을 내가 잘나서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한 것들이 순전히 자기 의와 자기 자랑의 근거로 가지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우상이 되는 것이라고 허물어 버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여러분이 무언가 열심을 내어서 예배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고 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목사가 와서는 이게 무어냐고 다 집어 치우라고 하였다면 여러분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다시는 이 교회 나오는가 봐라, 하지 않겠습니까? 개척멤버라면 아니 우리의 헌신과 공로를 무엇으로 보고 저런 말을 하다니 네가 나가라 하면서 내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어린이나 어른이나 간에 자기의 행한 일에 칭찬을 듣기를 본능적으로 좋아합니다. 아주 작은 일을 하여도 그것을 칭찬하고 격려하면 잘 해 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자기의 자랑거리들을 속으로 다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를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나 행한 것 죄뿐이나, 하는 자는 자연인으로서는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열심과 헌신은 어느 누구도 따라 갈수 없을 만큼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의 자랑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할례를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혈통적 아브라함의 후손이 참된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충돌이 요한복음 8장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8:31-59절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기 전에 요한복음을 이미 보았습니다. 사도행전이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가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스데반 집사가 아브라함과 할례에 대하여 설교를 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하신 내용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내용을 받아 들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말씀이나 스데반의 증거를 받아들인다면 자기들의 자랑들이 한 순간에 다 날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쟁들이 요한복음 8장의 내용입니다.


31-32절을 보시면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기에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도 자유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아들이 자유를 주어야만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전통과 확신과 자랑을 한꺼번에 다 무너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논쟁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 한분뿐이시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서 즐거워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나의 말을 듣고 나를 믿었을 것인데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을 보니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독단적인 말을 감히 누가 하겠습니까? 그러니 참람하다면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유대인들의 해석과 예수님의 해석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할례를 받은 자요 율법이 있고 성전과 제사가 있는데 어떻게 죄의 종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해석은 너희가 무슨 말을 하여도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를 믿지 않는 것을 보니 너희는 마귀의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황당하며 기분 나쁜 말입니까? 그러면 지금까지 그들이 행한 모든 것들이 죄의 종으로서 행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본 호세아서 1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내가 수고하여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었는데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의 고발은 너희가 손에 거짓 저울을 들고서 사기 치면서 축재를 하였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이 어떻게 핍박을 받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이 율법을 따라서 그렇게 열심히 목숨을 걸고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살았는데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0:2-3절입니다.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열심히 하긴 하였는데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인간의 어떠한 선행이나 공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을 하면 종종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그래도 인간이 순수한 면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어떠한 선행이나 율법지킴이나 공적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가 자유를 주어야만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자유를 얻기 위하여 예수를 믿을 자도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죄의 종이 되어 있는데 무슨 수로 인간이 죄를 이기고 의의 종이 될 수 있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가 아브라함에 있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한 가닥 남은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을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까지 들어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아내를 동생이라 속이기도 하면서 바로 왕과의 만남을 통하여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습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15장에서 나옵니다. 언약의 내용은 가나안 땅을 주시는 것과 그의 후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4백년을 지낸 후에 돌아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체결을 합니다.


언약체결은 짐승을 절반으로 쪼개어 놓고 그 사이로 언약 당사자들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언약을 어기면 너도 이 짐승처럼 죽는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건 언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 지나가고 아브라함은 구경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방적 언약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걸고 하신 약속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언약을 받았지만 아직도 자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어 주실 줄 믿고 기다려야 하는데 아내의 말을 듣고서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을 낳는 때가 아브라함 86세입니다. 그리고 13년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지 않으십니다. 이제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겠다고 하시면서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라는 뜻입니다. 모든 나라의 아비라는 뜻입니다. 그러시면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어른들이 할례를 받을 것이요, 그리고 태어나는 아이는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할레를 행하고 나서 낳은 아이가 바로 이삭입니다.


그러면 이삭이 태어난 것은 할례를 받고 난 후에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창세기 15장에서 받고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기 실력도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99세 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을 낳았다는 것은 인간의 혈통으로 약속의 자녀가 오는 것이 아님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적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요 육적 할례가 할례가 아닌 것입니다.


이 사건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어떤 인간의 노력과 애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인 협력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홀로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이 자유케 하면 자유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원한 것도 아닙니다. 구한 것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이 어둠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뒤 다 자르고 이 말씀만 가지고 보아라, 내가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다, 그러나 나는 믿고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너는 믿지 않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였다고 하면 똑같이 유대인인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으로 자기 공로와 자기 자랑을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12절을 인용하면 반드시 13절까지 인용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영접하는 자가 만약에 나온다면 이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난 자가 누구입니까?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므로 혈통, 육정, 사람의 뜻을 잘라버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할례인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방식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이나 육체에 할례를 행하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미 구약에서도 마음의 할례(신10:16)를 말하고 마음의 가죽(렘4:4)을 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몇 곳을 봅니다.


로마서 2:28-29절입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표면적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면적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6:11-16절을 봅니다.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따른 부르심과 택하심과 자비와 긍휼과 그 언약을 이루심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할례를 행하게 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에게 자기의 자랑이 나오면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들은 복음을 모르지, 나는 안다고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주님께 받은 자라는 것을 아는 자라면 정말 겸손하여 지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아는 자라면 자기의 잘남에 우쭐하지 않고 자기의 못남에 기죽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가정생활에 직장생활에서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평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의 자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노라, 라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자기 이름과 자기 자랑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동시에 자기의 실패와 못남에 대하여서도 자유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풍성함을 더 많이 알아 가시고 더 많이 체험하시고 누리시고 증거 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7:37-45  모세와 율법 



37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ㄱ)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2)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42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ㄴ)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세 사람을 들라면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있지만 유대인들이 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으며 다윗 같은 왕이 있었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다윗 같은 왕이 자기들을 다스리게 될, 한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 집사가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는 골격이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이 역사적 인물들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가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자주 말을 합니다만 그러나 모든 국가들은 자기들의 역사를 미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 자체가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왜곡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역사란 단순한 유대인들의 역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를 기록한 것은 성경 외에도 다른 책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나타나는 역사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이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는 설교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자부심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에 대하여 세례요한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누가복음 3:7-8절입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합니다. 얼마나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까?


그렇게 고발하는 것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말하는 회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보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유대인들의 자랑이요 그들의 근거가 되는 정체성을 뿌리로부터 흔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스데반도 죽는 것입니다.


제가 늘푸른 교회 처음 부임하여 와서 일년쯤 되어갈 때에 저와 교제하던 사람들이 그 교회 사람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받았습니다. 그때 제가 무어라고 대답하였는가 하면 젊은 사람들이 많고, 교회가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개혁에 대한 열망과 말씀에 관심이 있더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특별히 거부 반응 없이 잘 받아들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제 2년이 지나고 만 3년이 지나면서 무어라고 말하겠습니까? 역시 인간이란 별수 없어! 라는 대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말씀도 자기들의 유익한 부분은 좋아하지만 거북스러운 말씀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가 보는 것입니다. 헌금 강조 안하니 좋은 것이고, 강제로 이것저것 하라고 안하니 좋은 것이지, 정말 복음이 좋고 예수님은 좋은 것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10년을 복음 전하였는데 그래서 교인들이 다들 좋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문제가 발생되니 모두가 돌아서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 도움이 되면 좋고 손해가 오면 싫은 것이 저의 본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다 이러한 실상을 말씀 앞에서 노출되어지고 그래서 회개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회개란 정말 인간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습니다, 하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모세와 율법에 대하여 보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은 것이 자기들이 잘 나서 받은 줄로 압니다. 다른 나라 백성들은 자격이 없는 데 자기들은 자격이 있어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들만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백성들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받지도 아니한 다른 나라 사람들을 인간 취급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유대인이라고 율법을 어기면 이방인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주 고발하는 내용이 율법도 모르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부하를 시켜서 예수를 잡아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라고 보고하자 율법을 모르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있다가 율법에 의하면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고 합니다. 너도 그 예수의 제자냐는 것이지요. 지금 자기들의 율법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율법을 모르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을 자기들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와 율법을 자랑하던 그들이 모세와 율법에 대하여 어떻게 하였는가를 봅니다.


사도행전 7:23-28절입니다. 모세가 나이 40에 자기 백성을 돌아볼 생각이 들어 자기 백성을 학대하는 애굽의 관리를 한 사람 죽였습니다. 이렇게 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동족이 서로 싸우기에 말렸더니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언제 우리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면서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우리도 죽이려느냐고 모세를 밀치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도망갑니다. 무려 40년을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보냅니다. 모세의 자기 힘으로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으시고 늙도록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후에 이삭을 받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배척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가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고 왔을 때에 바로 왕이 고역을 더 심하게 하자 당장 모세를 원망한 것입니다. 하나님 저 모세 벌을 내려 주소서, 우리를 더 괴롭게 합니다,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입니다. 오직 관심사는 자기의 고통 해소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언약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38절을 봅니다. 광야교회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생명의 도를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던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 거절하여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언약을 받는 동안 백성들을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광야생활 동안 늘 모세를 원망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상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처리하시고 끝장내실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그리스도로 온 우주 만물을 통일하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진노로 갚으시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삶으로는 부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성경은 가증스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 홀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인정하시겠습니까? 유대인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회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를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3장과 7장,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을 간략하게 증거하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까? 믿음으로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할례를 행하기 전입니까? 후입니까? 전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란 오히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이는 사건입니다. 그러면 왜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모세의 율법의 기능이란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니면 죄를 짓고 있는데도 죄가 죄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개입됨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컴퓨터 범죄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컴퓨터를 이용하여 범죄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범죄이긴 한데 컴퓨터 범죄에 대하여 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고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가입한 것은 인간이 얼마나 스스로 구제 불가능한 죄인인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로마서 3:19-20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모든 입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죄인임을 알게 하고 죄의 결과는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죄 아래, 심판 아래 갇혀 있다는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9-18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죄 가운데 살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실상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이러한 죄인 됨을 발견하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의도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고서는 오히려 그것을 자기들의 자랑거리로 삼은 것입니다. 율법의 뜻을 모른 체 우리는 율법 받았다, 너희는 없지, 하고서 자랑하면서 자기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구원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3장에서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430년후에 주어진 율법이 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란 믿음의 실체가 오기까지 한시적으로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야 하는지를 율법을 통하여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인간의 행함으로 되지 않는가를 율법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자들은 오직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할이 율법의 기능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에서 예수님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한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브라함이고 그 믿음의 실체요 믿음을 주시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이 됩니다. 그 중간에 모세의 율법이 들어 왔다가 나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왜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는가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율법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여전히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임하심으로 자기의 죄와 비참의 상태를 보게 되는데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 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실력으로 구약이든 신약이든 그 말씀의 온전한 뜻대로 순종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한 말씀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볼 때 마다 자신의 악함과 죄를 발견하고 날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죄를 모르고 신앙생활 하면 늘 하나님과 거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 이만큼 행하였으니 이만큼은 해 주셔야지요, 하는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죄와 비참을 알면 알수록 더욱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바라볼 분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더욱 더 주님께 감사하고 그 사랑을 인하여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로마서 3:21-31, 4:1-8절. “봉독” 이런 사람이 복 있습니다.



사도행전 7:44-53  성 전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3)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49 ㄷ)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거룩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러움이 없는 상태, 죄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의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아담으로부터 죄 아래 갇힌 신세가 되어 버린 인간에게서는 스스로 죄 없는 상태를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결심이나 행위로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거룩하고 의로운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길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는 것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의 선물이 공급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무엇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입니까? 율법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430년 후의 율법이 무효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이란 인간이 죄 아래 갇혀 있음을 알게 함으로 오직 주님의 긍휼로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장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본래 뜻을 모른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받았고,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지킬 능력도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받고, 지키는 것이 그들의 자랑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3:19-27절을 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3)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된 것인데 믿음으로 되었다는 것은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어떤 행위나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하나님 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 된 상태를 그 아들의 피가 화목제물이 되어서 죄를 간과 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무엇도 함께 받았습니까? 성막에 대한 것도 함께 계시로 받은 것입니다. 십계명과 일반 율법에 대한 것보다 많은 분량이 성막에 대한 것입니다. 성막의 구조와 그 안에서의 제사와 제사장의 역할들이 아주 상세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출애굽기에서만이 아니라 레위기 전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을 차례대로 읽어나가다가 대부분 어디에서 멈추어 지는가 하면 출애굽기 25장 이후부터입니다.


출애굽기 25장부터 성막에 대하여 나옵니다. 모세가 계시를 받는 것부터 시작하여 만드는 과정까지 상세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성경이 지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레위기에 들어가면 아예 덮어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얼마나 상세하게 제사에 대하여 나오는지 양을 잡을 때는 어떻게 잡고 똥은 어떻게 처리하고 살은 불에 태우기도 하고 흔들기도 하고 삶기도 하고, 피는 어떻게 뿌리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로 가득한 것입니다. 십계명과 다른 규례들을 주고서 지키라고 하면 될 텐데 왜 율법을 주고 나서 성막과 제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인하여 죄를 깨닫습니다. 그러면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 죄를 해결할 방법이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피는 곧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은 대신 죽어야 죄가 사하여 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의 기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전은 건물로 지어지기 전에는 텐트로 되어 있기에 성막이라고 합니다만 그 안에서는 언제나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곳입니다. 이것이 성막에서는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7:44-45절을 봅니다. "봉독" 광야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증거의 장막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직접 본 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막이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다윗시대까지 있었습니다. 46-47절을 봅니다. "봉독"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다른 사본에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 드리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내가 언제 집을 지어 달라고 하였느냐 하시면서 오히려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이 처음에는 자기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마치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메어 오려고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다윗을 보호하는 것인데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보호하려고 정병 3만 명을 동원하여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마치 호위하듯이 모셔오려고 하다가 베레스 웃사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언약궤는 제사장이 어깨에 메고 가야하는데 수레에 싣고 간 것도 잘못이지만 자기가 하나님을 보호하여 가는 것처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오벧 에돔의 집에 두었더니 그 사람이 복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다시 메고 갑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제사장들이 에봇을 입고 어깨에 메고 갑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다윗이 하나님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신 것으로 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지어 드리겠다고 하시자 하나님께서 오히려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 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다윗의 왕위가 계속되리라는 것이면 이 왕위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하게 될 왕위인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이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제가 주님을 위하여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저를 위하여 집을 지어 주셔야 하시는 것이군요, 하면서 기도하는 내용이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영원히 주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야 사는 죄인입니다, 하는 고백인 것이지요!


사무엘하 7:27-29절입니다. "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8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29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것이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성전을 지을 재료를 준비하여 놓고서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합니다. 성전이 완공되고서 솔로몬이 기도하는 내용을 봅니다.


열왕기상 8:27절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하늘과 하늘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는데 어찌 사람의 손으로 건축한 이러한 집에 하나님께서 계실수가 있겠습니까, 하는 내용입니다. 단지 주의 눈이 이곳을 향하여 보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전을 보시겠습니까? 그곳만이 피 흘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거룩하신 주님께서 거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의 자리에서만 만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하나님과 죄인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성막과 성전의 이러한 기능을 오해하고서 자기 나라만 성전이 있기에 결코 망하지 아니하리라고 본 것입니다. 성전 자체가 우상화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치 엘리 제사장 때에 언약궤만 가져오면 전쟁에서 이길 줄 알고 언약궤를 가져 왔지만 오히려 전쟁에서 패하고 언약궤마저 빼앗겨 버린 것과 같습니다.


사도행전 7:47-50절입니다. "봉독"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서도 그 건물에 하나님을 모셔 둘 수가 없음을 이미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인용하여 또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6:1-4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1)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스데반 집사가 이 본문을 인용하면서 지금 유대인들이 붙들고 있는 성전이 우상이라고 공격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3일 만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7: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구약시대 솔로몬의 성전 건물이 서 있는 때에 그 성전 문을 가로막고서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미 성전이 우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얼마든지 이러한 종교화로 흐를 수 있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얽매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지금도 목숨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 시간과 공간의 거룩입니다. 안식일은 시간에 대한 거룩입니다. 성전은 공간에 대한 거룩입니다. 안식일과 성전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안식이 없는 인생에게 자신의 피로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성전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그 짐승의 피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 구속하시기 위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가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니 안식일과 성전이 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모르면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우리의 의로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어떤 행함을 자기 의로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따르는 것입니다. 오직 참된 성전이 되신 예수님, 짐승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인하여 우리가 살고 있음을 늘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날 건물이 아니라 성도를 성전으로 삼으신 주님의 뜻입니다.



사도행전 7:54-60  스데반의 죽음 



5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 집사가 왜 죽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생각에는 그러한 사람이 더욱 주의 복음을 잘 증거하게 하시면 되실 텐데 왜 그것도 비참하게 돌에 맞아 온 얼굴과 몸이 찢어지고 터져가면서 죽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동안 예수 믿으면 무언가 잘된다는 생각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서 주로 목사와 열심 있는 예수 믿는 자들이지만,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을 들어 왔습니다. 예수 믿는 나라들은 부강한 나라들이고 예수 믿지 않는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하고 어려우면 예수를 잘못 믿어서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예수님을 잘못 믿어서가 아니라 참으로 잘 믿었습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구약의 전체 흐름을 한 줄로 꿰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돌 맞아 죽은 것이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잘 믿으면 스데반처럼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예수를 잘 믿었더니 부귀하고 장수하였다는 그런 내용이 성경에서 있다면 여러분이 조사해서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설교를 정정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예수를 믿어서 세상에서 무엇인가 잘 되어 보려고 하셨다면 생각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스데반 꼴이 나지 않으려면 예수 믿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스데반의 설교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요약하여 봅시다. 세 번에 걸쳐서 할례와 율법과 성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할례란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라고 이미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란 혈통이나 사람의 뜻과 정성이 아니라 그러한 것의 단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약속으로 주어지는 한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할례입니다만 유대인들은 육적인 할례를 자기들의 자랑거리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이란 왜 인간이 죄인인지를 알게 함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고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율법외의 다른 한 의를 향하게 하는 것인데 오히려 그 율법을 가지고 율법이 증거하는 의인을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이란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기능이 성전인데 짐승의 피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온전한 한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전인데 그 성전을 헐라는 주님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에게 무엇을 주면 그 모든 것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할례도, 율법도, 성전도 모두 자기 자랑과 자기 치장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발하자 스데반을 그냥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말씀에 귀를 막고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질러된 것과 같은 일이 스데반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대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스데반처럼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봅시다.


가장 가까이 7:51-53절을 봅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핍박하였고 또 그 선지자들이 오시리라고 예고한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3:29-36절입니다. "29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만이 아니라 신약시대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동일한 길을 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믿고 따른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제 스데반의 죽음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도 온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거하니 더욱 견딜 수 없어 하면서 돌을 들어 치는 것입니다. 그러자 스데반은 자기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면서 무릎을 꿇고 크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면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스데반을 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자는 것은 쉼입니다.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최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도 스데반처럼 되자, 스데반을 본 받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과연 무엇을 증거하면서 죽었는가를 보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와 율법과 성전을 모두 자기들의 자랑과 치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인데 오히려 자기들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조차 초개같이 버리면서 그리스도만 증거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스데반이 대단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도대체 무엇이 있었기에 그렇게 그리스도만 증거한 것인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세상에서 하는 일이든, 예배당 안에서 하는 일이든 무엇이 드러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까? 지난주에 교사 강습회가 있었습니다. 둘째 날에 가보니 부장 교사만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한 사람도 없었는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강사의 강의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었을 것이고 또 하나는 저도 첫날 첫 시간은 함께 하였는데 율동강사가 손이 잘 올라가지 않으니 하는 말이 자기도 서울에서 들었다면서 지하교회에서 왔는지 왜 손이 안 올라가느냐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빠서 가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나 기분 나빠 하는 사람이나 모두 관심이 다른데 있는 것입니다. 크고 멋있는 예배당에 있으면 은근히 자랑스럽고 그렇지 못한 곳에 있으면 다른 것으로 자랑거리를 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성전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느냐? 건물이 아니다, 알고 있냐, 하면서 자기 자랑과 위로를 삼기 바쁜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는 자기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이 죄인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환영할 만한 것들로 예수님을 증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도대체 무엇을 포장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온갖 포장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게시판에 손봉호 교수의 월드컵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올려놓았습니다. 꼭 한번 보시가 바랍니다. 기독교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어필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진리로만 증거될 뿐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결코 좋아하지 않는 길입니다. 좁은 문이요 문만 좁은 것이 아니라 길도 좁은 것입니다. 넓은 문 넓은 길은 편하니 사람들이 많이 찾고 많이 갑니다. 그러나 좁은 문 좁은 길은 협착하고 험하여 찾는 자가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생명의 길입니까? 무엇이 진리의 길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역시 십자가의 길, 즉 죽는 길 뿐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기고 승리하고 예수 믿어서 이것저것 잘되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였더니 30배 60배 100배의 이익을 보았다고 하면 증권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다 몰려 올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십자가로 가는 길은 죽음으로의 초대입니다. 함께 죽자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다른 좋은 것들을 미끼로 제시하여서 복음을 전하면 되지 않는가? 하시겠지만 그런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의 기능이란 망하는 자들에게는 망하는 소식으로 들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얻는 자에게만 십자가의 복음이 능력으로 들리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4:3-5절입니다.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십자가의 복음이 가려지는 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망하는 자들에게는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예수님의 증인은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깨어짐으로 질그릇이 깨어짐으로 그 안에 있는 보배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6-18절을 봅니다. " 6 ㄱ)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13 기록한바 ㄴ)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이란 사람들이 스스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주 받는 모습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실패한 모습인 십자가의 죽음을 누가 좋아하며 나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두움 가운데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그 창조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가 비쳐 온 것입니다. 그러자 눈을 뜬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실패하여도, 죽어도, 손해를 보아도, 병이 들어도 상관없는 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그 빛이 그 보배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배가 드러나기 위하여서는 날마다 깨어지는 방법으로만 증거되는 것입니다. 질그릇이 자기 치장을 하면 그 안의 보배가 드러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안에 보배가 없으니 자기 치장에 바쁜 것입니다.


여러분이 화장을 왜 합니까? 화장하지 않은 얼굴로 교회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미, 주근깨. 여드름자국, 잔주름살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정말 아름다운 피부가 있다면 화장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보배가 있다면 나를 치장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아도, 실패를 하여도,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너 도대체 왜 그러니, 그러고 왜 사니, 하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까? 너무 약삭빨라서 그런 소리 들을 틈도 없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혹시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예수님이 계시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싫건 좋건 간에 우리를 자꾸만 죽음의 자리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죽으나 사나 내 안에 그리스도만이 존귀케 되는 그러한 삶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거부하지 마시지 바랍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운 것입니다. 죽어야 삽니다.



사도행전 8:1-8  큰 핍박 큰 기쁨 



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1)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볼 때에 그래도 이만하면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힘을 합하고 좋은 지도자를 만나면 불가능해 보이던 월드컵 4강도 이루어내는데 조금만 더 좋게 고치면 그래도 살만한 곳으로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잘 싸워서 이겼다고 돈을 수억 원씩이나 준답니다. 그리고 그것도 공헌도에 따라 나누어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다윗이 망명생활 할 때 600명의 군대가 있었습니다. 적을 추격하러 가다가 200명이 쳐져서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400명이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돌아올 때 4백 명 가운데 일부가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저들에게 처자식만 주어서 쫓아내어 버리자고 합니다. 그러자 다윗이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모든 전리품을 공평하게 나누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붙여주신 싸움인데 어떻게 자기들의 공로를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의 품꾼 비유에서도 하루 열두 시간 일한 사람이나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일당을 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 세상과 다른 모습입니까?


승리가 주어진다는 것은 상대방을 이겨야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경기에서 신사적으로 싸우는데 그러나 이번에는 얼마나 악착같이 싸웠습니까? 심판 몰래 옷을 잡아당기고 밀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구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전부의 모습입니다. 양보를 하고, 손해를 보고,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면 살아 갈수가 없는 세상입니다. 그저 남을 밟아야 하고, 이겨야 하고, 죽여야만 내가 사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한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였는데 그런 사람을 돌로 쳐 죽이더라는 것입니다. 돌이 날아오다가 180도 방향을 바꾸어서 던진 자에게 다시 날아가서 맞는 것도 아니고 그대로 맞아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의 죽음을 세상은 마땅히 여기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는 세상,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8:1절을 봅니다. 사울이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면서 할례와 율법과 성전을 공격한 것입니다. 할례와 율법과 성전을 자기들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스데반 집사는 자신의 죽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손에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사용한 것입니다. 할례를 가지고 남을 정죄한 것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판단만 하였습니다. 자기들을 옳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자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자기를 증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기 자랑, 자기 정당성을 고발하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예수님을 죽이고, 스데반을 죽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모습도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가를 점검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건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쓰는지를 돌아보면 단번에 알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손해보고 억울한 일 당함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기의 옳음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모든 지식과 사건과 경험들을 다 동원하여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성경도 예수님도 하나님도 다 끌어들여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안 되면 나중에 한마디 합니다. 하나님은 아시겠지! 그러나 막상 두 사람에게 다 들어보면 그렇지만도 않은데도 자기 잘남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한 알의 썩는 밀알로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보고 무어라고 합니까? 아이고, 예수쟁이들 지긋지긋하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입니까? 세상보다 더 세상이 되어버린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예수 믿는 자가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방인들보다 유대인들에게서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스데반을 유대인들이 돌로 쳐 죽이는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8:2절과 4절을 봅니다. "봉독"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집니다. 핍박을 피하여 도망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핍박을 피하여 도망을 갔는데 간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큰 핍박이 오자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피가 섞인 자들이라고 상종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까지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역시 주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사도행전 1:8절을 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증인이 되자고 훈련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증인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와 이방인에게 복음이 증거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벽인지를 사도행전에서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까지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 주님의 말씀의 능력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흩어지지 않으니 핍박을 통하여 흩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흩어진 자들은 사도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왜 피하여 가지 않았는가를 어떤 주석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관대하게 다루어졌거나 아니면 은신하여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핍박의 주된 대상은 헬라파 유대인들로 보는 것입니다. 특히 일곱 집사의 이름들이 모두 헬라식 이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집사 중 빌립의 이름이 나오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흩어진 사람들이라고만 나옵니다. 무명의 사람들입니다. 핍박이 오자 피하여 간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서 복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모습을 다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영웅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인물이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일함으로 그 사람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방식은 영웅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죽어가는 자들을 통하여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사람들이 자랑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열심과 재능으로 주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주님께서 이루어 가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이 죽고, 핍박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으로 교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절을 봅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한다고 합니다. 잔멸(殘滅)이란 씨도 없이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바울입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죽이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나는 것입니다. 마치 겨울철 잔디밭에 불을 끄려고 때리면 때릴수록 더 옆으로 번지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살살 쓰다듬으면 불이 꺼집니다.


사단도 지혜롭습니다. 그러니 교회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핍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잘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핍박이 없는 교회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게 미지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시면 정확한 진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도 주님은 주님의 일을 묵묵히 이루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26-31절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ㄴ)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자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지옥 가는 이유를 김세윤 교수는 자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사람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자기 자랑을 아는 자의 말이지요! 그러므로 자기 자랑 할 것이 없는 사람을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사도들 보다 집사였고, 집사 보다 이름 없이 흩어진 자들로 인하여 복음이 증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그저 나오는 것이라고는 자기 자랑과 자기 치장과 자기 자존심밖에 나오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수록 주님만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만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만이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지혜도 없고, 의도 없고, 거룩함도 없기에 구속을 받을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이 우리의 지혜와 의과 거룩과 구속이 되시기에 이제는 사나 죽으나 주님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리 자기 말이 많은 것입니까? 그 수많은 말들 중에 누가 과연 예수님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점심 식사를 하시고 한두 시간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까? 잠시도 쉬지 않고 나눈 이야기 중에서 과연 누가 자랑이 되었습니까?


자기 자랑에서 해방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복음을 증거하실 때, 자랑스러운 인물을 사용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자랑스럽기는커녕 죄인 중의 괴수, 스데반 죽을 때 마땅히 여긴 사울 같은 자를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평생에 자기 자랑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나고 멋있어서 복음을 잘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사람들이 볼 때에 아무른 자랑 거리가 없는 평범한 사람, 오히려 부족하여 보여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아도 됩니다. 성공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도 몰라주어도 됩니다. 져도 됩니다.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자유하게 하며 넉넉하게 사는 자세입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여유가 있고 넉넉하게 사는가를 세상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그런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어라고 하면 됩니까?


베드로전서 3:8-22절입니다.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ㄱ)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3)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4)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이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복을 빌라고 합니다. 14절을 봅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들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소동하는 것으로 소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소동을 하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니 두려워하고 소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 평소에 힘도 없고, 능력도 없고, 그래서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고 벌벌 떨고 소동을 하는 그런 상황에서 참으로 여유를 가지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물어 올 것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때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바로 위의 말씀에 다 나와 있습니다.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의로운 자가 대신 죽으심으로 속죄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분이 부활하시고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스데반도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 본 것입니다. 그에게 천사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위대하심을 증거하는 사람은 위대하거나 유명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흩어진 그 사람들이 자기들도 두려워서 피하였지만 그러나 복음을 두루 다니며 증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큰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졌지만 그러나 주님의 약속대로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되어 오늘 우리도 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큰 핍박이 큰 기쁨의 소식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소동하는 것들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소동하지 말고 오히려 큰 기쁨의 소식을 인하여 나의 환경에 상관없이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복음의 소식이 전하여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는 곳 마다 큰 기쁨의 소식이 증거되기를 바랍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더라!



사도행전 8:9-25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1)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2)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 내가 보니 너는 3)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4)매인바 되었도다 24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남으로 성도들이 흩어졌습니다. 이렇게 하면 교회가 잔멸하여 질줄 알았지만 오히려 흩어진 그 곳에서 복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 지역이 예루살렘에서 유다로 사마리아로 땅 끝으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사마리아에 복음이 증거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8:6-7절을 보시면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낫는 표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일로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말씀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오늘날도 이러한 표적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믿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이러한 표적이 일어난다고 해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주실 표적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자기 형제들이 지옥에 들어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주시면 그들이 믿을 것이라고 할 때에 아브라함이 무어라고 합니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서 들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부자가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증거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하자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죽었다가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래도 표적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즈음도 이러한 표적과 기적을 말하는 곳이 많습니다. 병 고치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었더니 부자가 되었더라,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행복한 가정이 되었다는 등의 여러 가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많이 믿을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면 처음에 무엇을 알고 나옵니까? 그러니 처음에는 좋게 말하고서 나중에 복음을 전하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표적을 보고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기적을 본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시몬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이 이런 예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표적과 기적을 보면 분명히 신뢰감을 갖게 하는데 그것이 정당한 방향으로 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여러분의 마음의 생각을 다 알고 여러분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미리 알아서 이렇게 하십시오, 그러는데 정말 그 말대로 해서 무언가 해결이 되었다면 여러분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군요!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 이번 주에는 어떤 주식을 살까요? 하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봐라 우리 목사님 말씀 듣고 이 사업을 했더니 사업이 잘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 두 번 들은 것이 아닙니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자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인데 아버지가 목사님이시고 아들이 목사님이신데 늘 어려운 문제만 생기면 점집에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은 점괘가 나오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괜히 복채 많이 받으려고 센 체 하는 경우도 있으니 돈은 달라는 대로 드릴 테니 속 시원히 말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당신은 나와 다른 너무나 지고한 분이 당신은 붙들고 있으니 점을 못 봅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그 이야기를 찬양대에서 한 것입니다. 찬양대를 하면서 점 보러 다닌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역시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자녀이구나 하면서 기뻐한 것이 아니라 모두 그 집으로 떼거리로 몰려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성경의 말씀을 믿지 않고서는 죽었다 살아난 자가 와서 말한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표적과 기적이 일어나면 그것을 이용할 생각을 하는 것이 죄인 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 이 일만 성사 시켜주신다면 제가 이것을 해 드리겠습니다.' 이 문제만 해결이 되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하면서 실상은 자기의 필요한 것을 챙기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누구입니까? 시몬입니다. 시몬이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행전 8:9-11절입니다. 사마리아에서 마술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자칭 큰 자라고 하였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청종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신의 능력이라고 불린 것이지요! 그러니 단지 눈속임만 하는 마술이 아니라 상당히 신비적인 능력도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오랫동안 시몬의 마술에 놀라서 시몬을 따랐는데 이제 빌립이 와서 능력을 행하니 상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빌립을 따랐는데 이 시몬도 빌립을 따른 것입니다.


13절을 봅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사마리아가 복음을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베드로와 요한이 현장을 확인하러 온 것입니다. 이 내용은 다음주에 보기로 하겠습니다만 이들이 와서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세례만 받았고 성령이 임하지 않았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안수하니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서 시몬이 무어라고 합니까?


18-19절을 봅니다. 돈을 드리면서 자기도 안수하면 성령이 임하는 그런 권능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엄청난 저주를 받습니다.


20-25절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사려고 하였으니 그 돈과 함께 망하라고 한 것입니다.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메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혹시 사하여 주실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자 시몬이 그런 벌이 임하지 않기를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만 그 이상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회개하였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면 시몬이 그동안 빌립을 따라다니면 믿고 세례를 받고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닌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지금까지 마술 행한 것은 잽도 안 되는 것임을 안 것입니다. 마술해서 돈을 벌고 존경 받는 일이란 것이 만 원짜리 일이라면 성령이 임하여 권능을 행하는 것은 부르는 것이 값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몬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어 단어에 simony 성직매매 죄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이러한 성직매매 죄에서 자유하십니까? 나는 목사 되기 위하여 돈을 쓰거나 장로 되기 위하여 돈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시몬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고시 때입니다. 우리가 듣기로는 전도사 고시 치르고 돈을 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도사 안하면 안하지 돈 내고서는 하지 않겠다고 작정을 한 것입니다. 이미 전도사 고시 전형료를 내었는데 무슨 돈을 또 내는가! 그러면 그것은 성직매매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같이 어떤 사람이 고시위원들 식사라도 하도록 얼마씩 내자는 것입니다. 반대를 하였지요! 무슨 그런 법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따지니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례상 인사로 그렇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사람하자고 해서 하는 사람은 하고 하지 않은 사람은 하지 않았습니다. 강도사 고시는 총회에서 하고 전도사 고시와 목사 고시는 노회에서 하는데 목사 고시 때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 교회의 직분인 안수 집사가 되거나 장로가 되면 무언가 해야만 된다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돈이 많은 사람이 무슨 큼직한 일을 하면 그런 사람들이 빨리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돈 없으면 직분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자, 하였습니다. 돈을 내지 않고 임직식을 한다거나 전도사 고시 때 돈 안내고 하였다고 해서 시몬이 안 되고 되고 할까요? 이렇게 했다고 시몬의 생각이 없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정직하게 하였으니 우리교회는 임직식 때 돈 내고 하지 않았으니 다른 교회보다 더 바르고 교회가 더 잘되리라고 생각하면 그것 자체가 이미 시몬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시몬이 다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예배를 드리고 연보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것도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수입의 10퍼센트라는 것이 적은 금액이 아닙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선교헌금도 하셨고, 감사헌금도 하셨을 것입니다. 또 다음주는 구제헌금도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왜 하신 것입니까? 솔직하게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하여 봅시다. 정말 나 같은 죄인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나의 모든 것이 전부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인정하면서 전부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으니 주님께로부터 거저 받는 것이기에 이것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형식으로 내어 놓습니다, 하면서 드린 것입니까?


아니면 헌금해서 복을 받자고 한 것입니까? 십일조 하면 복 받는다고 해서 지금까지 한 푼도 떼어먹지 않고 십일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십일조를 하라, 인색하지 않게 하라는 말을 듣고서 조금씩 넉넉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렇게 하여도 부자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목사를 고발을 하던지 해야지-미국에서는 실제로 고소하여 손해배상을 받았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왜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까? 그래도 혹시 손해가 나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복음을 듣고 나니 헌금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으로 복을 받고 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에 보다 헌금을 적게 한 것입니까? 그러나 헌금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가 모든 복을 받고 하는 것을 안다면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복음을 빌미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돈을 더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몬이 왜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살려고 한 것입니까? 돈이란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습니다. 생명도 연장시킵니다. 앞으로 복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은 세상은 돈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돈으로 계산하여 거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돈을 주고 살수 없다는 것은 돈이 단순한 돈이 아닙니다. 돈 안에는 사람들의 땀과 수고와 정성과 탐욕이 다 들어 있습니다. 공짜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돈만이 아니라 우리의 어떤 애씀과 수고와 정성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공급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대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행위가 시몬입니다. 오직 은혜로!



사도행전 8:14-17  사마리아도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오늘 설교 제목을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도'입니다. 14절 말씀에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씀인데 여기서 ‘사마리아도’ 라고 할 때 그 의미가 어떻게 전달이 되는 것입니까? 존경과 부러움으로 하는 말이겠습니까? 아니면 아니 그런 동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인가 하는 의미이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어느 대학교수 집안의 자녀가 서울대에 합격하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럴만 하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옆집에 사는 어떤 자녀도 서울대 합격을 하였습니다. 그 아버지가 맨 날 술이나 먹고 행패나 부리는 집안이고 그 자식도 별 특별하지도 않았는데 서울대 합격하였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합니까? '아니 그 집에도' 서울대 들어갔느냐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를 한번 해보라고 할 것입니다.


다시 사마리아에 대입을 합니다. 아니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단 말인가, 그러면 조사를 해보라,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내려 온 것으로 봅니다. 막상 와서 보니 빌립의 전도를 받아 이미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미 복음을 듣고서 그 복음을 믿었기에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은 사람에게 한 사람도 성령이 임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안수하니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이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아직도 논란이 분분합니다. 예수 믿는 것과 성령이 임하는 것은 다르다고 하는 자들과 예수 믿는 것이 성령이 아니고서는 믿지 못하는 것이니까 예수 믿는 것이 바로 성령의 세례다, 그렇게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입장입니까?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분명히 믿는 것과 성령의 세례를 달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것은 초대교회 때의 과도기적 모습이라고 합니다.


이때만 그렇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서는 예수를 주라고 할 수 없다고 하는 고린도전서 12:3절의 말씀 등을 인용하여 예수 믿는 것이 곧 성령의 세례라고 합니다. 요즈음은 이러한 논란도 없는 형편입니다. 모두가 세상에 정신이 팔려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만 이러한 논란을 통하여 성령의 체험이 있으면 고급한 신자, 없으면 저급한 신자 이렇게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신분적이 계급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고급 신자 저급한 신자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젖을 먹는 자가 있고, 밥을 먹는 자가 있는 것처럼 말씀의 깊이가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기의 공로로 주님 앞에 설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모두가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자신을 남과 비교하여 우월적인 위치에 서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는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는 데서도 계급화 하는 경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밋밋하게 복음의 말씀을 듣고 무슨 뚜렷한 체험도 없이 예수를 믿는 사람과 믿을 때부터 가시적인 체험이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더 신령하게 보이겠습니까? 우리는 종교적인 본능들이 다 있는 사람들이기에 후자에 점수를 더 주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미 복음을 듣고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자각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다는 사람도 또 다른 신비한 체험을 하기 위하여 쫓아다닌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받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 안수를 받으라, 기도를 어떻게 하라, 어느 기도원에 가라는 식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도 결국 돈 주고 하나님의 선물을 사려고 한 시몬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주어지는 은혜를 자꾸만 사람의 행위로 대체시키려고 하는 것이 죄인 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만하여 받았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조상들과 전통들을 그렇게 고수하여 왔던 것입니다. 너희들에게는 이런 것이 없지, 우리는 있다는 식의 자기자랑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 것이 율법이요 성전이요 할례요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을 자기들의 조상으로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서야 왜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만 자기들이 구원받는 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이 임하심으로 자신들의 죄와 비참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약속하신 대로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기까지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만 성령이 임하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서 사도들을 제외하고서는 여러 곳으로 흩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사마리아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모임에 이 소식이 증거된 것입니다. 그러자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는가, 하면서 와서 확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고, 성령이 임하셨는데도 그들이 넘을 수 없었던 벽은 유대교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특히 베드로와 요한이 현장에 가서 확인을 하고 그들에게 안수를 하니 성령이 임하는 것을 통하여 무엇을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복음이 유대의 경계를 넘어간 것을 확인시키는 작업인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예수 믿고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임하시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결국 사도들에게 임한 성령이 동일하게 사마리아인에게도 임하게 되자 그들이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스스로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께서 먼저 빌립과 흩어진 주의 백성들을 통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나서 제자들에게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시 복음의 전파는 주님께서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인 것입니다. 증인이란 말 그대로 듣고 본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무어라고 보고하였겠습니까? 사마리아에 가보니 그들도 동일하게 우리와 같은 성령이 임하였다고 보고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사마리아가 아니라 완전히 이방인에게 복음이 어떻게 증거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10장과 11장에 로마의 군대 장교인 고넬료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일입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이었는데도 경건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많이 구제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이 사람에게 나타나 베드로를 부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다음날 기도 중에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에 온갖 부정한 짐승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그러자 베드로는 부정한 음식을 이제까지 먹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상을 세 번이나 보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하고 있는데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갔더니 고넬료와 가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연결시키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연결시켜서 또 확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하신 것처럼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44-48절입니다. "44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2)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이번에는 안수를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데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누가 놀라는 것입니까? 함께 동행한 할례 받은 신자들이 놀라는 것입니다. 할례 받은 신자들이란 유대인 신자들입니다. 이들의 생각에 어떻게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도 확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이 어떻게 유대의 경계를 넘어서는가를 보이신 것입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주님의 복음이 증거되게 하시는 것에 놀라는 것은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야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심을 알겠다고 한 것입니다.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자 예루살렘에 그 소식이 전하여 지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자 할례자들이 힐문합니다. 어떻게 할례도 받지 아니한 사람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11:1-3).


이때 베드로의 대답이 11:15-17절 내용입니다.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베드로가 아직도 수동적입니다. 내가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우리가 받은 성령이 동일하게 임하시는 것을 내가 감히 누구관대 하나님을 막을 수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대답인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이 18절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이방인에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라고 마지못해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유대인의 벽이 높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되는 것은 사도들이 주님의 뜻을 헤아려서 그 벽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복음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어 내신 결과입니다. 이것을 확인하고 증거하는 것이 베드로의 일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내가 무슨 수로 막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증거되는 것은 증거하는 사람들의 열심과 재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는 것도 우리가 잘 나서거나 똑똑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씨를 뿌리거나 물을 주는 자는 자기의 맡겨진 일을 감당할 뿐이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처럼 막을 수 없는 주님의 약속의 능력이 오늘 이곳까지 증거가 된 것입니다. 내가 똑똑하거나 잘나서 믿게 된 것이 아닌 것처럼, 내가 잘못하고 실수 한다고 해서 떠나실 성령도 아니시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결국 누가 이기겠습니까?


로마서 8:9-11절입니다.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2)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것이 성도의 운명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게 되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죽을 우리의 몸도 살리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 약속되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내가 주님을 믿고, 내가 주님을 붙들고 가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또한 붙들고 가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항복시키시고 유대인의 벽을 넘어가게 하시는 그 열심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도 복음을 들었고,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도 복음을 받았고, 오늘 우리도 이 복음을 받았습니다. 이 변함없으신 주님의 열심 앞에 우리의 고집을 내려놓으시기를 소원합니다. 헛된 일에 너무 힘쓰지 말고 사시기 바랍니다. 성도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사도행전 8:26-40  성령의 전도



26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 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31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ㄱ)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37 5)(없음) 38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6)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사도행전을 흔히 성령행전이라고도 말합니다. 사도들이 주인공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인공이라는 차원입니다. 그런데 흔히 오해하기를 성령행전 그러면 우리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사도들처럼 능력 있게 전도하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난주에도 살펴 본 것처럼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은 사도들의 전도 계획과 비전과 열망에 의하여 된 것이 아니라 핍박으로 흩어진 자들에 의하여 복음이 증거된 것입니다. 그것도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고자 한 사도들에 의하여 사마리아에 복음이 증거된 것이 아니라 집사에 의하여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복음이 증거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성령께서 친히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빌립을 사용하시고 사도들을 사용하시지만 그들이 주도적으로 증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마리아와 이방인에게 복음이 증거되는 것을 꺼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회의를 하여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증거된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전에 이미 성령께서 사마리아와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들은 뒤따라가면서 복음이 이렇게 증거 되었다고 하는 말 그대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명령자는 성령이시고 빌립은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시키는 것을 거부하지도 못하는 지경으로 보입니다. 26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에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가라고 하시는지 이유도 없습니다. 그리고 가는 그곳은 광야입니다. 전도를 하려면 사람이 많은 곳에 가야 하는데 광야에 가서 무슨 전도를 한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가라고 하시니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 보니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경배하려 왔다가 이사야의 글을 읽으면서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가까이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읽고 있는 것이 이사야 53장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으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세례를 주고 나니 다시 성령께서 빌립을 이끌어 다른 곳으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의 전도가 아니라 성령의 전도입니다. 빌립은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전도의 내용을 보고자 합니다. 이디오피아는 여왕이 전통인 나라라고 합니다. 그러니 고관은 내시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예루살렘에 경배하려 왔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와서 경배를 하고 돌아가면서 성경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성경은 두루마리로 된 성경일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모든 성경을 손으로 직접 필사하는 것이기에 아주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을 구하여 읽고 내려가는데 마치 읽는 본문이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인 것입니다.


본문에 인용된 말씀은 이사야 53:7-8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있을 때 빌립이 가까이 가서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내시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로 끌려가는 양처럼 끌려가는 이 사람이 선지자 자신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하고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복음의 핵심에 근접한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자 빌립 집사가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로 끌려가는 고난 받는 이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얼마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었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사야 53:4-6절까지만 봅니다. "봉독" 그가 고난당하심은 자기의 죄가 아닌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 사람이 잘못하여 그렇게 고난당하는 것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무엇입니까?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복음을 들은 내시가 내가 세례를 받는 일에 무슨 거리낌이 있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 37절이 없음,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간혹 이러한 부분이 나오는 것은 성경의 사본 중에 어떤 부분이 보이지 아니하거나 상한 부분이 있기에 그대로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충한 사본들이 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본에는 이 부분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이 말하였다. "당신이 온 마음으로 믿으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내시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세례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의하면 내시가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라고 개종을 하고 할례를 받으면 유대인에 편입이 됩니다만 그러나 내시는 할례를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신명기 23:1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내시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데 빌립은 분명히 율법을 알면서도 이방인이요 내시인 이런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것입니까? 감히 사도들도 함부로 하지 못한 일을 집사가 행한 것입니다. 요즈음 같으면 완전히 치리감입니다. 제명 출교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집사가 감히 세례를 베풀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빌립은 지금 성령의 붙들림을 받아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이방인도 내시도 상관없이 얼마든지 주님께서 부르시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디오피아 내시가 복음을 듣고 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율법에 의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고난 받으신 주의 종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에서 대속하는 종으로 인하여 이사야 56장에서 이방인도 고자도 주님께로 돌아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6:3-8절을 봅니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6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1)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8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내시가 어떤 사람입니까? 이방인이요 동시에 고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여호와께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켰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였겠습니까? 여호와의 언약을 굳게 잡았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방인이며 고자인 사람이 하나님께 연합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모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입니다.


이디오피아 내시가 아니라 우리는 언제 안식일을 지킨 적이 있습니까? 안식일 지키시려면 안식교에 가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고 삽니까? 늘 우리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잡기 보다는 돈을 굳게 잡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 연합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사야 56:8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면서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미리 선택하시고 때가 되매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쓰임을 받는 자들은 자기들이 준비를 하였거나 비전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능력 있게 증거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도 내시를 몰랐고 내시도 빌립을 몰랐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만나게 하시니 만난 것이고, 그리고 헤어지게 하시니 서로 각자의 길을 간 것입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것도 구약의 여호와의 전쟁 방식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이란 여호와께서 앞장서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을 붙여주심으로 이기게 하시는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정복할 때 언제나 여호와께서 앞장서서 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께서 승리하신 전쟁에서 전리품을 거두러 다닌 것입니다.


신명기 31:3-8절을 봅니다. "봉독" 모세가 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면서 누가 앞장서신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앞장서시고 적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역시 복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34-38절입니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노력치 아니한 것을 거둔다고 하신 것입니다. 노력하신 분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성령을 보내신 주님께서 먼저 다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부름을 받은 자들은 평소에 전도에 야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이리 저리 자기 살길 찾아다니다가 부딪힌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 되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 자신의 이력이나 경력이 전혀 소용이 없도록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왜 여기에 와 있는지를 1년 전에 알았겠습니까? 3년 전에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함께 예수를 믿는다고 모여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일 어디로 갈지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땅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은 내가 나를 이끌어 가는 방식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별 볼일 없어 보인다고 하여도 그것이 복음을 알게 하시고 증거 하게 하시는 일에 전혀 방해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래 가지고 무슨 복음을 증거 하겠는가 하지 마시고 우리가 처한 그 어떤 곳에서라도 주님이 일하고 계심을 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은 일하십니다. 



사도행전 9:1-9  사울아 사울아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지성이면 감천이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이러한 속담은 우리의 보편적인 가치관입니다. 나의 지극한 정성과 공을 들이면 안 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겨울에도 찬물에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빌었더니 천지신명도 감동하여 나에게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점지하여 주셨다, 또는 우리 아들 장원급제하게 하여 주셨다고 합니다. 결국 신이 내린 특별한 능력보다 나의 정성을 얼마나 제대로 바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담이 얼마나 비복음적인지를 ‘신앙클리닉’ 시간에 배우셨지요? 그런데 돌아서면 또다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속담 가운에 오늘 말씀과 적용하여 볼 내용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속담입니다. 유명한 사람이 되고나면 그 사람의 과거는 언제나 미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성공한 그 사람이 있기까지의 삶을 추적하여 나온 것이 '성공시대'같은 프로그램 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들을 복원시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근면 성실하였다든가 집념이 대단하였다든가 그런 일화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사울이 주님께로 부름을 받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울 그러면 항상 먼저 생각하는 것이 속담과 같이 생각하게 됩니다. 사울은 날 때부터 정통 유대인이었으면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하였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업 받았고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러한 경력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래, 사울이 평소에 그런 사람이었으니 주님께서 그를 위대하게 사용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사도 바울 자신은 그런 것들이 오히려 해로운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랑들이 육체였으면 아무른 유익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의 부르심의 은혜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워낙 자랑하니 한번씩 나도 그러한 일로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만 이것은 자기의 잘남을 증거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들의 해로움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9절을 봅니다. "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1)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자기에게 유익하다는 것들, 그래서 열심히 추구한 모든 것들이 오히려 해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퀴즈를 하나 냅니다. 지금까지 사도행전에서 주의 복음이 증거되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사마리아인. 이방인 내시. 오늘 사울까지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가장 복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겠습니까? 답은 주로 끝번일 경우가 많습니다. 사마리아인도 자신들의 죄를 압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는 길이 쉽지 않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은혜의 복음이란 기쁨의 소식이 됩니다. 그러나 사울의 경우에는 은혜의 복음이란 이단의 괴수가 전한 잘못된 교리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완벽하게 유대인의 율법을 따라 흠이 없이 살아 왔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인이나 지방교회 사람들에게 전도를 한다고 가정하여 봅시다. 전도하려다가 오히려 전도 당하고 올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얼마나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한번 상대해 보시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성경을 척척 들이대면서 말하는지 감당이 안 될 것입니다. 이들이 결코 자기들의 필요한 구절만 뽑아서 외우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교회에서 예수 잘 믿는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배워온 정통과 교리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도 곧잘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면서도 지성이면 감천이고, 공든 탑이 무너지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 이런 속담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은혜의 복음이란 너무나 생소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특히 장로나 권사나 목사가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치리를 하든지 말 안 들으면 출교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가 흠이 없는 자라고 할 만큼 열심이 대단하였으면 대제사장에게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도 된다는 공문서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단지 권세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에 대하여서도 얼마나 해박하게 아는지 이론적으로도 공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전도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전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도 한번 화끈하게 사울아 사울아 하듯이 그렇게 부름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예수를 믿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를 때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과 이방인 내시와 사울 중에 누가 더 복된 사람입니까? 전도자의 말을 듣고서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전도자의 말을 듣기는커녕 전도자를 잡아서 죽이려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를 주님께서 부르신 것은 그의 열심과 그의 구약 지식과 가말리엘 문하생이라는 것과 로마의 시민권도 있었으니 주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갖추게 하시고 또 친히 부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미 본 바처럼 그러한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부르심에서 무엇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택하신 백성은 반드시 불러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한번 부르셔서 안 되면 두 번, 안 되면 세 번 네 번, 안 되면 될 때까지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니 단 한번에 항복하고 나오도록 부르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를 인격적으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온 마음에서 항복이 나오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9:1-2절을 봅니다. "봉독" 얼마나 위세 등등합니까? 위협과 살기가 등등합니다. 그래서 대 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가지고 여러 부하를 거느리고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직접 주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 많은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 위세 등등하던 사울이 어떻게 됩니까?


땅에 엎드려져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겨우 일어나서 눈을 떴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장님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같이 가던 다른 사람들은 무슨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위세 당당하던 사울이 주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니 완전히 땅에 엎드려져서 장님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부름 받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말로 할 때 알아듣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을 부르신 예수님의 영광과 권세를 아시겠습니까? 지금 부할 승천하여 계신 주님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영광과 존귀를 가시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주님을 직접 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면 우리가 다 죽을 터이니 당신이 대신 전하여 달라고 한 것처럼 지금 주님의 음성을 직접 보고 듣는다면 사울의 꼴이 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주님의 품에 기대었던 자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그 주님을 환상 중에 뵙고는 엎드려져 죽은 자와 같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변찮아 보이는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집부리면 부릴수록  매만 더 맞을 뿐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여집사가 자기 남편이 영 교회에 적응을 못하고 겉돌고 있다가 한번 어려움을 당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의 남편이 돌아오겠지요? 라고  묻는 집사에게 아직도 멀었습니다, 라고 하였답니다. 한두 번 그래가지고 나올 것 같으면 양반이지요! 우리의 고집이 어지간합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듣는다고 나와 있다는 것이 이미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지 아시라는 것입니다. 


몇 주 전에 임홍길씨를 운동장에서 만났습니다. 교회에서 보자고 인사를 하였는데 아직 소식은 없습니다. 이 분이 제가 3년 전에 처음 부임하였을 때 감전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하였는데 자기가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교통사고를 죽을 뻔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이번에도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친구들이 너는 천운을 타고 태어났는가 보다! 라고 말을 한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겠노라고 형수님께 부탁해서 십자가 목걸이도 만들어 달라고 하였답니다. 그러자 형수님이 좋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퇴원하고 몇 번 나오더니 3년째 감감 무속식입니다. 저는 그분이 주님의 택하신 자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택하신 자라면 결국 항복하고서 나올 것입니다. 


이사야 43:1-13절을 봅니다. "봉독" 주님께서 지목하여 부르시면 누가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께서 어떤 속량물을 지불하시고서라도 자기 백성을 구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13절에서 누가 막으리요!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을 부르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열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런 자도 불러서 사도로 사용하시는구나, 그렇다면 나는 사울보다 못할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 역시 자신이 그렇게 사용되어 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5-16절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울 보고 당신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열심이더니 결국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도 이렇게 능력 있게 쓰임을 받군요? 라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니요, 나같이 죄인 중의 괴수가 주님께 붙들림을 받아서 쓰임을 받는다면 당신은 나보다 열배 백배나 더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하나님의 열심임을 아시겠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던 그 주심께서 친히 매를 드시지 않으시고 여러분의 이웃을 통하여 아내와 자식을 통하여서 환경을 통하여서라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열심과 부르심에 이제 손을 들고 나아갑시다.



사도행전 9:10-19  다시 보게 됨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1)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오늘 말씀은 사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나게 됨으로 눈이 보이지 않았다가 아나니아라는 주님의 제자가 안수함으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서 다시 보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가지고 역시 바울은 달라,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변화시켜 주시니 저렇게 능력 있게 주님의 종이 되었구나! 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난주에 살펴 본 것처럼 사울이 바울이 되는 것은 자신의 어떤 자질과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잘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복음을 듣기에 완고한 사람입니다. 복음에 대하여 온 힘을 다하여 멸하고자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부르신 것은 창세전에 예정하신 것이요 또한 앞으로 구원 얻는 자들에게 모델케이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의 역할 못지않게 좋은 모델이 되는 사람이 저는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옆에 있었던 강도라고 봅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주님과 함께 낙원에 이를 수가 있었습니까? 살인강도이기에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고 합니다. 저는 이 강도가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바울 못지않은 역할을 하였다고 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사도 바울이 천국에서 듣고서 기분 나빠할까요? 결코 아니라고 봅니다.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을 구원하신 십자가의 능력이 더욱 자랑되는 것이니 더욱 기뻐할 것입니다.


전에 제가 알던 어떤 목사님의 어머니께서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하여도 자신이 없어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이래가지고 어떻게 천국에 가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내가 한 것도 없고 천국 갈만한 자격도 없는데 은혜로 간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강도의 이야기를 들려드렸다는 것입니다. 그제야 '그렇다면 나도 갈수는 있겠구나!'라고 하더랍니다. 물론 여기서 자신은 살인강도가 아니니 그 사람보다는 조금 낫다는 생각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런 강도가 구원받았고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려고 다니는 사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통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어떤 인간도 스스로 주님을 찾고 믿는 인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모델로 사용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율법을 받았다고 자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율법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들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의 의를 가지고 주님을 배척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할이었습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역할로 이스라엘이 사용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인 것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할 만큼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가장 의롭게 행동한다고 한 행동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이었습니다.


로마서 3:19-24절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율법의 기능이란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는 기능입니다. 율법이 가입함으로 나는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준 것을 지키라고 준 것이니 우리가 지킬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율법을 새롭게 해석을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행위로만 율법에 저촉되지 않으면 의인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율법 수여자이신 예수님께서는 행위만이 아니라 그 마음의 동기까지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렇게 말하였지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내용이 산상수훈인 것입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하는 자들이라도 이 산상수훈에 비추어 버리면 모두 다 부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몇 가지만 살펴봅니다. 살인하지 않았으면 살인자가 아니라서 의인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욕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고 합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은 것이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외인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 구제 금식을 하지는 않습니까? 내일 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이 말씀 앞에 어느 누가 나는 온전하게 의롭다고 할 자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을 제대로 보게 된다면 나는 부정한 자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치 문둥병자와 같은 것입니다. 문둥병자는 자기가 접촉하는 모든 것이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이 비쳐지니 우리의 실상이 문둥병자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아무리 사람들에게 좋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서는 모두 부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는데 최초로 하신 일이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입니다.


마태복음 8:1-3절입니다.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문둥병자에게 접촉하면 부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고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부정함을 자신이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받아 들일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자기들이 옳다고 해온 모든 것들이 전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한 것입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들의 의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배척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에게 가려진 비늘이고 수건인 것입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것은 유대인들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모델로 삼은 것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장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아나니아라는 주님의 제자가 있었는데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지시하시는 것입니다.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기도 중에 아나니아라는 자가 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나니아가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자인데 주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끼친 자라고 하자 주님께서 사울을 택하셔서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증거할 택한 그릇이라고 하시면서 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가서 안수하였더니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 영광의 빛 때문에 3일간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창조하여 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16-21절을 봅니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4)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4)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4)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5)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16절만 인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는데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였으니 당신도 믿고서 영생을 얻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렇게 사람들이 빛을 알아보고 믿는 자가 하나도 없더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어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는 자가 하나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주인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말할 때 주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라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이 어떤 것인가를 먼저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눈에 비늘이 덮어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시지 않으시면 결코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울 곁에 함께 서있던 자들은 무슨 소리를 들었어도 빛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9장에서는 소리는 듣고 빛은 보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22:9절에서는 빛은 보았는데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소리를 듣고 빛을 보아도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소리를 들었든지 빛을 보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3-6절을 봅니다.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ㄱ)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데 복음이 가려지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망하는 자들인데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세상신이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얻기로 작정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하신 그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만 복음의 빛을 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으로 죄인임을 알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고서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아는 자는 이미 복음의 빛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보다 못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다른 것이 보입니다. 아직 비늘이 덜 벗겨져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벗겨지기는 하였는데 자꾸만 안개가 끼어서 그런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아직도 수건이 가려져 있다고 말한 곳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2-18절입니다.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모세가 율법을 받고서도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사라질 영광인데 그 결국을 보이지 않으려고 수건으로 가리운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율법을 보면서 수건에 가려진 것처럼 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보면서 자유하게 하는 영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이 가득하여 주님의 영광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까? 비늘이 벗겨져서 새로운 세상을 보듯이 주의 말씀으로 우리의 흐려진 시각이 맑아지기를 소원합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오히려 보고 있는 우리는 아닙니까?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세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세계를 보라고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무엇을 보고 살고 있습니까?


바울 사도의 눈에 비늘 같은 것만을 벗겨내신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일하심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 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모든 것들이 전부 예수 그리스도로 창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만물의 마직막이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은 주님의 약속의 세계를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듯이 살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서는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지난주 이번주 휴가철에 집을 떠나서 여행을 하시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잠시 머물다가 올 여관방을 도배하고 장식하고 이불 빨아서 널고 그러지 않지요! 돌아올 집이 있기에 그러한 것은 사소한 일로 보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돌아가야 할 집이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그기는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자 이제 한 가지만 바라보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너희 눈앞에 주님의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든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말합니다. 누가 우리의 눈에 자꾸만 비늘 같은 것을 덮어씌우고 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이지 않습니까?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다니지 말고 주님의 약속의 세계를 밝히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안개가 걷히듯이 주님의 나라가 밝히 보이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9:19-31  힘을 더 얻어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쌔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2)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울이 주님을 만나고 나서 새로운 시각이 생겼습니다.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나니 이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구제 불능의 죄인인가를 알고서 예수님께서 왜 죽으셔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메섹에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갔다가 이제 즉시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하자 많은 사람들이 사울이 예수 믿는 자를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며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힘을 더 얻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누가 먼저 증거하였습니까? 사도들이었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자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담대하게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 증거를 이제 핍박하던 사울이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증거하는 일에 힘을 더 얻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힘을 더 얻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다는 말씀을 보면 우리는 먼저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래 복음을 증거하는데 힘이 있어야 하지, 그러니 힘을 더 얻어야 된다, 그러므로 우리도 힘을 더 얻어서 복음을 능력 있게 증거하자,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력을 주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힘을 더 얻은 모습과 우리가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과는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위하여 힘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들이 좋은 대학가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주의 복음을 널리 증거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또는 돈을 많이 벌어서, 권세를 가져서 주의 일을 잘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힘들은 세상에서 통하는 힘이지 주님의 일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힘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세상의 힘을 공생애 시작에서부터 거절하시고 시작하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40일을 금식하신 것입니다. 그때에 사단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시면서 물리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종교적인 슈퍼스타로 떠받들게 되겠지요! 그러자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로는 높은 산에 가서 순식간에 세상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준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 하나님만 경배하라고 하면서 물리치십니다.


이 세 가지의 내용만 있다면 세상에서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빵 문제, 무엇보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무용지물인 것입니다. 배고픈데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다 먹고 살만하니 다른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능력, 세상의 부귀영화, 이 모든 것들을 세상 사람들이 한결같이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힘을 가지고 일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하는 힘이라는데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울이 힘을 더 얻어서 행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님만이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무엇에서의 구원입니까? 죄로부터의 구원이고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주님께 세상의 힘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죄란 주님을 떠나 독립한 것이 죄라면, 구원이란 이제 주님께 의존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단지 먹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들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날마다 받아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평생 먹을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생 먹을 것만이 아니라 자녀대대로 먹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양식만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들도 한꺼번에 큰 능력 받아서 주님은 저 멀리 구경만 하시게 하고 내가 구하여 받은 능력으로 한번 힘껏 뽐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것을 능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울이 힘을 더 얻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을 잡아서 죽여 버리려는 것입니다. 전에는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왔다가 이제는 자신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할 지경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능력을 받았기에 더욱 힘을 얻었기에 잡으려고 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그러면 그들이 모두 나가자빠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러한 것을 능력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사울은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피하여 광주리에 줄을 메어서 성밖으로 내려 보내는 것입니다. 무슨 물건을 내려놓듯이 사울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힘을 더 얻은 사울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힘을 여러분이 구하시겠습니까?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힘을 구하시겠습니까? 혹시 구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나 고생한 만큼이나 나중에 나타날 더 칭찬과 영광을 계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하여 구하지, 죽기 위하여 구하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세상에서 무엇인가 잘 되어야 주님이 증거가 잘 되지, 어떻게 실패하고 망하고 어렵게 되었는데 주님을 잘 증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잘 되어야 예수님을 잘 증거한다는 것은 순 사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에서 부자가 되시고, 종교적으로 성공하셨고, 세상의 영광과 권세를 가지셨다면 사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 모든 것을 버리시고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저주 받아서 죽임 당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어떻게 세상에서 잘 되어야 예수님이 잘 증거 된다고 하는 것입니까? 오히려 방해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세상에서 잘 된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자랑할 만한 가문과 학력과 권세들이 오히려 해가 되었기에 배설물로 여긴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예수님을 알고 믿는 일에 도움은커녕 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 되어야 전도도 된다는 것은 아직도 십자가를 모르는 말입니다. 아직도 그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끼어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광주리를 타고 도망갑니다. 얼마나 볼품이 없는 모습입니까? 주님께 힘을 더 얻었다면 천군 천사가 호위하고 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온 천하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증인의 모습이 이게 무엇입니까? 겨우 다메섹에서 도망하여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사귀고자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보면 아라비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3년 만에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사귀고자 하나 제자들이 사울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일망타진 하려고 일부러 개종한척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꺼려한 것입니다.


이때 바나바가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사울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지를 말하자 그제야 겨우 교제를 시작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미 사도행전 4장에서 자기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가져다 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바나바를 보아서 사울을 받아들인 정도입니다. 제자들과 교제하면서 예루살렘에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합니다.


그러자 헬라파 유대인들이 또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또 도망가는 것입니다. 가이사랴로 가서 다소로 보낸 것입니다. 다소는 사울의 출신지입니다. 이렇게 다메섹에서 죽이려 하여 도망가고 예루살렘에서 죽이려고 하니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힘을 더 얻은 사울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교회가 힘 있게 성장하는 모습처럼 보입니까? 지리멸렬하면서 도망 다니는 모습으로 보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사도행전 9:31절입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자들을 유대인들이 잡아 죽이려고 하고 그래서 사울은 도망 다니는 중인데 성경은 오히려 교회가 든든히 서가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핍박하다가 개종하였기에 이제 교회가 든든히 서가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이려고 하니 도망가는 중에 있는데 어떻게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씀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빈틈없이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의 변방 갈릴리로, 갈릴리라는 말은 사도행전 1:8절에서 없는 지역입니다만 그러나 이제 그 지역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땅 끝이라고 해서 해남의 땅끝 마을만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여기 창원도 포함이 되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기에 사울을 죽이려고 하여도 교회는 변함없이 든든히 서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신앙의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며 이런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란 세상의 힘으로 결코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개척교회는 얼마가 있어야 예배 처소를 만들고 기성 교회는 얼마나 있어야 건축할 수 있고 하는 그러한 힘으로 교회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의 백성들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는 세상의 힘으로 세우지도 못하지만 세상의 힘으로 무너뜨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음부를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경남기독교 연합회에서 공문이 왔습니다. 두 번씩이나 보내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8.15 특별기도 성회의 건’이라는 제목으로 왔습니다. 마산 공설운동장 실내 체육관에서 개최되는 특별기도 성회에 꼭 참석해 주셔서 하나님께는 영광되고 그리스도인의 단합된 힘을 보여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라는 공문입니다. 많이 참석하여 단합된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수가 많다 그러니 함부로 건드리면 다쳐! 이런 힘이 아닙니까? 


성도의 힘이란 세상의 힘이 아닙니다. 다른 세상을 변함없이 바라보는 것이 성도의 힘인 것입니다. 이러한 힘은 우리 스스로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살기에 계속하여 땅의 것만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잠시 잠간씩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이렇게 바라보겠습니까? 자기 힘이 있을 때는 바라보지 아니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힘이 있다면 지푸라기 잡지 주님을 붙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8-10절입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


바울 사도가 잘못하여 환난과 고생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데 힘을 실어주지는 못할망정 왜 환난과 고생을 당하게 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져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성도에게 왜 앞이 캄캄한 일이 닥치는 것입니까? 자기 힘을 세상의 힘을 의뢰하지 말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런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4:7-18절입니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13 기록한바 ㄴ)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이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사람이 성도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9:32-43  주님의 일하심



32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지 팔년이라 34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38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계시의 책입니다. 물론 인간의 반응도 있습니다만 인간의 반응이라는 게 거의 다 하나님과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성경을 주신 것은 우리가 잘 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라는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유대인들이 이미 한 것입니다.


자기들은 특별한 민족이기에 선택을 받았고 선택을 받았기에 율법을 주신 것이고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잘 지키라고 주신 것이기에 율법을 제대로 지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결과에 이른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만천하에 공개된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그 책들은 모두가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신화를 다루고, 초월적인 것을 다룬다고 하여도 결국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이야기들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고 인간의 힘을 합하여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들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있기에 성경을 보아도 그런 방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을 보면 주님의 일하심이 먼저 보이기보다는 인간이 어떻게 하였나를 먼저 보는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하지만 궁극적인 관심사가 내가 어떻게 함으로 힘을 더 얻는가 하는데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애니아가 8년 중풍 병에서 고침을 받고 도르가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보면서 우리의 시선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역시 베드로는 다르다, 이렇게 가지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서 말하니, 베드로가 가서 기도하니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구나! 우리는 언제 베드로처럼 한번 되어보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런 식으로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말씀입니다만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는 것은 외부적인 환경이 평안해서 든든히 서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핍박하다가 주님을 만나고서 힘을 더 얻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니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광주리 타고 도망가고 겨우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교제를 하게 되나 유대인들이 또 사울을 죽이려고 하자 다소로 피신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 한 사람이 개종을 하였다고 핍박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이 심하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마저 죽이려고 하는 세상은 여전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32절을 봅니다.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로 내려갑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룻다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고 하는 것으로 보려고 할 것입니다만 그러나 이미 룻다에 있는 성도들에게 내려갔다고 되어있습니다.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바다 쪽으로 가는 길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변방입니다. 그리고 욥바는 지중해 바다의 항구입니다. 그런데 벌써 이런 곳에 성도가 있었고 주의 제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곳에 전도를 하였는지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이미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곳을 심방하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심하니 여러 곳을 다니면서 성도를 만나 서로 위로를 받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 바울 그러면 그들이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호응을 하고 교회가 마구 세워지는 그러한 능력의 사람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 되도록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가서 하는 일이란 주님의 일하심을 증거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 증거하는 모습을 보면 베드로의 능력도 아니고 애니아의 반응도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33-34절입니다. 애니아가 8년 동안 중풍 병으로 침상에 누워 있다가 베드로가 일으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애니아에게 무어라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꼭 남의 일 하는 것처럼 합니다. 만약에 자기 기도의 힘과 경건의 힘으로 되는 것이라면 며칠 금식도 하고 통성기도도 하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신유은사 집회한다는 광고도 붙이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누구를 고쳐 주실지 아닐지는 자기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와보라, 병 고침 받는다고 광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니아에게도 어떤 조건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며칠 하라든가. 성경을 몇 번 읽으라든가 주기도문을 외우라거나 사도신경을 반복하여 외우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헌금을 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신다." 침상을 정리하고 일어나라고 하니 일어나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베드로에게로 몰려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돌아간 것입니다. 자기 제자를 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채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여서 보좌에 앉으신 채로 구경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맡겨 두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도의 지상명령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직접 명령을 받고서도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증거되니 '사미라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느냐고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베드로가 얼마나 꺼려하였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하신 말씀은 이루시기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결국 베드로가 잘했다, 사울이 잘했다는 것이 아님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니아가 좋은 반응을 보였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심을 증거할 뿐입니다.


이 사건은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과 비교를 해보아도 됩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38년된 중풍병자였습니다.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낫는다는 연못입니다. 그러나 38년을 기다렸지만 자기에게 기회는 없었습니다.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에 철저하게 자비가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주님께서 무어라고 하신 것입니까? 내가 낫고자 하느냐 하시는데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물이 동할 때 나를 넣어 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내려가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시니 벌떡 일어나 걸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이 날이 안식일이라 사람들이 왜 안식일 날 침상을 메고 가느냐고 합니다. 안식이 없는 안식일, 자비가 없는 자비의 집에 누가 안식과 자비를 주시는 분이신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하신 바를 베드로가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으로 일으키는데 베드로는 무엇을 합니까? 자기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의 이름도 애니아의 이름도 아닌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사건은 다비다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다비다는 아람어이고 도르가는 헬라어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제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살았을 때 많은 선행을 베푼 사람입니다. 많은 과부들에게 속옷과 겉옷을 지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자 시체를 씻어서 다락에 눕혀놓고서는 룻다에 있는 베드로를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기도하고서 시체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합니다.


죽은 자가 도대체 무슨 수로 일어납니까? 그런데 일어나 앉아서 베드로를 보는 것입니다. 대단한 일 아닙니까? 어떻게 죽은 자를 살려냅니까? 역시 베드로다, 8년 된 중풍병자는 기도 안 해도 말 한마디로 일으키고 다비다는 기도 한번 하니 죽었던 자가 살아났다는 식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11-12절을 봅니다.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와 요한이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자 사람들이 사도들을 주목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때 하는 말이 왜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으로 된 것이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니아가 일어나고 도르가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베드로의 경건도 애니아의 반응도 도르가의 선행도 아닌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누가 전도를 잘 해서 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잘 알아들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가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자기의 이름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의 행위에 가치를 두려고 하는 우리의 자존심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에스겔 20:44절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서 거듭 거듭 하나님을 반역합니다. 진멸하여야 마땅하나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진멸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 여호와를 제대로 아는가 하면 우리의 악하고 더러운 행위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길로 인도하시면 그제야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도 사울도 자기의 이름이나 자기의 능력이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애니아가 일어나든, 도르가가 살아나든 증거되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베드로와 바울이 증거하는 분은 바라보지 않고 자꾸만 베드로와 바울을 보면서 영웅시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연약한 죄인이었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바울도 자기의 의를 내려놓고 주님의 일하심만을 증거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에서 주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이제 누구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43절입니다. 피장이 시몬의 집에 유하였습니다. 피장이란 갖바치입니다. 정통 유대인들에게는 직업상 죽은 짐승들을 만져야하는 이런 자들을 꺼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런 사람의 집에 유하는 것은 주님의 일하심을 볼수록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자기의 힘으로 주님을 따를 때는 시기와 질투로 높아지고자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배신하여도 자기는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찾아오시고 성령을 보내시고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주님을 보고서는 낮아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일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0:34-48  누가 금하리요!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44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2)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지난주 설교제목이 기억이 나십니까? ‘주님의 일하심’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에서 기적을 행한 것은 주님의 일하심을 증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가이사랴에서의 일입니다. 가이사랴는 욥바에서 약 50km 떨어져 있는 도시로서, 그 당시에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을 관장하는 총독의 주재지이며 로마군 수비대의 주둔지입니다. 그러므로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곳에서 역시 주님의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와 이번주의 설교제목을 붙이면 "주님의 일하심을 누가 막으리요!" 하는 제목이 되겠습니다.


그 당시에 이방인들 가운데는 전래적 이방 종교에 환멸을 느끼고서 유대교의 회당 예배에 참가하면서 부분적으로 회당 공동체에 가담한 친유대교적인 이방인들을 흔히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그러한 종류의 이방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함으로 유대인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구제만이 아니라 기도에도 힘쓴 것입니다. 그래서 제 구시 기도시간, 우리 시간으로 오후 세시입니다. 유대인들이 정하여 하는 기도시간에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서 지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욥바에 가서 피장이 시몬의 집에 있는 시몬, 즉 베드로를 부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비록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제와 기도에 힘을 쓰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된 것이라고 하나님의 사자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를 부르지 말고 하나님께서 너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라, 그러시면 되실 텐데 왜 복잡하게 베드로를 부르게 하시는가 하는 겁니다. 또 베드로를 부르러 보내지도 말고 베드로에게 너, 가이사랴의 고넬료에게 가서 전도하라고 명령하시면 되실 텐데 환상을 세 번씩이나 보이시는가 하는 겁니다. 


9절 이하를 보시면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유하고 있는 시몬 피장이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베드로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제 육시는 정오입니다. 점심때에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지붕은 슬래브처럼 되어 있기에 그곳에서 쉴 수도 있고, 기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에는 피장이 시몬이 가죽으로 차일을 만들어 네 귀퉁이를 메어서 그늘을 드리워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시장하여 무엇을 먹고자 하고 사람들은 식사를 준비하는 때에 잠시 잠이 들었는지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네 귀를 메고 내려오는데 그 안에 온갖 부정한 짐승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때 소리가 있기를 잡아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무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깨끗하다고 한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있은 후 그 그릇이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세 번이나 있었던 것은 확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율법에서 금한 부정한 짐승들을 언제든지 먹지 않았습니다. 돼지, 개고기, 장어, 미꾸라지 이런 것들을 먹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먹으라고 하시니 어안이 벙벙한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고 혹시 유혹인가? 하면서 속으로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마침 베드로를 찾는 사람들이 와서 고넬료가 어떻게 해서 자기를 보낸 것인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의심하지 말고 저들을 따라 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들을 불려들려 함께 유숙합니다. 이것도 큰 변화입니다. 이방인과 함께 밥도 먹고 잠도 자는 것입니다. 다음날 가이사랴에 갑니다.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모아서 이미 말씀 들을 준비를 다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드디어 베드로가 가니 고넬료가 맞이하면서 발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식민지 백성에게 지배자의 군대 백부장이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미군이 여중생을 전차로 깔아뭉개고도 큰소리치는데 미군의 장교가 동두천의 조그마한 개척교회 목사에게 엎드려 큰절을 하겠습니까? 고넬로가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오는 자에 대하여 어떤 자세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이런 말씀을 좋아하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고넬료를 일으키면서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초점과는 조금 거리가 멀지만 그러나 이러한 부분도 한번쯤은 짚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어떤 자세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스겔서 33:30-33절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오는데 어떤 자세로 오는가 하니 말씀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고 입술로는 사랑을 말하나 마음으로는 자기의 이욕을 좇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것을 연예인들이 쇼하는 것처럼 보러 오는 것입니다. 그 참 노래 잘한다, 그런데 춤은 별로다, 그런 식으로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다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면서 무어라고 하는지를 봅니다. 28절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유대교의 영향을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복잡하게 상황을 만드시면서 일하시는 것은 베드로를 키우시는 것입니다. 물론 고넬료도 구원하시는 일을 행하십니다만 베드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조금씩 더 넓고 깊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어떤 식인가 하면 베드로는 능력이 많다, 그래서 기적도 행하였다, 그러니 나도 전도를 하려면 그런 능력을 받아야 되겠다, 하면서 능력을 달라고 하거나 아니면 그런 능력이 없으니 나는 전도도 하지 않을 거야! 그러고 있지는 않습니까? 목사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서 여기서 설교하고 여러분은 아직 부족하기에 거기서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가장 훈련되는 사람은 목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편에서 보신다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보내시면서 어디에 가장 중요한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전도를 통하여 이방인에게 이제 본격적으로 복음이 증거된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은 베드로 자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가 어떻게 자신을 부르게 되었는지를 다 듣고 나서 하는 말이 34-35절입니다. "봉독" 이 고백이 나오도록 지금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심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유대민족의 선민의식을 떨쳐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세 번씩이나 거부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고넬료를 만나면서 그 사건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도 얼마든지 주님께서 받으시는 것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베드로 자신의 선민의식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것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한 것임을 갈수록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를 하나님께서 설득시키시는 것입니다.


그 항복의 결과가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고넬료 가정에 증거한 복음의 내용이 36-43절까지입니다. 사도들의 복음의 핵심을 그대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증거로부터 예수님의 사역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람들이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3일 만에 다시 살리심으로 예수님이 옳으심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기를 저를 믿는 자는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왜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바로 구원하시지 않으시고 베드로를 보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키우시는 것도 있지만 어느 누구도 구제나 선행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함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만 구원에 이름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이 사실이 고넬료에게 증거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의미를 새겨보아야 합니다. 고넬료가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와 기도를 하고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이 되었는데도 왜 또 따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바로 하나님께 직통으로 통할 수 있는데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혼동하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흔한 오해는 우리의 조상들도 다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름이나 조금씩 다르게 말할지라도 하느님이라고 하였던 조물주라고 하였던, 옥황상제라고 하였던 하나님의 존재를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1장에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들이 섬긴 것은 온갖 우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참된 하나님을 드러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상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상상의 하나님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상의 우상의 하나님의 부수어 버리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고 죽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우상 하나님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모두 가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일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참 하나님을 죽인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보내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러자 성령이 임하시고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놀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입니다. 베드로가 완벽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주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더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5-19절, 3:14-19절을 봅니다. "봉독" 우리가 알아가야 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풍성하심을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알아갈수록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누가 금하리요" 하면서 주님께 항복하는 것이며 이로서 베드로가 크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일 시키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목표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범사에 확인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계속)





출처 : 우림과 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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