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2)
(이장우 목사)
요한복음 강해(2)
041. 요한복음 9:13-34 예수는 그리스도
042. 역 설
043. 새가정
044. 양과 목자
045. 양의 문
046. 선한 목자
047. 목숨을 버릴 권세
048. 빼앗을 자가 없다
049. 그 일은 믿으라
050. 하나님의 영광
051. 부활과 생명
052. 예수님의 눈물
053. 나사로야 나오너라
054. 진리와 현실
055. 예수님의 죽으심
056. 예루살렘 입성
057. 나귀 새끼를 타신 왕
058. 주님을 섬기려면
059. 인자가 들려야
060. 믿지 못하는 이유
061. 예수님을 믿는 것은
062. 끝까지 사랑하심
063. 서로 발을 씻겨라
064. 인간의 한계
065. 새 계명
066. 근심하지 말라
067. 요시야의 개혁(열하 1:1-20)
068. 처 소
069. 길
070. 아버지를 보여주소서5
071. 주님의 일
072. 기 도
073. 보혜사
074. 평안을 주노라
075. 참 포도나무
076. 사 귐
077. 친구
078. 사 랑과 미움
079. 주님을 섬기는 예
080. 보혜사가 오시면
요한복음 9:13-34 예수는 그리스도
날 때부터 소경이 눈을 떴다면 축하하고 함께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뜨게 한 자가 예수라는 소문에 어떻게 하든지 예수가 눈을 뜨게 하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실 일을 어떻게 나타내시는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소경이 자기의 죄도, 자기 부모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나타내시는 것을 보이고자 하시는 것이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도 없고 또한 구원을 요청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은 상태, 즉 날 때부터 소경과 같은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세력을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원이 일어나는 것과 그것을 방해하는 사건입니다. 그러한 방해가 어떻게 집요하게 나타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뜨자 그 소문이 널리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접 눈을 뜬 당사자가 다니고 있으니 소문이 분분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 눈뜬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에게 갑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이 소경에게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어떻게 네가 눈을 떴느냐는 것이지요. 그러자 이 소경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발라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기에 그렇게 하였더니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러자 한쪽 사람들은 안식일을 어겼으니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목숨처럼 지키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 날, 그런 일 하면 시비를 걸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참된 안식이란 날 지킴이 아니라 내가 안식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죄인이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다시 눈을 뜬 사람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너는 그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선지자입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예수를 어떻게 하든지 죄인으로 몰아세워서 죽이려고 하는데 분명한 증거가 있느니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다가 그 부모를 부르는 것입니다.
소경이 눈떴다고 하여도 부모가 소경이 아니었다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근한 위협과 압박을 가하면서 부모에게 묻는 것입니다. 이 자가 너의 아들이냐, 그리고 소경으로 태어났다가 지금 본다는 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 라고 묻습니다. 부모가 사실대로 이야기하다가는 자기들이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할 것 같으니 다 알면서도 무어라고 말을 돌려 버립니까? 이 자가 우리의 아들인 것과 날 때부터 소경된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가 성인이니 그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왜 이렇게 대답합니까?
22절입니다.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라” 만약에 예수라는 사람이 우리 아들을 눈뜨게 하였으니 그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하면 유대교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서워서 그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출교라는 것이 그 당시의 사회에서 얼마나 치명적이면 이렇게 두려워하였겠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위협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시인을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자 바리새인들이 또다시 그 눈을 뜬 자에게 묻습니다. 네게 어떻게 하여 보게 되었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 왜 또다시 묻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느냐고 하자 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제자라고 하면서 그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자 소경이 이상하다, 그가 나를 이렇게 눈을 뜨게 한 것을 보니 분명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 뜻대로 행하는 자를 들으시는 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떴다는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 이는 분명히 하나님께로 온 선지자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을 내어 쫓아버립니다. 이것이 세상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정하고 방해하고 막아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와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 말뜻을 잠시 살펴보고자합니다. 예수라는 말은 마태복음 1:21절에 그 뜻을 설명하는데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여 내실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의 이름은 다른 사람에도 있는 이름입니다. 구약의 여호수아가 신약의 예수라는 이름과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3:29절에서 예수님의 족보 중에 예수라는 이름이 골로새서 4:11절에서 바울의 동역자 중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동명이인이 많은 것처럼 예수의 이름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역사적인 인물이 많지만 누가 그리스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경대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성경대로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확증하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확증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보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역사적인 실존인물로야 다 믿습니다. 마치 공자, 석가를 성인으로 보듯이 예수도 그런 성인 중에 하나라고 보는 그런 것은 역사적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살았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정보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것을 사탄은 방해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동원하여 방해합니까?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집권자들과 민중들과 이방인들까지 다 동원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메시아, 그리스도는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라고 하고 예수교라고 하는데 예수교란 예수를 한문으로 표기하여 야소라고 하였기에 옛날에는 야소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란 그리스도를 한문으로 표기하여 ‘기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면 유대교에서 출교를 시키는 것입니까? 유대인들은 분명히 메시아사상이 있었고 메시아를 대망하여 왔는데 정작 메시아가 왔는데 왜 배척을 하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즉 그리스도 사상이 자기들의 욕심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배후에는 메시아가 오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사단의 세력이 조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메시아를 죽여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만 나타나지 않으면 자기들이 보존되는 것이기에 사람을 동원하여 자기들의 반역에 끌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메시아가 구언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사단의 일이고 사단의 조종을 받고 있는 이 세상의 일인 것입니다.
시편 2편을 봅니다. 1-12절. “봉독”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 즉 메시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 세상의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비웃으시면서 자기의 왕 메시아를 시온산에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면 철장권세로 깨뜨려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니 그 아들에 입 맞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사단의 조종을 받아 하는 일이란 온 세상의 권세를 다 동원하여서라도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에게서 끊어 내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25-28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입은 자 즉 그리스도를 누가 대적합니까? 시편 2편의 예언대로 세상의 군왕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를 대적한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는 어디에 들어가겠습니까? 이방인에게 들어가지요.
유대인의 시각으로 유대인 외의 나머지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그러니 온 인류가 마음을 하나로 모은 유일한 사건이 무엇입니까? 합동으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에 합동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도 여전히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일입니다.
어떻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양면작전을 쓴다고 봅니다. 첫째는 여러 가지 핍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와 로마의 박해 때처럼 온갖 핍박을 가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면 유대교에서 출교시키듯이 핍박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자의 밥이 되게 하기도 하고, 고문과 감옥으로 여러 모양의 핍박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핍박으로 없어질 것 같았던 예수를 그리스도라는 무리가 더욱 많아지고 핍박이 믿음을 더욱 견고케 되는 것을 보고서 사단도 작전을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핍박보다 군림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대신 기독교가 힘을 가지고 군림하는 종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심지어 국교로 정하여 버리니 핍박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자 기도교가 얼마나 타락하였는지 중세교회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나라에도 적용을 해보면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하여 졌을 때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미 거대 종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 믿는 국회의원이 91명이랍니다. 예수 믿는 대통령이 나왔습니다. 그러니 핍박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교계에서 하는 일들을 보면 연합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 꼭 하는 일이 힘을 모아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힘을 모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을 핍박을 하거나 아니면 그렇게 고백한 자들이 기득권을 누리게 하거나간에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사탄의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다음에는 그에게 붙어 있는 자가 부활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데 지금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도대체 무엇이 끼어 있는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본드로 무엇을 접착하려고 하면 언제나 사용설명서에 무어라고 적혀 있습니까? 접착할 면의 표면에 있는 이물질을 제거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사용설명서가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붙어 있으려면 이물질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우리가 붙어 있지 못하게 하려면 그리스도와 우리사이에 이물질을 자꾸만 집어넣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일이고 세상의 일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든지 그리스도에게 붙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핍박을 가할 수도 있고, 쾌락을 끼워 넣을 수도 있고, 미지근하게 할 수도 있고,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도 있고, 바쁘게도 할 수도 있고, 우리의 공로나 자랑이나 행함을 끼워 넣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2주전 기독신문에 두 명의 목사가 면직된 공고가 실렸습니다. 울산노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면직된 두 목사가 노회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합동측 헌법을 동원하여 면직을 시켰는데 그 주된 동기는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라는 책에서 주일성수와 십일조의 문제를 다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기존의 질서를 흔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노회가 소환을 하면 고분고분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나는 면직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것이 면직의 이유였습니다. 그 사람의 주장은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입니다, 라는 주장으로 노회에서 면직이 된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떠한 행함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모두가 쫓겨날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지 못하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더 질문합니다.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십니까? 이 고백이 얼마나 엄청난 고백인지를 아시겠습니까?
마태복음 16:15-18절입니다. “봉독”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복, 천하를 주고도 못 얻는 생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믿는 이 엄청난 복이 실감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9:35-41 역설(逆說,Paradox)
며칠 전에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스크림의 이름이 ‘바꿔’였습니다. 포장지를 뜯어보니 파란색의 아이스크림인데 그 안에 흰 글씨로 ‘확’ 이라는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꾸는데 어느 정도로 바꾸어야 하는가 하면 확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스크림이야 바꾼다면 더위를 시원함으로 바꾸자는 말도 됩니다만 한동안 이 사회에서 ‘바꿔’열풍이 불었습니다. ‘바꿔, 바꿔 세상을 다 바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총선과도 연결되어 바꾸자는 말을 그야말로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도 남한의 바꿔 열풍을 알았는지 북한의 신문에서 보도하였다는데 남조선에는 바꿔야 할 사회적인 문제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누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가 싶지만 그러나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다 좋은 상태라면 그렇게 ‘바꿔’라는 말이, 그것도 모든 것을 확 바꾸라는 말이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세상은 결코 바뀌어 지지 않습니다.
정치가 바뀝니까? 자기가 나가면 확 바꾸어 놓겠다더니 기득권에 줄서기 바쁜 것입니다. 경제가 바뀌어 집니까? 계속하여 빈익빈 부익부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육이 바뀝니까? 과외 허용으로 과외를 못하는 서민은 더욱 뒤처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헌법재판소에서 과외금지가 위헌으로 판결된 것은 정당합니다. 자본주의란 시장경제입니다. 자유로운 경쟁으로 강한 자만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꾸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해 아래 무엇이 새롭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세상은 그대로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기를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만 관심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을 보다 살기 좋게 만들어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조차 이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싸움도 없고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자, 라고 합니다. 꼭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도지에 보면 나오는 푸른 잔디밭에 가족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그려놓았는데 그 정도는 창원시내의 공원에서 얼마든지 나오는 풍경입니다. 먼저 성경 한 곳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34-36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랍니다. 오히려 칼을 주고 불화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를 믿는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좀더 평화롭게 서로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에서 성탄절을 축하하고, 교회에서 석탄절을 축하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종교란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종교 때문에 세상의 전쟁과 분쟁이 얼마나 많았는가 하는 말들을 합니다. 물론 그러합니다. 종교 간의 전쟁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종교 안에서도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 이 세상에서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기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란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기득권을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교회가 이 세상에서 자기의 기득권을 챙기는 쪽으로 나간다면 근본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5:38-42절입니다. “봉독” 이것을 높은 윤리적인 차원이라고 사람들이 좋아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러면 과연 이렇게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이어서 나오는 말씀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무두가 죄인 됨을 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격과 조건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가 탈락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란 역설로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 세상이 비진리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비진리로 가득한지를 참된 진리가 오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조금만 노력하면 그래도 살만한 세상인줄 알고 서로 서로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와 빛과 생명이 나타나니 그동안의 모든 진리라는 것은 전부 비진리이었고, 인류의 빛이라는 것이 모두 어두움 이었고, 생명이라는 것이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배척받아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까? 온 인류가 합동으로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으신 분이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분이 자신을 죽인 자를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역설입니다.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에 스스로 빛을 알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만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진리와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님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가 눈을 뜰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해야 만이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아무도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지 않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노? 다 자기 닦은 데로 가지! 이것이 세상의 진리이지 않습니까? 공든탑이 무너지랴! 내가 한평생 이렇게 착하게 살아 왔는데,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이 착함을 보고서 그냥 두지는 않을 거야, 라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세상의 윤리요 도덕이요 종교라는 수준이요 한계입니다.
그러니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떴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른 조건과 이유 없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어떠한 선행조건도 없는데 그저 한 일이란 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 온 것입니다. 그것도 종교인이라는 얄팍한 양심하나 가지고 조금은 착한 척 흉내도 내어 보았지만 그러나 참된 안정이란 없이 남과 비교해 보고서 아, 저 정도면 나는 중간치는 하겠구나하는 안심 속에서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계속하여 증거하고 있는 바는 무언가 좀 안다는 사람은 예수님 앞에서 자꾸만 바보가 되고 무언가 본다는 자는 소경이 됩니다. 3장에서 니고데모가 유대인의 선생이면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아직 눈도 못 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예 세상적인 여인,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운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예수님이 생명수가 되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아는 자는 모르게 되고 모르는 자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 날 때부터 소경되어 구걸하던 거지, 이런 사람들을 세상은 죄인이라 사람 축에도 넣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하필이면 이런 사람들을 불러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들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점이 무어가 있습니까? 나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노골적인 죄인이고 불구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까? 주님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죄와 허물로 죽었기에, 모두가 이런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심으로, 자기 자름대로 잘났다는 사람을 심판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39절에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불만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미 성경은 메시아의 기능이 이러한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29:9-12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소경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되 그 마음은 멀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청년회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친구나 애인을 만나면 만 원짜리 쓰는 일이 아무것도 아니고 더 못써서 안타까운데 연보시간에 지갑에 미처 잔돈이 준비 안 되어 만 원짜리와 동전 몇 개가 있을 때에 만 원짜리를 하는가, 동전을 하는가, 갈등하다가 동전으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한다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노래하면서 행위로는 부정하는 가증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니 하나님이 이들을 소경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2:17-24절을 봅니다. “봉독”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의 죄를 말하고 있다면 2장은 유대인의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이 다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인간을 보는 시각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두가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3:9-18절입니다. “봉독”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가 죄 아래 있는 것입니다. 모든 행위가 악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란 18절에서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는 것입니다. 소경이니 바로 눈앞에 하나님을 보고서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참된 하나님을 죽여 버렸다는 것이 성경이 증거 하는 인간의 소경됨, 죄인 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상황을 알고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들의 죄를 드러내시면서 동시에 자기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침을 뱉어 진흙에 이개듯이 자신의 몸이 땅에 묻히시는 비참함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하시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땅에 오신 것이 자기 비하이요 낮추심인데 땅에 묻히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하시는데 흑이란 땅의 먼지, 땅의 티끌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낮아지심으로 소경을 눈뜨게 하시는 것처럼 오늘 이 세상에만 눈이 밝아 있는 저와 여러분의 무지와 죄악과 소경됨이 그분을 죽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죽였지만 그분은 다시 살아 나셨고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셨습니다.
이보다 더한 복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까지 하여 우리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이제 썩어질 것을 바라보지 말고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그 아들의 나라를 바라보라고, 그 영광의 기업이 어떠한지를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뜨여지기는 뜨여진 것입니까? 뜨여졌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히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처음에야 어리벙벙하여 무엇이 무언지 잘 모릅니다. 그러니 눈을 뜬 이 자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알게 되었지만 자신은 그가 누구인지 아직 눈을 뜨고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언제 예수님을 제대로 보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인하여 유대인들에게서 쫓겨났을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8:34-35절을 합께 봅니다. “봉독”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하셨는데 그 결과는 쫓겨남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의 어려움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이 우리에게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인내를 배우고 그로 말미암아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일만 생기리라는 것을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이 닥쳐올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으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로 하여금 저 영원한 나라를 향한 소망을 심어주는 것이구나, 하고서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꾸만 소돔과 고모라를 보게 되다가 롯의 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의 이 세상의 모습이 처처에 지진과 기근이 난리와 전쟁의 소문이 들리는 것은 예수님 재림직전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세상에 너무 미련 두지 마시고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눈뜬 자의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다가 핍박을 받는다면 누가 영접하러 오십니까?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고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집사였는데 설교 한편하고 돌 맞아 죽었습니다. 이 정도의 능력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큰일을 할 텐데 돌 날아오는 것 그대로 맞고서 죽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성전신앙을 공격하였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나서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설교한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어찌 하나님이 계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전 모독이란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여기고 돌로 쳐 죽일 죄목의 몇 번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소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아무도 보지 못한 내용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좌에 서 계셨습니다. 보좌란 앉아 있는 곳인데, 예수님을 위하여 죽어가는 스데반을 영접하러 일어서신 것입니다. 끝으로 성경 한 곳을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3:7-17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이 영문 밖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피로써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도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영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찾는 영원한 도성은 이곳에 없습니다. 오직 장차 나타날 것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눈뜬 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서로 선을 행하며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23-31 새 가정
5월은 무슨 달이라고 합니까?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가정의 달이라고 가정을 위한 프로그램과 행사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가정의 달이라고 하여 지난주는 어린이 주일, 오늘은 어버이 주일, 다음주는 스승의 주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주일이란 주님의 날이라는 말인데 다른 말을 붙혀서 주일이라고 하면 주님의 날이란 말을 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가정의 달이라고 하면서 가정을 주제로 다루면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가정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가정이 회복되어야 한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심각한 지경에 이른 이혼문제, 이로 인한 결손가정에서 나타나는 자녀들의 탈선과 범죄행위들의 수치를 말하면서 가정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정생활세미나가 교회에서 인기가 있고 또 부부생활세미나라고 하여 외국까지 여행하는 몇 백만 원짜리 세미나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부생활세미나에 참석도 못할 정도입니다만 그러나 세상에서나 교회에서 가정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기존의 가정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정의 행복과 안전과 발전과 영속을 위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존의 가정을 잘 가꾸고 행복하게 하자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정에 대하여는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우리의 삶에 맞지 않아서 그렇겠지요. 만약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모든 가정생활세미나, 부부생활세미나라는 것은 설자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존의 가정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정은 전혀 들어올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의 말씀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없다는 자세로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어느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서는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결론은 이런 자가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으로 3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하자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합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수준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 가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부자인고로 근심하며 떠나갑니다. 영생의 문턱에서 무엇 때문에 떠나갑니까? 재산이 많아서, 재산을 영생이신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여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서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쉽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라서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습니까? 부자이지만 율법을 다 지켰다는 그런 자가 천국에 못 들어간다면 누가 과연 갈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가로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 나섰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배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베드로가 나중에 무엇을 못 버립니까?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살기 위하여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집과 부모형제를 버린다고 영생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무엇을 버리는 행위로 구원 얻는다면 이단이 되어 버립니다. 많은 이단들이 집안에서 반대하면 버리고 오라고 하여서 집을 버리고 이단의 단체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버리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하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안심이 되십니까? 그러나 주님의 구원을 받은 자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라는 말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29-30절입니다. “봉독”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 형제, 자매, 어미, 아비. 아비라는 글자위에 작은 숫자가 있습니다. 그 글자가 난하주에 있습니다. 무어라고 되어 있습니까? 어떤 사본에는 아비나 다음에 아내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가정세미나 하는 분은 예수님을 위하여 다 버려도 아내는 버리라는 말이 없다고 하는데 여기서 성경의 다른 사본에는 아내도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식,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서 몇 배를 받게 됩니까? 백배를 받는 다고 합니다. 이와 병행구절을 봅니다.
마태복음 19:29절입니다. “봉독” 몇 배를 받는다고 합니까? 여러 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내세에는 영생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배를 받든지 백배를 받든지 현세에서 받습니다. 그리고 내세에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현세에서 여러 배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받는 것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버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집, 형제, 자매, 어미, 아비, (아내), 자식, 전토입니다. 8가지입니다. 그런데 받는 것은 집, 형제, 자매, 모친, 자식, 전토입니다. 6가지입니다. 무엇이 빠집니까? 아비와 아내가 빠집니다. 이것이 새가정의 구성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새 가정이 구성됩니까? 하늘나라가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를 침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쳐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길이 차단되어 있기에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씀이 수동태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천국은 침노당하는 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가정을 고수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가게 되니까 그런 가정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49-53절을 봅니다. “봉독” 불을 던지러 오신 것입니다. 화평이 아니라 분쟁케 하려고 오셨답니다. 한집에 다섯 사람이 있다면 둘이 셋과, 셋이 둘과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분쟁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세상에 우리가정, 우리가정하고 살던 사람들 안에 복음이 들어가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시인을 하면 요한복음 9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유대교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정 안에서도 이러한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초대교회 때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핍박을 받고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하고 가정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때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동일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가정이 행복해지고 세상에서 복을 받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예수를 좋아할까요? 그런 예수님 전하는 사람을 좋아할까요?
가덕도에 어느 강도사님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라고 말을 하였답니다. 예수님을 버리신 사건이란 이 세상을 하나님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예수님의 버려짐 속에 들어 있어야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애쓰지 말고 예수님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전하니 사람들이 전에 목사님이 전하든 것 하고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일 열심인 집사님 두 분이 전에 담임하던 목사님께 전화를 해가지고 목사님이 가르치던 것과는 다르다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자 전에 담임하던 목사가 내가 가르치던 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노회에 고소하겠다고 하더랍니다. 자기가 진리인 모양입니다. 성경적으로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변에서 성경에 있는 대로만 전하여 보십시오.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라면서 여러분을 핍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온 사람을 기존의 가정이 기존의 종교단체가 가만히 두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버리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쫓겨나는 것입니다.
‘벤허’라는 영화에서 보면 로마군대의 장군이 리디아라는 예수 믿는 여인을 사랑하지요. 그런데 이 장군이 무어라고 합니까? 나를 사랑하겠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사랑하겠소? 그러자 예수님을 버릴 수 없다고 하지요. 사랑의 차원이 다르다고 하자 나무 십자가를 부러트려버리고서는 화가 나서 갑니다. 물론 영화니까 나중에 돌아와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합니다만 이 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을 제대로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분열이 일어나고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잘못하여 미움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행실이 악하고 게을러서 얻어먹는 욕을 가지고 예수님 때문이라고 핑계하면 안 됩니다. 성경 몇 곳을 봅니다.
베드로전서 4:12-19절입니다. “봉독” 예수님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이 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쫓겨날지라도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잘못하여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남의 일에 간섭하는 그런 일로 고난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판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받을 벌이 어떠하겠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5:8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자기의 가족을 안돌아 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의 욕심 때문이지요. 그러면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입니다. 그리고 또 안돌아 보는 자는 어떤 식으로 안돌아 봅니까?
마가복음 7:6-13절입니다. “봉독”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안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서 장로들의 유전을 범한다는 힐난에 대하여 예수님이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고 자기들의 편리대로 해석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한다고 하지만 마음이 먼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마땅히 자기 부모를 공경하여야 합니다. 보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돌로 쳐 죽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부모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신명기의 말씀에 의하면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도 믿음의 부모라면 자녀의 믿음의 신앙교육이란 부모가 담당하여야 합니다. 일주일에 예배당 한 번 오는 것으로 신앙교육 다한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모를 교묘하게 속이는데 부모님께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함으로서 마땅히 섬길 부모를 섬기지 않았다면 이것이 바로 자기들이 욕심이요 이용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청년 때에 이런 고민을 많이 하였습니다. 십일조를 가지고 교회에도 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나도 빠듯한 삶에 부모님도 좀 도와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가, 십일조를 반반 나눌까? 교회에만 낼까? 고르반의 뜻을 생각해보았는데 그럴 때 어느 분이 예수 믿는 사람은 십의 삼조를 하고 산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교회에, 십일조는 부모에, 십일조는 구제와 선교에. 그러나 청년 때에 월급을 적게 받아서인지 그렇게 하면 나 혼자 먹고 살기도 힘든 지경이었으니 그렇게 못하였습니다.
이것을 법으로 삼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십일조를 엄격히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부모에게 가는 것이 아까워서 자기 주머니 채우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라는 질문이 나오지요.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십시오.
그러므로 자기의 욕심 때문에 가족을 돌보지 않고서 그들에게서 핍박을 받거나 예수 믿는 사람이 더 인색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하지 않는데도 아내로서 남편에게 세상의 도리를 다하는데도 무조건 예수 믿는 것이 싫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식의 도리를 다 하는데도 오직 예수 믿는 이유만으로 싫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경우를 성경에서 보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7:13-15절입니다. “봉독”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믿는 남편이나 아내와 함께 살기를 원하거든 함께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을 때는 이혼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에 믿는 자가 구속받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평 중에 하라는 것입니다. 이혼불가가 아니라 이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마음을 품고 자기의 정욕을 쫓아 아내를 내어 쫓을 구실을 가지고 남자들이 모세법을 악용하여 이혼증서만 주고서 이혼하려고 하는 것은 악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이란 세상의 법에 메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메이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든지 안하든지 가정을 이루든지 아니든지 간에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9-35절을 봅니다. “봉독” 이렇게 함은 주를 섬기게 함이라. 우리의 현재 상황이 가정을 이루었던, 아니든 처녀이든 총각이든 과부이든 간에 우리이 관심사는 새 가정의 가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람들이 무슨 기존의 자기 가정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끌어드리겠습니까? 마치 집안에 시원한 에어콘이 하나 있으면 행복하겠지요. 시원한 에어콘 하나 들여 놓듯이 예수라는 분을 모시면 행복해집니다, 라는 것이 기존의 가정을 위하여 예수님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도 예수님을 기준으로 새 가정이 도래되었기 때문에 세상의 것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예수 믿는 자를 싫어하여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련 없이 쫓겨나오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종교단체에서 쫓겨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쫓겨나와 보니 갈 데가 없지요.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자기처럼 쫓겨난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카타콤입니다.
그곳에 가보니 예수님 때문에 어머니를 버리고 왔는데 어머니가 여러 명 또는 백 명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에게서 쫓겨났는데 형제가 여러 명, 자매가, 자식이, 집과 땅이 그렇게 있더라는 것입니다. 집과 땅이란 다른 형제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주님의 것이니 주님의 백성이라면 함께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론만이 아니라 초대교회 때에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그 형제들이 필요에 따라 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충만한 역사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란 이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 가정에 여러 배를 받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내입니다. 새 가정이란 아버지는 한 분뿐입니다. 한 아버지, 한 주님을 모신 새 가정인 것입니다. 천국에는 시집, 장가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아내라는 말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랑, 교회는 신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쫓겨나거나 또는 예수님 때문에 버리고 온 자들이 현세에서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는 영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과연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자매 된 자를 여러분의 혈육보다 더 귀하에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새 가정 안에 살고 있습니까? 세상의 그 어떤 가정보다 더 소중하고 더 보배로운 예수의 피로 이루어진 가정에 속한 사람만이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6 양과 목자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지금 요한복음을 가지고 10개월을 설교하였습니다. 10개월이면 아이가 하나 만들어져 출산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복음이 무엇인지 말하라면 무엇을 말하여야 할지 감감 하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의 개인적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아는 것을 싫어하는 권세와 세력이 있다는 것을 먼저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계속하여 복음에 접근을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그런 것이구나, 38년 된 병자를 물에 들어가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안식을 주심으로 온전케 하시는 것이구나, 영생을 얻는 생명수와 상관없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그런 물이 있다면 좀 주셔서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그런 여인에게 기어이 생명수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어 믿게 하시는 것이 복음임을 알았지만 돌아서면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살다보니 또다시 은혜는 간곳없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나의 운명을 스스로 지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내가 이해하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는데 내가 설득당하여 복음을 좋아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는 것이 복음입니다. 왜 이해하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는가 하면 복음이란 십자가의 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소식이라고 하면 나에게 덕이 되고 이익이 되어야 좋은 소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나지 못하고 세상에 속한 상태에서 좋은 것이라고는 철저하게 주님의 약속과는 무관한 그런 것만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주시면 될 텐데 좋아하시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좋은 소식입니까?
십자가란 사형 형틀인데 그것은 우리로 함께 죽자는 초대인데 누가 이것을 좋아합니까? 본능적으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실패를 두려워하고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한번 잘살아 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인데, 그런 십자가는 거리끼고 미련한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도를 누가 좋아합니까? 그런데도 이런 십자가를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를 소개할 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죄를 용서해 놓았으니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된다, 라는 식으로 전하면 오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구원을 받아 낼 자격이 있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자가 무슨 수로 예수님을 보겠습니까? 예수님이 직접 가셔서 눈을 뜨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어느 누구도 희망 없다, 가능성 없다, 스스로 구원을 요청할 자가 없다, 라는 것이 복음의 전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이 제대로 살아나서 눈을 뜨고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도 스스로 살아나올 수가 없는 죽음의 권세아래 있었다는 것이 전제입니다.
고린도후서 4:3-6절을 봅니다. “봉독” 복음이 이 세상 신에 의하여 가려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머리가 모자라서 복음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정성이 부족해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신이 혼미하게 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6절에서 어두운데서 빛이 비치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캄캄한 어둠에서 빛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여기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지옥 갈 나를 살려 주셨으니 이제는 그 은혜를 보답해야지, 예수님 나를 살리신다고 고생하셨지요, 이제는 평안히 가만히 계세요, 제가 열심히 주의 일을 하겠습니다, 라는 쪽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구원이후에도 여전히 주님께서 일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금요 구역공부에서 나왔습니다.
금요 구역공부에 못 나오시는 분이라도 오늘 말씀만으로도 복음의 풍성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더욱 풍성한 복음으로의 초대를 위하여 말씀을 듣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이 얼마나 좋았으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배설물로 보여 지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서도 복음의 능력을 맛보시고 세상의 것이 갑자기 시시해보이고 주님의 일하심과 주님만이 뚜렷이 보여 지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이 양의 목자가 된다는 이 사실을 알고 믿는다는 것이 소경이 눈뜨는 사건보다 전혀 모자라지 않는 기적의 사건임을 알아야 합니다. 소경이 눈을 떠는 것이 단지 병고침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20:30-31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의 표적이 많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어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목적이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증거하면 알아듣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생명을 얻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지고 사람들이 평소에 좋아하는 것들을 주는 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 천하가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이 땅의 모든 권세와 부귀를 누린다하여도 그 영혼이 지옥가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이란 오직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만을 좇아 달려가는 우리들을 붙들어 세우시고 돌이켜서 영원한 세계를 맛보게 하시고 이제는 반대로 달려가게 하시기까지 하는 능력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능력을 목자와 양의 말씀을 통하여 보고자 합니다.
우선 유대인의 양치기는 이러하답니다. 낮에는 각자의 양들을 들판에서 먹이고는 저녁에 우리에 넣을 때는 공동으로 만든 양의 우리에 넣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침번을 세워서 들짐승이나 도둑이 들지 못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의 특징이 약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없고 그래서 양 그러면 목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듯이 따라 나오는 말인데, 그러나 한 가지 양의 잘하는 일은 자기의 목자의 음성을 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도 목자가 양떼를 부르면 반드시 자기의 양떼들만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인가 하여 직접 실험도 해보았답니다. 다른 사람이 꼭 같은 복장을 하고서 양을 인도하려고 하여도 양들이 안 따라 오더라는 것을 아주 오래전에 보았습니다.
양의 주인이 아침에 우리에서 몰고 나갈 때 문지기는 양은 확인 안 하는 것입니다. 양의 주인만 확인하고서 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의 목자는 자기의 목소리로 양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앞장서서 가면 양들은 자기의 주인의 목소리를 알기에 자기의 주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들이 자기의 주인의 목소리를 알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양은 따르지 아니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야 주로 양치기를 하는 사람들인데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을 얼마나 잘 알아듣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6절을 봅니다.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이것이 요한복음 전체에서 아니 성경전체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못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으로 오셨는지를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양의 목자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을 보니 너희들은 나의 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목자라고 인도자라고 하지만 그러나 참된 목자를 증거 하지 못하는 목자이기에 강도요, 절도라는 것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자가 참된 목자인데 오히려 양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배를 불리는 것이니 너희는 다 절도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목자가 참된 목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목자,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자가 참된 자기의 양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8:47절을 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요한일서 4:6절을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그러므로 제대로 된 양이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입니다. 누가 진짜 목자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누가 진짜 목자입니까? 10:15절에 보시면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죽으심을 본격적으로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양이란 자기 목자가 어떻게 죽는가를 아는 양입니다. 진짜 양은 목자의 죽음 속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목자란 자기의 죽음, 즉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양들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십자가의 정신이 빠져버린다면 아무리 예수를 주여, 주여, 라고 부른다고 하여도 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목자는 죽음으로 만나러 오시는데 양이 살기 위하여 만나러 온다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늘 실패하는 이유가 무어라고 배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편의와 우리의 완급경중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동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나를 더욱 행복하게 해주는 하나님으로 부른다면 가짜 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는 자리가 십자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면 모든 종교 활동이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십계명에서 우상이란 자기를 위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 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부른다고 하여도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내라는 신은 바로 금송아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말씀과 어긋나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양이란 자기의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처럼 우리가 바른 성도라면 예수님을 어디에서 만나는가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다 빠졌을 때, 정말 나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 때, 목자가 부르기 전에는 도저히 한 걸음도 목자를 향하여 스스로 나아갈 수도 없는 그런 상태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친히 와서 무엇을 하십니까?
3절에서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느니라. 자기 양의 이름만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다른 양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결코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목자의 음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양은 따라 오기는커녕 도망갑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서 있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자기들은 본다는 자들입니다. 눈을 떴다고 소경의 인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듣고 따르기는커녕 목자의 음성을 듣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이 말씀에 비추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님의 양이 아닌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도망갑니다. 그러면 주님의 양은 어떻게 합니까?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좋다고 따라 나설 자가 누구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영원한 것을 위하여 살자는 말씀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즉 족한 줄 알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누가 좋다고 따르겠습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듣고 누가 따르겠습니까?
갈라디아서 6:14절을 봅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새번역으로 보니 좀 쉽지요. 내가 세상을 보니 세상은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나를 보면 내가 무덤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 이러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극기 훈련하여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양에게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라는 것은 이러한 십자가를 전하였을 때 따르는 자가 있으면 주의 양이고 따르지 않고 도망가면 주님의 양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사람을 꼬이는 것이 아니라 누가 진짜 양인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가짜 양을 많이 모아 놓았다고 진짜 양이 아니지 않습니까? 몇 년 전에 어느 목사님이 헌신 예배시에 십자가의 도를 전하시면서 사람들이 열사람 정도 모인 곳에 개들이 많이 모였다고 그 개들을 사람 수에 넣는가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예수님께서 자기의 양들을 불러 내신는데 어떻게 불러내시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통하여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좋게 하여서 나중에 십자가를 전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은 이미 틀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양만 불러내시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반드시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자들은 그 음성을 듣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이 없기에 자꾸만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기독신문에서 이런 사설이 실렸습니다. 교회의 상업화, 안될 말이다. 그 내용에 몇 가지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주일학교에서 쿠폰을 나누어 주게 하고서는 그 쿠폰을 가지고 오는 아이에게 현금을 5,000원씩 주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는 인기 코미디언을 초청하였답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는 헌금하는데 인센티브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구마다 헌금 할당액을 정하고 초과달성하는 교구의 교역자에게 성과급을 후하게 주었더니 간단하게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사람을 모아보자는 식으로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문제는 그 신문의 광고란이 거의 사람 꼬이는 내용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현금을 5,000원 주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 가득 찬 광고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매춘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디에 버려두었습니까? 예배당에 십자가는 폼으로 메달아 둔 것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초대하는 것은 십자가에로의 초대입니다. 어느 유명한 사람의 글에 행복에로의 초대라는 책이 있는 데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함께 죽자는 초대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 초대에 응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이러한 십자가의 부름에 응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주님의 양인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지 않은 것은 아직도 주님의 양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사람 꼬여서 자기 교회 교인 수 확보하는 차원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양이 누구인지 십자가만을 증거 하여 분리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양이라면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교회를 따르거나 목사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양이 아니라면 교회를 다르고 목사를 따를 수는 있어도 예수님을 따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인데도 따라 나선다는 것은 사람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복음이 복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능력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만을 따라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0:7-10 양의 문
생존을 위하여 사는가? 생명을 위하여 사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생존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을 얻기 위하여 생존을 포기하는 삶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수많은 종교행사들이 생명을 말하기 보다는 생존에 어떤 보탬이 되는 쪽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곳에 와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보탬이 되리라고 생각하신 분이 없으시겠지만 혹시라도 계신다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시고 새롭게 생명의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은 자기의 이익과 결부되어야 행동을 합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행동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희생하고 봉사하는 행동도 있지 않느냐고 말하시겠지요.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남의 이익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한두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자기를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하여 희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러한 희생과 봉사가 세상의 다른 것보다 훨씬 뿌듯하고 기분 좋은 유익을 알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고 살아 보시면 얼마나 행복하신지를 알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예수를 믿고서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하자라는 것이 일차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나중에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나서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랑을 입은 자로서의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그러한 봉사나 윤리 도덕적인 일을 하기위한 기독교라면 그것은 세상의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우리가 스스로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명 존중하는 그런 생명은 하나님 앞에서 이미 죄로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성경을 통하여 인간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죽어 있기에 행동하는 모든 행동이 악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입만 벙긋하면 그 속에 가득한 썩고 부패한 것이 나오는 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2:22절 말씀에 인간은 수에 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수를 헤아린다는 것은 무언가 가치가 있을 때에 수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완전히 썩어버린 것은 수를 헤아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몽땅 폐기처분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배추가 속대가 올라오면 상품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김해에서 배추 농사를 지은 사람이 배추를 갈아 엎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갈아엎을 때에 수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수를 헤아릴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입니다. 좀더 낫게 말한다고 하여도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요 바람이요 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 하나님을 모르는 것, 이것이 죄이고 이것이 저주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 그 안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고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며 사는 이런 세상이 저주 받은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잘되고 더 사는 그런 차원이 전혀 아닌 것입니다. 이런 악한 세대에서 떠나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서 우리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자, 그런 말을 많이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삶의 자세입니다.
지난주에 양과 목자에 대하여 말씀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양을 치는 일을 잘 아는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7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시되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는 강도요 절도라고 합니다.
1-6절에서는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가 절도요 강도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자신이 양의 문이기에 자신을 통하여 들어가지 않으면 강도요 절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문이라는 것입니다. 양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을 들어가야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거부하는 자가 모두 강도요 절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일차적인 대상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은 다른 이방인들은 구원을 못 받아도 자기들을 다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선택하시고 선지자를 보내시고 율법을 주시고 세계 열방 중에서 자기들에만 계시를 주셨기에 자기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어려움도 메시아만 오면 모든 정치 경제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여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자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망가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왕은 이미 사단의 세 가지 시험 중에서 거절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이런 것을 준다는 것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절한 것은 자기들이 준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잘 분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때나 지금이나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끊임없이 생명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못 알아듣는 이유를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기들은 다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이방인이라도 구원을 얻으려면 자기들처럼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으로 개종을 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다 불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불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구원 얻는 문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은 이미 저주 받은 자요, 또 유대인이라고 하여도 율법의 기준에 들지 못하면 저주받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율법의 문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을 말하고 있으니 유대인들이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 알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하니 이런 자를 죽여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문을 거부하는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율법을 주신 것은 어느 인간도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 얻을 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는데 오히려 자기들은 율법이 있으니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이 은혜로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것이 율법보다 400년이나 앞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00년 후의 율법이란 왜 은혜로만 구원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차원에서 율법이 개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온 것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19-20절을 봅니다. “봉독” 율법은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 얻을 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행위로도 스스로의 구원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체가 가만히 있으면 냄새라도 덜 날 텐데 무언가 선한 일을 한다고 움직이면 악취만 더 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유대인을 선택하시고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뜻을 모르고서 교묘하게 율법의 정신을 변질시켜서 자기들의 수준으로 깎아 내리고서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가지고 무어라고 적용하고 사는 것입니까? 모세법에 이혼하려면 이혼증서를 주고서 이혼하라는 것을 가지고 오히려 자기들의 아내가 싫증나니까 새로운 아내를 취하고 싶어서 이혼증서를 내어 주고서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시자 그러면 장가가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학인하고 싶으십니까?
마태복음 19:10절입니다. 그렇다면 장가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가지고 적용한다고 하는 인간의 수준입니다. 모세가 인간의 악함을 인하여 이혼을 허락하였는데 이혼증서를 주는 것은 여인을 보호하는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나가, 그러면 그냥 나가야 되는 것이 유대사회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하자 그러면 장가 안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혼도 못하면 무슨 재미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율법의 정신을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마음에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다른 생각 안한 사람이 있습니까? 율법을 가지고 교묘하게 자기들이 이용하고서 나는 율법을 지킨 의인이다, 라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이 예수님의 말씀을 적용하여야 합니다. 그분이 아닙니다. 형제에 대하여 욕 한 마디 하여도 이미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이란 우리의 죄 아래 가두어 버리고 심판아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전제이고 복음의 전제입니다. 이것이 확인되지 않으면 예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이용하여 그저 우리 가정, 우리 사업, 우리 교회 잘되게 하자는 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일차적으로 강도요 도적이라는 지적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는 것을 거절하니 강도요 절도입니다. 다른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자꾸만 다른 것을 섞어 넣는다면 절도요 강도입니다. 사람의 행위를 개입시키면 안 됩니다. 교회란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입니다. 부동산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저께 편지가 하나 왔는데 어느 교회에서 예배당을 짓고서 빚을 갚지 못하여 경매처분에 넘어 가게 되었다고 긴급히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경매위기에 처하여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라고 합니다. 물론 그 분의 위기는 인정을 한다고 하여도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경매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가 어떻게 법원 경매에 넘어갑니까? 음부의 권세가 죽음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러니 이분은 지금 부동산 건물을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배당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니 도와주십시오, 하면 모르겠는데 이러한 호소를 하고 있으니 이것이 오늘날 우리 주변의 분위기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 되는 것을 거부함으로 절도요 강도가 되듯이 오늘날 우리주변에도 절도와 강도가 많습니다. 예수님만으로는 부족한 듯이 말하는 모든 자가 절도요 강도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은혜로 되었지만 그 이후에 복을 받고 천국에서도 상급을 많이 받아 내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행하여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복음을 오해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여 우리 보고 하시라고 하였겠습니까? 은혜에 보답하자고 합니다. 갚을 수 있는 은혜는 은혜가 아니고 삯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전도와 봉사와 섬김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훈련과 성숙, 즉 하나님의 사람됨을 원하는 것이지 우리의 업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구원만 하시고 지금은 팔장끼고 계시면서 너희들이 대접을 잘해보아라, 그러면 내가 복을 주마, 그러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일하고 계심이 있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9-10절을 봅니다. 예수님이 문입니다. 구원의 문입니다. 이 문을 통하여 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얻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양들에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어떻게 하신 것입니까? 자기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밤에 어린양을 잡아 피를 바른 것은 무엇을 보호 받는 것입니까? 생명이 보호되는 것입니다. 재산 보호를 위하여 어린양의 피가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를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에 도입하는 모독을 행치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5:1-7절을 봅니다. 이것을 전도하는 일에 자주 사용하시는데 목자가 양을 찾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누가 찾아 나섭니까? 목자가 나섭니다. 그리고는 어깨에 메고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주님에 의하여 찾아진바 되고 주님께 붙들려 여기까지 와있다는 사실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 그래서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더욱 풍성히 얻어가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0:11-18 선한 목자
시편 23편을 함께 봉독합니다. “봉독”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합니다. 다윗의 시편인데 다윗은 왕으로서 자신을 양으로 생각하고 주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것을 시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겼었습니까? 장인이 죽이려고 군사를 풀어 쫓아오는 그런 위기 속에서 외국으로 망명 갔다가 미치광이 짓을 하고서 살아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황무지와 광야의 동굴로 전전하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다윗이 왕이 되어 편안히 지낼 때 이런 시편이 나온 것이 아니라 참으로 위험한 순간순간에 이러한 시편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환난 가운데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주님을 찬양하는데 오늘 우리는 예수님만으로 부족함이 없으십니까? 예수님만 계시면 만족하십니까? 쉽게 아멘이 안 되시죠?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목자라고 하면서 왜 부족함을 느끼고 살고 있습니까?
황두용 목사의 글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현대인들은 사자와 호랑이 같은 용맹스러운 삶을 동경하면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하고 있다’라고 합니다. 예수님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양으로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자나 호랑이처럼 목자가 없이 독립적으로 자기의 삶을 개척하여 사는 그런 자세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목자라고 부르면서 예수님만으로 만족을 못하는 괴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의 성공담이라는 것은 사람이 어려운 환경가운데서 불굴의 의지로 투쟁하고 개척하여 출세하였나를 성공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성공시대입니다. 또 모든 위인전이나 자서전이라는 것이 모두가 인간의 용기와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도 성공담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여 성공하고, 이삭은 이렇게 하여 성공하고, 야곱은 이렇게 하여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인물도 자기의 능력으로 성공하였다, 라는 그런 관점에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스스로가 독립하여 행동하려는 것을 오히려 죄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인물들이 한결같이 드러내는 것은 주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왕이면서도 자신의 개척정신이나 불굴의 투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와 인도가 없이는 하루도 살수 없는 양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글에서 양의 특징에 대하여 본적이 있습니다. 양은 지독히 근시라서 목자가 없이 길을 다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에선 양이 언덕으로 굴러 떨어지면 다음 양도 그냥 그리로 가서 굴러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격용 무기가 없지 않습니까?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없는 것이 양의 특징입니다. 그러니 양이란 목자 없이는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으로 양과 목자와의 관계를 주님과 성도와의 관계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전능하신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능한 능력으로 인도하신다고 하니까 자꾸만 알라딘의 램프처럼 그런 초능력자로 생각하시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원하시는 사람, 목자가 원하시는 양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인도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원하시는 방향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조그마한 어려움만 닥치면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양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늑대요 이리요 여우요 사자와 호랑이처럼 자기의 삶을 자기가 이루어 나가겠다는,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더 우뚝 서서 성공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살기에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고 말은 하면서도 주님만으로 만족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우리는 주님의 양이 아닌 것입니다. 혈통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이스라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더더구나 양의 모양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생존경쟁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사자와 호랑이처럼 먹이 사슬의 최고의 자리에 이를까만 염두에 두고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약육강식의 세상 속에서 살다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도 나의 생존경쟁에 보탬이 되는 차원에서 예수를 끌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 나는 갈 길도 모르는 어린양이오니 나를 인도하소서, 라고 하기 보다는 이미 자신의 야망 찬 계획과 위대한 비전을 이미 확보하고서 주여 이것을 이루어 주옵소서,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멋지게 영광 돌리겠습니다, 라는 엉터리 같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양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시편 23:3절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 사는 것이 죽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입니다. 기존의 우리에 들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자들을 주님께서 한 우리에 넣어서 한 목자가 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관심사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것과 또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소생이나 의의 길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선뜻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우리의 죄인됨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우리의 관심이 세상적인 것으로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질기고 질긴 호랑이, 사자 같은 가죽들이 좀 찢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왜 오셨는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자 되고 성공하는 그런 삶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을 소생하고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0:11,15절.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으로 양의 그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은 세상의 평안이나 형통의 길이 아니라 의의 길입니다. 의의 길이란 세상이 알지도 못하는 길입니다.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이 없다면 더더구나 갈수가 없는 길입니다.
이 인도와 보호를 위하여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셔서 지금도 자기의 양떼를 빈틈없이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도와 보호하심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도와 보호가 어디로 향한 인도와 보호입니까? 의의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한 인도와 보호입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와 비교하여 삯군이 나옵니다. 이는 이리가 오면 도망가는 것입니다. 자기 양이 아니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일차적인 대상은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자기들이 선생이라, 인도자라 하면서도 선한 목자에게로 인도하지 아니하는 삯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목자라고 하면 자꾸만 목사를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요구하는 목사상이 겸손하고, 청빈하고, 인자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화내지 않고 부드럽고, 온화하고, 저금통장도 하나 없고 이런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좋은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희생한다고 하여도 목사는 죄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지신 분은 따로 계십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할 일이란 십자가를 지신 선한 목자가 따로 계신다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목사를 세우신 이유는 자기 양을 삼으라고 목사를 세운 것이 아니라 선한 목자가 따로 계심을 보여주어야 하고 증거 하여야 하는 것이 교회에 목사를 둔 이유입니다.
사도행전 20:28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자기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양떼를 치는 것이 목사의 일입니다. 감독이라고 하지요. 무엇을 감독하라는 것입니까?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분의 공로가 방해받지 않도록 감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가 아닌 다른 것이 슬며시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목숨을 걸고 막아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공로나 땀이나 피가 섞이지 못하게 감독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들어오지 못하게 감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양을 자기 양으로 삼아 자기의 이익을 채우려는 자가 삯군입니다.
에스겔서 34:1-24절까지를 봉독합니다. “봉독” 여기에 보면 삯군에 대하여 나옵니다. 양떼를 자기의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입니다. 양떼를 잡아먹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자에게 양떼를 맡기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자기의 양떼를 인도하여 내어서 친히 목자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목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양들 사이에서도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밀치는 것에 대하여 책망을 합니다. 그러니 목자와 양을 다 책망하고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자기의 양떼를 인도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번 적용을 하고 갑시다. 먼저 목사인 나는 삯군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보나 마나 삯군입니다. 매달 삯을 받고 있으니 당연히 삯군입니다. 그리고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는커녕 삯을 올려주면 기분좋아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예를 들자면 공동의회에서 제가 원한 것이 아닌데도 여러분이 차를 사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중고 티코를 구입하여 5년 정도 타고 다니니 고장이 많이 나서 수리 중에 있는 것을 누가 보았고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작년에 워낙 교회 사업을 하지 않아서 이월금이 좀 많아서 인지 차를 하나 사기로 공동의회에서 결의하였는데 목사 차산다고 재정이 마이너스가 나면 모양세가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천천히 하라고 하였는데 몇 달이 지나고 차를 사기에는 재정이 빡빡한 것입니다. 그러자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왜 헌금을 안 하노,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하였더니 아니 목사님도 그러세요, 그러니 목사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좋겠지요, 하더라구요. 당연한 말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럴 경우가 있지도 않겠지만 어느 큰 교회에서 월급도 많이 주고 대우도 잘 해줄 테니 오라고 한다면 저는 아마 갈 마음이 있을 겁니다. 이런 말을 하여서 저 목사 솔직하다 하여 또 다른 인기를 바란다면 이것이 또한 사기꾼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까? 선한 목자가 누구인가를 증거하기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양떼도 책망을 받습니다.
17-22절까지입니다. 좋은 꼴을 먹고 좋은 물을 마신 것을 작은 것으로 여겨서 다른 약한 양들이 먹지도 못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진 양과 그들의 등살에 못 견뎌 파리해진 양 사이에 주님이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심판을 목자와 양에게 하신 후에 다윗을 목자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미 죽은 사람인데 다윗을 세우겠다고 하신 것은 다윗과 언약하신 그 영원한 왕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한 목자를 세우셔서 친히 그들의 목자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4-16절을 봅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선한 목자는 양우리에 들지 않은 양까지 인도하여 내셔서 저희도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는 한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사야 53:6절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저에게 담당하셨도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란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분만을 소개하지 않는다면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11:20절에서 바울 사도는 자기가 전한 복음을 방해하는 육체의 행위를 자랑하는 자들의 말을 듣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책망을 합니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구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양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주님만이 참으로 선한 목자입니다. 그분의 음성만을 제대로 듣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양이라면 반드시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분이 친히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기에 염려하지 마시고 마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 되어도 그 인도와 보호하심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7-21 목숨을 버릴 권세
10여년 전에 어느 목사님이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며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물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는 나올 수가 없어서 살려달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그런데 그때 유학자가 지나다가 말하기를 사람이 늘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지, 하고는 지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던 스님이 그 광경을 보고는 모든 것이 업보요, 하고 지나가더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기독인이 지나다가 그 광경을 보고서 물에 뛰어 들어 그 사람을 건져내고서는 자신이 죽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교를 대신 죽은 것이라는 것으로 표현하고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러나 복음이란 단순히 대신 죽었다는 것보다도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살려달라고 소리라도 지르지만, 죄에 빠진 사람은 살려달라고 소리치기는커녕 죄를 짓는 것이 너무 좋고, 죄 속에서 사는 것이 그들의 생의 목표이기에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신다고 하면 오히려 화를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신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잘된다고 말하면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적하고 죄의 삯이 사망이며 심판이 있음을 말하면 싫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런 죄를 지적하는 것도 단지 윤리 도덕적인 죄만 지적을 하게 되면 그런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자기는 죄인 아닌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간음 말라, 살인 말라 그러면 기존의 세상적인 법적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런 죄 안 지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음욕을 품은 것이 이미 간음하였습니다. 탐심이 우상숭배입니다. 남을 미워한 것이 살인한 것과 같은 죄입니다. 행위만이 아니라 이미 죄인이기에 죄의 동기, 죄의 권세, 죄의 힘이 사람을 사로잡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죄의 목록이 아니라 경향성입니다. 사람을 가만히 두어도 죄가 나오는 것이면, 아무리 좋은 환경이 주어져도 끝없는 죄가 나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죽여버린 이 세상이 죄의 지배아래 있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죄의 심각성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죄로 가득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시지 않으시고는 해결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조차 예수님의 죽으심을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오해란 내가 2,000년 전에 유대땅에서 살았다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 개의 못’이라는 노래의 가사에 보면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노래를 할 때 정말 그 때 그 무리가 아니라 바로 내가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말하기를 내가 그때 있었다면 못 박아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도 있었으니 나는 아마 믿는 무리 중에 있었을 거라고 착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2,000년 전의 사람들과 꼭 같은 생각입니다.
마태복음 23:29-36절입니다. “봉독”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면서 우리가 그 시대에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니 너희가 그들의 후손임을 스스로 증거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 조상의 양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과거에 그렇게 하였지만 앞으로도 예수님이 보내시는 자들을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 이 세상의 일입니다. 이미 신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당하는 고난을 통하여 증명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인간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늘날도 순교자들의 무덤을 꾸미는 자들이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무덤과 비석을 세우면서 이것이 우리의 전통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순교자를 배출한 교파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비석을 세우고 기념관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치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높이 세워진 십자가, 찬란한 네온사인으로 조명되는 십자가가 서로 서로 경쟁하듯이 세위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에 과연 십자가의 정신이 살아있는 것입니까?
기장교리교회 방문을 한 집사님들이 이 교회에는 왜 십자가가 없느냐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십자가 탑이 없는 것은 처음에 세울까 말까 하다가 자금 사정도 여의치 않고 하여 세우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십자가가 네온사인으로 밤하늘을 수놓는 십자가를 생각하고 있지만 그런 십자가는 없습니다. 처절한 죽음의 형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십자가가 악세사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목걸이, 반지, 집안에, 차안에 십자가 장식물이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장식물이 아닙니다. 성도님들도 십자가를 목걸이로 하고 계시는 분이 계시겠지만 그것이 어떤 부적처럼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러므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드라큐라’ 같은 공포영화 같은데서 십자가를 들면 귀신이 물러가는 그런 식의 십자가는 없습니다. 그런 것이 십자가의 정신을 흐리게 하는 사단의 작전입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일말의 그런 십자가의 형상을 악세사리로 가지고 계시다면 속히 철거를 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고기 모양의 표적도 부치고 다닙니다. 헬라어로 물고기가 ‘익투스’인데, 다섯 글자로 되어 있는데 그 글자의 하나씩을 약자처럼 사용하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원자라는 단어의 첫 글자가 됩니다. 이것을 모으면 익투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상은 성도들이 핍박을 받을 때 자기들끼리의 암호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을 차 뒤에 붙이면서 다니는 이유가 무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붙이고 신호를 잘 지키고 양보를 잘하는 것도 아니던데 부적처럼 붙이고 다닌다면 속히 그런 것도 떼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물론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바르게 운전하겠습니다, 그러고 싶으면 운전석 앞에 잘 보이게 붙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형상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를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나도 날마다 죽는다는 생각을 늘 하시는 십자가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십자가가 하나의 형상으로 걸어지게 되면 가톨릭의 서물숭배가 될 수 있으면 이런 것을 여호와의 증인은 우상숭배라고 공격을 하게 됩니다. 물론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의 온전하신 구속을 막을 방법으로 그렇게 합니다만 우리가 십자가를 꾸미는 자가 될 수 있는 죄인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 당시의 사람들이 악하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잘 못 알아듣고 예수님을 죽여 버렸다, 그 사람들이 말을 잘 알아들었다면 죽이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통일교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그렇게 신문에 광고가 나오지 않는데 몇 년 전, 약 10여년 전에만 하여도 종종 전국적인 신문광고란에 ‘누가 예수를 죽기 위하여 왔다고 하는가?’라는 제목의 광고를 통하여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지 죽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고 아주 논리적으로 성경의 구절을 들어가면서 광고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야 예수님의 구원이 반쪽 구원이기에 문선명이가 있어야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자기들의 주장을 펼치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8절에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사람들이 무지하여 잘못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앞뒤를 보면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 아래 있기에 절대로 주님의 영광을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죽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무지한 사람들 주님의 영광을 알기는커녕 오히려 죽이는 그들을 자기의 죽음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에 예를 들은 내용은 살려달라고 고함을 치는 것은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관한한 모든 인간들은 살려달라고 요청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살려달라고 요청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길은 자신이 죽음으로 살려내는 것뿐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스스로 죽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힘없이 잡혀 십자가에 처절하게 죽는데 어떻게 스스로 죽는다는 말인가 할 것입니다만 그러나 이 십자가로 스스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연히 실수로 죽인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죽으심을 통하여 인류의 배후를 사로잡고 있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인류가 스스로 잘한다고 살아온 모든 것이 결국 마귀의 조종아래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들도 역시 별 볼일 없이 죄의 권세아래 있었다는 것이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1, 17:22절. “봉독”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어라고 하십니까?
오늘 말씀 요한복음 10:17-18절입니다. 목숨을 예수님에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감히 예수님을 죽일 수가 있습니까? 베드로가 칼을 들고 말고의 귀를 벨 때에 예수님이 지금 내가 명하여 하늘의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 없어서 이러는 줄 아느냐, 이렇게 되면 아버지의 뜻이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천사 한명만 와도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이 하루 밤 사이에 다 죽어 버리는데 열두 사단 더 되는 천사가 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잡혀 가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자기 비우심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마음을 비운다고 하여도 다 계산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기 비우심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 순종이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버리시고 버리시는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버릴 권세가 없는 것입니다. 자살한다면 버리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라고 이미 그 배후에 사망이 왕노릇 하기에 자살한다고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렸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죽을 권세가 있고 더 놀라운 것은 얻을 권세도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10-11절입니다. “봉독” 빌라도가 죽이고 살릴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죽는 것이며 이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기에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 빌라도 너의 권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는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백성의 죄를 지고서 대신 죽으신 죽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이 세상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6-14절을 봅니다. “봉독” 십자가의 비밀은 세상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한 자만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12절). 이러한 은혜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인데 눈으로 보지도 귀로 듣지도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밀은 육에 속한 자는 받을 수가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은 자는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목숨을 버릴 권세를 가지고 죽으심으로 아버지께서 택하시고 붙여주신 자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또한 버릴 권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얻을 권세도 있는 것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길을 스스로 자기를 비우셨기에 가신 길입니다. 자신이 비우시고 그 비워진 자리에 아버지의 뜻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비밀, 이러한 은혜를 받은 주님의 백성들도 이제는 목숨을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살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의 자존심이 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명예가 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하심,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살아야 돼, 죽으면 안돼, 그러고서 삽니다.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단지 목숨을 부지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랑하는 삶, 뛰어난 삶, 영웅적이고 남을 지배하고 싶은 그런 삶입니다. 이러한 것이 사라질 때 사람은 자살까지 합니다만 이러한 죽음은 목숨을 버리는 권세가 아니라 오히려 사망의 종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주님의 은혜가 임하고 나니 어떠한 삶이 드러나는가 하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세상의 가치관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존심 상하여 말도 못한 부끄러운 이야기, 자기의 약함을 스스럼없이 내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가 죽은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이 나타나는 것은 다른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 와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세상의 것으로 삶의 목적을 삶고 있다면 방향이 아직 제대로 잡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살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사는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싸움이란 한편이 죽지 않아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소한 다툼에서 지역적인 갈등, 국가적인 갈등과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기가 살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또 자기는 남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성도란 이제 그런 싸움은 끝이 난 사람입니다. 십자가에서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스물 스물 기어오르는 나는 살아야 돼, 하는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초대란 그러한 우리가 함께 죽고 이제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나타나서 사망의 종에서 벗어난 생명의 종의 모습으로 살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10:22-30 빼앗을 자가 없다
지금 남북의 정상이 만나게 된 것을 가지고 세계가 예민하게 반응을 보입니다. 겉으로는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라고 그래서 서로가 만나고 통일되는 것이 좋다, 라고 하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원하지 않는 나라들이 많은 것입니다. 자국의 이익을 따라 손익계산을 부지런히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바로 전쟁입니다. 총칼을 든 전쟁이 아니라 정치와 외교와 경제적인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빼앗으려하고, 또는 빼앗기지 아니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모두가 눈에 보이는 이런 전쟁만 생각을 하고 삽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도 아직 발을 이 땅에 딛고 있기에 이런 전쟁에 관심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는 남북통일보다 우선되는 것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남북이 화해하고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고 경제협력으로 살기 좋은 나라, 21세기의 강한 나라가 된다고 하여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죄와 사망의 권세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향한 집중력이 잠시 잠간 만에 빼앗길 수 있다는 것에 놀라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 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남북의 장미빛 미래보다 더욱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온 마음과 뜻과 몸을 다하여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 빼앗기지 않는다는 말씀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28-29절입니다. 2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내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없다, 라고 하십니다. 29절에서는 저희를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런 말씀은 전쟁에 관한 표현입니다. 빼앗고 빼앗기는 것입니다. 이런 전쟁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시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전쟁, 즉 영적 전쟁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삶의 방향이 잡히는 것이고 믿음의 방향이 잡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권투선수가 허공을 향하여 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때가 수전절입니다. 수전절은 율법에서 지키라고 하는 절기는 아닙니다. 기원전 160년대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는 사람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집니다. 그것을 마카비라는 지도자가 성전을 다시 짓기 위하여 12월중에 일주일 동안을 헌신절로 만들어 민족의 절기로 정하여 성전도 새로 짓고 또 지은 성전을 보수하기 위하여 헌신의 절기로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절기에 예수님이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곳에 다니시는 것입니다. 이때에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질문합니다. 언제까지 당신이 우리의 마음을 의혹케 하려고 그렇게 말합니까? 당신이 메시아라면 속 시원히 밝혀 주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이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으나 너희가 믿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하신 일이 충분히 메시아임을 증거하였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이미 다른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메시아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메시아가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새번역에서는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려고 합니까, 라고 합니다.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도록 하는지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 시원히 터놓고 메시아인지를 밝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인 것 같습니까? 우리가 그동안 요한복음 1장에서 10장까지를 약 11개월에 걸쳐서 보고 있습니다만 예수님이 과연 어떤 메시아입니까? 병고치고, 먹을 것 해결해주고, 그러니 유대인들이 이는 우리의 메시아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억지로 자기들의 임금 삼으려고 하니 예수님은 도망을 가십니다. 이것은 나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 그런 문제를 해결하러 온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북문제 해결하러 오신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헷갈리는 것입니까?
그 행하는 능력으로 보면 무엇이나 이루어 줄 것 같은데 자꾸만 꽁무니를 빼는 것처럼 보이니 얼마나 답답한지 제발 당신이 메시아인지 아닌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취를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라면 확실히 따라 갈 것이고 아니라면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나는 이미 말하였고 나의 행한 일을 통하여 메시아임을 증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가 믿지 못하는 것은 왜 믿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26-27절입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메시아를 선택하여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너희가 나의 말을 믿지 못하고 나를 따르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 앞에서 다시 한번 심각한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의 양인가를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제대로 알아듣고 따라 가고 있는가를 점검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신을 선택하고 종교를 선택하여서 가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나에게 더 유익이 있겠는가를 계산해보고서 따르든지 말든지 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할 때에도 계산을 한번 해보고서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계산을 해보시고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생각이 되시면 그만두시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영 아니다 싶으면 중간에 그만두는 것이 낫지 끝까지 밀어붙이다가는 끝까지 간 것만큼 손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빨리 손 틀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소개받을 때에도, 또는 소개할 때에도 언제나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좋은 말들을 하여서 현실적인 이익들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저의 어머니가 무어라고 하시는가 하면 그래가지고 예수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너희 교회가 그렇게 크지도 않다고 하던데 제발 좀 살살 하라고 합디다. 처음에는 좀 살살 하고서 나중에 가서 좀 강하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교인들 다 가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하는 염려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새벽기도회 때 본 말씀입니다만 다시 한번 보고자합니다.
누가복음 14:28-32절을 봅니다. “봉독” 망대를 지을 때 거기에 소요될 경비를 예산해보고서 짓는 것이지 하다가 모자라면 비웃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전쟁을 할 때도 지피지기를 해보고서 안 되겠다 싶으면 화친을 하는 것이 낫지요.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다가는 오히려 더 큰 낭패를 당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계산을 해보고서 이런 일을 하듯이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계산을 해보고서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25-27절을 봅니다. “봉독” 이 계산하라는 말씀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시고서 너희가 무엇 때문에 나를 따르려고 하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나를 따른다는 것은 이런 것이니 미리 계산해보고서 아니다 싶으면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나를 따른다는 것은 부모와 처자식 형제자매와 및 자기의 목숨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33-35절입니다. “봉독”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따라 오라는 것입니까? 오지 말라는 것입니까?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따라 갈 수 없는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계산하고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이 세상의 것이 모두 없어져도 다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심지어 나의 목숨까지 죽어진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습니까? 대답하시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제가 5년 전에 6만 킬로미터를 탄 티코 중고를 사고서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카렌스 새 차를 얻었으니 기분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침에 새벽기도회 오면서 차 한번 보고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서 한번씩 봅니다. 혹시 긁힌 데는 없는가 하고서 보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소유가 많아지면 이렇게 걱정거리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제 친구목사에게 하자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자기는 봉고를 36개월 할부로 구입하고서 밖에 세워 두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기도 하기 전에 차의 안부부터 먼저 챙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저 차를 오래 타다가 더러워지고 고장이 나면 또 싫어지고 더 나은 차를 구입하였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를 믿으면서 나의 것을 버리기는커녕 나의 소유를 보존시켜주고, 확대시켜주는 예수님, 거기다가 천국까지 보내주는 그런 예수님을 우리가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는 이런 말씀을 통하여 중간 결산을 해보고서 가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를 믿고 가면 무엇이 나에게 주어질 것인가 계산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를 믿는다고 수십 년을 믿어 왔지만 아직도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인지 땅에 속한 눈에 보이는 것을 주시는 메시아인지 아니면 이 땅의 것이 아닌 것을 약속하셨는지 헷갈리고 마음이 졸인다면 점검을 해보시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메시아 입니까? 밝히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한 곳을 더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9:58-62절입니다. “봉독” 여기서는 허다한 무리가 아니라 몇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겠습니다, 라고 하시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이곳이 아니기에 여기서는 쉴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따른다는 것은 너희들이 기대하는 것을 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바로 앞의 43절에서 48절에 보면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자기들 중에 누가 서로 크냐고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라 나서는 자들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예수를 믿는다고 믿어 왔는데도 별 뾰족한 수가 없었는데 그러나 그래도 정성이 쌓이고 쌍이면 혹시나 복권 터지듯이 한번 하늘에서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지 않나 하는 기대마저도 무너져 내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부터 그만두려고 하니 또 한편으로 염려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데 지옥이 없으면 다행이지만 만약 지옥이 있다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니 그만둘 수도 없고 갈등이 되실 것입니다. 요즈음은 지옥과 천국에 대하여 들어 보기도 힘든 시대입니다만.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말씀하신 이러한 말씀, 너희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이런 말씀을 듣고서도 주님을 따라 갈 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부르신 분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은 결코 빼앗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셔서 예수님께 붙여 주시고, 예수님이 그들을 위하여 자기의 피로 대속하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 쳐 주셨기에 누가 감히 우리를 주님의 손에서 빼앗아 갈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기에 아무에게도 자기의 백성을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그를 선택하여 믿은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슨 이익을 바라고 예수를 믿었다면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서 떠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괴로우면서도 그래 그 말씀이 맞아 하고서 따른다면 우리는 주님께 택함을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여러 가지 세상의 험한 일들로 인하여 불안하거나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만유보다 크신 분이 우리의 주님이라면 무엇으로 우리를 주님에게서 끊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이 세상의 것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영생을 바라보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는 나라를 사모한다면 이 세상의 어떠한 환난이라도 우리가 주님에게서 빼앗기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독도’
로마서 8:30-39절입니다. “봉독” 그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낼 수 없습니다. 빼앗기지 아니합니다. 이런 든든함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고, 세상을 가볍게 보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0:30-42 그 일은 믿으라
오늘 교회에 나오실 때 계산을 하고서 나오신 것입니까?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시는 분은 지난주에 결석을 하셨거나 조신 분이면 모르실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할 때에는 손익을 계산해보고서 행동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무엇이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되는지를 계산해보고서 따르라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 또는 종교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이익을 바라고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고 착하고 바르게 살고자 하는 것이지 무슨 다른 계산을 하고서 따르는가? 라는 생각이 드시는 분은 아직까지 자신의 윤리 도덕적인 능력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예수를 믿는 것이 지옥 갈까 봐서, 무서워서 믿는다는 것을 아주 우습게 여깁니다. 지옥 갈까 무서워서 예수 믿는다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고, 종교를 가짐으로 고상하게 살고, 윤리 도덕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면 아직도 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죄란 것은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계산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집을 지으려면 비용이 얼마가 들지 계산을 해보고서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부모와 처자식과 형제와 심지어 자기의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를 따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에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 말씀을 듣고서도 오늘 또 나오셨다는 것은 아마도 제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무언가 다른 힘에 끌려 온 것입니다.
마치 진공청소기에 먼지가 빨려 들어가듯이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항의 힘보다도 빨아들이는 힘이 강하기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천국이란 사람이 스스로 알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끌려들어 가는 것입니다. 먼지, 티끌이라고 하니 기분이 나쁘실지 모르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무엇으로 만드셨나요? 흙으로 만드셨지요. 흙이 무엇입니까? 영어로 보면 땅의 티끌(dust of ground)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땅의 티끌에 하나님이 자신의 호흡을 불어 넣어 주셔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고 사는 것이 사람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러나 범죄 이후로 인간은 스스로가 피조물이 아니라 자신도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생들에게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은 원래 땅의 티끌이니 땅의 티끌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스스로 나갈 수가 없기에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죄로 인하여 죽어 있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신이 임하심으로 살려 내시고 자기의 일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불러내실 때는 하나님의 강력한 힘으로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이 강력한 힘이 무엇인지 에베소서 1:17-23절을 봅니다. “봉독” 강력한 힘이란 그 능력이 그리스도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이기에 그 발 앞에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을 만물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강력으로 역사하신 능력입니다.
우리가 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는데 하나님이 강력히 역사하셔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시는데 그 일에 자기의 택한 백성도 함께 참여시키시는 것이 바로 강력한 능력이며 강력한 역사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4-7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살아나서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이요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그리스도가 머리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의 지시에 따라 몸을 이루는 것이 교회이기에 오늘 여기에 모인 것은 머리의 지시를 받아서 끌려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머리의 지시를 받지 않는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지요.
우리의 몸을 머리가 지시하여 움직이듯이 오늘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모인 것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는 없는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이끄신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사는 일에 별 도움이 안 되는, 도움은커녕 밟으면 밟히고 찢으면 찢기 우는 그런 삶으로 초대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서도 따라나서는 것은 이렇게 다른 힘과 능력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무슨 수로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까? 어떻게 십자가를 달게 지고 나갈 수가 있습니까? 주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이끌고 계시지 않는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10:20절에 예수님을 보고서 귀신들려 미쳤다고 합니다. 31절에서는 돌로 들어 치려고 합니다. 39절에서 예수를 잡고자 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왜 이런 반응을 보입니까?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 이렇게 말하니 예수님을 참람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으로서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신성모독죄가 어디 있는가 하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너희 율법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신이라 하였는데 어찌 하나님이 친히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을 참람(어그러지고 합부로 말하는 것)하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이라는 말씀은 구약전체를 말할 때 율법에서,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약에서, 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시편 82편에 있습니다.
시편 82편 1절. 하나님이 재판장들 가운데 서시며. 이 재판장을 난하주에 보면 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재판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이를 신이라 한 것입니다. 6절에도 보시면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신을 받으면 신들이라 지존자의 아들이라 불렸는데 어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느냐? 왜 믿지 못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배후에 무엇이 붙들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민수기 11:16-17, 26-29절을 봅니다. 모세를 도와서 재판을 할 지도자 70명이 하나님의 신을 받습니다. 그러자 그 지도자의 모임에 참여하지 않고 장막에 있는 두 사람 엘닷과 메닷도 함께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다는 보고를 할 때 여호수아가 저들의 예언을 금하소서, 라고 합니다. 이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왜 그것을 질투하느냐? 하면서 여호와께서 그 신을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이 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신이라, 재판장이라 하였는데 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을 그렇게 믿지 못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이들이 장님인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일하셔서 눈을 뜨게 하셔야만 아들을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승천하신 분이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가 성령을 받고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눈뜨게 되고 믿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라는 것이 많지만 모두가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거나 이익을 위하여 종교생활을 합니다. 이익이라면 눈앞에 이익을 말하거나 아니면 사후의 내세의 이익을 말하기도 합니다. 현세에서도 복을 받고 죽어서도 좋은데 간다라는 식의 이익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우습게 여기는 고상하고 자존심이 센 사람들은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아니야 우리가 종교를 가지고 신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 희생하고 사랑하고 섬기면서 좋은 세상 만들자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 간의 화해를 말하고 달라이 라마를 초대하고 교황을 초대하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인간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것이요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37-38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보고서 믿지 못하겠거든 나의 하는 일을 보고서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기적을 베푼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을 고치고 먹을 것을 주시는 것은 결국 자신이 병을 짊어지고 가시는 이사야 53장의 예언 성취이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은 자신의 살을 찢어서 영생의 양식을 주시는 표적으로 베푸신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나는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고서 믿지 못하겠거든 예수님이 하시는 아버지의 일을 하면 그 일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35-40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영생이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리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아버지의 일입니다. 아버지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신 일입니다. 이 일을 보고서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가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지 사람들이 믿지를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데 하나님이 홍해바다를 가르듯이 그러한 능력으로 자기들을 구원하여 주는 표적을 구하는데 힘없이 죽은 십자가는 표적과 능력과는 상관없는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기에 정말 유대인들에게는 꺼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인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의 죄를 자기가 져야지 남이 지는가,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도 자기가 로마를 반대하고 유대교를 반대하다가 자기 죄로 죽은 것이지 무슨 대속의 죽임이냐고 어리석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고서 좋아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꺼려하고 미련하다하도 어리석다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을 보고서 믿으라고 하여도 믿을 자가 없기에 주님의 일이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기어이 살려 내고야 마시는데 그 살려 내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거듭나고 다시 태어난 사람만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로 모이고 예수를 믿는다는 일이 이 정도의 엄청난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더욱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주님의 일하심을 알아가고 그 일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 우리는 죄인이기에 못 한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땅히 감당하여야 할 부분을 감당하지 않고 도망가려고 하는 교묘한 술수입니다.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가게 됩니까? 세상의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이 보면 참으로 어리석어 보이고 미련하게 보이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8-25절입니다. 세상의 지혜를, 총명을 다 폐하시고 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일을 믿는 것이란 참으로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러나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 버리신 그 일을 믿고 가는 것이 주님의 일하심입니다. 아무리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러나 그 십자가가 구원 얻는 자에게 능력이기에 누가 뭐라고 하여도 나는 예수님이 좋습니다, 하고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다는 것의 내용은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 일, 즉 십자가를 믿고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이제 이 세상은 더 이상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세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성도란 세상이 죽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기적을 맛보며 사는 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1-16 하나님의 영광
뉴 밀레니엄이란 요란한 말로 시작된 올해도 벌써 절반이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무엇을 위하여 살아 왔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시렵니까? 왜 삽니까? 제목에 힌트를 받아서 대답을 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대답을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시지요? 그보다 더 걱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더 곤란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된다는 당위론적인 명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의 교리적인 기초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입니다. 여기 기초한 문답이 두 가지인데 대요리 문답과 소요리 문답입니다. 요약된 교리문답인데, 대요리 문답은 196문답이고 소요리 문답은 107문답입니다. 이 두 문답의 제일 첫 번째 질문이 같은 내용입니다.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이뇨’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 한다는 것은 그분 한 분만으로 기쁘고 즐겁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자녀가 고등학교 2학년쯤 되어 교회에 열심을 내면 은근히 염려가 됩니다. 무슨 임원을 하고 토요 기도회다, 임원회다, 수련회 준비다, 문학의 밤 준비다, 찬양준비 한다면서 교회 붙어살면 걱정이 됩니다. 무슨 걱정입니까? 저러다가 대학 떨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합니까? 아들아 네가 좋은 대학 들어가서 더 크게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라, 그러니 지금은 11시 예배만 참석을 하고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부분은 내가 대신 맡아서 할 테니, 내가 평소의 두 배를 기도하고 봉사할 테니 너는 공부만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런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도대체 성경 어느 구절에서 좋은 대학 들어가면 하나님의 영광이고 재수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러나 이런 영광관이 가득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잘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십자가는 세상에서 잘된 것입니까?
이러다 보니 교회라는 모습이 세상의 영광을 가져다 놓고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다르듯이 오늘 우리의 영광이라는 것과 성경이 증거하는 영광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돌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부터 요한복음 11장에 들어갑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는 형제들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서 그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긴 자입니다. 그런데 이 자매의 오빠가 병이 들자 자매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좀 와달라고 합니다. 와서 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도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나중에 죽도록 하여서 다시 살려내셔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구나, 라고 이미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만 생각하여도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라면 죽을 병에 들리지 않게 하시지 어떻게 죽을 병에 들리게 하시고서 살리심으로 영광이라고 하는가? 그리고 요한복음 9장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죄가 누구 때문인가의 질문에 예수님은 부모의 죄도 자신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되고 또 병들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자체가 우리가 보기에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놀라운 것이고 신기한 기적이기에 하나님께 영광이다, 이렇게 보시면 너무나 피상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보시면 오늘날 우리도 사람들이 놀랄만한 일을 일으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면서 보통사람들이 잘 못하는 초인적인 금욕생활이나 신비적인 기적을 보임으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다, 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님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십자가란 기적이 아닙니다. 실패의 모습이고 힘없이 붙잡혀 죽은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저주받아 죽은 모습입니다. 이방인들이 볼 때는 유대 독립운동 하다가 로마에 의하여 처형된 실패한 혁명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이 십자가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를 아는 것이 성경을 바르게 알게 되는 첩경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는 그 천지만물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날 사람을 만드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천지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누가 도움을 주거나 보탬을 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신적 작정에 의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창조의 역사에 어떤 피조물도 동참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나 욥기에 보시면 인간이 무슨 항변을 할 때에 하나님의 대답이란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늘을 뺨으로 재어 보았느냐? 바닷물을 손으로 헤아려 보았느냐, 산들을 저울로 달아 보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란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시고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창조에 죄가 들어오게 되고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고자 하는 기도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아담이후의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무엇으로 드러나는가 하면 사람의 인위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범죄하고서 최초로 행한 행동이 하나님이 두려워서 숨는 것입니다. 몸을 숨길뿐만 아니라 몸을 가리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가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래의 영광, 하나님의 홀로 일하심의 영광을 우습게 여기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저마다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의 지위를 떠나서 스스로 창조자의 지위를 가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바벨탑으로 연결되어 지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고 자, 우리의 이름을 내자라는 것입니다.-세상의 모든 것들 정치 경제 도덕 교육.
그러므로 사람들이 열광하는 일이란 자기의 이름이 나는 것에 대하여 열광을 합니다. 자기의 이름이 영광을 받지 않는다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자기의 이름이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내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구절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하나님의 이름만이 구별되어 영광을 받는 것이 기도의 첫 번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보다 누구의 이름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나의 이름에 관심을 가지고 삽니다. 나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주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면 됩니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의 이름을 늘 염두에 두고 있으니 교회에서도 무슨 일을 하여도 사람들이 알아주는 방향으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흐름을 요한복음 1-10장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내가 어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행함의 능력을 가지고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을 한 사람들은 오히려 영생의 길을 알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요한복음 1-10장까지의 메시지는 너희는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상태입니까? 니고데모 같은 율법의 선생이라는 자도 거듭나지도 못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야 어떤 상태입니까? 38년 된 병자요, 날 때부터 소경된 자요,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돌 맞아 죽어 마땅한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동원시켜서 하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63절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육이 살리는데 무익하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현실인데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금 나사로의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시고 일부러 죽도록 기다렸다가 무덤에 장사하고서 냄새가 나는 때에 이들에게 찾아 가시는 것입니다(6절).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왜 죽였다가 살리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이라면 처음부터 병에 생기지도 않게 하여 크고 멋있는 일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될 텐데 병 주고 약주는 식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그 의미를 살피고자 합니다. 첫째는 모든 사람이 다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사로를 아플 때에 가서 치료하시지 않고 일부러 죽고 나서 가서 살리시는 것입니다. 아플 때에 가서 살리시면 무언가 가능성이 사람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죽어 버리면 허준도 못살려내는 것이기에 나사로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러 늦게 오시자 무어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러 늦게 오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모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내려면 언제 구하여야 됩니까? 물을 몇 잔 먹고 축 늘어졌을 때 구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힘이 전혀 손 쓸 수 없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지입니다.
숨이라도 붙어있어야 침을 놓든지 손을 쓰든지 할 텐데 이미 죽고 4일이나 되어서 무덤에서 썩어 냄새가 나는 정도로 된 상황 사람의 손이 전혀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 세상이 죄로 인하여 죽어 있는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죽음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택한 자를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 불러내시는 일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듯이 홀로 이루어 내시는 일이기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행함을 하나님의 영광에 섞어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데 은근히 자기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홀로 이루어 내신 그 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시는 방법으로 오늘 주의 백성들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셨다면 썩어서 냄새만 더 나는 인생이었습니다. 시체들끼리 모여서 무슨 윤리운동을 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남북이 통일이 되고, 어제까지 때려잡자 공산당, 무찌르자 괴로군, 그러다가 이제는 김정일 신드롬이 일어나는 이런 세대도 다 한 철 지나가는 시체의 냄새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살려내시는 일은 주님께서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체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부르신 것은 시체가 알아듣고 나온 것입니까? 그렇다면 시체가 아니지요. 주의 말씀의 능력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내시고 없는 것에서 만들어 내시는 그 창조의 능력이 살려 내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동일하게 불러내신 것입니다. 여기에 누가 잘나서 시체를 부르시는 소리에 응답하여 나온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은 이렇게 불러내신 그 사랑과 그 능력과 그 열심을 우리가 알아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냄새나는 시체들 사이에서 더 버티려고 하지 말고 다시는 죽는 일이 없는 냄새나는 일이 없는 그 나라와 그 의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살아나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른 소용이 없는 자들입니다. 눈을 뜨지 않은 자들에게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빛으로 비추어서 살려 낸 자들은 그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어두움의 일을 벗으라고 하는 것은 빛 가운데 들어 왔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는 이 주님의 일하심에 항복하여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1:17-32 부활과 생명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무엇이다, 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말씀, 생명, 빛, 선한 목자, 양의 문, 등의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이 자신이 부활과 생명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이 되신다는 이 말씀의 뜻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하여 부활과 생명의 능력을 지금부터 맛보며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 생명, 빛, 선한 목자, 양의 문, 이런 단어가 우리의 마음에 와 닿습니까? 아니면 공중에 붕 뜬 그런 느낌입니까? 이런 단어들이 현실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보다는 현실적인 것들이 더 잘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사는 모습입니다. 성도의 복이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금요일 저녁에 오신 분은 기억하십니까?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생명, 빛, 선한 목자, 양의 문, 하나님의 나라, 영생, 하나님의 영광, 의, 이런 단어들이 낯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동행이 없을수록 이런 단어들은 따분하고 졸음만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란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기에 저는 이 말씀을 여러분이 좋아하든지 아니 하든지 간에 증거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아들이는 능력이나 제 자신이 증거를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이 되시는 그 주님의 능력이 지금 이 시간에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약속을 하셨습니다. 두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이 ‘늘푸른’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장우 목사의 이름으로 모인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주님께서 이곳에 임하여 계시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임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 속에서 주님 자신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그 말씀을 받고서 그 말씀을 따라 주와 함께 동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의 배경이 어떠합니까?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살고 있는 가정에 나사로가 죽은 것입니다. 부모의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부모는 일찍 돌아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정에 가장이랄 수 있는 오빠가 죽은 것입니다. 얼마나 상심이 크겠습니까? 그것도 병이 들었을 때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지만 예수님은 일부러 이틀이나 더 지체하시고서 이제 죽은 지 4일이나 지나서 장사를 지냈고, 썩어 냄새나는 상태에 예수님이 이 가정에 오신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서 마중을 나옵니다. 나와서 하는 말이 21절에 보면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도 주님께서 무엇이라도 하나님께 간구하면 무엇을 들으실 줄 아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무어라고 합니까? 마지막 날 부활에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라고 합니다. 이러한 부활의 사상이 유대인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 바리새파는 부활을 믿는데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도하다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서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패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리새파 사람은 바울이 옳다 하고 사두개인은 바울이 틀렸다고 합니다. 부활의 중요성보다 자기들의 패를 더 생각하는 모습입니다만 유대인들 안에서도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으니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은 정치와 경제 등의 영역에서 특권 계층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마르다나 마리아는 부활을 믿기는 하는데 어떤 부활인가 하면 마지막 날에 다 부활하는 그런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이란 선지자들이 내다본 부활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하여 부활을 동시에 시키시는 한 때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에스겔 37:1-14절을 봅니다. “봉독” 마른 뼈는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이런 마른 뼈 같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살려 내셔서 고토로 돌아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것을 무덤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무덤에 살고 있기에 스스로 무덤을 나올 수 있는 자들은 없다, 라는 것입니다. 무덤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썩고 썩어서 마른 뼈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에스겔에게 보이면서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뼈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니 뼈들이 척척 제자리를 찾고서는 힘줄이 생기고 가죽이 덮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없습니까? 생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시 생기를 대언하라고 하자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바벨론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환상 중에 보니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고 썩고 나서 이제는 바짝 마른 뼈다귀만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은 메시아가 오면 현실적인 상황이 모두 회복된다고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그렇게 갈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죽음후의 부활도 내다본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죽은 자가 살아나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마르다는 이러한 부활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자기 오빠가 살아나리라는 것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부활을 믿지요. 죽음 후에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하는 것을 믿습니다.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악인은 심판의 부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한복음에서 그러한 부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의 관심은 죽은 자기 오빠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하지만 지금 죽은 자기 오빠로 인하여 울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없다면 오빠가 부모 같았을 테니까 이들의 슬픔이야 더한 것이지요.
그러니 평소에 예수님, 예수님 하고 다녀도 막상 자기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예수님보다도 자기 가족에게 모든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 그런 때에 예수님은 단지 자기 오빠를 죽지 않게 하여 주었으면 하는 그런 예수님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무어라고 하십니까?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죽어서도 산다는 것은 우리도 믿습니다.
그런데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이해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영생을 전하는 영생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과 생명이란 지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부활안에 생명 안에 있기에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11-13절을 봅니다. 나사로가 잔다고 하자 제자들은 자면 일어나겠지요, 그러자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잔다고 하는 것을 제자들이 못 알아듣자 제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죽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들이 보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29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을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이것을 무덤에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바라본 그 때란 바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한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온통 무덤인 것입니다. 마치 에스겔서에서 나오는 마른 뼈다귀들입니다. 이러한 무덤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사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1-33절입니다. “봉독”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형이 죽어 자식이 없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후사를 잇게 하여야 하는데 일곱 형제가 그렇게 하였다면 부활 후에 이 여인은 뉘 아내가 됩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다는 것입니다. 부활 후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이 천사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세상이 이미 죽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이 되어 있는 상태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에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불러내시는 자들의 대표와 모델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예로 드는 것입니다. 이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죽은 자는 이해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살아난 자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울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내가 부활과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잔다는 것입니다. 이미 부활과 생명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주어지는지는 요한복음에서 계속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을 보내심으로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믿고 나서 나중에 죽고서 부활하는 것만 부활이 아니라 지금 부활 안에, 생명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에 다시는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이 죽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헌옷을 벗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몸이 새 몸을 입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비록 썩어서 냄새가 나지만 그를 다시 살려내심으로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증거하시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0-58절을 봅니다. “봉독”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부활하리니 그때에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게 됩니다. 이러한 부활을 받는 자는 지금 예수를 믿는 자입니다. 지금 예수를 믿는 자가 부활안에, 생명 안에 있기에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이란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기 위함이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사망이 왕노릇 하고 있는 자를 부활과 생명이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4절의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는 이 말씀이 이사야 25:8절에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내심을 통하여 무엇을 증거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담대함이란 죽어도 산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담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에서의 원리는 나 죽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나, 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들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란 서바이벌 게임장입니다.
누가 살아남는가, 내가 살아남기 위하여 남을 죽여야만 하는 그런 장소입니다. 그러나 부활과 생명을 이미 받은 사람이라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죽음이란 목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자존심과 명예심 이런 것들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죄인이라도 주님의 용서를 받고 나니 사람들의 힐난과 수군거림이 상관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과 생명을 받은 자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시에 다 홀연히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활에 참여하고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부활과 생명 안에 있어야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붙어있는 자는 다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이 사망아래 있는 우리를 삼키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알고 믿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부활의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이 세상의 유혹을 이깁니다. 썩어질 것을 분별합니다.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목숨을 걸지 않는 것입니다. 손해보고 당하여도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순교를 당하여도 기쁘게 당하는 것이 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미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이 그 사람을 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동일하게 오늘 우리도 그러한 능력으로 붙들고 계시는 주님을 믿으신다면 이 세상을 죽은 세상으로 보시고 생명주심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성경 한곳만 봅니다.
사도행전 4:32-35절입니다. “봉독”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고서 자기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이 부활과 생명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풍성하여 지기를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11:28-39 예수님의 눈물
부활과 생명을 공짜로 받는 것이 좋습니까? 현금을 백만 원 공짜로 받는 것이 좋습니까? 제가 너무 유치한 질문을 하였지요? 그러나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기뻐하고, 슬퍼하고 사는가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원망을 하는가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예수를 믿는다고, 신앙 생활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과는 상관없이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 좌우되고 있는가를 보자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성도가 큰 손해를 보고서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목사에게 상담을 요청할 때 목사가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라고 하면 여러분이 무어라고 응답하시겠습니까? 아 그거는 그거고 지금 내 문제를 보라고, 억울하지 않느냐고 항변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예수님 입장 한번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고 따지는 것이 우리의 수준이 아닙니까?
제가 처음 전도사 때에 어떤 할머니가 예배당에 나왔습니다. 몇 달을 다니고 나서 학습문답을 위하여 교육을 하면서 목사님이 물으셨지요. 할머니,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 할머니의 대답이 ‘예수고 뭐고 내 몸이나 나았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할머니의 이야기가 너무 심하다고 싶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오늘 우리의 대부분이 예수를 믿으면 안 믿는 것 보다 무언가 세상에서 더 나은 것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분위기였습니다. 지금은 그래도 조금 나아진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노골적이지는 않아도 여전히 예수를 믿는 것이 현실적인 이익들과 현실적인 가치들을 결부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현실적인 것들을 말하지 않고 늘 영생과 내세와 생명과 그 나라와 그 의만 말하고 있습니까? 라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도 창조하시고 이 세상에서 잘사는 것도 하나님의 복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러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도 하나님이 햇빛과 비를 주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악인이나 선인이나 동일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택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이 땅의 썩어질 것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 주시는 것은 없습니까? 왜 없습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은 이방인이나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추구하는 방향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달려가는 방향은 언제나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산 소망이 아니라 썩어질 것, 더러워질 것, 쇠하여질 것을 ?아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보시고 주님께서 우시는 것입니다. 통분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말과 마리아의 말이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저의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텐데요, 라고 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마리아가 자기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울자 마리아를 따라 나선 유대인들까지 우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33절에 보시면 통분(痛憤)히 여기시고 민망(憫?)히 여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오늘날 우리의 뜻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을 보니 비통하게 여기시고, 안타깝게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눈물과 유대인들의 눈물을 보면서 나사로가 죽었으니 자기가 사랑하는 자가 죽었으니 슬퍼서 우는 것은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통분히 여기셨다는 것을 거꾸로 말하면 분통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시는 그런 눈물이라고 봅니다.
35절을 봅니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시고 나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켜본 유대인들이 무어라고 합니까? 보아라,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얼마나 사랑하였으면 저렇게 울까 하고서는 무어라고 합니까? 그렇게 사랑하였다면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수준이고 마르다, 마리아의 수준입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셨다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나사로를 사랑하였다면 왜 죽도록 내버려 두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단지 자기들에게 손해가 안 오는 정도의 사랑입니다. 병들지 않고, 슬프지 않고, 손해 보지 않았으면 하는 이런 모습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관점에서는 알 수가 없는 이들을 보시고 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는 죽음이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에 예수님 근처에 죽음이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 나사로 말고도 누가복음 7장에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장사지내러 가는 것을 보시고 아들을 살려내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은 자가 일어나고 말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5장에서는 죽은 소녀를 일으키십니다. ‘달리다굼’이지요.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시니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현재 부활과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죽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누가 예수님을 죽일 권세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허락하셔야만 죽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요한복음 10:18절에서 예수님은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이 우시는 것은 이렇게 사망의 권세에 붙들려서 살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우시는 것입니다. 부활과 생명이 곁에 계시는데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들이 나중에 주님의 부활의 영이 오셔야만 알게 됩니다만 그 이전에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여도 아직은 잘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셨다는 내용을 한곳 더 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9:41-44절입니다. “봉독”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우시는 것입니다. 평화의 소식을 모르고 숨겨져 있는 것을 인하여 우시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마태복음에서 한 번 더 봅니다. 마태복음 23:37-2절입니다. “봉독” 예루살렘을 향하여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눈물입니다. 이 세상의 택한 자라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사랑을 입고서 또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이들의 모습이 사망과 죽음의 권세아래에서 꼼짝을 못하고 있는 것을 통분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분통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이러한 주의 택한 백성들을 자기의 죽음으로 사내시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이 없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자들에게 생명의 줄을 연결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일을 모르고 예수 믿으면 뭘 주는데요,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이러한 모습 때문에 주님은 울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데 우리는 무어라고 합니까?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에게 해 주신 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오빠나 죽지 않게 못하시나요? 사랑하신다면서 우리에게 해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말라기 1:1-5절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하시자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그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포로로 잡혀 가게 하시고 지금도 열강들 속에서 기도 못 펴고 살게 하시면서 무엇을 사랑하신다는 겁니까? 이렇게 대어드는 것입니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날 위해 무엇을 해주었다고 잔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하는 말과 같지요? 낳고 기르고 먹이고 입히고 사람 되라고 그렇게 공부시켜왔는데 이놈들이 머리가 커지자 아버지 나에게 무얼 해주었다고 잔소리예요? 이러는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울지요. 통분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항의를 하자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조건으로야 장자이고 남자답고 활달한 에서가 나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고생을 합니까? 야곱이 죽을 고생을 합니다.
지금 주일 저녁에 야곱에 대하여 보지만 형에게서, 외삼촌이며 장인에게서 죽음의 위협과 죽을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에서는 어떻습니까? 고향에서 자기 사병이 400명이나 되는 것 같으면 그냥 목동들까지 합하면 얼마나 큰 거부입니까? 고생하였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나중에 짐승 떼를 선물로 준다고 하자 나도 넉넉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에서는 영영한 진노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개입을 하심으로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모르니까 주님을 원망하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서 무엇을 사랑하시는데요, 내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 하나 해주시지 않으면서 무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겁니까? 하는 이 백성들을 향하여 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우리로 하여금 죽을 것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는 걸음들을 달려가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이켜서 생명을 향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간섭이 우리에게는 싫은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대나무를 휘어잡으려면 잘 안되듯이 휘어잡았다가 놓아버리면 다시 원위치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나무를 사용하려는 사람이 대나무를 휘어지게 해서 사용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휘어가지고 휘어진 부분에 불로 좀 구우면 휘어진 채로 있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모습이 아닙니까? 그냥 내버려두면 대나무 원래의 성질대로 자라지만 하나님이 그를 택하시고 돌이키시려면 얼마나 우리를 불로 구우셔야만 돌아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풀무를 통과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는 스스로 돌아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사로를 불러내시듯이 우리를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불러내시듯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사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던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셨다면 편하였을 것입니다. 흘러 떠내려가는 것이야 쉽습니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어렵고 힘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상 어렵고 힘 드는 일을 싫어합니다. 더더구나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이란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런 우리가 주님께서 불러내시니 부름 받아 나온 것입니다. 시체가 순종하여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시듯이 그 창조의 능력으로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동일하게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던 우리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결코 놓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이 예수님을 알아가기 보다는 우리 오빠, 우리 남편, 우리 가정, 우리 교회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알아감으로 오는 감사와 감격과 기쁨은 사라지고 그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테니 하는 그런 가난한 신앙생활을 이제는 청산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이러한 우리를 보시고 울고 계시지 않으실까요? 지금 생명과 부활로 계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기 오빠 때문에 울고, 우는 그들을 보고서 울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란 예수님이 이들을 사랑하였다면 죽지 않게 하시면 되었을 텐데 소경을 눈뜨게 한 자가 나사로를 고치지 못하였는가 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늘 우리를 보고서 울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교회를 보면서 울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저는 울고 계신다고 봅니다.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로마서 8:26절에 보시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탄식하시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울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그 영광의 세계를 알까, 언제 썩어지지 아니할 것을 준비하며 살까, 언제 부활과 생명의 능력 안에서 살까, 하는 주님의 탄식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을 몰라보고서 무엇으로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까? 하고서 대어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눈을 열어주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를 제대로 알아감으로 세상의 것들이 결코 빼앗아 갈수 없는 그 사랑을 맛보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고집과 썩어질 것을 향하여 달려가는 우리를 위하여 오늘도 탄식하며 울고 계시는 주님의 눈물을 기억하시고 이제는 주님께로 돌이키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11:38-44 나사로야 나오너라
창세기 1장 1절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믿어지십니까? 아무리 믿으려고 하여도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무슨 말을 하여도 믿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무엇으로 창조하신 것입니까?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2-5절을 봅니다. “봉독”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가득하였는데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이미 삼위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의 능력이 창조를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절을 봅니다. “봉독” 창세기 1장의 창조를 더 상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말씀으로 지은바 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빛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왜 못 알아봅니까?
이사야 식으로 말하면 소경이고 귀머거리입니다. 그러니 빛을 볼 수도 말씀을 들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창조전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만이 사람들에게 가득한 것입니다. 이미 죄와 사망의 권세가 사람들을 혼돈스럽게 하였고 공허하게 하였고 캄캄함 아래 갇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진, 선, 미라는 것이 결국 혼돈과 캄캄함이라는 것입니다. 썩어서 냄새나는 것들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임을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증거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선생이란 자가 거듭나지도 못한 자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무슨 수로 물에 들어갑니까? 무슨 힘으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갑니까?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어떻게 눈을 뜰 수 있습니까?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어떻게 살아납니까?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예수님이 무엇을 증거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어떤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와 사망 안에 있기에 스스로는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불가능함을 보이시기 위하여 동원된 자들이 요한복음의 등장인물들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은 오히려 눈이 멀어지고 귀가 막아지는 일이 동전의 양면처럼 예수님의 사역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부활과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시고 예수님 자신이 친히 살려 내셔야만 살아나는 것임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난 것입니까? 우리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믿어주어서 살아난 것입니까? 아니요,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어서 마른 뼈들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죽어서 냄새를 피우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온갖 썩어질 것들, 없어질 것들을 좋아라고 쫓아다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생명과 부활에는 아예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직 나의 욕심과 쾌락을 쫓아 달려 간 것입니다.
욕심과 쾌락을 말하니 나는 그렇지 않고 고상하다고 말씀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예수님 없는 이 세상의 고상함이란 전부 냄새나는 것입니다. 악취를 풍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멀고 귀가 멀고 후각도 마비가 되어서 썩어지는 냄새를 맡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스스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살려 내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39절입니다. ‘돌문을 옮겨 놓아라.’ 마르다의 대답. ‘이미 죽은 지 나흘에 되어 냄새가 납니다.’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바위굴에 넣으니 냄새가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세입니까? 아니 지금 죽어 냄새나는 자를 어떻게 하시려고 바위를 옮기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네게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시니 바위를 옮겨놓습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이 무엇을 하십니까? 기도하십니다.
41, 42절입니다.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기도하면서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말을 들이심을 감사합니다. 항상 내말을 들으시는 줄은 압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이유는 복도 있는 저들이 믿게 하려고 하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기도하시지 않아도 이미 하나님과 하나 되어 있기에 그냥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여도 그 창조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것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이들이 우스개 소리로 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셨을까 하고 말합디다. 만약에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지 않고 그냥 나오너라 하셨다면 시체가 다 살아나올 것이기에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였다고 합디다. 우스개 소리로 하였지만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니 몸에 붕대를 감은채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풀어서 다니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도 죽으면 부활한다는 것, 물론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지난주에 보았듯이 지금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를 살리신 것도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신 이러한 창조의 능력으로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시고 말씀이 임하여 우리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무덤에 누워 있었던 자들입니다. 세상의 풍습을 좇아 살았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죽은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살아 나온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내가 반응을 보여서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시체에게 아무리 소리 지른다고 살아납니까? 불로 태운다고 뜨겁다고 합니까? 손을 자른다고 아프다고 합니까? 그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감각이 없이 살아온 저희들인데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는 것처럼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오너라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각자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말에 자기 이름을 넣어서 한번 말해 봅시다. 누구야 나오너라. 이 말을 듣고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 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어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셔서 살리시니 주님의 음성을 이제는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났으니 이렇게 예배도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살아나지 않은 자가 어떻게 듣고서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불러 내셔서 무엇을 하시려고 불러내신 것입니까? 다시 죽음의 생활을 하라고 불러내신 것입니까? 다시 썩어질 것을 향하여 달려가라고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까?
요한복음 12:2절입니다. 나사로가 그냥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9-11절을 봅니다. 예수님을 보러 왔지만 예수님만이 아니라 나사로도 보려고 온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증인인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나사로 까닭에 유대교를 떠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허물과 죄로 죽어서 썩어 냄새는 것들을 좋아라고 살던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살아났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세상을 떠나서 예수를 믿어야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썩어질 것에서 구원하여 내신 것은 영생을 위하여 살라고,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럽지 아니하는 나라가 있기에 그 나라를 준비하며 살라고 우리를 불러내셨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몇 년을 살아 왔습니까?
그런데 나를 보고서 너는 이상하다, 왜 이렇게 좋은 것을 시시하게 여기고 돈 안 되는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니 이런 의문을 가지고 우리에게 물어온 사람이 과연 몇 명이 됩니까? 우리를 보고서 우리가 가진 소망에 대하여 물어오는 자들이 얼마나 됩니까? 나사로 까닭에 유대교를 떠나듯이 나 때문에 세상을 떠나려고 마음이라도 먹어본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아니 살리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잖아요, 하고서 핑계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보일 수 있는 통로는 예수님 때문에 살아 난 자들을 보고서 예수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몇 년을 더 살다 죽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죽기까지 어떻게 살았다고 생각이 됩니까? 한번 천국의 맛을 보고 온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어서 빨리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천국을 보고 왔습니다. 그러자 빨리 죽어서 가고 싶다, 그러나 가지 못하는 것은 너희를 위함이라고, 사명 때문에 가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미 살아난 자는 그 주님의 영광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과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전혀 낙심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고서 사는 것입니다. 죽도록 고생하면서도 내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 하고 사는 것입니다.
왜 이럴까요? 살아났으니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나사로처럼 바울처럼 살아 난 사람이라면 무언가 다른 삶이 나타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나타나지 않고 있는 우리가 비정상입니다. 왜 영원을 준비하지 않고 있습니까? 왜 아직 썩어질 것들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있습니까? 왜 세상 것들에 대하여 그렇게도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조사를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이 방학하면서 성적표를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항목들이 있는 것처럼 여러분의 인생의 성적표를 한 번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신앙생활을 점검하는 성적표를 한번 스스로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기준입니다. 얼마나 말씀을 순종하였는가? 얼마나 기도하였는가? 얼마나 희생하였는가? 얼마나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겼는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였는가? 항목을 만들어서 체크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안하실 것 같으니까 지금 당장 시도해 봅시다. 나는 살려낸 후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점검표는 베드로전후서입니다. 중고등부 수련회 말씀을 준비하다가 우리의 살아난 이후의 삶이 어떠한지를 점검하는 좋은 기준이라서 지금 적용을 합니다. 성경에 밑줄을 그으시든지 연필 없으시면 접어두시든지 표시를 해두시고 나중에 한 번 더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1:3-4절. “봉독” 썩어지고 더렵혀지고 쇠하는 죽음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살려 내신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전서 1:13-17절 “봉독” 그러므로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에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고서 예수님 재림하실 때 가지고 오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살고 있습니까? 체크하시기 바랍니다. 이전에 알지 못하고 좇던 사욕을 위하여 살지 말고 순종의 자녀처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라.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려움으로 지내라. 지금 우리는 나그네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임하실 날을 바라보며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주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지내라.
베드로전서 1:18-25절을 또 봅니다. 우리가 구속된 것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서 죽음의 자리에서 살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살리심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입니까? 땅입니까?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십니까? 피차 뜨겁게 사랑하십니까? 말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십니까?
베드로전서 2:1-3절을 봅니다. 이렇게 하십니까? 베드로전서 2:11-12절입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있습니까? 나의 선한 행실로 인하여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주를 사랑하는 행실로 인하여 나의 남편에게서 나의 아내에게서 나의 자녀에게서 당신은, 아빠는, 엄마는 정말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입니다, 하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까?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계십니까?
베드로전서 3:8-12절입니다. 이렇게 하십니까? 베드로전서 2:20-22절입니다. 주님을 안다고 하면서 또다시 더러움에 얽매이게 되면 알지 못한 것이 더 나았다는 것입니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다시 들어가는 일을 우리가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성적을 확인합니다. 이런 말씀에 몇 점을 받았습니까? 합격점이 60점이라면 몇 점이 됩니까? 이렇게 점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좌절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고, 그러면 어찌할꼬, 회개라도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낙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그 능력이 이렇게 살라고 하시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면서까지 이런 사람으로 만드시고야 마시는 것입니까? 내가 순종을 안 하여도 영생을 준비하며 사는 사람으로 만드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3절입니다. “봉독” 고난을 통하여서라도 세상을 좇지 않게 하실 것이니 걱정을 마시기 바랍니다. 매를 때려서라도 주님을 향하는 것이 생명이기에 우리의 복이기에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5-57 진리와 현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죽어서 나흘이나 지나서 냄새가 나는 사람이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 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런 소리 말고 나의 절실한 필요를 채워 주라고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교육의 7단계를, 교사를 위하여 강의한다는 어느 분의 강의를 주보 복사하러 가면서 잠시 들었습니다. 아이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잘 알아서 낚시에 미끼를 걸듯이 아이들의 잠재적이고 영적인 필요를 채워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죽어 있는 자에게는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름 어린이 성경학교를 하는데 성경공부 시간에는 엉뚱한 짓 하다가도 간식시간에는 눈이 초롱초롱 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는 늦을지라도 수영장 가는 시간에는 미리 미리 나와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비단 어린 아이의 모습만일까요?
그러면 오늘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무엇입니까? 이 더운 날씨에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시원한 피서지가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는 피서를 가든지 휴가를 가든지 영적인 일에 민감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설교를 준비하면서 박영선 목사님의 강해집을 보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죄인이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더럽히고 있는지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인간 외의 모든 피조물은 자연을 더럽히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짐승들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조화를 이루기에 짐승의 배설물도 적절하게 처리되는 것이기에 자연이 더러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가지 않았을 곳이라고 생각하고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는데 그 골짜기에 라면봉지가 있다면 갑자기 어떤 생각이 납니까? 그곳에서 잠시도 있고 싶은 생각이 없어집니다. 그것뿐입니까? 온갖 페트병이라든지 사람의 배설물이 있는 곳들을 보면 휴가가 아니라 짜증이 납니다. 책의 내용을 그대로 몇 절 옮깁니다.
“인간은 모든 부패와 오염의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최대의 공해가 누구입니까? 인간입니다. 소를 사람만큼 먹여보십시오. 하루 세 끼씩 먹이면 코끼리만큼 커질 것입니다. 인간만큼 많이 먹을까요? 인간만큼 쓸데없는 소리를 할까요? 인간만큼 쓸데없이 살이 찔까요? 인간이 죄악 덩어리이며 어떻게 더럽게 살아 왔으며 하나님의 손길에 대하여 무감각한가를 이루 필설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이 내용이 기분 나쁘십니까? 그러면 이 분에게 가서 따지시기 바랍니다. 물론 인용한 저도 책임은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내용보다 사실은 더한 것이 우리의 상황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도대체 진리를 찾으려고 하겠습니까? 진리 그러면 진리가 밥 먹여주나 하고 덤비는 것이 이 세상이며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가 오늘 진리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것이 나사로가 살아나온 기적보다 하나도 못하지 않는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과 손에 잡을 수 있는 것들만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기가 달려가는 그 가속도로 인하여 이제는 스스로 멈출 수도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람들에게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소귀에 경읽기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러한 말씀이 귀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요즈음 새벽기도회에 잠언서를 마치고 전도서를 보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전도서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한번쯤은 누려 보았으면 하는 모든 것들을 다 누려 보았다고 합니다. 부귀, 영화, 권세, 거기다가 지혜에까지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 올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술과 여자와 취미생활까지 안 해본 것이 없이 다 누려 보았으나 그러니 이 모든 일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마땅한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성경에서 세상의 그러한 일이 헛되고 헛되면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는 그러한 것을 좇아 살아간다는 것이 참을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그러한 세상에서 건짐을 받아 진리를 말하는 자리로 나아오게 된 이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면 놀라운 은혜인지를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봅시다.
45절입니다. 예수의 하신 일을 보고 많은 유대인들이 믿었으나 그러나 그중에 어떤 자가 바리새인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서 믿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고발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하여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나의 형제에게 나사로를 보내서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자 이미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죽은 자가 살아서 가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일을 보고서 믿는 자가 있는가 하면 고발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다가오면 진리를 향하여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경우와 진리를 배척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에 분리를 일으키러 온 것입니다. 진리의 자녀와 비진리의 자녀를 나누는 것입니다 편가르기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서로서로 하나가 되자고 그렇게 말합니다. 종교 간에도 하나가 되고 나라 사이에도 하나가 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비진리는 섞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악과 선이 함께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혼돈의 세상에 참된 진리가 오자 세상이 두 쪽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와 예수님을 고발하고 죽이는 자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47-48절을 봅니다. “봉독”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의논합니다. 예수님이 잘못한 게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모의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보이니 저를 가만히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따라갈 텐데 그러면 민심이 그곳으로 옮겨 가면 데모가 일어난 것으로 알고 로마 군대가 들어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다 빼앗아 가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이라는 말을 다른 사본에서는 성전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 이들의 말하는 의도는 성전을 위하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의 민족을 염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하나님께 대하여도 충성되고 나라에 대하여도 충성되게 보이는 것입니다.
공의회로 모인 자리에서 이러한 대세의 흐름을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정신이고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별 다른 의견이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요 민족을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당장 정죄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배척하게 하는 사람들의 현실관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됨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말들이 얼마나 엉터리 같은 말입니까? 만군의 여호와를 섬긴다는 자들이 로마군대가 겁이 나서 벌벌 떨뿐만 아니라 로마가 주는 그들의 기득권의 단 맛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한 사람을 죽여서 많은 사람을 살리자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49-50절입니다. “봉독” 아마 의회에서 여러 의견들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결론을 내립니다.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유대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로 생각지 아니하느냐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진리관입니다. 진리냐 비진리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다수의 이익과 직결되는가 하는 것이 이들의 진리관입니다. 이것이 또한 민주주의의 원리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의회를 모았다는 것은 일종의 의회입니다. 이들이 정치적인 처결권은 식민지이기에 로마에게 있지만 로마가 점령국들에게 종교나 문화는 관대한 편이어서 그들의 종교나 문화는 그대로 인정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대교의 종교적인 문제들은 자기들의 의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회에서 내린 최종결론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죽어서 유대민족을 살리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이 그 해 대제사장이 되어서 하게 된 것이지만 그러나 이 말을 하게 된 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권세를 가지고 아무리 큰 소리 치더라도 모든 것이 주님의 주권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51-52절을 봅니다. “봉독” 이 말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죽이려는 대제사장의 입을 빌려서 하나님은 자신의 하실 일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진리관은 다수의 이익을 위하여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났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모습입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그 체제를 수호하기 위하여 진리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그렇게 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이 그들에 의하여 방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의 정치적이고 외형적인 원인은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대신하여 죽는 것이 났다는 지극히 실리적인 이유, 현실적인 이익을 계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날부터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공의회에서 공식적인 제거 음모를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대제사장의 입을 빌어서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민족이 망하는 것 보다 났다는 이 말을 하고서부터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57절에서 보면 예수님을 잡아들이라고 수배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러한 결정들까지도 자기의 뜻을 이루어 내시는 일에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하가 이미 주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잠시 있다가 없어지고 변동될 것들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일학교에, 학생회에 성경학교와 수련회를 통하여 증거 하려고 하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전달하려는 우리가 얼마나 진리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기준에 서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의 기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진리입니까?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가상현실 같은 이 세상입니까? 말씀 몇 곳만 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4:16-17절. “봉독”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속죄를 이루사 부활승천 하시어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진리의 성령은 세상이 받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자만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6:13절. “봉독”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어디로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받고 있습니까? 세상의 썩어질 구습을 좇는 일을 버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생명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고 계십니까?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장래의 일에 대하여 믿고 계시는 것입니까?
베드로후서의 말씀처럼 이 세상이 경건치 못한 자들을 불사르기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떠한 자가 되어야 마땅합니까?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안전지대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30년 동안이나 한번의 사고도 없었던 콩코드 비행기, 그래서 프랑스에서 미국을 왕복하려면 비행기삯만 1,000만원이나 하는, 그런 비행기도 추락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한 구절 더 봅니다.
요한복음 18:33-38절을 봅니다. “봉독” 빌라도의 질문, 예수님의 대답. 진리에 속한 자는 내 말을 듣느니라.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바로 앞에 진리를 두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자신의 왕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민중들의 항의에 예수님을, 진리를 내어 주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의 아우성이 없습니까? 나의 욕망을 위한 아우성에 예수님을 내어 주시는 않습니까?
요한복음 12:1-8 예수님의 죽으심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겉모습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사는 모든 원리가 위선과 체면으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위선과 체면이 가득하다 보니 의례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원리가 이러한 줄 알고 우리도 그렇게 동의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간에 겉이 번지러한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도 어디로 치우치는가 하면 외형적인대로 치우치는 것입니다. 우선 눈에 나타나는 실적들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예수 믿고서 어떤 복을 받았더라고 하는 말과 간증들 속에서 대부분이 이 세상에서 잘 된 것을 가지고 그 결과를 평가 하더라는 것입니다. 신앙간증이란 것들을 들어보면 한마디로 고진감래라는 말을 듣는 기분입니다. 어렵고 힘든 때를 극복하니 하나님이 이렇게 좋은 삶을 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장 큰 간증은 순교입니다. 주를 위하여 열심히 살았는데 그 결과가 힘없이 죽었더라, 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증이 나오지 않는 것을 우리는 이상하게 여겨야 합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냥 돌 맞아 죽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어떻습니까? 거지인 채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한데도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죽음을 말하고, 죽음을 기뻐하고,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당기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니 죽음을 기뻐하고 죽음을 당기고 싶어 하다니 무슨 말입니까, 하고 싶으시겠지만 오늘 말씀을 보시면 왜 이것이 중요한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2:1절에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이르십니다. 베다니라는 마을은 바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마을입니다. 그리고 유월절 엿새전이란 예수님이 이제 잡히시고 죽으실 유월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동네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 잔치집이 시몬이라는 집에서 열었습니다. 나사로의 집이 좁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베다니 마을 시몬의 집에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같은 본문을 다른 복음서에서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6:6-13절입니다. “봉독”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마가복음 14:3-9절입니다. “봉독” 거의 같음.
누가복음 7:36-50절입니다. “봉독”
향유를 붓는 것은 같은데 그 내용이 다르기에 같은 사건으로 보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그러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는 것은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나의 장사를 준비한다는 말씀과 이 내용이 복음이 전하여지는 곳에 함께 전하라는 것과 죄사함이 많기에 많이 사랑한다는 말씀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사함이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만 해결되는 문제이니 이 말씀도 주님께서 죄사함을 선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직접적인 죽음을 언급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죽음을 근거로 죄사함을 선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이라면 이 본문의 말씀도 같은 사건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을 빼더라도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서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성인의 일당이니 하루에 5만원을 받는 사람이라면 천오백 만원이나 나가는 귀한 향유입니다. 그런데 이 향유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두 사람의 태도와 예수님의 평가를 보게 됩니다.
먼저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서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습니다. 그러자 향유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 차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1:15절에 보면 여자의 긴 머리는 여자에게 영광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자에게 가장 큰 수치는 머리털을 밀어 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영광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광이란 예수님의 발아래입니다.
이것을 누가 제대로 압니까? 마리아가 제대로 안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았기에 예수님의 발에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기는 것이겠습니까? 유대인의 인사란 입맞춤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때 입맞춤을 사인으로 하여 넘기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 마리아는 물론 여자가 남자에게 입맞춤으로 인사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가장 영광스럽다는 그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발에 향유를 붓는데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머리에 붓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머리에도 붓고 발에도 부은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집에 귀한 손님이 오면 종들이 물로 그 손님의 발을 씻기고 향유를 조금 뿌려서 향기를 나게 한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한 죄 많은 여인이 향유를 붓는 장면에서 예수님이 시몬을 책망합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서 그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니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가 선지자라면 저 여인이 누구인지를 모르는가, 왜 만지도록 그냥 버려두느냐는 것입니다. 부정한 자가 만지면 부정하게 되는 것이 율법의 정결법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속으로 그렇게 하였겠지요.
그러자 예수님이 그 속마음을 아시고 비유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시몬을 부르시고서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가 동시에 탕감을 받았다면 누가 더 탕감하여 준 자를 사랑하겠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자 시몬이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판단이 옳도다, 하시면서 시몬이 비판한 한 여인과 비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첫째는 너는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나의 발을 씻어 주었다. 둘째는 너는 입 맞추지도 아니하였지만 이 여자는 들어올 때부터 내발에 입 맞추기를 멈추지 아니하였다. 입맞춤으로 손님을 접대하지 않은 것은 천대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지만 이 여인은 향유를 부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많이 사함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서 그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이 얼마나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입었다면 그렇게 하겠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향유사건은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하는 예언이 된 것입니다. 유월절 엿새전이기에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예수님이 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사건을 예언하는 것이 되는 것이 이 향유를 붓는 것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후 그 때로부터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실 일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됩니다, 하면서 예수님을 말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어라고 하십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만이 자기의 택한 자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시면 안 된다고 말리는 것이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사건 앞에서 예수님이 계셨더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텐데, 라고 마르다와 같은 반응을 보였지만 오빠가 살아나고 나서 그랬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었다는 것이 누가복음 10:38-42절입니다. “봉독” 마르다는 예수님 대접하기에 분주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마리아도 나를 도와주라고 하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이 너는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분주하다마는 그러나 한 가지만으로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대접하는 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일이 우선이 아닙니다. 우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목사를 대접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심방을 하면-잘 안하지만-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시는 것이 참된 대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잘 들었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제자들도 몰랐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관심-지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지리산에서 여러 교회가 연합으로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약 40여명 모였는데 부산에서 울산에서 경기도에서 대구에서 수원에서도 왔습니다. 그런데 한 자매가 혼자인 것 같아서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니 수원에서 혼자 왔다는 것입니다. 경희대 4학년이라는데 2년 전에 자기 교회 전도사님으로부터 복음을 듣고서 그때는 많이 다투기도 하였다는데, 가고 나서 복음에 눈이 뜨이게 되고 그래서 이번 수련회를 인터넷을 통하여 알게 되어 혼자 참여하였다는 것입니다.
수원에서 기차를 타고 진주 와서 다시 지리산으로 그것도 남자도 아니고 여학생이 혼자서 왔더라는 것입니다. 경비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렇게 오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어느 정도로 바쁜 일들을 제쳐둡니까? 마리아가 주님 발 앞에 가만히 있었던 것이 더 좋은 것을 택하였기에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된 것이 다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며,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한 사건이기에 그들은 한 도구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도구 중에서 가야바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원수로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어 자기의 민족을 살린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였다고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입니다. 그 처참한 죽으심이 바로 우리의 죽음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 죽음이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임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모르면 신앙이라는 것이 이 세상의 겉모습을 추구하다가 한평생을 보내는 것입니다. 마치 가룟 유다가 아이고, 저 아까운 것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지 하는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가룟 유다가 돈 주머니를 맡아서 관리를 하다보니 그 돈을 때때로 훔쳐내는 도적이기에 그렇게 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제대로 이해 못하게 되면 우리의 어떤 행위로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00 데나리온이라면 가난한 자를 얼마나 많이 도와줄 수가 있는데, 하는 태도입니다. 돈으로 힘으로 무슨 선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12:8절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도아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이 여자가 좋은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의 장사를 예비하였기에 복음이 전하여 지는 곳 마다 이 여인의 행한 일도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의 행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기 전에는 세상의 것으로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마치 가룟 유다와 같은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의 이유를 잘 모르면 가룟 유다처럼 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쓰고 힘을 모아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자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 이런 기대로 다녔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런 기미가 없으니 팔아넘긴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이렇게 팔아넘긴 것은 죽음에 임박하면 예수님이 어떤 초능력을 발휘하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를 가졌을 것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음을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몰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죽지 않고 무슨 천지개벽을 일으키시면 나 여기에 있다고 나갈 생각을 가지고 따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의 예수님을 따르는 평소의 모습을 보면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일하셨습니까? 그의 죽으심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이 모든 일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에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다 드러내시고 인간의 모습이 십자가에서 버림 받는 그 모습이어야 하고, 그리고 그 진노와 저주를 다 담당하시고 자기의 백성들을 대속하심이 그의 죽으심입니다. 그리고 그의 부활도 그의 죽으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예수님의 죽으심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죽는 것이 실패인줄 알고 있습니다. 성공하지 못하면 저주받은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세상이던 교회이던 무언가 시작하였다면 초능력을 발휘하든,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동원하든지, 귀신의 힘을 빌리든지 간에 성공하고 출세하고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별세를 말하면서 역시나 관심은 우리의 교회이고 우리의 나라이고 내가 속하여 있는 나의 소유를 붙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에 동원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사람들의 능력과 실력과 힘을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일을 멋있게 이루어 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29절에서 그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이 그의 피가 속죄를 이루사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게 된 바울 사도가 무어라고 하는지 몇 곳만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6:3-4절입니다. “봉독”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마리아가 단지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발에 입맞춤으로 그의 죽으심에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져야 함께 살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새 생명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하여 살기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 대하여는 죽기 위하여 믿는 길입니다.
빌립보서 3:7-9절입니다. “봉독”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지혜가, 자기의 능력이, 자기의 권세가 해롭다는 것입니다.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신앙에 방해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가장 귀하다는 것입니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서 난 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착하여도 아무리 좋은 것을 만들어 낸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제대로 알아가는 것이 신앙의 자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어떤 고백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6:14절입니다. “봉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의 죽으심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옛날의 경력도 아니요 자기의 헌신과 충성과 봉사도 아니요 자기를 살리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그의 죽으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의 부활에 참여하는 참으로 복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2:12-16 예루살렘 입성
오늘날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도대체가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고 다들 한마디씩 할 것입니다. 금요일 저녁에 시내 공원에 나가보니 무슨 공연을 하고 있어서 잠시 보았습니다. 공연 내용이 통일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학생과 노동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어린이까지 나와서 하는 내용들이 보안법 철폐, 미군 물러가라를 공공연하게 외치고 미군의 범죄행위를 사진으로 공개하고 어린이들은 반갑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아마 나이 드신 분들이 이런 장면을 보았다면 특히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되어 있는 분이라면 기절초풍할 일들이 지금 마구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할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는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미군이 물러가고 통일이 되면 좋은 세상이 올 것 같습니까? 통일이 되면 무엇을 하고 싶느냐고 반갑습니다, 라는 노래를 부르고 난 어린이들에게 누가 질문을 하니 물론 준비된 대답이겠지만 어떤 어린이는 두만강에 수영하고 싶다고 하고 어떤 여자 아이는 신혼여행을 백두산으로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게 통일되면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어떨까요? 이들의 원하는바와 다를 바가 있을까요?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좀더 노골적이고 좀더 위장된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지 인간의 죄성이란 결코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미군이 우리나라에서 범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군인들이 월남전에서 비록 미군의 용병으로 갔지만 범죄를 한 것입니다.
우리가 미군처럼 힘이 있는 나라라면 미군 못지않게 학대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한민족이고 이산가족들도 있지만 그러나 정말 통일을 논하려면 남한 사람 전체가 지금의 생활수준을 절반으로 낮출 각오를 하고 자기의 재산을 절반을 내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본을 가진 자가 자본이 없는 자를 다시 노예화 하는 것입니다. 형제라도 가난하면 외면하는 것인데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잠언 19: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 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만약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로 인하여 장미빛 미래를 꿈꾼다면 아직도 죄의 심각성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자질구레한 것들입니다. 너무 기대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은 헛될 뿐입니다. 해 아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생각해 볼 때는 대단한 사람처럼 여겨져도 그러나 휴가를 가도 될 정도로 별 볼일 없는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휴가를 가더라고 세상 돌아가는 것은 그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시간이라도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봅시다. 참으로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님의 일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일하심을 온 세상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다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신이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는 그 어둠의 장막을 뚫고서 복음의 빛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눈을 뜨고 보니 이 세상의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정도가 아니라 그러한 것만을 추구하는 삶이 죄임을 알고 오, 주님 이 악한 세상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말이 호산나입니다. 호산나는 지금 우리가 죽게 되었으니 나를 구하여 주소서 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헛된 세상에서, 죄 된 세상에서 무엇을 쌓으시렵니까?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허상 그리고 죽음뿐임을 알지 못하고 달려가는 사람들이 불쌍해 보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하여 사는 사람으로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모습에서 생존을 위하여 허덕이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생명을 위하여 사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가정이던 직장이던 어디서든 생명의 가치를 알고 사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이미 생명을 맛보고 생명 안에 산다면 틀림없이 생존을 위하여 사는 사람과 다른 시원함이 나타날 것입니다. 넉넉함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생각하여봅시다. 예수님이 자신이 메시아임을 제자들에게 비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자신이 예루살렘 성으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입성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공개적으로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의 활동은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으며 또한 그 일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예루살렘 입성에 대하여 어떻게 예언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신다는 말씀은 다음에 보기로 하고 우선 예루살렘 입성에 대하여 선지자들의 예언과 그 성취를 보고자 합니다.
16절 말씀을 보시면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신 예루살렘입성의 의미를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다가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된 책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얼마나 놀랍게 예언되었고 성취되었는가를 추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에녹을 볼 때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리운 내용을 말씀드리면서 므두셀라를 낳을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말씀을 유다서를 통하여 확인을 하였습니다. 그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이었음을 므두셀라 죽던 해 곧 노아 600세 되던 해이었음을 성경의 인물들 나이를 조사해보니 꼭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예루살렘 입성은 어떻게 예언되어 있는가를 봅니다.
다니엘서 9:24절을 봅니다. “봉독”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이 예언의 배경은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곳에서 포로기간이 70년 동안 되리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읽고 기도합니다.
자기 백성들의 죄를 회개하면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어 장차 될 일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 계시는 일차적으로 70년이 차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성과 성전이 다시 중건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을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포로에서 귀환 후에 바로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는 일 즉 메시아가 나타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그러한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고레스를 기름 부어 자기의 도구로 삼았습니다만 그러나 그는 영원한 의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의를 가지고 오시는 메시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이 분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셔서 메시아직을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70이레에 대하여 조금 더 살펴봅시다. 이레란 7을 말하지요 그러므로 칠이 70이란 것을 490년을 말합니다. 포로기간이 70년인데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데 70이레가 차면 백성들의 죄를 사하고 메시아가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70 이레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곳이 다니엘서 9:25절입니다. “봉독” 7이레와 62이레로 구분합니다. 그러면 69이레가 되는데 69이레면 490년이 아니라 483년이 됩니다. 7년이라는 단위가 빠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계산은 희년을 계산하는 것을 보아도 이해가 됩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 그렇게 되는데 7안식년을 지나면 49년이 됩니다. 그런데 희년은 50년째를 희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7이레 또는 69이레의 기점을 어디에서 잡는가 하는 것을 성경에서 보면 느헤미야 2:1-9절에 보면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도록 허락이 됩니다. 이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이 역사적으로 몇 년인가를 성경학자들이 아니라 고고학자들이 발견하였는데 약 10년의 차이가 나지만 기원전 455년과 445년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33년으로 보면 아닥사스다 왕 20년이 455년이라면 기원후 28년이 되고 445년이라면 기원후 38년이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33세를 기준하면 위 아래로 5년 차이가 납니다. 그러면 고고학자들이 맞겠습니까? 성경이 맞겠습니까? 성경이 맞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은 성경의 날짜를 계산하여 무엇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시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7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잠시 더 보고자 합니다. 매 7일은 안식일입니다. 매 7년은 안식년입니다. 안식년 곱하기 안식년은 49년입니다. 49년이 안식년이 되고 그 다음해가 희년입니다. 이러한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메시지가 됩니까? 사람의 생명이란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일하지 않음으로 메시지를 만든 것입니다.
한편의 설교입니다. 안식일, 안식년의 쉼이 그러합니다. 하루를 쉬면서 안식년, 일년을 농사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손길을 배제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국이 희년입니다. 희년은 모든 빚진 자가 탕감을 받고 땅을 팔았으면 자기 소유로 돌아오고 종으로 팔렸더라도 자유를 얻는 엄청난 해방과 자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해가 됩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제대로 지킨다고 하여도 비록 문자적이긴 하지만 안식년을 제대로 지켰다거나 희년을 제대로 지켰다는 것은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안식이 없는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안식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이 안식이며 구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안식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토하여 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안식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양보 없이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레위기 26:43-44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법을 싫어하는 그들을 ?아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은 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고서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의 구체적인 실현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역대하 36:20-21절입니다. “봉독”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였다는 것입니다. 70년 동안 사람이 없기에 연속 안식년을 누리는 것입니다. 7년마다 안식년을 누리는데 매년 안식년을 누리니 무려 490년 동안의 지켜야 할 안식년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이를 보면 결국 그 목표점이 안식을 주시는 희년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70년 만에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사건과 예수님이 70이레에 오신다는 것은 다 자기 백성의 안식을 주러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입성을 구약이 예언한 것이며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하시면서 그 예언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의 기능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의 일을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하신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제자들이 언제 깨닫게 되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승천 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역사관이나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에 마음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관심이 주님의 움직이심에 그분의 뜻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를 세상에서 구출하셔서 당신의 나라에 들여 놓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해방을 주시고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로 가신 것입니다. 이제는 종말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이 바로 종말에 일어날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에는 시간을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종말이라는 상황 안에 있기에 언제 몇 날 며칠이라는 것은 무의미 합니다.
오직 우리의 자세는 나중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밤에 내 영혼은, 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당신의 안식을 자기 백성에게 주시기 위하여 걸어가신 그 주님을 생각한다면 오늘 지금 이 시간에 세상의 기대를 버리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호산나하고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안달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면 왜 내 모양을 이 꼴로 만들어 놓았는가,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나라를 하면서 원망 불평을 합니다. 이것은 이미 역사의 중심에 누구를 두고 있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을 역사의 중심으로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택함을 입은 자는 호산나라고 외칩니다.
요한복음 12:12-19 나귀 새끼를 타신 왕
지난주에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의 구약적인 배경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입성을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러한 입성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어떤 예수를 믿는지를 점검하고서 나귀 새끼를 타고오신 그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즈음의 화두는 단연코 남북의 문제입니다. 이산가족, 통일, 김정일 위원장 등의 이야기들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갔을 때 공항에서의 영접하는 모습이 어떠하였습니까? 공항에 붉은색 카펫을 깔고서 절도 있는 의장대가 환영을 하고 인민들은 열열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차는 최고급의 차로 환영을 하였습니다. 지구상에서 조그마한 나라 그것도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는 한 나라의 대통령을 영접하는 일에 그 정도의 엄청난 준비를 하고서 영접을 합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예루살렘입성 모습을 보십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모두 이 예루살렘 입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함께 보면 예수님이 타고 가신 나귀 새끼도 예수님이나 제자들의 소유가 아니라 남의 나귀 새끼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한곳만 봅시다.
누가복음 19:29-34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귀를 풀어 오라고 하시는데 33절에 보니 임자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왜 남의 나귀를 푸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주님께서 쓰시고자 한다, 라고 하자 끌고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빌린 것입니다. 그런 나귀 새끼를 타고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데 사람들이 겉옷을 펴서 깔고 나무 가지를 베어서 길에 깔고 종려나무를 손에 들고 호산나,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시편 118편 25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여기서 이제 구원하소서 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호쉬아-나입니다. 그러니 이 내용을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편 118편 25-26절을 간단히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2:13절의 내용입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소리를 지르며 환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양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왕의 행차라면 리무진을 타고 가야 하는데 경차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집권자들이 보기에 얼마나 우습게 보였겠습니까? 특히 동양사회는 체면문화라고 하여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일부러라도 고급차를 타야만 대우를 해주는 그런 나라에서 살다보니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이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오다니 얼마나 초라한 행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행렬을 보고서 민중들이 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환영을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지금 절기가 유월절인데 유대인의 성인 남자라면 다 성전에 올라와서 유월절 절기를 지켜야 하는 그런 때입니다. 늘 이들의 기대는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나사렛 예수라는 청년이 병도 고치고 먹을 것도 해결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더더구나 얼마 전에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실이 알려지면서 기대는 최고조에 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2:17-19절에 보시면 나사로를 살려 낼 때 보았던 자들이 소문을 많이 내었고 이에 많은 무리가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행렬이 왕의 행차와는 비교가 안되지만 그러나 곧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원하여 내리라는 기대 속에서 호산나 하면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루살렘 성에 들어 가셔서 하신 일이란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을 정화한 것뿐입니다. 채찍으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아 내시고서 다른 특별한 영웅적인 일을 행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호산나 하던 이 무리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들의 선동을 받고서는 당장 돌아서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왕과 예수님이 이루어 내시는 왕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왕이란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 왕이 아니라 백마를 타고 오는 왕이었습니다. 물론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의 재림 시에는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이 초림 시에는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그런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왕이 아니라 한번 호령하면 천하가 벌벌 떠는 그런 왕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왜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들은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이미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선택받은 자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세상의 악한 자들이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러한 현실에서 자기들을 구원하여 달라는 호산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에게 구원하여 주소서라고 할 때에 무엇에서 구원을 말하고 있는가를 잘 보아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구원의 부르짖음도 세상의 물질이나 출세나 남북통일이나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강대국이 되는 그런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구하여야 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하여 주소서입니다. 죄에서 구하여 달라는 간구를 하지 못하는 것이 유대인들이고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백마를 타고 오셔서 한번 본때를 보여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께서 2천년 전에 백마를 타고 오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미 우리는 끝난 사람들입니다. 심판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9:11-16절입니다. “봉독” 재림하실 때 주님은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그리고 대적한 자들을 발로 밟습니다. 마치 포도주틀을 밟듯이 밟는 그 분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그분이 바로 철장으로 다스리시는 시편 2편의 그 분입니다. 그 아들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바는 이러한 왕을 원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를 알지 못하기에 이러한 왕이 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다가, 스가랴 9:9절에 이러한 주님이 오시리라는 예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주님의 영을 받고 나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 직전까지는 아직도 구원의 때입니다. 아직도 은혜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증거 되고 있는 것입니까? 나귀 새끼를 타고 계시는 분으로 십자가를 지신 분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를 믿는데도 왜 이 모양 이 꼴이냐 또는 다른 사람들이 너 예수 믿는다면서 예수는 천지를 창조한 분이라며 그런데 너 꼴이 그게 무어냐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주님 지금 한번 나타나셔서 본때를 보여 주십시오, 그런 생각이 들지요?
이런 생각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아니 너희들 천지를 창조한 여호와를 섬긴다면서 꼴이 그게 무어야 남의 나라 식민지로 살고 있다니 그러니 이들이 늘 구하는 왕이란 한번 본때를 보여줄 왕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성경에서 왕이 오리라는 예언이 있으니 더더구나 그런 말씀에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른 것 한 가지는 자기들이 구원받아야 하는 죄인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오신 것입니다. 이들이 기다리는 왕과는 다른 왕인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스가랴 9:9-10절을 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셔서 무엇을 제거하여 버리시는 것입니까? 에브라임의 병거와 에루살렘의 말과 전쟁하는 활을 끊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입장이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적들의 병거와 말과 전쟁무기들을 제거하여 버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바로 유대인들의 병거와 말을 없애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서 율법으로 금지하신 것이 있는데 왕으로서 병거와 말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은 전쟁용으로 병거나 말을 갖추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구원함에 있어 병거와 말이 무용지물이라는 말씀을 시편에서 자주 보았습니다. 언제 보았는가 물으시면 새벽기도회 때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분이 병거와 말을 끊어 버리신다는 것은 그러한 병거와 말 한마디로 힘이 너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계속하여 스가랴서 9:11절을 봅니다. “또 너로 말할진데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무엇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언약의 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구하는 것이라면 피로 구원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병거를 가득 주시고 말을 가득 주시면 됩니다. 요즈음 말로는 돈을 주고 힘을 주고 권세를 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죄에서 구원하셔야 하기에 피를 주시는 것입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기독교라는 단체를 돌아보면 도대체가 나귀 새끼를 타고오신 주님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티코를 타고 오는 것보다 리무진 정도를 타고 오면 대우가 달라지는 곳이 호텔이 아니라 교회가 되어 버렸다면 이미 우리는 주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셔서 병거와 말을 끊으시려고 오셨는데 우리는 제발 병거와 말을 달라고 하니 이게 어찌 주님을 믿는다는 자들의 모습이 됩니까?
시편 20:7-8절을 봅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저희는 굽어 엎드려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리로다” 시편 33:6-7절을 봅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지금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그 주님을 믿지 않고 병거와 말을 의지하는 자는 엎드려 질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정말 주님이 백마타시고 철장 권세를 가지고 오실 재림 때에 그동안 주를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세상의 힘을 구하기 위하여 주의 이름을 부른 자들을 밟아 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였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말자가 됩니까? 그 정도의 실력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안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길은 친히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셔서 병거와 말을 끊어 버리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무엇을 끊어 버리시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세상에서 귀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끊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못산다고 하는 것들을 끊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길입니다. 단지 우리의 의지하는 것들을 끊어 버리시고 이제는 나를 믿으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시기까지 낮아지신 주님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셔서 무엇을 하신 것입니까? 잡히시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왕이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살려 내시는 것이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2:23-24절을 봅니다. “봉독”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심이 인자가 영광을 받는 길이며 이것이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그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가 되고 말과 병거를 의지하지 않는 자가 된 것은 이러한 한 알알의 밀알로 죽으신 주님 때문에 되어진 일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믿는 자는 백마타고 오시는 분을 기쁨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0-26 주님을 섬기려면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시는데 사람들이 무어라고 환영을 하였습니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였습니다. 그런데 호산나라고 주를 부르지만 이들이 곧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 무리가 됩니다. 왜 그렇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죄의 종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장님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2:37-40절입니다. “봉독”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들어도, 보아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이 멀고 마음이 완고하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환호를 하고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더라도 그 구원이 죄에서의 구원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저 내 형편이나 나아졌으면 하는 그런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이스라엘이 이 정도라면 이방인이야 말해 무엇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은 인간은 어떠한 가르침과 종교와 의식으로도 거듭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잘나서 무언가 하나님을 잘 섬길만한 구석이 있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란 이런 모습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죄와 완고함, 목의 힘줄이 놋쇠 같은 굳은자들을 돌이키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일하심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만의 선택이 아니라 온 열방가운데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불러내시겠다는 것을 이미 창세기 12장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은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보여주시는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취가 오늘 말씀 20절에 보시면 명절에 예배하러 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헬라인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빌립을 통하고 안드레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데 그때 예수님이 무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주님께 찾아 온 것을 보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는 것은 이들이 모두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방인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을 보시고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영광의 때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갈릴리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때를 말씀하실 때 그 때란 언제나 무엇에 초점을 맞추시고 하신 때였습니까? 언제나 자신의 죽으심을 말씀하신 것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람들이 잡고자 하였으나 언제나 피하여 나가신 것은 무엇이 안 된 것입니까?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성경의 완성을 위한 때가 다 된 것입니다. 이방인도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 자신이 죽으심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영광 받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광이란 무엇이 영광입니까? 자신의 죽으심이 영광이란 것입니다. 자신의 죽으심을 영광이라고 하시는 분 앞에서 무슨 영광을 구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서 취미로 식물이나 동물을 기르고 계십니까? 아마 한두 가지는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위하여 물을 주고 먹이를 주면서 기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르는 자의 자기 기쁨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섬기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섬기기 위한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고 주를 섬긴다고 이렇게 하고 있습니까? 나를 섬기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까? 정말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이렇게 하고 있습니까? 정말 아무른 반대급부 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가 있습니까? 세상적인 것이 하나도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여도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주를 사랑하거나 섬기는 수준이 안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지 남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남을 사랑한다는 말을 할뿐입니다. 남녀가 사랑한다는 말을 왜 합니까? 정말 상대를 섬기고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한다고 말합니까? 마치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을 꺾어다가 자기의 화병에 꽃아 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이 무엇을 섬기는지를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4절을 봅니다. “봉독” 이 말씀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에게 쓰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까? 자기 사랑, 돈 사랑, 자긍, 교만, 훼방, 부모 거역, 감사치 아니함, 거룩하지 아니함, 무정함, 원통함을 풀지 아니함, 참소함, 절제 못함, 사나움,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음, 배반, 조급, 자고,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함. 처음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타나는 현상들이 결국 하나님보다 자기의 쾌락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무엇을 제시하여 예수를 믿게 하시겠습니까? 현실적인 이익들을 제시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겠지요. 자기에게 이익이 되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신을 따름이 무엇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2:25절입니다. “봉독”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리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를 사랑합니다. 남을 위하여 희생한다고 하여도 희생하는 자기의 고귀함을 자기의 가치에 기분좋아하는 사람인데 도대체 어떻게 자기를 미워한다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을 자신을 미워하여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무언가 잘하는 것 하나 없이 나는 내가 미워 차라리 탁 죽어 버리자 하는 것도 자기 사랑의 다른 면입니다.
이미 자기가 자신을 주로 섬기고 있기에 자신의 변변찮은 모습을 보고서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자기를 미워하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든지 남을 위하여 희생을 하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자기의 못난 모습을 한스러워 하면서 자신의 부모를 탓하고 시대와 환경을 탓하면서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나 하는 사람이라도 결국은 자기를 사랑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가 자기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길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모습입니다. 죄란 세상의 법정개념이 아닙니다. 세상의 윤리도덕적인 면에서의 죄의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죄란 마땅히 주를 사랑하고 주를 섬겨야 하는 인간 피조물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섬기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6:2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님이 재림하시면서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주 당연하게 살고 있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여 지기 위하여 자신을 섬기기 위하여 인생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주를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그런 사람이 누구냐고 반문을 하실 것입니다.
24절을 봅니다. 안 그러신 분이 한분 계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사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한 알의 밀알로 죽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시는 것이 예수님의 영광이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 알의 밀알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 열매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오늘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희생의 열매로 나온 것이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20:28절. “봉독” 주님이 우리를 섬겨주심,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심, 한 알의 밀알이 되심. 그러므로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사심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으심 안에 자기의 백성들을 끌어넣으시는 것입니다. 누가 스스로 자기를 미워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가는 자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사랑한다는 제자들마저 주님의 죽으심에서 도망을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역할도 무엇을 보여 주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는 제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신 그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많은 열매를 맺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 죽으심에 자기의 제자들을 끌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주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이 자기의 모든 백성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들이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대로 우리가 끌림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자기의 몸의 즐거움과 마음의 즐거움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투자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감각조차 없었던 우리가 주님이 이끄시니 이제는 무언가 달라진 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몸은 그대로입니다. 아직도 육체의 욕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무엇이 나에게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우리 안에 들어 온 것입니다. 내가 원해서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떻게 자기를 미워하는 것을 원할 수가 있습니까?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세상이 그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새 사람 된 증거입니다. 물론 자신이 잘못하여 욕을 얻어먹고 미움을 받는 것은 자기 잘못입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배척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극동방송에서 윤석균씨가 인도하는 찬양프로그램에서 어떤 이발사를 소개하면서 자신이 예수를 믿고서 세상의 친구를 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감동스럽다고 하면서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버렸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세상의 친구를 버린 내가 자랑이 됩니다. 내가 세상의 친구도 버리고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 자기의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나를 미워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차원의 믿음이란 내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믿음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받고 보니 세상이 오히려 나를 미워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버리고 세상의 친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기 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친구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까? 그 친구가 지금도 예수를 믿지 않는데도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만나 보았자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창회나 계모임 같은 모임에서 자기가 있을 자리가 아님을 압니다. 야, 쟈 빼라 빼, 물 흐린다, 그러지요. 청년이 노래방에 가서 복음성가를 불렀더니 돈 내어 주면서 나가라고 그러더래요. 노래방 물 흐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내 안에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신 그분의 생명의 씨앗이 들어온 증거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종자가 다른 것입니다. 종자가 다르기에 함께 살기는 사는데 자꾸만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미 주께서 우리를 자기의 생명의 세계로 옮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였기에 예수님께 속한 자를 세상이 미워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나를 미워하는 것에 겁내지 마시고 당연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씨앗이 다릅니다. 썩어질 씨앗이 아닙니다. 영생의 씨앗이 들어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주님이 일하시고 이끄심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되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섬기는 자를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주님이 계시는 곳에 주님을 섬기는 자로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도망갈래야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욱 주님을 섬기는 일만 남았습니다. 제대로 주님을 사랑하시고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섬길수록 더 귀하고 사랑할수록 더 사랑을 알아갈 것입니다.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새끼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오리가 알을 부화하여 새끼를 키우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조금 다르게 생겨가지고 다른 오리에게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미움을 받을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았겠지요. 하늘을 유유히 나르는 백조이지요. 그것을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날게 됩니다. 현실은 더러운 물에서 노는 오리이지만 그러나 무엇이 달랐습니까? 씨가 다른 것입니다.
이제는 훨훨 나르면서 삽시다. 높이 나르면 세상 것이 시시하게 보입니다. 신앙의 비상을 하면서 여유 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2:27-36 인자가 들려야
호산나라고 찬송을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시편 118편의 내용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호산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이 구절을 기억하고 늘 호산나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호산나, 하는 가벼운 율동을 곁들여 노래를 하지만 유대인들의 호산나는 자신들의 식민 상태에서 비장한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한 정도가 온 천지가 들썩거릴 정도로 호산나 하였지만 단지 며칠 만에 저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지난주에도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 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관이란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의 구원관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낮은 단계의 구원관이라면 미신을 들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세상의 윤리 도덕적인 기준도 없습니다. 그저 내 하나 잘되기만을 바라면서 자기의 부정행위들이 감추어지고 자기의 부와 명예들이 목숨이 지켜지기만을 바라는 것들입니다. 비는 대상은 아무것이라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돌이든 나무든 부적이든 상관없는 것입니다. 나를 좋게 하여 준다면 어디라도 정성을 바치고 물질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보다 조금은 낫다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래서 종교에도 하등종교와 고등종교로 나누는데 하등종교란 미신과 같은 맥락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고등종교란 무엇이 다른가 하면 자기 부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부인하고자 하는 내용이 들어 있을 때 고등종교가 됩니다. 가장 자기 부인을 잘하는 것이라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불교입니다.
이들은 인생이라는 괴로운 바다에서 해탈하기 위하여 가정도 부모도 다 버리고 금식하고 고행하며 해탈에 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부정의 종교가 오늘날 대중화되면서 어떤 설법이 인기가 있는가 하면 행복한 가정생활, 정신세계와 건강 이런 제목으로 호텔에서 강연회를 가지는 것입니다. 장가도 안가고 산으로 간 사람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만 그러나 이러한 설법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불교를 잘 알아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말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기 부정을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보는 고등종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분류하는 고등종교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 오늘날의 한국 불교와 기독교가 아닙니까? 자기 부인은커녕 어떻게 하든지 자기의 존재를 확대시키고 영속화시키기 위하여 부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미신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절에서 100일 기도를 하고 1,000일 기도를 하면서도 그것이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하여 빌고 빈다면 절에서는 비는 것이 원래 없지만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까? 교회에서 새벽기도 철야기도 릴레이기도 40일 금식기도 작정기도 하면서 정작 구하는바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참으로 자기를 부인하기 위하여 기도합니까? 나에게 있는 것으로 자족함을 알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까? 나의 욕망으로부터 자유케 하여 달라고 기도하십니까? 돈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십니까?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이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왜 인자가 들려야만 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27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보시면 이 때를 할 수만 있으면 면하게 해달라는 기도로 보입니다.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에 갈증과 피로와 고통이 우리와 같이 수반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의 뜻을 행하고자 함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합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생애는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아버지의 뜻대로 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의 모든 일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면 다른 말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자신이 이 때를 면하였으면 하고서 그렇게 간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새번역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말할까? 아니다 내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 때에 왔다” 고민과 괴로움이 있으셨겠지만 그러나 주님의 분명한 사명은 이 때를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간구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이것이 주님의 지상사역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나면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영광스럽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하신 일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의 때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때입니다. 예수님이 들리시는 것입니다.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난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하여 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하신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 앞으로도 영광이 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가장 가깝게는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리고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과 재림까지 하나님의 영광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하시는 그 영광의 일이란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인자가 들려야 한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들리심의 사건으로 인하여 하늘에 올리우시는 사건까지 연결이 됩니다.
주님의 들리우심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주님의 들리우심이 아니면 어떻게 미신적이고 종교적인 우리,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어 있기에 그저 나 자신이 신이 되어 온 세상이 모두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기분이 좋아지는 이런 인간을 살려 내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자의 들리심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성경 두 곳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3:13-14절입니다. “봉독”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라고 하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이신가 하면 유대인의 관원이요 랍비인 니고데모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선생이라는 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못 알아듣습니다.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율법선생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들려야 한다고 하시는 것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들려야만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놓쳐버리면 아무리 성경적인 말을 하여도 사람들의 의지와 지혜와 힘을 짜내어서 만든 종교집단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3:15-16절이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이 말씀은 자신의 들리우심을 전제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사건이 무엇입니까?
민수기 21:4-9절입니다. “봉독” 광야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그런 길로 인도하시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낮추시고 그들이 주님을 신뢰하는지 아니하는지를 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이 좋다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려서 죽은 자가 많습니다. 그리고 물려서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뱀의 모양을 한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보라니 여러분은 쳐다보겠습니까? 그런데 쳐다본 자는 사는 것입니다. 쳐다볼 가치가 없는 것을 쳐다 본 것은 자기의 실력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인자가 들린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도 나무에 달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에 달려 주는 것은 신명기에 의하면 저주 받아 죽는 죽음입니다. 아니 쳐다볼게 없어서 저주 받아 죽은 그런 자를 쳐다봅니까?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성공시대를 보면 일주일에 한명씩 성공한 사람을 소개하고 세계의 위인전기들을 보면 얼마나 성공한 자들이 많습니까? 그러다 보니 요즈음에 예수님이 성공한 자라고 책을 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최고 경영자 예수’라는 책입니다. 인기 있게 팔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도력을 다 갖추었기에 12명으로 시작하여 최고의 영향력을 끼쳤다는 그런 내용인데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가시 면류관을 쓰신 것을 보고서 머릿결이 눌러 붙지 않도록 고무 가시를 모자 안에 만들어 특허를 얻어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다를 게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저주 받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3:13절입니다. 물론 이 저주는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은 저주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저주 받으시기 위하여 나무에 달리신 것입니다. 저주 받아 죽은 예수님을 쳐다보고서 누가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하겠습니까? 제자들도 다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22-24절에서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합니다. 이 십자가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전혀 표적이 아니고 오히려 꺼리는 것이고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너무나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저주받아 죽으시는 십자가 아래에서 이방인인 로마의 백부장이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죽어가던 두 강도 중 한 강도가 그 십자가위에서 함께 저주받아 죽는 죽음 속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들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자기에게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달리심, 들리심은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의 임하심과 재림까지 함께 포함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들리심으로 자기의 백성을 이끌어 내시는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리우십니다. 십자가에 들리심이 부활과 승천, 하늘로 들리우심이 함께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에서 성령을 보내심을 지금도 자기의 백성을 자기에게로 끌고 계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8-10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위로 올라가시는데 내려 오셨기에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신 분이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심, 이것보다 더 큰 사건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나무에 들리신 것입니다. 이제 나무에서 하늘로 올리우시는 것입니다. 올리우시면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사망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모두가 꼼짝을 못하고 세상의 임금에게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망과 죄의 권세아래 사로잡혀 있는 자를 다시 사로잡아 내시려면 어떻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까? 전쟁을 하셔서 사망과 죄의 권세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들리심이란 이 두 가지의 일을 동시에 하시는 것입니다. 사로잡혀 있는 자를 사로잡으시고 그리고 자기 백성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람보’ 영화를 혹 보셨습니까? 포로로 잡혀 있는 자들을 구출하여 내는데 초인적인 전투력으로 포로 된 자들을 구하여 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적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포로를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은 어떻게 죄와 사망의 포로로 잡혀 있는 자들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까?
창세기 3:15절에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 나옵니다.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인의 후손은 그 머리를 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이 사망으로 사망을 이겨버리신 사건입니다. 대신 저주 받으심으로 저주를 끊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 31-32절입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거리끼고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 저주 받아 죽은 모습, 가장 실패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떤 자에게는 능력이 됩니까? 주님께서 이끌고 계시는 사람은 십자가가 능력이 됩니다. 이 이끌림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의 복임을 잊지 말고, 늘 체험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2:36-43 믿지 못하는 이유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습니까?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는 왜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믿지 않아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논리에 너무나 세뇌(洗腦)되어 있습니다. 이렇게만 말하게 되면 믿음의 주체가 ‘내’가 되어 버립니다. 내가 믿음이란 조건을 충족시켜서 구원을 얻었고 구원을 얻지 못한 자는 믿음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복음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 위에 세워진 구원관이란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믿어준 자신이 자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어준 행위가 얼마나 대견하게 여겨지겠습니까? 믿음이란 말을 이렇게 사용하고 있으니 어떤 종교적인 업적을 이루어 놓고서도 믿음으로 이루어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말 중의 하나가 믿음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를 꾸준히 하신 분은 어느 정도 믿음이 정리가 되셨으리라 생각을 합니다만 그러나 그것도 돌아서고 나면 또다시 우리의 행위에 기초한 믿음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의지적 결단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른 행위도 하지 않았는데 거저 주시는 은혜로 되어진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믿음을 그렇게 강조하지만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의 믿음 없음을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죄란 믿음 없음이 죄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이 임하심으로 책망을 하시는데,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시는데,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함이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될 텐데 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할까를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만 찾아보고자 합니다.
37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으나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53:1절을 인용합니다. 이사야 53:1-6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선지자들이 전한 바를 누가 믿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믿을만한 구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본 자들도 귀히 여기지 않았고 우리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한 것입니다. 더구나 대신 죄를 담당하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의 행위가 없이 용서를 받고 복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선악의 기준이 이미 범죄 함으로서 있기에 거저 주시는 은혜와 대신 받으시는 저주를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를 확정하는 것이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이사야 6:8-10절입니다. “봉독”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고서 죽은 자처럼 됩니다. 부정한 입술을 가진 자가 하나님을 보았기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죽지 아나함은 하나님의 용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가 제단의 숯불에 입술의 지짐을 받고서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제가 여기있사오니... 그런데 가면서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2:40절입니다. 스스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사람들이 나를 믿지 못하는 이유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고 돌이켜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고서 나오는 자가 없는 것이 성경의 예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여야 합니다.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믿을 수 없도록 눈과 귀를 막아버리셨는데 어떻게 스스로 나와서 믿습니다, 할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믿지 못하게 하셨으니 믿지 못하여 지옥에 가는 것도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하여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올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아무리 고안하고 자기들의 구원의 방도를 만들어 낸다고 하여도 그것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범죄이후에 생명나무로 접근을 차단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에서 차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도 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10-17절입니다. “봉독”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천국을 쉽게 설명하여 많은 사람을 천국에 들여 놓기 위함이 아니라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택한 자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역시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택한 자와 아닌 자를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와 저희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알아듣게 하시는 너희와 알아들을 수 없게 하시는 저희를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예수님이 오신 그때부터 분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못 알아듣는데 알아들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귀를 열어 주시고 마음으로 깨닫게 해주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인용한 곳을 한곳 더 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28:23-28절입니다. “봉독” 우리는 흔히 사도행전 그러면 사람들이 성령 받고 전도하여 수천 명씩 믿었다, 그러므로 우리고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모으자, 그런 식으로 많이 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끝이 무엇입니까? 전도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고침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실력으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미 죄와 허물로 죽어 있기에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갇혀 있습니다.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빠비용’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이것은 실화를 근거로 한 영화입니다. 살인현장에 우연히 지나다가 억울하게 범인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유배되는 것입니다. 검사의 과욕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배된 섬에서 탈출을 시도하는데 결국 성공하여 가는 빠삐용을 보고서 옆에 있던 죄수가 무어라고 합니까? 이곳에서 탈출하여도 너의 마음의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탈출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는 부분에서 순간의 자유를 얻었다고 하여도 그것은 또 다른 감옥의 일부일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 된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1:32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귀머거리요 소경이고 마음이 완악하여 있기에 스스로 고치고 돌아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몇몇 사람이 주께로 돌아온 자들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지난주에 말씀을 생각하여 보면 누가 들리심으로? 인자가 들리심으로, 예수님이 들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끌어내신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긍휼을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주님을 믿노라고 나온 것은 우리의 실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십자가에 들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긍휼로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긍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영광을 구하고 있기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첫째 이유가 이미 우리가 죄의 감옥 안에 갇혀 있기에 스스로 돌아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2:42-43절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원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많은데 바리새인 때문에 드러나게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유대교에서 쫓겨 날까봐서 말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믿을 수가 없는 사람들로 태어나는데 그러나 어느 정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까지 바르게 믿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그 긍휼의 정신이 계속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라지면 반드시 인간의 자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의 영광이 드러나는지를 우리 주변에서 보고자 합니다. 사람의 영광이란 결국 자기 이름에 관한 싸움입니다. 자기 이름이 영광을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빼앗기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영광을 결코 다른 것에 돌리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2:8절에서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방해하는 인간의 영광은 하나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에서 영광을 주님께 돌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115: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이 충돌이 됩니다. 영원한 주의 영광을 인간이 범죄함으로 그 영광을 마땅히 돌려야 할 주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교에서 출교 당할까 봐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일들, 즉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고자 합니다.
‘회복의 신앙’이라는 책에 보니 몇 년 전에 서울의 모교회에서 예배당을 짓다가-성전이라 하겠지요. 돈이 모자란 것입니다. 일은 크게 벌려 놓았고 돈은 턱없이 모자라니 얼마 이상을 헌금하면 교육관 이름을 헌금한 사람의 이름으로 부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액을 헌금하면 교회 이름을 그 사람의 이름으로 부르겠다는 광고가 나왔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자기의 이름이 나는 일과 이름이 나지 않는 일, 자기에게 칭찬과 영광이 돌아오는 일과 그렇지 않는 일, 어느 곳에 마음을 더 두고 계십니까? 신학교 안에도 건물들 마다 들어서면 그곳에 헌금한 사람들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예배당의 기초석 밑에 헌금자 이름을 기록하여 넣는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이것이 자기의 이름을 남기는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의 이름은 죄인이며 오직 주님이 불쌍히 여겨 주셔야만 합니다, 하는 반응이 나올 수가 있을 까요? 정말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라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아니합니까, 라는 자세가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까? 이방인의 장교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것이 부하이듯이 주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될 줄 믿습니다, 종에게 말씀 하옵소서, 하는 그런 자가 누구입니까? 이것이 자기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 긍휼을 입은 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죄인들의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시니 눈이 감긴 것이고 마음이 완고하여져서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사람들이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구원은 인간을 불순종아래 가두심으로 스스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긍휼을 입은 자만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나와서 하는 말은 오직 주의 긍휼하심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습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서 받으소서, 라고 하는 것이 구원받은 백성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죽어서 천당 가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누구의 이름과 누구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주님의 영광이란 주님의 하신 일로 인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사는 것도 모두가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명절에 사람들이 모이면 모두가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주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2:44-50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난주에는 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추석 명절에 가족 친지를 만나 보았을 때 무엇을 느꼈습니까? 사람들이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음을 확인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영광을 서로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고향을 가는데 두 가지는 갖추어져야 고향을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집을 사고, 자기 자가용을 사고서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을 사고 자가용을 샀는데 산지 일주일 만에 차를 도난당하고서 다시 새 차를 사기까지 기다렸다가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자기 영광성을 위하는 것, 자기 이익을 위하는 것이 이미 우리의 주인을 배척하고 있는 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제 주인을 제대로 알고 섬기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는 자기가 자신의 주인인양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씀 안에서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인생이 자기 손에 있는 줄 알고 자기의 결심과 결단으로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는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이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죄의 권세아래 있기에 죄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로 자기가 만물의 주인인양 착각하고 살고 있는 것이며 그러기에 어떤 신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자기에게 무언가 이익과 보탬이 되어야 믿겠다는 것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얼마나 나에게 실용적인 이익이 되는가가 진리의 척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람들마다 섬긴다는 신의 모양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자신의 창조를 섬겨야 하는데 사람들이 섬긴다는 신들이 온갖 우상들이라는 것이 로마서 1장에 나타납니다.
로마서 1:20-21절입니다. “봉독” 썩어질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제 창조주를 제대로 알고 주인을 제대로 알고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르는 것입니다. 모두가 제각각의 신들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용왕이든 옥황상제든 산신령이든 나무든 돌이든 사람이든 간에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냥 내 버려두셔도 할말이 없는 인생들인데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을 따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이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계시의 말씀인 것은 성경을 통하여 참된 하나님을 알려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인물과 사건들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과 야곱을 부르셔서 자신의 계시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시는 도구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친히 돌판에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십계명입니다. 어느 나라에 신이 친히 기록하여 주신 말씀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분만이 참된 하나님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와 둘째가 무엇입니까? 찬송가 뒤에 있습니다.
1-2계명을 읽어 봅시다. “봉독” 출애굽기 20:1-7절로 서론이 중요한데, 찬송가 뒤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서론이 나는 너희를 애굽땅 종 되었던 곳에서 구하여 낸 여호와라고 하시면서 이 십계명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를 구원하여 낸 자가 참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신이라도 너에게 있게 하지 말며 어떠한 형상이라고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받고 있는 순간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 아래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사람들은 우상숭배에 친화적인 것입니다. 바른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선지자들로부터 듣는 책망은 무엇입니까?
이사야 1:2-3절. ‘하늘이여 들어라 땅이여 귀를 귀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예레미야 8:7절에서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알지 못하도다’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섬기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습이 짐승보다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 이것이 죄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자들이 이 정도라면 이방인이야 더하지요. 그러니 사람들마다 자신들의 신에 대한 생각들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인백색(百人百色)이란 말이 있듯이 백인이 모이면 백인의 신의 개념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함께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포이에르 바하’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투사다’ 이 사람은 처음에 신학자로 시작하였다가 나중에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왜 이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가 하면 이 사람이 말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하고 조사를 해보니 사람들마다 마음에 각자의 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본성을 비추어 내면, 즉 투사 시키면 벽에 하나의 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이것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려운 말 같지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무언가 두렵고 그래서 믿을 만한 것은 만들어 낸 것이 신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나 아니거나 간에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우리의 마음의 생각들 또는 꿈 이상을 필름처럼 비추어 본다면 어떠한 상들이 나올 것입니다. 좀 더 나은 자아의 실현이라든가 자신의 본성적인 욕구들이 완성된 모습으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저를 비추면 무엇이 나올까요? 성공적인 목회자상을 꿈꾸고 있다면 그런 이미지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마다 이러한 형상들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아닌 다음에는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하나님, 하나님 하고 찾아다닌다고 하여도 사람들의 자기의 마음의 소원하는 바를 ?아 다닌다면 이것이 우상을 ?아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지으신 주인을 제대로 알아보고서 섬긴다는 것이 이처럼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오직 주님이 들리셔서 자기 백성을 이끄시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자기의 하나님의 상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상상하는 신들이 마음에 다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비록 계시를 받았다고 하나 그들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방인은 이방인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참되신 하나님이 내려 오셨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의 유월절입니다. 여기에서 그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핵심적으로 요약하여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44-45절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고 나를 믿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참람하게 들리며 건방지게 들리며 이를 갈게 만드는 말입니까? 네가 하나님이라고?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상상의 하나님이 이렇게 오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고 어린아이로 오시고 멸시받고 천대받는 모습으로 오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는 그런 모습으로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낮고 연약한 모습으로 오실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의 생각도 유대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하나님의 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이상한 책들이 나오고 그래서 정도령이 나오리라, 무슨 바위산의 장군이 나타나리라 모두가 메시아사상을 민중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라는 게 이게 뭡니까? 자신들이 잘 믿고 있다는 그런 자들은 오히려 배척을 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과 친구가 되어 주시다니 이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평소의 메시아사상이 다 무너져 내리는 그런 비참함을 절망을 맛본 것입니다. 최후의 순간이라도 기적을 갈구하면서 멀찌감치 십자가의 현장에 따라 갔던 자들도 결국은 그 처참하고 무력한 죽음 앞에서 내가 그동안 무언가 잘못 되어서 이렇게 정신없이 3년을 따라 다녔나 보다, 이제 무얼 하지? 그래 고기나 잡으러 가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영생인 것입니다. 영생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지금 예수님이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하니 유대인들이 이런 예수를 가만히 둘 수가 있겠습니까? 달려들어 죽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기대하는 그런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런 모습으로 오셔야 하신 것입니까?
47절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 오셨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누가 하십니까? 예수님의 하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그 말씀이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그것이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은 아직은 구원의 때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61:1-3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신원의 날을 전파하는 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란 바로 희년에 이루어지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에게는 복음이 되는데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의로 무장을 하고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해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신원의 날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원이라는 말은 원수 갚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말로는 심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에서 심판은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이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4:14-21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회당에서 성경을 봉독하시는데 이것은 회당장이 한 사람을 지목하여 성경을 읽게 하는 것이랍니다. 지금도 회당에서 그렇게 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두루마리 성경이 많이 있을 텐데 하필이면 그것이 이사야 두루마리였고 그것을 예수님이 펴서 읽으시는데 이사야 61장의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디까지만 읽으신 것입니까? 은혜의 해만 말씀하시고 이 말씀이 너희에게 응하였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읽지 않으셨습니까? 신원의 날입니다. 심판의 날은 읽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은 은혜의 해를 전파하신 것입니다. 심판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아직 은혜의 때입니다. 아직은 구원의 날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와 구원이란 십자가 안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입니다. 아무나 환영하고 나올 수 있는 성질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심판의 날까지는 아직도 구원의 때요 은혜의 때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고 싫어 버린바 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는 그 십자가의 비밀과 능력을 점점 더 풍성히 알아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되신 하나님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초점이 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의 때요 구원의 때로다.(고후6:1-2)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3:1-11 끝까지 사랑하심
진짜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랑이란 자기 소유욕의 다른 이름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삼기 위한 말을 아름답게 포장하여 사랑이라는 말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사랑이란 자기희생입니다. 그 특성으로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잘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도 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의 사랑을 사람들이 오해하는 또 한 가지는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하여야지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조건에 의한 선택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선택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된 줄을 아시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10-11절에 보시면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를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하시면 다 사랑하시지 왜 다는 아닙니까? 여기에 대하여 우리가 따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보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의 죄로 인하여 모두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을 입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러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본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성령이 임하셔야만 자신의 죄와 비참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죄와 비참을 제대로 알게 되면 자기는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누구는 구하여 주고 누구는 구하여 주지 않는가, 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도 사람들이 자신들을 죄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다 된 줄 아시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12제자 중에서라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입니다.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이들이 가룟 유다보다 나아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지만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의 대표로 보아도 됩니다.
어떻게 하였습니까? 배신하였습니다. 세 번씩이나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고 배신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나 베드로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예수님이 알고 계심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네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죽으심으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나머지도 모두 여기에서 나오는 사랑이지만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하여 편의상 분류하여 보는 것입니다. 13장 1절에 ‘유월절 전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왜 예수님이 유월절에 죽으시는가를 요한복음 1:29절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한 것입니다. 구약의 대속제물이 된 어린양의 죽음을 세례 요한의 손가락으로 모아서 꼭 찍어서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저 분이 세상 죄를 지고가실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이 어린양의 사건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의 종살이를 하고서 출애굽을 하는 절정이 장자의 죽음입니다. 지금까지의 재앙들은 애굽에만 떨어지는 재앙이었습니다. 고센 땅은 구별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죽음은 예외가 없이 다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집만은 살아남는 것입니까?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 어린양의 피를 보고서 죽음의 사자가 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넘어 간다고 하여 유월절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자동으로 구원하신다면 어린양의 피를 바르게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재앙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고센땅을 구별하듯이 죽음의 사자가 임하지 않게 하면 되실 텐데 열 번째의 재앙은 어린양의 피가 없으면 비록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이라 하여도 모세의 집이라 하여도 예외 없이 장자가 죽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 살아남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떠한 죄인이라도 심지어 애굽 사람이라도 어린양의 피 아래 있으면 그 재앙을 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 사건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유월절을 잊지 않도록 매년 유월절을 지키도록 율법으로 명시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유월절의 어린양으로서의 자기를 드림이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증거입니다.
히브리서 9:11-14절입니다. “봉독” 구약의 성전에서의 제사는 짐승의 피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것은 피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을 짐승의 피로써 온전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서 자기의 백성들을 온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죽으심으로 자기의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러한 죽으심이 모든 복음서의 핵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28장 중 27장)와 마가(16장 중 15장)와 누가(24장 중 23장)와 요한(21장 중 19장)의 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복음의 절정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죽으심을 인하여 자기 백성들을 살려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주님의 ‘끝까지’의 사랑입니다.
둘째로,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이 하는 일입니다. 발 씻기는 것은 종, 중에서도 낮은 종이 하는 일인데 예수님이 주가 되셔서 종의 자리로 자기 백성을 섬기신 것입니다. 한 사람씩 발을 씻겨 나가시는데 베드로 차례가 되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가만히 있었는가, 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보기에 어떻게 예수님이 자기를 씻기시는가 하여 거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지금 베드로가 거절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어떻게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자인데 어떻게 주인이 종의 발을 씻기시는가 하는 말입니다. 그러한 말에 대하여 예수님은 지금은 너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 말 말고 씻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시자 베드로가 놀라서 그러면 온몸을 씻어 주옵소서,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다고 하시면서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큰 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해결하셨으니 작은 죄들은 내가 씻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죄란 큰 죄 작은 죄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큰 죄를 지은 자는 사망에 이르고 작은 죄를 지은 자는 고생만 한다, 이런 말씀이 아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 발을 씻어 주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표시로 발을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미 너는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을 발 씻어 주심을 통하여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예수 믿고서 목욕은 하였으니 사소한 죄들을 너희들 스스로 씻어야 한다, 라는 식으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만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 주시고 나서 이제 발은 너희가 스스로 씻어야 한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도 나처럼 서로 남의 발을 씻어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발씻어 주심은 주인이 종이 된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이 되어서 자기의 죽음으로 죄를 사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성령이 임하고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고 나서 이러한 발 씻는 일을 하였습니까? 3:15절에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성찬식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처럼 세족식을 하였습니까? 성경 어느 곳에 제자들이 세족식을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세족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이해한 발 씻음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리고 증거 하면서 어떤 자세로 하였습니까?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종의 자세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발 씻어 주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끝까지’의 사랑은 자신이 목욕을 시켜 주신 것을 끝가지 유지하도록 하는 차원에서 발 씻어 주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손과 발을 씻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출애굽기 30:17-21절입니다. “봉독” 구약의 성막의 구조는 바깥 울타리가 있고 그 안에 다시 뜰과 천막이 덮어진 곳이 있습니다. 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고 덮개가 있는 곳이 성소와 지성소입니다. 성소에는 떡상과 등불과 향을 피우는 상이 있고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려면 물두멍에서 언제나 손과 발을 씻어야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을 이러한 말씀을 더욱 세밀하게 하여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 먹으면 부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수군거리자 예수님이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정결의 문제는 손을 씻고 발을 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서만이 정결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씻음이 정결이라면 이제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발씻음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끝가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을 씻는다는 것은 무엇을 기억하는 사건입니까?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발을 씻으면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발을 씻었으니 나 깨끗하다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한 사람이다? 목욕을 한 사람이다, 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말을 씻기라는 것은 결국 종의 자세로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깨끗케 하심을 기억하는 것이며 증거 하는 것이며 우리에게는 오늘날 말씀으로 섬기는 자들을 통하여 그 예수님의 목욕시킨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24-27절입니다. “봉독” 교회를 씻는 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신부이고 신랑은 주님입니다. 주님 앞에 정결한 신부로 준비되기 위하여 물로 씻어야 하는데 그 물로 씻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으로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말씀을 중요시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잘 전하여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깨끗하게 씻는 것입니다. 마치 발을 물로 씻듯이 씻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교회는 목욕탕이라고 합디다만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되었음을 무엇으로 확인을 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날마다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6-17절. “봉독” 이러한 말씀이 아니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점검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온통 불안에 휩싸여 있습니다. I.M.F 보다 더한 위기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위기는 아무것도 아님을 말씀을 통하여 알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정결하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이 더러워져 있는지를 점검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무시하고 세상의 것들에 두려워 떨고 있다면 말씀으로 정말 씻어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우리를 이런 세상에서 끝가지 사랑하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이러한 주님의 ‘끝까지’의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간 베드로에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 베드로를 찾아 가신 행위가 발 씻음인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넷째로, 이러한 발씻음의, ‘끝까지’의 사랑을 이제는 성령을 보내셔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게 하심으로 그 사랑을 확정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끝없는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사랑을 알아 가시면서 세상의 환난과 어려움과 핍박과 고난이 그 사랑을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을 알게 하시고 바라보게 하시는 주님의 끝없는 발씻어주심의 사랑으로 아시고 이제는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의 고집이 우리의 고집보다 더 강하고 세시고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의 구원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이 주님의 끝없는 사랑으로 현실의 고난이 있더라고 그로 인하여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는 감사가 있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3:12-20 서로 발을 씻겨라
지난주에 예수님의 ‘끝까지’의 사랑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배신하실 줄 알면서도 발을 섬기시는 종의 자리에까지 가셔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는 아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내가 너희의 주와 선생이 되어서 너희의 발을 씻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발을 씻어 주는 세족식을 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는 큰 죄는 예수님이 담당하시고 작은 죄들은 우리가 스스로 씻자, 하는 것도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발을 씻어 주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종의 자세로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잘 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잘 모르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남의 발을 씻어주는 종의 자리보다는 남에게서 발을 씻김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남을 섬기기보다는 섬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꼬리가 되기보다는 머리가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어느 한 구절이라도 제대로 보기 시작하면 우리의 죄 된 본성에 만족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니면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3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러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영적으로 분변한다는 것은 신비하게 본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원리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원리로는 너무나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가 여전히 남을 지배하고, 발로 밟고 정복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직도 구약을 문자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언약 속에 살면서도 아직도 우리의 생각이 구약의 문자를 그대로 적용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로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을 아직도 문자대로 적용하여 왔던 것입니다.
영국이 식민지를 개척할 때 앞장세운 것이 선교사들입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커다란 대포를 실은 함대가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선교의 역사가 이러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이 아메리카에 들어가서 인디언들을 살육하는 것을 구약의 이러한 정복전쟁을 자기들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물론 선교의 역사가 다 무력으로 행한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선교지에 들어가서 원주민들과 같이 낮아지고 그들 속에 들어가 함께 하면서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선교의 역사 속에서 대부분 자국의 경제적 군사적인 힘을 업고서 선교를 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정복하라는 것을 신약에서 그대로 적용한 오류인 것입니다. 구약의 정복이란 여호와의 언약을 따른 정복전쟁입니다. 이미 범죄한 인류를 향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지금 여호수아서를 새벽기도 시간에 말씀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복의 전쟁은 거룩과 비거룩의 전쟁이며 언약과 비언약의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쟁의 특징은 무기와 힘의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시행하시는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덮어주심의 은혜를 무시하는 함의 정신을 가진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온 세상에 만연합니다.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노아의 가족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덮어주심의 은혜를 심판에서 가리워 주심의 은혜를 무시하고 모독한 함, 자기 아비의 벌거벗었음을 희롱하는 그런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임을, 노아를 덮어준 셈의 후손이 함의 후손을 정복하는 차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란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이들도 하나님의 긍휼을 잊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구약의 정복을 보면 힘과 무력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면서 애굽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목동을 들어서 왕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하나님의 전쟁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선 자신이 속한 단체를 위하여 하나님을 끌어 들이는 전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구약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가 속한 나라와 단체를 위하여 하나님을 부르는 경우가 생깁니다. 지금 올림픽이 끝이 났습니다. 경기 때에 기도를 하는 자들이 무엇을 위하여 기도합니까? 그냥 스포츠로 운동한다는 의미라면 이기고 짐이 무슨 대수입니까? 우리는 무조건 이겨야 된다는 전제가 우리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전쟁 속에서 남을 배려합니까? 아주 약한 나라가 금메달 하나 겨우 따는데 그것마저도 빼앗아 와야 한다고 기를 쓰는 아나운서와 해설의 멘트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이러한 모습이 교회 안에도 얼마나 심각하게 뿌리 깊게 들어와 있는지 아십니까? 교회도 힘이 있어야 된다는 이론이 노골적으로 말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힘이 있어야 전도도 하고 선교도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경제가 선교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이 되어서 하는 것입니다. 종이 되어서 발을 씻어 주러 가는데 왜 돈이 필요합니까? 자신이 돈을 많이 가지고 가서 식모와 운전기사를 데리고 그래서 그들을 전도한다고 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요한복음 13:12-17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지금 내가 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제자들이 알 리가 있습니까?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을 말씀하시는데 이 자리에서도 누가 서로 높으냐를 따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등극하시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될까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발씻어주심을 모르는 것입니다. 모른다고 할지라도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심을 통하여 나중에 성령이 임하시면 이 말씀을 깨닫게 하시려고 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주라 하니 옳다고 하십니다. 너희의 선생이고 주가 되어서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며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 보다 크지 못한 것입니다. 주인이신 예수님, 보내신 분 예수님이 우리보다 크십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하신 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생각을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발을 씻기라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드러나는가 하면 20절입니다.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제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가는 것입니까? 발을 씻기는 모습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불우이웃돕기 하는 정도의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습에서 발을 씻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들어나는 자리까지의 요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 당신을 보니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소, 하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자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도 잘되고 부자가 되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고서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약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하는 것 보다는 더 낫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이런 말을 우리가 본성적으로 좋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본성에 얼마나 거리낌으로 다가오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듣기에 좋다 은혜롭다고 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이냐 세상적인 기준이냐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평소의 생각과 지론이 있는 데 그것을 목사가 성경을 들어서 증거 하여 주면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성경이라고 그렇게 받을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을 거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발을 씻어주는 모습이 내가 무엇을 많이 가지고서 남에게 베풀어 주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업들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아십니까? 그러므로 여전도회들이 많은 사업을 합니다. 사업을 하여서 수익을 남겨서 불우이웃돕기도 하고 선교도 하겠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 서울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전도회 사업을 할 수 있는 상품들이 있으니 여전도회 회장님 전화를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업을 하지 않습니다, 하자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 사업하여서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노력 그 애씀을 어디로 돌려야 하는가 하면 자기 속으로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가까이 있는 남편에게 잘하시기 바랍니다. 남편의 발을 씻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종의 자세입니다. 자녀에게 잘하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나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섬기라고 주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그런 자세로만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혹할만한 그 무엇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에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미련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에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볼 때는 가장 미련하여 보이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정말 그러한가, 주님의 끝까지의 사랑을 입고서 주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복음으로 고난을 당하며 종의 모습으로 섬긴 것입니다. 이방인의 집으로 들어가라면 가는 것입니다. 고난의 자리로 죽음의 자리로 가라면 가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만 주님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많이 복음을 전하였다고 보는 바울을 예로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4:9-16절. “봉독” 이것이 보냄을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기같이 되었습니다. 발을 씻어 주는 종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종,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 사도가 무어라고 합니까?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 바울이 이러한 자기의 모습을 본 받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된 이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까? 듣기에 거북스럽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바울을 본받으라는 것은 결국 요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보낸 자라는 것이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는 일은 자신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만물의 찌끼같이 되든지 고생을 하든지 자기에게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14-17절입니다. “봉독” 바울의 이러한 모습이 누가 하시는 일입니까?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이기게 하시고.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이기게 하신 모습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이기게 되심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우리가 종이 되는 것입니다. 발 씻는 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무엇이 드러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발을 씻겨주는 바울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세상의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선행으로 누가 드러납니까? 선행하는 그 사람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바울에게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납니까? 이 그리스도의 향기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윤리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향기가 되는 것입니까? 생명과 사망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고 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이를 감당하리요?
이것이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서 어떤 향기가 드러납니까? 망하는 자들에게는 이런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아니 저렇게 살다가는 하루도 못 살거야, 라는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더욱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것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그래 저런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야, 하고 주님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어떤 모습입니까?
고린도후서 6:1-10절입니다. “봉독” 신앙이란 이러한 역설의 사람들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씀을 드리면 세상과 거꾸로 살면 됩니다. 이러한 이김을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3:21-38 인간의 한계
우리는 종종 인간승리라는 말을 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온 운동기록이나, 신체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어떠한 기록을 세웠을 때, 또는 조난을 당하여 극한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 내었을 때 인간승리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승리를 외친다고 하여도 인간의 기본적인 한계를 뛰어 넘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보조 장치 없이 물속에서 살수 없는 것이고 하늘을 날아다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신체적인 한계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믿음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하며 어리석은지를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할 수 있다는 그 한계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지금은 올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 가는 곳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자리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무어라고 합니까?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라고 합니다. 누가 베드로의 열심을 따라 가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다 배신할지라도 나는 죽을지언정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38절에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네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죽을지라도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목숨을 바치더라도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이 인간의 최고의 한계 아닙니까? 그런데 그러한 최고의 열심과 목숨을 바치는 그 사건을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리라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돕겠다고 하나님을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돕겠다고 열심 내는 일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열심히 안 해서 탈이지 열심히 하는 것도 탈이냐고 따지는 분이 계십니다만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예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스토코우스키’라는 사람이 필라델비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 한 번은 베토벤의 오버튜어를 연주하게 되었답니다. 이 곡은 트럼펫 하나가 연주 도중 무대가 아닌 관중석 뒤에서 솔로로 나와야 한답니다. 연주가 한참 진행되고 지휘자가 관중석을 향하여 지휘봉으로 사인을 보냈는데도 트럼펫 소리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날 연주는 완전실패로 끝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무것도 모른 수위가 관중석 뒤에서 트럼펫 연주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서 아니 어떤 미친 놈이 이 연주회를 망치려고 그러는가 하면서 그 연주자의 팔을 뒤틀어 잡고서 연주를 못하게 한 것입니다. 수위가 그 연주자를 잡고서 생각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내가 수위가 되어서 이놈을 잘 붙들었기에 연주회가 성공이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잘못된 열심이 연주회를 망쳐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제자들에게 유대인들에게 오늘 우리에게 얼마든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는 열심을 내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 되어 버린 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의 장면이 예수님의 유월절 마지막 만찬이시고 예수님이 심령에 민망하여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요한에게 무어라고 합니까? 고개짓으로 요한에게-요한은 예수님께 기대어 있는 것입니다-배신할 자가 누구냐고 예수님께 물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게 되면 당장 ?아버릴 그런 자세이지요. 지금 자신이 예수님을 향한 열심히 얼마나 대단한지를 이런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나 베드로나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은 똑 같은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도 자기의 열심이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것이고 베드로도 자기의 열심이 예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자는 더 나쁜 것이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한 베드로는 좀 덜 나쁜 자입니까?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나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생각이나 결국은 사람의 일이요 사람의 생각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5-24절입니다. “봉독”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이 꼭 자신이 높아지려고 예수님이 죽으시면 안 된다는 것만으로는 볼 수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예수님을 보호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베드로의 순수한 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순순한 생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의 일이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최선을 다한 것,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고자한 생각이 결국 누구의 일로 드러난 것입니까? 사단의 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시기 전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열심히 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베드로만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바울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위한 열심은 어느 누구도 따라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어기면 돌로 쳐 죽일 정도입니다.
그러기에 전쟁이 안식일 날 일어나면 죽어도 방어를 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당시에도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돌로 쳐 죽일 정도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위선이다 외식이다, 라고 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외식이다, 위선이다 하면서 자신들이 그들보다 의로운 양 또는 자신의 마땅한 주를 섬겨야 하는 것을 피하여 나가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이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자리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안식일을 위한다고 성전을 위한다고 하는 것이 결국은 예수님을 죽이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인간의 한계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울의 예를 들어 봅시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얼마나 열심히 나섰습니까?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또 다른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려고 뛰어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울이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하였습니까? 자신의 개인의 명예와 이익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낸 것이 그런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열심을 내면 낼수록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지금은 베드로 네가 나를 따라 나선다고 맹세를 하지만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6절입니다.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지금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지금은 너의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 오리라는 것은 누구의 일입니까? 주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구분을 왜 하여야 하는가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계속하여 사람의 열심을 짜내는 식의 종교생활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가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자 하면서 설교도 성경공부도 어떠한 교회의 사업도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도 베드로의 열심이 아닌지를 점검하여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따지다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가, 빨리 빨리 큰 일을 이루어 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입니까?
요한복음 13:31-32절입니다. “봉독” 저가 나간 후에 누가 나갔습니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하여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서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고 나갔고 베드로는 자신은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배신할 것을 알고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무슨 영광을 얻으신 것입니까? 지금 이 자리가 무슨 자리입니까? 최후의 만찬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며칠 안에 예수님이 죽으실 줄 아시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다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고 하나님도 예수님을 인하여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광이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에 예수님을 제쳐두고서 어떤 업적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제대로 알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과 정 반대의 영광입니다. 힘없이 약하심으로 달리신 십자가 저주받아 죽은 모습의 십자가가 무슨 하나의 영광으로 여기겠습니까?
그러니 오늘날도 많은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자신들의 열심히 무엇인지를 알고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데 이러한 십자가를 버려두고서 세상의 사람들도 부러워 할만한 것들, 세상 사람들도 성공이라는 것들, 세상 사람들이 영광이라는 것들을 오늘날 십자가의 영광을 말하여야 할 교회들이 따라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베드로의 열심과 바울의 열심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지금은 자신이 죽어도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러나 배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주님의 종이 되어서 죽은 자리, 성경 외의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선의 열심이 결국 배신의 자리로 가는 것이며, 최고의 열심을 한다고 한 것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결국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베드로는 배신하였지만 돌이켜서 주님의 증인이 되는 일이 어떻게 일어 난 것입니까?
요한복음 13:26-27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주시는 떡을 찍어 주시는 데 그 떡을 받은 후에 곧 사단이 가룟 유다에게 들어 간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누가복음 22:31-32절입니다. “봉독” 베드로를 누가 밀 까불 듯이 흔들어 됩니까? 사단이 그렇게 합니다. 그러므로 배신을 합니다. 그러나 왜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돌이키게 됩니까? 예수님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 하고 계시기에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성령님도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고 예수님도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시기에 우리가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끝으로 빌립보서 3:5-9절을 봅니다. “봉독” 바울 자신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율법에 대한 열심, 유대인의 자부심 이런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오히려 주님을 핍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 귀함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무엇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의를 발견 한 것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난 의 하나님께로 난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떠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은 모두다 배설물로 여기고 해로 여기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라고 하는 분들이 있어서 한 곳을 더 봅니다.
빌립보서 3:3절입니다. 무엇으로 봉사합니까?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합니다. 그러면 누구를 자랑하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게 되고 무엇을 신뢰하지 않습니까?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어떠한 봉사의 일을 감당하실 때에 성령으로 봉사하시는지를 점검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누가 자랑이 되는가가 기준입니다. 예수님이 자랑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자랑에 자신의 자랑을 끼워 넣으려고 하면 이것이 바로 육체를 신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누구를 믿고 무엇을 신뢰합니까? 목사가 무엇을 믿고 성도가 무엇을 믿고 신뢰하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서, 육체가 자랑되거나 신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높아지고 자랑되어 지는 성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주님의 제자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십니까? 말로만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피차 뜨겁게 사랑하십니까? 저녁 예배시간에 찬양을 45분부터 시작합니다. 오프닝 송을 하고나서 인도자가 뜨겁게 사랑합니다, 라고 서로 인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인사를 하는 시간에 찬양인도자 외에 몇 사람 없습니다.
아마 서로 사랑하지 않는데 서로 사랑한다고 그것도 뜨겁게 사랑한다는 거짓말을 하려니 양심에 찔려서 일부러 늦게 오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몇 사람은 서로 뜨겁게 사랑하기에 일찍 오는 것입니까? 그 중에 한사람은 저인데 목사가 시작할 때부터 와야지 해서 앉아 있는 것이지 뜨겁게 사랑하여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서로 사랑하여야 주님의 제자인데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아니지요. 함께 예수를 믿는다면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서로 사랑하기는커녕 얼굴을 마주 보기도 싫어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 없습니까? 그 사람은 생각만 하여도 기분 나쁜 사람이 없습니까? 그것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함께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나중에 천국에 가서 주님께서 그 미워하는 사람을 옆자리나 마주 보는 자리에 앉히신다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면 어느 정도까지 가는지 아십니까? 네가 가는 천국 같으면 나는 안 간다는 것입니다. 네가 못 가든지 네가 못가든지 해야지 네가 천국 간다면 어찌 그 꼴을 보겠는가 하는 정도로 사람들이 말합니다.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 시골교회이니 다 아는 사람들이 한 교회에 나오게 되지요. 그런데 어떤 어른이 교회를 나오다가 다른 교회로 가는 것입니다. 시골에는 교회가 10리를 가다가 하나, 20리를 가다가 하나 있을 정도인데 버스도 하루 한두 번 다니니 걸어서 가야 하는데도 다른 교회를 나가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까운 교회 두고서 다른 동네교회에 왜 갔을까요? 싸워서 미운사람이 있어서 같이 예배 못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걸어서 다른 동네에 가기가 쉽습니까? 비 오고 눈 오고 너무 덥고 너무 추울 때는 못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배라도 빼먹으면 벌 받을까 해서인지 오기는 하는데 맨 뒷자리 늦게 와서 앉았다가 맨 먼저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 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 것이고 제자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나라와 상관이 없는 자들이 아닙니까?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까? 보이지 않기에 거짓말로 하여도 통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이러한 한 말씀을 가지고서 좀 더 심각하게 묵상하고 우리에게 적용하면서 말씀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서로 사랑하고 있는 줄 착각하게 됩니다. 나는 사랑하는데 상대방이 받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다 핑계일 뿐입니다. 어느 정도로 사랑하여야 된다고 하시는지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새 계명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면 옛 계명은 무엇인지 확인을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찾아보기 전에 옛 계명이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구약 전체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 계명이나 새 계명이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새 계명이라고 하는지 옛 계명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서 새 계명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0:25-28절입니다. “봉독”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이 증거 하는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유대인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8:18-23절입니다. “봉독” 계명을 아나니 하시면서 몇 가지의 예를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의 일부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율법전체를 요약하면 십계명이고 십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면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십계명을 다 지켰다는데 그러면 반드시 어떤 결과가 나와야 합니까? 율법과 선지서의 대강령인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너의 가진 것을 팔아서 네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을 때 이 사람은 무엇을 더 사랑한 것입니까?
자신의 재물을 더 사랑하여 나누어 주지도 못 하였고 주님을 따르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문자적으로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킨 것은 누구를 사랑한 것이 됩니까?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한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구제를 한고 전도를 하고 헌금을 한 것이 결국 자기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멋진 대답을 누가복음 10장에서는 한 율법사가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았다는데도 결국 예수님 앞에 서니 자신을 사랑한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은 것입니다. 율법사가 이렇게 물은 것은 자기는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구제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바리새인이요 율법사 정도면 구제 금식 안식일 기도 너무나 철저하리만큼 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이미 잘하는 것이고 이제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 자기 확인을 위하여 자기 옳음을 위하여 이웃이 누구인가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이웃이 누구라고 하십니까? 비유를 통하여, 강도만난 자의 비유를 통하여 레위인도 아니요 제사장도 아니요 사마리아인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한 사마리아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러니 눈앞에 이웃으로 와 계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18장에서 한 부자의 고민인 것입니다. 분명히 마음과 뜻과 몸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재산을 이웃에게 다 나누어 주고서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을 알고 있다고 하여도 막상 주님을 사랑하는가에 대하여는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계명은 무엇입니까? 역시나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면 옛 계명이 육체가 연약하여 이루지 못한 것을 새 계명은 어떻게 이루어 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새 사람이 되었기에 새 계명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고 거듭났으니 이제 서로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서로 사랑하고 있는지 자신을 말씀 앞에서 직면시켜 보아야 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비추어 보아여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줍쟎게 자기의 수준으로 사랑하고서도 새 계명을 다 지켰다고 착각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14-19절을 봅니다. “봉독” 형제를 사랑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으면 아직 사망 안에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있지 않느니라고 합니다. 형제는 무엇이 형제입니까? 우리가 똑 같이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구속함을 입었다면 형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자신이 거짓말하는 것이며 사망아래 있으며, 영생이 없으며,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것입니다(10절).
그러니 말로만 사랑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살인죄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과연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앉아 있지만 미워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정말 마음으로부터 용서가 되었습니까? 재물을 드리기 전에 형제와 불화한 일이 있으면 화해하고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베드로가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됩니까? 하였을 때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고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하여 주었는데 이 사람이 가다가 100 데나리온을 자기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고 감옥에 가둠을 듣고서 그를 다시 잡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 천부께서도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이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신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어느 계명이 쉽습니까? 옛 계명입니까? 새 계명입니까?
옛 계명은 문자적으로는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미워는 하여도 살인하지 않으면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지킨 것이 됩니다. 물론 그 깊이는 이르지 못한 것이 산상설교에서 드러납니다만, 그러나 새 계명은 미워하였다면 이미 살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에 비추어 보니 문자적으로 지키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람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자존심이 있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좋은 내용을 왜 실천하지 못 하는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사랑하지 하면서 나오는 모습이 간디나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죄에서 구속하시는 주님으로 믿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을 지켜낸다고 합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구약의 율법을 다 지켰다는 정도는 됩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에 직면을 하면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려니 우리의 욕심이 방해가 되고 나의 자아가 아직도 꿈틀되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아무리 예수 믿지만 무슨 바보냐, 지가 잘못하였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죽으면 죽었지 내가 먼저 손 내밀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오늘 말씀대로 하자면 사망 안에 있고 영생이 없고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심각하여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본성상 죽어도 말씀대로는 되지 않고 이런 말씀은 성경이 나와 있고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대체 용품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의사들이 데모를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대체 조제 금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의사가 어느 회사 어느 약품을 정하면 그것과 꼭 같은 것을 조제해야지 비슷한 약효가 난다고 하여 다른 것으로 대체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이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죽기까지 사랑하였으니 너희가 서로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을 하려니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체용품을 개발하는 것이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의 허상’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잘나오기. 십일조 잘하기. 교회일 충성하기. 당회장 목사에 대하여서는 가만히 숨어서라도 비난 안하기. 전도 열심히 하기. 성경읽기. 제자훈련 프로그램참석하기.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목돈 마련하기. 작정한 헌금 빠뜨리지 않고 하기. 선교사를 위하여 정한 시간에 기도하기. 비단 이런 것들뿐이겠습니까? 이런 말을 하면 꼭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헌금도 하지 말라더라, 기도도 전도도 하지 말라더라, 라고 합니다.
제가 언제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까? 이런 것들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여 나오는 것이라면 운동을 하여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이런 것들을 하지 않으면 나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봐서 하게 된다면 결국 주님을 사랑하여 한 것이 아니라 미워하여야 할 자기를 위하여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안 되니 이런 몇 가지를 하여 놓고서 위안을 삼는 것입니다. 내가 그래도 이정도로 하였으니 설마 주님이 날 모른다 하시겠나 하고서 안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심할 문제가 아닙니다. 대체용품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온전한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대체용품이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면 인위적으로 서로 사랑하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부흥회 때 목사와 장로 사이를 좋게 하기 위하여 모세의 기도에 아론과 훌이 붙들어 주는 것을 연출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울게 만들지만 그러나 나중에 싸울 때 보니 서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발씻어주는 프로그램이라든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프로그램에 참석도 해 보았고 또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대체용품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직면시켜보니 그런 것들이 대체용품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순전히 자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얼마든지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전도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하는 것도 있지만 우리 안에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도 자기를 사랑하면서도 얼마든지 종교적인 열심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고 말씀을 통하여 분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선하다고, 주님을 위하여 한 일이라고 하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우리의 죄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남편이 아내에게 보석 선물을 하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 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말 아내를 사랑하여 감사하여 선물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엇입니까? 말 안 해도 잘 알지요? 뭔가 찔리는 것이 있으니까 하는 선물이 있습니다. 바람을 피우거나 엉뚱한 짓을 할 때 선물하는 것은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랑대체용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해서 하거나 아니면 대체용품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7:1-11절을 봅니다. “봉독” 성전이 있고 절기를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제물을 드리는 그 현장에서 이것이 성전이 아니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면서 자기들은 이러니 우리가 구원 얻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온갖 불의와 죄악을 행하고서 자기들이 성전에 와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0절에서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자기들이 죄를 짓고 있으면서 자기를 사랑하기 위하여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면서 탐욕을 부리면서도 성전에 나와서 절기 지키고 제사 지내는 이것이 어찌 성전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이 아니라 도적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새 계명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보니 어떻습니까? 나는 정말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받고서 그래 이제 나는 사랑할 수 있다, 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대체용품으로 주님의 사랑을 바꿔치기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찌 해야 할까요? 회개할 뿐입니다. 주여 나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이러한 회개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형제를 그 회개의 순간이라도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주의 성령을 통하여 말씀의 비추임을 받는다면, 그리고 그 용서를 아는 자라면 회개하는 자라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세요, 라고 말을 한다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주님 앞에 용서를 받는 자인데 어찌 그런 것이 문제가 됩니까? 라는 반응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할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말씀 앞에 회개하는 심령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이 새 계명이란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주님이 이루어 내시는 사랑입니다. 성경 두 곳만 보고서 말씀을 맺습니다.
누가복음 18장 26-27절입니다. “봉독”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가라사대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오늘 새 계명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발견합니까? 누가 이 새 계명을 지켜 행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어떻게 하십니까?
요한일서 4:7-13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4장부터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피상적으로 말씀을 보지 말고 직면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대체용품으로 채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자에게서 형제의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작업을 주의 성령께서 하심을 믿으시고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이러한 사랑이 누구를 바라보게 됩니까? 주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고린도전서 16:22절에서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4:1-3 근심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의 반대말이 무엇일까요? 예수님 믿기입니다. 그런데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니 근심이 안 됩니까? 근심하지 말라고 하니 없던 근심, 잊었던 근심까지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죄 된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근심하는 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살면서 먹고 쌀 걱정, 자식걱정, 장래걱정이 안되는가 할 것입니다.
근심 말라 그러면, 염려 말라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하는가 하면서 근심 말라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도 안 해도 먹고 사나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근심과 염려가 어디에서 시작이 되었습니까?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의 에덴동산은 아무른 근심이 없는 곳입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준비하신 곳입니다. 얼마나 기후가 적절하였으면 옷을 입지 않아도 동산에서 살수 있었을 정도로 좋은 환경이었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먹을 염려, 쌀 걱정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위협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짐승들도 사납지 않았습니다. 독초도 없었습니다. 이런 동산에서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 죄란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들이 독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고서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것이 바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피조물의 지위를 떠나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독립선언이었습니다.
이러면 행복할줄 알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당장 입을 것을 걱정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나의 말을 순종하지 않았으니 이제는 먹고 사는 것이 너희의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인간은 염려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농사가 잘 안되면 어떻게 하나, 고기가 안 잡히면 어떻게 하나, 사업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가 사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없는 것은 모두가 근심과 염려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다가는 망하면 어떻게 살지, 이렇게 손해 보아서는 안 되는데, 이것 없이는 살수 없는데, 이 직장 아니면 어떻게 사는가, 그러니 그저 사장의 말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귀하게 여겨야지,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믿지만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 살길 내가 챙기는 것이지, 그래도 예수 믿지 않으면 현재의 삶보다 더 심한 액운이 올지 모르니 적당한 타협선에서 액땜식의 종교생활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 그동안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목사의 설교를 통하여 좋은 말로 위로나 좀 받아야겠다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는 없지요? 이미 계산해보고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열매가 맺어지지 않는 이유는 마태복음 13장에서 씨뿌리는 비유에서 왜 그렇습니까? 길가에 떨어진 씨는 깨닫지도 못하고 말씀을 빼앗겨 버리고, 돌밭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뿌리가 없어서 말씀으로 인한 환난과 핍박으로 곧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시밭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막혀 결실치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예수 믿다가는 망하기에 딱 좋겠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사나 하는 염려와 장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결국 신앙의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19-34절을 봅니다. “봉독” 19절에서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것은 보물이, 재물이 우리의 삶을 보장하여 주고 연장시켜 준다는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생존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이 말씀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라는 것이 헌금 많이 하면 천국의 아파트 평수가 넓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염려하는, 이방인이 염려하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이방인이나 구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너희 아버지는 이런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안다고 하십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위하여 준비합니까? 아버지가 자녀를 위하여 준비합니까?
아버지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이 처소를 준비하니 너희는 염려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을 누가 준비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다 준비하는 것이니 너희는 염려 말고 나를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이 모든 사람에게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하고 나온 인생들은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염려와 근심과 걱정으로 인하여 믿음의 열매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1-10절을 봅니다. “봉독”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오늘 말씀에 비추면 무엇이 됩니까? 염려하지 않기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에 착념치 않으니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로 인하여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말입니까?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이렇게 묵상하여 보았습니다. 지금 주님이 염려를 말라고 하시는데 세상의 염려와 근심을 하지 말라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면 이제 교회를 위한 염려를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여러분 이렇게 하여 어떻게 교회가 장래를 대비하겠습니까? 목사님, 그렇게 해서 교회 되겠어요? 이벤트도 좀하고 사람의 열심을 내게 해서라도 교회가 커져야 주님의 일을 할 것이 아닙니까? 예배당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되니 좀더 멋있게 인테리어도 하고 해야 되지 않습니까? 하는 말들이 교회를 위하여 염려를 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러한 염려로 인하여 오히려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고 경건을 가장하여 자신의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기독교 계통의 신문에 온통 나오는 광고가 새해 목회계획을 위한 강의가 소개됩니다. 등록비를 내고 오시면 한국의 큰 교회들의 목회 정보를 다 제공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 경험과 목회 성공의 비결들을 제시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당신은 교회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까? 바울사도가 교회에 대하여 얼마나 근심하였는데 그러 말을 합니까? 바울이 교회를 위한 근심이 어떤 근심이었겠습니까?
고린도후서 7:9-11절입니다. “봉독” 바울의 근심이 이런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잘못에 대하여 책망의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책망이 어떤 근심을 하게 되었습니까? 자신들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자신들을 깨끗하게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교회의 정결함을 유지하는가 하는 근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근심은 오히려 회개에 이르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세상의 근심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인적인 근심이든 교회를 위한 근심이든 간에 세상적인 관점에서의 근심은 오히려 망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제대로 세워지는지를 근심하는 것이지 세상의 기준을 따라 근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제대로 알고 바라보고 신뢰하는 것이어야지 교회가 세상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는 그런 염려와 근심이 오히려 교회를 망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디모데전서에서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견에 큰 유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든 교회이든 자족함을 모르면 이미 탐욕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이나 은이나 세상에 올 때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갈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먹을 것, 입을 것 있으면 족한 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것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는 세상의 염려는 믿음에서 떠나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는 것입니다.
부하려 하는 것이 해로운 정욕에 빠지는 것입니다. 부하려 하고 재물을 땅에 쌓아 두려고 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책임지고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주님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쌓아두고 그것을 믿는 자들에 대하여 야고보서는 울고 통곡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오히려 너희의 살을 먹으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과 5장에서 이런 것에 대한 대단히 엄한 책망의 말씀이 있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뇨,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당장 나타나는 반응이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염려 안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렇지요. 그러니 주님께서 염려를 나에게 맡겨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6절 말씀입니다. 염려와 근심을 주님 앞에서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러한 염려가 정말 쓸 데 없는 염려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면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는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요한복음 13장에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자신이 팔리실 것과 잡히시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근심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데 이제는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예수님의 권능을 보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시면 온 세상이 예수님의 세상이 될 것이고 그리고 자기들도 덩달아 한자리 할 텐데 오히려 예수님의 팔리시고 떠나실 것을 말씀하시니 얼마나 근심이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따라 다녔으니 그래도 근심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팔려 버리시면 지금까지 따라 다닌 것이 허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는데 보이는 주님이 계셔도 늘 흔들리는데 이제 주님이 떠나가신다면 어떻게 하난 근심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들은 유월절 명절이 아니라 초상집 분위기처럼 근심과 염려가 가득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계시면서 근심하지 말라고 하셔도 무엇 할 텐데 자신이 떠나시면서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떠나시면서 근심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기 위함입니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준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처소를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염려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살펴본 대로 에덴동산을 누가 만드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에덴동산은 죄로 인하여 쫓겨나게 되었는데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는 분이 주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염려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근심합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근심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오시자 전혀 근심하지 않게 됩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근심하였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근심하지 말라, 라는 말씀만 주시고 베드로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친히 성령을 보내셔서 자신의 말씀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그 결과 감옥에서 내일 처형을 당한다는데도 쿨쿨 누워 자는 그런 염려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염려가 무슨 염려입니까? 세상에서 어찌 살꼬, 하는 염려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염려가 우리로 하여금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세상의 염려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까, 하는 염려로 바뀌어 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먹고 사는 것은 어떻게 합니까? 금요 구역공부 할 때 이것 손해 보면 당장 굶어 죽는데요, 할 때 무어라고 대답을 합니까? 그것 없어서 죽게 된다면 빨리 천국 가니 좋다, 라는 자세로 해결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세 없이는 해결 방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 없이는 평생을 예수 믿어도 생활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결실이 막힐 뿐입니다.
끝으로 어느 시인이야기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사람의 고생과 가난을 보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는 늘 행복해 하였답니다. 천주교 신자인데 술도 좋아하고 시도 쓰고 그런 사람이지만 그가 행복해한 이유 한 가지는 그가 세상에 소풍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풍이 끝나면 하늘나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염려를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곳에서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고 친히 처소를 준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의 근심 그만 하시고 행복하고 기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귀천(歸天)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열왕기하 22:1-20 요시야의 개혁
요한복음을 하다가 왜 갑자기 열왕기하의 말씀을 전하는지 눈치가 빠른 분은 아실 것입니다. 오늘 달력을 보신 분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이라고 되어 있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83년전, 1517년 10월 31일에 마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의 만인성자교회 정문에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95개 조항의 토론 논제를 걸은 날입니다. 우리가 일년에 한번이라도 종교개혁의 정신을 알아보는 것이 신앙생활에 유익하리라 여겨서 종교개혁에 관하여 해마다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혹시 작년에 무슨 말씀이었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칼빈의 5대교리라는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전적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불가항력적 은혜, 제한적 속죄, 성도의 견인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루터의 개혁의 빛에 비추면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오직 은총으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성경으로만, 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입니다.
그 동안의 설교에서 이러한 중심으로 설교를 한다고 하였습니다만 어떻게 받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오직 성경으로만, 이라는 원리를 구약의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서 중세의 단편과 오늘날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다시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요시야가 8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31년을 왕으로 치리하는데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요시야가 본격적인 개혁을 단행하는 것은 18세 때에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한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구약시대에 성전을 수리 보수하기 위하여 성전입구에 헌금함을 마련하여 그곳에 돈이 차면 감독자에게 붙여서 성전을 수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시행이 되지 않았기에 왕이 다시 명하여 수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수리하다가 대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것을 서기관 사반에게 주어서 사반이 왕 앞에서 율법책을 읽습니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재앙을 깨닫고 회개의 표시입니다. 그리하여 그 율법책을 듣고 나서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기에 여호와의 진노가 크도다, 하면서 선지자의 말을 듣습니다. 훌다라는 여선지자가 왕이 읽은 율법책대로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으니 여호와의 진노가 끄지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훌다라는 여선지자가 요아스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네가 이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서 마음이 연하여져서 깊이 뉘우치고 주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었기에 나도 너의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너는 평안히 너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었으면 성전에서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찾아내었을까요? 우리가 신앙의 모든 것이 성경말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어떠한 종교체험이나 신비한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성경을 읽지 않고 있는지 마치 요시야 시대에 율법책이 성전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처럼 되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성경공부를 하는 자리에 놓치지 말고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는 자리에서 회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사실은 저주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가까지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바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압니다.
목사이니 그런 말하지 당신도 돈벌어 보라고 그러면 말씀을 볼 시간이 제대로 있는가 하시겠지만 그러나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생존입니까? 생명입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야 썩을 양식을 위하여 산다고 하여도 적어도 예배당이라도 나온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과연 말씀이 그러한가 하고서 하루에 한 장이라도 보아 갑시다. 그렇게 말하여도 잘 안하시니 내년에는 하루에 한 장씩 성경 보는 것으로 구역공부를 할 것입니다. 올해 구역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신 분은 내년에 꼭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넘어뜨리고자 하는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와서 여러분을 무엇으로 유혹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온갖 것들을 비슷하게 흉내 내면서 들이 닥치면 무엇을 감당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요시야 시대를 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서는 요시야가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합니다. 이미 온 마을마다 산당들이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산당들을 제거하기란 온 민중들의 반란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카톨릭에서 형상화 하여 섬기는 것들이 잘못된 것임을 카톨릭 신학자들도 알고 있습니다. 마치 제대로 된 스님이라면 부처에게 절하는 것이 쓸데없는 일임을 아는 것처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대로 두는가 하면 민중들의 마음을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제거하여 버리면 무엇을 보고 믿는다고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인데 보이는 것으로 대체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면 요시야 시대에 성전 안에 무엇들로 채워졌는지를 23장에서 보고자 합니다. 왕이 예루살렘의 장로들을 다 모으고 성전에 올라가니 거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들이 언약책을 읽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여호와 앞에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기로 하고서 개혁을 단행하는데 성전 안에 어떤 것들이 있는 것입니까?
23:4절입니다. 여호와의 전에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섬기는 우상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내어 불살라 버리라고 합니다. 성전이 아닌 마을에 세워진 산당들에 이러한 것들이 있으면 관리가 제대로 안되어 그렇게 되었나 보다 할 수도 있겠지만 여호와를 섬긴다는 성전 안에 이방의 신상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23:5절입니다. 성전뿐만 아니라 유다 모든 고을과 예루살렘 사면에 다 들어 찬 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23:7절에는 미동이 성전에 있습니다. 이것은 남창입니다. 성전에서 남자 창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성전에 미동의 집이 있고 그 곳에는 여인들이 아세라 우상을 섬기기 위하여 휘장을 짜는 처소였습니다. 성전이 이 정도이니 다른 곳이야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죽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8-13절까지입니다. 온갖 우상들이 가득한 곳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난 것입니까? 하나님의 율법책이 낭독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지 않으니 이런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그대로 버려두시는가, 고치시지 않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버려두심은 왜 이겠습니까? 이미 그것이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요시야가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하여 개혁을 하여도, 이러한 개혁은 민중의 반발을 살수가 있습니다.
민중들이 좋아하는 것은 없앤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여러 왕들이 어느 정도 개혁을 하기는 하여도 산당들은 없애지 못하였더라, 라는 말씀이 열왕기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시야가 정말 힘을 다하여 개혁을 하였어도 겨우 자기 자신하나 열조의 무덤에 묻힐 뿐이었습니다.
23:26-27절입니다. “봉독” 버리신 것입니다. 버리심으로 그대로 두시는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씀하자면 촛대를 옮겨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세시대가 어떠하였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종교개혁의 원인과 배경을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1) 전통적인 견해로는 교회 안에 만연하여 있었던 악습들 때문으로 봅니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면서 다양한 견해들이 나왔습니다. 2) 사상적인 설명으로는 사람마다 그 안에 개신교와 카톨릭이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도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말씀보다는 자신의 행위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고자 하는 심성이 있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3) 경제 사회적인 설명입니다. 마르크스주의의 등장으로 경제적 해석이 득세를 한 것입니다.
즉 돈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다툼은, 일어나는 것의 가장 나중에 드러나는 것은 돈과 이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어느 정도의 원인과 배경이 됩니다. 중세시대에 십자군 전쟁으로 많은 돈이 들어갔고 고위 성직자들의 사치로 인하여 돈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에서 고리대금업자에게 막대한 돈을 빌어다 쓴 것입니다. 이것을 갚을 길이 없자 그 돈을 갚는 대신 고리대금업자 집안에서 교황을 뽑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황의 하는 일이란 교회로 들어오는 수입을 자기의 집으로 송금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엄청난 성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무려 팔십년에 걸려 짓는데도 제대로 돈이 들어오지 않으니 면죄부를 팔기 시작한 것입니다. 면죄부란 처음에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하여 자금 마련차원에 못할 이유라고 봅니다.
4) 종교 신학적인 설명입니다. 인간은 종교적인 사람이라 종교 없이는 살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신성한 것 없이는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돈이 들더라도 끊임없이 신성한 것들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지상의 신성한 것들을 보고서 경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안에서도 이러한 형상의 숭배를 금지한 것입니다. 그러니 히스기야 왕의 개혁 때에 부수어 버린 것이 모세 시대 때 광야에서 놋뱀을 만들어 든 그것을 사람들이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가 그것을 부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다한 개혁인지 아십니까? 성당 안에서 마리아상을 부수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들을 두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원인들이 되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의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봅니다.
중세시대 성경을 읽지도 못한 교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민중들은 이미 사어(死語)가 되어 버린 라틴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의 불길이란 인쇄가 발달되면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되면서 불길이 가속화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은 것은 루터입니다. 루터 이전에도 여러 개혁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종교적인 탄압으로 처형당하여간 여러 이름 없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왜 이러한 교회의 잘못을 발견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틀린 점을 토론하기 위하여 95개 조항을 만들어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시작된 처절한 싸움이었습니다. 재판, 파문, 감금, 성경번역,,,,,,
그러나 이러한 루터가 죽었을 때에 그러한 개혁의 기운도 시들어 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개혁의 뒤를 이어서 나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개혁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하나님과 악마 사이에 선 루터”라는 책을 보니 “루터로 하여금 그가 없는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게 한 것은 부주의함이나 자기도취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재발견된 복음의 힘이, 그가 종종 예견했듯이 그의 죽음 뒤에 닥쳐올 혼란 속에서도, 스스로 진보해 나가기에 충분히 강하리라고 확신했다” 즉 복음의 힘이 이루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힘이 오늘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483년이 된 지금의 개신교의 모습은 오히려 중세교회를 닮아가고 있는 것이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온갖 이상한 것과 신비한 것들을 다 끌어 들이고 있습니다. 교회가 컨설팅을 행하고 경영합리화를 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돈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난주 기독신문에서 서울의 어느 대형교회에서 권사 취임식 때 600만원씩 감사헌금을 하라고 당회가 지시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임직만 이렇습니까? 총회장이 되기 위하여 몇 억씩 뿌린다는 이야기가 교단별로 다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워낙 부정부패가 심하니 합동측에서는 제비뽑기를 하자고 해서 이번 가을 총회에서 통과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얼마나 부끄러운 이야기입니까?
그냥 선거하면 돈을 쓰게 되니 제비뽑기를 한 것입니다. 이런 일 뿐이겠습니까? 오직 은총, 오직 믿음, 오직 말씀이라는 기치는 살아지고 교회도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전쟁에 뛰어 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요시야 시대 때 그렇게 부패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성전 창고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세시대에 평신도는 성경을 읽지도 못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성경이 너무 많습니다. 참고서적과 설교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누구나가 한마디씩 합니다.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아예 교회갱신협의회라는 단체가 우후죽순(雨後竹筍)식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교회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목사님 잘못하신다고 이젠 바꿔야 한다고 부르짖고 다녔습니다. 나야말로 이 시대의 지적으로 영적으로 투철한 신앙인이기에 이 교회, 이 교단, 이 나라를 바로 이끌어 나가야겠다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다니다가 마주친 조그만 나무 십자가. 나즈막이 그분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네가 죽어야 한다고”
요한복음 12:24절. 가장 큰 개혁은 내가 죽는 것, 내가 십자가 앞에서 부정됨.
요한복음 14:1-10 처소(處所)
벌써 11월 달입니다. 그렇게 요란하던 뉴밀레니엄이라고 하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11월 달입니다. 겨울이 가까이 왔습니다. 겨울이 가까이 오면 가장 걱정스러운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여름이야 그럭저럭 지낼 수 있지만 겨울은 견디기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특히 집이 없는 사람들은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렇게 애를 쓰는 것입니다. 자기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먹는 것, 입는 것을 아끼면서 집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물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렇게 애를 쓰는데 과연 우리가 영원히 거할 집에 대하여는 얼마나 걱정을 합니까?
지난주에 근심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가 가서 처소를 준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의 집은 사람이 지을 수가 있지만 하늘의 집은 사람이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친히 처소를 준비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처소가 다 마련되면 다시 제자들을 데리러 오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처소가 무엇인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고자 합니다.
우선 처소란, 말 그대로 거처할 곳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따로 처소를 마련하신다는 것은 이미 이 땅의 처소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집이란 개념으로만 처소를 이해한다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처소의 개념은 거할 집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처소를 다른 번역으로 보면 공동번역과 새번역에서는 “있을 곳”, 개역 개정판에는 “거처”, KJV에서는 "mansions", NIV와 TEV는 “many rooms” 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단어들만 보면 우선 어떤 장소적 개념의 거할 곳이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새 예루살렘성이 준비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맨션, 거처, 집이란 개념이 우리가 땅에서 생각하는 차원의 어떠한 집의 개념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곳입니다.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보석들이 무엇입니까? 금이나 다이아몬드 아닙니까? 그런데 그러한 보석들을 천국에서는 건축재로로밖에 사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땅의 돌이나 시멘트 이런 정도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것이 천국에서 건축재로로밖에 사용이 안 된다면 그 안의 다른 것들은 너무나 좋아서 땅의 것들로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무언가 비슷한 것이라고 있어야 비교가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30년 전만 하여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외국에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미국에 갔다 와서 설명을 한다고 그것이 이해가 다 됩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구멍가게 정도의 한국에서 ‘홈플러스’ 같은 대형 매장을 보고나면 무엇으로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이 거하시고 장차 우리가 가야할 곳이 이렇게 좋은 곳이니 이 땅에서 집이 없어도 너무 근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할 맨션이 많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주님이 친히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처소를 다른 각도로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소와 거처라는 말이 어떻게 성경에서 사용되는가를 보면 단지 사람이 사는 집만을 거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장 많이 사용되어지는 것이 사람이 사는 집으로 거할 장소로 사용됩니다만 그러나 성경에서 보면 처소란 것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처소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에서, 라는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회막이나 성전에 거하신다는 의미에서 성전을 하나님의 처소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안에 거하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처소로 삼는다고 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들의 처소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소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지금 처소를 준비하려 가신다는 말씀이 무엇인지 좀더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홀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창조물을 다스리고 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을 창조하시고서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것입니다. 안식하신다는 것은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보시기에 좋으신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물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대로 잘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곳에 죄가 들어와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하시고 자신의 영광을 위한 그 뜻을 이루어 내시기 위하여 새롭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하나님이 안식하실 처소를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국가가 출발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스라엘 국가란 세상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는 역할을 하는 국가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출애굽 시키시는지를 출애굽기를 봅니다.
출애굽기 15:13절. 주의 성결한 처소란 약속의 땅인 가나안입니다. 출애굽기 15:17절.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신 것,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구원시키신 것은 하나님의 자기 처소를 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범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낮 예배시의 말씀이 열왕기하의 요시야의 개혁에서 성전 안에 온갖 우상들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거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나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드렸으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리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시는 것인데 오히려 자기들이 집을 지어 드리고 제사를 지내니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우상이 가득하였을 때 하나님이 거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분이 어떻게 온갖 우상이 가득한 곳에 거하실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66:1-4절입니다. “봉독”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 되는데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사람들이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건물로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고 하면서 그곳에 온갖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나님께 얼마나 가증한 것이 되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는 하나님이 지으시는 것이라고 2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성전건축과 제사는 소를 바침이 살인과, 개과 돼지를 잡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개와 돼지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는 부정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인용하여 설교하다가 돌 맞아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7:46-53절을 봅니다. “봉독”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려고 하자 하나님이 무어라고 하신 것입니까? 너는 피를 많이 흘려서 네 아들 솔로몬이 지을 것이라고 하셨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내용이 사무엘하 7장에 나와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거하실 집을 지어드리려 하자 나단 선지자도 좋습니다, 그랬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아니 네가 나의 집을 짓는다고? 내가 언제 집지어 달라고 하였는가 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 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집이란 다윗의 위가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그 위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영원한 왕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물성전을 솔로몬이 짓게 되는데 짓고 나서는 무어라고 합니까? 열왕기에서 하늘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용납 못 하겠거든 어찌 이 전에 거하리요, 라고 합니다.
단지 주의 이름을 두셔서 이곳을 향하여 빌거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소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설교를 하는데 이사야 66:1-2절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으나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지은 성전을 붙들고 있음으로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를 갈면서 돌을 던져 스데반을 죽인 것입니다. 죽을만한 설교를 하였지요? 오늘날도 수백억을 들여서 성전을 짓는다는 곳에 가서 이런 설교를 하였다면 돌 맞아 죽지는 않아도 당장 쫓겨 날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처소를 준비하신다는 이 처소는 무엇입니까? 사람의 손으로 지을 수 없는 처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지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소가 무엇인지 성경을 보고자 합니다.
신명기 33:27절입니다. “봉독” 무엇이 처소가 됩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자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처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처소로 삼으시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의 처소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시편 90:1절.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시편 91:9절.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시편 132:13절.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하여 보면 하나님이 자신의 처소를 삼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택하셨다고 하시고 또한 그 이스라엘의 처소가 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처소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소가 아니라 온갖 우상의 처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히려 마귀의 처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하나님의 처소가 되시는 이스라엘이란 오직 한 분 예수님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내가 처소를 준비하러 가는데 이곳에 지금은 너희가 오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오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도마가 가로되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우리가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유명하신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함께 계시는 것입니까? 10절에 보시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이에 아직은 제자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직 처소가 준비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처소가 무엇입니까? 지금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거하시는 것이 처소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소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시며 성령으로 인도를 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면 왕의 자리에서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 됩니다. 이렇게 성령을 보내시면 어떻게 됩니까? 전에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가 이제는 아버지께 받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처소에 자기 백성들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이곳이 바로 처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4:20절에 보시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속에 자기의 백성을 넣어주는 것이 바로 거처를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14:23절에 보시면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보내심이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성령이 임한 자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6절, 6:19절에 보시면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성전인줄 알지 못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22절에서는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처소를 지금 주님께서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처소가 완성이 되면 주님의 재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안식을 하시는 것이며 그리고 우리도 주님을 우리의 거처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미 주님의 거처가 되었으며 또한 주님의 우리의 거처가 되었기에 임시 거처인 우리의 몸이 무너지면 새로운 처소를 덧입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 “봉독” 이 날을 사모합니다.
요한복음 14:4-6 “길”
길을 잃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디를 찾아 가야 하는데 길을 잘못 들어 당황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한두 번은 있을 줄 압니다.-한국중공업 사원아파트 앞을 말하였는데 한국중공업 공장까지 간 적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 때에도 길을 바르게 찾아 가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길에 대하여 점검하면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압니다. 전도지에 거의 다 나오는 내용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 라는 이 말씀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나는 길이다, 라고 하니 예수님을 방법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다리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많은 길이 있지만 하나님께 나가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인데 예수님뿐이다, 이 말을 맞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러니 너는 예수님을 믿으라, 그러면 사람이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오래된 대중가요 가사 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돌아가는 삼각지인가 그런 제목 같은데 이리 가면 어디이고 저리가면 어디인데 어디로 갈까 차라리 돌아서 갈까. 그런 내용의 가사가 많지요? 이러한 길에 대한 내용들은 자신들이 정처가 없는 나그네라는 표현도 되지만 자신들이 선택하여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이 길이다, 그러면 우선 생각되는 것이 내가 그 길을 선택하여 갈 수 있다고 자신을 중립적인 위치에 두고서 말하고 듣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전도를 할 때도 두 가지의 길을 그려놓고서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길 한쪽 끝은 벼랑으로 떨어지고 한쪽 끝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느 길을 가시겠습니까? 잘못 탄 버스는 갈아타십시오. 물론 전도를 이런 식으로밖에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도를 하는 사람은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미 자연인은 마귀의 권세 아래 있기에 스스로 길을 찾아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길을 설명하고 이해 시키려하여도 자신의 길이 옳다고 하지 예수님이 길이라고 인정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누가 잘 알겠습니까? 전도를 해 보신 분이라야 잘 압니다. 축호 전도를 하던 노방전도를 하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길이라고 전하여 보신 분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적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도란 길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길입니까? 이 길을 가지면 안 되는 일이 잘 되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길을 가려면 평소에 잘 되든 일이 안되는 그런 길이 됩니다. 바로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 길을 소개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이기에 예수만 잘 믿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고3들은 수능을 준비한다고 한참입니다. 아마 고3 자녀를 가진 부모님들은 자기 부모님보다 더 그들을 섬기고 심지어 하나님보다 더 섬기는 우상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나 절이나 고3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는 종교 사업이 흥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주 금요 구역공부에서 우리의 신앙까지도 자기 증명용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증명용으로 신앙을 얼마든지 이용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 예로서 “좋은 대학 들어가면 하나님의 영광이고 대학 떨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는 말을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사기라고 하였습니다. 성경 어느 부분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까? 요한계시록 23장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을 길이라고 하니 어떤 방법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방법으로서의 길인 예수님, 그리고 세상의 영광을 누려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방법차원에서의 길, 그러니 그 길이란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수단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까? 길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는 길이 있는 가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나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을까를 생각하고 있으니 그 방법이라는 차원에서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와보라, 무엇이 문제입니까? 건강입니까? 사업입니까? 막힌 문제가 무엇입니까?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에게서 해결을 받으십시오!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 되니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하나님의 특별한 종으로 사역하는 누구의 집회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포스트와 이런 선전이 어디에서 하는 것입니까? 옛날에는 기도원이나 그러더니 요즈음은 아예 교회에서 이런 길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영어에 WAY라는 뜻에 방법, 수단, 방식, 방침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이라고 하니 이러한 방법론 차원에서 예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의 방법, 기도응답의 방법, 대학입시의 방법, 요즈음은 영어 주일학교가 인기가 있답니다. 그러니 공부 잘하는 방법, 독서법, 이런 것이 어디에서 하고 있습니까? 교회의 프로그램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명심하여야 할 것은 이런 차원의 길이 전혀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도란 무엇입니까? 길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이란 지금까지 생각하든 모든 길과는 거꾸로 가는 길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그 정도만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란 사람들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 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할 때에 예수님은 무어라고 하신 것입니까? 너희가 나를 왜 따르려고 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나를 따르면 세상의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긍정을 하는 재미로 살고 있는 데 자기가 하는 일들을 미워하면서 자기를 부정하면서 따르라는 그 예수님을 누가 따를 수 있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은 도마가 예수님께 길을 물은 것에 대한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처소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두 번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시면서 처소가 준비되면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있게 하시겠다고 하시면서 14:4절에서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그러자 도마가 주님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자신이 길이란 것은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만이 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을 끝까지 가고 나서 도달하는 그런 길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자신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만이 아니라 자신이 진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통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생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과의 관계성,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으면 이것이 이미 길이요 진리요 생명 안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것을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의 방법으로 이해하고서 예수님을 보고서 그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모르니 길도 진리도 생명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길과 진리와 생명을 아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13:33절과 36절을 봅니다. “봉독” 소자들아, 제자들을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나를 찾으나 그러나 일찍 유대인들에 말한 것처럼 너희가 나의 가는 곳에 올수 없다고 한 것처럼 너희에게 말하노라 너희도 지금은 올수가 없지만 나중에는 따라 오리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이 길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막상 소경이었다는 것이 참된 길이신 예수님 앞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서도 소경이라서 길을 몰랐고 이방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도 못하여 길을 모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사람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기에 더더구나 따라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따라 갈수 있다고 큰소리를 친 베드로는 오히려 예수님을 부인할 뿐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따르기는커녕 세 번이나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맹세한다고 따라 갈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도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였지만 길이신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시자 장님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 아나니아가 기도하자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보게 된 것입니다. 눈이 가려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눈이 가려 있으면 길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오직 길 되신 분이 그 사람을 붙들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그 사람을 끌어 당겨서 길 안에 넣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 작업을 위하여 지금 주님이 지금은 너희가 올수 없으나 그러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는 것입니다. ‘이후에’라는 말씀은 곧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의 마음에서 늘 함께 하심으로만이 갈 수가 있는 길입니다. 이 길을 만드시기 위하여 주님이 어떤 일을 하신 것입니까?
요한복음 8:29, 42절을 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그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신들은 누구에게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누구의 종인 것입니까?
요한복음 8:44절에 보시면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무슨 길을 전하여도, 도를 전한다고 하는 도올이라도, 진리라고 말하는 수많은 종교적 가르침이라도, 생명을 준다고 영생을 준다고 말하는 어떤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가 이미 마귀의 자식이고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아무리 길이다, 도다, 진리다, 생명이다 하여도 결국은 마귀의 종이요 죄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에 전도란 무엇입니까? 당신은 지금 마귀의 종입니다. 즉 죄의 종입니다. 욕심이 당신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죄가 됩니다. 이 말을 듣고서 누가 기분 좋아하겠습니까? 이를 갈면서 돌로 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마치 스데반이 죽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혹 어떤 자들에게는 어찌 할꼬, 하면서 회개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죄인이라고 책망을 하면서 회개하라고 하는 메시지가 얼마나 됩니까? 회개 하라고 하여도 그 회개를 통하여 내가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육신적인 문제, 세상의 문제가 풀리기를 원한 그런 회개가 아니었습니까? 정말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여 애타하는 그런 회개가 있습니까? 이미 12년 전에 박영선 목사가 이 본문의 내용으로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면서 기독교를 심리적인 위안거리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싸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가장 큰 책임은 목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전부 좋게, 좋게 해서 헌금 받아먹고 좋은 이야기 해주어 서로 짜고 기독교를 망가뜨린 것입니다. 목사가 진리를 양보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동안 그렇게 서로 짜고 그렇게 해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가는 길을 다시 점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가고 있습니까? 먼 길은 잘못 들어서면 돌아서는 것도 멀고 힘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 길을 아시고 길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7-10절입니다. “봉독” 올리우심은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내려오신 분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 만이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누가 그 길을 알겠습니까? 그러기에 그 길이 되신 분이 마귀에 사로잡혀 있는 자를 사로잡아 내어 오셔서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사를 주신 것은 결국 봉사의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11-16절까지만 봅니다. 이런 삶이 나타나십니까? 이러한 삶이 우리의 삶의 목표이고 목적입니까? 단지 주보에 있는 표어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의 목표입니까? 그러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다시 자신의 길을 점검하시고 바른 길로 가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길입니다.
요한복음 14:7-10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오늘이 감사주일입니다. 어려서부터 들어온 감사주일의 설교내용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서 그 험악한 환경에서도 제일 먼저 예배당을 짓고, 그 다음에 학교를 짓고, 그 다음에 자기들의 집을 지었으며, 또 그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 첫 가을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고 그래서 미국은 세계에서 일등으로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그러니 우리도 어렵지만 감사를 하면 하나님이 더 감사할 것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자나라 강한 나라가 되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선교사들이 자기들의 입장에서 전하여 준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은 것이고 우리가 가난한 나라였기에 그러한 내용이 얼마나 실감나게 들렸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역사적 사실에 의하여 이미 밝혀졌지만 이번에 조찬선 목사라는 사람의 ‘기독교죄악사’라는 책을 보면 기독교가 그동안 저질러온 수많은 범죄를 다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중에서 청교도들의 죄악을 말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가서 그들이 행한 죄악상을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민 간 그들의 힘이 약하였기에 오히려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종자를 받기도 하고 농사짓는 법을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힘이 약할 때뿐이고 그들의 힘이 다소 강하여지자 앞선 무기들을 들고 와서 원주민들을 물아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소수는 원주민을 보호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인디언들을 학살한 것입니다. 인디언들의 토지 개념은 만민의 소유로 믿고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자연 친화적인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청교도들의 땅에 대한 개념이 어떠한지를 몇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전세계의 땅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땅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 경작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땅을 경작하고 개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2.먼저 발견한 땅은 발견한 자의 것이다. 거기에 정주하고 경작할 권리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원주님들은 예외이다.
3.아직도 아무에게나 점유되지 않은 땅은 몰수하여 경작 가능한 자에게 주어야 한다.
4.하나님을 모르는 이교도인 원주민들은 영혼이 없는 마귀의 앞잡이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민의 번영을 위해서는 원주민을 추방하고 우리가 그 땅을 소유하는 행위는 정의로운 일이다.
이러한 토지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으니 처음에 원주민들이 이들을 따뜻하게 대하였으나 그러니 이들이 힘이 강하여지자 1,637년, 이들이 민병대를 조직하여 원주민을 습격하여 500명을 죽이고 살아남은 부녀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잡아 서인도로 팔아 버렸다. 그리고 청교도들은 ‘우리는 오늘 600명의 이교도들을 지옥으로 보냈다’고 하며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 이후로 계속된 이들의 영토침략은 평화롭게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살인, 약탈, 강간, 방화를 하면서 이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륙을 개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야만스러운 광경을 바라본 원주민들이 치를 떨며, 우리들이 믿는 신은 남을 사랑하고 도우라고 가르치는데 당신들이 믿는 신은 왜 남을 죽이고 빼앗으라고 가르치느냐고 울부짖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차지한 땅이 북 아메리카와 캐나다이며 그리고 황금을 발견한다고 서부로, 서부로 개척을 하여 나가면서 결국 그 땅의 원주인인 인디언들은 지금 아주 비참하게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적인 실상입니다. 물론 구약의 여호수아서를 보면 정복전쟁이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죄악이 관영하였으며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면서 세상의 죄악을 어떻게 징벌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계시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문자대로 자기들에게 적용하여 그대로 시행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탐욕을 채운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추수감사의 의미가 미국적인 그런 감사를 극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땅의 조상들이 가을 추수를 하고서 감사를 한 것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든 신들에게 제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알지 못하고 행하던 때의 일입니다. 그러면 지금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사도행전 17:22-31절을 봅니다. “봉독”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합니다. 아덴은 아테네입니다. 이곳의 공개 토론장이 아레오바고인데 바울이 아테네를 돌아보니 온갖 우상을 섬기든 신전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바울이 전도를 합니다. 너희가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섬기는 신들을 보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것도 보았다. 신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서 그중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이 있다면 그런 신에게도 제사를 지내겠다는 정도로 얼마나 범사에 종교성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이들에게 참된 신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분이 누구인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1. 창조주입니다. 만유를 지으신 분이시기에 천지의 주재입니다. 주인이요 왕이십니다. 2. 그러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습니다. 3.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아니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선포입니까? 천지의 창조주가 어찌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분이 어떻게 사람의 섬김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가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여호수아가 죽을 때 하나님의 언약을 갱신합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서 잘 섬기겠습니다, 라고 맹세하자 여호수아가 하는 말이 여호수아 24:19절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제대로 섬길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생각을 교정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잘 섬기지 않아서 그렇지 하나님을 잘 섬기기만 하면 하나님이 기분이 좋아지셔서 복을 마구 퍼부어 주시는 그런 분으로 생각을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이방인들에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거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범사에 종교성이 많습니다. 절하지 않고 빌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종교성이 많습니다. 그러니 나무든 돌이든 정성을 다하여 빌기만 하면 복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나의 정성이 부족하여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종교성을 목사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합니다. 또 그런 말씀이 성경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말씀대로 한다면서 바치면 복 받는다고 큰소리칩니다. 그렇게 하여 많은 사람이 복을 받기 위하여 정성을 바치고 힘에 지나치도록 헌신 충성 봉사를 하였는데도 복을 받지 못하면 무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정성이 부족해서, 하면서 자기를 탓할 뿐입니다. 얼마나 뛰어난 종교성입니까? 그러니 이러한 종교성에 복음이 들어가면 종교성을 가진 사람들이 복음을 싫어하게 됩니다.
지금 말씀에서 무어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랍니다. 무엇이 부족하여서 사람의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랍니다. 이런 말씀이 왜 우리에게 보이지 않을까요?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종교성이 가득하여 바쳐야 복을 받지 하는 생각이 전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어떻게 바쳐서 복을 받았다는 그런 이야기만 잘 들리는 것입니다. 행한 것이 없이 받는 은혜는 생각도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25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섬김을 받아서 받는 조건으로서 무엇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 노아와의 언약을 따라서 이 땅이 있을 동안 심음과 거둠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의 풍성하심이 의인에게만이 아니라 악인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가꾸어도 자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언제 가을을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여름의 무더운 날씨기 시원해지도록 그리하여 결실이 되도록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햇빛에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모든 것을 거저 받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주님께 감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악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데도 하나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신실하게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로마서 11:35-36절에서 “누가 먼저 주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에게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주님께 드림으로 주님이 기뻐하셔서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하나님께 바치면 복을 준다 하였쟎아요?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준다고 하였지요.
그러나 누가 온전히 드릴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행하다가 하나만 그치게 되면 모두가 범한 것이 됩니다. 십일조 하나만 ‘온전히 드리면’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규례를 다 지켜 행하여서 드리는 십일조여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못하여도 십일조, 주일 성수만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은 스스로의 모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는 제물은 오직 흠 없는 어린양으로 드려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를 드리는 것은 단지 한해 농사 잘된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해 일 잘하게 되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일이 잘되지 않아도 어려워도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도행전 17:30-31절입니다. “봉독” 알지 못하던 시대는 허물치 않았습니다. 추수감사제를 조상에게 하든지 다른 신에게 하든지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천하를 공의로 심판 하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천하를 심판할 날을 정하시고 이제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단지 농사가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아니고의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이 땅에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상상의 하나님입니다. 단지 자신을 이롭게 하여 주는 우상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의 수많은 신전과 신들을 보면서 그들을 사람들이 섬긴다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많은 신들은 사람들이 섬겨 주어야 되는 신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10:1-25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은 사람들의 제사와 번제를 원치 아니하시고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의 제사를 기뻐하셨는데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몸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것이 온전하고 완전한 제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말씀에서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요청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보여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데요? 그 예수님의 계시가 담겨진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게 되고 이렇게 되는 것이 참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감사는 단지 추수하는 감사만이 아니라 이러한 추수를 가능케 하신 하나님의 낮아지심과 긍휼의 풍성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드리신 그 주님의 얼굴을 보기를 소원하는 감사여야 할 것입니다. 빌립이 보여 주소서, 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나를 본 것이 바로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한 것은 오늘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에 보는 것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더욱 하나님이 눈에 보이듯이 살아가시면서 더욱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4:11-12 주님의 일
찬양대가 찬양을 합니다. 왜 찬양을 합니까? 찬양이란 주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단지 내가 흥에 겨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 주신 일에 대하여 말하고 노래하고 증거 하는 모든 것이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해 주신 일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은 정성을 바쳤는가 하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해 주신 일이 무엇인가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봅니다.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자 예수님이 나를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본 것이 아버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마음을 다 알고 아버지의 일을 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11절에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음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그 일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병자를 고치신 일, 물위로 걸으신 일, 풍랑을 잔잔케 하심,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 죽은 자를 살리신 일, 오병이어의 일 등 그 일들을 아주 많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일들도 많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20:30-31절을 봅니다. “봉독” 책에 기록되지 않은 기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그러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합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 수많은 일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임을 알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하여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많은 일들 가운데서 무슨 사건이 결정적인 하나님의 아들의 일임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까?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 속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예수님이 파도를 잔잔케 하시자 제자들이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이 예수님이 자신이 무화과 나무아래 있었던 것을 말씀하시자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마리아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귀신들이 먼저 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벌써 우리를 멸하려고 오셨나이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 외에 예수님의 표적과 이적들이 많이 나타났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일로 보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요한복음 6장에서 나타나는 오병이어의 예를 봅시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 12광주리나 남은 사건을 통하여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우리가 죄인이로소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 사건을 통하여 너희가 영생할 양식은 이러한 빵이 아니라 바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는 말씀에 사람들이 어려워하면서 많이 떠나가고 다시는 따라 다니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38-40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자신을 위하여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서 아버지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바로 아버지를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이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다 살려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란 바로 아버지의 일이며 이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며 이들을 마지막 날에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바로 주님의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일의 궁극적인 완성의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무어라고 하신 것입니까?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부활과 재림이 다 이루어 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과 승천과 재림이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승천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라고 한 것입니다. 부활이 자랑이 안 됩니까? 승천과 재림이 자랑이 안 됩니까? 됩니다. 그런데도 십자가외에는 자랑치 않겠다는 그 십자가의 위력을 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결정적인 일이란 바로 십자가입니다.
마태복음 27:54절, 마가복음 15:39절에서 백부장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라고 고백합니다. 백부장이라면 예수님을 따라 다닐 시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군대를 통솔하여야 하는 사람입니다. 기적을 소문으로는 들었을지 모르지만 그 십자가형을 주도하는 백부장이 그렇게 힘없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그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서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일이란 바로 십자가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표적과 기사를 보였건만 사람들은 계속하여 표적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12:38-40절입니다. “봉독” 이런 말씀은 자주 찾아봅시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땅속에 3일을 계시는 것이 무슨 표적이 됩니까? 그러나 이 일이 바로 예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일이란 그 십자가로 자기의 백성들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라는 커다란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능력으로의 주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일이 이러한 것은 이제 조금이라도 알겠습니다, 라고 할 것입니다. 아주 많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주님의 일을 계속말씀 드릴 것입니다만 오늘 12절에 보시면 주님의 하시는 일을 예수님을 믿는 자도 할 것이요 더 큰 일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주님이 하신 그 십자가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더 큰 일도 한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여기서 많이 오해하는 것은 더 큰 일도 한다고 하니 자꾸만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할만한 것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한 기적들이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결국이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으로 다 이루심이 아니라 가장 기적 같지 않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하는 주님의 일이란 주님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증거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메시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를 하는데 제자들이 어떤 길로 가게 됩니까? 예수님이 가신 그 십자가의 죽으심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대속적인 십자가가 아니라 증인의 십자가입니다.
증인이 십자가로 가는 길이 전에 육체로 계신 주님이 이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더 크게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더 크게 하시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육체로 계실 때에는 예수님이 계시는 그 지역에만 예수님이 일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영이 임하여 공간을 초월하여 일어나고 있는 주의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근거가 바로 12절 끝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요,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원래의 영광의 자리로 가신 것입니다. 원래 보좌에 계시든 분이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이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제자들을 통하여 더 큰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모든 권세를 예수님이 가지신 것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을 통하여 큰일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8-20절을 봅니다. “봉독” 우리는 이 말씀만 읽으면 아이고 또 전도해라 하는구나 하는 걱정이 앞설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권세를 가지신 분이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계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예수님의 제자들이란 그분의 권세에 붙들려 나온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오늘도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을 때는 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이제는 온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큰 일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일이며 더 큰 주님의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2:24절에서 한 알의 밀알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알의 밀알로서 죽음으로 그 열매들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으심과 부활로 세상의 임금이 쫓겨 난 것입니다.
요한복음 12:31-33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고 그 죽으심이 바로 세상 임금 즉 사망을 권세로 지고 있는 세상 임금이 쫓겨나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자기의 백성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일을 무엇으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까? 십자가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결국이 한결같이 어떤 모습으로 결론이 납니까? 십자가를 지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인하여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가 어떠합니까? 스데반이 어떻게 됩니까? 바울 사도가 어떻게 됩니까? 오늘도 이런 일이 일어남은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 우편에서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능력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능력을 보이고자 교회가 힘을 원하고 세상의 실력을 원하다가 오늘날 온갖 돌팔매를 다 맞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바는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곧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가 보여주어야 할 주님의 일이란 세상과 거꾸로 가는 길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길은 세상 사람들이 분명히 싫어하고 꺼려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분명히 눈에 보이는 것을 잡고자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고 이러한 길을 본성적으로 싫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십자가의 능력이란 싫어하는 우리를 그리로 또한 밀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능력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세상적인 것으로 손해 보는 길입니다. 지는 길입니다. 그래 다 가져가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저 사람은 바보냐? 그렇습니다. 세상을 사는 일에는 바보 같습니다. 저렇게 해서 어떻게 살려고 그래, 하는 정도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사사들이 변변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하여 주님의 일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왼손잡이 에훗, 소모는 막대기를 들고선 삼갈, 여 선지자 드보라, 그 치맛자락을 붙들고 나가는 바락, 겁쟁이 기드온, 기생의 아들 입다, 여인에 약한 삼손,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이런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총회를 하면 누구를 임원으로 뽑습니까? 똑똑하고 잘난 사람입니까? 그러나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많아서 탈입니다. 주님의 일이 증거 되고 드러날 만한 어리숙한 사람이 없어서 탈입니다. 너무나 영악하고 계산적입니다. 바보스러움이 없습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왜 주님의 일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분명히 주님께서 주님의 일이 제자들에게 나타나고 더 큰 일도 나타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바보가 되려고 하지 않고 아무도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좀 바보처럼 삽시다. 바보처럼 산다는 것은 나의 주권이 나에게 있지 않다고 사는 것입니다.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다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어리숙하게 삽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미련한 십자가가 드러나 지기를 소원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4:13-16 기 도
오늘 말씀에 보시면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예수 믿는다고 살아 오셨는데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은 적이 많습니까? 받지 못한 적이 많습니까? 아마 응답을 받지 못한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아예 기도를 할 생각을 안 하고 사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안 되는데 기도한다고 뭐 뾰족한 수가 생기나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 있어서 가장 최종적인 답변은 기도해 봅시다.
이것만큼 애매모호하게 마무리 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다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기도라는 것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기도와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단어는 같은 단어를 쓰는데 그 내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있지 않습니까? 이름은 같은데 전혀 다른 사람이 있듯이 우리가 기도라는 말을 하면서도 전혀 다른 의미로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기도(祈禱)라는 것은 말 그대로 빌 ‘기’ 빌 ‘도’자입니다. 비는 것입니다. 무엇에나 비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비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빌고 비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교회에서도 비는 것이고 절에서도 비는 것이고 연하장에도 빈다는 것입니다. 연하장의 인사말에 ‘희망찬 새아침에 건강과 행운을 기원(祈願)하오며’라는 인사말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기원이라는 말은 빌고 원합니다. 그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를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교정시켜 줍니까? 비는데 바르게 빌어야 된다고 하면서 나무나 돌이나 피조물에 비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것은 우상숭배다, 하면서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아버지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내용도 너무 자기 욕심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감사 찬송을 하고서 그 다음에 회개하고 다름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제일 나중에 너의 소원을 아뢰라 그리고 마지막에는 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이런 식의 기도관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기도를 방법화 하여 누가 더 자신의 소원을 효과 있게 받아내는가 하는 기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온갖 기도응답의 비결이라는 책들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런 것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소원성취를 위하여 비는 것과 그 형식과 방법만 달랐지 내용은 그대로 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기도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 보시면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중요합니까? 무엇이든지가 중요합니까? 내 이름으로가 중요합니까? 무엇이든지는 내 이름으로, 라는 말에 제한을 받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름이란 단지 결재용 도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간구 하신 내용, 그러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니 우리는 그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라는 것을 단지 열심히 간절히 기도하기만 하면 응답된다, 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마태복음 7:7절을 그렇게 오해합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고, 악한 자라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하면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니 내가 좋아하는 것을 구하지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을 구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1장에서 같은 내용의 말씀으로 나오는데 좋은 것을 무어라고 합니까? 성령입니다. 지금 자꾸 반복을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성령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좋은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처럼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되도록 간절히 찾고, 구하고, 두드리겠습니까? 스데반처럼 되는데 구하시겠습니까?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이런 기도가 됩니까? 아이고 저 화상내 눈에 보이지나 말았으면, 그렇게 말합니까? 그러니 우리가 기도라고 하는 것이 전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이야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 때 개척교회에 출석을 좀 하였을 때 어느 청년이 기도하고 복권을 샀다고 그럽디다. 그래서 건축헌금을 다 하겠다고 하였는데 당첨되지는 않았습니다. 왜 복권을 사서 기도합니까? 당첨되면 예배당을 지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그런데 그런 복권을 저도 몇 번을 산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기도란 무엇입니까? 아들로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이 이 땅에 살면서 무엇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린 것입니까? 세상의 것으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업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결국 최고의 기도는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악한 아비라고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과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다르기에 문제입니다. 아이는 사탕이 좋은데 아버지는 칫솔과 치약을 주는 것입니다. 아이는 괴롭지만 아버지는 좋은 것을 준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의 최종 목표가 무엇입니까? 15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모든 것을 주신다 하시고서 갑자기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킨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결국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기도의 최종목표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도 역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최종목표이니 영원한 평행선이 아니라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런 기도를 누가 합니까? 그렇지요.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런 기도를 죽었다가 깨어난다고 하여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보혜사를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하시는 것은 바로 보혜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주님께서 구하시는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바로 보혜사를 우리에게 주사 영원토록 함께 거하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최종목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우리가 안 되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보혜사가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의 고집을 꺾으시고 결국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끝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사랑하는데 주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에 결국 항복당하여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노라고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오늘도 이루어 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보혜사가 오셔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우리의 죄와 비참을 알게 하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넣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주님의 사랑에 항복하게 하시고 우리를 설득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를 놀라워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기쁨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금이라도 아시겠습니까? 이제 어떤 기도를 성령이 충만한 자가 기도하였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7:54-60절입니다. “봉독” 누구 기도와 닮았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기도와 닮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주님의 영이 충만하니 주님의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으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기도의 모습입니다. 주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알지 못하고 행하나이다.
에베소서 1:17-19절. “봉독”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를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야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마음의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나라의 영광의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업의 풍성함이 어떤지를 알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여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함을 알기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해주신 일들을 알게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간구는 나의 우선적인 필요만을 구하다보니 안되면 지치고 기도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여 행한 이러한 기도의 제목과 내용들을 가지고 우리도 동일하게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들을 알고 그것을 조금씩 맛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그 천국의 기업의 영광을 맛보지 못하면 나중에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구역공부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다스림을 지금 맛을 보아야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되리라고 하면서 용서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금요일에 오신 분, 그 말씀이 생활 속에서 나타났습니까? 내가 일만 달란트 용서받았기에 나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셨습니까? 용서하면 그 안에서 나오는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의 맛을 조금이라고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의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14-21절. “봉독” 속사람이 강건하기를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주로 계시도록 기도하고 그리고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내리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바울의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이런 방향의 기도가 얼마나 됩니까? 물론 여러분 가운데서 이러한 기도를 하고 계시는 분이 있는 줄 압니다만 그러나 몇 사람이 아니라 모든 성도와 함께입니다. 모든 성도가 동일하게 이러한 주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여 지기를 기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것이 성령이 충만한 자의 기도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가 반드시 이러한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임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저 나의 필요만을 구하고 있는 자라면 속히 이러한 말씀에 눈이 열려지고 귀가 열려져서 우리 모든 성도들이 모두 주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아 가고 만족하고 누리고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이렇게 안 된다고 너무 낙심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여전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령께서 간구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시며, 또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4:16-24 보혜사(保惠師)
지난주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단지 결재도장처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그런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가 하면 나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나의 뜻을 포기하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하고 기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16절을 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 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보혜사를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아버지께 구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 보혜사가 무엇입니까? 한문으로는 지킬 ‘보’ 은혜 ‘혜’ 스승 ‘사’입니다. 은혜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스승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도우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합니다. 또 다른 보혜사란 예수님과 전혀 다른 분이라는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가지신 분이신데 오시는 모습이 다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육체로 계시기에 공간의 제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혜사로 오실 분은 그러한 제한이 없으시는 분으로서 다름입니다. 그러니 다르다고 하여도 예수님의 마음과 성품이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루어 내시고자 하시는 그 목표도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말로 성령, 진리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이 보혜사가 오셔서 자기의 백성들을 친히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위로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분을 보내어 주시도록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시는 것은 그래야 이 보혜사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혜사의 뜻이 도우시고 위로하시는 분이시라고 하시니 이 보혜사가 오시면 우리를 거저 도와주시고 위로하시고 성고하게 하시고 능력 있게 하시고 펄펄뛰고 날게 하시는 그런 분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고 그리스도의 영이시고 진리의 영이시기에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한 그러한 보혜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는데 도움을 주는 성령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환난과 고난을 당하게 하셔서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게 하시는 역할을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14:26절을 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보혜사를 성령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성령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자들에게 보내시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생각나게 하시고 또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으라, 그러면 만사형통하다, 성령 받으라, 그러면 목회 성공한다, 그러한 성령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보혜사 성령은 세상이 결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환영할만한 보혜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한얼산에 한번 가보았습니다. 여름방학 때 가보았는데 그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서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는지 주여, 주여 고함을 지르면서 성령을 달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결국 자신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술술 잘 풀리게 하시 위한 그런 성령을 구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 즉 보혜사의 뜻이 무엇입니까? 도와주시는 분, 지켜주시는 분, 힘을 주시는 분, 위로하시는 분, 대언하시는 분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 강사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성령만 받으면 안 되던 일이 잘 풀린다는 간증들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는 죽도록 고생하더니 은혜를 받고서 성령을 받고서 일이 잘 풀렸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도와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왜? 성령은 도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보혜사를 원어로 말하고 영어로 말해가면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파라클레이토스, 컴포트, 카운슬러, 헬퍼 등의 말을 하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강아지도 방언을 받는다면서 방언을 받지 못하면 강아지만도 못하다는 것이지요?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입니다. 역전의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그 여전도사가 하는 설교를 노트에 메모를 해두었는데 얼마 전에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경우를 들어서 처음에 고생을 하지만 나중에 역전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럴수록 더욱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받아서 인생의 성공을 합시다, 라는 것입니다. 역전의 스릴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운동경기도 역전극이 재미있듯이 지금 묶이고, 막히고, 꼬이고, 뒤틀어진 문제들이 성령을 받으면 해결이 됩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 얼마나 답답한 일이 많은 사람들입니까? 그러니 그러한 문제들을 놓고서 기도하는데 응답의 비결을 말하니 모두가 주여 성령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7절을 봅시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세상은 받을 수 없는 영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과는 아무른 상관이 없는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배척을 받는 영이 진리의 영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반복시키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러한 진리의 영을 알 수 있고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아무도 원하지 않아야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이 원하지 않았듯이 진리의 영을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우리를 진리가운대로 인도하시니 세상과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임한 증거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과연 성령을 받은 자입니까? 우리가 찾고 구하는 바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닙니까? 만약에 아직도 내가 예수를 믿어서 세상의 덕을 보고자 함이라면 빨리 회개를 하시든지 아니면 다른 동네에 가보셔야 할 것입니다. 결코 세상의 성공을 예수님이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택하신바가 되고 주님의 성령을 받은 자는 오히려 세상에서 미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8-19절을 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러한 예수님을 사람들이 좋아 하겠습니까? 이게 사람의 능력으로 될 일입니까?
그러므로 세상은 결코 받지 못하는 것이 보혜사입니다. 그리고 혹시 안다고 하여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이것이 죄인 줄 알고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를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보혜사 곧 성령을 받고 아는 자는 누구입니까?
다시 17절을 봅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세상은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희란 세상과 구별된 예수님의 택하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만이 주님이 택하신 자 곧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만이 이 성령을 받게 되고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마치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듯이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도록 하시는 장치가 바로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소를 마련하는 것이며 이렇게 되어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안에 진리의 영이 계십니까? 보혜사로 계십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내 안에 보혜사가 계시는지 아니 계시는지를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20절을 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 날에 즉 보혜사가 오시면 이러한 내용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게 됩니까?
21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을 결국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분명히 보혜사가 임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 있게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보혜사가 계시지 않으신 것이 아닌가? 내 사는 모습을 보니 예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늘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여도 그저 나의 이익을 위하여 예수님을 섬기는 차원이 아닙니까? 이렇게 하면 벌 받을 텐데 하면서 종교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억지로 마지못하여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 주님의 은혜와 용서가 감사하여 눈물겹도록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마 자신 있게 대답하실 수 있는 분이 많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 꽝입니까?
이런 예를 하나 들고자 합니다. 적절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에 시계가 있습니다.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건전지 때문입니다. 건전지가 없으면 시계가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어 있는 상태는 꼼짝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야할 방향으로 한 칸도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건전지가 들어가면 가야할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전지가 들어와도 원래 고정되어 있는 힘이 있습니다. 가려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려고 하는 저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건전지의 힘이 저항하는 힘보다 더 강하기에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몸을 가지고 이 땅에서 발을 붙어사는 한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거북스러운 것입니다. 생소합니다. 이런 일이 체질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소한 일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마땅한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저항하는지를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바로 답이 나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기쁩니까? 나를 사랑하는 것이 기쁩니까? 나의 재미와 나의 욕망이 채워지는 것이 기쁩니까? 주님의 욕망이 나에게 채워지는 것이 기쁩니까? 물어볼 것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요구가 나에게 채워지는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의 욕망 속에 끼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강합니까? 주님이 강하십니다. 어느 정도로 강하십니까? 영원토록 강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저항하여도 주님이 영원하시니 우리가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고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정말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예수님이 나의 주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입니다, 하는 고백이 나온다면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조금의 위안이 되십니까? 그러면 성령이 오셔서 결국 이루어 내실 일이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8:12-30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이 된 것입니다. 이 아들을 이제는 아들다운 자로 만들어 내시는데 그 길이 바로 고난의 길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당하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 속에서 우리가 연약하여 탄식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하여 못하는 것을 보혜사께서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데 그 것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러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때 참으로 한심스럽고 좌절이 되고 낙심이 된다 할지라도 그러나 소망을 잃지 않음은 주님의 약속, 즉 주님께서 보혜사를 보내셔서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이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이러한 주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진리가운데서 참으로 세상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아들의 영광의 형상에 이르기를 소원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한복음 14:25-31 평안을 주노라
몇 주 전에 금요성경공부의 질문에서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등 따시고 배부른 것이 최고다”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가장 우선적인 필요가 등 따시고 배부른 것입니다. 특히 날이 이렇게 추워지는 계절에는 더욱 등 따시고 배부른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 먹고 살만하다고 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등이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거저 소원이 배부르고 등 따신 것이 소원인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인사가 진지 잡수셨습니까? 할 정도로 먹는 것이 시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때는 지금도 물론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은 같은 소원이겠습니다만 등 따시고 배부른 것이 우선 평안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열심히 일하여 등 따시고 배부르게 되자 그것으로 평안하여 졌습니까?
결코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등이 뜨뜻하고 배부르게 방에 누웠으니 다른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무언가 즐길 거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을 부잣집에 한 대식 들어와 있는 흑백 텔레비전을 보려고 몰려 든 것입니다. 그러니 등 따시고 배부른 것이 평안이 아니라 텔레비전 한 대 정도는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결코 평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하는 노력보다 더 열심히 노력 하여야 텔레비전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등이 따시고 배가 불러야 하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텔레비전을 사려니 얼마나 더 힘써 일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힘들게 텔레비전을 한 대 사들이고 이제 한숨 돌릴까 하는데 이제부터는 텔레비전에서 쏟아 내는 광고의 홍수 속에서 자꾸만 자신이 가난하여 지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의 새것이 내일에 헌 것이 되는 상황에서 계속하여 발전 성공 진보라고 외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멈추면 쓰러져 버리는 두 바퀴로 달려가는 자전거를 탄 사람들 마냥 도대체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하여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것이 오늘의 모습입니다. 브레이크를 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브레이크를 걸면 그대로 무너져 내려버리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언제 한번 허리 펴고 아, 이제 평안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잠시의 쉼을 가질 수는 있어도 그러한 쉼들은 더 열심히 뛰기 위한 충전의 시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도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멈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멈추어 버리거나 천천히 간다면 이 경쟁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어디서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까?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곳에는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는 제일먼저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였기에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 되었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과 남자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인생은 이제 염려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농사걱정 자녀걱정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생활의 염려를 한다는 것이 이미 하나님을 떠난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고 하니 나는 죽어서는 안돼, 살아남아야 해, 나는 성공해야만 돼, 이것은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시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모두가 일등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도 모두가 일등을 하겠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일생동안 결국 죽음의 종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메여서 그저 꼼짝 달싹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말씀드렸듯이 목사가 자신의 밥줄이 끊어질까봐 교인들에게 바른 말씀을 전하지도 못하는 벙어리 개가 되어 있는 상황이나, 여러분이 세상의 직장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나 별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망의 종노릇하고 있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14-15절을 봅니다. “봉독” 사람들이 무엇에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망에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와 사망의 법에서 꼼짝을 하지 못하고 그저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사단의 영을 따라서 끌려 다니던 우리들을 어떻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까? 사망으로 사망을 잡으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사망의 종노릇하고 있는 우리를 놓아 주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무엇을 주신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줄 수 있는 평안은 무엇이라고 우리가 보았습니까? 등 따시고 배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등 따시고 배 부른다고 참된 평안이 있습디까? 새로운 욕망이 샘처럼 솟아나는 것입니다.
차라리 춥고 배고플 때는 욕망이 단순하였습니다. 그러나 등 따시고 배부르고 나니 이제는 욕망이 한도 끝도 없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 세상에서 참된 평안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이 주고자 하는 평안은 모두가 속임수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하였던 그 유혹에 안 넘어갈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혹 안에 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찾기 위하여 달리고 달리다가 그대로 지옥으로 달려 갈 뿐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평안,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무엇이겠습니까? 결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그러한 평안은 어린이가 부모의 품에 있는 것과 같은 평안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는 말씀을 우리가 잘 압니다. 2주전에 금요 성경공부에서 배웠습니다. 어린 아이 같다는 것은 어린 아이가 순진하다거나 착하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한 것이 죄인 된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 같다는 것은 어린 아이의 특징은 자신의 모든 필요를 자신이 이루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사람이 공적을 쌓아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받아서 가는 나라이기에 어린 아이 같아야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특징을 하나 더 들자면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요즈음 아이들이야 눈치가 빨라서 아빠 엄마 눈치 보고서 자기들도 분위기를 읽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젖 뗀 아이 정도라면 부모만 있으면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란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세상의 염려를 한다는 것이 교만이고 불신앙입니다. 얼마나 아버지를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까? 부모가 없는 어린 아이는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가 아버지입니까?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 아닙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신 것입니까?
요한복음 14:1-3절. “봉독” 14:18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제자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염려 말라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사람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염려가 안 됩니까?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 사먹으라고 한다고 배부릅니까? 직접 먹을 것을 사다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추운 사람에게 옷 사다 입으라 하지 말고 옷을 사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 말라고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신 것입니까?
요한복음 20:19-21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이 얼마나 두려워 떨었겠습니까? 자기들도 잡히면 십자가에 처형되지는 않을까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을 꼭 닫아걸고 있는데 그 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 지시기 전에 너희는 염려 말라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고 하셔도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렇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찾아 오셔서 무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확인하고서 기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번 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면서 예수님의 평강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평강을 말씀하시고 40일 만에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자신의 평강을 제자들에게 주시는데 처음에는 말씀으로 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다신 오셔서 확인을 시키시고 드디어 성령을 보내심으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주신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과 다른 것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나타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4: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마음에 근심도 두려움도 없는 그런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평안입니까? 우리는 아무른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계속 어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괜히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평안해도 되는가 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세상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염려도 두려워도 하지 않는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평안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나타납니까?
사도행전 4:18-19절. “봉독”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하니 가두어 버립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도록 위협합니다. 그러나 하는 말이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합니다. 얼마나 두려움이 없습니까? 이것이 평안입니다. 노회나 총회에서 소환하는데 겁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목사 안 되어도 상관없다는 담대함이 바로 평안입니다.
사도행전 5:29절. “봉독” 감옥에 가두며 위협과 협박 속에서도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주님의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40-41절. “봉독” 예수님 이름 때문에 매를 맞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이런 평안을 어떻게 세상이 감당을 합니까? 사도행전 12:1-12절. “봉독”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마저 잡아 죽이려고 군사 넷 식 네 패에 맡겨서 지키게 합니다. 유월절 후에 백성들 앞에서 공개 처형하려는 것이지요. 그런데 두 명은 보초를 서고 두 명은 양 옆에서 손과 발에 쇠고랑을 채워서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얼마나 평강을 누렸으면 쿨쿨 자는 것입니다. 천사가 가서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 하는 정도의 평안입니다.
며칠 후에 처형될 사람이 얼마나 평안하게 깊이 잠들었으면 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깨울 정도로 잡니까? 이런 평안이 우리에게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자질구레한 일들에 잠을 못자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입니까? 올해도 한해가 다 되어 가는데 나는 이루어 놓은 것은 없고 이래 가지고 어떻게 하나 긴긴 밤을 기와집 열두 채도 더 지었다가 무너뜨리면서 잠을 못 주무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올해는 장가를 가야 할 텐데 올해는 형편이 나아져야 할 텐데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으로 잠을 자지 못하고 계십니까? 그래서 불면증이 걸렸습니까?
주님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예수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평강을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 죽은 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내 안에 사시는 분이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더 이상 이 세상의 평가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었다,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에 목숨을 걸 일이 없는 것입니다. 대학에 떨어지거나 시험에 실패하면 꼭 몇 명이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실패하였다고 또 죽을 목숨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물으시겠습니까?
너희에게 내가 준 평안이 있는가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그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평안을 누리지 못하면 그만큼 우리의 손해입니다. 쓸데없는 염려를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머리카락 하나 희거나 검게 하지 못하면서 생명을 한 순간도 어떻게 못하면서 왜 내일 일을 염려 하십니까? 오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모퉁이돌선교회’에서 온 편지 하나 읽겠습니다. “읽기” 오늘도 참된 평강과 자유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입은 자는 세상의 어떠한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칼이나 위험이나 죽음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이 놀라운 평강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5:1-5 참 포도나무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으로 평안을 누렸습니까? 누리지 못하고 사셨다면 아직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 저녁에 유시민씨가 진행하는 100분 토론에서 한국경제 회생인가, 추락인가라는 제목으로 재정경제부 장관과 언론인과 교수들이 토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자가 결론을 내리면서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때 뉴딜정책을 펼친 루스벨트의 말을 인용합디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라는 것입니다.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가 할 수 있다, 라는 긍정적 생각을 가져야지 안 된다 두렵다 하는 그 두려움이 더 두려운 것이라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루스벨트식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운동들이 일어나도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두려워 마시고 믿음을 가지고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합시다. 그런 설교하고 세상 사람들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로 위기를 극복하여 내자는 것하고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말만 들어간 것이지 결국 세상의 평안과 안정을 원하는 것이라는 내용은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란 세상 사람들이 알 수가 없는 평안입니다. 어떤 평안입니까? 내일 사형을 당하여도 오늘 쿨쿨 잘 수 있는 평안입니다.
왜 입니까? 이미 완성된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피로 만들어진 나라, 경제문제가 전혀 발생하지 아니하는 나라, 불안이나 염려가 전혀 없는 나라, 주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가 준비 되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의 어떠한 일들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들어가는 목록 중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8절을 봅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 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들어가는 일순위가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두려워 한다는 것은 아직도 사망의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정말 내가 주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 있는 가를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과연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가를 점검하시기를 바랍니다. 망년회를 하느라고 바쁘시지요? 아무리 회사가 어려워도 망년회는 꼭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까지의 일들을 다 잊어버리고 이제 새해에는 더 잘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계획을 세워도 이런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제 월말이니 다음 달부터는 잘 해야지, 이제 연말이니 새해부터는 정말 잘해야지 하면서 망년회도 하도 신년회도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작심삼일입니다. 이러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해마다 망년회를 하고 신년회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어제 찬양대 식사하였다고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방식대로 신앙생활이라고 하고 있는 모습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송구영신예배 하면서 늘 하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연말쯤 되면 늘 하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주님 올해는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하였지만 이제 새해에는 열매를 많이 맺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 열심히 열매를 맺겠습니다, 하면서 연말과 송구영신을 하지만 역시 다음 연말이 되면 꼭 같은 내용의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을 보면서 당장 열매를 맺지 못하였는데 오늘 또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구나, 이런 식의 감을 미리 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 듣기 전에 이미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 올해 헌금 제대로 못한 것 내년에는 열심히 하지, 전도도 한명 못하였는데 내년에는 열심히 하지 뭐, 결석도 내년에는 하지 않고 잘 하지 뭐, 이런 식으로 계산하고서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그동안 열매라는 것들을 맺으라 하면서 이러한 열매들을 너무나 많이 들어 왔기 때문에 열매 이야기 나오면 미리 알아서 자기의 모습을 챙겨 보는 것입니다. 뭐 나는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낫지, 나는 총동원 전도주일날 우리는 하지도 않았지만, 하였다면 어떻게 위안을 삼습니까?
나는 한사람이라도 데려 왔는데 뭐, 이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사람도 어떻게 데리고 온 것입니까? 일당을 주고서라도 데리고 오라고 하니 어떻게 하든지 한사람이라도 오게 하면 체면이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제일 수월한가 하면 학교 선생입니다. 한두 명쯤은 데리고 와서 자기 이름 쓰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카드를 작성해보아서 압니다. 이렇게 해 놓고서 자신의 행위를 저울질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말씀이 그러한 우리의 종교적인 업적들을 열매로 맺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가 어디에 있는가, 그 소속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하시는 말씀입니다.
1절 말씀에 내가 참 포도나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십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그러면 무엇이 됩니까? 참 포도나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말씀하신 내용들이 나는 무엇이다, 라는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라는 말씀은 다른 자는 선한 목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도적이요 강도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길이다 생명이다 진리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 라는 말씀은 다른 것은 양의 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참 포도나무다, 라고 말씀하심은 너희는 참 포도나무가 아니다 그러니 너희가 나에게 붙어야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한 곳이 성경에 많이 나타납니다. 몇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80:8절.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예레미야 2:21절.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호세아 10:1절.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셔서 약속의 땅에 심으신 것은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열매가 무엇으로 나온 것입니까?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먹고 살만하면 할수록 오히려 우상을 더 많이 섬기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하나님이 모델로 삼으셔서 테스트를 해보시는 것입니다. 보아라, 인간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알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하여도 열매를 맺는 것이란 악한 열매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7:15-21절입니다. “봉독” 열매로 아는 것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얻을 수가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열매의 역할이란 무엇입니까? 열매를 많이 맺자 하는 내용이 아니라 네가 어떤 나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열매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아무리 만들어 내어도 이미 그것은 악한 나무에서 나온 악한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가 무엇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다고 이것이 좋은 열매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쁜 나무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열매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암도 고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계 최대의 교회를 만들어도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안하고 순수하게 작은 교회라도 아름답게 목회를 하였노라고 하여도 그것이 결코 주님 앞에서 의로운 열매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억지 열매를 맺으라고 하니 사람들이 시기와 경쟁을 하면서도 열매라도 내어 놓는 것을 주님이 얼마나 역겨워 하시겠습니까? 마치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하나님의 택한 족속이니 자기들의 능력으로 열매를 맺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백성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이 오시니 모두가 악한 포도나무라는 것이 들통이 난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는 오직 예수님뿐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 유대인들에게는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입니까? 너희는 다 마귀의 자식이다, 라고 하시니 어찌 예수님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기분이 나쁜 사람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예, 주님 옳습니다. 정말 저는 악한 자입니다, 라고 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임을 아는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할 것입니다. 주님 저는 스스로는 어떠한 선한 열매도 맺을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그냥 두시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악한 열매가 나올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선해 보이고 윤리 도덕적으로 착해 보인다고 하여도 결국 나에게서는 선한 것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철저하게 아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 속에 선한 가능성이 1%라도 있었다면 예수님이 죽으시지 않으시고 그 1%를 사용하셔서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1%의 선한 것이 없는 죄인이기에 아무리 교육을 시키고 교양을 훈련시키고 금욕과 절제를 하여도 이미 악한 나무인 것을 무슨 수로 좋은 열매가 나오겠습니까?
예레미야 13: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 진데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흑인이 그 피부색을 어떻게 바꿉니까? 우리나라에도 6.25전쟁 때 흑인들이 와서 한국 여자와의 사이에 흑인이 태어났습니다. 인순이 같은 사람이지요. 그들의 어려서의 괴로움을 우리가 압니까? 피부색이 달라서 얼마나 돌로 문지르고 씻어 보았겠습니까? 그런다고 피부색이 달라집니까? 표범의 얼룩반점이 무엇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까? 이것이 가능하다면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열매가 나온다는 것입니까?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악한 종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델로 들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성경만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참 포도나무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는 다음주에 보기로 하고서 오늘은 우리가 어떤 나무였는지를 확인하고서 내가 어디에 속하여 있는지를 점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4-5절을 봅니다. “봉독”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가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러하리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는 선한 일을 할 수 없지만 예수를 믿고 나서 이제 거듭났으니 이제는 선한 일을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저 멀리 밀쳐 두고서 보십시오, 나를 이렇게 구원하시고 목사가 되기까지 은혜를 주셨으니 이제 제가 멋있는 목사 바른 목사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능력 있는 주의 종이 되어서 큰일을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라는 것이 바로 악한 열매를 맺고 있는 증거입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주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자꾸만 이세상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다 보니 신앙의 열매도 수량으로 측량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어디에 소속이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3-24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원래부터 돌 감람나무입니다. 그런데 참 감람나무가 잘림으로 우리가 끼어 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까? 자긍하지 말라,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가능성이 있어서 구원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하여 놓았으니 멋진 일을 하여 보답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여서 그렇게 하신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 앞에 붙어 있는 자세는 무엇입니까? 겸손하게 하나님의 인자함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 우리에게 생명보다 나은 것입니다. 주님의 이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면 더 이상 무슨 두려움이 있습니까? 더 이상 무슨 염려가 있습니까?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바쁘고 복잡한 연말 교회들마다 정신없이 바빠 돌아갈 때 일수록 더욱 조용히 우리가 어디에 소속이 되어 있는지를 확인하심으로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음을 복으로 알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5:1-11 사 귐
2,000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일년 동안 여러분은 무슨 열매를 얼마나 맺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그동안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게 되지요? 그리하여 점검을 해 보는 것입니다. 헌금은 얼마나 했으며, 전도는 얼마나 했으며, 봉사는 제대로 하였는지, 찬양대원으로 몇 번을 빼 먹었는지, 교사로서 연초에 다섯 명을 맡았는데 지금은 몇 명이나 남았는지, 이런 식의 열매를 점검하기에 바쁠 것입니다. 그렇게 일년을 돌아보면서 생각하고서는 내가 부족하였다고 생각이 되면 주여 죄송합니다, 새해에는 열심히 해서 더 많은 열매를 맺어 드리겠습니다, 하든지 아니면 목사님 올해는 좀 쉬겠습니다, 하지요?
그러나 반대로 아주 열심히 하신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나는 한번도 결석도 안했고, 전도도 했고, 기도도 많이 했고, 헌금도 한번도 떼먹지 않았다면 내가 주님 앞에서야 자랑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교회에서 나만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서 주위를 돌아보면서 그래도 나만큼이나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하는 식으로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설마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정말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열매를 이야기하면 왜 이런 식의 열매들 즉 내가 무슨 일을 하여서 하나님께 보탬이 되리라는 그런 열매만을 생각하게 됩니까? 그것은 교회가 이미 세속화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속화란 교회가 세상을 닮은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란 언제나 물량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사람이 있으므로 우리 회사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로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회사나 단체에 그 사람이 유익을 줄 수 있는지의 여부를 수치로 나타냅니다. 능력을 점수로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능률이 없는 사람은 퇴출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올해 서비스를 두 가지 받아 보았습니다. 하나는 삼성 온풍기이고 또 하나는 기아 자동차입니다. 한사람은 집사였고 한사람은 교인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꼭 같은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서비스를 받고 나면 전화가 와서 서비스의 질이 어떠하더냐고 물을 것이라고 그러면 제발 말 좀 잘해 달라는 것입니다. 불만 보통 만족 매우만족, 이런 식으로 물으면 매우 만족이라고 해 주십시오.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다가 보니 교회 안에서도 한 사람의 교인을 볼 때 무엇을 기준으로 봅니까? 저 사람이 있으므로 우리 교회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를 기준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부자가 오는 것과 가난한 자가 오는 것을 초대 교회 때부터 차별을 한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야고보서 2장에서 무어라고 합니까?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오면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면서 가난한 자가 오면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가 서로 악한 생각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세상에 가난한 사람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세상의 부자라고 교회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대접을 더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교회가 돈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돈 없이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세상적인 생각이며, 세상적이란 말은 마귀적인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돈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마술사 시몬이 성령의 역사를 돈 주고 사려고 한 것입니다. 그럴 때 베드로가 무어라고 합니까? 저주를 퍼붓습니다. 성직매매라는 말이 사이머니(simony)입니다. 즉 시몬이 성령의 역사를 돈 주고 사려고 한데서 유래가 된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오늘날 교회라는 이름이 세상에 짓밟히는 맛을 잃는 소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방송국과 잡지사에서 앞 다투어 교회를 밟고 있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에 버리워 밟힌다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런 욕을 얻어먹으면 회개를 하여야지. 오히려 하는 일들이 커다란 예배당에 수만 명씩 모여서 방송국 성토대회 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1천 2백만의 기독교의 이름으로 그 방송국에서 선전하는 것은 불매 운동을 벌이겠다고 힘으로 협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기독교입니까? 세상의 힘의 논리로 일하는 것이지요. 한국의 커다는 교회들이 이런 식으로 대체를 하고 있으니 평소에 하나님의 일도 이런 식으로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과 아무른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세상의 물량적인 열매들을 결코 요구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천지가 다 하나님의 것인데 무엇이 부족하여 우리의 것을 요구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만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하자면 사귐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사귐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목적입니다. 천지 만물을 만드시고 사람을 최후에 만드셔서 하나님과의 사귐 즉 교제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이후로 그 사귐이 단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사람들이 자기들의 힘과 자기들의 지혜로만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과 단절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 지은 인간을 다 멸하여 버리시면 되시는데 왜 다시 몇을 선택하여 살려 내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택함을 입은 자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왜 살려 내셨는가를 바르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에 자꾸만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 같은 죄인 살려 주셨으니 이제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요, 하면서 하나님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열심히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하면서 온갖 사람의 힘을 다 동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경영방법을 도입하고, 세상의 성공한 방법을 교회에 그대로 도입하여 숫자를 모으고 교회를 키우고 그러면서 열심히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더 큰 일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지난주에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여 구약의 몇 곳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오늘은 한 곳을 더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5:1-7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이 포도나무요 하나님이 가장 좋은 포도나무로 가장 좋은 밭에다 심었는데 맺힌 열매가 들포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뽑아 내셔서 가나안에 심으시고 원하신 열매가 무엇입니까? 7절에 보시면 공평과 의로움입니다. 이러한 열매는 결코 세상의 물량적인 그런 열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 공평과 의입니다. 이러한 열매를 원하셨는데 오히려 무슨 열매를 맺은 것입니까? 강포와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에서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입니까? 헌금 많이 해서 예배당 짓는 것도 아니요, 사회 구제사업 많이 하는 것도 아니요, 세계에 제일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4:17-18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이사야 5장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공평과 의라고 하였지요? 로마서에서 무엇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성령 안에서 맺는 열매이고 이런 것을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결코 세상의 기준으로 측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열매라는 것은 가지가 맺어야지 해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가 가지에 맺힐 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붙어 있어서 나오는 열매는 사람들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세상의 업적들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열매가 어떠한 것들입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갈라디아서 5:16-26절입니다. “봉독”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대비합니다. 육체의 열매는 대부분이 분리를 일으킵니다. 음행, 더러움,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렇게 대비를 해보면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로 업적을 이루어 내기 위하여서는 끊임없이 시기와 질투와 경쟁을 불러 일으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서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기에 비하여 성령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업적이 아니라 성품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육제적인 열매는 자기 잘남을 내세우기 위하여 분리에 이르게 됩니다. 술수가 나오고, 원수를 맺고, 분쟁과 시기, 분냄과 당짓는 것, 분리, 투기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희락이며 화평이며 오래 참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란 결국 이러한 열매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이미 주님과의 무엇이 있어야 됩니까? 주님과의 사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6절을 봅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사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거함이란 무엇입니까? 17절에서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는 무엇이나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구하면 주신다니 우리는 또다시 나의 세상적인 필요를 구하면 된다는 것으로 보지만 그러나 전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결국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함, 기도의 문제도 결국 주님과의 사귐입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사귐이 있으면 있을수록 반드시 자연스럽게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나오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열매가 무슨 열매입니까? 조금 전에 갈라디아서에서 본 그러한 열매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많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 열매란 결국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귀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아버지와의 사귐을 가진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와 지시를 받아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과 맺어진 열매가 십자가라는 열매입니다. 그 십자가라는 열매로 인하여 우리가 맺어진 것입니다. 이러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5: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란 우리의 육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즉 죽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가 죽음으로, 우리의 욕심이 죽음으로, 우리의 자존심이 죽음으로 나오게 되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죽습니까? 늘 욕심이 샘솟듯 솟아나고 있는데요? 그러므로 성령을 쫓아 행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와의 사귐입니다.
요한복음 15:9절입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한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귐에로의 초대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며 특권입니까? 허물과 죄로 죽어서 그저 죽은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 우리에게 영생으로의 초대를 하시고 주님과의 사귐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죄로 인하여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제 주님과의 사귐이 회복되었다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러한 사귐의 회복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귐을 통하여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11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말함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의 사귐을 통하여 가지고 계신 그 기쁨을 우리에게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즉 예수님과 사귐이 있으면 이러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예수를 믿어오면서 얼마나 사귐이 깊어졌습니까? 사귐이 깊어질수록 더욱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뜻입니다. 그런데 기쁨과 감사가 없다면 결국 주님과의 사귐이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의식은 행하지만 주님과의 교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은 사라지고 종교적인 의무감만 남아서 피곤할 뿐입니다. 이제는 주님과의 사귐이 시작합시다.
요한일서 1:3-4절을 봅니다. “봉독” 사귐은 결국 말씀과 기도입니다. 남녀가 서로 사귀면 다른 사람이 보아도 아는 것입니다. 무언가 얼굴에 생기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주님과의 사귐이 더욱 깊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5:12-17 친 구
2001년 1월 첫 주일입니다. 사람들마다 묶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뜻 깊게 맞이하려고 해돋이를 보려고 몰려가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송구영신예배라든가 아니면 신년축복 부흥회에 참석하며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기 위하여 금식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은 결국 시간이라는 우상숭배라고, 12월 31일 저녁예배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달력의 역사를 보면 권력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얼마든지 조정이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날짜를 연기시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줄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천문학자들이 달과 별의 움직임을 보고서 날짜를 계산하여 차이가 나는 것을 윤년으로 계산하여 더하고 늘린 것입니다. 그러한 시차를 중세 교회에서 교회의 절기와 맞지 않아서 1582년 교황 그레고리 13세 때에는 10월 5일에서 10월 15일로 바로 넘어가기도 한 것입니다. 10일이 달력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이러한 식의 변동들이 아주 많이 나타납니다.
성경에서도 달력이 바뀌는 적이 한번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날을 기점으로 그 해의 첫 달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2:1-2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기존의 이집트 달력이 있는데 출애굽을 기점으로 새롭게 달력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지금도 두 개의 달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과 달에 메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어야 새사람입니다. 해가 바뀐다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 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어야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로움이란 과거와의 단절입니다. 나의 과거의 수치와 죄악과 더러움이 단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이력과 잘남과 경험도 모두가 단절이 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과거의 모든 것이 장사 지낸바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거듭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누가 압니까?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시니 율법의 선생이라는 사람이 다시 어머니 배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됩니까, 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위로부터 난다는 것은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하면 또다시 어떻게 하고서 방법론을 묻습니다. 그러나 방법은 없습니다. 바람이 바람 마음대로 불듯이 성령으로 나는 자도 자기가 어떻게 거듭났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거듭난 자 즉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반드시 예수님과의 관계성속에 묶여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그 사람의 능력을 결정합니다. 이것이 육신에 속한 생각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공수특전단의 베레모인지, 해병대의 베레모인가에 보면 ‘하면 된다’ 정도가 아니라 ‘안 되면 되게 하라’고 글씨를 수로 박아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는 누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소속이 되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소속의 문제를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비유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이미 두 번에 걸쳐서 살펴보았습니다만 처음에는 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 있다는 것은 내가 가지에 매달려 있어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가지가 나무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 뿌리가 그 가지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른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어떠한 연장으로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화목으로도 거추장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 쓰레기들을 불태울 때 함께 불태워 버리는 것이 포도나무의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가지 스스로는 아무른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가치가 없을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입니다.
이 가지가 누구입니까? 모든 사람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쓸모없다고 하는 것이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믿을 것이라고는 사람뿐인데 사람이 이렇게 쓸모가 없다고 하니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늘 우리가 듣는 말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듣습니다.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 가정에서 교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어떤 것입니까? 충효사상입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기를 거미 같은 인간, 개미 같은 인간, 꿀벌 같은 인간이야기를 합니다. 남을 헤치는 자가 되지 말고 자기만 위하는 자가 되지 말고 꿀벌처럼 남의 이익을 위하면서 살자, 라고 합니다. 그러나 꿀벌도 사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꿀을 채취하는 것이지 꽃이나 과일을 수정시키기 위하여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남을 위하는 그런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성인이라고 하면서 위인이라고 하면서 존경하고 추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반열에 예수님도 올려놓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생각들을 모두 부정합니다.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소속이 어디에 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모두가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 아래 있었기에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 올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이자 사람들이 어두움을 더 좋아해서 빛을 배척하였다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과 친구가 되려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려고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없이 그저 자기의 존재를 영원하게 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가 무시되고 사라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주님을 찾는 자도 없고 사랑하는 자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는가 할지 모르지만 그들도 역시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기 자신들을 사랑하였지 결코 주님의 친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과연 주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친구를 사귈 때 쳐다보고 사귀라고 합니다. 무언가 배울 것이 있고 얻어먹을 것이 있는 자를 친구로 사귀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낮아져 버리셨으니 누가 예수님을 친구로 사귀려고 하겠습니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15:16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라’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친구하자고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올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온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올 때에 언제나 무엇을 보고서 예배당으로 옵니까? 십자가를 보고서 옵니다. 그러면 이러한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화액은 물리치고 복을 불러주는 그런 부적입니까? 아니면 너, 나와 함께 죽자는 죽음으로의 초대입니까? 죽음으로의 초대입니다. 이 세상의 삶의 원리로 살면 너희가 정녕 죽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와 함께 죽는 길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누가 선뜻 나서서 예 저 친구하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도시락 사들고 다니면서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미워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예수 믿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세상 사람보다 더 세상을 사랑하니,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몫이 작아지니까 미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새벽기도회 때에 사사기를 마치고 룻기를 보고 있습니다.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서 먹고 살려고 이방인의 땅 모압으로 이민을 갑니다.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얼마 되지 않아서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겨집니다. 이 두 아들을 위하여 결혼을 모압 여자와 시켰는데 하나는 오르바이고 하나는 룻입니다. 그런데 결혼하여 아이도 하나 낳지 못하고 두 아들이 죽어 버립니다.
과부만 세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마나 있었던 재산까지 다 날려 버렸습니다. 망한 집안입니다. 그런데 이때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데 며느리를 돌려보냅니다. 나를 따라가면 고생만 한다, 그러니 너희가 젊었으니 너희 백성 너희 신에게로 돌아가서 재혼하고 행복하게 살아라, 그랬지요. 그러자 오르바는 돌아가고 룻은 죽음이 나를 갈라놓지 않는 한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면서 따라 갑니다.
여러분이 룻이라면 아니 룻의 친구나 집안 식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려야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망한 집으로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바른 예수를 믿는다면 주변에서 마구 말려야 하는 것입니다. 1여전도회에서 한달에 한번 전도를 한다고 전도지를 만들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도지를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이 보았지만 전도지에서 과연 십자가의 정신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읍시다, 그러한 내용이 있습니까? 죄를 이야기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도 결국은 내가 예수님을 선택하면 좋은 일이 있다는 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르게 알게 되면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도망가고 싶은 것입니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좋다고 따라 다닌다는 것은 무언가 다른 예수님 무언가 다른 십자가를 전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8-20절을 봅니다. “봉독” 세상이 예수 믿는 자를 미워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이 미워하였기에 예수님의 친구도 미워하는 것입니다. 미워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마귀아래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주고자 하는 경제문제 정치문제 종교문제 해결책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온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입니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미워하고 핍박하였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당연히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결국 내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빼버리면 일반종교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가능성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무언가를 잘하여 신을 기쁘게 하지 그래서 우리도 복을 받자라는 것은 세상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행위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택하여 주시는 것입니까? 친구로 택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단지 종이 아니라 친구로 대접하여 주시는 초대입니다. 이러한 대접은 아버지의 뜻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란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며 그 영생의 풍성을 받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친구로서의 대접을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15:13절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 우리를 주님이 친구라고 불러 주셨는데 사실을 우리는 주님의 원수 된 자들입니다. 이러한 원수를 친구로 불러 주시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로마서 5:6-11절. “봉독” 우리가 연약하였을 때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이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은 자가 없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간혹 있지만 죄인을 위하여 죽은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죄인이라면 아무른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지고서 죽으심으로만이 자기의 택한 백성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과의 사귐을 통하여 기쁨과 즐거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기쁘게 살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호화찬란하게 산다고 하여도 원수와 함께 살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원수 마귀와 함께 살면서 행복해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귐과 사랑이란 우리를 친구로 선택하여 주신 주님과의 교제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가 주님을 사랑을 받았다고 하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정말 자신이 죄인임을 아신다면 오직 주님의 은혜와 그 사랑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함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나도 용서 받아서 나왔고 너도 용서받아서 나왔기에 서로 자랑할 것이 결코 없는 것입니다. 그저 용서하신 주님의 사랑만 증거 할 뿐입니다.
그러니 어찌 서로 마음이 하나 되고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아직도 시기와 질투와 자기 자랑이 나오려거든 지금 내가 주님의 은혜를 잊어 버렸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용서 우리를 선택하신 그 사랑을, 친구로 대접하여 주시는 그 사랑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같이 죄인을 목숨 바쳐 사랑하신 그 사랑을 동일하게 입었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임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13-18절. “봉독” 나 같은 죄인을 친구로 대접하여 주시는 그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5:18-27 사랑과 미움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입니까? ‘사랑과 미움’ 무슨 드라마 제목 같습니다만 요한복음 15장에서의 두 개의 핵심단어를 찾으라고 한다면 사랑과 미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자기의 소유로 삼으신 것을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지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의 사귐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적인 업적을 가지고 열매를 많이 맺어 드리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내가 세상적인 어떠한 업적의 열매를 만들어서 바치고자 하니 자꾸만 무엇을 구합니까? 돈을 구하고 힘을 구하고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러한 세상의 것들로 만들어 낸 열매들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 너희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에게 하늘의 신령한 것들로 복 주었으니 너희가 이러한 영적인 것들을 알아 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는지를 알아 가는 것,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지들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세상이 공급하는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힘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자는 가진 자대로, 배운 자는 배운 자대로 사귀는 그러한 계모임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의 고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죄인이 주님으로부터 용서와 사랑을 받은 그 은혜를 인하여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모여서 나누는 대화가 달라야 합니다. 성도가 모여서 교제를 하는 것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의 풍성함과 주님의 뜻을 더 밝히 아는 것과 그리고 주님에 대한 소망이 더욱 분명하여지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교제의 기쁨보다는 다른 것들로 인하여 기뻐하고 있다면 우리의 수준이 아직도 주님의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제대로 알아 가지 못하고 얕은 물가에서 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인데도 우리가 이정도면 다른 교인들 보다 그래도 낫지 않을까라고 혹시 착각하시는 분은 계시지 않을까하여 이런 예화를 하나 들고자 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과 잘못하는 학생의 차이가 어디에서 납니까? 시험을 치르고 나면 표가 납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죽을상을 하고 나옵니다. 그런데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싱글벙글 입니다. 왜 그럴까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한두 문제 틀린 것을 아주 크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답을 쓴 것은 생각이 나지 않고 틀린 그 문제가 크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한두 개 알고서 맞추어 놓고서 그것이 좋아서 다 맞은 것처럼 기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점검을 해보셔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가를 평가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이 세상이니 세상에 있는 것들이 더 좋다면 우리는 그 만큼 예수님을 미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립이 안 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더 많이 얻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이 바른 복음인지를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이 세상에서 나에게 어떤 도움과 유익이 되는가로 결정을 하신 것이라면 틀린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니 갑자기 미움이 생기지 않습니까? 은혜니 사랑이니 용서니 하는 것들을 말할 때는 지루하기는 해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갑자기 목사도 미워지고 성경도 미워지고 그런 말하는 예수님까지도 미워지지는 않습니까?
오늘 말씀 18-20절을 봅니다. “봉독” 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을 미워한다고 합니다. 왜 미워합니까? 먼저 예수님을 미워하였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세상이 왜 미워한 것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이 속하신 분이 아니시기에 그러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분이 세상이 오셨으니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의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2:15-17절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말씀을 읽어 보니 기분이 나쁩니까? 좋습니까? 좋다면 지금 굉장히 고생을 하고 있는 분일 것입니다. 하도 고생을 하다 보니 나도 먹지 못할 것 다른 사람도 먹지 못하도록 하자는 식으로 망쳐버리고 싶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극소수가 되겠지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소망하기에 보이는 것들, 세상에 나타난 것들에 기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의 기준을 세울 때 이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고 하면 이것은 사기입니다.
김용옥 교수가 어떠한 형태이든지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사교라고 하였는데 그 말에 사람들이 박수를 친 것입니다. 헌금을 강요할 때 무슨 조건을 겁니까? 세상에서 더 많은 복을 받는다는 조건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은 결국 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실 때 여기에 서있는 저가 그러든지 아니면 어떤 천사 같은 사람이 와서라도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게 하는 차원의 말을 한다면 그것은 가짜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예수님이 사랑스럽습니까? 밉습니까? 오래전에 이런 말씀드린 것이 기억납니까? 계산을 해보시고 오시라고 내가 예수를 믿어서 손해가 될지 이익이 될지를 계산해보고 따라가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지금도 늦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점검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만 속고 있는 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입니다.
자신이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진리관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이롭게 하고 덕이 되게 하면 사랑하고 나를 해롭게 하고 손해가 되게 하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하는 것으로 기준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아닌가에 사랑과 미움의 교차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부모도 도움이 안 되면 버리는 것입니다. 형제도 자식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혹시 그렇지 않아도 효도하고 애 먹이는 자식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잘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 해놓고서 다른 사람이 안하는 일이라고 해서 자랑이 되고 칭찬이 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으면 효도하는데 상을 다 주고, 장한 어머니상이라 해서 상을 줍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에게 도움이 되어 준다는 예수님은 사랑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도움이 안 되는 예수님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말하고 성경이 말하는 복을 말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진리니 생명이니 영생이니 은혜니 죄니 심판이니 이런 말은 시큰둥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서 세상의 무엇을 얻었다는 말만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는 졸음이 달아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기에 세상이 미워하고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까? 세상의 모든 행사를 악하다, 죄다, 마귀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면 무얼 주는데요? 영생이다, 그러면 영생이 세상 사는데 무슨 이익이 됩니까? 그러니 영생은 천대 받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영생이 천대 받는 것입니다. 영생주시는 주님 때문에 세상의 것 모두 잃어 버려도 감사하고 기쁩니다, 하는 것이 영생 얻은 자의 삶인데 교회에서 영생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너무 속이 보이니까 영생은 예수 믿을 초기에 이미 확보해 놓은 것으로 간주하고 이제는 세상의 영광을 구하여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이 어떻게 주어집니까? 모든 것을 다 버린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죽도록 충성하고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사탕발림으로 예수 믿어서 영생 확보해 놓았다고 착각하고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어떻게 이 세상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예수님께서 죄라고 드러내시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란 아들을 믿고서 영생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미 요한복음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사람들이 자기들의 영광을 서로 취하고 있으니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행사를 악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요즈음의 예를 들자면 대도라고 불린 조세형씨가 일본에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들린 것입니다.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라의 망신이라고 미워하시겠지요? 그런데 조세형이가 일본에 가서 일본천황을 사로잡고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서 일본이 우리나라의 속국으로 만들어 버렸다면 어떻게 대접하시겠습니까? 영웅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좀도둑은 감옥에 가지만 나라를 훔치면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진리란 나와 내가 속한 단체나 국가에 얼마나 이익이 되는가에 달린 것이지 절대적인 진리나 가치관이란 없는 것입니다. 아이가 많은 나라에서는 아이를 적게 낳은 것이 국가에 도움이 되지만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나라에서는 많이 낳은 것이 국가에 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기준으로 누가 선이니 옳으니 하고 있는 것은 마치 도토리키재기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까? 어느 바보 형제가 내기를 하였답니다. 가장 큰 수를 말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지요? 먼저 동생이 말합니다. 한참 생각하다가 2, 그러자 형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3이라고 합니다. 동생이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무어라고 하였겠습니까? 졌다! 우리가 지금 세상에서 누가 옳고 그러니 하는 것들이 이 정도입니다.
조세형(동생)이나 노벨평화상(형)을 받은 사람이나 주님이 보실 때에는 악할 뿐입니다. 동일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더 예수님을 미워하겠습니까? 똑 같이 미워하지만 노벨평화상 받은 사람이 미워하는 강도가 더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떠한 미움을 받을 말씀을 하셨는지 요한복음에서만 몇 곳을 찾아봅니다.
요한복음 7:7절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고 하시니 예수님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23-24절입니다. “봉독” 너희는 아래에서 났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선생이라는 니고데모도 아래에서 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위에서 나신 분이시며 이 땅에 속하지 않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래에서 났고 거듭나지 못하였기에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하시니 유대인들이 얼마나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겠습니까? 아니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느라고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율법을 지키는데 우리를 보고서 죄인이라니 네가 오히려 죄인이라 하면서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5:22-24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됩니다. 내가 말했기 때문에 그 죄를 핑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이 바로 죄의 증거이며 이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예수님이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하신 것으로 이미 저희들의 죄가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으로 참 하나님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과 그 행하심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들을 자기들이 행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자기의 행한 것이 없는데도 의롭다하여 주시는 분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소속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소속이 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소속이 되어 있지 않든지 아니면 우리가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 속한 자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며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그 형제를 사랑하고 그러한 자는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일서 3:13-16절. “봉독” 예수 믿는 것으로 미움을 받기에 이런 사람끼리 서로 사랑함. 증인.
요한복음 16:1-4 주님을 섬기는 예
이 그림을 보십시오. 북한에서 예수를 믿다가 순교당한 자의 모습을 이야기로 듣고서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1999년 10월 10일 오전 10시에 청진 운동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들의 이름은 김일심(29세), 한설량(36세), 최철(38세)입니다. 이들을 북한에서 죽일 때 왜 운동장에서 공개적으로 처형을 하겠습니까? 너희도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과 김정일 장군이 말씀하시는 주체사상을 버리고 반동적인 기독교를 믿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미혹시켰다, 그러므로 인민의 이름으로 반동들을 처형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수천 명이 보는 가운데서 처형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자의 예다, 라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된다는 모델로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16장 2절을 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이르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북한에서 처형하는 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을 섬기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말하면서 죽이는 자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들의 하나님인 김일성과 김정일을 섬기는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이 신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김일성을 이미 신격화 해 놓고서 그 시신 앞에서 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 믿는 자를 죽이면서 자기들은 자기들의 신을 섬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출회시키고 심지어 죽이면서 무어라고 그들은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그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고 열심히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유대인들이 돌로 스데반을 쳐 죽인 것입니다.
왜 쳐 죽인 것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참되신 하나님을 증거 하는 자를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스데반이 죽어 마땅하다고 스데반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울이라는 사람, 즉 바울입니다. 사도행전 8:1절에 보시면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이 죽어 마땅하다는 여기는 것은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울이 더욱 살기와 위협이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서 공문을 받아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결박하여 끌어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아니 누구십니까? 나는 네게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십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섬긴 것이 참 하나님을 오히려 핍박한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바울이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유대교가 어떤 집단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히 오히려 참되신 하나님을 죽여 버리는 사단의 앞잡이가 되어 버린 것을 알고서는 유대교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2절을 봅니다. “봉독” 서머나 교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하십니다. 환난과 궁핍 중에 있는 자를 어떻게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부요한 것입니까? 믿음에 부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또 다른 훼방이 있었는데 그 훼방이 무엇입니까?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훼방이라는 것은 예수를 믿어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도 지키고 할례도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을 믿고 따르기로 하는 자들에게 유대인이라는 자들이 훼방을 합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은 사단의 무리요 단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세력들이 사단의 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미리 하시는 것입니까?
16:1절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4절을 봅니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두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반드시 출회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까지 할 것인데 그런 일이 닥친다고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오는 것으로 알라고 미리 말씀을 해 두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러한 핍박이 올 줄을 아시면 이러한 핍박이 안 오도록 해야지 왜 그렇게 방치를 하는 것입니까? 라고 물으실 수 있겠습니다만 15:22-25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하신 일을 인하여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곧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당연히 미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워함이 성경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움 받는 것이 지난주에 보았듯이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하셨으며, 오직 예수님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 라고 하신 것이기에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모든 인간의 선행과 노력과 의지를 원천 봉쇄하여 버리는 것이기에 기분이 나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를 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하는 것이랍니다.
16:3절입니다.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보고 무어라고 말하면서 놀리는 것은 그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내 주먹이나 믿으라고 하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하여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 배후에는 영적인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 싸움이 바로 창세기 3장에서부터 시작되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의 체계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이유 없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5:25절의 말씀이 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는 말씀이 시편에서 나옵니다. 시편을 왜 율법으로 말하는가 하면 구약 전체를 말할 때 율법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69: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다윗의 시편입니다. 다윗이 무엇을 잘못하여 원수가 많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위기에서 구하여 내었고 적군을 물리친 용사입니다. 그리고 사울의 사위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왜 다윗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기에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오히려 악신이 들고 다윗에게 주의 신이 함께 한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면 이것이 메시아입니다. 그러니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는 것은 단지 자기의 왕위를 노린다고 생각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기름부음을 받았기에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궁예 이야기를 해 봅시다. 궁예가 스스로 미륵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석총이 당신을 미륵이 아니라고 하면서 참된 미륵의 표시를 누구에게 줍니까? 왕건에게 주고서 자신을 당신이 미륵이 아닙니다, 하고서 죽습니다. 그러면 왕건이 미륵의 표시를 가지고 있는 것을 궁예가 알고 또 왕건을 황제로 추대하려는 사실을 궁예가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할까요? 아무리 사랑하는 의형제라고 하여도, 오른팔이라고 하여도 죽여 버릴 것입니다.
지금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가 없다는 것은 왜 그렇게 미워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하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추적하면서 두 번이나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날 때에 그때에야 잠시 제정신이 들어서 내가 잘못했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시편 2편에서 세상의 열왕들이 분노하며 나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끊어 버리기 위한 분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웃으시지요? 그리고서 자기의 왕을 시온산에 세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왕에게 절하지 않으면 모두가 하나님의 분노 중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반드시 고난이 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이라는 개념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그런 복으로 생각하신다면 정말 다시 생각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 자들에게 그러한 복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세상에서 살면 여러 가지의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애매히 물어주게 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복을 받았기에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이미 주셨다고 하는 복이 무엇입니까? 마귀에게 붙들려 죽음아래 있던 자를 자신의 피로서 우리를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즉 죄사함입니다. 용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이 언제 선명하게 됩니까? 등 따시고 배부를 때입니까? 고난 중에서 선명하여집니까? 고난 중에서 선명하여 지는 것입니다.
지금 고난당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이러한 신령하고 영적인 복들이 얼마나 선명한지 아십니까? 북한성도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리는지 아십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복을 받는다고 하고 있으니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보다 지혜로운 것입니다. 예수 믿다가 고난당하는 것을 예수를 잘못 믿어서 그렇게 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은연중에 그렇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이 무언가 형편이 나아지고 살만하게 되면 그래도 내가 예수를 이만큼 믿어 주었으니 이 정도로 누리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서로가 어떤 경쟁을 합니까? 내가 예수 믿고서 세상에서도 잘되어야 예수님이 증거 되지 않겠나, 라고 합니다. 그렇게 설교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세상에서 잘되는 것으로 예수님이 증거된다고 하신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가시지 말고 벤츠를 타고 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시 한번 요한복음 15:18-10절을 봅니다. “봉독”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기에 주님의 택하심을 입었기에 미움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는 말씀은 주인이 받은 세상에서의 대접대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핍박한 것처럼 당연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왜 꼭 이런 방법으로 하셔야 합니까? 라고 묻고 싶지요?
그 이유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분리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의 방식에 너무 깊이 들어붙어 있으니 그 떼어 내시는 과정이 아플 수밖에 없고 환난과 고난이라는 강을 통과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그 속에서 들어붙어 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는 환난이 유익이 됩니다. 고난이 유익이 됩니다. 환난과 고난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세상의 헛된 욕심들을 버리게 되며 결국 인내하고 하시고 소망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눈에 보이는 소망을 좇아갑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이만큼 하였다는 업적을 보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들이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한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닥치는 환난과 고난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러한 환난이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16-25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고난에 참예함으로 영광에도 참예함,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망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5-11 보혜사가 오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나야 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근심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랐는데 예수님이 떠나버리시면 자신들이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7절에 보시면 “내가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심이 왜 유익이신가 하면 예수님이 떠나시지 아니하시면 보혜사가 오시지 않을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가셔서 보혜사를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란 말은 위로자, 대변자의 뜻입니다. 성령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보혜사를 보내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떠나셔야 하시는 것이고 떠나심으로 보혜사를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님께서 보내실 보혜사가 오시면 어떤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보혜사가 오시면 그저 우리에게 도움이 되게 해주시면 좋겠는데 그러나 의외로 예수님께서 보내실 보혜사가 오시면 하시는 일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러한 보혜사의 하실 일을 말씀하신 내용을 통하여 보혜사의 하실 일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예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은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으로 성령의 역사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요한복음 16장의 보혜사의 하실 일, 즉 성령님의 하실 일을 가지고 성령의 객관적 사역이라고 합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일은 차이가 날 수가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우리에게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로 거듭나게 하시면 어떤 사람은 우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아무른 느낌이나 감정이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사역은 반드시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울었다, 그런데 너는 예수 믿을 때 울었냐? 나는 울지 않았는데 그러면 너는 나와 다르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믿어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그런데 너는 예수 믿을 때 눈물이 났다니 이상하다, 너 너무 감정적으로 치우친 것 아닌가? 이렇게 따지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잘났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의 골치 아픈 세 가지가 이런 것이랍니다.
첫째는, 예수를 절대로 믿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이랍니다.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으라는 식이지요. 그러다가 예수 믿고 나면 자기 믿는 식으로 믿는 것만이 최고라고 고집을 또 부리는 것입니다. 안 믿었을 때 고집부리는 것만큼이나 자기가 하는 일만이 잘하는 일이라고 떠들어서 골치가 아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그런 주장과 열심도 다 식어버리고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최고라고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랍니다. 그러니 우리가 제대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주님을 섬기는 적이 사실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아야 회개를 하는가 아니면 회개를 하여야 성령을 받는가? 아니면 방언을 해야 성령을 받은 것인가? 방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닌가? 이러한 논란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주장들이 사실은 나는 너와 다르다, 나는 너보다 낫다는 교만이라는 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문제들이 아니라 정말 보혜사가 오시면 무슨 일을 하시는가 하는 이러한 객관적이 기준이 너무나 명명백백하게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이 오시면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분명히 확인을 하시고 이 말씀 앞에 항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성령이 오신다는 말씀을 구약에서 한 곳만 찾아보고자 합니다.
요엘서 2:28-32절입니다. “봉독” 그 때에 여호와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며 늙은이가 꿈을 꾸고 젊은이가 이상을 볼 것이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래일, 꿈, 이상이라는 말을 가지고 성령이 임하시면 환상을 본다, 꿈을 가진다, 장래일을 말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점치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이러한 자들은 구약식으로 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일에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해준다 기도 받는다 하면서 개인의 신수사를 물으러 다니는 일들이 이러한 말씀으로 인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종말의 상황입니다. 종말이란 성령이 오시면 그것이 심판이요 종말이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는 것이 여호와의 심판입니다. 피와 불과 연기,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날들이 이르기 전에 즉 최종적인 종말이 이르기 전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이미 종말이 시작된 것이고, 이러한 종말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장래일을 말하는 것이며, 꿈을 꾸는 것이며, 이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바는 성령이 오시면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곧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가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신 것은 곧 성령을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완성시키는 차원에서의 유익인 것입니다. 단지 제자들의 개인의 신세가 세상의 힘과 능력을 받아서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가신 길을 뒤따라가게 함으로 이 세상에 심판아래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임한 자들은 한결같이 고난의 길로 간 것입니다.
제자들과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져서 그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배척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임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니 주여, 우리 자녀, 우리 남편이 성령의 능력으로 시험도 잘 치르고 회사에서 승진도 잘하게 하옵소서, 이러한 성령은 성경에서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엘서에서 예언한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성취가 되는지를 사도행전을 통하여 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2:14-36절입니다. 본문이 길지만 베드로 사도로부터 직접 설교를 듣는다고 생각하시고 제가 봉독을 합니다. “봉독” 사람들이 제자들을 보고 술 취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장래일을 말하고 꿈을 꾸며 이상을 말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결국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 종말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36절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 세상은 끝장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죄와 허물로 인하여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을 보니 너희는 정말 심판아래 있다는 것이 확증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마태복음 21:33-46절에 나와 있습니다. 설교란 성경의 내용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문의 말씀을 어떻게 성경에서 더 풍성하게 증거 하는가가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아름다운 말을 얼마나 매끄럽게 잘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성경이 증거하는 죄와 의와 심판이 증거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또 말씀을 읽습니다. “봉독” 여러분이 이 포도원의 주인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들의 시체를 앞세우고 복수하러 오시지 않겠습니까?
지난 수요일 저녁 이사야 59:17-18절에 구원자로 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이러한 모습입니다.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투구로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보수를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하나님께서 복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알지 못하고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서 믿어주는 종교적인 행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버림받아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이 예수님을 33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높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사 모든 사람이 그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뛰어난 이름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령이 오심으로 세상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아내어 버렸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지 아니하심이 증거가 되는 것이며 이것이 세상이 심판받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객관적인 사역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령, 즉 예수님께서 보내신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게 되면 반드시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8-11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그가 오시면 즉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무엇입니까? 9절입니다. 이 세상의 죄의 기준은 인류의 행복과 안위를 헤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임하여 알게 된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능력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 없이 내가 주인이 되어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이롭게 하는 자는 그 대상이 신이라도 좋은 신이 되지만 나를 이롭게 하지 않는 것은 그 대상이 비록 신이라 할지라도 죽이겠다는 것이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인간의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의 일들이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란 바로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십자가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나의 죄로 인하여 예수님이 죽으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죽으심이란 내가 받아야 할 심판과 저주를 대신 받은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이 하는 모든 일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종교적인 이름을 가지고 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일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하여 알게 하신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세상에서 죄다, 아니다 하는 것들을 책망하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에 대하여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10절입니다. 의에 대하여서라 함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버리셨기에 세상에는 그 어떠한 의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장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다 모아 내어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없는 곳에는 오직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구약에서 계속하여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데 예수님이 떠나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의가 없기에 이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은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서‘라 함은 11절입니다.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심판의 기준은 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어떠한 심판을 받을까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심판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심판을 받아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무슨 심판에 관심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까? 주님의 심판을 마음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심판의 기준은 우리에게 아무른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이 세상이 주님의 심판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령이 임하심으로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음을 반드시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내어 주신 보혜사를 통하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공통적인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와 성격이 다르고 나와 여러 가지로 다르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한 성령을 받았다면 요한복음 16장에 나타나는 이러한 책망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질문을 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의에 대한 책망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는 어떠한 것도 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의가 되기에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가 성령이 임한 자이고 복 있는 자입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기에 이제 심판의 기준은 오직 주 예수님이십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