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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린도후서 강해

kds7778 2008. 1. 20. 22:26
 

고린도후서 강해


내용 목차


1장:  위로하고 기쁨을 돕는 직분

2장:  사랑과 승리의 직분

3장:  새 언약의 직분

4장:  낙심치 않는 직분

5장:  화목케 하는 직분

6장:  고난으로 감당하는 직분

7장:  위로와 기쁨을 얻는 직분

8장:  풍성한 헌금

9장:  즐거움으로 하는 헌금

10장: 우리의 싸우는 병기

11장: 고난의 수고

12장: 사도의 표

13장: 권면과 축도



고린도후서는 바울 서신들 중 가장 자서전적이며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한 서신이다. 초대 교회의 폴리갑, 터툴리안, 이레니우스 등은 본 서신을 자주 인용하였다. 또한 본 서신의 세부적 내용들의 성격과 그 자연스러움과 생생함은 본 서신의 순수성을 강하게 증거한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바울을 심히 반대하고 비난하는 세력이 있었다(10, 11장).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고린도를 방문했으나 그 노력은 실패했고 바울을 반대했던 세력의 주동자는 바울을 크게 모욕했던 것 같다. 에베소로 돌아온 바울은 한 엄중한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냈다(2:3, 4; 7:6-16). 그 편지는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 쓰여진, 지금은 없어진, 한 편지이었던 것 같다. 돌아온 디도의 보고는 바울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는 내용이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였다. 그 때 바울은 마게도냐에 있었고 거기에서 그는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2:13; 7:5-8; 8:1; 9:2-4). 그렇다면 본 서신의 저작 시기는 주후 54년 혹은 55년 말경이었을 것이다.


고린도후서의 특징적 계시 내용은 사도의 직분에 관한 것이다. 1-7장은 사도직의 여러 면모들에 대하여(위로하고 기쁨을 돕는 직분, 사랑과 승리의 직분, 새 언약과 성령과 의의 직분, 낙심치 않는 직분, 화목케 하는 직분, 고난으로 감당하는 직분, 위로와 기쁨을 얻는 직분), 8, 9장은 헌금에 대하여, 10-12장은 사도직의 변증에 대하여 말하고, 13장은 사도의 권면과 축도이다.



1장: 위로하고 기쁨을 돕는 직분


1-2절, 문안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 그것은 사람의 뜻으로나 사람의 결심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전에 예수님을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적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따라 강권적으로 그를 부르셨고 이 길로 이끄셨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냄을 받은 자이었다. 무엇을 위해 보냄을 받았는가? 복음 전도를 위해서이었다.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고린도전서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 . .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디도서 1:3,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복음 전도자 바울에게는 "형제 디모데"가 있었다. 그는 혈육의 형제가 아니고 주 안에서의 형제이었다. 그는 바울에게 조력자이었다. 빌립보서 2:21, 22,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오늘날도 주의 일을 위해 바울 같은 자들과 디모데 같은 자들이 많이 요구된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 문안하였다. 고린도시에 많은 단체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교회는 그런 단체들과 달랐다. 교회는 인간적 단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이다. 오직 교회만 하나님의 단체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신 자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참으로 존귀하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뿐 아니라 또한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였다. 하나님의 교회는 고린도시에 국한되지 않았다. 교회는 아가야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 모두를 포함하였다. 아니, 교회는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 뿐만 아니라, 또한 이미 죽어 천국에 간 자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택자들까지도 포함한다. 교회는 인류 시조 아담 이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교회의 구성원은 '성도'(聖徒)라고 불리웠다. 거룩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법적인 의미이다. 그들은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났을 때는 다 죄인들이었다. 예수 믿기 전까지 그들은 죄인으로 살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케 되었다.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어 죄씻음을 받아 거룩한 자들이 된 것이다.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나 혼자만의 아버지가 아니고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우리를 근실히 징계하시는 아버지이시다.


바울은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주'는 주인, 주관자, 왕, 명령권자이며 사실 하나님과 동등한 의미이다. 이 세상에 참 주님은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만 우리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있기를 기원하였다. 사람의 호의는 제한성이 있고 무능하다. 그것은 이웃에게 참으로 문제의 해결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힘이 있어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된다. 그것은 사람을 불행에서 행복으로, 멸망에서 구원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


또 하나님의 '평강'은 최고의 복이다. 세상은 불안과 슬픔, 고통과 탄식의 세계이며 부조리와 갈등, 허무와 죽음의 세계이지만, 천국은 평강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세상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평강은 천국의 복의 시식(試食)과 같다.



3-11절, 위로의 직분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바울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신 독특한 인격이시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하나님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요한복음 20:17,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증거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 예수님을 통해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뜻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부자(父子) 관계에 서시지만, 또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신인(神人) 관계에 서신다.


바울은 또 하나님을 "자비의 아버지"라고 표현한다. '자비'는 원문에 복수형으로 '자비들'이다. 이것은 많은 자비를 가리킨다. 아버지라는 말은 아버지와 같이 자녀들에게 자비를 공급하심을 가리킨다.


또 그는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위로는 본문의 중심적 주제이다. 이 세상은 고통과 환난, 낙망과 슬픔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위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의 위로는 한계성이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로는 무한한 힘이 있다. 하나님은 마음에 평안과 용기를 주실 뿐만 아니라 그의 뜻을 따라 능력으로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하신다. 마치 외아들의 장례식에서 하염 없이 슬퍼했던 나인성 과부에게 그 아들을 다시 살려주심으로 위로해주셨듯이 말이다.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으로 부른 것은 사도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환난 중에서 위로하셨다. 몇몇 환난에서 위로하신 정도가 아니고 "모든 환난 중에서" 위로하셨다. 성도에게 환난이 있으나 위로도 있다. 그것은 사람의 위로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위로, 즉 하나님의 도우심과 간섭하심의 위로이다.


성도는 이 땅에서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또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초대 제자들은 핍박과 순교의 길을 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모든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도들을 환난 중에 위로하신 목적은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성도들을 위로하는 위로의 직분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한 자마다 고난 당하는 다른 성도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해주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원문에서 '고난'은 복수형으로서 여러 종류의 고난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오는 고난들, 그리스도를 전하기 때문에 오는 고난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고난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받는 고난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들을 넘치게 경험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즉 그리스도께서 공급하시는 위로도 넘치게 경험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뜻 가운데 고난들도 허락하시지만, 결코 자기 백성을 미워하시거나 방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정하신 때에 풍성한 위로로 그들을 위로하신다. 고난도 받고 위로도 받는 것은 자신의 신앙생활에 유익할 뿐 아니라, 특히 남을 돕는 데 유익하다.


[6, 7]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사도들이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던 것같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도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이 위로로 말미암아 그들은 어떠한 고난도 견딜 수 있게 될 것이다. 같은 원리가 오늘날도 적용된다. 환난 중에 사도들을 위로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가까이 계신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오늘도 우리에게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하다"고 말하였다. 무슨 소망인가? 환난받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것이라는 소망이다.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도움과 구원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모든 성도에게 시시때때로 고난이 있으나 하나님의 위로도 확실히 있을 것이다!


[8, 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바울 사도는 그와 디모데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언급한다. 그들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았고 살 소망까지 끊어졌었다. 그것은 죽음의 문앞에 처한 환난이었다. '이제는 죽었구나!'하는 절망의 때이었다. 그것을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표현하였다. 바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때때로 성도들에게 이런 극심한 고난이 닥쳐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적 모든 기쁨과 위로의 줄을 다 끊어버리시고 오직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서게 하시는 때가 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되는 때가 있다.


사도 바울이 당한 극심한 고난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오늘날도 성도들이 당하는 극심한 고난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다. (1) 고난은 성도를 겸손케 만든다(신 8:2). (2) 고난은 성도의 인격을 거룩하게 만든다(히 12:10, 11). (3) 그러나 고난의 주요한 또 하나의 목적은 본문 말씀대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믿음은 고난을 통해 강해지고 확고해진다.


[10, 11]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바울 일행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고난에서 건져내어주셨다. "또 건지시리라"는 말은 전통사본에 현재형이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는도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출은 과거, 현재, 미래에 다 적용된다는 말씀이다. 그는 우리를 건지셨고 건지시고 미래에도 건지실 것이라는 뜻이다. "의지하여 바라노라"는 말(엘피카멘)은 완료형으로서 소망의 확실함을 보인다. 과거에 함께 하신 하나님, 지금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미래에도 함께 하실 것을 확신하며 소망하는 것이다. 그가 오늘 우리 곁에 계신다.


[11절의 '도우라'는 '돕고 있으니'로, 두 번째 '우리를 위하여'는 '너희를 대신하여'로 읽는 것이 정확하다고 본다.]



12-24절, 전도여행 계획의 변경을 해명함


[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바울 사도는 세상에서 단순하고 신실하게 행동하였고 특별히 성도들을 대할 때 더욱 그러하였다. '거룩함'이라는 말(하폴로테스)은 원어에서 '단순함, 신실함, 솔직함'이라는 뜻이다. 또 그는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다. 육체의 지혜로 행하는 것은 흔히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이다. 그것은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처신하는 것이다. 또한 세상적 지혜는 대체로 위선적이다. 그것은 겉보기는 그럴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진실한 척하나 진실이 없고, 의로운 척하나 의롭지 못하고, 사랑하는 척하나 사랑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는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이기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이지 말고, 이중적, 복선적, 위선적이거나 교활하지 말고, 사람의 꾀나 세상적 수단 방법으로 하지 말고, 단순하고 솔직하며 신실하게 처신해야 한다. 또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행해야 한다.


[13, 14]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바울의 심정은 편지로 다 표현되었다. 그들이 읽고 아는 것이 바울의 마음 전부이었다. 그 이상의 것도, 그 이외의 것도 없었다. 숨겨진 다른 마음은 없었다. 이것이 단순함, 솔직함, 진실함이다. 오직 바울은 예수님 재림의 날에 교인들의 자랑이 되는 것을 원했다. 진실한 성도들은 마지막 날 전도자에게 영광과 자랑이 될 것이다.


[15-17]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 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바울의 본래의 전도여행 계획은 고린도에 갔다가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고린도에 가서 유대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이런 여행 계획은 쉽게 '예'하고 쉽게 '아니오'하는 경솔한 계획이 아니었다. 그것은 육신적, 인간적 계획이 아니었다.


[18, 19]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믿음직하시며 신실하시듯이 자신의 말도 경솔함이나 불신실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신실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증거한다. 이것은 그들이 전파한 예수님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예수님은 경솔하게 예 하고 아니오 하는 분이 아니셨다. 그는 불신실하신 분이 아니셨다.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는 말은 '오직 저에게는 예가 있었느니라'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예' 하시고 끝까지, 죽기까지 그것을 지키셨다. 그는 신실하셨다.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구원의 약속 곧 사죄와 칭의의 약속이며 천국과 부활의 약속이다. 그것은 영육의 복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21, 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하나님은 신실하시므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견고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말한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사역에 의존한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나 그가 우리 대신 죽으셨음으로 우리가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심은 특히 그가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사실에서 증거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우리를 인치셨다. 그가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가 친히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또 구원하신 자들을 견고케 하신다. 물론 이 진리는 성도의 안일함이나 방종의 구실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성령의 인치심은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모든 성도 속에 이미 내주하신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가 또다시 성령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는 단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은 성령을 또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영육의 모든 기관과 기능들을 주관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전체적 진리에 의하면, 성도의 구원의 보장은 삼중적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예정의 불변성이요, 둘째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성과 그의 중보사역의 효력이며, 셋째는 성령의 인치심이다. 본문은 이 세 번째 사실을 증거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구원의 보증이며 하나님의 인치심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다는 말은 성령의 활동 영역을 나타낸다. 지정의의 인격성을 가진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활동하신다. 그는 우리의 마음에 새로워짐, 곧 거룩한 변화를 주신다. 구원은 마음의 변화를 가져온다(겔 36:25, 26; 엡 4:22-24).


[23, 24]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바울은 자신의 전도여행 계획의 변경을 해명하면서 자신을 '너희 기쁨을 돕는 자'라고 겸손히 표현하였다. 이단자들이나 사이비종파의 교주들은 교인들의 믿음을 주장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그것도 잘못된 교리들을 가지고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겸손한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하나님만 우리의 주인이시다. 하나님만, 하나님의 말씀만, 성경만 우리의 영혼과 양심을 주관할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시고 보증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사이든 교사이든 권찰이든, 다른 이의 기쁨을 돕는 자로 처신해야 한다. 우리는 속죄 신앙에 굳게 서서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결론적으로, 본 장은 우리에게 두어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준다.


첫째로, 성도에게 고난이 있으나 하나님의 위로도 있다. 오늘날도 위로의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고난 중에서도 낙망치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믿음으로 살도록 힘써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남의 믿음을 주관하려 하지 말고 기쁨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오직 우리의 양심의 주인은 하나님뿐이시다. 우리 모두는 다 형제 자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처럼 겸손히 다른 이의 기쁨을 돕는 자로 처신하여야 할 것이다.




2장: 사랑과 승리의 직분


1-11절, 사랑의 직분


[1-3]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기쁨이 그의 기쁨이요 그들의 근심이 그의 근심임을 말한다. '근심'이라는 원어는 '무거운 마음, 슬픔 등'의 뜻을 가진다. 과연 성도는 교역자의 기쁨이요 성도의 기쁨은 교역자의 기쁨이다. 또한 성도의 근심과 슬픔은 교역자의 근심과 슬픔이다.


[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복음 사역은 외적으로는 큰 환난이 있었고 내적으로는 애통과 근심이 있었다. 외적 환난은 사탄과 세상의 핍박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내부에서도 성도들의 연약과 부족이 많았고 그것 때문에 오는 심적 고통과 슬픔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때때로 많은 눈물로 편지를 썼다.


바울의 사역은 눈물의 사역이었다. 사도행전 20:19,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사도행전 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우리도 그것을 본받기를 원한다.


바울의 눈물의 편지는 책망과 권면의 내용이었다. 그 목적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단지 그들에게 근심과 슬픔을 주기 위한 것이었는가? 물론 그것이 그들에게 근심과 슬픔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 책망과 그 권면은 전도자 바울의 그들을 향한 뜨겁고 넘치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사랑이 아니라면 눈물의 책망의 편지를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책망은 숨겨진 사랑보다 낫다.


[5, 6]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은 것이 족하도다.


'근심하게 한 자'는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범죄자를 가리킨다. 옛날 영어성경은 본절을 어느 정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고린도교회의 범죄자는 바울을 근심케 하였으나, 그는 너무 심하게 표현하지 않기 위해 '어느 정도 나를 근심케 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한 권징의 권면을 받아들였다. 범죄자는 권징을 받아야 한다. 비록 교회 안의 소수의 사람들이 그 권징에 반대했을지도 모르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찬성하였고 그 범죄자를 벌하였다. 그 권징은 충분하였다.


이처럼 초대 교회, 적어도 사도 시대의 교회에는 권징이 있었다. 그들은 사도의 권면을 순종하였다. 인간의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성령의 권면을 겸손히 따른 것이다. 그들은 형식적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진짜 공동체이었다. 그들에게는 진실한 신앙고백과 순종의 삶이 있었다.


[7-9]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권징은 벌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죄인의 회개를 목표로 한다. 권징하지 않으면 죄 가운데 머물 형제를 권징을 통해 바로 잡고 바로 세우는 것이 그 목적인 것이다. 이제 권징의 목적이 이루어졌다. 바울은 그러므로 그 범죄했던 성도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말한다.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기지 않게 하라고 말한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징계한 후에 그를 사랑으로 감싸주듯이! 얼마나 아름다운 교훈인지! 오늘날 교회들은 권징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권징도 있고 용서와 위로도 있는 것이 교회의 참 모습이다.


우리 중에 사랑의 새 계명을 어기기를 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새 계명에 복종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권징이 미움의 표현이 아니고 참으로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행해진 것이라는 것을 증거할 필요가 있다. 자녀를 징계하는 부모의 심정에 자녀에 대한 참된 사랑이 있음을 자녀에게 알릴 필요가 있듯이, 범죄하는 교인을 징벌하는 교회의 심정에 그 교인에 대한 참된 사랑이 있음을 그에게 증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그의 권면을 순종하리라고 기대한다. 아니 이 권면뿐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순종하는 자들이기를 기대한다. 교회는 순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성경에 증거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여 순종해야 한다. 불순종은 옛부터 인간의 뿌리 깊은 악이다.


[10, 11]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용서와 해벌(解罰)이 곧 자신의 용서와 해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용서와 해벌은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라고 말한다. 주께서도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8:18).


사탄은 범죄자로 하여금 너무 근심케 함으로 낙망케 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한다. 사탄의 궤계는 성도를 범죄케 하고 근심케 하고 낙심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징벌도 필요하지만 회개한 자에게는 위로도 필요하다. 사탄은 죄인에게 속박과 근심과 불안을 주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여 그에게 죄에서의 자유함과 기쁨과 평강을 주신다.



12-17절, 승리의 직분


[12, 13]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문'은 복음의 문, 전도의 문, 구원의 문이다. 문은 하나님이 열어 주셔야 된다. 부흥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드로아에서 이 문이 주 안에서 바울에게 열렸고 그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는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해 심령이 편치 못해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다.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마치 구약시대에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듯이"(삼하 8:6, 14), 하나님께서는 전도자 바울의 일행을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이기게 하셨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지식의 향기'라는 뜻이다. 곧 그리스도의 지식을 널리 알리는 향기라는 말이다. 바울은 고난의 사역을 하였지만, 그의 사역은 항상 승리적이었다. 오늘날도 진리의 사역은 승리적이다. 불순종과 죄는 실패의 원인이지만, 순종과 의는 결국 승리한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참된 종들의 바른 사역은 결코 실패치 않는다.


[15, 16]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전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구원얻는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향기이며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향기이다. 그러나 누가 이 직무를 감당할 수 있으랴! 이것은 참으로 존귀하고 복된 직무요 또한 두렵고 떨리는 직무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생명과 사망을 나누고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을 나누기 때문이다(요 3: 18).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감당할 자가 아무도 없다!


[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많은 사람들이 거짓된 사역을 하고 있었다. '혼잡하게 한다'는 원어는 '장사하다'는 뜻에서 시작하여 장사들이 이익을 많게 하려고 물건의 품질을 떨어뜨린다는 의미로 '부패시킨다'는 뜻을 가지는 말이다. 그래서 옛날 영어성경은 '부패시키다'는 말로 번역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장사군이 되어 말씀을 부패시키고 인간의 생각을 따라 가감하여 변질시키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오늘날도 거짓 목사들이 많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라는 원어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같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순전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증거하였다. 그는 말씀의 바른 일꾼이었다. 그는 후대의 말씀 사역자의 본이 된다. 오늘도 말씀의 일꾼들은 어떤 환경 처지에서도 변질되거나 타협하지 말고,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지 말고, 순전하게 순수하게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본 장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다른 형제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할 수 있지만, 그를 미워하는 마음에 떨어지지 말고 참된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해야 하며 그러면 항상 승리하게 될 것이다. 바울을 항상 승리케 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도 승리케 하실 수 있다.




3장: 새 언약의 직분


1-5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자천(自薦)한다는 말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스스로 추천한다는 뜻이다. 천거서를 부친다는 말은 타교회들로부터의 추천서를 그들에게 부친다는 뜻이고, 그들로부터 천거서를 받는다는 말은 자신에 대한 고린도교회의 확인서를 받는다는 뜻이다. 왜 그런 추천서가 필요한가? 거짓된 일꾼들이 많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어떤 일꾼을 신임하려면 한 교회의 추천서가 필요할 것이다. 일꾼은 한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다른 교회들에서도 인정받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름만 가진 불신실한 일꾼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추천서도 불신실할 수 있지만, 그래도 믿을 만한 교회나 사역자들이 쓴 추천서는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교회의 충실하고 모범적인 교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인정받고 덕스러운 말을 하고 사랑과 순종의 행위를 나타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2]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는 말은 고린도교인들 자체가 바울의 사도직을 증거하고 그의 일꾼 됨을 증명한다는 뜻이다. 이것보다 더 좋은 편지는 없다. 이것은 편지 이상이다. 추천 편지는 그의 인격과 삶을 증거할 것이지만, 바울의 인격과 삶은 고린도교인들이 증거할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1년 6개월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는데, 그 정도면 고린도교인들이 그의 인간됨을 알 수 있고 그의 진실한 일꾼 됨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행 18:11).


그 편지는 종이에 쓴 것이 아니고 바울 일행의 마음에 쓴 것이다. 그것은 종이에 쓴 것보다 더 생생하다. 고린도에서의 전도 사역은 종이에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바울의 마음 속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비록 종이에는 쓰여져 있지 않아도 마음 속에서는 생생히 기록되어 있으며, 마음 속에 쓰여 있다고 해서 다른 이들이 확인할 수 없는 은밀한 편지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공개된 편지이다.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心碑)에 한 것이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고린도교인들은 바울 일행의 편지 정도가 아니고, 또한 그리스도의 편지이었다. 그들은 바울 일행을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 곧 그들이 증거한 그리스도께서 친히 추천하시고 확증하시는 편지이다. 다른 말로, 고린도교인들 자체가 그리스도의 추천서요 그리스도의 증명서인 것이다.


그 편지의 필기 도구는 무엇이며 종이는 어떤 종이이었는가? 그 편지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었다. 먹이나 잉크는 생명 없는 것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은 생명으로 충만하시며 그의 증거는 항상 살아서 역사한다.


또 그 편지는 돌판에 쓴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판에 썼다. 아주 옛날에는 글을 돌판이나 흙판에 썼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편지는 돌판에 쓴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판에 썼다. 누구의 마음판에 썼는가? 바울의 마음판에도 쓰였고 고린도교인들의 마음판에도 쓰였던 것이다. 이것은 돌판에 쓴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편지가 아닌가?


[4, 5]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이같은 확신'이란 고린도교회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확신을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 만족 혹은 그 확신이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다고 고백한다. 모든 선한 것이 다 하나님께로 났고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우리 속에서 난 것처럼 스스로 만족하거나 자긍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모든 선한 사역과 그 열매는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6-18절, 새 언약의 일꾼


[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儀文)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예레미야 선지자로 미리 말씀하신 바이었다. 예레미야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이것은 메시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새 시대에 대한 예언이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언약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자리에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22:20).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대조된다. 여기에 구약과 신약의 대조가 있다. 옛 언약 곧 구약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이다. 새 언약 곧 신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 자들과 맺으신 언약이다. 구약은 율법의 형식으로 주어졌고 신약은 복음의 형식으로 주어졌다. 구약의 전면(前面)에는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말씀이 있었으나, 신약의 전면에는 '믿으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있다. 구약에도 의식법 곧 제사 제도나 성막 제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증거되어 있었지만, 신약은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증거된다(요 1:17).


옛 언약의 일꾼들은 모세와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었으나, 이제 사도들은 그들과 다르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었다. 이 자격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다.


또한 새 언약의 일꾼된 것은 의문(儀文)으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의문(儀文)이란 글자라는 뜻으로서 율법의 글자, 곧 율법 조문을 가리킨다. 그러나 '영'은 3절에 이미 언급한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킨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라는 말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여 죄인을 정죄하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 6:23).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죄로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신다.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살리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성령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라]."


[7-8]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복음 사역은 단순히 사람의 말과 글의 사역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다. 전도자의 직분은 성령의 직분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말씀의 봉사자들은 자신의 사역이 성령의 사역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이 사역을 단순히 말로서가 아니고 성령의 이끌리심과 도우심을 받아 감당해야 한다. 이 사역은 영광스러운 사역이다. 죽게 하는 율법의 직분도 영광이 있었다면, 살리시는 성령의 직분은 더욱 영광스러운 것이 아닌가!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율법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고 죄를 깨닫게 하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것의 중요한 부분은 죄를 깨닫게 하는 사역, 곧 정죄의 사역에 있다. 율법의 사역은 정죄의 사역이다. 그러나 신약의 복음은 이와 대조하여 칭의(稱義)의 진리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이 받는 의의 소식이다. 복음의 일꾼들은 죄인을 정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의를 선포한다. 복음 사역은 칭의의 사역이다. 그것은 죄인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길로 인도하는 사역이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스러웠다면 의의 직분은 얼마나 더 영광스러운가!


[10, 11]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복음 사역은 영광스럽다. 율법의 사역도 영광이 있었다. 그러나 복음 사역은 더 큰 영광이 있다. 율법의 사역의 영광은 없어질 영광이었다. 그것은 구약의 한계, 율법의 역할의 한계를 말한다. 구약과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효과적이었다. 구약의 율법 체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될 것이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것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복음 사역의 영광은 한계가 없는, 폐지됨이 없는, 영속적인 영광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며 그가 십자가 대속으로 이루신 완전한 의(義)의 영광이다.


[12-16]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할 때 그 얼굴에 광채가 났다(출 34:29-35). 그러나 그는 말을 마친 후 그의 이마에 수건을 써서 그 없어질 광채를 가리웠다. 그것은 율법이 장차 없어질 것이며 앞으로 나타날 참된 실체를 예표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구약 시대에는 그 수건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구약의 의식적 율법의 내용들은 그 내면에 감추어진 메시아의 사역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수건이 벗겨져야 할 때이다. 복음 사역은 수건을 쓰지 않는 사역, 곧 가리운 것이 없는 사역이다. 복음의 진리는 은밀하지 않고 밝히 드러난 진리, 공개된 진리이며, 그 영광은 없어지지 않는 영속적인 영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읽을 때 아직도 수건을 쓰고 있다. 그 수건은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상징들, 모형들, 예표들에 대한 무지와 거기서 비롯된 잘못된 율법주의 사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져야 한다.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도 신적 본질에 있어서 영이시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있는 자유란 율법의 정죄로부터,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율법의 공포로부터, 율법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율법의 근심과 염려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주의 영이 죄인의 죄를 씻으시고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구원 사역이다. 구원은 죄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사역이다.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구원의 결과는 영광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현실 속에서 이미 그 영광을 향해 가고 있고 변해 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활동이다. 지금은 법적으로 받아 소망 가운데 누리는 자유이며 의(義)이지만, 장차 영광 가운데서 그 자유와 그 의를 충만하게, 완전하게 누리게 될 것이다. 천국은 한마디로 영광의 세계이다. 우리는 그 영광을 사모하면서 영광의 주를 바라보며 그의 영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복음 사역이 새 언약과 성령과 의의 사역임을 알고 오직 성령을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를 힘써 증거하자.




4장: 낙심치 않는 직분


1-6절,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


[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죄 씻음과 죄 용서, 의롭다 하심, 율법의 정죄로부터의 구출과 자유는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이 은혜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과 직분도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것이다. 그것은, 영적으로 죽었었고 중생한 후에도 여전히 연약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긍휼로 받은 이 직분이 영광스럽기 때문에 그리고 그 영광은 없어질 영광이 아니고 길이 있을 영광이기 때문에, 바울은 어떤 고난의 형편과 처지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는다고 간증한다. 전도자는 성령께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데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인간은 연약하고 혹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은 힘 있게, 착오 없이 이루어진다.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숨은 부끄러움의 일'은 모든 불의와 사악과 모든 가식과 위선 등을 가리킨다. 궤휼은 간사함과 거짓됨을 가리킨다. 영광의 복음 사역자는 그런 것들을 의지하거나 행해서는 안된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한다는 원어(돌로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악한 일이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는 종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일을 파괴하는 종들이다.


그들과 달리, 바울은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또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해 자신을 증거한다. 이것은 오늘날 전도자의 바른 자세이며 하나님의 참된 종의 모습이다. 거기에는 가식이나 이중 인격이 없다. 외모로는 연약함이 있으나 그 속에 하나님의 진리가 있고 복음 증거의 사명과 소원이 있다. 그는 진정 하나님께서 쓰시는 종이요 성령의 도구이다.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우리 복음'이라는 말은 바울과 그 일행이 전파한 복음이라는 뜻인데, 그 복음은 하나님이 주시고 명하신 '하나님의 복음'이며(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이다(갈 1:12). 그것은 또한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교제의 악수로 확증한 복음이며(갈 2:9) 아무도 가감할 수 없고 변경할 수 없는 복음 곧 유일한 복음이다(갈 1:8, 9). 이 복음은 성경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어떤 자들에게는 가리워져 있다. 그들은 복음의 내용과 복음 안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망하는 자들,' '멸망해가고 있는 자들,' 영원한 멸망을 향해, 영원한 형벌의 처소인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될 때, 두 부류의 사람들, 곧 영생에 이를 자들과 영원한 형벌에 이를 자들이 명확히 구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결과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말고, 오직 바른 복음, 성경적 복음을 담대히 전하자.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이 세상 신'은 사탄을 가리킨다. 그는 성경 다른 곳에서 '이 세상 임금' (요 12:31) 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라고 불리웠다. 사탄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사람들은 사탄의 역사로 생각이 어두워지고 영의 눈이 멀어서 구주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한다'는 말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구주로 오셨고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내용이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는 '영광의 주'이시다(고전 2:8). 그는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본체'라는 원어는 '형체, 형상'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서 1:3,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형상'이라는 원어(카라크테르)는 '명확한 형상, 정확한 형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탄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바울은 자신을 전파하지 않았다. 세상 종교나 철학은 대체로 인간 스승을 중시하는 사제지간(師弟之間)의 도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인간 선생의 가치는 비교적 적다. 오직 그가 전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만이 가치가 있다. 바울은 아무것도 아니다(고전 3:7). 그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하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하였다. 역사 속에 한 인물, 유대의 한 청년 예수가 그리스도요 주님이시라는 것이 그가 전하는 내용이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는 구주를 가리킨다. 주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과 비슷한데, 순종의 관계를 나타낸다.


역사적 인물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를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으므로, 그를 믿는다는 것 속에는 그가 이루신 모든 은택들을 받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


특히 주님이라는 말은 순종의 관계를 나타낸다.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에게 절대적 순종을 약속하는 것이다.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자는 그에게 순종할 것이다. 비록 순종의 행위가 완전치 못해도, 참된 믿음에는 순종이 없을 수 없다. 순종은 믿음의 당연한 표시이며 증거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순종이 없다면 믿음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를 믿는다면 그에게 순종하려 할 것이다.


바울은 또한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말하였다. '예수를 위하여'라는 원어는 '예수 때문에'라는 뜻이다. 바울 사도 일행은 예수님 때문에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일꾼이 되었다. 그는 지금 주님 가신 길을 따라 섬기는 자로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을 성도들을 섬기는 종으로 자처한다. 그는 교회의 지배자가 되려 하지 않고 섬기는 종이 되려 한다. 이것이 겸손이다.


물론 '너희의 종'이라는 말이 교인들의 말을 맹종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와 교사로 파송된 일꾼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만 순종하고 그의 뜻만 선포하기를 원하는 자이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그는 바른 말씀의 진리를 품에 품고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구원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물로 바치며,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드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창세기 1장에 증거된 대로, 천지를 창조하시던 6일 중 첫째날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고 이로써 어두움 가운데 빛이 창조되었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실 수 있었던 전능의 하나님이시요, 빛을 창조하신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그 창조의 하나님은 또한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그 하나님이시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이 세상의 영적 상태, 정신적 상태, 도덕적 상태는 한마디로 어두움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시는 사역으로 또다시 표현된다. 그러나 이번의 빛은 물질적 빛이 아니고 정신적 빛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식, 복음의 지식, 구원의 지식을 가리킨다.


복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이 놀라운 지식이 죄인에게 구원이 된다. 그것은 우주와 인생의 근원과 미래를 깨달은 지식의 빛이요 모든 죄악과 부도덕의 문제를 해결한 의의 빛 곧 은혜의 구원의 빛이다. 이 복음의 빛이 세상에 비친 지 벌써 2천년이 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도덕적 어두움에서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빛이 당신의 영혼 속에 확실히 비치었는가?



7-18절, 낙심치 않음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빛, 곧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는 지식을 말한다. 이 지식, 이 믿음이 보배이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를 말한다. 성도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질그릇이지만, 이 그릇 속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빛을 소유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있음을 깨닫는다. 시편 62:11, "하나님의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복음 사역자의 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 곧 정신적 무지의 흑암 속에 그리스도를 아는 빛을 비추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8-10]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때문에, 바울 사도 일행은 사방으로 우겨쌈과 곤란을 당하여도 고민하거나 좌절하지 않았고, 답답하고 당황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또 악한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아도 결코 하나님께 그리고 진실한 성도들에게 버림을 당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거꾸러뜨림과 넘어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았다.


'예수 죽인 것'이란 '예수의 죽으심'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그의 고난에 참여함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고난은 그 자체가 끝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생명이 증거되고 나타났다.


[11-13]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전도자는 항상 예수님 때문에, 그의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지만, 예수님의 생명은 고난받는 그들을 통하여 나타나고 역사한다. 그것은 생명의 역사이다. 그것은 바울 사도 일행의 말과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역사이었다. 그것은 전도와 목회의 일들에서 나타나는 역사이다.


그들에게 고난이 있었으나 그들을 통해 생명 역사, 구원 역사, 교회의 건립과 성장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간증은 믿음에서 나오는 간증이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믿음의 같은 영, 같은 정신을 가진 자마다 동일한 간증을 담대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죽듯이 연약하나 우리를 통하여 주의 일, 곧 생명 구원의 고귀한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14, 15]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그와 함께 다시 살 것이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 부활의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그 앞에 서게 하실 것이다. 예수 죽음, 우리 죽음이 되고, 예수 부활, 우리 부활이 된다. 그리스도와 우리는 영적으로 연합되었다.


그리스도와 우리는 이미 연합되어 있으나, 장차 그것이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골로새서 3:3, 4,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바울 사도의 모든 사역은 교회와 교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가 많은 사람들의 감사함으로 풍성하여지고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가 고난을 당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죄인들은 구원과 생명을 얻고 은혜와 감사함이 풍성케 되기 때문에, 바울은 낙심치 않았다. 바로 그 동일한 이유 때문에 오늘날 목사들도 어떤 형편과 처지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는다. 그의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그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겉사람은 몸을 가리킨다. 사람의 몸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늙고 병들고 쇠하고 마침내 죽는다. 그것은 많은 고난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신의 삶을 '날마다 죽는' 삶이라고 묘사하였다. 속사람은 겉사람과 대조하여 영 혹은 영혼을 가리킨다. 성도의 영혼은 그 지식이 자라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완전한 의와 성결 가운데서 날마다 하늘의 위로가 더하고 천국 영광의 소망이 더욱 새로워진다.


[17, 18]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바울 사도는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을 비교한다. 그는 현재의 고난이 시간적으로 잠시 받는 환난이며 그 정도와 가치에 있어서 비교적 가볍다고 묘사한다. 비록 그 고난이 수년 혹은 수십 년 간의 고난이라 할지라도, 또 그 고난이 극심한 종류, 극악한 종류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미래의 영광과 비교해 볼 때 그러하다.


현재의 고난과 대조하여, 바울 사도는 성도가 누릴 미래의 영광이 시간적으로 영원한 영광, 곧 영원히 누릴 영광이며 그 정도와 가치에 있어서 지극히 크고 무겁다고 묘사한다. 현세의 영광, 지상에서의 영광은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라도 일시적이며 수십 년을 넘기지 못한다. 그러나 장래의 영광은 영원하다. 로마서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보이는 것 곧 물질 세계와 현실 세계를 위주하여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 곧 영적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와 미래의 세계를 위주하여 산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전도자의 삶의 바른 자세요 모든 성도의 삶의 바른 방식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위주하여 살아야 한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다. 시편 90: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우리가 받은 새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다(벧후 1:11).


전도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당하는 여러 가지 고난과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항상 우리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 역사, 구원 역사, 곧 전도의 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자. 그러므로 어떠한 환경처지, 어떠한 여건 속에서도 낙심치 말고 낙망치 말자.


또한 우리 모든 성도는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 현실 세계만을 위주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세계, 영혼의 세계, 미래의 세계를 위주하여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영원한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바르게, 담대하게 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재창조의 사역임을 알자. 사탄은 멸망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의 어두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빛을 비추시어 구원하신다.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믿음의 이 보화가 질그릇 같은 우리 육체 속에 있음을 깨닫고,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생명 역사 때문에, 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의 천국 때문에 어떠한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낙심치 말자.




5장: 화목케 하는 직분


1-10절,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본문은 성도가 죽으면 그 영혼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에 들어가 주와 함께 거하게 될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성도에게 큰 위안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엄숙한 의무도 뒤따른다.


[1-3]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은 현재 우리의 몸을 가리킨다. 그것을 장막(천막)이라고 부른 것은 임시적이고 영구성이 없음을 나타낸다. 벽돌집이나 철근 콘크리트 집은 비교적 영구적이지만, 천막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임시로 사용하기 위해 치는 것이며 사용 후엔 걷어서 넣어두거나 옮겨서 다른 곳에 친다. 이것은 비유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영구적이지 못하고 얼마간 쓰면 낡아지고 쇠하여짐을 표현한 것이다.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가리켰다. 천막을 걷어 분해하여 보관하듯이,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분해되어 버린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썩어 흙이 되지만,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 3:21). 몸을 떠난 성도의 영혼은 있을 곳이 없어 방황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 올라가 거기서 거처할 곳을 얻게 된다. 죽음 후에 영혼이 가는 집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다.


히브리서 9:11,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 히브리서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 . .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2:22, 23,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성도가 죽은 후 거처할 천국을 가리킨다. 성도의 영혼은 지금 육체 가운데 있지만, 육체의 죽음 후에는 천국에 들어가 거기서 부활 때까지 안식하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그 집은 하나님이 직접 지으신 집이므로 사람들이 지은 그 어떤 훌륭한 집보다 낫다.


우리의 영혼은 지금 땅 위에서 탄식하며 천국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는다'는 것은 영혼이 육체를 떠난 후에 천국에서 거처를 얻는 것을 말한다. '벗은 자'라는 말은 영혼이 육체를 떠나 좋은 거처를 얻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의 영혼이 탄식하는 까닭은 성도의 현재의 성화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며 또한 죄악된 세상이 지나가고 속히 새 세계가 오기를 소원하기 때문이다.


[4, 5]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영혼이 지금 육체 가운데 있으면서 탄식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를 떠나고자 함이 아니다. 성도의 소원은 현실의 삶이 고통스러워 단지 죽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의 탄식은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고자 하는 탄식이다. 그 생명은 천국의 생명이요 영광스런 생명이다. 다시 말해, 영혼이 지금 탄식하는 것은 빨리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서 하는 탄식인 것이다.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보증으로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성도는 성령의 활동으로 예수를 믿게 되고 천국의 산 소망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성도의 구원 확신은 성경 말씀 안에서 그리고 성경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말미암는다.


[6, 7]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는 담대히 구원을 확신하며 천국을 소망한다. 우리는 지금 몸에 거할 때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안다. 우리는 지금 실제로 주와 함께 있지 못하고 단지 영적으로, 성령으로 그와 함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교제하되 보는 것에 근거하여 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한다.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바울 사도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죽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도의 죽는 것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죽는 즉시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 주와 함께 거하게 된다. 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빌립보서 1:23, "내가 그 두 사이[삶과 죽음의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렇다면, 나이 많으신 노인 성도들에게 '오래 사세요'라는 설날 인사는 그렇게 좋은 인사가 아니다. 성도의 진정한 소원은 이 땅에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주님과 함께 있기를 사모하며 천국에 들어가기를 갈망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성도는 이 땅 위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장 즐거워한다.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거하는 것'은 영혼이 육체 안에 거하는 것 곧 육신의 생명이 연장되는 것이요, '떠나는 것'은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 곧 육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성도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곧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긍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천국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그의 뜻대로, 성경 진리대로 사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경건한 삶이요 의와 선을 행하는 삶이다.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받아야] 함이라.


모든 성도는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심판자이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요 5:22). 그리스도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의 심판은 공정하고 의로운 심판이 될 것이다. 언제 그가 심판하실 것인가? 그의 재림 때에 그는 그렇게 하실 것이다.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25:31, 32, "인자가 자기 영광의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과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행위대로 보상을 받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 그것은 처음도 은혜요 마지막도 은혜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이루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완전한 의에 근거하여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완전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는 불완전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는 완전하기 때문이다. 또 구원은 영광스럽다. 성도의 부활의 몸은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울 것이다(빌 3:21; 고전 15:43). 성도의 천국 생활은 영광스러울 것이다(계 21, 22장).


이 은혜의 구원은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만일 누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죄 가운데 머문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중생한 자는 결코 계속적으로 죄 가운데 살 수 없다. 그는 즉시 회개하며 죄를 떠나고 의를 행하려 애쓸 것이다. 그것은 새 생명의 당연한 활동이다. 불신앙과 불의는 멸망의 증거이다. 그러나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은 구원의 증거이다. 요한 사도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아직도 사망 가운데 있다고 말했다(요일 3:14).


그러나 상급은 우리의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다. 사실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공로로 내세울 만한 어떤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고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으로 선을 행하기 때문이며, 더욱이 우리의 선행은 우리의 당연한 의무에도 못미치는 보잘 것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요한계시록 4:10,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상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선행이지만 그 선행의 정도에 따라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경에서 상급에 대한 약속은 주로 봉사에 관계된다. 이것은 주로 복음 사역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는 말씀은 행위의 정도에 따라 상급이 다를 것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과 보상을 생각하면서 두려움과 기대를 가지고 죄짓지 않고 바르게 살며 선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자.


11-21절, 화목케 하는 직분


[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주의 두려우심'이란 마지막 날에 선악간에 심판하셔서 보응하시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그 사실을 아는 자마다 죄짓지 않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고 의롭게 선하게 살려고 힘쓸 것이며 또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도 권면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범사에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아신다는 고백이다.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는 말은 사도 바울의 진실한 삶이 고린도교인들에게도 알리워졌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진실한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바울 사도는 이렇게 자기를 변호하는 편지를 쓰는 것이 자신을 고린도교회 앞에 다시 추천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거짓 교사들 앞에서 그가 진실한 종임을 자랑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가 자신의 편지라고 이미 증거하였었다(고후 3:2).


바울은 거짓 교사들을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꽤 뭐가 있는 것같이 자랑하지만, 실상 그들의 마음은 자기들이 아무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자랑하는 것도 악한데 허풍으로 무엇을 자랑하는 것은 얼마나 더 악한 것인가!


[13, 14]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열심있는 성도는 때때로 세상 사람들 보기에 미친 것같이 보인다. 그들은 그의 열심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아무리 성도가 열심을 낸다 하여도 하나님의 요구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다하며 우리의 영혼을 다하며 우리의 힘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라고 명하시지만(신 6:5),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마음과 힘의 70%, 50%, 아니 30%도 하나님을 사랑치 못할 때가 많다.


열심 있는 성도가 미친 것같이 보여도 사실상 그는 미친 것이 아니다. 성도는 결코 미쳐서는 안된다. 온전한 정신은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정신이다. 기독교는 결코 비정상적이거나 비상식적인 종교가 아니다. 정상적인 인격은 바른 정신을 가진다. 성도는 하나님을 섬길 때나 인간 관계에서나 바른 정신을 가져야 한다.


성도가 때때로 미친 것같이 보이는 까닭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 때문이다. 성도는 그 사랑 때문에 핍박 중에도 낙심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때때로 홀로 있어도 외로워하지 않으며 물질적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위축되거나 그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주의 일에 열심히 충성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사랑이다. 그것은 한 사람이신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 죽으신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희생적 사랑이다. 그것은 그가 자신을 십자가 위에 희생 제물로 내어주신 사랑이다. 그것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셨다.


한 사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여기에 '모든 사람'이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가 다 해결되어 마지막 심판이나 지옥 형벌이 남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사람만이 그의 구원의 은총을 받는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사람이 실제로 죽은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속죄 개념이다. 속죄는 속죄물이 가상적으로가 아니고 실제로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2천년전 유대땅 예루살렘 성밖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실제로 우리의 모든 죄의 책임을 담당하셨고 실제로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을 받으셨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우리 모두는 그와 함께 실제로 죽은 것과 같았다.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구원받고 새 생명 얻은 자들이 이제는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들을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 죄짓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도의 윤리 생활의 기본적 목표이며 원리이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고린도전서 6:19, 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는 사람을 육체대로 알아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들은 그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된 자들, 곧 그가 매우 귀하게 여기신 자들이다. 여기에 성도들의 특별한 가치가 있고 여기에 성도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할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 그리스도를 단순히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목수 정도로 알았었다. 마가복음 6:3,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요 영광의 주이심을 알려주셨다.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구원받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다. 왜냐하면 이전의 것들, 곧 죄악된 것들, 정죄된 것들, 허무한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보라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었도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제 그에게 있는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었다. 그는 새 생명 곧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을 상속받을 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과거의 그가 아니다. 그의 삶의 의미와 가치는 완전히 새로워졌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인한 것이다. 로마서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로마서 11:36,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구원은 화목의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다른 말로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것이었다. 구원하신 것은 곧 화목케 하신 것이다. 그 화목은 인간 상호간의 화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말한다.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의 죄는 우리와 하나님을 원수되게 만들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가 화목한 관계로 회복되었다. 골로새서 1:21, 22,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하나님께서는 바울 일행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 사도의 직분은 화목케 하는 직분이다. 오늘날 전도자들의 직분은 화목케 하는 직분이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인 것이다.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이시다. 그는 사람의 본질을 취하신 하나님, 곧 한 인격 안에 하나님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함께 가지신 분이시다.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비하게 연합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우리뿐 아니라 또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에 많은 사람들을 위한 속죄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많은 죄인들의 많은 죄들을 그들 자신들에게 돌리지 않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고 화목케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다. 화목케 하는 말씀이 곧 복음이며, 그것이 사도들이 전한 내용이다. 여기에 교회의 사명이 있다.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대한 일은 이 화목의 말씀을 전파하여 주께서 구속하신 영혼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것이다. 화목케 된 자들마다 죄에서 구원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며 거룩하고 의로운 새 삶을 살게 될 것이다.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바울은 화목의 직분과 화목의 말씀을 가진 자신들을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使臣)'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 전도자는 그리스도의 사신 혹은 대사(大使)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 곧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며 원수된 자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을 오늘날 교회에 맡기시고 목사들과 전도자들을 그의 대사로 온 세상에 파송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너희'는 고린도교인들을 가리키지 않는가? 교인 중에도 하나님과의 화목이 필요한 자가 있는가? 그럴 수 있다. 교회에 적을 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은 자는 아니다. 교인 중에도 하나님과 화목이 필요한 자가 있을 수 있다. 권찰들과 교사들은 이 사실을 유념해야 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교인들이 참으로 구원받은 자인지를 항상 살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과 화목했는가?


교회 안에 아직도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자가 있다면 그를 인도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우리는 모든 교인이 하나님과 참으로 화목한 자, 하나님과 참으로 교제가 회복된 자, 하나님도 그를 기뻐하시고 그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가 되었는지 살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교회 밖에,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자들, 하나님과 화목해야 할 자들이 많이 남아있으리라는 생각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지금 세상에 얼마나 남아 있든지 간에 교회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 사도는 본절에서 속죄의 진리를 다시 한 번 더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의 죄를 담당한 속죄의 죽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그의 속죄의 죽음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 것이다(롬 3:24). 이것이 대속의 원리이며 구원의 이치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이 대속의 원리에 근거한다. 죄인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대속의 복음을, 이 화목의 소식을 세상 끝까지,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힘써 전파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 장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죽음 후에 천국이 있음을 확신하고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자. 둘째로, 우리는 대속의 이치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만 위해 살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여 화목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자.




6장: 고난으로 감당하는 직분


1-10절, 고난으로 감당하는 직분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바울 사도는 자신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동역자)라고 표현하였다. 고린도전서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하나님은 혼자서 많은 일들을 하셨고, 또 하고 계신다. 욥기 9:10,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그러나 그는 인간의 구원의 일을 위하여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오늘날 복음 사역자들은 그가 사용하시는 일꾼들 곧 그의 동역자들이며, 또 그런 헌신자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사도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받는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이다. 그것은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어떤 행위의 대가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 마땅히 간절함과 진지함으로 받아야 한다. 히브리서 2:1-3,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공의로운]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실 때가 있고 구원하실 날이 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다! 죄인들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불러야 하고 그에게로 가까이 나아와야 한다. 시편 32: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이사야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거두실 때가 온다. 말씀의 기근이 올 때가 있다. 아모스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은혜를 거두시고 심판을 내리시는 날이 있다. 잠언 1:24-26,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우리는 노아 시대에 홍수가 시작된 날을 기억하고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 때 유황불비가 내리기 시작한 그 아침을 기억해야 한다.


[3]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의 직분이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든지 거리낌을 주지 않도록 처신하려고 애썼다. 왜냐하면 그의 직분이 비난을 받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되며 영혼 구원과 교회 건립의 일들에도 지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교회의 직분자들이 자기 생각대로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과 직분의 명예를 생각하며 행동한다면 교회는 은혜롭게 진행되며 잘 건립될 것이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다고 생각하면서 함부로 행동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도, 교회도 위하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일과 교회의 평안과 부흥에 해를 끼칠 뿐이다.


[4-6]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곤란]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하나님의 일꾼은 수고하는 것이 본분이다. 바울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고난을 당하였고 그것을 견디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고 핍박과 매맞음과 갇힘 등의 육체적 고난도 있었다. 그는 때때로 어떤 이들의 반대와 배척을 받았고 소동과 소란을 경험하였다. 피곤한 날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는 일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범사에 깨끗하였다. 물질 관계에도 그러하였고 이성 관계에도 그러하였다. 이것은 후대의 모든 일꾼들의 모본이다. 또 그는 항상 지식으로 준비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전달하는 일꾼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지식으로 준비된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또 그는 범사에 오래 참았고 또 사람들에게 친절하였다. '자비함'이라는 원어는 '친절'이라는 뜻이다. 이것들은 다 일꾼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또 그는 성령의 감화 곧 성령의 인도하심과 이끌리심을 받았다. 전도자의 힘은 성령의 교통에 있다. 또 그는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행하였다. 이것들은 다 그의 진실한 간증이다.


[7, 8]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그는 또한 진리의 말씀으로 사역했다. 진리의 말씀은 곧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이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봉사했다. 하나님의 능력은 곧 성령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다. 그는 또한 의의 병기로 활동했다. 의의 병기라는 말은 그가 의를 전파하고 의를 건립하는 도구임을 말한다. 복음 운동은 의인 만드는 운동이다. 물론 이 일을 위한 도구는 의로운 인격자이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고 그 의를 소유하고 그 의를 실천하고 그 의를 전파해야 한다.


그러나 비록 그의 직분이 영광스러운 직분이지만, 그는 악하고 거짓된 비난도 받았다. 그는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의 상반된 평판을 받았다. 또 그의 확신 있는 설교와 교훈 때문에 그는 확실한 지식과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마치 속이는 자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속이는 자가 아니고 진리를 말한 자이었다.


[9, 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또 그는 자기를 선전하지 않고 조용히 일하였으므로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은 그를 인정하고 그를 사랑하였고 그의 이름은 그들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다. 그는 죽을 고난도 많이 당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으로 구원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그가 고난을 당하고 육신의 질병으로 고생할 때는 마치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 같았지만, 그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그 고난은 단지 그를 겸비케 하고 하나님만 의지케 하는 훈련 과정이었다.


더욱이, 비록 그가 성도들의 연약 때문에 근심하기도 했지만, 그는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천국 때문에, 그리고 구원 사역의 확장 때문에 항상 기뻐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이었지만, 많은 자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풍성한 은혜와 복으로 부요케 하는 자이었고 하나님의 모든 소유로 인해 또 그의 공급하심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자로 부족함이 없이 일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꾼들은 평안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또한 고난 가운데서도 바른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 전도자의 직분은 고난으로 감당해야 할 직분이다. 그러나 비록 경제적, 육체적, 심리적 고난이 크지만,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과 도우심과 공급하심도 크다. 그러므로 전도자들과 성도들은 낙망치 말고 더욱 주의 일에 충성하자.



11-13절, 마음을 넓히라


[11-13]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바울의 마음은 넓어져 있었고 그의 입도 열려 할 말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이 넓어져야 입도 열릴 것이나 마음이 좁아지면 입도 닫힐 것이다. 그의 열린 입은 그들을 비평하는 비평의 입이 아니고 주의 은혜에 대한 간증의 입이요 그들에 대한 권면의 입이었다.


그러나 고린도교인들은 마음이 좁아져 있었다. 그것은 바울 때문에 좁아진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조금이라도 좁은 마음이나 닫혀진 마음으로 그들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고린도교인들의 좁아짐은 그들의 마음 안에서, 그들의 깊은 감정에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제 바울은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권면한다. 그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고린도교인들을 위하여 어떻게 고난 가운데 사역했는지를 상기시켰으므로 그는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말한다. 바울의 고난의 사역은 그들에게 그의 진심을 알게 해 줄 것이다. 고린도교인들은 마음을 넓게 열고 그의 말과 생각과 소원과 의도와 행위를 이해하고 그와 일치하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 교회들도 하나님의 생각이 목사의 생각이 되고, 목사의 생각이 장로들의 생각이 되고, 장로들의 생각이 모든 교인들의 생각이 되어 하나님의 바른 뜻을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서로를 향해 마음이 좁아짐이 없이 마음을 넓혀 하나님의 바른 진리의 지식 안에서 일치할 때 교회는 진리와 사랑 안에서 바르고 힘있게 세워질 것이다.



14-18절,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그것은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믿음 없는 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와 어울리지 않게 멍에를 같이해서는 안된다. '멍에를 같이한다'는 원어(헤테로쥐게오)는 '어울리지 않게, 부당하게 멍에를 같이한다'는 뜻이다.


믿는 자는 예수님의 피로 죄씻음 받고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한 길을 걷는 자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고 죄에게 종이 되어 있어 불경건과 불의와 욕심에 넘어지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멍에를 같이할 수 없다. 그것은 의와 불법이 함께할 수 없음과 같다. 의는 불법을 정죄하고 멀리하며, 불법은 의를 싫어하고 배척한다. 그것은 빛과 어두움이 서로 사귈 수 없음과 같다. 빛이 오면 어두움은 물러가고 반대로 어두움이 오면 빛이 물러간다. 빛과 어두움은 결코 동시에 함께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벨리알은 '무가치한 자'라는 뜻으로 사탄을 가리킨다. 사탄은 하나님의 원수이다(마 13:39).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탄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다(히 2:14).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서로 죄화될 수 없다.


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영적 소유물이 서로 다르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소유하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과 영생과 부활과 천국을 소유하고 그가 주시는 평안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불신자는 하나님 대신 사탄을 소유하고, 영생과 천국 대신 멸망과 지옥을 소유하며, 평안 대신에 생에 대한 무의미와 허무를 소유한다. 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은 일치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을 모신 집이다. 그 곳에서는 하나님만 섬긴다. 그러나 우상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원리는 교회의 활동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의 교제 전반에 있어서 적용될 원리이다. 믿음이 없는 자는 구원받아야 할 전도 대상이지 영적 교제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교제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의와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이어야 한다. 요한일서 1:3,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고린도교인들은 믿지 않는 자들과 분리되어야 한다. '따로 있으라'는 말은 '분리하라'는 뜻이다. 형제간에 싸움과 분리는 죄이지만, 불신자와의 교회적 분리는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다. 신약성경은 이것을 명확히 교훈한다. 로마서 16:17, 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요한이서 9-11,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이러한 교훈은 이단을 제거하고 이단자들을 죽이라고 가르친 율법의 말씀과 일치한다. 신명기 13:1-5,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附從)하고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성도의 교제는 믿는 이들간의 교제이어야 한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것은 성도 상호간의 사랑을 명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사 시대에 반복적으로 실패하였던 원인은 가나안 정복시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들을 불완전하게 정복했던 까닭이었다(삿 1장).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명령을 지키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이방 족속들을 그 경내에 포용함으로 그들의 우상숭배를 본받게 되었고 부패되었다. 적은 누룩 같은 이방 족속들이 이스라엘 전체를 부패시키는 원인이 된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가 불신자를 정회원으로 포용하고 성도가 그와 교제할 때 교회는 속화되고 부패되기 시작한다. 무분별한 교제가 교회를 부패시키는 것이다. 교회가 작은 누룩과 같은 오류를 포용할 때 그 오류는 교회 전체를 부패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불신자들과 분리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교회에 나아와 말씀을 들을 수 있으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인정하고 영접하기까지 그는 아직 교회의 회원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를 교회의 봉사자로 세우거나 그와 영적으로 교제하는 것은 잘못이다.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회(會)이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명확히 구별된다(요일 3:10). 세상과 교회의 선이 명확할 때 교회는 강력한 단체가 될 것이다. 교회가 세상과 달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은 교회의 특권이요 힘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과 비슷하게 될 때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세상에 짓밟히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 장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복음 사역은 경제적, 육체적, 심리적 고난이 많은 사역임을 알고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자. 둘째로, 우리는 넓은 마음으로 서로 용납함으로 하나님의 일에 협력하자. 셋째로,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하지 말자.




7장: 위로와 기쁨을 얻는 직분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이 약속'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약속이다. 장차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얻을 약속을 받은 우리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도덕의 원동력이 되심을 보인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가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 잠언 16: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는 것은 우리의 성화의 목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가 온전한 거룩인 것을 증거한다. 비록 그것이 지상에서 불가능할지라도, 성도는 온전한 거룩을 향해 힘써야 한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이란 우리가 정신적, 심적 더러움 예를 들어 미움, 음란한 마음, 탐욕 등에도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을 보인다. 앞 장에서 말한 교제의 성결도 성화의 한 요소이다.


[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거짓 교사들의 악한 비난 때문에 고린도교인들은 그 교회의 설립자요 주의 신실한 일꾼인 바울을 향해 거리낌과 간격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이제 그들은 마음을 열고 그를 영접해야 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불의를 행하거나 해롭게 하거나 속여 빼앗은 일이 없었다.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행하는 것은 모든 구원 받은 성도들, 진실한 성도들의 표이며 교회의 참된 일꾼들의 자격이기도 하다.


모세는 하나님께 "나는 그들의 한 나귀도 취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의 한 사람도 해하지 아니하였나이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민 16:15). 사무엘도 마지막 설교시 이스라엘 회중에게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고 말했다(삼상 12:3).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는' 자가 집사의 자격이 있다고 말씀했다(딤전 3:8).


[3, 4]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과의 일치된 마음, 일치된 사랑 안에서 생사(生死)를 같이하기를 원했다. 이것이 교회다운 모습이 아닌가! 목사의 설교와 교훈, 혹은 책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주를 믿고 섬기며 다함께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닌가!


바울의 고린도교인들을 향한 담대함과 자랑은 그들을 사랑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가 그들을 참으로 사랑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다면 담대히 말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담대함과 자랑대로, 그의 사랑과 신뢰대로 그는 많은 환난 중에서도 그들로 인하여 위로와 기쁨이 넘쳤다. 6, 7절에도 그리고 13절에도 이런 사실이 증거되어 있다.


[5-7]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바울의 복음 사역은 육신적으로 휴식이 없는 사역이었다. 그는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였다. 밖으로는 유대인들의 핍박과 이방인 우상숭배자들의 핍박이 있었다. 안으로는 인간적 연약과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주님을 따르는 전도자의 길은 많은 고난을 통과해야 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 하다가, 복음을 위해 충성되이 일하려 하다가 힘이 빠지고 마음이 침체된 자들을 잘 위로하신다. 6절의 '비천한 자들'이라는 원어는 영어성경의 번역대로 '낙담한 자들, 침체된 자들'이라는 뜻이다. 바울의 마음이 위로를 받고 기쁨을 얻은 것은 그의 조력자 디도가 그들로부터 돌아와서 그들에 대한 좋은 보고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위로요 기쁨이었다.


하나님은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만 바라며 가난하고 외롭게 사는 자들을 도우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10: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殘害)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시편 68: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이 세상에서는 그들이 위로받을 데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8, 9]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먼저 쓴 편지에서 범죄자를 지적하고 책망한 것이 너무 심하여 그들이 낙심했을까봐 후회하였으나 그것이 잠시만 그들을 근심케 한 줄을 알고 이제 후회하지 않게 되었고, 지금은 도리어 기뻐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르러 바울에게 어떤 징계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두 종류의 근심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요 다른 하나는 세상 근심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자기의 죄와 부족을 깨닫고 근심하는 것이다. 이런 근심은 많이 할수록 좋다. 왜냐하면 그것은 회개와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시편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그러나 세상 근심은 세상의 일들로 인해 근심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의식주(衣食住)의 염려, 건강의 염려, 경제의 염려 등이다. 이런 근심은 마음과 몸의 건강을 해치고 마침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이런 근심을 버려야 한다. 마태복음 6:31, 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빌립보서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은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하여 민첩하고 성실하게 행동하였다. 그것은 순종의 행위이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의 순결성을 증거하기 위하여 변명하였고 범죄한 자의 죄와 그 죄를 포용한 자신들의 잘못을 인해 의분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두려워하였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의를,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 바울을 사모하였다. 또 그들은 회개하기에 열심을 내었고 악한 자를 벌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 그들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려 하였다.


이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미련한 자들은 교훈과 책망을 받으려 하지 않지만, 지혜로운 자들은 겸손히 그것을 받아들인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2:15,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책망을 들을 때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면 감사하며 조심하면 될 것이고, 우리에게 해당되면 고치고 회개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교훈과 책망을 달게 받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12, 13]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그의 편지의 결과 바울을 향한 그들의 진실함과 간절함이 확인되었다. 바울의 책망은 그들의 참된 회개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바울 일행은 위로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디도의 마음이 그들로 인하여 안심함과 새 힘을 얻었기 때문에 바울은 더욱 많이 기뻐하게 되었다. 전도자의 위로와 기쁨은 성도들이 예수 잘 믿고 믿음 안에서 산다는 사실에서 온다.


[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본절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참말만 하였다고 증거한다. 이것은 말씀의 일꾼들에게 꼭 필요한 간증이다. 우리는 항상 참말만 하기를 원한다. 야고보서 3:1, 2,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15, 16]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이 보낸 일꾼 디도를 두렵고 떨림으로 영접하였고 그의 말을 순종하였다. 이것이 성도들의 바른 태도이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 또 그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의 형제된 전도자들의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하며 어려울 때 그들을 돌아보는 것이 곧 주께 행한 선행이라고 가르치셨다(마 25:35-40).


요한삼서에 보면,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은 교회에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자이었다. 그는 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영접하려는 진실한 성도들을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하였다. 얼마나 악한 행동인가! 요한 사도는 그 서신에서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고 교훈하였다(11절).


고린도교인들을 향한 디도의 사랑의 심정은 그들의 진실한 영접과 순종을 인해 더욱 풍성하여졌다. 복음의 일꾼이 주의 백성의 진실한 믿음과 순종을 볼 때 그들을 향하여 사랑이 깊어지고 풍성하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디도의 이런 보고를 받은 바울도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을 향한 바울의 신뢰와 담대함은 그를 또 기뻐하게 만들었다. 복음 사역자에게 고난과 핍박, 그리고 교회로 인한 근심도 많았지만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기쁨도 풍성하였다.



결론적으로, 본 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영육의 모든 불결로부터 자신을 깨끗케 함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교훈과 책망을 겸손히 받을 줄 아는 자들이 되자. 셋째로, 참된 복음의 일꾼들을 영접하는 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인 줄 알고,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순종하자.




8장: 풍성한 헌금


8장과 9장은 헌금에 대한 내용이다. 고린도교회는 바울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되자마자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작정했던 헌금을 실행하라고 권한다. 이것은 헌금이 우리의 신앙 생활과 교회 생활에서 중요한 한 부분임을 깨우쳐 준다. 헌금은 덮어놓아야 할 문제가 아니고 가르치고 격려하고 실천해야 할 중요한 문제임을 보이는 것이다.


[1, 2]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마게도냐 교회들이란 빌립보교회나 데살로니가교회 등을 가리킨다. 바울 사도는 본절에서 그리고 4절과 6절과 7절에서 '은혜'라는 말을 헌금의 의미로 계속 사용하면서 헌금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헌금하는 은혜를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금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헌금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 속에서 풍성한 헌금을 했다. 그것은 넘치는 기쁨과 더불어 가능하였다. 넘치는 기쁨은 믿음 충만, 은혜 충만, 성령 충만한 데서 나온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이다. 풍성한 헌금은 반드시 평안과 부요 속에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도 비록 환난과 가난 속에 있을지라도 성령의 충만함과 기쁨을 가지고 풍성한 헌금을 할 수 있다.


[3, 4]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마게도냐 교회들은 헌금을 하되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하였다. 힘대로 헌금하는 것도 귀한 일인데, 힘에 지나도록 하였으니 얼마나 귀한 일인가! 그것은 자원하는 마음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며 억지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헌금의 용도는 '성도를 섬기는 일'을 위해서이다. 성도를 섬기는 일은 전도자의 생활비를 의미할 수도 있고 교인들 중에 물질적으로 어려운 자를 구제하는 일일 수도 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이 헌금에 참여하겠다고 바울에게 간절히 구하였다. 그들은 헌금을 짐스럽게 생각하여 회피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헌금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다.


[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금은 바울의 암시나 요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라는 말은 '우리가 그렇게 바라서가 아니라'라고 번역해야 정확하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바울의 사역에 협력하고자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에서 비롯된다. 헌금은 하나님의 뜻이다. 전도와 구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필요한 물질을 바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다.


[6]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의 일을 통하여 고린도교회를 권면하고 있다. 고린도교회는 디도를 통하여 헌금을 시작하였다. '디도를 권하여'라는 말 다음에 '그가'라는 말을 첨가하면 뜻이 분명해진다. 이제 바울은 그 시작한 헌금을 마치게 하라고 디도에게 권면하였다. 헌금하기로 결심하고 소원한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 헌금하기로 작정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이행하여야 한다. 약속하고 이행치 않는 것은 죄가 된다. 시작한 결심대로 성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7, 8]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고린도교회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바울 사도를 사랑함 등의 모든 일에 풍성하였다. 바울 사도는 이제 이 은혜 곧 헌금하는 일에 있어서도 풍성하기를 권한다. 헌금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한 열매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 일에 있어서도 풍성한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풍성한 헌금은 우리의 믿음의 풍성한 열매이다.


지금 바울은 풍성한 헌금에 대해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마게도냐 교인들의 간절함을 들어 권면하는 것이요 이로써 고린도교인들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형제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 우리의 형제 사랑의 진실성은 구제와 선행을 통하여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형제 사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십자가 희생의 사랑에 근거한다. 본래 부요하신 그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 하나님이신 그가 사람이 되심으로 많은 제한성을 체험하셨다. 그는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수치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가 자신을 낮추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하심은 우리에게 완전한 의(義)와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우리를 죄와 불행에서 영광스러운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과 가난한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풍성한 헌금을 실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12]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일년 전에 행하기를 시작하고 원하기도 했던 그 작정 헌금을 이제 실행하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헌금을 하되 있는 대로 하고 없는 것을 무리하게 만들어 할 것은 없다고 하였다. 빚을 내서 십일조를 하고 건축 헌금을 할 필요는 없다. 할 마음만 있다면 하나님은 있는 대로 받으시고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실 것이다.


[13-15]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헌금은 어떤 사람들을 어렵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평안케 하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어떤 사람들의 유여한 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부족을 보충하는 것이다. 얼마 후에는 반대로 지금 유여한 자가 어려운 자가 되고 지금 어려운 자가 유여한 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헌금은 서로의 부족을 보충함으로 교회 안의 성도들의 생활을 평균케 만드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성도가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도우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한 방법이다.


[16-19]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복음 사역에 있어서 동역자들이 같은 간절함 혹은 옛날 영어성경의 번역대로 '같은 간절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지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충성된 마음이기 때문이다. 바울에게는 그런 동일한 마음을 가진 디도가 있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일에 대해 같은 간절한 관심을 가진 일꾼들이 많이 필요하다.


바울은 디도 외에 또 한 형제를 보내었는데, 그는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바울 일행이 맡은 헌금의 일로 그들과 동행하는 자이었다. 바울은 그를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라고 소개하였다. 그는 복음 사역에 수종드는 자이었고 그 일에 있어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 받는 자이었다. 한 교회에서 칭찬 받는 자가 되는 것도 귀한데,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이니 얼마나 귀한 일인가! 칭찬을 듣는다는 말은 인격에 비교적 흠과 점이 없다는 말이니 이런 자가 하나님의 일에 적합하다.


[20, 21]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바울은 교회가 모은 거액의 헌금을 가지고 목적지에 전달하려 함에 있어서 매우 조심하였다. 그것은 아무도 그들을 비난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행하려 했을 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흠 없이, 정직하게 행하려 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헌금을 취급하는 모든 일꾼들에게 요구되는 정신이다. 교회의 헌금은 깨끗하고 정확하게 처리됨으로써 대적자들에게 비방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


[22, 23]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가 여러 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 번 시험하였거니와 이제 저가 너희를 크게 믿은 고로 더욱 간절하니라.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디도와 동행한 세 번째 사람이 있었는데, 바울은 그의 간절함과 부지런함을 여러 번 시험하였고 확인하였다. '간절하다'는 원어는 영어성경에는 '부지런하다'는 말로 번역되었다. 교회의 일꾼들은 이런 시험에 동과된 자이어야 좋다. 우리의 열심이 일시적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참된 믿음과 충성은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통과한 후에 증거된다.


바울에게는 친구 디도가 있었다. 그는 바울의 마음을 이해하며 고린도교회를 위하여 파송되어 필요한 일들을 처리할 일꾼이었다. 그는 참으로 바울의 동역자이었다. 복음 사역에는 동역자들이 필요하였다. 또 그 외의 형제들은 여러 교회의 사자들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이었다. 교회의 충성된 일꾼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결실이며 그들의 진실과 충성과 사랑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사한다.


[24]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저 사역자들을 사랑으로 영접하기를 바란다. 바울은 그 일꾼들에게 고린도교인들의 믿음과 사랑을 자랑한 바 있었다. 이제 그는 그들이 그의 자랑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참 교회는 진리와 사랑의 공동체이다. 진리의 말씀을 배우며 그 진리를 실천하되 사랑 안에서 실천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성도들은 사랑을 서로간에 나타내어야 하고 또 주께서 세우시고 파송하신 교회의 일꾼들에게도 나타내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본 장은 헌금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친다. 첫째로, 헌금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둘째로, 풍성한 헌금은 넘치는 기쁨에서 나온다. 셋째로, 힘에 지나도록 하는 헌금은 자원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넷째로, 헌금의 용도는 성도를 섬기는 일을 위해서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전도와 구제의 일을 위해서이다. 다섯째로, 헌금은 간절히 소원할 만한 일이다. 여섯째로,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할 때 가능하다. 전도와 구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일곱째로, 작정한 헌금은 실행되어야 한다. 여덟째로, 헌금은 풍성하게 해야 한다. 아홉째로, 헌금은 헌금자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열째로, 헌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사역에 근거한다. 부요하신 주께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즐거이 헌금하는 것이다. 열한째로, 헌금은 우리의 할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있는 대로 받으신다. 열두째로, 헌금은 성도들의 경제 생활을 평균하게 만든다. 열셋째로, 헌금은 깨끗하고 정확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열넷째로, 헌금은 교회에서 칭찬듣는 자들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




9장: 즐거움으로 하는 헌금


[1, 2]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헌금의 용도는 성도를 섬기는 일을 위해서이다. 그것은 전도자 후원과 구제를 가리킨다. 여기에 구제란 일반적인 자선 행위가 아니고,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성도를 위한 구제를 가리킨다. 아가야 지방에 있는 고린도교회가 1년 전부터 구제헌금을 준비하였다는 바울의 자랑이 마게도냐 교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선한 열심은 다른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 물론 감동치 않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감동을 받아 선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다른 이의 선한 행위를 본받을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3-5]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앞 장에서 언급한 대로 바울이 디도와 다른 두 형제를 고린도에 먼저 보낸 것은 그들이 1년 전에 작정한 헌금을 준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바울이 마게도냐인들과 함께 고린도에 갈 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헌금의 한 원리가 나타나 있다. 그것은, 헌금은 미리 준비하여야 된다는 원리이다. '억지'라는 말은 영어성경에는 '탐심에서 나온 것' 혹은 '탐심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번역되었다. 사람이 헌금할 때 탐심의 영향을 받으면 아까운 마음이 들고 억지로 하는 헌금이 된다는 뜻이다. 헌금은 미리 준비해야 하고 억지로 해서는 안된다.


[6, 7]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바울은 헌금을 심는 일에 비유하였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는 자연 이치와 같이, 헌금도 그러하다. 하나님 앞에 헌금을 많이 낼수록 복되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헌금을 최선을 다해 준비할 것이고, 억지로, 아까운 마음으로 내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헌금 정신이 제시된다. 그것은, 헌금은 하나님이 마음에 주신 선한 결심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는 헌금은 참 헌금이 되지 못하고 복된 헌금이 되지도 못한다. 하나님은 그런 헌금을 받으실 정도로 구차한 분이 아니시다. 그는 우리의 최선의 것, 우리의 최고의 것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즐겨내는 자가 되려면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인정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 나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데 어찌 인색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할 때 인색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나의 소유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세상에 나의 것이란 없다. 이 세상의 참된 소유자는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뿐이시다.


역대상 29장에 보면,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자신과 온 백성이 바친 헌금과 헌물에 대하여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 . .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 . .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대상 29:11, 14, 16).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신 것을 깨닫는다면 나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 내가 거듭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물질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그것으로 내가 나의 죄를 씻을 수 있었는가? 그것으로 내가 영생을 살 수 있었는가? 그것으로 내가 천국 들어갈 자격을 얻을 수 있었는가? 나의 물질은 나의 지상 생활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것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도록 내게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어찌 인색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기쁨과 즐거움으로 드려야 할 일이 아닌가?


[8, 9]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충만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충만한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주셔서 우리로 선한 일에 충만한 자가 되게 하신다. 또한 선행과 구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행하는 일이므로 의이다. 선행과 구제에 힘쓰는 자는 의로운 자이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는 자는 다른 이들에게 많은 선을 행하고 가난한 형제들을 너그러이 돌아보는 자가 된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가 맺어야 할 열매이다.


[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옛날 영어성경은 "심는 자에게 씨를 주시는 이가 먹을 양식을 주실 뿐 아니라 너희 심을 것을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라고 번역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물질은 두 가지 용도가 있다. 하나는 먹을 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심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먹을 양식을 풍성히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물질적으로 부요하신 분이시다. 그는 또한 우리에게 심을 것도 풍성하게 주신다. 그것은 전도와 구제를 위한 헌금을 가리킨다.


[11, 12]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범사에 풍성함을 주셔서 우리로 헌금도 풍성하게 할 수 있게 하시며, 그 헌금을 통해 하나님께 풍성한 감사가 돌려지게 하신다. 특정한 대상을 위해 바쳐지는 후한 구제 헌금은 가난한 성도의 부족을 보충할 뿐만 아니라, 구제받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드리게 만든다. 이것은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된다.


[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헌금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는, 헌금이 헌금하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선한 행위는 진실한 믿음의 증거이다. 입으로는 순종을 말해도 마음으로 순종치 않는 자는 참으로 의와 선을 행할 수 없다. 현재의 세상이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알고 그의 소망을 내세(來世)에 두는 자가 아니고서는 물질 사랑과 탐심을 참으로 버릴 수 없다. 세상과 물질과 돈을 정말 버린 자만이 전도와 구제를 위해 후한 헌금을 즐거이 드릴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된 헌금은 참된 믿음의 표이다.


[14, 15]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이며 증거이다. 우리는 헌금을 통해 헌금한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본다. 즐거움으로 하는 후한 헌금은 그것을 보는 이, 그 일을 듣는 이로 하여금 '오 주여 나에게도 그런 은혜, 그런 믿음, 그런 사랑을 주소서!'라는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실로 하나님의 은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땅 위에 곳곳에서 나타났고 지금도 나타난다. 우리도 그의 풍성한 은혜를 사모한다.



결론적으로, 본 장은 8장에 이어 헌금에 대해 몇 가지를 더 교훈한다. 첫째로, 헌금은 미리 준비해야 헌금답다. 둘째로, 헌금은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내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내야 한다. 셋째로, 헌금은 우리에게 의가 된다. 넷째로, 하나님의 주신 물질은 두 가지 용도를 위한 것인데, 하나는 먹을 양식이며 다른 하나는 심을 씨이다. 궁핍하다고 심을 씨를 먹지 않듯이, 심을 씨는 먹지 말고 심어야 한다. 다섯째로, 헌금은 헌금자의 진실한 믿음과 순종의 증거이다. 여섯째로,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다.




10장: 우리의 싸우는 병기


10장부터 12장까지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자기 변증의 내용이다.


[1, 2]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대면할 때 겸손하였다고 말한다. 겸손은 사람을 대면할 때 나타난다. 위선적 겸손도 없지 않겠지만, 사람을 오래 대해보면 그가 교만한지 겸손하지 알 수 있다. 바울은 지금 떠나 있을 때도 그리스도의 온유와 친절을 가지고 권면하기를 원한다. '관용'이라는 원어는 '친절'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겸손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들은 바울을 육체대로 행하는 자라고 비난하였다. '육체대로 행한다'는 말은 인간적, 육신적 생각이나 세상적 욕심이나 명예심을 가지고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육체대로 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그렇게 비난하였다. 하나님의 종들은 세상에서 잘못된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항상 하면서 살아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는 겸손과 온유로 대하려 했으나 자신을 그릇되이 비난하는 이런 자들을 향해서는 담대한 마음으로 대하려 하였다.


[3, 4]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우리는 다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는 육신적 생각이나 세상적 욕심과 명예심이 없지 않지만, 주의 참된 종들은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다. 즉 육신의 생각과 세상적 욕심에 이끌려 행하지 않는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새 원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


복음 사역은 일종의 전쟁이다. 그것은 죄악과의 전쟁, 사탄과의 전쟁, 그리고 악한 자들과의 전쟁이다. 그때 주의 종들의 무기는 육신적 힘, 육신적 지혜와 생각, 육신적 수단과 방법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원어(토 데오)는 옛날 영어성경처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아보인다. '견고한 진'은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가리킨다. 구원받기 전의 인간의 무지하고 불경건한 마음과 생각은 심히 완고하다. 그것은 견고한 진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깨뜨리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복음 전파 곧 전도는 하나님의 영혼 구원의 방법이다. 전도는 전도자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그 능력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할 때마다 '오 주여, 영혼을 구원하소서! 견고한 진을 파하소서!'라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5, 6]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적 생각들과 변론들을 다 파한다. '모든 이론'이라는 원어(로기스모이)는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생각들, 사상들, 추론들, 변론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세상에 잡다한 인간의 생각들, 사상들, 철학들, 종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그 모든 것을 다 파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지식의 근본이며(잠 1:7; 9:10),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복 곧 영생이다(요 17:3).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고 참된 하나님 지식을 대항하여 높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이것들을 다 깨뜨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복음을 통해 인간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킨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보자시요 죄인들의 구주이시다. 그는 세상의 모든 불행에 대한 해답이시다. 모든 사람은 복음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복종해야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이 구원이 된다. 그는 우리의 주님이시므로 우리는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복종이 온전히 된다는 말은 부족한 복종이 있고 온전한 복종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영적 성장 혹은 성화의 과정을 나타낸다. 그것은 복종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것은 불순종하던 옛 사람의 요소들이 점점 죽고 순종하는 새 사람의 요소들이 점점 살아나는 과정이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할 때,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은 징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을 외모로 평가하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종들과 자녀들을 외모로 보는 것은 큰 잘못이다. 사람을 외모를 본다는 말은 사람의 미모, 건강, 학력, 재력, 사회적 신분, 말주변 등을 본다는 뜻이다. 우리는 성도의 외모를 보지 말고 그 내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즉 그의 믿음의 정도, 영적 지식의 정도, 그의 깨달음과 분별력의 정도, 그의 신앙 인품 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성도의 참된 가치는 그의 외적 조건들에 있지 않고 그의 내적, 영적, 신앙적 상태에 있다. 성도의 거룩하고 선한 내면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다.


[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영적 권위와 권세를 주셨다. 그것은 교인들을 허물기 위한 것이 아니고 세우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복음의 일꾼들에게도 영적 권위가 어느 정도 주어져 있다. 그것은 영혼을 죄에서 건져내고 구원받은 자들을 영적으로 돌보며 양육하는 권세이다. 전도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요 목회는 구원받은 자들을 돌보며 양육하는 일이다.


[9-11]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같이 생각지 않게 함이니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 줄 알라.


바울은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바울에 대하여 그의 편지는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울을 약하게 보고 그 말이 시원치 않다고 보는 것은 그의 외모만 본 것이다. 그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가 담겨 있었고 하나님의 풍성한 진리가 들어 있었다.


[12-14]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스스로 비교하고 평가하며 칭찬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고 그런 자들과 감히 비교될 수도 없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자랑하는 것은 분량 밖의 자랑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이방 세계에 전하다가 고린도에까지 갔던 것이므로 바울의 자랑은 하나님이 주신 그 한계의 분량에 맞는다. 다른 이는 몰라도 그 교회의 개척자인 바울은 그 교회로 인하여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15-17]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바울은 복음의 계속적 확장을 위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진다'는 말은 영어성경처럼 '너희에 의해 풍성히 넓어진다'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넓어진다는 것은 그의 마음과 자랑과 전도 영역이 넓어진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주의 은혜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랑은 주님밖에 없고, 주의 은혜와 주의 능력밖에 없었다.


[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가 참으로 주 앞에서 인정받는 일꾼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칭찬하는 자가 되지 말고 주께 칭찬 듣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주께서 칭찬하실 자는 믿음과 인품을 구비한 자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지식, 곧 바른 성경 지식과 믿음, 그리고 흠과 점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인품을 갖춘 자는 주께 칭찬을 들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 장은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준다. 첫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잘못된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일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해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다른 성도를 외모로 보지 말고 그 내면 상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로, 우리는 주께 칭찬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11장: 고난의 수고


1-15절, 거짓 사도들


[1, 2]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이란 그의 자랑함을 가리킨다. 앞장에서 바울은 주께서 주신 사도직과 그 직분을 가지고 고린도에 가서 한 그의 사역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증거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이루신 일이었고 결코 분량 밖의 자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울의 사도직을 비난하고 그의 사도적 권위를 부정하는 자들 때문에 부득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한 자랑이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일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열심을 가지고 자기 뜻을 이루는 분이시다. 주의 종들은 하나님의 열심을 본받아야 한다. 바울은 그의 일을 중매하는 일로 표현하였다.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신부는 성도들이다. 그 결혼이 복된 결혼이 되기 위해 신부된 성도들은 정결해야 한다. 그들은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만 드려지는 순결한 신부이어야 한다.


[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성도에게 가장 큰 문제는 신앙의 변질, 신앙심의 부패이다. 사탄은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오늘날도 성도들을 미혹케 하려 한다. 주를 향한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불신앙에 떨어지며 주께 대한 바른 지식을 버리고 잘못된 지식을 가지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을 지켜야 한다. '진실함'이라는 원어는 '단순함'이라고도 번역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믿음을 잃지 않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단순하게, 어린 아이같이, 순전하게 믿는 믿음을 원하신다.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다른 예수'는 성경에 증거된 예수가 아닌 예수이다. 성경의 예수님은 처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나시고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만에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 외의 예수는 다른 예수이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예수는 다른 예수이다.


'다른 영'은 하나님의 영, 성령, 곧 진리의 영이 아닌 영이다. 그 영은 악령밖에 없다. 그것은 귀신이다. 그것은 거짓된 영이며 불결한 영이며 혼돈의 영이다. 그 영에게서 다른 정신, 다른 사상, 다른 마음이 나온다. 우리는 아무 영, 아무 정신, 아무 생각이나 받지 않아야 한다. 성도들은 영을 분별해야 한다(요일 4:1).


'다른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선포하시고 해설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복음 외의 복음을 가리킨다. 다른 복음은 실상 복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는 다른 복음이다. 또 예수님뿐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마리아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천주교회의 교훈은 다른 복음이다. 또 이웃 봉사의 도덕적 삶만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자유주의는 다른 복음이다. 또 기적 체험만을 강조하는 신비주의는 다른 복음이다.


우리는 옛 복음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적 신앙을 보수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진리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그 옛 신앙을 가지고 그 옛 신앙을 지키고 그 옛 신앙을 전해야 한다.


[5, 6]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지극히 큰 사도들'은 거짓 사도들을 가리킨 듯하다. 그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바울은 그들보다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는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았다. 말이 중요한가, 지식이 중요한가? 당연히 지식이 중요하다. 물론 말도 잘하면 좋겠지만, 말은 아첨이나 위선이나 이중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바른 지식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전할 수 있고 성도들에게 바른 길을 지시할 수 있다.


[7, 8]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料)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을 위해 한 것은 그들을 존중하여 자신을 낮춘 것이요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아무 대가 없이 전한 것이요, 그들을 섬기기 위해 다른 여러 교회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교회들에게서 후원금을 받은 것을 탈취한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물론 그것은 탈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서는 아무 대가를 받지 않았고 다른 교회들의 도움을 받아 그 교회를 세우고 돌아본 것이니 균형 없는 일처럼 보여 그것을 탈취라고 표현한 것이다. 바울의 이런 태도가 죄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선이요 사랑이었다.


[9]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바울은 고린도에 머문 동안 물질적으로 유여했던 것이 아니고 부족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았다. 그것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 즉 아마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그의 부족을 보충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일에 고린도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조심하였다. 그는 앞으로도 그렇게 조심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울 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이신 좋은 정신이었다. 이기적인 세상은 이와 반대이다. 어떤 이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남에게 유익을 주고 도움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며 그것이 그리스도와 바울을 본받는 것이다.


[10-12]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로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품고 고린도교인들을 사랑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한 것은 결코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은 "바울도 별 수 없다. 결국 그도 속으로는 물질을 구하는 자일 뿐이다"는 비난을 하려 했다. 이 악한 자들은 바울을 비난할 기회, 그의 발에 올무를 놓을 기회, 그를 범죄케 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기회를 끊어버렸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순수한 믿음과 사랑의 동기로 봉사함으로써 그렇게 하였다.


[13-15]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초대 교회때부터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이런 거짓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칭 그리스도의 사도이지만 사실상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들이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저런 거짓 사도들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탄이 자신을 빛의 천사로 위장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사탄의 종들이 의의 일꾼으로 위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저 악한 종들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될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 마귀의 종은 마귀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종인가 마귀의 종인가를 거룩과 진실과 의와 사랑의 행위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아서 판단할 수 있다.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그 종들을 영원한 지옥에 던져넣으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우리가 신앙의 부패와 변질에 대해 조심할 것을 교훈한다. 사탄은 오늘날에도 거짓 목사들을 통하여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함으로 우리의 신앙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종들과 백성들은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지 말고,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하고 단순한 믿음에 거해야 한다. 기독교회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지켜야 하고 또 그 신앙만을 전수해야 한다.



16-33절, 고난과 수고를 증거함


[16-18]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바울은 육신적으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자기도 육신적으로 대하려고 한다. '육체를 따라 말한다'는 것은 육신적 생각으로, 인간적, 세상적 생각으로 말한다는 뜻이다. 잠언에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는 말씀이 있다(잠 26:5).


[19, 20]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린도교인들은 어리석은 자들 즉 저 거짓 사도들을 기쁘게 용납하였다. 거짓 사도들은 교인들을 종으로 삼아 자기 왕국을 건립하는 자들이었고, 교인들을 잡아먹듯이 그들의 재산과 돈을 삼키는 자들이었고, 교인들을 사로잡아 속이고 이용해먹고, 또 자신을 높이고 교만하며, 심지어 교인들을 욱박지르고 구타하며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이었다. 그래도 고린도교인들은 그들을 지도자라고 맹종하였던 것이다.


[21-23]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이 히브리인이며 이스라엘인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응수하여 자신도 히브리인이며 자신도 이스라엘인이며 자신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자처했다. 바울은 거기에 응수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어떤 수고와 고생을 하였는지에 대하여 증거한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참된 일꾼이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는 수고를 넘치게 하였다. 그는 옥에도 여러 번 갇히었다. 그는 매도 수없이 맞았다. 그는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


[24, 25]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구약 율법에는,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까 하노라"고 기록되어 있다(신 25:3).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때린 것 같다. 바울은 그런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 '태장으로 때린다'는 원어는 '몽둥이로 때린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몽둥이로 매를 많이 맞고 옥에 갇히었었다(행 16:23). 그가 그렇게 몽둥이로 매를 맞은 것이 세 번이었다. 또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끌어내친 적이 있었다(행 14:19). 또 바울은 전도 여행중 세 번이나 배가 파선하는 일이 있었고 한 번은 일주야 곧 하루를 꼬빡 깊음에서 지냈다.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바울은 전도자로서 여러 번 전도여행을 다녔다. 그는 적어도 크게 세 차례 전도 여행을 하였다(사도행전). 네번째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서 거기서도 전도하였다. 그에게는 안정된 생활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많은 여행은 여러 가지 위험이 뒤따랐다. 강을 건너는 데 위험이 있었다. 낯선 곳들에서는 강도의 위험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미워했고 죽이려 했다. 이방인들은 바울의 복음이 우상숭배를 정죄함으로 그를 핍박했다. 도시 안에서는 사람들의 핍박과 죽음의 위험이 있었고, 광야에서는 뙤약볕과 짐승과 강도의 위험이 있었다. 바다에서는 풍랑으로 인한 죽음의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거짓 형제들이 있어서 바울을 비난하고 해치는 위험이 있었다.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수고하며 애쓰며 피곤할 정도로 고생하였다. 또 그는 여러 번 자지 못하였다. 그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었던 때도 있었다. 그는 여러 번 먹지 못하고 굶었다. 또 그는 따뜻한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여 추위에 떨기도 하였다.


바울의 이러한 고난과 수고는 본 서신 앞부분에서나 고린도전서에서도 약간 언급된 바가 있다. 본 서신 6장에서 그는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에 대해 언급하였다(고후 6:4, 5).


또 고린도전서에서 그는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 . .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 말했다(고전 4:9-13).


[28, 29]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거기에 더하여, 바울의 심령에는 교회를 위한 염려가 항상 있었다. 그것은 세상 염려나 의식주의 염려와 다른 염려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 염려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의식주의 염려, 직장 염려, 결혼 염려, 사업 염려, 건강 염려 등은 다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주의 종들에게는 교인들의 영적 성장에 대한 염려가 있다. 믿음이 약한 자나 연약 가운데 넘어지는 자를 볼 때 그들의 마음은 약하여지고 애타게 된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대신 심판대 앞에 설 것처럼 교인들을 염려하며 가르친다(히 13:17).


[30, 31]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나의 약한 것[들]'은 그가 이제까지 간증한 여러 가지 고난의 일들을 가리킨다. 이런 고난들은 인간적으론 두려움이요 수치일지 모르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들을 잘 견디었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잘 수행해왔다. 그의 이 간증과 고백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 곧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그 분께서 증거하실 것이다.


[32, 33]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바울은 고난의 증거의 긴 목록에 자신이 다메섹에서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도피한 사실을 첨가하고 있다. 이것은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된 내용이다. 거기에 보면,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행 9:23-25).


결론적으로, 바울의 수고와 고난은 그가 참된 사도임을 증거한다. 거짓 사도들은 그의 사도직을 비난하였다. 만일 그의 사도직이 부정된다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한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룬 복음 사역에 큰 손상이 있었을 것이다. 또 그로 인해 마귀는 더욱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혔을 것이다. 그러나 주를 위해 자신을 참으로 바치며 고난과 수고로 충성한 자는 거짓 사도일 수 없다.


바울이 당한 많은 고난은 그가 하나님과 그의 복음을 사랑하며 죽어가는 영혼들을 사랑한다는 산 증거이었다. 우리는 그런 고난을 당함이 없이 사랑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고난을 통과할 때 진실하게 증거된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복음으로 구원할 영혼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많은 육신적 고난과 수고를 참고 견딜 수 있다.


참으로, 바울은 고난 중에 사랑을 실천했고 하나님 앞에 충성했다. 그것은 주를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의 모범이 된다. 우리도 고난의 현실 속에서 참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하자.




12장: 사도의 표


1-10절, 육체의 가시


[1, 2]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 체험을 증거한다. 십사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는 바로 바울 자신을 가리킨다. 이 간증을 서두에 '자랑'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을 암시한다. 바울은 그의 사도직의 변호를 위해 부득이 이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셋째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거주하는 가장 높은 하늘을 가리킨다. 첫째 하늘은 새들이 나는 창공을, 둘째 하늘은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하늘을 가리킬 것이다.


참된 선지자와 사도의 자격 요건의 하나는 주께서 자신의 뜻과 영광을 그에게 계시하심에 있다. 자기 마음의 생각이나 거짓된 것을 하나님의 뜻인양 말하는 자는 거짓된 종이다. 여기에 덧붙여 또 하나의 자격 요건을 말한다면, 사람을 죄에서 회개시켜 의롭게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거짓 교사들은 사람을 죄에서 돌이키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참된 종들은 그 일을 위해 애타하며 눈물을 흘린다.


[3, 4]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낙원은 셋째 하늘과 같으며 그곳을 우리는 천국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나사로가 죽은 후 들어간 '아브라함의 품'(눅 16:22)이나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약속하신 '낙원'(눅 23:43)은 다 이곳을 가리킨다. 또 히브리서 12장에서 말한 '하늘의 예루살렘'도 바로 이곳이다(히 12:22, 23).


바울은 거기서 인간으로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천국의 언어일 것이다. 그것이 히브리어이었는지 어떤지는 모르나 여하튼 천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언어일 것이다. 우리는 천국에서 인격적인 의사 소통의 언어를 가질 것이다. 천국은 대화가 있는 사랑의 세계이다.


[5, 6]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셋째 하늘에 올라간 환상과 계시의 사건이 자신의 경험이었지만, 바울은 그것을 자신의 경험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 몸 안에 있었든지 혹은 자기 몸 밖에 있었던 한 사람의 경험이라고 말했다(2, 3절). 그러나 이것이 그 자신의 간증임은 문맥에서 분명하다. 바울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이것이 자기의 사도직의 변증을 위해 부득이 하는 자랑이었기 때문이다. 이 간증은 거짓이거나 과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참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를 보거나 그의 간증을 듣는 자가 무엇을 지나치게 생각지 않도록 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여러 놀랍고 중대한 계시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여기에 사도들의 권위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들의 도구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졌고 그들이 기록한 책들은 그 권위로 인쳐졌다. 여기에 신약 성경의 신적 권위성이 있다.


사도들 이후의 교회의 목사들은 사도들과 분명히 달랐다. 그들은 구약과 신약성경을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바르게 해석해야 하는 교사들에 불과하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최종적 규범은 오직 성경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경의]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신앙과 생활의 규칙이다"(1:2)라고 고백했고 또 "그에 의해 모든 종교상의 논쟁들이 확정되어야 하며 그에 의해 모든 회의들의 결정들, 고대의 저술가들의 견해들, 사람들의 교리들, 개인의 정신들이 검토되어야 하며 그의 선고를 우리가 신뢰해야 하는 최고의 심판자는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뿐이시다"(1:10)라고 했다.


사도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들이 너무 크고 중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너무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의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 교만은 가장 근본적인 죄이다. 신앙 지식에 있어서의 교만도 교만이다. 교만은 마귀가 마귀가 된 죄이었다(딤전 3:6). 바울이라도 교만에 떨어질 수 있다면, 모든 전도자들과 성도들은 교만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 속에 있는 교만의 경향성을 꺾고 하나님의 은혜로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육체에 가시를 주심으로써 그를 교만치 못하게 하셨다. '육체의 가시'란 육체의 어떤 질병이든지 육체의 연약성의 어떤 끊임없는 충동일 것이다. 여하튼 그는 그것을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하였다. 구약성경 욥기에 보면,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하에 욥을 쳐서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게 하였다(욥 2:7). 그러나 성도에게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우리는 육신의 질병의 치료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 질병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완전하게 제거하실 수 있다. 사실, 인간의 의술은 제한적이다. 야고보서 5장에는 병자들이 병낫기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14-18).


성도가 병들었을 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약과 의술에 의지하는 것은 분명히 불신앙이다. 유대왕 아사는 말년에 그 발에 병이 들어 심히 중하였으나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사들에게 구하였다(대하 16:12). 이것은 분명히 잘못이었다. 우리는 병들었을 때 우선 하나님께 회개하며 그의 긍휼과 치료를 간구해야 하며 그 후에 의사의 치료도 감사히 받을 것이다.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세 번의 간구를 다 거절하셨다. 하나님의 거절도 일종의 기도의 응답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종종 다르다. 우리의 최선의 소원이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최선이 아닐 수 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보다 낫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과 그의 처분에 우리 자신을 의탁해야 한다. 그는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이끄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거절하시며 주신 말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이었다. 바울은 하나님께 더 많은 은혜, 곧 육체의 가시를 제거하시는 은혜를 간구하였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답변은 그의 은혜와 긍휼이 이미 그에게 풍족하게 주어졌다는 것이었다.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였기 때문에가 아니라 더 사랑하였기 때문에 주셨던 것이다.


사람은 부족하고 그의 마음은 연약하다. 조금만 편안해도 해이해지고, 조금만 형통해도 교만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와 훈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징계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의 우리 정도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와 훈련 속에서 완전을 향해 더 잘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연약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그를 통하여 충만한 능력으로 역사하셨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의 연약함 속에서 충만히 나타났다. 우리가 스스로 강하다고 느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하다고 느낄 때 그는 우리를 통해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우리가 교만치 않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의 지혜는 참으로 놀랍다.


우리는 사사 기드온을 기억한다. 기드온을 좇은 백성이 많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사람을 그에게 붙이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만하여 자기들의 힘으로 승리한 줄로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무리 중에서 3만 2천명을 돌려보내게 하시고 겨우 삼백명을 남겨두셨다. 그는 기드온에게 그 삼백명을 주어 미디안 군대를 이기게 하셨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것이다.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이 깨달은 사실은, 그가 약할 때 하나님의 일도 약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사역에 충만히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그가 약할 때가 곧 그가 강할 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약함들 곧 많은 고난과 수고와 육체의 가시까지 간증하고 자랑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늘날도 우리의 심신은 연약하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들어 그의 일을 힘있게 이루신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바울의 사도직은 고난과 수고뿐 아니라 또한 주의 환상과 계시를 통하여 증거되었다. 이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오늘날 주의 일꾼들은 신구약 성경의 충실한 해석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귀한 일꾼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도 주셨다. 육체의 가시가 없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다. 오히려 육체의 가시는 바울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이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목적은 그로 하여금 교만치 않고 겸손케 하기 위해서이었다. 성도에게 있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를 미워하시는 표가 아니고 그를 정금같이 단련시키시는 그의 사랑의 표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능력은 바울이 연약할 때 온전히 나타났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고난과 수고와 연약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종들을 연약한 중에서 능력으로 사용하셔서 영광을 받으신다.



11-21절, 바울의 관심


[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간 일을 언급한 것이 어리석은 자랑임을 고백한다. 그것은 고린도교회에서 그의 사도직이 의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부득이 한 자랑이었다. 그러나, 비록 그 자신이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나, 그는 그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즉시 인정하고 고백한다. 주의 참된 종들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친히 죄인을 구원하시고 양육하신다는 사실을 항상 인정해야 한다.


[12]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사도의 또 하나의 표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다. 구약의 참 선지자의 표는 첫째로 성경에 합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거나 교훈을 하는 것이고, 둘째로 그의 예언한 바가 성취되는 것이고, 셋째로 기적을 행하는 것이었다. 신약의 사도의 표도 그와 비슷하다. 특히 기적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경우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증거이었고 사도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주의 참된 종들이라는 증거이었다.


[13, 14]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물질적 폐를 끼치지 않았다. 그가 그것을 '공평치 못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불공평이 아니고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불공평이었다. 폐를 끼칠 수 있는 자가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은 사랑이지 인격적 결함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사랑과 본받아야 할 봉사의 원리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는 자가 되지 말고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재물을 구하는 자가 아니고 그들의 영혼들, 그들 자신들, 그 심령들을 구하는 자이었다. 천하보다 귀하고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 귀한 것은 인간의 영혼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셨다(마 16:26). 바울은 자신을 부모에 비유한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해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해 하듯이, 그는 성도들의 재물을 기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자기의 재물을 사용하였다.


[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위해 자기의 재물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다 소비할 것이라고 말한다. 고린도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은 실로 컸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서 그의 사랑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 이것이 주님이 가신 길이요 주의 참된 종들이 간 길이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인간적, 세상적, 물질적 대가를 기대하지 말고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하고 영광스럽고 존귀한 대가만을 바라며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으시기 위함이 아니었고 도리어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이었다.


[16, 17]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깨끗하게 사역했지만, 비난하는 자들은 그가 간교한 속임수로 교인들을 취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비난은 바울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일을 허물어뜨리려는 악한 일이었다. 바울의 경우처럼, 아니 우리 주 예수님 자신의 경우처럼, 오늘날 주의 참된 종들에게는 그들의 선한 봉사의 걸음에 항상 악한 비난의 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참 일꾼과 거짓 일꾼의 차이는 분명하다. 거짓 일꾼은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고 물질적 이익만을 구한다. 다 썩어질 것이요 허무한 것임에도 그의 주관심은 이 세상의 것에 있다. 그러나 참 일꾼은 그렇지 않다. 그는 이 세상을 사랑치 않고 저 세상을 사랑하며,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구하지 않고 장차 하나님이 주실 영원한 존귀와 영광을 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세상의 것을 소비하며 자신까지 희생하여 주의 기쁘신 뜻과 일을 이루기를 힘쓸 수 있다.


[18, 19]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바울과 디도는 동일한 성령과 정신, 동일한 보조와 걸음을 가졌다. 그 정신과 그 걸음은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인 것이요,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교회와 교인들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요, 이 세상을 사랑치 않고 장차 올 세상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목사와 성도들의 정신이요 걸음이다. 오늘날도 우리 모두가 이런 정신과 보조로 행할 때 하나님의 일은 잘될 것이다.


이제까지 바울이 자신을 변명한 것은 단지 자기 변명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런 의미뿐이라면 그가 그렇게 변호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한 자가 아니었는가! 바울 사도의 변명은 실상 고린도교인들의 유익을 위함이었다. 바울의 참된 사도직의 변증은 고린도교회의 진행과 부흥에 꼭 필요했다. 바울이 하고자 하는 일은 복음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 그들을 굳게 세우는 것뿐이었다. 오늘날 주의 일꾼들의 관심과 목적도 영혼들의 구원과 성장뿐이어야 한다.


[20, 21]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의 주관심은 고린도교인들의 회개이었다. 그는 그들이 회개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을 보기를 원하며, 자신도 그들에게 책망의 얼굴로가 아니고 사랑과 기쁨의 얼굴로 대하게 되기를 원했다. 그는 그들이 회개하여 다툼이나 시기나 분냄이나 당짓는 것이나 중상함이나 수군수군함이나 거만함이나 어지러운 일들이 없기를 바라며, 특히 이전에 범죄했던 자들이 그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에서 회개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회개치 않는다면, 바울이 그곳에 갈 때 얼마나 근심에 빠지게 되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모든 것, 성경에 어긋나는 모든 것, 모든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를 다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본 장은 바울의 사도직과 사역에 대해 몇 가지를 추가적으로 증거한다. 첫째로, 바울의 사도의 표는 기적을 행한 것이었다. 둘째로, 바울은 교인들에게 물질적 폐를 끼치지 않았고 도리어 그들을 위해 자기의 재물과 자기 자신까지 허비하기를 원했다. 셋째로, 바울과 디도는 동일한 정신과 걸음으로 행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하지 않고 교회를 위하는 정신이며 현세의 것을 구하지 않고 천국만을 바라보는 정신이었다. 넷째로, 바울의 주관심은 교인들의 회개와 순종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목회의 주관심이어야 한다.




13장: 권면과 축도


[1]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바울이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정하리라'고 말한 것은 그의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이 참되고 확실함을 나타낸다. 율법에는,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신 19:15).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진실하게 말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또 그의 진실성은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증될 수 있어야 한다.


[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에 다시 가면 죄를 회개치 않는 자들에 대해 엄히 처벌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바울의 주관심은 죄 문제이었다. 하나님의 주관심이 바로 그러하다. 우리의 주관심도 그러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범죄자들의 문제이다. 범죄자들은 그 죄를 정직하게,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죄를 회개하고 죄씻음을 받은 자만 영생을 누릴 수 있다.


[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계셔서 바울 안에서 그리고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나, 고린도교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 증거를 요구하였다. 그들은 바울의 약한 모습만 보았고 바울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향해 결코 약하시지 않고 오히려 강하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늘날도 주께서는 주의 신실한 종들 안에서 말씀하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신다. 비록 주의 종들이 연약하게 보일지라도 그들 안에 계신 주님은 약하시지 않고 강하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종들의 연약만 보지 말고 그들을 세우시고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의 주님을 보아야 한다.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을 생각하면 참으로 약하게 보이지만 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주의 종들은 주 안에서 약하지만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며 일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종들과 성도들의 능력이시다.


[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자신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요청한다. 또 그들이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심을 알지 못하는가하고 묻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성도들 속에 계신다. 신인양성(新人兩性)을 가진 인격자로서 그는 지금 하늘에 하나님 오른편에 계시지만, 그의 신성의 영으로 지금 믿는 성도들 속에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을 받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게 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바울 사도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바울의 권면대로 회개하고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속에 계심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은 버리운 자들일 것이다.


[6, 7]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버리운 자가 아님을 확신하고, 고린도교인들도 그 사실을 알기를 바란다. 진실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신이 옳은 자임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고 고린도교인들로 하여금 죄에서 떠나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참된 믿음과 구원은 선한 삶으로 나타난다. 구원받은 신자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는 그들로 하여금 선한 삶을 살도록 이끄신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목적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딛 2:14).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마 7:17).


[8, 9]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바울은 자신을 진리를 거스려 행하지 않고 진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진리만 위하고 진리대로만 행하고 사람 앞에서 진실만을 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귀의 세계는 거짓의 세계이지만, 하나님의 세계는 진실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는 진리만를 위하고 진리대로만 행하고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바울은 진리 안에서 자신의 진심을 말하기를, 자기가 비록 약할지라도 고린도교인들이 믿음에 굳게 서서 강건하게 행한다면 그것으로 기뻐하며, 또 그들이 온전하게 되기를 기도한다고 한다. 사람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후에도 육신의 죄악성이 남아 있어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완전한 의를 실제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한다. 이것이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성화의 목표는 도덕적 완전이다. 우리는 온전케 되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기도하고 애써야 한다.


[10] 이를 인하여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해 일하는 일꾼이다. 고린도교회를 떠나 있을 때에도 그들의 온전함을 위해 편지를 썼다. 만일 그들이 죄를 회개치 않는다면 그는 사도의 권세로 그들을 징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모든 부족을 회개하고 고침으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다.


[11, 12]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마지막으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다섯 마디의 짧은 말로 권면한다. 첫째로, '기뻐하라'고 말한다. 고린도교인들이 죄를 범했을 때 바울은 많은 눈물로 편지했고 그들도 근심해야 했지만, 그들이 죄를 회개했다면 이제는 너무 근심에 빠져 있지 말고 기뻐해야 한다. 기쁨의 생활은 성도들의 정상적 생활이다.


둘째로, '온전케 되라'고 권면한다. 고린도교인들은 각자 자신의 부족을 고치고 온전해져야 하며 또 교회 전체가 온전해져야 한다. 우리는 개인의 성화(聖化)와 교회 전체의 온전함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받고 또 서로를 위해 권면하고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위로를 받으라'고 권면한다. 그는 책망의 편지로 인해 근심하며 회개했던 교인들을 위로한다. 범죄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지만,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선언된다.


넷째로, '마음을 같이하라'고 권면한다. 고린도교회에는 분열과 파당이 있었고 거짓 교사들을 인해 사도 바울을 향해서도 간격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모든 교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과 순종으로 일치하고 단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평안하라'고 권면한다. 평안은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에서 온다. 그것은 큰 복이다. 또 성도의 평안은 성도 상호간의 화목으로 나아간다. 지상에서의 성도의 거룩한 교제는 참으로 아름답고 복되다.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린도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복된 기원이다. 이것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을 향한 복된 기원이다. 오늘날 목사들은 종종 이 기원의 말씀으로 예배의 순서를 마친다. '있을지어다'라는 말은 '있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어떤 서신들에서는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번역되기도 하였고, 원어성경에서는 기원문(희구법) 형식으로 나타나는 구절도 있다(벧전 1:2; 벧후 1:2; 유 2).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신 은혜이다. 그 보혈의 샘은 우리의 과거의 추하고 더러운 죄들을 씻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리고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의 부족과 실수와 연약을 씻어 정결케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희생하신 사랑이다. 그 사랑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무제한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반적 호의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질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특별한 사랑은 택자들에게만 제한된다.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의 자리로 이끄셨다. 또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의 완성 곧 영화의 단계에까지 이끌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은 너무 크고 놀라워 아무도 그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 없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성령께서 죄인들 속에 들어와 중생(重生)의 역사를 하셔서 회개와 참 믿음을 주신 후 그들 속에 항상 계셔서 그들을 감동하시고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셔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구원받은 심령들 속에 영원히 거하시는 목적은 바로 구원을 위해서이다. 그는 구원을 실제적으로 시작하시고 완성하신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러한 구원 사역은 성도들에게 참으로 큰 은혜와 특권이다. 우리는 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주님을 섬기며 따르고 있다. 이 은혜와 복이 하나님의 모든 진실한 성도들에게 영원히 넘치기를 바란다.




 

출처 : 우림과 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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