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누가복음 강해-2
누가복음 강해-2
내용 목차
13장: 회개치 않으면 망함
14장: 자신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
15장: 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심
16장: 돈을 사랑치 말 것
17장: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
18장: 낙망치 말고 기도할 것
19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20장: 변론하심
21장: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 징조
22장: 잡히심
23장: 죽으심
24장: 부활하심
13장: 회개치 않으면 망함
1-9절, 회개치 않으면 망함
[1]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이 갈릴리 사람들은 아마 예루살렘에 올라와 제사하던 중에 로마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즉결 처형되므로 그들의 피가 그들의 제물에 섞였던 것 같다. 그들은 어떤 큰 죄를 범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2,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하나님께서 큰 죄인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벌하시는 경우들도 있으나, 오히려 참으시고 내버려 두시는 경우들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당한 재난을 보고 성급히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일이다.
여하튼, 다른 사람이 당한 재난은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여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우리 자신이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교훈의 중심이다. 구원은 결코 회개 없이 받는 구원이 아니다. 회개는 믿음의 표시이다. 구원은 반드시 회개를 동반한 믿음을 통하여 받는다. 회개는 구원에 절대필수적이다. 죄를 회개치 않고서는 아무도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회개는 모든 죄인들에게 매우 필수적이어서 아무도 그것 없이는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15:3).
[4, 5]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시온산 기슭에는 실로에 혹은 실로아라는 이름의 작은 샘이 있다. 거기에 있던 망대가 무너지므로 열여덟 사람이 치어죽었다. 그들은 아마 샘물에 몸을 씻으려고 왔다가 그런 일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일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날의 자동차 사고, 열차 사고, 비행기 사고, 화재, 붕괴 사고 등으로 죽는 것도 그렇다.
우리는 이런 일들로 죽은 자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러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직 그런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를 교훈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필립 헨리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회개에 대해 많이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만일 내가 강단에서 죽는다면 회개를 설교하다가 죽기를 원하며, 만일 내가 강단 밖에서 죽는다면 그것을 실천하다가 죽기를 원한다"라고 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 회개치 않는 자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6-9절, 열매를 못맺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이 비유는 앞에서 하신 회개에 대한 말씀과 연결된다. 무화과나무를 심은 그 사람은 그 열매를 구하였다. 그것은 회개의 열매를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님 전에 일했던 세례 요한도 강조했던 내용이었다.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요한은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말하기를,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 . .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라고 했다(눅 3:7-9).
회개의 열매는 죄악된 삶을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세상은 하나님보다 돈과 쾌락을 더 사랑하고 또 매우 음란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경건한 모습이나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중심의 변화와 그 변화된 중심에서 나오는 변화된 행동과 삶이다. 좋은 열매는 곧 선한 행동과 삶을 가리키는 것이다.
[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과원지기는 말씀의 사역자를 가리킬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도들과 오늘날 목사들이 그런 자들이다. 3년은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기간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위해 정해두신 기간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간 동안 그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3년은 짧지 않은 기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열매를 맺지 않을 때 땅만 버리도록 계속 그를 그냥 버려두지는 않으실 것이다. 열매를 못맺는 무화과나무가 땅만 버리듯이, 회개치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만 미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를 심판하실 것이다.
[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과원지기는 1년의 기간을 더 허락해주시면 그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특별하게 관리해보겠다고 요청하였다. 그 특별한 관리란 그를 향한 더욱 강력한 말씀의 교훈과 책망과 훈련을 가리킨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환경적 시련도 포함될지 모른다.
[9]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연장된 1년 후에 최종적으로 두 가지 결과가 남을 것이다. 회개의 열매를 맺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받고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6:9, 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음란은 부부 관계를 벗어난 모든 행위를 가리키며 오늘날 젊은이들의 결혼전 문란을 포함한다. 우상숭배에는 조상숭배의 제사나 차례도 포함된다. 그것들은 그 기원이 종교적이며 만일 그런 종교적 의미가 없다 할지라도 그것을 행하는 것은 미신적인 악이다. '탐색하는 자'라는 원어(말라코스)는 '남창'(男娼)을 가리킨다. '남색하는 자'라는 원어(아르세노코이테스)는 '동성애자'를 가리킨다. 남창이나 동성애자는 회개치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결론적으로, 1절부터 9절까지의 내용은 몇 가지의 진리를 계시한다. 첫째로, 회개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다 멸망하고 만다. 사람은 누구나 다 회개해야 구원을 받는다.
둘째로, 회개는 열매로 나타난다. 그것은 행동과 삶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믿는 모습이나 말이 아니고, 진정한 마음의 변화와 그것에서 나오는 변화된 행동과 삶이다. 즉, 불경건에서 경건으로, 우상숭배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더러움에서 거룩으로, 음란에서 단정과 절제로, 불의에서 의로, 악에서 선으로, 거짓에서 진실로 변화된 삶을 말한다.
셋째로,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기간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기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이 끝나면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천국에서 제외되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10-17절, 18년 동안 꼬부라진 병자를 고쳐주심
[10]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예수님은 아직 구약적 안식일을 지키셨다. 장차 구약의 토요일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폐지되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 신약의 주일로 바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예수님 자신도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셨다. 또 예수님은 회당 집회에 참석하셨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에 생긴 구약 교회의 예배당이었다. 예수께서나 사도들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때는 아직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가 구별되기 전이었으며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가 명확히 나뉘기 전이었다.
[11] 십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귀신들려 앓으며'라고 번역한 원어는 직역하면 '질병의 영(혹은 귀신)을 가지고 있었으며'이다. 이것은 이 여인이 18년 동안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한 것이 영 혹은 귀신의 활동이었음을 나타낸다. 악령들 혹은 귀신들은 세상의 불경건하고 악하고 불행한 일들의 배후에 역사하고 있다. 에베소서 2:2,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이 여인은 오랫 동안 이 질병의 영으로 인해 고생했다. 그러나 이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고침을 받을 때가 왔다. 이제 예수께서 그를 통해 자신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드러내실 때가 왔다.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그 여자가 소원하기 전에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부르셨다. 물론 이 여자가 마음 속으로 자신의 병고침을 먼저 소원했는지도 모른다. 혹시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병고침을 요청할 용기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셨던 경우와 같이 요청받지 않으신 때에 긍휼을 베푸셨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가 병자들의 소원을 들으시고 긍휼을 베푸셨으나 이 경우는 그가 말로 표현된 소원이 없이 긍휼을 베푸신 것이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여자여'라는 말(귀나이)은 성인 여자를 부르는 일반적 호칭이었던 것 같다(요 19:26 참조).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는 말씀은 병을 치료하시는 권위있는 말씀의 선언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권위있는 선언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권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권위이었다. 그 권위있는 말씀은 곧 그의 신성의 영광을 드러내었다.
[13]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안수하실 때 그 여자는 즉시 고침을 받았다. 18년 동안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했던 그의 몸은 즉시 펴졌다. 예수님의 안수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은 눈으로 볼 수 있게 전달되었고 확인되었다. 예수님의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예수께서 중한 열병으로 앓았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셨을 때도 그가 곧 일어났었고(눅 4:39) 친구들이 데려왔던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을 때도 그가 곧 일어났었다(눅 5:25). 이 경우도 그 여자는 곧 몸을 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을 보면, 그 여자의 속에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은 밝히 증거되었다. 또한 오랫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되었던 이 여인은 이제 그 매임과 그 질병에서 해방되었다.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회당의 최고책임자인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에 대해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여겨 분내며 사람들이 안식일에 병고침 받는 것을 금하였다. 그의 태도는 겉보기에는 안식일을 존중하며 철저히 지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중심에는 무지와 완악함이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메시아이신 증거를 방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회당 예배를 인도하는 그의 수고와 열심은 무슨 의미가 있었던가? 사람의 내면적 경건은 참으로 외형적 종교적 직분이나 열심과 직접 관계가 없음이 분명하다.
[15, 16]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주께서는 그 회당장과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에도 자기들의 소나 나귀를 마구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면서 이 불쌍한 여인을 그 오랫 동안의 사탄의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탄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에서 제명출교되는 것을 사탄에게 내어준다고 표현했고(고전 5:5) 또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흑암의 권세에서 살았다고 표현했고(골 1:13) 또 온 세상은 악한 자 곧 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까지 표현했다(요일 5:20). 그 여인은 오랫 동안 사탄에게 매여 사탄이 주는 질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소나 나귀보다 귀한 인간 영혼이었다. 더욱이 그는 '아브라함의 딸' 곧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여자는 고침을 받았다. 사탄에게서 놓임을 받았다.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행위를 반대했던 모든 사람들은 부끄러워했고 모든 사람들은 그의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들을 기뻐했다. '그의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들'이란 방금 전에 그가 병을 고치신 일과 그와 관련하여 그가 바르고 지혜롭고 은혜로운 말씀을 하신 것을 가리킨다.
18-21절,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심
[18, 19]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그러나' 혹은 '또'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세계를 가리킨다. 그것은 사탄과 죄와 죽음의 권세가 완전히 없는 세계이다. 그것은 병고침을 받았던 한 여인과 같이 죄인들이 사탄의 속박과 매임에서 해방되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이며 인류 역사의 한 종착지이다. 그것이 성도들의 소망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채전 혹은 정원에 심기운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하셨다. 그는 심기운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정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 비유는 첫째 하나님의 나라가 작은 세력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며, 둘째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자라며 확장된다는 것이며, 셋째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내 크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 곧 구원받은 영혼들로 구성된 교회는 심히 작은 세력에서 시작하여 점점 자라 지금은 온 세계에 가득한 단체가 되었다.
[20, 21]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하나님의 나라는 또 누룩에 비유되었다. 누룩은 보통 악과 그 영향력을 비유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비유되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뱀이 사탄을 비유하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좋은 뜻으로 '뱀같이 지혜로워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마 10:16). 여기에 누룩은 퍼져나가는 것을 비유했다. 가루 서 말을 반죽하여 누룩을 그 속에 두면 반죽 전체가 부풀게 되는 것처럼, 미미하게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마침내 온 세계에 퍼져 온 세계를 새롭게 만들 것이다.
결론적으로, 10절부터 21절까지의 내용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들을 발견한다. 첫째로, 예수께서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던 한 여인을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는 한 마디의 말씀으로 즉시 완전하게 고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구주이신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런 것보다 더 큰 어떤 증거를 주실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진실한 증거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구주이심을 깨닫고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여 고생했던 한 여인이 놓임과 고침을 받았듯이, 아직도 사탄에게 매여 있는 자는 이 시간 놓임과 고침을 받아야 한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다 사탄의 권세, 죄의 권세, 어두움의 권세 아래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아 죄와 사탄과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여러분은 참으로 구원을 받으셨는가?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작게 시작되었으나 점점 확장되어 마침내 온 세상에 퍼지는 큰 나라가 됨을 깨닫자! 구원 운동과 교회 운동이 그러하다. 우리는 인간적 방법으로 큰 운동을 꿈꾸는 자들이 아니다. 진리의 운동은 점점 확장되어 온 세계에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바로 믿고 바로 살며 이 천국 복음을 만민에게 전파하자!
22-30절, 구원받는 자와 제외되는 자
[22-24]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예수께서는 각 성과 각 촌에 다니시며 가르치셨다. 그는 그에게로 모여드는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여러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이것은 전도자들에게 본이 된다. 우리도 교회에 모여 오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또한 어디든지 기회 있는 대로 가서 말씀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다. 그때 한 사람이 그에게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여러 가지 진리를 말씀하셨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이며 우리가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구원의 좁은 문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의 보내신 유일한 구주이시며 인류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예수님 외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할 다른 구주가 없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둘째로, 예수께서는 구원에서 제외될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7:13, 14에서도 그는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하셨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만인구원설은 거짓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결국 멸망을 당할 것이다. 노아 시대에 노아의 가족 8명 외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홍수로 멸망했다. 이스라엘 나라 역사에도 여호수아나 갈렙이나 다윗같이 경건하고 의롭게 산 자들은 소수이었다. 오늘날도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믿고 따르는 자들은 적은 무리이다. 많은 이들이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
[25, 26]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셋째로, 예수께서는 구원의 문이 닫힐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을 때가 올 것이다. '집 주인'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켰다. 예수님은 구원의 문 곧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계 3:7)이시다. 천국문은 지금 열려 있으나 항상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이 닫힐 때가 있다. 문이 한 번 닫힌 후에는 아무도 그리로 들어갈 수 없다. 마치 노아 방주의 문이 닫힌 후에는 아무도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과 같다.
넷째로, 예수께서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의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는 표현하시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고 하셨다. '어디로서'라는 말(포덴)은 문자적 의미는 장소를 가리키지만, 담겨진 의미는 근원을 가리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 또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속해 있고, 모든 사람이 다 그들의 부모에게서 출생되었다. 모든 사람은 이런 점에서 공통적 근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사람의 범죄로 죄악된 세상이 되었고 하나님께 정죄를 받았고 마귀의 권세 아래 있고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의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세상적 근원만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근원을 요구하신다. 그것이 중생(重生)의 구원이라는 근원이다. 주께서는 그것을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는 것'(요 3:3, 5)이라고 표현하셨고 요한은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요 1:13)이라고 표현했다. 중생한 자가 아니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이 성경에 밝히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이다. 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27]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또한 주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행악하는 모든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 즉 천국에서 제외된 자들의 특징을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사는 것이 다 악이다.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죄악된 본성을 가진 죄인으로 태어난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서 죄를 회개하고 심령이 새로워지기 전에는 다 악하다. 그들은 참으로 의를 행하거나 선을 행하거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
다섯째로, 예수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거할 것이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에게서 떠나야 할 것이다.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 간의 분리는 불가피한 일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시편에는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라고 말씀했고(시 5:4-6), 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는 자니이다]"라고 말씀했다(시 15:1-4).
[28, 29]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여섯째로, 예수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불행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불행은 구원받은 자들의 행복과 대조된다.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 그리고 동서 남북에서 온 많은 이방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말했다가 빼앗길 뻔한 연약이 없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야곱도 아버지 이삭을 속이는 등의 흠과 결함이 없지 않은 자이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점점 거룩하여졌다. 그들은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특권을 얻었다. 세계 만방의 많은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 천국은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구원에서 제외된 자들 곧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의의 길을 걷지 않았던 그들은 밖으로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고 더 이상 그의 작은 긍휼과 은총도 받지 못할 것이며, 그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성경에 증거된 영원한 불못의 지옥 형벌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연합되어 죄를 회개하고 구주를 믿고 의를 행하다가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들어갈 것이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죄 가운데 살며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마침내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먼저 복음을 받은 자들도 멸망을 당할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 '나중된 자'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며 '먼저 된 자'는 유대인들을 가리킬 것이지만, 이 말씀은 또한 먼저 믿은 자들과 나중에 믿은 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구원에는 순서가 없다. 먼저 복음을 들었다고 먼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복음을 들어도 먼저 들은 자보다 먼저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먼저 복음을 들어도 나중에 들은 자보다 나중에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아예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은 우리는 그 복음의 요청에 지금 진지하게 응답해야 한다.
22절부터 30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첫째로,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이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둘째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수는 많을 것이다. 셋째로, 구원의 문은 닫힐 때가 있다. 지금은 구원의 문이 열려 있지만, 구원을 원하여도 받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넷째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근원이 다르다. 즉 그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고 본성에 따라 죄악된 삶을 산다. 다섯째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지 못할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과 구원받은 자들 간에 영원한 분리가 있을 것이다. 여섯째로,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슬픔과 고통 즉 영원한 지옥 형벌이 있을 것이다. 일곱째로, 먼저 복음을 받은 자들도 멸망을 당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는 우리의 구원을 점검하고 확인하자! 좁은 문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가? 구원의 문이 닫힐 때가 올 것이며 많은 이들이 그 문 밖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는가? 우리는 본성의 악을 버리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새 삶을 시작했는가?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진지하게 믿고 있으며 의와 선을 행하고 있는가?
31-35절, 예수님을 죽이려 함
[31] 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곧 그때에'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같은 날에'라고 되어 있다. 이 일은 앞의 사건과 같은 날에 이루어졌다. 여기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 안디바로서 당시 갈릴리 지방을 관할하고 있었다(눅 23:7). 이 바리새인들의 말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아직 갈릴리 지방에 계셨음을 알 수 있다. 그곳을 떠나기를 권한 어떤 바리새인들의 말이 예수님을 위하는 뜻에서 그를 피신시키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도 예수님을 환영치 아니하므로 배척하는 뜻에서 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여하튼 헤롯이나 당시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배척한 것이 사실이다. 마가복음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마가복음 5:17,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그러나 주를 진실히 믿는 자들은 주님과 그의 종들을 영접할 것이다. 요한복음 4: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사도행전 16:15, "저[루디아]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예수님은 세상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그는 선지자적 권위를 가지고 헤롯을 '저 여우'라고 지칭하셨다. 여우라는 표현은 그 간교함과 잔인함을 가리키는 비유의 말이다. '오늘과 내일'은 '명확하지 않은 얼마간의 기간'을 가리킨 것 같다. 즉 '헤롯의 죽이겠다는 위협 속에서도 내가 얼마 동안 좀더 나의 일을 계속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제3일'은 '얼마 있지 않아서 곧'이라는 뜻일 것이다. '[내가] 완전하여지리라'는 원어(텔레이우마이)는 '내가 완전하여지리라'는 뜻 외에 '내가 목표에 이르리라'는 뜻이 있다. 그것은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의 사명을 다 이루실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에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었다(요 19:30).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을 아시고 계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는 가셔야 할 사명의 길을 가셨다. 주님의 모습은 사명자들에게 본이 된다. 바울 사도는 주의 모습을 따랐다. 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또 바울 사도는 젊은 교역자 디모데에게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교훈하였다(딤후 4:5). 또 요한계시록에는 주께서 교회의 목사들에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말씀이 있다(계 2:10).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3:37-39에 보면, 예수께서는 얼마 후에도 34절과 35절의 말씀과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에게 파송된 자들을 돌려 치려 하고 있었다. 헤롯만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성의 사람들, 특히 유대 지도자들은 그를 죽이려 하였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던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 '평화의 성'이라는 뜻을 가진 그 성의 사람들이 타락하고 악해져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여러 번 모으려 하였다'는 주의 말씀은 그가 바로 이스라엘의 목자요 주(主)가 된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주께서 여러 번 이스라엘을 품으려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원치 않고 그를 거절하였다.
구약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신약 교회도 타락하고 배교적이었던 때가 종종 있었다. 중세 시대의 로마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신실한 많은 종들과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단체가 되었었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과거의 그 죄를 뉘우치고 돌이킨 적이 없다. 천주교회의 기본적 교리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 많은 개신교회들은 또다시 타락하여 배교(背敎)의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이 포용하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들은 역사상 가장 불신앙적이다. 그것들은 심지어 천주교회의 사상들보다도 더 이단적이다. 그것들은 천주교회와 개신교회가 역사적으로 공통적으로 믿었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것들은 성경의 신적 권위, 예수님의 성육신(成肉身)과 동정녀 탄생, 기적들, 대속(代贖), 육체적 부활, 재림, 지옥 등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교회의 모습과 같이, 오늘날 교회들은 또다시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과 순수한 보수 신앙의 증언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을 반복할 차비를 점점더 하고 있다. 많은 교회들의 신앙의 순수성은 점점더 약화되고 있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성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신다. 그는 예루살렘성에 있는 아름다운 성전과 훌륭한 궁궐들과 존귀한 사람들의 집들이 황폐하게 버린 바 될 것이라고 선포하신다. 이 예언은 우리가 아는 대로 주후 70년 로마 장군 디도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 성취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죽였던 예루살렘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주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의 예언과 더불어 또한 자신의 다시 오심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고 할 때'란 주의 재림의 때를 가리켰을 것이다.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려고 다시 오실 것이다. 히브리서 10:37, "잠시 잠간 후에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31절부터 35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헤롯왕과 예루살렘성 사람들 특히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계속 가셨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예루살렘은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핍박하고 죽이는 자가 되지 말고 그를 영접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랑으로 부르실 때 그의 음성에 응답하여 그에게로 나아오라는 것이다. 거기에 참된 평안과 영원한 생명이 있다. 오늘 본문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의 핍박자들을 두려워말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직분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룰 때까지 우리는 어떤 환경 여건 속에서도 변함 없이 충성해야 할 것이다.
14장: 자신을 버리고 주를 따르라
1-14절, 예수께서 식사 초대를 받으심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 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 중의 한 지도자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으셨다. 그는 그 초대에 응하셨다. 그는 죄인들과 접촉하기를 꺼리지 않으셨다. 그것은 죄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그 영혼을 구원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었다. 누가복음 5:31, 3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자세히 주시하였다. '엿보다'는 원어(파라테레오)는 '자세히 주시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그를 환영하고 영접할 것이지만, 사람이 상대방을 오해하고 시기하고 미워한다면 그를 거부하고 경계하고 주시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 대신에 오해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많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2-4]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저희가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그때 고창병 환자가 주님 앞에 있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고창병(dropsy)은 수종(水腫) 혹은 부종(浮腫)이라고 하는데 몸이 붓는 병이다. 아마 어떤 사람이 주님께 안식일에 그 병자를 고쳐주실 것인지 질문했던 것 같다. 주께서는 대답하시면서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한지 되물으셨다. 그들은 잠잠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얼마 전에 예수께서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몸이 꼬부라져 펴지 못하던 여자를 역시 안식일에 고쳐주신 일을 보았으나(눅 13:15, 16) 그들 자신은 여전히 안식일에는 그런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번에도 그를 고쳐주셨다. 주께서는 그를 붙드시고 고치셨고 보내셨다. 주께서 고창병 환자를 고쳐주신 것은 분명히 그의 크신 긍휼 때문이었다. 그는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자들을 무정하게 지나쳐 버릴 수 없으셨음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런 병고침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심으로 자신의 신성(神性)을 우리에게 확증해주셨다. 또한 그가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신 것은 우리가 단순히 안식일이라는 종교적 규례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호세아 6:6, "나는 인애(仁愛)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바리새인들은 종교 의식만을 중시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외식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교적 의식이나 형식보다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더 원하신다.
[5, 6]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행위의 정당함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지난 번 사건에서도 그는 말씀하시기를,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하셨었다(눅 13:15, 16).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는 일이 정당함은 이렇게 상식적 추론으로도 이해되는 일이었지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생각 때문에 보다 더 중요한 일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신앙 생활의 더 중요한 내용을 중시하지 않고 단지 종교적 형식만을 붙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7-10]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예수께서는 그 식사에 함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좋은 자리를 택함을 보셨다. 그것은 사람들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음, 즉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높이는 이기심과 자존심과 명예심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높은 자리나 좋은 자리에 앉으려 하지 말고 오히려 낮은 자리와 나쁜 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처신해야 함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그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존귀히 여김을 받는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주께서는 이어서 교만한 자가 낮아지고 겸손한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교훈이다.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베드로전서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교만은 자신에 대한 욕심이며 거기에서 다른 사람과의 싸움과 분열이 나오고 교만한 자는 결국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낮아지고 버림을 받는다. 그러나 겸손은 자신에 대한 욕심을 버릴 때 가능하며 거기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일치와 화평이 나오며 겸손한 자는 결국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높임을 받고 사랑을 받는다.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富)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또 예수께서는 우리가 누구를 식사 자리에 초대를 할 때 친한 사람들이나 부유한 사람들을 청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 까닭은 그들이 후에 우리를 청하여 되갚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을 베푼 후에 그 선의 갚음을 받으면 먼저 베푼 선이 더 이상 선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주고 받는 문화 속에 사는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이다. 우리는 우리가 주고 받는 돈이 진정한 축하나 위로의 뜻이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13, 14]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예수께서는 우리가 누구를 식사 자리에 초대할 때 가난한 자들과 불구자들같이 되갚지 못할 자들을 청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것이 우리에게 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장차 의인들이 부활할 때 갚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또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대로, 장차 의인들의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을 것이다. 몸의 죽음은 끝이 아니고 몸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로부터 또 부활한 의인들로부터 칭찬과 보상이 있을 것이다.
주께서 가르쳐주신 바는 우리가 세상에서 단순히 주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댓가를 바라지 말고 그저 주라는 것이다. 이렇게 선을 베풀고 구제하는 삶이 우리가 힘써야 할 삶이다. 누가복음 12:33, 34,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이렇게 단순히 주는 생활은 성도가 내세를 바라볼 때만 가능하다. 내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하나님의 보응과 보상을 바라볼 때, 성도는 이 세상에서 적은 소득을 얻을지라도 의롭고 정당하게 살 수 있고 또 우리의 선행과 봉사를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오해와 비난을 받을지라도 낙심치 않을 수 있다. 갈라디아서 6:9, 10,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결론적으로, 1절부터 14절까지에서 우리는 두어 가지 실제적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종교적 형식이나 규례를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 즉 의와 선과 진실보다 더 중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을 바로 깨닫고 그것을 더 중시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특히 하나님만 바라고 내세만을 바라면서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과 선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주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15-24절, 큰 잔치의 비유
[15]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4절에서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대접한 행위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갚음을 받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큰 잔치를 베푸셔서 그들의 선한 대접에 대해 후하게 갚으실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성경의 중요한 진리를 언급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설교 내용이었다. 마태복음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또 하나님의 나라는 사도들의 설교 내용이었다. 사도행전 28:30, 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음식을 먹을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먹는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마태복음 26:29,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요한계시록 22:1, 2,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표현인 교회에서도 우리는 식탁 교제를 나눈다. 사도행전 2:42, 46,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로마서 14: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이것이 주된 일이 아니라는 뜻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식탁 교제를 나누는 일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16, 17]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원문에는 16절 초두에 '그에게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다. 그 식사 자리에서도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단지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고 진리를 가르치시는 일이었다.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그가 베푼 '큰 잔치'는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를 가리킨다. '잔치할 시간'은 세상 종말이며 영광의 천국의 시작이다. 그는 그 잔치에 많은 사람들을 청하셨다. 그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또한 세상에 사는 모든 이방인들에게 초청의 말씀을 주셨다. '아무나 오게!' 이제 잔치할 시간이 되어 그 청하셨던 자들을 오라고 말씀하셨다. 본문에 4번이나 언급되는 '종'은 주인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고 알리는 전도자들을 상징한다.
[18-20]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처음에 잔치 초청을 받은 자들은 다 한결같이 사양하였다. 그들에게는 그럴 듯한 핑게거리가 있었다. 밭을 샀으니 나가보아야 하는 것이나 소를 샀으니 시험하러 나가보아야 하는 것이나 결혼했으니 참석하기 어렵다는 것은 다 그럴 듯한 일들이었다. 그런 일들은 사람이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일들이다. 그것들은 사람의 정상적인 일들이다. 그것들은 정상적인 건강이나 가정이나 직업이나 재산을 가진 자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들이다.
성경도 이런 일들에 대해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장려한다. 성경은 6일 동안 힘써 일하라고 가르쳤다. 출애굽기 20:8, 9,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성경은 게으른 자에 대해 책망한다. 잠언 6:6-11,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성경은 특히 결혼할 자 혹은 결혼한 자가 경제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잠언 24:27,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 또 양이나 소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것들을 잘 돌보아야 할 것을 말씀했다. 잠언 27:23,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또 결혼한 자에 대해서 성경은 집에서 쉬며 아내를 기쁘게 하라고 가르쳤다. 신명기 24:5,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1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그러나 이런 세상의 일들은 다 필요하고 사람에게 정상적인 일들이지만 잔치에 참여하는 일과 충돌되지 않는다. 잔치에 초청을 받았던 그들은 먼저 그 잔치에 참여해야 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것이 안식일 계명의 정신이다. 7일 중 하루를 하나님의 날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고 나머지 6일을 나의 일들에 쓰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십일조 계명의 정신이다.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고 10분의 9를 나의 일들에 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을 알아도 믿음이 약한 자는 6일도 그의 것이며 주일도 아까와서 그가 그 자신을 위해 다 쓸 것이며, 또 소득의 10분의 9도 그의 것이며 10분의 1도 아까와서 그가 그 자신을 위해 다 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기를 원하신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의 보고를 들은 집주인은 노하였다. 그는 왜 노하였는가? 그것은 청함 받은 자들이 청한 집주인과 그의 잔치를 무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거절은 불가피한 일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그 잔치에 참석한다고 해서 밭의 일을 하지 못하거나 소를 시험하지 못하거나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잔치를 청한 그 사람을 존중함이 없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주일을 구별하여 지킨다고 굶주리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에 대한 귀한 복의 약속이 있다. 창세기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사야 58:13, 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십일조 헌금을 하나님께 내기 때문에 가난해지거나 굶주리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에는 놀라운 약속이 있고 많은 성도들이 그 약속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 말라기 3:8-12,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면,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을 존중함이 없다면, 우리는 성수주일이나 십일조 생활을 힘쓰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예배 시간을 세상의 일들, 예를 들어 결혼식이나 장례식이나 기타 우리 자신의 쾌락을 위한 일들보다 못하게 여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을 노여워하신다. 사무엘상 2:30, ". .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존경치 않고 그의 초청을 무시하는 자들에 대해 노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의 거절로 인해 노한 주인은 그 종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불구자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본동네의 사람들 즉 우리의 이웃 사람들 가운데서 경제적으로 혹은 육신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들을 데려오라는 뜻이다. 정상적인 자들, 즉 정상적인 건강을 가지고 있고 정상적인 직업과 재산과 가정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잔치 초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육신적 건강이나 기본적 물질 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자들을 초청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 즉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초청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준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정상적이고 부유한 자들에게만 전도하지 말고 오히려 육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도해야 할 것이다.
[22, 23]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그래도 자리가 남아 있을 때, 그 주인은 이번에는 종에게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오라고 명령하였다. '산울가'라는 원어(프라그모스)는 '산울타리 가의 길'을 가리킨다.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구절은 원문을 직역하면 '내 집이 차도록 그들을 오라고 강권하라'이다. 그 주인의 종은 마을 안의 길이든지 마을과 마을을 잇는 큰 길이든지 마을 바깥 길이든지 어디든지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잔치 자리를 채워야 했다. 여기의 '내 집'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며 또 현재의 교회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 저절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전도하고 사람들을 강권하여야 한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처음 잔치 초청을 거절하였던 사람들은 그 잔치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빼앗길 것이다. 그들에게는 기회가 주어졌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 기회를 완전히 빼앗겼다. 그들이 그 잔치를 맛보지 못할 이유는 그 초청을 거절하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청을 받은 각 사람은 각각 그 초청에 응답하여야 한다. 그들은 각자 잔치 자리에 나아와야 한다. 잔치 자리에 오는 것은 바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을 가리킨다. 여러분은 모든 죄를 다 회개하고 우리의 구주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성경 말씀의 가르침대로 순종하고 있는가? 또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주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열심히 모이고 성경을 배우며 그 말씀을 실천하기를 힘쓰고 있는가?(히 10:23-25).
결론적으로, 15절부터 24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청하셨으나 청함을 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세상 일들을 핑게하며 그 초청을 거절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노여워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잔치의 초청 대상을 변경하고 확장하셨는데, 첫째로 그는 본동네 사람들 가운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데려오게 하셨고 또 기타 누구든지 강권하여 데려오게 하셨다. 하나님의 잔치 초청을 거절한 자들은 결코 그 잔치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본문이 주는 중요한 교훈은 두 가지라고 생각된다. 첫째는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세상 일들이 바쁘다고 핑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 곧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을 세상 일들보다 먼저 앞세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중요한 일이 아닌가!
둘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채워야 한다는 것과 그 방법에 관한 말씀이다. 우리는 우선 모든 사람들을 초청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언제까지 연연하지 말고 우리의 초청 대상을 변경하고 확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가난한 자들이나 병약한 자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초청해야 한다. 또 우리는 다른 동네에 있는 사람들도 누구든지 강권하여 하나님의 집을 채워야 한다. 하나님의 집을 채우는 일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열심으로 영혼들을 강권하여 참된 교회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된 잔치 자리로 인도하자!
25-35절,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간다고 다 그의 제자인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도 교회에 등록된 모든 교인들이나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이들이나 혹은 심지어 세례를 받은 모든 교인들이 다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인 것과 제자 아닌 것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내게 오는 자'는 겉보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참 믿음은 세상의 인간 관계를 초월하여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신앙은 절대적 차원의 것이다. 예수님의 참 제자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자인 것이다.
우선, 본문의 말씀은 가족들을 미워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른 곳에서 가족을 사랑해야 할 것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서로 모순됨이 없다. 에베소서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디도서 2:4,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디모데전서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기본적인 의무이다.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자기 가족도 사랑하고 잘 돌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친절하고 너그러우면서 가족들에 대해 그러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진리 문제 외에는 가족들과 다투거나 충돌해서는 안된다.
본문에서 '미워한다'는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가족에 대한 의무가 충돌하거나 하나님의 명령과 가족의 명령이 충돌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택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나 가족 어른들이 우리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시거나 예수를 믿지 말고 교회에도 나가지 말라고 명령하실 때 우리는 가족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심지어 우리의 목숨이 위협 당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신앙의 정절과 절개를 지켜야 한다.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는 우리의 가족을 미워하고 우리 목숨까지도 미워하는 것이다.
신앙은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가지는 절대적 차원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주님이시다. 아무리 사랑스런 가족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영생을 주지는 못한다. 사실상 육신의 생명도 연장시켜주지 못하는 것이 연약한 인간이다. 불치병에 걸려 죽음 앞에 선 나를 도울 수 있는 가족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과 구원과 도움이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가족 관계 때문에 즉 우리의 가족에 대한 의무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면 우리는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육신의 목숨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 차원에서 믿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일 것이며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 십자가는 자기 부정을 상징한다. 십자가는 사형 죄수가 지고 가서 사형장에서 매달려 죽는 나무이다.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현실에서 자기를 부정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고난의 현실은 자기 부정의 시험대요 훈련장과 연습장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현실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주를 따라가야 한다. 주를 따르는 것은 주의 말씀과 본을 따라 사는 것을 가리킨다.
[28-30]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망대 건축의 비유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자기의 경제 능력이 그것을 완수할 수 있을지 먼저 검토해보고 하라는 것이다. 먼저 그 비용을 예산하여 그 일이 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시작해야지, 그런 검토가 없이 그냥 시작하면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중도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사람들은 그를 비웃을 것이다.
[31, 32]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왕과 싸우려고 할 때에도 그는 먼저 자기의 군사력과 상대방의 군사력을 비교하여 볼 것이다. 군인들의 수와 화력이 상대방보다 월등이 나으면 한 번 해보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자기의 군사력의 정도를 미리 계산해보지 않고 전쟁을 일으킬 자는 없을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위의 두 비유가 암시하는 바는, 사람이 자기의 가진 것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망대를 건립하는 것과 다른 나라와 전쟁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 비유되었고, 건축 비용을 예산하는 것과 전투력을 비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든 소유를 가지고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영생을 위해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 사람은 자기의 가진 것으론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시편 49:8, "저희 생명의 구속(救贖)이 너무 귀하여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자신을 부정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버리면 얻는다는 것은 역설적인 진리이다. 우리는 일시적 세상을 버리고 영원한 천국을 얻으며,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썩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을 영원한 영광의 세계의 행복을 얻는다. 우리는 썩어질 육신의 몸을 버리고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얻으며, 세상적 기쁨을 버리고 비록 현재는 때때로 주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만 장차 영원히 눈물 없는 기쁨과 평강의 세계를 얻는 것이다.
[34, 35]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하시니라.
소금은 예수님의 제자를 상징하고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성도가 예수님의 제자답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가 예수님의 제자답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성도가 세상이나 자신을 부정하거나 초월하지 못하고 세상에 얽매이고 자기 욕심에 얽매여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 자는 실상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이며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요한일서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하다가 주를 배신하였고 바울의 동역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딤후 4:10). 우리는 맛 잃은 소금 같은 성도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다운 성도가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 나오는 무리 중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가족들과 심지어 우리 자신의 육신적 목숨까지 버릴 각오를 하고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길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와 가족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충돌한다면, 우리는 가족보다 하나님을 택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절대적 가치이시며 그는 우리의 영생이시요 영원한 행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 차원에서 믿고 사랑하며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신앙이요 제자의 길이다.
15장: 한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심
1-10절, 잃은 양, 잃은 은전(銀錢)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라는 표현은 그 동네의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라는 뜻이다.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왔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인물이셨다. 그는 사람들과 거리가 있지 않으셨다. 당시의 세리들 즉 세금을 받는 관리들은 죄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취급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직분과 직책을 이용하여 백성들로부터 부정한 이익을 챙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 죄인들을 용납하셨다. 여기에 죄인들에 대한 주님의 관심과 긍휼과 사랑이 나타나 있다.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을 보인 것은 기쁜 일이며 놀라운 일이었다. 실상 자신들을 죄인이라고 생각한 세리들과 죄인들은 자신들을 의인이라고 생각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보다 더 나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진지하게 나아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주된 사역은 말씀을 전하는 사역이었다. 기독교는 단순히 병을 고쳐주거나 세상적 복을 주거나 인간적 위로를 주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다른 활동의 종교가 아니고 말씀을 전하는 종교이다. 기독교가 전하는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죄사함과 구원의 말씀이며 영생의 말씀이다. 세리들과 죄인들은 바로 그 말씀에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용납하신 것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이런 행위를 가지고 자신들이 자유주의자들이나 천주교인들과 함께 전도대회를 주관하는 일을 합리화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적용이다.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오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요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배교적이며 이단적인 사상을 가진 자들과 함께 예배나 집회를 인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며 그것은 잘못이다.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을 전도대회를 주관하는 일에 참여시키는 일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그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며 방법이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 원망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했고 그의 관심과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을 죄를 용납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주께서는 죄를 용납하거나 인정하신 것이 아니었다. 주께서는 단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회개시켜 구원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예수께서는 자주 비유를 사용하여 진리를 가르치셨다. 비유를 이해할 때 우리는 그 중심적 진리를 붙드는 것이 중요하다. 비유의 부수적인 것들을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생각은 조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옛부터 이런 풍유적(allegical) 해석법이 있어 왔으나 그것을 조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확실하고 주관적이어서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또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유 해석에 있어서 우리는 너무 지나친 추측이나 상상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경은 그렇게 수수께끼 같은 책이 아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읽고 다 깨달을 만한 책이다. 성경에 어려운 단어나 구절이 없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그 중심 주제와 진리이며 그것은 매우 명료하여 성경을 읽는 이들이 대부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4-6]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잃은 양의 비유가 명백히 보이는 바는 세 가지이며 주님의 말씀의 목표는 세번째 내용에 있었다. 첫째는 양들의 주인이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귀히 여겼고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주인이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았다는 것이다. '찾도록'이라는 원어는 '그가 그것을 찾을 때까지'라는 뜻이다. 주인은 그 양을 조금 찾아본 정도가 아니었고 찾을 때까지 끈질기게 찾았고 마침내 찾았다. 셋째는 주인이 그 양을 찾은 후 매우 기뻐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의 기쁨을 자기 혼자만 가질 수 없어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함께 나눌 정도로 기뻐하였다.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주께서는 친히 그 비유의 뜻을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그 비유가 주는 진리의 교훈이다. 그것은 그 비유의 중심적 진리를 나타낸다. 그것은 앞에 언급한 세 가지의 내용 중 세번째에 해당한다. 예수님의 비유의 요지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리고 하늘에 있는 성도들과 천사들이 기뻐한다는 것이며, 그들의 기쁨은 심지어 천국에 이미 들어가 있는 성도들이나 지상에서 이미 구원받아 교회에 들어와 있는 성도들에 대한 기쁨보다 더한 기쁨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며 또한 예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또한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새 신자 한 명을 참으로 기뻐하자. 우리도 신입교인 한 명을 진심으로 환영하되, 특히 처음 믿고자 하는 이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기뻐하자.
[8-10]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잃은 은전(銀錢)의 비유도 잃은 양의 비유와 동일한 진리를 나타낸다. 드라크마는 헬라 화폐로서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과 거의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다 은전(銀錢)으로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의 가치이었다. 이 비유에서의 여인도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귀중히 여겼고 그것을 찾기 위해 열심히 애썼고 마침내 찾았으며 그것을 찾았을 때 그도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모으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주께서는 이 비유에서도 비유의 핵심을 말씀하시기를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 기쁨이 된다고 하셨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수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기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0절까지의 두 비유 즉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은전(銀錢)의 비유는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계셨다. 그것은 첫째로 한 사람의 영혼을 귀히 여기시는 것이다. 많은 수(數)만을 중시하시는 것이 아니고 한 명의 영혼을 중시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둘째로 잃어버린 한 영혼 즉 회개해야 할 한 죄인을 열심히, 부지런히, 끝까지 찾으시는 것이다. 한두 번 찾다가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찾을 때까지 찾으시는 심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죄인 한 명의 회개를 크게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정이요 예수님의 심정이다.
만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음식을 함께 드신 것을 이해했을 것이며 그에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였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알자.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한 명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깨닫자.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을 찾기 위해 얼마나 불붙는 심령을 가지고 계신지 깨닫자. 또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들 아흔 아홉보다 더 기뻐하고 즐거워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자.
여기에 교회에 주신 사명의 내용이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마 28:19, 20). 또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행 1: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힘쓰자. 우리는 먼저 우리 가까이에 있는 믿지 않는 가족의 구원을 위해, 믿지 않는 친척과 이웃의 구원을 위해 힘쓰고, 주께로 돌아오는 한 명의 영혼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기뻐하자. 또 주께서 힘주시는 대로 복음을 국내와 해외에 땅끝까지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자.
11-32절, 탕자의 돌아옴
[11-13]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주시기를 소원하였다. 그는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려는 생각보다 아버지의 유산에 의존하여 살아가려는 안이한 생각을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는 그의 요청대로 재산을 나누어 아들들에게 각각 나눠주었다. 구약의 율법대로 했다면 큰 아들에게는 2배를 주었을 것이다.
둘째 아들은 그 후 며칠이 못되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갔다. 그는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곳, 자기 생각과 뜻대로 살 수 있을 만한 곳으로 가기를 원했던 것이 분명했다. 이 둘째 아들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다. 사람은 자기의 자유 의지로 하나님을 떠나 먼 곳으로 갔다. 그는 하나님의 간섭을 원치 않았고 자신의 생각과 뜻을 따라 살기를 원했다.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서 성실히 돈을 버는 일을 하지 않았고 그 대신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며 그 재산을 허비하였다. 돈은 벌기는 어려워도 쓰기는 쉽다. 힘들게 돈을 번 자라야 규모 있게 또 근검절약하게 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탕자의 삶은 허비하는 삶으로 묘사되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은 하나님이 주신 건강과 시간과 재능과 돈을 허비하는 삶이다.
[14-16]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든 것은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허랑방탕하게 사는 삶을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그런 곳에 큰 흉년을 내리실 것이다. 흉년은 문자 그대로 흉년이거나 지진, 전쟁, 질병, 화재, 교통 사고, 경제적 파산, 가정의 파탄 등의 재난이나 불행을 가리킨다.
그 둘째 아들은 궁핍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낮고 비천하게 되었다. 심지어 돼지 먹이인 쥐엄열매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하였지만 그것조차도 그에게 주는 자가 없었다. 사람이 돼지 먹이를 먹다니 얼마나 불쌍해졌는가? 사람은 무지하여 하나님을 떠나는 생활이 자유롭고 행복하리라고 기대하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잘못된 소원과 헛된 욕망이었다. 물론 세상의 영광과 육신의 쾌락은 얼마 동안 인간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듯하였으나 그것은 곧 헛되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17-19]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큰 흉년은 하나님의 재앙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인간은 이런 큰 흉년이 들기 전에는 자신의 제한성과 문제점을 잘 깨닫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 없이도 영원히 행복할 줄로 착각하며 어리석게도 분주하게 산다. 그러나 큰 흉년과 빈곤함을 통해 그는 자신이 낮고 비천한 죄인, 짐승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짐승과 구별되는 인간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의 존귀성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인간은 스스로 부르짖게 된다.
방탕했던 그 아들은 궁핍 속에서 제 정신이 들었다. 그러므로 궁핍이 그에게는 불행만이 아니고 또한 행복으로 향하게 하는 원인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궁핍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았다면 그 궁핍은 결코 저주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요 복일 것이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은 원문을 직역하면 '그가 자신에게 왔을 때'인데, 그것은 그가 제 정신이 들었다는 뜻이다. 바른 생각과 깨달음이 온 것이었다. 그의 깨달음은 몇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는 자기 아버지 집의 부요함을 기억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부자요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일군들이 많이 있었다. 둘째로, 그는 자신의 빈곤함과 비천함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이대로 살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셋째로,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넷째로, 그는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아버지께 그렇게 고백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어리석게 행동했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다섯째로, 그는 자신이 아들의 자격이 없으므로 아버지의 일꾼의 하나로 여겨달라고 말하겠다고 생각했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은 회개할 때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자신의 빈곤함을 깨달으며 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과 자신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또 그는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요 감히 하나님의 아들의 특권을 주장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깨닫는다. 이런 바른 깨달음은 구원의 정상적 과정이다.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相距)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궁핍함 속에서 바른 깨달음을 가지게 된 그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다. 그는 깨달은 그대로 행하였다. 바른 생각은 바른 행동을 가져온다. 이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죄를 바로 깨닫고 그 죄를 슬퍼하고 일어나 그 죄악된 환경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돌아오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는 어떠하였는가?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고 그를 측은히 여기셨다. 그는 달려가셔서 그 목을 안고 입을 맞추셨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것은 겨우 받아들이는 정도의 사랑이 아니고, 뜨겁게 맞아들이는 사랑이었다.
회개하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태도도 그러하다. 그는 멀리서 그를 보고 측은히 여기신다. 그는 회개하는 죄인을 물리치지 않고 불쌍히 여기신다. 그의 긍휼은 크고 그의 사랑은 뜨겁다. 그 사랑이 바로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내어주신 사랑이다.
[21, 22]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께 자신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였을 때 아버지는 그 아들의 바른 깨달음과 뉘우침을 기뻐하며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들이 자기는 이제 아들의 자격이 없다고 고백했을 때,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용납지 않았고 그를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셨고 손에 반지를 끼우셨고 발에 신을 신기셨다. 이것은 그가 돌아온 그 아들을 종이나 일꾼으로가 아니고 사랑하는 아들로 인정하고 대우한다는 확실한 표시이었다. 스스로 아버지를 떠나 아들의 자격과 신분을 포기했던 그에게 다시 아들의 자격과 신분을 주신 것이었다.
회개한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비슷하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포기하고 죄와 마귀와 사망에게 종노릇하였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죄인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회개한 죄인은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과 신분을 회복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의의 옷을 입혀주셨다.
[23, 24]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본 비유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로 인하여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여 잔치를 베풀고 먹고 즐거워하였다. 아버지의 기쁨의 이유는 둘째 아들의 돌아옴이 마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과 같고 잃은 아들을 다시 얻은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그를 떠나갔던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심히 기뻐하신다.
[25-32]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본문은 맏아들의 태도를 증거한다. 어떤 이들은 맏아들을 집안에 있는 탕자라고 해석하지만, 그것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본문은 그가 그날도 밭에 있다가 돌아왔다고 표현하고 또 그의 고백에서도 그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기며 그의 명령을 어김이 없었다고 한다. 또 아버지의 말씀에서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아들은 성실한 아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집안의 탕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아버지의 기쁨의 심정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밭에서 돌아와 잔치 자리의 노래와 춤추는 소리의 이유를 들은 맏아들은 처음에는 노하였다. 그의 노한 마음은 이해할 만하다.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하며 성실히 여러 해를 보내었던 그에게는 염소 새끼 하나라도 주어 그의 친구들과 즐기게 하신 일이 없으셨고 근검절약하며 성실하게만 사셨던 아버지께서 재산을 탕진한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신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맏아들의 불평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은 그의 기쁨의 정당성을 분명히 증거하였다. 아버지가 너무 엄격하고 인간미가 적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맏아들을 위하지 않았거나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목자가 우리 안에 남아있는 99마리의 양들을 미워하지 않았듯이, 여인이 주머니 속에 남아있는 9개의 은전들을 미워하지 않았듯이, 아버지는 결코 맏아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사실상 아버지의 모든 소유는 그의 것이었다. 단지 아버지의 현재의 기쁨은 잃었던 둘째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기쁨인 것이다. 이 기쁨은 잃어버리지 않은 것에 대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다. 누가복음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결론적으로, 11절부터 32절까지의 본문은 몇 가지의 진리를 보인다. 첫째로, 그것은 인간의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증거한다. 모든 인간은 다 회개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부요하심을 깨닫고 자신의 궁핍과 비천함을 깨닫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것, 성경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 교회 중심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측은히 여기신다. 그는 그들을 뜨겁게 영접하신다.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일에서 확증되었다(요 3:16; 롬 5:8). 그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과 신분과 특권을 회복시켜 주셨다.
셋째로, 본문은 무엇보다도 죄인 한 명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증거한다. 본 비유의 아버지의 기쁨은 곧 하나님의 기쁨을 나타낸다. 우리는 맏아들이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그 기쁨을 깨닫고 죄인의 회개를 위해 힘쓰고 회개한 죄인을 기쁘게 영접해야 하겠다.
16장: 돈을 사랑치 말 것
1-12절, 불의한 청지기
본문은 성경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의 하나로서 주석가들은 본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그래서 J. C. 라일은 그의 복음서 강해에서 본문을 '난제들이 가득하기로 유명한' 구절이라고 표현하였다.
[1-3]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한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재산 관리인이다. 그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을 들은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해고시키기 위해 그를 불러 그의 일을 정리하라고 말하였다. 그 청지기는 자신의 장래를 생각하였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었고 빌어 먹자니 부끄러웠다.
[4-7]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그 청지기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빚을 임의로 감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신이 해고된 후에 그들이 자신을 그들의 집으로 영접해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하나씩 불렀고, 기름 백 말을 빚진 자에게는 오십 말로 감해 주었고 밀 백 석을 빚진 자에게는 팔십 석으로 감해 주었다. 이것은 기왕의 그의 불성실에 더하여 주인의 재산에 더욱 더 큰 손해를 끼친 일이었다.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그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자기 멋대로 처리했으니 옳지 않은 청지기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 주인은 그 청지기가 지혜 있게 행하였다고 칭찬하였다. 그것은 주인의 재산을 바르게 잘 관리했다는 뜻이 아니고, 그 청지기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머리를 썼다는 뜻이다. 물론 그 청지기의 지혜는 선한 지혜가 아니고 이 세상적인 지혜이었다. 주께서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어려운 구절이다. '재물'이라는 원어(마모나스)는 '재물, 재산, 부(富)'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왜 재물을 불의의 재물이라고 표현하셨는가? 그것은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인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것으로 생각하고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돈뿐 아니라 시간, 건강, 재능, 생명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내 것처럼 생각하고 내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불의한 청지기와 비교하여 말씀한 것이다. 인간의 세상 생활은 청지기의 생활과 같다. 우리는 어느 날 이 세상을 떠나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축내는 불의한 방식으로 빚쟁이들에게 선심을 써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가지고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재물로 하나님의 일에 힘씀으로써 하나님과 친근해지면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또 우리가 재물로 구제와 선행에 힘씀으로써 믿음 안에서 가난한 형제들과 친근해지면, 우리의 구제와 선행으로 도움을 받은 가난한 성도들은 천국에서 우리를 기쁘게 대하며 영접할 것이다. 이것은 미래를 준비하는 성도들의 지혜로운 물질 생활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께서는 마태복음 6:19-21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녹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녹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고 누가복음 12:33, 34에서도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바울 사도도 디모데전서 6:17-19에서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했다.
[10-12]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0절의 '지극히 작은 것'은 세상의 재물을 가리키며, '큰 것'은 천국의 보화를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천국의 보화와 비교할 때 세상의 재물과 부(富)는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하다. 11절의 '불의한 재물'도 땅의 재물을 가리키며, '참된 것'은 천국의 보화를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이 세상의 부와 재물을 헛되지만, 천국의 보화는 참되다.
12절의 '남의 것'도 세상의 재물을 가리키며, '너희의 것'은 천국에서 받을 부와 영광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세상의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단지 청지기처럼 하나님의 것을 맡은 것뿐이다. 그러나 장차 천국에서는 우리가 영원히 누릴 영광스런 기업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주께서 교훈하시고자 하시는 바는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바른 물질 생활에 대해서이다. 불의한 청지기같이 주인의 물질을 낭비하지 말고 의롭고 충성된 청지기같이 물질을 바르고 성실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바르고 성실한 사용인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전도와 구제를 위해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재물을 바르고 성실하게 사용할 때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더 큰 것, 참된 것, 영원히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을 받으며 누리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성도들의 바른 물질 생활에 대해 교훈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물질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의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간, 우리의 건강, 우리의 재능, 우리의 생명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내 것처럼 생각하고 내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낭비하는 것이며 불충성된 일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로 알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고 성실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들의 바른 물질 생활인가? 성경에 계시된 대로, 그것은 전도와 구제를 위해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힘과 건강으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근검 절약하여 살면서 하나님이 주신 재물로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일과 우리 주변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에 후하게 사용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선하고 충성된 청지기들이 되어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바르게, 선하게 사용하자.
13-18절, 온전한 도덕 생활
본문은 사람의 도덕적 부족의 세 가지 면을 바리새인들과 관련하여 말한다. 그 세 가지 면이란 물질욕과 명예욕과 정욕이다.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본절은 앞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한 결론과도 같다. 집의 종들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사랑하면 다른 한 사람을 미워하는 셈이 되고 한 사람을 중히 여기면 다른 한 사람을 경히 여기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셨고(출 20:3) 또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신 6:4, 5). 또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우리 자신을 미워하고 우리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 9:23; 14:26, 33). 또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교훈하였다(요일 2:15).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겨야지 세상이나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듣고 그를 비웃었다. 물질에 대한 욕심과 탐심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고 딱딱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이라도 배척하고 멸시하였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배척하고 멸시하는 악한 태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물질에 대한 탐심을 가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배척하게 될 것이다.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이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옳다고 여기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 속에 있는 각양의 죄악된 마음의 실상을 보셨다. 그는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 곧 물질에 대한 탐심도 보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 그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셨다(삼상 16:7).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마음 중심을 다 보시며 다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주께서는 또한 바리새인들의 마음 속에 사람들 중에서 높임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셨다. 그것은 그릇된 명예욕이었다. 그래서 주께서는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이란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르드개나 다니엘처럼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상황을 주셔서 높임을 받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 거짓되게 혹은 정당하지 않게 높아지려는 마음은 교만이요 명예욕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높임을 받는 것을 '가증한 것'이라고 여기신다. '미움을 받는 것'이라는 말은 '미워할 만한 것' 혹은 '가증한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정당하게 주시지 않은 명예는 가증한 것이다.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예수께서는 갑자기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구별을 말씀하신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가리키며 구약시대를 나타낸다. 구약시대는 요한의 때까지이었다.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며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듯이 들어간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전도 사역을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고 외치셨다(마 4:17). '나라'(바실레이아)는 '왕국'이라는 말로서 '통치'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사람의 범죄로 죄와 마귀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제 하나님의 통치가 특별한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과 같이 두려운 정죄를 선포하는 방식으로가 아니고 은혜와 용서와 영생의 기쁜 소식으로 선포되었다(요 1:17).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신약시대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영생의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고 해서 율법이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주께서는 율법의 한 획이 무효화 되지 않고 다 성취될 것을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5장에서도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17, 18).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다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롬 10:4; 고전 1:30), 성경은 또한 구원받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실제적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롬 6:13).
[18]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예수께서는 계속 바리새인들과 관련하여 사람의 도덕적 결함의 다른 중요한 한 요소를 지적하신다. 그것은 정욕의 죄악이다. 사람의 이 죄악성은 결혼 생활의 불성실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바로 간음의 죄악이다. 또 남편에게 버리운 이와 결혼하는 것도 간음의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결혼 관계는 사람이 나눈다고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모든 이혼과 재혼을 정죄하는 말씀은 아니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5:32). '음행한 연고 없이'라는 말씀은 음행이 이혼의 합법적 이유가 됨을 보인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이혼의 유일한 합법적 이유이다. 그러므로 재혼도 오직 두 가지의 경우만 합법적인데, 첫째는 사별(死別)한 경우요 둘째는 합법적 이혼을 한 경우이다. 또한 성경은 이혼이 아닌 별거(別居)를 정죄하지는 않는다. 부득이한 경우, 성도는 별거하여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가르친 합법적 이유가 없는 이혼은 인정될 수 없다.
결론적으로, 13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한 마디로 온전한 도덕 생활을 증거한다. 여기에 언급된 세 가지 주제인 돈과 명예와 정욕은 사람들을 죄악과 멸망으로 이끄는 요소들이며 성도들을 실패케 하고 멸망케 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물질욕과 명예욕과 정욕을 극복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돈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돈이란 합법적으로 버는 돈, 예를 들어 직장에서 정당히 받는 봉급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런 것으로 자족하며 근검 절약하여 살아야 한다. 그 이상의 것을 원할 때 시험에 떨어지기 쉽다. 예를 들어 남편들은 직장에서 뇌물 같은 불의의 물질을 받게 되고 아내들은 무리한 직장 생활로 남편을 돕는 집안 일이나 자녀 교육의 일을 다하지 못하는 결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 불행한 일이다.
둘째로,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명예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높이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혹시 우리를 들어 높이실 때까지 겸손히 우리의 처한 환경과 위치에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주신 아내와 남편과 환경으로 만족해야 한다. 결혼한 이들은 결혼 관계를 복되게, 귀중하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며, 혼자인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환경을 주시는 동안 기쁨과 만족함으로 생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범죄케 되고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19-31절, 부자와 거지 나사로
[19-2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의식주에 유여함을 누리고 살았다.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천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즉 그의 옷은 호화롭고 사치스러웠다. 그의 집이나 식생활도 그러하였다. 그는 경제적 유여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집 앞에 있는 거지 나사로를 도우려는 동정심을 가진 것 같지 않다. 그는 자기 만족에 빠져 날마다 즐기며 살았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한 거지가 있었다. '나사로'(라자로스)는 히브리어로 엘르아자르의 준말인데 '하나님은 도우심'이라는 뜻이다. 그를 도울 자는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는 헌데를 앓고 있었다. 그의 옷은 필경 더러운 누더기이었을 것이다. 그는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로 허기진 배를 채우려 하였고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곤 하였다. 그의 친구는 오직 개들뿐이었다.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어느날 그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하나님의 세계에는 그를 섬기는 많은 천사들이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룹'과 '스랍'들이 있고, 심부름하는 '가브리엘'이 있고, 전쟁하는 '미가엘'이 있다. 성도가 죽으면 천사들이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데려간다.
나사로는 죽은 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다. 아브라함의 품은 천국이다. 성도가 죽은 후 가는 곳에 대해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이 없다. 시편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누가복음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성도가 죽은 후 가는 곳은 동일하며, 그 곳은 하나님이 계신 영광의 천국이다.
어느날 그 부자도 죽었고 장사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아마 매우 거창하고 호화로웠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날 죽고, 크든지 작든지 장례식이 치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부자의 미래는 심히 불행하였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그 부자는 죽어 지옥에 떨어졌다. '음부'는 때때로 '무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명백히 '지옥'을 가리킨다. 지옥은 악인이 죽은 후 그 영혼이 들어가는 형벌의 장소이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본 것을 보면, 지옥은 낮은 곳에 있고 천국은 높은 곳에 있다. 천국과 지옥 간의 거리는 매우 멀다.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는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리웠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하늘로 올리우셨음을 보면,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은 하늘 위에 있는 어떤 곳이다. 반대로, 지옥은 땅 아래의 어떤 곳이라고 생각된다. 그 곳은 아마 지구 속의 어떤 곳일지도 모른다. 지구 속에는 매우 뜨거운 불이 있다고 한다. 간혹 화산이 터지면 뜨거운 용암이 땅 밖으로 흘러나온다. 지옥은 바로 그런 불못으로 성경에 묘사되어 있다.
그 부자는 지옥에서 천국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고 또 아브라함과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허락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지옥에서 천국을, 그리고 천국에서 지옥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허락으로 그 부자는 지옥에서 천국의 광경을 보았다.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하고 있었다. 그곳은 물이 없는 곳이었다. 물은 인간 생존에 가장 기본적 요소이다. 지옥에는 물이 없기 때문에 심히 목마름이 있었다. 그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일 것이다. 게다가, 지옥은 불못이다. 거기에는 불의 고통이 있다. 이것은 지옥에 대한 성경의 여러 곳의 증거이다. 부자는 불 가운데서 고통하며 고민하였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살았을 때'란 육신이 살았을 때를 말한다. 영혼은 불멸적이기 때문에 육신이 죽은 후에도 의식을 가지고 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았을 때 좋은 것들 곧 의식주의 풍요로움을 누렸었다. 그러나 그때 실상 그는 영적으로는 빈곤하였었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았다. 그는 인생의 참 목적과 가치를 알지 못하고 살았다.
한편, 거지 나사로는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았었다. 그는 육신적, 경제적 궁핍 속에서 살았다. 그는 의식주에 있어서 거지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본문의 전체적 문맥을 볼 때, 그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들 즉 구약성경을 알았고 믿었다. 물론, 세상에서 가난하면 자동적으로 성경을 믿고 내세에서 위로와 안식을 받는 것은 아니다. 거지 나사로는 아마 가난과 질병 속에서 자신의 허무함과 죄인됨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겸비하게 하나님을 찾았고 만났고 그를 믿고 의지하였을 것이다. 실상, 외적인 유여함보다 이것들이 인생에게 큰 복이다.
세상에서 좋은 것을 누렸던 그 부자는 내세에서 고통과 고민을 가운데 있었고, 세상에서 고통을 당했던 그 거지 나사로는 내세에서 위로와 쉼을 누렸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이었다. 만일 내세에 공의의 보응이 없다면, 만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마지막 심판이 없다면, 인간 도덕의 진정한 이유와 가치가 어디 있겠는가? 오늘날처럼 세상의 도덕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본문은 사람의 죽은 후의 상태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로 증거되었다. 이 세상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섞여 살지만, 저 세상에서도 그런 것은 아니다. 그 곳에서는 분리가 있을 것이며 최종 심판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사람들은 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으로 분리될 것이다. 의인은 위로와 안식의 천국으로 인도되고, 악인은 고통과 형벌의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주께서는 '너희와 우리 사이에'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라는 말은 지옥에 부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있음을 말한다. 지옥에는 천국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노아 홍수심판 때에 구원 받은 사람은 노아의 여덟 식구뿐이었다. 소돔 고모라성의 심판 때에도 그 성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유황불로 멸망을 당했다. 유다 나라가 멸망할 때도 예루살렘 거리에 의인 한 명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넓은 길로 가는 자는 많고 좁은 길로 가는 자는 적다고 말씀하셨다(마 7:13, 14).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자들도 많지만, 지옥에 들어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자들은 더 많을 것이다.
그 부자가 들어간 지옥과 거지 나사로가 들어간 천국 사이에는 고정된 큰 간격이 있었다. '큰 구렁이 끼어 있어'라는 원어는 '고정된 큰 간격이 있어'라는 뜻이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간격은 아담 이후 변경할 수 없이 고정되어 있다. 이것은 거기에 들어간 영혼들의 상태도 고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사람의 최종 상태는 고정된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오는 것도 불가능하고,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죽음으로 고정된 사람의 최종 상태는 아무도 변경할 수 없다.
여기에 하나님의 엄위하신 공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공의와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시고 불의와 죄악에 대해 경고하시지만, 저 세상에서 그는 공의의 보응을 내리실 것이다. 그 보응은 엄위하지만 이미 공개적으로 예고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시며 그의 공의도 변하지 않으신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선언하신 그대로 공의의 보응을 내리실 것이다.
[27, 28]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 부자는 고통 중에서 세상에 남아 있는 형제들을 기억하였다. 자기에게 아무런 위로가 없을 것을 깨달은 그는 세상에 남아 있는 다섯 형제들의 장래를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는 '내 형제 다섯에게 증거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아브라함에게 호소하였다.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다. 그 곳은 악인들이 형벌을 받아 고통을 당하는 곳이다. 그 곳은 불이 있는 곳으로 표현된다. 지옥의 공포는 이방인들도 양심으로 느꼈던 공포다. 모든 악인들은 그 곳에 가게 될 것이다.
지옥에 있는 부자는 나사로가 세상에 돌아가 자기 형제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주기를 소원하였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돌이킬 수 없을지라도 자기 형제들만은 그 곳에 오지 않기를 원하였다. 지옥의 고통을 경험한 자는 당연히 그런 소원을 가질 것이다.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죄인이 회개해야 할 이유이다. 자기의 죄를 회개치 않는 자마다 그 곳에 들어갈 것이다. 또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도해야 할 이유이다.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충족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을 읽고 성경을 들으라'는 뜻이다. 구원을 갈망하는 자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들어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복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언제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30, 31]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부자는 아브라함의 말을 인정치 않았다. 그는 성경의 효력을 믿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통해 회개와 구원의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죽은 자가 살아서 그들에게 돌아가 전도하면 그들이 회개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것은 오늘날 오순절파와 그 파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은 말하기를, 성경을 통해 믿지 않는 자는 기적을 통해서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성경을 통해서 사람을 구원하신다. 고린도전서 1:21-25,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기독교는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고 성경주의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사람의 구원을 위해 충족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날도 구원은 성경에 증거된 대속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쓸 것은 오직 성경을 읽고 성경을 믿고 성경을 실천하고 성경을 전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사람은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 둘 중에 한 곳으로 간다. 지상의 삶은 사후의 상태와 현격히 다를 수 있다. 부자는 지상에서 호화로이 살았으나 사후에 고통을 당했고, 나사로는 지상에서 가난하고 병약했으나 사후에 평안을 누렸다. 천국은 안식과 위로가 있는 곳이지만, 지옥은 고통의 장소이다. 23절, "저가 음부[지옥]에서 고통 중에," 24절,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고통을 받나이다]." 25절, "너는 고민[고통]을 받느니라." 28절, "이 고통받는 곳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은 죄인들이 회개해야 할 이유요, 또한 먼저 믿은 우리가 전도해야 할 이유이다.
둘째로, 사람의 죽은 후의 상태는 변경할 수 없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고정된 큰 간격이 있다. 아무도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거나,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 수 없다. 이 고정된 상태는 사람의 죽음으로 확정된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자신의 처지를 변경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기 전에 그의 미래의 처지를 준비해야 한다. 죽은 후에는 이미 늦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는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죽기 전에 회개해야 하고 우리는 사람들이 죽기 전에 그들에게 전도해야 한다.
셋째로, 사람을 회개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은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이다. 기독교는 기적주의나 은사주의가 아니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이다. 우리는 오직 성경을 읽고 믿고 실천하고 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늘도 죄인은 성경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
여러분은 확실히 구원을 받았는가? 여러분은 영원을 천국이나 지옥, 어디에서 보낼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구주이시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17장: 인자의 날이 갑자기 옴
1, 2절, 남을 범죄케 말라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실족케 하는 것'이라는 원어(스칸달라)는 '범죄케 하는 일들'이라는 뜻이다.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는 말씀은, 사람이 악하고 무지하며 세상이 또한 그래서 그런 일들이 불가피하게 생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주께서 엄하게 말씀하신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하는 일이 얼마나 큰 악임을 나타낸다. 죄는 사람을 멸망케 하는 악이다. 자신이 범죄해도 하나님의 진노로 자신을 멸망케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해도 하나님의 진노로 그를 멸망케 한다.
[2]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는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 중에 믿음이 약한 자들을 가리킨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주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고 믿음이 약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자들은 작은 시험이 와도 넘어지기 잘한다. '연자맷돌'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의 본문으로서 '당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을 뜻한다. 사람이 그런 맷돌을 목에 걸치고 바다에 던지우면 살 가망이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단호하시고 강하시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그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 30).
주님의 표현이 강한 만큼, 이 말씀은 인간에게 있어서 죄가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보여준다. 죄는 사람을 죽음과 지옥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사함을 주는 구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사람으로 보내셨고 십자가에 속죄 제물로 내어주셨다. 인간의 죄악들로 인한 댓가는 이처럼 매우 컸다. 우리는 범죄가 큰 문제인 것을 깨닫자. 우리는 자신의 범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하는 것도 큰 죄악임을 깨닫자. 우리에게 있어서 죄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3, 4절, 회개하면 용서하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우리는 형제의 범죄를 용납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한편 그의 회개를 거절하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형제의 범죄를 용납하면, 우리는 신앙적, 도덕적 방종과 해이에 떨어질 것이다. 그것은 형제 사랑의 남용이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또한 만일 우리가 형제의 회개를 받아주지 않고 거절한다면, 우리는 독선과 교만에 떨어질 것이다. 그것은 공의의 남용이다. 그것은 또한 사랑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한다면 우리는 그를 책망해야 한다. '경계하라'는 원어(에피티마오)는 '책망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의 죄와 잘못을 회개한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주님의 말씀은 또한 만일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범한 자신의 죄를 뉘우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용서와 그와의 교제의 회복을 보류할 수 있다는 뜻도 내포한다고 본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께서는 만일 우리에게 범죄한 자가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않고 회개치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마 18:17). 용서는 상대방의 회개 즉 상대방이 자신의 죄와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을 전제(前提)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4]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주께서는 또한 형제의 회개에 대한 우리의 용서는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라는 말씀은 인간의 부족과 연약을 내포하는 말씀이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죄와 실수도 자주 하고 회개도 자주 하며 용서도 자주 해야 한다. '하루 일곱 번이라도'라는 표현은 용서의 횟수에 제한을 두지 말고 상대가 언제든지 회개하면 그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뜻이다. 또한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이라는 말은 회개하는 자의 중심의 진실성 여부를 따지거나 판단하려 하지 말고 단지 그의 회개의 말에 근거하여 그를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사랑의 교제에 있어서 매우 요긴한 것 한가지는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일치 단합하여 주를 섬기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기 전에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그들도 서로의 부족과 연약을 용서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5, 6절,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사도들이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소원한 것은 좋은 일이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함을 깨닫고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함을 느꼈던 것 같다. 우리는 믿음이 적은 자들이므로 우리의 믿음은 날로 더해져야 한다. 그러나 다음 절의 주의 말씀을 보면 사도들은 이런 깨달음 속에서도 자신들에게 믿음이 상당히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그들의 소원 속에는 '우리에게 믿음이 좀 있긴 하지만 믿음을 좀더 주소서'라는 뜻이 담겨 있었던 것 같다.
[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겨자씨는 지극히 작은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물론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큰 믿음은 큰 역사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 말씀에서 사도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신다. 우리에게는 실상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믿음이 심히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만 바라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주여, 우리의 믿음이 심히 보잘 것 없사오니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주님께 소원을 아뢰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이 꽤 있다는 생각을 다 버리고 우리 자신의 믿음이 심히 보잘 것 없음을 인정하며 주님을 향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든지 항상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7-10절, 무익한 종이라는 마음가짐
[7-9]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주님의 이 비유는 옛날 종의 제도가 있었던 시대에 종의 신분과 의무를 잘 알려 준다. 종들은 주인의 밭을 갈거나 양을 쳤다. 그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 밭에서 돌아와서도 금방 편안히 상에 앉아서 음식을 먹지 못했고 오히려 주인의 상을 준비하고 수종들었다. 그들은 주인이 음식을 먹은 후에야 먹을 수 있었다. 또한 주인은 명령을 다 행한 종들에게 사례하지 않았다.
물론 종의 제도는 이상적 제도는 아니었다. 종들을 혹사시키는 주인은 좋은 주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역사상 존재했었고 주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있는 종의 신분과 의무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옛 시대의 주종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유익하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실상 인간적 주종 관계 이상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시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며, 더욱이 우리는 그를 거역하고 배반했던 죄인들, 즉 그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했던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옛 시대에 주인과 종의 관계를 알 필요가 있다.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사도들이 주께로부터 받은 명령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주께서는 그들이 이 일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하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신약 교회의 모든 봉사자들이 가져야 할 정신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종'이라고 생각하고 처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봉사의 직무를 수행할 때도 나의 힘과 재능으로 한 것이 아니고 주의 주신 은혜와 힘으로 했고 그때에도 우리에게는 많은 부족과 흠이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우리의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못한다. 이런 정신과 태도가 오늘날 목사들과 제직들과 주일학교 교사들과 찬양대원들이 가져야 할 봉사 정신과 태도이다. 우리 모두는 종의 정신으로 겸손히 주님을 섬겨야 한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0절까지의 내용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교훈을 정리해 본다. 첫째로, 우리는 범죄를 큰 문제로 여겨야 한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범죄하는 것도 그렇고 특히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하는 일이 그렇다. 자신이든지 다른 사람이든지 계속 범죄하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고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구원은 죄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의롭다 하심을 주고 다시는 죄 가운데 살지 않게 하시는 구원이다. 죄가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이다. 사람은 누구나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도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범죄하는 자는 회개해야 하고 다른 사람이 범죄하면 사랑으로 그를 책망해야 한다. 특히 다른 사람을 범죄케 하는 사람은 자신이 연자맷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을 정도로 악한 일이다. 죄를 큰 문제로 여기자.
둘째로, 우리는 회개와 용서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죄가 큰 문제인만큼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주 복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신다. 인간이 부족하고 연약하여 죄도 자주 짓고 회개도 자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회개를 언제나 기뻐하시고 용서해주신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자가 그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즉시 용서해주고 또 반복해서 그렇게 할지라도 그러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성도들 간의 교제와 단합과 일치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마귀의 일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이 보잘 것 없으며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종임을 고백하면서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의롭게 살고 범죄치 않기를 힘쓸 때 우리는 잠시라도 우리가 꽤 믿음이 있다거나 우리가 대접을 받을 만한 대단한 봉사자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늘 주의 말씀은 우리가 이런 생각들을 다 버리고 '우리는 무익한 종이며 단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이다'라고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봉사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겸손히 처신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1-19절,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1, 12]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성경 시대의 이스라엘 국토는 우리가 아는 대로 세 지역으로 구분된다. 북부는 갈릴리 지방이고 중부는 사마리아 지방이고 남부는 유대 지방이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방에서 유대 지방의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셨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라는 말씀은 그 동네가 사마리아 지방과 갈릴리 지방의 경계 지역에 있었다는 뜻인 것 같다.
예수께서 그 동네에 들어가셨을 때 그 부근에 살던 나병환자 열 명이 그를 만났다. '문둥병'은 나병 혹은 한센병이라고 부른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동네에서 쫓겨나 동네 밖에서 살아야 했다. 레위기 13: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 나병환자는 사회에서 격리되어 외롭고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아마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가까이 나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예수께 말했던 것 같다.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나병환자들은 예수께 소리 높여 간구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련한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을 부끄러워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들이 예수께 대해 얼마큼의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예수께서 불치병 환자들을 많이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었고 자기들의 병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음에 틀림 없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고 외쳤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의 긍휼 밖에 없었다.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예수께서는 저희를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들이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레 14장).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주의 말씀은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겠다는 뜻을 포함하였다. 예수께서 어떤 때에는 나병환자를 즉시 고쳐주신 경우도 있었다(마 8:3).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즉시 고쳐주지 않으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네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었다. 그것은 옛날 엘리사 선지자가 아람 군대장관 나병환자 나아만에게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다(왕하 5:10). 이런 말씀들은 믿음과 그 증거인 순종을 요구한다. 참된 믿음은 순종의 행위로 나타날 것이다. 그 열 명의 환자들은 주의 말씀대로 갔고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 그것은 믿음의 순종에서 얻은 복이었다.
예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일이었다. 그는 말씀으로 그 불치의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의 능력은 신성의 능력이었다. 그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진 자임을 증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우리의 구주로 세상에 보내어주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신적 구주이시다.
[15, 16]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열 명이 다 병고침을 받았으나, 그 중에 한 사람만 돌아와 주님께 감사하였다. 그는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예수께 돌아왔다. 원문에는 '돌아와'라는 말이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라는 말 다음에 나온다. 다른 이들은 다 바삐 자기 갈 곳으로 갔고, 한 사람만 주님께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이심을 알았음에 틀림 없다. 그는 자기가 받은 은혜를 인해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증거하였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고 그에게 감사드렸다. 그는 자신이 받은 큰 은혜를 깨닫고 예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감사드린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예수께 돌아온 이유이었다.
이렇게 예수께 돌아와 감사한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우리가 아는 대로 이방인과 피가 섞인 족속이었다. 예수님은 다음 절에서 그를 '이방인'이라고 표현하셨다(18절).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같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고 배척하였었다. 그러나 주께 돌아온 사람은 그 사람 하나뿐이었다.
[17, 1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했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보다 더 나은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더 많은 은혜를 입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몰랐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후에 곧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자신의 불쌍하고 비천했던 과거를 잊어버렸다. 그들의 마음은 겸손하지 않았다. 겸손한 자는 사람에게 받는 작은 선물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알지만, 겸손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께 받은 큰 은혜라도 감사하지 않는다. 그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교만하고 배은망덕한 자들이었다.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께서는 병자를 고치실 때 '네 믿은 대로 되라'(마 8:13) 혹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병고침을 받았음을 증거한다. 이것은 또한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그것은 자신의 어떤 의로운 행위가 아니고 그저 긍휼의 하나님만을 바라는 마음이다.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이런 구원받을 믿음이 있었다. 어떤 주석가들의 관찰대로, 그는 나병만 치료 받은 것이 아니고 영혼의 구원도 받았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9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무엇보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를 위한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단지 수많은 불치의 병환자들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 즉 지옥 갈 죄인들을 그 죄와 죄의 형벌에서 건져주신 구주이시다. 오늘도 누구든지 예수께로 나오면 죄씻음과 영생의 구원을 얻는다. 여러분은 예수께로 나오셨는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셨는가?
둘째로, 본사건은 부수적으로 우리가 어려운 문제를 당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함을 교훈해준다. 냉냉하고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뜨겁고 간절한 기도, 때때로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야 함을 가르쳐준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자는 문제의 해결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다(렘 29:12, 13). 예수께서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7, 8). 그러나 많은 교인들은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는 것 같다.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순종은 믿음의 당연한 표현이다. 믿는 자는 순종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들을 얻을 것이다. 믿고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육의 복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믿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아무런 복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실한 모든 말씀을 다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기를 힘써야 한다. 그때 우리들의 삶은 분명히 복될 것이다. 찬송가 377장 가사처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다.'
넷째로, 오늘 본문이 주는 중요한 한 교훈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해 우리가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한 사람 외에는 감사할 줄 몰랐다. 이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가를 잘 보여준다. 더욱이 저 아홉 명의 고침받은 나병환자들은 경건한 전통과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은 유대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릴 줄 몰랐다.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무시를 당하였던 저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감사하였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감사할 줄 모른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사람의 작은 선물에 대해서도 감사할 것이다. 구주 예수의 십자가 대속에 근거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영광돌리며 감사하고 있는가? 우리는 진심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가?
20, 21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음
[20, 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정치적, 경제적, 육체적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로마 제국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경제적으로 가난으로부터 구원을 얻고 육체적으로 모든 질병에서 건강함을 얻는 정치적, 경제적, 육체적 개념의 나라를 바랐던 것 같다. 오늘날도 자유주의적 교회는 정치적, 경제적 하나님 나라 개념을 가지고 있고, 오순절파 교회는 육체적, 물질적 하나님 나라 개념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에 대해, 주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 가운데 있다고 대답하셨다.
주의 말씀은,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가 내면적, 영적으로 시작된다는 것과,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시작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신자들 개인의 심령 속에 그리고 신자들의 공동체 즉 교회 속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이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통치권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회개하고 예수 믿는 신자들 속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믿고 순종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므로써 하나님의 통치권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복음 운동은 하나님 나라 확장 운동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결코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나, 중생(重生)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장차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나타나고 완성될 것이다.
22-37절, 인자(人子)의 나타나는 날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인자(人子)의 날'은 예수께서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사람들 가운데서 가르치시며 거니시며 활동하시는 날을 가리킨다. 때가 오면 제자들이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은, 첫째로, 그가 하늘로 올라가실 것 즉 그의 승천(昇天)을 암시하고, 둘째로, 그가 떠나시고 안 계신 신약교회시대를 암시하고, 셋째로, 그러나 장차 그가 다시 오실 것 즉 그의 재림을 암시한다.
[23, 24]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예수께서는 얼마 동안 안 계시다가 나타나실 것이다. 예수께서 나타나실 날, 곧 '그의 날'이 있다. 그날은 그가 떠나셨다가 돌아오시는 날, 즉 그가 승천하셨다가 재림하시는 날이다. 그가 나타나실 때, 즉 그의 재림의 때에 그는 한 장소에 제한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저편까지 비췸같이 온 세상의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의 재림은 세계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사실상 온 세계는 이미 인터넷 광케이블과 인공위성을 의존하는 전파들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한 지역의 일을 어느 곳에서나 텔레비젼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영적으로 임하고 있고 또 장차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지만,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 일이 있어야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시작될 나라이므로 이 일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이 선행(先行)되어야 했다. 그는 실상 이 일을 위해 오셨다. 그래서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마 20:28).
[26, 27]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질 것이다. 첫째로,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위로와 영광이 될 것이다. 그러나 둘째로,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이 될 것이다. 그것은 노아의 방주 사건과 비슷할 것이다. 방주 속에 들어간 노아의 여덟 식구는 40일 간의 홍수로부터 구원을 얻었지만, 방주 밖의 많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 등 세상일에 분주하다가 마침내 다 멸망을 받고 말았다. 오늘날도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자들은 주의 재림의 날에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고 세상일에만 분주하다가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홍수가 아니고 불의 심판이 성경 여러 곳에 경고되어 있다.
[28-30]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것은 또한 롯의 경우와도 비슷할 것이다. 롯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등 세상일에 분주하였다. 소돔성에서 구원을 받은 자는 롯과 그의 두 딸들뿐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늘로서 내리는 유황불비로 다 멸망하였다.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도 비슷할 것이다. 구원받는 성도들 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 세상에 빠져 세상일에만 분주하게 살다가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31]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것이니라.
주의 재림의 날은 회개치 않은 죄인들에게 심판과 멸망의 날이다. 그날에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다 불타버릴 것이다. 베드로후서 3:10, 11,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불타버리리라--전통사본].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그러므로 재림의 날에는 사람이 지붕 위에 있다가 집안의 귀중품을 가지러 내려갈 필요가 없고 밭에 있는 자가 집으로 돌아가려 할 필요가 없다. 이제 모든 것들이 불태워질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
[32, 33]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롯의 아내처럼 세상과 세상 물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버림을 당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2:15에는 말씀하기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했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적 목숨에 연연할 것도 없다. 우리는 특히 신앙의 절개를 저버리고 육신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주의 재림 직전에 대환난의 시대가 올 것인데, 우리는 어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만 소망하며 하나님의 진리만 붙잡고 육신의 생명을 초월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3:8, 10에는 기록되기를,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 . .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라고 했고, 또 요한계시록 14:9-12에는,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라고 했다.
[34, 35]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주의 재림의 날은 대 분리(分離)의 날이 될 것이다. 그날 밤에 함께 자던 두 사람 중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며, 함께 일하던 두 사람 중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데려감을 당하는 것은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들리움을 받는 것을 가리킬 것이며 버려둠을 당하는 것은 세상에 남겨져 두려운 심판을 받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데려감을 당하는 것 혹은 들리움을 받는 것을 흔히 휴거(携去, rapture)라고 부른다.
마태복음 24:30, 31,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6, 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37]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본절의 뜻은 해석하기 어려워보인다. '주여 어디오니이까?'라는 질문은 들리움을 받은 자들의 집결지가 어디인가라는 질문인 것 같다. 주께서는 그 질문에 대해 일반적인 사실로 대답하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 이 말씀은 아마 이런 뜻일 것이다. '시체'라는 원어(소마)는 단순히 '몸'이라는 뜻인데, 영적으로 죽은 몸들 곧 죄악된 몸들을 위해서는 심판의 천사들이 모여올 것이지만, 영적으로 살아 있는 몸들 곧 구원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의 몸들을 위해서는 영광의 재림의 주님을 맞이하도록 성도들을 돕는 천사들이 모여올 것이라는 뜻 같다.
결론적으로, 20절부터 37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영적으로 시작되었고 장차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나라는 주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여러분은 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는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고 있는가?
둘째로, 주의 재림의 때에 대분리가 있을 것이다. 그때 들리움을 받을 자들이 있을 것이며, 반면에 버리움을 받을 자들도 있을 것이다. 들리움을 받을 자들은 영광의 부활과 천국에서의 영생을 경험할 것이지만, 버리움을 받을 자들은 두려운 멸망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여러분은 그날에 어느 쪽에 있을 것인가? 또 여기에 구원받은 우리 모두가 가진 전도의 대사명이 있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 사랑과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우리의 소망을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과 그의 약속하신 천국에 두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두어야 한다. 노아의 때와 같이, 롯의 때와 같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롯의 아내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애착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 그 여자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육신의 목숨에 연연하지 말고 영원한 천국을 확신하고 소망하며 거기에 합당한 순결한 삶을 힘써야 할 것이다.
18장: 낙망치 말고 기도할 것
1-8절, 낙망치 말고 항상 기도하자
본문은 문맥상 우리가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면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다.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본절의 말씀이나 또 다음 절들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어려운 일들, 심지어 원통한 일들이 있을 것을 보여준다. 이 세상 생활은 모든 사람에게 수고로운 것이지만, 특히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고난으로 단련시키신다. 야곱이나 요셉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바울 등은 다 많은 고난을 겪었던 자들이었고,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도 많은 고난을 감당하셨다.
또 주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고(눅 9:2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다(요 16: 33). 다윗도 고백하기를,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했고(시 34:19), 바울도 증거하기를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고(행 14:22) 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다(딤후 3:12).
성도는 이와 같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과 환난을 통과해야 할 것이므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않는 것이 필요하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위로와 힘을 얻는 길이며 고난 가운데서 승리하는 길이다.
[2-5]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는 이런 교훈을 위해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주께서 비유로 드신 그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었다. 그는 한 보잘 것 없는 과부의 탄원을 얼마 동안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과부는 그에게 찾아와 자주 호소함으로써 그를 자꾸 귀찮게 하고 괴롭게 하였다. 마침내 그 재판관은 그 과부의 탄원을 들어주었는데, 그것은 그가 끝까지 와서 그를 괴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늘'이라는 원어는 '끝까지'라는 뜻이다.
[6, 7]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주께서는,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라고 말씀하셨다. '하물며'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처지가 저 과부의 처지보다 얼마나 더 나은가를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하고 악한 재판관이 아니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신 재판장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지혜와 능력뿐 아니라, 또한 그의 공의로우심과 선하심을 인정하자. 하나님 아버지는 두렵고 무서운 아버지이시지만 또한 좋으신 아버지이시다. 또 우리는, 그 불의한 재판관 앞에서 보잘 것 없고 불쌍한 과부와 같은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된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이런 성도들이 정당한 소원을 밤낮 부르짖어 아뢸 때, 능력이 많으시고 공의롭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 잘 들어주시겠는가!
'그 밤낮 부르짖는'이라는 주님의 표현은 우리가 고난 중에서와, 특히 원통한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열심히 쉬지 않고 기도하고 부르짖어야 할지를 보여준다. 주께서는 기도에 관해 교훈하실 때, "구하라 . . . 찾으라 . . . 문을 두드리라 . . .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7, 8). 바울 사도도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했다(살전 5:17). 구약성경도 우리가 환난 중에 부르짖어 기도할 것을 가르쳤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예레미야 29:12, 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는 전통사본 원문의 구절은 옛날 영어성경처럼 "비록 저희에게 오래 참으실지라도"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의 보기에 때때로 더디며 그래서 우리는 낙망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낙망치 말고 인내하며 하나님께 더욱 열심으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나타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눈물을 잘 아신다. 하나님의 마음은 속히 응답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이 더딜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나으시고, 그의 시간표가 우리의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완벽하시고 선하심을 믿자. 우리가 조금만 더 참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속히' 우리의 기도 제목과 우리의 원통한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성경에는 고난 중에 간절히 기도하여 응답받은 예들이 많다. 구약성경 사무엘상 7장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시작했고 미스바에 백성을 모아 큰 회개의 기도회를 가지고 있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다. 이스라엘에게는 심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때 사무엘은 젖먹는 어린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큰 우뢰를 발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어지럽게 하시므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패배케 하셨다.
또 신약성경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왕이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세 사람 중 하나인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옥에 가두었을 때, 성도들은 그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다. 베드로까지 죽임을 당한다면 교회에는 큰 손실과 타격일 것이었다. 그러나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의 결과, 헤롯이 그를 잡아 내려고 한 그 전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를 기적적으로 구출시켜 주셨고 원수들의 계획과 기대를 폐하셨다.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는 부언하시기를, 자신이 다시 올 때 세상에 믿음이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주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날에, 무덤에 있던 성도들은 살아나고 모든 믿는 자들은 다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재림의 주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광의 천국과 영생을 주실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이며, 거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소망이 있다. 그러나 주의 재림 직전의 세상은 믿음이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왜 그럴까? 많은 요인들 가운데서도, 물질적 부요와 평안,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생기는 육신적 쾌락과 죄악들이 주된 요인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18장에 보면, 마지막으로 멸망할 바벨론 곧 세상 나라의 특징은 각종의 불경건한 사상들과 종교들과 음행과 사치함이다. 오히려 가난과 고난과 질병이 사람의 구원과 참된 믿음을 위해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로움과 안락한 생활이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의 쾌락을 사랑하고 심히 음란한 세상을 만들게 하는 것이다.
물론, 주께서는 멸망할 세상 사람들보다 구원받은 교인들을 더 염려하신다. 주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믿음이 식어지지 않고 그들의 기도 생활이 식어지지 않기를 원하신다. 기도 생활은 믿음과 정비례한다. 우리는 고난 많은 세상 가운데서도 믿음이 약해져 낙심하지 말고 열심으로 밤낮 하나님께 기도하며 특히 원통한 일이 있을 때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심령에는 믿음의 부흥이 필요하다. 그 믿음의 부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말씀 곧 성경말씀으로 일어날 것이다. 성경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주는 책이다. 로마서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도행전 17:11, 12,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써 믿음이 강하여져서 어떤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낙망치 말고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8절까지의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로, 성도들에게는 세상에서 고난과 환난, 심지어 원통한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일들을 이상히 여기지 말자.
둘째로, 그러나 성도는 낙망치 말고 하나님께 힘써 기도해야 하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비록 더딜지라도 반드시, 속히 응답해 주실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기억하자. 그 재판관도 보잘 것 없는 한 과부의 탄원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우리의 소원이랴!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신가?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피로 구속(救贖)받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의 응답을 확신하고 참고 낙심치 말고 열심히 기도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의 기도 생활은 우리의 믿음과 정비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를 소원해야 하며, 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가까이 하여 늘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하기를 힘씀으로써 믿음이 자라고 강건해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고난 중에도 낙심치 않고 항상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9-14절,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예수님 당시 그를 따르는 자들 가운데는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실상 이 세상에 의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다 행하지 못한 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명령을 다 지킬 수도 없고 지키지도 못했다. 만일 우리가 이런 깨달음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우리 자신을 의롭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또한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자는 마음으로 범하는 죄를 죄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께서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음욕을 품은 자는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요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살인한 것이다(마 5:28; 요일 3:15). 사람은 자기 속에 더러운 죄성(罪性)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의롭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은 심히 부패하였고 죄악되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자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을 멸시할 것이다. 이런 자들은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보는 자들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연약성이 바로 자신의 연약성임을 모르는 자들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죄가 바로 자신도 범할 수 있는 죄임을 모르는 자들이다. 더욱이, 이들은 남을 멸시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큰 죄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예수께서 하신 이 비유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당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 두 사람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교인들 중에 두 부류가 있음을 보인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이었다. 바리새인은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이었고, 세리는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이었다.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다. '따로'라는 원어는 '자기 자신에게'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들으실 만한 기도가 아니고 스스로에게 하는 독백과 같은 기도이었다.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자'로 표현하였다. 그는 자신을 토색하는 죄인들, 불의한 죄인들, 간음하는 죄인들과 구별하였다. 토색은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것이다. 불의는 법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간음은 정당한 부부관계를 벗어난 것을 가리킨다. 그는 또 자신을 성전 한 쪽에서 기도하는 세리와도 구별하였다. 그는 세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고 오히려 그를 멸시하였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은 한 주간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였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다. 그러나 그의 금식은 자신의 죄악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아니고 종교적 의(義)나 공로를 쌓는 행위에 불과했던 것 같다. 또 그의 십일조 생활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겸손히 드린 것이 아니고 단지 물질의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거나 종교적인 자기 자랑으로 드린 것 같다. 여하튼 본문은 금식과 십일조까지도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앙심 없이 드릴 수 있음을 보인다.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한편, 세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것은 겉모습의 경건이 아니고 마음 속에서부터 자신이 죄인인 것과 자기 속에 죄악된 성질들이 많이 있음을 깨닫고 통회하는 기도임에 틀림 없었다. 그는 자신의 선함을 자랑할 것이 없었고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할 것밖에 없었다.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주께서는 그 사람의 기도에 대해 평가하셨다. 주께서는 우리의 신앙과 행위, 특히 우리의 기도 생활에 대해 공의로운 평가를 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 주께서는 그 세리가 그 바리새인보다 오히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평가하셨다. 그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 바리새인은 오히려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그에게는 무지(無知)의 죄, 위선의 죄, 교만의 죄, 이웃 사랑이 없는 죄 등이 있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이치가 있다. 자신이 꽤 의로운 줄 알고 자신을 높이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물리치심을 받을 것이지만,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깨닫고 자신을 낮추는 자는 하나님 앞에 용납하심을 받고 붙드심과 세우심을 받을 것이다. 가난한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통회 자복하는 자는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를 받고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가 되지 말고 우리 자신이 심히 연약하고 큰 죄인임을 깨닫고 우리 자신의 연약한 죄악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낮추자.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자는 하나님의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의 은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물리치심을 받을 것이다.
15-17절,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심
[15]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는 어린 아기들을 가진 부모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왔고 예수께서 그들을 만져주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부모들을 책망했다. 아마 그 제자들은 그 부모들이 예수님을 번거롭게 한다고 생각했거나 그들이 쓸데 없이 자기들의 아이들에 대해 인간적 욕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어린 아이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셨다. 또 그는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믿는 이들의 어린 아이들을 물리치시지 않고 용납하셨다. 그가 그 아이들을 용납하신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즉 그 어린 아이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다.
어린 아이들이 무시 당할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구약의 할례에 대한 규정에서 명백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정에서 태어난 아기를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게 하심으로써 그 아기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일원임을 증거케 하셨다(창 17:10- 14). 그러므로 믿는 가정에서 출생한 아이들은 하나님의 기업이요 하나님이 주신 상급이다(시 127:3).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 원리가 신약 시대에도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근거가 된다. 즉 구약 시대에 유아들을 언약 백성으로 삼으셨던 하나님께서 그들을 언약 공동체 곧 구약교회에서 제외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신약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또 주께서는 어린 아이들의 성품이 천국 백성에게 필수적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어린 아이들의 단순하고 순진한 성품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세상을 많이 살수록 사람들은 생각이 복잡해지고 상대방이나 그의 말을 잘 믿지 않는다. 어른들의 생각은 비교적 복잡하다. 또 이중적이고 복선적인 것도 적지 않다. 그런 복잡함 속에서는 무슨 사실에 대한 확신이 생기기 어렵다. 복잡한 마음은 사람을 의심의 수렁에 쉽게 빠뜨릴 것이다. 참 믿음은 어린 아이 같은 단순함과 순진함에서 가능하다. 하나님의 진리와 증거의 내용은 다 진실하고 확실하다. 단지, 사람의 마음이 복잡하여 그것을 잘 믿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어린 아이같이 순진하고 단순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주를 잘 믿을 수 있을 것이고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것이다.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에 보면, 아주 어릴 때 하나님을 믿은 몇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사도 요한의 제자요 2세기의 유명한 순교자인 폴리갑은 9살에 하나님을 믿었고, 18세기의 유명한 기독교 사상가 조나단 에드워즈는 7살에, 영국의 청교도적 지도자 리차드 백스터는 6살에, 유명한 찬송저작자 아이삭 왓츠는 9살에 각각 하나님을 믿었다고 한다. 사람은 어릴 때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다. 또 어릴 때 하나님을 믿은 자는 커서도 그 믿음을 쉽게 떠나지 않을 것이다.
본문에서 보이는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우리도 어린 아이들을 물리치지 말고 용납하라는 것과, 우리도 어린 아이들처럼 단순하고 순진하게 천국에 대한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9절부터 17절까지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교훈을 받는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인됨과 죄악됨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되지 말고 세리처럼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족한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는 어린 아이들처럼 단순하고 순진하게 천국을 영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확실한 증거의 말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이 복잡하여 확실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고 의심의 수렁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어린 아이들처럼 단순하고 순진해질 때 우리는 천국의 말씀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겸손하고 순진한 자들이 되자.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복, 천국과 영생의 복을 받을 자들의 모습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했다. 시편 131:1-3,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18-30절, 재물을 버리고 영생을 취하라
[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관원은 고급 공무원이다. 마태복음에는 이 사람을 '청년'이라고 표현하였다(마 19:20, 22).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하였다. 의롭고 선한 행위를 통해 영생에 이른다는 소위 '업보'(業報) 사상은 이방종교들의 특징이며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천주교회나 율법주의적 기독교의 사상이기도 하다. 물론 율법의 외적인 조건은 '행하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 로마서 3: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주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며 악하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만 지극히 선하시며 죄와 불결이 전혀 없으시다. 로마서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열왕기상 8: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원죄(原罪)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구약 율법에 보면, 여인들은 자녀를 출산한 후에 산혈이 깨끗케 되는 40일 혹은 80일 후에 하나님 앞에 번제와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깨끗함을 얻어야 했다(레 12장).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이 선하시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그 관원이 자신을 단순히 선한 사람으로 여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성경 전체가 밝히 증거하는 대로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다. 그는 사람이시지만, 그는 또한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참된 신성(神性) 혹은 신적 본질이 그에게 있으셨고 현재도 있으시다. 그의 신성은 그의 인성을 지키셔서 그로 하여금 범죄치 않게 하신다. 우리도 우리의 인간의 본성으로는 아직 죄악성과 연약성이 있기 때문에 항상 거룩하게 살지 못하지만,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조금씩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연합되어 있으시므로 그의 인격은 신성의 도움으로 죄 없는 완전한 인격이 되셨다.
[20, 21]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은 우리가 그 명령들을 다 지키면 영생을 얻을 것을 약속한다. 신명기 5:32, 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율법을 다 행하지 못한다는 것과 따라서 율법을 행함으로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 관원은 어려서부터 그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어느 정도 율법을 성실히 지킨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상당히 의롭고 착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선한 행위의 부족함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선과 의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인정받을 만한 선과 의가 되지 못하는 부족한 행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사랑하시며 말씀하셨다. '네가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사람마다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그의 죄악됨을 증거한다. 이 관원의 경우는 하나님 대신 물질을 주인으로 섬긴 것이 부족이었다. 물질에 대한 그의 사랑과 애착은 하나님의 명령이나 주님의 초청보다 더 크고 강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주께서는 모든 신자에게 이것을 요구하시지는 않는다. 모든 신자들이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마음가짐은 그러해야 한다. 성도들은 재물을 버려야 주님을 바르게 따를 수 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자발적으로 이것을 실천했다. 사도행전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사도행전 4:34, 35,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둘째,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우리가 우리의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하시는 선한 일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특히 우리가 자원하여 자신을 절제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리고 선을 행하면 천국에서 상을 얻을 것이다(고전 9:17).
셋째,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주께서는 아무에게나 이런 초청을 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단순히 구원의 초청이 아니고 특별한 초청이었다. 이것은 그를 제자로 혹은 전임사역자로 부르시는 것이었다. 우리의 주님이신 그가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는 것이었다. 그가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믿었다면 주님을 따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물질이나 세상이나 육신의 명예와 쾌락을 더 사랑한다면 주님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그 관원은 큰 부자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였다. 그는 영생을 얻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그 많은 재물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마태복음에는 그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갔다고 했고, 마가복음에는 그가 재물이 많으므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고 했다. 그의 근심은 재물 사랑과 영생 소원의 충돌에서 생긴 근심이었다. 그것은 세상의 재물이냐 천국의 영생이냐 양자택일을 해야 할 때에 생기는 근심이다. 신앙 생활의 과정에는 결국 그런 때가 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해두신 것이었다(마 6:24). 또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누가복음의 앞부분에서 읽은 대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눅 14: 33).
[24]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예수께서는 그 관원이 심히 근심하는 것을 보시고(전통사본)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진리이다. 이것은 현재 부자이든지 가난한 자이든지 모든 사람이 꼭 명심해야 할 중요한 진리이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우리가 재물을 벌기는 하지만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고 재물을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며 살라고 가르쳤다. 잠언 23:4, 5,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디모데전서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디모데전서 6:9, 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모데전서 6:7, 8,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25, 26]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는 말은 불가능한 것을 나타내는 속담이나 격언인 듯하다. 주께서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그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인간은 연약해서 물질의 부요를 소유하면 거기에 빠져서 영생과 천국을 얻기에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고 반문하였다. 본문에서, 영생을 얻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구원을 얻는 것은 다 같은 사실을 가리켰다.
[27]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요 구주이시다. 에베소서 2:8, 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28-30]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베드로는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고백하였다. 그때 주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집이나 부모와 형제나 아내와 자녀들을 버린 자는 금세와 내세에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금세의 복을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집이 우리의 집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우리의 식구들임을 의미하신 것일 것이다. 천지의 은금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대상 29:11; 시 24: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 백성의 영육의 필요,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하실 수 있고 또 공급하실 것이다. 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다 하나님의 가족들이다(마 12:50; 눅 8:21).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홀로 사는 자들도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또 주께서는 내세의 복을 '영생'이라고 말씀하셨다. 영생보다 더 귀한 복은 없다. 이와 같이 경건은 금세와 내세에 약속이 있다. 디모데전서 4:7-10,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디모데전서 6:17-19,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결론적으로, 18절부터 30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과 진리를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재물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모든 재산을 다 팔라는 뜻은 아니다. 물론 전임사역자는 의식주의 기본적인 것 외에 다른 사유 재산을 가지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본문이 보이는 바는 모든 신자가 재물에 대한 애착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돈을 벌기는 하지만, 돈을 사랑하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것을 맡은 청지기의 심령으로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따라야 한다. 거기에만 참된 소망이 있다. 하나님만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 하나님을 따르는 길은 생명의 길이요 평강과 기쁨의 길이다. 시편 23:1, 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러므로 우리의 평생의 소원은 주님만 따르고 주의 뜻을 행하고 주의 일을 크게 여기고 그것을 위해 힘쓰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로, 이러한 경건한 삶에는 현세와 내세에 약속이 있다. 현세에는 우리가 버린 것을 여러 배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진실한 성도들의 교제를 허락하셨다. 믿는 이들은 모두가 다 한 식구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의 부족이 없도록 늘 공급하여 주실 것이다. 그리고 내세에는 확실히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광스러운 영원한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의 재물에 연연하지 말고 재물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힘있게 따라가자!
31-34절, 자신에 대해 예언하심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언하신 내용이다. 우리는 조금 후의 일도 알지 못하는 인간이지만, 주께서는 자신의 미래를 다 아시는 초인적, 신적 존재이셨다.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예수께서는 며칠 후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어떻게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함께 그리로 올라가려 하셨다. 그것은 그의 용기와 그의 충성심이었다. 그는 고난과 죽음을 내다보시면서도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충성하셨다.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에 메시아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어떤 때에는 그들이 제사나 유월절 어린양이나 성막 등의 예표들을 통해 증거하였고 어떤 때에는 보다 직접적 예언들을 통해 증거하였다. 구약성경은 한마디로 오실 메시아에 대해 증거하였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구약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실 메시아에 관한 일이다.
구약성경에 메시아에 대해 기록된 모든 내용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다 성취되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성취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맨처음의 말씀인 마태복음 1:1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족보]라"라고 썼다. 이것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오신 메시아에 대해 증거한다. 예수님의 생애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를 다 성취하는 것이었다. 누가복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특히 그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에 있어서 그러하였다.
[32, 33]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예수님의 생애의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은 죽음과 부활이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으시고 능욕을 받으시고 침뱉음을 받으시고 채찍질을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임을 당하실 것이었다. 구약성경에는 메시아가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예표되고 예언되어 있었다. 죄인인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 짐승을 죽여 드렸던 제사들은 메시아의 죽음을 예표하였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이 집집마다 잡았던 유월절 어린양은 메시아의 죽음을 예표하였다. 제사장들이 오직 짐승 제물들의 피를 가지고서만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성막 제도는 메시아의 죽음의 필요성을 증거하였다. 더욱이,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장에서 메시아의 대속적(代贖的) 고난과 죽음에 대해 분명하게 예언하였다.
이사야 53:1-9,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장사되신 지 삼일 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셨다. 이것도 구약성경에 증거되고 암시된 바이었다. 시편 16:8-11,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 죽음은 인간의 죄 때문에 왔다. 죄가 없으신 메시아는 죽음으로 끝나실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죽으신 후에 반드시 다시 사셔야 하실 것이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결국 다시 살리실 것을 예언하였다. 호세아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구약성경에 예표되고 예언된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예표되고 예언된 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며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해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바울 사도도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복음의 골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증거하였다. 고린도전서 15:3, 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베드로 사도의 전도 내용의 골자도 이 두 가지를 포함하였다. 사도행전 2:22- 24,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도행전 10:38-43,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중요한 까닭은,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였고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과 그의 대속 사역이 확실함을 확증하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구원 신앙의 핵심이다. 로마서 10:9, 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그러나 이 중요한 복음의 내용이 제자들에게는 아직 가리워져 있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사실은 아직 제자들에게 감추어져 있었다.
인간은 심히 정신적으로 어두워져 있어서 하나님의 확실한 진리도 잘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작은 깨달음이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때에만 가능하다. 성경은 이 사실을 너무 분명하게 증거한다.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마태복음 11:25-27,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자 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16:15-17,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누가복음 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사도행전 11:18, "저희가 이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 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사도행전 16:14, "주께서 그[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에베소서 2:8, 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결론적으로, 31절부터 34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자. 구약성경의 성격과 내용과 권위를 바로 알자. 그것이 메시아에 대해 어떻게 예표하고 예언하였는지를 알자. 또 신약성경을 알자.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예표되고 예언된 메시아가 오셨음을 증거한다. 성경의 중심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 행하시는 구원이다. 우리는 신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확신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에게도 성경의 진리들이 감추어져 있고 우리가 그것들을 깨닫지 못하였을 터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조금 그 진리들을 깨닫고 믿게 하셨다.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아직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은혜주시면 그들이 깨닫고 믿게 될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간구하자.
셋째로,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용기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충성된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우리 앞에 고난이 예상되는 상황이 있을지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충성하자.
35-43절,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
[35]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본절은 소경의 불쌍한 처지를 보인다. 인간의 대표적 불행의 하나가 병이다. 소경은 그 한 예이다. 그는 남들이 다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없었다. 그는 가족도, 친구도 볼 수 없었다. 아마 그는 경제적으로 돌보아 줄 가족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길 가에 앉아 구걸하며 생활하였던 것 같다. 육신의 질병은 인간의 영적 질병과 불행을 보여준다. 모든 인간은 다 소경이었다. 하나님도, 천국도, 내세도, 지옥도 알지 못하는 소경이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이 먼 것보다 더 큰 불행이다.
[36, 37]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본문에서 중요한 사실은 이 불쌍한 소경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거기에 모든 문제의 해결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소경이 길에 앉아서 구걸하던 여리고라는 마을을 지나가고 계셨다. 그것은 그 소경에게 은혜받을 절호의 기회이었다. 그 기회를 놓치면 그는 다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직도 하나님은 구원의 문을 열어놓고 계신다. 아직도 그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도록 그들을 부르고 계신다. 아직도 예수님의 복음이 교회를 통해, 전도자들을 통해, 먼저 믿은 이들을 통해 전파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신성의 영으로 오늘도 세상 곳곳을 지나가고 계신다.
[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소경은 예수님을 향해 외쳤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려면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만나기 원하는 우리의 마음을 전해야 한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의 외침은 믿음의 외침이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그가 예수님을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 메시아로 알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어떻게 그 소경이 예수님을 그렇게 알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는 비록 앞을 못보는 소경이었지만, 귀머거리는 아니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또 듣고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 메시아라고 믿게 되었을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 오늘날도 우리가 예수님에 관하여 성경에 증거된 대로 읽고 듣고 묵상할 때 예수님을 확신할 수 있다.
그 소경의 외침은 또한 겸손한 외침이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은 다 자존심이 있어서 자신을 낮추거나 남의 동정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서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자는 겸손히 그 앞에 나아가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의 복을 얻는다(마 5:3).
[39]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그 소경은 하마터면 예수님을 못만날 뻔하였다. 그가 한 번 부르짖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예수님과 동행하던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믿음의 길에는 항상 어려움과 방해거리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때때로 믿는다는 이들을 통해 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소경은 주님께 부르짖는 것을 중단치 않았다. 그는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다. 우리의 믿음은 어려움을 극복할 때 더욱 빛난다. 또 믿음에는 항상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할 때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해야 한다.
[40, 41]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의 낙심치 않은 부르짖음은 응답을 얻었다. 예수께서는 머물러 서셨고 그를 데려오라고 명하셨다. 사람들의 뜻과 예수님의 뜻은 달랐다. 예수님은 그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를 외면치 않으시고 불러주셨다. 오늘날도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부르짖는 자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의 소원을 다 아뢸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 소경의 소원은 너무 분명하였다. 그것은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여'라는 그의 말은 그가 예수님을 자신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뜻이 있다고 본다. 그의 소원은 단순하고 분명하였다. 오늘날도 모든 죄인들은 자신들이 다 영적 소경인 것을 깨닫고 보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자신들이 영적 소경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아니고 다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42, 43]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예수님의 치료는 단순하였다. 그것은 말씀 한마디로 하신 치료이었다. 그는 단순히 그 소경에게 '보아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말씀이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맨처음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창조된 것과 같은 능력의 말씀이었다.
예수님의 치료는 또한 즉각적이었다. 그는 '곧 보게 되었다.' 그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었다. 예수님은 인생을 불행에서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신 것이 다시 한 번 증거되었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이와 같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는 많은 확실한 증거로 증거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오늘날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즉시 구원을 얻을 것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인간을 불행에서 건져내시기에 유능하신 구주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치료는 그 소경의 믿음에 대한 응답이었다. 예수님은 믿는 자를 치료하셨다. 만일 그가 믿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가 예수님께 긍휼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런 치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구원의 이치가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의 사역이지만 단지 그를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 구주 예수님은 능력으로 죄인을 구원하시지만 단지 그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도 믿는 자는 기도의 응답과 구원을 얻을 것이다.
고침을 받은 그 소경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그 광경을 본 사람들도 다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만난 자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35절부터 43절까지의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능력의 구주이심을 다시 한 번 더 증거한다. 여러분은 그를 만났는가? 그에게 겸손히 은혜를 간구했는가? 어려움과 방해거리가 있을 때 낙심치 않고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그에게 간구하여 응답을 받았는가?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과 내세를 보는 영적 눈이 뜨여졌는가? 여러분은 다 구원을 받았는가?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의 문이 열려 있고,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소식이 전파되고 있다. 지금도 그에게 부르짖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행에서 건져주시는 능력의 구주이시다.
19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10절, 삭개오의 구원
[1, 2]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신 것은 특히 거기에 살던 삭개오라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는 목적 없이 어느 곳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심이 없이 그 곳을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 삭개오의 직업은 세리 즉 세금을 걷는 관리이었다. 그는 세리들 가운데서 우두머리이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부자이었다. 세상적 직위가 있고 경제적 부요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기가 어려울 것이다. 당시에 세리들은 죄인으로 취급당하였다. 본문 7절에도 그는 사람들에 의해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상종하지 못할 만한 자로 여기고 그를 멀리하였을 것이다.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그런데 삭개오에게는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어떻게 그 속에 이런 소원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고 그에 대해 생각하고 큰 관심을 갖게 되었음에 틀림 없었다. 그의 소원은 단순히 예수가 무슨 신기한 일을 행하는가 하는 호기심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 보고자 하였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상당히 알고 있었고 어느 정도 끌리고 있었고 이제 그것을 확인해 보기를 원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려움이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는 때때로 어려운 점들이 있다. 삭개오의 경우는 키가 작은 것이 어려운 점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키는 작았고 사람들은 많았다. 자신의 결함과 주위 사람들의 장애 때문에 그는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의 부족한 점과 주위 사람들의 장애 때문에 주께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그러나 삭개오는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예수님의 진행하시는 길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 위에 올라가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보아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생긴 생각이었다.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찾으면 하나님께서 좋은 길을 얻고 찾게 해주실 것이다. 사실,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그의 사회적인 신분에 맞지 않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움이나 체면이나 혹은 나무에서 떨어지면 다칠 수도 있을 위험을 무릅쓰고 뽕나무에 올라갔다. '뽕나무'라고 번역된 원어(쉬코모라이아)는 '시카모 무화과 혹은 무화과 뽕나무'라는 말이다.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께서는 그 뽕나무 아래에 도달하셨을 때 삭개오를 우러러 보시고 그를 부르셨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께서는 신성(神性)의 지식으로 삭개오의 이름을 아셨던 것 같다.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님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구원하실 자를 다 아시고 찾으시고 부르신다.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가까이 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또 예수께서는 삭개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포함하여 그의 집에 관심을 가지셨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가정적 구원은 확실히 하나님의 큰 복이다.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예수님의 말씀은 삭개오에게 너무 예상 외의 것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확실히 삭개오에게 친근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그런 류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의 생각에, 거룩하고 선한 인격이신 예수님은 그를 대면하시면 필경 책망하고 야단을 치실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예상을 깨고 예수께서 자기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책망과 야단은 커녕 가까이 해주시고 심지어 자기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삭개오는 급히 내려왔고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다. 삭개오의 이런 반응을 보면, 그는 벌써 예수님에 대해 그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일 것이라는 긍정적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말씀에 그의 마음은 심히 요동하고 감동을 받기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비록 세상에서 주님을 이렇게 영접할 기회는 없다 할지라도, 주의 종들과 제자들, 예를 들어 교역자들과 권찰들을,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모든 성도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 한 사람이라도 즐거움으로 영접해야 할 것이다.
[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에 관하여 수군거렸다. 상대방의 행위의 동기와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은 수군거리는 일을 잘할 것이다.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죄인과 친구가 되어 그의 죄를 인정하거나 그와 함께 죄악의 낙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오직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집에 들어가신 것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거나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의 고백은 회개의 결심의 고백이었다. 어떻게 그에게 이런 회개의 고백이 가능하였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벌써 그의 마음 속에 이미 자신의 죄에 대한 가책과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하튼 이제 예수님 앞에 선 삭개오에게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앞에서 느끼는 인격적 감화와 성령의 강력한 역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치 밤새도록 한마리 잡지 못했던 물고기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두 배 가득히 잡게 된 후에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처럼,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회개의 결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선 예수님께 '주여'라고 고백했다. 본절은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 . .'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그의 '주여'라는 고백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임을 증거한다. '주님'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의 '여호와'에 해당하는 말로서 예수님의 신성의 명칭들 중 하나이다. 그는 또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며 만일 남의 것을 억지로 혹은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고백했다. 이것은 바른 회개이었다. 사람이 단지 죄를 깨닫고 뉘우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그 죄를 청산하기 위해 결심하는 것이 참된 회개이다. 삭개오는 참된 회개의 고백을 하였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께서는 오늘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언하셨다. 이것은 가정적 구원의 선언이었다. 이것은 그 집의 가장(家長)이 되는 삭개오의 구원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한 집의 가장이 구원을 받으면 온 가족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가장의 위치와 역할은 참으로 크다.
삭개오의 회개와 믿음은 확실히 그의 예수님 영접과 회개의 고백으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회개와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 때때로 신앙고백의 모양은 좀 다르지만, 하나님께 대한 참된 회개와 예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있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사명은 단순히 사람들을 가르쳐 무엇을 계몽하는 것이거나 사람들의 병들을 고쳐주거나 기적들을 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사명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전도하는 것이며(눅 4:43)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이다(눅 5:32).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마 20:28). 본래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잃어버린 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이 되었다. 예수님의 사명은 바로 이런 자들을 찾아 구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0절까지에서,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로서의 사명과 모습을 발견한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들어 가신 것은 바로 삭개오 같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는 삭개오를 찾아오셨고 만나주셨고 집에 들어가주셨고 마침내 구원하셨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주 관심은 영혼의 구원이다. 이것이 또한 우리의 주 관심이어야 하고 우리 교회의 주 관심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성령으로 우리를 통해 죄인들 곧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으신다.
둘째로, 우리는 죄인의 구원의 모습을 발견한다. 삭개오에게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간절하고 겸손한 마음이 있었고 그는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였고 또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청산하기를 결심하였다. 오늘날도 구주 예수님을 간절히, 겸손히 찾는 자는 만날 것이며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청산하기를 결심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참된 회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행 20:21).
셋째로, 이미 구원받은 자들도 이 말씀에 비추어 교훈을 받자.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원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열심으로 성경책을 읽고 기도하기를 힘쓰고 있는가? 또 우리는 얼마나 기쁨으로 주님을 영접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기쁨으로 예배하고 또 기쁨으로 주의 종들을 영접하는가? 또 우리는 얼마나 철저히 우리의 죄를 회개했고 또 청산했는가? 우리에게는 정말 회개의 열매가 있는가? 우리는 구원받은 삭개오의 모습에서 이런 점들을 배우자.
11-27절, 열 므나의 비유
[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예수께서 열 므나의 비유를 하신 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당장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오랜 후에 나타날 것이었다. 벌써 약 1970년이 지났고 아직도 몇 년이 더 지나야 할 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약속하신 나라는 반드시 임할 것이다.
[12]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자신을 어떤 귀인으로 표현하셨다. 예수님 자신은 지극히 존귀하신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요 1:1, 14, 18). 그는 왕으로 오셨으나 아직 본격적으로 왕의 일을 하지 않으셨다. 물론 지금 그가 하늘에서 하나님 오른편에서 영적으로 교회를 다스리고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그러나 그가 장차 다시 오심으로써 그의 왕되심을 완전하게, 영광스럽게 드러내실 것이다. 그는 자신이 먼 나라로 가실 것으로 표현하셨다. 그가 가신 천국은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사실이며 그가 왕위를 받아 왕의 영광을 가지고 돌아오시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릴 것이다.
[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의 열 명의 종들'은 다음 절의 '그의 백성'과 구별된다. 그들은 그의 제자들, 복음의 일꾼들, 오늘날 목사와 전도자들, 또 조금 넓게 보자면 교회의 직분자들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은 한 므나씩을 주며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명령하였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이 그 종들의 재능대로 어떤 이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이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이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주인이 종들에게 동일하게 한 므나씩을 주었다. 한 므나는 약 100일의 품삯이이었고 한다. 므나는 달란트보다 작은 돈의 단위로서 한 달란트가 60므나이었으니, 한 므나는 60분의 1 달란트에 불과하였다. 그 귀인이 종들에게 똑같이 한 므나씩 준 것은 어떤 동일한 임무와 사명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한 므나는 아마 모든 복음의 일꾼들이 주께로부터 받은 전도의 임무와 사명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주께서는 목사와 전도자들에게 당신의 재림의 날이 되기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하라고 명령하셨다.
[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범죄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난 세상은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적대적이다. 이 비유에서도 그러하다. 귀인이 다스릴 그 나라의 백성은 저를 미워하였고 사자까지 보내어 그가 자신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였다. 구약교회는 빈번히, 그리고 신약교회 조차도 종종, 배교적이었고 불신앙적이고 불순종적이었다. 예수님 당시의 구약교회가 그러하였다. 이것이 죄악된 인간 본성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변하지 않고서는 이 인간의 병폐는 결코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이 비유에서 귀인은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왕으로 다시 오실 것을 가리킨다. 주님의 재림은 미래의 확실한 사건이다. 돌아온 귀인은 은을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불렀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그가 세우신 복음의 일꾼들을 불러 그들이 얼마나 충성되이 일했는지를 평가하실 것이다.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은 장차 재림의 주님 앞에서 자신들의 받은 직분에 얼마나 충실했는지에 대해 판단을 받을 것이다. 재림하신 주께서 친히 판단하실 것이다.
[16, 17]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첫번째 종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다는 보고를 주인에게 드렸다. 그는 참으로 열심히 일했음에 틀림없었다. 주인은 그에게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라고 칭찬하였다. 또 주인은 그 종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다'고 인정하였다. 비록 한 므나는 장사하기에는 별로 큰 자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한 달란트에 60분의 1 정도밖에 안되었다. 그러나 그 종은 그 작은 것을 가지고 성실히, 열심히 일하였다. 그는 놀지 않았고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주인은 또한 그에게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주께서 주신 직분에 충성한 복음의 일꾼들에게 내리실 상을 나타낸다. 주님의 상은 직분자들의 충성의 정도에 따라 주어질 것이다.
[18, 19]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두번째 종도 열심히 일하여 이익을 많이 남겼다. 그는 비록 첫번째 종처럼 열 므나를 남기지는 못하였지만 다섯 므나나 남겼다. 복음의 일꾼들의 열심과 성실성은 각각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좀더 열심히, 성실하게 일할 것이고 다른 이는 그보다 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종들의 일한 정도에 따라 영혼 구원의 열매의 양도 다를 것이다. 주인은 그 두번째 종에게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복음의 일꾼들에게는 그들이 일한 만큼의 상이 주어질 것이다. 고린도전서 3:8,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20, 21]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세번째 종은 앞의 종들과 달랐다. 그는 받은 한 므나를 수건에 싸두었었다. 그는 주인에 대해 합당치 않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종의 임무는 주인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 외의 다른 것은 그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종은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주인에 대해 두려워했고 불평하였고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주인의 명령에 순종치 않았다. 그는 종으로서 합당치 않은 자이었다.
[22, 23]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주인은 그 종을 '악한 종'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렇다. 종의 임무를 하지 못한 그는 좋은 종, 착한 종이 아니고 나쁜 종, 악한 종이었다. 또 주인은 그에게 네가 나에 대하여 그런 생각을 했다면 왜 내 은을 은행에 두어 내가 올 때 이자라도 받게 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하였다. 그 종은 주인에 대해 잘못된 생각과 두려움과 불만을 가진 것 뿐만 아니라, 지혜가 없고 게으른 것이었다. 만일 그가 조금의 지혜와 성실한 마음이 있었다면, 그는 그 돈을 은행에 맡겨 이자가 생기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그 돈을 수건에 싸두었던 것이다.
[24-26]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주인은 그 종의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게 하였다. 그리고는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말씀하셨다. 주께 대한 믿음과 사랑, 그래서 순종과 충성과 열매가 있는 자는 상을 받고 더 받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사랑, 순종과 충성이 없는 자는 마지막 심판 때에 그가 받았던 것 조차도 빼앗기게 될 것이다.
[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주인은 또한 자기가 왕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백성들을 '원수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을 불러모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이것은 배교적, 불신앙적, 불순종적 교회의 종말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들이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데살로니가후서 1:7-9, ". . .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결론적으로, 11절부터 27절까지의 열 므나 비유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이 비유에 담긴 기본적 진리는 우리 주님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우신 후 장차 왕위를 가지고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진리와 소망을 굳게 붙들자.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둘째로,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은 착한 종같이 지극히 작은 일에도 충성해야 한다. 사실상, 모든 성도는 다 항상 성경책을 읽고 기도하기를 힘쓰며 서로 사랑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전도의 사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종같이 주께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지 말고 또 게으르지 말고, 우리에게 맡겨진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심정으로 주의 일에 힘쓰고 또 전도하자.
셋째로, 우리 모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거부하고 대항하는 불신앙적이고 불순종적 백성이 되지 말고, 그의 왕권을 믿고 기뻐하며 겸손히 그에게 순종하는 백성이 되자.
28-40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28-3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계셨다. 그는 거기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었다. 그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를 원하셨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뜻도 있지만 또한 그의 겸손함을 나타내심이었다(마 21:4, 5).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는 세상에서 나귀새끼 한 마리도 소유하지 않으셨다. 그는 인간적 표현으로 가난한 삶을 사셨다. 그러나 실상 온 세상이 그의 소유이었다.
그가 두 제자를 맞은편 마을로 보내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풀어 끌고오게 하신 것은 그의 신적인 지식을 증거한다. 하나님 외에 누가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맞은편 마을에 매여 있는 나귀새끼,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그 어린 짐승을 아셨고 보셨고 그것을 풀어 끌고 오라고 지시하셨던 것이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그의 신적 영광을 본다.
[31-34]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 나귀새끼는 주인이 있는 짐승이었다. '그 임자들'이 있었다(33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풀어 끌고 오라고 지시하셨다. 또 누가 그들에게 어찌하여 푸느냐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그 나귀새끼를 보았고 그것을 풀 때 그 임자들이 어찌하여 그것을 푸느냐고 묻자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하였다. 제자들에게 하신 그 명령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 나귀새끼의 참된 주인이 된다는 것을 암시하셨다. 아니, 예수님은 그 나귀새끼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실상 세상 모든 만물의 주인이 되신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것은 그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나님 외에 누가 이 세상의 참된 주인이신가? 우리가 세상에서 개인적 소유물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우리의 모든 소유의 참 주인은 우리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35, 36]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며 높이었다. 그들은 끌고 온 나귀새끼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쳐놓고 예수님을 태웠고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도 펼쳤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겉옷(히마티온)은 옷일 뿐만 아니라, 밤에는 이불 역할을 하는 필수품이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의 겉옷들을 예수님을 위해 펼쳐 드렸다. 그들에게는 겸손함이 있었고 예수님을 향한 경외심이 있었다. 우리도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따르자.
[37, 38]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또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능력의 일들을 인하여 기뻐하면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또 그들은 예수께 대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 복되다'고 외쳤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그 메시아, 곧 약속된 왕이신 것을 믿었던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오실 메시아께서 왕으로 증거되어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성경에 약속된 그 분으로 믿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우리도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자. 그것이 구원받은 백성의 표시가 될 것이다.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그러나 무리들 중에는 믿는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그러하지만, 무리들 중에는 믿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그런 자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보수적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바르고 참된 신앙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 정도로 알고 있었다. 아무리 예수께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를 선생 정도로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예수님은 훌륭한 선생님이시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이시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아 곧 우리의 구주이시요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시다. 그러나 그 바리새인들은 그를 경외하고 찬송하는 제자들을 오히려 책망하라고 예수께 요청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무지함과 믿음 없음을 드러낼 뿐이었다. 우리 가운데는 아직 예수께 대한 이런 정도의 지식을 가진 자들은 없는지!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요청에 대해 오히려 그들을 반박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셨다. '이 사람들은 정당한 찬송과 고백을 하나님 앞에 올렸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게 된다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이것은 격언적인 표현인 것 같다. 혹은 여기의 돌들이 이방인들을 표현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주실 자들에게 예수께 대한 참 믿음과 순종심을 주실 수 있고 또 그렇게 주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28절부터 40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곧 우리의 주, 우리의 왕이시다. 이것이 신약성경 전체가 예수께 대해 증거하는 바이다. 마태복음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요한계시록 17: 14,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기쁨으로 그를 찬양하자.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표시이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빌립보서 2: 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셋째로, 우리 중에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오늘 그 생각을 버리라. 모든 무지와 불신앙을 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자. 나다나엘은 처음에 예수님을 소개받았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하면서 믿지 않았으나 후에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다(요 1:45-49). 도마도 처음에는 주님의 육체적 부활을 믿지 않았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본 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요 20: 28). 오늘날 우리 중에 예수님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도 성경 말씀과 성령으로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 구원을 받게 되기를 바란다.
41-48절, 성을 보시고 우심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성을 보시고 우셨다. 그가 세상에서 30여년 동안 사시면서 여러 번 우셨겠지만, 특히 성경은 그의 세 번 우심에 대해 증거하였다. 본절의 말씀이 하나이고, 또 요한복음 11:35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셨고, 또 히브리서 5:7에 보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아뢰었다. 이 마지막 말씀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의 기도를 가리켰을 것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을 보시고 우신 것은 그 성의 장래를 생각해서이었다. 그 장래를 생각하니까 슬프고 답답하고 불쌍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동정과 사랑의 눈물을 가지신 분이셨다. 하나님은 싸늘한 공의만 가지신 분이 아니시고 또한 따뜻한 동정과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다.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평화에 관한 일은 예수님 자신에 관한 것을 가리키는 줄 안다. 참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얻는 마음의 평안과 환경적 평안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참 평화를 잃어버렸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평화를 주시러 오셨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이 평화의 일이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숨기워 있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핍박하고 죽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주시는 평화를 알지 못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자. 바로 알자!
[43, 44]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의 날을 내다보셨다. 그날은 역사적으로 주후 70년 로마의 장군 디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은 포위되었고 마침내 함락되었고 예루살렘 거민들과 그 자녀들은 땅에 메어침을 당했고 성전과 성벽과 집들은 다 무너졌고 불태워졌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메시아를 보내어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돌아보시는 날을 알지 못했고, 그날을 저버린 결과는 너무 비참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는 날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슬픔과 불행의 날이 다가오기 전에 죄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45, 46]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께서는 그 곳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권위를 가지시고 그렇게 하셨다. 사실상, 구약의 성전은 바로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을 위한 집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예표했던 집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바로 그 성전에 대해 가장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으로 의도되었다. 예수께서는 그 사실을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증거하셨다. '기록된 바'라는 그의 성경 인증은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 된다'는 개신교회의 기본적 신념을 확증한다. 구약의 성전은 일차적으로는 장차 오실 메시아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미리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성전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 지를 보여주었다. 즉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는 처소이었다. 오늘날도 예배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송하고 기도하는 곳이다. 또한 이것이 교회가 첫번째로 해야 할 의무이다.
그러나 당시에 성전의 이 순수한 기능은 부패되어 있었다. 성전 안에는 소나 양들을 파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종의 독점적 판매 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성전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제사를 위한 소나 양들을 독점적으로 팔아 이익을 남겼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것은 도적질이나 강도질과 같았다. 그래서 주께서는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지적하시고 책망하셨을 것이다. 구약 교회는 부패되어 있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어떤 명목이든지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똑같은 악이다. 어느 교회가 장로와 권사 같은 직분자들을 세우면서 혹은 예배당 건축을 위해 혹은 병고침을 위한 안수 기도를 위해 헌금을 강요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도 도적질이나 강도질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어지신 주께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신 것은 성전을 향한 그의 열심 때문이었다(요 2:17). 성전의 청결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고 중요한 문제이었다. 교회의 순결성은 교회가 지켜야 할 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교회에서 모든 교리적 오류와 윤리적 오류를 제거하고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은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오늘날도 교회를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순수한 교회가 되게 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47, 48]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예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설교와 가르침은 그의 사명이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마 4:23; 막 1: 38). 또 그는 바울 사도를 통해 우리에게도 명령하시기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라고 하셨다(딤후 4:2). 그러므로 주의 진실한 종들은 어떠한 환경 여건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른 설교와 가르침의 일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두 가지 상이한 반응이 있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은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 꾀하였고 단지 좋은 방침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모든 백성은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두 가지 대조되게 나타나는 현상은 진리의 운동에서 항상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구약의 진실한 선지자들은 배척과 핍박을 받았던 종들이었다. 또 사도행전 28:24, 25에 보면, 바울이 로마에 가서 유대인들을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강론하며 예수님의 일을 증거할 때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리의 말씀 앞에는 항상 두 가지 상이한 반응이 있다. 우리는 진리를 배척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진리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41절부터 48절까지에 나타난 대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을 보고 우시고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고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으신 일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자들이 되자.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영접하며 온전히 따르자. 그것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영접할 때 하나님과 화목하고 마음과 환경의 참된 평안을 얻게 된다. 우리는 주님을 거절하고 배척하는 어리석고 악한 자들이 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진실한 제자들이 되자.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참된 교회, 순수한 교회가 되게 하자.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이 곳은 우리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소망을 둘 수 있는 곳이다. 만일 교회가 부패된다면, 우리는 어디에 소망을 둘 수 있겠는가?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는 우리가 용납할 수 없고 용납해서도 안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오늘날 교회는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순결성의 회복을 위한 노력은 우리가 힘써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로 하여금 순수하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듣고 배우는 교회가 되게 하는 일을 위해 힘쓰자.
20장: 변론하심
1-8절, 자신의 귄위의 출처를 묻는 말에 답하심
[1, 2]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함께 예수께 와서 그의 권세와 권위의 출처를 질문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나 기적들을 행하실 때나 성전뜰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실 때에 권위 있게 행하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가지신 권위는 인간적인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주신 권위 곧 신적 권위이었다. 그러나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바로 알고 믿으려고 질문한 것 같지 않고 단지 그를 비난할 거리를 찾기 위해 한 것 같다. 정말 믿고자 하는 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이심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7:16,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3, 4]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마음을 아셨다. 그래서 그는 직접 대답하시는 대신에 도리어 한 질문을 하셨다. 그것은 예수님 전에 나타나 활동했던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나온 것 즉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물으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참 선지자를 아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 것이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참 선지자임을 아는 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것이다. 더욱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친히 증거하였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을 믿지 않고 거절한 자는 예수님도 믿지 않고 거절할 것이다.
[5-7]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유대 지도자들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그들의 대답은 심히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이었다. 선한 양심과 용기를 가진 자들은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고 그대로 행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요한은 하나님의 진노의 임박함과 각 사람의 회개의 필요성을 외쳤다. 역사상 거짓 선지자들은 부드러운 말을 했고 심판과 회개를 외치지 않았다. 요한이 회개를 외친 것은 확실히 참 선지자의 표이었다. 백성들은 세례 요한을 참 선지자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의 태도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심히 무지하였거나 매우 완악하였다. 실상, 사람은 누구든지 세상의 명예나 권세나 부귀나 육신의 쾌락을 구하는 삶을 회개치 않고서는 예수님께 진정으로 나올 수 없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저 지도자들의 중심을 아시고 자기도 그들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신다. 그것은 그들에게 말해도 그들이 듣지 않고 믿지 않고 그 앞에 복종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완악한 자들에게 진리를 말하는 것은 마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것과 같을 것이다(마 7:6).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다음에 나오는 악한 농부들에 대한 비유를 통해 그 지도자들의 악함을 지적하시고 자신의 권위의 출처에 대해서도 암시적으로 증거하셨다.
9-18절, 악한 농부들에 대한 비유
[9, 10]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한 사람'은 하나님을 가리키며,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 즉 구약교회를 가리킨다. '농부들'은 이스라엘 즉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가리킨다. 주인이 얻기를 원한 '포도원 소출'은 하나님의 백성의 열매 즉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건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선행을 가리킬 것이다. 주인이 보낸 '종'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참 선지자를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를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 하나님의 참된 종을 거절하고 박대하는 것은 곧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거절하고 박대하는 것이었다.
[11, 12]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하나님께서 다른 선지자를 보내셨으나 유대 지도자들은 그도 심히 때리고 해하고 거저 보내었다. 하나님께서는 세번째 자기의 종을 또 보내셨다. 세번씩이나 종을 보내었다는 표현은 단지 숫자적인 세 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 번 자기의 종들을 보내셨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열심과 오래 참으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거절하였다.
[13-16]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포도원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의 아들을 보내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나타낸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다. 그는 구약의 참된 선지자들보다도 뛰어나신 분이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밝히 증거하고 있다. 요한복음 20:30, 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내시는 아들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존경과 높임을 받아야 할 것이었다.
[14-16]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이스라엘 곧 구약교회의 상황은 정반대이었다. 그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것이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셨다. 또 그는 아들을 거절하고 죽인 저 지도자들의 결말에 대해서도 증거하셨다. 주인은 와서 그 농부들을 다 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그것은 아들을 죽인 죄악의 댓가로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유대 교회 대신에 이방 교회를 세우실 것을 나타낸다고 본다. 그 비유를 듣던 백성들은 일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으나 일은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17]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주께서 구약교회에서 버림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성경 여러 곳에서 예언된 바이었다. 본절에 인용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는 시편 118 :22의 말씀도 그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유대 교회의 건축자들 곧 지도자들에게서 버림을 받으실 것이었다. 그는 그들의 미움과 계략에 의해 죽임을 당하실 것이었다.
그러나 그 '건축자들의 버린 돌'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었다. 그것은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이 될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승리가 될 것이었다. 과연 유대 지도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예수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우리를 위한 영원한 대속(代贖)을 이루셨다. 그는 신약교회의 머릿돌이 되셨다. 신약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든든히 건립되게 되었다.
[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로 가루를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구원의 돌인 동시에 심판의 돌이 되신다. 그에게 걸려 넘어진 자들 곧 그를 거절하고 불신한 자들은 다 깨어지고 멸망을 당하고 만다. 또 최종적으로도 그는 그를 대항하는 모든 사람들을 영원한 멸망의 형벌로 벌하실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1:7-9, ". . .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완악한 자들도 그가 깨뜨리시면 깨뜨려져서 새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 그는 어떤 악한 죄인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실 수 있는 구주이시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8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처럼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거절하지 말고 그의 참된 종들을 거절하지 말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거절하는 것은 인생의 무지요 완악함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종들의 교훈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는 것은 진실한 교인들의 기본적 마음가짐이다. 참 교인은 하나님께 찬송하기를 원하고 기도하기를 좋아하고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기를 기뻐한다. 또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건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들의 열매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고 하나님의 뜻을 힘써 행하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거절한 구약 지도자들의 결말을 두려워하자.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그는 영원히 참지는 않으실 것이다. 마지막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한 자들은 그날에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모든 인생은 그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성실한 하루 하루를 살도록 힘써야 한다.
19-26절,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의 말씀이다. 그 말씀 앞에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회개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기는 커녕 예수님을 잡고자 했고 마음 속으로 그를 미워하고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심히 어둡고 완악하였다. 오히려 다수의 백성들은 양심적으로 예수님을 존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저 지도자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였다.
[20]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저 악한 지도자들에게는 악한 지혜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엿보다가 정탐들을 보내어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자신들을 정당화할 구실을 찾아 여론을 조성하고 백성의 생각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악함을 감추었다. 그들은 솔직하지 않았고 정정당당하지도 않았다.
[21]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그들이 보낸 정탐자들의 말은 외식적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실제로 그렇게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옳은 말이었다. 예수님은 바른 말씀으로 말하고 가르치셨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도와 진리를 진실하고 참되게 가르치셨다. 그의 모든 말씀은 진실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었다.
[22]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유대 나라의 독립을 갈망하던 사람들 가운데는 로마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한 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반대는 로마 제국과 황제를 거역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누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찬성한다면 유대인들에게 친(親)로마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 질문은 반대도, 찬성도 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넣어보려고 머리를 썼다.
[23]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가라사대.
그 지도자들은 악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고 비난하고 죽이기 위해 교묘히 시험하는 질문을 한 것이었다. 악한 자들은 악한 일을 하는데 지혜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적 지혜와 능력으로 그들의 간계를 아셨다. 여기에 예수님의 신적 영광이 다시 한 번 드러난다. 그는 사람의 생각과 속 뜻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참된 지혜에는 어른이 되어야 하지만,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24]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데나리온은 당시에 통용되던 은전을 가리킨다. 옛시대의 돈은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나타내었다. 그 은전에는 로마의 가이사 황제의 얼굴과 글이 쓰여 있었다. 그것은 그 은전을 쓰는 지역에서의 로마 황제의 통치권을 나타내었다.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한 영토이었고 로마 황제의 통치권 안에 있었던 것이다.
[25]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유대 나라가 로마 제국의 한 부분이요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에게 바쳐야 할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하였다. 이것이 성경에 증거된 하나님의 뜻이다. 로마서 13:1, 7,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그러나 다른 한편,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하나님의 것'은 실상 세상의 모든 것이다. 시편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규정하셨다. 레위기 27: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민수기 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말라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십일조를 내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십일조 생활을 강조하셨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어떤 이들은, 십일조는 율법 시대의 규례이며 신약 시대에는 폐지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단순히 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고 율법이 완성된 것이며 그 완성은 구약 때보다 축소되거나 쇠약해진 완성이 아니고 더 풍성해진 완성이다. 즉 구약 시대에는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이다가 신약 시대에는 전체가 내 것이 되는 식의 성취가 아니고 오히려 신약 시대에는 나의 소득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 되는 식의 성취인 것이다. 로마서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고린도전서 6:19, 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므로 십일조의 정신은 지금도 살아 있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들의 헌금은 십일조 이상이어야 합당하다.
[26]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유대의 지도자들이 보낸 정탐자들은 백성 앞에서 예수님의 말을 책잡을 수 없었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기며 잠잠하였다.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지혜로웠고 정당하였다.
결론적으로, 19절부터 26절까지의 내용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지혜와 지식을 본다. 그는 유대 지도자들과 그 정탐자들의 간계를 아셨다. 그의 대답은 사람들의 기대를 초월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지혜와 지식을 통해 그의 신적 영광을 본다. 우리는 복음서들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믿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가 속한 국가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고 위정자들에게 복종하고 또 규정된 정당한 세금을 성실하게 내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신약 아래서도 구약 성경의 교훈과 모범대로 소득의 온전한 십일조와 감사 예물들을 힘써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다.
셋째로,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악한 자들이 되지 말자. 저들은 예수님을 미워했고 죽이려 했고 거짓되며 외식적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이는 자들, 진리의 대적자들, 하나님의 원수들이 되지 말자.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 교회를 허무는 자들, 하나님의 일을 파괴하는 자들이 되지 말자. 요한일서에 증거한 대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자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 자이다. 우리는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기를 결심하는 자들이 되자!
27-40절, 부활에 관해 증거하심
신구약성경과 예수님은 성도들의 영광스런 부활이 있을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 실제적으로도 부활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생활의 큰 차이를 가져온다. 부활을 믿는 자는 하나님 중심, 천국 중심, 내세 중심, 진리 중심으로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지만,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오직 이 세상 중심, 자기 중심, 물질 중심으로 허무하게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27]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예수님 당시에 유대 사회에는 성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다. 특히 사두개인들이라는 자들이 그러하였다. 사도행전 23:8에 보면, 그들은 부활도 없고 영도 없고 천사도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저들은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같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부활을 믿지 않는다. 이런 자들은 참으로 허무한 자들이다. 내세와 천국과 부활을 믿지 않으면 이 세상만 믿는 자들인데, 이 세상은 장차 불타 없어질 세상이며 인생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부활을 부정하는 저들은 참으로 허무한 자들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사두개인 같은 불신앙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28]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사두개인들이 언급한 모세의 법은 '수혼(嫂婚) 제도'라고 불리우는 법이다. 이 법은 결혼한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취하여 그 첫아들로 형의 가문을 잇게 하는 법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자식이 없이 죽는 사람의 가문이 없어지지 않게 되었다. 이 법은 이스라엘 민족의 각 지파를 보존하여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아께서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실 수 있게 하는 목적을 가진 법이었다.
[29-33]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세째가 저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인들은 일곱 형제가 있는 어떤 집을 예로 들었다. 아마 가상적인 예일 것이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예이다. 맏형이 결혼한 후 아들이 없이 죽었고 여섯 동생들이 차례로 형수와 결혼하였으나 그들도 다 아들이 없이 죽게 되었다. 그러면 부활 때에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사두개인들은 부활의 사실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부활의 성격도 오해하였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였던 것 같다. 그들은 부활을 믿는 자들이 부활 때에 부부 관계가 있다고 믿는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34-36]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부활에 대해 증거하셨다. 그는 부활에 대해 세 가지 점을 증거하셨다. 첫째로, 그는 모든 사람이 부활에 참여하지 않고 한정된 사람들만 참여할 것을 증거하셨다. 그는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을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이라고 표현하셨고 또 그들을 '부활의 자녀'라고 표현하셨다.
이것은 악한 자들도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신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는 또 다른 곳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 5:28, 29). 그는 의인들의 부활과 악인들의 부활에 대해 분명히 가르치셨다.
본문이 말하는 부활은 의인의 부활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부활에는 제한된 수의 사람들만 참여할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만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요 3:5). 죄악된 삶을 버리고 예수님의 피로 깨끗케 된 자들만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갈 수 있다(계 21:27; 22:15). 이들은 인류 전체가 아니고 제한적이고 한정적이며 세상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아니고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이다. 멸망의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은 많고 영생의 좁은 길로 가는 사람들은 적다고 하신 주의 말씀과 같다(마 7:13, 14). 우리는 그 한정된 사람들의 수에 들어야 한다.
둘째로, 주께서는 부활의 성격에 대해 증거하셨다. 부활의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부활한 자들이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다시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부활한 자들은 결혼하지 않는다. 천국에서는 결혼 관계, 부부 관계가 없다. 결혼과 부부 관계는 이 세상에서만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 결혼이 필요한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서로 돕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창 2:18), 둘째는 자녀들을 많이 출산해야 하기 때문이고(창 1:28), 셋째는 음행의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고전 7:2). 그런데 이 세 가지 이유들은 다 천국에서는 불필요하다. 천국은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이다. 또 천국에서는 더 이상 자녀의 출산이 필요하지 않다. 또 부활한 몸은 전혀 육신의 정욕과 죄악성이 없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음행의 죄를 범할 일이 없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결혼의 필요성이 없다. 그러나 천국은 세상의 어떤 가정보다 더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 넘치는 곳이다.
부활한 자들은 또한 다시 죽을 수 없다. 천국에는 장례식이나 무덤이 없다. 거기에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죽음은 죄로 인해 왔기 때문에 천국에는 죄가 없으므로 죽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부활의 몸을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한 몸'이라고 말하였고(고전 15:42, 43),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외쳤다(고전 15:55). 사망은 마침내 영원히 추방되고 말 것이다.
주께서 본문에서 부활할 자들을 '천사와 동등하다'고 표현하신 말씀은 부활할 자들이 천사처럼 육체가 없는 영이 된다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성경은 천사와 사람을 분명히 구별한다. 천사는 물질적 육체가 없는 영적 존재이며, 사람은 물질적 육체와 영을 둘 다 가진 존재이다. 영과 육체를 둘 다 가지지 않은 사람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동등하다'는 말씀은 사람이 천사처럼 영적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사람이 천사들처럼 결혼을 하지 않고 또 육체적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천사들이 결혼하지 않듯이, 부활한 사람들도 결혼하지 않을 것이고, 천사들이 죽지 않듯이 부활한 사람들도 죽지 않을 것이다.
[37, 38]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셋째로, 주께서는 부활의 근거를 증거하셨다. 부활이 과연 성경적 진리 곧 하나님의 진리인가? 구약성경은 부활에 대해 확실히 증거하고 있는가? 물론, 주께서 언급하지 않으신 구약성경 구절들 가운데 부활에 대해 증거하는 구절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이사야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그러나 주께서는 이런 구절들을 인용하지 않으셨고 이것들보다 더 근원적인 한 구절을 인용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말씀하신 자신의 명칭에 관한 구절이다. 즉,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는 구절이다(출 3:6). 주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하셨다. 이것은 참으로 평범하게 보이지만 부활에 대한 더 근원적인 증명 구절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는 말씀 안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다는 뜻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 즉 죽은 인물들을 기억하는 정도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물론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등은 다 죽었지만, 그 영들은 다 천국에 살아 있고 그 육체도 어느날 부활할 것이다. 실상,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일진대 그들은 다 부활해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부활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부활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부활이 확실한 소망이 되게 하셨다.
[39, 40]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저희는 아무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예수님의 말씀에서 비난할 거리를 찾으려던 유대의 지도자들은 아무런 소득을 얻을 수 없었다. 예수께 아무것도 감히 더 질문할 수 없게 되자 어떤 서기관들은 그에게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자기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담대하게, 정당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잘 대답하셨다.
결론적으로, 27절부터 40절까지에서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믿지 못하는 믿음 없는 사두개인들이 되지 말자. 우리는 저 세상 곧 천국과 영광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는 자들로서 부활을 믿고 소망하자.
또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들답게, 이 세상의 육신적 삶을 위주하지 말고, 저 세상 곧 천국과 영생의 삶을 위주하며 살자. 우리는 바울 사도의 고백과 같이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보이는 세상을 위주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천국을 위주하며 사는 자들이 되자.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오직 이 세상 중심, 자기 중심, 물질 중심으로 허무하게 살 수밖에 없지만, 부활을 믿는 자는 하나님 중심, 천국 중심, 내세 중심, 진리 중심으로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다. 그렇게 힘있게 살자.
41-44절, 다윗의 주, 그리스도
[41]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장차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을 예언하셨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했고(사 11:1), 또 말하기를,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고 하였다(사 11:10). 이새는 다윗의 부친이다. 또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였다(렘 23:5, 6).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으로 오실 것이라는 뜻이다.
[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말에 대하여 그것을 부정하심이 없이 그리스도의 다른 면모의 진리를 증거하신다. 그는 구약성경의 시편을 인용하신다. 진리의 근거는 성경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성경이 역사적인 사실을 증언하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증거하셨다. 이 곳에서도 그는 시편을 인용하시면서 그것이 그 표제어에 나타난 대로 다윗의 글임을 증거하셨다. 시편의 표제어까지 인정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경이 진리의 규범이 됨을 증거하신다. 메시아에 관해 증거하려는 내용이 진리라는 사실을 그는 성경에 근거하여 증거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가 다른 곳들에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신 것과 일치한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대해 정확하고 오류 없는 규범이 된다. 바울의 증거한 바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오늘날 진리의 근거는 성경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원하시는 내용들을 다 성경에 기록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모든 교훈과 뜻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즉 객관적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리고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누구든지 성경에 밝히 가르쳐진 바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고, 또 누구든지 성경에 밝히 가르쳐진 바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다. 누구든지 성경에 밝히 가르쳐지지 않은 것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서는 안되며, 또 누구든지 성경에 밝히 가르쳐지지 않은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성경은 그리고 오직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규범이요 법칙이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성경에 의하면, 다윗은 메시아에 대해 '나의 주'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지만, 다윗 자신은 메시아를 '나의 주'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것은 메시아의 인격에 대한 다른 한 증거이다.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참 사람이심을 증거하지만, 그를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주'라는 말은 여호와와 동등한 명칭으로서 메시아께서 신적 존재이심을 증거한다.
메시아께서 신적 존재이시라는 것도 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이사야는 메시아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政事)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 7).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영원전에니라]."
신약성경도 예수께서 '주님'이심을 풍부하게 증거한다. 복음서들에서 예수님에 대해 '예수'라는 명칭 다음으로 빈번한 명칭은 '주님'이었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라는 명칭(617회) 외에 '주'라는 명칭(200회)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그 다음에 '인자(人子)'(116회), '하나님의 아들'(67회), '그리스도'(58회) 등의 명칭이 사용되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도 예수라는 명칭(975회)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말이 '주님'이라는 말이며(749회), '그리스도'라는 명칭 조차도 그 다음이다(569회).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고린도전서 8: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빌립보서 2:9- 11,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요한계시록 17:14,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43, 44]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본절은 메시아의 사역에 대하여 증거한다. 메시아의 사역은 한마디로 원수를 멸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통하여 이루시는 일이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발등상'은 '발 놓는 대'를 뜻하며, 발등상으로 둔다는 것은 굴복시키고 제압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만사를 주권적으로 섭리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네 원수' 즉 메시아의 원수는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원수 사탄을 가리킨다.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사탄이 완전히 굴복되고 제압되는 때이다. 이것은 창세기 3:15의 예언이 성취되는 때이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이것이 최초의 복음이요 메시아 예언이었다.
사탄의 굴복과 제압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히브리서 2:14, 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그러나 사탄의 완전한 굴복과 제압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사탄이 완전히 굴복될 때까지 예수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계신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계신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 세상과 교회를 다스리심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41절부터 44절까지의 짧은 내용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진리를 배운다. 첫째로,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근거가 되고 규범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바로 알고 열심히 읽고 배우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 곧 참 사람이심을 알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주님' 곧 참 하나님이심을 알고 확신하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원수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다가 다시 재림하실 것을 확실히 알자.
넷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아계신 살아계신 주님이시며, 환난 많은 세상에서 우리의 위로자와 인도자, 그리고 크신 도움과 힘이 되시는 것을 깨닫자.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45-47절, 서기관들을 주의하라
[45-47]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세상에는 본받아야 할 것이 있고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선한 것은 본받는 것이 좋지만, 악한 것은 본받지 않는 것이 좋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외식적인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다. 서기관은 하나님의 율법책을 연구하고 복사하는 율법학자이었다. '삼가라'는 말은 '주의하라'는 뜻이다. 외식적인 서기관들은 제자들이 본받지 말아야 할 대상이었다. 제자들은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본받지 말고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였다.
첫째로, 외식적인 서기관들의 문제는 외식, 즉 남의 눈을 많이 의식하고 남에게 보이려고 무엇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였다. 사람의 복장은 인격과 품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들은 겉모양으로는 점잖고 품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옷이 날개라고 사람의 옷은 그의 모습을 이렇게 저렇게 혹은 극에서 극으로 바꾸기도 한다.
옷뿐 아니라 사람의 얼굴의 아름다움도 그러하다. 외적인 아름다움이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항상 내면적, 인격적 아름다움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둘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잠언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 같으니라"고 했고(잠 11:22) 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고 말씀하였다(잠 31:30). 그러므로 사람은 외모의 단장보다 마음의 단장에 힘써야 한다.
서기관들은 또한 기도할 때도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였다. '외식으로'라는 원어(프로파세이)는 '보이려고'라는 뜻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그들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보이려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경건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겉과 속은 항상 똑같지 않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도 속으로 참으로 경건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겉으로는 볼 것이 없어도 속으로는, 그의 인격은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사람은 외모를 보기 쉬우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옛날 사무엘 선지자도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을 택하기 위해 이새의 집에 들어갔을 때 다윗의 형들의 용모와 키를 보고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사람인가 하고 잘못 생각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였다(삼상 16:7).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외식에 대해 조심할 것을 많이 말씀하셨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구제할 때 사람 앞에서 보이려고 하지 말고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다(마 6:1-4). 또 그는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6:5, 6). 또 그는 말씀하기를, 우리가 금식할 때 사람 앞에서 슬픈 기색을 내고 얼굴을 흉하게 하지 말고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다(마 6:16, 17).
그러므로 우리는 외식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무엇을 행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겉사람보다 우리의 속사람을, 즉 몸보다 마음과 영혼을 중시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구제도, 기도도, 금식도 은밀하게 행해야 한다.
둘째로, 저 외식적인 서기관들에게는 명예심과 교만이 있었다.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上座)와 잔치의 상석(上席)을 좋아하였다. 그것은 그들 속에 명예심과 교만이 있음을 드러낸다. 명예는 좋은 것이지만, 명예심 즉 명예를 좋아하는 마음은 좋은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렇게 훌륭한 존재가 아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심히 부족한 죄인들이며 무익한 종들이다(눅 17: 10; 18:13). 이러한 우리들에게 명예는 합당치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깨달아 볼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겸손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겸손에 대해 많이 가르치고 있다. 잠언에는, 교만에 뒤따르는 것은 패망이요 겸손에 뒤따르는 것은 존귀라고 말씀하였다. 예수께서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낮아져서 남을 섬기는 자가 될 때 하나님 앞에서 높임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0:26,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23:11, 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명예심과 교만을 조심하고 항상 겸손으로 단장해야 한다.
셋째로, 외식적인 서기관들에게는 탐심과 물질욕이 있었다. 그들은 과부들의 집들을 취하였다. '가산'이라는 원어(오이키아스)는 '집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 집들을 취하였는지는 모르나, 그들에게 물질욕과 탐심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였다. 아마도 그들 때문에 과부들은 마음에 큰 고통을 당했고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들의 행위는 이웃 사랑에 정반대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돈을 벌되 정당하고 의롭고 근면하게 벌라고 가르친다. 잠언 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는 불의한 방식으로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정당하고 근면하게 일함으로 물질적 여유를 누려야 한다.
또 성경은 우리에게 부자가 되려 하지 말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디모데전서 6:7-10,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히브리서 13: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런 교훈들을 하신 후, 예수께서는 덧붙여서 말씀하시기를, 외식하는 서기관들의 받는 판결이 더 중할 것이라고 하셨다. '판결'이라는 원어(크리마)는 '정죄, 형벌, 심판' 등의 뜻이다. 외식은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다. 외식은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을 듣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을 가장하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이처럼 외식은 거짓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것이기 때문에 회개하기도 어렵다. 우리는 훌륭하고 잘난 사람이 되려 하기보다 솔직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려 해야 한다. 외식자는 하나님께 더 큰 형벌과 심판을 받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외식하는 지도자들과 직분자들을 조심하고 저들을 본받지 말고 저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다. 또한 우리 자신이 외식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품위 있고 훌륭하게 보이려고 옷을 입거나 경건하게 보이려고 기도하거나 착하게 보이려고 구제하거나 하지 말아야 하겠다. 우리는 사람 앞에 보이려고 하지 말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진실하게 살아야 하겠다. 또 우리는 항상 명예심과 교만을 경계하고 겸손히 형제를 높이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또 우리는 모든 탐심과 물질적 욕심을 버리고 정당하고 의롭고 근면하게 돈을 벌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는 외식자들을 조심하고 우리 자신이 외식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다.
21장: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 징조
1-4절, 가난한 과부의 헌금
[1-4]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본문은 예수께서 사람들이 성전의 연보궤에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여러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을 넣는 것을 보셨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는 것을 보셨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행동을 보시되 특히 우리의 예배와 찬송과 기도와 또한 헌금하는 것도 보신다. 예수께서는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궤에 넣는 것을 보셨다. 렙돈은 유대인의 동전 이름으로서 당시 통용되던 돈들 가운데 가장 가치의 단위가 낮은 돈이었다. 1렙돈은 2분의 1 고드란트이며 8분의 1 앗사리온이고 128분의 1 데나리온이었다. 만일 어떤 부자가 1데나리온을 헌금하였고 그 가난한 자가 두 렙돈을 헌금하였다면, 오늘날 가치로 대략 비교하여 본다면, 그 부자는 6만원쯤 헌금하였고 그 과부는 천원쯤 헌금한 셈이었다. 6만원에 비해 천원은 정말 보잘 것 없는 금액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광경을 보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평가는 사람의 평가와 달랐다. 사람들은 헌금의 액수의 크고 작음만 보기 쉽지만, 주께서는 그 액수를 그의 경제적 상황에 비추어 보셨다. 4절의 말씀은 주께서 그렇게 평가하신 이유를 나타낸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부자들은 풍족한 처지에서 헌금하였으나, 그 과부는 구차한 중에, 즉 가난하고 부족한 처지에서 헌금하였다. 그것도,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헌금의 많고 적음은 상대적이다. 사람들은 드러난 헌금 액수의 크고 작음만 보기 쉬우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의 경제적 형편에 비추어 보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평가를 배워야 한다. 우리도 헌금의 액수만 가지고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헌금 액수만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일종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헌금 액수를 그의 경제적 형편에 비추어 보지 않고 평가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적은 금액의 헌금을 바쳤다 할지라도 그의 경제 형편이 매우 어려운 가운데서 정성껏 바쳤다면 우리는 그것을 크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 가난한 과부는 가난한 형편에서 헌금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헌금하였다. 그것은 지나친 행위이었는가? 그 여인은 종교에 너무 빠진 광신자이었는가? 그는 정신 과민 혹은 정신 이상 상태에 있었는가? 우리는 그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였으니 그 이후에는 어떻게 생활하겠는가 하고 염려하며 그를 돌보실 하나님을 의심해야 하겠는가?
헌금이 무엇인가? 헌금의 정신이 무엇인가?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함이 없다면 참된 헌금을 드리지 못할 것이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조카 롯이 이웃 나라 왕들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집에서 훈련된 318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추적하여 롯과 그 외의 주민들과 재물들을 다 찾아왔다. 아브라함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중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그를 맞아 축복하며 그의 대적을 그의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그때 아브라함은 그가 얻은 노획물의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성경에 여기에서 처음으로 십일조라는 말이 나온다. 그것은 분명히 그 전쟁에서 승리케 하시고 조카 롯을 구출하도록 도와주셨고 자기 목숨을 보존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아브라함의 감사의 표시이었다. 이와 같이,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으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감사의 행위로 시작되었다.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십일조 서약도 비슷하였다. 야곱은 자신을 형 에서라고 속이고 아버지 이삭에게 장자를 위한 축복 기도를 받았다. 그 후 형 에서는 그를 미워하여 아버지만 돌아가시면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결심하였다. 이 사실을 안 야곱은 부모와 형의 곁을 떠나 친척이 사는 옛 고향 하란을 향해 갔다. 그때 그의 마음은 외로움과 불안과 답답함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가 쓸쓸하게 하란으로 가던 중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지자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누워 잤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셨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것과 같은 복을 주셨고 또 끝까지 그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잠을 깬 야곱은 두려움과 큰 감동 가운데서 하나님께 서원하기를,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 주셔서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시면 하나님을 섬기며 이 곳에 하나님의 전을 세우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모든 것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했던 것이다. 즉 야곱의 경우도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인도하심과 도우심에 근거하여 자원함으로 십일조를 하나님께 약속했던 것이다.
구약의 헌금의 규례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정신에 근거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지극히 합당한 일이었다. 자식이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듯이, 인생이 창조주 하나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섬기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추수하는 처음 소산, 즉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셨고 그것들을 제사장들에게 주어 먹게 하셨다. 또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소득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게 하셨고 레위 사람들이 받은 그 십일조의 십일조는 제사장들에게 주게 하셨다.
십일조 규례는 하나님의 주 되심에 대한 인정과 감사를 시험하는 규례이었다. 그래서 말라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헌물을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십일조와 헌물을 바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라고 표현하셨다(8절). 그는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10절). 또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았으므로 저주를 받았다고 지적하셨고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제라도 성실히 드리면 하늘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을 것이며 화와 재앙을 막아주실 것을 약속하셨다(9-12절).
역대상 29장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그의 사유 재산인 금 3천 달란트(약 100톤)와 은 7천 달란트(약 240톤)를 하나님께 드렸고, 그의 뒤를 따라 나라의 지도자들과 관직자들도 하나님의 전 공사를 위해 즐거이 드렸는데, 금이 5천 달란트(약 170톤)은 1만 달란트, 놋 1만 8천 달란트, 철 10만 달란트 등이었다. 그들은 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성심으로 하나님께 드렸다. 그때 다윗은 고백하기를,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 . .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하였다(11, 14절). 그렇다! 헌금은 우리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 즉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것들 중에서 얼마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헌금이다.
신약성경에서 헌금에 대해 자세히 가르친 부분은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이다. 거기에 보면, 헌금은 '성도 섬기는 일'(고후 8:4; 9:1)로 표현되었다. 신약성경에서 헌금은 전도와 구제를 위한 것이다. 헌금은 전도자들과 전도 활동을 위해서와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는 또 헌금의 정신에 대한 몇 가지의 교훈이 있다. 첫째는 풍성하게 헌금하라는 것이다(고후 8:7). 마게도냐 교회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 중에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 그들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헌금하였다(고후 8:1-3). 둘째는 미리 준비하여 헌금하라는 것이다(고후 9:5). 셋째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즐거움으로 헌금하라는 것이다(고후 9:7). 또, 바울 사도는 헌금이 하나님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에 대한 증거라고 말했다(고후 8:8; 9:13) .
이러한 헌금에 대한 여러 성경 말씀들을 살펴볼 때, 본문의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참된 헌금의 귀한 모범이다. 그의 헌금은 십일조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비록 그의 헌금의 액수는 보잘 것 없었을지라도 그 헌금은 주님 앞에서 부자들의 많은 액수의 헌금보다 많게 평가되었다. 그는 자신의 가진 것 모두, 그의 생활비 모두를 하나님께 드렸다. 우리 중 누가 그런 헌금을 하나님께 드려보았는가? 그는 과연 가장 귀한 보화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한 자이었다.
결론적으로, 누가복음 21:1-4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기억하자. 첫째로, 우리는 단순히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헌금 액수로 그것의 많고 적음을 판단치 말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신다. 예수께서는 부자들의 많은 액수의 헌금보다 한 가난한 과부의 보잘 것 없는 액수의 헌금을 더 많다고 여기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판단이요 하나님의 평가이다. 우리도 헌금에 대해 이런 안목을 가지자.
둘째로, 우리는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본받자. 그는 자기의 있는 바 곧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바쳤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과 지식과 깨달음,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과 헌신은 얼마나 크고 강렬하였는지!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믿음과 지식과 깨달음, 그리고 우리의 사랑과 헌신은 어떠한가? 우리의 헌금은 어떠한가?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금을 드리는가?
5-19절, 종말의 징조들
[5, 6]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美石)과 헌물(獻物)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성전 건물의 아름답고 훌륭함에 대해 말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이 보는 그 아름다운 건물이 파괴되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날이 올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루살렘성과 성전의 멸망과 세상 종말에 관한 내용이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장차 불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베드로후서 3:10,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원소들]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것들]이 드러나리로다[불타버리리라]." 세상 나라는 장차 멸망할 도시, 곧 장망성(將亡城)이다. 교회의 외적 영광도 헛되기는 매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예루살렘성전이 무너질 날이 오듯이, 오늘날 그 어떤 훌륭한 예배당도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이 말씀이니라"고 하였다(벧전 1:24, 25). 또 사도 요한도 말씀하기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다(요일 2:15-17). 우리는 허무한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고 하나님의 뜻만 믿고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7-11]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그 일이 언제 일어나며 그 전에는 어떤 징조들이 있을 것인지 질문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종말의 징조들에 대해 여러 가지 점들을 말씀해주셨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은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나타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께서는 많은 사람이 자신들을 예수 그리스도 곧 재림주로 자처하고 세상의 종말을 주장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연구가는 1986년에 쓴 책에서 한국에 재림주로 자처하는 자가 35명이나 된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통일교의 교주 문선명이다. 그는 자신을 재림주로, 또 새 인류를 시작하는 참 부모로 주장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런 자들의 출현이 세상 종말의 한 징조이므로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고 그들을 좇지 말라고 말씀해두셨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국가들 간의 전쟁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전쟁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겠지만, 인류는 20세기에 1,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처참한 전쟁을 경험하였고 이제 3차 세계 대전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 아직 공산 세계와 서방 세계 간의 군사력의 견제는 없어지지 않았다. 동북 아시아에서도 공산주의적인 러시아와 중국과 북한은 여전히 미국과 대만과 한국, 일본 등 서방 세계에 위협적 존재이다. 또한 걸프만의 이라크와 미국-영국 간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유고 연방의 평화도 미지수이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간의 끝날 줄 모르는 전쟁이 마침내 세계적 전쟁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만일 3차 세계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전쟁은 이전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처참한 전쟁이 될 것이다. 현대의 전쟁 무기들은 재래식 무기들과 가히 비교할 수 없다. 신경 마비 개스나 세균 폭탄 등도 그러하지만, 특히 핵 폭탄은 인류 전체에 가장 공포의 대상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세상 종말의 한 징조라고 말씀하셨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처처에 큰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큰 지진의 힘은 약 1억 8천만 톤의 티엔티(TNT) 폭탄과 같으며, 그것은 최초의 원자폭탄의 약 만배의 힘이라고 한다. 큰 지진들은 20세기에 더욱 빈번해졌다고 한다. 20세기에 5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지진들은 24개 이상이 되며, 그 중 2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것도 14개나 된다. 지진은 세상 종말의 한 징조이다.
넷째로, 예수께서는 기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기근들도,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근래에 1870년대에 남부 인도에서 약 5백만명이 기근으로 죽었고, 중국에서는 9백만명 이상이 죽었다. 1929년과 30년에는 중국의 황하강의 홍수로 인한 기근으로 약 2백만명이 죽었다. 1943년 인도 동부 벵갈에 대 기근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후 150만명 이상이 기근으로 죽었다. 1960년대 이후 아프리카의 소위 사하라 사막 남부 사헬 지역과 남부 아프리카, 특히 이디오피아 등에 심각하여 수백만명이 죽었다. 수년 전, 세계은행은 지구상에서 매일 7억 5천만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기근은 세상 종말의 한 징조이다.
다섯째로, 예수께서는 온역 곧 악한 질병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역사상 수많은 전염성 혹은 비전염성 질병들이 있었지만, 의학이 발달된 오늘날도 병원들은 각종 환자들로 붐빈다. 고혈압, 당뇨, 암 등은 무서운 현대적 질병들이다. 특히, 현대 사회의 성 도덕의 타락과 음란, 그리고 특별히 동성애로 인하여, 임질과 매독 등의 성병이 유행하고, 아직까지도 치료약이 없는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 결핍증) 질병의 급속한 확산은 온 세계에 매우 두려운 일이 되고 있다. 악한 질병들의 출현은 세상 종말의 한 징조이다.
여섯째로, 예수께서는 '하늘로서 무서운 일들과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일들과 징조들이 무엇인지 잘 모르나, 여하튼 오늘날 인류는 세계적으로 이상 기후의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 학자들은 그것이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이라고도 한다. 집중 폭우로 인한 홍수와 폭설과 폭염 등이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주의 말씀과 같이, 세상 종말의 한 징조로서 더욱 무서운 일들이 예견된다.
[12-17]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口才)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일곱째로, 예수께서는 성도들이 핍박과 미움과 순교를 당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초대교회 때에 로마 황제에 의한 핍박, 종교 개혁 시대에 로마 교황에 의한 핍박 등은 예비적 징조 혹은 단계이었다. 그때 진실한 성도들은 많은 고난과 핍박과 심지어 순교를 당하였었다. 20세기 초, 우리 선조들은 일본 통치 시대의 신사 참배 강요와 이북 공산당의 핍박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주의 재림 직전에 세계적 전제국가, 아마 공산국가로 인해 이 예언은 성취될 것이다. 그때, 성도들은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에게 핍박을 당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오늘날 공산 세계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핍박과 미움과 순교를 당하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성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신 구주이시며 기독교 진리가 유일한 진리임을 믿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흑백 논리적이었고 비타협적이었다. 진정한 기독교는 중립주의를 배격한다. 하나님과 세상, 천국과 지옥, 진리와 거짓, 생명과 사망, 의와 불의 사이에는 결코 중립 지대나 회색 지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신념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다원적인 세상 속에서 사람들에게 미움과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18, 19]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예수께서는 세상 종말의 징조들을 말씀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온전히 보호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육을 보호하실 것이다. 물론 우리가 순교의 죽음을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순교의 죽음 앞에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킬 것이며 우리의 육신도 마지막 날 온전한 몸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다. 시편 54:4,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하시나이다." 마태복음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예수께서는 또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보호하실 것이므로 우리는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한다는 권면이다. 참된 믿음은 인내를 낳는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믿으며 그렇게 믿기 때문에 어떤 핍박 가운데서도 참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기다릴 수 있다. 그것이 성도가 승리하는 길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대환난 가운데서도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말씀했다(계 13: 10; 14:12).
결론적으로, 5절부터 19절까지의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요약해본다.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장차 불타 없어질 것을 생각하고 거기에 너무 애착을 두며 살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아름다운 성전이라 할지라도 그러할 것이었다. 우리가 힘을 모두어 예배당을 지을지라도, 그 아름다운 예배당도 마지막 날 불타 없어질 것이 확실하다.
둘째로, 우리는 주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세상 종말의 징조들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 종말이 되면,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 있을 것이다. 처처에 큰 지진이 있을 것이다. 기근이 있을 것이다. 악한 질병들이 있을 것이다. 하늘로서 무서운 징조들이 있을 것이다. 성도들이 핍박과 미움과 순교를 당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런 징조들은 상당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종말을 대비하여 살고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스런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 가운데서 끝까지 인내하면서 살자. 참 믿음은 인내하는 믿음이다.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의 그 무엇이 아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을 행하는 일에 힘쓰면서 어떠한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보호하실 것을 확신하고 끝까지 인내하는 자들이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힘쓰자.
20-24절,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
[20, 21]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성 안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본문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이 예언은 주후 70년에 문자 그대로 로마 군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성은 멸망하였다. 그때 유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피신하였고 예루살렘성 안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성밖으로 나갔는데, 그 가운데는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기억한 그리스도인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장래의 일들을 성경에 예언하시고 때가 되면 그 일을 그대로 이루시곤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예언들에 주의하고 거기에 맞는 준비를 해야 한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기억하고 다가올 사건에 대처해야 한다.
[22]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예루살렘 멸망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경고하신 모든 말씀들이 그대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에 대하여 율법에 공의의 형벌을 경고해두셨다. 구약 성경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는 그러한 경고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연약함을 보였고, 마침내 구약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도 그를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이다. 그들의 이 행위는 역사상 그들의 많은 죄악들 가운데서도 가장 극악한 범죄 행위이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사건을 통해 그들에게 공의의 보응과 형벌을 내리실 것이었다.
[23, 24]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그날은 큰 환난과 고통의 날이기 때문에, 임신한 여인들과 젖먹이는 여인들에게 화가 될 것이었다. 그들이 환난 날에 피신하거나 먹을 양식의 필요를 가지는데 어려움이 많을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이방 나라들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성이 멸망할 때에 칼과 기근에 죽은 유대인들이 110만명 이상이었고,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9만 7천명이었다고 한다.
특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충만한 수의 이방인들이 예수 믿어 교회 안에 들어오기까지라는 뜻이다. 그 기간은 이방인 교회들의 시대이다. 그 기간이 지나면, 유대인들의 국가적, 민족적 대 회심(回心)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된다. 로마서 11:25, 26,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5-28절, 자신의 재림(再臨)에 대한 예언
[25, 26] 일월 성신[해와 달과 별들]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주께서는 자신의 재림 직전에 있을 하늘과 바다의 징조들에 대해 예언하셨다. 11절에서도, 그는 세상 종말과 자신의 재림 직전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멸망 직전에도 하늘에서 불붙은 칼과 혜성(彗星)과 불빛과 병거와 군대 등이 보였다고 하며,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도 이런 내용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는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에 더욱 놀랍고 두려운 징조들이 있을 것이며, 하늘의 권능들은 흔들릴 것이다. 마태복음 24:29,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또한 바다도 파도들의 우는 소리를 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심할 것이다. 이 때 세상 사람들은 이런 놀랍고 두려운 일들로 인하여 혼란 중에 마음의 고통과 근심을 가질 것이며 세상에 임할 일들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할 것이다.
[27]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러한 재림의 징조들이 있은 후에,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그가 오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는 하늘로부터 내려 오실 것이다. 사도행전 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의 초림(初臨)과 너무 대조될 것이다. 초림 때에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셨고, 특히 탄생한 그 어린 아기는 마굿간의 말 구유에 누이셨었다. 그는 세상에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러나 재림의 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는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그의 재림은 위엄이 넘치고 영광이 넘칠 것이다. 그는 왕의 영광, 심판자의 영광을 가지고 오실 것이다.
[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救贖)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의 구원이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았지만(엡 2:8), 우리의 구원은 아직 소망 가운데 받은 구원이다. 로마서 8:23, 24,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주의 재림으로, 우리의 몸은 죄성이 전혀 없고 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몸으로 영화롭게 변화될 것이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부활함으로 영화롭게 될 것이며, 살아 있던 자들은 산 채로 영화롭게 변화될 것이다. 그것이 영화(榮化)의 단계이다. 이 구원의 날은 점점 더 가까워 오고 있다.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여기에 재림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은 곧 우리의 영화로운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우리는 재림의 징조들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더욱 분발하고 힘을 내어 하나님을 바라며 다시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세상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로 때때로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믿음과 소망까지 약해질지라도 일어나 머리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화로운 구원의 날이 가까와지고 있음을 알고 힘을 내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확신하고, 또한 그 재림의 날이 곧 우리의 영화로운 구원의 날이 됨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더욱 힘있게 소망하자. 주께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 우리 성도들도 그의 영광스런 모습과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29-38절, 항상 깨어 기도하라
[29-31]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무화과나무는 주로 여름에 싹이 나서 열매를 맺어 가을에 추수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가 싹이 나는 것을 보면 누구든지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자신의 재림 직전의 징조들에 대한 말씀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징조들은 거짓 그리스도들의 나타남, 전쟁들과 지진들과 기근들과 악한 질병들, 핍박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의 징조들 등이다. 주께서는 자신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스러운 시작을 동일한 시점으로 간주하셨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 현재의 하늘과 땅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나라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여 두신 징조들의 나타남을 주목하여야 한다. 과연, 오늘날 그것들 중 다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거짓 그리스도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고, 전쟁들과 지진들과 기근들과 악한 질병들이 많이 있었고, 핍박들도 많이 경험하였다. 하늘의 이상 징조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직 명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주께서 예언하신 징조들이 이미 많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가 많이 가까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32, 3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본문은 주님의 말씀의 확실함을 증거한다. '이 세대'는 일차적으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 주께서는 예루살렘성의 멸망과 자신의 재림을 연결시켜 말씀하셨고, 주의 예언의 말씀은 주께서 말씀하신 지 약 40년 후 예루살렘성의 멸망으로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 세대'는 또한 이 세상 혹은 인류를 가리켜야 할 것이다. 주의 재림 때에도 비슷한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다. 주께서는 자신이 예언하신 모든 징조들이 이 세상이 지나가기 전에, 인류가 없어지기 전에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루살렘성의 멸망 전에 그 징조들이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과 같이, 주의 재림 직전에도 그 동일한 징조들이 그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주께서는 덧붙여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의 말씀의 진리성을 다시 한번 더 증거하신 것이다. 주께서 하신 예언의 내용은 반드시 다 이루어질 것이다. 세상은 변하고 천지는 없어질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 베드로전서 1:24, 25,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귀한 영원 불변의 말씀의 가치를 깨닫고 그 말씀을 가장 귀히 여기고 그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행하자. 특히 종말 예언의 말씀을 다 믿자.
[34, 35]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주께서는 다가올 자신의 재림의 날과 영광스러운 천국의 시작을 생각하며 성도들이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마땅히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성도들이 마음이 둔해지면 주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고 잊고 살다가 그날을 뜻밖에 맞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그날 버림을 당할지도 모른다. 주께서는 성도들의 마음이 둔해지는 원인들로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 등 세 가지를 언급하셨다. 우리는 이 세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첫째로, 방탕함이 성도들의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방탕함은 과도한 쾌락의 추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즐거움이 있다. 먹는 즐거움이 있고 가정의 즐거움이 있고 운동이나 취미 생활의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어떤 즐거움이든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한계를 넘어서서 과도히 추구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고 신앙 생활에 큰 해가 된다. 어떤 교인들은 육신적 즐거움을 구하기 때문에 신앙 생활을 바로 하지 못하고 주일 하루도 경건하고 거룩하게 지키지 못한다. 이사야 58:13, 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聖日)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둘째로, 술취함도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술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술취함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지옥으로 인도하는 큰 죄가 된다. 고린도전서 6:9, 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의 갈 곳은 지옥뿐이다.
셋째로, 생활의 염려도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생활의 염려는 죄가 아닌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들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생활의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또 씨 뿌리는 비유에서 이생의 염려와 재리(財利)와 일락(逸樂)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를 가시밭에 떨어진 씨에 비유하셨다(눅 8: 14). 먹고 사는 일 때문에 신앙 생활을 잘하지 못하고 주일 하루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주께서 조심하라 하신 경우이다.
주의 재림은 온 지구상의 사람들에게 덫과 같이 갑자기 임할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처하여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멸망과 심판의 덫과 같을 것이다. 주의 재림의 날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 가운데 조심하지 않는 자들은 그런 자들과 같이 그날을 뜻밖에 맞을 위험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주께서는 또한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다. 그래야 우리는 장차 올 멸망을 피하고 영광의 구주 앞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서게 될 것이다. 성도들이 대 환난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경은 성도들이 대 환난을 통과할 것을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깨어 있는 성도들에게는 그 대 환난이 멸망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성도들은 대 환난 중에도 믿음을 지키고 이기는 자들이 될 것이다(계 13:10; 14 :12). 항상 깨어 기도하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태도이다. 성도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부족과 연약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을 감사하며 또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을 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37, 38]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낮은 일하는 시간이고 밤은 쉬는 시간이다. 예수께서는 낮에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밤에는 감람산으로 가셔서 쉬셨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죽이려 하였으나 모든 백성은 그의 말씀을 들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성전에 나아왔다. 주께서는 자신의 죽음의 시간이 가까와 옴을 아셨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거나 위축됨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담대하게 다 가르치셨음에 틀림 없다. 그것이 오늘날 주의 종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주의 종들은 환경에 위축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성실한 전파자와 교사가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29절부터 3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교훈을 정리한다. 첫째로,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징조들이 오늘 시대에 벌써 상당히 이루어졌음을 깨닫고 주의 재림의 날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음을 알자. 둘째로, 우리는 주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함을 알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고 다 성취됨을 깨닫자. 특히 종말 예언의 말씀을 다 믿자.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방탕함이나 술취함이나 생활의 염려로 둔하여지지 않도록 조심하자. 과도한 쾌락과 오락을 추구하지 말고 술취하지 말고 생활의 염려에 삼키우지 말자. 넷째로,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자. 기도로 하나님께 우리의 부족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을 항상 간구하자.
22장: 잡히심
1-13절, 예수님을 죽이려고 연구함
본문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연구한 일과,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주님을 넘겨주기로 약속한 일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월절 식탁을 준비시키신 일을 기록하고 있다.
[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 생활을 하던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오기 전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의 장자들을 죽이는 재앙을 내리실 때 양의 피를 문틀에 발라 그 재앙을 면하였던 일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무교절이라는 말은 누룩 넣지 않은 떡을 먹는 절기라는 뜻이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엄격히 말하면 구분된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1월 14일 저녁이었고 무교절은 1월 15일부터 7일간이었다(레 23:5, 6). 유대인들의 하루는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까지이기 때문에, 오늘날로 보면 유월절과 무교절 첫날은 같은 날 저녁이었다. 날이 저물기 전이 유월절이요 날이 저문 후부터 무교절 첫날이 된다. 신약성경에서는, 본문에서와 같이, 유월절과 무교절이 같은 절기로 불리운다.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대제사장들은 제사장들 중에서 선택된 지도적 인물들로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과 회원들이었고,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의 사본을 만드는 율법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다 이스라엘의 사회적, 종교적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롭게 행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연구하고 있었다. 성경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처럼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던 까닭을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다고 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마태복음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요한복음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전통 사본--'핍박하고 죽이려 한지라').
둘째로,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고 그를 죽이려 하였다. 요한복음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마태복음 26:65, 66,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셋째로, 그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을 악하다고 하시므로 그를 미워하였다. 요한복음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넷째로,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다. 마태복음 27:18, "이는 저가[빌라도가] 그들의[그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또 그들이 예수님을 그냥 죽이려 하지 않고 죽이는 일을 연구한 까닭은 본문의 증거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수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일반 백성보다 지도자들이 더 악하였다. 오늘날도 목사나 장로나 집사가 타락하면, 일반 성도보다 더 악하게 될 수 있다.
[3, 4]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책을 의논하매.
가룟 유다가 주를 배신한 것은 사탄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사탄이 그에게 들어가매 그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갔다. 군관들은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로서 대제사장을 보좌하는 자들이었다고 한다. 가룟 유다는 선생님을 배신하기로 결심하고 그들에게 가서 그를 넘겨줄 방책을 의논하였다.
성경은 그의 배신의 원인을 네 가지 점으로 증거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작정이었다. 누가복음 22: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둘째는 그의 불신앙 때문이었다. 요한복음 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셋째는 돈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요한복음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넷째는 사탄의 활동이었다. 본절,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요한복음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5]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고린도전서 10:33에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라는 교훈이 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그러나 이 말씀은 악한 자도 기쁘게 하라는 뜻이 아니다. 또 하나님을 거스려 인간을 기쁘게 하라는 뜻도 아니다. 갈라디아서 1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들은 가룟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언약하였다. 마태복음 26:15에 보면, 가룟 유다가 먼저 그들에게 돈을 요구하였고 그들은 은 30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은 30'은 은 30세겔(약 300그램)을 가리키든지 아니면 은전 30개 즉 30데나리온(약 150그램)을 가리킬 것이다. 가룟 유다에게는 돈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마침내 영생의 주님을 썩어질 은 30에 바꾸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참으로 가련한 유다이었다!
[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허락하다'는 원어(엑소몰로게오)는 '약속하다'는 뜻이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굳게 약속하였던 것이다. 유다가 예수님을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은 것은 그들의 연구 결과이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였고 백성의 반대를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또는 백성이 반대할 시간이 없도록 민첩하게 예수를 처치하기 위해서 무리가 없는 시간을 찾고 있었다. 악한 자들은 악을 행하는데 그들의 지혜를 사용하고 있었다.
[7]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일이 이른지라.
그런데 유연하게도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계획한 일과 유월절 양 잡는 날이 일치되었다.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것은 구약의 예언과 예표가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것이었다. 옛날 출애굽 시대에 애굽에 내려진 장자 재앙의 심판 때에 이스라엘 백성의 집 문틀에 발라진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이 되었듯이, 유월절에 인류의 극악한 죄로 인하여 십자가 위에서 희생되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구원이 되실 것이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이었다.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킬 것 같은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일을 그의 지극히 선한 구원의 일을 이루시는 과정이 되게 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실 것이었다.
[8-13]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여짜오되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 하신대 저희가 나가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예수께서는 두 제자들에게 성내에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한 사람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의 집 주인이 예비한 한 큰 다락방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의 놀라운 신적 지식의 한 예이었다. 그 두 제자들은 주의 말씀하신 대로 그 사람을 만났고 그의 주인이 제공한 큰 다락방을 그들의 유월절 식탁 장소로 준비하였다. 그들의 유월절 식탁은 주님의 신적 지식에 대한 확인과 확증이었다. 신성의 영광을 보이신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유월절 어린양이 되실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3절까지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깨닫는다. 첫째로, 인간은 참으로 사악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악만 행하는 존재와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으로, 그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단속지 않으시면, 우리는 언제나 넘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만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순간마다 성령의 인도하심만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악한 자, 위선자, 살인자, 간음자, 배신자가 될 수 있다.
둘째로, 인간의 죄악이 아무리 크고 강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실패치 않으시고 성취되신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온 세상의 모든 일들을 홀로 주관하시고 다스리신다. 세상은 주인 없는 집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우리 죄를 위한 유월절 어린양이 되게 하신다. 우리는 이 하나님만을 바라고 그의 뜻에만 순복하며 살자. 그것이 영생이요 평안이요 참된 행복이다.
14-23절, 나를 기억하며 이것을 행하라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지셨던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떡과 포도즙의 상징적 의미를 일깨우시며 성찬식을 교회의 영속적 의식으로 제정하시고 명하신 사실을 증거한다.
[14-16]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그의 열두 제자들과 함께 이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들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원문에서 16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됨으로써 그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그가 유월절 식사를 다시 못하실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 위에서 절기들을 지키기를 원하셨음이 분명하다. 그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간절히 원하셨다.
구약의 규례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하였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규례들을 다 지키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구원과 의(義)를 이루셨다. 그는 나신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고(눅 2:21), 공생애의 시작 때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고(마 3:15),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종하셨다(빌 2:6-8; 히 5 :8). 특히 그는 유월절 규례를 지키셨고 그것을 간절히 사모하셨다.
유월절에 관해 말한다면, 땅 위에서의 유월절은 예표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유월절의 떡과 포도즙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였다. 그것은 우리의 구속(救贖)을 상징하였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과 거듭남 즉 법적인 구원을 나타내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속죄 사역을 이루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 예표적 유월절은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구원의 완성 곧 영화(榮化)를 의미한다. 천국에서의 명절은 더 이상 예표적이거나 상징적이지 않고 완성적 축제가 될 것이다. 그것은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축제일 것이다. 스가랴서에는 그것을 표현하기를,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고 하였다(슥 3:10).
[17, 18]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 가졌던 그 유월절 식탁은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주께서는 그날 밤 잡히시고 그 다음날 새벽이면 정죄를 받고 아침 9시에 처형되실 것이었다. '이 잔을 가져다가 너희끼리 나누라'는 말씀은 장차 예수님이 떠나신 후 제자들이 주님 없는 식탁을 나누어야 할 것을 암시하시는 것 같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이다. 주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천국에서는 기쁨이 넘칠 식탁 교제가 있게 되겠지만, 그때까지 제자들은 육신적으로 주님과 떨어져서 그들 스스로 유월절 식탁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떡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유월절 떡을 자신의 몸이라고 표현하셨다. 구약의 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다. 유월절 어린양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다. 성경에 증거된 대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우리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 내어주셨다.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주께서는 또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 직역하면 "나를 기억하며 이것을 행하라"는 말씀이다. 우선, 성찬 의식은 주의 명령이다. 주께서는 '이것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의식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식의 중요한 의미는 예수님을 기억하는데 있다. 무엇을 기억하는 것인가? 그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고난의 주님을 기억한다.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께서는 저녁 먹으신 후 포도즙 잔도 나누어주시면서 "이 잔은 너희를 위해 붓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유월절의 포도즙을 자신의 피로 표현하셨다. 구약도 피 뿌림이 있었다. 출애굽기 24:6-8,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 옛 언약에서의 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하였다.
이제 예수께서 오셨고 우리를 위해 친히 자신의 피를 부으실 것이었다. 그것은 예표적 형식의 옛 언약과 대조되는 새 언약이 될 것이다. 그것은 옛 언약에서 예표된 바가 실체(實體)로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강조점의 차이도 있다. 옛 언약 아래서는 죄와 심판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는 죄사함과 의가 강조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구약과 신약을 정죄와 의로 각각 특징지어 표현하였다(고후 3:9). 그러나 두 언약은 두 별개의 언약이 아니고 동일한 은혜의 언약이다. 유월절 식탁의 포도즙 잔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실 피를 상징하였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부어질 새 언약의 피이었다.
히브리서 9:12-14,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베드로전서 1:18, 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1-23]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인간의 큰 죄는 하나님의 큰 구원을 이루고 있었다. 종교 지도자들의 죄, 재판장 빌라도의 죄, 가룟 유다의 배신의 죄 등은 역사상 가장 극악한 일을 꾸미고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는 일에 불과하였다.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 선하고 악한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이루는 것이다. 그의 작정은 지극히 높고 지극히 깊다. 그러나 범죄의 책임은 분명히 인간에게 있다. 하나님은 악을 조장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심판자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패와 죄악까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들을 섭리하셔서 결국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결론적으로, 14절부터 23절까지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성찬의 의미를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자. 우리가 죄인이었고, 우리가 죽어야 할 자이었으나, 우리 대신 죄 없으신 그가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셨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고 그것이 우리의 죄씻음이 되었다. 성찬의 떡과 성찬의 포도즙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의 그의 상하신 몸과 그의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우리는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그의 고난을 기억하고 감사한 마음과 믿음으로 참여하자.
둘째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그만 따르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믿자.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우리 속에는 여전히 죄성이 있다. 우리의 삶에는 여전히 실패와 연약의 자취들이 있다. 우리는 그의 이루신 의만을 감사히 받으며 의지하며 오직 그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가자.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따르자.
24-30절, 섬기는 자가 되라
[24]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제자들 가운데서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생겼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전에도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있었다. 그때 주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그들 중에 세우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너희 중에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자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9:46-48). 이번에는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생겼다. 다툼이라는 말은 변론보다는 좀더 상황인 것 같다.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나 다툼은 다 인간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명예심과 교만을 나타낸다. 더욱이, 예수께서 방금 전에 자신이 한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시고 죽으실 것을 암시하신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누가 크냐 다투었으니 참으로 인간은 부족한 존재이다. 제자들의 문제점은 명예심과 교만을 버리지 못한 데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문제점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있는 문제점이다. 교만은 다툼을 일으키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분열시킨다.
[25,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이방인의 임금들은 백성을 주관하며 지배하며, 권세 잡은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스스로 높인다. 교만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죄악이다. 그것은 마귀의 죄이다. 마귀는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함으로 마귀가 되었다(딤전 3:6).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미워하신다. 잠언 6:16-19,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에서는 큰 자가 남들을 주관하고 지배하며 자신을 스스로 높인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큰 자이다. 마태복음 20:27, 2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3:11, 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교만을 다툼을 일으키지만, 겸손은 교회의 단합과 일치를 가져온다. 에베소서 4:1-3,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빌립보서 2:2-4,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원문에는 27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주님 자신이 제자들을 가운데서 섬기는 자로 있으셨기 때문이었다. 본문의 사건은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행위가 있은 직후에 되어진 것 같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제자들이 서로 용서함으로써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될 것을 교훈하시는 뜻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예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친히 제자들을 섬기신 것을 나타내는 뜻도 있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섬기는 자로 처신하셨다.
겸손함은 주님께서 친히 보이신 덕목이었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는 주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28-30]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주께서는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보상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들에게 격려가 되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그의 공적 사역의 전체 기간을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 그는 마귀의 시험과 사람들에게서의 오해와 비난과 미움을 당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3년 동안 주님과 함께하였다. 비록 그들에게 많은 부족과 실수와 결함이 있었지만, 한가지 귀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랐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중요하였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렇다. 오늘날 우리들도 처음 제자들처럼, 아니 그들보다 더 많은 부족과 실수와 결함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인 것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라를 아들에게 맡기신 것같이 그도 그것을 제자들에게 맡겨 장차 그들이 그의 나라에 있어 그의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장차 이루어질 영광의 천국에서의 만족과 즐거움을 표현하신 것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장차 충만한 즐거움과 영광과 존귀를 주실 것이다. 주님의 그러한 상은 그들에게 뿐만 아니라, 주를 위해 헌신한 모든 일꾼들에게 약속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3:7, 8,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결론적으로, 24절부터 30절까지에서 우리가 받는 교훈은 교만과 명예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본받아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성심으로 섬길 뿐 아니라, 또한 서로 서로를 섬기는 자가 되자.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먼저 섬기는 자가 되자. 우리가 이처럼 주의 교훈을 따를 때 주께서는 내세의 풍성한 즐거움과 영광으로 상 주실 것이다.
31-34절, 시몬을 위해 기도하심
[31-34]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본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진리를 깨닫는다. 첫째로, 우리는 세상에 사탄의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존재하시듯이 사탄도 실제로 존재한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이다. 그는 에덴 동산에 실제로 있었다. 그는 뱀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었다. 요한계시록에는 그를 '큰 용, 옛 뱀, 마귀, 사단'이라고 표현하였다(계 12:9). 그 사탄은 예수님 당시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 우리는 사탄의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
사탄은 인류 역사의 시작 때로부터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하였다. 그는 인류 역사 전체에 걸쳐 활동하여 왔다. 그 사탄이 예수님 당시 그의 제자들을 밀 까부르듯 시험하려 하였다. 밀 까부르듯 시험하는 것은 그들을 실수하게 하고 범죄하게 하는 것을 말할 것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인 시몬 베드로는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다고 고백하였으나 그는 그날 밤 주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었다. 주를 부인하는 죄는 큰 죄가 아닌가? 그것은 3년간 주를 따라다니며 훈련 받은 것을 무(無)로 돌리는 듯한 큰 죄가 아닌가? 사탄은 시몬을 그렇게 크게 실수하고 범죄하게 할 것이었다.
사탄은 시몬뿐 아니라 또한 우리 중 누구라도 그렇게 범죄하게 할 수 있다. 사탄은 지금도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 되게 하는 악령이다. 사탄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이며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이다(엡 2:2).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본성의 죄악성과 연약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깨어 있지 않는다면 우리도 시몬 베드로와 같이 큰 실수와 범죄를 할 수 있다. 바울은 탄식하며 고백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하였다(롬 7:24). 우리는 늘 깨어 있어 사탄을 대적해야만 시험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의 활동이 이처럼 강력하지만, 그것은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 사탄은 주의 제자들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님께 요청하였다. 사탄은 자기 스스로 성도들을 시험할 수 없고 하나님께 청구하여 허락을 받은 후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욥기 1: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욥기 2:6,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온 우주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사탄은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활동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고 두려워해야 하며 사탄을 두려워할 것은 없다.
둘째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주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깨닫는다. 주 예수께서 시몬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 믿는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은 그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이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렸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히브리서가 증거하는 대로, 예수께서는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시다(히 2:17; 4:14). 그는 오늘날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의 기도를 올리신다. 로마서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의 중보의 기도는 효력이 있다.
주께서 시몬을 위해 하신 중보 기도의 내용은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대속하신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성도에게 있어서 생명줄이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영원한 생명이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영생이 없고 그는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요 3:36; 롬 1:17).
찬송가 203장은 이렇게 썼다: "나 행한 것으로 구원을 못얻고 이 육신 힘껏 애써도 죄 씻지 못하네. 나 혼자 힘으로 내 주를 못뵙고 나 탄식하여 울어도 내 짐을 못벗네/ 주 예수 공로만 내 짐을 벗기고 주 예수 흘린 피로써 나 평화얻겠네. 주 예수 사랑이 내 근심 쫓으며 내 병든 영혼 고치사 참 자유 주시네."
또 찬송가 343장은 이렇게 썼다: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이 복음 신앙, 속죄 신앙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 된다(요일 5:4). 예수께서는 시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곧 쇠약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 오늘날도 그는 우리의 믿음이 쇠약해지지 않기를 기도하실 것이다. 믿음이 쇠약해지지 않는다면, 시몬 베드로처럼 어떤 실수와 범죄의 현실에서도 다시 일어나 주께 엎드려 용서를 구하며 새 힘을 얻을 것이다. 주의 기도는 효력이 있어 우리는 어떤 연약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일어나 주께로 나아가게 된다.
셋째로, 본문에서 우리는 성도의 임무를 다시 깨닫는다. 그것은 먼저 우리의 실수와 연약에서부터 돌이키는 것이다. 성도는 언제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 죄를 버리고 그 죄에서 떠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다. 그는 믿지 않는 사람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다(눅 15:7). 그는 한 사람이 마귀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해방되어 구원얻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미 믿는 자들도 열심으로 죄를 회개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다(계 2:5; 3:19).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이다. 즉 우리가 죄짓지 않고 의롭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회개할 때 또한 다른 형제들을 굳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죄에서 돌이키도록 권면하고 또 죄짓지 않고 믿음과 의에 굳게 서도록 격려할 수 있을 것이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큰 죄를 범하고 눈물로 회개하며 돌이킨 후 다른 이들을 굳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간음과 살인의 큰 죄를 범한 후 통회 자복하고 회개하면서 자기 속에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 견고한 영을 주시고 성령을 거두지 마시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한 후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51:10-13).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사탄의 시험을 조심해야 하겠다. 사탄은 실제로 존재하는 악령이며 지금도 성도들을 밀 까부르듯이 시험하여 실수하고 범죄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사탄의 시험을 조심하며 깨어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중보 기도를 깨닫고 감사해야 하겠다. 특히 그는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쇠약해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신다. 그의 기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많은 실수와 연약과 부족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잃지 않고 또 다시 회개하며 일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새 힘을 얻는다. 예수님의 중보 기도는 효력이 있다! 주님의 중보 기도를 감사하자!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실수와 범죄를 깨달을 때마다 즉시 돌이켜 회개하고 그 죄를 버리고 그 죄에서 떠나야 하고, 또 그런 후 다른 형제들을 회개시키고 믿음과 의에 굳게 세우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까지도 사용하셔서 마침내 우리 모두의 회개와 실제적인 의와 거룩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게 하실 것이다. 아직도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은 없는가? 회개하고 구원을 얻었는가?
35-38절, 부족한 것이 있더냐?
[35]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주께서 제자들을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셨을 때란 마태복음10장이나 누가복음 9장에 증거된 대로 열두 사도들을 세우시고 전도자로 보내신 때를 가리킨다. 그때 주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들]이나 지팡이[들]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0:9, 10). 그들은 주의 명령대로 돈을 넣은 전대나, 여행용 물건을 넣은 주머니나, 여분의 신들을 가지지 않고 전도의 길을 떠났을 것이다.
주의 제자들은 주의 명령대로 행하였을 때 부족한 것이 없었다. "부족한 것이 있더냐? 없었나이다." 주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적 보호와 공급을 체험하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신앙적으로 연약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핍박이나 해를 당하지 않았고 또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먹을 음식과 쉴 처소를 얻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체험하였다. 우리가 믿음 중심, 말씀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만 산다면, 비록 우리에게 고난은 더러 있을지라도 우리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33에서 분명히 가르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는데, '이 모든 것'이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등 소위 의식주의 문제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생활 곧 하나님 제일주의, 말씀 제일주의, 신앙 제일주의로 사는 삶에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고백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하였다(시 23:1-3).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부족함이 없다.
히브리서 13장에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고 말씀하였다(히 13:5, 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내세뿐 아니라 현세도, 그리고 영적인 것뿐 아니라 육적인 것까지도 돌보시고 공급하신다.
[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이제는'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때를 가리킨다. 이제 제자들이 처할 상황은 이전과 다를 것이다. 주께서 그들을 보내셨을 때 제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공급을 체험하였지만 계속 기적적 보호와 공급을 체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독교는 많은 기적들에 관해 말하지만, 기적주의는 아니다. 기적은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으로 일어났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와 뜻을 알리는 목적이 있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질 것이었다. 제자들에게는 핍박도 있을 것이며 해도 받을 것이며 심지어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의 부족도 있을 것이고 거처할 곳이 없을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은 간증하기를,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다"고 말했다(고전 4:11).
주께서는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주께서 죽으신 후에는 돈 주머니나 여행 가방이 필요하고 아마 호신용 검도 필요할 것이다. 주의 말씀의 참 뜻은 제자들이 이제는 모든 정당한 인간적 방편을 무시하지 말고 사용하라는 것일 것이다. 제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손으로 일해야 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사도 바울은 자기 손으로 일하는 본을 남겨주었다. 사도행전 18:3에 보면, 그는 아굴라와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그와 함께 거하며 일하였는데, 그것은 장막 만드는 일이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그는 고백하기를,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라고 하였다(행 20:34, 35). 또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했다(살후 3:10).
성경은 우리에게 게으르지 말고 근면하라고 가르친다. 기독교는 기적주의가 아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성실하고 근면한 생활을 장려한다. 잠언 6:6-11,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언 11:16,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잠언 12:2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의 시간이 가까왔음을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되는 것임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대로 되는 것이었다. 성경에는 그가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을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사야 53:12은 예언하기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다 이루어져야 했다. 메시아의 죽음에 관한 예언들의 마지막 단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께서는 마침내 불법자로 간주되셨고 그래서 가장 극한 사형을 당하셨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인으로 취급되셨다. 그 시대에는 도덕도, 정의도 없었다. 오직 불의만 판을 쳤고 억울함이 가득하였다. 이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속(代贖)의 이치가 있었다. 죄 없으신 그가 형벌을 받으셨으므로 죄 있는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 이 때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그의 제자들도 고난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제자들은 고난 없는 전도 사역을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공급을 얻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그들은 고난을 각오하며 전도해야 할 것이다. 주께서 먼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것이며, 이제 제자들은 그의 뒤를 따라야 할 것이다.
[38] 저희가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많은 주석가들은 본절을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의 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자 주께서 '그만 말하자. 그만하면 되었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옛날 모세가 하나님의 진노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거기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대답하신 경우와 비슷할 것이다(신 3:26).
결론적으로, 35절부터 3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주권적으로 보호하시고 공급하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니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 중심, 진리 중심, 믿음 중심으로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하심이 있다 .
둘째로, 우리는 모든 정당한 인간적 방편들을 무시하지 말고 사용하면서 날마다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적 방식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공급하실 수 있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방법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정당한 인간적 방편들을 사용해야 한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성실하고, 주부는 집안일에서 성실하고 학생은 공부에 성실해야 한다. 우리는 기적주의나 한탕주의의 생각을 버리고 일확천금을 벌려는 생각을 버리고 놀고 먹으려 하지 말고 게으르지 말고 각자의 일에 성실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주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고 주의 제자들도 고난의 길을 걸었음을 기억하고 고난을 각오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므로 그 고난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높으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일이 됨을 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현실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어떤 고난의 현실이라도 하나님만 의지하며 인내하며 살아가야 한다.
39-46절, 감람산에서 기도하심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의 모습과 기도에 관한 교훈을 통해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몇 가지 교훈을 준다.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첫째로, 본문은 우리에게 기도의 습관을 가질 것을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가셨다. 그것은 기도하시기 위함이었다. 사람의 습관은 그의 인격을 형성한다. 우리는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한다. 매일 규칙적으로, 가능하면 시간을 구별하여,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습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습관(예를 들어, 주일에 물건을 사지 않고 텔레비젼을 보거나 운동을 하지 않는 것 등), 공예배 시간에 빠지지 않는 습관(예를 들어, 주일 오후예배, 수요예배, 새벽예배, 금요예배까지 참석하는 것) 등은 좋은 습관이며 자신의 영적 성장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유익하다. 히브리서 10:24, 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40]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둘째로, 본문은 우리에게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도란 인간이 하나님께 아뢰는 말이며, 성도의 기도 생활은 그의 믿음의 성장에 비례할 것이다. 즉 성도의 믿음이 자라면 그의 기도 생활도 깊어지고 풍성해질 것이다. 그런데 기도는 무엇보다 성도가 시험에 들지 않고 시험을 이기는 길인 것이다. 이 세상에는 죄악된 일들과 마귀의 시험들이 많다. 이것들은 우리의 연약하고 부패한 본성을 자극하여 우리로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고 불순종하게 만든다. 우리가 시험에 넘어지면 범죄하게 된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보다 죄를 안짓는 것이다. 성도가 죄를 안지으려면 우선 시험에 떨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기도는 바로 성도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기도하는 자는 깨어 믿음을 가지고 마귀의 시험을 대적할 수 있다. 누가복음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셋째로, 본문은 우리에게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릴 것을 가르친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간절한 기도의 모습이다. 사도 바울도 종종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행 20:36; 엡 3:15). 기도는 물론 인격적이어야 한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하셨다(마 6:7). 우리는 기도할 때 주문을 외우듯이 헛된 반복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격적으로 기도하되 냉냉한 마음으로 하지 말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성경은 부르짖는 기도에 대해 많이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셨는데(마 7:7) 이것은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을 나타낸다. 또 그는 밤에 찾아와 떡 세덩이를 빌리려 한 친구의 이야기로 우리가 강청하는 기도 혹은 끈질긴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누가복음 11: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혹은 '그 끈질김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또 그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로 우리가 때때로 어려운 일이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계속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누가복음 18:6, 7,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되, 시시때때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것이다.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넷째로, 본문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며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인간적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실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그는 인간적으로 그 잔 곧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는 심히 연약한 그 순간에도 아버지의 뜻을 앞세우셨다. 우리도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첫번째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4장에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利, 이익]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예수께서는 인간적 연약에도 불구하시고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인간 예수의 뜻보다 더 선하실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 인간의 뜻보다 더 지혜로우시고 더 선하시다. 실로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시며 우리에게 유익하시다. 이사야 55:8, 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고난의 현실 가운데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달게 받아야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내 뜻만을 고집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며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합당한 기도의 내용이며 합당한 기도의 자세이다.
[43, 44]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기도하는 아들 예수의 힘을 돕게 하셨다. 기도는 쉬운 일이 아니다. 주께서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힘쓰고 애써'라는 원어는 '고통 가운데서'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고통 가운데서도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간절히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기도의 모본이 된다. 우리도 항상 쉬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며 특히 고난과 환난의 현실에서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피난처와 견고한 망대로 삼고(시 61:3)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45, 46]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주께서 잡히실 날이 된 그날 밤이었지만,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지 못했다. 그들은 슬픔을 인하여 잠이 들고 말았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를 진실히 믿었고 따랐던 그들, 3년간이나 주님의 친 음성으로 은혜로운 교훈의 말씀을 받았던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육신은 여전히 연약하였다. 인간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우리의 성화란 얼마나 더디고 보잘 것 없는지!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쳐 복종시키는 연습을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39절부터 46절까지의 내용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얻었다. 첫째로, 우리는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하겠다. 특히 규칙적으로 성경책을 읽고 기도하는 습관, 공예배에 힘써 참석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기도함으로 시험에 떨어지지 않고 시험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깨어 기도하는 자는 마귀의 시험을 이길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기도하되 특히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간절한 기도, 부르짖는 기도를 올려야 할 것이다. 주께서 무릎을 꿇고 땀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셨듯이, 우리도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며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보다 더 지혜롭고 더 선하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47-53절, 이것까지 참으라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시고 감람산에서 기도하신 후 유대 지도자들이 보낸 무리들에게 잡히신 광경을 증거한다. 본문은 그 시간에 보이신 주님의 긍휼과 인내를 증거한다.
[47, 48]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가룟 유다는 주님께 입맞춤으로 그를 악인의 무리에게 넘겼다. 입맞춤은 그 시대의 인사법이었다. 바울이나 베드로의 서신들에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말씀이 자주 나온다. 그것은 성도의 거룩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물론 그것은 동성간의 인사로 제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밤에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그러한 사랑이나 존경의 입맞춤이 아니었다. 본문이 증거하는 대로 그는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 앞에 서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왔다. 그것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증거된 대로 그 무리들과 약속한 '군호'이었다(마 26:48; 막 14:44). 그는 그 무리에게 예수님을 확인시켜 그를 잡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거짓된 위선적인 이중적인 행위이었다. 잠언에는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라'는 말씀이 있다(잠 27:6). 이 경우가 그러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열둘 중에 하나'이었던 유다, 예수님께 많은 사랑을 입었고 3년간이나 주님과 동행하며 그의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과 교훈과 행동을 친히 목격했던 유다, 예수께서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그이었지만, 그 밤에 그는 주님을 배신하고 악한 유대 지도자들편에 서서 예수를 체포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것이 인간의 악하고 어리석은 모습이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고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을 것이다(마 27:5). 참으로 불쌍한 유다이었다!
[49, 50]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주님 곁에 있었던 제자들 중에서 주님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빼어든 자가 있었다. 요한복음에는 그가 시몬 베드로라고 증거한다(요 18:10). 그는 의분의 칼을 빼어들었다. 그는 지극히 의롭고 인자하신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잡는 무리를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주를 위해 칼을 빼어 주를 잡는 사람을 쳤다. 그가 친 칼은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쪽 귀를 잘랐다. 그것은 유대 지도자들의 편에서는 공무집행 방해의 행동이었겠지만, 베드로의 양심에는 정당방위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주께서 잡히시지 말아야 하고 죽으셔서는 안된다는 인간적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생각과 달리, 예수께서는 이전에 제자들에게 예언하신 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워 사형 선고를 받고 또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능욕과 채찍질을 당한 후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이었다(마 20:18, 19). 그는 잡히셔야 했고 죽으셔야 했다. 또한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의 가셔야 할 길이었다. 이사야 53장은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자세히 예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에 제자들에게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교훈하셨다(마 5: 39). 그를 위해 칼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교훈에 배치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점들에서 베드로의 행위는 정당화 되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주를 위하여 의분의 칼을 빼어들었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주를 위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잡히시는 주님의 뒤를 묵묵히 따라야 했을 것이다.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주께서는 칼로 악한 무리를 친 그 제자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기를 잡는 무리까지 긍휼히 여기셨고 그들의 악행을 참으셨다. 여기에 주님의 긍휼이 있고 주님의 인내가 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굳게 믿고 있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라고 하셨다(마 26:53, 54). 한 영(레게온)은 6천명의 군인들을 가리킨다. 열두 영은 문자적으로 7만 2천명의 천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그가 충만한 수의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는 그 권세를 쓰지 않고 끝까지 참으셨고 악인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제사장의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해주셨다. 여기에 주님의 긍휼이 다시 한번 더 증거된다. 비록 그 종이 자기를 잡으러 온 악한 자들에 속해 있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떨어진 오른쪽 귀를 붙여주셨던 것이다. 이것이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이 아닌가? 바울 사도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말했다(롬 12:20). 주께서 오른쪽 귀를 낫게 해주신 것은 그의 긍휼과 사랑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능력이었다.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이 떨어진 귀를 붙여줄 수 있는 자가 또 누구인가? 그의 능력은 신성(神性)의 능력이었다. 그는 잡히시는 그때에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무리들에게 능력으로 증거하셨던 것이다.
[52, 53]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어제까지 예수께서 성전에서 무리를 가르치셨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그들은 무리 앞에서 그를 잡을 만큼 악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그들의 양심은 그런 정도만큼 그들을 제재하였다. 그러나 이제 악한 자들의 때가 왔다. 어두움이 세상을 지배하는 때가 왔다. 유대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낼 때가 왔다. 그들의 양심은 통제권을 잃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극악한 죄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 인격자요 도덕적 인격자이셨던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영광의 주님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인류의 모든 죄악은 그들의 이 행동, 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죽이려는 이 행동에서 절정을 이룰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47절부터 53절까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실제적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입맞춤으로 주님을 배신하는 자가 되지 말자. 그것은 거짓이었고 위선이었고 이중적 행동이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마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그에게 은 30을 달아주었다(마 26:14-16). 은 30은 30데나리온을 가리킨다면 오늘날 돈으로 150만원 정도이며, 30세겔을 가리킨다면 300만원 정도, 30스타테르를 가리킨다면 600만원 정도이다. 그는 돈 몇 백만원에 주님을 팔았던 것이다. 재리의 유혹은 신앙의 실패자가 되게 한다. 그것은 주께서 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뿌리운 씨와 같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돈 사랑의 폐해에 대해 자세히 교훈하였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 10). 가룟 유다는 주님을 3년간이나 따라다녔고 주의 교훈과 기적을 친히 보았고 들었지만, 돈에 대한 욕심과 사랑 때문에 주님을 배신하였다. 그는 돈에 대한 사랑 때문에 멸망하였다. 우리는 돈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을 배신하지 말자. 우리는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신앙을 팔아먹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죽기까지 고난을 참으며 선을 베푸는 자가 되자. 예수께서는 잡히시던 그 밤에 이러한 모범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 우리는 주의 교훈을 기억하고 힘써 실천하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38-44). 우리는 주의 말씀과 모범을 지키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자(계 2:10).
54-62절, 베드로가 주를 세 번 부인함
[54, 55]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유대지도자들이 보낸 무리가 예수님을 붙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때 베드로는 멀찍이 주님을 따라갔다. 그는 몇 시간 전에 주님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말했었다. 그는 그의 말대로 행하지 못했다. 그는 주님 가까이에서 주님과 함께 당당히 주를 따르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그는 비록 멀찍이일지라도 주님을 따르기는 하였다. 그는 주님께서 잡히신 상태로 유대지도자들의 심문을 기다리고 계실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갔고 불가에 둘러앉은 사람들 가운데 앉았다. 그만큼 그는 주님을 따랐다.
[56, 57]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거기에서 한 여종은 불빛에 비친 베드로의 얼굴을 알아보고 그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마 26:69; 막 14:66, 67). 요한복음에는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요 18:17). 다른 복음서들에 나오는 그 여종이 바로 문 지키는 여종이었던 것 같다. 베드로는 그 여자의 말을 즉시 부인하였다. 이것이 베드로가 그 밤에 첫번째로 주님을 부인한 것이었다.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 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두번째는 조금 후에 다른 한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너도 그 당이라고 말했다. 마태복음에는 '다른 여종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고(마 26:71) 마가복음에는 '그 여종이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이 사람은 그 당이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막 14:69). '그 여종'은 처음 말한 여종을 가리키는 것 같다. 요한복음에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요 18:25). 베드로가 두번째 주님을 부인했을 때는 이런 일들이 동시에 먼저 있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때 맹세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마 26:72).
[59, 60]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베드로에 대해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다'고 말했다. 마태복음에는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마 26:73). 마가복음에는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막 14: 70). 요한복음에는 '대제사장의 종 하나가 베드로에게 말하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요 18: 26). 본문의 한 사람은 그 대제사장의 종을 가리킨 것 같다. 베드로는 갈릴리 지방 말씨와 억양을 가졌던 것 같다. 베드로가 세번째 주님을 부인했을 때 사람들의 지적과 특히 그 중의 한 사람인 대제사장의 종의 지적이 동시에 먼저 있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세번째에는 베드로가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마 26:74; 막 14:71).
이와 같이, 베드로는 사람 앞에서 공공연히, 반복해서 주님을 부인했고 심지어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그렇게 하였다. 그 사도는 주를 확실히 부인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 인간의 모습이 있다. 이것을 보면, 사람에게 행위의 의(義)라는 것은 없다. 아담이 한번 범죄함으로 죽었듯이, 인간의 많은 실수와 범죄는 자신의 행위의 의를 완전히 부정하게 만든다. 모처럼 쌓은 것 같은 행위의 의도 한번의 실수로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만다. 인간은 의가 없고 연약하기 그지 없는 존재이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돈에 대한 욕심과 사랑 때문에 왔었다. 실상 그는 믿음이 없었고 중생치 못했었다. 그러나 베드로의 배신은, 믿음이 있고 중생한 자에게 있는 연약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자기 목숨의 위협 앞에서 그렇게 연약하였다. 그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며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는 주의 말씀을 잊었다. 연약한 사도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의 본성의 연약성의 모습이다.
실상, 베드로의 모습은 구약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모습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풀무불에 던지우는 것도 겁내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었다(단 3장).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후 능력 있는 증거자가 되었다. 그는 사도행전에 증거된 대로 주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채찍질과 능욕을 기뻐하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행 5:40-42).
[61, 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주께서는 베드로가 그를 세 번이나 부인하는 것을 들으셨다. 베드로는 주님과 같은 뜰에 있었던 것 같다. 베드로가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갈릴리 사람으로 여겨졌던 것을 보면 그는 불을 쬐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같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목소리, 아니 세번째는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주님을 부인하는 목소리는 주님께도 들릴 만한 목소리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았을지라도 주님은 그의 하는 말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베드로의 부인하는 음성을 들은 주님은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 주님의 눈길은 베드로의 눈과 마주쳤을 것이다. 주님의 눈길은 분명히 베드로의 큰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눈길이었을 것이다. '네가 나를 그렇게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느냐? 3년간이나 나를 따라 다녔던 네가 나를 모른단 말인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치 말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던가? 너의 육신의 목숨이 그렇게 귀하냐? 죽는 것이 그렇게도 두려우냐?' 그러나 주님의 눈길은 또한 회개하라고 부르시는 긍휼의 눈길이었을 것이다. '베드로야, 네가 그렇게도 연약하냐? 3년간의 제자 훈련은 다 어디로 갔느냐? 빨리 회개하라. 속히 돌이키라.'
그때 베드로는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났고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연약과 부족과 주께 대한 불신실함을 뉘우치는 회개의 통곡이었을 것이다. 그는 몇 시간 전에 주님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고 말했던 자신의 말을 심히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 결심을 했을 것이다. 이런 큰 죄를 범하였으나 용서함을 얻고 후에 주를 위해 끝까지 쓰임 받은 종이 된 것을 보면, 이 밤에 그의 통곡은 진심의 회개의 통곡이었다.
결론적으로, 54절부터 62절까지의 내용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자신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는 베드로의 고백은 부끄러운 말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그런 고백을 하지 말아야 한다.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시편 62: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잠언 3:5, 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우리는 스스로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만을 구하고 의지하자.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실수와 죄악을 깨달을 때 즉시 회개해야 한다. 지체치 말고 통회자복해야 한다. 진심으로 마음을 찢는 눈물이 있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요한계시록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심의 회개의 눈물을 받으시고,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붙드실 것이다.
63-71절, 공회 앞에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심
본문은 예수께서 자기를 지키는 자들에게 모욕을 당하시고 유대지도자들에게 정죄를 당하신 것과 그들의 모임인 공회 앞에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내용을 증거한다.
[63-65]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우고 물어 가로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예수님을 지키던 사람들은 그를 희롱하고 때렸다. 전통사본에는 '그의 눈을 가리우고'라는 말 다음에 '얼굴을 때리고'라는 말이 또 있다. 그들은 또 많은 말로 예수님을 욕하였다. 예수님이 왜 그런 모욕을 당하셔야 하는가? 그는 그런 모욕을 당하실 아무런 잘못을 한 적이 없으시다. 인간이 얼마나 무지하고 악하면 그런 희롱과 구타와 모욕을 그에게 행하는가? 심히 비인격적인 사람들이다. 악인에 대해서라도 긍휼과 동정을 가져야 할 터인데, 의롭고 선하신 예수께 그런 행동을 하다니 인간은 참으로 악한 존재이다. 인간에게 선한 면이 있어 보일 때가 있지만, 악하게 행동할 때는 마귀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 본성의 모습이다. 이것이 인간 본성 속에 있는 죄악성이요 연약성이다.
그러나 이런 희롱과 모욕을 당하신 주께서는 대항하지 않으셨다. 구약성경은 메시아에 대하여 "그가 곤고를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예언하였다(사 53:7). 죄인을 향하신 그의 인내와 그의 온유와 그의 긍휼은 그의 제자 된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모범이다(벧전 2:21- 24).
[66-68]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이어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모였다. 그들은 백성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었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옛날 영어성경과 같이 '백성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그의 증언을 믿지 아니할 것이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증언을 듣고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겠느냐?'고 하였고, 저 지도자들은 다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였고 그의 얼굴에 침 뱉고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렸다.
실상,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벌써부터 생각하고 결심하였다. 누가복음 19: 47, 48,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누가복음 20: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과 같이 될 것이었다(눅 20:17). 누가복음 22:1, 2,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저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는가? 그것은 저들이 악하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자신들의 악함을 회개치 않았다. 또 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죽이려 하였다(요 8:37). 저들은 하나님을 사랑치 않았다(요 5: 42).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모양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고 죽이려 하였으니 저들의 경건한 외모는 위선에 불과하였다. 종교가 타락하면 세상보다 더 악해지는가 보다. 저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고 사탄의 종들이었다. 저들의 결국은 멸망뿐이다.
[69, 70]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다 가로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예수께서는 그런 모욕적 상황 속에서 유대지도자들의 최고회의인 공회 앞에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그에게 맹세케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마 26:63).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시면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다. 그것은 확실히, 법정 앞에서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하신 엄숙한 증언이었다.
공회의 법정 앞에서 하신 주님의 증언의 내용은 자신의 사역적 신분과 인격과 상태에 관한 것이었다. 우선, 그는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는 요청에 대해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는 말씀으로 우회적인 긍정적 대답을 하셨다. '그리스도'는 구약에 예언된 구주를 가리킨다(요 4: 25, 26).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이어서 '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는 말씀도 하셨다(마 26:64; 막 14:62).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그는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라고 분명하게 대답하셨다.
특히, 하나님 우편에 앉는 것과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구약 다니엘서에 예언된 메시아의 모습이다. 다니엘 7:13, 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일찌기 사도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의 내용이었다. 베드로는 고백하기를,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였다(마 16:16).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독생자이심을 증거한다(요 1:34; 3:16). 포도원 비유에서와 같이, 그는 주인의 종들과 다른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다(눅 20:13). 하나님의 아들께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우리가 아는 대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구약시대에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에 사용된 말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 가지 직분을 완성하시는 분으로 오셨다. 그는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이 되셨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신 참 선지자시요, 우리의 죄를 위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참 제사장이시요, 우리를 다스리시고 원수 마귀로부터 지키시는 참 왕이시다. 이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는다(요 3:16; 1:12). 이것이 복음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 약속은 신실하다.
[71] 저희가 가로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저 악한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 자신의 증언에 대하여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고 반응하였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그의 증언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똑같은 말을 그의 증언을 긍정하는 뜻으로 사용할 수 있다.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으니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예수님은 그가 친히 증거한 바로 그 분이든지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만일 그가 자신이 증거한 바로 그 분이 아니라면, 그는 선한 사람이 아니며 좋은 선생님, 모범적인 선생님이 아닐 것이다. 그는 확실히 사깃군이든지 정신병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진실을 말해야 할 재판석에서,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거짓을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존경하거나 추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는 진실을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이 친히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를 위해 참 선지자와 참 제사장과 참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보내어 주신 구주이시다. 그의 인격에 대한 증거들은 신약성경에 풍부하다. 그의 많은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을 풍성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증거한다. 그는 많은 병자들, 불치의 병자들을 고치셨다. 그는 귀신들린 자들을 많이 고치셨다. 그는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 그는 떡 다섯개로 5천명을 먹이셨다. 그는 말씀 한마디로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기타 많은 기적들이 성경에 진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모든 내용이 진실한 증인들인 그의 제자들에 의해 증거되었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서로 다른 네 명의 증인들에 의해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마침내 십자가형을 받으셨지만 삼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공회 앞에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참된 증거이다. 우리는 유대지도자들의 말을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을 받자. 우리 중에는 한 사람도 성경을 읽으면서, 이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멸망 당하는 자가 없기를 바란다. 그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믿지 않는 자는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를 영접하는 자 곧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으며(요 1:12),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따르는 제자가 되자. 우리는 그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를 위해 우리 자신을 즐거이 하나님께 바치며 그의 모든 뜻에 순종하자.
23장: 죽으심
누가복음 23장은 예수께서 빌라도와 헤롯에게 심문을 받으신 후 사형 언도를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일을 기록한다.
1-12절, 빌라도와 헤롯에게 심문 받으심
1절부터 12절까지는 예수께서 로마 총독 빌라도와 갈릴리 분봉왕 헤롯에게 심문 받으신 일을 기록한다.
[1, 2]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 이른 아침 예수를 끌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갔다. 당시의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유다 지방을 통치했던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최종적 재판권이 있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로마 총독으로 하여금 예수를 정죄하도록 머리를 썼다. 일반 대중은 로마 총독의 결정에 도전할 수 없을 것이었다. 저 종교지도자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 죄인의 손에 의해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제출한 고소 내용은, 첫째로 이 사람이 우리 백성을 미혹한다는 것과, 둘째로 그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한다는 것과, 셋째로 그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첫번째 고소 내용은 참으로 사실과 정반대 되는 비난이었다. '미혹한다'는 원어는 '타락시킨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전파하셨고 그들이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어둡고 완악하였으며 지금 저 지도자들은 도리어 예수가 백성을 타락시킨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 고소 내용도 사실과 달랐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내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을 하지 않으셨다. 그는 로마 제국의 정권을 반대하는 어떤 정치적 운동도 하지 않으셨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의 말을 책잡기 위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었다(눅 20:25). 성경은 성도가 세상에 살면서 세상 나라에 세금을 내야 할 것을 가르친다(롬 13:7).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이었다.
세번째 고소 내용은 사실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요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셨다.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셨다(사 9:6, 7; 렘 30: 9). 예수님은 바로 그 예언된 분이시다. 그러나 만일 저 지도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그들은 그 이유와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전에 예수께서는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해 요한의 제자들에게 답하시면서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었다(눅 7:22).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에 대하여 많은 증거를 남겨주셨다. 그러나 저 유대 지도자들의 반증은 무엇인가? 그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저들은 아무런 반증도 제시하지 않았다.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는 그들의 세 가지 고소 내용 중 세번째 것에 대해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는 말로 분명하게 자신의 신분에 대해 증거하셨다. 그는 유대인의 공회 앞에서 엄숙히 맹세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증거하셨듯이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도 자신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셨다. 그는 이 두 사건에서 자신의 인격과 신분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셨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일차적으로 물질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요한복음에는 좀더 자세히 그 내용이 쓰여 있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8:36). 예수님의 왕국과 왕권은 영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물질적인 나라가 아니고 영적인 나라이었다. 물론 그 나라는 장차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며 그 나라의 완성은 물질적 풍요로움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현재 죄를 회개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 속에 임하는 영적인 나라이다.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것을 즉시 알았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그것은 로마의 지성인의 한 사람이었을 그의 이성적 판단이며 양심적 판단이었다. 이방인 빌라도는 타락한 유대 종교인들보다 더 이성적이었고 더 양심적이었다. 그의 판단으로는 예수님이 죽임을 당할 합당한 이유가 없었다. 유대 지도자들이 제시한 고소 내용은 객관적 근거를 가지지 않았거나 타당한 반증을 가지지 않았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5-7]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무리들은 더욱 굳세게 말하면서 예수님을 백성을 소동케 하는 자 혹은 '선동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참된 믿음을 가지라고 외치고 가르친 것이 백성을 소동케 하고 선동한 것인가? 상황이 옳지 않음을 느낀 빌라도는 그 재판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 것을 듣고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 알고 그를 헤롯에게 보내었다. 헤롯은 헤롯 안디바라는 사람으로서 주전 4년부터 주후 39년까지 갈릴리 지방을 다스렸던 분봉왕이었다. 그는 세례 요한을 죽였던 왕이기도 하였다. 헤롯 가문은 에돔인 곧 에서의 후예이었다고 한다.
[8, 9]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헤롯은 예수님을 보고 심히 기뻐하였다. 예수에 관한 소문은 일반 대중 속에서만 퍼진 것이 아니고 헤롯 왕궁에까지 전달되었다. 예수님을 따르며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던 여인들 가운데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도 포함되어 있었다(눅 8:3). 요안나는 자기 남편에게 예수님에 관해 많이 이야기했을 것이며 그의 남편 구사는 기회 있는 대로 헤롯에게 예수님에 관해 말했을 것이다. 헤롯은 예수님을 오래 전부터 보고 싶어 하였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기적 행하심 같은 외적인 데 있었고,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진리나 예수님에 관한 진리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예수께 많은 말로 물었지만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유대 지도자들은 또 한 번 헤롯왕 앞에서 서서 예수를 힘써 고소하였다. 예수님께 그렇게 고소할 말한 악한 점이 있었는가? 저들은 자신들의 악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엄숙한 재판정을 악용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런 행위를 더욱 미워하신다. 그것은 인간의 양심을 저버린 완악하고 패역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지도자로서의 지위와 인간적 꾀를 가지고 의인 예수를 죽이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인간은 참으로 악하였고 타락한 교회는 참으로 가증하였다.
[11, 12]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헤롯은 그를 호위하는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하였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악인들에게 무시와 조롱을 당하셨다. 헤롯은 그에게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 보내었다. '빛난 옷'은 왕의 복장을 흉내낸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사람의 노리개감이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이런 수치와 멸시를 받으셨고 그것을 참으셨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이다.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가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도 평탄한 길이 아니고 고난을 통과하는 길이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의 믿음과 인격을 굳세게 하고 거룩케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고난이 없는 인간은 교만하기 쉽지만, 인간은 고난을 통해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2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 혹은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한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께서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친히 증거하신 증거를 통해서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공회 앞에서도, 로마 총독의 재판석 앞에서도 자신의 인격과 신분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사람들은 그의 증거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성경은 그에 관한 많은 증거들을 제시한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풍성히 증거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사형을 당할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임을 당하셨음을 알게 된다. 빌라도는 증거하기를,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라고 하였다. 또한 헤롯도 같은 판단을 하였기 때문에 그를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 보냈다. 그들은 다 재판장의 위치에 있었다. 만일 예수에게 죽을 죄가 있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확인하고 증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는 그런 죄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단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하였을 뿐이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으로, 그것도 십자가의 극형을 당할 죄인으로 정죄되고 있었다. 여기에 기독교의 깊은 진리가 있다. 의인 예수께서 죄인으로 간주되셨다. 그럼으로써 그가 죄인들을 대신하는 속죄 제물이 되셨다. 그의 죽음을 통해 죄인들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이 열렸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다(고후 5:21). 여기에 구원의 이치가 있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나 헤롯이 그를 믿고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않고 지나가 버린 자들이 되었다. 물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 했던 저 유대 지도자들의 무지와 죄악은 더욱 컸다. 그러나 그들은 다같이 공통적으로 마음이 어두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보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그를 고소하고 비난하였고 다른 이들은 그를 무시하고 조롱하였다. 또한 그들은 다 일반 대중과 충돌하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 진리나 참된 정의에 관심이나 열심이 없었다. 죄가 없는 죄수라면 당연히 풀어주어야 했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정의감이 없었다. 그들은 다 세상 권세나 명예나 돈이나 쾌락으로 인생을 즐기며 만족하며 사는 자들이었다. 여러분은 그런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참으로 깨닫고 진실히 믿고 따르라고 요청하신다.
13-25절, 빌라도의 잘못된 판결
본문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고 세 번이나 그 사실을 무리 앞에 말하고 그를 놓고자 하였으나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를 청하므로 마침내 그들의 뜻대로 판결하고 그를 내어준 일을 기록한다.
[13-16]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査實)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그들이 예수에 대해 제출한 고소 내용이 타당하지 않고 그에게 죄가 없으며 헤롯도 그렇게 판단하였다고 말했다. 이미 4절에서도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라는 그의 판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또다시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고 증거하였다. 이것은 로마 총독 빌라도 이성적, 양심적 판단이었다. 20절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였고, 22절에는 세번째 말하기를,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고 하였다. 빌라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거하였다. 성경은 진실한 증거의 책이다. 성경은 빌라도가 그의 판단으로 예수님이 죄가 없으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하였다는 것을 증거하였다. 빌라도의 판단은 그러하였다. 그것은 그의 이성과 양심에서 나온 바른 판단이었다.
[18-23]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民亂)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세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그러나 유대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빌라도의 올바른 판단을 무시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없이하라고 외쳤다. 그들의 요구는 예수를 죽이는 것이었다. 명절에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를 따라 빌라도가 그를 놓고자 하여 그들에게 다시 예수의 무죄함을 말했을 때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더욱 소리질렀고 예수 대신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다. 바라바는 성중에서 민란(民亂)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혀 있던 자이었다. 빌라도가 세번째 예수의 무죄함을 말했을 때 그들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였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를 권하였고 충동하였다(마 27:20; 막 15:11). 좀더 자세히 기록한 요한복음에 의하면,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은 소리질러 말하기를 '이 사람을 놓아주면 [로마 황제]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였다(요 19:12). 유대지도자들은 백성을 교묘히 선동하였고 총독 빌라도를 궁지로 몰아 넣었다. 마태복음에는 빌라도가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마 27:24). 유대지도자들은 백성을 선동하여 민란을 일으키려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민중의 힘을 빌려서 빌라도를 몰아대었다. 거기에는 이성도, 법도, 양심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악을 결코 묵과하지 않으실 것이다.
[24, 25]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마침내 빌라도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 그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는 죽임을 당하도록 무리들에게 넘겨주었다. 무리들의 소리가 이겼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정당한 이유 없이 죄인으로, 그것도 십자가의 극형에 처할 큰 죄인으로 정죄되셨다. 총독 빌라도의 판결은 이성대로 된 판결이 아니었고, 양심대로 된 판결도 아니었고, 법대로 된 판결도 아니었다. 그의 판결은 정의나 공의와는 상관 없었고 단지 백성의 뜻과 기분에 맞춘 판결이었다.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 . .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마가복음에는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그렇게 하였다고 증거되어 있다(막 15:15). 백성의 뜻 배후에는 유대지도자들의 뜻이 있었고 그 지도자들 속에는 예수께 대한 시기와 미움이 있었다. 빌라도는 그들이 시기함으로 예수를 자기에게 넘겨준 줄을 알고 있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마 27 :18; 막 15:10). 저들은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행위는 율법이 정죄한 죄이었다. 출애굽기 23:2,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결론적으로, 13절부터 25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본문에 기록된 사건에서 대속(代贖)의 이치를 본다. 참으로 죽어야 했던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고 바라바이었다. 그러나 바라바는 놓임을 받았고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여기에 구원의 이치가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바라바와 같은 자들이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했던 죄인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참혹한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죽으셨다. 사실상 죽어야 했던 자들은 우리이었고 그가 아니었지만, 그는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했고 우리는 그의 속죄의 죽음 때문에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놓임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놓아주시기 위해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던 것이다. 이 사실을 감사히 받자.
둘째로, 우리는 로마 총독 빌라도처럼 잘못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는 이성과 양심으로는 예수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기분에 맞추어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 그의 판단과 행동은 시종일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성적, 양심적 판단과는 다르게 사람들의 낯을 보고 그릇된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공의의 판결을 내려야 할 재판장의 위치에 있었던 그가 불의한 판결을 내렸다. 우리는 빌라도처럼 사람들의 낯을 보고 악을 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또 성경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 판단대로 행동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잘못된 판결을 받을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걸어가신 길이었다.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진실한 많은 종들이 걸어갔던 길이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였다(딤후 3:12).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하려면 많은 환난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행 14:22). 그 환난 중에는 예수께서 받으신 것과 같은 불의한 판결과 부정당한 정죄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와 의는 결국 승리할 것이며 거짓과 불의는 결국 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서 그리고 진리와 의의 편에 서서 핍박과 고난을 각오하며 살아가자. 빌립보서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26-32절,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
본문은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정죄를 받으신 후 십자가에 처형되시기 위해 끌려 가시는 길에서의 모습을 증거한다. 본문은 예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어떠했음을 증거한다. 첫째로 그 길은 쓸쓸한 길이었다. 둘째로 그 길은 눈물이 있었던 길이었다. 셋째로 그 길은 부당한 대접이 있는 길이었다.
[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로마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하셨고 그들의 이끌림을 받아 사형장으로 나가셨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라고 증거한다(요 19:17).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사형장으로 향하셨다. 그러나 본문이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수를 끌고가던 자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을 잡아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다고 증거한다. 그것은 아마 예수께서 십자가의 앞쪽을, 그리고 시몬은 십자가의 뒷쪽을 짊어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십자가 형틀이 매우 무거워서 예수께서 혼자 지실 수 없었던 형편이었던 것 같다.
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그들이 구레네 시몬을 '억지로' 잡아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였다고 증거한다(마 27:32; 막 15:21). 마가복음은 그를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언급한다. 이 말은 그와 그의 아들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복음서 기록 당시에 교회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음을 암시한다. 십자가를 질 때의 구레네 시몬은 예수를 믿지 않은 자이었던 것 같으나 예수의 십자가를 진 계기로 그와 그의 가정은 복을 받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자들이 되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나아가실 때 그의 곁에는 그를 위해 그 무거운 십자가를 자원하여 함께 짊어지고 갈 제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친히 사도로 세웠던 모든 자들도 그의 곁에 없었다. 아무도 그의 십자가를 함께 지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군병들은 시골에서 올라오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자를 잡아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한 것이었다. 그도 그 십자가를 지기를 원치 않았지만 그들은 억지로 그에게 그 일을 맡겼다. 주께서 사형장으로 가시던 그 길은 이와 같이 쓸쓸한 길이었다. 그의 곁에는 그 십자가를 함께 나누어 질 아무 제자도 없었다.
이것은 주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를 따르는 진실한 제자들이 걸어갔던 길이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증거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고 했고 또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딤후 1:15, 16; 4:14-16). 오늘날 주의 제자들도 믿음을 지키고 주의 뜻을 행하려면 때때로 외롭고 쓸쓸한 길을 가야 할 것이다.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많은 사람들이 구경거리가 났다고 십자가를 진 예수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특히 그를 위해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들의 큰 무리가 있었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감성적이기도 하지만, 예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믿고 사랑했던 것 같다. 오늘날까지 교회 시대에도 그러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여자들은 믿는 일에 더 열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의 눈물은 예수께 대한 동정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저 의롭고 착하신 분이 끔찍한 십자가형을 받기 위해 사형장으로 가고 계신 것이었다. 저들의 가슴은 슬픔과 애통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실히 믿은 여자들의 눈물은 다른 이들의 마음에 연쇄반응을 일으켜 수많은 여자들이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들은 가슴을 치며 예수를 따라오고 있었다. 주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은 이렇게 눈물과 통곡이 있었던 길이었다. 그의 제자된 우리가 가야 할 길에도 때때로 진실한 사람들의 눈물과 통곡이 있을 것이다.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여자들의 눈물이 그렇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암시하셨다. 그는 그의 십자가 처형에 동정을 보내는 것보다 더 큰 일이 그들 앞에 놓여 있음을 암시하셨다. 실상 유대지도자들이나 로마 총독 빌라도는 세상에서 가장 극악한 죄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의인에게 극악한 사형을 집행하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단순히 의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의인을 그렇게 정죄하고 죽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죄의 벌을 어떻게 다 받으려고 그런 악을 행하고 있는 것인가? '예루살렘의 딸들아'라는 주의 표현은 특히 예루살렘을 지목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 그 가운데 하나님의 전이 있었던 예루살렘, 그 지도자들, 그 거민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들이 받을 댓가는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그래서 주께서는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9-31]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주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암시하신다. 그 날은 얼마나 무서운 심판과 형벌의 날일지! 여자들의 젊은 아들들은 전쟁에 징집되어 나가 죽을 것이다. 아들을 낳았다는 기쁨의 일이 오히려 큰 슬픔의 이유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어떻게든지 피하기를 소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보내신 메시아를 박대하고 배척하고 정죄하고 십자가에 죽인 예루살렘 사람들의 큰 악에 대해 그들에게 엄한 형벌을 내리실 것이다. 그 형벌은 우리가 아는 대로 약 40년 후인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심히 참혹하게 이루어졌다.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예수께서 사형장으로 나아가실 때 다른 두 행악자들도 사형을 받으러 그와 함께 끌려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사형수의 한 사람으로 취급되셨다. 그것은 부당한 정죄요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었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심히 부당한 대접을 받고 계셨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예언된 바의 성취이기도 하였다. 이사야 53:12, ". . .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주께서 이런 대접을 받으셨다면 주의 제자된 우리도 그러할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19-21).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두 가지 분명한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주께서 가신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각오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아무도 함께 십자가를 질 자가 없이 홀로 지셔야 하는 쓸쓸한 길을 걸으셨다. 거기에는 수많은 여자들의 통곡이 있었다. 그는 사형수처럼 대접을 받으며 그 길을 가셨다. 우리가 주를 믿고 따르려면 주의 가신 길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했다(골 1:24). 그는 디모데에게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히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였다(딤후 1:8). 주께서는 제자들의 이런 고난을 예상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다(마 5:10-12). 우리는 주의 고난에 참여할 각오를 가지고 살자.
둘째로, 사람들은 예수의 억울한 죽음을 동정적으로 슬퍼할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죄를 성찰하고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정죄한 그들의 죄악은 인간 본성의 죄성을 대표할 뿐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저들이 아니고 바로 우리들이었다. 그러므로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인해 가슴을 치며 슬퍼 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를 정죄하고 죽이는 인생의 극악함과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깨닫고 통회자복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악됨을 철저히 성찰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인해 두려워하고 눈물을 흘려야 한다. 여러분은 참으로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자녀들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인해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가?
33-38절, 십자가에 못박히심
본문은 예수께서 사형장에 도착하셔서 두 행악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신 일과, 주께서 자기를 못박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신 일과, 그가 옷벗김과 조롱을 당하신 사실 등을 증거한다.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곳은 해골이라고 불리우는 곳이었다. 다른 복음서들에는 '골고다'라는 히브리말이 나온다. 해골이라는 이름은 아마 그곳이 사형장이었고 해골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곳의 지형이 해골 모양이기 때문이었다고 추측하였다.
십자가 사형 방식은 옛날부터 세계 곳곳에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신명기에 보면, 유대 사회에도 모세의 법에 죄수를 나무에 달아매는 사형법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신 21:22, 23) 아마 십자가 사형 방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로마 사람들은 베니게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사형법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시민에게는 그런 사형법을 적용시키지 않았고 단지 노예들에게만 적용하였다고 한다. 탈무드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우상숭배자와 신성모독죄를 범한 자에게 십자가형을 내렸다고 한다. 예수님 당시 십자가형에 대한 여러 기록들이 있다. 예를 들어, 주전 4년, 로마의 장군 바루스는 2천명의 폭도들을 십자가에 처형했다고 한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처형되어 십자가를 만들 나무뿐 아니라, 또한 십자가를 세울 장소도 부족하였다고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의 좌우에 두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다. 그들은 심히 악한 죄를 범한 자들임에 틀림 없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극악한 죄인으로 취급되셨다. 그의 양손과 양발에 큰 못들이 박혔고 거기로부터 피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는 많은 출혈로 인해 감당할 수 없는 심신의 고통을 느끼셨을 것이다. 마가복음의 증거대로 그는 3시부터 9시까지 즉 오늘날 시간 계산으로 말하면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고통스럽게 죽어가셨다(막 15:25, 34). 예수께서는 이렇게 끔직한 십자가형을 받으셨다.
[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예수께서는 이런 큰 고통 중에서도 아버지께 그를 못박는 자들을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하셨다. 그는 그들이 자기들의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바로 알았다면 그를 정죄하고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행 3:17; 고전 2:8). 물론 그들의 무지(無知)가 하나님의 용서의 근거나 구실이 될 수는 없다. 사람의 무지도 죄의 한 요소이다. 비록 지식을 가지고 범하는 죄보다 작은 죄일지라도, 무지의 죄도 분명한 죄이다.
아버지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주님의 기도는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기도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고통의 시간에 사랑의 기도를 아버지께 올리셨던 것이다. 그의 기도는 인간의 감정을 초월한 사랑의 행위이었다. 그의 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조건 없는 사랑이었다. 그는 이전에 제자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마 5:44). 그는 이제 자신의 말을 스스로 실천하셨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군병들은 그의 옷을 나누어 가졌고 또 제비 뽑았다. 요한복음에는 좀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 보면, 그들은 그의 겉옷을 넷으로 나누어 가졌고 그의 속옷은 나눌 수 없어서 제비 뽑아 가졌다(요 19:23, 24). 이것은 시편 22편에 예언된 바이었다. 시편 22:18, "[저희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겉옷뿐 아니라 속옷까지도 벗기움을 당하셨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수치와 모욕이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인간들에게 이런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다.
[35-37]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이 당한 부당한 정죄에 대해 의분하지도 않았고 그의 고통과 수욕에 대해 동정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관원들은 비웃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전적으로 부정하였고 오히려 그를 조롱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성경의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반복적으로 증거된 진리이었으며 이사야 53장 같은 성경에 밝히 예언된 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에게 자신을 구원하라, 즉 죽지 말고 살아서 내려오라고 놀려대었다. 그를 못박은 군병들도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그를 희롱하였다. 라일의 말대로, 그들의 눈에 예수는 왕관도 없고 왕국도 없고 군대도 없는 가련한 왕처럼 보였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다 걸림돌이 되셨다. 그는 그들에게 단지 조롱거리이었다.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있었다. 전통사본에는, "헬라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 글자들로"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요한복음도 동일한 내용을 증거한다(요 19:20).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주장하신 내용으로서 사실상 그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뜻이다. 이 죄패가 헬라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 글자들로 쓰여졌다는 것은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 메시아라는 사실을 온 천하에 알리는 의미가 있다. 당시에 헬라어[코이네]를 쓰던 일반 대중들이나 라틴어를 쓰던 로마 제국의 지식인들이나 히브리어를 쓰던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차별 없이 이 사실을 알아야 했다.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 메시아라는 사실은 천하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하나님의 복음이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 유대인의 왕 예수이시다. 그가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가? 아니다. 그의 십자가 죽음은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었다. 그는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함이었다.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마 20:28). 그의 고통과 수욕의 죽음 때문에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큰 구원을 얻었다.
결론적으로, 33절부터 3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왕, 즉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것은 그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참된 이유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원 때문이었다. 그것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그가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과 수치와 조롱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가 그런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큰 구원을 받았다. 그가 극악한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고통스런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해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셨다. 그들이 무지함 때문에 범하고 있었던 그 죄를 아버지께서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하신 것이었다. 그들의 무지함의 그 죄는 사실상 우리 모두의 죄악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단지 그들이 아니고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다. 그의 용서의 기도는 단지 로마 군병들을 위한 것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그의 중보의 기도 때문에 오늘 예수 믿는 우리 모두가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얻은 것이다.
셋째로, 예수님의 기도는 그가 친히 제자들에게 교훈하셨던 원수 사랑에 대한 그 자신의 실천이었다. 그것은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되었다. 그래서 최초의 순교자이었던 집사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을 때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행 7:60).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고 해치려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9-43절, 한 사형수의 구원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의 곁의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한 사형수의 구원받은 일에 대해 증거한다. 이 사건은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임을 잘 증거한다.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예수님 곁에는 좌우에 다른 두 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33절). 거기에 달린 자들은 다 행악자들이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그들을 '강도'라고 표현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악한 행위 때문에 십자가의 사형이라는 매우 중한 형벌을 받고 있었다. 그들의 생애는 이렇게 처참하고 허무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와 가치가 무엇이며 일생 동안 살아온 의미와 가치가 무엇이었던가? 그들은 이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사형 집행장에서 십자가 형틀 위에 매달려 있다. 그들의 인생의 모든 소망은 절망으로 끝나려는 순간이었다.
그 두 사람의 상황은 똑같았지만, 그 둘의 생각과 마음은 전혀 서로 달랐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였다. '비방하다'는 원어는 '중상하다, 욕하다, 오만불손하게 대하다'는 뜻이다. 그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예수님께 말했다. 그는 십자가 사형을 받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있었다. 인간은 참으로 무지하고 완고하다. 또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지식과 깨달음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해 오만불손하게 대하며 함부로 욕하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전혀 달랐다.
[40, 41]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그는 오히려 함께 사형을 받고 있었던 그 동료를 꾸짖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이었다. 그는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받는 형벌이 자신들의 행위에 합당한 것임을 양심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다"고 그는 말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생각이 있었다. 그는 예수님의 행한 것이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양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본 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판단의 말이었다. 그 행악자는 비록 큰 악을 행하여 사형을 받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자신에 대한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바른 깨달음과 판단이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죄악된 행위에 대한 바른 반성과 뉘우침이 있었다.
이러한 깨달음과 뉘우침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경에 계시된 대로, 인간은 누구나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죄인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죽어 있다(엡 2:1). 로마서 3장의 말씀대로, '죄인은 깨달음도 없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다'(11절).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인간이 깨달음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께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하였다(롬 9: 18). 한 행악자가 바른 깨달음과 뉘우침을 가진 것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었다.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그 행악자는 바른 깨달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하였다. 전통사본에는, "예수께 가로되,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 믿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주신 구주시요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그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 곧 믿음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6:37).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회개하며 그를 믿은 그 행악자에게 낙원에 들어가는 구원을 약속하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그 말씀이 거짓이 아니고 참되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거짓되지 않고 참되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도 다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진실로 말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이 세상에 다른 어느 곳에도 진리가 없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이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셋째 하늘과 낙원을 같은 곳으로 말했다(고후 12:2, 4). 회개하고 주를 의지한 그 행악자는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동시에 그 영혼이 주님과 함께 낙원으로 들어갈 것이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아슬아슬한 구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은 제한되지 않고 자유롭다. 고린도후서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믿으면 즉시 구원을 받는다.
그 행악자는 선한 행위로 구원받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선한 일을 한 것이 없었고 아무런 공로가 없었지만 천국에 들어갔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었다. 구원은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 에베소서 2:8, 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가 천국의 영광에 참여하고 복된 영생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죽어서 천국에 들어간 영혼은 장차 복된 부활에 참여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빌립보서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고린도전서 15:42, 43,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장차 영광에 이를 것이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결론적으로, 본문은 죽어가는 한 사형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악한 죄인이라도 또 어떤 절망적인 순간, 심지어 죽음의 문턱에서라도 구원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신다면 어떤 죄인도 구원하실 것이다. 저 사형수가 받은 구원이 바로 그러한 구원이었다. 인간적으로 아무런 소망이 없었던 저 죄인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구원하셨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동일하다. 그러나 오늘날도 구원얻고자 하는 자는 저 죄인과 같이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해야 하며 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의탁해야 한다. 예수께서만 우리의 구주시요 구원자이시며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오늘날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지금 완전한 구원을 값없이 받을 수 있다.
44-49절, 죽으심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죽으시기 3시간쯤 전에 온 땅이 캄캄하여진 일과, 성전 휘장이 찢어진 일과, 예수께서 자신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신 일과, 사형 집행을 하던 백부장이 그에 대해 증거한 말 등을 기록한다.
[44]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제6시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정오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정오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고 오후 3시까지 그러하였다. 그 세 시간 동안의 캄캄한 어두움은 그때의 세상의 어두움을 잘 나타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그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영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셨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증거된 대로,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마 27:46; 막 15:34).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도 버림을 받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시간은 참으로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많은 죄인들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와 형벌의 죽음을 죽으셨다. 요한복음 1:29,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죽으시기 바로 전에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 즉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었던 휘장이 찢어졌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증거하였다(마 27:51; 막 15:38).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졌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과연 주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런 일을 이루셨다. 그의 죽음으로 죄인들은 이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9장과 10장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이 은혜의 일을 자세히 증거한다. 히브리서 9:6-8,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 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히브리서 9:11, 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0:19, 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소 휘장이 찢어졌으므로,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에 신약 시대에는 누구든지 남녀 노소, 빈부 귀천 구별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또 구약 시대에는 매년 1차씩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언제든지, 시시때때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또 구약 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하여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또 구약 시대에는 성막 혹은 성전에서만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영원히 우리 속에 거하신다. 오늘날에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큰 댓가를 치루어주심으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자유로이 만나 뵐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영을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내 영혼'이라는 원어는 '나의 영'이라는 말이다. 이 단어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의 영을 가리키지 않고 인성(人性)의 영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신성으로는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다. 그러나 그는 인성으로는 모친 마리아에게서 사람의 본질을 받아 사람이 되셨다. 그는 참으로 사람이시므로 십자가 위에서 목말라 하셨고 고통스러워 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6시간 가량의 시간이 흘러 숨이 끊어지실 시간이 다가왔을 때, 그는 이제 자신의 영을 아버지께 부탁하신 것이다. 사람의 육신의 죽음은 그의 몸과 그의 영을 분리시키기 때문에 그의 영은 갈 곳을 선택해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영을 아버지께 의탁하셨다.
사람은 죽을 때 그 영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증거하여 주셨다. 그 이야기에서 부자는 죽은 후 그 영이 지옥으로 들어갔고, 거지 나사로는 낙원 곧 천국으로 들어갔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을 때 즉시 천국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영을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순교자 스데반은 죽을 때 그의 영을 주께 의탁하며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었다(행 7:59). 또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라고 하였다(벧전 4:19). 여러분은 그런 준비가 되어있는가?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로마의 군대 장교인 백부장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증거하였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그가 예수님에 대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한다(마 27:54; 막 15:39). '그 된 일'이란 3시간 동안 온 땅이 어두워짐과 성소 휘장이 찢어짐 등의 일을 가리킬 것이다. 이방인이었던 그 백부장은 이런 일들을 보면서 예수께서 의로운 자이셨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꼈고 그렇게 증거하였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그때에 저 이방인 백부장은 예수께 대한 바른 깨달음을 가지고 그에 대해 바르게 증거하였던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는가?
[48, 49]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여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그리고 살로메 등이다(마 27:56; 막 15:40).
결론적으로, 44절부터 49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소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또 어떤 연약과 어려움 가운데서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항상 담대히 나아가자.
둘째로, 우리는 죽음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영을 하나님께 부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긍휼과 구원의 은혜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을 항상 하나님께 의탁하자.
셋째로,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야 하고 믿고 확신해야 한다. 이방인 백부장은 이 사실을 깨달았다. 누가복음과 다른 복음서들이 전체적으로 증거하고자 하는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어야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을 믿고 확신하고 있는가?
50-56절, 장사되심
본문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금요일 오후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받아 바위에 판 새 무덤에 장사한 일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여자들이 그것을 자세히 보았고 예수님의 시체를 위해 향품과 향유를 준비한 일을 증거한다.
[50, 51]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공회 의원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을 가리킨다. 그 회의는 유대인 사회의 최고 의결 기관으로서 예수님 당시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되었다. 요셉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본문은 그에 대하여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그는 선하고 의로운 자이었다. 악한 자들이 가득한 그 시대에 선하고 의로운 한 사람이 있었다. 둘째로, 그는 공회원들의 계획과 행사에 동의하지 않은 자이었다. '결의'라는 원어(불레)는 '계획'이라는 뜻이다. 공회원들의 계획과 행사란 그들이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할 계획과 행사를 가리킨다. 그는 다른 동료들이 악을 행할 때 그것은 아니라고 양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자이었다. 셋째로,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예수님 당시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와 메시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었다(눅 2:25-38). 어두운 시대마다 하나님이 쓰시는 종들이 있었다. 요셉은 그런 자와 같았다.
[52, 53]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요셉은 공회 의원이었으므로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는 요청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무덤과 장사(葬事)를 위하여 요셉을 예비하셨고 사용하셨다. 마가복음 15:44에 보면, 요셉의 요청을 받은 빌라도는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후 그 시체를 내어주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세마포로 싸서 바위에 판 자기의 새 무덤,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그 무덤에 넣어두었다(마 27:60).
장사(葬事)는 죽음의 확증이다. 그는 죽으셨고 장사한 바 되셨다. 그의 부활은 단지 기절했다가 회생(回生)한 것이 아니었다. 죽은 몸이 영광스럽게 변하여 다시 사신 것이었다. 또 예수님의 무덤에는 다른 시체가 없었다. 그러므로 삼일 후 부활하신 자는 예수님 외에 다른 이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장사(葬事)는 거창한 장례 의식이 없었다. 거기에는 입관식이나 발인식이나 하관식 따위가 없었다. 그의 시체는 그저 세마포에 싸여서 무덤으로 옮겨졌다. 물론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의 조촐한 장례 행렬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장사는 확실히 쓸쓸한 장사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무슨 식을 거창하게 하려고 할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지 간소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종교적인 행사도 형식화, 의식화 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장례식도 찬송과 기도, 간단한 권면이나 말씀의 선포로 이루어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54-56]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안식일의 예비일,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금요일이었다. 안식일이 거의 되었다는 말은 금요일 오후가 되었다는 뜻이다. 당시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질 때부터 토요일 해가 질 때까지이었다. 예수님의 시체를 무덤에 옮기는 일에 베드로와 요한 같은 그의 제자들은 없었다. 단지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라 온 여자들이 끝까지 주를 따랐다. 그들이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을 좇아 와서 일주일 간이나 머문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예사롭지 않은 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하였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세 차례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태복음).
그들은 멀찍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도 바라보았고 지금 그의 무덤에 묻히시는 일을 자세히 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과 그의 시체가 어떻게 거기에 놓여졌는지를 보았다. 그 여자들은 삼일 후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의 무덤과 그의 장사되심과 더불어 그의 부활하심을 생생하게 증거할 것이다.
그 여자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위해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였다. 그것은 그의 시체에 바르고 그 곁에 두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것들은, 아마도 물로 씻지도 못하고 피로 얼룩진 채로 장사된 예수님의 시체를 씻고 그것의 냄새를 줄이는 데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필요하게 보이는 일이지만, 그들은 안식일 때문에 그 일을 중단하고 계명을 좇아 쉬었다. 그들은 경건한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부활하실 주님을 기대하지 않았고 단지 죽은 주님의 시체에 향품을 두고 향유를 바르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50절부터 56절까지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사용하셔서 예수님의 무덤을 준비케 하시고 장사(葬事)를 행하게 하셨음을 생각하면서 이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남겨놓으신 종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악하고 음란한 시대를 분별하고 거기에 물들지 말고 필요할 때는 기꺼이 이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면서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이 사회의 한 모퉁이에서 바쳐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악하고 불의한 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선하고 의롭게 살고 악한 자들의 계획과 행사에 아리마대 요셉처럼 아니오라는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또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쓸쓸하고 조촐한 장례식을 기억하면서 세상 일을 너무 크게 여기지 않아야 하겠다. 참으로 결혼식이든지 장례식이든지 어떤 명절이든지 세상의 의식들은 그 자체에 그런 큰 의미가 있지 않다. 거창한 결혼식보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스런 부부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하고 그럴 듯한 장례식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 그 영혼이 천국에서 복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실제적으로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는 의식이나 형식보다 내용과 실질을 더 중요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와서 일주간이나 거기에서 머물렀고 남자 제자들이 다 도망쳐버릴 때 주의 곁에 비록 멀리서라도 머물렀고 그의 시체가 무덤에 장사될 때도 그 광경을 자세히 보았던 저 여인들처럼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어떻게 끝까지 주를 따를 수 있는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를 힘쓰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족과 실수가 있을 때마다 겸손히 회개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24장: 부활하심
누가복음 24장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신 지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 등을 기록한다.
1-12절, 빈 무덤과 천사들의 증거
본문은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의 첫날 새벽 예수님의 장사되신 무덤에 찾아간 여자들이 무덤이 비었음을 보았고 또 천사들을 보았고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말을 들었고 사도들에게 와서 그 사실을 고하였고 베드로도 가서 빈 무덤을 확인하였다는 것을 증거한다.
[1-3] 안식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본절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과 시간을 증거한다. '안식후 첫날'은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주간의 첫날'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안식일 전날 즉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무덤에 장사되셨고 안식일이 지나고 그 다음날, 즉 일요일에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시간은 새벽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자들은 예수님의 장사되심을 보았던 여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확실히 알아두었고 그의 시체를 위해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던 자들이다. 전통사본에는 '그들과 함께 어떤 다른 이들도'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그들의 이름은 10절에 기록되어 있고 거기에도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라는 말이 있다. 그들은 거기에서 예수님의 무덤 문에 두었던 돌이 굴려 옮기운 것과 무덤 속에 예수님의 시체가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착각할 리는 없었다. 확실히 그의 무덤은 비어 있었다. 그 여자들은 다 그 빈 무덤의 증인들이었다.
예수의 빈 무덤은 네 권의 복음서들이 공통적으로 증거하고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근본적인 증거이다. 예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고 기절하셨다가 다시 기운을 차리신 것이라는 추측은 불가능하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고 그 시체를 내어주었었다(막 15:44, 45). 또 만일 그가 기절하였다가 회생하셨다면, 3일 동안이나 기진 맥진하였던 그가 어떻게 그 무거운 돌을 굴려내셨단 말인가? 또 그의 제자들이 그런 예수를 부활하셨다고 속여서 전파할 수 있었겠는가? 또 나중에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 혹은, 그의 제자들이 그 시체를 도적질하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불가능하다. 본문의 뒷부분에 증거된 대로, 제자들은 여자들의 말을 듣고서도 예수님의 무덤의 비었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더욱이, 열한 제자들이 그 시체를 감추어놓고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전파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그 제자들이 그런 거짓 증인들이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고 마귀의 종들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빈 무덤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그의 부활뿐이다.
[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그 여자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기 때문에 당황하였다. '근심한다'는 원어(디아포레오)는 '당황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을 위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왔었다. 그런데 그 시체가 없어진 것이다. 우리 주님의 시체를 누가 가져갔단 말인가? 이제 우리는 시체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는 일도 할 수 없단 말인가? 그들은 당황하였다.
그런데 그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 있었다. 그들은 확실히 천사들이었다. 종종 그러했듯이, 영적 존재인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찬란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영적 존재인 천사들의 존재를 믿는다. 그들은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아주 드물게 그들을 나타내 보이신다. 예를 들어, 천사들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고 롯에게 나타났으며 야곱에게 나타났다.
[5-8]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었을 때 그 천사들은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말했고 예수께서 무덤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말했다. 천사들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한 것이다. 또 그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했다. 그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었다. 마태복음에는 세 번이나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한번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9:22,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그 여자들은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의 그 말씀, 곧 그의 부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기억하였다.
[9, 10]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여자들은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일을 열한 사도들과 모든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그 여자들 중 대표적인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등이 그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었으나 예수님을 통해 고침을 받았던 여자이었다(눅 8:2). 그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의 증인들이었고 또 천사들의 말의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환각이나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증인들이었다.
[11, 12]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열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허탄한 듯이 생각하였다. 그들은 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것은 그들에게 심히 낯설고 믿기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일 것이다. 주께서 세 번이나 말씀한 적이 있으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아침에 여자들의 말을 듣고서도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중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 여자들의 말을 확인하려 하였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요한도 같이갔다. 그들은 무덤에 들어가 몸을 쌌던 세마포만 놓인 것을 보았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은 것을 보았다(요 20:6, 7). 그들은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2절까지는 예수님의 부활을 두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는 그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러 여자들이 함께 확인한 사실이었다. 무덤의 돌문은 열려 있었고 무덤은 비어 있었다. 그것은 또한 베드로와 요한이 확인한 사실이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 외의 다른 어떤 설명도 허용하지 않는다. 왜 무덤이 비었는가? 그것은 무덤에 누이셨던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둘째는 천사들의 증언이다. 천사들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증거하였다. 그들은 여자들에게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했다. 그들은 또한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언하셨던 것을 기억시켰다. 그들은 주께서 그 예언의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셨음을 말했다.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부활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셨다. 성경은 그의 부활의 증인들의 증언들의 기록이다.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우리의 죄악을 대속한 구주이심을 확증한다. 그의 부활은 기독교의 진리성과 유일성을 확증한다. 모든 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받아야 하고 주를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3-35절, 엠마오로 가는 길에 나타나심
[13, 14]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에 제자들 중 두 사람이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거리, 원문에는 육십 스타디온 되는 거리에 있는 마을이었다. 한 스타디온은 약 185미터이었으니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는 약 11킬로미터 되는 거리이다. 그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였다. '이 모든 된 일들'이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신 일, 삼일 후에 여인들이 그의 무덤이 비었음을 발견한 일,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 일, 베드로가 그 빈 무덤을 확인한 일 등의 일들이었다.
[15-17]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두 제자들이 길을 가면서 서로 이야기하며 변론하고 있을 그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그들과 동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가리워져 있어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전통사본에 의하면, 그들에게 물으시기를, '너희가 길 가면서 슬픈 얼굴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라고 하셨다. 그 제자들의 얼굴에는 슬픔과 우울함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슬픔과 우울함을 기쁨과 용기로 바꾸어주기를 원하셨다.
[18-20]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 두 제자 중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이었다. 그는 자기들에게 말을 건 그의 질문을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은 당시 예루살렘에서 가장 큰 뉴스거리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에게 말하기를,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이었으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해주었다. 몇 년 동안 유대의 전 지역에서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큰 공허함을 가져다 주었다.
[21-24]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救贖)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글로바는 계속 말하기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救贖)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했다. 우리는 그가 어떤 구원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지 다 모르지만, 여하튼 그가 생각하는 구원은 예수께서 유대 나라를 로마 제국으로부터 건져주시고 또 백성들을 가난으로부터 건져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포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기대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산산히 다 깨어지고 말았다. 그의 소망은 지금 절망으로 변하고 있었다.
글로바는 그 무명의 사람에게 계속 말하기를, 그러나 삼일 후 제자들 중에 어떤 여자들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그가 살아나셨다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고 말하여 우리를 놀라게 하였고,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어떤 이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여자들의 말한 바대로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하였으나 예수님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글로바의 말은 자신이 그 여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기대하지 않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자신은 믿지 않았지만, 그는 그 동안 되어진 일들에 대해 소박하게 증거한 셈이 되었다. 그의 소박한 말들은 우리가 성경이 진실하게 증거하는 내용들을 믿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25-27]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들의 우둔함과 성경을 더디 믿음에 대해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에 관해, 특히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요 5:39; 딤후 3:15). 구약성경의 제사 제도와 유월절 규례와 성막 제도 등이 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증거하고 있었다. 특히, 시편 22편이나 이사야 53장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잘 예언하였다. 그리스도는 오셔서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으신 후 영광 가운데 들어가실 것이다.
[28-31]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은 이야기하는 동안 엠마오에 가까이 왔고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강권하여 자기들과 함께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머물기 위해 들어가셨다. 그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실 때 떡을 가지고 감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는데, 그때 그들은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예수께서는 식탁에서 자신을 알리신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즉시 그들을 떠나셨고 그들에게 더 이상 보이지 아니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확실히 변화된 몸이었다. 그 몸은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몸이었다. 그러나 그 두 제자는 그 부활의 주님을 두 눈으로 보았고 그와 여러 시간 대화하였었다.
[32-35]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그 제자들은 길에서 주께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웠던 것을 말하면서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그들의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려 놓았다. 거기에는 열한 사도들과 여러 제자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은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했다. 그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식사 자리에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였다.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것들은 연약한 인간들의 환각 작용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 확실한 객관적 사실들이었다.
결론적으로, 13절부터 35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슬픔과 불신앙 가운데 있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다. 그들은 주께서 자신의 죽음과 삼일만의 부활에 대해 예언하신 말씀을 기억하거나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 두 제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의 오심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하신 말씀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빈 무덤에 대한 여자들의 증언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오늘날 많은 교인들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다. 부활, 승천하신 주 예수께서는 오늘날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이 어떤 연약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들을 찾아오신다.
둘째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성경을 풀어 설명하심으로써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증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성경대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성경대로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오늘날도 그는 성령으로 그리고 전도자들을 사용하여 신구약 성경을 가지고 자신을 증거하신다. 모든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확신하게 하고 그를 통해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한다.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20:30, 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셋째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변화를 주셨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그 제자들은 발걸음을 돌려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 슬픔과 낙심, 의심과 불신앙에 빠져 있었던 그들은 열한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다. 그들 속에는 증거할 수 있는 힘과 기쁨이 있었다. 부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확실하고 믿을 만한 증거가 된다.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사도행전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우리 모두도 부활의 주님을 확신하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를 믿고 주를 섬기는 일에 힘쓰자.
36-43절,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확인시키심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엠마오에서 올라온 두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들에게 어떻게 나타나셨음을 여러 제자들 앞에서 증거하고 있었을 때 예수께서 오셔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셨다. 그것은 기적적인 나타나심이었던 것 같다. 요한복음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확실히 놀랍고 신기한 몸이었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기원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으신 이후 슬픔과 근심과 불안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주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평강을 기원하심으로 그들을 크게 위로하셨던 것이다. 실상 예수께서는 참 평안을 주시는 주님이시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었다(마 11:28). 죄는 사람에게 슬픔과 근심을 가져왔으나 구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죄사함과 참 평안을 주셨다. 참 평안은 하나님의 복음의 한 주된 요소이다.
[37-40]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보는 것을 유령으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즉시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생각들이 일어나느냐?'고 말씀하셨다. '의심'이라는 원어는 '생각들'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단순히 영이 아니셨다. 부활하신 그의 몸은 손과 발을 가진 몸, 살과 뼈가 있는 몸이었다.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바로 그 몸, 무덤에 장사되셨던 바로 그 몸이 영광스런 몸으로 다시 사신 것이었다. 우리도 우리의 몸이 부활할 것이다. 이 몸이 영광스럽게, 신비하게 변화될 것이다.
[41-43]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제자들은 너무 기뻐서 오히려 그의 부활의 사실을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기고 있었다. 그때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에 대한 한가지 더 구체적인 증거를 주셨다. 그것은 음식을 먹으신 일이었다. 그는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라고 물으시고 구운 생선 한 토막과 벌꿀집을 드리매 받으사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전통사본에는 '구운 생선 한 토막 다음에 '벌꿀집'이라는 말이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음식까지 잡수시므로 자신의 부활, 곧 육체적 부활을 확실히 증거하셨다. 부활하신 그는 단순히 영이 아니시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몸을 가지고 계셨다.
44-49절, 성경의 요점을 깨우치심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하셨듯이 다른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부활이 성경에 예언된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예수께서는 전에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구약성경에 그리스도에 관해 예언 혹은 예표된 모든 내용들은 다 이루어져야 했다. 그 내용의 주요한 요지는 그의 죽음과 부활이었다.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주께서는 제자들의 생각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 본절에 '마음'이라는 원어(누스)는 '생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일깨워주실 때 우리는 성경을 깨달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는 기록된 성경책이고, 둘째는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사역이다. 이 둘은 다 꼭 필요하다. 성경 말씀은 객관적 요소이고, 성령의 사역은 주관적 요소이다. 이 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게 된다.
[46, 47]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전통사본에는 '기록되었으니'라는 말 다음에 '또 그것이 마땅하니'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도에 관해 성경이 기록하는 바 그리고 마땅한 바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그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많이 예언하고 또 암시하였다(짐승 제사들, 이사야 53장, 시편 22편 등). 또 그의 부활에 대해서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암시하였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회개와 죄사함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만 이루어질 것이 아니고 모든 족속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명백한 뜻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죄사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의 공로와 그의 중보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을 나타낸다.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증거하여 그들로 확신에 이르기를 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서 이 회개와 죄사함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셨다. 증인에게는 자신의 달변이나 열심이 중요하지 않고 단지, 증거해야 할 내용에 대한 성실한 증언이 중요하다. 그는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성실히 증언하면 된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부여된 임무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달변이나 열심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 하지 말고 오직 그들이 보고 들었던 바를 성실히 증거해야 했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바는 오직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성실히 증거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 2).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증인들에게 필요한 또 한가지는 성령의 능력이다. 그들은 증거할 내용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히 증거할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시다. 주께서는 성령의 오심에 대해 많이 증거하셨다(요 14-16장). 주께서 친히 성령을 보내실 것이다.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성령과 능력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성에 머물러 있기를 명하셨다. 사도행전 1:4, 8,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50-53절, 승천하심
[50-53]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베다니에서 승천하셨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2-3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요 11:18). 그곳은 감람산 기슭이었다. 주께서는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만에 다시 살려주셨고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종말에 관해 교훈해주셨었다(요 11장; 마 24장). 부활하신 주께서는 그곳에서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올리우셨다. 이것은 그가 부활하신 지 40일 후의 일이었다(행 1:3, 9). "하늘로 올리우시니"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사본은 시내산 사본과 베자 사본뿐이다. 그러므로 괄호를 없애야 한다.
제자들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고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인간 스승으로 섬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하였다. 예수님은 참으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요 1: 14). "그에게 경배하고"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사본은 베자 사본뿐이다. 그러므로 역시 괄호를 없애야 한다. 제자들이 늘 성전에 있은 것은 성령을 기다리라는 주의 명령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36절부터 53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자. 부활하신 그의 몸은 신비한 몸이었다. 그의 부활은 확실히 영화로운 부활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영이 아니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살과 뼈가 있고 음식을 잡수실 수도 있는 몸이었다. 그는 십자가에서 상하신 바로 그 몸으로 영화롭게 부활하신 것이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고 그를 믿음으로 영생의 구원을 확실히 얻자.
둘째로, 우리는 성경의 요지를 깨닫자.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다. 성경의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중요한 내용은 그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대속(代贖)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그 확증이다. 회개하는 죄인들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는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요지이다. 우리는 성경의 요지를 바로 알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다 받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자.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죄인들에게 복된 죄사함과 영생을 주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이 되자.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담대히 성경의 내용을 만인에게 증거하자. 우리는 가정이나 동네나 직장이나 어느 곳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