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내용 목차
1장: 내 증인이 되리라
2장: 성령의 강림(降臨)
3장: 앉은뱅이를 일으킴
4장: 공회 앞에서 증거함
5장: 사도들이 많은 기적들을 행함
6장: 일곱 사람을 택함
7장: 최초의 순교자
8장: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됨
9장: 사울을 부르심
10장: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달됨
11장: 안디옥 교회의 설립
12장: 두 번째 순교자 야고보
13장: 최초의 선교사
14장: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전도함
15장: 예루살렘 회의
16장: 빌립보에서 전도함
17장: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에서 전도함
18장: 고린도에서 전도함
19장: 에베소에서 전도함
20장: 에베소 장로들에게 권면함
21장: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감
22장: 무리들 앞에서 증거함
23장: 공회 앞에서 증거함
24장: 벨릭스 총독 앞에서 증거함
25장: 가이사 황제에게 호소함
26장: 아그립바 왕 앞에서 증거함
27장: 로마로 호송됨
28장: 로마에서도 전도함
본서의 저자는 누가이다. 저자는 본서의 서두에 자신이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에 대해 글을 썼다고 말했다(1:1-2). 사복음서 중에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서까지(1:2) 쓴 책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고 데오빌로라는 동일한 대상자에게 쓴 것을 볼 때 저자가 쓴 책은 누가복음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본서에 '우리'라는 표현이 나오는 구절들에서 그는 바울과 동행한 자이었음이 증거된다. 누가가 그러하였다(딤후 4:11). 초대 교회는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임을 증거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본서를 인용하면서 누가의 글이라고 증거하였다. 정경에 대한 무라토리 단편은 "모든 사도들의 행적은 다 한 권의 책에 기록되었다. 누가는 자기 생존시에 성취되었던 모든 일을 자세히 데오빌로 각하에게 전해주기 위해 수집했다"고 썼다. 누가는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온 때로부터 2년이 지난 때즈음 즉 주후 62, 63년경 본서를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본서는 기독교 복음 전파의 초기 역사를 증거한다. 우리는 본서에서 초대 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전파하였으며 교회가 어떻게 확장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본서의 특징적 주제는 전도이다. 본서는 전도의 책이다. 1-7장은 복음이 예루살렘에, 8-12장은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에, 그리고 13-28장은 복음이 수리아 안디옥에서 로마까지 전파된 역사를 증거한다. 본서는 또한 성령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하신 대로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통해 활동하셨는지를 증거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사도들의 행전인 동시에 '성령의 행전'이다.
본서는 초대 교회 때로부터 '사도들의 행전'이라고 불리웠지만, 주로 베드로와 바울의 전도 활동을 증거하며 특히 바울 서신들의 배경을 알려준다. 본서 1-12장은 주로 베드로의 사역에 대해, 13-28장은 주로 바울의 사역에 대해 증거한다.
본서의 중요한 한 목적은 바울의 이방인 전도 사역이 정당함을 보여주고, 또 원 사도들을 대표한 베드로와 후에 부름을 받은 바울의 복음이 동일한 복음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의 중요한 의미이었다. 원 사도들이 중심이 된 예루살렘 회의의 결의문은 바울에 대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 . . 바울'이라고 표현하였다(행 15:25, 26).
1장: 내 증인이 되리라
1-5절, 서두
[1, 2]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본서를 쓰고 있다. '데오빌로'가 누구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의 인물이었던 것 같다. 누가복음1:3에서는 그를 '데오빌로 각하'라고 부르는데, '각하'라는 말(크라티스토스)은 총독들에게 사용된 용어이었다.
누가는 사도들을 '그의 택하신 사도들'이라고 부른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친히 택하신 자들이었다. 마가복음 3:13-14,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요한복음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주께서 사도들을 친히 택하셨다는 사실에 사도들의 특별한 권위가 있다. 또 여기에 교회의 모든 직분들의 근본적 선택 원리가 있다. 물론 오늘날 교회는 추천과 투표의 방식으로 중요한 직분자들을 뽑지만, 그것은 주께서 택하신 자들을 세우는 절차이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을 세워야 할 것이다.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자세히 증거하기 전에 그의 부활에 대해 다시 한번 더 강조하여 증거한다. 그의 부활이 없으셨다면 그의 승천도 없으셨을 것이다. 부활하지 않으신 자는 승천하실 수 없다. 누가는 주께서 부활하셔서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셨고 '40일 동안' 사도들에게 보이셨다고 증거한다. '확실한 많은 증거로'라는 헬라어 원어는 '의심할 수 없는 많은 표들, 분명한 많은 증거들'이라는 뜻이다. 복음서들과 고린도전서 15장의 증거들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동시에 여러 차례 나타나셨고 심지어 5백여 형제들이 있는 장소에 일시에 나타나셨다. 더욱이 그가 나타나신 기간이 40일이나 되었다. 그는 확실히 자신의 다시 사심을 증거하셨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사건은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나셨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누가는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에 대해 말씀하셨는지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대해서'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께서 전하신 복음의 중심 내용이었다. 그는 전도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4:17). 또 그는 7가지의 비유로 천국에 대해 가르치셨다(마 13장). 누가복음 4:43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하셨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나라를 그의 전도의 중심 내용으로 삼았다. 사도행전 28:23, 31,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이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서 시작되어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천국에서 영광스럽게 완성될 나라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 복음의 요지이다.
[4, 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누가는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중요한 부탁은 우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대로 성령의 세례를 받도록 기다리라는 것이었음을 증거한다. 성령의 세례는 전도의 원동력이 될 것이었다. 세계복음화는 사람들이 이룰 수 없는 거대한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친히 이루실 일이다. 이제 성령께서 능력으로 제자들 속에 오셔서 이 일을 시작하실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 요엘서에서 이미 예언된 바이었고(욜 2:28-29) 주께서도 며칠 전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약속하셨던 내용이었다(요 14-16장). 이제 성령의 오심은 '몇 날이 못되어' 즉 약 10일 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주께서는 성령의 세례를 세례 요한의 물 세례와 비교하셨다. 물 세례는 죄씻음을 표시하였다. 이와 같이 성령의 세례는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들어오심으로 그들을 새롭게 하시는 것을 표시한다. 물론 당시의 제자들은 이미 죄씻음을 받았고 거듭난 새 생명을 소유하고 있었다(요 13:10; 15:3). 그러나 그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였다(요 7:39). 그러므로 이제 성령께서 오시면 그들 속에 거하시고(요 14:16-17) 그들을 인치시고(엡 1:13)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시키시고(고전 12:13) 그들에게 더욱 풍성한 은혜와 능력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자. 예수께서는 확실한 많은 증거로 자신의 다시 사심을 사도들에게 나타내셨고 40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셨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무엇이겠는가? 예수께서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사셨다. 그는 지금 죽은 자가 아니시고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 심지어 석가모니도, 공자도, 모하멧도 다 죽었지만, 오직 예수님 그는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전도에 대해 많이 배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전하신 주제이었다. 그것은 주께서 처음부터 전하신 내용이며 부활하신 후에도 전하신 내용이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전한 내용이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전해야 할 주제이며 내용이기도 하다. 구원의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시작되어 장차 영광스럽게 완성되는 내용을 포함한다.
전도의 능력은 성령의 세례이다.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셨고 그들을 통해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게 하셨다. 교회는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활동하였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도 성령께서 택하신 사람을, 성령의 보내심으로 파송하였다(행 13:2, 4). 예루살렘 회의도 성령의 역사 속에 이루어졌고 그들은 '성령과 우리는' 이러한 결정 사항을 온 교회에 알린다고 표현하였다(행 15:28). 오늘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것은 성령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신다. 우리는 성령을 또 받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단지 이미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주장하셔서 그의 일에 능력 있게 사용하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주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엡 5:18).
6-11절, 내 증인이 되리라
[6-8]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들이 모였을 때 그들은 예수께 물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지금입니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구약성경, 특히 이사야와 에스겔 등의 선지서들에 예언한 바로서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은 그 예언에 전적인 소망을 두고 있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정치적인 자유와 사회적인 안정과 경제적인 번영을 다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장차 천년왕국 혹은 천국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소망의 내용이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지금 이루어질 것입니까?' 그들의 질문은 비록 인간의 조급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긴 하였지만 성경에 예언된 바에 대한 제자들의 간절한 소망과 기대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의 질문과 관심은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고 분명히 한계를 긋듯이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때와 기한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문제이므로 우리가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인간의 시간표와 다르다. 조급한 마음을 가진 사람 보기에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더디 행동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실상 그는 구원얻을 영혼들을 위해 기다리시고 오래 참으시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그 대신 제자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즉 사명(使命, mission)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가 사도들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증인이 되는 일이었다. "너희가 . . .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을 친히 보았고 증거할 수 있었던 증인들이었다. 물론 넓게는 신약 시대의 우리 모두도 다 주의 증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목격한 바가 없다. 그러나 사도들은 친히 주님과 함께 3년 동안 생활했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는 이런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을 '증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도행전 10: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사도행전 13: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사도들이 증거해야 할 땅의 범위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이었다. 그것은 온 세상, 즉 지구 전체를 의미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온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할 복음이며 이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택한 모든 백성은 하나도 빠짐 없이 다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후에 예수께서 사도로 불러주신 바울이 당시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또 초대 교회의 글들이 전하는 바와 같이 베드로도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또 바울은 서바나(스페인)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했으니 당시로 말하면 거의 땅끝까지 복음을 전한 셈이긴 하다. 그러나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주의 말씀은 그들이 남긴 증거의 책들을 통해 그들의 증언들이 그 후에 온 지구 상에 전달되었고 우리에게까지 왔으며 오늘날도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들에 전달되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요한복음 끝부분에는 사도 요한의 증거에 대해 이렇게 써 있다.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이와 같이, 신약성경은 일차적으로 증인들의 증언의 책이다.
주께서는 사도들의 사명의 일에 관한 말씀과 더불어 그들의 증거 사역을 능력으로 도우실 성령의 임하심에 대해 말씀하셨다. 성령께서 오시는 주된 목적은 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실제로 죄인들에게 적용하여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 구원 사역에 필수적인 한 요소는 전도자들의 능력 있는 전도의 사역이다. 사도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주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것이 성령 강림의 주요한 한 목적이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 .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들이 받은, 그리고 오늘날 교회가 이어 받은, 복음 전파의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일이었다. 초대 교회의 전도와 교회 설립과 확장의 역사(歷史)는 단순히 사람들이 이룬 역사가 아니고 성령께서 사람들을 사용하여 이루신 역사이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의 행전이었다. 오늘날도 영혼 구원과 교회 부흥의 힘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있다.
[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는 전도의 일을 부탁하신 후 승천하셨다. 본문은 주께서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셨다'고 증거한다. 주의 승천은 사도들이 다 함께 보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것은 공동적으로 목격한 바이었고 공동적으로 증거할 수 있는 바이었다. 본문은 또한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였다고 증거한다. '가리워'라는 말(휘포람바노)은 '취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구름은 승천하시는 주를 낚아채듯이 취하였고 사도들은 구름 속으로 취하여진 주님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또 본문은 주께서 '올라가실 때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었다'고 증거한다. '자세히 쳐다본다'는 헬라어 원어(아테니죠)는 '시선을 집중하여 쳐다본다'는 뜻이다. 이 모든 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장소의 이동 즉 땅에서 하늘 위로 옮겨지신 일임을 증거한다. 주님의 승천은 말 그대로 승천(昇天, 하늘로 올리우심)이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그 신비를 다 알 수 없다.
본문은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증거한다. 그것은 흰옷 입은 두 사람에 의해 증거되었다. 그들은 천사들임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때에 천사들을 통해 진리를 증거하신다. 주 예수의 탄생 때에도 천사들은 나타나 주를 찬양하였다(눅 2:13-14). 주의 부활 때에도 천사들이 나타나 빈 무덤과 주의 부활을 증거하였다(눅 24:4). 이제 주의 승천 때에도 주의 천사들이 나타나 증거한 것이다.
천사들은 승천하신 바로 그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증거하였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이 예수'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에 있어서 "바로 이 예수"라는 강조된 표현이다. 바로 이 예수!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이 예수,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신 이 예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던 이 예수, 삼일 만에 부활하신 이 예수, 이제 사도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 바로 이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다른 예수가 아니고 바로 이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천사들은 또한 승천하신 예수께서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증거하였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모습이 어떠할 것을 증거한다. 주의 재림은 눈으로 볼 수 있게 이루어질 것이다. 주의 재림은 또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사건일 것이다. 또 주의 재림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사건일 것이다. 주께서 승천하실 때 구름이 그를 가로채듯이 취하여 갔다. 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셨고 제자들은 구름이 그를 가리워 그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그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다. 승천 때의 구름이 실제의 구름이었듯이, 재림 때의 구름도 실제의 구름일 것이다. 마태복음 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다. 우리는 그의 기적적 탄생도, 그의 기적 행하심도, 그의 십자가 대속(代贖)도, 그의 몸의 부활도, 그의 승천도, 그의 재림도 믿는다. 우리는 그가 장차 주실 천국의 영광스런 세계와 영생을 믿는다. 성경은 이 모든 사실들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의심치 말고 성경에 증거하는 대로 다 믿자.
결론적으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믿자. 또 우리는 그의 재림을 믿고 기대하자. 그리고 이제 우리는 주의 재림의 때까지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사명의 일에 충실하자.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께서 친히 사도들에게 부탁하신 일, 곧 전도의 일이다. 교회는 기회 있을 때마다 구원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또 교회는 전도자들을 훈련하고 파송하고 후원해야 한다. 또 넓은 의미에서 모든 교인들은 전도의 일에 힘써야 한다. 전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이다. 전도는 나의 직업의 그 무슨 일보다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영혼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지는 일이며 허무한 세상에서 영원히 가치 있는 것을 전하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해 힘쓰고 기도하고 또 헌금하자.
12-14절,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함
[12-14]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감람원이라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주께서 승천하신 곳은 감람원이라는 산 혹은 감람산이었다. 누가복음에는 주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승천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눅 24:50). 감람산 벳바게(마 21:1), 베다니(마 21:17), 감람산(마 24:3) 등은 다 같은 지역을 가리킨다. 그 곳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제자들은 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 곳은 열한 사도들이 머물고 있었던 곳이었다. 그들 모두는 거기에서 여자들과 예수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전념하였다. 전통사본에는 그들이 기도와 간구에 전념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들은 십일 동안 마음을 같이하여 계속 기도와 간구에 전념하였다. 그것은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한 준비기도회이었고 전도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특별기도회이었다.
교회의 삼대 임무는 예배와 영적 성장과 전도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임무요, 영적 성장은 자체를 위한 임무요, 전도는 세상을 위한 임무이다. 예배와 영적 성장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기도이다. 교회는 기도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는다. 또 교회는 기도로 성장하고 온전하여진다. 교회의 이 삼대 임무는 성경이 밝히 계시하는 바이며 전통적으로 교회가 밝히 이해했고 힘써 왔던 바이다. 이 삼대 임무를 저버리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며 또 이 삼대 임무를 소홀히 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 앞에 큰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5-26절, 사도 보선(補選)
[15-20]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명이나 되더라. 그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그 기도회에 모인 무리의 수는 약 일백 이십명이 되었다. 그 기도회 기간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열두 사도의 자리 중 비게 된 한 자리를 보충하게 하셨다. 베드로는 일어나 예수님을 잡는 일에 안내자가 되었던 유다에 대한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말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며 또 그 말씀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성취된다. 성경의 예언과 성취의 성격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된 책임을 증거한다. 우리는 성경의 영감성과 신적 권위성을 확신해야 한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우리의 신앙과 행위는 전적으로 성경 계시에 의존한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이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넘긴 가룟인 유다의 말로(末路)는 참으로 비참하였다. 본문과 마태복음 27장의 말씀(5-8절)을 종합해보면, 그는 예수님이 정죄되심을 보고 뉘우치며 받았던 은 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으나 받지 않자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러나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왔다. 한편 대제사장들은 그 은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다. 그 밭은 아겔다마 즉 피밭이라고 불리웠다.
요한복음에 보면,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이었고(6:64)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가는 도적이었고(12:6)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13: 10). 사탄은 벌써 그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려는 생각을 넣었고(13:2) 돈에 대한 욕심은 마침내 그로 하여금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내가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흥정하게 만들었다(마 26:15). 그는 모든 면에서 직분자의 자격에 미달하였다.
교회의 직분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씻음을 받은 자이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돈에 대한 욕심이 없어야 한다. 디모데전서 3장은 장로의 자격으로 여러 가지를 언급하면서 나그네를 대접하며 돈을 사랑치 않는 것을 들었다. 돈을 사랑치 않고 선한 일을 위해 너그러이 돈을 쓸 줄 아는 자가 바른 신앙인이다.
[21-26]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베드로는 주를 배신하고 멸망의 길을 택한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 한 명을 보충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사도의 자격 요건으로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어야 할 것을 제시하였다. 그 자격 요건은 사도의 직무와 직결되었다. 사도들은 전도자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증인들이다. 그들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해야 할 자들이었다.
제자들은 베드로의 제안에 동감하였다. 그들은 두 사람을 자격자로 추천하였다.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유스도라고도 하는 요셉이요 다른 하나는 맛디아이었다. 제자들은 그 두 사람을 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께서 그 둘 중에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여주시기를 구하였다. 그런 후 그들은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얻었고 그는 사도들의 수에 들게 되었다.
처음 제자들의 사도 보선(補選)의 사건은 후대 교회에게 본이 된다. 그들에게서는 선거 운동 같은 인간적 요소를 찾을 수 없다. 그들에게서는 후보자들의 경쟁이나 자기 선전이나 상대방에 대한 비방을 찾을 수 없다. 또 그들에게는 성대한 임직식 같은 것도 없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소박하고 순수하고 영적이었다. 오늘날 교회도 직분자를 택할 때 이런 합당한 방법을 취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먼저 어떤 직분의 합당한 역할과 직무를 설명하고, 그 다음 그 직분을 가질 만한 자의 자격을 성경에 계시된 대로 설정하고, 그 다음 거기에 해당하는 자를 후보로 추천한 후, 하나님께 기도하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후보자가 바르게 추천되었고 추천된 후보자들이 참으로 다 자격자라면, 성경의 예대로 제비뽑기도 결정의 한 방식일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법이 투표를 통해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는 자로 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사도의 자격 요건을 통해서 복음의 성격을 깨닫는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본 자들이다. 그들은 주님의 기적들을 보았고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보았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친히 목격한 증인들의 증언에 근거한다. 이것은 확실한 진리가 아닌가? 그러므로 기독교 복음을 확신하자. 이보다 더 확실한 진리는 세상에 없다.
둘째로, 우리는 가룟 유다의 말로를 기억하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이 없고 죄사함의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오직 돈에 대한 욕심만 가졌던 그는 마침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무엇보다 돈에 대한 욕심은 그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우리는 돈에 대한 애착을 참으로 버리고 선한 일을 위해 돈을 쓸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믿음은 영적이고 천적이기 때문에 세상의 것들을 분토와 같이 여긴다.
셋째로, 우리는 처음 제자들과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써야 하겠다. 우리는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교회는 단순히 회원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친목단체가 아니고 또 단순히 자선사업을 힘쓰는 단체도 아니다. 교회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신 자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뜻을 배우며 실천하는 단체이다. 교회가 교회의 구실을 바로 하지 못하면 하나님께로부터 큰 화를 받게 될 것이다. 교회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 지는 성경에 자세히 쓰여 있고, 그것을 연구하고 증거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교역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바른 교역자들의 교훈과 인도를 달게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닐 것이다. 교회는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말씀과 기도 가운데 영적으로 성장하고 또 이 구원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임무를 바로 알고 교회의 임무를 바로 수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 교회가 되자.
2장: 성령의 강림(降臨)
1-4절, 성령의 강림
[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에 성령께서 내려오셨다. 오순절은, 무교절 주간에 처음 추수한 보리단을 안식일 후 첫날 곧 일요일에 하나님께 흔들어 드리는 절기인 보리 초실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 오순절은 일요일 곧 주일이었다. 그 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셨다.
성령의 강림은 외적인 현상들을 동반하였다. 오순절날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제자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였다. 그 집은 1: 13에 언급한 '저희 유하는 다락'이었을 것이다. 또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 혹은 불같이 갈라지는 혀들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들을 동반하면서 내려오셨다.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 그것도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사실을 나타내는 독특한 현상이요 표시이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구약의 요엘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바요(욜 2:28, 29) 우리 주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 후에 제자들에게 교훈하실 때 약속하신 바(요 14 -16장)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성령께서는 약속대로 오셨다. 또 성령께서 오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속(救贖)하신 자들을 실제로 구원하시는 일 즉 그들을 중생(重生)시키고 성화(聖化)시키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이었다. 오늘날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시는 시대이다. 신약교회 시대는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시대이다. 성령의 오심은 진실로 성도들에게 말할 수 없이 큰 복이다. 성령께서는 성도들 속에 영원히 거하셔서 그들에게 보혜사 곧 위로자가 되신다. 또 성령께서는 성도의 신앙 생활과 성화(聖化)와 전도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하신다.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여 자신의 죄성(罪性)과 세상과 마귀의 권세를 이긴다.
5-13절, 무리들이 방언을 듣고 놀람
[5-13]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오순절 성령 강림의 독특한 한 표시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 방언이라는 헬라어 원어(글로싸)는 '언어'라는 뜻이다. 제자들은 다른 언어들로 말했다. 그때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에 우거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여러 언어들로 말하는 소리를 듣고 큰 무리가 모여왔다. 그들은 제자들이 각각 자신들의 언어들로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였다(6절). 그들은 자신들의 난 곳 언어들로 들을 수 있었다(8절).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들]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했다(11절). 그것은, 어떤 이의 추측과 같이, 제자들이 한가지 언어로 말하고 듣는 사람들이 여러 나라 언어들로 들은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여러 나라 언어들로 말하고 사람들이 그 여러 언어들로 들은 것이었다. 분명히, 방언은 듣는 기적이 아니고 말하는 기적이었다. 본문은 무리들이 떠나온 15개의 지역들의 이름을 열거한다. 그것은 제자들이 적어도 15개의 언어들로 말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신약성경의 방언은 이처럼 언어를 가리킨다. 사도시대의 방언은 외국어, 즉 제자들이 아직 배워본 적이 없는 외국어이었다.
이미 믿은 자들은 성령께서 그들 속에 거하시는 표시로 꼭 방언을 말할 필요는 없다. 사도시대의 방언은 성령 강림의 표시이었으다. 그러나 이미 믿은 자에게는 방언보다 인격적 신앙 생활이 더 중요하다. 즉 바른 지식과 믿음과 사랑의 인격이 더 중요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린도전서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얻은 제자들로 하여금 방언을 말하게 하신 것은 성령의 역사로 제자들이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세계복음화의 일을 이루게 될 것을 암시한다. 세계복음화의 가장 큰 장애물은 언어의 장벽일 것이다. 인류는 본래 한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창 11:1). 그러나 홍수 심판 후 노아의 자손들이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고 인본주의적 연합운동을 도모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고 인류는 서로 의사 소통을 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게 하셔서 온 세상의 택한 백성들을 다 구원하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심을 감사하자. 성령께서는 모든 믿는 이들 속에 들어와 계신다.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중생치 못하고 참된 회개와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속에 성령께서 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의 위로와 인도하심과 능력을 항상 구하자. 또 우리는 오늘날 방언을 구할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중요한 믿음의 바른 지식과 사랑과 덕스러운 인격을 사모하자. 그것들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 행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들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방언들로 암시된 세계복음화의 일을 위해 힘쓰자. 교회는 같은 말을 쓰는 동족들에게 뿐만 아니라, 또한 말이 다른 모든 민족들에게까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이 과업을 위해 지혜와 힘을 모으고 물질을 힘써 바쳐야 한다.
14-36절, 베드로의 첫 설교
[14-21]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오순절에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여러 나라 말들로 방언을 말할 때 그 소리를 듣고 그 곳으로 모여든 많은 무리들이 놀라고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기를 제자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하자,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더불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것은 베드로의 첫 설교와 같았다. 그것은 원고를 준비한 설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성령의 감동과 힘에 이끌리어 한 설교이었다. 그의 설교의 요지는, 우선 그들이 방언을 하는 것이 당시 시각이 제3시 즉 오전 9시이니 제자들이 술취한 것이 아니고,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로서 성령을 받은 현상이라고 증거했다. 하나님께서는 요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하나님의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또 그는 성령께서 부어지면 사람들은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예언은 구약 백성이 경험하지 못했던 성령의 풍성한 임하심을 약속한 것이었다. 이것이 오순절에 이루어졌다.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베드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의 강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한다. 먼저, 그는 예수께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신 사실을 증거한다. 그는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가 나사렛 동네에서 어릴 때부터 자라나신 인간임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물질적 육체를 가지신 분이셨다. 그는 참으로 인간이셨다. 그러나 그는 또한 참으로 하나님이셨다. 그것은 그의 기적 행하심을 통해 증거되었다. 그는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들을 행하셨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하기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역사상 누가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일이 있었는가? 역사상 누가 떡 다섯 덩이로 오천명을 먹인 일이 있었는가? 역사상 누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는 냄새가 나는 사람을 살린 일이 있었는가? 이 모든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이 아닌가? 이와 같이,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이심을 풍성히 증거하였다. 또 이러한 기적들은 어느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너희도 아는 바에," "너희 가운데서," "너희 앞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의 신적 인격을 증거하셨다.
[23, 24]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그러나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의 신성(神性)을 밝히 증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영접지 않고 배척하였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예수께서 달려 죽으신 십자가는 인간의 심히 악함을 증거하는 십자가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고 믿을 만한 많은 일들을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부정하고 멸시하고 배척하고 대적한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심히 악함을 증거할 뿐이다. 이것은 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건져내셨다. 예수께서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25-32]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다윗의 시편에 예언된 바임을 증거한다. 그는 시편 16편을 인용하였다. 거기에서 다윗은 주께서 그의 영혼을 음부 곧 지옥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로 하여금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상 다윗은 죽어 장사되었고 그의 무덤은 그때까지 그들 중에 있었다. 그의 육체는 다 썩었음에 틀림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편에서의 그의 고백이 자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그의 뒤에 오실 메시아에 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시편의 말씀은 곧 메시아의 부활에 대한 예언이었던 것이다. 그 예언대로 주 예수께서는 그 육체가 썩지 않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바로 그의 부활 사건에 대한 증인들이다.
[33-36]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베드로는 모인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 부어주심으로 이제 여러분이 이런 현상을 보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서도 다윗의 다른 시편인 시편 110편을 인용하며 성경의 예언대로 되었음을 증거한다. 거기에서 다윗은 메시아를 '내 주'라고 불러 메시아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멸하시기까지 그를 그의 우편에 앉게 하실 것을 예언적으로 말했다. 하나님 우편에 앉는다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와 능력과 통치권을 가진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또 다윗의 원수들은 곧 하나님의 원수들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원수들인데, 사탄과 악령들과 사탄의 종들이다. 그들은 다 함께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허물고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을 핍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그의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셨고 교회의 사자들을 오른손에 붙잡으시고 교회들 사이를 거니시며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러나 그의 원수들의 완전한 멸망은 장차 그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베드로는 결론적으로 온 이스라엘과 온 세상이 다 알아야 할 가장 중대한 사실은 예수께서 주님이시요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라고 증거했다. 예수께서 주님이시요 그리스도시라는 증거들은 이미 증거된 대로 그의 기적 행하심과 그의 부활과 그의 승천과 또 성령을 부어주심 등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그는 우리의 구주시요 주님이시다. 그는 우리의 대속(代贖)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시요 지금은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시고 교회를 다스리시며 보호하시고 원수들을 징벌하시고 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확신하자.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하자. 그래서 택한 백성이 다 주께로 돌아오도록! 다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받도록!
37-42절, 3천명의 결실(結實)
[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의 전도 설교는 효력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다. 들은 무리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사람은 마음이 굳어 찔림을 받지 못한다. 말씀의 화살이 그 마음에 꽂히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마음에 찔림을 얻고 회개하고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구원의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회개하고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회개'라는 헬라어 원어는 '생각의 전환'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 하나님 없는 데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의지하는 데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죄의 낙을 누리던 데서 죄를 미워하고 버리는 데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그를 부정하던 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어야 한다. 생각이 바뀌어야 삶이 바뀐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그를 인정하고 그를 믿고 의지하며 그 앞에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죄사함을 위한 것이다. 세례는 씻는 의식이다. 세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죄씻음이다. 인간에게 죄씻음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죄 때문에 죽음과 불행이 왔다. 그러나 죄씻음으로 의와 영원한 생명과 평강이 온다. 세례 자체가 죄를 씻는 것은 아니지만, 세례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의 피로 죄씻음을 받는 것을 표시하고 확증한다.
죄사함의 구원의 결과로 얻는 중요한 한 사실은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마음에 모신다는 것은 가장 놀라운 특권이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우리에게 다함이 없는 힘을 공급하신다. 성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라가며 거룩하여진다.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힘있게 섬길 수 있게 된다.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이 약속'은 죄사함과 성령을 받음의 약속을 가리킨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또 성령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것은 '너희와 너희 자녀' 곧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먼데 사람' 곧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졌다. 이 약속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에 '부르심'이란 단순히 외적으로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내면적으로 효력 있게 부르시는 것을 가리킨다. 이 부르심으로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며 구원에 이른다.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전도는 기본적 진리의 선포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부수적으로 '확증과 권면'이 필요하다. 사도 베드로는 여러 말로 복음을 확증하며 권면하였다. 성경은 바로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책이다. 이 책을 읽는 자들과 연구하는 자들은 다 확신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또 이 세상과의 구별을 가져온다. 세상은 악하고 하나님 앞에서 패역하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세상 사람들은 목이 곧고 마음이 완악하다. 사람이 세상대로 살면 결국 망하고 만다. 사람은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베드로의 전도와 확증과 권면은 결실을 얻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고 성령의 역사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에 응답하였다. 그들은 세례를 뒤로 미루지 않았다. 그 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3천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다 예수께 복종한 제자들이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120명의 무리에 3천명의 신입교인이 더하여졌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적과 같은 즐거운 사건이었다.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우선 네 가지 일에 힘썼다. 이것은 후시대의 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일들이다. 첫째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일이었다. 진리의 바른 가르침이 중요하다. 진리는 곧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교리와 윤리, 즉 믿어야 할 것과 행해야 할 것을 다 포함한다. 무엇이든지 원리를 바로 알아야 바르게 행할 수 있다. 기계도 원리를 바로 알아야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 가르침은 아무나 할 수 없고 또 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강도사'라는 제도를 둔다. '강도사'란 '도를 강론할 자격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즉 설교할 자격을 주는 제도이다. 아무나 주일학교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사는 주일학교 공과책에 충실해야 한다. 또 교역자는 그 교재의 내용이 건전한지 틀린 부분은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 가르침이 혼란하면 하나님의 일이 혼란해진다. 요즘 교회들은 가르침이 혼란하다. 그러므로 별별 풍조들이 교회들 안에 들어온다. 교회연합운동, 신복음주의, 은사운동, 프로미스 키퍼스 운동, 알파 코스 등이 들어왔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있은 후 역사적 기독교는 복음주의 혹은 개혁신학이라고 불리웠다. 복음주의는 천주교회와 구별하기 위한 이름이고 개혁신학은 루터교회와 구별하기 위한 이름이었다. 복음주의나 개혁신학이라는 이름은 귀한 이름들이었다. 천주교회는 복음을 왜곡시켰지만, 개신교회는 복음을 재발견하였다. 복음주의라는 본래의 뜻은 복음을 믿는 입장이라는 뜻으로 그것은 정통 기독교를 가리켰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복음주의의 폭이 너무 넓어져서 복음주의라는 이름 아래 각종 이단들이 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無誤)를 부정한다. 어떤 이들은 유신 진화론, 즉 창조론과 진화론을 절충시키는 이론을 제안하였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교단 안에 머물러 있고 또 그렇지 않은 많은 이들도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를 아무 문제 의식 없이 행하고 있다. 또 심지어 오늘날 복음주의는 천주교까지도 포용하는 추세에 있다. 이것은 참된 복음주의가 아니다. 참된 기독교는 그런 오류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타협적 복음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확고히 서야 한다. 목사의 사상이 바르고 부교역자들의 사상이 바르고 교사들과 권찰들의 사상이 바를 때 교회는 바로 세워질 것이다.
둘째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서로 교제하기를 힘썼다. 그것은 성도의 교제이다. 그것은 서로 문안하고 서로를 돌아보는 교제이다. 그것은 주께서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교제이다. 그것은 서로를 향해 오래 참고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며 친절하고 진실을 말하며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는 교제이다. 그것은 남을 미워하거나 비난하거나 해치는 악을 행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일이다. 교회는 서로 교제하는 회가 되어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의 교제는 떡을 떼는 일을 포함하였다. 그것은 성찬식뿐 아니라 또한 식탁교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성찬식은 하나님과 성도들 상호간의 교제의 중요한 표시이며 식탁교제도 교제의 표시이다. 그러나 식탁교제는 가능한 한 헌금으로보다는 개인적인 비용으로 충당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헌금은 주로 전도와 구제의 일에 써야 할 것이다.
셋째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 교회는 기도로 힘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확신하며 또 실천할 힘을 얻는다. 특히 교회는 기도로 전도와 봉사의 능력을 얻는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확실히 회개했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가?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었는가? 또 우리는 성령을 받았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에 스스로 정직한 대답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대답이 '예'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목사의 바른 가르침을 받고 또 그것을 사모하자. 합정동교회는 백영익 목사님을 통해 약 30년간 말씀을 배워왔고 또 김효성 목사를 통해 만 9년 8개월간 말씀을 받았다. 김 목사는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을 제외하고는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해석하고 증거하였다. 또 새벽이나 수요일, 금요일밤을 통해 욥기와 잠언, 전도서를 제외하고 구약성경을 거의 전부 해석하고 강론하였다. 우리는 바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그 말씀을 겸손히 받고 사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바른 말씀을 거두어가실 것이다. 말씀의 기근과 기갈이 찾아올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힘쓰자. 우리는 서로 문안하고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서로를 진심으로 위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모이기를 힘써야 하고 교회를 허무는 자들이 아니고 세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기도하기를 힘쓰자. 우리는 예배시간에 대표기도하는 이들과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기도의 시간에 참석해야 한다. 우리는 수요일밤 예배 혹은 기도회에 힘써 참석해야 한다. 또 우리는 자신을 위해 또 다른 이들을 위해 또 교회를 위해 새벽기도회에 힘써 참석해야 한다. 밤에 늦게 잠으로 새벽에 일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금요일밤 기도회 시간이 있다. 모든 성도들은 물론이고 교회의 제직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힘써야 한다.
43-47절, 초기 예루살렘 교회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사람들은 사도들을 두려워하였다. 사람들에게 생긴 이 두려움은 유익한 두려움인 것 같다. 사도들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은 그들의 가르침을 믿고 순종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구원과 성화(聖化)에 이르게 할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사도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멸시하고 대항하며 불신하였을 것이고 마침내 악인들이 들어갈 멸망에 이르고 구원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사도들을 두려워했던 까닭은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성경에는 단지 몇 가지의 기적들만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을 통해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고 증거되어 있다. 사도들이 행한 기적들은 그들의 신분증과도 같았다. 그것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며 그들의 전하는 바가 하나님의 진리임을 증거하고 확증하였다. 그 기적들은 하나님의 하신 일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들을 통해 구원의 진리들을 증거하시고 확증하셨다. 히브리서 2:3-4,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主)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기독교는 기적들로 확증된 종교이다.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믿는 사람들은 다 함께 있었다. '다 함께 있어'라는 말은 반드시 수천명의 사람들이 다 한 장소에 살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 말은 단순히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한 장소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서로 교제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정상적 교회의 교제의 모습이다.
그들의 교제는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행위로 표현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물건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물건들을 공동 소유로 생각하였고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내어놓았던 것이다. 그들이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 자신의 물건들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며, 둘째로 교회의 교인들이 다 서로 형제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오늘날도 이런 지식과 믿음이 있는 자들은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다.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교제는 구제로 표현되었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 물론, 성경은 자기 손으로 성실히 일하여 먹고 살 것을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친히 일하면서 복음을 전함으로 성도들에게 일하는 본을 보여주었다(행 20:34, 35). 또 그는 손으로 일하며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쳤다. 에베소서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0, 1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 . .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그러나 재산과 물질의 여유가 있는 자들은 그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것이 선하고 좋은 일이다. 물질은 선하게 사용하는 데 가치가 있다. 구제가 바로 그 선한 일이다.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하나님께 찬송하며 기도드리고 또 다른 이들에게 전도할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오늘날도 예배당은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부르며 기도하기 위해 준비된 성전(거룩한 집)이다. 우리는 이 집에 모이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 10:24, 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또한 그들은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이것은 성찬식과 그와 더불어 나눈 식탁 교제를 가리킬 것이다. 성찬은 성도들의 엄숙한 교제의 표시이며 식탁 교제는 사랑의 표현이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은 것은 그들의 사랑이 거짓되지 않고 진실함을 나타낸다. 서로 미워하고 비난하는 자들과 사랑의 식탁 교제를 나누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는 아직 그런 사탄의 역사는 없었다. 주님과 참된 믿음을 배반하였던 가룟 유다는 제 갈 길을 갔다. 초기 예루살렘 교인들의 사랑은 진실하였다.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들은 또한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찬양은 교회의 중요한 임무이다.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셨다(사 43:21).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케 하려 하심이었다(엡 1장). 그러므로 찬송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무리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또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정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지으면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 욕하고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도 욕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 사랑하며 가난한 형제들을 돌아보고 구제하는 것을 보면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하고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도 칭송할 것이다. 이것은 정상적인 신자의 삶의 모습이다. 참된 신자는 가까운 가족들과 식구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나아가 이웃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을 것이다. 그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은 아마도 믿음과 인격에 어떤 큰 결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찾아 고쳐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 복이 될 것이다. 그것을 고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욕이 되고 자신에게도 화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수적으로 성장하는 교회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전도했는지는 본문에 나타나 있지 않다. 물론 그들은 기회 있는 대로 전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보다 성도들의 행실의 본을 강조한다. 그들은 행실로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었다. 그 결과, 주께서는 날마다 그 교회에 구원얻는 자들을 더하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부활 승천하신 주께서 친히 행하시는 일이며 성령께서 역사하심이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복음을 처음 전하는 자나 복음을 이미 받은 자들에게 권면하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사람 속에 믿음을 심으시고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라고 말했다(고전 3:7). 사람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의 말과 행실을 통해 다른 이들을 구원하신다.
전통사본에는 본절에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그 교회에 더하게 하시니라."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그것은 어떤 인간적 조직이나 외형적 건물이 아니고 믿는 이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중요하다. 그들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그들이 모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순종하며 살고 서로 교제하는 그 곳에 참 교회가 있다. 역사가 흐르면서 교회가 인간적 조직이나 외형적 건물을 중시하게 되었지만, 그런 것은 교회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다. 주의 이름을 진실히 부르는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참 교회가 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 수적인 성장이 있었으나 그것은 교회의 본질에 속한 문제가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교회의 임무에 속한 문제도 아니었다. 교회의 본질은 성도들의 교제에 있었다.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을 때 그 곳에 교회가 있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의무뿐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의무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수적인 강박 관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큰 예배당을 지어놓고 이 장소를 채워야 되는데 하는 식의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저 성도답게 살았고 교제했고 또 기회 있는 대로 전도했다. 그리고 수적인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로 뒤따라 왔다. 수적인 성장은 단지 하나님이 주신 복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점을 배운다. 첫째로, 우리의 교회는 성도의 참다운 교제를 실천해야 한다. 성도의 참된 교제는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모든 교인들이 서로 형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풍성하게 될 것이다. 또 성도의 참된 교제는 우리 가운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자를 돌아보는 행위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돌아볼 힘은 없을지라도 교회 안의 어려운 형제들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식탁 교제를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형제 사랑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둘째로, 우리는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교회는 모일 때 교회다워진다. 교회는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바른 말씀의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예배당은 성도들이 모이는 일을 위해 있다.
셋째로,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사랑하며 선한 일에 힘쓸 때 이루어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서로 비난하고 악을 행한다면 하나님께서 노하실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우리를 욕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롭고 선한 행실로 하나님의 의와 선을 전파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우리 교회에 참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을 더하게 하실 것이다.
3장: 앉은뱅이를 일으킴
1-10절, 앉은뱅이를 일으킴
[1-5]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 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와 요한은 제9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갔다. 제9시는 오후 3시경이다. 유대인들의 경건한 풍습은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시편 55: 17에 보면, 다윗은 하루에 세 번,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기도했던 것 같다. 다니엘 6:10에 보면,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했다. 기도의 시간에 많은 사람들은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던 것 같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美門)에서 날마다 구걸하는 한 앉은뱅이를 보았다. 그 병자는 40여세이었으니(행 4:22) 40여년 간 앉은뱅이로 고생한 자이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간 것은 기도하기 위해서이거나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이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날 그들로 하여금 그 앉은뱅이를 고치게 하시고 또 그를 통해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셨다.
[6-10]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하며 그 앉은뱅이를 잡아 일으켰다. 사도들에게는 걸인을 동냥할 은과 금은 없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의 이름이었으며 능력의 이름이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모든 진실한 성도들의 마음 속에 있다.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 병자는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뛰어 서서 걸었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베드로를 통한 병고침의 일은 즉각적이었고 완전하였다. 그것은 기적적이었다. 그 앉은뱅이의 기쁨과 감격은 그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었으랴! 그는 난생 처음으로 걸었다! 또 모든 백성은 그가 구걸하던 앉은뱅이임을 알아보고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다.
11-26절,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
[11, 12]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는 솔로몬 행각에 모인 무리에게 이 일은 자기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옛날 요셉도 애굽왕 바로 앞에서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창 41:16). 또 다니엘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 앞에서 그의 꿈과 그 해석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지혜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아서가 아니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임을 분명히 말했다(단 2:28, 30). 이것은 모든 성도들의 본받을 태도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받았다. 고린도전서 4:7,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의 우리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고전 15:10).
[13-16]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무리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하였다. 그는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했다. 여기에 구약과 신약의 연관이 있다. 구약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바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하나님이시며 그를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는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자이지만, 그를 고백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는 자이다. 요한일서 2: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여기에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있다.
또 베드로는 로마 총독 빌라도가 인정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 죽을 죄가 없으신 자, 즉 거룩하고 의로우신 자시요 생명의 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우리가 그 일에 증인이라고 증거하였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그를 확신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 그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거이다. 그의 부활이 확인되면 그에 대한 모든 의심과 불신앙은 끝나고 말 것이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는 자들은 그의 부활을 확인하고 그를 믿고 확신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 앉은뱅이를 완전히 낫게 하였다고 증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서 역사하시는 능력의 주님이셨다. 병고침의 기적은 그 사실을 확증하였다. 이로써 예수께서 구주이심은 더욱 확증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풍성한 증거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 우리는 구태여 또 다른 기적을 통하지 않고서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
[17-2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베드로는 그들이 알지 못하여 그리한 줄 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루게 하셨다고 말했다. 그런 후, 그는 무리에게 회개하여 죄 없이 함을 받으라고 말했다. 그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회개함으로 죄사함을 받는 소식이다. 죄는 멸망의 원인이다. 그러나 회개는 구원의 길이다. 우리의 전할 내용도 이것이다--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
베드로는 또 회개하고 죄 없이 함을 얻으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구원의 즐거움을 말한다. 죄로 인해 슬픔과 두려움과 고통에 빠져 있었던 우리들이 죄사함을 받음으로 기쁨과 즐거움과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했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현재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이다.
베드로는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증거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회복의 때까지 그를 천국에 두실 것이지만, 그때가 되면 그가 다시 오실 것이며 그때 우주 만물은 새로워질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목표이다. 인류 역사는 그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 그것이 또한 교회의 소망이기도 하다. 이 만유의 회복은 구약 율법 중 50년마다 지켜야 했던 '희년'의 제도에서 이미 암시된 바이었다. 그때 우주는 창조의 본래의 모습대로 회복될 것이다. 죄 때문에 세상이 더러워졌었으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마침내 세상이 새로워질 것이다.
[22-26]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또 이 시대는 모세가 '나 같은 선지자'가 올 것이라고 예언한 예언이 성취된 시대요, 사무엘 이후의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 곧 메시아로 말미암은 회복의 예언이 성취된 시대임을 증거하였다. 구약의 회복 예언은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영적 회복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물질계의 회복을 포함한다. 또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네 자손으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말씀의 성취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육의 복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 그의 부활을 증인들의 증언들을 통해 확신하였는가?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얻었는가? 우리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거기에 대해 확실하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널리 전하자. 우리에게 비록 은과 금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자들이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오셨다.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영육의 복을 받을 메시아가 오셨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자.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만유의 회복을 소망하자. 그는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 우주는 새로워질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앞에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 날을 사모하며 거기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두자.
4장: 공회 앞에서 증거함
1-4절, 사도들이 감옥에 갇힘
[1-3]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道)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베드로와 요한이 솔로몬 행각에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거기에 왔다. '성전 맡은 자'는 성전의 경비를 맡은 자를 가리킨다. 성전 수호장 혹은 경비실장이다. 사두개인들은 당시의 자유주의자들로서 부활을 부정하였다(행 23:8).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의 전하는 말과 가르침과 예수를 예로 들어 부활에 대해 증거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들은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싫어하였다. 중생치 못한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도(말씀)을 싫어한다. 심지어 교회의 직분자라 할지라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도는 하나님의 긍휼과 성령의 역사로만 깨달을 수 있고 받을 수 있다. 주께서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7). 저들은 사도들을 죄수로 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사도 베드로가 전한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무지하고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핍박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셨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남자의 수는 약 5천명이 되었다. 5천이라는 숫자가 솔로몬 행각에서 전도받고 믿은 자들의 수일지도 모르나, 그것은 아마 그보다 예루살렘 교회의 전체 교인수를 가리킬 것이다. '되었더라'는 헬라어 원어(에게네데)는 단순히 수를 가리키는 뜻보다 수의 증가를 가리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솔로몬 행각에서의 전도로 많은 사람들이 믿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수가 약 5천명으로 늘어났다는 뜻일 것이다.
5-12절, 공회 앞에서 증거함
[5-7]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 다음날 예루살렘 공회가 모였다. 관원이라는 헬라어 원어는 '다스리는 자'라는 말로서 유대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그 말은 아마 대제사장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산헤드린이라고 불리우는 유대인 공회의 한 부분으로서 사두개파에 속하였다.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는 이전에 시무하였거나 당시에 시무한 대제사장들이었다. 당시에 시무하는 대제사장은 유대인 공회의 의장이 되었다.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다른 한 부분으로서 바리새파에 속하였다. 서기관들은 율법학자들로서 성경의 사본을 보존하고 필사(筆寫)하고 연구하고 해석하는 학자들이었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에게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고 물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였느냐, 아니면 다른 신의 이름으로 하였느냐는 질문일 것이다.
[8-10]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때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대답하였다. 그의 담력과 구변(口辯)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때에 비상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며 그의 종들에게 비상한 능력을 주신다. 베드로는, 이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은 것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된 것이라고 담대히 증거하였다.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담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말했다. 또 그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말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무죄성(無罪性)을 증거하며 더 나아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롬 1:4).
베드로는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자주 표현하였다(2:22; 3:6; 10:38). 그것은 역사적 예수를 가리킨다. 그것은 나사렛 동네 출신 예수, 그 동네 사람들이 아는 예수, 그들이 그의 가족들과 그의 어린 시절을 증거할 수 있는 예수, 다시 말해 사람이신 예수를 가리킨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 사람이 신적 인격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처럼 독특한 인격이시다. 그는 신인(神人)이시다. 그는 살아계시고 신성(神性)의 영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이시다. 그의 이름이 능력이 있다. 그 이름이 앉은뱅이를 낫게 하였다.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자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구약 시편 118:22의 말씀과 같다. 거기에 보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메시아 예언이었다.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이다. '너희 건축자들'은 유대 지도자들을 가리켰다. 그들이 버렸다는 말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할 것을 말한다. 과연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였고 마침내 로마 총독 빌라도를 통해 그를 죽게 하였다. 그러나 그 버린 돌은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집 모퉁이의 머릿돌은 집의 좌우의 벽을 연결하는 중요한 기초석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교회의 기초석이 되셨다. 사람들은 그를 버렸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셨고 중요하게 사용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들의 뜻은 전혀 달랐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었다.
[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베드로는 세상에서 구주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심을 분명히 증거하였다. 예수께서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었다(요 14:6).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했다(딤전 2:5).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예수님 외에 다른 구주를 주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온 세상에 유일한 구주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주 예수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전도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말세를 당한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의 길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세계의 거의 모든 대교단들의 협의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타종교와의 대화분과장이었던 웨슬리 아리아라자는 말하기를, "기독교의 신, 힌두교의 신, 이슬람교의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힌두교적 이해, 이슬람교적 이해가 있을 뿐이다. . . . 타종교인도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형제 자매요 순례자이지 이방인이 아니다. . . . 힌두교인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동료 순례자이다"라고 하였다.
감신대학 학장이었던 변선환 교수는 "그리스도만이 보편적으로 유일한 구속자이신 것이 아니라"고 말했고 타종교들도 "그들 스스로의 구원의 길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 한신대학의 김경재 교수는, "하느님은 이름 없는 존재로 인간이 자신이 살아온 역사와 문화와 풍토와 환경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적실한 언어로 붙인 이름들이 있을 뿐이다"며 "그것은 하나님이기도, 알라이기도, 비로자나불이기도, 브라만이기도, 한울님이기도 하며 신, 로고스, 태극이거나 혹은 이름 없이 가슴 속에 담아두며 흠모하는 우주적인 어떤 존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런 사상은 가장 악한 이단이다. 교회가 이런 사상을 포용하는 것은 배교적이다. 그러나 보수 교단이 그런 일을 책망하고 경계하지 않고 연합운동에만 힘쓰니 심히 탄식스럽다. 마치 연합이 선이며 연합을 반대하는 것은 악인냥 잘못 평가되고 있다. 이념의 대 혼란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귀한 진리를 배운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환경적 조건과 별개로 역사하신다.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설교를 싫어하고 그들을 잡아 가두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믿게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믿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수는 크게 증가하였다. 우리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 충성하자.
둘째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이 배척하고 십자가에 죽게 한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살리셨고 능력의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그의 이름은 앉은뱅이를 완전케 만들었다. 그는 살아계신 구주이시다. 그는 교회의 기초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는 오늘도 교회를 붙드시고 지키시고 건립하시고 보호하신다. 우리는 그를 믿고 의지하며 그의 능력의 이름을 의지하며 일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버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을 기뻐하자.
셋째로,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주가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기독교의 유일성, 복음의 유일성을 믿는다. 오늘날 기독교계 속에 들어와 있는 종교 다원주의는 가장 악한 이단이다. 또 교회들이 그것을 포용하는 것은 배교적 증거이다. 보수교회들은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사람들이 좋아하든지 좋아하지 않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담대히 전파해야 한다.
13-22절, 사도들이 위협을 당함
[13, 14]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담대히 말했었다. '기탄없이'라는 헬라어 원어(파르레시아)는 '담대히, 확신 있게'라는 뜻이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이 본래 학문 없는 범인(凡人), 즉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으로 알았다가 담대히 말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 사도들의 담대한 발언은 분명히 성령께서 주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었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 20).
옛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모세가 하나님께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하며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었다(출 4:11, 12). 하나님은 모세에게 구변(口辯)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또 우리 예수께서도 인간적으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셨던 것 같다. 유대인들은 그를 기이히 여기며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말했었다(요 7:15).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풍성하고 은혜스럽게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배운 자들이나 배우지 못한 자들이나 간에 주의 종들이 사람들 앞에서 진리를 담대히 증거하게 역사하신다. 진리의 증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 담대히 말할 수 있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대적하고 비난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이 전에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실이 분명하였고 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친 앉은뱅이가 그들과 함께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리는 항상 당당한 법이다. 진리에 대한 정당한 비난의 말은 없다. 진리의 사람들에 대한 거짓된 비난들은 항상 있어왔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대해서도 그러하였지만, 결국 그 모든 거짓된 비난들은 다 파하여지고 하나님의 진리는 승리하며 견고히 세워질 것이었다.
[15, 16]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통해 일어난 기적을 부정할 수 없다고 인정하였다. 그들의 말을 정확히 다시 번역하면, "저희에 의해 확실한 표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드러났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유명한'이라는 헬라어 원어(그노스토스)는 '확실한, 다툴 여지가 없는'이라는 뜻이다. 앉은뱅이가 나은 그 기적은 공회원들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부정하려 했고 왜곡시키려 했다. 그것은 그들이 어두움의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진리는 은밀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게 이루어진 사실들에 기초하고 있다(행 2:22). 그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항상 진리를 부정하고 왜곡시키려 했다.
[17, 18]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공회원들은 사도들에게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도록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믿을 만한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믿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반대하고 대적하며 그것이 전파되는 것을 싫어하고 방해하고 위협하였던 것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다(롬 3:11).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19, 20]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 앞에서 위협을 받았으나 담대히 대답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너희 말' 곧 공회원들, 유대 지도자들,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의 말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들을 온 세계에 전하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28:19, 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과 그의 명령들을 말하고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말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라는 선택의 기로(岐路)에서, 그들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담대히 증거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취해야 할 유일한 바른 태도이다.
[21, 22]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세나 되었더라.
관원들은 사도들을 벌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특히 백성들 때문에 그러하였다. 왜냐하면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40여세나 되었고 백성들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확실한 표적들을 동반하였고 그 표적들에 기초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복음 진리를 확증하셨고 그의 표적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과 기독교가 참됨을 확증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의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리의 사람, 양심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리를 부정하고 대적하고 그 진리를 전하는 사도들을 오히려 위협하고 핍박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그들이 멸망에 이를 사람들이라는 표시이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증거요 영생에 이를 자들이라는 표시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기독교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에 근거한 진리이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들을 가리킨다.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헬라어 원어(페플레로포레메논)는 '매우 확실하게 믿어진 일들, 완전히 확정된 일들'이라는 뜻이다. 또 이러한 사실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확증되었다. 히브리서 2:3-4,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기독교는 믿을 만한 진리요 확증된 진리이다.
둘째로, 기독교가 이와 같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에 근거한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진리가 감추어져 있고 가리워져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진리를 믿지 못하고 그것을 부정하고 대적하고 그 진리를 전하는 자를 위협하고 핍박하는 것이다. 앉은뱅이가 낫는 것과 같은 기적이 일어나도, 믿는 이는 믿지만, 믿지 않는 이는 믿지 않는다. 여기에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과 버려두신 자들의 차이가 나타난다. 아무리 큰 기적을 본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끄시는 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진리를 믿지 못할 것이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자에게는 기적을 보지 못해도 복음 진리를 믿는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지만, 멸망하는 자에게는 어둡고 완고하고 거친 마음을 주셔서 심지어 기적을 보아도 믿지 않는다. 로마서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셋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들 앞에서 담대해야 하고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옳은 일이다. 사람의 위협은 최악의 경우 우리의 육신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함께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실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자. 오직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며, 그의 모든 말씀에 겸손히 복종하자.
23-31절, 사도들이 담대함을 위해 기도함
[23, 24]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공회에서 놓임을 받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 사도들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 말을 들은 사도들은 일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들에게는 어려울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일치된 믿음과 실천이 있었다. 기도는 어려울 때 담력을 얻는 길이다. 성도가 기도 없이 어떻게 환난을 극복하겠는가? 기도 없는 결혼과 가정 생활, 기도 없는 사업과 직장 생활 등은 다 하나님 앞에서 성공적일 수 없다.
사도들은 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부르짖어 통성으로 기도하였다. 보통 때에는 조용히, 남에게 방해되지 않게, 속삭이듯이 기도하는 것이 좋다. 무의미하게 말을 반복하거나 중얼거리듯이 하는 기도는 좋지 않다. 기도는 인격적 하나님께 바른 생각과 바른 말로써 드려져야 한다. 그러나 비상한 때에는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다. 때로는 금식하며 기도한다.
사도들은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대주재 곧 참주인이심을 고백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또한 천지의 대주재자이시다. 그는 모든 일을 임의로 행하실 권한이 있으시다. 우리는 바로 창조자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주권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25-28]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사도들은 헤롯과 빌라도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메시아를 대적한 것은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쓴 시편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사도들은 정통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관, 즉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성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성경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므로 사람들의 불신앙과 대항도 자신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심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한 자들의 대적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사용하셔서 그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29-31]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들은 하나님께 몇 가지를 간구하였다. 첫째는 정치적, 종교적 권세자들이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시옵소서라는 간구이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면 사도들을 위해 적절하게 조치하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보호해 주시든지 피신시켜 주시든지 아니면 원수들을 진멸시켜 주실 것이다.
둘째는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라는 간구이었다. 진리에 대한 핍박은 예견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없애주시기를 구함보다 그것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주시기를 구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진리 운동에 고난과 핍박은 항상 있다. 그러나 전도를 통해 영혼들은 구원을 얻고 교회는 설립되고 확장될 것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담대히 계속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를 확신 있게 다 가르치는 것이다. 전도는 교회의 사명이며 모든 신자들에게 가장 귀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육신적, 환경적 조건을 초월하여 행해야 할 과업이며 세상의 그 어떤 일들보다도 더 큰 중요성을 두고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셋째는 주의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이었다. '손을 내밀어'라는 말이 전통사본에는 '주의 손을 내밀어'라고 되어 있다. 주께서 병고침과 기적을 행하시기를 구한 것이다. 사도 시대에는 이런 역사가 많이 일어났었다. 사도행전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신약성경이 아직 완성되기 전에, 신약교회가 아직 튼튼하게 건립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표적과 기사를 통해 복음 진리를 확증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사들과 능력들은 교회 역사상 계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는 그런 것들 없이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기독교는 기적이나 철학을 전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 왔다(고전 1:22, 23). 또한 2천년 간의 기독교회들의 확장도 기적들을 통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셨다. 모인 곳은 진동하였고 모든 사도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얻었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성령은 능력의 영이시며 능력을 주시는 영이시다. 오늘 우리도 성령의 충만함을 얻음으로 담대히 전도할 수 있다. 전도의 담력은 성령의 충만함에서 나온다. 사도들은 대적자들의 위협 앞에서 마음이 약해지기 쉬웠을 것이지만, 기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얻음으로 담대함을 얻었고 전도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32-37절, 신자들이 유무상통(有無相通)함
[32-37]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교회이었다. 사도행전 2:44, 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본문 32절,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초대 교인들의 유무상통은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짐에서 나왔다. 그것은 저들이 한 교훈을 받았고 한 믿음과 한 소망을 가졌고 한 순종심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아직 마귀가 주는 분열의 징조는 없었다.
초대 교인들은 자기의 재산 즉 집이나 밭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고 모든 물건을 서로 공통적으로 사용하였다. 심지어 밭과 집이 있는 자들은 그것들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에게 드리므로 사도들이 그것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나중에 바울의 동역자가 된 바나바도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바친 사람 중의 하나이었다. 이런 까닭에 교인들 중에는 핍절한 사람 즉 물질적 부족을 가졌던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물질적 필요는 다 충족되었다.
물론 기독교는 사유재산(私有財産)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사회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신 15:11). 구약의 왕정 시대에도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었다. 또 부지런한 자는 부요해지고 게으른 자는 가난해진다(잠 10:4). 성경에서 토색(討索) 즉 남의 재산을 강제로 요구하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큰 죄로 간주된다. 고린도전서 6:9, 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비록 성경이 사유재산을 인정하지만, 우리의 모든 재산은 실상 다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에 불과하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바로 알 때 물질을 다스리는 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물질의 종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6:24).
다윗은 이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역대상 29:11,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29:14-16,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시편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우리가 모든 재산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의 필요를 따라 즐거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초대 교인들의 유무상통의 정신이었다. 물질적 여유가 있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물질을 내어놓는다. 그러나 내 것이라고 자랑하며 내놓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내어놓는 것이다. 물론 게으르지 않고 성실히 일하는 것은 언제나 전제되어야 한다. 게으름은 악한 것이다. 사람마다 건강 상태가 다르고 타고난 재능도 다를 것이지만, 누구든지 손으로 하는 일을 싫어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했다(살후 3:10).
결론적으로,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어려울 때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며 승리적 삶의 방법이다. 둘째로, 우리는 기도함으로 성령의 충만을 얻어 담대히 전도하자. 전도뿐 아니라,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 권찰, 찬양대 지휘자, 반주자, 대원, 주방봉사자, 사무원, 관리인 등 누구든지 기도함으로 능력을 받아 맡은 일을 감당하자.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재산을 전도와 구제를 위해 선용하자. 우리 자신은 검소하게 살며 선한 일을 위해 많이 쓰자.
5장: 사도들이 많은 기적들을 행함
1-11절,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은 유무상통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사랑의 교제이었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소유물을 자신들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았고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자유로이 제공하였다. 그런데 그때 본문에 기록된 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생겼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음으로 징벌하신 것을 보면, 이 사건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사건을 중요하게 여기셨는가?
[1-6]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모든 부자들이 자신들의 소유를 다 내어놓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을' 때에(행 4:32),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헌금을 하긴 해야겠는데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그 값을 사도들 앞에 다 드리기가 아까왔음에 틀림 없다. 그들에게는 물질적 욕심이 있었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골 3:5). 그것은 물질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아니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섬기는 마음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 물질에 대한 욕심은 씨가 가시떨기에 떨어진 것과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게 방해한다(마 13:22). 엘리사의 수종자 게하시는 물질에 욕심을 내다가 문둥병에 걸렸고(왕하 5:20-27), 주님을 배신하고 은 30에 주를 팔았던 가룟 유다는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멸망을 당했다. 물질적 욕심은 성도가 물리쳐야 할 큰 시험거리이다.
더욱이, 아나니아는 물질적 욕심을 감추기 위해 베드로 앞에서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나니아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나니아의 마음 속에는 사탄이 가득하였다. 교회 안에 어떻게 이런 사람이 허용되겠는가?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단지 베드로를 속이려 한 것이 아니고 성령을 속이려 한 것이며 단지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한 것이었다. 성도들의 회(會) 속에 이런 거짓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거짓은 곧 마귀의 속성이다. 주께서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기 때문에 거짓을 버리고 각각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권면했고(엡 4:25), 또 교회의 집사의 자격 요건의 하나로서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않는 것을 들었다(딤전 3:8). 거짓말은 교회 안에서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될 큰 악이다. 만일 교회가 거짓을 용납한다면, 교회는 점차 부패하고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7-11]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 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보다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도직의 권위를 굳게 세워주심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함께 꾀하여 사도들 속에 특별하게 역사하시는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였다.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권위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속에는 사도들을 업수이 여기는 마음이 생겼음에 틀림 없다.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단순히 헌금 액수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 욕심 문제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단순히 거짓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보다 더 큰 문제에 관계되었다. 이것은 사도직의 권위에 관계되어 있었다. 사도직의 권위는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은 그들이 전하는 말씀, 그들이 주는 교훈에 관계되기 때문에 그러하였다. 사도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 있게 전달되어야 했다. 그 말씀은 모든 회중에게 권위 있게 받아져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 온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다(5, 11절).
사도직의 권위는 양을 치는데 있었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명을 일깨우시면서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요 21:15-17). 목양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말씀의 권위이다. 그가 전하고 가르치는 말씀은 권위 있게 전달되고 받아져야 한다. 이 직분은 목사와 장로들에게 전달되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말했다(행 20:28). 교회에서 인도자들의 권위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했다(히 13:17). 베드로도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교훈했다(벧전 5:5).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권위가 무시되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업수이여김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불순종은 큰 악이다. 바울은 교인들에게 옛날 모세의 지도에 대항하여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지 말라고 권면했다(고전 10:10). 또 유다도 그의 서신에서 성도들이 '원망하고 불만을 토하는 자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유 16).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권위가 굳게 세워지고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견고히 확립되게 하시기 위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치셔서 죽이셨다. 그것은 너무 두려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하나님의 의도는 분명하였다. 사도직은 존중되어야 하고 교회는 그들에게 복종하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에 복종해야 했다. 사도들의 전한 교훈이 바로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또 사도들의 목양의 직분이 목사와 장로들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사와 장로들, 곧 당회의 성경적 교훈과 치리는 교인들에 의하여 존중되어야 하고 복종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무시하고 대항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시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성경적 교훈과 치리 안에서 굳세게 세워지고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12-16절, 사도들이 많은 기적들을 행함
[12-16]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손으로 많은 기적들이 행해지게 하셨다. 그것은 기적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히 병자들이나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자들이 불쌍해서만도 아니었다. 만일 그것뿐이라면, 왜 사도 시대 이후에 그런 기적들이 계속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을 통해 이루어진 기적들은 그들의 권위를 확증하고 그들이 전한 복음과 그들이 가르친 교훈들의 진리성을 확증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터 위에, 즉 그들이 전하는 말씀과 교훈의 터 위에 교회를 견고히 세우기를 원하셨다. 이제 그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초대의 신자들은 사도직의 권위를 체험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도들을 교회의 설립자로 사용하고 계시는지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엡 2:20). 또 사도들의 글들인 신약성경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초대 교회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물질적 욕심을 가지지 말자. 탐욕은 우상숭배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성도에게 가장 큰 시험이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 생명을 질식시키고 우리의 신앙 항해를 파선케 만드는 큰 악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모든 거짓을 버리고 서로 진실을 말하자. 거짓은 마귀의 속성이요 지옥갈 죄악이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용납될 수 없는 큰 악이다. 만일 교회 안에 진실이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고 마귀의 회(會)일 것이다.
셋째로,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워주신 담임목사와 장로들 곧 당회의 교훈과 치리를 존중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들에 대한 비난은 사사로이 다루어져서는 안되며 매우 신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교인에게 가장 큰 불행은 목양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이다. 물론 담임목사와 장로들은 바른 신앙사상과 바른 인격과 덕과 바른 분별력을 가져야 하지만, 교인들은 목사의 성경적 교훈을 달게 받고 당회의 성경적 치리에 대해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목사의 교훈이나 당회의 치리에 대해 어떤 이의(異議)가 있는 자는 사사로이 불평하여 다른 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자신뿐 아니라 남들의 신앙을 죽이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더 큰 악이 될 것이다. 그는 신중하게 그 문제를 당회에 제기하고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목양의 관계가 바로 되는 것이다. 특히 강단에서 증거되는 성경적 설교와 교훈은 성도들에게 그대로 받아져야 한다.
17-32절, 공회 앞에서 또 증거함
[17, 18]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였다. 시기는 교만한 마음과 명예심에서 나온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도 시기 때문이었다. 마태는 로마 총독 빌라도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증거한다(마 27:18). 미움과 교만은 다툼과 분열을 일으키고(잠 10:12), 온유와 겸손, 인내와 사랑은 일치와 단합을 가져온다(엡 4:1-3).
사도들은 전도하다가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로 잡혀 옥에 갇혔다. 바른 믿음을 지키다가 옥에 갇히거나 핍박을 받는 것이나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거나 핍박을 당하는 것은 복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옥에 갇힌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했다(딤후 1:8). 예수께서는 우리가 주님 때문에 비난을 당하고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장차 큰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1, 12).
[19, 20]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하나님께서는 그 밤에 천사를 보내어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끌어내셨고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때에 비상한 방식으로 일하셨다. 특히 사도 시대에는 여러 가지 기적들이 일어났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하심을 여러 모로 밝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옥에서 놓여난 기적이 아니고 그들이 성전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복음 전파를 통해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어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영원히 죽을 죄인들로 생명을 얻게 하는 생명 운동이다.
[21]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사도들을 통해 이미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행 5:12, 15, 16), 교회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공회원들 즉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그것들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사람들을 해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모임을 가졌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받들기 위해 모인 모임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대적하기 위해 모인 모임이었다.
[22-25]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신기한 일을 보이셨다. 그들이 보낸 사람들은 감옥에 가서 옥이 든든히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사도들이 한 사람도 없었음을 보았고 돌아와 그대로 보고하였다. 정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사도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더욱 놀라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지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사도들을 위하시고 그들을 도우신다는 것을 알리시며 느끼게 하셨다.
[26]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
교회의 지도자들과 달리, 오히려 일반 백성들은 사도들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고 그들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러므로 성전 맡은 자와 직원들은 사도들을 잡아 왔으나 강제로 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그들을 돌로 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눈이 어두어지면 교회의 직분자라도 일반 신자보다 못하게 된다. 일반 신자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진리를 진지하게 듣고 생각하는 반면, 직분자들은 오히려 그 진리를 대적하고 훼방하였다.
[27, 28]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사도들은 끌려와 공회 앞에 세워졌고 대제사장은 그들을 심문하고 힐책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이 예루살렘에 가득히 퍼지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힘 있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기뻐할 일이 아니었고 염려하고 두려워할 일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죽인 예수의 피값이 자신들에게 돌려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행위의 악함을 양심으로 느끼며 불안해 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공회 앞에 선 베드로와 사도들은 담대하게 말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것은 옳은 말이다. 우리는 사람의 생각이나 견해나 주장에 매이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에 매이고, 하나님의 뜻에 매이고, 바른 교리와 성경적 교훈과 성경적 설교에 매여 그것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 성경 공부의 중요성, 성경 강해의 중요성이 있다. 누구든지 어떤 교리를 주장하고자 하면 성경에 근거해서 변론하고 성경에 근거해서 주장해야 하고, 무엇을 반박하고자 하면 성경에 근거해서 반박해야 한다. 성경의 건전한 해석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은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30, 31]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사도들은 공회 앞에서의 발언의 기회를 이용하여 복음을 증거하였다. 그들이 증거한 복음의 주제는 십자가, 부활, 승천, 예수께서 우리의 임금과 구주가 되심, 회개, 죄사함 등이었다. 이것들은 복음의 요지들에 속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하늘로 승천하셨다. 그럼으로써 그는 우리의 임금과 구주이심이 확증되었다. 또 우리는 회개하고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는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오늘날도 교회가 전파해야 할 복음의 요지이다. 우리는 오늘날도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의 구주 되심과 회개와 죄사함을 전파해야 한다.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하나님의 복음은 증인들에 의해 확증되었다. 사도들은 '우리는 이 일들에 대한 혹은 이 말씀들에 대한 증인이라'고 말했다. 사도들은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친히 보고 들은 자들이었다(행 1:21, 22). 하나님의 복음은 증인들의 증언들에 근거하여 후시대에 전달되었다. 이것은 후시대의 사람들이 복음을 믿는 데 있어서 중요한 근거가 된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후시대에 무슨 사건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최선의 근거는 진실한 증인들의 증언일 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진실한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에 근거하여 모든 후시대에 전달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신 성령께서도 복음을 확증하셨다. 사도 시대에 성령께서는 사도들을 통해 많은 기적들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복음을 확증하셨다. 히브리서 2:3, 4,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오늘날에도 성령께서는 사도 시대와 다른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기록된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복음을 증거하신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성경 말씀 안에서 그리고 성경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시기하지 말자. 우리는 교만과 명예심을 다 버리고 남을 시기하거나 미워하는 자가 되지 말자.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고 높여주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화내는 것은 아직도 교만과 명예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자기의 영광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진리의 교훈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쇠할지라도 진리의 교훈이 흥하면 우리는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진리의 지식이 없으면, 진리에 대한 눈이 열리지 않으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둘째로, 고난을 각오하자. 예수께서 가신 길은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를 지시는 길이었다. 사도 바울이 간 길도 고난의 길이었다. 참된 성도의 가는 길은 칭찬과 영광을 얻는 길이 아니고 고난과 핍박을 감수해야 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며 신앙 생활, 봉사 생활을 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힘써 생명의 말씀을 전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원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다. 그것은 죄인들을 회개케 하는 말씀이며 죄사함과 영생을 주는 말씀이다. 그것은 증인들에 의해 확증된 말씀이며 성령께서도 많은 기적들로 확증하셨고 지금도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히시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그 명령에 순종하는 일이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싫어하고 전하지 말라고 위협하고 방해할지라도,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옳다. 우리는 우리의 남은 여생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다가 생을 마치기를 원한다. 우리를 통해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구원을 받도록!
33-42절, 사도들을 채찍질함
[33]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쌔.
공회원들은 사도들의 증거하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들을 죽이려 하였다. 복음 전도는 이런 큰 위험을 당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던 저들은 그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또한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음에 틀림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악한 일을 계속 행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며 사도들이 무슨 죽을 잘못을 범했는가?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그때 공회원 중에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일어났다. 그는 바리새인이라고 증거되어 있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에 엄격한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그 당시에 자유주의자들인 사두개인들과 달랐다. 또 가말리엘은 교법사라고 증거되어 있다. 교법사는 율법 선생 즉 오늘날 성경학자나 신학자를 가리킨다. 또 그는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고 증거되어 있다.
바울도 가말리엘 선생 밑에서 교육을 받았었다. 그는 사도행전 22:3에 증거하기를,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고 하였다. 다시 번역하면,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아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35-39]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가말리엘은 이전의 인물인 드다와 갈릴리 유다의 예를 들어 동료들에게 예수의 제자들을 조심하여 다루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버려두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그의 제안의 이유는, 만일 예수의 제자들의 가르침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라면 조만간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가말리엘의 충고는 지극히 정당한 충고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살벌한 공회 가운데서도 백성에게 존경받던 가말리엘 선생을 사용하셔서 사도들을 죽음에서 건져내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뜻 가운데 무엇이든지 자유로이 사용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아니면, 사람은 누구나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인으로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셨다(마 10:29-31).
[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그러나 가말리엘 자신은 아직도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그는 단순히 그런 정도에 머물지 말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았어야 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일꾼들인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그러나 가말리엘에게는 그런 깨달음, 그런 믿음이 아직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공회원들과 더불어 사도들을 채찍질하였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였다.
공회원들이 가말리엘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사도들은 이로써 죽음의 위험을 면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채찍질을 당하였다. 이처럼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전도하다가 핍박을 당했고 매를 맞았다. 우리는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전도하다가 욕을 먹거나 매를 맞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전도하지 못하는가? 이것은 우리의 연약이요 부끄러움이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들은 고난과 매 맞음을 오히려 기뻐하였다. 왜냐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오히려 영광이다. 또 그런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는 하늘에서 상급이 크다. 마태복음 5:11, 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또 고난은 하나님의 진실한 일꾼의 표이기도 하다. 누가복음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사도들은 계속 전도하였다. 그들은 전도하지 말라는 유대 지도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인간의 말은 들을 것이 있고 듣지 않아야 할 것, 듣지 않아도 될 것이 있다. 전도하지 말라는 말은 듣지 않아야 할 것, 듣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그들은 죽음의 위협을 받았고 매맞음을 당했으나 계속 전도했다. 그들은 날마다,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치기를 쉬지 않았다.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첫째로, 우리는 전도할 때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감옥에 갇힘이 있고 매맞음이 있으며 심지어 죽음의 위험이 있다. 성도들은 그것을 각오해야 하며 오히려 그것을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요 하늘에 큰 상급이 있는 일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진실한 일꾼이라는 표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것은 거짓 선생의 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 말자.
둘째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도들이 죽음의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말리엘을 사용하여 공회의 여론을 막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주관하신다. 그는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 우리가 죽을 때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도 우리를 죽일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현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살자.
셋째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복음을 계속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전도는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복음은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한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6장: 일곱 사람을 택함
1-6절, 일곱 사람을 택함
[1]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사도행전에서, 예수 믿는 자들은 제자라고 자주 불리웠다. 제자는 선생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고 선생님의 본을 본받는 자이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고 주님의 모습과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핍박이 있었으나, 구원의 역사는 더욱 많았다. 제자들의 수는 날로 더 많아졌다. 오순절에 3천명이 구원얻었고(행 2:41) 앉은뱅이를 고친 후 제자들의 수는 5천명이나 되었다(행 4:4). 교회에 핍박은 있었으나 구원받는 수는 날마다 늘어갔다.
그러나 그때 문제가 생겼다. 인간의 부족 때문에, 교회 안에 때때로 문제가 생긴다. 당시의 문제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유대땅 출신 유대인을 가리키고, 헬라파 유대인은 세계 각곳 출신으로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한 까닭은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서 빠지기 때문이었다. '매일 구제'라는 말은 매일 식사를 제공하는 봉사를 가리킨다. 아마 고의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지만, 그런 일로 인하여 사랑의 공동체에 불평의 말이 생기기 시작했다.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당시의 열두 사도는 오늘날 목사와 장로들의 역할을 하였다. 그들이 모든 제자를 불러 모은 것은 오늘날 공동의회를 소집한 것과 같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공궤'라는 헬라어 원어는 '식탁 봉사'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구제의 일, 그리고 넓게는 재정출납의 일을 가리킨다. 사도들의 주된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었으므로 구제나 재정출납의 일로 인해 말씀 전파의 일이 소홀히 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본절은 집사직의 기원과 집사의 자격과 수에 대해 증거한다. 물론 본문에 집사라는 말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것이 집사직의 기원이라고 본다. 집사직은 이처럼 사도들의 말씀의 직무에 지장되지 않게 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들에게 맡겨질 일은 구제의 일, 넓게는 재정 관리의 일이었다. 그런 일들은 목사와 장로들이 할 수 없거나 해서는 안되어서가 아니라, 목사와 장로들이 보다 영적인 일에 전념하게 하기 위하여 집사들에게 맡겨지는 것이 필요하였다.
집사의 자격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이라고 표현된다. '사람'이라고 번역된 마지막 말(아네르)은 '남자'를 가리킨다. 사도들과 장로들과 같이 초대교회의 집사들은 남자들 중에서 선택되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이라는 표현은 봉사할 만한 지혜와 힘이 있는 모범적인 인물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모범적인 인물이 아니고서는 칭찬을 듣지 못할 것이다.
교회직분자의 자격은 한마디로 인격적 성숙함에 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장로와 집사의 자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집사의 수는 일곱이었다. 일곱은 완전을 상징하는 것 같다. 요한계시록은 일곱이라는 숫자를 많이 계시하는데, 일곱 촛대(교회), 일곱 별(목사),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뿔, 일곱 눈(하나님의 일곱 영) 등이다. 5천명 이상의 교인들이 있었을지라도 단지 일곱 집사를 세웠다. 오늘날 교회에 집사의 수가 많은 것은 인간적인 성격이 많아 보인다. 초대 교회는 직분자의 수가 많지 않았다.
[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본절은 사도의 임무를 보인다. '기도하는 것'은 개인적인 기도뿐 아니라 공적으로 기도 모임이나 예배회를 인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고 '말씀 전하는 것'은 전도와 설교와 권면의 일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목사와 장로의 직분은 바로 그런 일을 위한 것이었다.
교회 헌법은 목사의 직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목사가 지교회를 관리할 때는 양무리 된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으로 교훈하고 강도하며, 찬송하는 일과 성례를 거행할 것이요, 하나님을 대리하여 축복하고 어린이와 청년을 교육하며 고시하고 교우를 심방하며 궁핍한 자와 병자와 환난 당한 자를 위로하고 장로와 합력(合力)하여 치리권을 행사한다.
또한, 교회 헌법은 장로의 직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1. 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총찰한다. 치리 장로는 교인의 택함을 받고 교인의 대표자로 목사와 협동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며, 지교회 혹은 전국 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총찰한다.
2. 도리 오해나 도덕상 부패를 방지한다. 주께 부탁받은 양무리가 도리 오해나 도덕상 부패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당회로나 개인으로 선히 권면하되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당회에 보고한다.
3. 교우를 심방하여 위로, 교훈, 간호한다. 교우를 심방하되 특별히 병자와 조상자(遭喪者)를 위로하며 무식한 자와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며 간호할 것이니 평신도보다 장로는 신분상 의무와 직무상 책임이 더욱 중요하다.
4. 교인의 신앙을 살피고 위하여 기도한다. 장로는 교인과 함께 기도하며, 위하여 기도하고 교인 중에 강도의 결과를 찾아본다.
5. 특별히 심방할 자를 목사에게 보고한다. 병환자와 슬픔을 당한 자와 회개하는 자와 특별히 구조받아야 할 자가 있는 때에는 목사에게 보고한다.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회중이 직분자들을 택하였다. 선택의 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사도행전 1:21-26에 나오는 사도 보선의 경우와 사도행전 14:23에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라는 말씀을 참고할 때, 아마 후보의 공천 후 제비뽑기 혹은 다수결 거수 투표에 의해서 선택되었을 것이다.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회중에 의해 선택된 일곱 사람들은 사도들의 기도와 안수로 직분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임직식이었다. 안수는 직분을 위탁하고 그 직분에 필요한 성령의 은사를 구하는 상징적 형식이었다. 초대 교회의 임직식은 거창한 형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촐하지만 실속 있고 의미 있는 형식이었다. 그것은 단지 기도와 안수로 구성되었다. 임직식은 실상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거기에 야단스러운 축하행사와 꽃다발과 사진촬영 등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
7절, 제자들의 수가 더 많아짐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왕성하였다. 말씀의 능력은 영혼들의 구원을 가져왔고 교회는 숫적으로 점점 증가하였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였다. '도'라고 번역된 말은 '믿음'이라는 단어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 믿음의 내용이 되는 복음 진리를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왕성함과 영혼 구원의 역사 그리고 교인들의 숫적인 증가는 다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교회의 각 직분의 성격을 바로 이해하자. 목사와 장로는 기도와 말씀 전파의 일에 전념해야 할 직분이다. 그 중에 목사는 교회를 이끄는 목자로 말씀 연구와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장로들도 똑같이 기도와 말씀의 일에 힘써야 할 직분이다. 그들은 교인 심방과 교훈 등 교회의 영적인 일들에 힘써야 한다. 목사와 장로의 관계는, 자동차에 비유하면, 핸들과 액셀러레이터(가속장치)의 관계와 같다. 목사가 말씀의 확신과 기도 중에 교회의 방향을 잡으면 장로들은 교회가 그 방향을 향해 전진하도록 엑셀러레이터(가속장치)를 눌러야 한다. 장로는 결코 브레이크(제동장치) 역할을 해서는 안된다. 물론 비성경적인 일은 지적되고 시정되어야 할 것이지만, 목사가 성경적 확신 속에서 어떤 일을 계획할 때 장로들은 그를 도와 그 일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한편, 집사는 구제와 재정 관리의 일을 맡는다.
둘째로, 우리는 직분자를 바로 세워야 한다. 교회직분자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 다른 이들에게 칭찬을 듣는 자이어야 한다. 후보자들에게는 신앙 지식과 사상의 건전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특히 인격적 성숙함이 요구된다.
셋째로, 각 사람은 자기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직분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다(고전 4:2). 주께서는 우리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신다(계 2:10).
마지막으로, 우리는 말씀의 왕성함을 위해 기도하자.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역사하셔서 죄인들을 회개시키시고 영적으로 어둡고 완악한 마음들을 밝히시고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 복종하게 하시기를 기도하자.
8-15절, 공회 앞에 선 스데반
스데반은 집사 이상의 인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집사 이상의 은혜를 주셨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였다(딤후 2:20, 21). 스데반은 과연 짧은 생애이었지만 하나님의 집에서 귀히 쓰임 받은 일꾼이었다.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스데반은 집사의 일뿐 아니라, 기적을 행하는 일도 하였다. 기적은 주로 사도들이 행하는 일이었다. 사도행전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사도행전 5:12,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사도 바울은 사도의 표가 기적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후 12:12). 하나님께서 기적을 주신 목적은 자신의 특별계시의 말씀을 확증하시기 위해서이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기를,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사도들]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고 했다(히 2: 4). 그러나 사도 시대에는 사도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 중에도 기적을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스데반도 그 중 하나이었다.
[9, 10]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스데반은 기적을 행하였을 뿐 아니라, 대적자들과 변론할 때에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였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 4:11, 12).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전도자로 내보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하셨다(마 10:20). 스데반은 성령의 지혜와 능력으로 말하며 행동하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며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행하였지만,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생겼다. 하나님의 일에는 항상 대적자들이 있었다.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사람들이 그를 대적하여 일어났다. '리버디노'는 지역 이름이 아니고 '자유인들'이라는 뜻으로 이방 나라에 포로된 종의 신분에서 자유를 얻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자유인이 된 흩어진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스데반과 변론하여 그를 대적하였다. 그들은 아마 유대 사회에서 지도적 인물들이었던 것 같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거스리는 사탄의 방해와 핍박이 항상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신앙 생활은 영적 전쟁이다.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그러하다.
스데반을 대적한 자들은 외형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면적으로는 진리에 대해 무지하였고 이해심이 없었으며 악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교만하였고 긍휼의 마음이 없었고 이성적이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도리어 거짓되고 불의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을 충동질하였고 거짓 증인까지 동원하였다. 그들이 스데반을 말로 당하지 못하자 온갖 악한 일들을 행하기 시작하였다.
[11-14]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대적자들이 스데반에 대해 행한 악은 서너 가지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11절에 '가르쳐'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휘포발로)는 '암시하다, 선동하다, 매수하다'는 뜻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하게 하였다. 또 그들은 백성과 그 지도자들인 장로들과 서기관들도 충동하였다. 또 그들은 스데반을 잡아 공회로 데려갔다. 더욱이,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세웠고 그들로 하여금 스데반이 이 거룩한 곳 곧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그치지 않고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모세가 전한 규례를 고치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하게 하였다. 그런 류의 거짓 증거는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악한 일이다.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이제 스데반은 공회 앞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공회 앞에 선 스데반의 모습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그것은 공회원들이 본 바이었다. 사람의 얼굴은 대체로 그의 마음을 나타낸다. 기쁜 마음은 기쁜 얼굴로 나타나고 슬픈 마음은 슬픈 얼굴로 나타난다. 교만한 마음은 교만한 눈으로 표현되고(잠 6:17), 음란한 마음은 음심이 가득한 눈으로 표현된다(벧후 2:14). 전도서 8:1에는 말하기를,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고 했다.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는 말은 그의 얼굴이 선한 천사들이 가지고 있는 무죄성(無罪性) 혹은 도덕적 완전성을 나타내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공회 앞에 선 스데반의 얼굴에서는 죄악된 마음에서 나오는 모습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교만과 불의와 악독, 음란과 불결과 탐욕, 미움과 분노와 저주가 없었다. 그의 얼굴은 온유와 겸손, 거룩과 의와 사랑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로 많이 성화된 성도의 모습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스데반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기를 소원하자. 그는 일곱 명 중 하나로 선택되었지만, 그 이상이었다. 그는 자기가 받은 직분 이상의 일을 행하였다. 우리도 그렇게 쓰임 받기를 원한다. 우리도 우리의 직분 이상의 일을 행하는 자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맡은 일 이상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일꾼이 되기를 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 우리는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스데반을 대적한 자들은 외적으로 교인들, 그것도 아마 지도적 인물인 교인들이었다. 그러나 성도나 직분자는 외적인 모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에게는 내면적 은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와 사역에 대한 깨달음과 지식, 겸손과 진실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이 없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고 허무는 자가 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자.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신앙 생활은 영적 전쟁이다. 우리는 끊임 없이 사탄과 세상과 죄와 육신의 정욕과 싸운다. 사탄과 세상은 우리가 평안하게 주를 따르지 못하도록 많은 고난과 핍박으로 우리를 도전한다. 그러나 성도는 마침내 승리할 것이다. 모든 일은 합력하여 개인에게나 교회에게나 유익을 이룰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스데반의 얼굴에 나타난 것과 같은 내면적 덕을 사모하자. 날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악성을 십자가에 못박고 보혈의 샘에서 씻으며 성령의 불로 태우자. 교만과 불의와 악, 미움과 분노, 음란과 불결과 탐욕을 다 씻음 받고 태움 받자. 우리 마음은 거룩과 의와 선,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만 가득 채워지게 하자.
7장: 최초의 순교자
본장은 스데반의 설교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스데반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히 증거하였다.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는 후시대에 교훈이 된다.
1-16절, 아브라함, 야곱, 요셉
[1-3]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스데반 집사는 구약성경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그러나 사도들에 비하면 그의 지식은 불완전하여 보인다. 그는 당시 통용되는 헬라어역 성경과 당시의 유대인의 전통적 견해에 익숙해 있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곳에 관하여,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즉 갈대아 우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이 사실을 명확히 계시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에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가족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므로 아브람은 여호와의 명을 좇아 하란을 떠났다고 기록되다 있다(창 11:31-12:4). 가장 자연스러운 구약 본문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명령하신 곳은 하란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는 것이었음은 분명하다(창 15:7; 느 9:7).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우상숭배의 환경을 떠나 하나님 중심의 새 민족과 새 국가를 시작하라는 명령이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실 땅은 가나안땅이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실 새 세계 곧 천국을 예표하였다. 이 세상은 우상숭배로 심각하게 병든 장망성(將亡城)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 패역한 세대[세상]에서 구원받기를 원하신다(행 2:4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초청으로 부르실 때 우리에게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버릴 것을 명령하신다. 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누가복음 14:26, 27,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때에 관하여, 스데반은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도 구약 본문의 자연스러운 해석 같지 않다. 창세기 11:26, 32; 12:4에는, 데라가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에 죽었고, 아브람은 75세에 하란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아브람이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을 떠났다면 그는 데라가 130세에 낳은 아들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데라가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는 말씀에 조화되지 않는다. 아브람이 세 형제 중 막내라고 가정할지라도 큰 형과의 나이 차이가 60년이나 된다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차라리 아브람은 데라가 70세에 낳은 아들이었고 그가 75세에 하란을 떠날 때 데라는 아직 145세이었고 아브람이 그 곳을 떠난 후에도 60년이나 더 하란에서 살았다고 가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11장 끝에 '데라는 205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는 기술은 그 사건이 12장의 사건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창세기 저자의 역사 기술의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5장에서도 17절에 "이스마엘은 향년이 137세에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고"라고 기술한 후에, 20절에서 이삭이 40세에 아내를 취한 사실을 기술하였다. 그러나 이스마엘과 이삭은 13살 차이이었으므로 이삭이 40세에는 이스마엘이 53세에 불과했고 아직 죽기 전이었다. 또 다른 한 예로, 창세기 35:28 이하에 이삭의 나이 180세에 죽었음을 기술한 후에, 37:2에 요셉이 17세에 종으로 팔려간 일을 기술하였다. 요셉이 17세 때에 이삭은 168세이었다. 이와 같이 35장과 37장의 사건은 시간 순서가 아니고 창세기 저자의 역사 기술의 방식이었다.
[5-7]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을 유업으로 약속하셨으나 아직 그 곳을 차지할 때는 되지 않았고 단지 약속의 형태로 주셨을 뿐이다. 아직 수백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의 자손들은 이방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해야 했고 400년 동안 종살이의 고통과 학대를 당해야 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학대했던 그 나라를 심판하시고 그들을 그 곳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과 나라가 되게 하실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미래의 약속의 형태로 주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 신약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도 미래의 약속의 형태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표로서 할례의 규례를 주셨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를 덮고 있는 끝의 가죽을 베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죄악성을 잘라내는 성결을 상징하였다. 그것은 중생(重生)을 의미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려면 먼저 죄를 씻음 받아야 한다. 죄가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다. 그것이 죽음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요지는 모든 사람이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죄성은 도려내어져야 하고 거룩과 의의 새 마음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이다.
[9-10]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요셉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모형이었다. 요셉의 형들은 그를 시기하여 애굽에 종으로 팔았다. 시기는 무서운 악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한 죄악이다(마 27:1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하셨고 그 모든 환난에서 그를 건져내셨다. 물론 요셉 편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치 않으려고 애썼다. 하나님은 성결한 삶을 기뻐하신다. 성결한 자는 하나님과 동행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이한 방법으로 그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11-14] 그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요셉을 먼저 애굽에 보내어 총리가 되게 하신 것은 친족들을 구원하시려는 뜻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뜻이었던 것과 같았다.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든 큰 흉년에서 야곱의 자손들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통해 구원을 얻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이한 구원의 사건이었다. 요셉은 아버지와 형제들을 애굽으로 초청하였다. 그것이 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거주하게 되었는가 하는 연유이었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는 출애굽기에 꼭 필요한 역사적 배경이 된다.
요셉이 청한 친족의 수에 관하여, 스데반은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을 청하였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 당시에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구약 70인 헬라어역 성경에 근거한 내용이라고 보인다. 그 헬라어역 성경 창세기 46:20은 야곱의 자손으로 애굽에 내려간 자들의 수의 도합을 75명으로 말하는데, 그 수에는 요셉의 손자 5명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은 그들을 뺀 70명만을 말한다.
[15-16]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야곱과 그 자녀들의 매장지에 관하여, 스데반은 그들이 다 세겜에 매장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확한 혹은 대략적인 표현이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야곱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산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되었고(창 50:13), 요셉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산 땅에 매장되었다(수 24:32; 창 33:19). 그 외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들은 아마 요셉처럼 세겜에 묻혔을 수도 있다. 또 스데반이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무덤을 샀다'고 한 말은 정확히 말하면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샀다는 뜻으로 새겨 읽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넓은 의미에서 그렇게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스데반이 언급한 구약 역사 속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은 우리도 부르셨고 지금도 우리에게 불경건한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 중심, 천국 중심의 삶을 살라고 명하신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씻음의 상징이요 언약의 표로 명하신 세례를 받았다.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할 삶은 오직 한가지이니 곧 죄가 없는 성결한 삶이다. 셋째로,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시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게 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우리는 오직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어떤 환난 속에서도 낙심치 말고 믿음을 지키고 의와 선을 힘써 행하자.
17-36절, 모세를 부르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모세의 120년 생애는 3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처음 40년은 애굽왕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양육된 시기이었다. 그 다음 40년은 미디안 광야로 도피하여 생활했던 시기이었다. 나머지 40년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스라엘의 구원자와 통치자로 일했던 시기이었다.
[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이 이방인의 땅에서 나그네 되고 종이 되어 4백년 동안 괴롭힘을 당한 후에 그 곳에서 나올 것이라고 약속하셨었다(본문 5-7절; 창 15:13-16). 그때가 가까웠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졌다. 출애굽기 1:7은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衆多)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증거한다.
[18, 19]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요셉을 총리로 등용했던 애굽왕은 애굽의 역사에서 중왕국시대 제12왕조 중 아마 센우스레트 3세이었을 것이다. 본절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은 신왕국시대 제18왕조 때를 가리킬 것이다. 그때 애굽왕은 궤계를 써서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였고 산파들로 하여금 남자 어린아기를 죽이게 했다가 후에는 나일강에 던지도록 명령하였다(출 1:8-22).
[20, 21]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의 출생 시기는 이렇게 민족적으로 어려운 때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모세는 출생하자마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기쁘신 일을 그의 기쁘신 때에 그의 기쁘신 방법으로 이루신다.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다. 그는 부모의 집에서 단지 석 달을 길리우고 나일강에 버림을 받았지만, 강에 목욕하러 나왔던 바로의 공주가 그를 발견하고 측은히 여겨 데려다가 자기 아들같이 키웠다. 또 모세의 어머니는 그의 유모로 소개되어 아기를 양육하게 되었다(출 2:1-10). 모세는 어머니의 품 속에서, 기도와 사랑 속에서, 또 경건한 교훈 속에서 자랄 수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이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천사들이나 사람들이 뒤따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시다. 애굽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고 멸하려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왕궁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양육하셨다.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모세는 바로의 궁중에서 애굽의 모든 지혜와 학문을 배웠다. 모세는 당시에 가장 훌륭한 궁중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말과 행위에 능력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고 많은 육체적 훈련도 받았을 것이다. 물론 그의 몸도 튼튼했을 것이다. 그것은 다 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데 필요한 요소들이었다.
[23-25]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는 나이가 40이 되었을 때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났다. 사람이 사명감을 느끼는 때는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40세는 일반적으로 늦은 감이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 너무 부족했다. 그는 원통한 일을 보고 의분하였고 동족을 위하여 애굽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는 몸이 건장했고 싸움도 잘했던 것 같다. 그에게는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정의감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또한 사람을 죽이는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 없다. 그는 이스라엘 형제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26-29]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더욱이 그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을 말리다가 오히려 저항을 받았고 심지어 그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인 일까지 탄로가 났다. 모세는 그 말을 듣고 도망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양 치는 자가 되었고 결혼하였고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낳았다. 그의 젊은 꿈과 비젼은 여지없이 꺾이었고 그는 실패자로서 좌절과 포기의 삶을 살아야 했다.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 민족을 위한 고상한 꿈이 있었던 그가, 하루 아침에 들판의 양치기로 변해 있었다. 그는 양 치는 일에 전념해야 했다.
[30-35]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 긴 세월은 결코 헛되이 흐르지 않았다. 그것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자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특별 훈련의 기간이었다. 그 40년 동안 모세는 하나님보다 자신이 앞서며 하나님을 신뢰함보다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을 다 버리고 자신을 비우는 겸손 훈련을 철저히 받았음에 틀림 없다. 또 그는 많은 인내 훈련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는 그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하나님과 많이 교제했을 것이다. 광야는 그에게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에게 기도하는 가장 적합한 장소이었다. 미디안 광야 40년은 모세에게 겸손과 인내와 기도의 훈련 시기이었다.
40년이 찬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모세는 그 광경을 기이히 여기며 그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려왔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이었다. 그것은 모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르심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그의 기쁘신 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자유로이 일하신다. 사람들이 거절했던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지도자와 구원자로 부르셨고 보내셨다.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모세의 마지막 40년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수행한 시기이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모세는 많이 사양했었다. 그에게는 정말 자신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는 준비된 일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세우셨고 보내셨고 40년 동안 사용하셨다. 모세는 애굽왕 바로 앞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였다. 또 그는 홍해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홍해가 갈라져 마른 땅같이 건너게 하였다. 그러나 뒤쫓아오던 애굽 군대는 다 물에 죽임을 당했다. 또 그는 40년 광야 여정에서 많은 대적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사와 표적들을 행함으로써 그의 사명을 감당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권위를 끝까지 지켜주셨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자. 모세는 죽임을 당할 시대적 환경 속에서 출생했지만, 하나님의 기이한 보호와 양육을 받았다. 모세 시대의 하나님은 또한 오늘날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악한 환경에 위축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자.
둘째로, 우리는 겸손 훈련을 달게 받자. 모세는 자기를 내세우며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줄 것을 기대했을 때 실패했다. 그러나 40년간 미디안 생활을 통해 자신을 꺾고 자기를 포기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셨고 그를 세우셨고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들어 사용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자.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믿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못한다고 여러 번 사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세우셨고 보내셨고 사용하셨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신 일이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이루실 수 있고 이루실 것이다. 우리의 성화도, 우리의 봉사도, 전도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만 너무 생각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 앞에 죽도록 충성하자.
37-50절, 우상숭배에 떨어짐
이스라엘의 역사는 참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고 거역하며 오히려 우상숭배에 떨어진 역사이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서 구원을 받아야 했다.
[37]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장차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예언한 자이었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주 우리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다. 모세는 메시아를 '나와 같은 선지자'라고 표현하였다. 메시아는 선지자 곧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자로 오실 것이었다.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대화하였던 큰 선지자이었으나(민 12:6- 8; 신 34:10), 메시아는 그보다 더 탁월하신 분이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려주셨다.
[38]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모세는 하나님과 우리 조상들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하였다.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는 십계명을 선포하시고 율법을 주셨던 하나님을 가리킨 것 같다. 야곱은 자기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사자(使者) 혹은 천사"라고 표현하였다(창 48:16).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천사'로 나타나 하나님과 동일시되셨던 그 분은 구약시대에 활동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다고 본다. 스데반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교회라고 불렀다. 교회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며 그들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모세는 하나님과 구약 교회 사이에 중보자로 사역하였다.
모세는 생명의 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다. '생명의 도'라는 헬라어 원어(로기아 존타)는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글자나 죽은 소리가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는 친 음성이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예레미야 23: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요 불같이, 반석을 부스러뜨리는 철방망이같이 힘이 있는 말씀이다.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은 모세에게 복종치 않았고 그를 거절했다. 그들의 마음은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였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보내셨고 그의 말씀을 전한 자이었으나, 부패한 백성은 그에게 복종치 않았고 그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도리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애굽은 하나님 없는 세상이다. 애굽에서의 생활은 물질 중심, 육신의 쾌락 중심의 생활이었다. 거기에는 술취함과 방탕함이 있었다. 거기에는 경건함이나 거룩함이나 절제함이 없었다. 거기에는 자족함도 없었다.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세상적 삶을 좋아할 것이다.
[40, 41]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 시내산 위로 올라간 후, 이스라엘 백성은 40일을 기다리지 못하여서 아론에게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주문하였다. 아론은 모세의 동역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행하였다. 그들은 우상숭배에 떨어졌다. 그것은 십계명 중 제1, 2계명을 범하는 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제사하며 기뻐하였다. 그들은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출 32:18, 19).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 크게 노하셨다. 그는 그들을 다 완전히 멸하려고 하셨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가로막았고 그들을 용서하시기를 간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말을 들어 그들을 당장에 다 멸하지는 않으셨으나, 그 날에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레위 지파 사람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3천명이나 죽임을 당했다.
[42, 43]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시는 데서 돌이키셨고 그들을 우상숭배에 버려두셨다. 본문은 송아지 숭배가 하늘의 군대 곧 별 숭배의 일이라고 말한다. 광야의 송아지 숭배는 이스라엘 열왕 시대의 바알과 아세라 숭배와 일월성신 숭배로 이어져 내려갔다. 스데반은 구약 아모스 선지자의 글을 인용한다. 그가 인용한 구절은 히브리어 성경 본문이 아니고 당시에 사용되었던 헬라어역 성경 본문이었다. 단지 맨끝의 말이 '다메섹 밖에' 대신에 '바벨론 밖에'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어 본문은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어 식굿은 헬라어 몰록으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바벨론신을 가리킨다. 히브리어 기윤은 헬라어 레판으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이방신으로서 토성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송아지는 농경 사회에서 풍년과 다산(多産)의 신으로 숭배되었고 또한 별을 의미하기도 하였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송아지 숭배와 별 숭배에 떨어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히 진노하셨고 그들을 멸망시키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고 바벨론 밖으로 흩으실 것이었다.
[44, 45]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했던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증거의 성막을 주셨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시내산에서 본 모양대로 만든 것이었다. 그 성막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때 가지고 들어갔고 다윗 때까지 보존되었다. 성막은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가 있었고, 성막 제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그를 섬길 수 있었다.
[46, 47]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6절을 전통사본대로 다시 번역하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하나님을 위하여 거처를 찾도록[준비하도록] 소원하였더니"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 중심, 성막 중심으로 살기를 원하였고 성전을 건립하기를 소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지 않으셨고 그의 아들 솔로몬 때에 그것을 이루도록 하셨다.
[48-50]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며 땅은 그의 발받침이다. 천지만물이 다 그의 창조물이다. 창조자 하나님은 피조세계 속에 제한되지 않으신다.
그러면 성막과 성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구름으로 자신의 특별한 임재(臨在)의 표시를 나타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제한되지 않으신다.
성막과 성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긍휼로 그 백성을 받으신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40년간 광야에서 생활할 때부터 가나안 정착 후에도, 그리고 왕국의 역사 끝까지 항상 하나님을 불신앙했고 불순종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막 제도, 성전 제도를 통해 제사장 곧 중보자를 주시고 제사를 통해 속죄 곧 죄사함을 주시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과 새 삶을 모형적으로 보여주신 제도이었다. 성막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근거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말씀과 기도, 성령의 감동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고 감사하며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아야 할 것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기억하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자. 그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다. 그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에게 큰 힘과 위로를 주는 말씀이다. 둘째로, 우리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을 거역하여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고 우상숭배에 떨어지지 말자. 우리는 돈이나 육신의 쾌락을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말고 오직 경건하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자족하며 살자. 셋째로, 우리는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의 피로 죄씻음 받고 그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 안에서 힘을 얻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며 감사하며 순종하며 살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와 선을 힘써 행하자.
51-60절, 스데반의 순교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스데반은 자기를 핍박하는 공회원들에게 바른 설교를 하였다. 그는 그들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목이 곧다는 말은 교만하다는 뜻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반복해서 이런 책망을 받았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없고 깨닫는 마음이 없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중생하지 못한 증거일 것이다. 스데반은 그들이 바로 그런 자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항상 성령을 거스려 그 조상들과 같이 한다고 책망하였다. 교만과 무지(無知)는 하나님을 거역케 하고 그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만든다. 스데반의 설교는 귀에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를 직선적으로 책망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바른 말을 할 것이다.
[52, 53]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은 그들의 조상들은 의인이 오리라고 예언한 모든 선지자들을 핍박한 자들이요 이제 그들은 그 의인을 죽인 자들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 아담 이후 모든 인간 중에 유일하게 죄 없는 분이시다. 메시아는 죄 없는 자라야 많은 사람들의 대속 제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였다. 3년 동안 많은 말씀을 들었고 많은 기적과 병고침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거절하였고 불신하였고 정죄하여 죽음에 넘기우게 하였다. '잡아준 자'라는 헬라어 원어(푸로도타이)는 '배반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포도원 비유에서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고 마침내 그의 상속자인 아들까지 죽였다고 말씀하셨다(마 21:35, 36).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전해주신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의 심히 죄악 됨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함으로 밝히 드러났다.
[5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본문은 스데반의 설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증거한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렸다. 조상들의 죄와 그들 자신의 죄가 과연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형 당할 만한 악인이 아니셨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시기에서 나온 것, 즉 그들의 자존심이 상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만일 예수께서 그들을 정죄하지 않고 높여주셨더라면, 그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도 양심으로는 예수께서 좋은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데반의 바른 설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악한 감정은 그들의 이성과 양심을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교만함과 악함을 회개치 않고 도리어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다. 얼마 전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회개하여 3천명이 세례를 받았었다. 그러나 지금 스데반 앞에 있는 공회원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것도, 회개치 않는 것도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들은 회개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버려진 자들은 회개치 않을 것이다.
[55, 56]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성령에 충만한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그것은 계시적 환상이었다. 성경은 계시 사건 때에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스데반은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9번이나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신다는 표현은 본절에서 뿐이다. 이것은 주께서 핍박 당하는 스데반에게 더 큰 관심과 도움 주심을 나타낸다.
[57, 58]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공회원들은 일제히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쳤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이나 회개하는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 그들에게는 아직 들을 귀도, 깨닫는 마음도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할 것이다. 증인들은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는 날 사울은 가까이에서 그의 죽음을 관찰할 수 있었다.
[59, 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누가는 스데반의 최후에 대해 두 가지를 증거하였다. 첫째, 스데반은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였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스데반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했음에 틀림 없다. 그는 하나님을 확신했고 천국과 내세를 확신했다. 베드로전서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둘째, 스데반은 원수의 죄의 용서를 하나님께 빌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것은 예수님의 교훈과 모범을 실천한 것이었다. 전통사본에 보면,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5:43, 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또 주께서는 친히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정죄하고 못박는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군병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다(눅 23:34). 스데반은 주의 말씀과 본을 그대로 따랐다.
스데반은 이 두 마디의 말을 한 후에 죽었다. 본문에 '자니라'라는 말은 부활 소망을 가진 성도들의 죽음에 대한 표현이다. 밤에 잠자는 자들이 아침이 되어 깨듯이,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부활할 때가 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이다. 그때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고전 15:51-52; 살전 4:16-17).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겸손함과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자.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겸손함과 깨달음이 없다면, 저 유대인의 공회원들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스데반의 최후를 본받자. 첫째, 그의 순교를 본받자. 하나님과 주 예수께 대한 참된 믿음과 충성은 순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할 것이다. 순교는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천국과 내세와 우리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며 우리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할 때 가능하다. 둘째, 스데반이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한 것을 본받자. 그것은 예수님의 교훈을 지킨 것이요 예수님 자신을 본받은 것이다. 우리도 우리를 대적하고 해치고 죽이려는 자들까지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죄의 용서를 하나님께 구하는 자들이 되자.
8장: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됨
본장은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있어서 믿는 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것과 그 결과 복음이 사마리아에까지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교회에 닥친 핍박이 오히려 전도와 복음 확장의 기회가 되었다.
1-3절,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
[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울은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다. 잘못된 지식은 잘못된 판단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과 감정을 버리고 바른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특히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로 인해 큰 핍박을 당했다. 고난과 핍박은 성도들에게 예상되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많은 고난을 받으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그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고난과 핍박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15:18- 20,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 .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사도 바울은 핍박 받는 초대 교인들에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고(행 14:22), 또 제자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였다(딤후 3:12).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으로 인해 사도들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에 흩어졌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머문 것은 핍박을 겁내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 때문이며 죽음을 각오한 믿음과 충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마 예루살렘에 아직도 더 전도할 일이 남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고난 중에도 직분을 완수해야 한다.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나 이별의 눈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너무 일찍 아쉽게 떠났기 때문에 흘린 눈물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실하고 충성된 종이 죽을 때 성도들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악한 자가 죽을 때는 그런 눈물을 흘리는 자가 별로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은 왕위에 오른 후 자기의 모든 아우들을 죽였고 이스라엘 왕 아합의 길 곧 우상숭배의 길을 따랐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치셔서 능히 고치지 못할 병이 그 창자에 들게 하셨으므로 여러 날 후 2년 만에 그 창자가 그 병으로 인하여 빠져나와 죽었다. 성경 역대하 21:20에 보면, 그는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스데반의 죽음은 그와는 정반대이었다. 경건한 사람들은 그를 위해 크게 울었다.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사울의 열심은 특별하였다. 그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를 다 멸하려 하였다. 그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내어 옥에 넘겼다. 그는 후에 갈라디아서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라고 하였다(갈 1:13, 14).
잘못된 지식과 판단은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잘못된 행동을 하게 한다. 유대인들은 잘못된 지식과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서 10:2,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은 이런 잘못된 지식과 열심 때문에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이 되었다. 데살로니가전서 2:15, 16,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 2:9,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우리는 지식이 바르고 그래서 항상 바른 판단을 하고 바른 열심을 품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4-13절, 사마리아 성에 복음이 전파됨
[4-8]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신자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성도에게 닥친 고난은 유익하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그러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많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의 방법이 되었듯이, 교회가 당한 큰 고난 곧 핍박과 흩어짐은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기회가 되었다. 고난은 다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다.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었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곧 그가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시며 그를 믿는 자는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이제 주의 제자들은 예루살렘뿐 아니라 유다와 사마리아에서도 주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야 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땅끝까지 주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빌립에게 전도하는 능을 주셨고 또 그에게 표적들을 주셨다. 많은 사람에게서 더러운 귀신들이 나갔고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들이 나음을 얻었다. 하나님의 복음은 큰 능력으로 전파되고 확증되었다. 그 결과, 그 성에는 큰 기쁨이 있었다.
[9-13]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랫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빌립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해 전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의 목표이다. 사람들은 빌립을 믿었다. 믿은 남녀들은 다 빌립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는 주 예수께서 친히 명하신 의식으로서 죄씻음을 표시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세력 있게 증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빌립의 복음 전도를 사용하셨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그 성에 스스로 큰 자로 자칭하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큰 능력'(전통사본)이라고 불리웠던 마술장이 시몬까지도 믿고 세례를 받았고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나녔고 그 나타나는 '능력과 표적들'(전통사본)을 보고 놀랐다. 하나님의 복음은 능력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신앙의 여정에는 어려운 일이 있다.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그러하다. 때때로 핍박이, 그것도 극심한 핍박, 순교를 요구하는 듯한 핍박이 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오래 참고 바른 믿음을 지키자. 고난과 핍박 중에 믿음을 변절하거나 믿음을 양보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복음 진리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뜻에 대한, 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유대인들은 잘못된 지식 때문에 사물을 잘못 판단하고 잘못된 열심을 가져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이 되었다. 우리는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사물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하고 바른 열심을 가지고 주를 섬기는 자들이 되자.
셋째로, 하나님께는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는 실패가 없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실패 같은 일들도 합력하여 선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는 방법이 되었다. 교회의 핍박과 흩어짐은 전도와 복음 확장의 기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자.
넷째로, 전도는 구원의 방법이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하게 보이는 내용과 방법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다. 우리가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도를 통해 영혼들을 구원하신다. 우리는 오직 힘써 전도하자.
14-25절, 사마리아 교회가 성령을 받음
사마리아 교회는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을 받음으로 예루살렘 교회와 동일한 한 교회의 지체임이 증거되었다. 만국 교회는 다 하나이다. 그 교회는 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받았고 한 성령께서 그 가운데 영원히 거하시는 무리들의 연합이다.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담대히 예루살렘에 머물러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은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내용이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어지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전도 설교이든지 목회 설교이든지 간에 성경적 설교 혹은 성경의 바른 강론은 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진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그러하다.
사마리아 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그것은 그 성에 한두 명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음을 의미할 것이다. 앞에 6절에서 사도행전의 저자는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고 기록하였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사마리아 성에 기독교회가 세워졌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이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냈다. 그것은, 들려온 소식대로 사마리아에 과연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는지를 확인하고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마리아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임을 증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 그러므로 열두 사도들의 대표인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성에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열매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마리아 교회는 하나님의 동일한 복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된 참 교회임이 증거될 것이다.
[15-17]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가서 본 그 교회의 중요한 부족은 그들이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성령은 예수께서 십자가 대속 사역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다른 보혜사 곧 위로자 혹은 돕는 자로 오신 분이시다(요 14-16장).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믿는 이들은 누구나 성령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신자들이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지, 성령을 받으라고 교훈하지 않는다. 로마서 8: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요한일서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또 사도 시대의 성령 강림은 방언, 예언, 병고침 등 초자연적 은사들을 동반하였으므로 성령을 받은 여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마리아 교회는 예외이었다. 16절이 그 사실을 암시한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 구절은 예수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시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인데 사마리아 교회는 예외이었음을 나타낸다. 사마리아 교회가 예외이었던 까닭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보내셔서 좀더 확실하게 한 후에 성령을 보내시려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마리아 교회가 반쯤 이방인들인 자들로 구성되었다는 그 교회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 같다. 사도들을 통해 그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의 한 지체임이 증거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그리로 보내었고 그들은 그 교회의 부족을 보고 위하여 기도했고 또 교인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께서 내려오셨다. 안수는 그 자체에 효력이 있기보다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상징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의 안수로 그 교인들이 성령을 받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사마리아 교회도 교회의 한 지체로 인정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하여 주셨다.
[18, 19]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그런데 사마리아 교회에는 아직 철저하게 회개하지 못한 것 같은 교인이 있었다. 그는 과거에 마술사이었던 시몬이었다. 교회 속에는 때때로 쭉정이도, 가라지도 있다. 그것들은 마지막 심판때까지 함께 자란다. 그것들을 완전하게 제거하는 것은 때때로 어렵다(마 13:29, 30). 시몬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그의 회개는 불완전한 것 같다. 그것은 그가 사도들이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게 하는 것을 보고 돈을 주며 자기도 그 권능을 얻기를 소원한 데서 드러난다. 그는 돈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사려 하였다. 그의 속에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고 과시하려는 교만과 명예심이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든지 자신을 대단한 자로 생각하는 자는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 자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뿐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높여야 한다.
[20-24]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베드로의 책망은 매우 날카롭고 직선적이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시몬의 영혼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것 같다. 그는 아직도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물질만능주의 우상이 들어 있었다. 사람이 돈 사랑, 세상 사랑을 벗어나야 믿음의 길에 바로 들어설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하였다(딤전 6:9, 10).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였다(요일 2:15).
베드로는 또한 그에게 말하기를,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권하였다. 우리가 돈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몬처럼 될 수 있고, 또 예수께 나아왔던 한 부자 청년같이 주의 명령을 거절하고 주를 떠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며(마 19:21, 22),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주의 사랑하는 일꾼 바울의 곁을 떠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딤후 4:10). 베드로의 심한 책망을 들은 시몬은 두려움을 느끼며 그가 자신에게 말한 것이 하나도 임하지 않도록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기를 요청하였다.
[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두 사도는 사마리아 성에 주의 말씀을 증거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 하다가 사마리아 사람들이 사는 여러 동네에 들러 복음을 전하였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지방의 수가 성에는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이미 복음을 전한 바가 있었다(요 4:39-42). 이제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 성에,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사마리아 지방의 여러 마을들에 복음이 증거됨으로써 주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명하신 대로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증거되었다. 복음의 불길은 점점 온 세계를 향해 퍼져나가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심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자.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는 초대교회 때와 같이 우리에게 초자연적 은사들을 주시거나 나타내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거하신다. 그는 우리의 위로자, 우리의 인도자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둘째로, 우리는 참된 교회는 온 세계에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 교회에 성령 강림을 보류하시고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 성령을 주심으로써 그 교회가 하나님의 한 교회의 지체임을 증거하셨다. 온 세계의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이다. 교회의 일체성은 영적, 교리적, 유형적 성격을 가진다. 오늘날 교회의 분열들은 인간적 부족과 연약의 이유도 없지 않겠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리적, 교훈적 불일치 때문에 오는 것이다. 천주교회, 자유주의, 신복음주의, 은사운동, 윤리적 부패 등으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는 매우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참 교회는 교리적, 교훈적 순수성 안에서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항상 물질만능주의를 경계하자. 교회 안에는 중생하지 못한 시몬 같은 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아직도 돈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돈 사랑, 세상 사랑을 버려야 한다. 재리의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돈에 대한 애착은 바른 신앙 생활을 부패시킨다.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자족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고 주님을 바르게 따를 수 없다. 성도는 돈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
26-40절, 구스 내시에게 전도함
본문은 빌립이 구스 내시에게 전도한 내용이다. 이 가운데서 우리는 구스 내시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며 또한 전도에 관한 몇 가지의 진리를 배운다.
[26]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방법으로 천사를 통해 빌립에게 지시하여 구스 내시에게 전도하게 하셨다. 이것은 구스 내시를 특별히 사랑하신 증거이었다. 지금 그가 전도를 받지 못하면 오랜 후에나 전도를 받게 될 것이다. 그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택한 영혼을 위해 긴급한 방식으로 전도자를 파송하셨다. 가사는 애굽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이어지는 비아 마리스(via Maris)라는 당시 가장 주요 도로 상에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광야이었다.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빌립은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하였다. 일어나 가서 보니 한 에디오피아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한 눈에 존귀한 사람임이 드러났다. 그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 있는 내시이었는데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에디오피아 즉 구스는 아프리카의 이집트 남쪽, 나일강 상류 지역, 오늘날 수단의 누비아 지역이라고 한다. 그 곳은 예루살렘에서 2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보다 5배 이상이나 먼 곳에서 예루살렘까지 와서 예배드린 것을 보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예배당과의 거리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28]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그의 경건함이 다시 한번 더 나타난다. 그는 당시에 구입하기 어려웠을 성경책의 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마 그것을 비싼 값에 샀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함을 보인다. 우리는 성경책을 가장 사랑해야 한다. 더욱이 그는 병거를 타고 먼 길을 가면서 성경을 읽었다. 그가 가는 그 길이 오늘날의 길에 비하면 노면 상태가 좋지 않았고 그가 탄 병거가 오늘날 교통수단에 비하면 책을 읽기에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많이 흔들렸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경을 읽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함을 한층더 잘 보인다. 우리는 성경책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은 여건 속에서 성경 읽기를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간혹 버스나 전철 속에서 성경을 읽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기쁨을 얻는다.
[29, 30]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빌립 속에 거하신 성령께서는 빌립을 권하여 그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셨다. 오늘날도 성도들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자유로이 활동하셔서 전도자들을 권면하시고 격려하신다. 빌립은 달려갔다. 그것은 그가 성령의 권면에 즉시, 즐거이 순종했음을 나타낸다. 우리도 성령의 감동에 즉시 순종해야 한다. 빌립은 그 에디오피아 사람이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읽는 것을 깨닫느뇨?" 하고 말을 건네었다. 전도자는 낯선 사람에게라도 접근하여 말을 붙이기 시작해야 한다.
[31-34]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그 내시는 빌립에게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고 청하였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여 주신 것이었다. 그 내시는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메시아의 고난에 관한 부분을 읽고 있었다. 그가 빌립에게 질문한 것을 보면 그는 성경의 내용에 큰 관심이 있었고 또 성경 내용을 믿으려는 마음이 있었음에 틀림 없다. 그의 마음 속에는 벌써 하나님의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빌립은 입을 열어 말했다. 이 표현은 그 동안 빌립이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잠잠했음을 보이는 것 같다. 전도자는 말장이, 수다장이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말하되 하나님의 은혜로 담대히 말해야 한다. 빌립은 이사야의 글에 익숙한 자이었다. 그것은 빌립이 유대인들의 습관과 같이 어릴 때부터 성경을 많이 읽었음을 보여준다. 빌립은 평소에 성경에 익숙하였음에 틀림 없다. 오늘날 우리도 바쁜 날들 속에서 성경을 많이 읽음으로 믿음에 부요한 자들이 되고 전도의 도구로 사용함을 얻자. 빌립은 예수를 증거하였다. 그것이 전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그가 행한 많은 기적들과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가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
[36-40]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빌립은 구스 내시의 요청에 따라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것은 먼 곳으로 떠나는 성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배려이었다. 본절은 빌립이 베푼 세례의 방식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이 둘 다 물에 내려간 것은 단지 세례를 베풀기 위함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물에 내려간 것은 물 속에 담그는 세례 방식을 증명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례가 물 속에 담그거나 물을 붓거나 물을 뿌림으로 정당하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세례를 베풀자마자, 주의 영께서는 빌립을 다른 곳으로 이끌어 가셨다. 전도는 전도자보다 전도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며 그것만 영속적으로 기억되는 것이 중요하다. 전도자는 떠나갔지만, 전도를 받은 구스 내시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다. 그는 기뻐하며 그의 길을 갔다. 빌립은 아소도 등 여러 성들에서 전도하였고 가이사랴에까지 갔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구스 내시의 경건을 본받자. 그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2천 킬로미터 이상이나 되는 먼 곳에서 왔고 또 예배드리고 돌아가면서도 아마 흔들렸을 그 불편한 병거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다. 이러한 경건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귀히 여기셔서 복음의 복을 받게 하셨다. 우리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성경 읽는 일을 귀히 여기자.
둘째로, 우리는 본문에서 전도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준비하신 구스 내시 같은 영혼이 있다. 둘째, 하나님의 준비된 전도자가 있다. 셋째,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한다. 넷째,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해야 한다. 여섯째, 전도자가 높임을 받지 말아야 한다. 일곱째, 전도로 구원받은 자의 심령에는 기쁨이 있다.
셋째로, 우리는 준비된 전도자가 되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 성경 전반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또 순종의 마음가짐으로 준비된 자가 그러한 자이다.
9장: 사울을 부르심
누가는 사울에 대해 이미 몇 번 언급하였다. 스데반을 돌로 쳤던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든지(행 7:58),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다든지(행 8:1),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며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는(행 8:3) 등의 언급이다. 그러나 누가는 이제 본격적으로 이 사람 사울의 회심에 대해 기록한다. 교회를 핍박하던 이 사람은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는 제자가 되었다. 더욱이, 그는 후에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가 되어 소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지역들을 다니며 전도할 주의 귀한 종이 될 것이다.
1-9절, 사울아, 사울아
[1, 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은 주의 제자들,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과 행실을 본받기를 원하는 진실한 성도들을 위협하고 그들을 향해 살기가 등등하였다. 그는 후에 한 서신에서 자기의 행동이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였다(딤전 1:13). 그는 예루살렘의 신자들을 핍박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심지어 당시 유대인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회당들에 갈 공문을 요청하였다. 다메섹은 당시 수리아의 주요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24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공회는 그 곳의 회당들에까지도 영향력을 가졌던 것 같다. 사울은 이처럼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를 넘어서서 심지어 이방 나라 다메섹에까지 가서 예수 믿는 도를 좇는 사람들을, 그것도 남녀를 무론하고 결박하여 잡아 오려고 열심을 내었다. 무지에서 나온 잘못된 열심은 이렇게 사울로 하여금 극히 악한 일, 즉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성도들을 죽이는 일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무지한 열심을 조심해야 한다.
[3-5]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의 무지한 열심의 걸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개입하셨다. 그는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거꾸러뜨리셨다. 주께서는 그가 예루살렘을 출발할 때가 아니고 다메섹에 도착할 때 즈음에 나타나셨다. 주께서는 일을 행하시는 때가 있다.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그 빛은 아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해보다도 더 밝은 빛이다. 아마도 그 강한 빛으로 인해, 사울은 땅에 엎드러졌다. 그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질문했고, 주께서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대답해 주셨다.
본문은 예수께서 지금 살아계심을 증거한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그의 생이 끝난 분이 아니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고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예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증거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는 자는 유한한 피조물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보통 인간이 아니시다.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의 부활은 그의 신성(神性)과 그의 메시아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하셨다(계 1:17, 18).
주께서는 또한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다. 사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고(1절), 다메섹에 가서도 예수 믿는 도를 좇는 사람들을 결박하여 잡아오려고 하였다(2절). 그러나 살아계신 주께서는 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주께서 그의 제자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하심을 보여준다. 이것은 주의 제자들이 그의 몸 된 교회를 형성한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가 보낸 전도자를 영접하는 것이 그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고(마 10:40), 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에게 죄를 짓는 것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했다(고전 8:12).
[6-9]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했고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 3일간은 사울에게 기도와 묵상의 기간이었다. 예수는 누구이신가? 그는 과연 부활하셨는가? 그는 과연 살아 계신가? 그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가? 또한 그 3일간은 분명히 사울에게 회개의 기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키시는 기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후에, 교회를 핍박했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며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요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이며(고전 15:9)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고전 15:9; 딤전 1:15).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무지에서 나오는 잘못된 열심을 조심하자. 우리는 바른 지식과 열심을 구비하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심을 바로 알고 바로 믿자. 그는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고 성령으로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신다. 그는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우리의 삶의 현실 가운데 개입하실 수 있는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셋째로, 우리는 주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형성하는 줄을 바로 알고 그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주를 진실히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사랑하자. 우리가 주를 믿는 자들을 영접하고 사랑하고 섬기면, 우리는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주를 믿는 자들을 영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섬기지 않는 것이 된다.
10-19절, 아나니아를 보내심
본문은 주께서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사울에게 보내셔서 안수하여 눈을 뜨게 하시고 세례를 베풀게 하심으로 제자로 삼으셨음을 기록한다. 이것은 또 한번의 주의 놀라운 긍휼과 사랑의 행위이다.
[10]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는 살아계셔서 사도 시대에 직접 제자들에게 역사하셨다. 본문에는 '주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온다(10, 11, 15절). 스데반에게 하늘이 열려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듯이(행 7:55), 주께서는 환상 중에 제자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꿈과 환상은 하나님께서 구약시대나 사도 시대에 자신을 계시하신 방법이었다(민 12:6). 오늘날에는 기록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알려 주신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다.
[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주께서는 아나니아에게 구체적으로 지시하셨다. 그는 장소와 사람 이름을 말씀하셨다. 장소는 직가라 하는 거리의 유다 집이며, 사람은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사람이었다. 주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일어나 가서 그를 찾으라'고 지시하셨다. 이런 예언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하실 수 없는 것이다. 또 그는 부언하시기를, 그가 기도 중이라고 하셨다. 사울은 그 3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였다고 생각된다. 그 3일은 그에게 회개하며 믿기로 결심하는 기간이었다.
[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주께서는 사울에게도 분명한 환상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되는 환상이었다. 구약 시대나 사도 시대에 하나님의 뜻은 환상 중의 구체적인 예언을 통해 전달되고 또 그 예언의 성취를 통해 확인되곤 하였다. 또한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가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는 지시의 뜻도 들어 있다.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아나니아는 주께 질문하였다. 그는 사울에 대해 많은 사람에게서 들은 바가 있었고 또 나름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가 사울을 나쁜 사람이라고 부른 것은 한 사람의 말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말에 근거하여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된다. 아나니아가 사울에 대해 들은 것처럼 여러 사람에게 들은 사실이라면 어느 정도 믿을 만한 일일 것이다. 아나니아가 들은 바에 의하면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그가 듣고 판단한 바는 사실이었다. 갈라디아서 1:13에서 사울 자신도 후에 인정하기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였다'고 하였다.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아나니아가 사울에 대해 들은 바는 이것뿐 아니라, 또한 그가 여기 다메섹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후에 사도행전 22:4, 5에서 사울 자신이 고백하기를,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라고 하였다. 사울에 대한 아나니아의 판단과 지식은 옳았다.
그러므로 주께 아뢰는 아나니아의 질문에는 표현되지는 않았어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주여, 주의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한 이런 악인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해야 합니까? 그가 눈이 안 보이는 것은 더 잘 된 일이 아닙니까? 그는 복음의 원수요 교회의 원수요 하나님의 원수가 아닙니까?"
[15, 16]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나니아의 불만스러운 심경에서 나온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단호하였다. 그는 단순히 '가라'고 명하셨다. 그것은 11절에 나온 대로 처음 명령하신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신 것이다. 마치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후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선지자 요나에게 두 번째 내린 하나님의 명령이 처음 명령과 똑같았던 것과 같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며 그의 긍휼과 너그러움은 사람이 측량할 수 없다.
그러나 주께서는 친절하게도 아나니아에게 그가 사울에게 가야 할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해주셨다. 첫째는, 이 사람 사울이 주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 택한 주의 그릇이기 때문이었다. 주께서는 원수 같은 사울을 택하셨다. 이것은 주의 측량할 수 없는 긍휼과 사랑의 표현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롬 5:8).
둘째는, 그가 주의 이름을 위해 많은 해를 받을 것을 주께서 그에게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울은 주의 이름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었다. 과연 그는 그런 고난을 받았다. 그는 고린도전서 4:11-13에서 고백하기를,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주의 답변은 아나니아에게 충분하였던 것 같다. 그는 주의 명령에 즉시 순종하였다. 그는 가서 사울을 찾았고 그에게 안수하며 '형제 사울아'라고 말했다. 그는 사울을 원수로 생각하지 않고 주의 지시대로 형제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 그는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고 말했다. 그는 예수님의 주 되심과 그가 지금도 살아계심을 증거한 것이다. 또 그것은 사울이 본 환상의 내용 그대로이었다. 그것은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하고 믿게 되는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18, 19]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쌔.
주께서 사울에게 주셨던 환상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사울은 아나니아의 안수로 즉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표시이었다. 그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그와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것을 확증하는 일이 되었다. 또 그는 음식을 먹고 몸도 강건케 되었다. 주 예수를 핍박했던 사울은 이제 주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놀랍고 은혜로운 사건이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진리를 교훈한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다. 그는 사울에게 길에서 나타나셨고, 또 아나니아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그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셔서 성령으로 감동하시고 역사하신다.
둘째로, 주께서는 원수 같은 사울을 사랑하셨고 그를 일꾼으로 택하셨다. 주의 긍휼과 사랑의 풍성함을 우리는 다 측량할 수 없다. 우리는 때때로 요나처럼 주의 뜻을 거역하고 아나니아처럼 주께 반문하지만, 주께서는 우리에게 똑같은 명령을 주신다. '가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셋째로, 주께는 변화의 능력이 있으시다. 주께서는 사울의 어둡고 딱딱한 마음을 변화시키셨다. 그는 거의 강제적인 방식으로 그를 꺾으셨고 그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셨고 응답하셔서 그를 마침내 변화시키셨다. 사울은 일어나 세례를 받았고 주의 제자가 되었다. 핍박자가 제자가 되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있겠는가? 사울은 주의 성도들을 핍박했던 자신의 과거의 잘못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더욱 주께 충성하는 일꾼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의 능력을 믿고 주께 기도하자.
19b-25절, 사울이 예수님을 증거함
본문은 사울이 다메섹에서 제자들과 교제하며 유대인의 회당들에서 전도하였고 유대인들이 죽이려 하므로 그 곳으로부터 도피하였음을 증거한다.
[19] . . .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쌔.
사울에게는 이제 새 친구들이 생겼다. 이제는 유대교의 랍비들이나 세상 친구들이 아니고 예수 믿는 자들이 그의 친구가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교제이었다. 성도의 교제는 세상의 교제와 다르다. 그것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교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영적 교제이다. 요한일서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성도의 교제는 성경 말씀의 뜻을 묵상하고 깨달은 바를 서로 나누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친구는 참으로 중요하다. 성도에게도 친구는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경건하고 착한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그래야 신앙의 유익을 얻을 것이다.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고린도전서 15:33, 34,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20-22]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사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했고 즉시 유대인들의 회당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유대인들이 자기처럼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상 밖의 사건에 다 놀랐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예수 믿는 자들을 잔해하는 자라고 알고 있었고 그가 여기에 온 것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신자들을 잡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명하므로 유대인들을 당황케 하였다. '굴복케 하다'는 헬라어 원어(슁케오)는 '당황케 하다'는 뜻이다. 그는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들과 그의 부활, 특히 길에서 그에게 나타나심을 통해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였을 것이다.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본절의 '여러 날'은 다른 성경과 비교해보면 3년이었다. 그는 회심한 지 삼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갈라디아서 1:17, 18,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일을 유할쌔." 그 삼년 중 얼마 동안 그는 아라비아에 갔었는데, 그것은 아마 특별한 기도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 기간은 하나님과 깊은 교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메섹 성에 살던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기를 공모하였다. 악한 자들은 참으로 악하다. 또 그들은 악을 행하는데 열심이 있다. 또 그들은 여러 사람이 함께 악을 도모하는 경향이 있다. 악한 자들은 혼자서보다 당을 지어서 악을 행한다. 로마서 2: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신앙의 길은 고난의 길이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자마자 고난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런 고난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는 후에 다른 이들에게 고난에 대비하도록 권면할 수 있었다. 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특히 전도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신 고난의 길인 것이다. 그 길은 주의 말씀대로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주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복된 길이다.
[24, 25]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을 죽이려 한다는 유대인들의 은밀한 계획이 사울에게 알려졌다. 이것은 사울로 하여금 피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밤낮 성문까지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를 밤에 광주리에 담아 성에서 달아 내려 도피하게 하였다. 다메섹에는 하나님 앞에서 용감하고 다른 성도를 사랑하는 무명의 주의 제자들이 있었다. 사울은 후에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간증하였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후 11:32, 33). 여리고에 들어갔던 두 명의 정탐군들이 기생 라합을 통해 죽음을 피하였듯이, 다윗이 미갈을 통해 사울의 칼날을 피하였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종들과 성도들에게 고난 중에서도 자주 피할 길을 주신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나누기를 힘쓰자. 성도의 교제는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교제이다. 교회는 이런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는 자들이 모여 교제하는 곳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었다(행 2:42). 우리 교회도 그런 교제가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였을진대 믿지 않는 다른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전도는 성도가 할 수 있는 가장 복된 일이다. 더욱이, 전도는 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명하시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말씀하셨다.
셋째로, 우리는 주의 제자의 길을 걸을 때 고난을 각오하자.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행 14:22). 또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핍박이 있다(딤후 3: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피할 길을 준비해주신다.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제자의 길을 걸을 때 고난을 각오하며 항상 믿음의 담대함을 잃지 말자.
26-30절, 사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감
사울은 회심한 후 다메섹에서 얼마 동안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전도자 사울의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본문은 그가 거기에서 처음에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기가 쉽지 않았음과 또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하였음을 증거한다.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갈라디아 1장에 보면, 그는 3년 만에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거기서 15일을 유하면서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갈 1:18, 19). 아마 다른 사도들은 여러 다른 곳으로 흩어져 전도 사역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주를 믿는 성도들을 사귀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를 다 두려워하였고 그가 주의 제자 되었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격적 교제는 상대방의 진실을 알 때에 가능하다. 더욱이 과거에 공공연히 성도들을 핍박했던 자에 대해서 두려움과 거리낌을 갖는 것은 인간 본성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의심으로 시작될지라도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계기들을 통하여 점차 상대방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과 순종의 행위를 보고 그의 변화된 마음, 그의 변화된 생각, 그의 변화된 인격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서로 진실한 친구가 될 수 있고 성도의 진실한 교제가 가능할 것이다.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울이 당한 어려움을 도와준 인물이 바나바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친구이었다. 바나바는 좋은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4:35, 37에 보면, 그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으로서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으나 사도들이 그를 바나바라고 불렀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는 또 자기의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둘 정도로 진실히 주를 믿고 따르는 자이었다. 또 사도행전 11:24에 보면,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증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건하고 착한 인물을 친구로 사울에게 주셔서 그로 하여금 사울과 사도들의 교량 역할을 하게 하셨다. 우리도 이런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사울이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사울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증거하였다. 그것은 사도들로 하여금 사울을 이해하고 그를 주의 제자와 형제로 용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바나바는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세상적 친구가 아니고, 주 안에서 사울을 위하고 그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준 좋은 친구이었다. 오늘날 주께서는 자기 종들에게 필요한 때에 필요한 친구들과 동역자들을 주실 것이다.
[28, 29]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사울은 믿는 제자들과 함께 교제하며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주 예수님을 의지하며 또 그의 권위로'라는 뜻이다. 사울에게는 예수께서 주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담대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는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였다. '헬라파 유대인'(헬레니스테스)이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했다. 그것은 분명히 신앙적 충돌에 기인했다. 더욱이 한 때 유대교에 열심이 있었던 사울이 배신자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들의 마음은 더욱 격분했을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종교적, 사상적 대립은 가장 심각하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은 결코 무시될 수 없었다. 기독교가 진리이면 유대교는 비진리가 된다. 기독교에 구원이 있고 거기에만 하나님을 섬김이 있고 영생의 복이 있다면, 유대교를 포함하여 다른 종교들에는 구원이 없고 하나님을 섬김이 없고 영생의 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오늘날 종교간의 일치와 연합을 추구하는 무리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며 비성경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저버린 배교한 교회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구약 시대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종교가 부패할 때는 항상 우상숭배나 이방종교의 포용이 있었다. 물론 여러 종교 신앙을 가진 자들이 모여 사는 세상 속에서 사회정치 문제에 서로 협력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는 다르다. 물론 종교 신념의 차이 때문에 상대방을 핍박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각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종교 신앙을 가질 자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들은, 비록 타종교인들을 인간으로서 존중하지만, 그들을 회개가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한 불쌍한 영혼들로 본다. 또 비록 어떤 이들이 우리를 핍박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힘써 전도해야 할 것이다.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갈라디아서 1장에서는 그가 그 후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다고 말한다(갈 1:21). 길리기아 다소는 사울의 출생지이었다(행 22:3).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나중에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거기서 함께 1년간 큰 무리를 가르쳤다(행 11:25, 26).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어떤 경우에는 교회 안에서 이해와 인정을 받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고 조급해 하지 말고 인내하면서 모든 진실한 성도들에게 인정을 받도록 성실히 행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바나바같이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기적이거나 계산적이지 말고, 상대방의 신앙의 이력에 대해 잘 알고 필요할 때 다른 이들에게 그를 소개하고 또 변호할 수 있는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주를 믿고 따르는 길은 항상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 길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 핍박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딤후 3:12). 사탄은 주의 종들을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다. 아마 귀하고 신실한 종일수록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험과 핍박,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바르고 담대하게 행하고 죽도록 충성하자.
31절, 교회들의 평안과 성장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본절은 당시 교회들의 형편을 요약하여 증거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의 불길이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붙었고 많은 교회들이 곳곳에 세워졌으며 그 교회들은 평안 가운데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라는 말(운)은 핍박자 사울의 변화를 주로 염두에 둔 말인 것 같다. 사울은 교회에 대한 핍박의 한 대표적 예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핍박자 사울을 꺾으셨다. 비록 교회들에 대한 핍박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겠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증거가 너무 뚜렸했고 이로 인해 교회들은 더욱 힘을 얻었을 것이다.
본절은 당시의 교회들의 형편을 네 마디로 표현하였다. 첫째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들은 평안하였다. 특별한 열심을 가지고 기독교회를 핍박했던 사울이 변하여 예수 믿는 자가 되고 예수를 증거하는 자가 되었을 때 유대인들의 핍박은 한 풀 꺾였던 것 같다. 큰 핍박은 식어졌던 것 같다. 교회들에게 상당한 외적 평안이 찾아왔던 것 같다.
그러나 실상 내적인 평안은 더욱 큰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근본적 평안을 약속하셨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편지할 때마다 하나님의 평강을 기원하였다(롬 1:7). 또 그는 데살로니가후서 3:16에서 말하기를,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하실지어다"라고 했고 또 빌립보서 4:6, 7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평안을 누리며 산다. 교회는 항상 이 평안 가운데 거하는 것이다.
둘째로, 교회들은 든든히 서 가고 있었다. '든든히 서 간다'는 헬라어 원어(오이코도메오)은 '집을 세운다, 증진시키다, 성장시키다'는 뜻이다. 이것은 영적 건립을 의미한다. 교회는 영적으로 집과 같다. 고린도전서 3:9, "너희는 . . .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린도전서 3:16, 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이 집은 지금도 계속 지어지고 있다. 이것은 외적인 예배당 건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의 성화(聖化), 즉 성도들의 인격과 삶이 지식과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있어서 자라가는 것을 말한다. 다음 성경구절들은 이 진리를 잘 보인다.
에베소서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4:11-16,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셋째로, 교회들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교회들이 건전하게 진행하며 발전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주를 경외함으로 진행한다는 말은 주님을 두려워함으로 주님과 주의 말씀 즉 주의 종들을 통해 성실하게 증거되는 말씀에 복종한다는 뜻이다. 주를 경외하고 주의 말씀에 복종하는 교회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건전한 교회이다. 또 그들에게는 성령의 위로가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하나님의 근심과 책망이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종할 때 성령의 위로가 있고 풍성히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나그네 삶을 사는 성도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세상은 악하고 성도는 약하며 늘 부족하다. 세상에는 마귀의 시험이 많고 죄악된 풍조의 도전이 강하다. 성도에게는 항상 자신 속에 죄성과의 싸움이 있다. 성도에게는 악한 핍박자들도 많다. 성도의 길은 좁은 길, 외로운 길이다. 시편 34:19은 '의인에게 고난이 많다'고 말했다. 성도는 때때로 육체적 연약과 질병, 또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이럴 때마다 성도는 위로가 필요하다. 이 때 만일 성도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없다면, 그는 낙심하고 낙망하며 혹은 자포자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가 연약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싸매어 주신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시시때때로, 때마다 일마다 그들을 붙드시고 위로 격려하신다.
넷째로, 교회들은 수가 더 많아졌다. 교회들의 수도 많아졌고 교인들의 수도 많아졌을 것이다. 그것은 앞에 언급된 사실들의 당연한 결과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상적 신앙생활을 할 때, 전도의 효력이 나타난다. 교회들이 평안하고 든든히 서 갈 때, 그리고 교회들이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할 때, 즉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주의 말씀의 교훈대로 서로 사랑하며 모든 불결과 음란과 악함을 버릴 때, 전도는 효력 있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의 삶이 그렇지 못하고 이율배반적일 때, 성도들의 삶이 세속적이고 탐욕적이며 서로 미워하고 다툴 때, 전도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우리 교회가 바로 이런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자. 이미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 평안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안에서 우리는 이 평안을 얻었다. 우리는 믿음과 기도 가운데서 항상 이 평안 안에 거하자.
둘째로,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고 든든히 서자. 우리는 성경 말씀의 교훈 안에서 지식과 믿음이 자라고 거룩함과 사랑이 온전하여지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영적 상태는 어떠한가? 우리의 성화의 정도는 어떠한가? 우리는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자라고 든든히 서기를 소원하고 힘쓰자!
셋째로, 우리는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자. 우리가 성경 말씀을 멸시하고 복종치 않는다면, 주의 영은 근심하실 것이지만, 우리가 주를 두려워하고 주의 말씀을 진심으로 복종한다면, 성령의 위로하심도 풍성할 것이다. 예배때마다 하는 '성령의 교통하심'에 대한 목사의 기원은 바로 이것을 포함한다. 성령의 위로와 격려하심, 권면하심과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 참 성도들이며 그들의 모임이 참 교회이다.
넷째로, 교회가 이러할 때 교회는 숫적으로도 성장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얻는 자들의 수를 날마다 더하게 하실 것이다. 또 이 주위에 하나님을 진실히 믿는 이들이 우리 교회로 모여올 것이다. 우리의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고 힘쓰자.
32-35절, 애니아를 고쳐주심
[32]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때에'라는 말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 하므로 형제들이 사울을 다소로 보냈을 때를 가리킨다. 그때 베드로도 예루살렘을 떠나 사방으로 두루 행하며 전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룻다라는 곳으로 내려갔다.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 35킬로미터쯤에 위치해 있었고 다음 사건에 나오는 욥바에서는 동남쪽으로 18킬로미터쯤에 위치해 있었다. 많은 기적 사건들 중에 일부만 기록한 성경이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은 그 내용이 놀랍기도 하지만 더욱이 다음에 나오는 욥바와 가이사랴에서의 사건들에 연결되기 때문인 것 같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본문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성도들'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본서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한다. 가장 자주 사용된 용어는 '형제'라는 말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동족 유대인들을 향해서도 사용되는 말이다. 그 다음으로 자주 쓰인 용어는 '제자'라는 말이다. 이것은 주님을 배우며 따르는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본절에 사용한 '성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거룩하게 된 자들이라는 뜻으로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자주 사용한 명칭이었다.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 지 팔년이라.
룻다에 애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에 누운 지 8년이나 된 자이었다. 물론 예수께서 사역하셨을 때도 모든 병자들이 다 고침받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애니아는 아마도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즈음 병상에 눕기 시작한 듯하다. 그는 예수님께 병고침 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 베드로를 통해 병고침을 받게 되었다.
[34]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베드로는 애니야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쉽게 말했다. 그때 애니아는 곧 일어났다. 사도행전 3장에 기록된 대로, 베드로는 이전에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나면서 앉은뱅이 된 40세 가량된 사람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 사건이나 지금 사건이나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뿐이다. 예수께서는 살아계셔서 사도들을 통해 능력의 일들을 이루셨다. 이와 같이, 사도들을 통해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었다. 기적은 사도들의 신분증과 같았다(고후 12:12). 사도 시대에는 심지어 집사들도 기적을 행한 자가 있었다. 성경은 많은 기적들 중 극히 일부분만 기록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의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도 시대 이후에도 세상에 기적들을 계속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물론, 기도의 응답으로 신기한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사람의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 즉 죄로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이다. 그 결과, 영적으로 병든 인격이 새롭게 될 것이다. 영적인 소경이 눈을 뜨고 영적인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영적인 벙어리가 말을 하고 영적인 앉은뱅이와 중풍병자가 뛰며 걸을 것이다.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고, 불결한 자가 변하여 거룩한 자가 되고, 악한 자가 변하여 착한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물론, 사람의 영혼의 구원은 마지막 날에는 그의 영육의 구원이 될 것이다. 영혼의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영생하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다.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애니아의 병고침을 보고 룻다와 사론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다. 주께로 돌아왔다는 것은 전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지 못했고 그를 의심하고 믿지 못했던 자들이 이제는 그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믿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병고침을 본다고 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 가운데 은혜를 주셔야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사실상 기적 때문에 사람들이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믿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도 기적을 보고도 안 믿은 자들이 많이 있었다. 구약 시대에도 유대인들은 많은 기적을 보았으나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기적은 참된 믿음과 아무 관계가 없다.
하나님의 뜻은 기적 없이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는 방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기적들이 역사상 일어났었다. 그 기적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확증하는 표이었다. 오늘날에는 기적들이 없어도 역사상 이루어진 그 표적들을 통해, 성경에 기록된 그 표적들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 오늘날에는 외형적인 기적 없이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실상, 내면적 변화는 더 큰 기적이다. 이제는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하고 확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다음의 성경 구절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보여준다.
요한복음 20:30, 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6:27-31,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고린도전서 1:21-25,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도 살아계신 신적인 구주이시다. 8년간이나 중풍병으로 침상에 누워 있었던 애니아를 고쳐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기적으로 육신의 병을 고치시지는 않는다. 육신의 병고침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구원이 아니다. 육신의 병고침을 받은 자도 죄로 인해 지옥에 들어갈 수 있다. 땅의 복을 구하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육신의 건강이나 물질적 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를 회개함과 거룩하고 착한 삶을 사는 것이다. 육신의 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이다.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과 비교할 수 있는 육신의 것, 세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육신의 병은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병원 치료나 자연 요법 등 다양한 방법으로 치료해 주시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치료해 주시지 않기도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깨달은 자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이래도 저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과 현세의 유익된 평강을 주실 것이 분명하다.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신 능력의 주님, 사랑의 주님은 우리의 지상 생활에 대해 무엇이든지 좋은 것, 우리에게 유익된 것을 하실 수 있고 또 하실 것이다. 육신의 건강이나 물질적 유여함이 반드시 행복의 조건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빼앗으심으로써 자신의 신앙 인격의 유익이나 가족들의 구원이 되게 하신다.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우리에게 유익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오늘날 죄인들은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성경을 통해, 전도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하고 주께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모든 믿는 이들은 이 성경 말씀과 거기에 증거된 신적인 구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에게 힘써 전파해야 한다.
36-43절, 죽은 다비다를 살리심
본문은 사도 베드로가 성도 다비다를 살린 사건을 증거한다. 이 사건은 사도 베드로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그 속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었다.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다비다 혹은 도르가라고 불리우는 이 여제자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진실한 성도이었다. 선행과 구제는 참 경건의 증거이다. 성경의 전체적 요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서로 사랑하며 남에게 선을 베풀라는 것이다. 요한일서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구약의 율법도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로 요약된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로마서 13:8-10, ". . .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다비다는 늙어서 죽은 것이 아니고 병들어 죽었다. 성도도 병들고 성도도 죽는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출생도 하나님의 정한 때에 있고 죽음도 하나님의 정한 때에 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죽는다. 그러나 그 후에 천국에서의 쉼과 안식이 있고 또 부활의 날이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을 때라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또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야 한다.
[38]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욥바는 베드로가 8년 동안 중풍병으로 침상에 누워 있던 애니아를 예수의 이름으로 고쳐준 룻다에서 서북쪽으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해안도시이었다. 욥바의 성도들은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빨리 와 달라고 요청하였다. 베드로는 나이 40세쯤 되었을 한 인간이지만, 주께서는 그에게 특별한 직분과 권위를 주셨다. 주께서는 주의 종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귀한 직분을 주셨고 그 직분과 더불어 당신의 권위를 주셨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셨다(마10:40).
[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베드로가 거기에 도착하여 다비다를 뉘운 다락에 올라갔을 때 모든 과부들은 베드로 곁에 서서 울었고 다비다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였다. 옛시대에 옷은 귀한 것이었다. 그 옷들은 다비다의 선행의 흔적들이었다. 모든 과부들의 눈물과 그들이 보여준 옷들은 다비다가 어떻게 진실한 성도이었는지를 잘 증거한다.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는 사람들을 다 내어보냈다. 그것은 기도에 지장을 받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해야 하는데 인간을 의식하게 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행해 기도해야지, 사람 앞에 연설하듯이 기도해서는 안될 것이다. 기도는 오직 하나님 앞에 우리의 중심을 아뢰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그것은 그의 기도가 간절한 기도이었음을 나타낸다. 기도는 형식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형식적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기도는 마음을 토하는 것이어야 한다. 진심의 기도, 간절한 기도만이 참 기도이다. 엘리야는 머리를 무릎 사이에 넣고 일곱 번이나 계속해서 기도하였다(왕상 18:42-44). 주께서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실 때 밤에 떡 세 덩이를 빌리러 온 한 친구의 이야기를 비유로 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1:8). 또 그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눅 18:6, 7).
성경은 병자를 위해서도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쳤다. 야고보서 5:13, 14-18,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 . . .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베드로는 기도를 마친 후 다비다를 향햐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말했다. 다비다는 눈을 떠 베드로를 보았고 일어나 앉았다. 베드로는 룻다에서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그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주님만 의지하고 그를 살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베드로를 믿지 않고 42절의 말씀대로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물론 성도들은 주의 종 베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또 두려워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41-43]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켰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의 산 것을 보여주었다. 욥바에 그 소문은 즉시 퍼졌을 것이다. 다비다를 살린 이 사건은 욥바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확실하게 증거될 수 있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일로 인해 주님을 믿게 되었다. 다비다를 살린 자는 베드로가 아니고 베드로 속에 역사하시고 그와 함께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베드로를 통해 이루어진 기적들은 단순히 인간 베드로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가 전하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 사건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다. 베드로는 그 일 후 그 곳을 곧 떠나지 않았고 욥바에서 피장(皮匠) 시몬의 집에 유하며 여러 날 있었다. 주께서는 그를 다음에 복음을 전할 곳으로 부르실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의 참믿음은 사랑과 선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사랑과 선을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아직 사랑의 인격이 되지 못한 자는 영적인 어린아이와 같다. 영적으로 성숙한 자는 그 인격이 겸손과 사랑과 선행으로 단장된 자이다. 둘째로, 우리는 삶과 죽음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자. 인간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자. 우리는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죽을 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감을 확신하자. 셋째로, 우리는 질병이나 환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간구하자. 우리의 무기는 오직 기도뿐이다. 주께서는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넷째로,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그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성경의 진실한 증거들을 통해 그를 확신하자.
10장: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달됨
사도행전 10장은 이방인 고넬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일을 자세히 기록한다. 이것은 복음이 최초로 이방인에게 전달된 사건이었다.
1-8절, 고넬료의 환상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가이사랴는 욥바에서 지중해 해안을 따라 약 50킬로미터 북쪽에 위치한 중요한 항구 도시이다. 그 도시는 로마 제국의 행정구역상 유대 지방의 주요 도시이었고 헤롯 왕과 로마 총독들의 공식적인 거주지이었다. 가이사랴라는 도시 이름도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이름을 따른 것이었다. 그 도시에 고넬료라는 로마 군인이 있었다. 그는 이탈리야 대(隊)라는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백부장은 100명의 부하를 거느린 장교로서 오늘날 중대장쯤 된다.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안 식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자기 혼자만 하나님을 경외하여도 경건하고 귀한 일인데, 온 집안 식구들을 권면해서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니 얼마나 더 경건하고 귀한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부모 된 우리만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자녀들도 잘 가르쳐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를 원하신다. 신명기 6:4-7,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에베소서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넬료는 또한 구제도 많이 하였다. 그의 경건은 진실하였다. 사람의 선행과 구제는 그가 하나님을 진실히 섬기고 있다는 증거요 그가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고린도후서 9:13, "이 직무[구제 헌금]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고린도후서 8:7, 8,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구제 헌금]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요한일서 3: 17, 18,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고넬료는 또한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였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경건함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하였다(살전 5:17). 다니엘은 국무총리라는 바쁜 삶 속에서도 하루 세 번씩 규칙적으로 기도하였다. 다니엘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기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행위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인정하며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잠언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과연 고넬료는 하나님의 좋은 인도를 받았다.
[3-8] 하루는 제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고넬료는 시간을 정해 놓고 규칙적으로 기도했던 것 같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씩, 즉 3시(오전 9시), 6시(정오), 9시(오후 3시)에 기도했던 것 같다. 고넬료는 어느 날 제9시 기도 시간에 기도 중에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보았다. 그 때 그는 금식 기도 중이었다. 30절(전통사본), "이맘때까지 내가 금식하며 내 집에서 제9시 기도를 하는데." 그는 기도 중 환상을 보았다. 꿈과 환상은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방편이었다. 민수기 12:6,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고넬료는 환상 중에 천사를 보았고 천사는 그에게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는 시몬을 청하라고 하였다. 천사가 떠나자마자 고넬료는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말하고 욥바로 보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제와 선행을 실천하는 자들을 받으시고 그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들을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고넬료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 경건한 이방인 고넬료에게서 배울 바가 많다. 첫째로, 우리는 온 집안 식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자. 신앙은 개인적인 문제이지만, 부모 된 자에게는 일차적으로 가족들의 신앙에 대한 책임이 있다.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한다고 하여도 그들을 참된 신앙으로 이끌지 못한다면 우리의 수고는 헛될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자녀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물질적으로 자녀들에게 모든 좋은 것을(좋은 옷 사주기, 좋은 음식 먹이기, 각종 학원에 보내기 등을) 다 해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들을 참 신앙 안으로 이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가장 귀한 것을 해준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만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우리의 온 가족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자.
둘째로, 우리는 구제와 선행에 힘쓰자. 구제와 선행은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히 믿는다는 표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대로 다른 성도를 사랑한다는 표이다. 우리는 말로만 형제를 사랑할 것이 아니고 우리보다 어려운 자들을 보면 구제하며 선을 행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심이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자. 기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행위이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실제적인 무신론자이다. 말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실천하기를 좋아하고 또 항상 기도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마다 항상 기도할 것이다. 그는 평안할 때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고난 가운데서는 회개의 기도와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구하는 간구의 기도를 드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자.
9-22절, 베드로의 환상
[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육시더라.
하나님의 섭리는 우연하게 보이나 정확하게 이루어진다. 고넬료에게서 보냄을 받은 자들이 욥바 성에 가까이 갔을 때에 베드로는 기도하기 위해 지붕에 올라갔다. 옛날 유대 땅의 집들의 지붕은 들보 위에 나무 가지들을 놓고 그 위에 갈대 매트를 놓고 그 위에 두꺼운 흙을 발라서 만들었는데 집 안의 추가적 공간으로서 여름에는 잠을 자는 곳으로도 쓰였고 거실이나 창고로도 쓰였다고 한다. 베드로는 그 곳을 기도 장소로 사용했다. 그는 제6시 즉 정오에 기도하기 위해 그 곳에 올라갔다. 그는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것 같다.
[10, 11]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 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점심식사 시간이 되어 배가 매우 고팠을 때 하나님께서는 먹는 음식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환상으로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환경과 상황을 적절히 사용하신다. '비몽사몽 간에'라는 말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가리킨다. 17절과 19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본 것을 환상이라고 말한다. 그는 환상 중에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환상을 볼 때 하늘이 열리는 경우가 많았다. 사도행전 7:56에 보면,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베드로는 그 환상에서 네 귀를 맨 큰 보자기 같은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12-14]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베드로는 그 그릇 안에 각종 짐승과 기는 것과 새들이 있는 것을 보았고 또한 '베드로야 일어나 그것들을 잡아 먹으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그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라고 대답했다. 베드로는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는 레위기 11장이나 신명기 14장에 규정된 대로 언제든지 정결한 생물만 먹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았다. 그 규정은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 뜻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구별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법(儀式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완성되었고 따라서 신약 아래서는 폐지되었다. 도덕법은 영속적이지만, 의식법은 폐지되었다. 그러므로 골로새서 2:16, 17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했다.
[15, 16]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깨끗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속되다고 여기지 말라는 뜻이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중 모든 택한 자들을 깨끗케 하셨다. 유대인이나 이방이나 간에 모든 택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그들의 모든 죄들의 깨끗케 함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속되다 해서는 안된다. 여기에 전도 대상자들에 대한 우리의 바른 태도가 있다. 우리는 사람들의 외적 조건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 대해 긍휼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깨끗케 하신 자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하늘로 올리워 간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 편에서 전도 대상을 제한해서는 안된다. 상대방이 복음을 받든지 안 받든지 간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17, 18]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하나님의 시간표는 정확하다. 베드로가 속으로 환상의 뜻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바로 그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은 그가 우거한 집에 도착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섭리하시는 모든 일들을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이루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기대하면서 오늘도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19-21]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일어나 내려가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천사의 음성(3-6절)은 하나님의 음성 곧 성령의 음성이었다. 성령은 단순히 어떤 기운이나 힘이 아니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그는 모든 성도 속에 거하시며 그들을 친히 인도하신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전통사본에는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라는 말 대신에 단순히 '사람들이 너를 찾으니'라고 되어 있다.
[22]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그 사람들은 고넬료에 대해 몇 가지로 증거하였다. 첫째로, 그들은 고넬료를 의인이라고 증거하였다. 세상에 완전한 의인은 없지만, 고넬료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그리고 양심의 법에 따라서 살려고 애쓴 자임이 틀림 없다. 그의 구제와 선행은 그의 의를 증거하였다. 둘째로, 그들은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악을 떠날 수 있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악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고넬료가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는 자라고 증거하였다. 신앙은 말보다 그의 인품을 통해 증거된다. 성도의 인품은 주위 사람들에 의해 잘 증거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마태복음 5:16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또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3:7에서 장로의 자격 요건의 하나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자. 이것은 특히 전도 대상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사람의 외적인 조건, 사회적 신분, 물질적 여건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자.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롭게 살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버리며 선행과 구제에 힘쓰는 자가 되자.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으로써 의와 선을 행하는 자가 되자. 셋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심지어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듣는 자가 되자. 참된 신앙은 그의 말보다 그의 인품을 통해 증거될 것이다. 우리의 인품이 선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알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 듣는 자가 될 것이다.
23-33절, 고넬료의 영접
본문은 고넬료가 어떻게 베드로를 영접했고 그를 통해 주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는지를 증거한다.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쌔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베드로는 하나님의 지시에 즉시 그리고 즐거이 순종했다. 그는 이튿날 저희와 함께 욥바를 향해 떠났다. '두어 형제'라는 헬라어 원어(티네스)는 '몇 명'이라는 뜻이다. 뒤에 11:12에 보면, 욥바에서 베드로와 함께 간 자들은 여섯 명이었다. 그 여섯 명의 욥바 형제들이 베드로와 동행한 것은 베드로를 존경해서이기도 했겠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후에 이방인 고넬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 사건에 대해 증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가이사랴까지 가는 약 50킬로미터의 길은 10명의 무리가 하루에 이동하기에는 멀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이튿날에나 가이사랴에 들어갔다. 그런데 고넬료는 베드로를 기다리며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놓고 있었다.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던'(2절) 고넬료는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까지 다 초청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고넬료는 하나님의 말씀 받는 일을 크게 여겼다. 또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향한 그의 사랑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가지게 해주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말씀 받는 일을 크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의 표현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이 무엇이겠는가? 세상에 많은 일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고넬료는 베드로를 맞을 때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였다. '절하다'는 헬라어 원어(프로스퀴네오)는 영어 성경의 번역대로 '경배하다'는 뜻이 있다. 그것은 고넬료의 겸손한 인품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하나님의 말씀 전달자에 대해 어떤 존경을 가졌는지를 나타낸다. 베드로에 대한 그의 태도에는 지나친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진 존경심과 사모함을 잘 나타낸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은 말씀 증거자에 대한 존경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2, 13에서 교훈하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했고, 또 디모데전서 5:17에서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하였다.
[26]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베드로는 고넬료의 절을 받기를 거절하였다. 그는 자기에게 절하는 고넬료를 일으키며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람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 신적 숭배와 같았다. 인간은 인간이며 신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으로 족하다. 인간은 인간 이상으로 높임을 받아서는 안된다. 베드로는 자신을 부당하게 높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바른 것이었다.
[27-29]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 것을 보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유대인이 이방인과 접촉하고 그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율법이 금하는 바는 아니었다. 율법은 단지 유대인이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하였다(신 7:3, 4). 그것은 그들이 이방인의 종교에 영향을 받을 것을 방지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후대 유대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율법을 해석하여 이방인들과 전혀 접촉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위법'이라는 말은 이런 전통과 관습을 어기는 일이라는 뜻이다.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에 따르면,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주신 환상에서 '아무것도 속되다거나 깨끗지 않다고 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그 초청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 후에 무슨 일로 자기를 불렀느냐고 초청의 이유를 물었다. 그가 거기에 온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바로 그 일을 위해 온 것이었다. 그 외의 다른 일들은 그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고 실상 그의 관심 밖에 있었다.
[30-32]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구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
고넬료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셨던 환상과 지시에 대해 그대로 말했다. 이렇게 최초의 이방인 구원은 하나님의 비상한 섭리로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셨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 환상과 지시로 인간의 제한된 생각을 극복케 하셨던 것이다. 전통사본에는 '이맘때까지'라는 구절 다음에 '내가 금식하며'라는 구절이 있다. 고넬료는 기도하며 금식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금식은 특별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는 행동이다. 금식은 육신의 즐거움을 중단하고 육신의 생명의 쇠약함을 각오하는 행동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7:21의 전통사본에서 "그러나 이런 류의 것은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시므로 금식기도의 효험을 증거하셨다. 성도가 지극히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기도는 금식 기도이다. 그것은 효력 있는 기도이다. 또 32절 끝에 전통사본에는 "그가 와서 네게 말하리라"는 구절이 있다.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지시에 대해 곧 순종했다. 그는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있었다. 그는 베드로에게 "이제 우리는 주께서[전통사본--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참으로 경건하였다. 그는 단순히 인간 베드로 앞에 있지 않았고 하나님 앞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었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것이 참된 경건이다. 경건은 항상 하나님 앞에 사는 태도이다. 고넬료는 이런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모든 진리를 듣기를 원하였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주신 경건을 본받기를 원한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로마서 9:18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말했다. 본문에 나타난 고넬료의 경건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은혜로 주신 경건은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초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한 것이다. 가족들과 친척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무엇인가? 그들을 초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겨우 우리 자신만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형제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친척들과 친구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자.
둘째로,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은혜로 주신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 전달자를 귀히 여기는 태도이었다. 이것은 모든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은혜이다. 성도들은 설교자들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 설교자를 높이는 것이 아니고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는 것이다. 설교자의 권위의 손상은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의 손상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은 그 말씀을 전하는 자에 대한 존경으로 나타날 것이다.
셋째로, 고넬료는 하나님의 은혜로 금식 기도를 하였다. 금식은 특별히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육신의 즐거움을 중단하고 생명의 쇠약을 각오하는 것이다. 우리 앞에 비상하게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우리도 금식함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자.
넷째로, 고넬료는 베드로 앞에서도 인간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고백하였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였다. 우리도 이 세상 사는 동안 단순히 사람들 앞에서만 살지 말고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자. 이것이 참된 경건이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도 사람만 의식하지 말고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자.
34-48절, 베드로의 전도
본문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전한 내용과 그 결과에 대해 증거한다.
[34, 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베드로의 깨달음은 옳다. 하나님은 과연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신다. 그는 사람의 얼굴 생김새나 키, 학력이나 사회적 신분, 재산 정도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그는 사람의 인품을 보신다. 그는 우상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며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들을 받으신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백부장 고넬료는 바로 그런 자들 중의 한 사람이며 또 고넬료의 집에 모인 친척들과 친구들은 바로 그런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도 베드로를 통해 구원의 복음을 들려 주셨다.
[36, 37]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베드로는 하나님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의 소식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고 만유의 주이시다. 그는 신적인 인물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화평이 오고 그 화평과 더불어 마음의 평안도 찾아올 것이다. 이 화평의 복음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왔다. 그것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이어 갈릴리에서 공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온 유대에 널리 전파되었다. 그 소식은 당시에 그 주위에 산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이야기들이었다.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예수는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는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웠다. 그는 신화적 인물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확인할 수 있었던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역사적 인물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바로 '메시아'라는 말이다. 그는 메시아이셨다. 그는 갈릴리와 유대 땅을 두루 다니셨고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셨고 죽은 자들을 살려주셨다. 이것은 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 일들이었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인간 예수께는 하나님의 본질이 함께 계셨다.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이 한 인격 안에 결합되셨다. 그는 참 사람이신 동시에 참 하나님이셨다. 그의 행하신 병고침과 기적들은 다 하나님의 능력의 일들이었다. 그는 그 일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행하셨다.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하신 일들에 대한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그대로 진실하게 증거하였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거짓 증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이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의 사건이며 사실인 것을 증거하는 증인들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그의 행하신 일들에 근거하는데, 그 일들은 그것들을 본 제자들의 증언에 의해 후대에 전달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증거가 거짓되지 않고 진실한 것임을 믿으며 그 증거를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
[40, 41]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한 사건은 그의 부활이었다. 부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가장 확실한 마지막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는 자신의 다시 사심을 제자들에게 여러 날 보여주셨다. 사도행전 1:3에서 누가는 부활하신 주께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증거한 바가 있다. 주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음식을 먹기까지 하였다. 그것은 그의 부활이 단지 영적인 현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의 부활은 육체적 부활이었다. 물론 그의 부활이 단순히 죽은 몸의 회생은 아니었다. 부활하신 그의 몸은 변화된 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영적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상하신 그 몸이 부활하셨고 그가 묻히셨던 무덤을 빈 무덤을 만드시는 방식으로 부활하셨다.
[42]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만백성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 복음의 중심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바로 하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이시다.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예수께서 사람들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말은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뜻이다. 요한복음 5:22에서 그는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이시다. 사람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 9:27). 여기에 구원의 절대 필요성이 있다. 장차 온 세상의 심판자이실 그가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를 영접하고 믿으며 그 앞에 복종해야 한다.
[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보다 중요한 사실은,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한 바와 같이, 그를 믿는 자들이 그 이름을 통해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죄 문제가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죄사함의 문제는 또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인간의 죄사함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다른 길은 없다. 다른 방법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 다른 이름은 없다.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44]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하나님의 구원은 즉각적이었다. 베드로의 설교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을 때에 하나님의 구원이 그들에게 임하였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 그것은 구원의 표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이 듣고 받고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내려오신다. 그래서 후에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라고 증거했다(행 11:17). 또 바울도 갈라디아서 3장에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
[45] 베드로와 함께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은혜와 성령의 선물을 주신다는 것은 그때까지도 생각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그래서 베드로와 함께온 할례 받은 유대인 신자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행하셨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셨다. 그것은 요엘 선지자로 하신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였다. 요엘 2:28에 보면, 그는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라고 하셨다. 만민 속에 이방인들도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고넬료를 비롯한 이방인 신자들이 성령을 받은 증거는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볼 수 있는 외적인 표시이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대로, 오순절에 성령께서 처음 내려오셨을 때도 제자들은 방언을 말했었다. 초기 교회의 방언은 신자들이 성령을 받은 증거이었다.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표요 하나님이 그들을 받으셨다는 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게 하신 것이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고 받으셨다는 표로서 내려오신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이요 인치심이다.
[47, 48]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다시 번역하면, ". . . 누가 능히 이들이 물로 세례 받지 못하도록 금하리요 하고 그들에게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하니라." 성령을 받은 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았으니 물 세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했다. 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자. 첫째로, 기독교의 확실성을 기억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그것들을 본 제자들에 의해 증거되었다. 그들은 진실한 증인들이었다. 기독교는 증인들의 증거에 의해 확립된 진리이다. 2천년의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들의 진실한 증언들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진실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그들의 증거들을 통해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둘째로,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한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믿고 전할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심판자이시다. 그가 다시 오실 때 온 세상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다같이 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또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죄 문제가 인류의 근본적 문제이다. 죄 사함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다른 길은 없다. 다른 방법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이다.
11장: 안디옥 교회의 설립
1-18절, 베드로의 보고
본문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유대의 형제들 앞에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한 사실을 보고한 내용이다.
[1-3]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전도하여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이 사도들과 유대에 있는 형제들에게 알려졌다. 그런데 한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할례자들 곧 유대인 신자들이 베드로와 다툰 일이었다. '힐난하다'는 헬라어 원어는 '다투다'는 뜻이다. 그들은 그에게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고 말했다. 유대인들은 세계 복음화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완고한 선민의식을 버리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지 않으셨던가?(마 28:19). 또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지 않으셨던가?(행 1:8).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마음은 무지하고 연약했으며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이해심이 도무지 없었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우리의 제한된 이해와 선입관 혹은 고정 관념을 가지고 상대방을 판단하고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 여부나 그 동기를 질문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고 했다(롬 12:16). 야고보는 말하기를,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했다(약 3:13-18). 그는 참된 지혜가 다투지 않고 화평하는 지혜임을 강조한 것이다.
[4]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오해와 다툼의 문제가 있었을 때, 사도 베드로는 주께서 주신 사도적 권위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 유별난 권위를 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종들의 권위는 단순히 직분의 권위가 아니고 그것과 더불어, 아니 그것보다 먼저, 진리의 바른 지식과 굳건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경건하고 도덕적인 인품과 삶에서 나오는 권위이다. 자신에 대한 교인들의 오해나 비난에 대해, 베드로는 사도적 권위로 대처하는 대신 오히려 자초지종에 대한 차근한 설명으로 겸손히 대처하였다. 그는 후에 그의 서신에서 장로들에게 교훈하기를,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했다(벧전 5:3). 바울도 비슷한 교훈을 하기를,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했고(갈 6:1), 또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라"고 했다(딤후 2:24).
[5-12] 가로되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베드로는 자기가 본 환상에 대해 자세하게 증거했다. 그 환상에서 그는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그에게 나타난 환상은 세 번 반복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계시요 뜻임을 나타내었다. 그가 환상을 본 직후 세 사람이 그가 우거한 집 앞에 왔다. 11절의 '마침'이라는 헬라어 원문은 직역하면 '그리고 보라 바로 그 때에'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신기하게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정확하였다. 하나님의 계시는 현실에서 이루어졌다. 성령께서는 베드로 속에서 그들을 맞이하며 그들과 함께 가라고 명하셨다. 그래서 그는 욥바의 여섯 형제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갔던 것이다. 그 여섯 형제들은 베드로가 하는 이 모든 말에 대한 증인들이다. 이렇게, 그가 이방인의 집에 간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와 지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13-17]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베드로를 맞은 고넬료는 자신이 어떻게 천사의 나타남을 보았으며 그 천사가 자기에게 지시하기를,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여 오면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을 얻을 말씀을 전해주리라고 하였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한 베드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그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려오셨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였다. 그는 그 해명적 보고에서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그런즉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고 하였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라는 구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에게'라고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시끄럽던 교회는 잠잠해졌다. 다툼은 제거되었다. 온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음을 깨달았다. 이방인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복음을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고 구원을 주셨고 성령을 받게 하셨고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셨다는 뜻이다. 베드로에 대한 오해와 비난, 그리고 일시적인 다툼은 사라졌다. 교회는 평온을 되찾았다. 온 교회가 일치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교회에서 모든 문제에 있어서 만장일치가 이상적이지만, 때때로 교회 안에는 소수의 반대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대다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일치된 생각과 이해를 가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같은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교회의 중요한 한 속성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일치단합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에베소서 4:2, 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결론적으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가급적이면 오해와 다툼을 버리고 이해하고 화목하기를 힘쓰자. 어떤 의문점이 있을 때는 우리의 제한된 이해와 선입견을 가지고 상대방에 대해 말하거나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먼저 그에게 겸손히 질문함으로써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판단하자.
둘째로, 우리는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 단순히 권위로 대처하지 말고 오히려 겸손히 처신하자. 베드로나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사도의 권위를 가진 자들이었지만, 아니 우리 주님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가진 자이시지만, 그들은 필요한 경우 다 겸손히 자신을 변호하고 변명하였다. 주의 종들의 권위는 실상 우리가 하나님과 그 진리를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실천하는 데 있다.
셋째로, 우리는 같은 생각과 같은 말을 하는 일치단합한 교회의 모습을 보이자. 교회에는 때때로 어떤 문제에 대해 오해나 갈등이 있을 수 있으나 주 안에서 사랑으로 기도하며 대화함으로써 일치된 생각과 판단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목사와 장로들의 사상과 행동이 성경에 일치하고 교인들의 사상과 행동이 또한 그러함으로써 일치단합된 교회의 모습을 보이자.
19-30절, 안디옥 교회
본문은 후에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하여 세계 선교에 앞장설 안디옥 교회의 설립과 발전에 대하여 증거한다.
[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과 핍박은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다. 하나님의 일은 어려움 속에서 쇠잔해지지 않고 도리어 번창하여졌다. 제자들은 곳곳에 흩어졌고 흩어진 그 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흩어진 자들은 베니게와 구브로와 수리아 안디옥에까지 이르렀고 거기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예루살렘 교회에 닥친 핍박은 오히려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기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롬 8:28).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흩어진 제자들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파 유대인들에게도 전도하였다. '헬라인'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헬라파 유대인들'(헬레니스테스)이라고 되어 있다. '헬라파 유대인'이란 혈통으로는 유대인이지만 이방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헬라인이기도 하다. 구원의 복음이 그들에게도 전파되었다. 복음이 전파되어야 구원 역사가 일어난다. 로마서 10:13-1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의 손이 전도자들과 함께할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구원은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 시편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구원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일이다.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또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 없이 살던 상태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따르는 상태로 돌아와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1:9,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이것이 구원이다.
[22-24]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에서 일어난 구원 역사를 듣고 바나바를 그 곳으로 보냈다. 바나바는 그 곳에서 가까운 구브로 섬 출신이었다(행 4:36). 바나바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이었다. 그는 거기에 파송되기에 적절한 인물이었다. 바나바는 그 곳에 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다. 죄인들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나바는 구원 받은 모든 자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면하였다. 신앙 생활은 신자 편에서의 성실한 노력도 필요하다. 우리는 소극적으로 있을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정하고 마음을 굳게 하여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 '붙어 있다'는 표현은 구약의 율법에서 자주 나오는 '부종(附從)한다'는 말로서 하나님을 꼭 붙잡고 가까이 따르는 태도를 나타낸다. 우리는 항상 말씀의 묵상과 기도로써 하나님과 밀접히 교통하며 그를 따라야 한다. 바나바의 사역은 이미 믿은 자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나아오게 하였다.
[25, 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의 사역은 교인들을 권면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가서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고 그 두 사람은 1년간 교회에서 큰 무리를 가르쳤다. 사람은 가르침을 통해 변화된다. 그의 지식이 바로 되고 그의 인격도 비록 조금씩이겠지만 변화된다. 잘못된 것을 고치고 나쁜 것을 버리며 좋은 것을 배우고 격려함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신자들이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진리의 지식이 더하여 가고 도덕적 품성이 변화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영적 성장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에베소서 4:11, 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27-30]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사도 시대에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선지자들이 있었다. 한 선지자가 참 선지자인지 여부는 그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여부에 달렸다. 아가보라는 선지자는 그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면 참 선지자이었다. 그의 예언대로, 글라우디오 때에,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었다. 글라우디오는 주후 41-54년에 통치했던 로마 황제이었다.
안디옥 교인들은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부조'라는 헬라어 원어(디아코니아)는 '봉사'라는 말로서 '도움, 원조'라는 뜻도 가진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들은 선행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것은 참된 신앙의 증거가 될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구원받은 후 선하게 사는 것이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구하며 열심히 전도하자. 전도는 우리편에서의 의무이며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에 달려 있다. 주께서 역사하시면 영혼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마음을 굳게 정하여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늘 성경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종(附從)해야 한다. 그것이 경건한 삶이다. 셋째로, 우리는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배워야 한다.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자들은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는 자들은 열심히 배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자를 계속 주시기를 우리는 원한다. 넷째로, 우리는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은 구원의 증거요 열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마다 힘써 선을 행하자.
12장: 두 번째 순교자 야고보
1-17절, 베드로의 기적적 구출
[1, 2]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본절에 나오는 헤롯왕은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로서 주후 37년부터 44년까지 팔레스틴 전역을 통치했던 왕이었다. 그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서 가장 예수님 측근에 있었던 세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 중 한 사람이었다. 야고보는 스데반에 이어 두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되어 일찍 순교의 잔을 마셨다.
[3, 4]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쌔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유대인들은 야고보의 죽음을 기뻐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하나님의 사랑하는 종들을 핍박하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15, 16에서 증거하기를,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하면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 앞장설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사실이며 그 자신들에게는 저주이다.
헤롯왕은 유대인들이 야고보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 옥에 가두었다. 악한 위정자는 의와 선을 생각하지 않고 백성들의 눈치만 보거나 자신의 정치적 생명만 생각한다. 그때는 무교절 때이었다. 베드로는 군사 넷씩인 네 패에 맡겨 지킴을 받았다. 주를 따르는 길은, 특히 전도자의 길은, 고난과 순교의 길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다(마 16:24). 경건하게 주를 따르는 길은 고난을 각오해야 하는 길이다.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교회는 예배당 건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다. "오 하나님, 야고보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먼저 순교를 당했습니다. 베드로도 그 뒤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 주의 일을 위해 충성된 종들이 살아서 활동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주님, 하나님의 뜻 가운데 베드로를 구출해 주시고 주의 일들을 좀더 하게 허락하옵소서."
개인이나 교회나, 어려운 문제의 해결 방법은 기도밖에 없다. 마태복음 7:7, 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특히 환난 중에 기도하라고 성경은 가르쳤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문제의 해결의 열쇠는 오직 하나님께 있다.
[6, 7]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하나님의 기적은 헤롯이 베드로를 잡아 죽이려 한 그 전날 밤에 일어났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한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 정하신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셨다. 그것은 역사상 빈번히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일 경우에만 아주 드물게 일어난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기적을 통해 일하시지 않지만, 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방식으로 일하실 수 있음을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의 천사는 그의 곁에 섰고 옥 중에 광채가 비치었고 그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웠고 그의 손의 쇠사슬은 벗어졌다.
[8-10]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쌔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천사는 베드로에게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고 말했고 또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그는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이 아니고 자신이 환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렀다. 문이 저절로 열렸다. 베드로가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날 때 천사가 즉시 그를 떠났다. 하나님께서는 그 밤에 베드로를 지켰던 군사들에게 깊은 잠을 주셨음에 틀림 없다. 군사 넷씩인 네 패의 지킴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그의 일을 가로막을 자가 누구이겠으며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줄 알겠노라 하여.
그때야 베드로는 정신이 났다. 그것은 환상이 아니고 현실이었다. 그는 주께서 천사를 보내어 그를 기적적으로 구출해 내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일생의 길이를 다 작정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대로 산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작정대로 순교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 좀더 살아서 주의 일을 하도록 작정되었다.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은 예루살렘 교회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거기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는 효력이 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가져왔다.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낙심치 말아야 한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시면서 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하셨다. 불의한 재판관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보잘 것 없는 한 과부의 청원이라 할지라도 그 과부가 끈질기게 요청할 때 들어주었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관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낙심치 않고 기도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기도가 반드시 응답되지 않겠는가? 단지 우리는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자기 중심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13-16]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대문을 두드리는 베드로의 음성을 듣고 알려준 로데의 말을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고 처음에는 그 소녀를 미쳤다고 말했고 그 소녀가 진짜라고 힘써 주장하자 그러면 그의 천사라고 말했다. 그들은 다 베드로의 구출을 위해 기도했겠지만, 그들의 믿음은 약하였다. 그들은 베드로가 구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믿음은 이렇게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잘 응답해주신다. 기도는 효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
[17]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베드로는 놀란 그들을 손짓으로 조용하라고 진정시키고 주께서 어떻게 자기를 옥에서 기적적으로 구출해주셨는지를 말하고 또 야고보와 다른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고 하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 여기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고 사도처럼 인정을 받은 인물이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를 사도적 인물로 여겼고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갈 1:19; 2:9).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주를 따르는 길이 고난과 순교의 길임을 알자. 야고보는 순교를 당했고 베드로는 옥에 갇혔다. 주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참된 신앙의 길은 고난을 각오하는 길이다.
둘째로,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것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다 그러하다. 기도는 효력이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함으로써 베드로의 기적적 구출의 응답을 받았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의 작정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는 우리의 일생의 장단을 모른다. 야고보는 일찍 순교로 생을 끝맺었고 베드로는 죽음의 위기에서 구출되었다. 그도 후에는 순교를 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끝을 모른다. 우리는 오직 오늘이라는 날 동안 바르게, 성실하게, 믿음으로, 의롭게, 착하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살자.
18-25절, 헤롯의 죽음
본문은 헤롯의 죽음과 하나님의 말씀의 흥왕함 등을 증거한다.
[18, 19]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날이 새자 군사들 가운데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베드로의 기적적 구출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헤롯은 파숫군들을 심문하였고 그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헤롯은 잔인하였다. 그는 죄 없는 야고보를 칼로 죽였고 베드로도 잡아 옥에 가두었고 이제 파숫군들도 죽였다. 파숫군들은 그 밤에 깨어 있지 못했고 자신들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의 가치나 그 죽음의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죽도록 버려지고 어떤 이는 기적으로라도 구출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공의롭고 선하신 판단에 따라 이루어진다.
[20-23]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 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악한 헤롯의 악행을 갚으셨다. 그의 죽음은 그가 대단히 싫어했던 두로와 시돈 사람들 앞에서 그가 연설을 하고 난 후에 즉시 일어났다. 왕에게 아첨하기 위해 계획된 그 집회에서 헤롯이 연설했을 때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큰 소리로 칭찬하기를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 때 하나님의 천사가 즉시 그를 치니 그는 충이 먹어서 죽었다. '충'이라는 말은 '벌레'라는 뜻으로 무서운 병균을 가리킨다. 사람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병균에 의해 각종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또 죽기도 한다. 하나님의 천사가 헤롯을 친 까닭은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헤롯은 교만하였고 자신을 높였고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길 줄 몰랐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2:8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빼앗아 자신에게 돌리거나 우상에게 돌리는 자는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의 세력과 영향력이 크고 왕성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구원 역사와 결실이 증가하고 확장됨을 가리킨다. 사탄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주의 종들을 죽이려 하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교회를 지키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그의 일이 쇠잔치 않고 왕성하게 역사하신다. 이것이 이제까지의 교회의 역사이었고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런 일이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고 그를 믿고 섬기며 그의 일에 헌신하고 충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예루살렘에서'라는 헬라어 원문은 사본상 두 가지 본문이 있다. 어떤 사본들은 우리 말 번역처럼 '예루살렘으로부터'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전통적 다수사본들은 '예루살렘으로'라고 되어 있다. 아마 후자가 원본의 본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다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부조의 일을 마쳤고 또한 마가라 하는 요한을 동반자로 취하였더라." 바나바와 사울은 어려움과 위협이 있는 상황 속에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가 안디옥 교회가 보낸 부조의 일을 완수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큰 흉년으로 인한 가난과 두려운 핍박 속에서 그 부조로 인해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초대 교회들은 이처럼 성도들 간에 사랑의 교제가 있었다.
본문은 몇 가지의 진리를 증거한다. 첫째로, 악인은 그 행한 악에 대해 보응을 받는다. 사람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둔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7, 8에서 말하기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였다. 둘째로, 핍박의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고 번창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악한 자들의 위협과 핍박으로 그 능력이 위축되거나 쇠약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서나 언제나 힘 있게 전파되고 사람들이 그 앞에 복종하여 회개하고 순종하도록 힘써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핍박의 환경 속에서도 선한 일을 실천하고 하나님이 주신 직무를 완수해야 한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선을 행하며 각자 맡은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길이며 죽도록 충성하는 길이다.
13장: 최초의 선교사
1-3절, 성령께서 선교사를 파송케 하심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 교회에는 다섯 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르치는 일을 행하였다. 교회에는 가르치는 자들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가르치는 자들을 교회에 주신다. 성도들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들을 배운다. 에베소서 4:11- 13,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안디옥 교회의 교사들은 주를 섬기며 금식하였다. 금식은 간절한 기도의 형태이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금식했는지에 대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들은 아마 하나님의 일을 위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일을 위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 간절히 기도했던 것 같다. 그 때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바나바와 사울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할 것을 지시하셨다. 그 일은 복음을 온 땅에 두루 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은 간절한 기도를 통해 깨달아지고 준비되고 시작된다. 그 하나님의 지시는 한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주어졌을 것이다. 옛시대에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행위이었다.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의 교사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후 그 일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확신케 하며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킨다. 그들은 기도 중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였고 지교회의 유익만 생각하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주의 일을 위해 헌신해야 했다. 그들은 성령의 지시대로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보내기 위해 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부탁하였다. 안수는 직무를 위탁하는 뜻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하여 안디옥 교회는 최초로 세계 선교의 대업(大業)을 시작한 교회가 되었다. 그 교회는 최초로 아시아와 유럽에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가 된 것이다.
4-12절, 구브로에서의 전도 활동
[4, 5]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소위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의 시작이었다. 안디옥 교회의 교사들이, 성도들의 기도와 후원 아래, 그들을 파송하였지만, 본문은 그들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께서 전도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훈련시키시고 그들을 보내시고 사용하신다. 마태복음 9:37, 38,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바나바와 사울은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먼저 구브로 섬으로 갔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출생지이기도 하였다(행 4:36). 구브로의 첫 성은 살라미이었다. 바나바와 사울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전도는 나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자신이 전하는 말을 부끄러워 말고 또 자신의 부족만 생각하지 말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전해야 할 것이다.
바나바와 사울은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다. 이 요한은 마가라 하는 요한으로서(행 12:25) 바나바의 사촌이다(골 4:10). 전도 사역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동역자와 수종자가 필요하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예수께서도 친히 제자들을 불러 전도의 일에 참여케 하셨다. 오늘날에도 복음 사역을 위해 신실한 동역자와 수종자들이 많이 필요하다.
[6, 7]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그들은 구브로 섬을 가로질러 서쪽의 바보에 이르렀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들은 어려운 일에 부딛혔다. 그것은 바예수라는 이름의 유대인 거짓 선지자 마술사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형식적 명칭을 가진 유대인이었다. 잘못된 신자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불신자가 더 나을 것이다. 잘못된 신자는 불신자보다 하나님의 일을 더 대적한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는 거짓 선지자이었다. 또 그는 마술사이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마귀의 도구이었다. 선교 활동에는 난관들이 있다. 전도자들은 여러 가지 난관들을 통과해야 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흥왕하게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이다.
서기오 바울은 구브로 섬을 다스리는 로마의 총독이었다. 그는 지혜 있는 자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과 소원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준비시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신다. 서기오 바울에게는 아마도 심령으로 기다리던 좋은 기회이었을 것이다.
[8] 이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그 마술사는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바른 종들을 대적하는 것은 큰 죄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 중에 가장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며(마 10:40-42), 가장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 곧 그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을 참 믿음, 바른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것도 큰 죄악이다.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이렇게 방해하는 일이 있다. 선교 활동에는 때때로 난관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니 염려할 것은 없다.
[9-11]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사울'은 '구하여 얻은 자'(asked for)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small)라는 뜻이다. 바울은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 행실에 대한 반성과 현재의 그의 겸손한 마음을 잘 나타낸다. 바울은 자신을 작은 자로 여겼다. 에베소서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그는 비록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꼈지만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은 그에게 지혜와 능력과 큰 담력을 주었다.
성령 충만했던 바울은 그 마술사의 악을 직시하였고 그것을 그대로 지적하였다. 바울은 그의 속에 궤계와 악행이 가득하고 그가 마귀의 자식이며 모든 의의 원수이고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바울은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을 선포하였다. 사도 바울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바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 마술사를 덮었고 그는 앞을 보지 못하고 인도할 사람을 찾았다.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총독은 그 일을 보고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다. 전도에는 난관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큰 능력으로 일하셨다. 마술사를 벌하신 그 기적의 일도 그러하지만, 그보다 로마 제국의 한 총독을 믿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놀라운 능력의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를 배운다. 첫째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전도자를 부르시며 훈련시키시고 전도자를 세우시고 파송하신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뜻에 힘써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금식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받들자. 둘째로, 선교 활동에는 때때로 어려움들이 있을 것을 각오하자.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역사하심과 같이, 사탄과 악령들도 하나님의 일을 미워하고 방해하며 혼란스럽게 한다. 셋째로,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신 전능자이시다. 사탄의 활동이 강하지만 하나님은 그보다 더 강하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믿자.
13-23절,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전도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울 일행은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의 버가에 이르렀다. 바울과 동행하는 자들은 바나바를 비롯하여 마가 요한 등이었다. 그런데 요한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버가에서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분명히 전도자로서의 연약함과 부족함이었다. 전도자는 자기를 부정하고 가족관계를 초월하고 고난을 각오하며 주를 따라야 한다(눅 9:57-62). 하나님이 명하신 전도의 일은 자신의 생명보다, 가족들보다 더 중요하다. 마가 요한에게는 그런 사명감과 인내심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다.
[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비시디아 안디옥은 이름은 같으나 수리아 안디옥과 구별되는 도시이었다. 다른 곳들과 같이, 그 곳도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다. 그 회당은 오늘날 예배당과 같이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이었다. 바울 일행은 그 회당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것은 전도의 기회를 가지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온 세계에 흩어져서 살면서 곳곳에 회당들을 세우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고 그것들은 복음을 전하는 발판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회당들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구원을 준비시키셨다.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당시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의 순서에는 구약성경을 읽는 시간이 있었다. 매주 얼마큼씩 읽어 일년에 일회씩 구약 전체를 읽게 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성경을 읽는 일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 날도 회당 예배는 성경을 읽는 순서를 가졌고, 그 후 회당장들은 바울 일행에게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고 요청하였다. 회당장은 회당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이다. 바울에게는 기다리던 좋은 기회가 왔다. 그는 그 기회를 잘 사용하였다.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바울은 사람들의 흔한 습관과 같이 손짓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손짓하는 것은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고 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동작이었을 것이다. 회당에 모인 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이방인들 중에서 유대교로 개종했거나 하나님에 대해 알기 원하는 자들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복음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바울은 이스라엘의 중요한 역사를 언급한다. 그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배경이며 기초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택하셨다. 종으로 팔린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기근을 피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들은 아들 요셉과 애굽왕 바로의 호의로 애굽의 고센 땅에서 거주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고 그 고통은 점점 더 심각해져갔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예언이 성취된 것이기도 하였다. 창세기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들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 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특별히 대우하셨고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셨다.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큰 권능은 애굽에 내려진 10가지 재앙들과 홍해가 육지처럼 갈라진 기적에서 잘 나타났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고 그 능력으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국가의 설립 초기부터 하나님의 큰 권능을 경험한 민족이었다.
[18] 광야에서 약 사십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애굽에서 나온 후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간의 과정은 반복하여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을 불신앙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불순종한 과정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전적 부패성을 증거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오래 참으셨고, 비록 그들을 징벌하셨지만 40년 후에는 그 후손들을 전 세대와 거의 같은 수로 남기셨다. 광야 40년간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의 시간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많은 부족과 연약에 대해 오래 참으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약 사백오십년간).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40년 후에 약속하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시고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셨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신 까닭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그들의 심한 우상숭배와 음란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심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가나안 족속들을 완전히 멸망시키려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대해서는 공의로 심판하신다. 본절 끝의 '약 450년간'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20절의 '그 후에'라는 말 다음에 나온다.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전통사본에는 "그것들 후에 약 450년간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라고 되어 있다. 450년은 사사 시대에 이방 나라들로 인해 당한 고통의 기간과 사사들을 통한 구원과 평안의 기간을 엘리의 40년 기간까지 합산한 기간인 것 같다. 그러나 사사 시대의 실제 기간은 약 340년 정도밖에 안된다. 사사 시대는 반복된 실패와 불순종의 역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마다 이방 나라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징벌하셨다. 그의 징벌은 짧을 때는 7, 8년, 길 때는 20년 혹은 40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고통 중에 그들이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아보셨고 사사를 일으키셔서 구원하셨고, 그들이 누린 평안의 기간은 고난보다 몇 갑절이나 길었다. 하나님의 본심은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평안을 주시는 것이다. 고통은 많은 경우 단지 우리의 죄 때문에 온다.
[21, 22]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첫 왕으로 주셨다가 그를 폐하셨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까닭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잘못은 세 가지이었다. 첫째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선지자 대신 자신이 제사를 드리려 한 것이고, 둘째는 아말렉을 다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 순종치 않은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의 금하신 법을 어기고 신접한 자에게 물은 것이었다. 죄는 불행을 가져온다. 범죄하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그러나 다윗의 마음 속에는 참된 믿음과 순종심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그의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이 하나님과 합한 자를 찾으시고 그를 사용하셔서 그의 뜻을 다 이루신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사모하고 우리의 마음을 점검하고 지켜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두려움과 믿음,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중심이 필요하다. 참된 종교는 마음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것은 바른 믿음과 순종심이다.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중에 이스라엘의 구주, 곧 인류의 구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것은 사무엘하 7:12-16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말씀 속에 담긴 약속이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 약속에 근거하여 예언하기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렘 23:5)라고 했고 또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렘 33:15)고 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족보]라"는 말로 시작된다(마 1:1).
결론적으로, 13절부터 23절까지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한 전도의 내용 중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죄 지으면 망한다. 하나님께서는 심히 우상숭배적이고 음란했던 가나안 일곱 족속을 다 멸하게 하셨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도 범죄할 때에 폐하셨다. 우리도 죄 지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두려운 공의를 깨닫고 모든 죄악된 일을 버리자.
둘째로, 우리는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것은 바로 그의 믿음과 순종심 때문이다. 비록 다윗에게도 연약성과 실수가 있었지만,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지한 자요 그의 뜻에 절대 순종하려 한 자이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도 바로 이런 참된 믿음과 순종심이다.
셋째로, 우리는 약속대로 오신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확신하며 오직 그를 의지하자. 천하 만민 중에 우리를 죄와 지옥 멸망에서 구원하실 자는 예수밖에 없다.
24-31절, 죽으셨으나 다시 사심
[24]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요한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준비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외치고 회개한 자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었다. 회개는 참된 믿음을 위한 준비 단계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치 않고 병자에게 필요하듯이,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구주가 필요치 않으나 죄인들에게는 그가 필요하다. 사람이 구주 예수를 믿으려 하면 자기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먼저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25]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세례 요한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가 얼마 동안이나 사역했는지는 잘 모르나 그 사명의 길을 마치려 할 즈음에 그는 자기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증거하였다. 그것은 자기 위치를 지킬 줄 아는 사역자의 모범적 태도를 나타낸다. 그것이 바로 겸손이다. 겸손한 자는 자기의 위치를 끝까지 지킬 것이다. 요한은 또한 자신이 자기 뒤에 나타나실 그리스도의 발의 신을 풀 자격도 없다고 증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었다.
[26]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본절은 23절에 이어진다. 23절은 전통사본에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는 말 대신에 "구원을 주셨도다"라고 되어 있다. 본절은 전통사본에 ". . . 이 구원의 말씀을 너희에게 보내셨도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다음 절에 헬라어 원문에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뜻에 맞다.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헬라어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이 예수를 정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말씀을 너희에게 먼저 보내셨다는 뜻이든지, 혹은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이 예수를 정죄했고 십자가에 죽게 한 후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으므로 이제 이 구원의 말씀을 너희에게 보셨다는 뜻일 것이다.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예수의 죽음은 인간 죄악의 극치이었다. 악인을 정죄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의인을 정죄하는 것은 큰 악이다. 그것은 악한 왕 므낫세의 행위와 같이 의인의 피를 흘리는 큰 죄악이다(왕하 21:16).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것도 자기 백성인 자들에게 버림을 당하셨고 정죄를 당하셨고 죽임을 당하셨다. 그는 인간으로서 감당키 어려운 그 고통스런 일을 경험하셨다.
[29]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성경의 예언을 이룬 것이었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죽음을 예언하였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증거하였다. 이사야 53:3-6,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메시아의 고난은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었다.
[30]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모든 사람이 죽고 죽은 후에는 다시 살지 못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리셨다. 그것은 그가 죽을 죄가 없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는 의인으로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주장한 대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증거하셨다. 또한 그는 장차 우리가 경험할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다. 우리가 그의 부활을 믿을 때 장차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은 열두 제자들과 여인들이었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그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다. 사도행전 1:3은 부활하신 주께서 40일 동안 확실한 많은 증거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증거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다. 그들은 보지도 않은 것을 보았다고 증거하는 거짓 증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며 자신의 증거한 내용을 순교의 피로써 확증했던 진실한 증인들이었다. 그 증거들은 신약성경에 기록되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사실들은 그 진실한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지금까지 전달되어 내려왔다. 2천년의 간격을 이어주는 줄은 바로 그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이었고 거기에 더하여 성령께서도 항상 함께 힘 있게 감동하셨다.
결론적으로, 24절부터 31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정리해본다.
첫째로, 사람은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예비 단계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자에게만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의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러므로 자신이 큰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만이 예수께로 나아와 그를 믿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둘째로, 사람들은 심히 죄악되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인간의 죄악됨이 얼마나 심각한지!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심히 부패된 존재이다.
셋째로,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 그를 증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증거되신 구주이시다. 누구든지 성경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하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이 그를 믿을 만한 확실한 증거이다.
32-43절,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
[32, 33]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은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바이었다. 33절에 '우리 자녀들에게'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그들의 자녀들인 우리에게'라고 되어 있고 그것이 문맥에 맞다. 바울은 시편 2:7을 메시아 약속의 구절로 인용한다. 우리 말 성경에 보면,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우는 구주, 즉 신적인 구주를 보내실 것을 말한다.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장차 하나님의 아들을 구주로 보내실 뿐만 아니라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실 것을 암시하셨다. 바울은 이 점에 대하여 구약의 두 구절을 인용한다. 하나는 이사야 55:3이다. 우리 말 성경에 보면, ". . .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고 되어 있다. 바울은 이 구절의 끝부분을 헬라어 70인역에서 그대로 인용하였다. 본문에는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고 되어 있으나,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다윗의 확실한 자비를 너희에게 주리라"이다.
[35-37]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바울이 두 번째 인용한 구절은 시편 16:10이다. 우리 말 성경에는,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 구절의 후반부는 분명히 메시아의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 다윗은 이미 죽어 무덤에 묻혔고 그 몸은 다 썩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 몸은 썩음을 당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메시아 약속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주신 확실한 자비를 따라 독생자를 사람으로 보내셨고 그가 성경대로 죽으셨고 성경대로 부활하셨던 것이다.
[38, 39]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복음의 요지는 이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이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핵심은 바로 이 죄 문제의 해결에 있었다. 죄가 죽음과 불행의 원인이었므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이 영생과 영원한 행복의 길이다.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을 주셨다. 그것이 복음의 요지이다. 이 복음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증거되었다. 그 대표적 구절은 다음과 같다.
로마서 3:19-24,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40, 41]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그러나 바울은 그들 속에 있을지도 모를 불신앙에 대해서도 경고하였다. 복음은 값싼 구원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소식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도 요한복음 3장에서 이 은혜의 구원의 소식이 어떤 이들에게는 멸망이 됨을 증거하셨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17-21절).
[42, 43] 저희가 나갈쌔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2절 전반부는 전통사본에는 "저희가 유대인의 회당에서 나올 때, 이방인들이 청하되 . . ."라고 되어 있다. 바울의 전도 설교는 상당한 열매를 맺었다. 폐회한 후에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 즉 이방인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말하면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하였다. '두 사도'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는 단순히 '그들'이라고 되어 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는 권면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권면이다. 그것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의(義) 안에서, 즉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라는 권면이다. 예수 그리스도 없으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으며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메시아에 대해 예언하셨고 그 예언을 이루셨다. 하나님은 성경을 이루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율법과 증거와 약속과 교훈의 책이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이다. 신앙생활은 성경책을 읽고 그 책을 배우고 그 책의 교훈대로 믿고 행하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복음의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만이 복음이다. 우리는 여기에 무엇을 가감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죄사함과 의는 완전한 죄사함이요 완전한 의이다. 거기에 무엇을 더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 안에, 그 의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믿어야 한다. 순종은 참된 믿음 안에서 자연히 나오는 행위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자는 그의 뜻에 겸손히 순종한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 2:17, 26).
44-52절,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두 번째 안식일에 설교했을 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이방인들이 회당에 모이는 안식일을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두 번째 안식일에는 거의 온 성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도시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과 갈급함을 갖도록 준비시키셨다. 종교적 부흥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때에 일어날 것이다. 미국교회의 역사를 보면, 그것은 대체로 전쟁이나 경제 공황 같은 사회적 재난이 있은 후에 찾아왔다.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의 설교에 대해 유대인들은 나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많은 무리가 모인 것을 보고 시기가 가득하였다. 시기심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했던 자들의 죄악이었다. 사람이 시기심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들의 명예와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자에게는 시기심이 있을 곳이 없다. 그들은 또한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였다. 그것은 큰 죄이다. 바울이 전한 말은 바울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박하고 비방한 것이었다.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유대인들의 나쁜 반응에 대하여, 전도자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한 태도를 가졌다.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고 비방한 것은 스스로 영생에 합당치 않음을 증거한 것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로 향한다고 말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믿게 하지는 않는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들 때문에 너무 상심할 것은 없다. 믿지 않는 자들과 너무 변론할 시간도 없다. 복음을 충분히 증거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이제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자들은 버려두고 새로운 전도 대상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자들은 믿고 순종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께서 명하신 바이기도 하였다. 이사야는 메시아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였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고 부탁하셨다(행 1:8). 복음 전도자들은 이방 세계에 비치는 빛이다. 그 빛을 통해 온 세상 끝의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 하나님의 뜻이 거의 성취된 것을 본다.
[48, 49]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유대인들과는 달리, 이방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기뻐하여 주의 말씀을 찬송하며 믿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통사본에는 '주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앞절의 주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 같다.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말씀은, 영생의 구원은 하나님의 작정에 근거한다는 것과, 그 작정은 확정된 것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구원 작정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는 것을 잘 증거한다. 믿음은 예정의 결과요 증거이다. 예정된 자는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여기에 전도의 필요성이 있다. 로마서 10: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이미 믿은 그들에게 뿐만 아니라, 또한 이방인들을 위한 그 복음의 소식이 그 지방에 널리 전파되었다. 교회의 사명은 오직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다.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유대인들은 시기하고 변박하고 비방하는 데 머물지 않고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고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고 그 지경에서 쫓아내었다. 악한 자들은 혼자서는 용감하게 행치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은 당을 지어서 악을 행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스스로 차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해롭게 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51-52]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복음 전파의 일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전도자들은 낙심하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저들을 향하여 그들의 발에 티끌을 떨어버렸다. 그것은 교제의 선을 분명히 하는 그들의 단호함을 나타낸다. 그들은 그곳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 곳에 오래 머물기보다 여러 다른 곳들로 가서 일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계속 충만하였다. '충만하다'는 헬라어는 계속하여 충만함을 나타낸다. 기쁨의 충만과 성령의 충만은 신자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되지 말자. 그들은 시기가 충만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변박하고 비방하였으며 사람들을 선동하여 전도자들을 핍박하고 배척하였다.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처럼 되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영생을 위해 작정된 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자. 그러면 그들 속에 기쁨과 성령이 계속 충만해듯이, 우리 속에도 기쁨과 성령이 계속 충만할 것이다.
셋째로, 복음의 일꾼된 자들은 복음이 전파될 때 항상 두 부류가 나뉨을 예상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치 말자. 우리는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을 향해 발에 티끌을 떨어버림으로써 교제의 선을 분명히 하자.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변론하면서 시간 낭비를 할 것은 없다. 우리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을 버려두고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14장: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전도함
1-7절, 이고니온에서의 전도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이고니온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직선거리로 약 120킬로미터 동쪽에 위치한 도시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 곳의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전도하였다. '두 사도'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는 단순히 '그들'이라고 되어 있다. 거기에서 그들의 전도는 결실을 맺었다.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복음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전도자들을 사용하셨다.
[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그러나 거기에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순종치 아니하는'이라는 헬라어 원어(아페이둔테스)는 '믿지 않는'이라는 뜻이다. 복음이 전파될 때 믿는 자들도 있지만, 믿지 않는 자들도 있다. 어디에서든지, 언제든지 복음에는 두 가지 반응이 있다. 항상 두 부류가 나타난다. 더욱이, 그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만 믿지 않은 것이 아니고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그 전도자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였다. 악인들은 자신들만 악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이들도 악하게 만든다. 그것이 악의 성질인 것 같다.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두 사도'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는 단지 '그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들은 적대 세력을 직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있으며 담대히 전도하였다. 전도자들에게는 핍박 중에도 인내와 용기가 필요하다.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다. 주께서는 전도자들을 세상 끝날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동행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또한 친히 자신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다. 복음은 죄 용서의 소식이므로 은혜의 말씀이다. 사람에게 선행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사람은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주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심으로써 복음을 증거하셨다. 사도 시대에는 기적들이 널리 나타났다. 사도들 뿐만 아니라 일반 성도들도 기적을 행하였다. 스데반은 기적을 행한 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기적들은 특히 사도들을 통해 많이 일어났고(행 2:43; 5:12), 그래서 기적을 행하는 것은 사도의 표라고 불리웠다(고후 12:12). 오늘날도 살아계신 주께서는 친히 복음을 증거하시지만, 외적인 기적들을 통하지 않고 말씀의 내면적 감동을 통해 하신다.
[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두 사도'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서 '그 사도들'이라고 되어 있다. 본절과 본장 14절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그 사도들'이라고 불리웠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열두 사도들과 바울 이외의 사람에게 '사도'라는 명칭이 사용된 특이한 예이다.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들은 이고니온 성의 사람들은 둘로 나뉘었다. 즉 그들은 유대인을 좇는 자들과 바울과 바나바를 좇는 자들로 나뉘인 것이었다. 구원의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항상 그런 현상이 생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순종하는 자와 순종치 않는 자, 택자와 불택자 혹은 비택자가 나뉘는 것이다.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이고니온 성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믿지 않는 자들은 전도자들을 핍박하였다. 어떤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충동을 받았고 그 도시의 관원들도 합세하였다. 본절의 '두 사도'도 원문에는 단순히 '그들'이라고 되어 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능욕하고 학대하였으며 돌을 들어 치려고 달려들었다.
[6-7]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돌로 치려함을 알고 그 곳을 피하였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전도자로 파송하실 때 그들이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하셨었다(마 10:23). 그들은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피하여 거기에서도 복음을 전했다. 핍박은 있었으나, 도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있었으나, 그들은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거니 쉬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사실을 교훈한다. 첫째로, 전도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로마서 10:13-1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들을 사용하신다. 그는 그들과 함께 하신다. 그는 그들을 통해 친히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신다. 그는 그들을 통해 택하신 자들을 다 구원하신다.
둘째로, 전도하면, 복음을 믿지 않고 오히려 전도자들을 대적하는 자들도 일어난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싫어한다. 특히 그는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의 일을 싫어한다. 그는 전도의 일을 방해하며 믿음 없는 자들을 충동하고 감동하여 전도자들을 대적하게 한다. 또 그는 전도의 내용을 변질시키려 한다. 무엇보다 사탄의 가장 큰 전략은 전도자들을 낙심시켜 전도의 바른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셋째로, 그러나 전도자는 고난 중에서도 낙심치 말고 복음 전파의 사명에 충성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교회의 사명은 전도이다. 국내이든지 국외이든지 복음이 없는 곳에는 어디든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물론 그 일을 위해서는 헌신된 전도자들이 필요하다. 또 그들을 지원하는 물질이 필요하다. 또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기도 후원자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일들을 위해 더욱 힘쓰자.
8-18절, 루스드라에서의 전도
[8-10]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 갔을 때 그 성에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은 바울의 전도하는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바울은 그를 주목하였고 그 사람 속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긴다. 로마서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그는 비록 몸은 불구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 그는 그 믿음으로 그의 병든 몸까지 구원을 얻었다. 바울은 그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그 사람은 뛰어 일어나 걸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다.
[11-13]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하나님의 기적은 단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고, 그들에게 전도자가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자임을 증거하는 의미가 있었다. 과연 사람들은 바울의 행한 것을 보고 그들의 말로 "신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고 소리질렀다.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이었다. 사도들의 기적은 그들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의 종들이며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증거한다. 그들은 바나바를 쓰스(Zeus)라고 하고 바울을 허메(Hermes)라고 했다. 성밖에 있는 쓰스 신당의 제사장은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성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를 하고자 하였다. 기적만으로는 부족하였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으나 우상숭배를 버리지는 못했다. 바른 지식, 바른 교리가 필요했다. 복음은 바른 지식이며 바른 교리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단지 그 복음을 확증하는 데 필요할 뿐이다. 복음이 없는 기적은 무의미하다.
[14-15]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헬라어 원문은 14절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사도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무리가 성문 앞에서 제사를 드리려 한다는 말을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렀다. 그들은 그 무리에게 세 가지를 말했다. 첫째로, 그들은 자신들이 그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지 않다. 인간은 지식과 능력이 유한하고 심신이 연약하고 또 심령이 부패하여 죄악되다. 둘째로, 그들은 그들에게 이런 헛된 일들을 버리라고 말했다. '헛된 일들'(마타이아)이란 '우상들, 우상숭배'를 가리킨다. 셋째로, 그들은 그들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살아계신 참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이것이 복음의 한 중요한 내용이다. 복음은 사람이 헛된 우상들을 버리고 참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초청이다.
[16-18]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우상숭배가 어느 시대에나 큰 죄악이지만, 하나님께서 지나간 세대에는 이방인들이 헛된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내버려두셨다. 물론 그들의 우상숭배는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라는 하나님의 초청이 있다. 이전에도 하나님이 자신을 증거하지 않으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들을 행하셔서 하늘의 비를 주어 곡식과 열매를 맺게 하시고 음식과 기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셨다. 이런 일들이 다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심을 증거하였다. 그래서 이방 세계에서도 사람들은, 비록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는 못했고 또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불완전한 방식으로이었지만, 하나님을 느꼈고 찾았고 사모하였으며 재난을 당했을 때에는 하늘을 향해 양심에 거리끼는 죄를 회개하며 하늘의 뜻(天命)을 거스리지 않고 그 뜻에 순응하며 살려 하였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준다. 첫째로, 기적만으로는 부족하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만으로는 우상숭배를 버리게 할 수 없었다. 바른 지식이 필요하였다. 복음이 필요하였다. 기독교는 기적주의가 아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구원 진리의 종교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속에서 그리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시고 구원을 얻게 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고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
둘째로, 사람은 헛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사람은 이방 신들은 물론이고 돈과 육신적 쾌락과 세상 영광에 대한 사랑을 다 버리고 창조주이시며 살아계신 참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만을 사모하고 성경 읽기와 듣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그 모든 말씀을 믿고 행하는 자가 되자.
셋째로, 우리는 자연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많이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땅에 따뜻한 햇볕과 비를 주심을 감사해야 하고 가을에 곡식들과 나무들의 풍성한 결실과 추수가 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이 우리의 육신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느끼며 항상 감사해야 한다.
19-28절, 일차 전도 목표의 완성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招引)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지 않는 자들, 진짜 신자가 아닌 자들이었다. 구약 교회 안에는 그런 자들이 많이 있었다. 말세의 혼탁한 교회들 안에도 그런 자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분별하고 그런 자들과 상종치 말아야 한다. 그들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자들이었다. 안디옥에서 온 자들은 약 12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온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돌로 쳤다. 그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끌어 내쳤다. 이처럼 바울은 죽었다고 여겨질 정도로 돌에 맞았다. 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쉽고 편안한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님 가신 고난의 길을 따르는 길이었다.
[20-21]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제자들은 수가 적고 또 힘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바울을 보호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울을 둘러 섰을 때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났고 다시 힘을 내어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갔다. 더베는 루스드라에서 동쪽으로 약 9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바울은 그 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전도하는 길에 고난은 있었으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도 있었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였으나 하나님은 모든 환경과 처지를 사용하여 그의 뜻을 이루어가셨다.
[21-22] . . .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오며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일 뿐만 아니라, 이미 믿은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도 필요했다. 바울은 이미 믿은 자들에게 '이 믿음에 거하라'고 권했다. 이미 믿은 자들은 그들이 믿은 그 믿음을 굳게 붙들고 그 믿음 안에 거하며 그 믿음 안에서 행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신자가 믿음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또 바울은 그들에게 우리가 많은 환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지는 하나님의 나라 곧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천국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확실한 소망이다. 그러나 그 나라에 들어가는 과정에는 많은 환난이 있을 것이다. 성도의 세상 생활의 한 특징은 고난이다. 그것은 사탄의 장난과 시험으로 인해서도 올 것이지만, 우리 자신의 부족과 연약 때문에도 올 것이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고난은 결국에는 우리에게 영적 유익을 줄 것이다.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다. '택한다'는 원어(케이로토네오)는 '손을 뻗치다, 손을 내밀다, 투표하여 선출하다, 임명하다, 세우다'는 뜻이 있다. 장로들은 말씀의 바른 지식과 모범으로써 교회를 지켜야 할 자들로서 교회에 꼭 필요한 직분자들이다. 사도행전 20:28은 그들이 교회의 감독자이며 양을 돌보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이들을 목자 없는 양들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돌아볼 감독자들을 세우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그 직분을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번째 서신에서 장로들에게 권면하기를 양들을 돌아보되, 부득이함으로 즉 단순히 의무감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즐거운 뜻과 준비된 마음으로 하며,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무리에 본이 되라고 했다(벧전 5:2-3). 바울과 바나바는 금식 기도하면서 장로들을 택하였고 그들을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였다. 이런 중대한 일이 있을 때 그들이 금식 기도하며 그 일을 행한 것은 후대의 교회에 본이 될 것이다.
[24-28]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비시디아를 지나 밤빌리아에 이르러 말씀을 버가에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그들이 처음 전도의 일을 위해 세움을 받았고 안디옥 교회의 교사들에 의해 금식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탁하여 파송받았던 곳이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일차 전도의 목표로 계획했던 바를 다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이룬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앞에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들과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였다. 전도는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이루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그가 허락하시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여러 날 머물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의 일차 계획을 완수하였다. 그들은 더베에서도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고 버가에도 말씀을 전했다. 그러나 그들이 보고한 대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시므로 전도의 결실이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믿는 자들이 생겼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전도의 사명을 완수하자.
둘째로, 바울과 바나바는 고난 중에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은 줄 알 정도로 고난을 당했다. 또 그는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고난의 길임을 각오해야 한다.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셋째로, 바울과 바나바는 교회들에 장로들을 세웠다. 장로들은 교회를 하나님의 바른 말씀 안에서 지키는 책임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성도들을 돌보는 자들이다. 그들은 모든 교인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자들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장로들을 세울 때 금식 기도하며 그들을 세웠고 그들을 하나님께 부탁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들을 바른 말씀 안에서 견고케 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이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교리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그러해야 하며 개인적으로도 단체적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여러분의 담임목사와 부교역자들과 장로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들이 강건하므로 여러분을 견고케 세우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하라. 우리 교회가 개인적으로 단체적으로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한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자.
15장: 예루살렘 회의
1-11절, 예루살렘 회의가 열림
[1-2]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교회 안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바른 것을 가르치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지만, 잘못된 것을 가르치면 하나님의 일을 어지럽히고 가로막고 심지어 허물어뜨릴 수도 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 안에는 잘못된 가르침이 들어왔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가르침의 내용은 신자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할례를 받는 것은 구약 율법과 규례를 지킨다는 약속과 같은 의미가 있었다. 즉 그들의 사상은 할례를 받고 구약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율법주의라고 부른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교회 안에서 교리적 논쟁은 불가피하다. 모든 논쟁이 다 안좋은 것은 아니다. 교리적 논쟁은 필요하다. 그것은 회피할 문제가 아니다. 교리적 논쟁이 생기는 까닭은, 첫째로, 잘못된 교훈 때문이다. 잘못된 교훈은 지상의 교회 내에서 계속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의 활동이 끊임 없을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인간의 무지(無知)와 이해력은 언제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교리적 논쟁이 생기는 까닭은, 둘째로, 교리적 관심과 충성심 때문이다. 교리적 논쟁은 교리적 무관심 속에서는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교리적 오류가 있는데도 교리적 논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무관심과 불충성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있고 그 진리를 사랑한다면 그것을 지키려 할 것이고 비진리를 비평하고 배격하려 할 것이다.
[2] . . .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형제들이 율법주의 오류의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그 교회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한 것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권위와 지식에 있어서 더 나아서라기보다 교회의 일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이었을 것이다. 교리 사상의 차이는 교회 일체성을 손상시킬 수밖에 없었다.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교리 사상의 일치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했고(고전 1:10), 또 에베소서에서는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고 말했다(엡 4:4-6). 교회는 교리적 순결성과 교리적 일치가 필요하다. 교리적 논쟁은 교리적 순결성과 일치를 위한 과정일 뿐이다. 교리적 논쟁은 힘든 과정이지만, 기도와 겸손과 인내로써 진행할 때 교회는 마침내 교리적 순결성과 일치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3-4]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전송 즉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였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소식 즉 한 명의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소식보다 더 반갑고 기쁜 소식은 없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 즉 성도들과 사도들과 장로들의 영접을 받았고 예루살렘 교회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셔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말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선교 보고이며 간증이었다. 그들의 선교 보고대로, 그들이 행한 일들은 그들의 일들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행하신 일들이었다.
[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그런데, 그들의 보고를 들은 사람들 중에서 과거 바리새파에 속했던 어떤 믿는 사람들은 일어나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안디옥 교회에 들어왔던 바로 그 율법주의 사상이었다. 구약 즉 옛 언약의 증표이었던 할례는 영원한 규례인가? 구약의 율법은 이방인 신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영원한 법인가? 그것은 신약 아래서 폐지될 수 없는 영원한 법인가? 이 문제는 초대 교회가 처음부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모세의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관계는 처음부터 쉽게 이해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의 복음에 대한 밝은 이해가 없었던 사도 시대 초기에 어떤 바리새파 배경을 가진 신자들이 율법주의적으로 진리를 이해하려 한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6-7]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모였다. 그것은 교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최초의 교회 회의이었다. 그 교회 회의에서는 많은 변론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권위적 계시로 선포하게 하시는 대신에 많은 변론을 통해 깨달아지도록 하셨다. 사람들의 무지와 이해력의 부족은 토론을 통해 서서히 극복될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그 후 교회는 일치된 교리적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때때로 그런 과정을 밟아야 할 것이었다. 교리적 논쟁은 힘든 과정이지만, 교회의 교리적 순결성과 일치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단지 그것은 기도와 겸손과 인내로써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7-11] . . .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예루살렘 회의에서 베드로는 일어나 구원의 은혜성에 대해 증거하였다. 그는 네 가지 점을 증거했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셨다는 것과, 둘째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셨다는 것과, 셋째는 하나님께서 저희와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셨다는 것과, 넷째는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마음의 깨끗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결론적으로 너희가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감당할 수 없었던 율법의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지우려 한다고 지적하면서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고 말했다. 즉 그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정죄하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 것이요 율법의 저주를 담당한 것이었다(롬 10:4; 고후 5:21; 갈 3:13). 그러므로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율법은 폐지되었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 율법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구원의 은혜성에 대한 이 진리는 모든 교인들이 처음부터 이해한 것이 아니고 교리적 논쟁을 통해 서서히 밝히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율법의 폐지 혹은 영속성에 관하여,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주의도 잘못된 생각이지만, 다른 한편 율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반율법주의(反律法主義), 즉 율법폐기론도 잘못된 생각이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다는 점이 있지만 또 여전히 지켜져야 한다는 점도 있다. 신약성경은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진술과 같이 구약의 율법의 세 가지 내용을 구별하는 것이 좋다. 구약의 율법은 도덕법, 의식법, 재판법 등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덕법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규정한 것으로 십계명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의식법은 할례, 성막 예배와 제사 제도, 절기들, 깨끗하고 더러운 음식들 등의 법들이다. 재판법은 하나님의 직접적 통치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국가의 사회법들이다. 그것은 오늘날 민법, 형법, 상법 같은 법들이다. 이 세 가지 내용들 중,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완성되었기 때문에 폐지되었고 단지 그것들에 담긴 교훈적인 점들을 본받을 뿐이다. 재판법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세속 사회에서 그대로 지켜지기 어렵다. 그러나 도덕법은 그 성격상 구원받은 성도들도 지켜야 할 의로운 원리들이다. 물론 성도는 구원받기 위해 그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지만 율법을 지킨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의를 얻었기 때문에 의롭게 산다.
교회 내에서 교리적 논쟁은 불가피하였다. 교리적 순결성과 교리적 일치를 위해 교리적 논쟁은 필요하였다. 초대 교회는 예루살렘 회의에서의 긴 토론과 논쟁을 통해 율법과 구원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즉 구원의 은혜성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교리적 논쟁과 토론은 힘든 과정이지만, 기도와 겸손과 인내로 진행된다면 그것은 마침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오늘날 교회도 교리적 토론을 통해 바른 교리, 즉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고 교회의 참된 하나 됨을 지켜야 할 것이다.
12-29절,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
[12-14]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예루살렘 교회의 회중이 바나바와 바울의 전도 보고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들 중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는지에 대해 들은 후 야고보가 일어나 발언하였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한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아보신 일을 시몬 베드로가 증거했다고 말했다.
[15-18]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야고보는 베드로의 증거가 선지자들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아모스 선지자의 글을 인용한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훗날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시며 그 황폐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실 것과, 그 남은 자들과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될 것을 말했다. 즉 이방인들의 구원이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19-21]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야고보는 성경에 이방인의 구원이 예언되어 있음을 말한 후 자신의 의견 혹은 판단으로는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몇 가지 점들만 조심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제안한 몇 가지 점들이란 첫째로 우상의 더러운 것과 둘째로 음행과 셋째로 목 매어 죽인 것과 넷째로 피이다. 그는 이방인 신자들이 이런 것들을 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
첫째로, 야고보는 이방인 신자들이 우상의 더러운 것을 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상의 더러운 것이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가리킨다(29절). 그것은 우상제물 자체가 죄악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연약한 자들의 마음을 더럽히고 우상숭배에 떨어지게 하기 때문이었다. 우상숭배는 어느 시대나 인간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죄악이다. 둘째로, 그는 이방인 신자들이 음행을 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음행은 우상숭배와 더불어 인간 사회의 대표적인 죄악이다. 오늘날과 같이 옛날의 이방 사회는 너무 음란하여 음행을 가볍게 여기는 분위기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그럴 수 없다. 음행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이다. 셋째로, 그는 이방인 신자들이 목 매어 죽인 것을 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목 매어 죽인 것이란 피를 빼지 않은 고기를 가리킨다. 이방 세계에서 식용 고기는 피를 빼지 않은 것이 많았다. 넷째로, 그는 이방인 신자들이 피를 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셋째와 넷째는 다 피를 먹지 말라는 율법의 규례와 관계되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피는 생명이므로 피를 먹지 말아야 했다.
개혁교회가 전통적으로 이해하는 대로, 본문에 나타난 야고보의 제안은 영속적 성격을 가진 내용은 아니라고 본다. 우상숭배와 음행은 어느 시대에나 큰 죄악이지만, 목 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문제는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간의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필요한 생각이었다. 만일 이방인 신자들이 율법에 금지된 그런 것을 용납한다면, 교회 안에서 옛날부터 율법을 잘 지켜 왔던 유대인 신자들은 마음에 큰 거리낌을 가졌을 것이며 교회 생활에서 마음의 상당한 불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거리낌과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이방인 신자들은 이런 점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이방인 신자들은 모세의 율법과 유대인들의 규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22-23]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야고보의 제안에 따라 예루살렘 회의는 이제 일치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또 그 회의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유다와 실라를 선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였다. 또 그들은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문안하였다. 여러 시간의 교리적 토론은 하나님의 은혜로 마침내 일치된 좋은 결론을 가져왔다.
[24-27]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4절부터 29절까지는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인 그 편지의 내용이다. 거기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은 우선 예루살렘 교회의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이방인 신자들을 괴롭게 하고 마음을 미혹한다고 지적하였다. 전통사본에는 ". . .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너희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 후 사도들과 장로들은 그 편지에 계속 쓰기를, 그들이 사람들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다고 했다. 여기에 '일치 가결'이라는 말(호모뒤마돈)은 교회의 하나 됨을 보여주는 기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교리적 토론은 마침내 사상적 일치를 가져왔다. 얼마 동안의 혼란과 심적 고통은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다.
[28-29]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사도들과 장로들과 교인들 즉 예루살렘 회의는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였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라고 쓸 수 있었다. 이로써, 이방인들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와 구약 율법과의 관계에 관해, 바른 깨달음과 생각이 정리되었다.
성경은 구원의 근본적 교리들에 있어서 명료하다. 성경에 불명료한 어떤 교리적 주제들이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교리들은 분명하여서 바른 생각과 그릇된 생각이 명확하게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성경의 어떤 지엽적 교리들에 대해 여러 견해들을 용납한다 할지라도, 근본적 교리들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이 명확히 가르치는 근본적 교리들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명백히 이단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초대교회가 이방인의 구원의 은혜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던 것과 같이, 역사상 교회는 여러 차례의 세계적 회의들을 통해 중요한 교리들에 대해 공적인 진술들을 만들었다. 우리는 그러한 세계적 교회 회의들의 공적 신앙고백의 내용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초대교회의 니케야 회의나 칼케돈 회의, 그리고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도르트 회의 등이 작성한 신앙고백들을 귀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 회의의 예와 같이, 교회는 필요할 때마다 건전한 교리적 토론을 통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분별하고 확신해야 하며 역사적 기독교 교리 체계를 굳게 붙들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의 순결성과 일치성을 잘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30-41절, 말씀으로 교회를 돌아봄
[30-32]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바울과 바나바와 및 예루살렘 교회의 보냄을 받은 형제들은 수리아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예루살렘 교회가 회의의 결론을 담아 보낸 편지를 전달하였다.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은 그 편지를 읽고 그 권면과 위로와 격려의 말을 인해 기뻐하였다.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온 유다와 실라, 즉 예루살렘 교회의 보냄을 받은 그들은 선지자들이었다. 사도시대의 선지자란 하나님의 계시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권면하는 자이었다. 그들은 여러 말로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을 권면했고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였다. 그들은 사상과 믿음에 있어서 바울과 바나바와 일치하였다. 그들의 건전하고 일치된 권면은 안디옥 교회에 유익을 끼쳤다. 올바른 말씀의 사역자들은 교회를 어지럽히거나 분열시키거나 속화시키지 않고 교회로 하여금 참된 지식과 거룩함 가운데서 일치단합하여 자라가게 할 것이다.
[33-35]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얼마 후에 그들은 평안 가운데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머물며 여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였다. '여러 다른 사람들과 함께'라는 말은 안디옥 교회에 말씀의 사역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교회에 말씀의 사역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교회의 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교회에 주일학교 교사나 권찰의 후보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모든 교인들이 성경 말씀의 지식에 풍성하여지고 그 말씀의 지식으로 서로를 권면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옛날 이스라엘의 광야 시대에 지도자 모세는 이스라엘 회중을 인도하기에 피곤하였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70인 장로들에게 내려주셨었다. 70인 장로들 중 모이지 않고 진중에 머물렀던 엘닷과 메닷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그들이 예언하는 것을 본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그들이 예언하는 것을 금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모세는 대답하기를,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었다(민 11:29).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풍성한 은혜를 주셔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자 되기를 원한다.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며칠이 지난 후 바울은 바나바에게 주의 말씀을 전했던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지 방문하자고 제안하였다. 그것은 심방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말이다. 성경은 믿는 이들이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고 했고(살전 5:11), 또 말하기를,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했다(살전 5:14). 또 히브리서에는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12-13),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히 10:23-25). 오늘날도 교인들에게 심방이 필요하다. 특히 문제를 가진 자들, 그래서 주일 집회에 빠지는 자들에게 심방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주일학교 교사의 사역이나 구역을 맡아 심방하는 권찰의 사역은 매우 필요하고 귀한 사역이다.
[37-39]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심방 동반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의견이 나뉘었다. 바나바는 온건한 생각과 성품을 가졌던 것 같다. 그는 전에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서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행 13:13) 마가 요한도 데리고 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울의 생각과 입장은 보다 강경하였던 것 같다. 그는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않은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생각은 날카롭게 대조되었고 심히 다투었으며 그 결과 그들은 피차 갈라서서 각자 자기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 두 사람의 신앙 사상이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함께 일하는 자들의 자격에 대한 생각에 차이가 있었다. 어느 쪽이 옳았는지 성경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도행전 후반이 바울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고 그 내용이 성경이 되었음을 볼 때 바울의 생각이 옳았던 것 같다. 함께 일하는 자는 여러 면에서 상당히 준비된 자이어야 할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심히 다투고 나뉘인 것은 말씀 사역자들의 인간적 연약을 보이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동역(同役)의 중요한 원리를 보여준다. 아모스 선지자는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고 말했다(암 3:3). 그것은 옳은 말씀이다. 주의 일을 함께 행할 자들은 생각이 같아야 하고 뜻이 같아야 한다. 또한 말씀의 사역자들은 주를 사랑하고 주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일할 각오가 되어야 하며 심령이 굳세게 단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주의 뜻을 함께 받들 수 있고 하나님의 일과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들을 부르시고 생각과 사상의 일치와 온전한 헌신과 심령의 굳셈으로 훈련시키시고 그들을 들어 사용하셔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40-41]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바울은 실라를 동반자로 택하여 말씀 사역의 길을 떠났다. 본문은 그들이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났다고 기록한다. 그것은 말씀 사역 혹은 심방의 효력이 하나님의 은혜로 됨을 보여준다. 말씀의 사역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일해야 할 것이다. 말씀의 사역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돌보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사역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도우시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본문은 그들이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했다고 기록한다. 그것은 말씀 사역 혹은 심방의 유익을 증거한다. 말씀의 사역 즉 전도와 권면과 격려의 사역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할 것이다. 말씀의 사역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견고케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오늘날도 교회에는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는 일이 필요하다. 말씀의 사역자들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도 우리 교회에 말씀의 사역자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도하자. 말씀의 사역자들이 부족하지 않기를 기도하자. 우리 모두가 다 말씀의 사역자들이 되기를 기도하자.
둘째로, 말씀의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영혼을 구원하고 세우는 일은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서로 권면하고 격려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성도들의 믿음은 굳세어지고 하나님의 교회는 견고하게 될 것이다. 전도가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심방도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주위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전파해야 하지만, 또한 우리 주위에 있는 이미 믿는 자들을 돌아보고 권면하고 격려하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서로 돌아보아 믿음과 선행을 격려해야 한다.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이 일을 힘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주의 일을 함께 받들기 위해 뜻을 같이해야 한다. 말씀의 사역자들도 인간이므로 때때로 생각의 부족함 때문에 다투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주의 일을 함께 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뜻을 같이해야 할 것이다. 두 사람이 의합치 못하면 동행할 수 없다는 것은 항상 진리이다. 우리 모두는 이 어지러운 말세지말의 교계의 상황 속에서도 생각과 뜻을 같이하며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주의 일에 충성하는 자들이 되자.
16장: 빌립보에서 전도함
1-10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1-2]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디모데는 믿음이 진실한 자이었고 그의 모친과 외할머니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편지하였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3-5).
또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듣는 자이었다. 사람은 말이나 인품이 좋을 때, 즉 그의 말이 경우에 바르고 진실함과 덕스러움이 있고 그의 인품이 경건하고 선할 때, 다른 이들에게 칭찬을 들을 것이다. 성경은 장로와 집사의 자격에 대해 말할 때 책망할 것이 없는 자, 즉 모범적 인품을 가진 자가 자격이 있다고 했다(딤전 3:2). 디모데는 다른 신자들에게 칭찬을 듣는 자이었다. 이런 인품이었기 때문에 그는 후에 바울에게 가장 좋은 협력자가 되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했다(빌 2:19-22).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바울은 디모데를 수종자로 삼았고 그를 데리고 떠나려 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큰 은혜이었다. 하나님이 주셔야 우리는 복음 사역의 협력자들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데리고 떠나기 전에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을 고려하여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하였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거리낌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자가 자기들을 위해 말씀을 전하는 것을 거리낌으로 여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남에게 거리낌을 주지 않으려 하였다. 그는 고린도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19-22).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열정과 진실한 겸손을 가진 자만이 그렇게 처신할 수 있을 것이다.
[4-5]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바울 일행의 전도 여행은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을 끼쳤다. 여러 교회들과 성도들은 믿음이 더 굳세어졌다. 인간은 연약하고 우리의 믿음은 조그만 환경의 변화에도 흔들리고 연약해지기 쉽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교훈과 성령의 위로가 있을 때 우리의 믿음은 굳세어질 것이다. 또 그 지역의 교회들은 교인수도 날마다 늘었다. 그것은 먼저 믿은 신자들이 주위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계속 소개하고 증거하고 또 의롭고 선한 삶의 본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큰 구원을 체험한 자마다 그 구원을 다른 이들에게 증거하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에게 소개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벧전 2:9). 초대 교회는 영적으로, 숫적으로 성장하였다. 오늘 우리 교회도 영적으로 성장하여 믿음이 굳세어지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숫적으로도 성장하여 구원 얻는 자들이 날마다 더하기를 원한다.
[6-7]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바울의 전도 여행은 열매를 맺는 여행이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통과하였으나 성령께서는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고 그들이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으나 성령께서 허락지 아니하셨다. 본문에 나오는 지역 이름들은 오늘날 터어키 땅으로서 아시아는 그 땅의 서쪽 지방을 가리키고 무시아는 서북쪽 끝이며 비두니아는 무시아에서 동북쪽 지역 즉 오늘날 터어키의 북쪽 지역이다. 바울은 소아시아 지방의 북쪽으로 나아가 전도하려 했으나 성령께서는 그것을 막으셨고 그들의 걸음을 서쪽 마게도냐 지방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성화의 과정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고(롬 8: 14) 우리의 삶 전체를 인도하신다. 그는 전도자들의 길을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시요 인도자이시다.
[8-10]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이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 항구에 이르렀을 때 밤에 환상이 그에게 보였다. 그것은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마게도냐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고 요청하는 환상이었다. 바울은 그 환상을 본 후 그것이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인 줄로 깨달았고 그래서 그들은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 옛시대에 환상은 하나님의 계시의 한 방법이었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환상이 하나님의 계시의 일반적 방법이 아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 성경을 진지하게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며 또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함으로 성령의 감동과 깨닫게 하심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 마음에 간절한 소원을 주시면서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다(빌 2:13).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오늘날 복음 사역에 디모데같이 꼭 필요하고 다른 성도들에게 칭찬듣는 좋은 일꾼들을 많이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하자. 하나님이 은혜주시면 그러할 것이다. 또 우리 자신이 그런 자 되기를 힘쓰자. 둘째로,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영적으로 또한 숫적으로 성장하는 교회 되기를 기도하자. 교회는 바른 말씀의 교훈과 성령의 위로로 성도들의 믿음이 굳세어짐으로 영적으로 성장할 것이며, 또 이미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증거하며 또 의롭고 선한 삶의 본을 보임으로써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이 날마다 더하므로 숫적으로도 성장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항상 성령의 인도를 받기를 원하며 또 그 인도하심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무슨 좋은 일이든지 하나님이 막으시면 중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성경 교훈에 합한 어떤 간절한 소원을 우리 마음에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인 줄 깨닫고 그 일을 계획하고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간에 주의 영광만을 위해야 하고 일치단합한 가운데 주의 뜻만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11-18절, 빌립보에서의 전도
[11-13]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바울 일행은 마게도냐로 건너가서 그 지방의 첫성인 빌립보에 들어갔다. '첫성'이라는 말은 '중요한 도시'라는 뜻일 것이다. 당시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는 데살로니가이었지만, 빌립보도 매우 중요한 도시이었다. 그 도시는 또한 로마 식민지이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들'은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와 같은 통치제도와 법들과 언어와 외적 형태들을 가졌고 또 어떤 곳은 세금의 면제도 받았다고 한다.
바울은 그 성에 며칠 머물면서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아 나갔다.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라는 구절은 전통사본에 의하면 '기도처가 있곤 했던'이라는 뜻이다. 또 '문밖'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성밖'이라고 되어 있다. 바울은 성밖 강가의 기도처로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전도하였다. 전도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해야 할 일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만민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들을 교회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야 하고 흩어져야 한다.
[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바울이 가서 전도할 때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시키신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두아디라 성의 자주빛 옷감을 파는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여인이었다. 주께서는 그 여인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귀를 기울여 듣게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귀와 마음에 할례를 주셔서 깨닫게 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을 자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 . .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3-4, 6).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구주이시다. 그는 친히 죄인의 마음 속에 참된 회개와 믿음을 주셔서 그를 구원하신다.
[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루디아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믿었다. 그는 즉시 자기 가족들과 더불어 세례를 받았다. '그 집'이라는 말은 유아도 포함하는 말이다. 만일 그에게 어린아이가 있었다면 그도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온 가족의 세례는 당시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의 풍습이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옛시대에 가정적 구원을 주셨다. 오늘날도 우리는 가정적 구원을 기대한다. 물론 구원은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바른 관계에서 얻는 것이지만, 가정에서 한 사람이 구원을 얻으면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구원이 가깝다는 것은 이성적으로도 생각할 만하고 경험적으로도 그러하다. 먼저 믿은 이가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며 선한 본을 보이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여자들을 위해 교훈하기를,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1- 4)고 했다.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利)하게 하는 자라.
점치는 일은 귀신의 활동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호기심으로라도 점을 보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큰 죄이다. 신명기 18:9-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17-18]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 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귀신도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 단지 귀신은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귀신들에게는 구원 얻을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 그 귀신은 여러 날 동안 바울 일행이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들이며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들임을 말했다. 바울은 심히 괴로와 그 귀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나오게 했다. 바울이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기적이었다. 그러나 본문이 증거하는 대로 바울은 처음부터 그런 일을 행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신의 본무(本務)로 생각했다. 그는 기적을 행할 능력을 받은 사도이었으나(고후 12:12) 그 능력을 함부로 쓰려 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기적주의가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증거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다(고전1:22-24). 오늘날 우리는 성경만으로 충분히 하나님을 믿고 섬길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기적을 행하거나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그 명령들을 바로 행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전도하기 위해 전도할 대상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가서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서 파송하는 전도자들이다. 우리는 세상으로 파송되는 전도자들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전도가 효력 있게 이루어지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은 구주이시다. 하나님은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자를 우리의 전도를 통해 구원하신다.
셋째로, 우리는 가정적 구원을 기대하자. 구원은 개인적인 일이지만, 가족들 중 한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다른 이에게도 구원의 빛이 비취기 시작한다. 먼저 믿은 이의 간절한 기도와 진지한 전도와 모범적 행위를 통해 가정의 다른 이에게도 구원이 임한다.
넷째로, 우리는 거짓된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세상에는 귀신의 신비한 활동들이 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점을 본다든가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기독교는 신비한 기적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오직 성경 말씀을 믿고 그 교훈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을 강조하는 도리이다.
19-40절, 빌립보 간수의 구원
[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바울이 귀신 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았으나 그 일로 인해 여종의 주인들은 바울을 핍박했다. 그들은 여종의 인격을 귀히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그 여종을 단지 그들의 이익의 도구로만 사용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만을 위한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도리이다. 우리는 비록 자신에게 손해가 될지라도 다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 여종의 주인들은 여종을 고쳐준 바울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 당시에 저자(아고라)는 사람들이 모여서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일 뿐만 아니라, 또한 토론이나 재판이 이루어졌던 공공장소이었다.
[20-22]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갔다. '상관들'(스트라테고이)은 그 지방의 으뜸 되는 행정장관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상관들 앞에서 바울과 실라를 고소하기를, 이들이 유대인들로서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고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하였다. 함께 모인 사람들도 함께 바울과 실라를 비난하였다. 그들의 비난은 정당한 것 같지 않다. 바울은 여종이 그를 계속 괴롭히기 때문에 부득이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았던 것뿐이며 실상 그 일은 선한 일이었다. 귀신들린 불쌍한 여종을 정상적인 건전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이 비난거리나 정죄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인격보다 물질적 이익을 더 중시하는 주인들과 우상숭배로 어두워진 사람들은 정당한 판단을 저버리고 바울과 실라를 비난하고 정죄하였다. 또 그들의 말을 들은 상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말했다.
[23-24]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전도자 바울과 실라는 변명할 기회를 얻지도 못한 채 억울하게 고난을 당해야 했다. 그들은 많은 매를 맞은 후 깊은 옥에 갇혔고 그 발은 차꼬에 든든히 채워졌다. 그 감옥은 춥고 어두웠을 것이며 그들의 온몸은 심히 쑤시고 아팠을 것이다. 그들은 그 밤에 갑갑하고 부자유스런 그 감옥 속 어둡고 찬 바닥에 그렇게 던져져 있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 종들을 그런 고난의 현실 속에 그렇게 버려두셨다. 그것은 진실한 성도들의 현실, 특히 전도자들의 현실이 어떠할 것을 보여주었다.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 고난의 현실 속에서 낙심치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정쯤 되어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하였다. 그것은 한밤중에 드린 특이한 기도요 찬송이었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다. 믿는 자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다. 또 기도할 때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시고 그 힘과 위로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찬송할 수 있게 된다. 찬송은 하나님의 응답과도 같다. 성도에게 고난은 있지만, 믿음은 그 고난을 이긴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했다(요일 5:4-5).
[26-28]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그 밤에 바울과 실라가 믿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을 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홀연히 큰 지진이 났고 옥터가 움직이고 문들이 곧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기이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일들이 일어났다. 그것은, 자다가 깬 간수가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였으나 바울이 큰 소리로 그것을 막은 일이었다. 즉 간수는 자살하려던 자리에서 육신의 생명이 건짐을 받았다. 간수는 죽음에서 건짐을 얻었다.
[29-30]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뿐만 아니라, 그 밤의 기적적 사건으로 간수는 그 영혼도 구원을 받게 되었다. 바울의 목소리를 듣고 등불을 들고 뛰어 들어간 간수는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구원의 방법에 대해 질문하였다. 그는 바울과 실라가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17절)임을 들어서 알았던 것 같다. 또 그는 평소에 죄책으로 고민하며 구원의 길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는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준 은인인 그 착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물으려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마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밤에 단지 지진으로 옥문이 열리고 바울과 실라의 차꼬가 벗어지게 하신 것이 아니고 그들을 통해 그 간수에게 육신의 생명과 영혼의 구원을 주신 것이었다.
[31-32]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에 주께서는 바울과 실라로 하여금 간수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그것은 특이한 한밤 중의 전도요 한밤 중의 설교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람이 구원을 얻는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다. 믿는 자는 죄씻음과 영생의 구원을 얻는다. 바울과 실라는 그 간수와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의 말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전했다. 하나님의 구원은 단지 그 간수에게만 주어지지 않고 그의 가족들에게도 주어질 것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가정적 구원이 될 것이었다. 비록 가족 개개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한 가정의 가장(家長)의 구원은 가족들에게 구원의 문을 여는 일이 될 것이었다.
[33-34]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그 밤의 바울과 실라의 전도와 설교는 열매를 맺었다. 그 간수와 온 가족들은 하나님을 영접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 밤에 다 세례를 받았으며 자기 집에서 음식을 차려 그들을 대접하였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 한밤 중의 세례식과 그 한밤 중의 식탁과 기쁨의 교제는 참으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혜의 열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의 놀라운 구원을 위해 바울과 실라에게 많은 매와 옥에 갇히는 고난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고난은 그 간수와 가족들의 귀한 영혼 구원에 비하면 그렇게 큰 값을 지불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고난으로 귀한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도 즐거이 그런 고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35-39] 날이 새매 상관들이 아전을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간수가 이 말대로 바울에게 고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아전들이 이 말로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그 다음날 상관들은 아전을 보내어 바울과 실라를 놓으라고 하였다. 그 밤에 그들이 생각해보니 그 감금이 정당성이 없었다고 판단되었든지, 아니면 혹시 간수가 그 밤의 일을 보고하며 그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간청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로마 사람인 자신들을 죄도 정하지 않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둔 것이 잘못된 일임을 말하면서 그들이 직접 와서 자신들을 데리고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아마 자신들이 위법하게 놓여나는 것이 아니고 정당하게 놓여남을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복음의 진리성을 나타내려 함이었을 것이다.
[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옥에서 놓여나왔다. 육신적 고생도 있었지만, 영혼들을 구원하는 기쁨과 즐거움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다. 그들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며 그곳을 떠났다. 위로를 받아야 했을 그들이 오히려 형제들을 위로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들은 육신적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위로를 이미 받았고 그 위로로써 다른 형제들을 이제 위로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성도들에게는, 특히 전도자들에게는, 세상에서 핍박과 고난이 있다. 그것은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다. 성도들에게 억울한 비난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도 있을 것이다. 둘째로, 그러나 믿음은 고난을 이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세상을 이길 수 있다(요일 5:4-5). 셋째로, 믿음은 기적을 가져온다. 바울과 실라의 믿음의 기도와 찬송은 옥문이 열리는 기적, 간수의 육신의 생명을 구원하는 기적, 더 나아가 그와 그의 가족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기적까지 가져왔다. 고난은 있었으나 구원의 신기한 역사는 계속 일어났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현실의 고난을 두려워말고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자.
17장: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에서 전도함
1-9절,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
[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방의 중심 도시이었다. 유대인들은 유다 왕국의 멸망 후 온 세계에 흩어졌고 각곳에서 회당을 세웠는데, 데살로니가에도 그런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다. 유대인의 회당들은 신약 시대에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데 발판이 되었다. 유대인들의 죄악과 국가적 멸망이 세계 복음화를 위한 발판이 되었다. 인간들은 실패하였으나 하나님께는 실패가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인간들의 실패까지도 사용하셔서 그의 선한 뜻을 이루신다.
[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사도 바울은 습관적으로 어릴 때부터 안식일을 지키고 회당 예배에 참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부모들이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신앙으로 양육할 것을 명하셨다. 오늘날 온 가족들이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교회의 모든 공적 집회에 힘써 참석하는 것은 올바른 습관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합당한 방식이다. 바울은 자기 습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참여하였고 그것을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바울은 전도할 때 성경을 가지고 전했다. 성경은 전도와 설교의 자료집이다. 기독교는 한 책의 종교이다. 그 책은 성경책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며 하나님의 말씀 곧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딤후 3:16). 성경은 유익한 책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진리와 교훈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읽는 모든 이에게 큰 유익을 주는 책이다. 또한 성경은 편리한 책이다. 성경에 익숙한 자는 하나님의 모든 좋은 말씀을 언제든지 기억하며 확인하며 활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익숙해야 한다. 우리는 이 유익하고 편리한 책을 열심히 읽고 연구함으로써 그 모든 말씀에 익숙한 자들이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유익을 받아누려야 할 것이다.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전도하되 세 안식일에 강론하였다. '강론하다'는 원어(디아레고마이)는 '변론하다'는 뜻이다. 복음 진리를 전하려면 때때로 변론이 필요하다. 바울은 세 안식일에 계속 강론하였다. 그는 한번의 전도로 부족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세 번 연속하여 복음 진리를 확실하게 전하려 하였다. 우리는 전도할 때 하나님이 힘 주시는 대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익숙하여 성경을 가지고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최선을 다해 설명하고 증거해야 한다.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은 전도할 때 성경의 한 부분이나 한 주제를 풀어 설명하면서 증거하였다. 특히 바울이 전한 복음의 요점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거하였다. 그것은 짐승 제물의 죽음, 피흘림, 불에 태움과 이사야서와 시편의 구절들에 근거한 설명이었을 것이다. 이사야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시편 16: 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그런 후, 바울은 그가 전하는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다. 예수께서는 과연 의로우신 자이었으나 십자가에 참혹히 달려 피흘려 죽으셨고 삼일만에 다시 사셨다. 그는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분이심이 확실하였다.
[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바울의 말을 들은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다. 복음이 전파될 때 항상 두 부류가 나뉘인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두 부류가 나뉘인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 전부가 믿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믿고 순종하며 어떤 이들은 믿지 않고 순종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 두 부류가 나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모든 사람이 다 믿었으면 좋겠으나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믿는 부류에 속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는 큰 결실을 거두었다. 바울의 전도는 효력이 있었다. 바울의 말을 믿은 자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 본문은 '경건한 헬라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권함을 받았다'는 원어는 '믿었다'는 뜻이다. '귀부인들'은 사회적 신분과 재산이 있는 자들의 부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 바울의 전하는 복음을 믿었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 믿음은 순종을 동반한다. 믿은 자들은 바울과 실라를 추종하였다.
[5-9]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 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그러나 대적자들이 있었다. 전통사본에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였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 성의 건달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바울과 실라를 비난하기를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말이 맞기는 하다. 바울의 전도 여정에는 빈번히 다툼이 있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누가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들인가? 분쟁들 중에는, 해서는 안될 죄악된 분쟁이 있고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분쟁이 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말씀대로, 믿는 이들 간에 서로 물고 뜯는 분쟁은 분명히 죄악된 분쟁이다(갈 5:15, 20).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가 전파될 때 일어나는 분쟁, 즉 그 진리를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이들을 향해 일으키는 분쟁은 믿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원치 않으나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분쟁이다. 그러므로 모든 분쟁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진리 운동에서 파생되는 분쟁은 믿는 자의 입장에서 원치는 않으나 불가피한 분쟁이다. 타협적 태도에는 분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말하며 진리대로 행하고자 할 때는 항상 분쟁이 있을 것이다. 진리를 전하는 자들은 때때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라고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세상에 검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10:34).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성경에 익숙한 자들이 되자. 성경은 유익한 책이며 편리한 책이다. 성경에 익숙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살 수 있을 것이므로 복되다. 둘째로, 우리는 전도할 때 성경의 뜻을 풀어 설명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성경은 우리의 전도 교본이다. 성경은 영혼을 구원하는 효력 있는 도구이다. 셋째로, 우리는 불가피한 분쟁을 두려워하지 말자. 진리 운동에는 때때로 분쟁이 있다. 사탄은 교회가 진리 가운데 든든히 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싫어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하려 할 때 사탄의 방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 운동의 과정에 일어나는 모든 분쟁은 결국에는 유익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 운동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두려워하지 말자.
10-15절, 베뢰아에서의 전도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데살로니가에서 핍박을 받았던 바울과 실라는 밤에 형제들에 의해 베뢰아라는 도시로 보내졌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그 밤에 도피하는 긴 여행을 해야 했다. 당시의 밤의 여행은 불편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도자의 길이었다. 그들은 베뢰아에 도착하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다. 유대인의 회당은 전도하기 위한 첫발판과 같았지만,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에 실상 인간적으로는 들어가기 싫은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도하기 위해 직분을 받았고 보냄을 받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 9:16-17).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었다. '신사적'이라는 헬라어(유게네-스)는 '가문이 있는 집안 출신의, 고상한'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그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태도에서 나타났다. '간절한 마음으로'라는 원어는 '모든 준비된 마음으로,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라는 뜻이다. 즉 그들은 편견이나 선입견, 좁은 마음, 닫힌 마음, 부정적인 마음,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 열린 마음, 모든 준비된 마음,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다. 사람의 본성은 사악하고 비뚤어져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마음이 비뚤어지고 부정적이기 쉽다. 모세는 이스라엘 회중을 '사곡한 종류'라고 표현하였다(신 32:5). 사도 바울은 세상을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라고 표현하였다(빌 2: 12-15).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이렇게 비뚤어지고 부정적인 마음이 변하여 고상한 마음,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 즐거움으로 말씀을 받을 만한 마음이 될 것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상고한다'는 말은 '확인하고 검토하고 연구한다'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며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책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말하기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요 20:30-31).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했다(딤후 3:15). 사람이 성경책을 자세히 읽고 연구한다면 그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며 구원에 이를 것이다. 그것이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이다.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하나님께서는 베뢰아에서의 바울의 전도 사역에 많은 열매를 주셨다. 바울의 말을 들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믿었고 헬라의 귀부인들과 남자들도 적지 않았다. 바울이 그곳에서 특히 많은 결실을 얻은 것은 베뢰아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성품이 고상하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소박하고 단순한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받을 때 말씀을 더 잘 이해하게 되며 또 날마다 성경을 연구함으로 들은 내용을 확인할 때 더 잘 믿을 수 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 말씀을 통해 생긴다(롬 10:17).
[13-14]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하나님의 일이 힘 있게 이루어질 때 사탄의 방해도 계속 되었다. 하나님의 종들의 열심도 컸지만, 악한 자들의 열심도 대단하였다. 교회 사역은 영적 전쟁과도 같다.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은 베뢰아에서 무리를 충동하여 소동을 일으켰다. 믿는 형제들은 바울을 즉시 내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했다. 베뢰아에서 많은 결신자들을 얻었다고 기뻐한 것은 잠깐이었고 바울은 또 다시 피신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교훈하였었다(마 10:23).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베뢰아에서 아덴까지는 바닷길로 400 내지 500킬로미터 가야 했다. 바닷길은 항상 풍랑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여행이었다. 바울의 전도 여정은 많은 고난을 경험한 과정이었다. 그는 고린도후서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고 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고상한 마음을 받아 즐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받자.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좁은 마음, 완고한 마음, 부정적이고 비뚤어진 마음을 다 버리고 소박하고 단순한 마음, 열린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자. 둘째로, 우리는 성경책을 날마다 읽고 연구하자.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되다. 그는 믿음에 굳게 서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될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은 고난을 각오하자. 바울의 전도 여정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며 견디어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핍박과 매, 여행의 위험, 계속되는 도피, 경제적 부족 등의 연속이었다. 주를 따르며 주를 섬기는 길은 좁은 길이며 고난의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은 영생의 길이며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선한 길이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주님만 바라보며 감당할 능력을 주께 구하며 고난을 각오하자.
16-34절, 아덴에서의 전도
[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사도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면서 아덴 성을 둘러보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노하였다. 그것은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는 선한 분노이다. 우상숭배자들을 보고도 우리의 마음에 분노가 없다면 우리는 그 영혼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전도는 세상의 우상숭배적 환경이나 죄악된 환경에서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에 헛된 것들을 숭배하고 헛된 것들에 가치를 두고 살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가 필요하고 인생의 정로(正路)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일이 필요하다. 전도자 바울의 마음 속에는 이런 사랑, 이런 분노, 이런 열심이 있었다.
[17-22]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바울은 유대인 회당의 경건한 사람들에게 말했을 뿐 아니라 시장과 광장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그리고 심지어 당시의 에피큐러스와 스토익 철학자들과도 변론하였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다. 아덴 사람들은 종교와 철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우상숭배는 그러한 관심에서 나왔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말했다. 아덴 사람들은 종교적, 철학적 토론을 좋아하였고 그것을 위해 시간을 쓸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종교와 철학의 문제들은 때때로 비현실적이고 사치스런 일처럼 취급되지만, 실상 그것들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들이다. 인간은 광대한 우주, 깊은 신비에 싸여 있는 우주 속에서 살고 있다. 우주와 인간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과 바른 방법은 무엇인가? 선(善)이란 무엇이며 도덕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겪는 수많은 고난들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죽음이란 무엇이며 죽음 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런 문제들은 옛날부터 종교와 철학의 주제들이었다. 돈을 벌고 먹고 살기에 급급하여 이런 문제들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는 시대보다는 이런 문제들을 생각할 여유를 가진 시대와 사회가 확실히 낫기는 낫다. 바울은 그런 아덴의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전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아덴 사람들은 종교와 철학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지만,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을 만들어 그 신을 섬기려 하였다. 철학은 인간 지혜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최선의 지혜로 참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필요성은 어느 정도 느끼지만, 그가 누구이시며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시고 요구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 바울은 그것을 접촉점으로 삼아 그들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말했다. 이방종교들과 철학들이 해답을 주지 못하는 것들을 기독교는 명백하게 대답한다. 사람은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때 모든 종교적, 철학적 질문에 대한 바르고 완전한 대답을 가진다.
[24-25]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바울이 전한 내용은 무엇보다 우선 참 하나님의 탁월하심에 대한 것이었다. 참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그는 창조주이시므로 피조세계에 제한되지 않으신다. 예를 들어 그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으며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시다. 그는 스스로 완전하시고 충만하셔서 조금도 부족이 없으시다. 그는 지금도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피조물 중의 하나처럼 생각하고 섬기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의 완전성과 충족성을 알지 못하는 신 개념과 그를 섬기는 방식은 잘못이다.
[26-29]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바울은 또한 그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에 거하게 하셨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셨고 거주의 경계를 한하심으로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와 거주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어느 정도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멀리 떠나 계시지 않다. 모든 인간은 실상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움직이고 있고 존재한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세계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분수에 맞지 않는 비현실적이거나 사치스런 무엇이 아니고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생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이다.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옛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버려두셨으나 이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명하시기를 회개하라고 하셨다고 말한다. 회개는 복음의 중심 내용이다. 회개는 하나님 없이 살았던 무지와 불경건,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며 살았던 모든 죄악과 부도덕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며 하나님을 안 후부터는 의롭고 선하게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는 생명의 길이다. 사람이 참으로 회개치 않으면 자신의 죄 때문에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회개하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모든 사람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나와야 한다. 회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이다.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바울은 또한 마지막 심판의 날이 있음을 증거한다. 이것은 매우 두려운 사실이다. 인간 사회는 도덕적 혼란과 무질서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도덕적 주재자이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모든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물으실 것이며 그들의 행위에 대해 공의의 보응을 내리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날을 작정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세우셨다. 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가 되게 하셨다.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구주이시며 마지막 심판자이심을 증거하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것은 또 장차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32-34]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아덴에서의 바울의 전도의 결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본문의 증거대로 단지 몇 사람이 그의 말을 믿었다. 전도의 결과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어떤 때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올 것이나, 어떤 때는 적은 사람들만 주께로 돌아올 것이다. 전도를 받고 믿는 자들이 많든지 적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우리는 그 수를 귀히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 한 명을 귀히 여겨야 한다. 주께서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다(마 16:26).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전도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더 깨닫는다.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한 환경일수록 구원의 필요성은 더 크다. 우리는 구원의 복음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담대히 전하자. 우리는 악한 환경이나 악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자. 우리가 담대히 전도하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리의 내용을 바르게 알아야 하며 또 성령의 능력을 힘 입어야 한다. 그 일을 위해 우리는 열심히 성경을 배우고 연구해야 하며 힘써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전도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말씀이 열매를 맺느냐 맺지 않느냐, 또 얼마나 많이 열매를 맺느냐 하는 문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 염려할 문제가 아니다. 전도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자.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은 그가 정하신 때에 우리나 혹은 다른 이들의 전도를 통해 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올 것이다.
18장: 고린도에서 전도함
1-17절, 고린도에서의 전도
[1-3]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아덴을 떠난 바울은 고린도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고린도는 고대 헬라의 상업의 중심지이었고 매우 음란했던 도시이었다. 후에 로마시대에 그 도시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바울은 그곳에서 아굴라라 하는 소아시아 북부 본도 지방 출신인 유대인 하나를 만났다. 그는 그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에 살다가 로마 총독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살던 곳을 떠나 최근에 고린도로 온 자이었다. 그들의 직업이 천막을 만드는 것이어서 바울은 그들에게 가서 함께 거하며 일하였다. 사람이 자신이나 가족의 식생활을 위해 기술을 가지는 것은 필요하고 좋은 일이다. 바울은 자신의 식생활을 위해 손수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남의 도움이나 받으며 게으르게 놀고 먹거나 아니면 돈벌이에 얽매여서 일평생 아무 선한 일도 못하는 그런 자가 아니었다.
[4-5]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바울은 안식일마다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거기 모인 경건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는 강론하고 권면하였다. '강론하다'는 원어는 논리적으로 변론하고 증거한다는 뜻이고, '권면하다'는 원어는 설득한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성령에 붙잡혀'라고 되어 있다. 그는 성령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하였다. '밝히 증거하다'는 원어는 '열심히 증거한다'는 뜻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전하는 말씀을 가급적 논리적으로 증거하고 또 성령에 붙잡힌 바 되어 열심을 다해 전해야 할 것이다.
[6]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바울의 전도 사역에는 항상 대적자들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하였고 훼방하였다. 사탄은 영혼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며 하나님의 일이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것을 싫어하며 방해한다. 그러나 바울의 대처는 단호하였다. 바울은 옷을 떨므로써 그 대적자들과의 단절을 분명히 하였다. 또 그는 그들의 피가 그들 머리로 돌아갈 것이며 자기는 깨끗하다고 말함으로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하였다. 또 그는 이 후에는 자신이 이방인들에게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말씀하셨었다(마 10:14).
[7-8]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그의 말을 믿는 자들도 있었다. 바울은 회당에서 나와 하나님을 공경하는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정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원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라는 뜻으로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전도 사역을 위해 집회 장소를 주셨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님을 믿었다. 사도행전은 고넬료, 루디아, 빌립보 간수 등 온 가정이 주를 믿는 일들을 종종 기록했다. 또 수다한 고린도인들도 바울이 전하는 말을 듣고 믿었으며 세례를 받았다. 바울의 대적자들도 있었지만, 바울의 말을 믿고 따르는 자들도 많이 있었다. 하나님의 복음은 항상 상반된 반응을 가져온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의 사역에서도 그러하였다면, 하물며 오늘날 우리들의 사역에서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대적자들이 있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주께서는 밤에 환상 중에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셨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물론 그는 인성으로 천국에 계시지만, 신성으로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나타나심처럼 사도시대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환상은 사도시대에 하나님의 계시의 한 방법이었다.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 충족히 기록되고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실 필요성이 없다고 우리는 믿는다. 환상 중에 나타나신 주께서는 바울에게 두려워말고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후시대의 모든 전도자들에게 교훈이 된다. 오늘날 말씀의 봉사자들은 인간적으로 두렵고 낙심될 때가 있을지라도 두려워말고 잠잠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엄숙히 명했다(딤후 4:2).
[10-11]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주께서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두 가지이었다. 첫째는 주께서 바울과 함께하시므로 아무도 그를 대적하여 해롭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었다(마 28:20). 이 위로와 격려의 말씀은 모든 전도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우리가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은 오직 주의 손 안에 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성에 주의 백성이 많기 때문이었다. 전도자는 구원 운동의 도구이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전도자들을 통해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전도자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전도자는 낙심치 말고 담대히 말씀을 전해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주님의 위로와 격려를 받은 후 더욱 힘을 내어 고린도에서 일년 육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가르쳤다.
[12-13]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주후 51년 혹은 52년경, 갈리오가 아가야 지방의 총독이 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그를 데리고 재판 자리로 갔다. 바울의 전도 사역에는 이렇게 항상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그를 고소하기를 그가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율법에 예언된 분이요 율법을 성취하신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친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셨다(마 5:17).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여 그를 미워하였고 그를 믿는 제자들을 핍박하였다.
[14-17]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고 저희를 재판 자리에서 쫓아내니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치 아니하니라.
바울이 자신을 변명하고자 할 때 총독 갈리오는 유대인들에게 그 일이 도덕적 사건이 아니고 단지 종교적 사건이라는 이유로 그 고소를 기각하고 그들을 재판 자리에서 내쫓았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하신다는 표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전도 사역을 막으려는 유대인들의 고소를 이렇게 갈리오를 통해 막으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순교의 잔을 마실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그를 해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전도할 때 힘써 증거해야 한다. 물론 인간의 구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논리적으로, 열심히 증거하며 사람들을 설득한 것처럼, 전도자는 성령에 붙잡혀서, 논리적으로 그리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전도할 때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며 우리를 통해 택한 백성이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일학교 교사들과 구역 권찰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말씀의 봉사자들은 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있는 자들이다. 말씀 증거의 사역에는 항상 어려움이 있고 대적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인간적 두려움과 염려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계신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또한 오늘날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우리를 통해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이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말씀을 전하자.
18-23절, 하나님 중심의 사역
[18]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었고(11절) 유대인들의 소요가 있은 후에도 여러 날 거기 머물렀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났다. 그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그와 함께하였다. 아굴라는 남편이고 브리스길라는 아내인데, 성경에서 그 부부의 이름이 언급될 때 두 번 더(롬 16:3; 딤후 4:19) 본절처럼 아내의 이름이 남편보다 앞에 나온다. 그것은 주 안에서는 영적 특권에 있어서 남녀의 차등이 없음을 보이며(갈 3:28) 또 아마 그 아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남편보다 더 지혜와 지식이 있었음을 보이는 것 같다. 그 부부는 바울에게 좋은 동역자가 되었다. 로마서 16:3-4에서 바울은 증거하기를,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했다.
바울은 일찍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서원은 하나님께 맹세하며 약속하는 기도이다. 바울은 아마 고난과 위험 중에서 하나님께 서원했던 것 같다. 겐그레아는 고린도의 동쪽에 있는 항구 도시이다. 그는 거기에서 머리를 깎았다. 머리를 깎는 것은 서원 기간이 마칠 때 하는 것으로서 서원의 목표가 이루어진 후 그 서원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 그가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지키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서원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간섭과 역사를 구하는 것이었다. 서원은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의지하고 사모할 때 한다. 서원을 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고 순종하는 것이며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믿음의 행위이다. 옛날 이스라엘 왕 사울은 쉽게 맹세하고 쉽게 그 맹세를 깨뜨렸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한나와 입다와 다윗 같은 이들은 하나님께 서원했을 때 그 서원을 지켰다. 시편 15:4, "[하나님의 성산에 거할 자는]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19]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바울은 에베소에 도착하였다. 에베소는 애게 해 건너편에 있는 도시로서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이었다.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였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지만, 먼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다. 그에게는 분명히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었고 복음 전도에 대한 불 붙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때에는 에베소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20-21]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여러 사람이 그에게 더 오래 있기를 청했으나 그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들과 작별하였다. 전통사본에 보면, 그는 말하기를, "나는 다가오는 이 절기를 예루살렘에서 꼭 지켜야 하겠노라.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했다. 그가 말한 절기는 유월절 혹은 오순절일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는 말씀은 바울이 단순히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움을 나타낸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다 맡기며 언제나 그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잠언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야고보서 4:13-16,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22]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바울은 가이사랴에 상륙하였다. 가이사랴는 팔레스틴의 항구이다. '올라가'라는 표현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울이 회심한 후 예루살렘에 네 번째 올라간 일일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문안했을 것이다. 그런 후 안디옥으로 내려갔다. 안디옥은 수리아 안디옥으로서 그를 선교사로 파송했던 교회가 있는 곳이다. 이로써 그의 2차 전도여행은 끝났다. 1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과 특히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였었다(행 14:27). 그러나 이 번에는 더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 복음이 마게도냐 지방과 아가야 지방에 심겨졌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등 중요한 도시들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하신 일이었다. 안디옥 교회의 선교에 대한 깨달음과 열정과 순종, 전도자 파송과 기도와 후원이 하나님의 일을 가능하게 하였다. 각 곳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 구원얻는 영혼들이 생겨났고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교회 설립의 일들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바울은 안디옥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일로 인해 불타고 있었다. 그는 그 곳을 떠나 다시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들을 굳게 하였다.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땅은 그가 처음에 전도했던 비시디아 안디옥을 비롯하여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을 가리킬 것이다. 그는 두루 다니며 제자들을 굳게 하였다. 전도는 씨를 뿌리며 심는 것이고, 심방은 돋아난 싹에게 물을 주며 보살피는 것이다. 전도도 필요하고 심방도 필요하다. 목회에는 이 양면, 즉 전도와 양육의 두 측면이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간섭과 역사를 구하며 그에게 기도하고 모든 일을 그에게 의탁하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모하자. 또 하나님께 약속하는 기도를 드린 것이 있으면 그 약속을 잘 지키자. 그것이 바른 믿음이다. 그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자.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나 자신의 뜻이나 계획을 앞세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따라 살자. 하나님이 뜻하시고 기뻐하시고 허락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잘 될 것이지만, 그가 기뻐하시지 않고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 일도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를 붙들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힘쓰자. 우리는 수리아 안디옥 교회와 같이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든지, 아니면 파송받은 바울과 동료들처럼 실제로 전도 사역에 자신을 드려 전도하고 구원얻은 자들을 돌아보든지 간에, 하나님의 일을 힘쓰자. 전도와 심방 혹은 양육은 다 하나님의 일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 즉 하나님께서 자기 외아들에게 부탁하셨던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을 죄에서 구원하고 그를 믿음 안에 굳게 세우는 일이다. 그것은 참된 교회를 건립하는 일이다.
24-28절, 아볼로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아볼로라 하는 한 유대인이 에베소에 왔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이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 당시 애굽의 수도이었고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이었다. 그 도시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주전 3세기에는 거기에서 구약성경의 70인 헬라어역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 곳에 필로라고 하는 유명한 헬라파 유대인 철학자가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아볼로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며 공부를 했고 성경을 배웠다.
[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아볼로는 일찍 주의 도를 배웠다. '일찍'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내려오신 오순절 이전을 가리킬 것이다. 그는 일찍부터 주의 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배웠고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다. 그는 예수님의 교훈들과 행위들에 대해 많이 알았던 것 같고 그것들에 대해 자세히 가르쳤다.
그러나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요한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와 대조되는 말일 것이다. 요한은 말하기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했다(마 3:11). 또 부활하신 예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행 1:5). 아볼로는 아직 사도들을 통해 복음을 바로 듣지 못했던 것 같고 성령을 받지 못했다. 그는 성령께서 그의 속에 거하심과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는 아직도 오순절 이전 시대에 살고 있었다.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했으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들은 그에게 공적으로가 아니고 사적으로 복음을 더 자세히 설명해준 것이다. 그 내용은 그들이 사도 바울에게서 배운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 내용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의미,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의 약속, 그의 피로 죄사함 받음과 의롭다 하심 얻음 등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아볼로는 학문이 많은 자이었으나 천막 만드는 자들인 아굴라 부부에게 겸손히 진리를 배웠다. 기독교 신앙 지식은 세상 지식이 많고 적음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아볼로는 아굴라 부부를 통해 아마 성령의 오심과 역사하심을 체험했을 것이다.
[27-28]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아볼로가 아가야 지방 즉 고린도로 건너가고자 했을 때 에베소에 있는 형제들은 그 곳의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그를 영접하라고 부탁하였다. 아볼로는 그 곳에 가서 성경을 가지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힘 있게 유대인들의 말을 이김으로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 본문은 믿는 자들을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음을 나타낸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께로 나올 수 없고 그를 진심으로 믿을 수 없다(요 6:44).
19장: 에베소에서 전도함
1-7절, 에베소의 어떤 제자들
[1-2]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여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들을 굳게 한 후(행 18:23) 하나님의 뜻 가운데 에베소에 왔다. 그는 전에 거기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말했었다(행 18:21). 거기에서 그는 '어떤 제자들'을 만났다. '제자'라는 표현은 사도행전에서 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바울의 짧은 전도나 아볼로의 가르침 혹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전도로 믿은 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는 바울의 질문에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하였다. 사도 시대에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았다(갈 3:2). 성령을 받는 것은 신약 성도의 특권이며 큰 복이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4:16). 또 사도 시대에는 성령을 받은 증거로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났었다. 그러나 에베소의 그 제자들은 그런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3-5]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그 제자들은 단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요한의 뒤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참 신자로서는 부족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믿기는 했으나 세례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사도들을 통해 세례를 받음으로써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바울의 권면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6-7]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오셨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신자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오신 것과 같았다(행 8:17). 하나님께서는 두 경우 다 사도들을 통해 새 신자들이 성령을 받게 하셨다. 에베소의 그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증거로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전달하고 확증하는 뜻이 있었다. 그들의 수는 약 열두 명이었다. 그 열두 명 가량의 사람들은 에베소 교회의 설립교인들이 되었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령을 받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성령을 받는 것이 신약 성도의 특권과 복이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게 된다. 에베소의 어떤 제자들은 신약 아래 있었던 구약적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성령님은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약속된 분이시며 그를 받는 것은 신약 성도의 특권과 복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그는 항상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신다. 성도들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어떤 역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다. 또 성령께서는 우리로 선한 열매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들을 맺게 하신다. 또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전도하고 봉사할 힘과 능력을 항상 공급하신다.
그러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에 관하여, 그것은 사도시대의 일시적 현상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기적은 특별한 시대에 특별한 목적으로 주신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그 확증을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성경 말씀의 교리들과 윤리적 교훈들로 충분하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교리들을 다 믿고 모든 생활 교훈들을 힘써 실천하면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초자연적 은사가 아니라, 모든 죄를 떠나는 거룩한 삶과 서로 사랑하는 삶이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 속에서 거룩한 삶과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8-22절, 에베소에서의 전도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바울은 아마 안식일마다 회당에 들어가 강론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석 달 동안 12번 이상 설교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했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의 요지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외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살던 불경건한 삶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의 말씀 앞에 복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구원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에게 복종하는 삶이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담대히 강론하였고 권면하였다. 강론하다는 원어는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을 骕하며 권면하다는 원어는 설득하며 권하는 것을 뜻한다.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버려두신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의 죄 가운데 그대로 버려진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이다. 에베소 회당 안에는 그런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음이 굳고 완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거부하였다. 그들은 마치 딱딱한 길가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흙을 파서 고르지 않으면 씨가 심기울 수 없을 것이다. 통회하여 온유해진 마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받을 수 없다. 이 불신앙적인 자들은 무리 앞에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비방하였다. 하나님이 보내신 전도자의 말을 비방한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비방한 것이었고 하나님이 보내신 전도자를 거부한 것은 곧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었다.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워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강론하였다. 교제할 때가 있고 분리할 때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종을 통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무리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이들이 섞여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이들이 많을수록 그 교회는 무기력한 교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이들이 적을수록 그 교회는 힘 있는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는 많은 수가 모이는 데 의미가 있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진실하고 순종하는 자들이 모여 서로 사랑하고 주를 섬기는 데 의미가 있다. 적은 수라 하더라도 한 마음, 한 뜻으로 단합하여 주를 섬기는 교회가 교회답다. 바울은 믿고 순종하는 그들을 위해 날마다 말씀을 강론하였다. 말씀을 전하는 열심이 바울에게 있었고 말씀을 듣는 열심이 교인들에게 있었다.
[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두 해 동안은 안식일이 100번 이상이다. 만일 일주일에 세 번씩 전했다면 그는 그 곳에서 300번 이상 설교 혹은 강론할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다. 기독교는 단순히 어떤 삶이나 체험이 아니고 바른 사상에 입각한 삶이요 체험이다. 2년 동안의 바울의 말씀 사역을 통해 그 당시 로마의 한 행정구역인 아시아 지방에 주의 말씀이 널리 전파되었다.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듣게 되었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풍성한 말씀의 잔치이었다.
[11-16]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기적들을 행하셨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들에게 얹으면 그 병들이 떠나고 악귀들 혹은 악령들도 나갔다. 어떤 마술하는 자들, 특히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바울이 전한 예수의 이름으로 비슷한 흉내를 내다가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그들을 억제하여 이김으로 그들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치는 일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행하는 기적을 통해 그가 전한 말씀이 진리임을 능력으로 증거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도 시대에 주신 기적들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진리임을 확증한 표이었다. 히브리서는 증거하기를,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고 했다(히 2:3-4).
[17-19]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기적보다 더 놀라운 일은 많은 사람들의 회개이었다. 하나님의 복음과 능력의 일에 대해 들은 사람들은 다 두려운 마음을 가졌고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고 믿은 자들은 많이 사도 앞에 와서 자복하고 행한 일들을 고하였다.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었다. 그 책값은 은 오만이나 되었다. 은 50,000은 당시의 보통 노동자가 50,000일 동안, 즉 137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매우 큰 금액이었다. 이 사건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어떻게 철저하게 회개했으며 죄악된 일들을 청산했는가를 보여준다. 구원은 참된 회개 즉 죄의 청산을 동반한다. 죄의 청산은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한 자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 한다.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전도의 역사이다. 사도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었고 흥왕하고 세력을 얻었다. 사도행전 6장에는 증거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고 했고(행 6:7), 사도행전 12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증거했고(행 12:24), 본절에는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힘은 곧 하나님의 힘이며 성령의 힘이다. 전도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힘 곧 하나님의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21-22]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바울은 2년 3개월 간의 에베소에서의 전도 사역을 마친 후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심령으로 계획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그 즈음에 쓴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고 말했다(16:8-9). 그의 에베소 전도 사역은 많은 결실을 맺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를 생각한다. 첫째로,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 3개월 이상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였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깨닫고 믿고 행하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무엇보다 설교와 성경공부가 중요하다. 느헤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자와 여자, 무릇 알아 들을 만한 자들이 다 수문 앞 광장에 모였고 학사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였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였다(느 8:2-3, 8). 신약의 성도들도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둘째로, 사도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기적들로 확증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실 때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다. 기독교는 기적들을 믿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적주의는 아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다(고전 1:22-24).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불변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기적의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지만, 오늘날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외적인 기적을 통해 일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의 중생(重生)과 회개와 믿음 등 구원의 역사는 언제나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내면적 기적이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더불어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셋째로, 참된 말씀의 사역은 참된 회개의 역사를 가져온다. 참된 회개는 죄의 청산을 동반한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바른 말씀, 즉 성경적 설교와 강론을 통해 죄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고 교회가 부흥하고 든든히 세워진다.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히 4:1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다. 우리는 오늘날도 참된 말씀, 성경적 설교와 강론이 힘있게 역사하기를 기도하자.
23-41절, 에베소 성의 소요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바울의 2년 3개월 사역을 통해 에베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시아에 널리 증거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던 때,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던 그 때에, 이 도(道)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다. 진리 운동에는 때때로 갈등과 싸움이 있다. 예수께서는 "내가 화평을 주러 오지 않았고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다(마 10:34-39). 인간의 무지함이나 사탄의 역사로 인해 그런 갈등과 싸움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진리를 위해 일하는 자들은 그런 소동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24-25]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소동의 주동자는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었다. 그는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드는 일을 했다. 아데미는 에베소 사람들이 섬기던 이방신이며 '은감실'이란 은으로 만든 신주 궤를 가리킨다. 데메드리오와 그 직공들은 그 신주 궤를 만드는 일을 통해 적지 않은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우상숭배가 번창할수록 그들의 사업은 확장되었고 수입이 늘었을 것이다. 그런데 데메드리오는 바울의 전도가 그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자기 공장의 직공들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을 선동하며 소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26-27]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선동한 내용, 그가 바울을 핍박하는 이유가 되는 내용은 두 가지이었다. 첫째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는 바울이 전하는 말 때문에 그들의 영업만 천하여지고 아데미의 전각이 경홀히 여김이 되고 그의 위엄도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잘못된 종교적 지식과 믿음에서 온 것이었다. 둘째는, 그 결과 자기들에게 적지 않은 돈벌이가 되고 자기들의 유족한 생활의 기반이 되는 은감실 만드는 일이 쇠잔해질 위험이 있다는 것, 즉 소득 감소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 관계의 싸움은 주로 이권 문제에서 생긴다. 물질적 이해 관계를 초월한 사람은 싸울 일이 없을 것이다.
[28-31]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가는지라.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데메드리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분이 가득하였다. 그의 말은 군중을 분노케 하는 데는 성공적이었다. 그들의 소동은 확실히 감정적이었다. 그들은 "크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데미여" 하고 외쳤다. 온 성은 그로 인해 요란하였다. 그들은 바울과 같이 다니던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갔다. 바울도 그리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제자들이 말렸고 관원 중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도 그에게 통지하여 만류하였다.
[32-34]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발명하려 하나 저희는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 동안이나 하더니.
소동하는 무리들 속에는 오직 군중 심리만 있었다. 모인 자들 중 다수는 그들이 왜 모였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이 말, 다른 이들은 저 말을 할 뿐이었다. 거기에는 정정당당하게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가 없었고 그런 토론은 불가능하였다. 유대인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말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무리들은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며 두 시간 동안이나 외쳤다. 에베소성에서의 소동의 실상은 그러하였다. 그것은 지극히 비인간적인 군중 심리이었다.
[35-37]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성이 큰 아데미와 및 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전각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훼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잡아 왔으니.
그 소동은 그 성의 서기장에 의해 겨우 진정되었다. 서기장은 사람들의 종교적 생각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는 그들이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거나 아데미 여신을 훼방하지 않은 자를 잡아온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모든 일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들이 사람을 체포하거나 구금할 때는 거기에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바울의 동역자 몇 사람을 체포, 구금한 것은 타당한 이유가 없었다.
[38-41] 만일 데메드리오와 및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송사할 것이 있거든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거든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단할지라.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의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가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다 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데메드리오는 바울에 대해 사람들을 선동하는 식으로 대처해서는 안되었다. 그 당시 에베소 성에는 재판 날들도 있었고 총독들도 있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송사할 일이 있으면 그는 정식 재판 절차를 밟아서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데메드리오는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았다. 그러므로 서기장은 그 집회에 대해 지적을 받을 것을 염려하면서 정식 재판을 하라고 권면한 후 그 모임을 해산시켰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진리 운동에는 항상 싸움과 갈등이 있다. 모세의 광야 목회가 그러하였고 다윗의 국가 목회도 그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많은 싸움과 갈등을 이겨내셨다. 진리 운동에서 생기는 싸움과 갈등은 선한 싸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 운동의 과정에서 보는 갈등과 싸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잘못된 싸움을 피해야 한다.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료들의 바울을 향한 싸움은 잘못된 싸움이었다. 첫째, 그들은 잘못된 지식 때문에 즉 이방신과 우상에 대한 잘못된 지식 때문에 싸웠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교훈 안에서 행하면 잘못된 지식이 교정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성경 안에서만 건전한 토의와 신사적 인격의 덕을 가질 수 있다. 둘째, 그들은 이권 때문에 싸웠다. 물질에 대한 욕심은 눈을 어둡게 하고 분별력을 없게 만든다. 셋째, 그들은 감정 때문에 싸웠다. 자존심이나 자신의 명예가 상한다고 느낄 때 사람은 감정적 싸움에 떨어지기 쉽다. 넷째, 그들은 군중심리에 이끌려 싸웠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정당한 토론이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류의 싸움을 피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합법적 절차를 따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서기장은 데메드리오에게 정식 재판을 하라고 말했다. 우리가 무엇을 판단하려면, 그 소송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그것이 정당한 절차를 밟고 있는지, 그것을 위해 원고와 피고가 발언할 기회를 가지는 정당한 사건 심리가 있는지 등을 살핀 후에 판단해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양심적으로 생각하는데, 하물며 교인들이 어떤 문제를 판단할 때 그런 정당한 과정을 밟아서 정당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 아닌가? 교회는 정당하고 덕스러운 회의를 통해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20장: 에베소 장로들에게 권면함
1-12절, 유두고 사건
[1-2]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에베소에서 데메드리오가 선동한 불법 집회 소동이 있은 후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인사하고 포옹하며 그들을 떠나 마게도냐로 갔다. 마게도냐는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성이 있는 지역이다. 바울은 그 지역을 지나며 제자들을 권면하였고 헬라에 이르렀다. 헬라는 고린도 성이 있는 곳이다. 바울은 자기가 전도했던 곳들을 방문하여 신자들을 권면하였다. 신앙생활에 교훈과 권면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나쁜 말은 나쁜 영향을 주지만, 바르고 좋은 말은 바르고 좋은 영향을 준다. 바른 교훈과 권면을 많이 받을수록 성도들은 그 신앙과 인격, 말과 행동과 삶이 온전하여질 것이다.
[3]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바울은 헬라에 석 달을 머문 후 배 타고 수리아로 가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그를 해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항상 사탄과 악한 자들의 대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다 이루실 것이므로 그의 종들도 맡은 직무를 행함에 있어서 두려워하거나 위축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헤롯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3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라"고 하셨다(눅 13:32-33). 사명자는 어떤 형편 처지에서도 자신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핍박을 피할 수 있을 때는 피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치 않는 것이다. 바울은 헬라에서 아시아로 직접 배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마게도냐로 돌아서 가기로 결정했다.
[4-5]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어렵고 힘든 전도여행의 길이지만, 바울과 함께 동행하며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 등 모두 일곱 명이었다. 거기에 바울의 첫번째 동역자인 실라가 있고 또 사도행전을 쓰고 있는 누가가 있었다. 바울의 전도단은 바울을 포함하여 적어도 열 명이었다. 처음에 언급된 일곱 명은 먼저 아시아의 드로아에 가서 '우리' 즉 누가를 포함한 바울과 실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로아는 아시아 지방의 항구 도시이었다. 그들은 고난 중에서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는 형제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도 주시지만 위로도 주신다.
[6-8]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바울은 무교절 후 빌립보에서 출발하여 닷새만에 드로아에 도착했고 거기서 7일을 머물렀다. 거기에 머물면서 안식 후 첫날 혹은 주간의 첫날 즉 일요일에 제자들은 떡을 떼기 위해 모였다. '떡을 뗀다'는 말은 성찬식을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사도 시대에 벌써 예수 믿는 신자들이 주일 집회를 가졌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안식일은 토요일에서 주일로 변경되고 있었다. 토요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완성되었고(골 2:16-17),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의 부활의 날로서 주일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지키기 시작했다. 신약 아래서 주일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서 그리고 공적인 예배의 날로서 기쁘게 지켜지고 있다. 바울은 이튿날 떠나기 위해 성도들에게 말씀의 강론을 한밤중까지 계속하였다. 그들이 모인 윗다락에는 등불들이 많이 켜 있었다. 그들은 시간의 제약을 느끼지 않고 주일 특별집회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강사는 주의 귀한 종이며 성경말씀에 정통한 사도 바울이었다. 그들의 집회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의 충만함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그 때 큰 어려운 일이 생겼다. 하나님의 충만한 말씀의 잔치 시간에 큰 시험이 생긴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에는 종종 어려움이나 시험이 있다. 그 어려움은 믿음 없는 한 청년에 의해 일어났다. 유두고라는 이름의 그 청년은 그 은혜로운 집회 시간에 창에 걸터 앉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오 믿음 없는 젊은이여! 그 귀한 사도 바울의 설교 시간에 깊은 잠에 떨어져 있다니! 잠에 빠졌던 유두고는 마침내 사고를 일으켰다. 바울은 조는 젊은이 때문에 강론을 줄이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그 밤에 더 오래 강론하였고 잠을 이기지 못하던 유두고는 마침내 3층 다락에서 떨어졌고 일으켜 보니 죽었다. 공적 집회 시간에 사람이 죽다니 이 얼마나 큰 시험거리인가!
[10-13]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바울은 내려가서 그 청년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생명의 박동소리가 그에게 들렸다. 죽었던 그에게서 생명의 박동소리가 났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었다. 그는 교인들에게 그에게 생명이 있으니 떠들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바울은 다시 올라가 예정대로 설교를 마치고 떡을 떼어 먹으며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날이 새기까지 오랫 동안 그들과 이야기한 후 그곳을 떠났다. 제자들 속에는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충만했음에 틀림 없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살아난 아이를 인해 큰 위로를 받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주의 말씀을 귀중히 여기며 항상 말씀 중심으로 모이기를 힘쓰자.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과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성경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교회로 모일 때 성경적 설교를 사모하고 말씀에 마음을 기울이며 또 교회에서 서로 교제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로 권면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모일 때 힘을 얻고 영적으로 자라갈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신앙의 여정에 때때로 어려운 일이 있음을 알자. 바울의 전도 여정에는 유대인들의 핍박이 자주 있었다. 바울은 헬라 지역에 삼개월 머물 때에 유대인들이 그를 해치려고 공모하는 일을 알게 되어 피신하였다. 또한 그가 드로아에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한밤중까지 강론할 때 유두고라는 청년이 죽는 사고가 생겼다. 신앙생활에는 마귀의 시험이 있고 우리를 두렵게 하고 낙심케 하는 일들이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그런 일이 있을 때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말자.
셋째로, 우리는 어려운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이 있음을 잊지 말자. 바울에게 교제를 나눌 성도들과 그를 돕는 동역자들이 있었듯이, 또 죽었다고 판단되었던 청년 유두고가 회생함으로 바울 자신과 모든 제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듯이,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우리에게 위로거리를 주시고 또 시시때때로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13-27절, 바울의 전도 사역
[13-16]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은 앗소, 미둘레네, 기오, 사모, 트로길리움을 거쳐서 밀레도에 이르렀다. 밀레도는 에베소에서 가까운 항구도시이었다. 전통사본에는 "사모에 들리고"라는 말 다음에 "트로길리움에 머물고"라는 구절이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에베소를 다시 들리지 않고 지나 가기로 노정을 정하였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있기 위해 바쁘게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17-19]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모이게 하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이 에베소에서 어떻게 전도의 일을 했는지에 대해 증거하며 교훈을 주려고 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이 모든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주를 섬겼다고 증거한다. 그는 에베소에서도 많은 고난을 받았다. 악한 자들은 바울과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방하였고 데메드리오는 온 성을 소동시키기도 하였다. 유대인들도 간교하게 그를 낙심시키는 시험을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고난 속에서도 모든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주를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의 사역은 모든 전도자들에게 본이 된다.
[20-21]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바울은 또한 유익한 것은 무엇이나 전하고 가르쳤다고 증거한다. 그것은 그가 전하고 가르친 내용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물론 사람이 믿어야 할 내용과 행해야 할 내용을 포함할 것이다. 그것은 실상 모든 성경에 관계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바울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들을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서든지 전하며 가르쳤다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말고 가르치지 말아야 할 시간과 장소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 어디서나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또 그 말씀들을 거리낌 없이 즉 담대하게 전하고 가르쳤다고 증거한다.
특히 그가 전한 내용의 핵심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사람은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그는 회개와 믿음을 전한 것이었다. 회개와 믿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실상 하나이다. 사람은 회개해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참으로 믿은 자는 죄를 떠나야 한다. 참 믿음은 죄를 회개함을 전제하며 그것을 동반한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오늘날도 교회가 힘써 전해야 할 중심 내용이다.
[22-24]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심령에서 나온 굳은 결심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강권하심 속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각 성에서 받은 성령의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문제로 여기지 않고 기쁨으로 그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 그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즉 그는 죽을 각오로 복음사역에 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셨다(눅 9:23-24). 그것은 모든 시대의 전도자들에게 본이 된다.
[25-27]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요지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한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중심 주제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말이요 죄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것이요 회개와 순종과 의는 하나님의 통치를 겸손히 받아들인 것이다. 죄를 회개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심령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
바울은 또 그들이 더 이상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예언적 발언을 한다. 아마 그것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 같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로마로 압송될 것이며 이제는 로마와 또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서바나 전도에 힘쓸 것이다. 그는 로마에서 순교를 당할 것이다. 그는 에베소 교인들의 얼굴을 세상에서 다시 보지는 못할 것이다.
바울은 또 자신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증거한다. 그 이유는 그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뜻을 거리낌 없이 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사람이 믿어야 할 바와 행해야 할 바를 포함한다. 즉 그것은 모든 교리와 윤리를 포함한다. 피는 사람의 죄책과 그 결과인 멸망을 가리킨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자나 불순종하는 자는 그들의 죄와 멸망에 대해 그들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바울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도자의 임무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겔 3:18-19).
본문은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전도 사역의 면모를 증거한다. 그는 모든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주님을 섬겼다. 그는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전하며 가르쳤다. 그는 전도자의 사명 완수를 위해 죽을 각오로 사역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전함으로써 전도자의 임무를 다했다.
본문의 내용은 후시대의 모든 전도자들과 직분자들에게 교훈이 되며 모범이 된다. 첫째로, 우리는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주님을 섬기자. 둘째로, 우리는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전하며 가르치자. 셋째로, 우리는 사명과 직분 완수를 위해 죽을 각오로 일하자.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전함으로 전도자와 성도의 책임을 다하자.
28-38절, 장로들의 직무
[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밀레도에 모인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장로의 직무를 잘 감당하도록 권면하였다. 본문이 증거하는 대로, 장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감독자로 세움을 입은 자이다. 끝부분을 전통사본대로 다시 번역하면, "그가 자기 피로 사신 주 하나님의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교회는 주 예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은 계산할 수 없이 크다. 주께서는 지극히 큰 값을 지불하여 우리를 사셨다. 여기에 성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셨는지가 나타난다. 여기에 또한 하나님께서 여기시는 성도들의 가치가 있다. 교회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시고 구원하신 교회이며 하나님께서 설립하시고 소유하시고 다스리시는 교회이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양들인 구원받은 성도들을 가운데서 그들을 먹이고 돌보게 하기 위해 성령께서 세우신 자들이다. 장로들은 양들을 돌보는 감독자와 목자이다. 목자는 양을 먹이고 양을 돌본다. 양들을 먹이는 것은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교훈하는 일이며 양들을 돌보는 것은 교인들을 심방하여 권면하거나 위로하거나 책망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장로'라 함은 장로교회의 목사와 장로를 다 포함하는 말이다. 장로교회 헌법에 보면, 장로는 두 반이 있으니 강도(설교)와 치리를 겸한 자를 목사라 하고 치리만 하는 자를 장로라 한다고 말했다.
장로들은 양들을 돌보는 직무를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위해 그리고 온 양떼를 위해 조심해야 한다. 장로들은 바른 말씀의 지식과 믿음, 그리고 바른 인격과 삶을 간직해야 한다. 그들은 양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고 그래야 양들을 잘 돌아볼 수 있다. 자신들이 범죄하거나 연약에 떨어지면 양들을 바르게 가르치거나 권면하고 인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권면하기를,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였다(벧전 5:3).
[29-30]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원문에는 29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장로들이 조심해야 할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흉악한 이리가 교회에 들어올 것이며 또 어그러진 혹은 사악한 말을 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들어오든지 내부에서 일어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교훈에서 떠나는 것이 이단이며 교회의 장로들은 그런 이단을 조심해야 한다. 이단들은 양들을 아끼지 않고 타락시키며 바른 교훈에서 떠나게 한다. 마귀는 이런 방식으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부패시킨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단번에 주신 복음에서 떠나는 것은 저주받을 큰 악이라고 말했다. 갈라디아서 1:8-9,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의 교훈이 중요하다. 교회에서는 성경적 설교가 중요하다. 우리는 사도들로부터 전달되어 오는 역사적 기독교, 성경적 기독교를 바르게 파악하고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바른 말씀 즉 역사적 기독교를 바르게 알고 분별해야 하고 그것을 확고하게 지켜야 한다. 로마서 16:17-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디모데후서 1:13-14,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역사적 기독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그리고 칼빈, 핫지, 벌코프, 박형룡 등의 신학책들에 증거되어 있는 개혁신학에서 잘 나타나 있다.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탄의 역사로 교회가 부패되고 변질되기 쉬우므로, 바울은 에베소에 있을 때 그들에게 밤낮 쉬지 않고 부지런히 가르치고 권면했고 눈물로 진지하고 간절하게 각 사람을 훈계하였다. 이제 그는 장로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기억하면서 조심하라고 말한다. 바울은 모범적인 사역자이었다. 오늘날 복음 사역자들도 바울을 본받아 부지런하고 간절하게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훈계해야 할 것이다.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이제 그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바울은 그들과 교회를 하나님과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하나님은 가장 좋은 교사요 권면자요 책망자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에게 의탁하는 것은 가장 좋은 방책이다. 또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만드실 때부터 오늘날까지 말씀으로 일하시는 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요지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은 죄사하심과 의롭다 하심의 은혜를 증거하는 말씀임을 나타낸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든든히 세우며 우리로 거룩케 하심을 입은 자들의 회, 즉 현재 참된 교회와 미래에 영광스런 천국에 들게 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충성되어야 하고 또 성경의 교훈에도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강론하고 배우고 묵상해야 한다.
[33-35]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의 모범적 사역은 그가 물질적 탐심을 가지고 일하지 않은 점에서도 드러난다. 바울은 교인들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일함으로써 자신의 필요와 자기 동행자들이 필요를 충당하였다. 그는 결코 게으르지 않았고 교인들에게 물질적 부담을 주지 않았다. 바울은 그렇게 본을 보임으로써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도 몸이 약해 일을 못해서 물질적으로 궁핍한 자들을 돕는 자들이 되게 하려 하였다. 주 예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 탐심을 버리고 성실히 일함으로써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36-38]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바울은 모든 권면을 마친 후 무릎을 꿇고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함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들은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들에게는 피차 뜨겁고 진실한 사랑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장로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장로들은 우선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바른 지식과 믿음, 바른 인격과 삶을 가짐으로써 그리고 바울처럼 물질적 탐심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손으로 일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자가 됨으로써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 장로들은 주께서 피로 사신 양들을 먹이고 지키고 돌보아야 하며, 또 그러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잘못된 사상과 교훈으로 교회를 부패시키는 이단들을 분별하고 막아야 한다.
둘째로, 교회를 끝까지 지키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다. 그 방법은 우선 하나님께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요,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도록 하는 것이다. 교회가 성경적 설교와 권면을 사모하고 그 교훈 안에 거하면 부패하지 않고 탈선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위해 성경책을 주셨다.
21장: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감
1-14절,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려고 결심함
[1-4]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바울 일행은 밀레도에서 떠나 고스와 로도와 바다라를 지나 두로에 도착했다. 그들은 두로에서 제자들을 찾아 7일을 머물렀다. 바울은 그들과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자들은 다 한 가족이다. 두로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받을 핍박과 고난을 예감하면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이미 굳은 결심을 한 터이었다.
[5-6]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쌔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바울 일행은 두로에서 여러 날을 지난 후 그곳의 제자들과 작별하였다. 두로의 제자들은 그들의 아내들과 자녀들과 함께 바울 일행을 성문 밖까지 전송하였고 그들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곳의 제자들이 가족들과 함께 바울을 전송한 것은 그들이 가족적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을 잘 나타낸다. 온 가족이 다 한 마음과 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는 가족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 그들이 다 함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드린 것은 그들의 기도가 간절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기도에 잘 응답하신다. 바울은 그 기도를 통해 두로의 제자들의 평안과 신앙적 성장과 열매 맺기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며 의탁했을 것이고, 두로의 제자들은 바울 일행의 예루살렘 방문과 그곳에서의 안전과 계속되는 그의 전도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며 의탁했을 것이다. 성도의 교제는 권면과 기도의 교제이다.
[7-9]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바울 일행은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그곳의 형제들과 교제하였고 이튿날 가이사랴에 이르러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 유하였다.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가 구제와 봉사의 일을 위해 선택하여 세웠던 일곱 명 중 한 사람이었다(행 6장). 그 일곱 명의 직무는 집사의 직무라고 생각된다. 빌립은 또 하나님의 은혜로 사마리아에 최초로 복음을 전했고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자이었다(행 8장). 그에게는 네 딸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 처녀들로서 예언하는 자들이었다.
빌립의 네 딸들이 예언하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은 남녀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특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의 직분에 일반적으로 남자를 세워 그의 일을 행하셨고 신약 시대에도 사도와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직분에 남자를 세우시고 또 여자들이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교훈하셨지만(고전 14:34-38; 딤전 2:11-14), 비상할 때에는 예외적으로 여자들에게도 예언이나 기타 은사를 주셨다. 구약시대에 미리암과 드보라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10-11]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사도 시대에는 사도들 외에도 예언의 은사를 받은 평신도들이 있었다. 선지자 아가보도 그 중의 하나이었다. 그는 유대로부터 가이사랴로 내려와 바울에 대해 예언하였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증거하였었다(행 20:23). 그것은 다른 곳의 어떤 제자들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그가 당할 고난에 대해 이미 예언하였음을 보여준다. 선지자 아가보도 비슷한 예언을 하였다. 그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잡아매고 성령으로 예언하기를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띠 주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말했다.
[12-13]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과 함께했던 자들은 빌립과 가이사랴 성도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눈물로 권하였다. 그들의 권함은 진지하였고 간곡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올라가려는 바울의 결심은 확고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회의(주후 49년경) 이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했던 것 같고 예루살렘을 사모하였던 것 같다. 그는 2차 전도여행(51년경)에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등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서 전도하였다. 3차 전도여행(54년경)에서는 소아시아 지역과 특히 에베소에서 전도하였고 그 후 그는 마게도냐와 아가야(헬라) 지방을 거쳐 밀레도를 경유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였던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한 것은, 예루살렘을 사모한 이유 외에도, 또한 아시아와 마게도냐에서 더 이상 그가 전도할 곳이 없었고 예루살렘 방문 후 로마와 서바나까지 가기를 소원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도행전 19: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로마서 15:23-26,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로마와 서바나는 당시에 땅끝이었다. 그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하였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려는 그의 결심은 확고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
[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바울이 권함을 받지 않자 그의 동료들과 그곳의 성도들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면서 권하기를 그쳤다. 바울이 동료들과 성도들의 권면을 거절하며 예루살렘에 올라가려고 굳게 결심한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위해 그런 각오를 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일을 위해 그러하였다. 사람의 결심은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 사람이 어떤 결심을 하든지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하신 바를 다 이루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성도들의 교제를 귀히 여기며 힘쓰자. 특히 온 가족들이 함께 주를 섬기면서 서로 교제하자. 바울은 가는 곳마다 성도의 교제를 힘썼다. 그들의 교제는 교훈과 격려가 있는 교제이었고 무릎을 꿇고 기도함이 있는 교제이었고 눈물로 권면함이 있는 교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거룩한 교제를 기뻐하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 되자. 두로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은 권면하였다. 빌립의 네 딸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었다. 아가보는 성령으로 예언하는 자이었다. 오늘날은 사도 시대처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를 체험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동일한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의 심령 속에 거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우리는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믿고 체험하자.
셋째로, 우리는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며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자.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 후 로마와 서바나까지 가서 전도하기를 원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심이 있었고 하나님이 주신 직분에 충성하려고 하였다. 그는 전도자로서의 그의 일을 위해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셨다. 주의 사도들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갔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며 하나님의 일들과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에 충성하자.
15-26절,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감
[15-20]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쌔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 . . .
바울은 가이사랴에 여러 날 머문 후(10절), 짐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가이사랴의 몇 제자들도 그와 함께 갔고 특히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도 함께 하였는데, 바울의 전도단 일행이 그의 집에 유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형제들은 그들을 기쁨으로 영접하였다. 그 이튿날 바울은 일행들과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갔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갈 1:19)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 곳에는 다른 장로들도 있었다.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에게 문안하였다. 또 그들에게 자신의 전도사역에 대해 낱낱이 보고하였다. 그것은 물론 의무사항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의 사역자들이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서로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특히 야고보에게 문안한 것은 좋은 본이 된다. 교회는 주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서로 교제하고 서로 문안해야 할 것이다. 바울과 야고보는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교회의 일꾼들이었다. 성도의 교제는 항상 즐겁고 복된 일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다.
또 바울은 그들에게 보고할 때 자신의 전도사역을 하나님께서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하시고 이루신 일들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전도자들의 사역은 순전히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한 명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사신 구주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구원해내신다. 바울의 전도 보고를 들은 야고보와 장로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의 최선의 봉사라 할지라도 그 봉사의 결과로 인한 영광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행한 모든 선한 일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무런 선한 일을 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22]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은 바울에게 한가지 근심된 사실을 말했다. 그것은 믿는 유대인들의 문제이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은 수만명에 달하였다. 그들은 다 율법에 열심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에 대해 잘못된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지식은 매우 제한적이고 또 빈번히 잘못되기 일쑤이다.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들 세계에서 유대인들을 가르치기를,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치 말고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규모'라는 헬라어(에도스)는 '관습'을 가리킨다. 그것은 잘못된 지식과 정보이었다. 그들은 이 잘못된 정보 때문에 바울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들 것이 분명하였다. 유대인들의 저항은 예견되는 일이었다.
[23-26]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 된 것을 고하니라.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은 한 방책을 생각해내었다. 그것은 바울로 하여금 결례를 행하게 함으로써 그가 율법과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습을 지키는 자임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방책이었다. 이 결례의 규례는 구약 민수기 6장에 나오는 나실인 규례를 가리키는 것 같다. 거기에 보면, 자신을 거룩하게 성별한 나실인은 그 성별 기간이 끝날 때 번제와 속죄제와 화목제와 소제 등 규정된 제사를 드리고 자기의 머리털을 밀어야 했다. 사도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의 규례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은 과도기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주를 믿는 이방인들에게는 단지 네 가지만 조심하도록 예루살렘 총회가 결의한 바가 있었다. 그 네 가지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섞여 있는 초대교회의 과도기적 방침이라고 이해된다. 25절에서 "피할 것을 결의하고"라는 구절은 전통사본에는 "피할 것 외에는 그런 것을 지키지 않도록 결의하고"라고 되어 있다. '그런 것'이란 할례나 전통적 관습 등을 가리킬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방책에 동의하고 그것을 준행하였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혹은 하나됨을 힘써 지키자. 우리는 교회의 거룩과 화평을 둘다 함께 지켜야 한다. 교회는 교리적, 윤리적 오류가 없는 순결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동시에, 또 서로 분열과 다툼이 없는 일치된 교회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행한 선한 일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성과 연약을 가진 부족한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믿는 다른 형제를 향해 마음을 넓게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정보를 가져야 하고 모든 일을 신중하게 판단하고 말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의 지식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또 우리의 완고한 마음이나 편협한 마음을 버리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관용하려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저 믿는 유대인들처럼 편협하고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마음을 넓게 가져야 할 것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뜻, 영혼들의 구원 등의 큰 일과 목표를 생각하면서 현재 우리가 처한 환경여건에 적응하려 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러하였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27-40절, 예루살렘 성의 소동
[27-30]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를 보았고 그의 말을 들었으나 그가 전하는 복음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핍박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와 성전에서 바울을 보았고 그를 잡아 죽이려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였다. 사람의 말은 영향력이 있다. 진실하고 좋은 말은 좋은 영향을 끼치지만, 거짓되고 악한 말은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 유대인들의 말은 바울에 대해 잘못된 생각에서 나왔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율법이나 예루살렘 성전을 훼방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바울을 그렇게 잘못 생각했고 또 바울이 헬라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에 대해 잘못 생각하였다. 그들의 잘못된 생각에서 거짓되고 악한 비난과 선동의 말이 나왔다. 그들의 선동의 말은 온 성을 소동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비난과 선동에 대해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어떤 말에 대해서든지 과연 그것이 그러한지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바른 판단을 내리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선동하는 말에든지 생각 없이, 바른 판단 없이 따라다녀서는 안될 것이다.
[31-32]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무리들은 바울을 잡았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하나님의 종들은 주의 일을 할 때 고난과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예수님도 핍박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러할 것이며 주의 귀한 종 바울도 핍박을 받았으니 우리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이 되야 올 것이다. 천부장이 소동의 소식을 듣고 급히 군사들을 거느리고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유대인들은 천부장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쳤다. 하나님의 종 바울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피할 길을 주셨다. 그것은 천부장을 보내심으로 얻게 된 길이었다. 고린도전서 10:13은 말씀하기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다.
[33-36]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 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하나님의 귀한 종 바울은 두 쇠사슬에 결박을 당하였다. 천부장은 그 소동의 원인이 무엇인지 확인하려 하였으나 무리들의 소동과 부르짖음으로 실상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혼란과 무질서가 가득하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는 이성적 발언과 판단은 불가능하였다. 바울은 무리들에게 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군사들에게 들려 갔다. 주의 종 바울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했다. 무리들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그를 따라갔다. 이것이 세상이다. 이것이 어두움이 지배하는 세상 현실이다. 예수께서 정죄를 받으실 때도 그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는 사람의 선과 악의 행위들을 다 보시고 헤아리시고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그의 공의로우신 심판은 지금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의 정하신 때에 나타날 것이고 또 세상의 마지막 날에 충만히,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다.
[37-40]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바울은 천부장에게 말을 건네었다. 천부장은 바울에게 '네가 4천명의 자객들[암살자들]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고 물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대답한다. 바울은 그런 암살자들을 거느린 자가 아니었다. 기독교는 그런 류의 폭력이나 테러 음모단체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악한 자들을 대적하지 말고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네 왼편도 돌려대라"고 가르치셨다. 바울은 비록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유대인이었다. 그는 천부장의 허락을 받은 후 층대 위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조용히 한 후 히브리 방언, 즉 예수님과 사도들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아람어로 말하였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무질서한 선동을 조심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거짓된 지식과 판단으로 무리를 선동했고 그로 인하여 온 성은 소동과 무질서에 빠졌다. 우리는 어떤 선동적 말에든지 바른 생각 없이, 바른 판단 없이 따라 다니지 말고, 어떤 일에서나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이성적, 양심적 판단을 내리려 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고난과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종 바울을 폭행하며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기억해야 할 교훈이다. 기독교는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위협적 상황에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담대히 자신을 변호하려 하였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항상 합법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하고 또 질서 있게 행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담대히 행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겨야 한다. 주 하나님은 우리와 온 우주의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바울의 길을 작정하시고 그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자는 바로 이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죽을 때가 되면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을 때는 무리들이 그를 죽이려 해도 그는 죽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천부장을 통해 그에게 피할 길을 주셨다. 우리도 하나님의 이런 주권적 섭리를 믿고 그를 의지하자.
22장: 무리들 앞에서 증거함
1-16절, 무리들 앞에서 증거함
[1-3]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천부장에게 발언권을 얻은 바울은 무리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였다. 무리들은 바울이 히브리어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해졌다. 바울은 자신이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한 유대인인 것과 '이 성' 즉 예루살렘 성에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아 하나님께 대해 열심을 내었던 사실을 말했다. 가말리엘은 당시의 율법학자로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이었다(행 5:34). 이와 같이 바울은 어릴 때부터 경건하고 보수적인 신앙교육을 받았고 그가 배운 지식대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겼던 자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종교적인 열심만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른 지식을 가진 열심이 필요하였다.
[4-5]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바울은 열심이 있었으나 그 열심이 잘못된 데 사용되었다. 그는 잘못된 지식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였고 남자든지 여자든지 잡아 결박하여 옥에 넘기는 일을 했고 예수 믿는 도를 박멸하려 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을 때 증인들은 옷을 벗어 청년 사울[바울의 이전 이름]의 발 앞에 두었다(행 7:58). 또 사도행전 8:3은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기록했고 사도행전 9:1은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는 심지어 멀리 다메섹 성에까지 가 예수 믿는 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와 형벌을 받게 하려 하였다. 그는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고 하였다(갈 1:13 -14). 잘못된 지식에서 나온 열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거스렸다.
[6-8]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그런데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에게 놀라운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친히 그에게 나타나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사건은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 정오쯤 되었을 때 일어났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그를 둘러비쳤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광채 곧 그의 신성(神性)의 광채이었다. 요한계시록 21:23에 보면,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양의 빛 때문에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다고 증거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광채가 그를 비추었고 그는 땅에 엎드러졌다. 그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주의 음성이 그에게 들렸다. "주여 뉘시니이까?"라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주께서 대답하셨다. 나사렛 예수, 즉 나사렛에서 자라셨던 예수, 33년간 세상에 계셨던 예수,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40일 만에 승천하신 예수,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 곧 성경에 확실히 증거된 역사적 예수께서 특별히 핍박자 사울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그를 굴복시키셨던 것이다.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도행전 9:7은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고 증거한다. 그 두 구절들이 다 진실한 증거일 것이니, 그것들을 종합해보면, 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비취는 큰 빛은 보았으나 말씀하신 예수님의 형상을 보지 못했고 어떤 음성과 소리는 들었으나 그것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다.
[10-11]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바울은 예수님께 '주여'라고 부르면서 예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물었다. 주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정한 바'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향해 만세 전에 작정하신 바를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처음부터 끝날까지의 모든 일들을 다 작정하셨고 때가 될 때 다 이루신다. 이사야 46: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그는 주권적 작정자이시며 섭리자이시다. 그 큰 빛 때문에 앞을 볼 수 없게 된 바울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렇게 잘못된 지식과 열심을 가진 핍박자 사울을 굴복시키고 변화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성을 가진 주 예수께서는 그 핍박자를 한 순간에 굴복시키셨고 변화시키셨다.
[12-13]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아나니아라 하는 한 사람이 바울을 찾아왔다. 아나니아는 율법에 비추어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메섹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었다. 그는 핍박자 사울의 소식을 알고 있었으나 주께서 지시하신 대로 순종하여 바울을 찾아왔다. 그는 바울에게 와서 곁에 서서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고 말했다. 바울은 즉시 그를 쳐다보았고 그의 시력은 즉시 회복되었다. 그것은 아나니아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바울을 위해 정하신 뜻을 이루신 것이었다. 바울은 육신의 눈만 열린 것이 아니고 영의 눈도 열렸다.
[14-16]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그의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고 그의 친 음성을 듣게 하셨다고 말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구별되었지만 다른 기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는 오히려 유대교의 본래의 뿌리를 참으로 계승한 진리이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가 오셨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신 것은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곧 복음전도자로 삼으시는 것이었다. 거기에 바울의 사명이 있었다. 바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일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는 그 날 그 시간에 아나니아의 권면대로 주의 이름을 불렀고 세례를 받고 죄씻음을 얻었다.
결론적으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잘못된 열심을 조심해야 한다. 잘못된 지식에서 나오는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수 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지식과 열심이 필요하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심을 믿자. 그것은 핍박자 사울이 변화된 사건을 통해 확증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핍박자 사울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그를 굴복시키셨다. 그는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이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중요한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땅끝까지 전하는 전도의 일임을 인식하자. 전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주께서는 이 일을 위해 사울을 부르셨다. 오늘날도 주께서는 이 일을 위해 전도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시고 훈련시키시고 파송하신다. 교회의 세 가지 중요한 임무는 예배와 영적 성장과 전도인데, 그 중에 전도는 주 예수께서 교회에 주신 특별한 임무, 곧 교회의 사명이다.
17-30절, 무리의 반응
[17-21]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 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무리들 앞에서 자신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 비몽사몽 간에 주께서 나타나셔서 자신의 갈 길을 일러주신 일에 대해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들은 때때로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특별한 상태에 있었고 바울도 그러하였다. 그 때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한 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는 다메섹 길에서 핍박자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변화시키셨고 제자로 삼으셨다. 사도행전 앞부분에서 읽은 바와 같이, 베드로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켰고(행 3:6) 8년 동안이나 중풍병으로 고생하며 누워 있던 애니야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낫게 하였다(행 9:34). 또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오른편에 서 있는 것을 순교자 스데반에게 순교 당하기 직전에 보여주셨고(행 7:55) 또한 고린도에서 밤에 환상 중에 바울에게 나타나 격려하셨다(행 18:9). 주 예수께서는 지금도 신성의 영으로 역사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신다.
비몽사몽 간에 나타나신 주께서는 바울에게 유대인 동족들이 그가 예수에 대해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할 것이니 속히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자신이 주를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각 회당에서 때렸고 주의 증인 스데반이 돌에 맞아 피흘려 죽을 때 그의 곁에 서서 그를 죽이는 일을 찬성하였고 죽이는 자들의 옷을 지켰음을 주께 고백하였다. 그 때 주께서는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들에게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을 향하신 주의 뜻은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그의 사도들을 거절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으나 바른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신들의 행위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롬 10:2-3).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로 보냄을 받았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롬 15:16). 베드로가 할례자들의 사도이었던 것같이, 바울은 무할례자들의 사도이었다(갈 2:7-9).
[22-23]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바울의 말을 들은 무리들은 소요하였다. 그들은 소리를 질렀고 떠들었고 옷을 던지고 티끌을 날렸다. 그들은 바울을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둘 자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살벌한 상황이었다. 그들의 무지함은 주의 종을 핍박하고 살해하려는 데까지 나아갔다. 사형을 당할 어떤 큰 죄인도 그의 죄를 확정하지 않고 죽여서는 안될 것이다. 재판은 공정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사형을 집행할 죄에 대한 규정이 있고 특히 이단자들에 대해 그러하지만(신 13장), 그런 경우에도 그 죄에 대해 두세 증인에 의해 사실을 확인하고 그것이 율법에 저촉되는 큰 범죄인지를 확증한 후에 사형을 집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환상을 증거하는 바울을 그들은 왜 죽이려는 것인가? 전에 그가 핍박하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그를 유대인들은 왜 죽이려는 것인가? 정죄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단지 무지와 오해와 시기심 때문에 그를 죽이려 하였고 무리를 선동하였다. 바울은 후에,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증거하였다(살전 2: 15-16).
[24-30]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대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가로되 어찌하려 하느뇨? 이는 로마 사람이라 하니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사람이냐? 내게 말하라. 가로되 그러하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신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줄 알고 또는 그 결박한 것을 인하여 두려워하니라. 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하는지 실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저희 앞에 세우니라.
바울은 채찍과 학대를 받을 위험 중에 로마 시민의 특권을 사용하였다. 로마 시민권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편이 되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그를 건져내실 수도 있다. 그는 히스기야 때처럼 하나님의 천사를 보내어 바울의 원수들을 멸하실 수도 있다(왕하 19:35). 그는 베드로를 기적으로 감옥에서 구출하셨듯이(행 12장), 바울을 건져내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수단을 사용하셨다. 그것이 로마 시민권이었다. 기적은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세상 지식이나 지적 능력을 사용하셔서 그로 하여금 많은 서신들(13권 내지 14권의 성경)을 쓰게 하셨고 천부장과 군사들을 사용하셔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고 또 본문의 내용처럼 그의 로마 시민권을 사용하셔서 그가 너무 부당하게 학대와 채찍질을 당하지 않게 하셨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도 로마 시민권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행 16:37-39). 로마 제국에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들에게 특별한 혜택이 주어졌고 특히 재판에 있어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이시다. 부활, 승천하신 주께서는 지금도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의지하며 우리의 영혼을 그에게 의탁하며 그로부터 지혜와 능력을 받자.
둘째로, 복음 사역에는 항상 고난이 따른다. 바울의 전도 사역은 많은 고난을 감당해야 한 사역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당했다. 무리들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쳤다. 세상에는 마귀와 악령들의 역사가 많다. 그러므로 진리의 운동은 항상 그런 악한 세력들의 도전과 방해가 많을 것을 예상해야 하고 따라서 주의 종들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자연적 방편들을 사용하시면서 섭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여건을 다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주의의 태도를 버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기적을 추구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에게 감사하며 우리의 해야 할 의무와 직분에 성실해야 한다.
23장: 공회 앞에서 증거함
1-11절, 공회 앞에서 증거함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바울은 유대인들의 공회 앞에서 자신이 평소에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한다. 양심은 선악을 분별하여 선을 행하려는 마음을 가리킨다. 양심은 선하지만 그것이 죄로 인하여 약해지고 더러워지기도 한다(고전 8:7). 심지어 양심이 화인 맞아 외식하는 자도 있다(딤전 4:2). 사람이 욕심을 따라 행하거나 숨은 죄가 있으면 양심을 거스리게 된다. 그러나 성도의 정상적 신앙생활은 양심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평소의 생활에서 범사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주일도 중요하지만, 월요일부터 6일간의 삶도 똑같이 중요하다. 성도가 6일간 세속사회 속에서 신앙생활을 잘할 때 주일에도 감사와 감격이 넘칠 것이다.
[2-3]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당시 유대인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의 말을 듣다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고 명했다. 그것은 바울이 잘못된 말을 했다고 그가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정당한 말, 양심적인 말을 했을 뿐이었다. 바울은 그에게 항의했다.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회칠한 담'이라는 말은 속에는 불결과 불의로 가득하면서 겉으로는 거룩하고 의로운 척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주께서도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실 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했다(마 23:27).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재판장의 자리에 있으면서 사건을 정확히 파악하고 시비를 바르게 판단하려 하지 않고 마치 바울이 잘못인 것처럼 속단하여 그의 입을 치라고 하였으니 하나님이 그 불의한 말과 판단에 대해 갚으실 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악행에 대해 공의로 갚으실 것이다(신 32:35).
[4-5]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곁에 선 사람들이 '네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욕하느냐?'고 지적했을 때 바울은 즉시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고 말했다. 똑같은 행위라도 알고 한 잘못과 알지 못하고 한 잘못은 크게 다르다. 심지어 살인이라도 부지 중에 한 경우는 살인자가 도피성에 피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 율법의 규정이었다. 바울은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는 법을 암송하면서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다. 사람이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아야 하는 까닭은 사회의 질서와 덕을 위해서이다. 어느 단체나 사회의 지도자를 비방하는 것은 그 단체나 사회를 혼란시키고 파괴시키는 악이다. 건설적인 조언은 선한 것이지만, 파괴적인 비방은 악한 것이다. 성도는 그런 비방을 삼가야 할 것이다.
[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바울의 고백에 의하면, 바울은 바리새인이었고 그의 부친도 바리새인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보수주의적 입장을 가진 자들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심문을 받는 이유가 죽은 자의 소망인 부활을 인함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가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것은 죽은 자의 소망인 부활에 관한 것이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지 못할 사건이 아니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로 알 때 사람들은 기독교 복음의 진리성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확증이었다.
[7-8]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바울의 말을 들은 공회원들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간에 의견 다툼이 생겼고 무리들이 나뉘었다. 그 당시 바리새파는 서기관들과 장로들로서 보수적인 전통파이었고 사두개파는 대제사장들로서 자유적인 개혁파이었다. 사두개파는 부활도, 천사도, 영도 다 부정하였으나 바리새파는 그것들을 다 인정하였다. 그 두 파 간의 다툼과 소동은 컸다.
[9-10] 크게 훤화가 일어날쌔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
그 때 바리새파 중 몇 서기관들이 일어나 바울에게 악한 것이 없으며 혹 영이나 천사가 저에게 말했으면 어찌 하겠느냐고 말했다. 헬라어 다수 전통사본에는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하나님과 다투지 말자"라고 되어 있다. 저들이 하나님의 일을 사사로이 판단한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말이 있자, 그들 가운데 큰 분쟁이 생겼다. 천부장은 바울이 무리에게 찢겨질까봐 군사를 명하여 그를 취하여 영문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천부장과 군사들은 하나님이 바울을 보호하시는 일반적 은총의 수단이었다.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소요와 위협의 시간을 모면하고 심신으로 피곤했을 그 날 밤에 주께서는 바울에게 나타나셨다. 그는 바울 곁에 서서 바울을 위로 격려하셨다. "담대하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계신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신성(神性)의 영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또 주께서는 바울에게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벌써부터 로마 방문을 사모하였고 심지어 서바나(스페인)까지 가서 전도하기를 소원하였었다(행 19:21; 롬 15:23).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범사에 항상 양심을 따라 살자. 우리는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게 유지되고 더러워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무엇보다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하지 말고 양심에 비추어 떳떳하게, 정정당당하게 신앙생활을 하자. 둘째로, 우리는 성경의 교훈대로만 살자. 예를 들어, 우리는 확실한 증거가 없이 사람을 정죄하거나 윗사람을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성경의 교훈대로, 올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증거인 동시에 기독교가 참되며 확실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넷째로, 우리는 복음전도자이거나 교회의 봉사자이거나 일반 신자이거나 간에 주 예수 안에서 담대한 마음을 가지자. 주를 따르는데 꼭 필요한 덕 중의 하나가 담대함이다. 세상이 악하고 우리는 약하나 우리는 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성령의 위로 안에서 항상 담대히 우리의 본분을 다하자.
12-35절, 가이사랴로 호송됨
[12-13]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 여명이더라.
40여명의 유대인들은 당을 지어 바울을 죽이려고 결심하였다. 그들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 14절과 21절에도 반복해서 증거되었다. 악한 자들은 서로 격려하면서 악한 일을 도모하였다. 유대인들은 형식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종을 죽이려는 악한 계획을 한 것은 확실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일이었다. 성경 역사가 이처럼 보이듯이 진지함이 없는 형식적 교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무리가 될 수 있다. 누구든지 심령이 거듭나 바른 지식을 가지고 선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이런 악에 떨어질 수 있다.
[14-15]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알아볼 양으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바울을 죽이기로 맹세한 저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자신들의 굳은 결심을 말하며 한 방책을 제안했다. 그것은 바울을 공회로 불러오는 도중에 그를 살해하려는 계획이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지도자들로서 마땅히 그 악한 자들의 거짓된 계획을 거절하고 그들을 책망했어야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실상 그들은 다 한 동류들이었다.
[16-21]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문에 들어가 바울에게 고한지라.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가로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가로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천부장이 그 손을 잡고 물러가서 종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저희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당신은 저희 청함을 좇지 마옵소서. 저희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 여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의 조카가 그 사실을 알고 바울에게 그것을 알려주었다.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는 꿈이나 환상이나 기적적인 일들을 통해 일하시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연적인 환경여건을 통해 일하신다. 이 경우도 그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그 위험으로부터 건지시기 위해 기적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고 자연적인 한 방법을 사용하셨다. 바울의 조카는 그들의 음모를 알았고 바울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바울은 그 조카를 백부장을 통해 천부장에게 가서 알려주도록 하였고 그 조카는 천부장에게 자기가 들은 상황을 그대로 알려주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개인적인 일이나 단체적인 일이나 우연하게 보이는 일까지도 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 안에서 되어진다. 참 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되어진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의지하고 그의 인도하심에 순응해야 한다.
[22-24] 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고하였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삼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마병 칠십 명과 창군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천부장은 그의 말을 듣고 즉시 조치하였다. 그는 그 밤 제삼시 곧 오늘날 시각으로 밤 9시에 보병 200, 마병 70, 창군 200 등 많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바울을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 안전하게 보내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으로지만 악한 유대인들의 살해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을 위해 많은 군인들을 사용하셨다.
[25-30]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에게 문안하노이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송사하는지 알고자 하여 저희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송사하는 것이 저희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건이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게 하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송사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를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본문은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총독 벨릭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소개한다. 그 편지는, 바울이 로마 사람이라는 사실과 유대인들이 부장하게, 무리하게 그를 송사하였음과 그를 해치려는 음모가 있으므로 그를 총독 각하에게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천부장은 자신이 판단하기에 바울은 죽이거나 결박을 당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도 언급하였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죽이려 하였을 때도 로마 총독 빌라도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한다고 세 번이나 공개적으로 말했었다(눅 23:4, 15, 22). 이방인이 그를 죽일 죄가 없다고 판단하는 사건에서 유대인들은 의인들을 정죄하였다. 그것이 죄인들의 죄악됨이요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이었으며 성도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이다.
[31-35]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이튿날 마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문으로 돌아 가니라. 저희가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가로되 너를 송사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바울은 군사들의 호송을 받아 무사히 가이사랴에 도착하였고 총독 앞에서 자신이 로마 제국의 영토 안에 있는 길리기아 사람임을 말했다. 총독은 그를 송사하는 사람들이 오면 그의 말을 듣겠다고 하면서 그를 헤롯궁에 지키라고 명하였다. '궁'이라는 헬라어(프라이토리온)는 총독이나 황제 등 고위 관리의 관저를 가리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악한 일에 단합하여 열심을 내는 자들이 되지 말고 선한 일에 단합하여 열심을 내는 자들이 되자. 하나님의 교회를 허무는 자가 되지 말고 세우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자가 되지 말고 증진시키는 자가 되자. 이로써 의인과 악인은 확실히 구별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깨닫고 믿자. 모든 일의 시간표가 하나님 안에 있다.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도, 죽음의 위협도, 그리고 그 고난으로부터 피신함도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보다 더 지혜롭고 더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의 섭리만 의지하고 그의 인도하심에 항상 순응하자. 셋째로,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며 살자. 성도는 세상에서 애매히 고난을 당할 수 있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가능하며 그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높으신 뜻을 이루신다. 바울의 경우, 그는 그 고난을 통해 로마로 가게 되며 거기서 전도하게 된다.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우리는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어디든지 주를 따라 가야 할 것이다.
24장: 벨릭스 총독 앞에서 증거함
1-27절, 벨릭스 총독 앞에서 증거함
[1-2]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바울은 가이사랴에 있었던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로 이송되어 헤롯궁에 감금된 지 닷새 후에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날짜에 대해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하였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이튿날 야고보와 장로들에게 문안하였고(행 21:18) 그들의 제안대로 결례의식을 행하기 위해 7일을 보냈다(행 21:27). 그리고 이제 또 5일이 지났으니 예루살렘에 올라온 지 12일이 지난 셈이었다(행 24:11). 그때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장로들 몇 사람과 더둘로라는 변호사와 더불어 그곳으로 내려와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였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고 로마 총독은 백성의 고소 사건을 판결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3-4]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하옵나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3절의 '개량된 것'이라는 본문은 전통사본에는 '유익하고 가치 있는 일들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되어 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대변하는 더둘로의 말은 아첨하는 기운이 역력하였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위정자들을 존중하는 것은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그들에게 아첨해서는 안된다. 아첨은 사실보다 과장되는 경우가 많다. 아첨은 자기의 세상적 이익을 계산한 천박한 인격의 소치이다.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바울은 총독 앞에서 유대 지도자들의 대변인을 통해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 그는 염병에 걸린 자요 천하에 퍼진 유대인들을 소요케 하는 자이며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말을 들었다. 하나님의 충성된 종 바울은 그런 나쁜 비난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의 복음 때문에 그런 말을 들었다. 그러나 실상 그런 비난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바를 증거할 뿐이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온 세계에 힘 있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6-9]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더둘로는 또 바울이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였다고 주장하였고 유대 지도자들도 그의 말을 후원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옳지 않았다. 성경의 전통적 다수의 사본들과 역본들에는 '우리가 잡았사오니'라는 말 대신에 "우리가 잡아 우리의 법에 따라 재판하려 하였으나 천부장 루시아가 우리에게 와서 강압적으로 우리 손에서 그를 취하여 갔고 고소자들에게 당신께 오라고 명하였나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들은 바울을 살해하려고 했던 악한 계획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음모를 좌절시키셨고 바울을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셨었고 그의 구원사역이 차질을 빚지 않도록 섭리하고 계셨다.
[10-13]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 이틀밖에 못되었고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 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할 때 총독 앞에 비굴하게 아첨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담대하게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하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일을 오직 하나님께 맡기었다. 그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가 열 이틀밖에 못되었고 유대 지도자들이 그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이나 성 중에서 무리를 소요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그들이 자신을 송사하는 모든 일에 아무 근거가 없다고 진술하였다. 바울의 말은 당당하였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할 수 있다.
[14-16]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바울은 자신이 그들이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면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 즉 구약성경을 다 믿는다는 사실과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진 소망인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것은 놀라운 신앙고백이며 간증이다. 그는 구약성경을 다 믿고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고 소망하였다. 그는 이러한 믿음과 소망 가운데서 하나님과 사람을 대해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17-19]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
전통적으로는, 18절부터 '드리는 중에'라는 구절 다음에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보았나이다. 그러나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라고 읽는다. 아마 그렇게 읽는 것이 올바른 읽기일 것이다. 바울을 주목해 본 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아니고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20-21]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이 공회 앞에서 증거하기 전에는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 바울은 공회 앞에서 무슨 잘못을 범한 것도 없었다. 단지 그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의 부활은 바리새인들을 포함하여 전통적 유대인들이 믿고 소망한 바이었다. 그것은 정죄의 구실이 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핍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정당성이 없었다.
[22-23]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 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벨릭스는 예수 믿는 도에 관해 상당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바울의 죄목이 심각한 것이 아님을 알았고 그에 대해 매우 너그러운 처리를 하였다. 총독은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게 하였고 친구 중 누가 그를 수종하는 것이나 그에게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억울하게 결박되어 감금되고 고난을 당하는 바울을 이만큼 배려하시고 위로하셨다. 성도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다.
[24-25]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수일 후 벨릭스는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말씀을 들었다. 드루실라는, 야고보를 죽였던(행 12:1-2) 헤롯왕(헤롯 아그립바 1세)의 둘째 딸이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중심하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강론할 기회를 얻었다. 의는 바로 복음의 중심 주제이며 절제는 모든 사람 특히 권세자나 부자에게 매우 요긴한 덕이며 심판은 모든 사람이 기억해야 할 진리이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의가 없기 때문에 필요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의를 예수 믿는 자에게 적용하여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절제는 자신의 죄성과 세상의 악과 싸워 이기기를 원하는 자마다 유념해야 할 덕이다(고전 9:25). 기독교는 금욕주의는 아니지만, 성도는 육신적 쾌락을 절제할 때 승리적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다(갈 5:23).
[26-27]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그러나 벨릭스는 아직 믿음 안에서 변화된 인격을 갖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는 많은 세상 권세자들과 비슷하게 여전히 뇌물을 바라는 물질적 욕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귀한 종 바울을 구류해 두었다. 사람들의 인심이나 여론이 반드시 정의는 아니다. 진리와 의는 때때로 소수편에 있다. 다수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성경과 이성에 근거하여 진리와 의를 주장하고 지킬 수 있는 자가 진정으로 용기 있는 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바울처럼 성경을 다 믿자.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들을 다 믿는다고 고백했다. 성경의 어느 부분도 폐지될 수 없다(요 10:35).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딤후 3:16).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성경이 그리고 성경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되었고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진 말씀임을 알고 그 모든 말씀을 다 귀히 여기고 다 믿자.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규범이다.
둘째로, 우리는 바울처럼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고 소망하자. 우리의 바라는 것은 단지 이 세상이 아니다. 세상은 풀과 같이, 풀의 꽃과 같이 시들고 쇠해지고 있다. 우리는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그가 약속하신 부활에 둔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계시록 20:12-13,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셋째로, 우리는 성경의 교훈대로 의롭고 절제하며 살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제 우리는 죄와 상관 없는 자들로 의롭게, 선하게만 살고 또 육신의 쾌락에 빠지지 말고 모든 일에 절제하자. 고린도전서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5장: 가이사 황제에게 호소함
1-27절, 가이사 황제에게 호소함
[1-5] 베스도가 도임한 지 삼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쌔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가로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 하니라.
벨릭스를 이어 베스도가 로마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베스도는 주후 59년부터 61년까지 총독의 직무를 한 자이다. 그가 총독으로 부임한 지 삼일 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 중 높은 사람들은 바울을 고소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를 가지고 베스도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주기를 청하였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베스도는 자신이 얼마 있으면 가이사랴에 내려갈 것을 말하면서 유대 지도자들이 자기와 함께 가이사랴로 내려가 그를 송사하라고 말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도우시는 섭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베스도의 이런 답변을 통해 바울을 유대인들의 살해 음모로부터 지키셨다. 바울은 또 한번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으로 보호함을 얻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기 전에는 결코 인간의 살해 음모 같은 일에 희생되지 않을 것이다.
[6-8]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일 혹 십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 오라 명하니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헬라어 전통사본에 의하면, 베스도는 예루살렘에서 10일 이상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갔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았다. 그 재판정에서 유대인들은 여러 말로 바울을 송사하였으나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었다. 그 때 바울은 자신을 변명하기를, 자신이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범죄치 않고 떳떳해야 한다. 우리는 종교적 문제들에서 뿐만 아니라 세속적 문제들에 있어서도 범죄치 말아야 한다. 신자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도 도덕적 비난을 받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의롭고 정직하고 착하고 진실해야 한다.
[9-12]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바울이 가로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대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심문을 받으려는가를 물었다. 그 때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으니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주지 말기를 구하며 로마 황제 앞에서 재판받기를 호소하였다. 가이사 황제 앞에서 재판받기를 호소하는 것은 당시에 로마 시민이 가진 특권이었다. 이것은 옛시대에 죄수의 인권을 존중한 좋은 일이었다. 옛시대에도 이러하였는데 하물며 오늘날에 사람의 인권을 짓밟는 인민재판식 재판이 지구상에 있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는가? 재판은 인간 사회에서 매우 엄숙한 일이다. 재판은 하나님의 일이다. 베스도는 배석자들과 상의한 후 바울을 그가 호소한 대로 황제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3-16]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어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바울에 대한 재판이 있은 지 수일 후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에게 문안하기 위해 가이사랴에 왔다. 이 아그립바 왕은 헤롯 아그립바 2세로서 야고보를 죽였던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었다. 그는 주후 48년부터 70년까지 팔레스틴 북부와 북동부를 다스렸다. 버니게는 그의 고모 즉 아그립바 1세의 큰 딸이었다. 작은 딸은 앞에서 나온 벨릭스의 아내인 두루실라이다. 그들이 여러 날 있는 동안 베스도는 바울의 일에 대해 왕에게 말했다. 그가 예루살렘에 있었을 때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바울을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였으나 그는 그들에게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죽도록 내어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했다. 여기에 또 로마 제국의 정당한 재판 절차가 언급되고 있다. 재판시 원고와 피고의 주장을 다 들은 후 판결하는 것은 공정한 재판의 기본적 요소이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런 상식적 절차를 무시하고 바울을 정죄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이방인인 로마 총독은 오히려 그것을 거절하였다. 잠언에도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잠 18:17)고 말함으로써 재판하는 이들은 원고와 피고의 말을 충분히 듣고 판결해야 할 것을 가르쳤다.
[17-22] 그러므로 저희가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 왔으나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라. 내가 이 일을 어떻게 사실할는지 의심이 있어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가로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베스도는 지체치 않고 재판을 열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이방인 총독의 양심적이고 성실한 모습이었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어떤 법조인들이 뇌물을 받고 고의로 재판을 누락시키거나 연기시킨 일이 있었다는 뉴스를 들을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 언제쯤 공의가 충만하게 세워지고 인권을 존중하는 풍토가 이루어질 지 탄식스럽다. 베스도는 그 재판에서 유대 지도자들이 바울에 대해 자기가 짐작했던 것 같은 어떤 악행에 대해서는 하나도 제출하지 않고 단지 그들의 종교 문제와 예수의 부활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임을 알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이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신을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23-27]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의를 베풀고 와서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신문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저가 황제에게 호소한 고로 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 그에게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어 세웠나이다. 그 죄목을 베풀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이튿날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바울을 다시 신문하면서 베스도는 바울에 대해 몇 가지 요점으로 아그립바 왕에게 소개한다. 첫째는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해 그는 살려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외친다는 사실이며, 둘째는 자신이 살펴볼 때 바울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다는 사실이며, 셋째는 바울이 황제에게 호소함으로 황제에게 보내기로 작정했다는 사실이며, 넷째는 황제에게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며 죄목을 베풀지 않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알아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신문한다는 사실 등이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 지도자들이 죽이려 했던 죄수 바울에 대해 이방인 총독 베스도는 '그가 죽을 죄를 범한 일이 없다'고 판단하였던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 놀라운 일이었다. 종교인이 타락하면 일반인보다 더 악해지는 것 같다. 사람은 기본적인 양심과 이성을 가지고 도덕적 시시비비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저 유대인들처럼 악을 계획하지 말자. 정당한 이유가 있어도 합법적 절차를 밟아야 할 터인데, 하물며 정당한 이유가 없이 바울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민 저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악한 자들인가? 또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 총독이 죄 없다고 판단한 바울을 살려두지 못할 자라고 외쳐대는 저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악한 자들인가?
또 우리는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자가 되자. 그는 총독의 법정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증거했다. 로마 총독 베스도가 보기에도 그는 죽을 죄를 범한 일이 없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도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것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굳게 믿자. 세상은 때때로 성도를 해하려는 악한 음모가 있는 세상이지만 바울을 죽음의 위기로부터 지키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총독들의 법정에서 오히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거할 기회를 얻었고 또 거기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소원했던 로마로 갈 기회를 얻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 안에 있다. 우리는 어려운 현실만 보지 말고 그 현실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자.
26장: 아그립바 왕 앞에서 증거함
1-18절, 아그립바 왕 앞에서 증거함
[1-3]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손을 들어 말했다. 그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할 때 손짓하며 말한 적이 있고(행 13:16) 예루살렘에서 무리 앞에서 말할 때도 손짓하며 말했다(행 21:40). 손짓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는 동작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그립바 왕 앞에서 그는 손짓하는 대신에 손을 들며 말했다. 손을 들며 말하는 것은 관습적인 몸짓이거나 아그립바 왕에 대한 경의의 표시일 것이다. 그는 아그립바 왕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잘 아시기 때문에 다행히 여기며 변명하오니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바울은 적절하게 입을 열어 자신을 변명하기 시작했다.
[4-8]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바울은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해 증거한다. 그는 자신이 젊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의 가장 엄한 파인 바리새파의 생활을 했고 그 사실을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다고 증거했다. 바리새파는 당시에 경건하고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파이었다. 그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었다. 바울도 그러했다. 그는 특히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 즉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다. 그는 자신이 신문을 받는 까닭은 바로 부활 문제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실 수 있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못 가지는가라고 물었다. 성경을 그대로 다 믿는 것은 올바른 태도이다. 보수신앙은 좋은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으며 특히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
[9-12]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바울은 이전에 하나님을 바로 믿으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와 그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대적했고 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었고 그들을 죽이는 일이 옳다고 주장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의 열심은 특별해서 각 회당에서 여러 번 사람들에게 벌을 주었고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했고 심히 격분하여 외국의 성까지도 가서 성도들을 핍박하였다. 바울의 과거의 삶의 경우에서 보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한다.
[13-15]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증거한다. 그가 다메섹 성을 향해 가고 있었을 때 정오 즈음에 길에서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그와 그의 일행에게 비추었다. 그들은 다 땅에 엎드러졌다. 그 때 히브리어로 바울에게 음성이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가시채는 가시나무 막대기를 가리킨다. 바울이 '주여 뉘시니이까?'라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그는 대답하셨다. 하나님은 오랫 동안 침묵하셨으나 이제 그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를 부르실 때가 되었다. 부활, 승천하셨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셨다. 그는 영원히 살아계신 구주이시다. 그가 바울에게 나타나신 사실은 그의 부활에 대한 또 하나의 생생한 증거이었다.
[16-18]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주께서는 바울에게 자신이 나타나신 목적을 알려주셨다. 그것은 그를 구원하셔서 일꾼과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이었다. '사환'이라고 번역된 말은 '일꾼'이라는 뜻이다. 바울의 사역은 또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역이 될 것이다. 구원의 사역이란 사람의 내면적, 영적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원의 사역은 죄씻음을 주는 사역이요 거룩하게 된 성도들 가운데 속하게 하는 사역이다.
결론적으로, 첫째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지식 있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성경 지식,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신앙생활에 필수적이다. 잘못된 지식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그를 대적하는 자리에 떨어지게 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그는 옛날 핍박자 바울에게 빛 가운데서 나타나셨고 그를 부르셨고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셨다. 그는 오늘날도 동일하게 살아계신 구주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는 오늘날도 택하신 백성을 불러 구원하시고 복음의 충성된 일꾼들을 찾으시고 부르신다. 젊은이들은 주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셋째로, 그가 일꾼들을 부르시는 목적은 그들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구원의 핵심은 죄사함과 거룩함, 즉 의(義)이다. 그는 오늘날도 전도자들과 설교자들을 통해 어두움과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죄인들을 빛 가운데로, 하나님께로 불러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죄사함과 거룩함을 주신다. 오늘날도 이 구원의 일이 힘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19-32절,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이다
[19-20]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증거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신 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것을 거스리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그는 다메섹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또 예루살렘에서와 온 유대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전도하였다고 고백한다. 전도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 그는 또한 자신이 전한 내용을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삶이라고 표현하였다. 회개는 자신의 죄악됨을 뉘우치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즉 하나님 없이 사는 데서 돌이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다. 또 참된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일을 동반한다. 회개에 합당한 일이란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고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할 것과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전했다.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참된 회개를 전한 바울을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잡아 죽이고자 하였다. 성전은 하나님을 섬기는 곳인데, 그곳에서 하나님의 세우신 종 바울을 잡아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은 어두웠고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깨달음과 지식이 없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고 그가 불러 세우신 종 바울을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주의 종 바울을 죽이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핍박하는 것이요, 그것은 곧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이었다. 마태복음 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누가복음 10: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22-23]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바울은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죽지 않고 이제까지 전도하였다고 말한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인간의 평안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인간의 삶의 여정 전체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전도자의 사역의 길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였다. 그것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이었는데, 곧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이 되실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세상은 무지와 부도덕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어두움을 밝히시는 빛이시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의(義)를 이루셨고 그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신다. 그의 의는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다.
[24-25]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말하자 베스도는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다. 네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외쳤다. 진리의 종들은 때때로 세상에서 그런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바울은 미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제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혼란스럽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람은 자신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사리 분별과 사리 판단을 하고 상당히 자기 절제를 한다. 사람이 자신에 대한 건전한 의식과 분별력과 판단력, 그리고 절제력을 가진 상태는 미친 상태가 아니다. 바울은 결코 미친 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베스도 총독에게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한다고 말했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을 상당히 알고 계실 줄 믿는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유대 땅의 어느 한편 구석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팔레스틴과 그 인근 지역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태복음 4:23-25,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27-29]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만일 그가 선지자들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가 선지자들을 믿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일들을 믿을 수 있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권면하려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아그립바 왕은 바울에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바울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의 예상되는 권면을 피하려 하였다. '적은 말로'라는 표현은 '거의,' '쉽게,' 또는 '짧은 시간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아그립바 왕이 사용한 것을 보면, 그 말은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 사용된 이후(행 11:26) 15년 정도 세월이 흐른 그 당시 널리 알려지고 사용된 말이었던 것같다. 바울은 자신의 무죄성을 변호하는 재판 자리에서 그 제한된 시간에 총독과 왕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기회를 얻었다. 바울은 그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자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고 구원받고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다.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 . .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라는 표현은 '거의든지 완전이든지' 혹은 '시간이 짧든지 길든지 간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30-32]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과 베니게 등은 바울이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일이 없다고 판단하였고 만일 그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더라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더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한 것은 부당하고 무리한 일이었음이 드러났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자들도 어두워지면 그렇게 악한 일을 도모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심령이 밝아질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선한 인격자가 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바울같이 되자. 그것은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또 그의 증인들이 증거한 대로, 다시 말해 신구약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확신하자.
둘째로, 우리는 바울처럼 전도하자. 그는 죄수의 신분으로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려고 애썼다. 특히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증거로 그의 부활을 증거했다. 또 그는 모든 사람이 그들의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과 회개에 합당한 삶 즉 의와 선의 삶을 살 것을 전파했다. 우리도 예수님을 확신하고 죄를 버리고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모든 사람에게 이 진리를 전하자.
셋째로, 우리는 이렇게 믿음으로 살고 전도할 때 미쳤다는 말을 들을 각오를 하자.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귀신이 들렸다는 말을 들으셨다. 바울은 총독 베스도에게 미쳤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런 악한 비난을 들을 각오를 하자. 그러나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그런 비난을 견디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믿고 따르고 섬기며 그를 전하자.
27장: 로마로 호송됨
1-26절,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남
[1]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우리의'라는 표현이 보이듯이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과 함께하면서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시가 있는 이탈리아로 호송되는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다. 바울은 다른 죄수 몇 사람과 더불어 아구스도라는 이름의 부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겨졌다. 이렇게 죄수의 몸으로 바울은 그가 소원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던 로마 방문의 길을 떠났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되, 때때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할 방식으로 응답하신다.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하니라.
죄수 바울 일행은 아시아 해변 즉 밀레도, 에베소 등의 지역으로 가는 아드랏무데노라는 이름의 배에 올랐다. 누가는 이와 같이 지역 이름, 부대 이름, 사람 이름, 배 이름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그는 초대교회의 전도의 역사를 기록한 이 사도행전에서 자신의 직업인 의사로서의 섬세함을 드러냈다. 바울 일행에는 마게도냐 사람 아리스다고도 있었다. 아리스다고는 큰 소요가 있었던 에베소에서도 바울과 함께 다녔고(행 19:29) 그 후 바울과 동행했고(행 20:4; 27:2) 로마 옥에서도 바울 곁에 있었다(골 4:10). 바울은 '나의 동역자'라고 부른 자들 속에 그를 포함시켰다(몬 24).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
가이사랴에서 출발한 배는 이튿날 약 130킬로미터 떨어진 시돈에 도착했다. 율리오는 바울에게 친절히 대했고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음을 허락했다. 율리오는 비록 짧은 하룻밤이었지만 바울의 경건하고 정직한 인품에 감동을 받았을지 모르며, 혹은 같은 지역에 사는 이탈리아대라는 부대의 백부장인 고넬료에게서 바울에 대한 좋은 소개말을 들었거나 그에 대한 호의적 처분을 부탁받았을지도 모른다.
[4-8]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러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배가 더디 가 여러 날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성에서 가깝더라.
배는 바람의 거스림을 피해 구브로 해안을 따라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지나 루기아의 무라 성에 도착했다. 그것은 벌써 약 900킬로미터나 되는 긴 여정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이탈리야까지는 그 두 배 이상이나 먼 길이요 위험한 길이었다. 무라 성에서 백부장은 죄수들을 이탈리야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타게 하였다. 그들은 배가 더디 가 여러 날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렀고 바람이 강하여서 서쪽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서남쪽에 있는 그레데 섬 동쪽 끝의 살모네 앞을 지나 섬 남쪽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간신히 미항(美港, 아름다운 항구)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라새아 성에서 가까왔다.
[9-11]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항해가 예정보다 지체되어 금식하는 절기 즉 유대인의 속죄일인 9월 중순이 지났기 때문에 행선하기가 위험한 때가 되었다. 가을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 항해하기에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때 바울은 사람들에게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큰 손해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船主)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다. 그것이 이성적으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선장과 선주는 항해에 관한 한 전문가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밀접히 동행하는 하나님의 종들은 때때로 현실을 보는 눈과 건전한 통찰력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12-14]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미항이 겨울을 지나기에 불편하므로 그 섬의 큰 항구인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나자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뵈닉스는 미항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항구로서 한편은 남서로, 한편은 북서로 향하였다. 남풍이 순하게 불므로 사람들은 그들의 계획대로 되는 줄 알고 닻을 감고 출발하였으나 얼마 못가서 섬 가운데서 불어오는 유로클뤼돈이라는 강한 바람을 맞았다. 우리는 인생의 여정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생각해서도 안될 것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어렵게 보이는 것도 쉽게 해결될 수 있으나 하나님이 버려두시면 쉬워 보이는 것도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성도는 오직 하루 하루 하나님과 동행하고 일마다, 순간마다 하나님께 의탁하며 행해야 한다. 잠언 3:6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했다.
[15-20]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배는 표류하다가 클라우덴이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배에 달린 '거루' 즉 작은 배를 잡아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 즉 빨아들이는 모래(流砂, quick-sand)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갔고 사공들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들을 저희 손으로 내어 버렸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었고 구원이 여망이 다 없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 바울에게 이런 어려운 일을 주셨다. 그것은 물론 바울을 시험하고 괴롭히는 마귀의 장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이루어짐을 믿으며 극심한 고난까지도 성도를 단련시키는 유익한 일임을 믿는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1-26]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여러 날 동안 먹지 못하고 있었을 때 바울은 그들 가운데 서서 그들이 자기의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않아 이 타격과 손해를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사자께서 어제 밤에 내게 나타나셔서 '네가 가이사 앞에 설 것이요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다 네게 주셨다'고 말했으며 그는 하나님의 사자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 풍랑 속에서도 바울을 떠나지 않으시고 그와 함께하셨고 그를 통해 이루실 일이 그대로 착오 없이 이루어지게 하셨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나 자신의 인간적 혹은 경험적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주시는 건전한 통찰력과 판단력을 공급받자. 둘째로, 우리는 어떤 현실이든지 잘 되는 것 같다고 너무 쉽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현실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지도 말자.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할 일을 성실히 행해야 하고 자만하지도 말고 낙망하지도 말아야 한다. 셋째로, 성도의 삶에 때때로 유라굴로 혹은 유로클뤼돈 같은 광풍이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향하신 그의 뜻은 착오 없이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져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현실만 바라보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자.
27-44절, 다 구원을 얻음
[27-28]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 저리 쫓겨 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와지는 줄을 짐작하고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죄수의 몸으로 배 타고 로마로 가던 바울 일행은 큰 폭풍을 만나 여러 날 고생을 했는데, 누가는 그 날들을 정확히 세어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이라고 하였고 그 밤에 그들은 아드리아 바다 즉 마게도냐-아가야 지방과 이탈리아 사이의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 다녔고, 밤중쯤 되어 사공들은 어느 육지에 가까와지는 줄을 짐작하고 물을 재어보았는데 20길이었고 조금 가다가 또 재어보니 15길이었다고 기록한다.
[29-32]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사공들은 배가 암초에 걸릴까 염려하여 고물 즉 배끝에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기다리는 중 이물 즉 뱃머리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 즉 작은 배를 바다에 내려놓고 도망하고자 하였다. 그 때 바울은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않으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군인들은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렸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권적 하나님이시며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으로 자연 법칙이나 자연적 수단들을 사용하신다. 배를 운전하는 데는 사공들이 필요하였다. 하나님께서 비상하게 기적으로 배를 움직이실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사공들을 사용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거나 등한히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믿는다고 해서 소극적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의무를 다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자연적 수단들을 다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믿는 것은 결코 소극적 태도나 책임 회피적 태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해야 할 본분을 다해야 한다.
[33-34] 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날이 새어갈 때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풍랑이 멈추기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열 나흘인즉 이제는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였다.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고 육신의 건강과 힘을 회복해야 했다. 바울은 그들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다고 즉 한 사람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본문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의 일반적 방식은 자연적 수단을 사용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육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고도 건강과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의 방식이 아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의 방식이 아니다. 기적은 말 그대로 비상한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특별한 행위일 뿐이다.
[35-37]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 칠십 륙인이러라.
바울은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떼어 먹기 시작했다. 바울의 마음 속에는 굳센 믿음과 평안이 있었다. 환난과 고통 중에서도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감사하며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바울의 믿음의 행위를 본 사람들은 다 기꺼이 음식을 취하였다. '안심하고'라는 원어는 '기꺼이, 기분이 좋아'라는 뜻이며, '받아 먹으니'라는 말은 '음식을 취하니'라는 뜻이다. 바울과 함께 그 배에 탄 사람들의 수는 전부 276명이었다. 바울은 고난 중에서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기회를 가졌다.
[38-41]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배에 탄 사람들은 배부르게 음식을 먹었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다. 날이 새자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보였다. 사람들은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을지 의논한 후 닻을 치워버렸고 자신들을 바다에 맡기고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해 들어가다가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가 땅에 걸리게 되었다. 뱃머리는 움직이지 않게 딱붙어버렸고 배끝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갔다.
[42-44]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군인들은 죄수들이 헤엄쳐서 도망할까 염려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고 말했으나 백부장은 그들의 뜻을 막았다. 하나님은 바울을 죽음의 위험에서 지키시기 위해 백부장의 마음을 감동하셨고 그를 사용하셨다. 여기에 다시 한번 더 하나님의 섭리의 일반적 방식이 증거된다. 백부장은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에게 물에 뛰어내려 육지로 나가도록 명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널조각이나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였다. 마침내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진리를 본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종 바울에게 많은 시험과 고난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시험과 고난에서 그를 건져주셨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실패함 없이 다 이루신다. 전도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불러 일꾼을 삼으셨고 그에게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는 소원을 주셨다. 이제 그에게 주신 그 소원을 하나님께서는 다 이루시려고 그를 고난 중에도 죽지 않게 하시는 것이다.
셋째로,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의 종 바울을 구원하시는 방식은 여러 가지 자연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첫째, 배에 탄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사공들이 필요하였다. 둘째, 열 나흘 동안 먹지 못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음식을 먹는 일이 필요하였다. 셋째, 바울이 죽임을 당할 뻔한 위기를 모면한 것은 백부장을 통해서이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바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통해 이루어지며 현실의 일들은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시는 그의 섭리의 표현이다. 그런데 그는 그의 작정하신 바를 이루실 때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주로 자연적 수단들과 방법들을 통해 이루시는 것이다. 기독교는 기적을 믿으나 기적주의는 아니다.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 방식은 기적이 아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자연적 수단들과 방법들을 사용하여 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주의적 생각을 버리고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적 수단들을 다 사용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의무들에 성실해야 한다.
28장: 로마에서도 전도함
1-15절, 멜리데 섬에 머뭄
겉보기에는 별 교훈이 없는 평범한 사건들 같으나 여기에도 은혜로운 내용들이 있다. 토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가 있었다.
[1-2]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멜리데 섬은 오늘날 말타(Malta)라고 부르는 섬이다. 이 섬은 이탈리아 남단에 있는 시실리아 섬 남쪽의 작은 섬이다. 멜리데 섬의 토인들 혹은 원주민들은 바울 일행에게 특별한 동정과 친절을 베풀었다. 비가 오고 날이 찬 때이었으므로 그들은 불을 피웠고 바울 일행을 영접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들의 친절은 인간다운 모습이었다. 문명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명이 인간성을 메마르게 하고 이기적이게 하고 폐쇄적이고 개인주의적이게 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젼만 많이 보는 아이들은 사회성이 떨어지고 컴퓨터에 중독된 사람들도 부도덕하고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인격이 되기 쉽다. 아직도 도시보다 시골 인심이 더 좋을 것이다. 현대사회에는 탐심과 경쟁심 속에서 남을 속이고 범죄하는 일들이 많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 인간다운 삶은 물질적 부요에보다 오히려 자족하며 사는 삶에 있다.
[3-4] 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우리 말에 한 뭇이라는 말은 한 짐보다는 작고 한 줌보다는 큰 단위를 뜻한다. 바울이 독사에 물린 것을 보고 토인들은 그가 살인자이므로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토인들 속에 있는 도덕의식을 증거한다. 그것은 인간의 양심에서 나온 도덕성이다. 그들은 악한 자는 공의의 형벌을 받는다고 믿고 있었다. 이것은 모든 인간 속에 있는 도덕의식이다. 사람 속에는 악을 행하면 '천벌'을 받는다는 의식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본성 속에 심어주신 양심이 소리이다.
[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바울은 독사에 물렸으나 조금도 상함이 없었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하신 약속의 문자적 성취이었다. 마가복음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런 것을 시험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도시대의 현상이었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세우신 종들이라는 표이었다(고후 12:12). 기적은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성을 확증하는 하나님의 표이었다. 히브리서 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6]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
바울이 조금도 상함이 없는 것을 본 토인들은 그를 신이라고 말했다. 토인들 속에는 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이 있고 신은 전능하다는 의식이 있었다. 즉 그들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종교가 없는 민족은 없다고 한다. 모든 사람의 본성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意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한 증거이기도 하다.
멜리데 섬의 토인들의 도덕성과 종교성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 주시는 일반적 은혜이다. 그 은혜 때문에 세상이 극도로 악하게 치닫지는 않는다. 마지막 때에는 세상이 극악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멸망 당할 마지막 세상의 중심 도시를 사치와 음란으로 더러워진 바벨론이라고 불렀다(계 17-18장). 그러나 세상이 아직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직은 하나님의 구원의 문이 열려 있는 것 같다. 모든 사람 속에 있는 도덕성과 종교성이 전도의 발판이 되고 구원의 접촉점이 된다.
[7-10]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그 섬에 특별한 은혜도 주셨다. 그 섬의 제일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는 바울 일행을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였다. 그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위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보블리오의 대접를 갚을 수 있게 하셨다. 그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을 앓게 되었을 때, 바울은 들어가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함으로 그 병을 고쳐주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또 그 섬의 다른 병자들도 와서 고침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의 친절에 대해 내리신 하나님의 보상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병고침만 받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울은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한 자에게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거스리심을 보이신다(시 18:25-26). 하나님은 우리의 선행을 갚아주신다(마 6:3-4).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갈 6:7).
바울이 받은 위로들도 많았다. 바울을 통해 병고침을 받은 그들은 그가 그 섬을 떠날 때 그들의 쓸 것을 배에 올림으로써 바울 일행을 대접하였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멜리데 섬의 토인들을 통해 바울이 받은 위로는 컸을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그들에게 병고침을 주신 것도 바울에게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병고침이 있었던 것은 바울의 능력 때문에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때문이었다. 바울 일행이 그곳을 떠날 때 원주민들이 배에 실어준 물품들도 바울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11-12] 석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우리가 타고 떠나니 그 배 기호는 디오스구로라.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바울 일행은 그 섬에 석달을 머물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들이 그 섬을 떠날 때 탄 배의 소속과 이름, 그리고 그들이 로마에 도착하기까지 경유한 항구들과 도시들을 언급한다. 그들이 탄 배는 알렉산드리아 소속의 배이었고 그 배의 이름은 디오스구로이었다. 수라구사[시라큐스]는 시실리아섬의 동쪽의 항구이다.
[13-15]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난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레기온은 시실리아섬 건너편에 있는 이탈리아 반도의 최남단 항구이었다. 바울은 보디올에서 형제들, 즉 예수 믿는 성도들을 만났고 그들의 청함을 받아 7일을 함께 유하였고 로마의 형제들도 바울의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광장 혹은 시장]와 삼관[세 채의 여관들]이라는 곳까지 맞으러 왔다. 바울을 맞으러 나온 이들은 주의 진실한 제자들이었음에 틀림 없다. 요한삼서에 보면,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사도 요한을 영접하지 않았고 그를 부당하게 비난하였고 그것도 부족하여 주의 종들을 대접하려는 자들을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하였다(9, 10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고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마 10:40, 42). 바울은 그를 맞으러 압비오 광장과 삼관까지 온 형제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 바울에게 많은 힘과 위로를 주셨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서로를 향해 그리고 특히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향해 친절과 인간애를 가지자. 멜리데 섬의 토인들에게도 그런 인간애가 있었다. 남을 배려하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은 인간다운 모습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것이 사실상 구원의 목표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든 악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현실에 만족하면서 친절과 선을 행하는 자들이 되자.
또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고 어떤 현실에서도 낙심하지 말자. 바울은 많은 고생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선한 손길 속에 살았고 많은 위로와 힘을 얻었고 체험하였다. 바울의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지금도 살아계셔서 섭리하신다. 우리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행하면 그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위로와 힘을 풍성히 주시며 체험케 하실 것이다.
16-31절, 로마에서 전도함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과 함께 로마에 도착했고 바울 곁에 있었다. 전통사본에는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라는 말 다음에 "백부장은 죄수들을 시위대장에게 넘겼으나"라는 구절이 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따로 있게 허락되었다. 바울이 따로 있는 그 곳은 23절의 '그의 우거하는 집'과 30절의 '자기 셋집' 즉 그가 2년 동안 유했던 집과 아마 동일한 곳일 것이다.
[17-19]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 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바울은 사흘 후에 유대인들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였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부당하게 유대민족을 대항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오해나 잘못된 선입견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이나 조상의 규모와 관습에 대해 잘못한 일이 없다고 말한다. 또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 바 되었고 로마인은 그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므로 그가 마지 못해 가이사에게 호소한 것이요 그의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과연 우리는 사도행전의 앞장들에서 이방인들이 바울의 무죄함을 증거한 바를 읽었다. 사도행전 23:29에 보면,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벨릭스 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대인들이] 송사하는 것이 저희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건이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라고 말했고, 사도행전 25:25에 보면, 로마 총독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에 대해 증거하기를,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라고 했고, 사도행전 26:31에 보면, 아그립바 왕은 총독과 함께 증언하기를,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고 하였다. 바울은 정죄받을 죄가 없었으나 정죄를 당했고 부득이 로마 황제의 판결에 호소하게 된 것이었다.
유대인들 중 높은 자들을 청한 바울의 처신은 지혜롭고 정당하였다. 복음전도자에게는 행동의 정당함과 인격의 신임성이 중요하다. 전도자가 거짓되다면 어떻게 진리를 선포할 수 있으며 그가 악을 행하거나 사리사욕에 따라 행동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라 할 수 있겠는가? 주의 종들에게는 그가 거짓되다거나 불법을 행한다는 말보다 더 심각한 비난은 없다. 그러므로 비록 마귀의 방해와 인간의 무지와 불신앙 그리고 미움, 이기심, 열등감 등의 연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오해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지라도, 복음사역자가 자신의 결백과 신임성을 변호하는 일은 필요하고 지혜롭고 정당한 일이라고 본다.
[20]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바울은 이렇게 그곳의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청하면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결박을 당하게 된 원인이 되는 그 '이스라엘의 소망'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한 증거이기도 한 죽은 자의 부활을 가리는 것 같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인의 공회 앞에서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라고 말했다(행 23:6). 또 그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라고 말했다(행 26:6-7). 죽은 자의 부활은 메시야의 오심으로 확증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자이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물었고(마 11:3),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라고 말했다(요 4:25).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주시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 때문에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다.
[21-22]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 중 높은 사람들은 유대로부터 바울에 대해 어떤 편지나 또 비난의 말을 들은 적이 없으므로 그의 말을 들어보겠다고 하였다. 또 그들은 그러나 이 파,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이 파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안다고 말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초대의 신자들과 교회들은 이방인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또한 유대인 사회에서도 반대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로마에서도 그러했던 것 같다.
[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유대인들은 날짜를 정하여 바울이 우거하는 집에 많이 모여왔다. 바울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유대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말씀을 강론하고 증거하고 권하였다. 권한다는 말은 설득한다는 뜻이다. 그가 전한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중요한 주제이며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강조한다. 그것은 죄인이 하나님 없이 사는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앞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침내 영광스런 천국으로 완성될 것이다. 다니엘은 로마 시대에 하나님께서 한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예언을 기록하였다. 다니엘 2: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예수께서는 처음 복음을 전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4:17).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심령에서부터 시작된다. 바울은 이 복음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 곧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증거하고 권하였다.
[24-29]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복음이 증거될 때에는 믿는 자도 있으나 믿지 않는 자도 있다. 복음이 증거될 때는 항상 그런 현상이 있었다. 복음은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 특히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유대인들이 복음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을 예언하셨다. 그 예언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적절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의 가르침을 들었으나 그를 알지 못했고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바울이 곳곳에 다니며 복음을 전했을 때도 다수의 유대인들은 그가 전한 구원의 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대적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영적 어두움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보내졌음을 알아야 한다. 이방인들은 그 복음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헬라어 전통사본에 보면, 29절에는 "저가 이 말을 마칠 때에 유대인들이 서로 큰 쟁론을 하며 물러가더라"라는 말이 있다. 구원은 전도자에게나 죄인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구주이시다. 물론 죄인 자신이 회개하고 믿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회개치 않고 믿지 않을 것이다. 참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그 2년은 아마 재판받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자기 셋집에 유하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을 다 영접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와 방법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전하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통치를 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요 그가 보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의 중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복음은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믿는 것이다. 사도행전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복음을 담대히 전했다. 그것은 분명히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과 확신이었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다(딤후 2:9). 그 2년 동안 바울은 그 곳에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썼을 것이다. 바울의 전도 활동을 금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복음은 그 후에 계속 오늘까지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다. 그것은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 그러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바울의 처신을 본받자. 그는 자신의 결백과 신임성을 위하여 자신을 변호하였다. 비록 그것이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을 완전히 다 없앨 수는 없을지라도, 그러한 변호는 필요하고 정당한 일이며 우리도 배워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사도행전은 전도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의 역사로 그리고 바울 같은 전도자들의 헌신으로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 오늘날도 바울의 뒤를 이어 그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어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전할 자는 누구인가? 바울은 죄수의 신분과 쇠사슬에 매인 몸으로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다. 우리는 자유의 몸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 하는가? 오늘날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바칠 자가 누구인가? 셋째로,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의 손에 달려 있다.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은 구주이시다. 사람이 복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사람은 무지하고 영적으로 심히 어두워져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를 믿고 따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구원을 위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것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