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
내용 목차
14장: 떡의 기적
15장: 장로들의 유전을 어김
16장: 베드로의 신앙고백
17장: 변화산 사건
18장: 겸손과 용서를 가르치심
19장: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심
20장: 포도원 비유
21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22장: 유대 지도자들과 변론하심
23장: 위선적 지도자들을 책망하심
24장: 재림의 징조
25장: 깨어 충성할 것
26장: 잡히심
27장: 죽으심
28장: 부활하심
14장: 떡의 기적
1-12절, 세례 요한의 죽음
[1-4]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이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들 중 하나인 헤롯 안디바이다. 다른 아들들로는 헤롯 아켈라오와 헤롯 빌립이 있었다.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다스렸다. 헤롯 안디바의 본래의 아내는 아라비아의 왕 아레타스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헤롯은 자기 본처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를 취했다. 더구나 헤로디아는 헤롯과 빌립의 형제인 아리스토불루스의 딸, 즉 헤롯과 빌립의 조카이었다. 그러므로 헤롯의 잘못은 이중적이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도 잘못이고, 성경이 금한 친족결혼을 한 것도 잘못이었다. 하나님의 사람 요한은 헤롯의 이 잘못을 용감하게 바로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지적 때문에 옥에 갇혔다.
[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민중(multitude)은 무리들을 가리킨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 했으나 사람들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을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위선자들, 악인들, 혹은 겁쟁이들은 자기 양심에 비추어 옳은 일을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고 그들의 말과 여론을 더 두려워한다.
일반 대중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는 자를 그 나라의 왕이 죽이려 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는 사실 그 나라의 왕의 자격이 없는 자이다. 왜냐하면 왕은 공의를 행해야 하는 자이며 더구나 그 나라는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을 존경치 않고 오히려 죽이려 하다니 모순이다. 그러나 교회 역사상 교회가 부패되고 세속화 되었을 때 종종 그러하였다.
[6]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사람들은 잔치를 열며 자기 생일을 축하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함이 없는 생일 축하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많은 이들의 생일은 오히려 지옥을 향한 첫걸음이 아닌가? 그들에게 생일이 무슨 복이 되는가? 오히려 화가 아닌가? 장차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나지 않은 것이 낫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생일 잔치에 의의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생일 축하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의 육신의 생일이 영원한 천국의 생명으로 이어진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생일 축하만이 참된 생일 축하이다.
[7-8]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왕이면 무엇이든지 달라는대로 줄 수 있는가? 그런 힘이 있는가? 이것은 허세(虛勢)이다. 그러나 헤롯은 그런 맹세를 하였다. 그는 자기의 말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고 있었다.
헤로디아도 악한 여자임에 틀림 없다. 그는 자기 욕심대로 자기 남편을 버리고 남편의 형제와 결혼했고, 그 결혼이 악하다고 지적해 준 하나님의 선지자 요한을 미워하여 잡아 옥에 가두게 했고 이제 기어코 그를 죽이려 한다. 사람의 악한 마음은 마침내 의인을 죽이는 데까지 간다.
[9-11]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 가니라.
헤롯의 근심은 군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공의의 판단과 처리보다 자기의 명예와 체면을 더 중시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자기의 권력을 남용하여 저 의인 요한을 죽이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요한의 목은 잘리웠고 그 머리는 소반에 담겨 왔다. 세례 요한의 머리가 음식물인가, 그것이 보물인가? 인생의 독한 미움과 복수심은 기어코 이런 끔찍한 일을 만들고 말았다. 인간은 만물보다 더 악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세례 요한의 마지막이 이러하였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작정하신 생애의 끝이었다. 요한의 사역은 이렇게 옥 중에서 끝 맺어야 했다. 그 의로운 설교자는 마침내 목 베임을 당하여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주의 종들에게 수치가 아니고 영광이다. 시작은 좋으나 끝이 좋지 않은 것이 수치이지, 진리를 위해 살기로 결심하여 그렇게 살기 시작하여 사역의 기간 동안 진리만을 위하여 살다가 마침내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영광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을 것이며, 죽음 너머에는 영광이 있다. 더구나 의로운 순교자의 죽음 너머에는 큰 상급이 있다. 그러므로 순교는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감당할 만한 종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이다.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그 수의 규모를 알 수 없으나, 세례 요한의 투옥 후 죽기까지 그의 제자들은 그를 따랐다. 메시아가 오셨으나 그들은 아직 메시아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이렇게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은 같은 시대에 얼마 동안 중첩되었다. 세례 요한 자신이나 그의 제자들은 아직 이 젊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 세례 요한이 죽고 장사된 이 때부터 요한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 같다. 이제 한 시대는 갔고 한 시대가 왔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완전히 끝나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만이 하나님의 참된 사역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3-21절, 5병2어(五餠二魚)의 기적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예수께서 무엇을 들으셨는가? 세례 요한의 죽음의 소식인가, 혹은 1, 2절의 말씀대로 헤롯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를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자가 아닌가 하고 말한다는 소식인가?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 두 사건은 시간적으로 별로 큰 간격이 없었던 것 같다. 오늘 본문은 그 둘의 구별을 하지 않고 서술하는 것 같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간에, 예수께서는 헤롯의 행위나 말에 대해 통분해 하셨을 것이며, 그는 그런 이 세상에 대해 고통하셨을 것이다. 그는 고요히 빈 들로 나가셨다. 세상을 구하러 오신 그가 세상을 싫어하시지는 않겠지만, 때때로 세상 때문에 고통과 눈물을 간직하고 조용히 있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은 여러 마을로부터 그를 좇아 왔다. 세례 요한의 죽음의 소식이 널리 알려졌을 것이며,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공허함이 있고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께 기대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예수께서는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왜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었는가? 그리고 모여든 그 무리가 왜 불쌍한가? 그 무리들은 구약교회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구약교회는 배교적이었고 속화 될 대로 속화되어 있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인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섬기지 않았다. 따라서 무리들은 참된 주의 뜻을 듣기 위해, 그리고 참된 모범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방황했다. 목자 없는 양 같이 방황하는 그 영혼들을 보실 때 어찌 불쌍하지 않았겠는가?
그런 내면적 빈곤과 공허함 뿐만 아니라, 육신적 질병으로 고생하는 자들도 있었다. 주께서는 그런 육신적 문제들까지도 동정하신다. 그는 우리의 영혼을 돌보심처럼 우리의 육신도 돌보신다. 그는 우리가 연약한 육체임을 잘 알고 계신다.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무리들은 저녁이 되기까지 예수님 주위에 있었고 그를 떠나지 않았다. 이미 저녁 시간이 지났지만 그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자들도 그들을 돌려보내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저녁식사시간이니까 마을에 들어가 음식을 사먹게 하자고 제안할 뿐이었다. 그러면 음식을 먹고 또 모이게 될 것이다. 언제 그 모임이 끝날지 몰랐다. 이토록 무리들의 마음은 무엇을 요구했고 사모했고 갈급했다. 이 방황하고 마음에 허전함을 느끼는 무리를 위해 예수께서도 자리를 피하거나 그들을 강제 해산 시키려 하지 않으셨다. 그는 오히려 그들의 육신적 양식을 걱정해 주셨다.
[16-18]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떡의 기적을 작정하셨다. 이제 이미 해가 진 그 저녁, 아마도 그 갈릴리 해변의 빈들에서,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기를 결심하셨다. 제자들이 알아본 결과 무리들에게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요한복음은 좀더 자세히 증거하기를, 그것은 한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고 거기 모인 무리들에게 조금씩 주더라도 200 데나리온 어치의 떡을 가지고도 부족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 형편을 아시고 계셨다. 그는 이미 떡 기적을 작정하셨다. 떡 다섯 개가 그 자체로는 그 무리들에게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부족하지만, 예수님께는 무엇을 행할 능력이 있으시다. 그 조그만 것도 그가 적합하게 사용하실 수 있다. 다른 이는 무엇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그는 그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고, 그 큰 무리를 배부르게 할 수 있으셨다.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그는 사람들에게 잔디 위에 앉으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떡 다석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 '축사한다'는 단어(율로게오)는 감사하다, 찬양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감사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그 큰 무리에게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음식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범을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대해 감사하는 자만이 더 큰 복을 기대할 자격이 있다.
이것은 분명히 육신의 음식을 나누는 사건이지만, 영의 양식을 나눔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인간 설교자와 교사의 보잘 것 없는 준비된 내용이 하나님이 복주시면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일꾼들은 말씀을 전하는 시간마다 그에게 의지하고 의탁하자.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예수님의 떡 제공은 겨우 허기를 면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리에게 배부름을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풍성한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그러하다. 남은 조각은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어졌다. 주의 공급은 배부르게 먹고 많이 남을 정도의 풍성한 공급이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또한 오늘날도 주께서 영육으로 이러한 풍성한 공급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실 것을 우리로 기대하게 한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이것은 대단한 숫자이다. 장년 남자만 5천명이었다. 아마도 오늘날과 같이, 그 당시에도 많은 여자들과 아이들이 거기에 함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리는 만 명이 넘었을 것이다. 그 많은 무리들이 그 저녁에 놀라운 떡의 기적의 현장에 있었다. 그들이 이 일에 증인들이었다.
세상 사랑이 더 강하여 예수님과의 만남은 형식에 불과하고 곧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 어떤 현대 교인들과 달리, 집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 저녁이 되었는데도 그대로 거기 머물고 있던 그 큰 무리, 아마도 그 공허하고 방황하며 갈망하는 무리들에게 주께서는 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다.
22-33절, 바다 위로 걸어오심
[22, 23]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날이 이미 어두워졌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여 먼저 배 타고 바다를 건너가게 하셨다. 그는 또 하나의 기적을 행하실 터이었다. 그 자신은 돌아가는 무리를 친히 돌보셨다. 그는 아마 피곤했을 제자들과 무리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끝까지 보이셨다.
무리를 다 보내신 예수님은 그 자신이 육신적으로 피곤하셨을 것이나,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올라가셨다. 거기서 그 밤에 혼자 계셨고 아버지와 기도로 교통하셨다. 우리는 무슨 일을 행하신 후에도 기도하시는 주님을 본받아야 하겠다.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그런데 제자들이 타고 떠난 배가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떠났으나 바람이 거슬려 물결로 인해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얼마 전에 떡 기적으로 인한 가슴 설레는 기쁨과 만족감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만 주지 않으시고 평안과 불안, 기쁨과 슬픔을 번갈아 가며 주심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 우리의 거룩하고 겸손한 인격은 하나님의 이런 섭리적 훈련 속에서 단련되고 향상된다.
[25-26]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신약 시대에는 밤의 12시간을 4경(更, watch)으로 나눈 로마인의 방식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를 밤이라고 본다면, 제4경은 오전 3시-6시까지의 시간, 즉 이른 새벽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밤을 새우시며 그 새벽에 바다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제자들에게로 오셨다. 그는 바다 위로 걸어서 오셨다. 그것이 가능한가? 그가 단순히 사람에 불과하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비과학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무엇이 아니다.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표이다.
제자들은 바다 위로 걸어 오는 자가 주님이심을 생각지 못했다. 그것은 육체를 가진 자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그것이 영 혹은 귀신 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나뭇가지를 던져 도끼를 뜨게 하신 하나님께서 물 위로 걸으시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27-29]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예수께서는 두려워 하는 제자들을 즉시 안심시키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물 위로 걸어오고 있는 자가 자신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님을 단순한 한 인간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는 그의 신성을 믿었음에 틀림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선생님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부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믿음은 비교적 순수했다. 그는 신적인 주님께서 물 위로 걸어 오실 수 있음을 믿었고, 또 그가 자신을 명하시면 자신도 물 위로 걸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큰 믿음이 아닌가?
예수께서는 이 소박한 베드로의 믿음의 요청을 거절치 않으셨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때때로 그의 구하는 것이 부적절하고 불필요할지라도 허락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도 그러하다.
[30-31]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이것이 인생의 믿음의 정도이다. 인간의 믿음이 어디 있는가? 우리가 믿는다고 하지만, 현실 앞에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쉽게 산산조각이 나는가?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다 그렇다. 그러나 베드로에게처럼 우리에게도 우리의 믿음 없는 형편에서도 도움과 구원을 요청할 주님이 우리 옆에 계신다.
예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 주셨다. 하나님은 위기 중에 신속한 도움이시다. 베드로는 믿음이 적고 의심했다고 지적을 받았다. 믿음이 없어 의심하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다.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얼마나 든든한 사실인지 모른다.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하고 그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과 구주가 우리 곁에 계시다는 사실이 말이다. 얼마 동안 바다에서 고통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주께서, 아마도 급히, 바다 위로 걸어서 오셨다. 비상한 때에는 하나님께서 비상하게 활동하신다.
여하튼, 떡 기적으로 혹시 부풀어 올랐을지도 모르는 제자들의 마음은 철저하게 부숴졌을 것이며, 능력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절감했을 것이다. 주 예수님만 우리의 능력이시다. 우리는 무익하고 무능한 종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의 능력 안에서만 유능할 수 있고, 그의 지혜 안에서만 지혜로울 수 있을 뿐이다.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신적 인격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는 너무 많았다. 떡의 기적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고, 물 위로 걸어오심과 바람을 잔잔케 하신 능력의 일을 이 새벽 연거푸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이 증거의 기록을 통하여 그를 확인하고 그를 확신하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그리고 그에게 합당한 영광과 헌신을 돌리자.
34-36절, 옷가에 손대는 자들을 다 고치심
[34-36]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떡 기적을 행하신 들판은 갈릴리 해변의 들판이었다. 예수께서는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지만, 육신에 병든 자들도 많이 고쳐주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영혼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동시에, 이웃의 육신적 질병과 고통에 대해서도 동정심을 가져야 한다. 참된 사랑은 영육의 구원과 회복에 대한 관심이다.
예수님의 능력은 얼마나 놀라운 능력인지!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그 불쌍한 여인만이 아니고,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했고 손을 댄 자는 다 나음을 얻었다. 이것은 그가 신적 능력을 가지신 신적 인격이심을 증거한다.
15장: 마음의 더러움
1-20절, 손 씻지 않고 먹었다는 비난에 대하여
[1-2]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 먹을 때 손을 씻는 장로들의 유전[전통]을 범했다고 비난했다. 떡 먹을 때 손을 씻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렇게 비난할 만큼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무지한 자들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을 분간치 못한다.
[3-6]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기들의 유전(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말씀을 범함을 지적하셨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면 부모에게는 무엇을 안드려도 괜찮다고 가르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의무를 안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이 지적을 통해 무엇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절대적 기준과 규칙이 되는가를 분명하게 보이셨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절대적 규칙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 뿐이다. 우리는 성경이 명하는 것은 해야 하고 성경이 금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성경이 침묵하는 것에 대해서는 독단적이지 말아야 한다. 성경만이 절대적 기준이며 최종적 권위이다.
[7-9]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입술 뿐이었고 실상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었다. 이것이 무지한 외식자들의 종교 생활이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과 형식은 있었지만, 실제는 헛수고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람의 유전과 전통이냐,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이냐?--이 두 갈래 길에서 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전자에 더 충실하였다. 그러나 주께서 보이신 것은 우리가 후자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최종적 권위를 가지지 않는 것과 최종적 권위를 가지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오직 성경에 충실해야 한다.
[10, 11]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2-14]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두 종류의 씨 뿌림이 있다. 천부께서 심으신 것이 있고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고 다른 이가 심은 것이 있다. 천부께서 심으신 것은 영원한 생명, 곧 중생의 새 새명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러나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가짜이다.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결국 뽑힐 것이다. 그것은 최종적 심판 때에 뽑힐 것이다. 그러나 환란과 시험의 때에도, 그리고 강력한 바른 말씀 앞에서도 스스로 뽑힐 수도 있다. 그러므로 바른 말 앞에 실족하는 자는 그냥 두라. 그러나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바른 말씀 앞에 실족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15-20]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음(heart, 카르디아)은 인격의 중심이다. 우리는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신 6:5).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의 마음은 심히 부패되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 되었다(렘 17:9).
이제 구원은 마음의 변화를 수반한다. 새 마음을 받는 것이 구원이다(겔 36:26).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 그러나 마음(카르디아, heart)의 변화는 무엇보다 마음(생각, 누스, mind)의 변화를 의미한다. 구원받은 자는 여실하게 그 생각이 변했다. 전에는 사람이 그 생각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으나, 이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새 생각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롬 7:23, 25; 12:2; 고전 2:16; 엡 4: 23).
더러운 손으로 먹는 것이 사람을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더럽히지는 못한다. 사람의 더러움은 마음 속에서 나오는 악들이다. 그러므로 외적 성결보다 내면적 성결을 힘써야 한다. 마음의 청결을 사모하고 힘써야 한다.
21-28절, 가나안 여자의 딸을 고쳐주심
[21-23]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두로와 시돈 지방은 이스라엘 땅 북쪽에 인접한 지역이다. 여기에서 한 이방인이 예수님께 나아왔다. 마가복음에는 그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 여자를 위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이방 여자에게는 놀라운 믿음이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다. '주여'(퀴리에)라는 말도 그의 신적 인격을 인정하는 귀한 신앙고백이라고 보이며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그가 메시아라는 신앙고백임이 분명하다.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와 병고침을 받은 자들은 대개 이렇게 믿음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는 그의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음을 고하면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쳤다.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딸의 불행과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여겨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던 것이다. 구하는 자가 받는다. 구하되 간절히, 때로는 외쳐 구해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없으셨다. 여기에 하나님의 침묵의 시험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의 간구에 대해 침묵하신다. 제자들은 그 여자의 외침이 시끄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 와서 그 여자를 보내라고 요청하였다.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이것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주된 사역을 표현하는 말씀일 것이다. 요한복음에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전도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지상 사역은 주로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방인 구원은 그의 제자들에게 위탁될 것이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이 될 것이었다.
[25, 26]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주님은 그 여자를 포함하여 이방인들을 개들에다 비유하신다. 주님의 말씀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당시의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사용하여 시험하시려고 하셨는지 우리는 확실히 모른다. 그러나 진심의 말로 보아도 주님의 이 말씀이 지나친 말씀은 아니다. 사실 구약시대로 보면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이었지만, 이방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하나님 없는 세계이었다. 인생이 하나님을 떠나 살면 실상 짐승보다 나은 점이 없다. 오히려 사람은 짐승보다 더 악한 일들을 저지르는 것이다. 인간은 개들처럼 이웃을 물어뜯고 부도덕한 일을 행하는 존재로 타락하였다. 여하튼 주님의 이 말씀은 그 여인에게 참된 자기 인식과 겸손과 믿음을 요청한다. 자기 자신이 벌레와 같은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주님께 참으로 나아올 수 없다.
[27, 28]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그 여자의 믿음은 참으로 컸다. 그는 참으로 낮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그의 딸은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진 그 시간에 고침을 받았다. 이것이 예수님의 능력이다. 그는 세상에 계실 때 자신의 신적 인격과 능력을 이와 같이 여러 사건들로 밝히 증거하셨다.
29-31절, 각종 병자들을 고치심
[29-3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께서는 두로와 시돈 지방을 떠나 다시 갈릴리 지방으로 들어오셨다. 그는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셨다. 그 산은 아마 산상설교를 하셨던 그 산인 것 같다(마 5:1). 예수님의 말씀사역의 장소는 어떤 때는 산, 어떤 때는 바닷가(마 13:1), 어떤 때는 빈들(광야, 마 14:13)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각종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다. 사람들의 세계에는 그때에나 지금에나 많은 병들과 문제들이 있다. 그런 문제들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외적인 문제들에 대해 주로 심각성을 가진다. 예수님의 사역은 회개와 죄 사함의 영혼 구원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항상 외적인, 육신적인 병들에 더 관심이 있었다.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 등 각종 병자들이 예수님의 발 앞에 놓여졌다.
예수께서는 그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벙어리는 말하고 불구자는 건전하게 되고 절뚝발이는 걸으며 소경은 보게 되었다. 예수님은 다양한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마태복음 4:23, 24에 보면, 그는 모든 병을 고쳐주셨다고 기록했다. 마태복음에 이제까지 나온 병자들의 종류를 보면, 4장에 귀신들린 병, 간질, 중풍병, 8장에 문둥병, 열병, 9장에 혈루병, 소경, 죽은 자, 벙어리, 12장에 손 마른 병, 그리고 본장에서 절뚝발이, 불구자가 추가된다. 이러한 병들은 오늘날 종합병원의 내과, 외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피부과, 안과, 이비인후과, 정신과 등에 관계된다.
예수님의 치료는 거의 즉각적이고 완전하였다. 병 치료의 기적들은 그의 신성의 증거와 표이다. 복음서들을 읽는 자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보고 그를 확신해야 한다. 사람은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무리들은 그 기적들을 보고 기이히 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성경의 역사적 사실들은 신중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성경의 역사적 사건은 그것이 가지는 어떤 분명한 의미가 있다. 그것을 넘어서 무리하게 영해하려 할 때 불확실한 주관주의 오류가 발생한다. 역사를 그대로 오늘 현실에 적용하려 하거나, 역사를 임의적으로 영해하는 것은 둘 다 불건전한 해석이 된다.
예수님의 병 고치신 기적들에 대해서도 그렇다. 예수께서는 병 고치는 능력을 사도들에게 주셨고(마 10:1), 사도시대에는 스데반이나 빌립 같은 집사들도 기적을 행하였다. 성도들에게도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주어졌다. 그러나 병 고침 등의 기적들은 그 후 시대에 교회에 항존하는 은혜로 계속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기적의 절대필요성은 사라졌고 기적은 내면화되었다.
사실 사도들이나 사도시대에 주신 외적 기적들의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확증하는데 있었다(히 2:3, 4). 마치 모세오경이 기록된 이후, 모세에게 주셨던 것 같은 기적들이 그 후 세대에 주어지지 않았던 것과 같이, 신약성경이 기록되고 사도들의 기적들로 그 성경이 확증된 이후에는 외적 기적의 절대필요성이 사라졌다.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아브라함의 입을 빌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세와 선지자들(즉 구약성경)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16:31). 오늘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기적을 통해서라기보다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하는 것 뿐이다. 외적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적 기적이다. 즉 중생의 기적, 내적 변화의 기적, 영적 성장의 기적--이것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외적 기적과 내적 기적이 항상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분명하다. 외적 기적을 경험하는 것과 내적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
주께서는 교회 역사에서 외적 기적들을 주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내적 기적들을 언제나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풍성하게 일어났다.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는 단순히 육신적 질병의 치료가 아니고, 영혼의 구원, 믿음, 회개, 영적 성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적 기적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과 믿음과 회개와 영적 성장을 위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현실의 상황 속에서 참된 믿음의 생활을 하기를 힘쓰자.
32-39절, 두번째의 떡 기적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예수님께서는 두번째 떡 기적을 행하셨다. 그것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심에서 나왔다. 무리들은 이미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붙잡혔던 것 같다. 어떻게 사흘 동안이나 그 광야에 거할 수 있겠는가? 먹을 것은 다 떨어지고 육신의 힘도 다 떨어졌다. 그냥 해산하면 길에서 기진할 자들이 있을 정도이었다. 이때 주께서 그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주께서는 단순히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을 위해 떡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사흘이나 있었던 무리들을 위해 행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주께서는 사람의 영적 문제에 대해서만 아니고 육적 문제에 대해서도, 즉 먹는 떡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셨다. 오늘 우리들에 대해서도 그러하시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의 섭리적 배려 속에 공급된다. 그는 우리의 영육 둘 다를 돌보시고 기르시는 목자이시다.
[33]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제자들은 얼마 전에 경험한 떡 기적을 잊었던 것 같다. 제자들은 주님의 관심에 대해 적어도 잠잠히 주의 능력을 의지하고 기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한계성을 가지고 인간의 이성적 계산에만 빨랐다. "여기는 광야인데 어디서 이 많은 무리를 위해 떡을 확보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면, 만일 그들이 이 순간 지난번의 떡 기적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주님께 오히려 어떤 해결책을 요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에서 장정만 60만명, 여자들과 아이들을 합하여 약 200만명이 족히 될 이스라엘 무리를 광야에서 40년 간이나 먹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고 믿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믿음이 없는지라 현실의 상황에서는 믿음보다 인간의 계산이 앞선다.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이것이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이었다. 여기에 인간의 제한성과 하나님의 초월성이 있다. 떡 일곱 개는 턱 없이 모자라는 제한된 분량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이것이 신의 능력, 곧 전능이라는 것이다.
[35]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인간 예수께서는 믿음으로 충만하셨다. 그의 충만한 믿음은 그의 신성의 도우심에 근거했을 것이다. 어떻게 떡 일곱 개를 가지고 그 많은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는가?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을 그는 하셨다. 그의 신성과 인성은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비하게 결합되어 있으셨다.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으로 인하여 믿음 충만하셨다.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그의 앞에 놓인 떡과 생선, 그의 손에 들린 그 음식물은 그 큰 무리에 비해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리곤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기 시작하셨다. 제자들은 주님께 받아 무리에게 주었다. 예수님의 행위는 인간의 제한성을 초월하였다. 그 보잘 것 없는 음식물이 그의 손에서는 신기한 팽창을 하였다. 주께서 떼어 주시는 행위는 몇 차례로 끝나지 않았다. 그 손길은 마침내 온 무리를 다 배불리 먹일 때까지 계속되었다. 인간의 육신적 필요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 필요가 넘치게 충족될 때까지 그리고 남을 때까지 계속된 것이다.
[37-39]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에 가시니라.
여기에 예수님의 신성이 또 한번 밝히 증거되었다. 남자만 4천명이니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아마도 만명 이상은 되었을 그 무리를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초월하는 사건이다. 이것은 신 만이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의 일이다. 그 일을 예수께서 행하셨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16장: 베드로의 신앙고백
1-4절,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함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신앙사상이 서로 달랐으나 예수님을 반대하는 데는 연합하였다. 사탄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불화할지라도 진리를 대적하는 데는 연합한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 요청은 그들의 믿음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사람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다.
믿으려 하는 자는 이미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확인함으로써도 충분히 믿을 수 있다. 이미 주신 기적들을 확인해 보려 하지 않고 또 하나의 어떤 기적을 구하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오늘 우리도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충족하게 여기지 않고 추가적 기적들을 구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부족함과 마음의 완고함을 나타낸다.
[2,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중생치 못한 자들은 세상지식과 세상판단력은 있어도 진리의 지식과 영적 판단력은 없다. 메시아가 오셨다는 시대의 표적들은 너무 많았다. 구약 예언들은 성취되고 있었다. 메시아의 베들레헴 탄생, 유다 지파에 속함, 다윗의 자손으로 오심, 소경과 벙어리와 앉은뱅이 등 병자들의 치료--이것들은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표들이었다. 메시아는 확실히 오셨다. 그러나 소경된 지도자들은 시대의 표적들을 분별할 힘이 없었다.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착하고 경건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그러나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그를 시험하고 표적을 구하고 있다. 이들은 참 교회에 속하지 않고 교회 밖에 있다. 주께서 이런 자들의 불신앙과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하실 표적들은 없다. 주님의 기적들은 주로 그를 따르며 그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그러나 한 가지 표적은 있다. 그것은 요나의 표적이다. 요나가 삼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삼일간 무덤에 있게 되실 것이다. 요나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모형적으로 보인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삼일만에 다시 사심의 사건은 불신앙적 세상을 위해 주시는 마지막 표적이다. 이 표적 앞에 사람은 가부 간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를 거부할 것인가? 또 다른 표적이 필요치 않다.
5-12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5-7]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떡의 누룩을 가리키는 줄로 잘못 이해하였다. 그들은 주님이 때때로 하신 비유적 표현을 잘 이해하지 못하곤 하였다.
[8-10]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주께서 제자들과 하신 이 대화는 앞에 기록된 두 차례의 떡 기적을 재확인하는 의미를 가졌다.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이 두 차례의 기적사건들은 지어낸 신화가 아니고 역사적 사실과 사건임을 주께서 재확증하셨다.
이처럼 성경의 사건들은 이중 삼중적으로 증거되었다. 불신앙자는 그 어떤 증거를 보고 들어도 믿지 않을 것이지만, 믿으려 하는 자는 믿을 만한 증거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믿지 못할 불확실한 어떤 것을 강제로 믿으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믿을 만한 많은 증거들을 성경에 제시해 주시면서 믿으라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요청하시는 분이시다.
[11, 12]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주님의 말씀은 떡의 누룩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사람의 교훈을 가리킨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곧 그들의 교훈을 주의하라고 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결함은 자기 것 만을 제일인줄 알고 자기들의 잘못과 결함에 대해 반성할 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우물안 개구리들과 같았다. 자기들이 세상에서 가장 잘 믿는 줄로 잘못 생각하였다. 사실 그들 가운데는 율법 선생들인 랍비와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모세오경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보수 신앙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바르게 깨닫지 못했고 자기 의(義)를 의지하였다. 그들은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종교적 지식도 많았고 상당한 열심도 있었으나 종교의 참본질이 무엇임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종교의 외적 규례들을 중시하였으나 보다 중요한 내면성을 무시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외모보다 마음이다. 마음의 할례는 종교의 시작이다. 그러나 그들은 형식주의에 떨어져 있었다.
다른 한편, 사두개인들은 그 당시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존중했으나 다른 성경들은 무시하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들을 불신하고 부정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천사도 영도 몸의 부활도 믿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세상의 권력과 금력과 결탁한 세속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현실에 잘 적응하였고 잘 타협하였다. 당시의 부유한 고위 제사장들은 이 파에 속하였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곧 교훈을 주의하라." 교훈은 누룩과 같이 번져 나간다. 그것은 교훈의 영향력을 의미한다. 그것이 좋은 영향력이든지 아니면 악한 영향력이든지 간에 사람의 교훈은 영향력을 지닌다. 좋은 교훈은 좋은 영향력을 끼치니 좋지만, 잘못된 교훈, 이단적 교훈, 율법주의, 형식주의의 교훈, 혹은 자유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의 교훈은 참된 경건을 해치는 나쁜 영향력을 지닌다. 잘못된 교훈은 분별하여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신앙적으로 큰 손해를 본다. 디모데후서 2:17에는 잘못된 교훈을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에 비교하였다. 그것은 조기 발견, 조기 치료치 않으면 온 몸을 망치게 될 것이다. 자신만 망치지 않고 온 교회를 망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말을 분별하여 붙들어야 하고 잘못된 말을 분별하고 경계해야 한다. 여기에 바른 성경 연구의 중요성이 있다.
13-20절, 베드로의 신앙고백
[13-16]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인자'(人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로서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자주 부르셨다. 예수님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견해는 다양했다. 오늘날과 같이, 그 당시에도 예수님을 단순히 선지자 혹은 종교적 선생이나 지도자 정도로 아는 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바른 견해는 하나뿐이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베드로의 고백대로, 그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를 가리킨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구약시대에 기름 부음을 받았던 세 직분이 있었다. 그것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었다. 메시아는 이 세 직분을 완성할 자로 오실 것이었다. 그는 참선지자, 참제사장, 참왕이 될 것이었다.
예언된 메시아는 또한 신적 인격일 것이었다. 이사야 9:6의 예언대로,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불리웠다. 미가 5:2의 예언대로,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영원 전에)"이시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신적 본질을 가진 분이시다.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신적 그리스도, 곧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바요나'라는 말은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복되다.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신앙고백은 복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지식을 갖고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계시한 이는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베드로가 이 구원적 지식을 갖게 된 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왔거나 어떤 인간 선생을 통해 된 것이 아니다. 구원적 지식은 사람 속에서 나오거나 사람이 줄 수 없다. 사람은 영적으로 어두워 있고 무능력해져 있다. 구원적 지식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올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부르시는 자만이 그런 계시의 복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하고 무능한 죄인을 불러 구원시키신다.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페트로스)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요한복음 1:42의 증거대로, 그가 동생의 인도로 처음 주님께 나아왔던 때이었다. 그러나 그가 바른 신앙고백을 했을 때 주께서는 그 이름을 재확인시키셨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이어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원문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은 남성명사이지만, 반석이라는 이 말은 여성명사이다. 명사의 성(性)이 바뀐 것을 보면, 이 반석(페트라)이 시몬 베드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졌거나 행사했다고 증거하지 않는다. 그에게 주어진 천국열쇠와 그 기능은 마태복음 18:18에서 다른 제자들에게도 주어졌다. 또 심지어 마태복음 16:23에서 주께서는 그를 사탄이라고 책망하시기도 하셨다. 더욱이, 베드로의 수위적(首位的) 사도권이 감독이나 교황에게 전달되었다는 천주교의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
'이 반석'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다. 교회는 사도들이 받고 고백하고 가르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진리의 터 위에 세워질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교회의 기초는 예수님께 대한 바른 믿음이다.
또한 교회는 어떤 사람이나 사람들의 교회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내 교회를'이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목사의 교회도, 교인들의 교회도 아니다. 개척교회는 모교회의 교회나 모교회의 당회의 교회도 아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요 교회의 우두머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은 다 종들이며 일꾼들이다.
주께서는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의 설립자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시다. 교회는 사람들의 사업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업이다. 그가 친히 자기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업에 참여한 동업자요 하나님의 일에 고용된 일꾼이다. 사람이 교회를 세우려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힘과 능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루신다.
'음부의 권세'는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가리킨다. 죄 아래 있는 온 세상은 사망과 지옥의 권세 아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교회는 그 권세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제 사망과 지옥의 권세가 교회를, 구원받은 성도들을 이기지 못한다. 이것이 구원의 복과 능력이다.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베드로에게 주신 이 천국열쇠는 교훈과 권징의 권세를 상징한다. 이 권세는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다른 제자들에게도 주어졌다. 교회가 복음 진리를 선포할 때 믿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고 거부하는 자는 천국에서 제외된다. 또한 바른 교훈에 순종치 않는 자들은 정당한 권징을 받게 된다. 바른 권징은 천국문을 닫고 해벌은 그 문을 연다. 하나님께서는 지상교회에 권위를 주셔서 교회가 바른 말씀으로 교인들을 돌보고 감독하며 다스리게 하셨다.
[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주께서 때때로 자신의 기적 사건들이나 메시아 신분을 감추신 까닭은 아마도 민중들이 메시아의 참사명을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정치-경제적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메시아의 참사명은 죄 사함으로 말미암은 영혼들의 구원에 있었다. 그 사명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러므로 무리들이 이 사실을 아직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의 사역 초기에, 주께서는 자신을 비교적 감추셨다. 물론 믿는 제자들에겐 그의 신분과 사명이 처음부터 드러났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주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강림 전에는 주의 사역의 참성격을 다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21-28절, 자기 부정을 가르치심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예수께서 처음부터 자신의 죽음을 가르치지 않은 것은 믿음이 적은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고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나타난 대로 제자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 분명해졌던 것 같다. 이 때부터 주께서는 비로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치시기 시작하셨다. 이 예언은 마태복음에 세 차례 반복되어 있는 것들 중 첫번째 예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참된 교회의 기초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의 죽음은 속죄의 죽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소식이다. 참 교회의 설립은 이 속죄의 복음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고린도전서 1:22, 23,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속죄의 복음을, 속죄의 복음만을 힘써 전파하라. 그리하여 이 주위에 구원 받을 영혼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도록!
[22, 23]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주님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책망하듯�이 말하기를, "주여, 그리 되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했다. 베드로는 아직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요성과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 성도의 참생명이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 바른 신앙고백을 하여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이었지만, 지금은 사탄이라는 책망을 들었다. 베드로의 충고는 주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생각은 사람의 일에 불과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고 생각지 못했다.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주께서는 교회의 설립을 가르치신 후 얼마되지 않아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 성도들의 자기 부정의 삶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주 예수님 자신이 가실 길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었다. 주를 따르는 자들의 길도 똑같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주님을 믿고 따라갈 수 없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 부정을 전제하고 자기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성도의 삶은 한 마디로 자기 부정의 삶이다. 개척교회를 시작하실 성도 여러분은 이런 각오를 하셨는가?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제 목숨'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키고, '잃어 버릴 것이다,' '찾을 것이다'는 말은 영원한 생명의 상실 혹은 획득을 가리킨다. 이것은 자기 희생의 행위로 영생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니고, 자기 희생의 행위가 영생 얻는 자의 당연한 삶임을 보인다. 성도의 자기 희생적 삶은 그가 영생의 길을 가고 있다는 확증이다. 구하려 하면 잃고 잃으면 찾는다.
성도의 자기 부정과 십자가의 길은 주님이 가신 길과 비슷하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부활하셨다. 그는 죽으심으로 죄인을 위한 영생의 길을 여셨고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주를 위하여 죽으면 확실히 부활할 것이다. 교회의 설립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자기를 바치는 자는 확실히 영생에 이를 것이다.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것은 육신적 생명에나 영원한 생명에나 다 적용된다. 이 세상에서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육신의 생명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가치가 있다. 육신의 생명은 백년에 국한되지만, 영생은 시간적 제한성이 없다. 또 육신의 생명은 수고와 고생으로 가득하지만, 영생은 의와 평강과 기쁨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생명이다. 이 영생과 바꿀 수 있는 보화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목표는 영생 이외에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이 영생을 위해 육신의 생명을 즐거이 하나님께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주께서는 이 땅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지만, 장차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의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실 것이다. 그의 재림에서 그는 그의 본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성도들은 이 땅에서 자기 부정과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야 하지만, 장차 주께서 다시 오실 때 그런 삶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가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다. 현재 감추어져 있는 성도의 영광은 그때 밝히 나타날 것이다.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이라는 말은 '그의 나라에 오는 것'이라는 말이다. 마가복음 9:1,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주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주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지만, 본 절의 예언은 주의 나라의 영광과 능력을 증거할 어떤 사건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변화산 사건이나 오순절 성령 강림이든지, 아니면 요한계시록 끝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사도 요한의 환상을 가리킬 것이다.
17장: 변화산 사건
1-8절, 변화산 사건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엿새 후라고 날짜를 꼽은 이유는 무엇인가? 주께서 자신의 죽음의 예언을 하신 지 몇 일이 안되어 세 제자들이 주의 신성의 영광을 재확인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지 모르겠다. 혹은 바로 전 절에 예언대로, 인자가 그의 영광의 나라에 임하는 것을 세 제자들이 맛보았음을 증거하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주께서는 세 제자들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의 영광, 곧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이다. 영광의 주께서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이사야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러나 그의 본래의 모습은 영광스럽다.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인물들일 것이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고, 엘리야는 선지자들 중에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고 그의 능력을 체험한 자이었고, 유독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산 채로 하늘로 올리웠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들이 주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에 대해 말씀하였다. 메시아의 죽음은 성경 전체의 대 주제이다.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주의 신성의 영광을 보고 모세와 엘리야의 환상까지 보았으니 실로 황홀한 지경이었을 것이다. 세 제자들은 산 아래서 행해야 할 의무를 잠시 잊고 산 위에 초막 셋을 짓기를 소원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산 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산 아래로 내려가 온 땅을 복음화 시키는 것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이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의 증거이다. 그는 제자들을 위하여 친 음성으로 아들에 대해 증거하여 주셨다. 이것이 제자들이 간혹 경험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이다. 그 영광은 육체에 가리워져 있었으나 때때로 이런 저런 증거들과 함께 나타났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베드로 사도는 후에 그의 두번째 서신에서 이 사건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
[6-8]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제자들이 본 것은 너무 영광스러웠고 들은 것은 너무 두려운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보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의 증거를 들었다. 주께서는 심히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은 짧은 시간 동안만이었다. 이제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경험의 반복이 아니고 믿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영광의 주님으로 확실히 믿고 그 믿음대로 그를 위해 사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것이 필요하다.
9-13절, 엘리야가 먼저 왔음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은 참된 믿음을 위해서만 알려질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광을오용치 않도록 주께서는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자신이 알려지지 않게 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그의 신적 영광과 기적들은 단순한 호기심의 만족이나 지상 왕국 건립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되고, 죄 사함으로 말미암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믿는 자에게는 그리고 믿으려 하는 자에게는 성경에 증거되고 기록된 그의 이 일들이 확실한 표들이 된다.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서기관들, 즉 당시의 성경학자들은 말라기 4:5, 6의 예언을 달리 해석할 수 없었다. 거기에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예언되어 있다. 이것은 메시아께서 나타나시기 전에 한 선지자가 나와서 대중들을 회개시킬 것을 예언한 것이었다. 여기에 예언된 엘리야의 미리 나타남을 성경학자들은 부정할 수 없었고 성경을 아는 경건한 자들은 다 기다렸을 것이다.
[11-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예수님도 구약의 예언을 서기관들이 이해한 그대로 인정하셨다. 엘리야가 과연 먼저 올 것이고 그에게 부여된 임무대로 많은 사람들을 회개케 할 것이다. 이 구절은 사람의 윤회(輪廻)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승천한 엘리야가 다시 어린 아기로 출생하거나 하늘로부터 강림할 수는 없다. 이 예언은 한 선지자가 엘리야의 심령으로 나타나 엘리야 당시와 같이 배교적인 그 시대 교회의 상황을 거슬려 외로이 그러나 능력 있고 충성되게 사역할 것을 의미한 것이라고 본다.
그 선지자가 왔다. 그는 세례 요한이었다. 누가복음 1:15-17에 증거한 대로, 그의 출생을 예언한 천사는 말하기를, "이는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서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언대로 오실 자가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하여 임의로 대우하였다. '임의로'라는 말은 자기들의 원하는 대로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바르게 알아보고 그를 존중하고 그를 따르는 것이 필요했으나, 대중들의 마음에는 그런 분별력, 그런 공경심, 그런 순종심이 없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대중의 지도자들은 영적 소경들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앞선 자가 증거했던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게도 합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께서는 대중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많은 고난과 죽임을 당하실 것이었다. 열린 눈, 열린 귀가 없는 무지한 대중들은 그를 핍박하는 그 핍박에 동참할 것이다. 그러나 열린 눈, 열린 귀를 가진 자들은, 그 수가 많든지 적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를 공경하고 그를 따를 것이다. 동일한 주의 종에 대하여 그리고 동일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그 두 부류는 나뉘일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쪽에 속해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자.
14-21절, 간질병 아들을 고쳐주심
[14-16]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영어성경(KJV, NASV)에는 '미친'(lunatic)이라고 번역하였으나, 원문의 단어는 우리 말 성경대로 '간질'이라는 의미가 있다. 마가복음 본문의 묘사는 간질과 비슷하다. 누가복음 9장에는 그 아들은 그의 외아들이라고 하였다. 그 아들은 벙어리 귀신(영)이 들렸는데, 귀신(영)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고 파리하여 간다고 하였다. 귀신은 악한 영, 곧 악한 천사이다. 이 병은 악한 영의 활동으로 인한 것이었다.
[17, 1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주께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를 책망하시고 탄식하신다. 제자들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받았으나 믿음이 약하여 그 아들을 치료하지 못하였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 믿음 없는 세대 가운데서도 그 불쌍한 아이를 고쳐주시기 위해 그를 데려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그 더러운 영을 꾸짖으셨다. 그의 명령으로 충분하다. 주의 말씀은 자연계와 정신계를 주관하는 말씀, 곧 신의 말씀이시다. 그 아이는 일어섰다. 주의 치료는 즉각적이고 완전하였다. 악령은 나가고 그 아들은 고침을 받았다.
[19-21]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1절 없음.)
이 말씀은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큰 능력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음을 보이며,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실상 믿음이 없음을 보인다. 우리의 믿음이란 작은 겨자씨만한 분량도 되지 못한다.
전통사본에는 21절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마가복음에도 전통사본에는 이 구절이 나온다. 기도와 믿음은 정비례한다. 믿음이 있어야 기도하고, 믿음이 없으면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믿음이 약하면 조금 기도하고 믿음이 강할수록 더 많이 기도할 것이다.
금식은 기도의 특수 형태이다. 음식은 생명과 힘과 즐거움의 공급 수단이다. 금식은 생명과 힘과 즐거움의 중단이요 억제이다. 그것은 비상한 기도의 방식이다. 비상한 상황에는 비상한 기도가 필요하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되지 않을 때, 엎드려 기도하는 것 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여기에 문제를 가진 성도의 문제해결의 열쇠가 있다. "기도와 금식 외에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 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셔서 더욱 힘 있게 기도하게 하소서.
22-23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두번째 예언하심
[22, 23]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24-27절, 반 세겔 세금을 내심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고향이다. 반 세겔(디드라크몬)은 2 드라크마라는 단어이다. 이것은 성전 봉사의 유지를 위한 세금이며, 그 유래는 출애굽기 30:11-16이라고 한다.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 20세 이상된 모든 사람들은 생명의 속전으로 반 세겔을 내어야 하며 그 금액은 회막의 봉사에 쓰게 하였다. 역대하 24:6에 보면, 유다왕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에게 책망하며 지적하기를 왜 레위 사람을 시켜서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 회중이 법막을 위하여 정한 세를 거두게 하지 않았느냐고 하였다. 성전 세금을 받는 자가 베드로에게 와서 너의 선생이 세금을 안 내느냐고 물었다.
[25, 26]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베드로는 세금에 관해 '주께서 내신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주님이 세금을 안 내는 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자신과 주님의 돈 주머니가 비어 있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대답은 주께서 모든 것을 처리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먼저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베드로가 말하기 전에 그가 당한 일을 알고 계셨다. 그의 지식은 인간의 제한성을 초월한다. 그는 전지(全知)하신 자이시다. 더욱이, 주께서는 세상 임금들이 이런 세금들을 받는 것은 자기 아들들에게서가 아니고 다른 이들 즉 그 나라의 백성들에게서이며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관세(텔레)는 물품세 혹은 재산세이며, 정세(켄소스)는 인두세 혹은 주민등록세를 가리킨다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세금, 특히 성전세를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성전세가 면제될 자는 바로 그이다. 이 말씀에서 그가 암시하는 바는 자신이 온 세상의 왕이요 왕의 아들이시며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증거이다.
[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주께서는 사람들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세금을 내게 하셨다.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고 말씀하시고 다른 제자들을 언급지 않으신 것은 이것이 아마도 그가 베드로의 집에 머무실 때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여하튼, 주님 자신이 세금을 내셨다면, 주의 제자된 우리들이 국가에 대한 정당한 의무를 회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마태복음 22:2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믿지 않는 사람들로 오해케 하지 않도록 처신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 때 그에게는 한 세겔도 없으셨음이 분명하다. 제자들의 주머니도 비었음이 분명하다. 부요하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한 삶을 사셨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함이셨다. 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우리는 왜 주님을 위해 가난한 데 처하기를 싫어하는가? 왜 우리는 주님을 위해 조그마한 손해도 보기를 싫어하는가? 왜 우리는 주님의 이름 아래 높아지고 편안하고 부요하기만을 구하는가?
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얻은 이 사건은 실로 기적이었다. 주께서 바다 속에 물고기 입에 물린 한 세겔을 보셨다는 것은 그의 전지하심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 고기가 낚시에 걸린다는 것은 심지어 예측된 우연으로 돌릴 수 만은 없는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물고기를 보셨고 그 입에 물린 한 세겔을 보셨고 그 물고기가 낚시에 바로 그 시각에 정확히 걸리게 하셨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주권, 곧 신적 주권 아래 되어졌음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이 다시 한 번 드러난다. 이제 여러분은 그에게 합당한 영광과 찬송을 그에게 돌리겠는가? 이제 여러분은 그에게 절대적 순종과 헌신을 재다짐하겠는가?
18장: 겸손과 용서를 가르치심
1-14절, 겸손을 가르치심
[1-3]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천국에서 누가 더 큰가?'라는 질문 속에는 제자들 마음 속에 있는 육신적, 지상적(地上的), 이기적 야망이 보인다. 주께서는 먼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겸손에 대해 교훈하셨다. '돌이켜'라는 말은 '회개하여'라는 말이다. 주께서는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책망하신다. 너희가 그 마음을 회개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신다. 어린 아이라는 말(파이디온)은 매우 어린 아이 혹은 유아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린 아이들에게선 아직 교만하고 이기적인 야망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람이 어린 아이같이 겸비한 심령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겸손한 인격과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교만치 않고 겸비해진다. 어린 아이와 같이 겸비한 심령이 없이 구원 받는 자는 아무도 없다. 겸손하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겸손치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겸손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받는 자의 증표이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천국은 이 세상과 다르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높이는 운동을 하지만, 천국에서는 정반대이다. 이 땅에서 자기를 낮추는 그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 천국의 원리는 섬김의 원리이다. 이 땅에서는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지만, 천국은 정반대이다.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친히 낮아지셔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어주셨다. 그는 우리를 섬기는 자로 일하셨다. 이와 같이, 천국의 제자된 자들마다 이 도리를 본받아야 한다. 주의 이름으로 성도를 많이 섬긴 자가 그 나라에서 큰 자로 인정받을 것이다. 천국의 원리는 낮아짐으로 높아지는 원리이다.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교만한 자는 자기보다 높은 자에게는 혹 아첨할지라도, 자기보다 낮은 자는 낮추어 볼 것이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어린 아이 하나를 사랑하고 존중히 여긴다. 특히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일 때 더욱 그러하다. 그 어린 아이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이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그를 영접하는 것은 곧 주를 영접하는 것이다.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그러나 반대로 주를 믿는 어린 아이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은 대단히 큰 죄가 된다. 실족케 한다는 말은 범죄케 한다는 뜻이다. 그런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고 하셨다. 이 얼마나 무서운 경고인가? 물론 이것은 자살을 가리키는 말씀은 아니다. 자살은 주의 피값으로 사신 바된 몸, 주의 성전된 몸을 해치는 죄이다. 여기에 이 말씀은 남을 범죄케 하는 자는 차라리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우리가 산 즉 남을 살리는 자가 되어야지 남을 범죄케 하여 죽게 만드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이 세상에는 남을 범죄케 하는 일들이 적지 않다. 그것은 세상에 화가 되는 일들이다. 우리가 남을 죄 짓지 않게 하는 일, 남을 죄에서 건지는 일에 바쳐질지언정, 남을 죄 짓게 하는 데 바쳐져서는 안된다. 종교적 이단을 가르친다든지, 위선적 행위로 남에게 참신앙과 교회에 대한 반발심을 일으키게 한다든지, 술취함과 음란과 방탕한 풍조를 사회에 조장하는 것은 남을 범죄케 하는 예들이다.
[8, 9]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주의 말씀은 매우 엄격하고 철저하다. 우리의 손이나 발, 우리의 눈이 우리를 계속 범죄케 하거든 차라리 그것을 찍어 내버리고 빼어 내버리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신다. 왜 그런가? 범죄자는 영원한 지옥불못에 던지울 것이므로 두 손, 두 발, 두 눈을 가지고 계속 범죄하여 지옥가는 것보다 한 손, 한 발, 한 눈을 가지고 범죄치 않아 영생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참으로 구원받은 자는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불구자가 때때로 그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큰 은혜일지도 모른다. 성한 몸으로 죄만 짓는 것보다 불구의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확실히 더 복되다.
만일 우리가 불구의 몸을 원치 않는다면, 우리의 사지백체를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하고 선하게 사용해야 할 것을 결심하자.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이미 찍어 내버려야 했을 부분, 뽑아 내버려야 했을 지체를 가진 몸이다. 나의 손, 나의 발, 나의 눈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만 사용하자. 그렇지 않다면, 오 주여 우리가 차라리 불구자가 되게 하소서. 그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이 아니니이까?
[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소자(작은 자)'는 예수님을 믿는 어린 아이 하나를 가리킨다. 기독교는 인격적 종교이다. 한 사람의 생명은, 어른의 생명이든지 아이의 생명이든지, 혹은 어머니 태아의 생명일지라도, 동등하게 귀하다. 사람을 천시하거나 사람을 차별하는 태도는 비인격적이고 비성경적이다. 물론 이것은 사회나 교회나 가정의 질서와, 직분의 차이를 부인하는 말이 아니다. 질서와 직분의 차이는 존중되어야 한다. 아랫 사람은 윗 사람을 존중하고 순복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인격을, 비록 그것이 어린 아이 하나의 인격이라 할지라도, 업신여기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그를 귀히 여기시고 그들의 천사들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기 때문이다.
[11] (없음)
전통사본에는 "인자는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왔노라"는 말씀이 나온다. 남을 범죄케 하는 것은 그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구주께서 오신 것은 영혼을 잃어버리려 함이 아니고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주의 제자된 우리도 같은 사명감을 가져야 마땅하다. 그러니 주를 따르는 자들이 어찌 남을 범죄케 하여 그의 구원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또한 어떤 이가 종교적, 도덕적 결함이 많다면, 그는 우리가 거절하고 업신여길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관심과 전도의 대상이요 우리가 구원해야 할 대상이다.
[12, 13]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여기에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은 양의 비유가 짧게 나타난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으려는 것이 목자의 심정이요 그 양을 찾는 것이 목자의 기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 마리의 어린양이라도 잃어버려지게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나의 실수로 그가 범죄하게 할 수 있겠는가?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그렇다면 주를 믿는 어린 아이 하나라도 존중하며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다시 돌이켜 이 문단을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겸손해야 하며, 또 주를 믿는 어린 아이 하나를 존중히 여겨 영접하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요 겸손한 인격만이 할 수 있는 자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범죄하여 길을 잃게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어린 신자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자. 또한 한 명의 영혼, 한 명의 어린 생명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힘쓰자.
15-20절,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교회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교제이다. 그런데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죄를 범할 때가 있다. 그 죄가 말로 우리를 잘못되게 비난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의 돈을 떼어먹는 일일 수도 있다. 교회 생활에서 이런 일들이 종종 있다. 우리의 인격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수할 때가 없지 않다.
전통사본에는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주께서는 그 대처 방안을 말씀해 주신다.
첫째로,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개인적 권면이 첫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 사실을 남에게 먼저 알리지 말아야 할 것을 내포한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저런 자와는 만날 것도 없어!' 하고 그를 정죄하고 그와의 교제를 끊어버리지 말 것을 내포한다. 가서 먼저 권고하라!
이렇게 하려면 시간이 들고 수고가 든다. 또 잘못하면 마음 상하는 말을 한 마디 더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그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아끼는 성도의 태도라는 말씀이다.
만일 그가 들으면 우리는 그 형제를 잃지 않고 얻은 것이다. 지상에서 참된 성도의 교제를 유지하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이 내포하는 바이다. 이것이 교회의 일체성(一體性)을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증참한다'고 번역한 말은 '확실케 한다', '확증케 한다'는 뜻이다. 만일 그 형제가 개인적 권면을 듣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케 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증인을 동반한 권면이 두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구약 신명기 19:15의 말씀이다. 우리 말 성경에 보면,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신명기의 그 본문 다음에 보면, 위증자(僞證者)에 대해서는 자세히 사실을 조사하여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고 명령되어 있다.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세번째 단계는 교회적 권면이다. 이것은 두 당사자를 교회의 회중 앞에서 판단받게 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 교회적 판단도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교회적 교제의 단절을 내포한다. 즉 그를 교회의 참회원으로 간주하여 사랑의 교제를 나눌 대상으로 생각지 말라는 것이다. 그를 형제 자매가 아닌 교회 밖에 속한 외인(外人)으로 간주하라는 것이다. 참된 교회적 교제, 성도의 교제는 가능치 않다는 뜻이다. 교회와 세상은 다르다. 세상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교제는 참 교회의 본질이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것은 교회적 권징을 의미한다. 매는 것은 권징의 시행이요 푸는 것은 해벌(解罰)을 가리키는 줄 안다. 이 권징은 비록 땅에서, 즉 지상교회 안에서 시행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정된다. 참된 교회적 권징은 곧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권징이다.
[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단순히 합심기도의 일반적 교훈일 뿐만 아니라, 일차적으로 교회적 권징에 관한 말씀인 것 같다. 땅에서 합심한 교회적 회의와 결정은 주의 임재 속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다.
21-35절, 용서에 관해 가르치심
[21, 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일곱 번의 용서도 인간으로선 적은 수의 용서가 아니다. 실제로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잘못을 범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에게 용서해줄 마음이 들겠는가? 그러나 주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교훈하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은 490번이다. 이 말씀은 491번째는 용서치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회개만 하면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일 것이다. 용서에는 횟수의 제한이 없다. 용서의 횟수는 무한이다. 상대가 뉘우치기만 하면 무한히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다.
[23, 24]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주께서는 용서를 가르치기 위하여 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비유는 중심적인 뜻을 붙잡으면 되고 너무 자세히 해석하여 맞추려 하면 오히려 비유의 본 의도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다. 이 비유에서 천국은 지상 교회를, 임금은 하나님을, 종들은 그의 백성을 가리켰을 것이다. 임금이 종들과 회계 즉 재정결산을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행위결산을 하신다. 이것이 공의의 심판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하나님의 백성 혹은 성도의 영적 형편을 가리켰다. 일만 달란트는 은량으로 약 천만 불이라고 한다. 이것은 일반 사람으로서 갚을 수 없는 금액의 빚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이 구원 받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죄의 빚은 구제 불능의 빚이었다. 그것은 지옥 가기에 합당하고 천국 가기에 합당치 않은 빚이었다. 죄의 값은 영원한 죽음, 곧 지옥의 형벌이다.
[25, 26]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의 빚은 사실상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갚아도 갚기 어려울 정도의 금액일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그 모든 것을 다 팔아 빚을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 종은 겸손히 그 주인에게 굴복하여 다 갚겠으니 참아달라고 아뢰었다. 이것이 성도의 처지이었다. 우리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나의 몸, 나의 아내와 자식들, 나의 재산을 다 팔아도 나의 죄벌을 갚는데 부족하다. 이 사실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이것이 구원의 이치이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갚거나 성취하는 무엇이 아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인한 선물이다.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구원하신 것이다. 구원의 원인은 우리 속에 있지 않고 그 분 속에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즉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다.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백 데나리온의 빚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범한 잘못을 비유하였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에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 백 데나리온은 백일 정도의 품삯에 해당한다. 물론 그것도 적은 금액은 아니다. 그러나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그것은 거의 무(無)에 가까울 정도로 아무 것도 아니다.
[29, 30]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러나 그 종은 동료의 간청을 허락지 않고 그를 옥에 가두었다. 그는 자기가 받은 비교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생각지 않았다. 만일 그가 그 은혜를 기억하였다면, 백 데나리온 정도의 빚은 기꺼이 탕감하여 주었을 것이다. 여기에 주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성도의 상호 용서의 근거 혹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께로부터 큰 용서를 받았으니 성도 상호간에 작은 용서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남의 허물을 용서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가 받은 죄 사함의 큰 구원 때문이다.
[31-33]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은 동료들의 고발을 듣고 그를 불러 책망하였다. 주인은 그에게 그의 긍휼의 행동과 똑같은 행동을 요구하였다. 네가 내게 긍휼을 입은 것과 같이 너도 네 동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당한 요구이다. 이 요구 앞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종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이다. 주께서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큰 긍휼을 입은 자들의 공동체는 마땅히 서로 긍휼히 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34, 35]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주께서는 이 비유에서 이상적 행동원리만을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지켜져야 할 행동원리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용서라는 행동원리이다. 하나님께 참으로 용서받은 자들이라면 다른 형제들을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필수적 문제이다. 만일 형제를 용서함이 없는 자는 그도 하나님께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참으로 구원받은 자가 아니다. 물론 참으로 구원받은 자가 이런 처지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렇다, 그런 처지에 머물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주의 교훈과 경고가 필요한 것이다. 성화와 인격적 성숙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교훈을 듣고 훈련을 쌓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면과 경고가 필요하다. 교회는 한 마디로 서로 사랑하며 서로 용서하는 공동체이어야 한다.
19장: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가 어려움
1-12절, 이혼에 대하여
[1, 2]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주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죽임을 당하실 일이 가까와지고 있었다. 이제 그는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경으로 올라가셨다. 그의 갈릴리 중심의 사역이 끝나 이제 작별을 한다. 그에게 남은 사역은 유대 지방에서, 특히 예루살렘에서의 일들이다.
[3-6]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이혼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예수께서는 창세기 2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어떤 의도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 둘이 결합되게 하셨는가를 알게 하심으로써 대답하였다. 이 결혼의 최초원리는 일부일처(一夫一妻)의 제도이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서'라는 말은 결혼이 성장한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된 가정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심으로 남여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하나이다. 부부 간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심지어 부모-자식 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된다.
[7, 8]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이혼법을 들어 반문하였다. 신명기 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some uncleanness, 다바르 에르왓)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 구절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두 파가 있었다고 한다. 귑마이 학파는 수치되는 일을 부부 관계의 불성실, 즉 외도(外道), 음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르게 해석하였으나, 힐렐 학파는 그것이 남편 마음에 상하거나 맞지 않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넓게 해석하였다. 후자에 의하면 아주 하찮은 구실로도 이혼이 가능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께서는 모세의 이혼법이 주어진 것은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요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 원리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해주셨다. 그것은 이혼의 허용이기는 하지만, 잘못된 이혼들을 방지하기 위한 허용이었다. 이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 제도에 배치된다.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관계이다. 결혼 서약은 영속적 성격을 가진다. 사람이 그 서약을 파한다고 파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 부당한 이혼들 때문에 세상은 얼마나 혼란한가?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이혼이 가능한 유일한 경우는 상대방이 결혼 서약을 저버리고 음행한 경우뿐이다. 상대방이 다른 이와 정(情)을 통한 것은 부부관계에 있어서 가장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정당한 질투와 분노를 일으킨다. 그 분노는 끄기 어려운 불이다. 그러므로 그 경우 이혼이 허락된다. 그러나 그 한 가지 경우 외에는 어떤 이유로도 이혼이 정당화 될 수 없다. 부부 간에 성격상의 차이 등으로 별거(別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잠 21:9, 19; 고전 7:11), 부당한 이혼과 재혼은 하나님 앞에 간음죄에 해당한다.
전통사본은 "또 버리운 여자와 결혼하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첨가되어 있다. 이 말씀은 부당한 재혼을 정죄한다. 즉 부당한 이혼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될 수 없으므로 버린 자든지 버리운 자든지 다른 사람과의 재혼이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러나 정당한 이혼후 무죄한 편은 재혼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여기에서 취급되지 않은 것 같다. 천주교회에서는 그러한 재혼의 가능성이 부인되나, 헬라정교회나 개신교회에서는 보통 인정된다고 한다.
[10-12]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독신(獨身)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는 말은 '그것[그 말]이 주어진 자들 외에는'이라는 뜻이다. 그들 중에는 날 때부터 고자(鼓子)된 자들이 있다. 이들은 선천적으로 결혼이 불가능하거나 결혼을 원치 않는 자들이다. 또는 궁중의 내시들과 같이 사람들이 만든 고자들도 있다. 마지막으로,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들이 있다. 바울이 이 마지막 경우이었다(고전 7:7).
그러나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들만 받을 수 있다. 독신주의는 강요될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일반적 결심을 넘어선다. 뿐만 아니라, 독신이 결혼보다 반드시 우월한 생활방식도 아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제도이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결혼도, 독신도 복되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 주지 않으시면 그 어느 쪽도 복되지 않다.
13-15절, 어린 아이들에게 안수하심
[13]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누가복음에는 '자기 어린 아기를[아기들을]'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지금이나 예나 자기 어린 아이들 혹은 아기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기 아기들을 데려왔다. 그것은 잘 한 일이다. 오늘날도 믿는 부모들은 자기 아기들을 예배 모임에 참석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다. 그들은 아마도 그것을 귀찮게 여긴 것 같다.
[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라고 하였다. 어린 아이들을 무시하는 어른들의 행동은 주님의 분노를 일으키고 책망을 받을 만하다. 주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이 사건에서 주께서 모든 어린 아기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지는 확실치 않으나, 적어도 믿는 가정에 태어난 아기들에게 그러하시다는 것은 분명하다. 믿는 자들의 아기들은 아직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께 나올 수 없고 천국과 상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주의 나라에 용납되고 환영을 받는다. 그들은 실로 천국백성에 소속될 만하다. 여기에 구약 때로부터 유아들에게 할례를 베풀므로 언약백성으로 인정했던 구원의 원리가 신약시대에도 보인다. 믿는 가정의 아기들은 구원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나 외인들이 아니고, 언약 아래 있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 적어도 그들이 커서 주님을 배반하기 전까지는 주님의 품 안에 있는 자들로 간주되어야 한다.
[15]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마가복음에는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실제로 어린 아기들을 영접하셨고, 그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기도를 해주셨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된 우리 부모들이 어떻게 자녀들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할지 알 수 있고, 우리 믿는 어른들이 어떻게 교회에 나온 어린 생명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위하여 기도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천국에서와 교회에서는 어른이나 어린 아이나 생명의 가치는 똑같다. 그러므로 어린 아기 하나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요 부족이다.
16-22절, 한 부자 청년의 질문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누가복음에는 '한 관원'이라고 했다. 마가복음에는 그가 달려와서 꿇어앉아 말했다고 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길에서 그러했을 것이다. 전통사본에는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되어 있다.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종교적 문제에 해답을 찾기 위한 그의 진지함과 열심은 대단히 컸던 것 같다.
[17-1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전통사본에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본문과 같다. 주께서 이렇게 반문하신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선하지 않고 하나님만 선하시기 때문이며, 또한 그 청년 관원이 예수님을 단순히 한 인간 선생 정도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상 예수님은 유일하게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도 선하신 분이시며 그는 하나님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는 말씀은 구약의 율법의 요구를 반복하신 것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계명을 지켜 영생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 계명은 오히려 우리의 죄악됨을 깨닫게 해줄 뿐이다. 예수께서는 십계명 중 인간 관계에 대한 계명들을 주로 언급하셨다.
[20-22]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전통사본에는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릴 때부터 지키었사오니'라고 되어 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증거했다. 그는 상당히 성실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에게서 한 가지 치명적 결함을 보고 계셨다. 그것은 물질이었다. 물질은 그에게 있어서 우상이었다. 물질 문제의 극복이 없이는 그에게 온전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계명 준수는 영생을 위한 완전한 의가 되지 못한다. 부유한 환경 속에선 어느 정도 의롭게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난 속에서도 도적질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고 나를 좇으라고 주께서는 요청하셨다. 주께서는 이렇게 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이 요청에 첨가하셨다. 그러나 주의 이 요청은 이 부자 청년의 문제점을 즉시 드러내었다. 그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고 물질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는 물질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따를 수 없었음이 드러났다. 그는 외적으로는 매우 유망하고 인품 있고 부유한 자, 곧 부족함이 없는 것같이 보였지만, 내적으로는 매우 치명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물질이라는 우상 때문에 예수님을 참으로 영접하고 따를 수 없었던 것이 그 결함이었다. 그는 영생에 대한 종교적 질문에 해답을 듣고 있지만 물질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여기에 교훈이 있다. 주께서는 이미 마태복음 6:24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해 두셨다.
23-30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움
[23, 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같은 말로 사용된다. 또한 이 말은 16절의 영생과 25절의 구원과도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이 문맥상 분명하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물론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단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어느 정도 어려운가? 그것은 약대 같은 큰 짐승이 바늘귀 같은 작은 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 이 말씀은 부자가 자기 자신으로선 천국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함을 보인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왜 그렇게 어려울까? 그것은 대개 부자에게는 물질이 하나님이 되고 주인이 되고 그의 의지하는 바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부자되는 것은 복이 아니고 화이다.
[25, 26]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물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사실은 모든 부자나 모든 물질적 부요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부자들 중에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성경에 아브라함이나 이삭은 부자이었다. 창세기 13:2, "아브라함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창세기 26:12-14,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또한, 우리가 아는 대로 욥도 부자이었다. 욥기 1:3, "그 소유물은 양이 7천이요 약대가 3천이요 소가 5백 겨리요 암나귀가 5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그러나 부자는, 그리고 지금 부자인 부자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물질적 애착과 부자되려 하는 마음이 있는 한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 자신으로서는 영생과 천국과 구원을 얻기에 불가능하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 누가 물질욕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준행하여 영생을 획득할 수 있겠는가? 누가 네 물질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의 초청 앞에 무조건적으로 '예' 하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는 구원의 전능(全能)이 있다. 그가 구원하시고자 하시면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전도할 수 있는 것이다.
부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부자이면서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길 수 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는 물질을 초월할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소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구원은 아직 불확실하다. 그가 참으로 믿는 자라면 그는 네 물질을 다 버리라는 주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참으로 그가 물질을 초월할 수 있다면, 그는 물질을 신뢰하거나 물질 때문에 높은 마음을 갖거나 물질을 자기 소유로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 물질의 부요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한 사업에 힘쓰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런 경우 그의 물질적 복은 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하고 물질은 신앙의 방해거리, 신앙성장의 방해거리가 된다. 부자보다 가난한 자 중에 주를 더 뜨겁게 믿고 따르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다 주를 잘 믿을 수 있다는 말도 아니다. 가난이 주를 잘 믿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이 물질에 대한 사랑을 떠나는 것이다. 그의 중심이 하나님만 향하고 하나님만 기뻐하고 하나님 뜻만을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가? 이렇게 변화된 마음인가?
[27, 28]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태복음 4:20, 22에 보면, 제자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주를 따랐다. 오늘날도 목사와 전도사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자이어야 한다. 물론 거기에 교회 편에서의 의무와 책임도 있다. 전도자가 무엇을 바라서 주를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주께서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좋은 지위, 예를 들어, 12제자들에게는 세상이 새롭게 될 때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지위를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주님의 명령은 최고의 명령이기 때문에 주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그 명령을 받은 자는 절대적 차원에서 주를 따라야 한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소유와 모든 인간관계를 초월해야 하는 태도를 내포한다. 즉 그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전통사본에는 '아내나'라는 말이 있음)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가 되어야 한다. 주께서는 이런 자에게 그것들을 여러 배, 전통사본에는 '백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백배를 받는다는 말씀은 이 땅에서나 천국에서 공동소유하게 될 주의 재산이나 주의 가족들을 의미할 것이다. 영생을 상속할 것이라는 말씀은 이런 헌신적 삶의 댓가로 영생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니고 이런 헌신적 삶은 영생을 얻는 확실한 표가 된다는 뜻인줄 안다. 진실한 제자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복되다.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먼저 된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 되고 나중된 이방인들의 다수가 먼저 될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원리가 이방인 교회 안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믿었다고 안일한 생각에 젖어 있어서는 안된다. 주의 세계는 믿은 연도가 최종적으로 중요하지 않고 지금 그가 어떻게 믿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지금 우리가 깨어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안일하고 높은 마음을 단호히 버려야 한다. 먼저 된 여러분이 나중 된 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믿기 시작한 분일지라도 믿음생활에 앞설 수 있다.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 우리가 말씀과 기도 중에, 그리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리고 복음 전도의 향기를 주위에 발하면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20장: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
1-16절, 포도원 품군 비유
[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비유한 것과 같이, 신약성경에서 천국 혹은 천국의 현재적 단계로서의 지상(地上) 교회를 포도원으로 비유하였다. 포도원의 일은 포도나무를 심고 가꾸거나 포도열매를 따는 것일 것이다. 이와 같이 천국의 일꾼된 자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여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자들을 모든 말씀으로 가르쳐 성도다운 열매를 맺게 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포도원에 들여 보낼 일꾼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길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고 비유하였다. 추수 시기에는 일꾼이 부족하여 포도원 주인들이 사람들이 많은 길 거리나 시장터에 나가 일꾼들을 구한다고 한다. 비유는 지나치게 자세하게 해석할 필요가 없고 그 중심적 의도와 의미를 찾도록 힘써야 한다. 이른 아침은 아침 6시경이며, 그것은 시대적으로 예수님의 복음 사역이 유대인들을 위하여 시작된 때를 가리킬 수 있을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사람의 생애의 초기를 가리킬 수도 있을 것이다.
[2-7]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이 비유에서 나타난 대로,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이다. 주인은 포도원의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였다. 제3시는 오전 9시이며 그 때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을 또 포도원에 들여 보냈다. 그들에게도 정당한 삯을 약속하였다. 제6시와 9시, 즉 정오와 오후 3시에도 나가 그같이 하였고 제11시, 즉 오후 5시에도 나가 보니 전통사본에는 '게으르게' 섰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그들은 일도 하지 않고 종일 놀기만 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아마 개인적으로 말하면 일평생 동안 하나님의 일, 교회의 일, 복음 전도의 일을 하지 않고 다른 것들, 실상 그것들은 자기를 즐겁게 하는 노는 일들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들만 하다가 세월을 허비한 자들이 이런 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날이 저물지 않았다. 그들을 위해 아직도 포도원에 일할 일거리가 남아 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말세에 부름 받은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요, 이것은 또한 장년과 노년에 예수님 믿은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아직도 여러분을 위한 일거리가 있다. 아직도 주님은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라고 여러분을 부르고 계신다. 주인은 그들도 포도원에 들여보내며 전통사본에는 '네가 정당하게 받으리라'고 그들에게 약속하였다.
[8, 9]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오후 6시쯤이 되면 날이 저물고 하루 일과가 마친다. 이때 품삯을 계산해 준다. 좋은 주인은 그 날 일한 품삯을 그 날 주지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말하기를,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말하였다. 제11시, 즉 오후 5시에 와서 일한 자들은, 비록 1시간만 일했지만,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그 주인은 참 후한 사람이었다.
19장에서부터 이어지는 문맥상 분명한 대로, 여기 한 데나리온은 천국과 영생을 가리켰다. 19:29,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마가복음에는 '금세에서 백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씀은 천국과 영생이 인간의 수고의 댓가로 얻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노력주의, 댓가주의적 관념은 성경 전체의 진리와 반대된다. 사람은 자기 행위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의 엄격한 요구에 매우 미달하며 결코 구원과 영생의 공로가 될 만하지 못하다. 구원과 영생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 사역의 공로로만, 그리고 우리 편에서 오직 그것을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
일꾼들은 하루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받았었다. 그 한 데나리온은 본 비유에서 천국과 영생을 상징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를 위해 산 결과는 영생이다.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그러나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이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수고의 댓가라기보다 값없이 주신 은혜이다. 사실, 일꾼으로 선택된 것부터가 은혜이다. 또 하루의 일과 시간 중 몇 시간이 부족하고 심지어 단지 1시간만 일했는데도 하루 품삯을 주는 것은 주인의 전적인 은혜인 것이다. 주인의 요구대로 포도원 일에 참여한 일꾼들은 다 한 데나리온을 받듯이, 주님의 요구대로 주의 복음 사역에 참여한 일꾼들은 다 영생을 받는다. 그것은 댓가처럼 약속되었지만, 그러나 댓가가 아니고 사실상 그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나 일하라는 주님의 요구와 일에 대한 정당한 댓가의 약속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10-12]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이 비유의 주요한 목적이 이 구절들에 있는 것 같다. 이 비유는 앞 장의 베드로의 질문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베드로의 질문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는 것이었다. 이 질문과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여기 이른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은 주의 공생애 시작 때부터 주님의 선택을 받아 복음 사역에 참여한 12제자들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들의 수고는 나중에 부름 받은 자들에 비해 매우 컸을 것이다. 이 비유에서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라고 말했으니, 단순히 봉사시간의 길이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이 받는 품삯은 약속된 한 데나리온뿐이지,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동일한 한 데나리온이 모든 일꾼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먼저 일한 자들이 주인에게 원망을 할 정도로 그들의 상업주의적, 댓가주의적 사고방식에 역행하는 처사이다. 그러나 주인은 그렇게 할 것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 뜻의 성취를 위해 교회 안에서 많이 수고한 먼저된 일꾼들에게나, 적게 수고한 나중된 일꾼들에게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이라는 은혜의 선물과 상급이 동일함을 보인다. 먼저 믿는 자에게는 더 좋은 영생, 나중 믿는 자에게는 덜 좋은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니고, 모든 믿는 자에게 그리고 모든 신실한 일꾼들에게 동일한 천국과 영생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일꾼들은 그들의 부름 받은 시대나 나이를 관계치 말고, 오직 주님께 충성하면 된다. 내가 남보다 더 많이 수고했기 때문에 더 나은 영생을 받아야 한다고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13-15]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 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의 처사는 공의로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인은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늦게 온 봉사자들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주인의 주권적 처분에 따른 것이었다. 주인의 재산을 주인의 처분대로 하는 것은 아무런 잘못이 아니며, 더욱이 주인이 늦게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들에게 너그러운 품삯을 주는 것은 선한 일이지 악한 일은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12제자들과 같이 주를 위해 일찍부터 많이 수고한 자들이 늦게 주를 믿고 일꾼으로 부름 받은 자들을 낮추어 보고 저들은 많이 수고한 우리보다 낮은 영생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해서는 안된다. 믿음과 봉사에 대한 주님의 약속은 영생이다.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늦게 부름 받아 조금만 일하는 자가 되기를 원할 것인가? 아니면 일찍 부름을 받았을지라도 늦게 부름 받은 자와 일의 양의 균형을 위해 적당히 놀아가면서 일할 것인가? 그것은 악한 생각이다. 사람이 온종일 일해도 그 댓가로 영생을 얻기에 부족하다. 선택과 부르심의 여부와 그 때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뜻 안에 있으며, 일단 그가 택하시고 부르시면 믿고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불충성이다. 그러므로 댓가를 바라고 믿거나 일하지 말자. 남과 비교하면서 믿거나 일하지 말자. 오직 택하시고 부르신 주님만 바라며 믿고 일하자. 그것이 자신의 죄악됨과 무능함,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의 참된 태도이다.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먼저 일꾼된 자들이 먼저 삯을 받지 못했다. 도리어 나중 일꾼된 자들이 먼저 받았다. 나중 일꾼된 자들은 먼저 일꾼된 자들보다 더 주인의 호의를 입은 셈이다. 전통사본에는 이 말씀에 이어서 '이는 많은 사람이 부름을 입으나 적은 사람이 택함을 입음이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 부언된 말씀은,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와 복음 사역을 위해 부름을 받지만, 구원과 참 지식을 갖도록 선택된 자들은 많지 않다는 뜻인 것 같다. 왜냐하면 먼저 일꾼된 자들의 다수가 주님의 은혜의 구원과 영생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아직껏 공로주의, 댓가주의, 상업주의적 생각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고 도리어 늦게 부름 받은 자들을 낮추어 보는 교만한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먼저 믿는 우리는 그런 태도를 다 버려야 한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우리가 그를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한 이후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하여야 한다.
17-19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번째 예언하심
[17-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20-28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
[20, 21]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여기에 어머니들 속에 그리고 모든 사람 속에 있는 욕심이 보인다. 자기 자녀들이 그리고 자기 자신이 남들보다 더 나은 자, 더 높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 욕심이다. 그것은 세상적 욕심이요 헛된 명예심이다. 그것은 부패된 허영심이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세상적 사랑을 제거하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그리고 사람이 자기 마음을 단속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22,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 나라의 명예는 세상적 욕심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은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이었다. 그와 같이, 주의 나라에서의 명예는 이 땅의 방식과 다른 방식, 곧 주와 함께 고난을 받는 방식에 의해 얻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것을 명료하게 알지 못했을 것이다.
주의 마시려는 잔을 자기들도 마시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의 중심은 그 점에서 순진했던 것 같다. 십자가의 고난의 아픔을 잘 모르는 자가 어디든지 가겠다고 용감하게 대답하는 지도 모르겠다. 잔은 고난의 분량을 의미한다. 주께서 마셔야 할 고난의 잔이 있었다. 주께서 당하셔야 할 고난의 분량이 있었다. 그것을 그들이 마실 수 있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또 주께서도 그들이 주의 고난에 참여할 것, 곧 아마도 순교의 고난을 당할 것을 시인하셨다.
그러나 주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주님의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지금 그것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작정이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의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감추어진 것을 알려고 할 것이 없다. 그런 관심 자체가 올바르거나 선하지 못하다.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왜 분히 여기는가? 그것은 그들 속에도 동일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보다 높아지려는 욕심이 없는 곳에는 이런 류의 분노가 있지 않을 것이다.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집권자'는 통치자들, '대인'(大人)은 고위 관리들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남을 지배하는 것은 세상나라에서 볼 수 있는 일이요 방식이다. 남을 지배하려는 태도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적 행위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세상나라다.
[26, 27]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즉 성도의 공동체는 그렇지 않다. 전혀 다른 원리와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교회 안에는 높은 지위, 즉 남을 지배하는 위치가 없어야 한다. 주께서는 그런 류의 권위와 권세를 다 부정하신다. 그러므로 소위 고위 성직자 개념은 비성경적이다. 모든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모든 성도는 다 동등하다. 모든 성도는 한 목표인 주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협력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교회 안에 큰 자가 있다면 남을 섬기는 자가 그러하다. 아, 얼마나 세상과 다른 원리요 방식인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회에서 큰 자가 되려고 하거나 으뜸이 되려고 하면, 다른 성도들을 겸손히 섬겨야 한다. 천국에서 훌륭한 자는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지배하는 높은 직분자가 아니고, 자기를 낮추고 남을 섬기는 자이다.
사실, 이렇게 하면 거기에는 갈등이나 분쟁이나 분노가 결코 없을 것이다. 인간 공동체의 갈등과 분쟁과 싸움은 다 서로 높아지려는 마음에서 나왔다. 그러나 서로 낮아지려 하고 서로 섬기려 하는 곳에 무슨 싸움과 갈등이 일어나겠는가? 그런 곳은 곧 천국의 모형이 아닌가?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께서는 자신의 모범으로써 이 교훈의 무게를 더하셨다. 우리의 구주와 주님께서 섬김을 받기 위해 세상에 오지 않으셨다. 그는 도리어 많은 사람들을 섬기시며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은 주의 사역이 단순히 모범이나 교훈을 주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주의 사역의 핵심은 이 말씀에서도 보이는 대로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밝히 증거한다. 그러나 이 중심적 사역은 부수적으로 주의 낮아지심과 섬김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주의 이 모범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도 남을 섬기며 남을 위하여 우리의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29-34절, 소경들을 고쳐주심
[29, 30]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여리고는 예루살렘에 가까운 도시이었다. 그곳을 떠날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았다. 그 때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다. 그 불쌍한 소경들은 주님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은 구약의 약속된 메시아를 가리킨 말이다. 그들은 불쌍한 소경들이었으나 놀라웁게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약속된 메시아라는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아마 들리는 소문을 통하여, 그러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사람들은 그 불쌍한 소경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고 잠잠하라고 말했다. 무리들은 비록 예수님을 좇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을지라도 예수님의 동정심을 갖고 있지 못했다. 소경들이 치료의 은혜를 받는 데에는 예수님 측근에 둘러서 있는 사람들이 도움을 주는 자들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방해거리이었다. 먼저 믿는 우리들은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다른 이들을 영접하고 주께로 인도하는 자가 되어야지 그들에게 거리낌을 주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소경들은 무리들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낙심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더욱 소리를 질러 말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이와 같이 우리가 주께로 나아갈 때 사람의 방해가 있을지라도 낙심치 말고 더욱더 힘써 나아가야 한다. 무지한 대중들이 항상 우리의 길을 돕는 것은 아니다.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소경들의 낙심치 않는 부르짖음은 마침내 주님의 관심을 끌었다. 예수께서는 머물러 서셨고 저희를 부르신 것이다. 여기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는 주의 말씀과 비슷함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얻는다. 우리가 기도치 않으면 무엇을 받을 것을 기대치 말아야 한다. 그러나 기도하면, 그리고 낙심치 않고 계속 더욱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가 그의 시선을 돌리시고 우리의 기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기를 힘쓰며 기도할 때 낙심치 말자.
[33, 34]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소경들의 소원은 분명하였다. 그들은 눈을 뜨기를 원하였다. 우리는 주께 나아가 기도할 때 우리의 소원을 분명하게 하여야 한다. 중언부언하지 말고 명확하고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또한 확실한 기도의 응답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소경들을 민망히 여기셨고 저희 눈을 만져주셨다. 예수님은 인생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인생의 연약함을 치료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시다. 사랑과 능력이 구비될 때 치료와 구원이 가능케 되었다. 예수께서 그 소경들의 눈을 만져 주시니 그들이 즉시 보게 되었다. 주의 능력의 치료와 구원은 신속하고 완전하였다. 여기에 다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신적 영광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치료 받은 그 소경들은 그들에게 최대의 은인인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도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자마다 구원하신 주님을 따르게 될 것이다.
21장: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11절,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1-3]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의 일행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다. 예루살렘 가까이에 감람산이 있었고 그 부근에 벳바게라는 곳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거기에서 두 제자를 보내셨다. 본문엔 '나귀와 나귀 새끼를 함께 끌고 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되어 있다. 나귀 새끼는 어미를 떨어질 수 없는 어린 새끼, 곧 아직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나귀, 오직 주를 위하여 예비된 나귀이었다. 여기에서도 주의 신적 지식이 나타난다. 그는 보잘 것 없는 나귀 새끼 한 마리까지도 보시고 섭리하신다.
왕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데 나귀를 빌려 타고 가시려 하심은 그의 나라의 성격을 보인다. 이 왕은 세상의 왕들과 다른 왕이시다.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와 다른 나라이다. 그는 지금 외적으로 가난하고 초라해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왕권을 행사하시는 왕이시며 그의 나라(왕국)는 영적으로 세워지고 확장되고 있는 나라인 것이다.
나귀를 끌고 오라는 주님의 지시는 무례한 것처럼 보인다. 주께서는 주인에게 허락을 받은 후 끌고 오라고 하지 않으셨고, 그냥 끌고 오라고 하셨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 무례하게 보이는 행동으로 주께서는 친히 자신이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되지만, 주님은 다르다. 그는 온 우주의 대 주인이시다. 그는 원하시는 대로 무엇을 취하실 수 있고 사용하실 수 있다. 나귀의 주인도 그 사실을 알고,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 즉시 보내드렸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유가 주님의 것인줄 알고 있는가?
[4, 5]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이것은 구약의 메시아 예언의 일부를 이루려 하심이었다. 이 예언은 스가랴 9:9에 나온다. 사실상, 약속을 하신 이도 주님이시요 그 약속을 이행하시는 이도 주님이시다. 그의 고난과 죽음이 가까워 오는 때에, 주께서는 이 약속의 성취를 통하여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시기를 원하셨다.
인용된 그 예언에 보면, '시온의 딸들아, 너희의 왕으로 오는 메시아를 인하여 기뻐하라'고 말씀하였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가 자기 백성에게 오심을 아는 것은 교회의 기쁨이다. 시온의 딸들은 무지한 대중들처럼 잠들어 있지 말고 깨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고 기쁨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탈 것이라고 하였다. 말은 전쟁의 동물이요 나귀는 평화의 동물이라고 한다. 이방의 왕들은 말을 탔지 나귀를 타지 않았다. 말에 비하여, 나귀는 경멸을 당하는 짐승이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그의 겸손을 나타낸다. 그것도 어미에게 의존하는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더욱더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와 같이 영적이다. 세상 왕국처럼 외적 영광을 따르는 왕국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지극히 비천한 자들에게까지 미치는 은혜의 복음이 있다. 어떤 비천한 자도 예수께로 나아올 수 있고 그는 그를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마가복음에 보면,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라고 하였다(막 11:4). 이것은 마가복음 자체의 내면적 성격과 교회 역사가 증거하는 대로 아마 마가복음의 내용적 증거자인 베드로의 생생한 목격증거를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보냄을 받은 두 제자 중 하나는 베드로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는 다른 경우와 같이 요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다른 복음서들의 증거대로, 예수께서는 나귀에 타신 것이 아니고 나귀 새끼에 타셨을 것이다.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은 것은 안장을 대신해서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또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우리의 겉옷이나 우리의 장식물들을 벗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할 부분이다.
주께서는 어린 나귀 새끼, 아직 안장도 없는 짐승을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교통수단이 발달한 오늘날의 상황과 많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소유 혹은 공동 소유의 말이나 나귀 한 필도 없으셨다. 지극히 부유하신 하나님의 아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의 소유이셨던 그가 지극히 가난한 자의 걸음을 걸으셨다. 그렇다면 그의 제자된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할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겸손과 가난에 처하기보다 높은 자리와 부유한 자리를 더 좋아하지 않는가! 우리가 정말 주의 겸손과 가난을 본받고 있는가?
[8-11]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무리가 겉옷을 길에 펼치는 것은 왕에 대한 백성의 존경심을 표현하는 행위일 것이다. 무리들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여기며 환영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말로서 구약에 시편의 마지막 부분들에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시들의 하나의 내용이다(시 118:26). 예루살렘 온 성은 소동하였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로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비록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거절했고 죽일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무리들을 감동하여 그를 증거하고 그를 찬양케 하셨다.
얼마나 감격스런 일인지!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아마도 그들 중 다수가 변하여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지 않았던가! 이것이 변태무쌍한 인간의 마음이며 믿을 수 없는 사람의 말이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사람을 너무 믿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그를 존경한다고 너무 감격할 것도 없고 그를 멸시한다고 너무 낙심할 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실하기를 힘써야 한다. 사람들은 주의 종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며 존경하기도 하고 천대하기도 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 주님께 그러하였다면 그의 종된 우리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12-17절, 성전을 깨끗게 하심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용도로 쓰여야 할 거룩한 곳인데, 그곳이 불의의 이익을 챙기는 매매장으로 타락되었다. 이것은 종교의 타락이었다. 거룩하고 경건한 종교의 가명(假名) 아래 자기의 이익을 노리는 이 불의한 종교지도자들과 성전 안에 돈 바꾸고 비둘기 파는 자들과는 결탁되어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하나님의 일들을 목표로 삼고 일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땅에 속한 것, 썩어지고 불타 없어질 것을 구하는 가련한 종교가들! 예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향하여는 동정하였으나, 성전의 더럽혀짐에 대해서는 격노하셨다. 주님은 온유하며 겸손하시지만, 종교의 타락에 대해서는 분노하셨던 것이다.
[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주님의 종교 개혁은 종교가 성경의 본래의 가르침대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정신에 근거하였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성전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예배의 처소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순수한 성전 종교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예배자들의 주머니의 돈을 교묘히 긁어내는 행위로 변질되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종교 개혁은 항상 성경에 근거해야만 된다. 요시야의 개혁, 히스기야의 개혁이 그러했고, 루터와 칼빈의 종교 개혁이 그러하였다. 오늘날의 종교개혁도 오직 성경의 교훈으로 돌아감으로써만 시작되고 성취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다.
[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타락한, 위선적 행위들에 대해서는 격노하고 동정심을 보이지 않으시던 주님이지만, 성전에서 그에게 나아온 소경과 절둑발이들에게는 긍휼과 능력을 베푸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고침을 받았다. 뻔뻔스런 악인들에게는 노하시지만, 도움을 구하는 죄인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이시다.
[15-17]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이상한 일'은 '놀라운 일들' 즉 기적들을 가리킨다. 주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영광을 수 없이 많이 드러내셨지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오히려 그것들에 대해 분노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그 외에도,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에 대해서도 유대 지도자들은 분노하였다. 사실상, 메시아를 영접해야 할 저 지도자들이 주를 거부하고 그를 죽이려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기들을 동원하여 주를 찬송케 하셨던 것이다.
18-22절, 무화과를 저주하심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예수님의 측근에 있던 사람들은 물질적 여유가 있는 부유한 자들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른 아침이긴 하지만, 예수님 일행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자가 없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비교적 가난한 환경에서 사역하셨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이 그의 사역에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역은 가난 때문에 좌절되지 않는다.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베다니의 일부이든지 혹은 연접해 있었던 벳바게는 '무화과나무들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동네이다. 그 주위에는 무화과나무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복음서는 때때로 사건을 간략히 증거하기도 한다. 이 경우도 그러하다. 좀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에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저물매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에 나가셨다.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 있으셨고, 그 날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고 성전을 깨끗게 하셨다. 매일 저물 때마다 저희가 성밖으로 나갔다. 아마 그 다음날 아침, 저희가 지나갈 때에 저주 받은 무화과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았다. 마태복음은 2일 간의 사건을 한 사건처럼 간략히 증거하였다(앞에서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려 주신 사건에서도 그러하였다). 그러면 여기 '곧'이라는 말은 저주를 선언한 지 여러 날이 지나지 않고 하루만에라는 뜻이 된다.
시장하신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에 무슨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셨다고 증거되어 있다. 마가복음에는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고 증거하였다. 여기에 예수님의 인성의 증거가 있다. 인간 예수님은 배고픔을 느끼셨고 지식의 제한성을 가지셨다. 그는 멀리서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셨다. 그의 인성은 우리의 것과 같은 참된 인성, 즉 육신적 연약성과 지식의 제한성을 가진 인성이었다. 물론, 그의 인성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죄성은 갖지 않으신 인성이셨다.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는 부당한 그의 감정풀이이셨는가? 무화과는 열매가 먼저 열린 후 잎사귀를 낸다고 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잎사귀가 있다는 것은 열매를 이미 맺혔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나무의 경우는 비정상적이었다. 열매도 맺지 않은 채 잎사귀부터 무성하게 낸 것이었다. 이것은 실제적 삶의 열매는 없이 종교적 형식들만 가득한 당시의 타락한 종교를 잘 나타내 주는 것 같다. 주께서는 교훈을 주기 위하여 이 일을 행하셨을 것이다.
[20-22]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이 사건의 중심 교훈은 기도이다. 죽기 위해 올라가셨던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이제 며칠 후면 십자가의 형틀을 지실 주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격려하시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는 기도의 힘을 가르치신다. 물론, 우리는 이 교훈이 오늘날 오순절주의, 은사주의자들처럼 외적 기적을 추구하는 근거로 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2천년 교회 역사에서 외적 기적들을 주심으로 섭리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주의 교회의 복음 사역이 얼마나 놀라웁게 전진해 왔는지! 복음 사역에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지만, 기도하는 종들을 통하여, 그들의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그 장애물들은 극복되었다. 때로는 순교의 피를 흘림이 요구되었지만, 그러나 복음 전파의 대행진은 꺽이지 않고 힘차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한 외적 기적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지만, 내면적 기적들을 기대한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강건케 하시고 자기 교회를 신실하게 만드시기를 기대한다.
23-27절, 권위의 출처를 질문함
[23-27]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위의 출처에 대해 질문하였다. 이것은 믿어보려는 순수한 동기에서 한 것이 아니고 비난하려는 불순한 동기에서 한 것이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지혜롭게 되질문하심으로써 그들의 위선의 악을 드러내셨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들은 요한도 인정치 않았고 그가 증거한 그리스도 예수도 인정치 않고 있다. 인정치 않을 뿐 아니라, 지금 예수님을 죽이려 모의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권위의 출처는 요한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이다. 그러나 저 악하고 위선적인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인정치 않는다. 만일 저들이 이것을 인정한다면, 회개하고 저를 믿었을 것이다.
28-32절, 두 아들의 비유
[28-30]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헬라어 사본의 대다수는, 옛날 영어성경과 같이, 맏아들과 둘째 아들의 대답이 바뀌어 있다. 즉 맏아들이 처음에는 싫소이다라고 대답했으나 후에 뉘우치고 갔고, 둘째 아들이 처음에는 가겠소이다라고 대답했으나 가지 않았다.
[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헬라어 사본에는 여기서도 그 둘 중에 아비의 뜻대로 한 자는 첫째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주께서 설명하신 대로,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했고, 맏아들은 세리들과 창기들을, 둘째 아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상징했다.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세리들과 창기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으나 요한이 옳은 길을 외칠 때에 회개하고 그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스스로 자부하였지만, 요한의 말씀을 따라 회개하지도 그를 믿지도 않았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른 자인가? 겉으로만 종교적이게 보이고 내면적으로는 주님과 먼 위선자들보다, 외적으로 죄인처럼 보이나 내면적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진실히 앙망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자들이다. 신앙생활은 처음의 입술의 고백보다 후의 삶의 열매가 더 중요하다. 처음보다 나중이 그리고 말보다 행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33-46절, 포도원 비유
[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성경은 구약 교회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종종 비유하였다(사 5:2). 포도원을 만드신 이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는 포도원 주인이시다. 농부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이들은 포도원의 소작인들, 즉 하나님께로부터 교회를 위탁받은 일꾼들이다.
[34-36]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열매는 죄로부터 떠나 의와 거룩의 삶을 사는 구원의 열매이다. 주인의 종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의롭고 거룩한 나라와 백성이 되기를 소원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영접하거나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하나님께서 많은 종들을 더 보내셨지만, 그 지도자들은 그들에게도 그러하였다.
[37-39]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자기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선지자들과 다르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지만, 예수님은 그의 아들이시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신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공경하기는커녕 도리어 예루살렘 밖에서 죽일 것이다.
[40, 41]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그러나 이 악한 농부들, 곧 위선적 지도자들은 주인에게 멸망당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예수님은 마치 건축자들의 버린 돌과 같으시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그를 버렸다. 그러나 그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요 하나님이 하신 일이요 기이한 일이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비유의 요점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 즉 구원받은 자다운 행위들이 없는 위선자들은 그 나라를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사람들이 그 나라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말이나 이론이 아니고 변화된 행위와 삶이다. 그것 없이는 구원이 없다. 참된 구원은 행위로 나타나는 구원이다.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자신을 돌에 비교하셨다. 이것은 구약 다니엘서에 예언된 표현이다. 이 돌은 사람을 깨뜨리는 돌이다. 이 돌은 구원의 돌이다. 그 어떠한 강퍅한 자들이라도 이 돌 위에 떨어지기만 하면 가루가 될 것이다. 변하여 새롭게 될 수 있다.
[45, 46]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하신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 비유의 교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잡고자 했다.
22장: 유대의 지도자들과 변론하심
1-14절,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
[1, 2]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앞 장의 포도원 비유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었으나,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었다. 앞의 비유에서 요구하시는 바는 구원에 합당한 행위이지만, 여기에서 주시는 바는 값 없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이다. 혼인잔치는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다. 이 비유에서 하나님은 왕으로, 예수님은 왕자로, 그리고 천국은 왕자의 혼인잔치로 묘사되었다.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왕은 종들을 보내어 그 혼인잔치에 초청된 자들을 오라고 하였다.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들을 가리키며, 먼저 초청된 자들은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나 왕의 초청을 받은 그들은 그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를 싫어하였다.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왕은 한번 더 다른 종들을 보내어 초청하였다. 이것은 왕의 인내요 친절이었다. 이번에는 잔치상의 풍성함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며 초청하게 하였다.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러나 저들은 세상의 일들에만 관심을 두고 왕의 초청에는 무관심하였다. 아니, 이것은 단순히 무관심이 아니고 왕의 초청에 대한 멸시요 경멸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의 일들 때문에, 그 일들을 핑게 대면서, 하나님의 복음에 괌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것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것이다.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초청을 받은 자들이 그 초청을 멸시하며 자기 일들을 보러 가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 남은 자들은 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다. 이것은 좀더 악하게 보인다. 이와 같이, 복음의 초청을 먼저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초청을 싫어하고 경멸하였고 심지어 그것을 대적하였다. 그들은 그 초청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종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복음을 거절하였다.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마침내 왕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악한 자들을 죽이고 그 동네를 불사르었다. 이것은 주후 70년경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 사건을 가리켰을 것이다. 이방의 군대들은 하나님의 징벌의 몽둥이이다(사 10:5 참조).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메시아의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다. 그것은 기쁘고 즐거운 잔치일 것이다. 그러나 청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잔치에 합당치 않았다.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처음 초청을 받은 자들이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면, 여기 사거리 길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킬 것이다. 여하튼 이번에는 초청장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아무나 초청하게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온 세계에 전파되는 일이다. 누구든지 이 혼인잔치에로 초청을 받고 있다.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도덕적으로 드러난 악인이든지 그렇지 않고 비교적 선한 자이든지 상관치 않고 하나님의 초청은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고 각종의 사람들이 응답하여 교회에 나아온다.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가득하듯이, 하나님의 교회는 각종 교인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그런데 여기에 또 문제가 생겼다.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한 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 예복은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옷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왕이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을 것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국가적 거부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의 회심을 암시하면서, 예복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이 예복은 구원의 예복, 의의 예복,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의의 옷이다. 이사야 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로마서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우리의 의복은 이것뿐이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의 눈에는 그 사실이 금방 드러났다. 누가 참예복을 입었는지, 누가 입지 않고 교회에 들어와 앉아 있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금방 드러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참된 속죄의 신앙, 예수님의 의를 믿는 신앙을 간직하자.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예복은 자기가 마련하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값 없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단지 교만과 불신앙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거절하고 자기의 행위의 의를 의지하는 자뿐이다. 그러므로 그 잘못은 주님께 있지 않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정죄될 것이다. 에수님의 의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예수님의 의를 힘 입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고 멸망을 받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과 영광으로부터 추방되어 공포 속에 슬피 울며 고통하게 될 것이다.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복음으로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지만, 택함을 입은 자들은 적다.
15-22절, 세금 문제에 대한 질문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15절 이하는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원들과 의논하여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한 질문을 하였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잠시라도 쉬지 않고 활동한다. 주님을 넘어뜨리려 하였듯이, 그들은 오늘날도 주의 종들과 자녀들을 넘어뜨리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있어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한다.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서로 종교적, 정치적 견해들이 다른 자들이었으나, 예수님을 핍박하는 데는 합작하였다. 오늘날도 세상에는 다양한 사상들과 입장들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으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데는 합작하곤 한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마치 진심으로 존경하듯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이것은 저 악한 자들의 편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점들 혹은 특성들이었을 것이다. 주님은 참되셨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길)을 가르치셨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셨다. 오늘날 주의 종들도 사람의 비위를 마추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하나님의 길만을 지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당시의 유대인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야 한다는 친(親)로마파요, 다른 하나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칠 필요가 없다는 반(反)로마파, 즉 민족주의파일 것이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변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당시의 중요한 사회 문제요, 예수님께 질문할 만한 문제이었을 것이다.
[18]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그러나 이 질문의 배후에는 다른 의도가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올무에 넘어지게 하려는 시험의 의도이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예' 아니면 '아니오'일 것이요 그러면 그를 친(親)로마파나 반(反)로마파로 몰 수 있을 것이었다. 이것은 유대인 회중들과 이간을 붙일 빌미가 되든지, 아니면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자로 비난할 거리가 될 것이었다.
[19-22]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 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주님의 대답은 시험을 피하는 지혜를 보인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지혜보다 뛰어나다. 주님은 셋돈 하나를 가져오게 하여 그 돈에 새겨진 형상과 글이 뉘 것이냐고 질문하셨다. 그것은 가이사의 형상과 글이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정치권 아래서 살고 있었다. 유대 나라는 그때 로마의 속국이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오늘날 성도는 두 영역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세상 나라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성도가 세상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한, 세상 나라의 규범을 지켜야 하고 부과되는 세금을 바쳐야 한다. 베드로전서 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 로마서 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라."
그러나 성도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사실상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므로 이 세상에 그리고 우리의 소유 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두 영역은 사실상 중첩되어 있다. 그러나 특히 하나님의 것은 십일조와 헌물 및 첫 열매이다. 레위기 27:30,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말라기 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잠언 3:9, 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23-33절, 부활에 관한 질문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사두개인들은 그 당시의 이성주의자, 자유주의자이었다. 사도행전 23: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이성주의자, 자유주의자는 곧 불신앙자요 이단자이다.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이것은 신명기 25:5, 6에 규정된 법이었다. 거기에 보면,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25-28]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인들은 이 독특한 경우를 들어 부활의 불합리성을 증거하기를 원하였다. 이것은 기발한 착안이었다. 부활의 관념은 이 율법의 규정과 모순되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이것을 부활에 대한 반론으로 제시했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예수님의 대답은 격한 책망이나 비난의 어조가 아니고 조용한 지적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의 신념은 비성경적이요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지적하셨다. '오해하였도다'는 말(플라나스데)은 '미혹되다,' '잘못되다'는 뜻이다. 오류에 대한 지적은 조용할지라도 힘이 있고 효력이 있다. 바른 지식과 잘못된 지식은 날카롭게 구별된다.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성경 진리에 반대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일이 된다. 구약성경은 몸의 부활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였다. 이사야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보다 더 근원적으로,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에게는 죽은 자를 살릴 능력이 있다. 인간에게는 부활이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그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부활 부정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 부정이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결혼관계는 지상에 국한된다. 천국에서는 결혼이 없다. 이 점에서 부활한 사람은 천사와 같다. 천사의 세계에는 결혼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 때에는 인간에게 더 이상 자녀의 출산도 필요 없고, 육체의 정욕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부활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없다.
[31-33]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사실상, 죽은 자의 부활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라는 말씀에서 증명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고 만 존재들이라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옛 기억을 들추어내는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불멸적 존재로 만드셨다. 범죄로 인하여 죽음이 왔으나, 구원은 당연히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을 내포한다. 사람이 죽고만다면, 창조와 구원은 무의미할 것이다. 부활은 창조와 구원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아브라함이라는 존재가 결코 죽고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모든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불멸적 영혼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현재 살아 있다. 그러나 이것 정도가 아니다. 인간은 영육의 존재이다. 의인 아브라함은 지금 영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지만, 장차 다시 육체와 결합하여 영광스런 인간 존재가 될 것이다. 이것은 바로 부활의 사실이요 소망인 것이다. 성도는 죽어도 장차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이다.
34-40절, 큰 계명들
[34-36]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율법사는 모세의 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며 가르치는 사람을 가리킨다. 마가복음에는 '서기관'이라고 표현했다(막 12:28). 모세오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율법들은 그 수가 많다. 그 많은 법들 중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흥미 있고 중요한 질문이다.
[37,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예수께서는 신명기 6:5의 말씀을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신명기 6:4부터 인용하셨다고 좀더 자세히 증거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는 말씀이다. '목숨'은 영혼(네페쉬)이라는 단어이다. 신명기 본문에는 '뜻' 대신에 '힘'이라고 되어 있다. 여하튼, 인생의 가장 첫번째 의무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뜻과 힘을 다하여 유일하신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경건은 인생의 삶의 기본적 의무요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요 주요 부분이다. 인간의 모든 도덕적 생활은 참된 경건에서 나온다.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법은 레위기 19:18의 말씀이다. 이웃 사랑은 모든 인간관계의 법들의 완성이다.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직역하면, "온 율법과 선지자들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느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의 모든 교훈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물론 성경은 이런 율법적 내용뿐이 아니다. 사람은 율법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 율법은 의로운 표준이며 규범이지만, 사람은 죄 아래 빠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 지키지 못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님의 대속(代贖)으로 그리고 믿음으로만 받는다. 그러나 율법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요구인가, 우리가 얼마나 죄악되며 무능한가, 주 예수님의 대속이 왜 필요한가를 알려준다. 이제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누구나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41-46절, 그리스도는 뉘 자손이냐?
[41, 42]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번에는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뉘 자손이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질문하셨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했다. '자손'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아들'이라는 뜻이다. 구약성경의 많은 예언의 말씀들이 장차 다윗의 자손 중에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지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라는 것은 믿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이 말씀에서 주께서는 구약성경 시편의 영감성을 증거하셨다. 구약의 모세오경과 선지서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선지자 oo에게 말씀하시기를" 등의 말씀에 표현된 그대로 하나님의 영감성을 증거한다. 그러나 시가서들은 그 자체로 보면 성도들의 기도의 글들, 즉 찬양, 감사, 고백, 간구의 글들이다. 그러나 주께서 이 시가서들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음을 증거해 주신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의 정통 유대교의 성경관이었다. 예수께서는 정통 유대교의 성경관을 그대로 수납하셨다. 사실, 그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도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그 시험을 물리치셨다(마 4장).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도 동일한 성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행전 1:16,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오늘날과 같이 성경에 대한 믿음이 없는 불신앙과 회의주의의 시대에 우리는 예수님 자신과 사도들이 가지셨던 바른 성경관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믿고 실천해야 하겠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고 우리의 인격을 온전케 한다. 성경을 사랑하는 참 성도가 되자.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시편 본문에는 첫 단어인 '주'는 '여호와'로 되어 있다. 구약의 여호와라는 하나님 명칭은 신약에서 주님으로 대체되어 사용되었다. 그 다음에 '내 주'라는 말은 다윗이 성령의 감동 중에 장차 오실 메시아를 지칭한 것이었다. 이 말씀은 메시아의 승천을 암시하고 그가 하나님 우편에 계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메시아에게는 원수들이 없지 않다! 여기 메시아의 원수들은 누구인가? 이 원수는 마태복음 13:39에 설명된 가라지를 심는 원수 마귀 곧 사탄과 그의 사자들 곧 악령들이다. 메시아는 천국의 아들들을 심는데, 마귀는 지옥의 아들들을 심고 있다. 오늘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원수는 마귀, 사탄과 악령들이다. 그는 교회를 부패시키고 거짓 복음과 거짓 진리를 유포시킨다. 거짓된 종들을 교회 안에 일으키고 교회 속에 투입시킨다. 교회는 지상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원수인 사탄과 전쟁을 하고 있다(엡 6:10-12).
이 원수를 발 아래 두는 것은 사탄을 최종적으로 굴복시키고 처벌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이것은 이미 창세기 3:15에서 예언된 바이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마태복음 25:41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영영한 불'이 예비되어 있음을 증거한다.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사탄의 하수인들로 활동할 것이라는 예언이 나오고 19:20에는 그 둘이 산채로 유황불못 곧 지옥에 던지울 것을 말씀했다. 또 요한계시록 20:10에는 저희를 미혹하던 마귀도 불과 유황못에 던지울 것이 예언되어 있다.
이것이 사탄에 대한 최종적 형벌이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사탄의 최종적 멸망 때까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실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부터 다시 지상 강림하실 때, 곧 그의 재림 때는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심판하여 영원한 멸망에 던져 넣으실 때인 것이다. 그것은 선이 악을 이기고, 하나님이 영적 흑암의 천사들을 이기실 우주적 대 승리의 날이다. 그 이후에는 세상에 더 이상 악령의 미혹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그 날을 고대하며 기다린다.
[45, 46]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주의 이 질문은 메시아의 인성(人性)만을 아는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의 신성(神性)도 알아야 했다.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주, 곧 다윗의 하나님이시다. 다윗왕도 메시아 왕국에서는 한 신민(臣民)에 불과할 것이다. 신약성경은 메시아의 신성의 영광을 이렇게 증거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요한일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복음 14:9은 예수님 자신의 증거를 기록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4:6에서 증거하기를,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했다. 또 그는 고린도후서 5:16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말하였다.
오늘 믿는 자들은 복되다. 우리는 메시아가 참 사람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참 하나님이심을 알기 대문이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사람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요 참된 신성을 가지신 참 하나님이시다. 아,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지!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자.
23장: 위선자들을 책망하심
[1, 2]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모세의 자리'는 선지자의 자리이다. 모세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었다. 신명기 34: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 그 말씀을 선포하는 자, 그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이다. 오늘날 목사도 그러하다. 물론 직분이 그러하다고 다 하나님의 참된 종인 것은 아니다. 옛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위선자들이고 내적으로 심히 부패되어 있었던 것과 같이, 오늘날도 위선적 목사들, 부패된 목사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세의 자리,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 선포자, 전달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그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한 마디로 위선자들이었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위는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실상 행함이 없는 말은 위선에 불과하다. 위선은 죽은 경건이다. 그것은 경건이 아니고 불경건이다. 디도서 1: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야고보서 2:26, "영혼[영]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행함이 없는 말, 곧 위선은 지혜가 아니고 어리석음이다. 주께서 이미 마태복음 7장 끝에서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세우는 어리석은 자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위선자의 경건은 악한 환란의 날에 파괴되고 만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와 같이 부패하고 위선적이게 되었을 때 참된 성도들은 매우 고통하고 영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물론 참된 성도들은 그들이 속한 부패된 교회를 개혁하여 참 교회로 세우기를 힘써야 한다. 할 수 있는 대로, 힘을 다하여 참 교회를 건립해야 한다. 건물 건립이 아니고 지식 건립, 입장과 노선 건립, 신앙품격 건립, 신앙의 순수성 건립을 가리킨다. 부패된 지도자들의 말들 중 틀린 말은 빼놓고 바른 말들은 지켜야 하지만, 위선적 지도자들의 행위들은 본받지 말아야 한다. "저희의 말은 행하되 행위는 본받지 말라." 거기에 고통과 고민이 따른다. 참된 경건은 바른 말뿐 아니라 바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패된 교회의 지도층이나 회중의 다수가 바른 개혁을 거절할 때, 즉 배교적 교회의 갱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을 때, 참된 성도들이 그 교회를 떠나 참 교회를 세우는 것은 적어도 신약시대에는 허용된 자유라고 본다. 구약시대에는 교회와 국가가 분리될 수 없어서 이스라엘 국가를 떠나서 교회를 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신약교회는 성도들의 자발적인 단체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배교적 교회를 떠나는 것은 분파주의의 죄가 아니다. 참된 성도는 배교적 교회 안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배교적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책망 들을 일이 될 것이다.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나와서 바른 교회를 개척하고 건립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구약교회와 신약교회가 분리된 이치이었다. 그것이 교회의 영적 성격이다. 참 교회의 연속성은 외적, 조직적 연속이거나 교회 건물의 보수가 아니고, 영적, 신앙적 연속이며 교리적, 교훈적 보존이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복음진리에 있어서 연속성, 계속성, 계대성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참 교회의 표를 상실케 되고 이단의 부류에 속할 수 밖에 없다. 참 교회의 표는 바른 말과 바른 삶이다.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위선적 지도자들은 무거운 짐을 사람들의 어깨에 지운다. '무거운 짐'은 하나님의 법들의 세칙화(細則化), 즉 하나님의 법들을 더욱 자세하게 규례화, 의식화 하는 것을 가리켰을 것이다. 율법의 역할이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어찌할꼬 하는 절망과 좌절을 주는데 있는데, 율법의 세칙화는 얼마나 더 무거운 짐이 되겠는가? 종교가 참 진리를 떠나고 생명을 잃어버릴 때 규례와 의식만 무성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참 진리는 자유를 준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8:31, 32). 바울 사도도,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말씀했고(고후 3:17),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였다(갈 5:1). 야고보는 복음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약 1:25). 참종교는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 마태복음 11:29, 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쉽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위선적 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는 이렇게 무거운 종교적 의무들을 부과해 놓고서는 자기 자신들은 한 손가락으로도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위선이요 죽은 경건이다. 이와 반대로, 참종교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썼다(딤전 4:12). 또 그는 디도에게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명하였다(딛 2:6, 7). 베드로도 장로들에게 교훈하기를,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였다(벧전 5:3).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위선자는 모든 행위를 남에게 보이려고 한다. 신명기 6:8에 보면, '너는 또 그것[여호와의 말씀]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고 말씀했는데, 이 말씀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경문을 찼다. 경문(經文)은 기도 때 이마와 팔과 허리에 차는, 성경구절들이 쓰인 가는 양피지 띠를 가리킨다. 위선자들은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였다. 이것은 더 경건하게 보이려 함이었을 것이다. 데이빗 딕슨은 표현하기를, "위선자들의 본질은 종교적이기보다는 종교적이게 보이기를 더 연구하는 것이며; 진실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겉모양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왜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애쓰는가? 그것은 사람의 칭찬을 구하는 교만의 마음, 자기 자랑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결국 위선이란 교만이나 자기 자랑과 함께 가는 것이다. 교만과 자기 자랑이 없는 곳, 겸비한 마음만 있는 곳에는 위선이 있을 수 없다. 겸손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할 수 있으나, 위선은 거짓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참종교는 형식이 아니고 실질이며, 외형이나 외모가 아니고 내실(內實)과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하셨고(신 6:5), 잠언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교훈하셨다(잠 4:23).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명하였다(딤후 3:5). 우리는 사람 앞에 보이려고 무엇을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 이것이 외식자의 길과 다른, 참종교의 길이다.
[6, 7]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위선자들은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 즉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또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명예심이요 교만이다. 겸손한 인격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밀한 칭찬보다 사람의 드러난 칭찬과 영광을 좋아하는 것은 이 세상적이다. 사실 이런 마음에서 싸움이 생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26에는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했다.
성경은 사람을 자랑치 말라고 교훈하였다. 고린도전서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라도 자랑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에 불과하다. 사람에게는 의와 능력이 심히 부족하다. 우리의 완전한 의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으며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다(롬 10:1-4; 3:23, 24).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빌립보서 3:7-9 참조. 시편 62:11, "하나님이 한 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8-10]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전통사본에는 8절에 "너희 선생은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시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되어 있다. 랍비, 아비, 및 지도자는 다 종교적 지도자를 가리키는 용어일 것이다. 랍비는 우두머리, 지도자, 선생 등의 뜻이다. 아비는 육신의 아버지를 가리킨 것이 아니고 영적 지도자를 가리킨 것일 것이다. 우리의 선생님과 영적 아버지와 지도자는 하나님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물론 바울은 고린도전서 4:15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말했다. 영적으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항상 이런 칭호로 불리우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우리가 이런 칭호를 사랑하는 것도 합당치 않다.
명칭 때문에 사람이 교만해져서는 안된다. 형제, 자매는 성도 상호간에 사용될 만한 좋은 용어이다. 그것은 겸손한 표현어이다.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마태복음 28:10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하셨다. 우리 주님 자신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신 것이다. 그렇다면 비천한 인생인 우리 직분자들이 교만한 칭호를 사랑할 것이 무엇인가? 겸손히 형제, 자매로 처신하고 불리우는 데 무슨 거리낌이 있겠는가?
교회의 직분자들은 다 봉사자들이다. 목사라는 명칭은 양 치는 목동, 목자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양무리인 성도들을 보살피는 일꾼이다. 영어로 목사를 가리키는 말 중의 하나인 미니스터(minister)는 '섬기는 자'라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3:5에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디아코노이)이니라"고 하였다. 사역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집사라는 단어로서 시중드는 자, 섬기는 자, 종이라는 뜻이다. 고린도후서 4:5에서 바울은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목사 뿐만 아니라, 전도사도, 장로도, 권사도, 구역장도, 주일학교 교사도, 집사도,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은 다 봉사자요 일꾼이다. 우리는 교만한 칭호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부족한 사람이다. 우리는 자기의 명예나 유익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의 영광만을 위하고 성도들의 유익만을 위하여서만 봉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물론, 서로 존경하고 피차 복종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본분이다. 로마서 12:10에는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가르쳤다. 에베소서 5:21에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씀했다.
또한 주께서 세우신 교회의 직분자들에 대하여 존경하고 복종하는 것은 성도의 바른 태도요 행위이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전서 5:17, 18에서 가르치기를,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고 했다. 갈라디아서 4:14에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은 주의 귀한 종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
히브리서 13:17은,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교훈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6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말씀하였다. 이와 같이, 일반 성도들은 주께서 세우신 교회의 직분자들을 존경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자들 자신은 교만과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히 성도의 발을 씻기는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섬기는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11, 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천국 윤리는 세상 윤리와 다르다. 세상에서는 큰 자가 섬김을 받는 자이다. 섬기는 자보다 섬김을 받는 자가 높은 자이다. 그러나 천국과 교회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자신을 낮추어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셨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천국에서 가장 큰 자이신 주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셨다. 우리는 주님을 본받는 자로서 우리의 직분이 중하면 중할수록 주님처럼 성도를 섬기는 자리에 처하여야 한다.
이렇게 자기를 낮추고 다른 형제와 자매를 위하여 봉사하고 섬기는 자는 주를 본받는 자로서 주의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을 것이다.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자는 자신의 죄악되고 무가치한 정체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는 주님의 물리침을 받거나 영적으로 심히 어린 자일 것이다. 겸손은 영적 성숙의 덕이다.
베드로전서 5:5, 6,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주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받으신다. 교만한 자는 무가치하지만, 겸손한 자는 주께서 높이 들어 사용하신다. 우리는 교만한 직분자인가, 아니면 겸손한 봉사자인가? 우리는 참으로 주의 교훈을 따르며 주의 모본을 본받는가?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주께서는 일반 대중에게보다 부패한 지도자들에게 더 진노하신다. 마태복음 5장의 8복(八福, '복이 있나니')과 대조적으로, 본절에는 위선적 지도자들에 대한 8화(八禍, '화 있을진저')가 선언되어 있다.
외식은 속과 겉이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이 없으면서 믿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없으면서 열심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 속에는 사랑이 없으면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외식이요 위선이다. 그것은 연약하거나 실수로 범하는 악이 아니고 고의적 악, 곧 큰 죄악이다.
외식자의 한 특징은 천국문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천국은 인생의 최대의 목표요 소망이다. 성경에 증거된 대로, 하나님은 예로부터 영생의 소망과 천국의 복락을 약속하셨다. 이 천국의 문, 영생의 문은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친히 양의 문, 구원의 문이심을 증거하셨다(요 10:8, 9). 또 그는 자신이 죄인들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증거하셨다(요 14:6). 그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허락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 말씀사역을 가리킨다. 그것은 베드로에게만 아니라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게 주어진 열쇠이다.
천국문을 열고 닫는 것은 바른 말씀의 사역과 잘못된 말씀의 사역을 가리킨다. 참된 회개와 예수님 믿음을 전파하는 것은 천국문을 여는 것이지만, 참된 회개도 전하지 않고 예수님도 전하지 않는 것은 천국문을 닫는 것이 된다. 거기다가, 죄를 버리지 않아도 됨을 암시하는 위선과 믿으려는 자를 믿지 못하게 방해하고 핍박하는 일까지 첨가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악인지 모른다. 이리하여 외식자는 천국의 안내자가 아니고 천국의 방해자, 천국문을 가로막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천국의 안내자인가, 아니면 방해자인가?
[1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으리로다.
과부들의 집이란 과부들의 재산을 가리키는 줄 안다. 외식자는 과부들의 재산을 교묘히 탈취한다. 그는 실상 하늘에 소망을 둔 자가 아니고 땅의 것만을 구하는 자이다. 그들 속에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 가득하다. 빌립보서 3:19에 보면, 바울을 대적하던 유대주의자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의 신은 배요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이다. 여기에 땅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가 구별된다. 참 성도는 하늘의 시민권자요 천국에 소망을 둔 자요 장차 천국의 복락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땅에 속한 자는 세상이 불심판을 받을 때 세상과 함께 영원한 불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외식자는 내면적으론 물질욕에 가득하지만, 외형적으론 경건한 척한다. 그들은 외식으로 길게 기도했다. 그리하여 경건하고 순진한 성도들을 속이는 것이다. 얼마나 사탄의 방식이 교묘한지! 그러므로 성도는 영적 분별력을 구해야 한다.
이러한 외식자들은 마침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 차등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죄의 경중(輕重)에 따른 것이다. 마태복음 11:20-24에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많이 베푸신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등의 마을들이 회개치 않음으로 두로와 시돈 같은 이방인의 도시들보다, 아니 옛날 유황불 심판을 받았던 소돔성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9:11에는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한 빌라도의 죄보다 빌라도에게 그를 넘겨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죄가 더 큼을 말씀하셨다. 요한일서 5:16, 17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였다. 성도들의 실수와 연약의 죄는 회개할 때 용서함을 받을 것이지만, 이단자들의 고의적 범죄는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죄이다. 그것은 스스로 회개할 수 없는 큰 악이다. 외식은 고의적 죄로서 큰 죄이다.
죄에 경중이 있듯이, 심판에도 경중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며 그의 행위의 죄의 경중대로 정당한 형벌을 내리신다. 외식자들의 물질욕과 위선적 경건은 일반인의 불경건과 불의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악이다. 그것은 위장된 악이다. 그것은 사람을 속이는 악이다. 우리는 이러한 위선과 물질적 욕심을 버리고 땅의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의 소망을 두는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한다.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교인은 신자와 구별된다. 교회에 등록하는 자는 누구나 교인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고 믿고 의지하는 자이다. 교인 중에는 신자가 아닌 자들도 있을 수 있다. 다 하나님의 백성 같은 모양은 가졌으나, 곡식과 가라지, 알곡과 쭉정이는 구별된다.
외식자들도 전도에 열심이 있다. 그들도 사람을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다녔다. 말하자면, 전도여행을 위해 이 도시, 저 도시를,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열심이 얼마나 컸었는가! 그들은 예수님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까지 그들의 신념에 대한 열심이 있었다. 오늘날 이방종교인들이나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이단자들도 종교적 열심을 갖고 있다. 종교적 진지함이나 열심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바른 지식이 필요하고 지식 있는 열심이 필요한 것이다.
그들의 열심은 자기 사람 만드는 데 그친 열심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교인수를 늘이는 데 열심을 가졌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을 만들었는가이다. 하나님의 열심은 사람을 회개시켜 새 사람을 만드는 열심이다. 그것은 구원의 열심이다. 참된 회개와 구원이 없다면, 구름 떼와 같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는 일이다. 교인수보다 중요한 것은 교인의 질이다. 교인수는 반드시 교인의 질과 함께 더하여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수적 증가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외식자들의 전도는 실상은 무서운 쭉정이 운동이고 가라지 운동이었다. 그들은 얻은 교인을 자기들보다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게 만들었다. 이것이 외식자들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그들은 천국 자녀를 만드는 대신 지옥자식들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제자는 선생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선생은 많은 것들을 가르쳤지만, 제자는 그 중에 어느 한 가지를 치우치게 강조하는 일이 있다. 또 선생은 어떤 것을 한 의견으로 가르쳤는데, 제자는 그것을 확실한 교리로 가르치는 일도 있다. 선생은 작은 실수자, 작은 위선자이었는데, 제자는 용감한 실수자, 큰 위선자가 되는 일도 있다. 이것이 종교적 부패와 악화의 과정인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가르치고 바른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다음 세대는 우리보다 더 악화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그러나 우리가 바로 하면 선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16-22]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성전의 금'이란 성전에 바쳐지는 헌금을 가리키는 줄 안다. 외식자들은 가치관에 있어서 영적 소경이다. 무엇이 더 가치 있고 무엇이 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판단력이 없다. 그들은 성전이나 제단보다 성전의 헌금이나 제단에 바쳐지는 예물을 더 중시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가 아니고, 물질적 탐심 때문에이었다. 그러나 그 탐심을 헌금이라는 허울 좋은 종교적 형식으로 은닉하였다.
성전과 제단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이다. 그것으로 맹세함은 곧 그것이 상징하는 하나님으로 맹세함이 된다. 그것은 비록 가난하여 헌금이 없이 행해진 것일지라도 참된 맹세이다. 헌금과 예물은 물론 경건의 선한 표현이다. 고린도후서 8:7, 8에는 헌금의 은혜에도 풍성하게 하라는 권면이 있고 구제헌금이 이웃사랑, 성도 상호간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일이 됨을 가르쳤다. 그러나 헌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이다. 그러므로 더 가치 있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겨야 하며, 덜 가치 있는 것을 덜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 물질과 하나님 자신을 어찌 혼동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 둘의 가치를 혼동하는 자가 있다면 그의 영적 시력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그는 확실히 영적 소경이 아니겠는가? 여러분의 눈은 어떠한가?
[23, 2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위선적 지도자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cummin)의 십일조를 드렸다. 이것은 레위기 27:30에 근거하였다: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그것도 필요한 종교적 의무이었다.
그러나 십일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의와 인(仁)과 신(信)이었다. 누가복음 11:42에는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의는 포괄적 덕목이다. 인간의 근본적 결함은 불의와 죄로 표현되었다. 모든 악과 부정직과 거짓이 불의 속에 포함된다. 의는 인간의 이 근본적, 포괄적 불의에 반대되는 덕목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행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율법에 따라 사는 것이 의이다. 인(仁)은 자비와 사랑을 가리킨다. 죄악된 인간 생활의 단면 하나는 이웃을 향한 미움이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줄 수 있으나 미움은 인간관계의 분쟁과 파탄을 초래한다.
신(信)은 인간관계의 신실성, 신뢰성, 신임성도 가리킬 수 있으나, 여기에서는 아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리켰을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 불신임하고 불신앙하는 것은 큰 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를 거역하고 대항하는 태도이다. 그런 태도에서 불평과 원망이 나온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를 신뢰하고 인정하고 겸손히 그와 동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참된 경건이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저 소경된 지도자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고 있다. 여기에서 주께서는 십일조 같은 종교적 형식을 지극히 작은 생물체인 하루살이에 비교하셨고, 의와 인과 신 같은 내면적 덕을 가장 큰 동물의 하나인 약대에 비교하셨다. 이와 같이, 종교생활의 형식보다 내면적 실질을 중시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내면적 실질이 있으면 종교적 외적 형식도 있게 마련이지만, 종교적 형식이 있다고 해서 항상 내면적 실질이 있지는 않다.
[25, 26]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잔과 대접의 겉은 외모를 비유한 것이다. 저 외식적 지도자들은 외부적 성결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내면적, 심적 성결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중요한 것은 내적 성결이다. 마음에 가득한 대로 말과 행위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먼저 안을, 즉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마음은 인격의 좌소이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이 어떠하면 그의 인격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깨끗게 되면 자연히 외적 성결도 힘쓸 것이다. 외적 성결은 내면적 성결에서 나와야 정상적이지, 그렇지 않은 외적 성결은 위선에 그칠 뿐인 것이다.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외적 의와 선을 외모의 단장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내면적 성결과 단장이 없는 외적 단장은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다. 회칠한 무덤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과 불쾌한 냄새로 가득하다. 이와 비슷하게 외식자들은 겉보기에 의인이요 선인일 수 있으나 실상은 내적으로 외식과 불법으로 가득한 것이다. 종교적, 도덕적 행위란 단순히 외적 단장품이어서는 안된다. 먼저 내면적, 종교적 도덕적 단장을 힘써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세상의 빛이 되어 우리의 선한 행실을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어낸, 꾸며낸 선과 의가 아니고, 진실한 의와 선인 것이다. 그러한 선과 의는 장려된다. 그러나 모든 형태의 위선과 외식은 단호히 정죄된다.
[29-32]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의인들의 비석은 역시 '무덤'(므네메이온)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저 외식자들은 이와 같이 마치 선지자들을 위하는 자들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과 다를 바가 없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의 외식적 말이 오히려 그들의 정체를 노출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의 분량을 채울 것이다.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말(겐네마타 에키드논)은 마태복음 3:7과 12: 34에서는 '독사의 자식들'로 번역되었다. 외식자들은 본질상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고 마귀의 자식들이다. 뱀들과 독사의 새끼들이 사람에게 큰 해를 끼치듯이, 저 외식자들은 사람들에게 치명적 해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선지자들과 지혜자들과 율법교사들을 그들에게 보낼 때 그들은 그들을 죽이고 채찍질하고 핍박할 것이다. 이것이 저 외식자들이 그들 조상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이것이 외식이다. 주의 예언대로, 주의 종들은 유대인들에게 죽임과 채찍질과 핍박을 받을 것이다. 교회는 이것을 기억하고 담대한 마음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외식적 지도자들은 마침내 주 예수님을 죽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의인 아벨로부터 역사상 흘려진 의로운 자들의 피들의 절정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대는 그 핏값을 받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그곳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이었다. 세상의 다른 곳들에서는 불경건과 불의가 가득할지라도 이곳만은 경건과 의가 충만해야 할 곳이었다. 의의 결과만이 평강이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재난은 죄 때문에 온다. 천국에는 재난이 없다. 그러나 이 도시가 지금 하나님을 대항하고 있다.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돌로 친다.
주께서는 여러 번 예루살렘을 감싸려 하셨다. 율법에 나타난 요구나, 선지자들의 회개의 부르짖음은 진실하고 진지한 요청이었다. 그것은 결코 위선적 말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향해 진실하게 회개를 명하신다. 회개하라, 내게로 오라!
그러나 그들은 원치 않았다. 불신앙은 사람의 의지적 거절, 자원적 거절이지, 결코 강압적 행동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비록 선을 행하는 의지적 능력이 없으나, 악을 행하는 자유의지는 있다. 그러므로 악행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이나 어떤 다른 이에게 있지 않고, 사람 자신에게 있다.
사람은 원함으로 구원을 받고 원치 않음으로 멸망을 당한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러나 원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役事)로만 가능하다.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하나님을 거절한 결과는 황폐요, 파멸과 고생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회개치 않으면 망할 것 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를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구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이다. 이 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요,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는 때이다. 그 때가 있다. 인류역사는 심판으로, 황폐와 파멸로 끝나지 않는다. 인류역사는 미래에 영광스러운 새 예루살렘, 신천신지로 끝날 것이다. 그 나라와 그 도시가 예비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1:1, 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4장: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종말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마태복음 21: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마태복음 21장 후반에서부터 23장에 걸쳐 기록된 내용들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변론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성전 안에서 유대 지도자들과 무리들 앞에서 외식자들의 오류들을 직선적으로 책망하셨던 것이다.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앞 장에서(23:38) 예루살렘의 황폐를 예언하신 주께서 좀더 구체적으로 돌 하나도 첩놓이지 않고 다 무너뜨리울 것을 말씀하셨다. 이 예언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을 불 태웠을 때에 성취되었다. 이 때는 주께서 예언하신 지 40년 후이었다.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24, 25장의 내용은 감람산 위에서 가르치신 것이었다. 예루살렘 멸망의 시기와, 주의 재림과 세상종말의 징조에 대해 묻는 제자들의 물음에 대해 주께서 대답하셨다. 두 사건은 별개의 것이지만, 서로 비슷한 점이 있었다. 예루살렘 멸망은 회개치 않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의, 즉 세상종말의, 그림자이었다. 매튜 풀은 그의 주석에서, 주께서 본장에서 말씀하신 종말징조들은 요세푸스의 유대인의 전쟁들, 제2권 11장부터 제4권에서 확증되는 대로 예루살렘 멸망 직전의 상태에서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고 말했다(성경주석, Ⅲ, 113). 물론, 본장에서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종말에 대한 예언이 함께 나오기 때문에 해석상 어려움도 없지 않다.
[4, 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종말의 첫번째 징조는 사람들의 미혹이다.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할 것이다. 마태복음 24:11, 24,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 . .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요한계시록 13:11-18,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 . .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 . . .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의) . . . 오른 손에나 이마에 (짐승의) 표(666)를 받게 하고."
사실, 사도시대의 말기에 벌써 많은 적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났다(요일 2:18; 4:1-3; 요이 7, 9). 또한,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때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상 종종 이런 징조들이 나타난 때가 있었다. 종교개혁 때에도 그러하였다. 최종적으로 주의 재림 직전에도 그러할 것이다. 이 종교적 미혹은 그 어떠한 시험보다도 악하고 치명적이며, 교회를 혼란시킬 것이다.
이단(異端)은 기독교의 바른 교리들, 특히 근본교리들로부터 탈선된 견해나, 그런 견해를 취하는 인물이나 집단을 가리킨다. 오늘날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이단들은 다음과 같다. 우선, 교회 역사상 로마 카톨릭 교회와 교황주의는 대표적 미혹이며, 오늘날도 최대의 이단은 로마 카톨릭 교회이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단번 속죄의 복음을 바로 붙들지 않고 사람의 선행(善行)과 교회의 의식(儀式)을 구원에 본질적이라고 봄에 있어서 이단적이고(갈 1:8, 9), 마리아를 그리스도와 대등한 위치에서 중보자로, 보혜사로, 기도의 대상으로, 세상의 여왕으로 높임에 있어서는 우상숭배적이다.
또한, 19세기 이후 나타난 각종 이단종파들은 마지막 시대의 미혹들이라고 생각된다. 세계적 이단들로는 윌리암 밀러(1782-1849)가 시작한 안식교, 죠셉 스미스(1805-44)가 시작한 몰몬교, 찰스 러셀(1852- 1916)이 시작한 여호와의 증인, 메리 에디(1821-1910)에 의해 시작된 크리스챤 싸이언스, 문선명(1919- )의 통일교 등이 있다. 이단종파 연구가 박영관 박사에 의하면, 오늘날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이단종파들은 유럽 50개, 미국 150개, 아시아 50개 등 도합 약 300개가 된다고 한다(이단종파비판, 2권, 22쪽).
한국의 이단종파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박태선의 전도관, 문선명의 통일교, 이유성의 새일교회, 유재열의 장막성전, 정명석의 애천교회, 조희성의 영생교, 권신찬의 한국 기독교 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 김기동의 베뢰아, 이초석의 한국 예루살렘교회, 박명호의 엘리야 복음선교원, 이장림의 다미 선교회, 이명범의 레마 선교회, 이선아의 밤빌리아 추수군, 박윤식의 대성교회, 권기원의 한국 지방교회 등.
이단들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① 이단종파의 교주들은 대개 10대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하나님과의 직접적, 특수적 교통을 주장한다. 이단 연구가 탁명환 선생에 의하면, 1986년 4월 30일 현재 한국에 재림주로 자처하는 자가 35명,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자가 12명이라고 했다(기독교이단연구, 61쪽). ② 이단들은 자기들의 집단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배타적 주장을 한다. ③ 절박한 종말의식을 강조한다. ④ 지상천국 강조한다. ⑤ 이단들은 외부와의 교제를 단절하며 현실도피적 경향이 있다. ⑥ 빈번히 교주들의 부도덕한 사건들이 감추어져 있다.
이단들에 대처하여 교회들이 반성해야 할 점들은 다음과 같다: ① 교회는 신앙적 해이에서 벗어나 바른 성경교육과 교리교육을 통하여 이단들에 대비해야 한다. ② 교회는 교권적 횡포와 독선을 버리고 성경적, 민주적 교회운영을 하고, 교인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③ 교회는 세속화 혹은 물질주의화, 예를 들어 성직자의 직업화, 헌금강조, 교회건물 등의 사치화를 반성해야 한다.
이상의 비교적 드러난 이단종파들보다 더욱 교묘하고 더욱 파괴적인 것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는 이단보다 더 배교적인 이단이며, 현대교회의 가장 큰 미혹이다. 수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역사적 개신교회들인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루터교 등 거의 모든 대 교단들에 침투하여 그들의 목사 양성원인 신학교들을 장악했고, 젊은 목사 후보생들의 사상을 부패시켰다. 16세기 종교개혁 때와 같이, 20세기 기독교회는 또 다시 배교(背敎)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예언의 성취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背道)하는 일이 있고."
세계의 대교단들은 자유주의를 고의적으로 포용하거나 자유주의화 되어 있다. 예컨대, 미국의 대교단인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UCC), 연합 감리교회(UMC),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 미국 침례교회(=북침례교회, ABC), 남침례교회(SBC) 등을 보라(김효성, 현대교회문제, 54-58쪽 참조). 세계 기독교의 주류 교단들은 소위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되어 있는데, 그 단체는 배교적이다. 우리 나라도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기독교감리회(기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등이 교단적으로 말하면 자유주의적이고 배교적이다. 물론 그런 교단들 안에도 보수적 목사들과 교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신학교들이 자유주의적이므로 그 교단들은 명백히 자유주의적이다.
[6, 7]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또 하나의 중요한 징조는 전쟁이다. 요한계시록 6장에 나오는 일곱 인의 계시 중 두번째 인은 붉은 말의 환상인데, 그것은 큰 칼 곧 전쟁을 상징했다. 요한계시록 8, 9장에 나오는 일곱 나팔의 계시 중 여섯째 나팔인 유브라데강 주위에서의 큰 전쟁, 곧 2억('2만만')의 군사가 동원될 전쟁에 대한 예언이다. 또한 요한계시록 16장에 나오는 일곱 대접의 계시에서도 여섯째 대접은 유브라데 강이 말라 동방의 왕들이 들어옴으로 세계적 연합군이 형성되고 마침내 아마겟돈(혹은 마게돈, 즉 므깃도 혹은 므깃도 언덕)에서 마지막 대 전쟁이 일어날 것을 말한다.
역사상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전쟁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전쟁들 중에서도 20세기에 치룬 두 차례의 세계적 전쟁은 처참한 '대전'(大戰, Great War)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에 오스트리아-항가리가 세르비아를 침공함으로써 발발하여 4년간 계속되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의 연합군이 마침내 오스트리아-항가리와 독일 등을 패배시킴으로 전쟁은 그쳤으나, 전쟁으로 인해 군인들만도 거의 천만 명이나 희생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독일, 이태리, 일본의 세계정복 야망에 대항하여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 등의 연합국이 싸우므로 1945년 마침내 연합국이 승리하였다. 온 세계에서 벌어진 이 대전으로 죽은 민간인 수는 셀 수 없을만큼 많았고 군인들만도 약 1700만명이 희생되었다.
2차 세계대전후 세계는 서방세계와 공산진영으로 서로 대립되었고 아직도 그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세계 적화(赤化, 공산화)의 꿈을 버리기 전까지는 그러할 것이다. 한편,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종교적 갈등이 남아 있다. 만일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아마 중동에서부터일 것이며, 그 전쟁은 핵무기와 화학-생물학무기들을 동원한 인류역사가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 처참한 전쟁이 될 것이다. 현대인은 고도로 불안한 전쟁의 위험 속에 살고 있다.
처처에 기근과.
요한계시록 6장의 일곱 인의 계시 중 세째 인은 검은 말의 환상인데, 그것은 흉년을 상징했다. 기근들은,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근대에 들어와 세계적으로 더욱더 심해진 것 같다. 월드 북 사전(The World Book Encyclopedia)에 의하면, 1870년대에 남부 인도에서 약 5백만명이 기근으로 죽었고, 중국에서는 9백만명 이상이 죽었다. 1929년과 30년에는 중국의 황하강의 홍수로 인한 기근으로 약 2백만명이 죽었다. 1943년 인도 동부 벵갈에 대 기근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후 150만명 이상이 기근으로 죽었다. 1960년대 이후 아프리카의 소위 사하라 사막 남부 사헬 지역과 남부 아프리카, 특히 이디오피아 등에 심각하여 수백만명이 죽었다. 1995년 4월 28일자 조선일보에 의하면, 세계은행은 지구상에서 매일 7억 5천만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온역들과.
전통사본에는 '온역들과'라는 말이 들어 있다. 기근들이라는 헬라어(리모이)와 온역들이라는 말(로이모이)는 글자 모양이나 발음이 비슷하다. 온역은 악한 전염병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16장의 일곱 대접의 계시에서 첫째 대접은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남을 예언했다. 또 다섯째 대접은 짐승의 나라가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할 것을 예언했다. 여기 '헌데'와 '종기'는 원문에서 같은 말이다.
역사상 수많은 전염성 혹은 비전염성 질병들이 있었지만, 의학이 발달된 오늘날도 병원들은 각종 환자들로 붐빈다. 고혈압, 당뇨, 암 등은 무서운 현대적 질병들이다. 특히 현대의 도덕적 부패와 음란, 그리고 특히 동성애로 인하여, 매독과 임질 등의 성병이 유행하고, 아직 치료약이 없는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 결핍증)의 확산은 매우 위협적이다.
지진이 있으리니.
지진들도 징조의 하나이다. 요한계시록 6장의 여섯째 인은 큰 지진과 천계에 큰 변동이 일어날 것에 대한 예언이다. 요한계시록 11:13에는 두 증인의 승천후 큰 지진이 나서 성 10분의 1이 무너지고 7천명이 죽을 것을 예언했다. 요한계시록 16장의 일곱째 대접의 계시는 큰 지진이 있어 큰 성 바벨론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큰 우박이 있을 것을 예언한다. 큰 지진의 힘은 약 1억 8천만 톤의 폭탄(TNT)과 같으며, 그것은 최초의 원자폭탄의 약 만배의 힘이라고 한다.
월드 북 사전에 의하면, 역사상 대 지진들과 사망자수는 다음과 같다: 주후 526년 시리아 안디옥(지금의 터어키) 25만명, 1268년 소아시아 실레시아 6만명, 1290년 중국 북동부 10만명, 1556년 중국 중앙부 솨안키 83만명, 1667년 코카시아(소련 남서부) 8만명, 1693년 이태리 카타니아 6만명, 1730년 일본 혹가이도 13만 7천명, 1737년 인도 칼커타 30만명, 1755년 포르투갈 리스본 6만명, 1783년 남부 이태리 5만명.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대지진들이 더욱 빈번해졌다. 20세기에 5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지진들은 24개 이상이 되며, 그 중 2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것은 14개나 된다. 5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큰 지진만 꼽아보면, 1908년 이태리 멧시나 7만 5천명, 1920년 중국 중앙부 간서 20만명, 1923년 일본 도오꾜-요코하마 14만 2천8백 2명, 1932년 중국 중앙부 7만명, 1935년 인도 쿠에타(지금은 파키스탄 지역) 6만명, 1970년 페루 침보테 6만 6천7백 9십4명, 1976년 중국 북동부 헤베이 24만명 등이다. 최근의 큰 지진으로는 1988년 아르메니아 2만 5천명 이상, 1990년 이란 서북부 카스피해 인접지역 2만 5천 내지 4만명, 1995년 일본 고오베 5천4백명, 러시아 사할린도 네프트골스크 2천명 이상 등이다.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이렇게 전쟁들, 기근들, 온역들, 그리고 지진들의 징조는 오늘 시대가 주의 재림이 매우 가까운 시대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에 불과하다.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종말 징조의 두려운 하나는 핍박들이다. 성경은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예언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정치적 인물 혹은 세력을 가리킬 것이다.
요한일서 2:18, 22,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敵)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데살로니가후서 2:3, 4,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저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 불리우거나 숭배함을 받는 모든 것보다 자신을 높여 하나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처럼 앉아 자기를 하나님으로 나타내느니라"(전통사본 직역). 요한계시록 13:1-7,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 . .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초대교회 때의 로마황제, 중세교회시대의 로마교황는 예비적 징조 혹은 단계이었다. 그 때 진실한 성도들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였었다. 20세기 초 우리 선조들은 일본 통치시대의 신사참배 강요와 이북 공산당의 핍박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주의 재림 직전에 세계적 전제국가(아마, 공산국가)의 통치자의 출현으로 이 예언은 절정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이 때 진실한 성도들, 즉 짐승의 표(666)를 받지 않는 자들은 심한 미움과 큰 핍박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이런 시험의 때에 많은 사람들이 변절하고 참 성도들을 핍박하는데 앞장 설 것이다. 이들은 가룟 유다의 후예들이며, 진실한 성도들이 아니다.
[11-13]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많은 형식적 교인들의 변절과 배교, 그리고 불법과 위선의 유행으로 인하여 참 성도들이라도 낙심하거나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기에 힘을 잃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참 성도들은 끝까지 견딜 수 있고 이기는 자이다. 요한계시록 17:14, "저희[짐승]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요한계시록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지막으로, 종말의 징조는 세계 복음화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을 포함할 것이다. 로마서 11:25, 26,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어떤 이는 이 구절이 종말의 때에 이스라엘 민족의 대규모 회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보지만(헤르만 바빙크), 우리는 (촬스 핫지와 함께)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문맥상 육신적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 혹은 선택된 충만한 수의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본다.
세계 복음화는 하나님의 복음, 곧 천국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됨을 가리킨다. 백년 전에 겨우 이 복음이 아시아의 동쪽 끝부분인 한국에 도착했다. 이제 교회의 남은 사명은, 그리고 한국교회의 사명은, 세계 복음화이다. 참 교회들은 현대 기독교의 배교적 상황으로 인해 낙심치 말고 성실히 세계 복음화의 일을 위해 힘써야 한다. 사도행전 1:6-8,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다니엘 11:31,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다니엘 11장은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의 세력이 꺽이고 그 나라가 나누일 때 일어날 애굽(프톨레미) 왕국과 수리아(실루커스) 왕국 간의 전쟁에 관한 예언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우상을 가리키고, '거룩한 곳'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이 예언은 주전 167년 수리아 왕 안티오커스 4세(일명 '에피파네스)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고 제사를 폐지하고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울 것을 가리켰다.
이것은 역사상 성취되었으나, 모형적으로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의 징조로 제시되었다고 본다. 로마군대는 주후 66년에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주후 70년에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였다. 주의 재림 직전에도 그런 일이 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3, 4,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저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 불리우거나 숭배함을 받는 모든 것보다 자신을 높여 하나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처럼 앉아 자기를 하나님으로 나타내느니라"(전통사본 직역).
[16-18]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때 산으로 도망하라고 가르쳐준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증거하기를, 예루살렘 멸망의 때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요단 건너편, 베레아 북단 펠라로 도피하였다고 한다. 집안의 물건이나 겉옷을 가질러 돌이키지 말라고 한 것은 그 재난이 급속하므로 이 땅의 것에 대한 모든 애착을 버리고 급히 피하여야 할 것을 가리킨 줄 안다. 우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해야 한다. 창세기 19:26에 보면, 롯의 아내는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지 말고 속히 산으로 도망하라는 천사의 지시를 저버리고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의 명령대로만 살아야지, 이 땅의 것들에 대한 애착에 매여 있으면 급속한 재난을 피할 수 없다.
[19, 20]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아이 밴 것과 젖 먹이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단순히 피난하기 어려우니까 화가 있다는 말이다. 결혼은 대부분 인간의 마음과 육신의 요청이지만, 결혼에는 심신의 고통도 뒤따르며 이 환란의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고린도전서 7:26-28, "[처녀에 대하여]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란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겨울과 안식일도 피난하기 어려우니까 그 때를 피하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예루살렘 멸망시도 극심한 환란이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기록하기를,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의 때에 그 시대에 식량이 없어져서 여자가 그의 자식을 죽여 먹은 일이 있었다. . . . 나는 창세 이후로 어느 다른 도시가 이렇게 비참히 고통을 받은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어느 세대가 이보다 더 죄악이 충만하였다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예언은 또한 재림 직전에 있을 역사상 최대의 환란을 예언하신 것이라고 본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이 대환란을 가리킨다고 본다. 거기에 기록된 재앙들은 참으로 전무후무한 것들이다.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환란의 기간을 요한계시록에서는 3년 반으로 자주 표현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문자적 기간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환란의 기간은 제한되고 짧을 것이다. 그것은 악인들을 위하여 그런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자들이나 구원 받을 자들을 위하여 그럴 것이다. 어떤 이들은 택자들이 환란에 참여치 않고 그 전에 들리움을 받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고 그들도 환란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니므로 피할 길이나 견딜 은혜를 얻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9:4, "(다섯째 나팔인 황충 재앙시)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계 16:2도 참조.)
[23, 24]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주께서는 거짓 그리스도들을 조심하라고 재강조하신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미혹할 것을 말씀하셨다. 신앙의 초보적 단계에서는 진리의 기초적 지식들이 필요하지만, 신앙의 성장과정에서는 많은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하고 많은 시험과 미혹을 분별하여 이겨야 한다. 사탄은 할 수 있는 대로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려 한다. 택자들은, 비록 실패치 않을 것이지만, 깨어 조심하고 싸워 이겨야 한다.
데살로니후서 2:9, 10, "악한 자의 임함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 말씀은 재림 직전의 징조로 거짓된 기적주의가 유행할 것이며 그 근원은 사탄이고 그 대상 혹은 진짜 피해자는 진리를 거부한 멸망할 자들이라는 것을 보인다. 참된 성도들은 이 사실을 알고 조심해야 한다.
신명기 13:1-5,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附從)하고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 . .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위의 말씀의 요지는, 교회 안에 거짓된 기적운동이 있을 것이며, 거짓된 기적운동의 본질은 예배의 대상이 바뀌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런 운동을 허용하시는 목적은 성도의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시험하시기 위함이고, 교회는 거짓된 기적을 행하는 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은사운동은 바른 교리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된 기적들, 사탄의 활동들의 활동무대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의 은사운동을 조심해야 한다.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바른 교리, 바른 교훈이다. 우리는 기적을 따라가지 말고 바른 교리와 교훈을 따라가야 한다. 무엇이 바른 교훈인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 바른 교훈이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은 개신교(Protestant), 개혁주의(Reformed), 근본주의(Fundamentalism)로 표현된다.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권주의, 의식주의, 선행주의에 반대하여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개혁주의는 루터파, 이성파, 신비파, 과격파에 반대하여 개신교의 정신을 바르게 지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절대적 은혜를 강조하는 입장이다. 근본주의는 오늘날 배교적 불신앙인 자유주의, 타협적 신복음주의, 경험위주의 은사주의에 반대하며, 특히 자유주의와 타협지 말고 분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바른 교훈이다.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우리는 주의 예언의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주께서는 미리 말씀하셨다. 이제는 남은 것은 우리의 성실성이다. 그러므로 성경 읽기는 우리의 중요한 일거리이다. 말씀 묵상은 우리의 성실한 신앙 생활에 필수적 요소이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 자만이 깨어 있을 수 있다.
[26-28]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주의 재림은 번개같이, 즉 온 세상에 동시에 알려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어느 특정한 산이나 들, 어느 특정한 집이나 집회소에 가야만 주의 재림을 대비하거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신비주의는 흔히 어느 기도원, 어느 은사받은 직분자의 집이 주의 재림을 대비할 장소인 것처럼 선전하였다. '여기만 와야 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구원의 방주는 어느 장소나 집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가 우리의 구원이며 그 안에 있는 자, 곧 그를 진실히 믿고 의지하는 자가 구원받은 자요 구원 안에 있는 자이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는 말씀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참 교회들이 많지 않다는 것도 말해 두어야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말하기를, "개교회들은 그것들 안에서 복음의 교리가 가르쳐지며 받아들여지고 규례들이 집행되고 공적 예배가 행해지는 순결성의 정도에 따라 더 순결하기도 하고 덜 순결하기도 하다"고 했고 또 "하늘 아래서 가장 순결한 교회들이라도 혼잡과 오류에 빠지기 쉽고, 어떤 것들은 매우 타락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아니고 사탄의 회당들이 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를 예배하는 교회가 땅 위에 항상 있을 것이다"고 했다. 모든 교회가 다 똑같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순결한 교회를 세워야 할 책임이 있고 그러한 교회에 속하여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대환난 전이 아니고 후에 있을 것이다. 해, 달, 별들은 어떤 이들이 해석하듯이 정치적, 종교적 권세나 제도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문자적 해와 달과 별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여섯째 인의 큰 지진 사건이나, 네째 나팔의 해와 달과 별들의 3분의 1이 침을 받을 사건의 예언들과 비슷하다. 문자적 의미가 가능하고 그것이 자연스러울 때 그것을 비유적으로 해석할 아무런 근거나 이유는 없다.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인자의 징조는 재림의 징조이다. 이제까지의 예언들은 재림 직전의 징조들이고 본절의 징조는 재림 자체의 징조이다. 하늘은 문자적 하늘이다. 주의 재림은 주께서 문자적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사건이다.
왜 땅의 족속들이 통곡하는가? 그것은 후회의 통곡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1:7, ". . .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다가왔고, 주를 영접지 않았던 죄인들의 마음에는 두려움과 후회만이 가득하며, 그들은 그런 마음으로 애곡할 것이다.
주께서는 재림하는 자신을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신자(神子)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언제나 어디까지나 우리와 동행할 것이다. 마태복음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러나 인자로서는 즉 그의 인성(人性)으로는 제한성을 가진다. 재림의 인자는 공간의 이동성을 가진다.
구름도 문자적 구름을 가리킨다고 본다. 구름이 성경에 상징적 의미로 사용된 곳들도 있으나, 여기에선 그렇지 않다고 본다. 마태복음 26:6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이 말씀들에서 사실상 강조된 것은 구름이 아니고, 유형성(有形性)과 가시성(可視性)이다.
주의 재림이 이와 같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유형적, 가시적 재림일 것은 그의 승천 때에 천사들에 의하여 이미 증거된 바이다. 그의 재림은 그의 승천의 역순일 뿐이다. 사도행전 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재림의 주는 또한 능력과 큰 영광을 가지실 것이다. 그것은 그의 초림(初臨)과 비교될 것이다. 그의 초림은 사람들이 외적으로 볼 때 능력도, 영광도 없는 초라한 어린 아기의 출생이었다.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오신 고난의 종의 강림에 적합하였다. 그러나 재림의 주는 다르다. 그는 이제 승리의 주, 심판의 주, 구원 완성의 주, 곧 큰 영광과 능력의 주이신 것이다.
[31]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이것을 흔히 '휴거'(rapture)라고 부른다. 주의 재림시 택자들은 지구 동쪽 끝에서부터 서쪽 끝까지 사방에서 들리움을 받을 것이다. 이 광경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좀더 자세히 증거되어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4:16, 17). 주의 재림 때에 성도들은 모두 하늘로 들리워 기쁘고 영광스럽게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지만,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 곧 불신앙과 죄악 가운데 살던 자들은 두려움과 후회의 슬픔 속에 버려져 있을 것이다.
[32, 33]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 줄 알라.
어떤 이들이 이 비유에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그 잎사귀가 나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주께서 의미하시는 바는, 단순히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것이 여름이 가까운 징조이듯이, 이 모든 징조들이 일어나면 주의 재림이 가까운 줄을 알라는 것뿐이다. 무화과나무 자체를 비유적으로 해석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무화과나무와 여름은 이 모든 징조들과 재림에 병행되는 비교일 뿐이다. 우리 시대는 과연 어떠한가? 주께서 얼마큼 문 앞에 가까이 와 계시다고 보겠는가?
[34, 3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예언 성취의 시기나 시간을 강조하신 것이 아니고 예언 성취의 확실성을 강조하신 것이다. 예루살렘 멸망의 예언은 주후 70년에 역사적으로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와 같이, 주의 재림의 예언도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진실로'라는 말(나이)은 '참으로,' '확실히,' '정말'이라는 뜻이다. 전통사본에는 '아멘 주 예수여' 다음에 '진실로'(나이)라는 말이 또 들어있다. 주의 재림은 진실로, 참으로, 확실히, 정말 이루어질 것이다.
이 땅의 일들이 변화무쌍하며, 세상과 인생의 육신이 낡고 쇠하여지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며 확실하다. 베드로전서 1:24, 25,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성도는 이 진실하고 영원한 말씀을 사랑하고 읽고 묵상하기를 힘쓰며 굳게 붙들어야 한다.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전통사본에는 '아들도'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마가복음 본문엔 전통사본에도 이 말이 들어 있다.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아들도 모른다'는 말은 재림의 시간을 알리는 것이 아들이 전달하라고 받은 내용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라고 하나(루터, 랑게), 그것은 빈약한 추측인 것 같다. 전달하라고 무엇을 받지 못했다는 말과 무엇을 모른다는 말은 확실히 서로 다르다. 오히려 우리는 크리소스톰이나 칼빈과 같이 이 말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것으로 이해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으로는 전지(全知)하시지만, 인성으로는 지식에 제한성을 가지신다. 그가 재림의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하신다는 것도 그 제한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
아버지의 뜻은 주의 재림의 시간을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 사도행전 1:7,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만일 2천년 전에 재림의 시간을 2천년 후라고 알려주셨더라면, 많은 성도들이 해이해지거나 혹은 낙망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비밀은 오히려 성도들에게 유익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 날이 확실히 올 것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37-39]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하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전부이면 그 삶은 멸망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주의 재림의 날이 바로 그 날이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의 징조들을 보는 눈,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노아가 방주를 준비하고 거기에 들어갔듯이, 우리 모두는 확실한 구원을 받아야 한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방주이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만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안전하다. 그를 믿고 그의 십자가 공로 안에 거하는 자만이 다가오는 멸망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40, 41]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큰 분리가 일어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데려감을 당할 것이고, 다른 이들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 곧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영접하고 믿은 자들은 하늘로 들리워 재림의 주를 영접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주를 알지 못하고 세상만을 알던 자들,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섬기지 않던 자들, 죄의 낙을 누리던 자들은 다 버리움을 받을 것이다. 이 거대한 분리의 사건에서 여러분은 확실히 들리움을 받는 부류에 속하는가? 여러분은 진실한 회개와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즐거이 재림의 주를 기다리고 있는가?
[42-44]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을 두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깨어 있는 생활이다. 깨어 있는 생활이란 경건과 의와 사랑의 생활을 의미한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참된 경건과 믿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잠든 삶이 아닐 수 없다. 또 참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에 일치하는 의롭고 거룩한 생활, 서로 사랑함을 실천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것은 참된 믿음의 행위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참믿음은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깨어 있는 삶이란 다른 말로 위선적이지 않은 진실한 정상적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주께서는 자신의 재림의 돌연성을 도적의 비유로 표현하셨다. 자신을 도적에 비교한 것이 아니고, 단지 자신의 재림의 돌연성을 도적의 침입의 돌연성에 비교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도적의 비유를 오해하여 주의 재림은 어느 순간이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 결론은 지나친 결론이다. 주께서는 이 말씀의 앞뒤 문맥에서 자신의 재림이 어느 순간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재림의 징조들에 대해 말씀하시고 대환난 후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셨다. 도적의 비유는 단지 재림의 돌연성, 즉 재림이 많은 사람들에게 뜻밖에 닥칠 것임을 보이는 것뿐이다. 도적의 돌연적 침입을 막기 위해 항상 조심해야 하고 문 단속을 잘해야 하듯이, 주님의 돌연적 재림을 맞이하기 위해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함을 가르치신 것이다.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의 재림의 진리 앞에서 두 종류의 종들이 가능하다. 하나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다. 이들은 진실한 제자들, 참된 교회 일꾼들이다. 이 말씀에서 주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집 사람들은 성도들을 가리키며, 때를 따라 나눠줄 양식은 영의 양식, 곧 신구약 66권의 말씀일 것이다.
흔히 충성과 지혜는 반대 개념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세상적으로는 지혜 있는 자가 요령을 잘 피우는 자일지 모른다. 충성된 자는 고지식하고 미련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무엇이 지혜인가?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복이 되지 않고 화가 되도록 행동한 것이 결코 지혜가 아니다. 참된 지혜는 복된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이 지혜요 지혜자는 충성한다.
주의 종들과 일꾼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다. 고린도전서 4:2,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은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자기의 직분과 직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4: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디모데후서 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여러분은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들인가?
[46, 47]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들과 그들의 충성된 봉사는 복되다. 그것은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일이다(잠 25:13). 주인의 모든 소유는 천국을 가리킬 것이다. 천국은 주의 충성된 종들에게 맡겨질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도 주의 일에 충성할 것이다. 천국은 충성된 자들이 주와 더불어 자발적으로 통치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2:5,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48-51]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 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주의 재림의 진리 앞에 다른 하나는 악한 종들이 가능하다. 악한 종들의 재림관은 긴박성이 없다. 그들은 주의 재림을 진실하고 진지하게 기다리지 않는다. 그 결과, 그들의 마음은 강포하고 방탕함에 떨어진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심판을 진지하게 믿지 않는 자가 어떻게 경건함과 근심함으로 살며, 거룩과 사랑을 실천하겠는가? 내세를 알지 못하는 자마다 현실의 즐거움만을 위주하며 살지 않겠는가?
그러나 주의 재림이 돌연히 오고야 말 것이다. 재림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재림이 안오는 것이 아니다. 이 돌연한 재림은 악한 종들에게 무서운 징벌의 사건이 될 것이다. 그들은 내어쫓기며 외식자들로 간주되며 외식자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진실한 신자들, 진실한 종들이 아니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가상적 경고이다. 우리는 진실한 신자들이 이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러분이 진실한 신자들인가? 그렇다면 그 진실함을 깨어 있는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 주께서는 약속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고 그 때 그는 참과 거짓, 진실과 위선을 구별하시며 분리시키실 것이다.
25장: 깨어 충성할 것
1-13절, 열 처녀의 비유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태복음 25장은 24장에 이어 주의 재림에 대비하여 제자들이 깨어 충성해야 할 것을 계속 가르친다. 여기에 말씀하신 천국은 천국의 현재의 단계인 교회를 가리킨다. 유대 나라의 결혼식은 밤에 한다고 한다. 신랑이 그의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에 오면, 신부의 친구[들러리]들은 나가서 그들을 맞으며 신부를 인도하여 신랑과 함께 결혼 잔치자리인 신랑의 집에 이르게 한다. 이 비유에서 열 처녀는 신부의 친구들에 해당한다. 신부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런 일이 밤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등불이 필요하였다. 여기에 말씀하신 신랑은 재림의 주님을 가리키며, 언급되지 않은 신부는 성도들 즉 교회를 가리키고, 열 처녀들은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는 주의 종들, 주의 일꾼들을 가리켰을 것이다.
[2-4]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앞 장에서도 말했지만, 주의 종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들이고, 다른 하나는 게으르고 악하고 미련한 종들이다. 등은 외적 신앙고백을 가리키고, 기름은 내적 은혜를 가리킨다. 성경에서 기름은 흔히 성령을 상징한다. 성도의 내면적 은혜는 성령의 활동이며,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는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신다.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구원과 중생의 은혜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진실히 믿고 거룩과 사랑을 실천한다. 그러나 악하고 미련한 종들은 믿는 모양은 갖고 있으나 성령의 내면적 은혜를 갖고 있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참으로 구원 받지 못한 자들, 참으로 중생치 못한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참된 거룩과 사랑이 없다. 비록 그들에게 천국과 영생에 대한 헛된 소망과 확신이 있지만, 그들은 위선자와 형식적 신자에 불과하다.
[5, 6]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인간 편에서 볼 때 주의 재림은 더딘 것 같다. 그래서 열 처녀들 모두가 졸며 잤다. 지혜로운 처녀들도 졸며 잤다는 말씀은 재림 직전에 기독교계 전체가 영적으로 해이해질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누가복음 18:8,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비록 그러할지라도, 여전히 주의 비유의 정신은 그 중에 일부는 진실한 종들이며, 나머지는 그렇지 않음을 말한다. 그런데 밤중에 신랑이 왔다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친구들의 소리일 것이다. 주의 재림이 더딘 것 같아 보여도, 그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자들이 복되다.
[7-9]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미련한 자들은 기름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등불이 꺼져갔다. 그들의 등불은 신부를 신랑의 집으로 인도할만큼 충분하지 못하였다. 지혜로운 자들의 기름은 미련한 자들과 나눠쓰기에 충분치 않았다. 이것은 개인이 소유한 구원의 은혜가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해 충분치 않음을 보인다. 구원은 각 개인의 문제이며 각 개인이 준비해야 할 문제이다. 각 개인의 구원은 다른 이의 은혜에 의존하지 않는다.
[10-12]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여기에서도 두 부류의 분리가 나타난다. 예비하였던 지혜로운 처녀들은 결혼잔치에 들어갔으나, 결혼잔치집의 문은 닫혔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문을 열어달라는 그들의 요청에 대해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말로 거절하셨다. 그 두 부류의 분리는 냉엄하였다. 주께서 미련한 처녀들을 알지 못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들은 처음부터 주의 택한 양들이 아니었고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증명된 거듭난 성도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믿는 모양만 갖춘 형식적 교인들, 곧 위선자들에 불과하였다.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주의 재림의 진리 앞에서 모든 진실한 성도들이 명심해야 할 교훈은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깨어 있는 생활은 이 비유에서는 기름 준비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성령의 내면적 은혜를 가리킨다. 참된 믿음과 사랑의 실천은 그것의 외적 증거이다. 그것은 일회적 행위가 아니고 영속적 삶이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동행하면서 거룩과 의, 사랑과 진실을 행하는 자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없는 자들, 다시 말해 무지와 죄악 속에서 낙을 누리는 자들은 영적으로 잠든 자들, 죽은 자들이다.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깨어 있는 삶으로 그 구원을 증명해야 한다.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타국에 가는 주인은 승천하실 주님 자신을 가리켰다. 주인의 종들은 일차적으로 제자들, 즉 주의 교회의 일꾼들을 가리켰고, 이차적으로 모든 성도들을 의미할 수 있다. 자기 소유를 맡기는 것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일들, 직분들, 직책들을 가리켰을 것이다. 주께서 맡기시는, 하나님의 일, 주님 자신의 일이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영혼을 구원하고 양육하는 말씀의 사역이다(요 6:27, 29). 이것이 교회의 일이다. 이것이 교회가 하는 모든 일들의 중심이어야 한다.
이 일들은 주님 자신의 소유이다. 예를 들어, 주께서 목사들에게 맡기시는 교회와 성도들은 주님 자신의 양들이다. 누가 양들인가? 아무 교회에나 모이는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양은 아니다. 참된 교회라 하더라도 그 속에 모여든 모든 사람들이 다 주의 양은 아니다. 요한복음 10:26, 27,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주께 대한 참된 신앙고백을 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자들이 주의 참된 양들이다.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재능대로'라는 말은 '능력대로'라는 뜻이다. 능력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자신일 것이다. 그가 우리의 구원 받기 전에도 태어날 때부터 각자에게 재능을 주셨고, 우리의 구원받은 후에도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은사를 주셨다. 고린도전서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주신 능력대로 그의 소유를 맡기신다.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들, 직분들, 직책들은 서로 다르다. 로마서 12:3-6,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고린도전서 12:4-6,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디아코니아, 봉사, 사역)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16, 17]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장사는 돈을 쓰는 것이 아니고 돈을 버는 것이듯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일들은 소모성 일이 아니고 생산성 일이다. 주께서 주신 직분들은 모두 다 합력하여 영혼들을 구원하고 영혼들을 양육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그것이 주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고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께서 열매를 기대하시되, 각자에게 맡기신 분량만큼의 열매를 기대하신다. 다섯 달란트에는 다섯 달란트만큼, 두 달란트에는 두 달란트만큼의 열매이다. 다섯 달란트에 백 달란트나, 두 달란트에 열 달란트의 열매를 기대하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분량만큼, 우리가 할 수 있는 분량만큼, 오직 충성되이 일함으로써 얻어질 분량만큼을 기대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충성이다.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장사하지 않았다. 즉 그는 그 한 달란트를 활용하지 않았다. 그는 일하지 않았다. 그는, 물론 주인의 소유를 써버리지도 않았지만, 그것으로 장사하여 이익을 남기지도 않았다. 해석하여 말한다면, 그는 주께로부터 받은 직분에 충성하지 않았고 좋은 결실과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저 그 재능, 그 직분, 그 직책을 묶어 두었고 묵혀 두었다.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주인이 소유를 맡기고 장사하여 이익을 얻기를 기대하였으니, 주인이 돌아오면 재정 결산을 할 것이다. 주인이 오랜 후에 돌아왔다는 것은 주의 재림이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에 있을 것을 암시하신 것 같다. 인간 편에서 볼 때 주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 같으나,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 때 주께서는 주의 종들과 성도들과 결산을 하실 것이다. 무슨 결산인가? 맡기셨던 일들, 주셨던 직분들에 대한 결산이다. 얼마나 좋은 결실을 만들었는지, 몇 명의 영혼들을 구원하고 동료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어떤 봉사 혹은 기여를 했는지 주께서 결산하실 것이다.
[20-23]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다섯 달란트를 맡은 자와 두 달란트를 맡은 자는 또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 보고하였고, 주인은 그들에게 잘 하였다고 칭찬하고, 그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평가하였다. 또 그들에게 '내가 네게 많은 것을 맡기겠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상급이다. 주인이 그들에게 맡길 '많은 것'은 천국 기업의 한 부분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이 관할할 사람들의 수나 통치 영역의 범위를 가리킬지도 모른다. '주인의 즐거움'은 미래의 영광의 천국에서 누릴 즐거움일 것이다. 그것은 영생의 복락이다. 그 즐거움은 다함이 없는 즐거움이고, 즐거워한 후에 허전하고 허탈한 세상적 즐거움이 아니다.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굳은'이라는 말(스클레로스)은 성경 헬라어 사전에 보면 '엄한, 거친, 지독한'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주인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나타낸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는 불평, 불만, 원망의 잘못된 태도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실상 그렇게 엄한 사람, 거칠고 지독한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주인이 종들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바는 지극히 정당하였다. 주인의 소유인 종들이 주인의 소유를 가지고 주인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 충성의 기본적 이유가 있다.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여기에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정상적 두려움이 아니고, 잘못된 두려움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두려워하는] 것은 참 지식의 시작이다(잠 1:7). 하나님께 대한 바른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낳지만, 잘못된 두려움은 불순종을 낳는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은 때때로 그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두려움이나 겁을 가진다.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과 믿음과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공포나 겁을 오히려 제거한다. 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는 주인에 대한 악한 생각과 견해와 판단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그의 인격이 악함을 증거한다. 또한 그는 맡겨진 일을 주인의 요구와 기대대로 부지런히 충성되이 하지 않았다. 그는 게으른 종이었다. 주인에 대한 악한 견해와 불충성은 연대 관계가 있었다.
사상과 행위는 같이 간다. 악한 사상에서 충성된 행위를 기대할 수 없다. 편협한 생각은 편협한 인격을 반영하고, 불평과 비난의 생각은 불평과 비난의 인격의 표현이다. 생각은 그 인격의 반영이요 표현이다. 그러므로 생각의 바른 변화는 삶의 바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자마다 그 앞에서 바른 삶, 그에게 충성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는 바른 견해와 충성된 삶이 있는가?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취리(取利)하는 자들'이 우리의 현실에 누구에게 적용될지 어려워 보이지만, 이야기 속에서의 의미는 분명하다.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둔다는 것은 분명히 손해다. 취리하는 자들에게 맡겼다면 약간의 이익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주께서 맡겨주신 직분과 직책을 묵혀두어서는 안된다. 자신이 못할 경우라면, 누군가가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28, 29]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있는 자는 지식과 믿음이 있는 자요, 그것에 근거하여 충성이 있는 자요, 그 결과 열매와 소득이 있는 자이다. 반면에, 없는 자는 지식과 믿음이 없는 자, 따라서 충성이 없는 자, 그 결과 열매와 소득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은 충성을 요구한다. 본전만 간직하고 있을 수는 없다. 충성이 있는 자이든지, 충성이 없는 자이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있는 자는 더욱 풍족해지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길 날이 온다. 우리는 '있는 자'인가?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무익하다는 말은 무가치하다는 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존귀하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다(마 16:26). 그것은 육신의 목숨이 영생하는 목숨으로 이어질 때 그러하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바른 깨달음과 지식이 없을 때, 그는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가 못되고 오히려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시편 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62:9,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시편 119:119,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을 찌끼같이 버리시니." 이사야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바깥 어두운 데'는 지옥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마태복음 25장의 세 비유들에서 미련한 처녀들에게 혼인잔치의 문이 이미 닫히고 신랑이 그들을 모른다고 한 것과, 한 달란트를 받아 땅 속에 감추어 두었던 자가 그 한 달란트를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과, 염소와 같은 자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주어지는 것은 다 동일한 사실을 보인다고 본다. 그것은 악하고 미련하고 불충성된 자들에게 주어질 지옥 형벌을 가리킨다.
31-46절, 양과 염소의 비유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예수께서는 자신의 재림을 묘사하면서 자신을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그것은 그의 인성의 명칭이다. 비록 그의 신인 양성(神人兩性)은 결합된 후에 결코 분리되지 않으실 것이지만, 그는 신성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인성으로는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표현된다. '자기 영광의 보좌'는 그의 왕의 영광을 보인다. 그는 낮은 인생의 모습, 종의 모습을 취하셨지만, 이제 영광의 왕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는 지금 승천하여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우리는 그가 지금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확실히 계실 것을 알고 믿고 소망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32, 33]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 편에 두리라.
재림의 주(主)요 영광의 왕이신 그는 바로 온 세상의 심판주이시다. 모든 민족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고 그 앞에 집합될 것이다. 이 대심판에는 의인들과 악인들이 구별 없이 서게 된다. 심판은 이 세상에 태어난 적이 있는 자들에게,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세상에서 육신적 생명을 받은 적이 있는 자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주어질 것이다.
심판의 날에 모든 인생들은 크게 두 부류로 분리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을 것이다. 양은 구원받은 의인들을, 염소는 멸망 받을 악인들을 가리킨 것 같다. 양은 온유와 순종을 상징하고 염소는 거침과 불순종을 상징한 것 같다. 과연 의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온유하고 순종하는 자들이지만, 악인들은 거칠고 불순종하는 자들이다.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다시 오실 인자(人子)는 이제 '임금'으로 불리운다. 그는 왕의 영광을 가지고 오시는 것이다. '복받을'이라는 말(blessed)은 '복받은'이라고 번역함이 더 좋을 것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이다. 그들의 복은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복, 영원한 생명의 복이요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는 복이다. 여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하신 뜻이 증거되었다. 인류역사의 복잡다단한 사건들 속에서 한 가지 흘러내려오는 일은 이것, 즉 창세로부터 준비된 천국이었다. 이것이 개인과 온 인류의 궁극적 목표이다. 이것이 의인의 행복의 요점이다. 이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나라에 가치를 둔 자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 깨닫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35, 36]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주께서는 의인들이 영광의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증거로 주님을 향한그들의 행위를 드셨다. 주님을 위해 먹을 것과 마실 것, 거처할 곳과 입을 것을 공급한 행위와, 주께서 병들었거나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본 행위 등이 그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의 고난의 삶을 전제하고 있다. 그는 의식주가 넉넉하신 삶을 살지 않으시고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정처 없는 삶을 사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또 병들거나 옥에 갇히는 분으로 표현된다. 의인들에게는 이런 고난의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음에 틀림 없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섬김의 행위는 그에 대한 참된 믿음의 증거이다. 선한 행위는 구원의 근거나 이유가 되지는 못하나 구원의 산 증거가 된다.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37-40]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의인들은 주님을 직접적으로 공급하고 섬긴 일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금방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이 주의 형제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께 한 것임을 말씀하셨다. '여기'라는 말은 '이'(these)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 내 형제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문맥상 일차적으로 주의 제자들, 곧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파송될 복음의 일꾼들을 가리킬 것이다. 본장의 두 비유에서 자신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깨어 충성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주님은 지금 이 비유에서 열두 제자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주신다. 온 세계의 진실한 성도들은 그들을 영접할 것이다.
주께서는 이전에 열두 제자들을 내어보내시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 . .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 42). 주의 제자들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이 주님께 하는 것이며, 주의 제자들 중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이 내 형제들'은 또한 넓게는 주를 믿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는 그의 새 계명을 미리 교훈하신 것이다. 모든 성도들에게는 주의 이름이 있다. 주를 믿는 소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은 곧 주를 영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돌아보며 도와야 하겠는가? 또 우리의 도움이 영적, 정신적 영역에만 머물지 말고, 어떻게 의식주와 육신 생활, 물질 생활의 영역에까지 확대되어야 하겠는가? 요한일서 3:17, 18,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재림주가 집행하실 마지막 심판은 천국의 영광을 가져올 밝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왼편에 있는 자들, 곧 염소로 비유된 자들이 있다. 그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이다. 인생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죄 때문이다. 죄를 회개하고 죄 씻음을 받지 않는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최종적 형벌이 내려질 것이다.
저주 받은 악인들이 들어갈 궁극적 처소는 지옥이다. 그곳은 '영영한 불'의 장소이다. 이 영영한 불은 마가복음 9장에 자세히 반복적으로 교훈되어 있다. 지옥은 일차적으로 마귀와 그 천사들을 위해 준비된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 범죄하고 회개치 않은 모든 인간들이 저 악한 천사들과 함께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운명은 궁극적으로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천국이요, 다른 하나는 지옥이다. 성경은 이 둘을 인생의 궁극적 두 처소로, 그리고 이 둘 외에 다른 처소가 없음을, 분명히 계시하고 있다.
[42-46]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의인들에게와 같이 악인들에게도, 주께서는 그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하고 하지 않았음을 증거하신다. 말씀의 묵상에서 드러난 대로, 부활 승천하여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 자신께서 지금 고난을 당하시는 것은 아니나, 주의 제자들, 전도자들, 주의 성도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지금 고난 가운데 있다. 주님의 관심은 바로 그들에게 있다. 주의 제자들이 몇 일후면 파송될 것이다. 그들을 영접하고 대접하지 않는 것은 곧 주님을 대접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결정적 결함인가? 그렇다. 주의 제자들에게 대한 그들의 태도가 바로 주님 자신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실한 신자들이라면 주의 제자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그들이 어려울 때 그들을 도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의 제자들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에게 어떻게 영벌이 선언될 수 있겠는가? 주께서 이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신다.
이와 같이, 마태복음 25장의 세 비유는 공통적으로 의인과 악인,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 충성된 자와 불충성된 자, 참 신자와 위선자, 영생을 얻을 자와 영벌(永罰)에 처할 자를 구별하여 보인다.
26장: 잡히심
1-5절, 예수님을 죽이려 의논함
[1, 2]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유월절 저녁식사를 목요일 밤에 가지셨다면, 마태복음 24, 25장의 교훈을 하신 날은 유월절 이틀전 즉 화요일이었을 것이다. 복음서 기록자들은 예수님의 3년여 사역 기간중 마지막 한 주간의 교훈과 사건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마태복음 21장부터, 마가복음 11장부터, 요한복음 12장부터 등).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넘기우실 것이었다. '판다'는 원어(파라디도미)는 '넘긴다'는 뜻이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한 유대인의 중요한 절기이었다. 유월절에 집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의식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음을 예표하였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5:7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유월절 어린양으로 표현하였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아셨고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다. 그는 이미 3차례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언하셨었다(마 16:21; 17:22, 23; 20:18, 19).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은 그의 신적 지식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미리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셨다. 제자들은 주께서 죽기 위해 오셨음을 깨달아야 하고 그 사건이 닥칠 때 당황치 말아야 했다. 또한 그들 자신도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했다.
[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가야바는 그 때의 대제사장이었다(눅 3:2; 요 11:51). 그는 외적으로 유식하고 존귀하게 보이는 지도자이었지만, 실상 메시아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 악한 자이었다. '아문'이라는 말(아울레)은 법정 혹은 관청의 안뜰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라고 주어진 사택이 그들을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을 의논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4, 5]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말하기를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궤계로'라는 원어는 '교묘히, 은밀히, 간교히'라는 뜻이며 '민요'(民謠)는 '소동, 폭동'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27:18에 보면, 저 악한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것은 시기 때문이라고 빌라도는 증거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했고 죽이려 했다. 그들은 자신을 진리보다 더 중시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를 우상으로 삼고 있는 자들과 같았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의 우상이며 교만이다.
그들의 미움은 옛날 가인의 경우와 비슷하였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시기와 미움 때문이었다. 참된 경건과 겸손을 소유하지 않은 자는 누구나 이런 오류에 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와 진리 안에서 우리의 자존심을 꺽지 않는다면 우리도 까닭 없이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죽이는 데까지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히 자신의 자존심을 꺽는 훈련, 곧 자기 부정의 훈련을 해야 한다.
6-13절, 예수께 향유를 부음
[6]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이 사건은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것과 동일한 사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정확한 때는 유월절 6일 전이었다. 장소는 나병환자이었던 시몬의 집이었다. '문둥이 시몬'이라는 표현은 그가 그 당시 나병환자이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가 그때 나병환자이었다면 예수께서는 그를 고쳐주셨을 것이다.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도 '세리 마태'라고 불리운 것처럼, 그는 이전에 나병환자이었으나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을 것이다.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요한복음은 이 여자의 이름이 마리아이었고, 그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고 증거하였다. 그 여자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도, 발에도 부었을 것이다. 이 여자는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소모하였다. 사람이 귀한 옷이나 화장품이나 장신구로 자신을 단장하는 것은 그의 몸이 그것들보다 더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예수님께 부은 그 향유는 매우 값진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향유보다 더 귀하시다. 예수께서는 평소에 값비싼 치장이나 대접을 받지 않으셨으나, 참으로 값비싼 향유를 써야 할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보다 더 적합한 인물이 누구이겠는가?
[8, 9]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제자들은 그 여자의 행위를 허비와 낭비로 생각하였다. 그 향유의 값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3백 데나리온 가량으로 추측되었다. 그것은 노동자의 3백일의 봉급이었다. 이 많은 값의 향유를 예수님께 붓는 것은 허비가 아닌가? 차라리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면 더 낫지 않았겠는가? 요한복음에 보면, 이 반대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실상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갖는 자가 아니었고 돈궤의 돈을 훔쳐내는 도적이었다.
[10-12]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예수님의 판단은 그들과 달랐다. 예수님은 그 여자가 좋은 일을 하였으므로 그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항상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 향유를 붓는 일은 항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의 지상 생애는 이제 며칠만 남았었다. 이제 이 여자는 그 남은 시간에 좋은 일을 한 것이다. 그 여자의 행위가 주님의 장사를 위하여 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 여자가 주의 죽으심을 알고 있었음을 보인다. 며칠 후면 십자가에 죽으실 그리스도를 위해 이 향유를 붓는 것은 합당하였다.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너무 대조적이다. 경건한 외모를 가졌던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리스도를 죽이려 했던 그 때, 이 여자에게는 주께 대한 간절한 헌신의 사랑이 있었다. 일반 노동자들에게 거의 1년 봉급이 될 가치의 향유를 그 여자는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를 위해 즐거이 부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그의 교회와 복음 사역을 위해 무엇을 드렸으며 또 드릴 수 있는가?
14-16절, 가룟 유다의 배신
[14-16] 그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은 삼십을 달아주었다"는 말씀에 '달아주다'는 단어(히스테미)는 옛날 영어성경에는 '약속하다'는 말로 번역하였다. 마가복음 14:11에는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라고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의 뜻은 실제로 준 것이 아니고 약속했다는 뜻일 것 같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신하고 원수들에게 내어준 것은 돈 욕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그는 3년간이나 예수님 곁에서 진리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돈 욕심을 극복치 못했다. 디모데전서 6:9, 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윤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유다가 돈 욕심 때문에 주님을 악인들에게 넘겨준 사실은 예수님께 매우 귀한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위와 얼마나 대조되는 것인지! 유다는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은 30에 주님을 배신했으나, 그 여자는 십자가에 곧 죽으실 주님을 위해 300데나리온 가치의 향유를 부었다. 무지와 지식, 불신앙과 믿음, 배신과 사랑, 돈 욕심과 보화의 선용, 이 얼마나 큰 대조인지! 우리는 돈 욕심을 극복했는가?
17-30절, 유월절 저녁식사
[17] 무교절의 첫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엄격히 말하면, 유월절은 유대 달력으로 1월 14일저녁이요, 무교절은 1월 15일부터 7일간이다(레 23:5, 6). 그러나 유월절과 무교절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 같다.
[18, 19] 가라사대 성 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주께서는 안정된 사역의 거처를 가지고 사역하지 않으셨다. 그의 설교단은 들판이요 산 위이었고, 그의 거처는 이 집, 저 집, 혹은 심지어 들판이나 산 위이었다. 인간적으로 말해, 주께서는 경제적 안정이 없는 사역을 하셨다. 그러나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었다. 주의 사역의 필요를 공급할 자들은 언제나 부족치 않았다. 필요하다면 언제나 모든 진실한 성도의 집이 그의 집회소와 식탁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이제 마지막 유월절 저녁식사 장소와 식탁을 위해 한 가정을 예비하셨다. 오늘날 목사와 전도자들도 그리고 모든 성도들도 경제적 안정을 염려치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공급하심을 믿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충성하자(마 6:33).
주께서는 "내 때가 가까왔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정해진 때가 있다(전도서). 아무 때나 아무 일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작정된 때 작정된 일이 발생한다. 예수님의 사역 기간중 많은 사건들과 일들이 지나갔다. 이제 한 가지 사건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이 여기 '내 때'로 표현된 사건이다. 그것은 곧 그의 십자가 죽음의 사건이다. 그것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곧 인류 구속의 일을 성취하시는 사건이었다. 그 절정적 때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고 인내하면서 오직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20-23]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그 유월절 저녁식사는 결코 즐거운 식탁이 아니었다. 주께서는 그 식탁에서 제자들 중 한 사람이 그를 배신하고 그를 악인들에게 넘길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심히 근심하였다. "주님 도대체 그 자가 누구입니까? 저입니까?" 주께서는 그가 자기와 가까이 앉아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가룟 유다는 제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측근에 속했던 것 같다. 아주 친한 자들 중 하나가 배신자가 될 것이다. 아주 신뢰하던 자들 중 하나가 대적자가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사람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24]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메시아의 죽음은 성경에 기록된 바요 하나님의 작정된 바이다. 그러므로 그 일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를 악인에게 내어주는 배신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행위의 신비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작정하시고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작정 속에 되어지지만, 악을 행하는 그 사람에게는 그 악행에 대한 책임과 형벌이 있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악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를 죽음에 내어주는 악은 큰 악이며, 그런 악을 행하는 자는 차라리 출생치 않았으면 자기에게 더 나았을 뻔하였다. 사람으로 출생하여 구원 받아 가치 있는 일을 위하여 그의 생애가 사용된 복된 자가 있고, 여기 가룟 유다처럼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 자가 있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보람된 삶이든지 후회스런 삶이든지 둘 중에 하나를 살고 있다. 우리는 전자에 속하는가?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이미 예수님을 넘기려고 약속했던 유다, 그가 예수님께 당돌하고 뻔뻔스럽게 '랍비여 저입니까?'라고 질문했다. 다른 제자들은 '주여 저입니까?'라고 말했으나, 유다는 '랍비여[선생이여] 저입니까?'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선생 정도로 여겼음을 보인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 않았다. 요한복음 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랍비여 저입니까?'라는 질문은 예수께서 자기의 정체를 모르실 것이라는 그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 같다. 이것은 마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한 가인의 대답과 같다. 또는 베드로 앞에서 하나님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던 아나니아 부부의 태도와도 같다. 그들은 다 주님이 이런 것까지는 모르실 거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주님의 신적 지식과 인격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불신앙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고 믿는 자들이 되자.
[26, 27]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전통사본의 다수는 '축복하다'는 말이 '사례하다'는 말과 같은 말(유카리스테오)이며, 그 뜻은 '감사하다'이다. 이것은 식사시 감사기도이다. 떡을 떼신 것을 보면, 그 때 사용된 빵은 큰 한 덩어리이었던 것 같다.
여기 '저희' 속에 가룟 유다도 포함되었는가?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성찬식이 먼저 있었고 그 후에 인자를 파는 자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렇다면 유다도 성찬식에 참여한 듯하다. 요한복음 13장에 의하면, 유월절 저녁 식사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자기를 파는 자에 대해 언급하셨고 떡 한 조각을 유다에게 주자 유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 후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고 14-17장의 교훈으로 이어진다. 유다가 성찬식에 참여했든지 안했든지 상관 없다. 천주교회는 성례의 의식 자체가 객관적 효력을 가진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성례의 의식 자체는 효력이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유다가 성찬에 참여하였다면, 그도 그런 류의 사람이었다.
떡을 가리켜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신 것은 상징적 표현이다. 천주교회가 생각하듯이 성찬의 떡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거나(화체설 化體說), 루터교회가 생각하듯이 그 떡과 함께, 혹은 그 안에, 혹은 그 밑에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있는 것(공재설 共在說)이 아니다. 이것은 상징이다. 잔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상징이다.
그러나 상징이라는 것은 그 상징물과 그것이 상징하는 내용과의 영적 일치를 전제하며 내포한다. 즉 그 떡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거나 그리스도의 몸이 물질적으로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떡은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찢으신 몸이다(고전 11:24, 전통사본).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야 하고 믿어야 하고 그것을 중시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십자가 위에서의 피 흘리시는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죄사함을 위하는 것이었다. 여기 '많은 사람들'은 택자들을 가리킨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속죄의 피가 죄를 씻는다. 히브리서 9:22,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는 생명이며, 피 흘림은 죄값의 죽음을 대신하는 속죄이다.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영혼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이는 피가 영혼을 위하여 속죄함이니라]."
그러므로 속죄의 피가 중요하며 속죄의 신앙이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요 6:51)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고 말씀하셨다(요 6:53-55). 이것은 속죄 사역을 가리키며, 그것은 장차 성찬으로 상징되고 확증될 것이었다. 속죄가 없으면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속죄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적 신앙이다.
'언약의 피'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새 언약의 피'라고 되어 있다. 누가복음 22:20과 고린도전서 11:25에도 새 언약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이 신약이다. 이것은 옛 언약 곧 구약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구약은 에덴동산의 하나님의 최초 명령이 아니고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가리킬 것이다. 구약은 율법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율법은 전면(前面)에 '행하라'는 도덕법의 요구와 후면(後面)에 의식법(儀式法)의 은혜로 구성되어 있다. '행하라'는 도덕법의 요구는 마치 에덴 동산의 명령 즉 행위언약이라 부르는 명령과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시내산 언약은 행위언약이 아니다. 왜냐하면 의식법이 있기 때문이다.
구약은 율법의 형식으로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고 정죄하는 역할을 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감취어 있었고 그림자와 모형으로 증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어지는 신약은 복음의 형식으로서 전면에 '믿으라'는 은혜의 선언이 있다. 구약에서 예표되고 예언되었던 하나님의 은혜의 실체인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 구원의 사역이 실제적으로,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은 구약과 대조하여 정죄와 심판보다 의와 구원의 자유를 더 밝히 증거하고 제시하고 제공한다. 여러분은 이 새 언약 속에 들어왔는가? 의와 구원의 자유를 받았는가?
[29, 30]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주께서는 천국의 식사에 대해 암시하신다. 천국은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이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왕과 통치자이시다. 거기에서 우리는 새 것을 마시게 될 것이다. 천국의 포도나무와 포도즙은 이 세상의 현재의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일 것이다. 그것은 새 것, 즉 만물이 새로워진 데서 얻는 새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헌 것을 먹고 마시지만, 그 날에는 새 세계에서 새 것을 먹고 마실 것이다. 천국에서의 식탁과 식탁 교제는 즐겁고 기쁘고 아름다울 것이다.
31-35절, 제자들이 주를 버릴 것을 예언하심
[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 밤에 제자들이 주를 버릴 것이다. 이것은 구약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슥 13:7)의 성취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일 것이다. 제자들은 주를 진실히 믿었고 주를 위하여 살려 했지만, 아직 믿음도 마음도 약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버림을 받으셨다면 주의 제자된 우리가 후배 제자들, 성도들에게 버림을 받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디모데후서에 보면, 대 사도 바울의 노년의 형편도 후배 제자들이 그 곁에 많지 않은 쓸쓸한 것 같다. 그러나 주를 따르는 종들은 지상에서의 그 고통과 그 고독을 견디어 내야만 한다.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이와 같이 주께서는 죽으시기 전부터 자신의 부활에 대해 몇 차례 밝히 언급하셨다. 이제도 부활후 갈릴리에서의 재회(再會)를 약속하신다. 이처럼 그의 부활은 그 자신에 의해 예언된 바이다. 그러므로 그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는 핍박과 순교의 피로 인쳐진 주의 제자들의 진실한 증거들과 증거의 기록들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주님 자신의 말씀의 신실성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은 결국 하나님의 증거를 무시하고 불신임하고 대항하는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33-35]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만은 그렇지 않겠나이다'고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고백했다. 다른 모든 제자들도 그러하였다. 참으로, 이들의 인간적 결심과 고백은 귀한 것임에 틀림 없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입의 고백과 마음의 소원이 필요하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런 개인적, 인격적, 결사적 고백과 결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께서는 칭찬과 격려 대신 그에게 낙심을 줄 말씀을 하셨다.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러나 거기에 진리가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고백과 소원을 가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 신뢰 혹은 자신감뿐이라면 그것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인간적 결심은 매우 무능력하다.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효력이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그리고 특히 죽음의 위협 아래서는 매우 무력하다.
그리스도인의 승리적 힘은 그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오직 '그에게 능력 주시는 자[그리스도--전통사본]'(빌 4:13)에게 있다. 시편 62:11, "하나님의 한 두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신뢰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자.
36-46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심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겟세마네는 감람산의 감람 과수원이라고 한다.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라고 증거하였다(눅 22:39). 그곳은 저들에게 휴식의 동산이요 기도의 동산이었다.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것은 그의 인성(人性)의 증거이었다. 물론 신성으로도 성부와 대화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의 기도의 모습은 그의 인성을 보인다. 이때는 그가 잡히시기 전날이었다. 큰 일을 앞에 놓고 그는 기도하셨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눅 22:41). 그것은 그의 기도가 간절한 기도이었음을 증거한다. 누가복음 22:44에는, 그가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고 증거했다. 그의 기도의 행위는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 우리 앞에 큰 일이 놓였을 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기도이다. 그것도 진지하고 간절한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37, 38]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들 요한과 야고보, 이렇게 세 사람은 예수님의 12제자들중 그의 측근에 있었던 세 제자들이었다. 주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도, 그리고 변화산 위에 올라가실 때에도, 그들을 데리고 가셨다. 그때 주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셨고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실 정도이었다. 주께서 이런 마음의 상태에 있으셨다는 것은 그의 참된 인성을 다시 한 번 더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셨고 우리와 같은 연약성을 경험하셨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함께 깨어 있어줄 것을 부탁하셨다.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얼굴을 땅에 대신 것은 괴로운 심정의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이 잔'은 고난의 쓴 잔, 즉 십자가의 죽음의 잔을 가리킨다. 그의 십자가는 단순히 육신적 고통만이 아니고 영적 대리적 형벌의 고통, 곧 지옥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겟세마네에서의 그의 기도는 눈물과 고통의 기도이었다. 히브리서 5:7에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했다.
실상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아들을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셨다. 그 까닭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이었다. 여기에 십자가의 심오한 의미가 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과 피흘림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고 의롭다 하심을 합법적으로 얻게 되었다.
십자가의 고난의 잔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그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의 말을 맺으셨다. 이것은 순종의 정신으로 올린 기도이었다. 그의 기도는 자기 뜻과 자기 계획과 자기 고집을 관철시키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다. 기도는 순종의 정신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마땅히 성취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하고 선하며 완전하다.
인간적으로 표현하여, 아들 예수께서는 이렇게 아버지께 복종하심으로써 그의 온전함을 증거하셨다. 순종은 의요 생명이요 승리이었다. 로마서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빌립보서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히브리서 5:8, 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도 자기의 뜻을 꺽고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배워야 한다.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주의 기도는 한 시간 동안 행해졌다. 한 시간 동안에 그의 기도의 내용은 단순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기도는 한 시간을 소모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이 한 시간 동안의 기도의 씨름에 제자들이 함께 깨어 마음을 같이 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 시간 잠을 잤다.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주의 이 말씀은 시험에 들지 않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증거한다. 깨어 기도할 때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을 때, 우리는 시험에 빠지게 된다. 제자들이 마음(영, 프뉴마)으로는 깨어 기도하기를 원했지만, 그들의 육신은 연약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 기도하기를 힘쓰지 않으면 우리는 저 제자들과 같이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2-46]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의 기도는 세 번 반복되었다. 한 번이 한 시간씩이었는지는 모르나 처음 기도가 한 시간이었음으로 대략 세 시간의 기도를 하셨을 것 같다. 그의 기도는 오랫 동안 올린 기도이었다.
연장된 그의 기도의 내용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처음 내용의 반복이었다. 주님의 기도는 어떤 점에서 응답 없는 기도이었다. 그러나 그 무응답이 바로 아버지의 응답이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이 십자가의 형틀에 달리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뢸 때 그 소원대로 응답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다. 무응답도 응답인 경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뜻보다 더 뛰어나셔서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비록 우리의 뜻대로는 안되었어도 하나님의 뜻대로는 진행되고 있고 성취되고 있다. 이것이 참된 응답이다.
47-56절, 잡히심
[47-49]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왔다. 검과 몽치는 '칼들과 몽둥이들'이라는 말이다. 입 맞춤으로 선생을 넘기는 유다의 행위는 속임과 위선의 절정이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렇게까지 악한 일을 담대히 할 수 있을까? 그 동기와 이유가 돈 몇 푼에 있었으니, 돈 욕심이 인간의 양심을 이렇게도 마비시키는 것인가? 이것은 결코 유다 한 사람에게만 속한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려면, 우리는 돈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다처럼 실패자가 될 것이다.
세상과 천국은 다르다. 세상은 돈, 욕심, 속임, 배신 그리고 폭력이 지배한다. 세상 사람의 양심이라는 것은 평소에는 있는 듯하지만, 자기에게 해가 되거나 불리하면 언제든지 저버릴 수 있는 양심이다. 모든 사람은 죄악되다. 그러나 천국은 진리, 진실, 사랑 그리고 순종이 지배한다. 두 세계의 지배 원리, 생활 원리가 다르다.
[50-52]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여기에 기독교의 성격이 나타난다. 기독교는 폭력과 물리력을 사용치 않는다. 기독교는 칼로 사람을 정복하거나 다스리지 않는다. 같은 원리로 기독교는 돈이나 사람의 지혜나 조직력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 인간적이고 세상적이다. 기독교의 방법론은 하나님의 복음진리를 말로 전하고, 사랑의 행위로 실천하고, 마침내 희생의 죽음까지도 사양치 않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무력하게 보이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하게 보이는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 실상 사랑은 칼보다 강하다.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營)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영(營)이라는 말(레기온)은 6천명의 로마 군인들의 부대를 가리킨다. 12영은 문자적으론 7만 2천명이다. 그것은 천사들의 충분히 많은 수를 가리킬 것이다. 예수께서 잡히시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이사야 37:36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18만 5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고 기록하였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힘 있는 봉사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동원하시면 예수님을 잡으려는 저들을 당장 다 멸하실 수 있다.
[54-56]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를 잡는 자들을 멸하실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 잡혀 죽으셔야 했기 때문이다. 성경의 성취는 곧 하나님의 뜻의 성취이었다. 여기에 성경의 성격과 중요성이 있다. 성경의 많은 내용은 예언적이다. 그 예언들은 성취되어야 했고 또 성취될 것이다. 구약의 메시아 예언들의 다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예언대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다. 성경대로 희생 제물이 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일이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성경은 여전히 예언적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믿고 성경대로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기를 소망하고 기대한다.
57-68절, 심문을 받으심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이 일에 주동자이었던 것 같다.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공모자이었다. 그들은 이 중대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이 밤, 아니 이 새벽에 이미 모여 있었다. 메시아를 죽이기 위한 새벽집회이었다. 종교적 열심이라는 것도 이렇게 악마적일 수 있다. 바른 지식은 열심보다 앞서야 한다. 지식 있는 열심이 요구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에 일치하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한다.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베드로의 행위는, 비록 방금 전의 그의 고백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매우 용감하였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을 때, 그는 비록 멀찍이라도 예수님을 좇았고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들어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가 멀찍이 예수님을 좇은 것이다. '멀찍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마음으로 주님과 거리감을 가짐을 행위로 나타낸 것 같다. 어디든지 주님과 함께 가겠다던 그의 고백이 지금 어디 있는가? 우리의 삶에 이렇게 '멀찍이' 주를 따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하나님 편에 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짝 가까이서, 바로 곁에서 좇는 자가 되어야 한다.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전통사본에는 '대제사장들과'라는 말 다음에 '장로들과'라는 말이 들어 있다. 거짓 증거는 마귀적이다. 거짓 증거로 의인,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인 의인을 죽이려는 것은 더욱 마귀적이다. 거짓 증거를 찾았다는 것은 오히려 참 증거로는 그를 죽일 죄가 없었음을 증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았다. 이것은 불의한 일이다. 의로운 판단은 증거들과 정당한 논리에 근거한다. 확실한 증거들에서 확실한 결론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와 같이,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그 결론에 그럴듯한 증거들을 찾는 것은 불의한 판단이다. 이미 내려진 그 결론의 정당성은 단지 인간의 타락한 죄성, 곧 악마적 죄성 외의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60, 61]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많은 거짓 증인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증거가 예수님을 사형시킬 그럴 듯한 근거로 채택될 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후에 두 사람의 증거가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고발이었다. 이것은 요한복음 2:21의 말씀대로 예수께서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으나, 유대인들은 46년 동안 지어진 그 당시의 헤롯 성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겉보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이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한 큰 죄목이 되는 듯하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참 뜻을 무시한 문자적 증거는 참 증거가 아니고 오히려 거짓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참 증거가 무시되고 거짓 증거가 판치는 어두운 세상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증거가 거짓으로 매도(罵倒)되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단지 인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참 증거인양 선전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과 교회에서는 참 증거와 거짓 증거가 구별되어야 하고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객관적 사실들에 근거되어야 한다. 참 증거는 하나님께 속하지만, 거짓 증거는 마귀에게 속한다. 거짓말하는 자는 지옥불에 던지우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8, ". . .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22:15, ". . .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62-64]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대제사장의 직접 심문이 시작되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엄숙히 질문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이 공식적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분명한 말로 대답하셨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리고는 시편과 다니엘서에 나타난 메시아 예언의 표현으로 부언(附言)하셨다.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주님의 이 말씀은 그의 신성과 메시아성에 대한 공식적 발언이요 증거이시다. 주의 인격을 존중하는 자마다 그의 증거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 증거를 믿지 않으면서 그를 훌륭한 인격자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만일 주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시라면 그는 사기꾼이나 미치광이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는 진실한 인격이시요 우리의 신적 구주이시다.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인 자기 증거는 참람한 말로 간주되었다. 사실,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면 참람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은 참람한 말이 아니고 참된 말씀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이 말씀 하나로써 사형의 충족한 증거가 되는 것처럼 단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는 것이 어떻게 참람한 말이 되는가?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반증(反證)을 제시했는가? 그는 아무런 반증도 없이 예수님을 정죄했다. 반증 없는 정죄는 결코 바른 판단과 판결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불의한 판단이요 악한 판결이다.
[66]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성경에 여러 차례 증거된 대로, 실상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마태복음 12:14,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후)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요한복음 5:18,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마태복음 26:4, (유월절 이틀 전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안뜰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이려고 의논하되."
그러므로 실상 공회의 재판은 단지 형식에 불과했다. 사형이라는 결론은 이미 나 있었다. 그것은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함께 음모된 결론이었다. 아, 어두운 세대, 무서운 세상! 공의로운 판단이 시행되지 않는 법정! 양심과 이성의 판단을 꺽고 의인에게 기어코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다. 이것이 부패된 인간의 모습이요 부패된 교회의 모습이다. 오 주여,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범사에 바르고 진실한 양심과 판단력을 주시옵소서!
[67, 68]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이것은 주께서 받으실 본격적 수욕의 시작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저 의인께서 거짓되고 악한 사람들에 의해 얼굴에 침 뱉음, 주먹으로 침, 그리고 손바닥으로 때림을 받으셨다. 이 어찌 가능한 일이랴? 그러나 이것이 가능했음은 인간의 큰 죄악 때문이었다.
주께서 옛날에 친히 이런 고난을 당하셨다면, 주의 제자된 우리가 오늘날 이런 류의 고난을 당한다고 이상할 것이 없다. 세상과 타협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 없겠지만, 세상을 악하다 책망하는 자는 오늘도 핍박을 받을 것이다.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누가복음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오히려 모든 사람의 칭찬을 조심하고, 부당한 비난과 핍박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
69-75절,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함
[69, 70]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婢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비자'는 여종이라는 말이다. 이 여종은 예수님을 '갈릴리 사람 예수'라고 불렀다. 갈릴리는 이스라엘 북쪽 지방이다. '갈릴리 사람 예수'라는 말은 북쪽 지방 사람이라는 표현일 것이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이것은 공적, 공개적 부인이었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10:33에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자는 마음 속으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그 믿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71, 72]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다른 한 여종이 사람들에게 베드로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증거하였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나사렛 예수'로 표현되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의 작은 마을이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그러므로 북쪽 작은 시골마을 출신 예수라는 뜻일 것이다. 이 말은 수도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을 낮추어 보며 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가치는 그의 출생지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인간됨, 그의 영적, 신앙적 지식과 도덕적 인품에 좌우된다.
베드로의 실패는 점점 더 깊어졌다.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정도에서, 이번에는 맹세하며 부인하는 데로 나아갔다.
[73, 74]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네 말소리란 어떤 영어번역처럼 그의 갈릴리 액센트를 가리키지 않고 그가 여종의 말에 반응하는 말투, 즉 맹세하며 부정하는 과민적 말투를 가리키는 것 같다. 물론 그의 말씨도 갈릴리 액센트이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의 말투는 확실히 과민적이었다. 그러한 말투의 반응은 오히려 그가 그런 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듯하다.
저주했다는 말씀은 자기를 저주했다는 말, 즉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류의 말을 했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그의 잘못을 더욱 강화시킨다. 그는 연약하고 거짓된 존재라는 것을 더욱더 드러낸다. 베드로는 이와 같이 단순히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고 맹세하여 그리고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하였다. 그때 닭이 곧 울었다. 벌써 이른 새벽이 되었다. 아마 새벽 5시 전후이었을 것이다.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러나 감사하게도 닭의 울음은 단순히 새벽을 알리는 울음이 아니고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울음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적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자기의 결심과 고백의 공허하고 무력(無力)함을 절감했을 것이다. 인간은 약하고 인간의 결심은 보잘 것 없다. 베드로는 심히 통곡했다. 그것은 주께 대한 죄와 실수를 통회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통감한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통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다.
베드로의 생애에 있어서 그런 실수가 또다시 있었을까?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그런 실수와 실패를 막아내는 방법은 조금 터득하였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결심과 각오만으론 선을 행하고 주께 충성할 수 없다. 인간은 무익하고 무능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참된 선과 온전한 충성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고(갈 5:16),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했다(갈 5:22, 23). 우리도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깨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만을 구하자. 그가 돕지 않으시면 우리는 자주 자주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 안에서 우리는 선을 행하며 충성할 수 있다.
27장: 죽으심
1-2절, 빌라도에게 넘겨줌
[1, 2]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유대의 지도자들은 새벽에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악인들은 악을 도모하고 실행하기 위해 밤 늦게도 이른 새벽에도 분주하다. 그러므로 인생의 분주함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분주한가? 악을 위해서인가, 선을 위해서인가? 헛된 것을 위해서인가, 영원한 것을 위해서인가? 질문해 보아야 한다.
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긴 까닭은, 우선 그 당시 그들에게는 죄수를 사형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한복음 18:31,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덧붙여, 그들은 예수님을 죽임에 있어서 백성들의 비난을 감소시키려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을 죽임에 있어서 로마 총독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어느 때나 그러하지만, 타락한 종교는 정치와 결탁하여 악을 행한다. 그것은 세상적 지혜요 인간적 꾀이다.
3-10절, 가룟 유다의 자살
[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유다에게도 양심은 있었다.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양심이 마비되었을 때는 3년간 따르던 주님을 배반할 수 있었지만, 이제 그 양심이 깨어나니 그의 행동을 후회하게 된다. 돈 30양으로 인한 잠시 동안의 기쁨보다 양심의 고통은 더 컸다. 그것이 죄악된 행위의 실상이다. 유다는 그 돈을 쓸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다. 결국 헛수고이었다. 쓰지도 못할 돈 때문에 선생을 팔아넘겼던 것이다. 죄를 짓는 인생은 이처럼 무지하고 어리석은 존재이다.
[4, 5]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는 예수님의 정죄당하심을 '무죄한 피'라고 증거했다. 그는 이 말을 통해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거하였다. 이 배신한 제자까지도 마침내 선생님의 무죄함을 증거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화인맞은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나 후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죄는 더 크다.
유다는 은을 성소(나오스)에 던져넣고 스스로 목매어 자살하였다. 사도행전 1:18에는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고 증거되어 있다. 이 증거는 그의 자살에 대한 보충적 설명일 것이다.
유다가 자살한 것을 보면, 그의 후회는 회개는 아니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죄악된 행위만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사랑과 용서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참으로 회개한 자는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남은 삶을 즐거이 드린다. 그러나 자살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믿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 태도이다. 자살은 그저 자기 행위에 대한 후회일 뿐이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고후 7:10).
[6-10]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定價)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대제사장들은 유다가 던져놓고 간 그 돈을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고 판단했고, 그 돈으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 그것은 마치 불쌍한 나그네들을 위하는 것 같은 위선적 행위이었다. 위선자들은 항상 겉보기의 선행을 한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의와 선과 진실이 없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이 섭리적 사건은 이미 구약의 스가랴 선지자의 글에 예언된 바이었다(슥 11:13). 마태가 스가랴의 글을 예레미야의 예언이라고 증거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주석가 라이트푸트는 유대인 학자 데이빗 김치의 글을 인용하여 예레미야가 선지자들 가운데 첫번째 위치를 가졌고 그래서 이렇게 불리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여하튼 구약의 예언은 이와 같이 놀랍게 성취되었다. 우리는 성경의 초자연적 예언성을 굳게 믿자.
11-26절, 빌라도의 판결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유대인의 왕'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이다. 호세아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함으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에스겔 37:24,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었으므로, 유대인의 왕이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 곧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 메시아라는 자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긍정하셨다.
[12-14]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여러 가지 고소의 말들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것들은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불의하고 부당한 말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자신을 변명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아버지께 모든 것을 의탁했을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총독과는 이해 관계로 결탁되어 있었던 것 같고, 이미 결론은 나와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자신을 변명하려 할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지 않으셨고, 총독은 예수님의 태도를 심히 기이히 여겼다.
[15-17]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바라바는 유명한 죄수이었다고 본문은 증거한다. 마가복음에는 그가 민란을 꾸미고 민란에 살인한 자라고 증거했다. 이런 선동자와 살인자가 예수님과 나란히 석방가능 대상자로 제시되었다. 결국 예수님은 정죄되고 바라바는 놓여나게 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저 죄인 바라바보다도 못한 인간으로 정죄되신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거꾸로 된 사건이었다. 죽어야 할 죄인은 놓여나고 죽지 마셔야 될 주께서 죽음에 내어준 바 되셨다.
그러나 이것이 속죄의 이치인 것이다. 죽어야 마땅했던 우리가 예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도리어 삶을 얻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죽지 마셔야 할 의인이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속하려고 죽으셨고, 죽어야 마땅한 죄인인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원한 삶을 얻은 것이다. 나는 바라바와 같은 죄인이다. 그러나 나는 놓여나고 주께서는 정죄되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이것이 대속의 이치요 은혜이다. 성도는 이 은혜를 평생 잊지 말아야 한다.
[18] 이는 저가 그들의[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자기에게 넘겨준 줄 알고 있었다. 시기는 무서운 죄이다. 시기는 미움에서 나오고 그것은 곧 살인과 같은 죄인 것이다. 요한일서 3:14, 15,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빌라도가 유대 지도자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자기에게 넘겨준 줄 알았다는 말은 또한 그가 예수께서 아무 죄가 없으셨음을 알았다는 말이 된다. 빌라도는 예수께서 죄 없이 넘겨지신 것을 알았다. 누가복음에는 이 사실이 좀더 자세히 증거되어 있다.
누가복음 23: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23:14, 15,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23: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19]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총독의 아내도 남편에게 예수님의 무죄함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저 옳은 사람'이라고 불렀고, 지난 밤 꿈에 예수님으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고 증거하였다. 악한 자는 그가 저지른 혹은 저지를 악한 일 때문에 편한 잠을 잘 수 없다. 빌라도의 아내의 꿈은 그의 불안안 생각과 마음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빌라도 자신도, 그의 아내도, 예수님이 무죄하였음을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함을 알면서도 비겁한 판결, 불의한 판결을 내렸다. 그는 로마의 가이사를 대신하여 공의로운 판결을 내려야 할 그의 직분과 권세를 그릇되이 사용하였다. 그래서 의인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하였다.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님을 멸하자 하게 하였다. 권한다는 말은 설득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백성을 선동한 셈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잘잘못에 대해 판별하고 판단하려 하지 않았고, 여하튼 그를 죽이려고 수를 썼던 것이다. 백성의 지도자로서 그들은 백성을 통제할 수 있는 권세자의 위치에 있었고, 백성은 그들의 실권을 고려하고 행동해야만 했다. 백성의 이 이해관계의 약점을 이용하여 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무죄함에 대한 백성의 판단력을 흐려놓았고 그를 죽이자고 설득하고 선동하였다. 이것은 심히 악한 행동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른 판단력과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다.
[21, 22]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는 그리스도와 바라바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무리들에게 물었다. 무리들은 바라바를 원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권유에 설득되었고, 그들의 눈과 판단력은 어두워져 있었다. 빌라도는 또 물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이것은 재판관으로서 할 수 없는 무책임한 물음이었다. 객관적 사실들과 증거들을 종합하여 바르게 판단함으로 시비를 가려야 할 자가 무리들의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다. 무리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권유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대답하였다.
[23]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는 다시 물었다.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정당한 죄목을 제시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행한 악한 일이 있었다면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제시해야 할 것이었지만 그런 제시는 없었다. 아니, 그런 악이 그에게 없었으니 그런 제시도 있을 수 없었다. 그 대신,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다고 소리를 질렀을 뿐이다.
[24]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빌라도의 이 미지근하고 무책임한 심문은 아무 효력이 없었다. 도리어 민란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이것은 유대 지도자들의 계산과 작전이었을 것이다. 무리의 외침이 법이었다. 이렇게 무법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옳고 그름을 성실히 판단함이 없이 사람을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가? 이것이 과격데모와 폭동의 문제점이다. 그것들은 이성적 판단을 용납지 않는다. 거기서는 의와 불의가 분별될 수 없다. 오직 힘이 법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과격데모와 폭동을 반대한다. 그런 것은 사회를 개선시키기보다 혼란에 빠뜨리며 더 악화시킬 뿐이다.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말했다. 이것은 책임회피의 악을 가중시킨다. 예수님을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었던 그이었다(요 19:10). 판결은 그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손을 씻는다고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의 내용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무리의 대답은 무지하였다. 그 피값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대답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값, 거기에 상응하는 형벌을 그들이 받을 수 있겠는가? 과연 그들의 무지한 요청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해 약간의 보응을 하셨다. 그것이 역사상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사건이었다. 회개치 않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다. 그것은 지옥의 영원한 형벌이다. 그러나 회개해도 죄는 때때로 훈련의 과정을 가져온다. 그 훈련의 과정이 비록 정확한 죄값은 아닐지라도 그것은 죄 때문에 주시는 과정이다. 그것은 때때로 쓰리고 아픈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최상의 길은 죄를 안짓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범하였을 때는 즉시 그리고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26]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의 판결은 무책임하고 불공정한 판결이었다. 그의 판결은 기회주의적이고 여론적이었다. 재판관이 어떤 사건을 판결할 때 여론을 무시하지 말고 참고해야 하겠지만, 여론에 이끌려 판결해서는 안된다. 판결은 오직 진리대로 되어야 한다. 객관적 사실들과 증거들에 의하여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떳떳한 판결이 된다. 비록 자기의 직위가 위태하여지는 경우라 할지라도, 바른 판결을 내리는 자가 의로운 재판관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없었음을 알았다. 또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어느 정도 노력했다. 그러나 무리들의 폭동적 요구에 눌려 예수님을 죽는데 내어주고 말았다. 그는 그의 이성적 판단에 반대되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그의 양심에 반대되는 판결을 내렸다. 그의 마음은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엉터리 재판관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런 빌라도의 판결로 정죄되셨다.
27-31절,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하심
[27-31]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 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그에게 입혀진 홍포는 아마 로마의 고급 장교들이 입는 붉은 옷이었을 것이다. 또 그의 머리에는 왕이 쓰는 금면류관 대신 가시 면류관이 쓰여졌다. 그의 손에는 왕의 금홀 대신 갈대를 쥐어졌다. 군인들은 그 앞에서 무릎을 굻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그를 희롱하였다. 예수님은 이렇게 한 정신이상적 인물처럼 간주되며 놀림을 받으셨다.
의로우신 주께서 고난을 당하셨다.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다. 세상은 악하므로 의인을 의인으로 존경하지 않고 도리어 비난하고 대적하고 핍박한다. 마태복음 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우리는 진리를 대적하는 자리에 서지 말고, 진리 편에서 고난을 받는 자리에 서자. 위선적 종교인이나 무지한 교인이 되지 말고, 진리의 복음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되자. 디모데후서 1: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32-44절, 십자가에 달리심
[32-34]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요한복음 19:17에 보면, 예수께서 친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나오셨다. 십자가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시몬을 억지로 같이 가게하여 십자가를 함께 지웠을 것이다. 해골의 곳이라는 뜻의 골고다라는 이 곳은 사형수들의 해골들이 있었기 때문에든지, 아니면 언덕의 모양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웠을 것이다.
쓸개 탄 신포도주를 드렸으나 예수께서는 맛보고 마시지 않으셨다. 마가복음 15:23에는 '몰약 탄 포도주'라고 증거했다. 이 신포도주는 마취제의 역할을 하여 사형수로 하여금 고통을 덜 느끼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미 십자가의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하셨고 그것을 감소시킬 생각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 포도주를 마시기를 거절하셨을 것이다.
[35-38]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옷을 제비 뽑아 나눈 것은 구약에 예언된대로이었다. 시편 22:17, 18, ". . .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그의 십자가에 달리심은 인간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십자가 꼭대기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가 붙여졌다. 요한복음에는 그 죄패의 말이 3개 국어로 기록되었다고 증거했다. 실상, 이 죄패는 예수님의 신분을 바르게 증거한 명패이었다. 그의 좌우에는 강도 둘이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다. 이사야 53:12, "(이는 그가 . . . )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39-44]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이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그는 십자가 위에서까지도 모욕과 희롱을 당하셨다. 지나가는 자들이 그를 모욕하였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그를 조롱하였고, 심지어 그와 함께 좌우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그를 욕하였다. 물론 이 마지막 사람들은, 누가복음의 증거에 의하면, 그 중 한 사람은 회개하였다. 이러한 조롱과 모욕은 구약의 예언대로이었다. 시편 22:7, 8,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저들은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말했었다. 정말인가? 주께서 내려오시기만 하면 회개하고 믿을 것인가? 아니다. 이것은 말뿐이다. 그들은 내려와도 믿지 않을 자들이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부족해서 그를 안믿었던가? 아니다. 그들은 믿으려는 마음이 없어서 안믿었다. 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미워하고 어두움을 사랑한다. 요한복음 3:20, 21,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45-56절,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
[45, 46]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치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죽음을 보지 아니하시려는 것같이 캄캄함이 임하게 하셨다. 참담한 저주의 모습, 제자에 의해 팔리움을 받고, 제자들의 버림을 받고, 죽어야 할 죄인들의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고, 육체의 피와 물까지도 다 흘려야 하는 처절한 고통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이요 모습이지만, 사랑과 긍휼과 자비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자기 아들에게 지우셨다.
생각해 보자. 인간의 죄가 얼마나 하나님의 큰 진노를 사고 있는가를! 인간의 죄의 용서가 얼마나 큰 댓가를 요구하는가를! 반면에, 택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곧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이것들을 바로 안다면 우리가 다시는 죄 가운데 있지 못할 것이고, 이것들을 바로 안다면 우리가 이제는 십자가의 은혜의 영광을 자랑할 것이고, 이것들을 바로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할 것이다.
[47-49]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사람들은 철저하게 악해서 끝까지 긍휼과 자비보다는 조롱과 멸시, 놀림의 모습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인생의 모습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모습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50, 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예수님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은 인생에게 살 길을 열어놓으셨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가지고 일년에 한 번씩밖에 들어갈 수 없는 지성소의 휘장이 갈라졌다. 지성소는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요 또 대제사장이 잘못하면 직사(直死)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곳 입구의 휘장이 갈라지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히브리서 10:19, 20,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옛날 같으면 이방인으로 감히 성전에도 못들어오고 저 뜰 밖에 있어야 할 이방인인 우리,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영원한 기업과 상관 없는 우리가 성전 안에 들어갈 특권을 받았다. 죄로 인하여 철저히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성전뜰이 아닌 성전 안에, 그것도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에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짐승의 피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우리가 한 나라의 대통령만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어도 특권이라고 말하는데, 우주를 지으시고 다시리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니, 이 은혜와 사랑이 크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철저하게 버림을 당했으나 그를 통해 받는 성도의 특권은 감당할 수 없게 크다. 이 사실을 깨닫고 항상 감사하는 자가 되자.
[52, 53]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앞에 증거한 대로, 하늘이 어두워졌었다. 하늘도 슬퍼하는 듯하였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부당성에 항거하여 시위하는 듯하였었다. 지난 절에는 땅과 바위들이 증거하였다. 이제는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이것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無罪性)과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특히 성도들의 부활은 최종적 부활의 예시(豫示)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의미를 증거한다. 그의 사역은 요한복음 6:39, 40에서 증거하신 대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그는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제 이 최종적 부활은 성도들의 이 부활 사건으로 암시되었다.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본절은 외인들의 증거이다. 로마의 군인들, 백부장과 예수님을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며 예수께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증거하였다. 위선적 유대 지도자들과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인 로마 총독 빌라도와 돈에 눈이 어두웠던 제자 가룟유다와 무지한 무리들은 합작하여 예수님을 죽였다. 그러나 하늘이, 땅과 바위가, 자던 성도들의 몸이, 로마의 백부장과 군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과 신성을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의로우신 주께서 죄인들과 악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속죄의 작정과 섭리이었다. 그것이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55, 56]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여자들이었다. 그들의 수는 많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자들이었다(눅 8:1-3). 그들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남자 제자들은 다 도망하였다. 아마 자기들도 혹시 잡혀 죽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자들은 멀리서지마는 주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경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컸다. 비록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질서에 따라 가정에서 남편들을 돕는 자이며 따라서 교회에서도 남자들을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지만(고전 14:34-37; 딤전 2:11- 14),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함께 참여하며 협력하는 데에는 큰 역할을 하였다(롬 16:1, 3, 6). 주님을 믿고 따르며 주님의 멍에를 짊어지는 데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못할 이유가 없고 또 못하지도 않았다. 여자들은 일차적으로 가정적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남자 사역자들과 더불어 얼마든지 하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협력하는 자가 될 수 있다.
57-61절, 무덤에 장사되심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이 영적으로 어두운 상황에, 아무도 예수님을 동정하거나 도우려 하지 않는 것 같은 이 때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예비하셨고 그의 마음을 감동하셨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는 아리마대 요셉이었다. 그는 부자이었고, 다른 복음서에 보면 공회원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이었다.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 곧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야곱의 자손들의 기근에 대비하여 요셉을 예비하셨고, 애굽에서 노예와 같이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모세를 예비하셨다. 그는 신약교회를 위해 바울을 예비하셨다. 아무런 도움이 없어 보일 때, 그는 그의 일을 예비하시고 도우신다. 그리고 그의 예비하심은 주밀하고 완전하다.
[58-61]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그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하여 받았다. 그는 정한 세마포로 그 시체를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무덤에 넣어두었다. 예수님은 무덤에, 돌무덤에 장사되셨다. 그는 부자의 무덤에 묻히셨다. 이로써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이사야 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고린도전서 15:3, 4,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무덤은 죽음의 기념물이다. 죄인들이 죄의 값으로 죽어 무덤에 들어간다. 무덤은 죄인의 육신의 감옥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거기에까지 내려가셨다. 그는 죄가 없으셨으므로 무덤에 내려가는 것이 그에게는 전혀 합당치 않았으나 죄인과 같이 거기에 내려가셨다. 그것은 순전히 우리를 대신하여 내려가셨고 그렇게 낮아지신 것이었다.
예수님의 장례는 이렇게 정성껏 이루어졌다. 성도의 장례식은 너무 사치스럽게 이루어져서도 안되지만, 너무 소홀히 여겨서도 안된다고 본다. 장례식은 정성껏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아리마대 요셉은 주님을 위해 이처럼 자기 새무덤을 제공하였다. 이것은 귀한 봉사이었다. 누가 자기의 새 것을 하나님을 위해, 주의 복음을 위해 드리겠는가? 당신은 그렇게 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그렇게 할 수 있다.
62-66절, 무덤이 돌로 인봉됨
[62, 63]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예비일 다음날은 안식일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저 유혹하던 자'라고 불리우셨다. 그가 충성된 증거자이셨지,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이셨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위선자들에게 그런 평가를 받으셨다. 바울 사도도 자신이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다"고 고백하였다(고후 6:8). 오늘날도 주 앞에 충성하는 자들이 그런 취급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자. 또 우리가 그런 취급을 당할 때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말자.
저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예수께서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물론 저들은 예수님의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예수께서 그 말을 했다는 것은 믿었다. 그들은 적어도 오늘 자유주의자들보다는 믿음이 더 있는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오늘 자유주의자들은 예수께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그 말은 제자들이 후에 삽입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저 유대 지도자들의 말은 예수님의 자기 예언을 확증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에 대하여 미리 예언해 두셨다. 그의 부활은 그 자신에 의해 예언된 바이었다.
[64]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상상치 못했다. 그들이 상상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생의 시체를 도적질한 후 그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거짓된 자들의 마음에는 거짓된 일만 상상되는 것 같다. 예수님의 시체가 도적질 당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질 것이라고 그들은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무덤을 적어도 사흘까지 굳게 지켜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고 그것을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작전은 치밀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인간의 치밀한 작전을 무(無)로 돌리신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 주권적 손길만을 의뢰해야 한다.
[65, 66]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그들은 빌라도의 허락을 얻어 자기들의 파숫군을 사용하여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켰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의 시체 도적질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주의 부활을 더욱 힘 있게 증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실제로 아들을 부활시키지 않으셨다면, 부활에 대한 거짓된 증거조차도 만들기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 악인들의 치밀한 계획을 무효화시키시고, 인봉된 무덤문의 돌과 파숫군들을 무력화시키셨다. 세상에서 때때로 악이 이기는 것 같으나, 승리는 하나님께 있다. 어두운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듯이, 악의 세력이 거세고 모든 선을 압도하는 것같이 보이면 보일수록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매우 가까움을 알아두어야 한다. 이사야 25:4, "주는 폭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충돌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보장(힘, 방어물)이시며." 악인이 승리했다고 개가를 부를 때 그것은 실패의 외침에 불과하며, 참 승리는 오히려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십자가의 고난 뒤에 따른 부활의 승리이다.
28장: 부활하심
1-7절, 천사들이 여자들에게 증거함
천사들은 여자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증거하였고, 여자들은 그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하였다. 이 증거를 요한복음은 생략하였으나 마태와 마가와 누가 복음은 공통적으로 증거하였다.
[1]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안식후 첫날(미안 삽바톤)이 되려는 미명(未明)에"라는 말은 정확히 번역하면 "주간의 첫날 새벽에"이다. 이제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의 첫날 새벽, 동이 터오는 시간이 되었다. 마가복음 16:2, "매우 일찌기 해돋은 때에." 그 시간을 대략 새벽 6시로 본다면, 이때는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신 금요일밤(아마 6시경)부터 토요일 하루를 지나 일요일 새벽까지 그러니까 정확히는 만 하루반 그리고 대략적으로는 제3일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의 날과 때가 분명히 증거되었다.
무덤을 보려고 왔던 여자들의 이름 두 명이 언급된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이다. 마가복음 16:1에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등 3명의 이름이 언급된다. 누가복음 24:10에는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고 증거했다. 천사들의 증거와 빈 무덤의 확인은 한 명이 증거한 불확실한 어떤 것이 아니고, 두 명 이상의 여러 여자들이 증거한 확실한 사건이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이 여자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향품을 바르기 위해 왔다. 누가복음 23:55, 56,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누가복음 24:1, "안식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이것은 예수님을 향한 여자들의 거룩한 참사랑과 정성이었다. 그들은 두려움과 무서움을 극복하고 인간적으로 불쌍한 선생님의 시체에 향품과 향유를 발라 아마도 썩는 것과 냄새를 막으려 했던 것 같다. 비록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는 지식과 믿음이 없는 것 같지만, 어느 상황에서나 성도에겐 최선의 믿음과 사랑과 충성이 필요하다.
[2-4]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그 새벽에 그 무덤에서 일어난 일들이 서술된다. 첫째, 큰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현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든지 필요하다면 이런 현상을 사용하실 것이다. 둘째, 주의 천사 혹은 천사들이 하늘로서 내려왔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날 두 명의 천사들이 그 무덤에 있었다고 증거한다. 천사는 하나님의 수종자로서 하나님의 특별섭리의 일들에 동원된다. 세째, 그 천사는 무덤문으로부터 돌을 굴려내었다. 천사는 사람 못지 않게, 아니 사람보다 더 힘이 강하다. 넷째, 그 천사가 그 돌 위에 앉아 있었다. 그 천사의 모습 혹은 얼굴(이데아)은 번개 같았고 그 옷은 눈같이 희었다. 번개 같은 모습은 그의 민첩함을, 눈 같은 옷은 그의 성결함을 보일 것이다. 하나님의 봉사자들은 민첩하고 성결해야 한다.
다섯째, 수직하던 병사들은 무서워 떨었다. 하나님이 일어나 천지를 진동시키실 때에 그 앞에서 떨지 않을 자가 없다. 여섯째, 그 병사들은 죽은 자같이 되었다. 옛날 다니엘이 그러했듯이(단 10:8),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의 영광만 보아도 사람은 떨며 죽은 자같이 된다. 이로 보건대, 수직하던 병사들은 그 모든 광경을 보았음에 틀림 없다. 여자들도 무덤돌에 앉은 천사를 보았을지 모르나, 만일 그러했다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그 사실을 생략한 것일 것이다.
[5-7]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여기에 천사의 전한 말이 나온다. 이것은 무덤 속에서 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들에 예수님의 부활의 과정에 대한 자세한 진술은 없다. 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스스로 일어나셨는지 아니면 천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도왔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예수님의 부활은 여자들이 무덤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무덤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와 같이 부활의 이치가 신비롭고 궁금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과정이 아니고 그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이다. 주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 무덤에서, 천사는 여자들에게 무서워말라고 안심시키면서 세 가지의 내용을 말하였다. 첫째,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 둘째, 와서 주께서[전통본문] 누우셨던 곳을 보라. 즉 빈 무덤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여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이것이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공통적으로 증거한 첫번째 부활증거이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근거로서 빈 무덤의 사실을 제시한 것이다. 세째,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 이 소식이 그들에게 예수님께 대한 확신을 주고, 슬픔에 찬 그들에게 기쁨과 위로와 힘을 줄 것이다.
이 세 가지 내용은 다시 요약하면 부활사실의 선포, 부활사실의 근거 제시(빈 무덤), 부활사실 전파의 사명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의 부활사실에 대한 선포가 전해져 있고, 처음 목격자들의 증언들, 즉 복음서들과 신약성경의 나머지 몇 부분들(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15장 등)이 있다. 우리는 이 증거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사실을 확인하고, 그럼으로써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우리의 죄를 십자가 위에서 속량하신 분이시요,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부활로 친히 증거하신 자이심을 만방에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8-10절, 예수께서 여자들에게 나타나심
[8, 9]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하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예수께서 길에서 여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증거이다. 그 새벽 무덤에서 천사의 말을 들은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 뒤섞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로 빨리 달려가고 있었다. 전통본문에는 9절 초두에 "그런데 그들이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려고 가고 있었을 때, 보라 예수께서 . . ."라고 되어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문안하셨다. '평안하뇨?'라는 말(카이레테)은 일반적인 문안의 말이다. 우리 말에 '안녕하세요?'라는 말에 해당한다.
여자들은 나아가 그의 발을 붙잡고 그에게 경배하였다. '경배하다'는 말은 '절하다,' '경배하다'는 단어이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인간 이상의 존재 즉 신적 존재로 섬겼음을 보인다. 인간 선생님에게는 머리를 숙여 인사는 하지만, 엎드려 절하지는 않는다. 요한계시록 22:8, 9,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아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10]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 여기에 예수님의 인성(人性)이 나타나 있다. 주께서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두 본질을 가지고 계셨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셨다. 그의 인성에 있어서 그는 우리의 형제가 되신다. 주의 이 말씀은 또한 그의 겸손을 나타낸다. 어떻게 감히 우리가 그의 형제가 될 수 있는가? 그는 우리의 주님, 하나님, 우리의 경배와 순종의 대상이 아니신가? 그러나 그는 즐거이 우리의 형제로, 심지어 우리의 친구로 자신을 낮추셨다.
모든 진실한 제자들은 그의 이 겸손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우리는 형제들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되고 겸손히 서로 복종하고 서로 섬기는 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24에서 말씀하기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썼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자신을 보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왜 갈릴리로 가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유다 지방 예루살렘에서도 주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다른 복음서들은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 땅은 부활하신 주께서 나타나시기에 적합지 않았던 것 같다. 주께서는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었고, 가르치셨던 그 곳 바닷가, 그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할 그 곳에서 제자들과 다시 얼마 동안 교제의 시간을 가지시기를 원하셨다.
사도행전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이 40일간의 가르침은 주로 갈릴리에서 행해지지 않았나 추측된다. 거기서 제자들은 낙심과 슬픔을 떨쳐버리게 될 것이고, 부활의 주님을 확신하게 될 것이고, 부활의 증인으로서 재무장되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주께로부터 전도의 대사명을 받게 될 것이었다.
11-15절, 군병들이 거짓 소문을 퍼뜨림
[11] 여자들이 갈 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파숫군들은 그 날 새벽에 되어진 일들, 즉 지진, 무덤돌이 굴려진 것, 천사의 나타남,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인 무덤의 비었음을 목격한 자들이었다. 그들의 보고를 통해 대제사장들에게도 그 사실들이 전달되었다.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여기에서 다시 유대 지도자들의 강퍅한 마음이 드러난다. 그들은 사실을 확인하여 믿으려는 마음이 도무지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전날에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죽이려만 하였고, 또 이제는 어떻게 하든지 그 새벽의 기이한 사건들을 은폐하려고만 하였다. 악한 자들은 악한 것을 좋아한다. 죄인에게서 진실한 양심의 일깨움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또 한가지는 악과 돈은 항상 결탁된다는 사실이다. 돈이면 선생을 팔기도 하고 돈이면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 보도하기도 한다. 이것이 세상이다. 이 경우는 상황이 중대하므로 돈이 많이 요구되었다. 이 긴급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그들은 군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어 그 입을 막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13]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이 거짓말은 이성적으로 타당성이 없는 말이다. 제자들이 무장특공대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파숫군들은 무장된 군인들이고 제자들은 평범한 시민들이 아니었는가? 더구나, 그들이 잠 잘 때 도적질하여 갔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는가? 이것은 마치 어떤 유치부 아이가 '선생님 저 아이가 눈 안감았데요'라고 일러주는 것과 같다. 또한, 설사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하여 갔다고 하면, 저 유대 지도자들이 그것 하나쯤 찾아내어 반증할 힘이 없었겠는가?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선생의 시체나 감추어놓고 부활을 외치며 기뻐하고 순교하는 미치광이들이 되었던가? 그것이 기독교의 기원이었는가? 이런 생각들은 부활의 반증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부활의 사실과 증거를 후원한다.
[14, 15]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총독과 유대 지도자들은 결국 한통속이다. 진리를 위한 자들이 아니고 세상의 썩어질 것만을 아는 속물들이다. 돈과 명예와 땅의 행락을 위하는 것이면 진실이나 거짓을 상관치 않는 자들이다. 이것이 죄인의 실상이다. 죄인들은 결국 한통속이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 진실과 양심을 거역하는 데는 한패인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거짓말들이 있다. 에덴 동산에서 사탄이 '네가 선악과를 따먹어도 결코 죽지 않으리라. 오히려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와에게 말했던 거짓말로부터 시작하여 인류 역사는 거짓말들로 가득한 역사이다. 오늘 세상에도 그러하다. 회개치 않는 악인들은 거짓으로 남을 속이며 자신도 속는다. 거짓말을 진리로 믿고 진리를 거짓말로 배척한다. 참된 지식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누가 인간의 사상세계에서 모든 거짓을 추방하고 진리만을 건립할 수 있겠는가? 최종심판의 때까지는 진리와 거짓이 뒤섞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한다. 또 진리 안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요한 사도는 요한이서 4절에서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고 말씀했고, 요한삼서 3, 4절에서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고 말씀했다. 우리 모두는 오직 진리를 소유하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6-20절, 전도의 사명을 주심
[16, 17]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열 한 제자들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산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 그에게 경배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아직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의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곧 확신에 이르렀을 것이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의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권세 있게, 권위 있게 하셨다. 물론 그 권세는 아들의 신성으로서의 권세가 아닐 것이다. 그 신적 권세는 그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버지께 받은 권세란 그의 인성으로서의, 혹은 그의 신인 양성(神人兩性)으로서의 권세일 것이다. 사람이 되신 예수께서는 신성(神性)의 권세와 권위로 옷입으셨던 것이다. 참 사람이신 그는 이제 신적 존귀와 영광을 받으신다. 사람이 되신 그는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되신다.
빌립보서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요한계시록 5:12, 13,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친구와 형제로 여기실지라도(마 28:10; 요 15:14, 15), 우리는 그를 두려움으로 섬기며 높이며 경배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 그것은 영적 권세를 포함한다. 그것은 공중에 권세 잡은 마귀와 악령들을 제압하는 권세이다. 그것은 구원의 권세이다. 예수님께는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으시다. 그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죄책을 제거하시며, 우리로 우리 속의 죄성을 비록 조금씩이지만 극복케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성화(聖化)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의 권세는 또한 육신적, 물질적 권세를 포함한다. 첫 사람 아담은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들을 다스릴 권세를 받았으나(창 1:26, 28) 범죄함으로 그 권세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제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만물의 왕권, 통치권을 받으신 것이다. 이 권세는 미래에 신천신지(新天新地)에서 확실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제 온 세상의 유일한 권세자, 유독(惟獨)한 권위자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계복음화의 대사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가장 큰 두려움을 가지고 받아져야 하고 순종되어져야 한다.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요 과제이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너희는. 이 명령은 일차적으로 열 한 제자들, 즉 사도들에게 주신 것이다. 디도서 1:3, "자기 때에 자기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이 사역 혹은 사명은 사도들에 이어서 주께서 교회에 세우시는 전임(專任)사역자들, 즉 목사나 선교사나 전도사들에게 적용된다. 물론, 모든 성도들 혹은 평신도들은, 비록 그들이 다 전도를 위해 파송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 전도의 대 사명을 위해 생각과 정성과 힘을 모두어야 한다. 전도 혹은 세계복음화는 주께서 신약교회에 주신 최대의 사명(mission)이다.
가서. 전도는 교회에 오는 사람만 돌보는 것이 아니고 가야 한다. 오는 사람도 가르치지만, 가기도 해야 한다.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누가복음 10:1, "이 후에 주께서 달리 70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모든 족속으로. 전도의 대상은 모든 족속이다. 자기 동네,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온 세계 사람들에게이다. 즉 주의 명령은 세계복음화의 명령이다. 세계복음화는 세계가 다 복음에로 돌아온다는 뜻이 아니고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한다는 뜻이다. 오늘도 그것이 필요한가? 그렇다. 겨우 백년 전에 복음이 한국에 들어왔다. 아직도 세상에는 복음을 받지 못한 민족들, 나라들이 있다고 한다. 세계복음화의 과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국내전도자 뿐만 아니라, 해외전도자 혹은 흔히 말하는 선교사가 필요하다. 이 일을 위해 조직적 선교연구소가 필요하고 선교사 훈련원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든지 교회는 이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제자를 삼아. '제자를 삼는다'는 말(마데튜오)은 옛날 영어번역에는 '가르치다'로 번역하였다. '제자를 삼는다'는 말은 누구의 제자를 삼는다는 말인지 불분명하므로 그렇게 번역한 것 같다. 제자란 누구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행동을 본받는 자를 가리킨다. 제자를 삼으라는 주의 명령은 누구의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인가? 가르치는 자들의 제자인가? 가르치는 자는 선생이 되고 배우는 자는 제자가 되는가? 어떤 의미에선 그렇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하면 우리의 선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그러므로 나의 제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것이다.
마태복음 23:8-10,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시요--전통사본]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고린도전서 3:5-7,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세례는 죄씻음의 표시요 하나님과의 연합의 표시이다. '이름으로'라는 말은 '이름 안으로(에이스)'라는 뜻인데, 이것은 영적 연합을 가리킨다고 본다. 여기에서 영적 연합이란 본질적 연합 혹은 실체적(實體的) 합일(合一)을 의미하지 않고 정신적 그러나 생명적 연합을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은 영적 죽음을 가져왔다. 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에베소서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성삼위의 이름 안으로 연합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선택된 백성의 수에 참여함을 의미하며, 아들의 구속사역, 중보사역의 혜택을 받음을 의미하며, 성령의 인치심과 내주(內住)하심 그리고 성령 안에 거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구원의 복이다. 이 복은 죄씻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며, 이제 믿음으로 받는 세례는 그 구원의 복, 즉 죄 씻음과 연합을 표시하며 확증한다. 성도가 받는 복이 이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전도(傳道)는 사실 복음 전파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세례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주께서 분부한[명령한] 모든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한다. 전도는 일차적인 것이고, 전도로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많은 가르침이 필요하다.
가르침의 내용은 예수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이 말씀은 사도들을 통하여 전달되었고 해설되었다. 이 말씀은 이제 성경에 다 기록되었다. 오늘날은 이 말씀만이 권위를 가진다. 사도시대 이후에 목사들의 독자적 권위는 없다. 그들은 오직 성경에 충실해야 한다. 여기에 또한 성경해석의 중요성도 나온다. 왜냐하면 성경에 충실하려고 하니까 그렇다. 성경의 메시지는 명백하다. 2중적, 3중적이지 않고 단순하다.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해야 한다.
가르침의 범위는 '모든 것'이다. 육적으로 편식(偏食)이 좋지 않듯이,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모든 말씀을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 교리도, 윤리도 배워야 한다. 교리에 대해서도 모든 교리들, 즉 하나님, 인간, 그리스도, 구원, 교회, 종말에 관한 모든 교리들을 배워야 하고, 윤리에 대해서도 개인, 가정, 교회, 사회의 모든 생활 문제들을 배워야 한다.
덧붙여, 가르침의 목적은 실천이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키는 것, 실천하는 것이 교훈의 목표인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가르치고 배워야 할 내용과 목표이다.
주께서는 이런 명령, 즉 전도, 세례, 교훈의 명령을 주시면서 후원과 위로의 말씀을 첨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의 종들에게 교훈에 있어서나 지혜와 용기에 있어서 지도와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제 이런 지도와 도움을 주께서 보증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모든 가능한 낙심과 좌절을 제거해준다. 이것은 주의 종들이 어떻게 계속 새 힘을 얻게 될 지를 보장해준다. 주님의 이 위로의 말씀은 다른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위로자, 격려자)로 오신 주의 성령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주께서는 사명만 부여하신 것이 아니고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힘도 보장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사명 수행에 충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