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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요한복음 강해

kds7778 2008. 1. 20. 22:14
 

요한복음 강해


내용 목차


1장: 사람이 되신 독생자

2장: 처음 기적

3장: 거듭남

4장: 생수를 주시는 자

5장: 생명의 주님

6장: 생명의 떡

7장: 생수의 강을 주심

8장: 죄에서 자유케 하심

9장: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

10장: 선한 목자

11장: 죽은 자를 살리심

12장: 죽으실 것을 말씀하심

13장: 새 계명을 주심

14장: 성령을 약속하심

15장: 포도나무의 비유

16장: 성령의 사역

17장: 제자들을 위한 기도

18장: 잡히심

19장: 십자가에 못박히심

20장: 부활하심

21장: 세 번째 나타나심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다. 그는 열두 제자들 중 예수님의 측근에 있었던 세 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본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채, 자신을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자주 표현하였다(13:23; 19:26; 20:2; 21:7, 20).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의 제자인 이레니우스(130-200년경)는 말하기를, "이후에 주의 제자, 주의 가슴에 기대어 있던 요한이 아시아의 에베소에 있는 그의 거처에서 친히 하나의 복음서를 내었다"고 했다. 정경에 대한 무라토리 단편(170년경)은 "제자 중 한 사람인 요한이 그의 동료 제자들의 권고로 복음서들 가운데 제4복음서를 기록했다"고 증거한다. 본서는 아마 주후 85-90년경 에베소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은 보충적 성격을 가진 복음서이다. 본서에는 마태와 마가와 누가복음에 있는 내용이 많이 생략되어 있고, 그 대신 거기에 없는 것들이 많이 보충되어 있다. 복음서들 중 본서만 유월절을 3번 언급한다(2:13, 23; 6:4; 11:55). 또 본서만 예수님의 초기 사역을 포함하여, 그가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 지방에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일들에 대해 증거한다.


요한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이었으므로, 요한복음은 목격자적 증거의 내용을 많이 가지고 있다. 저자는 어떤 사건의 발생한 시각을 종종 언급한다(1:39; 4:6, 52; 19:14). 또 그는 베드로가 귀를 짜른 대제사장의 종의 이름을 말고라고 언급한다. 본서에는 '증거한다'는 말이 33번, '증거'라는 말이 14번 사용되었다. 요한복음 21:24에는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는 말씀이 쓰여 있다. 이 모든 점들은 본서의 신빙성을 더하여준다.


다른 복음서들도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본서는 특히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한다. 요한복음 1:1,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8:58,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14:9,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러나 본서에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증거도 명백하다. 4:6,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19:28, "내가 목마르다."


덧붙여, 본서에는 기록의 목적이 제시되어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0, 31). 이것은 본서뿐 아니라, 모든 복음서들의 공통적 목적이며 모든 성경의 일차적인 목적이다(딤후 3:15).




1장: 사람이 되신 독생자


1-5절, 태초부터 계신 말씀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태초부터 계신 말씀'으로 표현하면서 그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그가 만물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또 그가 우리의 구원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증거한다.


[1, 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 2]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그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


본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증거한다. 사람이 되시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으로 표현되신다. '태초'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맨 처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창조의 시작 때를 가리킨다. 시간은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계시니라'는 말은 더 정확히 번역하면 '계셨더라'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시간 세계의 맨 처음에 이미 말씀이 존재하고 계셨다. 물론 태초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만 가능하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씀은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을 보충한다. 시간 세계의 맨 처음에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음을, 즉 하나님께서 태초 이전부터 존재하고 계셨음을 전제한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은 시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 영원하신 분이심을 뜻한다. 이와 같이, 본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더라고 말한다. 말씀이라고 표현된 이 분은 태초 이전부터 존재하고 계셨다. 그는 하나님과 똑같이 시간에 속하지 않는 분이셨다.


그러나 본절은 태초부터 계신 이 말씀이 또한 하나님과 구별되심을 증거한다.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두 번이나 그 말씀과 하나님을 구별하여 말한다. 여기에 두 분의 관계성이 나타난다. 주께서는 후에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창세 전의 관계, 즉 영원적인 관계이며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표현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물론 인격적 관계일 것이다.


그러나 본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태초부터 계신 말씀, 하나님과 구별되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한다. 이것은 말씀으로 표현된 그 분의 신성(神性)을 나타낸다. 물론 그가 인격적이시라는 것은 내포된 사실이다.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되시는 것과 동시에 그 두 분이 본질적으로, 본체적으로 하나이시라는 것을 나타낸다. 세상에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사실은 구약성경 처음부터 신약성경 끝까지 성경 전체에 흐르는 기본적 진리이다. 기독교는 다신론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신비한 사실이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하나님과 아들 간에는 신비하게도 숫자적으로 본질적, 본체적 하나 됨이 있다. 이것이 성부와 성자의 일체의 신비이다. 이것이 더 넓게는 성령과의 관계를 포함한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이시라고 밝히 증거한다. 이사야는 신적 메시야의 탄생을 예언하였었다.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였다.

디도서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말하였다(요일 5:20).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셨다. 그는 태초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분이셨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 즉 하나님과 구별되시지만,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본체적으로 하나이신 분, 즉 참 하나님이셨다.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가 있고 또한 하나님의 신비가 있다. 여기에 모든 인생이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신적 영광이 있는 것이다.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3] 만물은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며, 이미 지음받은 것 가운데 그가 없이 지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


본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천지만물과의 관계를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지만물 창조의 매개자라는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 창조물 중에 그가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도 바울도 골로새서 1:16에서 같은 진리를 증거하였다: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해]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히브리서 1:2도 증거하기를,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했다. 만물 속에는 우리 자신도 포함된다.

 

그를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은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와 관련된 것이라고 본다.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의 기사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 말 성경에는 천지창조의 일에 있어서 '가라사대'라는 말이 10번, '이르시되'라는 말이 1번 하나님께 돌려졌다. 히브리서 11:3은 말하기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만물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천지만물의 창조자이시다.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세상에 있는 것 중에 그가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가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는 사실이다.


[4, 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4, 5] 그 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빛이 어두움 속에 비치어도 어두움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


본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구원과의 관계를 증거한다. 그것은 생명과 빛이라는 두 마디로 표현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 생명은 육적인 생명, 영적인 생명, 영원한 생명을 다 포함할 것이다. 생명은 밝고 기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생일을 축하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슬픔과 우울함이며 거기에는 또한 두려움이 있다. 우리는 죽음을 축하하지는 않는다. 무덤은 쓸쓸하고 적막한 곳이다. 그러나 생명의 봄은 밝고 기쁘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해 "나는 생명이다"라고 증거하셨다(요 11:25; 14:6).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그를 '생명의 말씀'이라고 표현했고(요일 1:1) 또 '영생'이라고 말했다(요일 5:20). 그에게는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죽음의 정복과 영원한 생명이 죄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그 생명은 또한 사람들의 빛이다.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의 빛이다. 물론 그것은 참 지식과 의의 빛에서 오는 생명의 기쁨과 즐거움이다. 무지와 죄는 어두움이요 그 결과는 죽음,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다. 거기에는 슬픔과 고통만 있다. 그러나 주 안에 있는 생명은 슬픔과 고통을 제거하는 참된 빛이다. 우리는 과거에 다 어두움에 속해 있었다.(아담후손)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두움에서 빛의 세계로 구원을 얻었다(엡 5:8). 참 지식과 의,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얻었다.


그러나 빛이 어두움에 비취지만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그 빛을 깨닫지 못하고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고린도후서 4:3, 4,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시는 자들에게는 이 빛이 비취었다.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감사하게도, 우리들 속에 이 빛이 비취었다. 또 지금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시는 자들에게 이 빛이 비취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시며 하나님과 구별되시지만 곧 하나님이신 분이심을 증거한다. 또한 본문은 그가 만물의 창조자 곧 우리의 창조자이심을 증거하고, 또한 그가 우리의 생명과 빛이 되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 놀라운 사실을 바르게 알고 있었는가? 또 그를 바르게 믿고 있고 또 따르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과연 어떤 분이신가? 당신은 그를 참으로 나의 하나님, 나의 창조자, 나의 생명과 빛으로 믿고 의지하였는가? 아직 그렇지 못한 자가 있다면, 오늘 그를 영접하지 않겠는가?


6-13절, 예수님을 영접하셨나요?


본문은 하나님께서 요한을 미리 보내셔서 참빛을 증거하게 하셨다는 것과, “참빛이 세상에 오셨고 자기 땅에 오셨으나 사람들이 영접지 않았다는 것과, 영접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는 사실 등을 증거한다.


[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나타나시기 전에 요한이라는 사람을 미리 보내셨다. 그는 흔히 세례 요한이라고 불리운 자이다. '세례 요한'(마 3:1)이라는 표현은 '세례를 주는 자 요한'이라는 뜻이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특별한 의미에서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는다. 요한은 그런 사람이었다.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7] 그가 증인으로 왔으니 빛에 관하여 증거하려 함이며, 모든 사람이 그를 통하여 믿게 하려 함이더라.


요한의 사명은 참빛에 대하여 증거하여 모든 사람으로 그를 인하여 그 빛을 믿게 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는 많은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였다. 마태복음은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마 3:5, 6) 또 요한이 그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였다고 기록한다(마 3:11, 12).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말하기를,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했다(요 3:26).


오늘날 모든 성도들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전도로 다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도록 해야 할 사명이 있다. 물론 전도자들, 선교사들에게는 특별한 의미에서 그런 사명이 주어졌다. 주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다(마 28:19). 그러나 넓게는 우리 모두에게 이 전도의 사명이 주어졌다. 요한복음 20:21에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다.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8] 그 사람은 그 빛이 아니었고 그 빛에 관하여 증거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더라.


요한과 그가 전한 참빛은 구별되었다. 사람의 사명은 그의 위치를 분명히 정해 준다. 전도자는 자신과 자기가 전하는 빛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어떤 교만한 자들은 자신과 빛을 혼동하고 자신을 빛으로 선전하였다. 그러나 거기에서 불건전한 종파가 나온다. 모든 진실한 전도자들은 자신이 빛이 아니요 단지 그 빛에 대해 증거하러 온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겸손히 고백해야 하며 자기의 위치를 잘 지켜야 한다.


[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9] 세상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비치는 참 빛이 있었으니


요한이 증거한 그 참빛이 세상에 오셨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빛은 지식과 의,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가리킨다고 본다. 참빛은 참지식 즉 하나님에 대한, 인간에 대한, 구원에 대한 참지식이며, 완전한 의이며 거기에서 나오는 참기쁨, 영원한 기쁨이다. 이 세상에는 거짓된 빛들이 많이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에 대해, 인간에 대해, 구원의 길에 대해 바른 지식을 주지 못하며, 완전한 의를 주지 못하며, 참기쁨, 영원한 기쁨을 주지 못한다.


참빛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다. 빛은 비추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빛은 장농 속에 두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태양이 하늘 높이 달려 있는 것은 온 세상을 밝고 따뜻하게 비추기 위함이다. 태양은 온 세상을 비추기 위해 존재한다. 이처럼 참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비추기 위해 오셨다.


모든 사람은 빛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과 구원에 대한 바른 지식이 필요하고, 완전한 의가 필요하고, 참되고 영원한 기쁨이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0] 그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더라.


참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람으로 출생하셨고 세상 속에서 약 33년이나 사셨다. 그러나 그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태초부터 계셨던 분이시고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온 세상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요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왜 세상이 그를 몰랐는가? 그것은 이 세상을 주장하는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3, 4에서 이런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타락한 천사 루시퍼가 아담을 타락시켰고 이 세상을 주장하여 우리는 죄와 멸망의 어둠의 자식이었으나 빛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된것이다.)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1] 그가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온 세상 가운데 특히 자신이 특별한 소유로 선택하신 유대 땅에 탄생하셨다. 그는 마태복음 2:1의 증거대로 헤롯 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그는 유대 땅에서 그의 생을 보내셨다. 그러나 그의 백성 된 유대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복음서들이 증거하는 대로, 유대인의 공회는 그를 사형에 합당한 자로 정죄하였고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으로 넘겼다. 거기에서 유대인들은 지도자들의 충동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질러 외쳤고 마침내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는 판결을 내렸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에게 거절을 당하셨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2]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는 이렇게 거절을 당하셨지만, 그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특권이 주어진다. 영접하는 자 혹은 영접한 자라는 말은 신비적인 뜻이나 의식(儀式)으로 예수님을 마음 속에 영접하는 자를 가리키기보다 단순히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믿는 자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래서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 곧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자녀이었으나 범죄한 후 마귀의 자녀가 되었다. 죄인들은 죄의 종들이며 마귀의 특성인 거짓의 속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말씀하셨고(요 8:44), 사도 요한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불렀고 그들을 의와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구별하였다(요일 3:10).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참으로 존귀한 것이다. 부모는 자녀의 면류관이다. 존귀한 부모의 자녀는 부모의 존귀를 함께 가지며 누린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존귀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영광스럽다. 그것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이다. 또 거기에는 모든 보장과 보증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언제든지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이 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과 응답하심을 받아 누린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을 권리가 주어진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7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라고 말했다.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3] 그들은 혈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또한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혈통으로 된 것을 말하지 않는다. 구원과 중생(重生)은 혈통적인 개념이 아니다. 구원과 중생은 개인적인 것이지 혈통적으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 그것은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즉 사람의 구원과 중생은 육신적 생각과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방법이나 교육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생명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 그것이 중생(重生) 혹은 거듭남이다. 죄로 인해 죽었던 영혼, 즉 참된 지식과 도덕성을 상실하였던 우리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씻음을 얻어 새 생명, 다시 죽지 않을 영원한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그것이 거듭남이며,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를 교훈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에 대한, 구원에 대한 바른 지식과 완전한 의와 참된 기쁨을 얻는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는 이 빛이 비취었는가? 여러분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둘째로, 참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 곧 그를 하나님의 아들과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난 자들 곧 중생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은 실로 존귀하고 영광스럽다.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보호와 공급과 응답의 보장이 있다. 거기에는 천국과 영생의 상속권이 있다. 여러분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 여러분은 다 중생했는가? 여러분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런 특권을 깨닫고 감격하고 있는가?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이 되자. 요한처럼 우리도 주 예수를 증거하여 다른 이들도 또 예수를 믿도록, 믿어 구원을 얻도록 해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오늘날도 우리에게 같은 것을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서의 사명감을 가지자. 참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자.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 되는 특권을 누리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14-18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소위 '성육신'(成肉身, 육신이 되심)의 진리는 지극히 신비한 사실이지만, 기독교 진리들 중 가장 근본이 되는 진리이다. 요한복음의 시작 부분은 예수께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셨음을 증거하였다. 본문은 이제 그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成肉身)의 놀라운 사실과, 그 성육신의 영광과 목적, 그리고 그 성육신이 하나님의 절정적 계시(啓示),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확실하게 나타내신 일이었음을 증거한다. 이것은 실로 무지하고 죄악되며 허무하고 불행한 인간들에게 말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4]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로고스)'은 1-3절에서 증거된 대로 '태초부터 계신 말씀,' '창조 이전부터 계신 말씀,' '하나님과 구별되지만 참된 신성(神性)을 가지신 하나님이신 말씀'을 가리킨다. 그는 곧 선재(先在)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할 때에 '육신'은 단순히 사람의 몸만 가리키지 않고 영육으로 구성된 인간의 본질 곧 인성(人性)을 가리킨다. 그는 사람의 몸과 영을 가지신 참 사람이셨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라고 불리우신다(딤전 2:5).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의 영혼(프쉬케)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고백하셨다(마 26:38). 그는 인간의 몸만 가지신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의 몸과 영혼을 가지신 참 사람이신 하나님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그것은 신비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변하셨는 뜻은 아니다. 그는 사람이 되신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그는 빌립에게 말씀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셨다(요 14:9).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21문답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구속자(救贖者)는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救贖者)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리하여 두 구별된 본질(natures)과 한 인격(one person)을 가지신 하나님과 사람이셨고 영원토록 계속 그러하시다"라고 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는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다. 그는 인간으로서, 또 물론 하나님으로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다. 그는 사람으로 출생하셨고 성장하셨으며 인간의 특성과 연약성을 다 가지셨다. 그는 가난과 질병, 미움과 싸움, 슬픔과 고통과 불행의 세상 속에서, 죄인들 가운데서 생활하셨다. 영광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 세상 속에 약 30여년간이라는 세월을 사셨다. 그러나 그에게 죄는 없으셨다. 인간은 연약하나 신성(神性)이 그 속에 계셨기 때문이었다. 죄 없는 인간이어야 속죄제물이 되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며 인류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이다.


[14] . . .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사람이 되신 사실을 증거한 후 또한 그의 영광에 대해 증거한다. 그의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셨다. 독생자(모노게네스)는 독특한 의미에서 아들, 즉 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의미에서 아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와 다른 의미이다. 그것은 참된 신성(神性)을 가리킨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신비하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어느 시점에서의 관계일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시간 세계에서의 관계라면 아들의 신성(神性)에 근본적 결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영원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기적들을 통해 그의 신성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예를 들어, 그가 갈릴리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을 때 제자들의 그의 신성의 영광을 보고 그를 믿었다(요 2:11).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 성육신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긍휼이었다. 그는 왜 사람이 되셨는가? 그것은 인간의 죄짐을 지시기 위해서이었다. 대속제물이 되시기 위해서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범죄했으므로 사람이 죄의 형벌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범죄했는데 짐승이나 천사가 벌을 받을 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대신 받으실 수도 없었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람이 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사람이 짐승이 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어떻게 무한자이신 그가 유한자가 되실 수 있는가? 어떻게 영광이 충만하신 그가 욕된 몸을 취하실 수 있는가? 어떻게 자유로우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에 속박되실 수 있는가? 어떻게 영광의 주께서 인간의 연약과 고통을 경험하실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람을 만드신 그가 인간 부모에게 순종하실 수 있는가? 그러나 그는 사람이 되셨다. 그것은 놀라운 은혜이었다. 그에게는 은혜가 충만하였다. 그는 죄 없는 아름다운 인격이셨고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셨다. 그는 은혜로운 말씀들로 사람들을 교훈하셨고(눅 4:22)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셨다(마 9:12, 13).


그는 또 진리로 충만하셨다. 그는 진실하셨고 항상 진리만 말씀하셨다. 그는 악을 지적하시고 책망하셨고 악을 용납하지 않으셨고 악과 타협하지 않으셨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셨고 선포하셨다(요 12:49, 50). 그에게는 구원의 진리가 충만하셨다. 그는 자신을 진리라고 부르셨다(요 14:6). 하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므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


성육신(成肉身)은 가장 놀라운 사건이다. 그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요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의 특별계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죄인 구원의 방법이다. 그가 사람이 되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므로 죄인들의 구원이 이루어졌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 그것은 실제로 죄인들을 구원하는 은혜요 진리이었다. 그는 오늘날도 복음을 통해, 전도자들을 통해, 성령의 사역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5] 요한이 그에 관하여 증거하며 외쳐 말하기를 "이 분이 내가 말한 그 분이라. 내 뒤에 오시는 그가 나보다 앞선 것은 그 분이 나보다 먼저 계셨음이라."고 하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보다 앞선 자이시라고 증거하였다. '앞선 자'라는 말은 신분이나 권위나 능력에 있어서 뛰어나신 분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선지자보다 나은 자'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보다 큰 이가 없도다'라고 증거하셨으나(마 11:9, 11),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자기보다 앞선 자, 즉 신분이나 권위나 능력에 있어서 자기보다 나은 자, 뛰어난 자라고 증거한 것이다. 과연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보다 나으시다. 그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다.


세례 요한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보다 먼저 계신 자라고 증거하였다. 누가복음 1:26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전에 잉태되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서 자기보다 먼저 계신 자라고 증거하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요 1:1)이시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8:58). 구약의 미가 선지자는 메시야에 대해 예언하기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上古)에, 태초에니라"고 하였다. '태초에'라는 말은 '영원 전에'라는 뜻이다. 과연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보다 먼저 계신 분이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6] 우리 모두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았으니 은혜 위에 은혜니라.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 그들은 그에게서 은혜로운 말씀을 풍성히 들었을 뿐만 아니라,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하나님과의 교제의 특권과 담력과 성령을 받음과 영생과 위로와 도우심과 기도의 응답 등 충만한 은혜를 받아 누렸다. 오늘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도 동일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런 모든 은택을 받아 누린다.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진리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구별시키는 특징을 이룬다. 구약시대의 특징은 율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다. 그것은 구약성경 출애굽기로부터 신명기까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제 신약시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와 진리가 풍성히 증거되었다. 물론 구약의 율법 속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있었고 신약의 복음 속에도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은 유효하다. 로마서 7:12, 14,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은 서로 대립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형식과 강조점의 차이이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특징인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여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고 정죄를 받은 자들임을 보여준다. 로마서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요 '정죄의 직분'이라고 말했다(6, 9절).


이와 대조하여, 신약 시대의 특징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의롭다 하심을 나타낸다. 로마서 3:21, 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신약의 복음을 '살리는 것'이요 '의의 직분'이라고 말했다(6, 9절).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신약의 복음 안에서 밝히 증거되었다. 우리는 그 은혜와 진리를 받았고 또 그것을 만인에게 전파하는 것이다.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8] 아무도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뿐이라. 그가 하나님을 분명히 밝히셨느니라.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절정적 계시(啓示),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확실하게 나타내신 일이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요 4:24). 영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16에서 하나님에 관해 말하기를,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자(獨生子)께서 성육신하심으로 하나님을 특별하게 나타내셨다. 본문에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독생하신 아들' 즉 독생자(獨生子)라고 되어 있다.


요한복음 14:7-11은 이렇게 증거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두 가지를 깨닫는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성육신의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 중의 기적이며 하나님의 은혜 중의 은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이 신비와 그의 영광을 깨닫고 감사와 영광을 그에게 돌려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사실이다. 그의 성육신 자체가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이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은 그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받아 누렸다. 오늘날 우리 모두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경 말씀을 통해, 그의 속죄의 복음 진리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통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고 또 그것에 근거하여 풍성히 내리시는 그의 은혜와 진리를 받아 누려야 할 것이다. 오늘날도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시며 그의 이름을 진실히 부르는 모든 자에게 은혜와 진리를 풍성하게 내리시는 주님이시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진리를 풍성히 받아 누리자.


19-34절, 세례 요한의 증거


세례 요한은 예수님 당시 예수님보다 일찍 나타나 유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귀한 선지자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였고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였다.


[19-21]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19-21] 또 이것이 요한의 증거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내어 그에게 묻기를 "네가 누구냐?"고 하였더니 20 요한이 시인하고 부인하지 아니하였으니, 시인하기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하더라. 21 그들이 묻기를 "그러면 네가 무엇이냐, 네가 엘리야냐?"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네가 그 선지자냐?"고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아니라."고 하더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라고 물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낸 그 유대인들은 본문 24절에 증거된 대로 바리새인들이었다. 세례 요한은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드러나게 대답하였고 그 대답을 거절하지 않았다. 우선,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그리스도나 엘리야나 그 선지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엘리야를 언급한 것은 구약성경 말라기 4:5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예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 선지자'라는 말은 신명기 18장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는 모세의 예언을 가리킬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에 대해 바르게 알고 있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을 알고 자기 위치를 지키기를 힘써야 한다. 자기 위치를 벗어나는 것이 교만의 시작이다. 이단 종파들의 교주들은 자신을 신격화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무엇을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척하는 것, 무엇을 많이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가진 척하는 것, 이런 것은 다 허풍이요 허세요 외식과 거짓이다. 이것은 아마 교만이나 열등감에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성도는 이런 것을 다 버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족하고 죄성을 가진 피조물임을 고백하고 항상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22, 23]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2, 23] 그러므로 그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누구냐? 우리로 우리를 보낸 자들에게 가서 답변하게 하라. 너는 네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느냐?"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라."고 하더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재차 다그치는 질문에 대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대답했다. 이사야 40:3에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예언되어 있다. 요한은 자신이 거기에 예언된 그 소리라고 말했다. 선지자의 일차적 임무는 외치는 소리 즉 설교의 목소리에 있었다. 오늘날 목사들의 일차적 임무도 그러하다. 목사는 자신이 회중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만 바르게 전달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세례 요한이 외칠 내용은 '주의 길을 곧게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뒤에 오실 메시야를 위해 길을 닦고 길을 준비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온유함으로 구원을 사모함을 가리킨다.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모든 죄인들이 거쳐야 할 정상적인 과정이다.


[24-27]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24-27] 보냄을 받은 자들은 바리새인들로부터 왔더라. 그들이 그에게 묻고 말하기를 "네가 그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네가 침례를 주느냐?"고 하니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물로 침례를 주지만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분이 너희 가운데 서 계시는데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은 나보다 앞선 분이며 나는 그 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느니라."고 하더라.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냄을 받은 저들은 요한에게 또 묻기를 '네가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니면서 왜 세례를 주느냐?'라고 했다. 그때 요한은 내가 주는 물 세례는 한 상징에 불과하며 내 뒤에 한 분이 오신다고 말했다. 전통사본에는 27절에, 15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는 나보다 앞선 자시요'라는 말이 있다. 또 요한은 자신이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야가 어떻게 신적인 인격이시며 자기 자신은 어떻게 연약한 인생에 불과한지에 대해 바로 알고 바로 인정한 것이었다. 사람은 이와 같이 자신을 알고 겸손히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로마서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28]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28] 이런 일들이 요단강 건너편 베다바라에서 있었으니 그 곳은 요한이 침례를 주던 곳이라.


본절은 목격자의 증언을 담고 있다. 본절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들과 요한 간에 대화가 있었던 장소를 언급한다. 다음 절에 나오는 '이튿날'이라는 시간에 대한 언급도 그러하다. 이와 같이 성경은 지어낸 허구(虛構)가 아니고 그것이 증거하는 그대로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한 책이다.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 다음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세례 요한이 자신에 대해 증거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메시야에 대해 증거한 것이다. 그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일할 사명을 받았다.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 첫번째 증거는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메시야께서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보인 대로 속죄제물이 되실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 사역을 가리킨다. 세상 죄를 짊어지신 어린양은 유월절 어린양을 가리킨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고린도전서 5:7의 증거대로, 유월절 양의 죽음이었다. 그는 세상의 죄, 정확히 말하면 세상에 흩어져 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죄를 짊어지신 속죄제물로 죽으셨다. 그는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 즉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어린양이셨다. 세례 요한이 어떻게 구약성경에 암시된 이런 놀라운 진리를 알았는지 신기스럽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요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이 분이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그 분이 나보다 먼저 계셨음이라."고 했던 그분이라.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보다 앞선 자이며 자기보다 먼저 계신 자'임을 증거하였다. 이것은 이미 15절과 27절에서 증거된 바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시고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신적인 존재이시다. 그는 요한복음 1:1에 증거된 대로 '태초에 이미 계셨던 말씀'이시다.


[3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나는 그 분을 알지 못하였지만 그 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내가 물로 침례를 주러 왔노라."고 하더라. 또 요한이 증거하여 말하기를 "나는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비둘기같이 내려와 그 분 위에 머무시는 것을 보았노라. 나는 그 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시어 물로 침례를 주라고 하신 그 분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내려와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보리니, 그가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라.'고 하시기에


세례 요한은 물 세례를 통해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메시야를 드러내고 증거하려 하였다. 마태복음 3:13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으셨다. 물 세례는 구원에 본질적으로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이므로 매우 중요하며 따라서 누구든지 그것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이와 같이 세례 요한은 자신의 임무 혹은 사역의 목표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다시 정리하면, 그 임무는 두 가지이었는데,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메시야께 대한 믿음을 준비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메시야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 다음,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두 번째 증거를 한다. 그것은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라는 것이다. 물 세례는 하나의 상징이며 성령 세례는 그 실체이다. 물은 씻음 즉 죄사함을 상징한다.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성령 세례는 성령께서 실제로 죄인들을 불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새 생명을 주시고 새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 세례는 곧 사람의 중생(重生) 사건이다.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내가 보았고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노라."고 하니라.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한 세 번째 증거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미 증거한 '자기보다 앞선 자이며 먼저 계신 자'(15, 27, 30절)라는 증거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이 책의 서두에서부터 증거한 대로 예수께서 '태초에 계셨던 말씀이시며 하나님'(1절)이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자이며 독생자(獨生者)'(14절)이시고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獨生子)'(18절)이시라는 말씀과 함께, 예수님의 신적 인격을 잘 증거한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과 본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물론 이것은 신비한 사실이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대속을 위해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 지금도 성령을 통해 죄인들의 죄를 씻으시고 새 생명을 주셔서 거듭나게 하시는 예수님은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지 모른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자.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그 안에 우리의 모든 죄 문제의 해결이 있다. 또한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자이시다. 그는 실제로 우리의 죄를 씻고 새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시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신적인 구주이시다.


모든 사람은 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래야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다. 누구든지 죄를 회개치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죄사함과 영생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있다. 여러분 중에는 아직 회개치 않은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는 없는가?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은 그를 진실히 따라야 한다. 그를 따른다는 것은 그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의 가르침대로 산다는 것은 한마디로 죄 안 짓고 사는 것이며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주를 믿고 따르는 자의 삶이다. 우리 모두는 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되자.


35-42절, 처음 제자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따랐던 세 제자들에 대해 증거한다. 그들 중 두 사람은 본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다. 요한복음 3:24에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을 보면, 본문의 사건은 갈릴리 해변에서 네 제자들을 부르신 마태복음 4:18 이하에 기록된 사건보다 이전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의 그 사건은 마태복음 4:12의 말씀대로 예수께서 세례 요한의 잡힘을 들으신 후에 행하신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앞부분에서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전도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즉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기 전에 하신 그의 초기 사역을 증거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마태복음을 포함한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생략되어 있는 것들이다.


[35-37]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그 다음날 다시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께서 거니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니 두 제자가 그의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를 따라가더라.


요한은 어제도 예수님에 대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증거하였다(1:29). 그는 오늘 다시 그에 대해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속죄제물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주고 참된 평안과 영생을 주는 속죄제물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바로 죄인들에게 그런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그를 통해 죄사함과 평안과 영생을 얻었다.


요한이 어제 예수님에 대해 증거했을 때는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 그가 예수님에 대해 다시 증거했을 때 이번에는 그의 두 제자들이 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 제자들은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이미 세례 요한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그가 증거한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준비된 자는 때가 될 때 구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될 것이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도구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했다(고전 1:21). 그는 또 말하기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라고 했다(롬 10:13-15).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 전도하여 반응이 없다고 낙심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또 다시 전도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계속 증거하며 구원의 결실이 있을 때까지 전도해야 할 것이다.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그때 예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무엇을 찾느냐?"고 하시니, 그들이 말씀드리기를 "랍비여, (랍비는 해석하면 선생이라.) 어디에 거하시니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이시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분명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무엇 때문이며,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이 물질적 복을 추구함 때문인가?

그것이 세상적 출세와 성공을 기원하기 위함인가?

그것이 땅에서 육신적 즐거움을 누리기 위함인가?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며 죄사함과 영생을 얻기 원하여 주님을 믿고 따르고 있는 것인가?


그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되물었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랍비여'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을 아직 하나님의 아들과 주님으로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였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그들은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 그가 과연 세례 요한이 증거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아니면 또 하나의 거짓되고 세속적인 인물인지를 알기를 원하였을 것이다.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십시쯤 되었더라.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와서, 보라."고 하시더라. 그들이 가서 주께서 거하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은 주와 함께 머물렀으니, 이는 그때가 제 십시쯤 되었음이라.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와 보라'고 대답하셨다. 이보다 더 좋은 대답은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함께 지내보면 다 알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계신 곳을 보고 그 날 주님과 함께 지냈다. 때는 제10시쯤 되었다. 그것은 오전 10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요한은 마태, 마가, 누가와 달리, 로마 사람들의 시간 계산 방식을 사용했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 제자들은 그 날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만난 일이었다. 그 교제를 통해 그들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던 의심의 상태에서 '메시야'라고 부르는 확신의 상태로 변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 연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를 더욱 알고 더욱 깊이 교제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하였다. 또한 교회에서의 경건한 성도들과의 교제는 예수님을 아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40-42]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한의 말을 듣고 주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더라. 그가 먼저 그의 형제 시몬을 만나 말하기를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니 그것을 해석하면 그리스도라. 그리하여 그가 시몬을 예수께 데려오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너는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 너를 게바라 부르리라."하시니 그것을 해석하면 돌이라.


예수님을 처음으로 따랐던 두 제자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아마 본서를 쓴 요한 자신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본서의 저자 요한은 본서에서 자신을 항상 드러내지 않고 감추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가 메시야이심을 확신케 되었다. 그 때 그들 중 한 사람인 안드레는 그 날 오후에 자기 형제 시몬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하였고 또 그를 데리고 예수께로 왔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확신한 자는 그를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먼저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에게부터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 읽기와 듣기, 성경 묵상과 연구를 통해 예수님을 확신하고 또 다른 이들을 그에게로 인도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성경책을 읽고 공부하게 하거나, 예배에 참석하여 설교를 듣게 함으로써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안드레가 데려온 그의 형제 시몬을 알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하셨다.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그의 믿음과 인격이 굳세고 든든해질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뿐 아니라 오늘 우리도 다 아신다. 우리의 연약함도 아시고 우리의 진실함도 아신다. 그는 우리의 장래도 아신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전도의 결실이 금방 없어 보이는 때에도 낙심치 않고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전도는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정한 때에 택하신 죄인들을 다 구원하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오늘날도 예수님의 거하신 데를 와서 보자. 그 곳이 어디인가? 그곳은 다른 곳이 아니고 바로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연구하는 곳이며 성경 말씀 안에서 경건한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는 곳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 속에서 주님을 더욱 알고 더욱 깊이 교제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셋째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확신했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먼저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와 이웃에게부터 예수님을 전하자. 우리가 이웃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사랑은 전도이다. 왜냐하면 전도는 죄인을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43-51절, 빌립과 나다나엘


본문은 예수께서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삼으신 사건을 기록한다. 그들은 안드레와 익명의 한 제자(아마 요한), 그리고 베드로에 이어 예수님의 처음 제자가 된 자들이었다. 본문은 특히 나다나엘을 부르심에 대해 자세히 증거한다.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다음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고자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시니,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더라.


'이튿날'은 바로 앞에 언급된 사건 즉 안드레와 다른 제자(아마 요한 자신)가 예수님을 따랐던 그 날로부터 계산된다. 처음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랐던 그 날은 뜻 깊은 날이었다. 그러므로 2:1에는 그 날부터 계산하여 '사흘 되던 날'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라는 말은 아직 주께서 유대 지방에 계실 때 이 일이 있었음을 보이는 것 같다. 그가 갈릴리까지 가신 것 같지는 않다. 이 일은 28절에 언급한 대로 세례 요한이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 있었을 때 되어진 것이므로 아마 그 부근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다니 부근에 유숙하고 계셨던 것 같고 그때 안드레, 요한, 시몬 베드로, 그리고 이제 빌립까지 주를 따랐고 주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께서 빌립을 만나자마자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에게는 우연하게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께는 우연이라는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다 작정하시고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그 작정하신 바를 현실 가운데서 그대로 남김 없이 다 이루신다. 시편 115:3은 증거하기를,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라고 했다.


처음 제자들은 아마 모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을 것이다. 사도들은 후에 한 명의 사도를 보선할 때, 사도행전 1:21, 22에 보면, 그 자격 요건으로 '세례 요한 때부터 함께 다니던 자'를 언급하였다. 빌립도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요한이 세례주는 곳 부근에 있었던 것 같다. 여하튼, 다른 제자들과 같이, 빌립의 심령에도 하나님을 경외함과 죄를 회개함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45절에 기록된 대로, 그에게는 메시야에 대한 상당한 지식과 기다림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런 빌립을 제자로 부르셨던 것이다. 주께서는 오늘날도 준비되지 않은 자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고 준비된 자를 제자로 부르실 것이다.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의 성읍인 벳새다 출신이더라.


안드레와 베드로와 더불어 빌립은 벳새다 사람이었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 북쪽 해변의 마을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있는 아마 요한도, 형제 야고보와 함께, 갈릴리의 어부이었으니(마 4:21, 22) 갈릴리 사람이었다. 다음에 언급될 나다나엘도 요한복음 21:2의 증거대로 갈릴리 가나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왜 예루살렘이나 유대 지방 출신자들을 부르시지 않고 갈릴리 지방 출신자들을 제자로 부르셨을까? 그것은 아마 당시의 교회가 매우 부패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의 사람들은 그 종교적 부패의 영향을 직접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시면 악한 환경을 거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대체로 환경의 영향을 쉽게 받는다. 도시 사람들은 시골 사람들보다 보통 더 세상적이다. 악의 영향력은 매우 강하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 지방인 갈릴리는 비교적 예루살렘의 악한 영향이 적었을 것 같다. 교회들이 부패되어 있을 때는 홀로 떨어져서 주님을 섬기는 것도 유익할 수 있다. 여하튼, 갈릴리 사람들 중에 순박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참된 경건을 가졌던 자들이 있었다. 주께서는 그들을 부르셨고 제자로 삼으셨다.


예수님 자신도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셨고 전도 사역을 시작하실 무렵에는, 마태복음 4:13의 말씀대로, 가버나움에 가서 사신 갈릴리 사람이셨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 해변 마을로서 벳새다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인간적으로 예수께서 다른 이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할 이유도 되겠지만, 다른 면에서 그가 어릴 때부터 경건하고 독실한 인물인 것을 아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은 어릴 때 나쁜 사람이 아니셨을 것이다. 그는 어릴 때에도 흠이 없는 인격이셨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어릴 때부터 보아서 또 그에 대해 들어서 알았을 것이다. 만일 그가 악한 인물이었다면 사람들은 그를 결코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의 신성(神性)의 증거는 아직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의 공적 사역의 때에 나타날 것이었다. 그는 갈릴리 사람이셨고 갈릴리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택하셨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또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 사람을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 하니


빌립은 예수님을 따르게 된 그 날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찾았다. 나다나엘도 아마 그 부근에 있었던 것 같다. 빌립이 나다나엘의 고향인 갈릴리 가나까지 간 것 같지는 않다. 나다나엘도 다음의 구절들을 보면 경건한 인물이었다. 빌립은 먼저 경건한 친구를 찾아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기에 준비된 사람이다. 빌립에게는 메시야에 대한 성경 예언의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는 메시야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렇다. 메시야는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하신 인물이시다.


그는 모세가 율법책에서 예언하였고 또 유월절과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 등 여러 의식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예표(豫表)적으로 그에 대해 언급했던 인물이며 또 그 후의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한 인물이었다. 빌립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친구 나다나엘에게 이제 바로 그 예언된 메시야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확신있게 말하였다. 성경에 예언된 인물이 참 인간으로 오셨다는 말이다. 메시야는 분명히 한 역사적 인물로 오셨다.


[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하니, 빌립이 그에게 말하기를 "와서 보라."고 하더라.


나다나엘의 처음 반응은 많은 사람들의 반응처럼 부정적이었다. 베들레헴이나 예루살렘은 성경에 예언된 바가 있지만(미 5:2; 말 3:1), 나사렛은 예언된 바가 없지 않은가? 나다나엘에게 나사렛은 메시야를 기대할 만한 곳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러나 빌립은 그에게 '와 보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것은 그를 알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다. '와 보라'는 말은 언제나 최선의 전도 방법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은 성경 말씀 가운데서이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자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다. 오늘날 예수께서는 기록된 성경을 통해 자신을 증거하신다. 또 성경을 풀어 설명하는 교회의 설교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하고 만나게 하는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데 성경책과 성경적 설교를 사용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관하여 말씀하시기를 "보라,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에게는 간사함이 없도다."라고 하시니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을 미리 아시고 그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를 가리켜'라는 헬라어 원어는 '그에 관하여'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그를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표현하셨다. 또 그는 그의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증거하셨다. 나다나엘은 경건하고 독실한 인물이었다. 그는 주의 제자가 되기에 적합하게 준비된 인물이었다.


[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께서 언제부터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노라."고 하시니라.


자신에 대한 주님의 증거의 말씀에 나다나엘은 놀랐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그때 주께서는 더욱 놀라운 증거를 하셨다. 그것은 그가 빌립이 그를 부르기 전에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그를 보았다는 증거이었다. 그것이 그의 참 이스라엘 사람임과 간사함이 없음과 관계됨을 보면, 나다나엘은 그 무화과나무 아래서 놀거나 잠자거나 먹거나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간절히, 진실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였던 것 같다. 하나님은 언제나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성도의 중심을 보시고 받으신다. 주께서는 바로 그러한 경건한 나다나엘의 중심을 보셨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마음과 모든 죄를 버리고 흠과 점 없이 살고자 하는 그의 중심을 보셨을 것이다.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이 대답하여 주께 말씀드리기를 "랍비여,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주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니이다!"라고 하더라.


주님의 그 말씀은 나다나엘로 하여금 모든 의심을 떨쳐버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게 하였다. 하나님을 향해 간절한 자신의 중심을 보신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하였다. 안드레와 요한 속에 생겼던, 그리고 시몬과 빌립에게 생겼던, 동일한 믿음과 확신이 나다나엘에게도 생겼다. 이 믿음과 확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도 있다. 또 우리뿐 아니라, 오늘도 진지하게 성경책을 읽고 듣고 묵상하며 연구하는 모든 구도자(求道者)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주시라는 믿음과 확신을 얻게 될 것이다.


[50, 5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하니 네가 믿느냐? 네가 이보다 더 큰 일들을 보리라."고 하시고 또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이 후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리라."고 하시더라.


나다나엘은 예수께서 그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고 함으로 믿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그가 그보다 더 큰 일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그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나다나엘에게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나다나엘은 장차 예수님의 신비한 신적 영광을 더 보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구약성경이 예언한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확신했듯이, 우리 모두는 이 성경의 증거들을 통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자.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확인하고 확신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의 책이다. 성경에 담긴 많은 증거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확신하자. 그를 믿어 구원을 받고 그를 확신하고 그를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자.


둘째로, 빌립이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주 앞으로 인도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친구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구원하기로 택하신 자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실 것이다. 악한 자들은 끝까지 악을 행할 것이지만, 죄를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께로 나올 것이며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님을 만날 것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2장: 처음 기적


1-11절,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


본문은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처음 기적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께서 이 기적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그리고 왜 행하셨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셋째 날에 갈릴리 카나에서 혼인식이 있었는데 예수의 모친도 거기에 있더라.


본절은 예수께서 언제 그리고 어디에서 처음 기적을 행하셨는지를 말한다. 그는 사흘 되던 날 즉 안드레와 한 제자가 맨 처음 예수님을 따랐던 날부터 세어서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서의 한 혼인 잔치 자리에서 그 기적을 행하셨다. 갈릴리 가나는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가깝고 나다나엘의 고향이었다. 거기에서 혼인 예식과 잔치가 있었고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계셨다. 누가 혼인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거기 계셨고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걱정하셨고 하인들에게 무엇을 지시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그 잔치집은 아마 예수님의 어머니의 친척이었던 것 같다. 혼인 예식과 잔치는 엄숙한 서약이 있는 시간일 뿐만 아니라, 인간사 중에서 가장 기쁘고 즐거운 일이요 축하할 만한 일일 것이다.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혼인식에 초대되었는데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그 혼인 예식과 잔치에 청함을 받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혼인하는 집이 제자들 중 어떤 이와 관련이 있어서 초청을 받았거나, 아니면 예수님 때문에 함께 초청을 받았을 것이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혼인 예식과 잔치를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는 친히 율법에 복종하셔서 할례를 받으셨고 부모에게 순종하셨고 그들과 함께 경건하게 절기를 지키셨고 또 며칠 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고 이제 혼인 예식과 잔치에 참여하신 것이다. 그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으셨다.(어린양의 혼인잔치?)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그들에게 포도주가 부족하므로 예수의 모친이 그에게 말하기를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하니


혼인 잔치를 준비한 집이 물질적으로 아주 유여한 집 같지는 않았다. 그 집은 혼인 잔치를 하면서 음식을 넉넉히 준비하지 못했던 것 같다. 혹은 예상보다 손님들이 많이 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기쁘고 즐거워야 할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작은 문제는 아니었다. 그 혼인 잔치는 흥과 즐거움이 깨어질 처지에 있었다. 그때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께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녀는 예수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다. 그녀가 한 말은 예수께 대한 그녀의 믿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포도주가 떨어진 그 어려운 문제를 예수가 해결해줄 수 있다는 그녀의 믿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예수께서 신적 능력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그녀의 믿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아들 예수에 대해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 그녀는 아마 예수를 잉태할 때부터 그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의 잉태에 대한 천사의 계시를 받았을 때 천사는 그녀의 몸에 잉태되어 나실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다윗의 위를 잇는 왕이라고 일러주었었다(눅 1:32-35). 또 그가 아기 예수를 출산했을 때 그 지경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찾아와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 그리스도 주이신 구주가 나셨다고 했다고 말했고 마리아는 그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했었다(눅 2:11, 17, 19). 그녀는 예수가 소년 시절을 거쳐 자랄 때 줄곧 그를 주목하며 그 믿음을 간직했을 것이다. 이제 그 믿음을 가지고 마리아는 예수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4, 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인이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시니라. 주의 모친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그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행하라."고 하더라.


어머니의 요청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던 것 같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여자여'라는 표현은 당시 여자에게 할 수 있는 일반적 호칭이었다. 성경에 사용된 예들을 보면, 그것은, 학자들의 설명대로, 존중과 사랑을 가진 용어이었던 것 같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말씀은 아직 그가 공적으로 드러나게 일할 때가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은 확고하였다. 그녀는 예수가 그 어려움을 도울 수 있고 또 도와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의 믿음은 하인들에게 이른 말에서 드러난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어야 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성경 말씀을 주야로 읽고 듣고 배우기를 사모할 것이며 성경 읽는 일이나 설교 듣는 일을 크게 여기고 금은 보화를 얻는 것보다도 더 크게 여길 것이다. 그는 결코 성경 말씀이 강론되는 시간과 장소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거기에는 유대인의 정결의식에 따라 한 통에 두세 메트레타를 담는 돌로 된 물통이 여섯 개 놓여 있는데


그 집에는 결례 의식을 위한 돌항아리 여섯이 있었다. 마가복음 7:3, 4에 언급된 대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손발을 씻거나 몸을 씻었다. 그 집에는 그러한 씻는 의식을 위해 돌항아리가 여섯이나 있었다. "두세 통"이라는 말에서 '통'(메트레테스)이라는 단위는 약 39리터 정도이다. 그러므로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는 약 80 내지 120리터 정도의 물을 담을 수 있는 큰 김장독 같은 항아리이었다.


[7, 8]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宴會長)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통을 물로 채우라."고 하시니, 그들이 아구까지 채우더라.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떠다가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가져다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가져다 주더라.

(예수님께서는 천국백성이 다 먹을 수 있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실 것이다?)


어머니 마리아의 확신대로, 예수께서는 그 혼인 잔치의 어려움을 동정하셨다. 그는 인간의 혼인 잔치를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는 인간의 일들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는 혼인 잔치의 즐거움과 흥이 깨어질 처지에 대해 동정하셨다. 이제 그의 일할 때가 다 되었다. 아직 공적으로 일할 때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적으로이지만,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적 영광을 나타낼 때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하인들에게 항아리들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다. 마리아의 요청과 지시대로, 하인들은 예수의 말에 순종하였다. 그들은 예수의 말을 멸시하거나 거역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하면서 불평한 것 같지도 않다. 하인들은 그 항아리들에 물을 아구까지 채웠다. 이것은 그들의 성실한 순종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이제 떠서 연회장(宴會長) 곧 잔치 인도자에게 갖다 주라고 말씀하셨다. 하인들은 이번에도 그의 말에 그대로 순종하였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은 이런 상황에서 일어났다. (순종이 기적을 만든다?)


기적은 믿고 순종하는 데서 일어난다. 예수께서는 후에 자기 고향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아니하므로 그곳에서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 마가복음 6:5, 6,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데 무슨 기적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그를 믿고 그의 말씀을 사모하고 실천할 때 오늘날도 우리는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9, 10]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그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나 (그 물을 떠 온 종들은 알더라.)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 신랑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기를 "누구나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었다가 사람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는데 당신은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간직해 두었도다."라고 하니라.


예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그것은 맛이 좋은 포도주이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것은 예수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하인들과 제자들이 보고 확인했던 확실한 기적이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욥기 42:2에서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고백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자연법칙은 그가 정하신 것이다. 그것은 신비한 법칙이다. 소가 풀을 뜯어먹고 우유를 내는 이치를 누가 알겠는가? 포도나무가 비와 땅의 양분을 섭취하여 포도송이를 주렁주렁 맺는 이치를 누가 알겠으며 사과나무가 똑같은 조건에서 사과를 맺는 이치를 누가 알겠는가? 그것은 신비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인 것이다. 인간으로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 자는 아무도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이 기적은 예수께서 신성(神性)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한 증거인 것이다.


예수께서 만드신 포도주는 진짜 포도주이었다. 그것은 맛이 좋은 포도주이었다. 예수께서 술을 만드셨는가? 그것은 재미 있는 문제이다. 예수께서는 술을 만드셨다. 그러나 우리가 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깨닫는다면 그것은 당황스런 문제는 아니다. 성경은 완전 금주(禁酒)를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에서 술은 좋은 의미로서 쓰일 때가 있고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일 때도 있다. 성경은 술을 한두 잔 마시는 것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술취하는 것은 큰 죄이다. 그것은 지옥에 던지울 만한 큰 죄이다(고전 6:10). 그러므로 술취함은 성도에게 합당하지 않다. 술은 몸의 건강에 나쁘다는 이유와, 술은 경제적 지출이 된다는 이유와, 술은 중독성이 있다는 이유와, 무엇보다 술 마시는 습관은 술취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이유와, 옛날의 술보다 오늘날의 술의 알코홀 농도가 매우 높다는 이유 등을 고려할 때, 우리는 가급적 술을 안 마시는 것이 유익하다. 우리는 교회의 완전 금주의 좋은 전통을 존중하며 오늘날도 그것을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예수께서 이적들 가운데 이 처음 이적을 갈릴리 카나에서 행하시고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니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더라.


이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처음 표적이었다. 이 표적의 목적은 두 가지이었다. 하나는 예수의 영광을 나타내심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요, 다른 하나는 그것을 통해 우리로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함이다. 과연 제자들은 이 기적을 통해 예수의 신적 영광을 보았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수 있는 분은 결코 단순히 사람일 수 없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제자들은 그 사실을 깨달았고 예수님을 믿었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세상 일을 너무 무시하지 말자. 예수께서는 혼인 예식과 잔치에 참여하셨고 잔치의 어려운 문제를 도와주셨다. 그는 혼인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세상 일을 너무 무시하는 극단에 떨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필요한 일들을 존중하고 마음을 낮추어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자. 예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그 기적은 예수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하인들과 제자들이 친히 눈으로 보았던 기적이었다. 그것은 확실한 기적 사건이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가? 역사상 인간으로서 그런 일을 행한 자가 있었던가?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확신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자. 하인들은 예수의 이상한 지시에 대해 멸시하거나 대항하지 않았고 불평하지도 않았음이 확실하다. 그 하인들은 묵묵히 그의 말에 순종하였다.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가 믿고 순종할 때 일어난다. 불신앙과 불평 속에서는 아무런 좋은 것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형통과 평안을 주실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때때로 기이한 일들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이 되자.


12-25절, 성전을 청결케 하심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이 부패된 것을 보시고 그것을 깨끗케 하시고 성전을 더럽힌 자들을 책망하신 사건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그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즈음에도 비슷한 일을 하셨다(마 21:12, 13).


[12, 13]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이 일 후에 주께서 그의 모친과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카퍼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서 여러 날을 머물지는 아니하시더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워지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갈릴리 가나에서 처음 기적을 행하신 후, 예수님은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다. 가나는 산지에 있는 마을이며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마을이다. 예수께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등의 남동생들이 있었고 누이들도 있었다(마 13:55; 막 6:3).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 여러 날 계시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 때는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왔다. 이 유월절은 예수님의 공적인 전도 활동 기간 중 첫번째로 맞는 유월절이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이것 외에 두 번 더 유월절을 지키셨음을 증거한다(요 6:4; 11:55).


[14-16]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그런데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 모두를 양과 소와 함께 성전에서 몰아내고,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고 상들을 뒤엎으시며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들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시니라.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께서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그 짐승들을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그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시고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책망하셨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의 집이다. 그 곳은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의 처소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며 주의 일을 의논하고 교제하는 것 외에, 성전 안에서 세상적인 행사들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더욱이 종교적 행위를 빙자하여 돈 벌이를 하는 장사 행위는 성전 안에서 용납될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매우 가증한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대신에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참된 경건과 너무 거리가 먼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이 장사하는 집이 되지 않고 순수한 성전이 되기를 원하셨다.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그때 제자들이 "주의 집을 위한 열성이 나를 삼켰나이다."라고 기록된 것을 기억하더라.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예수의 행동을 본 제자들은 시편 69:9의 말씀을 기억했다. 거기에 보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을 사랑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전을 사랑함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137편 저자는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지로다"라고 고백했다(시 137:6). 예수님의 성전 청결의 권위 있는 행위는 성전을 위한 그의 사랑과 열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동일한 열심을 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흠과 점이 없는 깨끗하고 거룩한 교회를 원하셨다. 에베소서 5:25-27,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오늘날 교회들의 배교(背敎)와 타협과 혼란을 보고 무관심하거나 무감각해서는 안된다. 잘못된 교리를 포용하는 포용주의는 잘못이다. 또 단순히 교인들의 숫자에만 관심을 가지거나 세상적 복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들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을 보고 탄식하며 통분하며 마음에 고통을 느끼며 그것을 몹시 싫어해야 한다. 우리는 바른 교리를 보수(保守)하고 잘못된 사상들을 배격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개체 교회 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에 대한 책임도 느껴야 한다.


[18-21]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주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보여 주겠느냐?"고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이것을 다시 세우리라."고 하시니라. 그러자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 걸렸는데 네가 이것을 삼 일 만에 세우겠단 말이냐?"고 하더라. 그러나 주께서는 성전된 자기 몸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라.


유대인들은 예수의 행위에 대한 권위의 근거를 질문하였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를,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고 하셨다. 유대인들은 46년 동안에 지어진 이 성전을 예수가 어떻게 삼일 만에 세우겠다는 것인가라고 오해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의 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확실한 증거이었다.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구약의 성막과 성전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고 예표(豫表)하였다.

구약의 성막과 성전에는 번제단, 물두멍(물대야), 떡상, 촛대, 분향단, 속죄소 등이 있었다.

 

번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대리적 지옥 형벌을 나타내었고,

물두멍(물대야)은 그의 성결하심을,

떡상은 그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심을,

촛대는 그의 교훈과 깨닫게 하심을,

향단은 그의 중보 기도를,

속죄소는 그의 단번 대속(代贖)의 사역을 상징하고 예표하였다.


이처럼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그리고 그가 그 몸으로 이루신 속죄 사역을 예표하였다.


성전은 또한 오늘날 예수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된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그러므로 성전의 청결은 신자 개인의 성화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물론, 구약의 성전은 부수적으로 오늘날 예배당을 가리킬 수 있다. 오늘날의 예배당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위해 거룩히 구별된 건물이다. 그러므로 예배당은 세상적인 일을 위해 사용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그 후 주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을 때 제자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더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은 그의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의 말씀을 믿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구약성경의 말씀은 시편 16:10이다. 거기에 보면, "이는 내 영혼을 음부[지옥]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씀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었다. 그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제자들의 증거에 근거하여 우리도 예수께서 육체로 부활하신 사실을 확신하자.


[23-25]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유월절 명절날에 주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 많은 사람이 그가 행하신 이적들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더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아니하시니, 이는 주께서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더라. 또 사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아시므로 누가 사람에 관하여 증거하는 것도 필요로 하지 아니하시더라.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머무시면서 여러 표적들(병자들을 고치심 등)을 행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고 그를 믿었다. 기적들은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추가적인 표적들이 없어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표적들을 확인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 (오직 성경을 통해 기적을 내가 직접 경험한다?)


많은 사람들이 표적들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을 아셨고 사람의 속에 있는 것들을 다 아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주의 종들도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 인간은 다 무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잘못 판단하기 잘하는 자요 연약하고 넘어지고 실수하기 잘하는 자이다. 인간은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물론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사람이 필요하다. 신실한 일꾼들이, 신실한 동역자들이 필요하다. 기드온 3백명 용사 같은 자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의 종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이사야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성전의 참 뜻을 깨닫자. 그것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 사역을 상징하고 예표하였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성전은 또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가리킨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는 이 성전을 두려움과 기쁨으로 생각하며 대하자.


둘째로, 우리는 성전에 대한 열심, 즉 오늘날 교회에 대한 열심을 가지자. 교회가 진리의 말씀 속에서 순수함을 유지하고 사랑으로 단합하며 복음을 온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 일에 우리 모두는 열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마음 속에 있었던 성전을 위한 열심이 우리 속에도 있기를 소원한다.


셋째로, 특히 주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셨듯이, 우리는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이 들어온 자유주의 신학들, 잘못된 교회 연합 운동, 타협적 복음주의, 은사운동 등의 교리적 이단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거룩과 사랑과 겸손과 온유와 선함과 진실에 어긋나는 윤리적 죄들을 용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넷째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던 것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믿고 따른다면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또 사람들이 우리를 배척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낙심치 말고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해야 할 것이다.


3장: 거듭남


1-13절, 거듭남에 대해


본문은 예수께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사람에게 주께서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이다.


[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니코데모라 하는 바리새인 한 사람이 있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다.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경건하고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자들이었다. 형식과 외식에 치우친 자들도 많이 있었던 것 같으나 니고데모처럼 경건한 자들도 있었다. 한편 당시의 사두개인들은 세속적이고 자유적인 입장을 가진 자들이었다. 니고데모는 또한 유대인의 관원이었다. '관원'이라는 말은 유대 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진 지도적 인물, 예컨대 유대의 공회원이라든가 회당장 같은 자를 가리킨다. 즉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 경건하였고 사회적으로 신분이 있는 자이었던 것이다.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말씀드리기를 "랍비여,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을 아나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당신이 행하시는 이런 이적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니이다."라고 하더라.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비록 그가 바쁜 사회 생활을 했을지라도 낮에 시간을 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밤에 왔던 것 같다. 그러나 여하튼 그는 밤에라도 예수께 찾아왔다. 그는 와서 경건한 사람들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그는 예수님을 선지자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였다. 그 근거로서 그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들었다.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고 본 것은 옳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이상이셨다. 그는 단순히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오신 선지자가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셨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의 고백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거듭남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는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 네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고 진리임을 강조하셨다. 그가 강조하신 말씀은 거듭남의 필요성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신분이 있고 존경을 받는 니고데모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거듭남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씀하셨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 다시 나야 하는 것이다.


거듭남 곧 중생(重生)은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5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첫사람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었다(창 3:24). 그러므로 사람이 죄인인 채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죄인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6:9, 10에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씀했고, 또 요한계시록 22:15에는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했다.


[4, 5]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니코데모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나의 체험)


니고데모가 거듭남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자 예수께서는 거듭남의 방법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은 육신적인 의미가 아니고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물은 죄씻음(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세례 의식의 물)을 상징한다. 우리는 물로 더러운 것을 씻는다. 그것을 중심 내용으로 하는 복음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것은 물론 세례 의식의 물에서 상징된다. 에베소서 5:26에는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했고, 요한복음 15:3에는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했으며, 히브리서 10:22에는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라고 했다.


또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씀에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사람의 심령에 적용하시는 성령의 구원 활동을 가리킨다. 거듭남은 성령의 구원 역사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6:11에는,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했고, 디도서 3:5에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했다.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새 사람이 된다.


[6-8]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어서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모두 그와 같으니라."고 하시니라.


(버려진 영이 되지말자.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살아나야 한다.)


거듭남은 육적인 일이 아니고, 영적인 성격의 일이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의 변화이다. 사람의 출생은 육적인 일이었다. 영이 그 속에 없는 것은 아니나, 영생하시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으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의를 행치 않는 영이었다. 영의 기능들인 지식과 감정과 의지는 매우 어두워졌고 약하여졌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거듭남은 영의 변화이다. 그 영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살아나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행하게 된다.


영은 바람과 같다. 우리는 바람이 어디로부터 나와서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남이 언제,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람을 볼 수는 없으나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는 있듯이, 거듭난 사람의 소리, 즉 그가 죄를 회개하는 소리,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소리를 들을 수는 있을 것이다. 바람은 볼 수 없으나, 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성령을 볼 수는 없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은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참된 회개와 믿음의 고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회개와 믿음은 거듭남의 증거이다.


[9-12]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니코데모가 대답하여 주께 말씀드리기를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일들도 모르느냐?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또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래도 너희는 우리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들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일들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겠느냐?


거듭남은, 비록 신비한 영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땅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거듭남은 사람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원 사건이다. 그것은 '땅의 일' 즉 땅에서 이루어지고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경험했다. 우리 중에 많은 이들이,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경험한 일인줄 안다.


이렇게 말씀하신 후, 예수께서는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신 자신의 말이 확실한 진리임을 강조하셨다.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우리'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세 구별된 인격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인격을 암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세 구별된 인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성경에 계시된 명확한 진리인 동시에 매우 신비한 사실이다. 또 주께서는 거듭남의 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하늘의 일'에 대해서도 말씀하실 것을 암시하신다. 그것은 후에 요한계시록 같은 성경에서 천국에 대해 말씀하실 것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하늘에 있는 인자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전통사본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 인자(人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본절은 예수님의 신인(神人) 양성을 증거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는 말은 예수께서 본래 하늘에 계셨음을 나타낸다. 그는 요한복음 1:1의 증거대로 '태초부터 계신 자'이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땅에 내려오신 후에도 여전히 '하늘에 있는 인자'이시다. 그의 신성(神性)으로 그는 항상 하늘에 계신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는 사람이시다. 땅에 있는 자들 중에 하늘에 올라간 자는 예수님 외에 없다. 물론 하늘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간 에녹과 엘리야를 비롯하여 모든 성도들의 영들이 있다(히 12:22, 23).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거듭남에 대해 스스로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질문케 된다. 여러분은 거듭났는가? 거듭남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수적인 자격 조건이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았는가? 거듭남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요한일서 3:9, 10는 말씀하기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했다.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고 있는가?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가? 또 요한일서 5:1은 말씀하기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고 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는가? 우리는 거듭남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자인가? 우리는 거듭난 자인가? 우리는 확실히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는가?


14-21절, 믿음과 구원


본문은 거듭남에 대해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계속이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거듭남이 자신의 십자가 사역에 근거함을 암시하시고 죄인들이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증거하셨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같이 인자도 그렇게 들려올려져야만 하리니


예수께서는 옛날 불뱀 사건을 언급하셨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산을 거처 에돔 땅을 둘러 행할 때 길로 인해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노하셔서 불뱀을 보내셨고 많은 사람들이 그 뱀들에 물려 죽었다. 그들이 죄를 뉘우쳤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셨고 불뱀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봄으로 죽지 않고 살게 하셨다.


이 불뱀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豫表)하였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실 것을 가리켰다. 요한복음에 몇 번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 특히 요한복음 12:32, 33은 그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을 암시하였음을 증거한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광야에서 장대에 단 놋뱀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목적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전통사본에는 '멸망치 않고'라는 말이 들어 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방법으로 믿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는 영생이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함으로 죽을 자가 되었고 그 곳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천국에 다시 들어가 영생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죄인이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어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얼머나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었는가?)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본절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이유를 증거한다.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이유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 즉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사랑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주셨다.


'세상'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물론 세상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구원하실 자들을 선택하셨다. 그래서 요한복음 6:39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예수께 주신 자들이 있고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또 그러므로 사도행전 13:48은 증거하기를,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서 영생을 주시기로 선택하신 자들의 수효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7:9은 증거하기를,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주셨다. 전통사본에는 독생자라는 말 앞에 '자기'라는 말이 있다. '자기 독생자(獨生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친히 낳으신 외아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하나님께 외아들이 있으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낳으신 외아들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를 언제 낳으셨는가? 그것은 영원 전이었다고 우리는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간 세계에서 출생된 자는 영원하실 수 없고 영원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실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증거하므로(요 1:1; 요일 5:20),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간의 관계는 영원적이라고밖에 우리는 달리 표현할 수 없다. 또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성경의 기본적 진리에 근거하여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의 본질적 일체와 숫적인 하나 되심을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주셨다. '주셨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그를 세상에 내어주셨음을 뜻한다. 우리는 그것을 성육신(成肉身)이라고 부른다. 영원하신 아들께서 육신을 입고, 좀더 정확히 말해 인간의 영과 육체를 취하여 사람으로 오셨다. '주셨다'는 말은 또한 아버지께서 그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음을 뜻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셨다. 예수께서는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마 20:28).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였다. (우리도 죽기위해 왔다->영원한 천국)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주신 목적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세상과 거기 사는 모든 죄인들은 죄로 인해 멸망할 처지에 있었다. 성경이 증거하는 죄인들의 마지막 상태는 불 붙는 지옥에 던지우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신다. 영생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이다.


그러나 그 구원은 믿음으로 얻도록 계획되었다.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행함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했다. 로마서 3:20의 말씀대로, 세상에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사야 64:6의 말씀대로,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정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법이다. (율법으로 수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3:21, 22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또 에베소서 2:8, 9도 밝히 증거하기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다.


그러나 실상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내가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만세 전의 선택과 이끄심이 없이는 내가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주께서는 요한복음 6:37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0:26에서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고 그 사랑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8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고, 요한은 요한일서 4:9, 10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했다.


[17, 18]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하여 세상이 구원받게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믿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아니하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정죄를 받은 것이라. 이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목적을 다시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세상을 심판하고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의 '심판하다'는 헬라어 원어(크리노)는 '정죄(定罪)하다'는 뜻도 있다. 독생자를 믿는 자는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정죄를 받은 것과 같다.


[19-21]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것이 정죄라. 즉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보다는 오히려 어두움을 더 사랑하니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라.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혹 자기의 행위가 책망받을까 함이라.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하나님 안에서 행한 자기의 행위를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하시더라.


그 정죄는 빛이 세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빛으로 나오지 않고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다. 그것이 믿지 않는 그들이 이미 정죄를 받았다는 증거이다. 구원을 받은 증거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 곧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증거는 빛을 멀리하고 오히려 어두움을 사랑하는 것이다. 불신앙은 하나님의 버리심의 증거이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행위가 드러나고 책망을 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적이나 간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는 낮의 빛을 두려워하며 밤의 어두움을 좋아한다. 그러나 진리를 좇는 자, 즉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의를 행하고자 하는 자는 빛으로 나아온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의 주요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주셨다. 그는 자기 독생자를 사람이 되게 하셨고 죄인들을 위한 속죄물로 십자가에 희생시키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희생하신 것과 같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정하신 구원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사람은 행위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 사람의 행위는 심히 부족하고 흠이 많다. 그러므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이미 정죄를 받은 것과 같다. 빛이 세상에 왔으나 그가 빛으로 오지 않고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 그 정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구주이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진리가 전파될 때에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사람들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 빛을 좋아하는 자와 어두움을 좋아하는 자, 구원 받는 자와 구원 받지 못하는 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와 버려두신 자로 나뉘인다. 그 둘 외에 중립지대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히 그 사랑을 받아들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자. 하나님의 예정하신 구원을 받자. 이제는 모든 죄를 다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와 그를 섬기며 성경에 교훈하신 대로 그의 뜻을 믿고 행하자. 그것이 복된 길, 평강과 형통의 길이고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22-30절, 세례 요한의 대답


본문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관한 제자들의 말에 대해 대답한 내용이다. 이 대답에서 요한은 자신이 자신의 위치와 직무를 바로 알고 있음을 증거하였다.


[22]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이런 일들 후에 예수와 제자들이 유대 땅으로 와 주께서 거기서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침례를 주시더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유대 땅으로 가셨고 거기에 머무시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셨다. 요한복음 4:2에 보면,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주었다. 세례는 구약의 결례(潔禮) 혹은 정결 의식에서 나왔다. 구약의 결례 의식은 물로 씻거나 피를 뿌림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율법에는 나병환자가 병이 나으면 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그에게 일곱 번 뿌리도록 규정되어 있다(레 14:7, 8). 에스겔은 맑은 물로 뿌려 정결케 함에 대해 예언하였다(겔 36:25). 이런 규례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물을 뿌리거나 물로 씻는 정결 의식들을 장로들의 유전으로 가지고 있었고(막 7:3, 4) 거기에서 세례 의식이 나왔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하는 의식이다. 사도행전 2:38이나 22:16에 보면, 세례와 죄씻음 혹은 죄사함이 함께 언급됨으로써 세례의 의미가 죄씻음임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상징적 의식들을 다 파하셨으나 세례와 성찬, 두 가지만 남기셨다. 그것들은 주께서 친히 명령하신 바이며 또 본문이 증거하는 대로 주께서 친히 행하신 일이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의 핵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매우 중요하며 또 참으로 복되다. 누구든지 죄씻음을 받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다. 죄의 댓가는 죽음과 멸망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씻으시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다. 세례는 복된 의식이다.


[23, 24]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요한도 살림 근처 애논에서 침례를 주고 있었으니 이는 거기에 물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더라. 요한이 그때까지는 감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었다. 애논은 요단강 상류 갈릴리 지방 가까운 쪽이다. 요한은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다. 마태복음 4:12, 13이나 마가복음 1:14에 보면, 예수께서는 요한이 옥에 갇힌 후에 갈릴리에서 전도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요한복음의 내용은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의 일들이었다. 이것들은 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 등에서 생략되어 있는 것들이었다. 요한복음은 이와 같이 예수님의 초기 사역들, 특히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의 초기 사역들에 대한 증거를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에 대해 보충적 성격을 가진다.


[25-27]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 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그때 요한의 제자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정결에 관하여 논쟁이 생기니 그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하기를 "랍비여, 보소서, 요단 강 건너편에서 당신과 함께 계셨고, 또 당신이 증거하신 그 분께서 침례를 주시니, 모든 사람이 그 분께로 가나이다."라고 하니 요한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하늘에서 주신 것이 아니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한의 제자들은 한 유대인과 결례에 대해 변론한 후 선생님에게 와서 요단강 건너편에서 그가 증거했던 자가 세례를 주므로 사람들이 다 그에게 간다고 불평스럽게 말했다. 그것은 분명히 아직 30세 가량밖에 안 된 젊은 사역자 요한에게 인간적으로 쓸쓸하고 우울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을 극복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그의 대답은 분명하였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그는 예수님의 가지신 모든 지혜와 은혜와 능력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는 것들임을 분명하게 말한 것이다. 상대방이 가진 은혜와 능력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도 그러하다. 우리의 지혜, 건강, 물질, 환경 여건은 물론, 우리의 믿음, 구원, 성화, 지식, 분별력, 능력, 바른 사역, 심지어 충성까지도 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자신의 많은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말하기를, 천지에 있는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왔다고 했다(대상 29:11, 14). 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말했다(고전 4:7).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우리의 구원도 그러하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고 말했다(롬 9:18).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믿고 그를 따르며 섬긴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히스기야 같은 경건한 자도 하나님이 잠시 그를 떠나시니 실수하였다(대하 32:31; 왕하 20:12-18).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이가 가진 좋은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기뻐하며 그것들을 존중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28]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다만 그 분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내가 말한 것을 증거해 줄 자는 바로 너희니라.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아 사람들에게 그를 소개하는 자에 불과함을 제자들에게 다시 강조하였다. 그는 자신의 위치와 신분과 사명을 바로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누구이심을,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자이심을 이미 밝히 증거하였고 또 자신은 그의 신끈을 풀 자격도 없는 자, 즉 그 곁에서 그를 섬길 자격도 없는 자임을 고백하였었다(요 1:33, 34; 막 1:7). 세례 요한처럼, 우리도 우리의 위치와 신분과 사명을 바로 아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신부를 얻는 사람은 신랑이지만 신랑의 친구는 곁에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으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게는 이런 기쁨이 충만하니라


세례 요한은 또한 예수님을 신랑에, 자신을 그 친구에 비유하였다. 그는 신부를 취하는 자가 신랑이지만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신랑의 친구가 크게 기뻐하듯이 자신이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다고 말한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귀한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30세 가량의 젊은 사역자로서의 인간적인 쓸쓸함이나 우울함이 없었다. 그에게는 불필요하게 인간적인 연약성이 없었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경쟁심이나 시기심 같은 인간적인 추한 모습이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기쁨이 충만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렇게 좋은 모습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그 분은 융성해야만 하나 나는 쇠잔해야만 하리라.


세례 요한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실 때이며 자신은 사명을 다했으므로 쇠해지고 사라져야 할 자임을 고백한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직분자와 봉사자에게 본이 된다. 직분자는 자신의 위치와 직무를 바로 알고 그것을 지키고 자기 본분을 다해야 하며 또 다른 이의 위치와 직무를 바로 알아 그를 격려하며 그의 일을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을 무시하지 말고 그에게 무례히 행치 말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시기와 교만, 미움과 다툼은 무서운 악이다. 특히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성경은 교훈하기를,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했다(갈 5:15). 또 성경은 교훈하기를, 할 수 있는 대로 서로 화평하고 덕을 세우라고 강조했다(롬 14:19).


결론적으로, 우리는 세례 요한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도 받아 누리기를 원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음을 알자. 우리가 가진 좋은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바로 알고 우리 자신을 높이거나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며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행하자. 또한 하나님께서 다른 좋은 것들도 주실 수 있음을 알고 이 세상 사는 동안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에게 구하며 살아가자. 또 다른 이들이 받은 좋은 것들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인 줄 알고 그들을 존중하며 시기하지 말자. 우리는 우리에게나 다른 이들에게나 모든 좋은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줄 알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위치와 직무를 바로 알고 그것을 지키고 또 상대방의 위치와 직무를 알아 그것을 존중하고 그를 격려하자. 어느 단체나 사회든지 사람이 각자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을 때 평안하며 발전할 것이다. 교회도 그러하다. 우리는 성도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또 주께서 주신 직분을 따라 그 직분에 충성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일을 논단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교만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시기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상대방의 위치와 직무를 인정하고 그를 격려하고 그의 잘한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기뻐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자이다. 그는 인간적으로 동년배인 예수 그리스도를 외모로 보지 않았고 그의 흥함과 자신의 쇠함에 대해 쓸쓸해 하거나 우울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기쁨이 충만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모든 봉사자들에게 본이 된다.



31-36절, 세례 요한이 증언


본문은 30절에 이어 세례 요한의 말의 계속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그가 신적인 인격이시며 그 안에 영생이 있음을 증거하였다.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위로부터 오시는 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자는 땅에 있어서 땅에 관한 일을 말하느니라. 그러나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만물 위에 계시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서 오시는 이'라고 증거하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과 본질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은 땅이 아니고 하나님이며 그의 본질도 땅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이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 인격이시다.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1:34에서 이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한 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요한복음 1장에서 사도 요한이 증거한 대로, 그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곧 하나님이신 말씀이시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시다(요 1:1, 14).


그러므로 본절에 두 번 나오는 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만물 위에 계시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그 근원이나 본질이나 권위나 영광에 있어서 피조세계 즉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을 초월해 계심을 의미한다. 세례 요한은 신적 인격이신 예수와 대조하여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땅에서 난 이'는 모든 인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세례 요한 자신을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그 근원이 다르고 그 본질이 다르고, 따라서 그 권위나 영광이 다르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신적 영광을 믿는다. 그는 단순히 땅 위에 사신 한 인간이 아니셨다. 그는 단순히 한 훌륭한 인간 선생이 아니셨다. 그는 위로부터 오신 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이, 땅에 속하지 않고 만물 위에 계신 이이시다. 그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그의 본질은 하나님이시다. 그의 권위와 그의 영광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그의 신적 인격과 그의 신적 영광을 믿는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말했다(고후 4:6).


[32, 33]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그 분이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시나 아무도 그 분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느니라.

그 분의 증거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참되시다는 것을 확증하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그가 보시고 들으신 것을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하신 내용은 다 진실하고 확실하며 믿을 만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말들, 그 어떤 인간 스승의 말들과도 비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하고 확실하며 믿을 만한 내용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의지를 예수님처럼 밝히 증거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친히 하나님 아버지를 보시고 그의 뜻을 들으신 자이기 때문이다.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인간은 온 세상에, 인류 역사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가 증거한 내용들을 받는 자들이 없었다. 그것이 어둡고 부패한 세상의 현실이었다. 세상은 가장 진실하고 확실하고 믿을 만한 말씀을 의심하며 불신하였다. 세상은 얼마나 어둡고 어리석은가! 그러나 예수님의 증거한 말씀을 받는 자는 하나님을 참되시다고 증거하는 자가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그렇지만 반대로 그의 증거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되다고 증거하는 것과 같다.


[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말씀하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라.


하나님의 보내신 자, 즉 땅에서 나오지 않고 땅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께로서 나오시고 하나님께 속한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실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다.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골 2:9).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자이셨고 자신들은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와 진리를 공급받았다고 말했다(요 1:14, 16).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모든 세상의 말들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구약의 선지자들의 말들과도 구별된다. 선지자들은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거하셨고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서 흘러넘쳤다. 이런 점에서 복음서들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들은 탁월하다.


여기에서 조금 증거된 바와 같이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영이시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신약의 사도들도 성령의 감동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들을 전했다. 그것들이 오늘날의 성경들이다. 사도 시대 이후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책 안에 충족하게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있다. 성경을 건전하게 해석한 성경적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 성경은 항상 건전하게 해석해야 한다.


성경 교훈을 충실히 따르는 옛길은 항상 좁은 길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령을 빙자하여 넓은 길, 세상적인 길, 자신들의 욕심을 따르는 길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좁은 길을 걸으라고 명하셨다. 마태복음 7:13,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또한 사도 바울도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어려운 시대가 이를 것을 예언하였다. 디모데후서 4:3, 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오늘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이다.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어 모든 것들을 그의 손에 주셨으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기 외아들을 사랑하셔서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다. 마태복음 11:27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또 마태복음 28:18에 보면,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1:2은 예수님을 '만유의 후사[상속자]'라고 불렀다. 우주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고, 특히 세상에 사는 모든 영혼들이 그의 손 안에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그를 믿고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이 다 그의 손 안에 있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고 실제로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그가 구원하시면 그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고, 그가 구원하지 않으시면 구원할 자가 없다.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더라.


인간의 구원은 그에게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그는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본절에 '순종치 아니하다'는 헬라어 원어(아페이데오)는 '믿지 아니하다'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지금도 영생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장래에도 영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생을 얻는 유일한 조건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죄인에게서 하나님의 진노가 제거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서 제거되지 않고 그 사람 위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의 절대적 필요성이 있다.


결론적으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를 기억하자.

첫째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신적 영광을 감사하며 찬송하자. 그는 단순히 인간 중에 훌륭한 어떤 분이 아니시다. 그는 땅에서 난 자가 아니시다. 그는 인간이셨으나 그의 근원과 본질은 땅에 속하지 않는다. 그의 근원과 본질은 하나님께 속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에게는 신적 구주가 있으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를 통해 경배와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도우신다.


둘째로, 성령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자.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특히 복음서들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이며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말씀이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을 건전하게 해석하여 하나님의 바른 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 오늘날 성령의 이름을 빙자한 넓은 길, 섞인 말씀, 육신의 사욕을 좇는 말씀을 분별하고 옛길, 좁은 길, 건전한 길을 사모하며 굳게 붙들자.


셋째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교회 생활은 헛수고이다. 교회 생활은 단순히 경건한 분위기나 평안한 심리상태를 맛보는 것이 아니다. 교회 생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고 그 구원의 감격 때문에 즐거이 하나님을 섬기며 따르는 생활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을 믿었는가? 또 그를 진실하게 믿고 있는가? 여러분은 참으로 영생을 소유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였는가?




4장: 생수를 주시는 자


1-18절,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본문은 예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 성의 한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이다. 본문을 통해, 예수께서는 자신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는 자임을 증거하신다.


[1-3]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그러므로 예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를 삼고 침례준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것을 주께서 아시고 (예수께서 친히 침례를 주신 것이 아니고 그의 제자들이 준 것이지만) 유대를 떠나서 다시 갈릴리로 가시니라.


유대 땅 요단강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모여 들기 시작했고 그의 제자들에게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그 사실을 들은 줄 아시고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려 하셨다. 바리새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건함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과 일찍부터 충돌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때가 되면 그들과 충돌하게 될 것이며 예수께서는 바로 그들에 의해 정죄를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 때가 아니었다.


[4, 5]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그런데 주께서는 사마리아를 거쳐 가셔야만 하였더라. 그리하여 주께서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수칼이라 하는 사마리아의 한 성읍에 오셨는데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를 지나가야 하셨다. 사마리아는 유대 지방에서 갈릴리 지방으로 가는, 즉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지방이었다. 예수님의 일행은 사마리아 지방에 수가라는 한 동네에 이르렀다. 요한은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거기에서 가깝다고 표현한다. 그 땅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세겜을 가리켰을 것이다(수 24:32). 수가는 그 세겜 땅에 가까운 동네이었다.


[6, 7]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거기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여행으로 피곤하시므로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는데 때는 제 육시쯤이더라.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는데,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실 물을 좀 달라."고 하시더라.


수가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여행에 피곤하여 우물 곁에 앉으셨다. 때는 제6시쯤 되었다. 요한복음에서의 시간은 로마 사람들의 방식을 따르는 것 같다. 그러면 제6시는 오후 6시이다. 저녁은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우물에 나오는 시간이었다(창 24:11). 사마리아 여자는 그때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는 하루 종일 걸으셨기 때문에 피곤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건장한 체력을 가지신 것 같지 않다. 예수께서 여행에 피곤하신 것은 그가 참으로 사람이셨음을 증거해준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구절도 많이 있으나 그가 사람이심을 증거하는 구절도 많이 있다. 그래서 성경을 믿는 역사적 기독교회는 예수께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독특한 인격이시라고 고백한다.


[7-9] . . .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는데,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실 물을 좀 달라."고 하시더라. (이는 그의 제자들이 음식을 사기 위하여 성읍으로 갔음이라.) 그때 사마리아 여인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유대인인 당신이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시나이까?"라고 하니, 이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과는 교제가 없기 때문이더라.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하셨다. 사마리아 여자는 의아한 마음으로 예수께 반문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그것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반쯤 이방인으로 여겨서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기 때문에 자유로이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할 수 있었다. 우리가 상대방의 영혼을 사랑한다면, 어떤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너에게 말한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으리라."고 하시니


예수님의 참된 관심은 물을 얻어 마시는 것이 아니고 그 여자의 영혼의 구원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하나님의 선물과 생수에 대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요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롬 6:23). 사마리아 여자가 그에게 물을 좀 달라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안다면, 그 여자는 도리어 그에게 생명의 물을 구하였을 것이다. 이 생수는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11, 12]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그 여인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당신은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그 생수를 얻겠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그와 그의 자손들과 가축들이 여기서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하시니이까?"라고 하니라.


다시 번역하면, "선생님, 당신은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당신이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게 한 우리 조상 야곱보다 당신이 더 크니이까?" 그 여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어떤 물질적 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13,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그에게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그 우물의 물과 자신이 주는 물을 대조시키셨다. 예수께서 주시는 물은 물질적 물이 아니고 영적 물을 가리킨다. 사람은 물을 마시지 못하면 갈증을 느끼고 그것이 심하면 몸에 힘이 빠지고 더 계속되면 죽을 것이다. 목마름이 심하면 죽는다. 그러나 목말라 죽을 지경이었던 삼손이 물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며 소생했듯이(삿 15:18, 19), 목말랐던 자가 물을 마시면 힘이 생긴다. 물은 생명에 필수적 요소이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는 영혼의 갈증, 마음의 갈증이 있다. 그것은 죄로 인하여 생긴 여러 가지 슬픔과 불안과 불만족이다. 그래서 죄인에게는 참된 안식과 만족이 없다. 그것이 심하면 삶의 의욕과 기쁨을 잃게 된다. 모든 사람은 이 갈증을 가진 채 영원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런 슬픔과 불만을 해소하는 물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기쁨과 힘을 주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을 가리킨다. 그 물은 다른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시는 성령님을 가리킨다(요 7:37-39). 죄인들은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관심과 흥미를 보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물을 아직도 물질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려 했던 것 같다. 그는 한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도 않고 또 이 우물에 와서 물을 길을 필요도 없는 그런 물이 있다면 자기에게도 달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예수께서 영적인 물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영적인 물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며 그 사마리아 여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16-18]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실상 그 여인에게는 영적인 깊은 갈증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삶의 깊은 불만족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그것을 일깨우기를 원하셨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여자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셨다. 그러나 병자가 자신의 치명적 병을 바로 알아야 살 길이 있듯이, 사람은 자신의 치명적 문제를 바로 알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 여자는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으나 그 남자는 그의 남편이 될 수 없는 남자이었다. 즉 그녀는 다른 여자의 남편을 빼앗아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여자의 문제는 결혼 생활에 불성실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혼과 재혼을 반복했다. 그 가운데서 그가 터득한 것은 인생은 만족이 없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영혼의 불만족과 갈증만 더해갔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깨달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 여자의 문제는 결혼 생활에 있었다. 사람마다 문제가 다를 수 있다. 예수께 찾아와 영생의 길을 질문했던 한 부자 청년의 문제는 돈이었다(마 19:16-22). 사람은 자신의 치명적 문제를 바로 알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예수께 나오는 자는 자신의 치명적 문제, 자신의 치명적 죄를 바로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청산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영혼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고, 참 평안을 얻을 수 있고,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고, 영생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믿음의 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다.


말씀을 맺는다. 여러분은 예수가 누구이신지 확실히 아는가? 여러분은 예수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는 자이심을 확실히 아는가? 여러분은 예수가 여러분의 치명적 문제를 치료해 주실 수 있는 자임을 아는가? 여러분은 예수가 여러분의 치명적 죄를 깨끗이 사해 주실 수 있는 자임을 아는가?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문제를 깨달았는가?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았는가? 인생의 문제의 해결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그는 성경에 계시된 바로 그 분이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죄인을 부르시고 구원하신다. 여러분은 참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여러분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가? 여러분은 참으로 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는가? 성경 읽기를 좋아하고 기도하기를 좋아하는가? 교회 오기를 좋아하는가? 성경을 배우기를 좋아하고 성경 교훈대로 살기를 좋아하는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셨는가?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는가? 죄사함과 영생을 받았는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아직도 '예'라고 대답할 수 없는 분이 있다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시기를 바란다. 오늘 죄사함과 영생을 얻고 성령을 선물로 받기를 바란다.


19-26절, 참된 예배


[19, 20]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의 과거를 훤히 아시는 예수는 선지자 곧 하나님의 영을 가진 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예배의 장소에 대해 질문하였다. 그것은 평소에 그 여자가 가졌던 관심거리이었던 것 같다. 예배에 대한 관심은 경건함의 표현이다. 그 여자의 마음 속에는 경건함이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은 이 산 즉 세겜 서쪽에 있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즉 성전이 있는 시온 산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했다. 그것은 그 둘 중에 어느 말이 옳은가라는 질문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참 예배할 때가 오는데 그것은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예배하는 때가 아니라고 하셨다. 구약 시대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장소에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식으로 행해져야 했다. 그러나 이제 어떤 장소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예배드리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약 시대를 가리켰다. 신약 시대의 예배는 어떤 장소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조용한 장소이면 어디나 예배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시끄러운 곳은 좋지 않다. 또 정숙한 방식이면 된다. 무질서한 방식은 좋지 않다. 이방종교는 옛날부터 광란적 방식으로 그들의 신들을 섬겼다. 그러나 참 종교인 기독교는 그렇게 예배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므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도 인격적이어야 한다. 요즘 많은 교회들에서 예배 형식이나 찬송이나 기도가 세속화 되었다고 생각된다. 예배나 찬송이나 기도는 보다 정숙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본절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23절에도 두 번이나 그런 호칭이 나온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라는 명칭은 그가 만물의 근원이 되심과 그의 권위와 위엄, 또한 그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두려우신 아버지이신 동시에 자녀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이시다.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이후 북방 이스라엘 나라에는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역대하 15:3에는 "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이제 오래였으나"라고 말씀했다. 그들이 앗수르에 멸망하여 온 세계로 흩어진 이후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건이 남아 있었다. 또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온다고 성경은 예언하였다. 이사야 2:2, 3,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예수께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드리는 자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혹은 위선적으로 예배드리는 자들도 있음을 암시하신다. 물론 우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주께서는 참된 예배 방식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라고 말씀하셨다. '신령'이라는 헬라어 원어(프뉴마)는 '영'이라는 단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엡 6:18)이나 인간의 영을 다 가리킬 수 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영을 가리킨다면, '신령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배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사람의 영을 가리킨다면, '신령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심령으로, 중심으로, 마음 속으로' 예배한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단지 외형적으로나 외모적으로나 형식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둘 다 좋은 뜻이 되지만, 다음 절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아마 후자로 생각된다. 또한 '진정'이라는 헬라어 원어(알레데이아)는 '진리'와 '진실'을 다 가리킬 수 있는 단어이다. 만일 그것이 진리라는 뜻이면,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말은 '진리 안에서, 진리의 말씀 안에서' 예배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는 뜻이면,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말은 우리 말 번역대로 진실하게, 진심으로,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거짓으로, 위선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둘 다 좋은 뜻이 되지만,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후자로 생각된다.


참된 예배가 시행될 시기는 '이 때' 곧 메시야의 오심으로 시작된 신약 시대이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상징적, 예표적 형식들이 많았다. 그것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암시하였다. 그러나 때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속죄 사역을 완수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상징적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이제 우리의 예배는 단순히 외형적, 외모적 예배가 아니다. 예배에서 장소의 치장이나 의복의 치장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깨끗한 장소이면 족하고 단정한 복장이면 족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참된 예배자들을 찾으신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원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하나님께 심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영은 물질이 아니므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나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 실체이다. 영은 단순히 기운이나 에너지 같은 비인격적 실체가 아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인격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외형적으로, 형식적으로 섬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배의 장소 치장이나 의식 단장에 힘쓸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적으로, 심령으로, 진심으로 예배해야 한다. 그리심 산이든지 예루살렘 성이든지 가리지 말고 어디서나 자유로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의 십자가 공로를 힘 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를 섬겨야 한다.


[25, 26]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사마리아 여자에게 메시야에 대한 지식과 소망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지와 고난의 긴 과정 속에서 사마리아 사람들, 그들에게까지 이런 깨달음과 소원을 주셨던 것이다. 사실 메시야께서 오셔서 속죄 사역을 이루심으로 예배의 참된 방식이 밝히 드러날 것이며 과연 그렇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셨다. 비록 과거에 다섯 남편을 가졌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으나 여전히 영혼의 목마름과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던 그 여자이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이 있었고 메시야에 대한 지식과 소망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여자에게 메시야를 증거해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만나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첫째로, 참 예배는 장소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예배에 있어서 외적인 치장, 장소적 치장, 형식적 치장은 중요하지 않다. 둘째로, 참 예배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심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과 진실한 믿음, 성령의 감동과 도우심, 심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 셋째로, 참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십자가 공로 안에서, 그의 완전한 의(義) 안에서, 그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찾으신다. 우리 모두 이런 참 예배자들이 되자.


27-42절, 수가성 사람들의 구원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제자들이 예수께 묻지 않은 것은 그를 신뢰하고 경외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무시하거나 불신했다면 어찌하든지 그의 흠을 잡으려 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따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신앙은 인간편에서는 자유로 선택하는 일이며 강압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지로가 아니고 자원함으로 하는 봉사를 기뻐하신다.


[28, 29]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 사마리아 여자는 물 긷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 놀라운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러 달려갔다. 그것은 그가 평소에 하나님을 사모하고 구원을 사모하고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을 잘 나타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메시야의 발견을 그렇게 크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여자는 동네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그 증거로서 그가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했다고 제시한다. 그가 신적인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한 사람의 과거를 그렇게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수가 성에 살고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도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했고 메시야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사모하고 기다렸음에 틀림 없다. 그들이 그렇게 준비되지 않고서는 그 여자의 말에 그렇게 반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자들에게 만나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구원하신다. 사람의 준비란 자신의 죄악됨과 허무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을 갈망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5:3-6).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준비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31-34]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께서는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양식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양식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그의 일은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이다. 요한복음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러므로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와 세계 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을 행하며 그것을 완수하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요, 또한 그것은 우리의 양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루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밥을 먹어도 배가 고프고 만족이 없어야 할 것이다.


[35]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유대 땅에서 추수는 4월초에 보리 추수가 시작되고 5월말에는 밀 추수가 시작된다. 추수 시기는 지역에 따라서, 즉 지역이 산지냐 계곡이냐에 따라서 따르다. 전체적으로 보면, 추수는 보통 8월말까지 계속된다. 예수께서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그 때는 12월이나 1월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사건은 요한복음 2:13에 언급된 첫번째 유월절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때에 있었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4월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3:22에 "이 후에"라는 표현에서 암시된다. 또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는 이 말은 요한복음 5:1에 나오는 '유대인의 명절'을 또 다른 하나의 유월절로 볼 수 있게 만들며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3년 이상으로 만든다. 물론 그 명절을 오순절이나 초막절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유월절이 하나 생략된 것이어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3년 이상이 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다음 절에 나오는 '이미'라는 말은 여기에 붙여져야 한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이다. 아직 곡식 추수는 넉달이 지나야 하지만, 영적인 추수는 이미 때가 되었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뿌리는 자는 모세와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을 가리켰다. 그들은 다 씨를 뿌리는 자들이었다. 거두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가리켰다. 전도는 이 두 방면을 가지고 있다. 씨를 뿌리는 일도 있고 곡식을 거두는 일도 있다. 물론 그 둘은 다 수고로운 일이다. 그러나 일꾼들은 그 일한 대로 상을 받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3:8,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다니엘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그들이 거두는 것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들이다. 이렇게 하여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는 함께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37, 38]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거두는 일을 할 것이다. 그들은 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미 앞서간 자들이 심는 일을 많이 하였다. 세례 요한이 심는 일을 하였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노력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이 노력한 것을 거두러 보냄을 받았다. 그들은 심는 수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거두는 일도 수고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이들이 심느라고 노력한 그것들을 이제 거두게 될 것이다. 심는 자도, 거두는 자도 다 주의 일을 하는 것이다. 전도 사역은 심는 일과 거두는 일을 다 포함한다. 심어야 거둘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는다고 금방 거둘 것이 있지는 않다. 모든 것이 다 때가 있다. 열심히 심다 보면, 거둘 때도 있다. 시편 126:5, 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수가 성에는 추수할 곡식이 많이 있었다. 낫만 대면 추수할 곡식이 많이 있었다. 그 여자는 예수께서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다 내게 말했다고 증거하였다. 그 여자의 증거는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여자의 간증과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었다. 그것은 영혼들을 추수하는 것과 같았다.


[40-42]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그 여자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마리아인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준비된 마음이 있었음에 틀림 없다. 그들은 예수께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였다. 하나님과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이 아니고서는 그런 요청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들으셨고 이틀을 유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가 세상의 구주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 전통 사본에는 '세상의 구주'라는 말 다음에 '그리스도'라는 말이 있다.


결론적으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를 배운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완수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자. 하나님의 뜻과 그의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영혼 구원의 일이요 전도하는 일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다. 이 일을 행함으로 우리의 마음에 만족을 얻자. 둘째로, 전도 사역에는 두 방면이 있다. 하나는 씨를 심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곡식을 거두는 일이다. 우리는 이 둘을 다 힘써야 한다. 우리는 복음을 널리 전파하며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또 사람들을 믿게 하고 교회로 인도해야 한다. 열심히 심어야 거둘 수 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진다. 심는 자들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관심과 갈망과 소원을 일으킨 후, 거두는 자들을 통해 그들을 예수께로, 참된 교회로 인도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열심히 전도하며 충성하자.


43-54절,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심


[43, 44]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예수께서는 수가성에 이틀을 유하셨고 그 후에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다. 헬라어 원문에는 44절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전에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었고 그래서 유대땅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갈릴리에서도 자신을 증거하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뜻일 것이다.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본절의 명절은 일차적으로 요한복음 2:13, 23에 언급된 유월절을 가리킬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며 여러 가지 표적들을 행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후 유대땅에 약 8개월 가량 지체하신 것 같다.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갈릴리에서의 전도 사역은 그 후에 시작된 것 같다.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예수께서는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셨다. 그 곳을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고 언급한 것은 요한복음 2장에 기록된 기적 사건이 확실한 사실이었음을 다시 증거한 것이다. 그 곳에 왕의 신하가 있었다. '왕의 신하'라는 헬라어(바실리코스)는 '왕에게 속한 높은 관리'를 가리킨다. 그는 사회적으로 존귀하고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어 있었다. 갈릴리 가나와 가버나움은 나사렛을 경유하면 약 40킬로미터(서울에서 수원까지의 거리) 정도 되는 꽤 먼 거리이었다. '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49, 51절), 그의 아들은 아직 나이가 어렸던 것 같다. 또 그의 종들이 가버나움 집에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그의 집무실은 가나에 있었으나 그의 집은 가버나움에 있었던 것 같다.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그는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에 오셨음을 듣고 가서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청하였다. 저가 예수께 와서 그렇게 청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유대땅에서 기적 행하셨음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들은 소문에 의해 예수께 대한 약간의 믿음이 생겼다. 물론 그 믿음은 아직 매우 약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거의 죽게 되었고 아들을 살리기 위한 다른 방도는 없어 보였다. 다행히 그는 갈릴리 가나에 오신 예수께 그 문제를 아뢰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예수께서는 탄식어린 말투로 사람들 속에 믿음이 없음을 지적하셨다. 사람들은 표적들과 기사들을 보지 못하면 믿지 않을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도 그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확실한 믿음을 갖도록 기적들을 주셨다. 기적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믿음의 방편이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왕의 신하의 마음상태도 비슷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에게도 굳건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들은 소문만 가지고도 예수님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예수가 내 아들을 고쳐주면 믿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 신하는 자기 아이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서 고쳐주시기를 구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은 것 같지 않다. 그가 예수님을 신적 구주로 믿었다면, "주여 말씀으로만 하소서, 그러면 내 아이가 낫겠나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수고스럽게 그의 집까지 내려오시기를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굳센 믿음을 가지지는 못했다.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예수께서는 그 신하의 간청을 들어주셨다. 그는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쉽게 말씀하셨다. 그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생긴다(롬 10:17). 믿음은 말씀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사람이 믿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말씀을 들어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는 말씀을 믿고 갔다. 그가 갔다는 것은 말씀을 믿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가 믿지 못했다면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었기 때문에 가버나움으로 갔다.


[51, 52]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는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는 것을 만났다. 종들은 그의 아이가 살았음을 전해주었다. 그 아비는 종들에게 아들의 낫기 시작한 때를 물었다. 그것은 예수의 말을 확인하려 한 것이요 예수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지를 확인하려 한 것이었다. 종들은 "어제 제7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라고 대답했다. 4:6에서 시간에 대해 설명한 대로, 제7시는 로마 시간 계산법대로의 제7시 즉 오후 7시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면 '어제 제7시'라는 말은 그가 밤을 지나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종들을 만났음을 의미할 것이다.


[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 오신 것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시고 그로 인하여 그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시려는 뜻이 있었다. 그 신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다. 그는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직접 체험하였다. 그는 그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확신했다. 그 자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가족들 전체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하나님의 귀한 구원이 그와 그의 가정에 임하였다.


하나님의 방법은 오늘날에도 계속 기적을 체험함으로써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 중의 일부만을 성경에 기록케 하셨고 이제는 성경을 통해 사람들로 예수를 믿게 하신다. 요한복음 20:30, 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할 수 있다.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을 보충하는 성격이 있다.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전도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언급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그 전에 유대 땅과 사마리아 땅에서 무슨 일들을 하셨는지를 증거한다. 또 갈릴리에서 두 차례 기적을 행하신 일들도 증거한다. 다른 복음서들에 증거된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전도 사역은 이런 일들 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가 아직 두드러진 전도 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벌써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은 나타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구원의 기본적 진리들을 본다. 첫째로, 세상에는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세상적으로 고상하고 부요한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심한 열병으로 거의 죽게 된 아들처럼, 세상에는 죄로 인하여 지옥에 던지울 수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죽기 전에, 지옥에 던지우기 전에 구원이 필요한 자들이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구주로 세상에 오셨다. 그는 단순히 육신적으로 죽을 병자들을 고쳐주실 수 있는 구주가 아니고, 마귀의 종이 되어 죄만 짓던 자들,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을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시고 영생할 의인을 만드시는 구주이시다. 그가 갈릴리에 오신 것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시기 위함이었듯이,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셋째로, 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왕의 신하는 단지 아들의 병고침을 받은 것뿐 아니라, 그와 그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믿음에는 세 단계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예수님에 관해 듣고 믿는 것이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께 나아와 간청하였다. 그의 믿음은 비록 약한 것일지라도 예수께 나아와 무엇을 구하는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널리 전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믿는 것이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믿고 갔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들을 직접 읽고 듣고 믿을 수 있다. 셋째는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그를 믿는 것이다. 왕의 신하는 주의 능력을 체험하였고 그와 그의 온 집이 다 예수님을 믿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능력을 확인하고 그를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여 우리와 우리의 온 가족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5장: 생명의 주님


1-18절,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그 후에'라는 헬라어 원어(메타 타우타)는 '이 일들 후에'라는 뜻으로 시간의 상당한 경과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유대인의 명절'은 많은 사람들이 유월절로 본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절기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절기이며 또 겨울이 지난 다음에 맞는 첫번째 큰 절기이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들을 증거한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와 누가복음들에서는 이런 사건이 생략되어 있다.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옛날 영어성경은 '양문 곁에'라는 말을 '양의 시장 곁에'라고 번역했다. 시장이나 문은 헬라어 원문에 생략된 명사를 추측하여 첨가한 것이다. '베데스다'(벧 헤스다)는 아람어로서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행각은 벽이 없고 지붕과 기둥만 있는 방을 가리키는 말로서 주랑이라고도 한다.


[3, 4]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베데스다 못에 있는 다섯 개의 행각들 안에는 소경들, 절뚝발이들, 혈기 마른 자들 등의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의 동함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것은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무슨 병이든지 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기한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베데스다 못은 과연 하나님의 자비의 집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긍휼이 많으심을 나타내며 그러나 그 은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에게만 한 사람씩 허용되는 고귀한 것임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모하는 자들에게 병고침의 은혜를 주시고 계셨다.


[5-7]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거기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병이 매우 오래된 것을 아셨다. 그는 일생의 절반을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는 병 낫기를 사모하였으나 물이 동할 때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병고침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병 낫기를 간절히 사모하지만 좌절하고 낙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는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의 동하는 물보다 더 놀라운 자비의 구주이시다. 그는 그의 영육의 모든 문제를 고쳐주실 수 있는 구주이시다.


[8, 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께서는 38년 된 그 병자에게 단순하게 말씀하셨다.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라, 걸어가라." 그것은 38년 동안의 투병 생활을 끝내게 하시는 치료의 말씀이었다. 그 병자는 그의 말씀대로 즉시 고침을 받았다. 그는 자리에서 즉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38년 동안 익숙했을 눕는 자리를 치워버리게 되었다. 예수님의 신적 능력이 나타났다. 그의 말씀의 능력은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던 하나님의 능력과 동일하였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그의 신적 능력을 통해 충분히 증거되었다.


[10-13]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러나 유대인들은 잘못된 안식일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엄하게 명령하셨다. 그 날은 온종일 휴식하며 노동이나 세속적인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 장사하는 자는 가게 문을 닫아야 하고 공장을 경영하는 자는 모든 일을 중단하고 직원들에게 휴식을 주어야 한다. 그 날 온종일 쉬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로 모이기 위해서이다. 공적인 예배의 시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실상 단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결국 자신의 믿음이 자라고 견고해진다.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유익은 구약의 토요 안식일 뿐만 아니라, 신약의 주일 안식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나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아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그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의 행각에 있을 것이 아니고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경배해야 했다. 오늘날 우리는 안식일에도 영혼 구원의 일을 할 수 있다.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에서 죄와 병이 관계가 있음을 증거하셨다. 모든 병은 죄 때문에 이 세상에 왔다. 천국에는 죄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어떤 병도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병고침을 받은 그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했다. 죄를 지으면 다시 병이 재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15-18]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아버지의 일을 행하셨는데, 그것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이며 전도하는 일이다. 누가복음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마가복음 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주께서는 이 일, 곧 영혼 구원의 전도의 일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셨고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 곧 사명이다.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마가복음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요한복음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오늘도 우리는 이 일에 힘써야 한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다고 그를 비난하였고 그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신적 인격이시다. 그는 신적인 구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38년 된 병자도 쉽게 고쳐주실 수 있었다. 그는 육신의 병 뿐만 아니라 영혼의 죄 문제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구주이시다. 그는 신적 구주이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예수님은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38년 된 병자를 단번에, 쉽게 고쳐주셨다. 그는 그 병자에게 단지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라, 걸어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를 깨끗이 고쳐주셨다. 그는 놀라운 신적 구주이시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의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38년보다 더 오래된 인간의 죄병을 단번에 고쳐주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우리의 죄를 단번에 사해주시는 구주이시다. 그의 구원은 영육의 완전한 구원이다.


사람의 죄는 죄책(罪責, guilt)과 부패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죄책이란 죄의 법적인 책임을 가리키고 부패성이란 죄의 실제적 성질을 가리킨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이 두 요소가 생긴다. 이 두 요소가 다 중요하지만, 둘 중에 보다 중요한 것은 죄책, 즉 하나님 앞에서의 법적인 책임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의 죄책, 즉 우리의 죄의 법적 책임을 단번에 용서함 받은 것이다. 우리의 부패성, 즉 실제적 죄악성은 서서히 극복된다. 예수께서는 단번에 우리를 죄책으로부터 구원해주셨고 완전한 의를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육의 완전한 구주이시다. 그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후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은 후 다시 죄를 지으면 그 병이 재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구원받은 성도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 있다. 히브리서 12:5-13은 이렇게 말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는 삶이어야 한다. 그것이 성화의 삶이다. 그런 결심과 노력이 없으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요 중생하지 못한 자일 것이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구원받은 성도는 거룩의 열매를 맺다가 영생에 이른다. 죄 안짓는 거룩의 삶은 성도의 당연한 삶이다. 만일 성도가 거룩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거룩의 열매를 맺는다면, 그는 풍성한 평안과 형통을 경험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일을 본받아 하나님의 일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죄인을 구원하는 일이다. 그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 곧 전도하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도 이 일을 위해 우리의 관심과 시간과 물질을 다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에는 원수 마귀의 시험과 핍박도 있을 것이다. 죄인들이 구원받는 일을 가장 싫어하는 자가 사탄이다. 사탄은 우리가 죄 가운데서 영원한 멸망을 받기를 원하는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세 전에 작정하신 뜻대로 구원하실 자들을 다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는 그의 도구가 되어야 하고 어떤 고난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그의 일을 받드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9-29절, 아들의 살리시는 사역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에 그를 핍박하고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구원 사역 즉 사람을 살리시는 사역에 대해 말씀하셨다.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으로서, 거짓말들이 많은 세상 속에서 참된 것들을 말씀하심을 나타낸다. 그가 말씀하신 내용은, 아들은 아버지의 행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오직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고 행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베데스다 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을 두고 하는 말씀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종종 내려보내셔서 못의 물을 동하게 하셨고 그때 그곳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병자가 고침을 받게 하셨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일을 보셨고 자신도 병자를 고치신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행하신 대로 행하셨다. 아들은 아버지의 행하시는 대로 행하신다.


[20, 21]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자기의 행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이신다. 또 그는 '그보다 더 큰 일'도 보이시는데,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 곧 중생(重生, 거듭남)은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큰 일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는 표현은 예수께서 주권(主權)을 가진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1:27에서도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영혼이 살아야 장차 몸도 부활할 것이다. 중생은 구원의 시작이요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심은 사람의 영육(靈肉)을 다 구원하시는 것이다.


[22, 23]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22절은 예수께서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사람의 심판이 아들의 손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23절은 아버지께서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신 목적을 말한다. 그 목적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공경함같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 함이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자들은 그가 보내신 아들을 공경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자들은 그 아들도 공경하지 않을 것이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그 다음에 언급되는 말씀이 중요한 내용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영원한 참 생명을 얻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영원한 참 생명을 얻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말도 단지 귀로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고 순종함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에 대한 믿음은 그의 인격을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의 말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그의 인격을 믿는 것인 동시에 그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 '얻었다'는 헬라어 원어는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소유한 자이다.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말씀은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의롭다 하심'의 복음이다. 믿는 자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며 따라서 그에게 정죄함이 없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서 완료시제로서 구원의 불변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성경의 다른 말씀들과 일치한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은 역시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중요함을 암시한다. 그것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며 듣는 자는 살아날 것이라는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는 것은 구원의 현재적 측면인 중생(重生, 거듭남)을 가리킨다. 그것은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을 살리시는 사역의 첫번째 단계이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다시 살아났다(엡 2:1).


[26, 27]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본절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가능한 이유를 증거한다. 그 이유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셨고 또 사람이 됨을 인하여 심판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사람이 되셔서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리적 형벌을 받으심으로 대속(代贖) 사역을 성취하셨다. 그가 한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모든 죄를 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신성(神性)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었다. 그의 대속 사역을 통해 그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여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게 되신 것이다.


[28, 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하나님의 아들의 사람 살리시는 사역의 두 번째 단계는 장차 있을 몸의 부활이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죽은 자들을 묻은 무덤들은 다 열리고 시체들은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장차 두 종류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는 생명의 부활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의 부활이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이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은 되지 못하나 참된 믿음의 증거로서 중요하다. 믿는 자는 죄 짓지 않고 거룩의 열매를 맺고 선을 행하다가 영생에 들어가고 영광스런 부활에 이를 것이다. 이런 두 종류의 부활에 대해서는, 구약성경 다니엘 12:2도 증거하기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귀한 진리를 생각하게 된다.


첫째로, 모든 사람은 죽은 영혼이 다시 살고 영육이 영원히 살기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사람이 다시 살고 영원히 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지 않은 자들은 그를 믿으라.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믿은 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자. 영생은 단지 미래에 얻을 것이 아니고 이미 소유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는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변할 수 없는, 확정된 구원이다.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그 구원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영광스런 몸의 부활을 소망하자. 그것은 성경이 약속하는 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복된 소망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행으로 우리의 참된 믿음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영생에 이를 것이며 영광스런 부활에 참여할 것이다.


30-47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한 증거들에 관해 말씀하신 후, 유대인들이 그를 믿지 않는 이유에 대해 부언(附言)하셨다.


[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21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고 말씀하셨었다. 그것은 그가 주권자이심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 그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얼른 보면 앞의 말씀과 모순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예수께서는 단지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심을 증거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주권적 하나님이시지만, 항상 아버지와 일치되게 행동하신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즐거이 복종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심판은 항상 바르고 정당하다.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롭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도 그러하다.


[31, 32]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예수님은 지금 단지 자신에 대해 주관적 증거를 하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만일 단지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증거할 뿐이라면 그의 증거는 참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며 그의 증거는 참되다. 예수님은 이 때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를 의미하신 것 같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가 세례를 받으실 때 친히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3:16, 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33-35]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또한 세례 요한이 진리 혹은 '그 진리'(테- 알레-데이아-)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거하였다. 예수께서 요한을 언급하는 것은 그가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유대인들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요한을 선지자로 여겼다. 요한은 그들에게 켜서 비취는 등불과 같았고 유대인들은 그 빛을 기뻐하였다. 바로 그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기를,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며(요 1:29)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자'이시며(요 1:33)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요 1:34) 했던 것이다.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役事) 곧 나의 하는 그 역사(役事)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요한의 증거가 분명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셔서 이루게 하실 일들 즉 그가 행하실 일들을 가리킨다고 그는 말씀하신다. 그 일들은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셨다는 것을 그를 위하여 증거할 것이다. 그 일들이란 그가 행할 기적들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을 통해 이룰 속죄사역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 일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증거할 것이다(요 20:30, 31; 행 17:31; 롬 1:4).


[37, 38]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예수께서는 또 그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그에 대해 증거하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려온 사실을 가리킬 것이다. 또 후에 그가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친 음성으로 그에 대해 증거하실 것이다(마 17:5).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는 구약성경의 증거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였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생을 얻게 하는가? 그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한다. 누가복음 24:25-27,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누가복음 24:44, 45,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디모데후서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사중적(四重的)이다. 첫째는 하나님 자신의 증거요, 둘째는 세례 요한의 증거이며, 셋째는 예수께서 이루실 일들의 증거요, 넷째는 구약성경의 증거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은 충분하고 확실하였다.


[40-43]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이 이렇게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그를 믿기를 원치 않았다. 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와서 하나님의 진리로 교훈하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와서 자기의 사상으로 교훈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영접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들 가운데서는 오히려 이단들이 영접을 받는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결코 바르게 믿을 수 없을 것이다.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또 그들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즉 유대인들은 인간적, 세상적 영광을 구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칭찬과 세상적 자랑을 구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과 세상적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돈과 육신의 쾌락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사람이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마태복음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14:3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45-47]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들을 아버지께 고소하지 않아도 그들이 바라고 의지하는 모세가 그들을 고소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또 만일 그들이 모세를 믿었다면 그들이 또한 그를 믿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모세는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모세의 율법에 있는 성막 제도, 제사 제도, 절기들, 할례 등은 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법들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모세의 글들도 믿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는가? 오늘날도 성경을 믿지 않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실제적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네 가지 증거들을 통해 그를 확신하자. 첫째는 하나님 자신의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음성으로 아들 예수에 대해 증거하셨다. 둘째는 세례 요한의 증거이다. 무리들에게 진실한 선지자로 인정을 받았던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거하였다. 셋째는 예수께서 이루실 일들, 즉 그가 행하실 기적들과, 또 그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실 속죄사역의 증거이다. 넷째는 구약성경의 증거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은 풍부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 확신하지 못한 자들마다 이러한 증거들을 자세히 검토함으로써 그를 확신하자.


둘째로, 우리는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이유를 살펴서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자.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세상과 세상의 영광을 사랑하는 마음을 다 버려야 한다. 돈 사랑, 육신의 쾌락 사랑, 명예 사랑, 세상영광 사랑 등은 신앙의 큰 방해물들이다. 이 세상의 헛된 것들과 죄악된 것들의 낙을 누리는 자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지 못할 것이다. 또 그런 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믿지 않을 것이며 성경을 믿지 않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헛된 것들과 죄악된 것들을 버리고 성경을 읽고 배우고 믿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되자. 우리는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오류에 빠지지 말자.




6장: 생명의 떡


1-15절, 떡과 물고기 기적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그 후에'(메타 타우타)라는 표현은 시간이 상당히 지났음을 나타낸다. 5:1의 '유대인의 명절'을 유월절로 본다면,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장소는 갈릴리 바닷가이다. 갈릴리 바다는 디베랴 바다 또는 게네사렛 호수(눅 5:1)라고도 불리웠다. 갈릴리 바다는 남북으로 약 20킬로미터이며 동서로 가장 먼 곳이 약 12킬로미터가 된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 9:10에는, 예수께서 가신 갈릴리 바다 건너편이 벳새다라는 동네라고 언급되어 있다. 벳새다는 갈릴리 바다 북동쪽 해변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2, 3]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누가복음 9:11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오자 그가 그들을 영접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고 병 고칠 자들을 고치셨다고 기록했다. 주께서 병자들을 고치시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사건들에 대하여 많이 기록하고 있지 않고 단지 몇 가지만 자세하게 기록했으나, 본문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음이 확실하다. 그는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다.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때는 유월절 직전이었다. 이 유월절은 아마 예수님의 공적 전도사역 기간 중에 맞으신 세 번째 유월절이었을 것이다. 첫번째는 요한복음 2:13에, 두 번째는 아마 5:1에, 세 번째는 본절에, 그리고 네 번째는 11:55에 나온다. 만일 그것이 그러하였다면, 예수님의 공적 전도사역의 기간은 대략 3년 반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신 것 같다. 그 이유는 본 사건의 전후문맥에서 찾을 수 있다. 요한복음 5:16, 18,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한복음 7: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5-7]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를 따라왔다. 사람들은 아마 계속 모여들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해 떡 기적을 행하시기를 뜻하시고 빌립에게 시험적으로 물으셨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많은]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아마 제자들 중에 빌립이 계산에 빠른 자이었는지도 모른다. 빌립은 대략적으로 계산해보았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백 데나리온의 떡을 가지고도 부족하리이다." 2백 데나리온은 2백명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오늘날로 환산하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7만원씩만 쳐도 2백명분이면 1400만원이나 된다. 한 사람이 2천원어치 빵을 받는다고 치면, 그것은 약 7천명분의 빵값이 될 것이다.


[8, 9]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안드레는 아마 사람들 가운데로 다니며 떡을 찾아 확인했던 것 같다. 한 어린 소년이 그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주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그 떡이 '보리로 만든'(크리디노스) 떡이라고 표현하였고 또 물고기도 다른 복음서들처럼 그냥 물고기(이크뒤스)가 아니고 '작은 물고기'(옵사리온)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생생한 목격자적 증거이며 보충적 증거일 것이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린 그 소년은 자기도 배가 고팠지만 자기의 도시락을 기꺼이 주님께 드렸을 것이다. 그것은 보통 믿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기적은 그런 믿음의 행위에서 일어났다.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는 사람들로 앉게 하셨다. 그 곳에는 잔디(코르토스)가 많았다. 마가복음 6:39은 그 곳에 '푸른 잔디'(클로로스 코르토스)가 있었다고 표현하였다. 앉은 사람들의 수는 오천쯤 되었다. 마태복음 14:21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명'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면 전체 수는 약 6, 7천명 이상은 되었을 것이며 안드레의 대략적 계산은 거의 맞았을 것이다.


[11-13]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예수께서는 감사 기도를 올리신 후 앉은 자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그들이 원하는 대로 넉넉히 먹게 나누어 주셨다. 예수께서 떼어주시는 떡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떡을 바친 소년이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만일 그 소년이 가까이 있었다면 그는 무릎을 치면서 놀라움과 감탄의 소리를 연발하였을 것이다. '아! 내가 바친 그 떡과 물고기가 줄어들지를 않고 예수님의 손에서 자꾸 또 나누어져 나온다!" 그 소년은 집에 돌아간 후에도 그 놀라운 사건으로 인하여 뛰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날 저녁 그 기적의 떡을 먹은 사람들이 다 그러했을 것이다.


앉은 사람들은 다 배불리 먹었다. 예수께서는 또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먹는 음식이 남았다고 그냥 버리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과 또 음식을 먹은 후에는 앉았던 장소라도 깨끗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 같다. 믿는 이들은 생활의 모든 면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제자들이 거둔 남은 조각들은 열두 바구니에 찼다. 그 저녁에 주께서 행하신 떡과 물고기 기적은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게 한 풍성한 기적이었다.


[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을 보고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다"라고 말했다. '그 선지자'라는 말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모세는 신명기 18:15에서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선지자'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기적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임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 함을 눈치채셨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 그리고 가난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했던 것 같다. 즉 그들은 정치적 메시야, 경제적 메시야를 갈망했던 것이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일반 사람들의 관심사일 것이다. 사람들은 정치적인 평안과 경제적인 유여함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보셨다. 그것은 인간의 심령의 죄 문제이었다. 사람과 세상의 불행은 죄에서 시작되었다. 죄가 인간 불행의 근본 문제이다. 그러므로 죄 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개인과 사회의 참된 평안과 행복이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셨다. 그는 우리들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를 떠나 혼자 산으로 가셨고 다른 복음서들이 증거하는 대로 그는 거기에서 기도하셨다(마 14:23; 막 6:46).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예수께서 행하신 떡과 물고기 기적은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것은 네 권의 복음서들에 다 기록되어 있다. 어느 한 권의 책에만 기록된 사건이라도 진실한 사실인데, 네 권에 다 기록되었으니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의심해서는 안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기적의 사실을 인정하고 믿자.


둘째로, 떡과 물고기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느꼈기 때문에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했다. 인간으로서 이런 기적을 행한 자가 누구이며 행할 자가 누구인가? 예수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이런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을까? 그의 기적은 순전히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굳세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 우리는 이 기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셋째로, 떡과 물고기 기적을 행하신 후 예수께서 혼자 산으로 가신 것은 그의 구원 사역이 영적임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단지 정치적, 경제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셨다. 그는 그보다 더 근원적 문제인 인간의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셨다. 정치적, 경제적 문제의 해결은 죄 문제의 해결의 결과로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교회는 단지 정치적, 경제적, 육신적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며 구원받은 자들을 진리의 교훈 안에서 양육하기 위해 존재한다. 성도는 죄에서 구원을 받아 진실한 사람,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자가 될 것이다.


16-29절, 영생의 양식을 위해 일하라


[16-18]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벳새다 언덕에서 떡 기적을 행하신 후 예수께서는 혼자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셨고 제자들은 배 타고 바다를 건너 거버나움으로 갔다. 그런데 배 타고 가는 중 제자들은 큰 바람과 풍랑을 만났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바람이 거슬리므로 제자들이 물결을 인해 괴로이 노를 저으며 고난을 당했다고 기록했다. 바로 그 날 저녁에 제자들은 놀라운 기적을 보며 기뻐하였는데, 그 밤에 그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겨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저녁에 무리들 가운데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던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이런 어려움 속에 버려두시는 것인가? 왜 하나님께서는 그 큰 바람과 풍랑이 떡 기적으로 가슴 부풀었을 제자들에게 마음의 두려움과 고통과 당황을 주게 버려두시는 것인가? 그러나 이것이 세상이다. 제자들은 이런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들은 세상에서 쉽고 안이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기쁨과 슬픔, 평안과 고난을 번갈아 만나게 될 것이다.


[19-21]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제자들은 배를 타고 10여리쯤 상당히 멀리 바다 가운데로 나갔다. '10여리'라는 헬라어 원어는 '25 내지 30스타디온'이라는 말인데, 약 5-6킬로미터의 거리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그 때가 '밤 4경쯤'이라고 증거하는데, 밤 4경은 새벽 3-6시이다. 아마 제자들은 큰 바람과 파도와 씨름하느라고 여러 시간을 소비한 것 같다. 그 힘든 시간에 예수께서는 바다 위로 걸어오셨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바다 위로 걸어오는 물체를 보고 두려워하였으나 그가 예수님인줄 확인하고 그를 기쁘게 영접하였다. 이 사건은 확실히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역사상 바다 위로 걸어온 사람이 누구인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몹시 힘들어 하던 그 밤에 비상한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오셨다.


그 기적 사건이 확실함은, 첫째로 그 밤에 제자들만 배 타고 떠났었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둘째로 제자들이 10여리쯤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로 나갔다는 사실과, 셋째로 제자들이 바다 위로 걸어오는 예수님을 처음 보았을 때 두려워했다는 사실과, 넷째로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확인하고 기쁘게 영접했다는 사실 등에서 분명하게 증거된다. 그 밤에 그 배에 탔던 제자들은 다 이 사건의 증인들이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어떤 인간도 그런 일을 한 적이 없고 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그 밤에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배에 영접했던 제자들은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라고 증거하였다(마 14:33). 떡 기적과 더불어 바다 위로 걸어오신 이 기적을 통해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성을 확실히 증거하셨다. 이 기적 사건들이 확실히 역사적 사실들이라면, 예수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것은 정당한 판단일 것이다.


[22-25]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무리들은 떡 기적이 있었던 그 밤에 제자들의 배가 한 척뿐이었고 그 밤에 그 배로 제자들만 떠났고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배에 오르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은 예수께서 다른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실 수 없었음을 증거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가지 않고서는 바다 건너편으로 가실 수 없었음을 부수적으로 증거한다. 무리들은 자기들의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에 가서 예수님을 만났다. 무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왔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찾고 그에게 나아오려는 열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 나아온다고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동기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에게 오는가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단지 열심만으로는 부족하였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바른 생각과 마음을 가진 열심이 필요하다.


[26-2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예수께서는 자기를 찾아온 무리들의 잘못된 생각과 마음을 지적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즉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그를 믿었기 때문에가 아니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단지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오늘도 또 그런 기적의 떡을 먹을 것을 기대하며 온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것은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셨다. 떡은 사람에게 필요하지만, 결국 다 썩는 양식에 불과하다. 그래서 구약성경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과 부귀영화와 그 모든 즐거움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요일 2:17). 사람은 떡을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결국 늙고 병들고 쇠하고 죽고 만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즉 우리의 삶의 목적과 목표를 허무한 데 두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도 예수님 당시의 무리들과 비슷하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관심과 목표는 단지 세상의 것들, 즉 물질의 복이나 육신의 건강과 행복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것들을 찾아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을 믿으려는 것은 심히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다 썩는 양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비록 교회에 나와 그런 것들을 다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하지 못하고 결국 다 없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 과연 영원한 것이 있는가? 이 세상에 과연 영생이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때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하나님은 영생이시며 그의 말씀은 영원하다. 베드로전서 1:23-25,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것은 얼마나 복된 사실인가? 또 하나님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을 주신다.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인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확증하셨고 보증하셨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믿을 만한 자라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이시요 영생을 주시는 주님이시다.


[28-29]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사람들이 묻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대답하셨다. 그렇다. 영생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사람은 그를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 그것은 썩지 않는 양식이며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환영하고 영접하는 것이다(요 1:12). 믿음은 하나님께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롬 6:17). 마음으로 그를 거역하거나 거절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자. 떡 기적을 통해, 바다 위로 걸어오신 기적을 통해 그를 믿자.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첫째로 여기자. 하나님의 말씀을 첫째로 여기자. 믿는 일을 크게 여기자. 교회를 귀히 여기자. 주일 집회를 귀히 여기며 힘써 지키자.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썩는 양식을 위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며 성경 말씀을 배우는 일은 썩지 않는 양식, 즉 영원한 생명의 일이다. 그 일을 첫째로 귀히 여기며 그 일을 위해 힘쓰자.


30-40절, 하나님의 뜻


[30-31]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기적의 떡에 대한 관심 때문에 예수께로 모여온 무리에게 썩지 않고 영생하는 양식 즉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일에 대해 말씀하시자, 무리들은 그를 믿을 어떤 표적을 요구하였다.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그들은 덧붙여서 자기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처럼 어떤 표적을 보여줄 것인지를 질문하였다. 그들의 질문에는 여전히 떡 기적을 구하고 물질적 기적을 의지하는 기적주의적 생각이 있어 보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질문을 하는 것 같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무슨 외적인 증거가 있는가? 우리가 그를 믿을 만한 어떤 외적인 증거가 있는가?" 물론, 성경에는 그런 질문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만한 충분한 많은 증거들을 주셨고 그것들을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진지하게 믿고자 하는 자라면 성경을 읽고 살펴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32-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는 무리들의 질문에 진실하게 대답하시면서 광야 40년 동안 날마다 하늘에서 내렸던 만나, 이스라엘 백성이 날마다 먹었던 그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려주셨던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제 하늘에서 참 떡을 내리셔서 세상에 생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떡은 육신의 생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날마다 떡을 먹어야 살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떡을 먹어도, 날마다 떡을 먹어도 결국 죽고 만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고도 죽은 것과 같지 않은 떡,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는 떡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가 죽지 않는 생명의 떡에 대해 말씀하시자 무리들은 그 떡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말했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3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생명의 떡에 관심을 가진 무리에게, 예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어떻게 생명의 떡이 되시는가? 그것은 그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죄가 없는 천국에서는 죽음도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인간의 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이었다.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완전한 의(義)를 이루셨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그 의를 나누어 주심으로써 그를 믿는 자들이 죽지 않고 살며 죽어도 다시 살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굶주리고 목마르면 결국 죽는 것이지만, 그에게 오는 자 곧 그를 믿는 자는 결코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영원히 살고 죽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시다. 그러나 이 놀라운 생명의 주를 눈 앞에 두고도 유대인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유대인들은 왜 생명의 주를 보고도 믿지 않는가? 사람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가?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가? 이런 문제에 관련하여, 예수께서는 선택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라는 표현은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됨을 증거한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행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하실 자들을 택하셨고 그들을 실제로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구주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들을 구원하신다. 이와 같이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라는 말씀은 또한 그 구원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고 제한된 자들의 것임을 암시한다.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시는 자들이 있고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두렵게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 가운데 버려두셔서 멸망할 자들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택함을 입은 자들, 그 제한된 자들은 다 예수께로 올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실패가 없을 것이다. 또 그 구원은 불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에게 나아와 그를 믿는 것은 확실히 선택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나오는 자를 예수께서는 결코 거절하거나 물리치지 않으실 것이다.


[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려 함이었다. 그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택한 백성을 다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은 다 구원을 얻고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많은 사람들은 일시적인 것에 삶의 목적을 두고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돈과 세상의 영광과 육신의 쾌락 같은 것이 삶의 목표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썩어질 것들이며 없어질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썩어지고 없어지는 것에 있지 않고 영원한 것 곧 우리의 영생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선택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들은 다 마지막 날 영광스럽게 부활할 것이다.


말씀을 맺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세상에 내려주신 생명의 떡이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자들, 지금 주시는 자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올 것이며 그를 믿을 것이다. 죄 가운데 멸망할 자들도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며 마지막 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런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자. 우리가 바로 그런 자라면 예수 믿는 것이 가장 큰 복임을 깨닫고 이 생명의 떡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자.


41-51절,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


[41-42]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앞부분에서(32, 35절)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그가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하늘에서, 즉 하나님의 세계에서 이미 존재하였음을 나타내고, 또 그가 단순히 땅에 속한 자, 즉 인간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 즉 신성(神性)을 가진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는 요한복음 초두에 증거한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자'(요 1:14) 즉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한다고 수군거렸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우리가 그 부모를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믿지 않았다. 그들에게 예수는 어릴 때부터 보아온 한 인간에 불과하였고 그의 부모도 잘 알려진 자들이었다.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예수를 신적 존재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수군거리는 죄를 범하고 있었다. 그들의 수군거림은 분명히 불신앙의 죄이었다(롬 1:29).


[43-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고 하시면서 본문에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본문은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을 가진다. 첫째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올 수 없다. 어떤 이들은 구원이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전혀 맞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성경은 반대로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임을 증거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시작하거나 우리의 선택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주시고 우리를 이끄실 때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사람이 회개하고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이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께로 나올 수 없고 그를 믿을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난 두번째 중요한 내용은 예수 믿는 자들에게 마지막 날에 부활이 있다는 것이다. 신적인 구주이신 예수께서 친히 부활과 영생을 주실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한없이 돌고 도는 것이 아니다. 인류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다. 시작은 창조요, 끝은 심판이다. 심판 때가 있는데, 그때 믿는 이들에게 영광스런 부활이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육신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성도들에게는 복된 부활이 있고 그 후에 영생이 있다. 성도의 영생은 다시 죽지 않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이다. 이 부활과 이 영생은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귀하고 복된 소망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의 첫번째 서신에서 쓰기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요일 5:13).


[45-46]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끄신다는 말을 구약성경 이사야에 나오는 표현대로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것, 아버지께 듣고 배우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그것은 사람이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보거나 육신의 귀로 그의 음성을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눈을 열어 깨닫게 하심으로 심령으로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 아버지를 본 자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신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온 자'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자'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믿는다. 우리는 그의 말씀대로 예수께서 하늘로서 내려온, 하나님에게서 온, 신적 구주이심을 믿는다.


[47-5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다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표현으로 진리를 강조하신다.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은 그의 말씀이 진리, 그것도 중요한 진리임을 강조한다. 그 내용은 그가 생명의 떡이시며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떡은 육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수단이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 그러나 물질적인 떡은 아무리 먹어도 결국 죽고 만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놀라운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먹었으나 그들도 결국 죽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 즉 하늘에 속한 떡, 신적 인격인 떡이시며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게 하는 떡이시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떡이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주께서는 요한복음 5:24에서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소유하고 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벌써 여러 번 자신에 대해 '하늘에서 내려온'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셨다. 그것은 자신의 신성(神性)을 암시한다. 그는 우리와 똑같이 땅에서 난, 땅에 속한 인간에 불과하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에 속한 신적 인격이시다. 그는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표현하셨다. '산 떡'은 '살아 있는 자'라는 뜻인 동시에 '생명을 주는 자'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앞에서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말씀하셨다(47절, 전통사본).


그는 또 "나의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가 줄 내 살이로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생명을 위해'라는 말씀은 세상의 사람들 누구에게나 무제한적으로 주실 생명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제한적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나 그가 택하신 자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 살고 있고 그들은 세상을 대표한다. 그들은, 그리고 그들만,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들이다. 주께서 그들을 위해 '그의 살'을 주신다는 표현은 그가 그 몸을 제물로 주시며 그 몸을 상하실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암시한다. 과연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께서는 그 몸을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상하시며 그의 피를 남김 없이 다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그가 우리에게 주신 영생은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이루신 사역이었다.


결론적으로, 본문에 나타난 중요한 진리는 세 가지이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시다. 즉 그는 이 땅에서 나신,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시고 하늘로부터 오신, 하늘에 속하신 분이시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다. 그는 우리의 놀라운 신적 구주이신 것이다.


둘째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끄실 때 예수께로 나올 수 있다. 하나님이 이끄신다는 것은 그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끄셨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저 유대인들처럼 수군거리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하고 거절했을 것이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영생의 구원은 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 영생을 얻은 것을 가장 큰 행복인 줄 알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해야 한다. 또 이 구원에 무엇을 더할 것이 없는 줄 알고 항상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항상 기뻐하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믿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이 믿음을 굳게 지키자.



52-59절, 속죄 신앙


[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는 앞절에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살을 줄 것이라고 암시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의견 충돌이 있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는 곳에는 일치와 단합이 있지만, 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할 때는 언제나 의견 충돌이 있을 것이다.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말씀의 진리성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하신다. 그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시는 것은 자신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본질, 즉 인간의 영과 육체를 가진 자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인간과 같은 물질적 육체가 없으시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인간의 본질을 가지셨으므로 물질적 육체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계셨다.


예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해 주신다는 말씀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실 것을 암시한다. 그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제자들에게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 .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22:19-20). 그것은 구약의 제사 제도를 생각하게 한다. 구약의 짐승 제물은 피를 흘려 죽고 불태워졌다. 피는 생명이므로 피 흘림을 통해 죄가 속해진다는 것이 성경이 계시하는 원리이다(레 17:11).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바로 그의 십자가의 속죄의 고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표현은 매우 강하게 들리지만,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속죄의 주를 믿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것을 가리켰다. 그것은 속죄 신앙을 가리켰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마실 때 그 음식이 우리의 몸에 살이 되고 피가 되듯이, 우리가 우리를 구속(救贖)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는 우리에게 영생이 되신다. 속죄 신앙은 성찬식에서 생생하게 표현된다. 성찬식에서 우리가 먹는 떡과 마시는 포도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을 때 성찬에 참여하는 의미가 있다. 우리의 속죄 신앙은 성찬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떡을 먹고 포도즙을 마실 때 바르게 표현된다.


성찬식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대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영생의 길이다. 속죄의 주님을 믿는 믿음이 영생에 이르는 믿음이다. 속죄의 주님이 없이는 아무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진노와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고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참 믿음은 속죄 신앙이다. 속죄 신앙은 영생에 이르는 신앙이다. 속죄의 주님을 믿는 자는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


[54-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속죄 신앙을 가진 자는 이미 영생을 소유한 자이다. 신자도 불신자처럼 죽어 장사되지만 신자는 마지막 날 다시 살리심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을 믿는다. 우리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 사도 바울은 증거하기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다(고전 15:51-52).


이 세상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양식과 음료는 결국 우리로 죽게 하는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 죽지 않고 영생하게 하는 양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 양식이요 참 음료이시다. 세상의 모든 양식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건져낼 수 없는 양식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어 영생을 주시는 양식이다. 이 세상에 그런 양식과 음료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56-5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께서는 영생의 이치를 연합의 원리로 보충하여 설명하신다. 그는 자신의 살을 먹고 자신의 피를 마시는 자는 그 안에 거하고 그도 저 안에 거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연합의 관계를 묘사한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이런 연합 속에 있다면 그는 그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예수께서 살아계신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그로 인하여 생명을 누림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사람, 즉 그를 믿는 사람은 그로 인하여 살 것이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그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58-59]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시다. 그는 신적인 떡이시다. 그 떡을 먹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죽게 되었고 영생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구주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이루신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


그가 가르치신 영생의 길에 대한 이 놀라운 말씀의 내용은 그가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후 가버나움의 한 회당에서 하신 것이었다. 그 기적과 그 후에 하신 이 말씀의 내용은 제자들이 임의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입에서 나온 진실한 말씀이며 확실한 진리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모든 물질적 양식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건져낼 수 없는, 즉 영생에 이르게 할 수 없는 양식이다. 결국 그것은 썩어질 양식이요 헛된 양식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헛된 양식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결국 헛된 수고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헛된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의 양식이다. 그는 우리에게 참 양식이시요 참 음료이시다. 그가 우리에게 영생의 양식이 되는 이치는 그의 속죄 사역을 통해서이다. 죄의 댓가는 죽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다. 예수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의(義) 안에 영생의 길이 있다.


셋째로, 사람에게 영생과 부활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시는 복이다. 거기에 인간의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 인간의 소망이 있다. 시편 39:5-7,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넷째로, 사람은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생을 얻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또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였다(요일 5:11-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속죄 신앙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1-25)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만을 우리의 영생의 양식으로 인정하고 그를 영접하며 의지하고, 비록 완전하지는 않아도 성심으로 그를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60-71절, 믿는 자, 믿지 않는 자


[60-61]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생을 얻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제자들 중에 여러 사람이 그의 말씀이 어렵다고 평가하며 수군거렸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살과 피를 단순히 물질적 의미로만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믿음과 순종에 거리낌이 되고 걸림이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수긍하는 데서 생기는 믿음은 단합과 순종으로 나타나지만, 그의 말씀에 대한 무지와 거리낌에서 나오는 불신앙은 수군거림과 불순종으로 나타난다.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씀의 진리성을 좀더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에 천국에 있었다는 사실과 또 후에 자신이 이전의 있던 곳으로 올리울 사실에 대해 언급하신다. 그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만일 예수께서 단순히 인간이실 뿐이라면, 그는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 되실 수 없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자, 곧 신적 인격이시라면 그의 말씀은 진리이며 그가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이 물질적인 의미가 아니고 영적인 의미임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하나님의 영 즉 신적인 영은 피조물 된 인간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다. 육은 피조물이다. 거기에는 본래 생명이 없다. 맨처음에도 진흙으로 빚어진 인간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감으로 인간은 산 자가 되었다. 육은 무익하다. 단순히 인간의 살과 피는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다. 그것은 그렇게 할 가치도 없고 능력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다르다. 그에게서는 신성의 영과 인간의 영이 결합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의 육이 아니시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이 신성의 영이 그의 고난을 가치 있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의 살과 피는 대속(代贖)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의 가치는 말할 수 없이 크고 그 죽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능력 또한 그러하다. 그의 영은 그를 믿는 자들을 다 살리실 수 있다. 그의 영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 되듯이,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신과 동일시 된다. 그의 말씀은 영 곧 신적인 영이며 그 영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며 사람들에게 생명이 되며 실상 생명 자체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관건은 그의 신성(神性)을 이해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단순히 사람이라면, 만일 그가 단순히 육신뿐이시라면, 그의 말씀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곧 신성의 영이시므로 그의 말씀은 다 이해된다.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다 믿는 자는 아니다. 그에게 '주여, 주여'하고 말한다고 다 믿는 자는 아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온다고 다 믿는 자는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누구인지 다 아셨다. 그는 처음부터 그들을 아신다. 그는 실상 태초부터 그들을 다 아신다. 이 지식도 그가 신적 인격이심을 증거한다. 종말의 일을 태초부터 말하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뿐이시다(사 46:10). 그러나 지금 참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결국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 것이며 그를 대적하는 무리가 될 것이다.


[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사람이 예수님께 나올 수 있고 그를 믿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그에게 나올 수 없고 그를 믿을 수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고 또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했다(롬 9:16, 18). 하나님께서 긍휼로 택하신 자들만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믿게 하시고 구원하신다.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물러갔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결국 나뉠 것이다. 쭉정이와 알곡은 나뉠 것이며 곡식과 가라지는 나뉠 것이다. 양과 염소는 나뉠 것이며 중생한 자와 중생치 못한 자는 나뉠 것이다.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수를 비교하면, 구원받은 자는 다수가 아니고 소수일 것이다. 중생한 자만 주를 끝까지 따를 것이다. 참으로 믿는 자들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갈 것이다.


[67-69]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너희도 가려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시몬 베드로는 잘 대답하였다. 전통사본대로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나이다. 우리는 주께서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예수께 대한 믿음의 가장 핵심적 지식이요 핵심적 내용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야 할 이유들 중의 핵심적 이유는 그에게 영생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만 영생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의 길이요 곧 영생이다. 다른 길은 없다(요 14:6).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주신 적이 없다(행 4:12).


[70-7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친히 택하여 세우신 열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을 마귀라고 불렀다. '마귀'라는 헬라어(디아볼로스)는 '훼방자, 배신자'라는 뜻이다. 과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였다.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고 의아해 하고 당황스러워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 것이고 있었다. 가룟인 유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을 들었고 모든 기적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배반하였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신성의 증거들을 확인할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모든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않았고 그를 배반하였다. 여기에 사람의 심각한 영적 어두움이 잘 드러나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원얻을 수 없다는 진리가 생생히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말해 가룟인 유다의 물질에 대한 욕심은 그의 영적 어두움의 한 원인이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믿는 자는 어떤 자인가? 믿는 자는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사실, 즉 그의 신성(神性)을 믿는 자이다(62절).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승천으로 장차 확증될 것이다. 그의 영 곧 그의 신성의 영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다. 인간의 육은 무익하다. 신적 구주이신 예수께 영생의 말씀이 있고 그에게 영생이 있다. 그는 유일한 영생의 길이시다(63, 68절). 그러나 예수님의 신성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하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의 선택으로만 가능하다(65절).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께 나올 수 없고 그를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그를 믿을 수 있다. 또 그렇게 주를 진실히 믿은 자들만 끝까지 주님을 따를 것이다. 그들은 주님을 떠나 다른 데로 가지 않을 것이다(68절).


그러나 겉보기에 그를 따르는 것 같은 자들 가운데 그를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므로 그 말씀을 어렵다고 수군거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적인 구주이심을, 즉 그의 신성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이며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떠나갈 것이다. 그들은 영생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배신하고 그를 대적하는 무리 가운데 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진실히 예수님, 신적인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그의 모든 말씀들을 다 믿는 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영생의 말씀이 그에게만 있는 줄 알고 어디든지 그만을 따르며 세상 끝날까지, 우리의 목숨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만을 따르는 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7장: 생수의 강을 주심


1-13절, 인간의 무지와 불신앙


[1-2]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것은 5장에 기록된 대로 유대인의 명절 때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일로 인한 것이었다(요 5:16, 18). 그 때 이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고 그 사실을 아신 예수께서는 유대에서 다니기를 꺼려하셨다.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을 피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본장은 6장의 사건보다 6개월 후의 일들을 쓰고 있다. 앞장의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약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사건은 유월절이 가까운 때의 일이고(요 6:4) 본장은 초막절 때의 일이었는데, 유월절은 유대인 달력으로 1월 14일이고 초막절은 7월 15일부터 한 주간 동안이므로 6개월 간의 간격이 있다. 요한복음은 그 6개월 간의 예수님의 말씀들과 일들을 생략하고 있고 이와 같이 그의 공적인 생애 가운데서 매우 제한된 내용들만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이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졌음을 나타낸다.


[3-5]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께는 육신의 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이었다(마 13:55; 막 6:3). 그러나 그 육신의 동생들은 예수님과 어릴 때부터 함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바로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적 영광이나 그의 메시야 사명을 알지 못했고 그가 마치 자기를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자로 잘못 알고 있었다. 누구든지 육신으로는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그의 육신적 동생들이라 할지라도 그를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성령께서 깨닫게 하지 않으시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것이, 단순히 직분자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예수님을 믿게 하지는 못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셔야 사람이 그에게로 나올 수 있다(요 6:44).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에서 말하기를,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을 수 있다.


[6-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그를 미워한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그들의 행위를 악하다고 증거하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유대 지도자들을 악하다고 말하지 않으셨더라면, 그들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사람들 앞에 아첨이나 하는 분이 아니셨다. 그는 공의의 증거자이셨다. 그는 선과 악을 구별하셨고 선을 선이라고, 악을 악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것, 즉 돈을 사랑하고 사람들 앞에 칭찬 듣기나 좋아하고 육신의 쾌락을 사랑하는 것은 다 악하다고 책망을 들어야 했다.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그런 이중적, 위선적 언행을 그대로 지적하셨고 책망하셨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고 선하게 보였으나, 속에는 온갖 탐욕과 미움이 가득했고 또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 한 것이 얼마나 큰 악인가? 선지자 예례미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설교했을 때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하였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고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였다.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라고 했다(렘 20:7-8). 그러나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자신의 죄악됨을 깨달아야 하고 거기에서 돌이켜야만 한다.


[10-13]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초막절에 모인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에 대해 상반된 견해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다른 이들은 그를 무리를 미혹하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렇게 정반대의 견해가 가능할까? 그러나 진리에 대해서는 항상 이런 현상이 있었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은 경건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라고 인정을 받았으나 불경건한 대중들에게는 배척과 핍박을 받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다. 주의 귀한 종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을 때도 무리들 가운데는 그에 대해 상반된 견해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주의 귀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인정했으나 다른 이들은 그를 교인들을 속여서 자기 사람이나 만들고 그들에게서 물질적 이득이나 얻으려 하는 자라고 비난하고 핍박하였다(고후 12:16-17).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는 자신에 대해 증거하기를,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라고 했다(고후 6:8). 하나님의 참된 종에 대한 이런 잘못된 견해는 사람들의 영적 무지(無知)와 죄악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태도를 증거한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워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예수님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를 무리를 미혹하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의롭고 선한 분이신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이런 잘못된 견해가 가능한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무지와 죄악 때문에 가능하다. 사람은 스스로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지 못하고 찾지도 못한다. 그래서 성경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한다(롬 3:11).


사람이 예수님을 아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과 성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깨닫고 믿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이 참된 회개와 믿음을 가지게 되려면 그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그는 자신의 영적 무지를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또 우리가 다른 이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첫번째 일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를 부르시며 그를 이끌지 아니하시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14-24절, 예수님의 교훈


[14-15]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이미 초막절 명절의 중간이 되었다. 초막절은 7일간 지킨다(레 23:34). 연중 3대 절기인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에는 모든 남자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주 앞에 경배하여야 했다(출 23:17).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 들어가셨다. 여기에서 성전은 성전의 뜰을 가리킨다. 성소 안에는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고 일반 사람들은 성전 뜰에서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공적 사역에서 하신 일은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신 것이었다(마 4:23). 가르치신 일은 그의 사역 중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신 탁월한 교사이셨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가 배우지 않았는데 글을 아는 것을 기이히 여겼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마 13:55) 혹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막 6:3)로 불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집에서나 회당에서 배운 것 외에 따로 배우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그의 자란 배경을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가르칠 능력은 누가 주시는가?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는다면 그의 가르치심에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교훈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증거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진리를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힘으로 말씀하신 것이었다. 요한복음 3:34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고 했다. 예수님의 교훈은 곧 하나님의 교훈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 중의 특별계시이시다. 그의 말씀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말씀보다 더욱 직접적 권위를 가진다. 히브리서 1:1-2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여러 번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8: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14: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4:24,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그의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그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예수님의 교훈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는 길이 있다. 사람은 본성의 무지와 죄악 때문에 자기 뜻대로 살면 허무하고 죄악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시편 39:6은 고백하기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 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했다. 또 욥기 15:16은 사람을 "악을 짓기를 물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뜻 즉 경건과 의와 선을 구하면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되고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간절히 구하고(잠 2:4-6) 자기 속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의(義)가 없음을 깨닫고 애통하며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때(마 5:3-6)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되고 그를 알고 그를 믿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또 거짓 교사와 자신을 분간할 방법을 알려 주신다. 그것은 말하는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가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지 않고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신의 영광만 구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나 거짓 교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고 그 속에 불의한 것이 없다. 여기에 진실한 제자의 모습이 있고 제자의 길이 있다. 그래서 주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눅 9:23).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대해 언급하신다. 그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었음을 증거하신다. 구약 처음에 나오는 모세의 다섯 권의 책은, 어떤 불신앙적 학자들이 상상하듯이, 모세보다 수백년 후 각각 다른 시대에 쓰여진 네 개의 문서들이 후에 편집된 것이 아니고, 성경에 증거된 그대로 모세가 하나님께 받아 기록한 책들이다. 우리는 모세의 다섯 권의 책들의 진실성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성경의 진실성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다. 불경건과 부도덕함은 사람을 영적 어두움 속으로 몰아가고 그래서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그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사람이 율법대로 경건하고 의롭게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가 귀신이 들렸다고 대답하였다. 귀신은 악한 영이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생각하고 악을 말하고 악을 행하게 만든다. 악이 무엇인가? 그것은 불경건하고 쾌락적이고 음란하고 거짓되고 남을 해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것에 해당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경건하고 거룩하시며 진실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시는 분이시다. 유대인들이 그를 미워하는 것은 그가 그들을 악하다고 책망하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죄를 책망하는 것은 악이 아니고 선이다. 사람은 죄의 책망을 받아야 회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을 수 있고 영생에 이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실상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고(요 5:16, 18) 마침내 죽였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증거했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예수께서 행하신 한가지 일이란 그가 여러 달 전 그들의 명절 때에 안식일에 예루살렘 양문곁 베데스다 연못의 한 행각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일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그 일 때문에 그를 기이히 여겼고 그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행하신 그 일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배척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예수님의 선한 행위는 오히려 그의 교훈의 진리성을 확증한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할례는 아브라함 때에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표이었지만, 모세 때에 율법으로 규정되었다. 레위기 12:3,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제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같다. 그것은 죄씻음으로 말미암는 중생(重生)을 상징한다. 골로새서 2:11-12은 말하기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했다. 할례 시 남자 아기의 고추를 덮고 있는 살가죽 끝부분을 자르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죄를 잘라버리는 뜻이 있는 것 같다.


[23]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 하느냐?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않으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베풀고 할례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의 전신을 건전케 하셨다. '사람의 전신'이라는 원어(홀론 안드로폰)는 '사람의 전체 혹은 전인(全人)'이라는 말로서 영혼과 몸을 포함한 사람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단지 38년 된 병자의 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고 그의 영혼의 죄를 사해 주셨다. 그러므로 그는 후에 그에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권면하셨다(요 5:14). 그렇다면, 예수님의 병고치신 일은 할례보다도 더 나은 일이었다. 그 병자는 영혼의 죄사함과 육신의 병고침을 받았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미워하고 죽이려는 악한 감정을 가지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큰 죄이다. 선한 자에게 악한 감정을 가지는 것은 큰 죄이다.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사람은 무엇을 외모로 판단하기 쉽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외모나 돈이나 학력이나 사회적 신분을 보고 그를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도덕성이다. 아무리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고 올바르고 선하게 행하지 않는 자는 악한 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올바르고 선하게 행하는 자는 선한 자이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선한 일이었다. 그 일로 인해 그를 비난하고 죽이려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유대인들이 공의로 판단한다면, 예수님의 행위를 선한 것으로 인정하고 그의 교훈을 믿을 만한 교훈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자. 그의 교훈은 진리의 말씀이며 영생의 말씀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함으로써 예수님의 교훈의 참됨을 깨닫자. 기독교는 단순히 이론의 종교가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죄를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실제로 경건하려고 해야 한다. 우리는 실제로 의롭고 거룩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죄악된 지를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게 되고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병고치신 행위가 비난할 일이 아니고 선한 일이며 오히려 그 일을 통해 예수님의 교훈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깨닫자.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을 확신하고 그를 확신하자.



25-36절, 내가 그에게서 났고


[25-26]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앞에서는(20절) 사람들이 예수님께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라고 반문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 사람들 중 일부는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하고 말한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악한 자들의 악한 계획은 감출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악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다 드러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게 말씀을 가르치셨다. 그는 은밀하게 무엇을 하시지 않았다. 진리는 정정당당하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게 말씀을 가르치셨으나 유대 지도자들은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만큼 예수님을 지키셨고 악한 자들의 악한 손을 막으셨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예수님은 악한 자들의 손에 넘기우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도 그의 가르치시는 사역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의인들은 하나님의 보호 속에서 당당하게 산다.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고 말한 것은 그의 육신적 출생과 자란 배경을 두고 한 말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 동네 출신이며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두고 하는 말 같은데, 그러나 성경에는 그리스도께서 또한 다윗의 자손으로, 한 인간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지식과 탐구심은 없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의 육신적인 것에 관한 것뿐이다. 그러나 실상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신성(神性)과 그의 그리스도이심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겸비하신 구주이셨다.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죽이려 했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 수 없고 그에게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다(요 6:44). 또 그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마 11:27). 사도 바울은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증거했다(고후 4:6).


[28-29]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사람들의 생각을 아시는 주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외치면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의 출생과 배경에 대한 사람들의 지식을 어느 정도 인정하셨다. 예수님은 과연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셨고 사람들 보기에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셨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참 지식은 그의 동정녀 탄생과 신성(神性)에 대한 지식이며 그런 지식은 사람들에게 아직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이 스스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심으로 왔다고 말씀하시며 그를 보내신 이는 참되다고 하신다. 또 그는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그를 안다'고 말씀하시며 그 이유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왔고] 그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에서 그는 자신의 존재와 속성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은 신성(神性)을 가지신 그리스도,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이시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출생되었다. 스스로 이 세상에 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창조의 이치 안에서 세상에 태어났다. 여기에 인간의 근원적 질문에 대한 정답이 있고 인생의 삶의 목적과 가치에 대한 판단 기준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오신 자가 아니고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자이셨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서, 그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자"(요 3:13)라고 표현하셨고 또 그는 '위로부터 오시는 이' 혹은 '하늘로서 오시는 이'(요 3:31)라고 표현되셨다. 그것은 다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표현이다.


[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아무도 그를 잡을 수 없었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다. 그 때가 되기 전에는, 사람이 아무리 악을 계획할지라도 그 악을 실행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믿기 때문에 고난의 현실이나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고요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가 행하시며 이루시는 일을 본다.


[31]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무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 예수님을 믿을 만한 증거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것들이 있다. 만일 그것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는 결코 선하거나 훌륭한 선생이 아니고 순전히 거짓말장이요 악한 사기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런 자가 아니고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그대로의 인물이라고 믿는다. 또한 그에 대한 증거로서 그의 행하신 표적들이 있다. 그가 행하신 표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충분한 증거들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요한복음 끝에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요 20:30-31).


예수께서 행하신 것보다 더 많은 표적들을 행한 자가 세상에 있었는가? 아니, 세상에 그가 행하신 것만큼이라도 행한 자가 있었는가? 석가모니나 공자가 그러하였는가? 마호멧이나 조로아스터가 그러하였는가? 그러므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하고 제자들을 통해 질문했던 세례자 요한에게 예수께서는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1:4-5). 그의 행하신 표적들은 그가 어떤 자임을 충분히 증거하고 우리가 그를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표적들과 기사들로 증거된 자이시다.


[32]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우려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냈다. 예수님은 전도 사역을 시작한 초기부터 핍박을 받으셨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셨다. 나사렛 회당에서는 분노한 사람들이 그를 동네 밖 산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그를 밀쳐 내리치고자 하였었다(눅 4:28-29). 1년쯤 지난 때부터는 그를 죽이려는 움직임이 더욱 드러났다(요 5:16-18). 그러다가 그가 죽으시기 약 6개월 전부터는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본격적으로 있었고 마침내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 데까지 이르게 되셨다.


[33-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예수님은 약 6개월 정도 더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 머무실 것이었다. 그런 후에 그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이다. 그것은 그의 승천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전도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이 위로 올라가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말한다(전 3:21; 12:7). 사람은 죽으면 그 영이 하나님께로 나아가 선악 간에 심판을 받아 천국 혹은 지옥에 들어가며 거기서 마지막 심판날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그 몸으로, 제자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올라가실 것이다(행 1:9-10). 그가 승천하시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며 그가 가신 그곳에도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물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자들은 죽은 후에 천국에 올라가 그를 뵈올 것이지만, 회개치 않고 그를 믿지 않은 자들은 영원히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며 그가 계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을 것이다.


[35-36]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 가서 헬라인을 가르치겠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그의 승천을 상상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어렵기만 하였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참으로 알자. 단순히 그를 훌륭한 역사적 인물로만 알지 말고 그의 신성을 알자.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하나님께로 올라가신 사실을 알자. 예수님은 우리의 신적인 구주이시다. 또 우리는 예수님을 참으로 믿자.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그의 진실한 말씀을 받고 그의 행하신 모든 표적들을 통해 그를 확신하자.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참으로 따르자.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의 모든 가르침에 순종하고 그를 섬기며 따르자. 그를 믿고 따르는 길에는 고난도 있을 것이지만, 이 길은 영생의 길이며 영광의 길이다. 우리 모두는 진실히 그를 알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르자.



37-53절, 내게로 와서 마시라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본문은 예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가르치신 사건의 계속이다(요 7:2, 14, 28). 초막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7월 15일부터 한 주간 동안이며 명절 끝날 곧 큰 날은 제8일을 가리킨다. 그 날은 거룩한 대회로 모이는 날이었다(레 23:36; 민 29:35). 예수께서는 그 날 무리들 앞에서 외치며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것은 죄인들을 향한 구주의 놀라운 초청이다. 첫째로, 이 초청에는 제한성이 없다. 누구든지 주께로 나올 수 있다. 둘째로, 그러나 단지 목마른 자들이 올 것이다. 이 목마름은 육신적인 뜻이 아니고 영적인 뜻이다. 이것은 인간이 무엇인가,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인간은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인간은 왜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가, 세상에는 왜 불행한 일들이 있는가, 인간은 왜 도덕적인 죄를 극복하지 못하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들에서 생기는 목마름이다. 이런 것들은 실상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셋째로, 예수님의 초청은 너무 단순한 초청이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는 단순히 자신이 인간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실 자라고 말씀하신다. 마신다는 표현은 믿음을 가리킨다. 그의 초청의 말씀은 사람이 그에게 나아와 그를 믿으면 모든 문제의 해답을 얻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초청이다.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그는 그를 믿는 자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신다. 6:35에서 그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었다. 성경은 구원을 물에 비유하였다. 이사야 12: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이사야 35:6-7,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이사야 41:18, "내가 자산[澋山, 벌거숭이 산]에 강을 열며 골짜기 가운데 샘이 나게 하며 광야로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이사야 44:3,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神,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이사야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 믿는 자들의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내린다는 말씀은 그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킨 것이었다. 성령께서는 아직 믿는 무리에게 계시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이후에는 성령께서 모든 신자들 속에 계셔서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신약 교회는 성령의 내주(內住)하시는 놀라운 복을 누리고 있다. 이것은 다시 신자들 속에 메마름이 없는 풍성한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께서 믿는 이들 속에 영원히 거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고 필요한 영적 은혜를 날마다 공급하신다.


[40-44]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대략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을 성경에 예언된 선지자 혹은 그리스도로 보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이미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그들의 심령은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믿음의 문 앞에 서 있는 자들이다.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나올 수 없고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출생지가 베들레헴이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에게 손을 대는 자가 없었다.


[45-46]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 잡으라고 보냈던 하속들은 그를 잡지 못한 채 돌아왔다. 그들은 자기들을 보낸 자들에게 대답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서 오지 않고 하나님께로서 왔고 자기를 믿는 자는 목마름을 해소할 것이며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했다. 그렇다. 유대의 역사 속에 그렇게 말한 자는 없었다. 아니, 인류의 역사 속에도 그렇게 말한 자는 없었다. 물론 거짓되고 부도덕한 이단 종파 혹은 사이비 종파의 교주들은 그런 말을 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양심적인 인격자들 중에는 그런 말을 한 자는 아무도 없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인생의 모든 고통의 원인이 욕심 혹은 집착인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며 그 욕심 혹은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수련의 목표라고 가르쳤다. 유교의 창시자 공자는 자기 자신과 가정을 다스리며 국가와 온 세계를 사랑과 정의가 있는 사회를 만들어 보려고 가르치며 노력했던 도덕적 선생이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모하멧은 가장 위대한 여섯 명의 선지자들 중 한 사람으로 추앙될 뿐이다. 도교의 창시자 노자는 모든 욕심과 생각과 행위를 초월하는 달관의 상태를 가르친 철학 선생이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는 자신을 예언자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유일한 구주라고 주장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아무도 없었다.


[47-49]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미혹되었다'는 말은 '속임을 당했다, 속았다'는 뜻인데, 예수님이 무리를 속이는 자이었는가? 예수님은 사기꾼인가, 거짓말장인가? 예수께서 속였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주장에 대한 반대되는 증거가 있는가?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의 대부분이 예수를 믿지 않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는가? 성경에 증거된 대로, 그들이 예수님을 반대한 이유는 타당성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거짓말이나 죄가 될 수는 없다.


또 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율법'은 성경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는 것이 마치 성경적 이유가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아무런 반증도 제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성경으로 자신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누가복음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50-51]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밤에 예수께 찾아와 중생에 대한 말씀을 들었던 니고데모는 저들의 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성경대로 판단하기를 원한다면, 그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그의 말을 들어보고 거기에 어떤 거짓이나 잘못이 있는지, 또 그의 행한 바를 검토하여 거기에 어떤 도덕적 악이 있는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성경적인 판결을 하는 자들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에는 잘못이나 거짓이 없었고 그의 행동에는 정죄받을 악이 없었다.


[52-53]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갈릴리 지방에 대해 멸시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했었다. 바리새인들은 니고데모에게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정확하지 않았다. 분명히 요나는 갈릴리 출신이었고 나훔도 그러한 것 같다. 확실히,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무지했든지, 의도적으로 성경을 왜곡했든지, 아니면 노한 감정 때문에 잘못 말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정리해본다. 첫째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하였다. 그것은 정당하지 않았다. 말에나 행위에나 성경적으로나 예수님을 정죄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은 본장 7절의 말씀대로 그가 그들의 행사를 악하다고 증거하셨기 때문이었다(마 27:18). 그들의 미움은 자기들의 자존심이 상한 데서 생긴 감정적인 것이었다. 만일 예수께서 그들을 높여 주셨더라면 그들은 그를 미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성경들에 증거된 대로, 경건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었고 거룩하지 않았고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받을 만한 위선자들이었다.


둘째로, 그들의 하속들이 말한 대로, 예수님처럼 말씀하신 자는 이때까지 없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생명의 구주임을 밝히 증거하셨다. 그는 자신이 주장하신 바로 그 분이시다. 세상에 그와 같은 분은 없었다.


셋째로,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예수께로 나와서 그를 믿음으로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를 믿는 자는 인간의 의미성, 목적성, 가치성을 깨닫고 죄 문제, 허무 문제, 죽음 문제를 해결 받는다. 그를 믿는 자는 성령을 받음으로 영원한 위로와 생명의 풍성함을 누린다. 여러분은 참으로 그를 믿었는가?




8장: 죄에서 자유케 하심


1-11절, 간음 중에 잡힌 여자


[1-2]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초막절 마지막 날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신 후 예수께서는 그 저녁 감람산으로 가셨다. 감람산은 예루살렘성 동남쪽에 있는 산인데, 거기에 벳바게와 베다니라는 동네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밤에 아마 그 동네에서 머무신 후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왔고 그는 아침부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3-4]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겉보기로는 종교적 전통을 따르는 경건한 자들이었지만, 실상은 외식자들이었다. 그들은 간음 중에 잡힌 한 여자를 끌고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그 여자는 명절에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왔을 때 간음죄를 범했다. 왜 그 여자만 잡혀왔는지, 같이 정죄받아야 할 남자는 어디로 피했는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그 여자는 큰 죄를 지었다. 간음은 정욕의 죄이다. 인간의 죄성은 육체의 부정당한 욕망으로 나타난다. 밥을 먹고 싶은 욕구는 정당한 것이지만 먹는 음식을 도적질하는 것은 죄가 되듯이, 성적 욕구는 정당한 것이지만 음란과 간음은 죄가 된다. 성은 하나님이 주신 부부 관계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부부 관계의 성은 죄가 아니고 오히려 사랑의 수단이다. 그러나 부부 관계를 벗어난 성 행위는 죄가 된다. 음란과 간음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큰 죄요 회개하여 씻음 받아야 할 더러운 죄이다. 그러나 이러한 죄성이 모든 사람 속에 다 있다. 음란에 떨어질 수 있는 죄성이 모든 사람 속에 있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으로서 인간의 죄악된 행위와 본성의 죄악된 성질을 깨닫게 한다(롬 3:20). 음란과 간음의 죄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큰 죄이며 사형에 해당하는 죄이다. 레위기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명기 22:22,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마태복음 5:27-32,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둔다(롬 4:15). 간음은 죽임을 당할 큰 죄이다. 그러므로 그 여인은 아마 죽음의 두려움에 질려 창백한 얼굴에 몸을 떨고 있었을 것이다.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비난하고 정죄할 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이웃을 까닭 없이, 정당한 이유 없이 미워하는 것도 큰 죄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면 심판을 받게 되고 욕하면 지옥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마 5:22). 사도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요 살인하는 자요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자라고 말했다(요일 2:9; 3:15). 미워하는 것과 살인하는 것은 한걸음 차이이다. 의로우신 예수님을 까닭 없이, 정당한 이유 없이 미워하고 비난하며 죽이려 한 것은 큰 죄악이었다.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만 죽을 죄인이 아니고 예수님을 정죄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죽을 죄인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속히 대답하지 않으신채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 글씨를 쓰고 계셨다. 아마 그는 인간의 악함을 생각하고 계셨을 것이며 또 하나님의 율법도 지키고 그 여인도 구할 길을 생각하고 계셨을 것이다.


[7-8]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혜로운 답변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동시에 그 여인을 구할 수 있는 아마 유일한 대답이었다. 또한 그것은 인간의 죄성을 일깨우신 말씀이다. 그것은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아무도 없음을 깨우치신 말씀이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간음죄를 지은 그 여인만 죄인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미워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죄인이었고, 아니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일을 극히 조심해야 한다. 또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일도 매우 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하기를,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하였다(약 4:11-12).


[9-10]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도덕적 분별력, 선악의 판단력이다. 사람은 양심 때문에 악을 깨닫고 부끄러워하고 그 형벌을 두려워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서 죄 없는 자가 아님을 느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을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들까지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고 예수님과 그 여자만 남았다. 그 여자를 고소하고 정죄하던 자들은 다 떠나갔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그 여자는 "주여 없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께서는 그를 죽음에서 건져주셨고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예수님은 죄인을 심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죄인을 회개시키러, 그를 구원하고 살리러 오셨다. 장차 다시 오실 때 그는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1:7-9,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러나 지금 그는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단지 회개하라고 부르신다.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다시는 범죄치 말라"는 말씀은 회개하라는 말씀이며 이제는 죄를 떠나 의와 선을 행하라는 말씀이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하였다(롬 6:17-18, 22). 모든 사람은 죄를 회개하고 의와 거룩의 길을 향해 새로운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그래야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래야 지옥 영원한 불에 던지우지 않고 의와 평화의 새 세계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을 죄인이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든지, 그를 붙잡아 와서 예수 앞에 두고 예수를 정죄할 거리를 찾고 있는 유대 지도자들이든지,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일반 대중이든지, 모든 사람은 다 정죄받을 죄인, 아니 영원히 지옥불에 던지울 죄인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는 죄인들을 정죄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 그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 그는 지금 누구든지 그에게로 와서 그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으라고 죄인들을 부르신다. 그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그는 그 여자를 사람들의 정죄로부터 건져주셨다. 그는 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죄로부터 구원을 얻어야 한다. 죄를 사랑하는 자는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 죄를 심판하실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버리고 의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의는 인간의 생활 법칙이다. 의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평강의 길이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48:22). 모든 죄인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 또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 안에 거하면서 의(義)의 길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죄 안 짓는 생활이 성도의 삶의 일차적 목표이다.



12-20절, 나는 세상의 빛이라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성전뜰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시던 주께서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와 그를 시험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인해 잠시 방해를 받으셨으나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를 시험하던 자들은 다 떠나갔으나 그의 가르침을 듣던 자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담의 타락 이후, 세상은 어두운 세상이 되었다. 인간의 많은 철학과 종교와 사상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도 없고 의와 거룩의 도덕성도 없으며 미래에 대한 소망도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이사야는 오래 전에 메시야에 대해 예언하기를,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하였었다(사 42:6; 49:6).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야로 오셨다. 그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단순하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놀라운 선언이었다. 역사상 그와 같이 말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태양빛이 온 땅의 구석구석에, 모든 사람에게 비취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온 세상에, 모든 사람에게 비췬다. 비록 모든 사람이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할지라도, 그의 빛은 남자나 여자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지식인이나 일반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구별함 없이 모든 사람에게 비췬다. 그 빛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이요 의와 생명의 빛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그 빛과 생명이 약속된다. '따르는 자'라는 말은 구주와 지도자이신 그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기고 범사에 그에게 복종하는 자, 곧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를 따르는 자는 빛과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는 어두움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며 참 빛을 소유할 것이다.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빛이다. 태양이 있는 곳에는 항상 밝은 빛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는 항상, 영원토록 빛과 생명이 있을 것이다.


[13-14]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무리 중에 바리새인들은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했다. '참되지 않다'는 말은 '믿을 만하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그 때 예수께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다"고 말씀하셨다. '참되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는 뜻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증거가 믿을 만한 이유로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신성(神性) 즉 신적 본질을 가진 자이시며 세상을 구원할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고 장차 승천하여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실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증거는 인간의 어떤 증거와도 같지 않다. 그는 신성을 가진 하나님으로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다. 그것은 인간의 그 어떤 최선의 증거보다 더 힘이 있다.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증거는 세상에서 가장 힘 있고 완전한 증거이다.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육체를 따라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외모로, 인간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외적인 권위나 영광이 없어 보였던 것 같다. 물론 사람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는 말을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신적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육체를 따라 그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잘못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무도 판단치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사람들을 판단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고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는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까지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날 사람들을 공의로 판단하고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16-18]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그러나예수께서 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이들에 대해 판단하실지라도 그 판단은 믿을 만한 판단이다. 그것은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너희 율법에도'라는 표현은 '너희가 믿고 높이고 인용하는 율법에도'라는 뜻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믿고 높이고 즐겨 인용하였다. 그런데 율법은 무슨 일이든지 판단할 때 한 사람의 증언만 가지고서 하지 말고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을 가지고 하라고 했다. 민수기 35:30, "무릇 사람을 죽인 자 곧 고살자를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신명기 19: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세상에 온 사실에 대해 율법의 요구대로 두 증인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요 다른 하나는 아버지이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천국에 있으셨음을 증거하신다. 그의 말은 사실 그대로이었다. 또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 대해 증거하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증거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해 계속 증거해 오셨다. 또 그는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그리고 그가 세 명의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친 음성으로 아들 예수에 대해 증거하셨다(마 3:16-17; 17:5). 또 그는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통해 그를 증거하셨다(요 5:36).


[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그에게 질문했다. 예수께서는 그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자신과 아버지와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서 아버지를 알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시다.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세상의 지식이 많은 자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을 것이다.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이상의 말씀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연보궤 앞에서 가르치실 때 하신 말씀이었다. 연보궤 앞은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공적인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다. 아무것도 은밀한 것은 없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증거되신 바로 그 분이시다. 그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신적인 구주로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다. 그에게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어두움에서 구원을 받고 생명의 빛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를 믿지 않았고 그를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 속에 그를 해치려는 마음은 있었으나 아직 그를 해칠 힘은 없었다. 아직 그가 잡히실 때가 아니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에 달려 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이 있다. 그 기간이 끝나기 전에는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복잡한 세상 속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러한 확신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 영접하였는가? 우리는 다 그를 믿고 따르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자마다 어두움에서 구원을 받고 생명의 빛을 받는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어두움 속에 사는 자는 없는가?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으라. 그를 믿으므로 빛을 받아 빛의 세계에서 빛의 생활, 곧 하나님을 알고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게 사는 생활을 하자. 또 그 빛을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이들에게 전하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르자. 세상의 빛과 생명이신 구주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를 무시하고 그와 변론하며 그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그를 십자가에 죽게 내어몰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존경과 영광을 받으시기보다 멸시와 고난을 받으셨다. 그는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수치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도 세상에서 칭찬과 영광 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오히려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 받기를 각오하자.



21-30절,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그가 아버지께로, 천국으로 돌아가시는 것을 의미한다(7:33; 8:14). 그러나 유대인들의 다수는 뒤늦게 그를 찾다가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며 주께서 가시는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전 3:1). 믿고 구원을 받는 것도 때가 있다. 때가 너무 늦으면 구주를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믿고자 해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때를 잃은 에서는 후에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저버리면 다시는 회개치 못하고 믿지 못하고 죄사함을 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때가 올 것이다. 잠언 1:28은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라"고 말씀했다.


[22]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스스로의 목숨을 끊으려는 것인가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살은 죄인데 주께서 자살을 의미했을 리가 없다. 우리의 목숨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특히 구원받은 성도의 목숨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된 것이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끊어서는 안된다. 고린도전서 6:19-20은 말씀하기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다.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앞에서 그가 간다고 말한 것이 자살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함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셨으나 유대인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셨다. 유대인들은 다 아래서 났고 이 세상에서 났고 이 세상에 속하지만 예수께서는 위에서 나셨고 이 세상에서 나지 않으셨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다. '났다,' '속한다'는 원어(에크)는 근원과 본질을 나타낸다. 유대인들과 예수님은 그 근원이 다르고 그 본질이 다르다. 유대인들은 세상적 근원을 가지고 물질적 본질을 가지지만, 예수님은 신적 근원을 가지시고 신적 본질을 가지신다. 예수님의 신적 근원과 본질은 부수적으로 그의 탄생이 처녀 마리아를 통한 특별 방식임을 암시한다.


[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예수님의 신성(神性) 즉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신앙의 필수적 요소이다. 구원은 이 신앙을 통해 온다. 불신앙은 큰 죄악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의 모든 죄의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죄 가운데서 죽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12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했다.


[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자신에 대해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그는 밤에 그를 찾아왔던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그는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믿고 있었던 수가성 여인에게 "내가 그로라"라고 말씀하셨다(요 4:26). 그는 베데스다 연못 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에 유대인들과 변론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요 5장). 그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기적의 떡을 먹었던 무리들에게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증거하셨다(요 6장). 그는 초막절 마지막 날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무리에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7:37-38). 또 그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요 8:12).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분명하게 증거하셨던 것이다.


[26-27]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또 덧붙여서 그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참되시므로 그에게 들은 것을 세상에 말하는 그 자신의 말들이 다 참되다고 증거하신다. 마귀는 거짓되지만 하나님은 진실하시며 그의 말씀은 다 진리이다.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내용들도 다 진실하다. 그 내용이 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그 외에도 말씀하실 것이 많으셨고 그가 더 많은 것들을 말씀하셨다면 그것들도 다 진리이겠으나, 적어도 성경에 기록된 그의 모든 말씀은 다 진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유대인들이 지금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있으나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할 때에는 그들이 그를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다 그를 알고 다 그를 믿지는 않을 것이며 택한 자들만 그렇게 할 것이지만, 그들이 그를 알고 믿게 될 것이며 그의 말씀이 진리임도 알게 될 것이다. 과연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만에 승천하신 후, 오순절이 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의 찔림을 받았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고 그 날 삼천명이나 세례를 받았다. 사도행전 2:36-37,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사도행전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29-30]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오히려 미워하고 배척하였으나,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그와 함께 계시고 그를 혼자 두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더욱 그러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으셨고 배척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와 항상 함께하셨다. 이 사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된다. 주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다(마 28:20).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를 힘쓴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더욱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했다(고후 5:8-9).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해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고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믿고 구원을 받는 것도 때가 있다. 지금은 아직 은혜받을 만한 때이며 지금은 아직 구원의 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거두어지는 때가 올 것이다. 천국문이 닫힐 때가 올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지만 더 이상 구원을 받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헛되이 주의 이름을 부를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오기 전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자. 천국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자. 참으로 회개하고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돌이키며 진심으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자.


둘째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자. 그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그의 신성(神性)을, 그가 신적 구주이심을,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심을, 그가 인간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실 유일한 구주이심을, 그가 세상의 빛이심을 믿자.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주의 간곡한 말씀을 받자.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


셋째로, 불신앙은 영원한 멸망으로 이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들은 영원한 지옥불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넷째로,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나서 즉 중생해서 장차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그들이 비록 이 땅에서 배척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항상 함께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더욱 체험할 것이다.



31-36절, 죄로부터의 자유


예수께서는 이 부분의 말씀에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참 제자가 될 것과 특히 죄로부터의 자유함을 얻을 것에 대해 교훈하셨다.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예수께서는 먼저 참 제자가 되는 일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람이 그의 참 제자가 되려면 그의 말에 거해야 한다고 그는 말씀하셨다. 그의 말씀에 거한다는 말은 그의 교훈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믿고 그 안에 계속 머물며 그것을 실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의 교훈을 한번 듣고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듣고 붙잡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제자는 스승에게서 배우고 그 배운 바대로 그를 따르는 자이다. 스승과 제자의 바른 관계는 제자가 스승의 말을 믿고 실행하는 데 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인다고 잠언은 말했다(잠 10:8). 그것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의 모습이다. 주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른다고 말씀하셨다(요 10:27). 그것이 주를 따르는 참 제자의 모습이다.


그것은 주의 비유들 중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가 아니고 좋은 밭에 떨어진 씨와 같다. 돌밭에 뿌리운 씨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를 가리켰고 가시떨기에 뿌리운 씨는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를 가리켰다(마 13:21-22). 그러나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를 가리켰다(눅 8:15). 좋은 밭에 떨어진 씨와 같이 말씀을 듣고 받고 굳게 붙들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 참 제자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그가 친히 하신 말씀들과 그에 관한 사도들의 모든 말씀들을 다 포함한다. 그것이 곧 성경말씀이다. 성경적 기독교는 바로 성경 말씀에 바로 선 기독교이며 역사적 기독교는 바로 그런 입장을 가리킨다. 성경을 벗어난 교훈은 참 기독교가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은 대략 네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성경보다 중요시하는 자유주의이며 둘째는 인간의 신비적 경험을 추구하는 은사주의이며 셋째는 성경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유주의와 은사주의를 반대하지 않고 적당히 어울려 가려고 하는 부류인데 이것을 신복음주의 혹은 타협적 복음주의라고 부른다. 성경적 기독교는 이 세 가지 부류와 구별된다. 성경적 기독교는 성경말씀의 교훈 안에 거하려는 입장이다. 그것은 오늘날 좁은 길이다. 그러나 바른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려는 자들은 성경의 바른 말씀 곧 성경적 기독교를 믿으며 붙들며 그 안에 굳게 서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비방하였다. 그 때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말씀을 가르쳤다. 참 제자는 말씀을 받고 따르는 자이다. 그가 예수님의 참 제자이며 사도의 참 제자이다. 오늘날 목사와 교인의 관계도 이런 관계이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회 속에는 제자훈련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제자훈련은 몇 가지 내용을 가르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육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를 원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놀고 먹고 즐기는 것을 교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일일 뿐이다. 사람들은 선생이나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명예욕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류의 교회생활은 참 제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참된 제자훈련은 성경의 모든 교훈을 가르치고 배우며 또 그대로 실행하여 인격의 변화를 가질 때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요 14:6)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에 관한 말씀이다. 복음이 바로 진리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했다(엡 1:13).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복음의 요지는, 인간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긍휼과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주셨으므로 그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여기에 모든 죄인들의 구원과 소망이 있다. 여기에 천국의 문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주는 은혜와 복 중에 가장 큰 것은 자유라고 표현될 수 있다. 이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가리킨다. 죄로부터의 자유란 죄책(罪責) 즉 죄의 법적 책임으로부터의 자유, 죄인이라는 신분으로부터의 자유, 죄의 형벌과 공포 즉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으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부터의 자유이다. 죄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복음이다. 그것은 '의롭다 하심'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19-24).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0:4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의가 이렇게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이라도 신자를 정죄치 못하며 이런 의미에서 성도는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표현된다. 이것이 로마서 7장과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증거한 요지이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물론 성도가 죄의 세력 곧 죄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것은 아니다. 땅 위에서의 성화는 불완전하다. 완전 성화는 부활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죄성은 죄책이 없는 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완전한 의는 무효화되지 않는다. 의와 죄의 싸움과 갈등은 있으나 최종적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물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의 안에서 의를 행하고 그 완전한 거룩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믿었고 그 말씀 안에 거하고 있다면, 다시는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며 죄가 우리를 종으로 삼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유대인들은 육신적 자만심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악된 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 조상들이 죄로 인해 멸망하여 바벨론 나라의 포로가 되어 70년을 살았다는 사실과 지금도 로마 제국의 지배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중생치 못한 자들은 외적인 문제는 잘 이해하면서도 영적인 문제는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몸의 질병이나 돈의 손실에 대해서는 민감하면서도 죄 문제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심지어 중생했고 성령을 받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이 실제로 믿음과 구원과 정반대의 삶을 산다면 그들은 저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의 생각은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말하는 자유가 죄로부터의 자유임을 말씀하신다. 죄를 범하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 그는 죄성 즉 죄의 경향성과 습관성의 지배를 받으며 죄의 형벌 아래 있게 된다. 죄는 그의 육신의 욕망을 충동질하며 죄벌의 공포는 그를 위협한다. 모든 죄인은 다 죄의 종이다. 그들은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면할 수 없으며 이 땅 위에서도 평안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 자는 누구나 죄로부터의 참 자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


[35-36]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종과 아들의 신분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종은 주인의 집에서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다. 그것이 옛날 아브라함의 종 하갈의 처지이었다. 그 여자와 그의 아들 이스마엘은 결국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집에 거하며 그의 기업을 이어받았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죄의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 천국에 거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국에 영원히 거하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실 것이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 자체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 혹은 그에 관한 말씀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죄인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 이것이 구원이요 전도의 목표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두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그의 참 제자가 되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막연히 그를 믿는다는 생각으로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길은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곧 성경의 모든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좁은 길이지만, 이것이 바른 길이며 이것이 성경적 기독교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감사함으로, 그러나 두렵고 떨림으로, 읽고 듣고 믿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 말씀 안에 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그 자유를 지키고 누리는 자가 되자.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그는 죄성의 지배를 받고 죄의 형벌의 두려움 속에서 산다. 그러나 우리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다. 그는 죄의 법적인 책임과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얻는다. 모든 신자는 이 자유를 얻어야 한다. 이 자유를 깨달아야 한다. 또 이런 자유를 얻은 자마다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죄와 상관 없이 살아야 한다. 중생한 자는 결코 계속 죄를 짓지 않으며 계속 죄 가운데 낙을 누리지 않는다. 그는 잠시 죄의 유혹에 넘어질지라도 즉시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의지하며 의의 길, 거룩의 길을 힘쓴다. 죄인과 의인의 길은 판연히 다르다. 죄의 종 된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길로 나아와야 한다.



37-47절, 너희는 마귀의 자녀


본문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반면 예수께서는 그들이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지적하신 말씀이다.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인정하신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아브라함의 씨로 약속된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죽이려 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은 요한복음 5장에서부터 요한복음 전체에 여러 번 증거되어 있다. 5:16(전통본문),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고 죽이려 한지라."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7:1, "유대인들이 죽이려 한지라." 8:37,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8:40,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11:53,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까닭은 그의 말씀이 그들 속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요 세상의 빛이며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믿지 않으면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모든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믿어야 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곧 신적 구주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하였고 그의 신성도, 그의 구주 되심도 믿지 않았고 도리어 그를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자신과 근원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고 말씀하셨다. 전통본문대로 다시 번역하면, "나는 내 아버지와 함께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와 함께 본 것을 행하느니라." 예수께서 아버지와 함께 보셨다는 말씀은 그가 사람으로 나시기 전 천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실 때 보셨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보고 들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다 말씀하셨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아비와 함께 본 것을 행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아비란 일차적으로 그들의 육신적 아버지나 조상을 가리킬 것이지만, 근원적으로는 그들의 영적인 아버지인 마귀를 암시한다. 모든 죄인은 마귀의 자녀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아들이 아버지의 성질을 닮듯이(父傳子傳) 죄인들은 마귀의 성질을 닮았다.


[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다시 강조하면서 예수님의 암시를 부정하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위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처럼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행위를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으나 영적으로는 도무지 아브라함을 닮지 않았고 오히려 마귀의 속성을 지니고 마귀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의 형상 대신에 마귀의 형상을 닮은 죄인들이 되었다. 사람 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죄성이 유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행위와 매우 달랐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말한 사람인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인간의 말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께 들은 진리의 말씀이었다. 요한복음 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대적 상태에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시날왕, 엘라살왕, 엘람왕, 고임왕 등의 연합군을 파하고 조카 롯을 구하여 돌아올 때 자기를 축복한 멜기세덱에게 노획물의 10분의 1을 주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어떻게 존중했는가를 보이는 한 예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그들의 아비의 행위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육신의 조상들을 가리킬 것이다. 유대인들의 조상은 대체로 불경건하고 우상숭배적이었고 부도덕하고 악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배척하고 죽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매우 달랐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아비가 근원적으로는 마귀라는 사실을 여전히 암시하신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며 자신들이 음란한 데서 나지 않았고 그들의 아버지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신앙고백은 경건하고 좋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일 뿐이고 실제로 그들의 심령 상태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심령 상태는 하나님과 거리가 멀었고 선함과 진실함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들 속에는 죄악된 욕심과 미움이 가득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무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미워하고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단지 외모로가 아니고 심령으로 정말 그러하다면, 그들이 자신을 사랑했을 것인데,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께서는 자신이 스스로 온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를 미워하고 죽이려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며 그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도 없고 하나님의 영도 없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는 깨달음이 없었고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4-15). 바울도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일에 대해 증거하기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했다(고후 4:3-4).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예수께서는 이제 보다 분명하게 그들이 그들의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마귀의 자녀인 증거는 그들이 마귀의 욕심을 행하고자 하기 때문이었다. 마귀의 욕심은 교만과 명예심 등이며 거기에서 미움과 시기와 살인이 나온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이다. 그는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함으로 죽게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인이 되고 죽게 되었다. 또 마귀에게는 진리가 없다. 그는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 하는 것은 그들이 마귀의 자녀임을 증거할 뿐이었다.


[45-47]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말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무슨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를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마귀의 자녀라는 증거이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중생한 자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을 것이지만, 그들이 그것을 듣지 않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았다는 증거이었다. '하나님께 속한다'는 원어는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할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예수님을 믿고 그를 따를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죽이려 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마귀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44절). 그들이 마귀의 자녀인 증거는, 첫째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깨닫지 못하고(43, 47절) 받지 않고(37절) 믿지 않기(45-46절) 때문이며, 둘째로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치 않고(42절) 죽이려 하기 때문이다(37, 40절). 오늘날도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적 기독교를 깨닫지 못하고 받지 않고 믿지 않으며 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보내신 전도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적 기독교를 깨닫고 받고 믿는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다(요일 5:1). 또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전도자들을 사랑한다.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했고(고전 16:22), 주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5:40).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모든 사람은 이 둘 중의 하나이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 만일 여러분이 아직 마귀의 자녀라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라.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라.



48-59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고 말했다.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은, 참 유대인이 아니다,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거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말한 까닭은, 아마 예수께서 유대인들을 정죄하고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귀신이 들렸다는 말은 미쳤다는 뜻일 것이다. 마가복음 3:21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의 친지들이 그를 붙들러 온 일을 증거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귀신이 들렸다 혹은 미쳤다고 말한 까닭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께로서 왔고(42절) 자신의 말이 진리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46-47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주의 귀한 종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이단이라는 말을 들었고(행 24:5) 베스도 총독에게 미쳤다는 말을 들었다(행 26:24). 우리 주 예수께서 사마리아인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셨다면, 주의 종된 우리는 그런 말이나 혹은 그보다 더한 말을 듣는다고 분노하거나 낙심할 것이 없을 것이다.


[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미친 자가 아니시다. 그는 바른 정신으로 진리를 말씀하신 자이다. 또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공경한 것, 즉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 것인데 그들이 그를 무시한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가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고 아첨하는 말을 했다면 그들의 미움과 비난을 받지는 않았겠지만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바른 말씀을 하실 때, 진리만을 말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였다.


[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영광 받기를 구하지 않으셨다. 만일 그가 사람의 영광을 구하셨다면 그는 사람들이 비위를 맞추는 거짓 선지자가 되셨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 자신이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는 않으셨으나 그의 영광을 구하고 사람들의 모든 말과 행위를 판단하시는 이가 계신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또 그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위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고 보응하실 것이다.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법이다. 그는 이렇게 진지하게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내 말을 지킨다'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의 교훈대로 의의 길을 걷는 것을 가리킨다. 죽음이라는 말은 영적인 죽음과 육신의 죽음 그리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성경에서 죽음이라는 말은 이 세 가지 요소를 다 포함한다.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는다는 말은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영생의 길을 가리킨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육신적으로도 죽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명확한 교훈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이런 죽음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5:24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구원받은 신자도 육신적으로 죽지만 장차 부활할 것을 믿기 때문에 '잔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52-53]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우리는 네가 귀신 들린 줄 안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선지자들이 다 죽었는데 예수님이 자신의 말을 지키면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한 죽음과 생명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죽음을 단지 육신적 죽음으로만 이해했고 또 영생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54-5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과 구원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자신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만일 그 정도의 차원이라면 그 말은 별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성과 구원 사역은 그의 아버지 곧 유대인들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가 증거하실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무시하나 하나님은 그를 증거하실 것이다.


유대인들은 말로만 하나님을 알 뿐 실제로는 그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고 배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신다. 실상 예수님만 하나님을 바르게 아신다. 그래서 그는 마태복음에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11:27).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는 그 어떤 인간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하고 친밀하며 신비한 관계이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께서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는 거짓말장이가 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말씀을 지킨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영원한 삼위일체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후에 하나님께 순종하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로마서 5:19에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했는데, 많은 사람들을 의인 되게 하신 그 한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빌립보서 2:8은 예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이 순종으로 우리는 값없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았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언제, 어디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는가? 어떤 이들은 아브라함이 예수님 당시에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기뻐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하였으나, 다수의 주석가들은 아브라함이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면서 먼 장래에 오실 메시야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했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 그리고 그를 통해 온 세계에 구원의 복이 전달될 것을 내다보며 기뻐하였을 것이다.


[57]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 때 예수님의 나이가 약 33세 정도이었을 것인데, 유대인들은 왜 그에게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고 말했는가? 물론 예수님의 얼굴이 실제 나이보다 나이가 더 들어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33세 정도가 50세 정도로 보였겠는지는 의문이다. 유대인들의 표현은, 라일의 주석대로, '네가 인생의 절반도 살지 못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는 뜻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또 하나의 표현을 사용하셔서 자신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증거하셨다. 그것은 그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 즉 그의 신성(神性)에 대한 증거이다. 그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있느니라'(에고 에이미)는 구약에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명칭을 생각나게 하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에예 아쉐르 에예)고 말씀하셨다(출 3:14). 그것은 여호와라는 명칭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설명이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이시다. 그것은 '내가 있느니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神性)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신성을 소유한 자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그를 치려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못했다. 그들의 눈은 아직 열려지지 않았다. 헬라어 전통사본에는 '나가시니라'는 말 대신에 '나가시며 그들 가운데로 통과하여 지나가시니라'고 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알자. 모든 인간은 시작이 있지만,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시다. 그는, 요한복음 1:1의 증거대로 태초부터 계셨고, 요한계시록 22:13의 말씀대로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자.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생의 길이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영생의 길을 바로 알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 안에 거할 때 영생을 누린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은 자들은 이 진리를 다른 이들에게 증거해야 한다. 전도는 하나님의 가장 큰 소원이며 성도의 기본적인 의무이다.




9장: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


1-12절,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예수께서는 길 가실 때에 한 소경을 보셨다. 비록 모든 일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속에서 일어나지만,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를 찾으셨다기보다 길 가시다가 우연히 그를 만나셨다. 예수님의 주된 사역은 병고치는 것 같은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시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었다.


그가 길에서 보신 소경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이었다. 그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 푸른 하늘과 산과 들, 그리고 각양의 동식물들을 볼 수 없는 자이었다. 그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큰 자연적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그는 늘 어둡고 단조로운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다. 세상에는 이런 불행한 자들이 많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육신적, 정신적 병약자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 심리적으로 외로운 자들, 특히 죄인들이 많다. 그들은 모두 영적 혹은 육적으로 불행한 자들이다.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 자신의 원죄 때문인지,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인지 예수님께 질문하였다. 보통 죄와 질병은 연관이 있다. 사람은 죄로 인해 각종 질병들과 불행을 당한다. 구약성경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죄의 형벌로 여러 가지 질병들로 인간을 치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 중에 눈 멂 등도 언급되어 있다(28절). 또 성경은 부모의 죄 때문에 그 자녀를 병으로 죽게 하는 경우도 증거한다. 다윗은 범죄한 후 우리아의 처가 그에게 낳은 아이가 병으로 죽는 일을 당하였다(삼하 12장). 두아디라 교회의 여자 이세벨은 죄 때문에 그 자신이 병상에 누울 것이요 그의 자녀가 죽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계 2:22-23). 인간의 불행과 죄는 빈번히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교훈하였다(약 5:16).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이 경우는 그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범한 까닭이 아니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고침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것이다. 모든 병이 다 직접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는 아니다. 물론 근원적으로는 세상의 모든 불행이 다 죄에 기인하지만, 모든 불행이 다 직접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는 아니다. 그것이 욥기의 주요 교훈이기도 하다. 의인 욥은 많은 재산의 손실, 모든 자녀들의 죽음, 자신의 몸의 치료할 수 없는 질병 등 큰 불행을 당했으나, 그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받은 재앙은 아니었다. 욥이 당한 고난은 하나님의 높고 깊으신 뜻 가운데 주어진 고난이었다. 성도들에게는 때때로 그런 고난이 있다. 성도는 그런 고난을 통해 더욱 더 하나님을 알게 되고 겸손해지고 믿음이 굳세어지고 인격이 거룩하고 선하게 단련된다. 그러므로 욥은 고난 중에 고백하기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했다(욥 23:10).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당하는 형제들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고난 당하는 형제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4-5]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오늘날은 낮과 밤의 구별이 많이 깨어진 시대이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여전히 낮은 일하는 때이고 밤은 쉬는 때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온 자신이 활동하는 때를 낮에 비유하셨다. 그는 살아계시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잡혀 죽으실 때가 오며 그 때는 그가 일하실 수 없을 것이다. 인생에게도 낮과 밤이 있다. 인간의 젊음도 한 때이며 평안한 환경도 항상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일할 수 없는 밤이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할 만한 때에 즉 아직 낮이라고 말할 수 있는 때에 시간을 아끼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힘써야 할 것이다.


[6-7]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께서는 단순히 말씀하심으로 그 소경을 고치실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는 그 대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런 방법을 사용하신 것은 분명히 그 소경에게서 믿음과 순종을 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행위는 모든 사람에게 교훈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참된 믿음과 순종이다. 예수님의 방법은 옛날 엘리사 때에 엘리사가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던 방법과 비슷하였다.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에게 말하기를,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했다(왕하 5장).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 당장에 말씀으로 나아만의 나병을 치료하실 수 있었다. 또 요단강에 몸을 씻는다 해도 일곱 번이 아니고 한 번 씻어도 깨끗함을 얻게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에게서 참된 믿음과 순종을 보기를 원하셨다. 나아만이 체험할 기적은 그의 믿음과 순종을 필요로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참된 믿음과 순종을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순종하는 자는 오늘날에도 삶의 현실 속에서 시시 때때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순종했다. 그는 그의 말씀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다. 실로암은 구약 이사야 8:6에 나오는 '실로아'와 같은 말이다. 그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자 그의 눈은 시력을 회복했다. 그의 죽은 시신경이 되살아났다. 그 소경은 이제 보는 자가 되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얼마나 기쁘고 감격적인 순간이었겠는지! 그는 기적적으로 치료를 받았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엇을 창조하시는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는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8-12]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를 보았던 사람들은 서로 엇갈린 판단과 말을 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가 전에 구걸하던 그 소경이라 하고 다른 이들은 그가 아니다, 그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들의 판단이 엇갈리는 것은, 기적이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내가 그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눈이 떠진 경위를 묻자 그는 앞에 증거된 내용을 말했다. 이와 같이 본문은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그 소경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셔서 그 소경이 그대로 했더니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증거한 셈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다 진실한 내용이다. 본문에서 그 진실성은 이처럼 두 번이나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기록함으로써 더 확실히 증거된다. 성경은 진실한 증인들의 진실한 증거의 내용들이다. 우리는 성경을 다 믿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세상에는 불행한 자들이 많다.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병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도 많지만,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병약한 자들과 외로운 자들과 죄인들이 많다.


둘째로, 우리는 질병의 치료를 위해, 건강의 회복을 위해, 경제의 회복을 위해, 정신적 평안을 위해 먼저 죄를 회개하며 기도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 그런 불행 가운데 있는 우리의 형제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어떤 불행이 특정한 죄 때문에 오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구주이시다. 그는 우리의 치료자이시다. 그는 가장 훌륭한 의사이시다. 그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자이시다. 그는 우리의 영육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있는 구주이시다. 그에게 나아가 해답을 얻자.


넷째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된 믿음과 순종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며 그의 모든 교훈을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믿음과 순종을 기뻐하신다. 우리가 믿고 순종할 때 우리에게는 영적,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회복과 구원이 있고 또 참된 평강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는 그의 도우심과 그의 능력을 체험할 것이다.



13-34절, 유대인들의 불신앙적 변론


본문은 불신앙적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통해 고침받은 소경과 변론하는 내용이다.


[13-16]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일을 한번 더 언급하였고 고침을 받았던 그 소경도 바리새인들 앞에서 한번 더 증거했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 9장은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사실을 모두 네 번이나 증거했다. 이 사건은 본문이 증거한 대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성경은 진실한 증인들의 증거의 기록이다. 그것은 발생한 사건을 진실하게 증거한 기록이다.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고 어떤 바리새인들은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바리새인들 가운데는 예수의 인격에 대하여 쟁론이 있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주신 것이 잘못이었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안식일은 죄로 인하여 참 안식을 잃어버린 인생에게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참된 안식의 예표이었다. 그 소경은 참 안식을 모르고 있었고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의 마음에는 슬픔과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침을 받았을 때 그는 큰 기쁨과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단지 소경을 고침받았을 뿐 아니라 영혼의 죄사함과 구원을 받았다면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그는 과연 그렇게 되었다(38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그에게 참 안식을 주신 것이요 그것은 오히려 안식일에 합당한 일이었다.


[17]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고침받았던 소경은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선지자라고 대답하였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서 진리를 말하는 자이며 사람들은 그의 모든 말씀을 다 믿어야 할 것이다. 어떤 선지자가 참 선지자이려면, 첫째로 그가 전하는 내용이 모세의 율법에 맞아야 하고, 둘째로 기적을 행하는 표가 있어야 했고, 또 셋째로 만일 그가 무엇을 예언한다면 그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져야 했다.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일치하게 교훈하셨고 행하셨다. 그는 도덕적으로 흠잡힐 것이 없으셨다. 이제 그가 소경의 눈을 기적적으로 고쳐주셨으니 그는 참 선지자의 표를 가지신 것이 분명하였다. 고침받은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그가 참 선지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 곧 우리가 그의 말을 다 믿고 다 지켜야 할 선지자이심을 깨닫고,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18-23]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유대인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그 부모에게 그가 소경으로 난 아들이 맞는지 그리고 지금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 부모는 그가 자신들의 아들이며 소경으로 난 자라고 말한 후, 그러나 그가 눈을 뜨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그가 장성했으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 부모가 아들이 눈을 뜨게 된 경위에 대해 그렇게 말한 까닭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를 출교하기로 이미 합의했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의 마음은 어둡고 강퍅하였다. 그들은 그 소경이 예수님에 의해 고침받은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 속에 있었던 불신앙적 선입견은 그들로 하여금 명확한 사실 조차도 믿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 불신앙적 편견을 버린다면,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잘못된 선입견을 버릴 때 어떤 사물이든지 바르게 분별하고 판단하고 믿을 수 있다.


[24-25]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죄인이라고 단정하며 정죄한다. 그것도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무지한 일이었다. 예수께서 죄인인 증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셔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신 것이 죄가 되는가? 그것은 결코 죄가 될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죄가 되려면,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 외에 예수께는 정죄받을 도덕적인 죄악이 없으셨다. 그는 참으로 정죄받을 일이 없으셨다. 그러나 저 유대인들은 어둡고 강퍅한 마음으로 그를 정죄하였다.


[26-29]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불신앙은 명확한 사실에 대해 계속적인 질문을 하게 하며 의문을 일으키게 한다. 유대인들은 그 사람이 그에게 무엇을 하였고 어떻게 그의 눈을 뜨게 했는지 또 다시 물었다. 고침받은 그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이미 일렀는데도 듣지 않고서 왜 다시 듣고자 하느냐, 그의 제자가 되려 하느냐고 책망하듯이 대답했다. 유식한 불신앙자들은 평범한 신자에게 책망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히려 그를 욕하면서 자신들은 모세의 제자이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 알지만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들이 모세를 믿는다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역사상 모세 이후에도 하나님의 진실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다. 참 선지자들은 그들의 교훈과 인품과 행위에 의해 그 진실성이 증거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참 선지자이신지에 대해 양심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무조건 거절해서는 안될 것이다.


[30-34]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고침받은 그 사람은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해 오히려 의아해 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음을 확신하며 증거하였다. 그가 그렇게 판단했던 까닭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를 들으신다는 점과, 둘째로 창세 이후로 인류의 역사상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한 일이 없었고 그런 소문을 들은 적도 없다는 점과, 셋째로 그러므로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셨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 등이었다. 평범한 그 사람의 깨달음과 판단은 유대 지도자들의 생각과 판단보다 더 타당성이 있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히려 그를 책망하며 쫓아내어 보냈다. 인간의 무지와 강퍅함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제거되고 고쳐질 수 없다. 인간은 전적으로 어둡고 부패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불신앙적 유대인들과 소경이었던 자와의 대조를 본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며 누구든지 그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출교하기를 합의하였다. 유대인들은 확실한 이유와 근거도 없이 예수를 죄인이라고 단정하였고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지만 이 사람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면에 소경이었다가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은 예수께서 선지자이시며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자이시라고 증거했다. 그는 첫째로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않으시고 경건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들으신다는 것과, 둘째로 창세 이후로 인류의 역사상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한 일이 없었고 그런 소문을 들은 적도 없다는 것과, 셋째로 그러므로 만일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으셨다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그가 유대인들 앞에서 제시한 그 근거들은 타당성과 설득력을 가진다.


또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소경을 고쳐주신 일에 대해서도,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안식일은 참 안식의 예표이었다. 죄인인 인간에게는 참 안식이 없었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그 사람은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그를 고쳐주셨다. 그는 그에게 참 안식을 맛보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에게 영육의 참 안식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소경을 안식일에 고쳐주신 것은 오히려 안식일에 하실 만한 일이었다. 그 소경에게는 영육의 참 안식이 필요했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것을 얻었다.


우리는 소경이었다가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의 판단과 증거를 통해 다시 한번 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참 선지자요 그리스도 구주이심을 확신하자. 우리는 저 유대인들처럼 무지함과 강퍅함과 불신앙적 선입견을 가지지 말자.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증인들의 진실한 증거의 말씀들을 진지하게 읽고 생각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며 그의 참 제자가 되어 그의 모든 명령과 교훈을 힘써 순종하자. 또 그를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자.



35-41절,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


[35]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소경이었던 그 사람을 쫓아내었다는 말을 들으셨다. 그가 그 사람을 만나자 '네가 인자(人子)를 믿느냐?'라고 물으셨다. 전통적 헬라어 다수 사본들은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는 말 대신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라고 되어 있다. 그것이 원본의 본문일 것이다. 전통적 헬라어 다수사본의 본문은 보존되어야 하고 타당한 근거 없이 수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도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즐겨 쓰신 말이며 구약 다니엘의 예언대로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로 생각되지만, 본문에서는 그것보다 '하나님의 아들'이 더 적절하다.


[36]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고침받은 그 소경은 자기를 고쳐주신 예수님의 제안대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을 마음이 있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한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었다. 사람이 하나님과 그 진리를 믿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관심 조차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부패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도다"(호 8:12)라고 하셨다. 그러나 고침받은 그 소경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었다. 그는 "주여 그가 누구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진지하게 예수께 대답하였다.


[37-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셨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그 때 그 사람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하며 그에게 절하였다. '절한다'는 원어(프로스퀴네오)는 영어성경들의 번역처럼 '경배한다'는 뜻이다. 소경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사람들이 믿고 경배해야 할 대상이시다. 그는 단순히 한 인간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를 믿고 의지하며 그를 경배하고 예배해야 한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한 모범적 인격만이 아니시고 또한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신앙의 대상이시다. 성경은 우리가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사야 2:22은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도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으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요한복음 2: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이사야 26:4은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라고 말씀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니시고, 바로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분이시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영생을 얻는다(요 3:16; 20:31).


예수님은 또한 우리가 경배해야 할 분이시다. 이것은 그가 신성(神性)을 가지신 자 곧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 대신 어떤 피조물도 경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 다른 피조물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의 제1계명을 어기는 죄가 되며 또 그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시다. 그는 단지 한 인간이 아니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찬송과 경배의 대상이시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하늘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어린양을 보았고 또 천사들과 모든 만물이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 찬송과 경배를 드리는 광경을 보았다. 요한계시록 5: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5: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요한계시록 5: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찬송과 경배를 올려야 한다.


[3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요한복음 3:17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다. 오늘 본문에 '심판하신다'는 말은 예수께서 복음을 통해 신자와 불신자, 구원받는 자와 멸망하는 자를 나누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를 믿는 자는 구원과 영생을 얻지만, 그를 믿지 않는 자는 멸망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심판자가 되신다. 그것은 요한복음 3:18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한 말씀과 같다. 또 요한복음 3:36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4:3-4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복음인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심판이 된다. 그것은 듣는 사람들을 구원과 멸망, 천국과 지옥의 두 부류로 나누는 점에서 그러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심판자가 된다는 사실을 표현하시기를,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육신적으로 소경이었던 자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 이것은 실상 예수께서 영적인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사실을 상징한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영적인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16:14은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라고 기록한다. 고린도후서 4:6은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눈을 밝혀 주실 때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구원을 받게 된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영적 소경이 고침받으므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또한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육신적으로 보는 자들, 육신의 눈은 시력이 좋아서 안경을 끼지 않고도 잘 볼 수 있는 자들은 영적인 소경이 될 것이다. 특히 스스로 무엇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 스스로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행복을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 그래서 돈을 벌거나 장사나 사업을 하는 데 눈이 밝고 세상의 명예나 권세를 취하는 일에 눈이 밝고 육신의 쾌락과 음란을 추구하는 데 눈이 밝은 자들은 영적 소경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들은 다 자신들이 죄인임을 보지 못하고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복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영생과 천국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세상적인, 물질적인, 육신적인 일들에는 눈이 밝으나 영적인, 천적인, 도덕적인 일들에는 소경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영적 소경이 고침을 받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영안(靈眼)이 열려서 영원하고 복되신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죄악됨과 허무함을 알고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는 자가 들어가 누릴 천국과 영생을 아는 자가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은 자신이 영적 소경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고침을 받아 하나님을 알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천국과 영생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세상적인 눈, 죄악된 눈은 멀고 영적인 눈은 밝아져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설교를 깨닫고 믿게 하시던 주께서는 오늘날도 구원하실 자들의 마음을 여신다. 어두운 데서 빛이 있으라고 선포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영적 어두움 속에 사는 자들의 마음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주신다.


예수 믿는 모든 성도는 이미 이 빛을 받은 자들이다. 영적으로 소경이었던 자들이 고침을 받았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었고 그를 경배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합당한 찬송과 경배를 올려야 한다. 그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찬송과 감사와 경배와 영광을 영원토록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참된 경배와 순종을 드려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눈이 더욱 밝아져서 하나님과 그의 복된 말씀과 천국의 영광과 능력을 더욱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고 하였다. 우리의 영적 시력이 날마다 더욱 더 밝아지기를 기도하자. 그래서 하나님과 그의 온전하신 뜻과 천국의 영광을 더욱 더 아는 자들이 되자.




10장: 선한 목자


1-21절, 예수 그리스도는 양의 문이시며 선한 목자이심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예수님은 무리에게 목자와 양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 비유에서 그는 세 가지 요점을 말씀하셨다. 첫째, 양의 목자는 문으로 들어간다.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이다. 둘째,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고 앞서간다. 셋째,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를 따라간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음성은 알지 못하므로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도망한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 백성 간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비유의 뜻을 설명하시면서 자신이 바로 양의 문이며 또 자신이 선한 목자임을 증거하셨다.


[7-10]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께서는 먼저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자기보다 먼저 온 자들은 다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세례 요한 같은 이들을 가리킬 수 없다. 그들은 결코 절도나 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히 거짓 목자들, 거짓 교사들을 가리켰다.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런 부류에 들 것이다. 그런 자들은 양들의 구원과 영적 성장을 위해 살지 않고 헛된 물질적 이익을 위해 사는 자들이다. 그들은 양들의 영혼을 살리고 건강하게 하기보다는 그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양의 문이시다. 죄인들이 그 문을 통해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양들로 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다. '생명을 더 풍성히 얻는다'는 말은 구원받은 성도의 신앙 인격과 삶이 강건해지고 온전해지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구원얻은 양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양들의 우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얻은 양들은 그 집에 거하며 드나들면서 특히 교회의 공적인 집회들을 통하여 영의 양식, 말씀의 양식을 얻는다. 인간 목사는 성경 교훈으로 양식을 공급하고 교인들은 그 양식으로 온전케 된다.


[11-12]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예수께서는 또한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또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자신이 장차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암시한다. 그는 마태복음 20:28에 기록된 대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9:12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기를,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고 했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4:9-10에서 증거하기를,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주셨다.


그러나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다. 그는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며 이리는 양을 늑탈하고 헤친다. 이리는 거짓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결국 양들을 죽이는 자들이다. 목자와 삯군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목자는 양을 위해 일하지만, 삯군은 오직 돈을 위해, 물질적 이익을 위해 일한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의 유익을 위해 수고하고 필요하다면 양을 위해 희생도 할 수 있지만, 삯군은 자기에게 이익이 없으면 언제든지 양을 버리고 떠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참 목자, 선한 목자이시요 삯군이 아니시다. 또 그는 오늘날도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을 비롯하여 모든 봉사자들이 삯군이 아니고 참 목자, 선한 목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는 우리가 삯군의 정신으로가 아니고 참 목자의 심정으로 봉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교역자나 장로들이나 주일학교 교사나 구역 권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성실하게 전하고 실천함으로써 맡겨진 양들이 배우고 본받아 온전한 신앙인격자들이 되도록 힘쓰기를 원하신다.


[13-15]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삯군이 이리를 보고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시다. 그는 그의 양들을 아신다. 그리고 그의 양들도 그를 안다. 마치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시고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아시는 것과 같이,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양들을 알며 양들은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다. 주께서 말씀하신 양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선택하신 자들이요 영생을 주시기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자들이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요한복음 6:37, 39,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선택된 자들이 그리고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를 것이다.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예수께서는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 즉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고 그가 그들을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또 그들이 다 한 무리가 되고 한 목자에게 속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영혼 구원과 전도에 대한 그의 사명을 증거한다. 그 '다른 양들'은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 유대인들과 또한 선택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신 자들이 있다. 사도행전 13:48은, 바울이 전도할 때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들만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 없이, 민족이나 언어나 피부색의 구별 없이 그들은 다 한 교회가 되고 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될 것이다.


[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결정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아셨다. 그는 죽은 후에 다시 목숨을 얻을 것을 아셨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스스로 목숨을 버릴 권세도 주셨고 또 다시 얻을 권세도 주셨다. 그가 비록 다시 살아나실 것을 아셨지만, 죽으시는 것은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적으로 그 죽음을 피하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과 통곡의 기도를 아버지께 올리셨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뜻을 확신했고 그 뜻에 즐거이 순종했다. 그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께서 어떻게 사랑하지 않으시겠는가?


[19-21]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수님의 목자와 양의 비유와 그 설명을 들은 무리들은 다시 분쟁하였다. 많은 이들은 그가 귀신 들려 미쳤다고 말하며 그를 배척하였으나 어떤 이들은 그의 말이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다,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라고 반박하였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 자신의 직분과 사명을 사실대로 증거하였지만, 무리들 중 다수의 심령에는 아직 깨달음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는 날에는 그들 중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눈이 열릴 것이다. 그의 양들은 그를 바로 알고 진심으로 그를 믿고 그를 따를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진리를 다시 확인하고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양의 문이시며 선한 목자이시다. 그는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구원받을 유일한 구주이시다. 죄인들은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또 그는 친히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선한 목자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바로 알자. 그를 바로 알자.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양들을 아시며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른다. 그러나 그의 양이 아닌 자들은 그의 음성을 거절하고 그를 믿지 않고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양인가? 우리는 참으로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르고 있는가? 그의 양들은 그를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고 교회 안에서 바른 교훈을 받음으로 온전한 인격자들이 되지만, 양이 아닌 자들은 구원과 영생을 얻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것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택자들을 참된 교회로 이끄시기를 원하신다.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며, 오늘날 교회가 힘써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마태복음 28:19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전도하는 일에 힘을 모으자.



22-42절, 예수 그리스도의 양의 특징과 특권


[22-23]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본문은 증거하는 사건이 수전절에 솔로몬의 행각 부근에서 되어진 것임을 말한다. 수전절(修殿節)이라고 번역한 헬라어(엥카이니아)는 히브리어 카누카에 해당하는 말로서 봉헌(奉獻, dedication)절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주전 165년 유대 지도자 마카비우스가 수리아 왕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를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승리한 후 성전을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한 날이다. 그것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9월 25일부터 8일간이며 오늘 우리 달력으로 12월 중순쯤 될 것이다. 그 때는 겨울이다. 솔로몬 행각은 사도행전의 증거대로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쳐주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모였던 곳이고(행 3:11) 초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모였던 곳이었다(행 5:12).


[24-25]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예수께서는 자기들의 마음을 의혹시키지 말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지 밝히 말하라고 요청하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다'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그것은 그의 전도활동 초기부터 말씀하신 바이었다. 그러므로 안드레는 자기의 형제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했다(요 1:41). 예수께서는 수가성 여인에게 "네게 말하는 내가 그[메시야 곧 그리스도]로라"고 말씀하셨다(요 4:26). 수가성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여인에게 말하기를,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 그리스도신 줄 앎이니라"고 했다(요 4:42, 전통사본). 떡 기적을 경험한 후 시몬 베드로는 "우리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고백했다(요 6:69, 전통사본).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처음부터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그가 그리스도시라는 증거는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신 일들이란 그가 전도활동 초기부터 행하신 기적들을 가리킨다. 그는 맨처음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요 2:9). 또 그는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다(요 5:8-9). 또 그는 떡 기적을 행하셨다(요 6:10-12). 또 그는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고쳐주셨다(요 9:6-7). 이 모든 기적들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이다. 그는 그 일들을 행하셨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책 끝부분에서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라고 말했다(요 20:30-31).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예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셨고 또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많은 기적들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 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을까? 예수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자신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선택의 진리가 암시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앞에서도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요 6:44) 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하셨다(요 8:47). 선택의 진리는 두렵고 심오한 진리이지만 성경에 명백히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죄인들 중 어떤 자들을 그들의 행위에 근거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다(엡 1:4-5; 딤후 1:9).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다.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구원에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의 결과이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께서는 이제 자기의 양의 특징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며 그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37). 예수 그리스도의 양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른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그의 교훈에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를 믿는 자는 마음으로 이미 그를 순종한 것이요 마음으로 순종한 자는 범사에 그를 순종할 것이다. 로마서 6: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의에게 종이 되었고 하나님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교훈하신 의의 교훈에 즐거이 순종한다.


[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또 자기의 양의 특권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의 특권은 예수께서 주시는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 영생은 영원한 삶이요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이다. 영생을 얻은 자는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다. 사실상, 영생은 온 인류가 사모하는 바이다(전 3:11). 하나님의 약속은 한마디로 영생이다(딛 1:2).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첫번째 편지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썼다(요일 5:13).


예수께서는 자신이 양에게 영생을 준다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그 손에서 빼앗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그들을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기 때문에 그들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는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이 받는 영생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영생, 안전하게 보장된 영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귀나 어떤 악인들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며 산다.


[30-33]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그가 자신의 신성(神性)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증거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실 때도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가진 분이심을 의미한 것이요 하나님은 한 분이시므로 그것은 실상 하나님과 아들의 일체를 증거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 점 때문에, 즉 그가 결국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든다는 것 때문에 그를 참람하다고 판단하고 돌로 쳐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즉 참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으로 믿지 않으면서 그를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유대인들보다도 못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성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그를 하나님으로 바로 깨닫고 믿어야 한다.


[34-3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는 시편 82:6을 인용하시면서 '율법에 기록한 바'라고 표현하셨는데, '율법'은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는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시편을 포함한 모든 성경의 신적 권위성을 증거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폐지될 수 없는 절대적 권위의 말씀임을 믿고 인정하신 것이다. 성경을 폐지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의 성경관이며 예수님 자신의 성경관이었으며 오늘날 정통적 기독교회의 성경관이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 즉 재판관들을 신이라고 부른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셔서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참람한 일이냐고 반문하셨다.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이심을 안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자신에 대한 증거를 대항하고 반론하지 않았을 것이다.


[37-39]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다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을 자신의 신성(神性)에 대한 증거로 들었다. 또 그는 유대인들에게 그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을 보고 그 일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믿게 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 안에 계시고 예수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고 믿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하나님의 일들 즉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이요, 그것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증거들이다.


[40-42] 다시 요단강 저 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예수께서 요단강 건너편 요한이 처음에 세례주던 곳에 가서 거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 와서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되다'고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예수께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수단이 되고 있었다. 요한은 순교한 후에도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하는 그의 사명을 다하고 있었다.


본문을 요약하면, 첫째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참된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그것은 그가 전도활동을 하신 처음부터 증거하신 바이었다. 자신의 신성에 대한 그의 증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를 참람하다고 판단하여 돌로 쳐서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행하는 하나님의 일들이 자신의 참된 신성을 증거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증거들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양의 특징과 특권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의 특징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믿으며 그를 따르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의 양이 아니므로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양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믿으며 그를 따를 것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양의 특권은 예수께서 주시는 영생, 곧 영원히 죽지 않는 복된 삶을 얻는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그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그의 모든 기적들을 읽고 확인하고 그를 믿고 확신하자.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그의 양은 그를 믿을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양인가?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시는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르자. 성경의 교훈을 다 믿고 힘써 순종하자.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인 복된 영생을 확신하고 감사하자.




11장: 죽은 자를 살리심


1-32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본문은 몇 가지 사실을 증거한다. 첫째로, 본문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증거한다. 나사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1-2]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나사로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이었다. 그들은 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었던 것 같다. 베다니를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이라고 마리아를 먼저 언급한 것은 2절의 말씀대로 마리아가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긴 일로 제자들에게 더 잘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마리아는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께서 마르다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 들어갔을 때,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39절). 그 때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여 예수께 말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그 때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한가지가 필요하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마리아는 확실히 예수님을 알고 그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며 즐거이 듣는 자이었다. 본문에 증거된 대로 마르다도 믿음이 있는 자이었지만, 마리아의 믿음과 사랑은 그 형제보다 더 진지하고 거룩하고 강하였던 것 같다.


[3-5]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그의 오라비인 나사로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이었다. 누이들은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말했다. 평소에 예수께서는 그 가족들, 즉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뒤에 보면,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우리 친구 나사로'라고 부르신다. '친구'라는 헬라어(필로스)는 '사랑하는 자'라는 뜻이다. 나사로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이었다. 그런데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병들 수 있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신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아뢸 하나님과 주 예수님이 계시다. 야고보는 신자가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교훈하였다(약 5:13-16). 예수께서는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에게 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13-14).


예수께서는 그 소식을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말씀은 나사로가 그 병으로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그 병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릴 것을 암시한다. 실상 모든 신자들의 죽음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신자의 죽음은 슬프고 두려운 일이 아니고 천국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과정이요 장차 부활할 소망을 가진 죽음이다. 신자의 죽음은 불행의 극치가 아니고 이 생을 성실하게 마치려는 신앙 훈련의 절정이다. 신자는 죽음을 생각하며 더욱 분발한다.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하나님은 조급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도 조급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영생할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때가 언제인지를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조급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7-8]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대인들의 죽이려는 위협이 있었던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주의 말씀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주님의 인도하심은 때때로 인간편에서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고 그 때 우리는 당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인도하심이 최선의 길임을 믿고 인내하면서 그를 따라야 할 것이다.


[9-1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예수께서는 일상 생활의 예를 비유로 드셨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빛이 있으므로 실족하지 않고 밤에 다니면 빛이 없기 때문에 실족한다. 그것은 낮 열두 시간과 같이 그가 아직도 일하실 시간이며 그가 일하시는 동안에는 아직 죽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그의 일하실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은 낮과 같다. 그러니 제자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그와 함께 활동할 수 있다. 아직은 죽음을 겁낼 때가 아니다.


[11-14]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예수께서는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죽음을 잠자는 것에 비유하셨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한 이해를 보인다. 물론 그것은 사람의 영적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죽은 자도 의식을 가진다(눅 16장). 죽음을 잠자는 것에 비유한 것은 단지 몸의 상태를 의미한다. 죽은 자는 잠자는 것과 같다. 그것은 부활의 소망을 암시한다. 잠자는 자를 깨울 수 있듯이, 주께서는 마지막 날 죽은 자를 깨우실 것이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해를 나타낸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묘사로서 아름답기까지 하다. 성도의 죽음은 슬픈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죽어 없어지는 멸절의 사건도 아니다. 성도의 죽음은 마지막 부활의 소망을 가진 채로 잠자는 것이다.


[15-16]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기뻐한 것이 아니고 그가 거기 있지 않은 것을 기뻐하셨다.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믿게 하려 함이었다. 무엇을 믿게 한다는 뜻인가? 그것은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게 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었으나 더 믿고 확신해야 할 것이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슬픔의 사건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기쁘고 유익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 중 한 사람인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고 오직 인간적 생각과 판단만 하고 있었다. 그는 가능한 가장 악한 상황을 생각하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주님을 믿는 믿음의 말이나 태도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담대함이나 용기 같은 것이 없고 오직 죽음의 두려움만 있어 보였다.


[17-19]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나사로는 죽었고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었다. 그는 확실히 죽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으니 그의 몸은 부패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39절). 모든 사람은 병에 걸리며 또 마침내 죽는다. 신자도 예외가 아니어서 때때로 병에 걸리고 또 결국 죽는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도 죽는다. 인간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이다(히 9:27).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은 인간의 죄 때문에 세상에 왔고 세상의 한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 그 사실은 모든 사람이 죄인인 증거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구주가 필요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람은 죽음을 준비해야 하고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한 5리, 약 3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많은 조문객들이 그 가정에 찾아왔다.


[20-24]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원문에는 21절에 '주여'(퀴리에)라는 말이 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그의 오라비의 병이 고침을 받고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라는 말은 하나님께 쓰이는 말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우주의 참 주인이시요 주재자이시다. 마르다에게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 있었다. 또 마르다는 예수님께 병고침의 신적 능력이 있음을 믿었다. 그는 예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그의 오라비의 병을 고쳐주셨을 것을 믿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제라도 예수께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안다고 말했다. 마르다는 하나님께서 지금 예수님의 기도를 응답해주실 것을 믿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으로만 믿지 않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은 것이다. 기도의 응답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을 현재의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그의 오라비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 줄을 안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 날의 부활도 믿었다. 그는 다니엘 12:2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 거기에 보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말씀했다(단 12:2). 마르다는 그 말씀을 믿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믿었고 기도의 응답을 믿었고 마지막 부활을 믿었다. 그의 믿음은 매우 컸다.


둘째로,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하셨는지 증거한다.


[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 있는 자이며 생명의 원천임을 증거하신 것이다. 이것은 영혼과 육체에, 또 현세와 내세에 다 적용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는 계속 말씀하시기를, 그를 믿는 자는 비록 몸이 죽을지라도 다시 살 것이며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한 죽음 곧 성경에 '둘째 사망'이라고 표현한 그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참으로 놀라운 생명의 구주이시다. 예수님은 인간의 죽음의 해결자이시다! 이것은 놀라운 소식이 아닌가!


예수께서는 자신이 영생을 주는 하나님의 아들 구주임을 처음부터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신 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에 무리들에게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요 5:28-29).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신 후 무리들에게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말씀하셨다(요 6:51).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0:10).


사실, 생명은 하나님의 고유적 속성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모든 생명은 그로부터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다(시 36:9; 렘 2: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과 생명이 되시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리고 자신의 부활을 통해 그 사실을 증명하실 것이다. 그는 과연 부활이요 생명이시다. 인간의 죽음의 문제의 해결책이 여기 있다. 죽음을 극복하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것이 귀한 진리가 아닌가!


뿐만 아니라,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대답하기를,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나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믿나이다'라는 말은 원어 성경에는 '내가 믿었나이다'(페피스튜카)라고 되어 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이미 믿었다. 이 믿음은 베드로의 믿음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 믿음이다. 마르다는 이 믿음 안에서 예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받아들였다. 그의 믿음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28-32]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21절처럼, 32절에도 원문에는 '주여'(퀴리에)라는 말이 들어 있다. '주'라는 말은 하나님께 쓰이는 말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우주의 참 주인이시요 주재자이시다. 마르다에게서와 같이 마리아에게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 있었다. 또 마르다와 같이 마리아도 예수님께 병고침의 신적 능력이 있음을 믿었다. 그들은 다 예수님을 신적 구주로 믿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말씀을 맺는다. 나사로가 죽었듯이, 우리도 언제가는 죽을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영원히 살지 못하고 죽을 자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죽음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구원의 길, 영생의 길을 발견함으로써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대비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과 생명이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죽음의 해결자이시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 하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이시다. 죄인들은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과 우리의 부활과 생명이 되심을 알고 그를 믿자.


마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다. 그 믿음 안에서 그는 예수께서 부활과 생명이심을 믿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믿었다. 여러분도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바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죽음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들 중에서 가장 큰 문제요 사실상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고도 제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죽음의 문제의 해결은 인생의 가장 큰 문제의 해결이다. 기독교는 바로 그 문제의 해결책을 증거한다. 기독교는 죄사함과 영생의 길을 증거한다. 거기에 참 평강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길이다. 이것이 참으로 보배로운 진리가 아닌가? 이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고 그를 성심으로 따르자.



33-57절, 나사로야 나오라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바를 증명하신 사건이다. 그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 이 놀라운 사건이 본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 기록이 진실한 증거임을 믿는다. 본문은 몇 가지 사실을 증거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심정을 가진 사람이셨다.


[33-34]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그는 마리아의 우는 것과 또 함께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 '통분히 여기다'는 헬라어(엠브리마오마이)는 '크게 요동하다, 크게 상하다'는 뜻이며, '민망하다'는 헬라어(타랏소의 수동태)는 '괴롭다'는 뜻이다. 주 예수께서는 왜 심령이 크게 상하시고 괴로우셨는가? 그것은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과 그 죽음을 인한 누이들의 슬픔의 눈물과 유대인들의 눈물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더 깊게는 본래 영생할 수 있도록 창조된 인간이 범죄함으로 죽게 된 불쌍한 처지를 슬퍼하신 것일 것이다.


[35-36]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예수께서 그 때 눈물을 흘리셨음은 그가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는 사랑과 동정심을 가진 사람이셨음을 증거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매우 인간적인 모습을 본다. 그가 금식하셨을 때 배고프셨고(마 4:2) 때때로 피곤하셨고(요 4:6) 낮에도 배에서 주무셨고(마 8:24)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목말라 하셨듯이(요 19:28)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신 것은 그의 인간적 모습을 보인다. 그는 참으로 사람이셨다. 그러나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고 좋은 사람이셨다. 남을 미워하거나 남과 다투거나 남에게 말이나 물질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해를 주는 무정하고 무자비한 사람이 아니셨다. 어려움당한 사람을 동정할 줄 아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덕목이다. 물론 그 덕만으로는 부족하고 사람이 선행과 의행(義行)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지만, 그러나 우는 자와 함께 울 수 있고 웃는 자와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모습 속에는 이런 인간적인 모습이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는 사랑과 동정심을 가진 사람이셨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지 않고 인간성에 있다. 잠언은 말하기를,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 같으니라"고 했고(11:22),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고 말했다(잠 31:30). 인간의 아름다움은 미움과 악을 버리고 선함과 긍휼과 사랑으로 단장되는 데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한 면모이며 성화의 목표의 한 요소이다. 하나님의 뜻은 선한 자가 되고 선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7-39]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지 않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인간은 한번은 다 죽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한번 죽는 죽음을 막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주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특별한 예이었다. 나사로의 시체는 무덤 속에 놓여 있었고 죽은 지 나흘이 되었으므로 벌써 냄새가 났다. 나사로는 확실히 죽었다. 그의 몸은 이미 썩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것이다.


둘째로, 예수는 신적 구주이시다. 본문은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40-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밀접한 교제를 나누셨다. 그는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며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아버지와 항상 기도로 교통하셨으며 아버지께서는 항상 그의 말을 들어주셨다. 아버지와 아들은 매우 친밀하셨다.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신 것은 그가 나사로를 살려주실 것을 기도하신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아버지의 허락 속에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실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런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 말씀을 듣는 무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임을 믿게 하려 함이었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셨다. 나사로를 부르신 그의 음성은 컸고 명료하였다. 그는 나사로의 몸을 떠나갔던 그의 영혼을 부르셨고 그의 잠든 몸을 깨우셨다.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를 부르셨거나 아버지께 호소하신 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권위로 그를 부르셨다. 주 예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도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죽은 자들을 깨우시고 일으키실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요한복음 5:25, 28-29,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그가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을 때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다. '베'라는 헬라어(케이리아)는 '붕대' 혹은 '수의'를 가리킨다. 즉 나사로는 수의를 입은 채로 나온 것이다. 그의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다. 아마 그는 예수께서 부르신 그 때에 살아난 것 같다. 아직 수의나 수건을 벗을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자가 일어났다.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 자가 일어났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부활과 생명이 되심을 증명하셨다. 그가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그는 전에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고(눅 7:11-17) 야이로의 외동딸도 살리셨다(눅 8:40-42, 49-55).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는 우리의 부활과 생명이 되신다.


셋째로, 자신이 신적 구주임을 증명하는 기적에 대해 두 가지 다른 반응이 있었다.


[45-46]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45절에 보면,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 기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고 주신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히브리서 2:3-4,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에 대해 다른 하나의 반응은 여전히 믿지 않는 것이다. 그 중에 어떤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였다. 그들이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알린 것은 예수께 대한 부정적, 불신앙적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똑같은 사건 앞에서도 믿는 자들이 있는 반면 믿지 않는 자들도 있다. 믿음은 단지 외적 조건에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9).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이끄시는 자들만 예수께로 나아와 그를 믿을 수 있다(요 6:37, 44). 하나님의 택하신 양들은 그를 믿을 것이며(요 10:26)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요 3:16; 5:24).


[47-48]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유대지도자들도 예수께서 많은 기적들을 행했음을 인정하였다.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은 역사적, 객관적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의 원수들도 그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단지, 그 지도자들은 심령이 어둡고 굳어서 예수의 기적들을 알고도 그를 믿지 못했을 뿐이다. 48절에 보면, 그들은 오히려 말하기를,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고 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추종한다면 로마인들이 우리를 반역자로 간주하여 다시 들어와 이 땅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권은 그런 세상적인, 정치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셨다. 그의 왕권은 일차적으로 영적인, 정신적인, 도덕적인 것이었다.


[49-53]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 때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말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발언은 백성의 유익을 구실로 하여 예수를 죽이려는 생각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제거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가야바의 발언은 예언적이기까지 하였다.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 것은 이전부터이었다. 요한복음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한복음 7: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요한복음 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그러나 유대지도자들은 나사로 사건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여기에 인간의 극악함이 드러난다. 그들의 조상들은 의를 전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었고 이제 그들은 그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하는 것이다.


[54-5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저희가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이 유월절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마지막 유월절이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은 세 번 혹은 네 번의 유월절을 증거한다. 첫번째는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처음 기적 직후이었고(요 2:13), 두 번째는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인 기적의 때이었고(요 6:4), 세 번째는 본절의 유월절이다. 이 세 번의 유월절에 첨가하여, 요한복음 5장에 언급된 '유대인의 명절'도 유월절일 가능성이 있다.


말씀을 맺는다.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만한 많은 증거들이 있다. 성경에 그 증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성경에 기록된 그 증거들을 확인하고 믿을 수 있다. 기독교는 믿을 만하지 못한 어떤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미신적이거나 사이비한 가르침이 아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을 만한 증거들을 확인하고 믿으라고 말하는 복된 소식이다. 예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부활과 생명이 되시는 신적 구주이심을 증명한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그를 확신하자.


또한 우리는 과거의 모든 헛되고 죄악된 멸망의 삶을 청산하고 회개하고 그에게로 돌아와 이제는 새 삶, 경건하고 거룩한 삶, 의롭고 선한 삶을 살자.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 새 삶을 사는 것이다. 그 새 삶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죄를 버리는 것이다. 과거에는 우리가 이기적이고 서로 미워하고 속이고 음란한 생활을 했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세상적인 죄악된 삶을 살지 않는 것이다. 더 이상 남을 미워하거나 욕하거나 남에게 말로나 물질로나 신체적으로나 해를 주거나 음란하고 불결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고 선을 행하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12장: 죽으실 것을 말씀하심


1-8절,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부음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부은 본문의 사건은 마태복음 26장이나 마가복음 14장에 나오는 사건과 동일한 사건이든지 아니면 비슷한 일이 두 번 있었을 것이다.


[1-2]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사건의 때는 유월절 엿새 전이었다. 이 유월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유월절이다. 사건의 장소는 베다니의 한 집이었다. 베다니는 예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던 동네이었다. 어느 집에서 잔치가 열렸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 마르다 형제의 집에서 연 잔치 같다. 그것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신 일이 기쁘고 감사해서 연 잔치이었을 것이다.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고 상을 차리는 일을 보았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들기 위해 식탁에 앉은 자들 중에 있었다.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1근이라는 원어(리트라)는 약 400g 혹은 400cc를 가리킨다. 마리아는 그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다.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였다. 마리아는 그 값비싼 나드 향유보다 예수님을 더 가치 있게 여겼다. 누가복음 7:38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거기에는 어떤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마태복음 26장이나 마가복음 14장에는 유월절 이틀 전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인이 매우 귀한 향유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져와 그 옥합을 깨뜨리고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4-5]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그 향유는 300데나리온 정도의 가치가 있었던 것 같다. 300데나리온은 우리가 아는 대로 그 당시의 일반 노동자가 300일, 즉 10개월 동안 번 돈의 합계와 같다. 오늘날 하루 품삯을 7만원 정도만 잡아도 2100만원이나 된다. 400cc는 그렇게 많은 양이 아니지만, 값은 2100만원 정도가 되니 매우 값비싼 향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오랫 동안 돈을 조금씩 저축하여 그 향유를 구입했을지도 모르며 아마 시집 갈 때 쓰려고 간직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마리아는 그렇게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린 것이다.


그 때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하듯이 말했다. 그것은 좋은 말이었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선한 일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신명기 15:7-8, 10은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했다. 잠언 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갈라디아서 2:10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바울에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더불어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일을 부탁하였고 바울은 자신도 그 일을 본래부터 힘써 행하고 있다고 증거하였다.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러나 가룟 유다의 중심은 그 말과 달랐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고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가룟 유다는 진리보다 돈에 관심이 있었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세상에 대한 욕심이 마음에 가득했다. 그는 도적이었고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갔다. 남의 돈을 훔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이다. 도적은 정당하게 수고하지 않고 불의한 방식으로 돈을 벌려는 자이다.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교회 직분자는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특히 교회의 재정을 잘못 관리하면 하나님께 큰 벌을 받게 된다. 교회 재정은 성경의 원리대로 바르게 쓰고 정직하게 쓰고 또 절약하며 써야 한다. 어느 교회는 재정보고도 목사에게 하지 않고 목사도 손님 대접에 돈을 과도히 쓰고 장로들도 교회 재정을 쉽게, 물 쓰듯이 쓰다가 교회 재정이 바닥이 나고 많은 빚을 지고 목사 사택까지 잡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교회 재정은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다. 목사와 장로들은 재정을 포함하여 교회의 모든 일에 책임을 가진다. 교회 재정은 성경의 원리대로, 즉 전도와 구제를 위해, 정직하게, 그리고 절약적이게 즉 사치와 낭비가 없게 써야 한다. 그래야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벌을 면할 것이다.


[7-8]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는 좋은 일을 했다. 그가 값비싼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돈을 쓴 것과 같다. 평소에 돈을 잘 안 쓰던 사람도 사람이 죽으면 돈을 쓴다. 물론 평소에도 돈을 적절히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값비싼 관이나 수의를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오히려 평소에 부모님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다. 너무 구두쇠처럼 살지 말고 평소에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남을 위해 돈을 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돈은 쓰기 위해 있는 것이다. 먹을 것도 적절히 먹고 입을 것도 적절히 입으면서 살라고 돈을 버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교회의 일을 위해, 전도를 위해 돈은 써야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도와줄 힘이 있을 때 가난한 형제를 위해 도와주는 데 쓸 때 돈의 가치가 있다.


세상에는 가난한 자들이 항상 있을 것이므로, 가난한 자들을 도울 기회는 항상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며칠 후 죽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그 때까지 아마 마리아가 부은 것과 같은 그런 값비싼 향유를 발라보신 적이 없으셨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향유를 바를 만큼 귀한 분이 있으시다면, 예수님이 바로 그 분일 것이다! 예수님보다 더 귀한 분이 세상에 누구인가? 사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값비싼 향유를 바를 만큼 그렇게 고상한 존재가 아니다. 물론 돈의 여유가 있어서 그런 것을 사서 바른다면 바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슨 죄가 되겠는가? 그러나 자신에게 과분한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것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마리아는 분명 예수께서 그의 값비싼 향유보다 더 귀하신, 더 가치 있으신 분임을 믿었다. 마리아는 확실히 예수께서 그의 오라비 나사로의 생명의 은인이시며 또 자기 자신의 생명의 구주이심을 믿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마리아는 예수님을 바로 알았고 그를 경외하고 섬기는 마음이 넘쳐났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귀한 교훈을 발견한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 구제하는 일을 부정하지 않으신다. 구제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뜻이며, 가난한 형제를 동정하며 돕는 일은 선한 일이요 우리가 힘써야 할 의무이다. 둘째로, 돈은 정직하게 벌어야 한다. 우리는 정당하게 수고하지 않고 불의한 방식으로 돈을 벌려는 도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정당하게, 정직하게, 그리고 필요하다면 땀을 흘리면서 돈을 버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번 돈을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고 검소하게 써야 할 것이다. 셋째로,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돈을 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향유를 바르실 만한 분이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신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은 그의 복음을 위해 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돈을 쓰자. 또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가장 귀한 보화를 드리자. 마리아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지극히 귀한 향유를 주께 부어드린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몸과 생명과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복음 전파를 위해 바치자.



9-19절, 나사로 까닭에


[9-11]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유대인들의 큰 무리가 예수님 계신 곳으로 왔다.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만이 아니었고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었다.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께로 왔고 예수님을 믿었다. 나사로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도구가 되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이제는 성경책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는 말씀은 구약성경뿐 아니라 신약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것처럼, 성경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구원받았고 또 지금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들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고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도구가 되었지만, 악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뿐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정반대되었다. 사람을 정죄하는 일은 극히 신중하게 그리고 정당한 절차를 따라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 죽이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 한 악한 생각은 나사로까지 죽이려 하는 생각으로 발전되었다. 가장 공의롭고 선해야 할 유대지도자들이 가장 불의하고 악한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것이 악한 인생의 모습이다.


[12-13]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그를 맞으러 나갔다. 종려나무 가지는 기쁨의 표시이다. 그들은 '호산나'를 외쳤다.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시편 118편에는 이런 시가 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22-25절). 이것은 메시야 예언시이다. 무리들이 예수님에 대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믿었던 것 같다.


[14-16]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예수께서는 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것은 스가랴 9:9의 예언을 이루신 것이었다. 거기에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복음서들에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 둘을 보내어 그 나귀새끼를 빌려오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위해 나귀 한 마리도 없으셨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들의 참 소유주이시다. 그는 지금 겸손하게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다. 제자들은 스가랴의 예언이 예수님께 대한 것임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그가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즉 그가 부활하신 후에야 그것이 예수께 대해 기록된 것임을 깨달았다.


[17-18]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무리들이 예수님을 이처럼 맞은 것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하였기 때문이었다. 무리들은 예수께서 이 표적 행하심을, 즉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 행하심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생각하며 영접하였고 호산나 찬송을 불렀던 것이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했을 것이다. 또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그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증거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환영을 받으신 사실은 그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추가적 증거가 되었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던 것과 같이, 또 그 사실을 본 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함으로써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과 같이, 우리는 성경의 진실한 증언들을 통해 예수님을 확신하고 환영하고 그를 사랑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 그에 대해 증거하자.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성경은 죄인들로 하여금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어 구원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죄인들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확신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누구든지 마음을 열고 성경을 연구하는 자는 예수님을 확신하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또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은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나사로까지 죽이려 했지만, 유대인 회중들 가운데 예수님에 대한 진지한 인식과 깨달음이 퍼지고 있었다. 바리새인들도 스스로 인정하여 말하기를, "보라 너희가 계획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라고 했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하나님의 일을 대항하고 좌절시키려 계획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친히 뜻하신 바를 다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결국 다 이루어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나사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듯이, 성경에는 예수님을 통해 병고침을 받고 기적을 체험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증인들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누구든지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할 수 있다. 디모데후서 3:15의 말씀대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둘째로,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이 되자. 나사로의 기적을 본 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증거했다. 성경을 깨닫고 예수 믿고 구원을 얻은 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구주 예수님을 소개하고 증거하자.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또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9은 말하기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저 유대지도자들처럼 위선적인 교인, 양심에 화인맞은 외식자가 되지 말자. 저들이 하나님의 뜻을 대적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은 좌절되지 않았다.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악만 더할 뿐이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만 쌓을 뿐이다. 하나님의 선한 뜻은 다 이루어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이루는 하나님의 종이 될지언정 결코 저 악한 자들같이 되지 말자.



20-27절,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심


[20-23]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유월절에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온 헬라인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기 원하여 빌립에게 청하였고 빌립은 안드레에게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께 가서 그 일을 말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대답하셨다. 그것은 그의 죽음의 때가 가까왔음을 뜻한다. 그가 죽기까지 낮아지셨을 때 아버지께서는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셔서 그를 높이시며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굴복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이방인들의 구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헬라인들의 방문이 이방인들의 구원을 미리 보인다는 사실을 암시하신 것 같다. 이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계획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죽으실 때가 가까왔다. 그러나 그 고통의 사건은 마침내 그에게 영광이 될 것이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기 전 한 알의 밀이 땅에 심기워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평범한 이치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비유이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심기우지 않고 창고 속에 있으면 한 알 그대로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심기워 썩으면 거기에서 참밀의 삯이 나고 자라서 많은 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이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사역도 이와 같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죽으셔야 했다. 그가 죽지 않으신다면 인류의 구속(救贖)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 알의 밀과 같이 죽으심으로 많은 죄인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이사야 53:10, 11,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25-26]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 . .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시면서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가 그를 본받아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길은 고난과 핍박이 있고 죽음의 위협이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 길은 심지어 순교의 피를 흘려야 하는 길이다. 그것은 지금도 어떤 공산국가들이나 이슬람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 자신의 생명보다 귀히 여겨야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아는 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보다 귀히 여길 수 있고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죽기까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의 육신의 생명 즉 이 세상의 삶을 아까워해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를 믿고 따르기를 포기한다면 그는 영생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4:26, 27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또 누가복음 14:33에서는,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가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끝까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사람이 자기 생명을 미워하면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자기 생명을 미워할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가치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자신의 인간적 조건과 환경적 조건을 초월하는 믿음이 참 믿음이다. 그런 믿음을 굳게 가지고 끝까지 참고 견디는 자는 확실히, 반드시 영생에 이를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는 확실히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6:25에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본문 26절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침에 있어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본이 되셨다. 그는 이제 우리가 그를 믿고 따르며 그를 섬기려 한다면 이 점에서도 그를 따르라고 교훈하신다. 즉 우리는 목숨을 내어놓고 죽음을 각오하고 그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즐거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참으로 아는 자들은 기꺼이 그렇게 하려 할 것이다. 그가 우리같이 무지하고 무가치한 죄인들, 벌레와 같은 자들을 위해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고 그를 위해 죽음의 자리에도 나아갈 각오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26] . . .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자기를 진실히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두 가지 귀하고 복된 약속을 주신다. 하나는 그가 계신 곳에 그를 섬기는 자도 있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가 계신 곳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다. 그는 죽은 후에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그는 그곳으로부터 세상에 오셨고 이제 그곳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그가 계신 곳에 그를 섬기는 자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그를 진실히 믿고 따르는 자들이 확실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이다. 우리가 진실히 그를 믿고 따른다면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고 우리가 천국에 반드시 들어갈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런 확신을 가지고 고난도 즐거이 참았다. 히브리서 10:34, 35,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베드로후서 1:10, 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참된 순종은 성도에게 구원의 확신을 준다.


다른 하나의 약속은 사람이 그를 섬기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고 우리를 불러 그를 믿고 섬기는 자가 되게 하셨지만, 우리가 그를 진실히 믿고 따르며 그를 성심으로 섬긴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기뻐하시고 더 사랑하시고 더 귀히 여기실 것이다. 온 우주의 주관자이시며 살아계신 참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신다면 이것보다 더 복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11, 12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셨다. 또 요한복음 14:21, 23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시기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고 하셨다. 참된 순종은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가져온다.


[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시고 제자들이 죽음을 각오하며 그를 따를 것을 교훈하셨으나, 인간적으로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가지셨던 것 같다. 이것은 모든 사람 속에 있는 공통적 심리일 것이다. 죽음은 죄 때문에 세상에 들어온 외부의 침입자와 같은 것이다. 죽음은 어둡고 두렵고 슬픈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기를 싫어하고 영생하기를 소원한다. 예수께서도 인간적으로는 같은 심리를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마지막 유월절 식사 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도, 마태복음 26:37, 38은 증거하기를,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그는 곧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증거하셨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 길로 즐거이 가려 하신다. 그는 마태복음 20:28에서도 분명히 증거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그는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한 알의 밀처럼 죽을 것을 말씀하셨다. 그는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그의 죽음의 결과로 얻는 열매들이다. 한 알의 밀이 썩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많은 죄인들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셨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또한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그를 알고 그를 믿고 그를 사랑하며 그를 따르고 섬긴다면, 우리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적 목숨을 미워하고 영생과 천국을 얻기를 소원해야 한다. 죄와 슬픔으로 얼룩진 세상의 삶과 영광스런 영생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이 큰 가치의 차이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정한 제자의 길은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과 천국만을 바라며 따르는 것이다.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며 그를 따를 때 얻을 복을 약속하셨다. 그 첫째는 천국에 확실히 들어간다는 것이며 그 둘째는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귀하고 복된 사실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천국을 가장 큰 보화로 깨닫고 죽음을 각오하며 그를 믿고 섬기며 따르자. 그 때 우리는 천국을 확신할 수 있고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28-36절,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시기를 구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가장 합당한 기도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섭리의 목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목적도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아들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친히 음성으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은 어떻게 영광스럽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택자들을 구원하심을 통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대적하고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벌하심으로써 그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엄위하심을 드러내셨다. 또 택자들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을 지옥형벌로부터 건져내어 주시고 이제는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새 삶을 살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함을 드러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 특히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통해 이미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으며 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더욱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이제 구원의 역사가 온 세상에 충만히 이루어질 것이다.


[29-30]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하늘로부터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무리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것을 우뢰소리라고 말하기도 하였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천사의 음성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우뢰소리나 천사의 음성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소리가 난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고 무리들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의 음성은 무리들로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 특히 예수께서 장차 죽으실 일의 목적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예수께서는 이 세상 임금과 같이 활동하고 있는 사탄이 쫓겨날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직 사탄의 최종적 멸망은 미래에 있을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이미 그것이 온 것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탄은 죄와 사망으로써 세상과 세상에 사는 자들을 주관하고 있다. 그러나 구주 예수께서 세상을 대신하고 택자들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그들의 죄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셨고 사탄의 권세를 부숴뜨리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마귀의 일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주께서는 그것을 내다보시면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고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0:18에서도, 전도하고 돌아와 전도보고를 하는 70인 전도자들에게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말씀하셨고, 요한계시록 12:9에도 "큰 용이 [하늘에서]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고 했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결정적으로 멸망이 확실케 되었고 천국에서 내어쫓기고 최종적으로는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마 25:41; 계 20:10).


[32-33]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땅에서 들리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암시하셨다. 그는 요한복음 3:14에서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고 8:28에서는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죽음이 어떠할 것을 암시하셨다.


또 예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내가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셨다. 원문에서는 '내가'라는 말(카고)이 강조되어 있다. 여기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 영생을 주시려고 작정하신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구원은 하나님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말 그대로 구주이시다. 그는 택한 백성을 남김 없이 다 구원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6:39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는 모든 택자들을 다 구원하실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대속(代贖)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함받은 모든 자들을 다 구원하실 것이다.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유대인들은 '우리가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원하심을 말씀한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시편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사야 9:6, 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러나 구약성경은 또한 메시야의 죽으심에 대해서도 예언하였다. 이사야 53장은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라고 예언했다(사 53:8- 10).


[35-36]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끝으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빛에 비유하셨다. 그것은 진리의 지식과 의를 가리킨다고 본다. 반면에 어두움은 무지와 죄악을 상징한다. 사람이 빛이 있을 동안에 걸어다니면 어두움이 그를 붙잡지 못하듯이, 신자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믿고 따르는 동안에는 무지와 죄악이 그를 붙잡지 못할 것이다. 혹 죄에 잠시 넘어질지라도 그는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두움 가운데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한다. 무지와 부도덕 가운데 사는 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다가 결국 멸망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다. 기회는 항상, 언제까지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인간에게는 현재만 있다. 내일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내일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시간이다. 죽음은 언제든지 갑자기 닥쳐올 수 있고 그것이 닥쳐오면 피할 수 없다. 구원의 문이 닫히는 시간이 곧 올 것이다.


노아 시대 홍수심판 때에도 그러했다. 하나님의 경고를 받지 않고 죄악의 낙을 누리던 모든 사람은 단지 노아의 8식구를 제외하고는 다 기회를 상실했다. 창세기 7:11, 12,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창세기 7:16, "[방주에]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 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창세기 7:21-23,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어떤 청년들은 아직은 준비의 걸음이라고 생각하면서 믿는 일을 내일로 미룬다. 입시 준비 때문에, 취직 준비 때문에, 또는 취직한 지 얼마 안돼서, 집 장만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믿는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이다. 어떤 노인들은 이미 인생의 날들이 다 지났다고 생각하면서 믿는 일을 스스로 포기한다. 그러나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어야 한다. 지금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야 할 때이다. 청년들에게도 죽음은 갑자기 찾아온다. 기회가 언제나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다. 청년들이 여러 번 실수하고 시행착오를 많이 경험한 후에 돌아오는 것은 좋은 시간들을 너무 낭비하는 것이다. 노인들도 시간이 너무 지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의 헛됨과 죄악됨을 깊이 인식했다면 더 잘 믿을 수 있는 때이다. 여하튼 하나님의 구원은 뒤로 미룰 일이 아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에,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만한 때에, 죄인들은 그를 믿음으로 빛의 자녀, 즉 진리와 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본문의 말씀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세상의 임금인 사탄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사탄은 하늘에서 쫓겨났고 장차 심판을 받을 것이다. 사탄의 권세는 죄와 죽음의 권세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것을 파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사탄의 일이 실패하고 사탄의 권세는 파해질 것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구원사역이 실제로 시작되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내가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구원은 하나님의 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 그는 구주이시다. 과연 그의 구원 사역은 지난 2천년 동안 온 세계에서 충만히 이루어졌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아직 문이 열려 있을 때, 아직 구원받으라는 부르심이 들릴 때,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40일 간의 폭우가 내리기 시작하고 노아의 방주문이 닫히듯이, 문이 닫힐 때가 올 것이다. 구원의 문이 닫힐 때가 올 것이다. 더 이상 기회가 없을 때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믿을 만한 때 모든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아야 한다.



37-50절, 나를 믿는 자는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예수께서는 유대인들 앞에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사도행전 2:22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고 했다. 요한복음은 2장에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의 한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과, 4장에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과, 5장에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과, 6장에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것과 그 밤에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과, 9장에 예루살렘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주신 것과, 11장에 베다니에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것 등을 증거했다. 이 외에도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요 20:30; 21:25).


그러나 그런 많은 기적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 이 사실은 믿음이 외적 기적의 체험을 통해 생기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기독교는 기적을 믿으나 기적주의는 아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어둡고 부패되고 무능력해져 있기 때문에, 믿음은 단순히 외적인 기적을 보거나 체험함으로써 생기지 않는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생긴다. 그것은 외적 기적이 없이도, 기적을 보거나 체험함이 없이도 생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의 내면적 역사로 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믿음 자체도 그러하다.


[38-41]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예전에 이사야 선지자 때에도 사람들은 그 선지자의 전한 바를 믿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고 그들로 회개하지 못하게 하셨고 그들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이 선지자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심으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하나님의 심판 중에 가장 무서운 심판의 하나는 그가 버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긍휼과 은혜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버려두시면 사람이 그에게로 돌아갈 수 없다. 이사야는 주의 영광을 보았을 때 주께로부터 이 말씀을 받았고 이 진리를 깨달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 유대인들처럼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할 것이다.


[42-43]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유대인들의 관원들 중의 많은 이들은 예수님을 믿었으나 그 믿음이 불완전하였다. 그들은 바리새인들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시인하고 고백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출교는 유대 나라에서 국민으로서 누리는 모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특권과 혜택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 즉 사람의 칭찬과 평판과 인정받음을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의 칭찬과 평가와 인정하심보다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참으로 구원받을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10:32, 33). 또 요한계시록 14:9, 10은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참 신앙은 인간적, 세상적 조건을 초월한 신앙이다. 히브리서 11:24-26은 모세의 신앙에 대해 이렇게 증거한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그것이 참 신앙이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4장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33). 찬송가 102장의 가사를 쓴 이는 이렇게 고백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전에 즐기던 세상 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이것이 참 신앙이요 자신을 부정하고 죽음의 자리에까지 갈 수 있는 신앙이다.


[44-46]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 빛은 하나님을 아는 진리의 빛, 지식의 빛이요 의와 생명이다. 반면에 어두움은 무지요 죄요 죽음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를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을 보는 자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요 14:9).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참 빛과 지식을 얻고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5:24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다.


[47-50]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듣고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그들을 심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그가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 곧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의 날에 예수께서 선언하신 그 진리의 말씀들이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그는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또 그는 자신이 자의로 무엇을 말하지 않으셨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가 말할 바를 명령하여 주셨고 그 명령은 사람에게 영생이 된다고 증거하신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가감 없이 받아져야 하고 믿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절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것이요 곧 하나님을 거절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적은 죄가 아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어떻게 받고 믿었는지를 판단하실 것이다.


본문은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알려준다. 첫째로, 본문은 참 믿음이 기적 체험을 통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유대인들은 많은 기적을 직접 보았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 예수 믿고 구원얻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이 은혜주시면 사람은 외적 기적이 없이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예수님에 대한 참 믿음을 위해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단순한 기적이 구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자는 참 믿음을 가질 수 없음을 보인다. 참 믿음은 세상의 부귀 영화와 권세와 명예가 헛됨을 바로 알고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을 부정할 때 가능하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가장 귀한 보화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귀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 관원들처럼 세상 것 때문에 방해받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고 고백하고 그를 사랑하며 그만을 따라야 할 것이다.


셋째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임을 증거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를 믿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작은 죄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행복이시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영생을 얻을 자가 없고 평강과 형통을 누릴 자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을 다 믿고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그만 따르자.




13장: 새 계명을 주심


1-20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유월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 마지막 유월절, 즉 세 번째 혹은 네 번째의 유월절이다. '유월절 전에'라는 말은 '유월절 식탁을 가지기 전에'라는 뜻일 것이다. 본장에 나오는 식탁은 공관복음들에 나오는 유월절 식탁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시간 즉 승천의 시간이 되었음을 아셨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 즉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예수께 주신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된 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 . .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은 ". . . 사랑하셨듯이, 끝까지 사랑하셨더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창세 전, 즉 하나님께서 택자들을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던 때로부터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던 때에도 사랑하셨고 그가 세상에 계시는 동안 계속 사랑하셨고 그가 죽으실 때까지 사랑하셨고 그 후에도 세상 끝날까지 사랑하실 것이고 영원히 사랑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보장하시고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28:20,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바울도 고린도전서 1:8에서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원문에는 3절의 '저녁 먹는 중'이라는 구절이 2절 초두에 있다. 유월절 저녁식탁 때에 마귀는 벌써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배반하여 유대지도자들에게 넘겨주려는 생각을 넣었다. 마귀는 살아있는 존재이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요 인간을 범죄케 하여 멸망케 하는 자이다. 마귀는 가룟 유다의 마음에 악한 생각을 넣었다. 사람의 생각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난다. 선한 생각은 선한 말과 선한 행동으로 나타나고 악한 생각은 악한 말과 악한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2:35에 보면, 주께서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말씀했고, 바울은 로마서 8:5-7에서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잠언 4:23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했다. 택자들과 불택자들, 구원받은 자들과 멸망당할 자들은 생각부터 다르고 또 말과 행동이 다르다.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예수께서는 두 가지 사실을 아셨다. 첫째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을 아셨다. 여기에 '모든 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들, 특히 택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8:18에서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특히 택자들은 그의 손에 맡겨졌기 때문에 그가 그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실 것이다. 둘째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아셨다. 요한복음 앞부분이 증거하는 대로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요 3:13),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서 오시는 이(요 3:31), 하늘로서 내린 참 떡(요 6:32),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요 6:51)이시며, 그는 이전에 있던 곳 즉 하나님이 계시고 영광으로 충만한 천국에서 오셨다가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4, 5]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예수께서는 유월절 저녁 식탁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셨다. 남의 발을 씻기는 것은 당시에 종들이 하는 일이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자신을 낮추시고 겸손히 남을 섬기시는 행동이셨다. 거기에 더하여, 8절과 10절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그의 행위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는 뜻이 들어 있었다.


[6-8]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주인이 종의 발을 씻길 수 없고 선생님이 제자의 발을 씻길 수 없다는 일반적 생각 때문에 베드로는 주께서 자기 발을 씻기지 못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단순한 섬김의 행동이 아니시고 더 깊은 상징적 의미가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죄사함을 상징하였음이 틀림 없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죄사함이 없다면, 베드로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그와 상관이 없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도, 천국 백성도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죄를 씻으셨기 때문에, 그리고 날마다 우리의 부족을 씻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끝까지 은혜 안에 거하다가 마침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다.


[9-11]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베드로는 주와 상관 없는 자가 된다는 말씀에 놀라 자기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기 때문에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셨다. 온 몸을 깨끗케 하는 목욕은 우리가 모든 죄를 사함받고 거룩케 된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바로 중생(重生, 거듭남)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공로를 우리에게 적용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으시고 새 생명과 새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한 자도 세상에서 때때로 불성실하고 실수하고 범죄한다. 그러므로 목욕한 자들이 발을 씻듯이, 중생한 자들은 자신의 연약과 부족을 용서함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모든 제자들이 다 중생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열두 제자들 중에는 불택자가 한 사람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죄사함을 받지 못했고 중생하지 못한 자이었다. 그는 주님을 배반하고 유대지도자들에게 그를 넘겨줄 자이었다. 이것은 교회 안에 가라지나 쭉정이가 있는 것을 보여준다. 불택자들은, 비록 현재 교회 안에 있어 믿는 자와 비슷할지라도, 중생치 못했고 죄사함을 받지 못한 자이기 때문에 죄 가운데 살다가 어느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진리를 배반하고 떠나갈 것이다.


[12-17]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를 설명하신다. 그것은 선생과 주님인 자신이 이 일의 본을 보임으로써 제자들도 서로의 발을 씻기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겸손히 서로를 섬기며 특히 상대방의 허물과 실수와 부족을 덮고 용서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라고 본다. 예수께서는 용서에 대해 많이 교훈하였다. 마태복음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누가복음 17:3, 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바울도 에베소서 4:31, 32에서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했다. 용서는 사랑의 한 표현이다. 그래서 잠언 10:12은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런 본을 보이셨으니, 우리도 겸손히 서로를 섬기며 상대방의 허물과 부족을 용서할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실천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18-20]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끝으로 예수께서는, 그러나 이 사랑의 섬김과 용서는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기 어렵고 택자들에게만 적용될 것을 말씀하신다. 주를 배신할 자가 있을 것이다. '나와 함께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는 성경이 이루어질 것이다. 주께서 이 사실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은 일이 이루어질 때 제자들로 하여금 주를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기적들뿐 아니라 예언의 성취도 주 예수께 대한 참된 믿음의 보조물이다. 불택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배신할 것이며 그는 하나님과 상관 없는 자이지만, 택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교훈에 순종할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된 자들이다. 그래서 주께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같은 말씀이 마태복음 10:40에도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는 그가 친히 택하시고 세우시고 보내신 복음사역자들 즉 목사들과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하나님은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 증거하셨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분명히 증거한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주님이신 그가 종이 하는 일을 행하셨다. 그것은 그의 겸손과 남을 섬김, 그리고 특히 죄 용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주님과 선생이신 자신이 이렇게 행했으니 너희도 그렇게 행하라고 제자들에게 교훈하셨다. 우리도 겸손히 형제를 섬기며 형제의 허물과 부족을 용서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라고 교훈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자는 주의 명령과 본을 행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자. 셋째로, 택자들은 주를 영접하고 주의 명령과 행위를 본받을 것이지만, 불택자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즉 그것은 구원과 직결된다.



21-38절, 서로 사랑하라


[21-26]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는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다. '심령에 민망하여'라는 말은 '심령이 괴로우셔서'라는 뜻인데, 그것은 인간적으로 배신을 당하는 아픔을 가리킨다. 제자들은 주의 말씀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궁금하였고 베드로는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 있었던 자,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머릿짓을 하여 그가 누구인지 묻게 하였다. 이 제자는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을 가리킨다고 본다. 요한복음 21:20, 24,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26-3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예수께서는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고 말씀하시면서 한 조각을 찍어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본문은, "그 후에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6:70에서 이미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말씀하셨다. 본장 2절의 말씀대로, 사탄은 이미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려는 생각을 넣었고 이제 직접 그 속에 들어가 그로 하여금 이런 큰 악을 행하게 한 것이다. 주께서는 그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주님을 배신하고 유대지도자들에게 넘겨주려는 그의 악한 계획을 속히 행하라는 뜻이다. 다른 제자들은 주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유다는 매우 당황한 얼굴로 그 자리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그 밤에 그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유다는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갔으며 그 때는 밤이었다. 시간만 밤이 아니고 유다의 영적 세계는 캄캄한 밤이었고 그의 영원한 미래도 그러하였다.


[31-33]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주께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는 그 날 밤 잡히셔서 날이 새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다. 그러나 주의 죽음은 택자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요 그 일이 완성되면 그는 부활하고 승천하여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얼마 후에 이루어질 확실한 그 일을 미리 내다보시면서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도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아들의 대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으로써 그도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이 일이 곧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지금 주님과 함께 그 일에 동참할 수 없다. 그들은 지금 죽음을 맞을 수 없다. 그들은 주의 죽음과 주의 부활과 주의 승천에 지금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후에 참여할 것이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처럼 중요한 한가지 교훈을 남기신다. 그것은 새 계명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것은 옛날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과 대조되는 명칭이다. 예수께서는 옛 계명과 대조하여 새 계명을 주신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옛 계명도 그 요점은 사랑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십계명을 요약하여 그는 단순하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로 새 계명을 주신다.


세상은 서로 미워하고 다투며 불택자는 주를 배신하고 떠나갈 것이지만,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제자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들은 형제의 부족과 실수와 연약을 용서하고 덮어주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도우며 일치단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사랑이 무엇인가? 그것은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며 그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그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고린도전서 13:4-7은 사랑의 성격에 대해 증거하기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 초대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심지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행위로 사랑을 실천하였다(행 2:44, 45).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는 주께서 친히 십자가로 본을 보이시며 서로 사랑할 것을 명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바울도 에베소서 5:1, 2에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마다 주의 교훈대로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요한일서 4:9-11에는 이렇게 말씀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표가 된다고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서신에서 이단과 적그리스도에 대해 경계할 것을 강하게 교훈하는 동시에 바로 믿고 순종하는 형제들에 대해 참된 형제 사랑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 서신에서 형제 사랑이 우리가 빛 가운데 있는 증거이며 생명에 들어간 증거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가 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가 진심으로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알게 될 것이다.


[36-38]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주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암시하시고 지금 제자들이 그를 따라올 수 없다고 하실 때 베드로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주께서는 다시 말씀하시기를,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셨다. 아직 베드로는 죽을 때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가 되면 그는 주님을 따라 그가 가신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주를 위해 그의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를 가지고 있음을 고백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사랑했고 죽기까지 그를 따르기를 진심으로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진심의 결심이 그렇게 강하지는 못하다. 그는 마태복음 26:34의 증거대로 '그 날 밤에' 그리고 마가복음 14:30의 증거대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주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다. 그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인간의 결심이 얼마나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가슴 아프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교훈하신다. 사랑은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아름다운 인격의 덕이다. 그것은 형제의 허물과 부족을 용서하고(엡 4:31, 32) 그의 어려움을 돕는 것을 포함한다(요일 3:17, 18). 그것은 교회의 일치의 덕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는 주 예수께서 친히 본을 보이셨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먼저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사랑,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를 사랑하고 또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그를 믿고 그의 교훈에 순종하는 자라면 서로 사랑함을 실천해야 한다.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가 주의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변화된 인격과 삶이 참된 성도의 표요 참된 교회의 표이다.




14장: 성령을 약속하심


13장에 이어서 14장은 예수께서 한 제자의 다락방에서 마지막 유월절 식사 후 열두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이다. 13장에서 그는 제자들이 서로 용서함으로써 사랑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셨고 14-16장에서는 특히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의 오심과 그의 사역에 대해 교훈하셨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다. 마태복음 5-7장이 '산상 설교'라고 불리우듯이, 요한복음 14-16장은 '다락방 설교'라고 불리운다.



1-14절, 제자들을 위로하심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그것은 제자들이 주께서 떠나신다는 말씀 때문에(요 13:36) 근심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근심을 이기게 하기 위해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믿을 만한 분이시다. 그는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그는 신실하시다. 그는 거짓말하거나 제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천국의 소망을 주신다. '내 아버지 집'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천국을 가리킨다. 거기에는 하나님뿐 아니라 영화롭게 된 택자들의 영혼이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장차 주실 새 하늘과 새 땅은 단지 영의 세계일 것 같지 않다. 사실 물질 세계가 나쁘거나 악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영이 타락하여 물질 세계까지 악화(惡化)된 것뿐이다. 죄 없는 세상은 아름답고 복되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새 세계를 만드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21:5은 그가 장차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새로워진 물질 세계일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천국에서 우리는 새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마 26:29). 요한계시록의 묘사대로, 새 예루살렘성의 문은 진주문이며 성 안의 길은 황금길이고 그 성에는 생명강이 흐르고 강가에 생명나무가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아름답고 복된 천국을 준비하시러 가셨다.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천국이 다 준비되면 그는 다시 오실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본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성령 강림의 일로 보고 주께서 있는 곳에 있게 된다는 말씀은 성도가 죽은 후에 주께서 계신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나 성도가 죽은 후에 그 영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여전히 과도기적 상태이고 마지막 날 주께서 다시 오실 때 나타날 영광스런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성도의 참된 소망이며 위로이다. 주께서 계신 곳은 단순히 영의 세계만이 아니고 영육으로 복된 세계일 것이다. 그곳에는 현재 죽음을 보지 않고 올리운 에녹과 엘리야가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부활 승천하심으로 그곳에 들어가셨다. 예수께서는 단지 영이 아니시고 신령한 몸 즉 변화된 육체를 가지고 계신다. 그 몸은 음식을 먹으실 수 있는 몸이지만 자유롭게,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몸이셨다.


[4-5]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전통사본에는 4절이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가 알고 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되어 있다. 주의 말씀에 대해 도마는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삽나이까라고 대답하였다. 천국은 인간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니 모른다고 할 수 있으나 천국 가는 길은 모른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가 영생의 길이요 천국 가는 길이심을 그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도마는 천국에 대해서도, 그 길에 대해서도 무지하였다.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곧 천국 가는 길임을 증거하셨다. 죄인들은 그를 통해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또 예수께서는 자신이 진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진리 자체이시다. 죄인들은 그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구원과 의(義)를 안다. 그는 또한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죄인들을 죄로 인해 죽었던 상태에서 영생으로 이끄신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의(義)로 말미암아 죄인들은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 천국 가는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천국으로 갈 수 있다. 그는 죄인들을 위한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했고(행 4:12), 또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했다(딤전 2:5).


[7-9]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음을 증거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가장 탁월한 계시이시다. 히브리서 1:3의 증거대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고 또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보았다는 뜻이다. 빌립이 그의 말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보여 주시기를 구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자신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음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신성(神性)에 있어서, 즉 신적 본질과 신적 본체에 있어서 동일하심을 증거한 것이다.


[10-11]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본질적 일체성을 나타낸다. 그 일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이 말은 그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빌립에게 이 사실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은 인격적 구별은 있으나 본질적으로 일체이시다. 아버지와 아들은 신성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주께서는 또한 만일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그의 행하시는 일을 인해 그를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그가 행하신 기적들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이다. 그의 기적들은 그가 참된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놀라운 약속들을 주셨다. 첫째는 그를 믿는 자들이 그의 일을 할 것이며 그의 행한 것보다 더 큰 일도 행할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제자들이 주의 행한 일을 행할 것이라는 말씀은 사도들이 주님 승천하신 후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많은 기적들을 행한 일에서 성취되었다. 또 그들이 주님의 행하신 일보다 더 큰 것도 행할 것이라는 말씀은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할 때 3천명의 영혼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사건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주께서 행하신 일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주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후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을 통해 능력으로 역사하신 결과이었다.


[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둘째는 기도의 응답에 대한 약속이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꼭 필요한 일을 기도함에 있어서 기도 제목에 제한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모든 것을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혹은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할 수 있고 그러면 그가 응답하실 것이다. 그는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또한 기도의 응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께서 주신 위로의 말씀들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천국의 소망을 주셨다. 그는 자신이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이며 그들을 위해 집을 예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제자들이 그를 통해, 오직 그를 통해서, 천국으로 갈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또 주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또 그는 자신이 아버지와 동일시 됨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그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또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가 하신 일보다 더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승천하신 주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지혜와 힘으로써 영혼들을 구원하고 교회를 건립할 수 있다. 또 주께서는 기도의 응답에 대한 약속을 주셨다. 이것은 다 제자들에게 큰 위로의 말씀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광의 천국을 소망하며 사모하자. 그는 우리를 위해 천국을 예비하고 계신다. 천국이 다 준비되면 그는 다시 오실 것이며 우리를 그 곳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또 우리는 천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바라자. 또 그가 하신 기도 응답의 약속을 믿고 기도함으로써 응답받는 체험을 하자. 그는 지금도 천국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주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우리의 생명과 구원이시요 위로와 소망이시다.



15-31절, 성령을 약속하심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가 준 계명을 지킬 것을 강조하신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가리킨다. 그러한 강조는 21절, 23절, 24절에서 반복된다.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할 것이다. 주님의 주된 관심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주께서는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주께서는 또한 성령께서 오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제자들의 위로를 위해 그리고 그들이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 구함으로써 오실 '다른 보혜사'에 대해 말씀하신다. '보혜사'라는 헬라어(파라클레-토스)는 '변호자, 대언자, 중재자, 위로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보혜사이시다. 그러나 이제 그가 죽으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이며 '다른 보혜사'가 오실 것이다. 그 보혜사는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그는 성령을 가리켰다. 성령께서 성도들과 영원히 함께 거하신다는 사실은 성도들에게 놀라운 위로와 특권이 아닐 수 없다.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오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그는 진리만 말씀하실 것이며 결코 거짓말을 하시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 속에 계실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알 것이다. 주께서는 "저는 . . .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성령께서 장차 오셔서 제자들 속에 거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가 "저는 너희와 함께(혹은 너희 곁에) 거하심이요"라고 현재의 일로 말씀하신 것은 자신을 가리킨 듯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은 성령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시다. 신적 본질에 있어서 성령께서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제자들 곁에 계신다.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쓸쓸하게, 위로자 없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에게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과연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들에게 오셨고 또 승천하신 후에도 성령으로 오셨고 장차 재림하심으로 오실 것이다. 문맥적으로 볼 때, 이 말씀은 성령의 오심에 가장 맞는 것 같다.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주께서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후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이 아니고 오직 제자들에게 보이셨다(행 10:41). 또 그가 승천하신 후에도 세상은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영의 눈, 믿음의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것은 예수께서 생명의 주인으로서 무덤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셨고 영원한 생명으로 사시기 때문이며 제자들도 그의 생명으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죽은 후에도 그 생명으로 천국에서 주를 뵈올 것이다.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날, 제자들은 그가 아버지 안에 계심을 즉 그의 신성(神性)을 깨닫게 될 것이며, 성령께서 오시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또 그들은 주의 신성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영적, 신비적 연합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신비적 연합은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적 일체가 아니고 단지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되고 그의 풍성한 은혜를 받는 것을 뜻할 것이다. 성도들은 전지전능한 신이 될 수 없으나,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 살 것이며 장차 천국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께서는 성령 강림의 은혜와 복을 주님에 대한 사랑과 순종을 통해 얻게 되고 누리게 됨을 말씀하신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사랑하여 그의 계명을 지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더욱 사랑하실 것이요 주께서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주님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가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은 성령의 오심과 함께하심을 가리키는 것 같다. 우리가 주를 알지 못하고 거역하고 있었을 때 그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다면, 우리가 그를 믿고 그를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행할 때는 그가 우리를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는가?


[22-24]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주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두고 말씀하시지 않고 제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실 것이다.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신자 속에 오셔서 거하심을 가리키는 말씀이 분명하다. 성령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오신다. 그러나 주께서 하신 말씀이 그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25-26]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께서는 얼마 후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지만 또 다른 보혜사께서 그들에게 오실 것이다. 그는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시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롬 8:9)이시며 '아들의 영'(갈 4:6)이심을 증거한다. 또 주께서는 성령을 '그가'(에케이노스)라는 남성 지시대명사로 부르심으로써 성령께서 인격적 존재이심을 증거하셨다. 성령의 사역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 곧 모든 진리를 가르치시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에게 가장 좋은 선생님이시다. 우리는 그를 통해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신다. 그 평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평안이다. 하나님께는 참 평안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평강의 나라이다(롬 14:17). 주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세상의 평안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 그것은 지금 평안할지라도 다음 순간 근심과 염려에 떨어질 수 있는 평안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안,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은 영속적이고 힘이 있다. 하나님의 평안을 받는 자는 세상의 세력이나 마귀의 위협이나 자신의 연약을 보고 근심하거나 낙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의 평강은 세상을 이기는 힘이 된다.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다시 번역하면,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만일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다면 기뻐하였으리라.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하였음이니라. 이는 나의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이 말씀은, 그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요 또 제자들에게 유익한 일이기 때문에 그들이 기뻐해야 한다는 뜻인 것 같다. 과연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것은 자신에게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요 제자들에게 유익한 일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는 말씀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은 하나님과 동일하시고 동등하시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人性)을 취하신 중보자로서 아버지보다 낮으시고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하셔야 했다.


[29-31]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이 세상 임금'은 사탄을 가리킨다. 사탄이 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할 것이다. 이제 그 때가 가까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사랑하며 그의 명령을 죽기까지 행하실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실 것이다. 장차 세상은 그가 어떤 순종으로 아버지께 순종하셨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죽음의 시간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지만 그는 위축하지 않고 아버지의 명하신 바를 묵묵히 행하실 것이다. 그의 순종은 우리 모두에게 교훈과 본이 된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의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해야 하며 죽기까지 의와 선과 진리를 행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를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 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다. 그는 '또 다른 보혜사,' 곧 위로자, 변호자, 중재자로 오실 것이다. 그는 영원히 성도들과 함께 계시고 성도들 속에 거하실 것이다. 오실 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진리의 영으로서 모든 진리를 가르치실 것이고 주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실 것이다. 주께서 약속하신 그 보혜사 성령께서는 이미 교회 안에, 성도들 속에 오셨고 지금 우리 속에 거하신다. 그는 영원히 교회 안에, 성도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또 예수께서는 자신의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의 평안을 받아 근심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키자. 주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또 우리는 이미 우리 속에 오신 성령님을 감사하며 기뻐하고 그를 따라 살자.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감동과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구하자. 또 우리는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을 성령 안에서 받으며 누리자. 우리는 이 세상의 악한 풍조나 마귀의 시험이나 우리의 연약을 인해 근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감사함으로 아룀으로써 항상 평안 가운데 살자.




15장: 포도나무의 비유


1-8절, 포도나무의 비유


[1, 2]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예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을 '극상품 포도나무'(소레크)로 비유하신 적이 있으시다(사 5:2). 그와 비슷하게, 주 예수께서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 곧 '극상품의 좋은 포도나무'로, 신약교회인 우리들을 '그 가지들'로, 아버지 하나님을 '그 농부'로 비유하셨다. 주께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열매에 대한 관심을 보이셨다. 포도나무의 가치는 그 열매에 있다. 포도를 맺지 못하는 나무나 가지는 쓸모가 거의 없다. 주님의 관심은 열매이다.


주께서는 포도나무 가지들을 두 종류로 나누셨다. 첫째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요, 둘째는 열매를 맺는 가지이다. 그것은 마치 주께서 곡식 비유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시고 가라지 비유에서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하신 것과 같다.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농부가 잘라버리듯이,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도 열매 맺지 않는 자들을 제해버리실 것이다. 그러나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가지를 치듯이 그가 깨끗케 하실 것이다.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지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다. 주께서 강조하시는 열매는 선한 인격과 행실과 삶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선행과 서로 사랑하는 삶을 가리킨다.


[3, 4]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주께서는 성도가 선한 열매를 맺는데 꼭 필요한 연합에 대해 말씀하셨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그의 사랑과 그의 의(義)와 그의 생명 안에 거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는 말씀은 한마디로 연합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신비적 연합'이다. 이것은 성도들의 중생(重生, 거듭남) 사건과 동시적이다. '거하라'는 원어는 그것이 반복적 행위라기보다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임을 나타낸다. 성도의 중생과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은 단번에 이루어진다. 우리가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능한 것은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깨끗케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가리킨다. 성경은 우리가 말씀으로 죄씻음을 받는다고 말한다.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중생은 죄씻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으로 죄씻음을 받아 새 생명이 시작될 때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성도가 열매를 맺는 데 필수적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죽어버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듯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못하면 죽은 가지에 불과하고 결코 거룩하고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래서 주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받고 중생한 자들 곧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만 거룩하고 선한 인격과 삶의 열매, 곧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5, 6]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말씀은 예수 믿는 자들에게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예수 믿는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중생했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그러나 주께서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이라고 현재적 의미로 말씀하신 것은 현재 주님과의 영적 교제를 강조하신 것 같다. 성도가 열매를 맺으려면 과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만족하지 말고 현재 주님과의 밀접한 교제를 힘써야 할 것이다. 과거에 포도나무 가지이었어도, 현재 끊어진 가지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현재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 성도가 거룩하고 선한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그리스도와 밀접히 교통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연합과 교통은 말씀 묵상과 기도, 성령의 감동과 인도, 믿음과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렇게 말씀 묵상과 기도, 성령의 감동과 인도, 믿음과 순종으로 주님과 밀접히 교제하는 성도는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가 우리의 의가 되고 우리의 생명이 되며 또한 선행을 위한 힘과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즉 그가 중생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그는 죽은 가지처럼 말라지고 버린 바 되고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께서는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그의 말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는 자는 그 복음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자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되어 그의 영이 그 속에 계시고 그의 말씀이 그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복된 약속이 있다. 그것은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가지는 특권이다. 주께서는 앞에서도 기도 응답을 약속하셨었다. 요한복음 14:13,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구원받은 사실은 이 특권의 기초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밀접히 교제하며 열매를 맺을 때는 더욱 그 특권이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성도도 죄 가운데 있으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사야 59:1-3,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요한일서 3:21, 22,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그런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주께서는 산상설교에서도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표현하시면서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16). 성도들의 선한 행실들, 사랑의 행실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또 우리가 그렇게 선한 열매들이 많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주께서는 앞에서도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3:35).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중요한 진리와 교훈을 발견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관심은 열매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선한 행실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세상에 헛된 것을 구하며 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 뜻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선한 열매를 많이 맺는 자 되기를 소원하자. 좋은 인격자가 되기를 소원하자.


둘째로, 사람이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우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한다. 그것은 죄씻음으로 말미암는 중생(重生) 즉 거듭남을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루어진다. 요한복음 1:12, 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사람이 중생해야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포도나무에서 잘리운 가지처럼 버림을 당하고 멸망을 당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은 항상 주 안에 거해야 선한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과의 밀접한 교제의 생활을 가리킨다. 그것은 성경말씀의 묵상과 기도, 성령의 감동과 인도, 믿음과 순종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라면 우리는 주님과 항상 교제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성경책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주님을 믿고 주의 모든 말씀을 실천하려고 애써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보이신 성도의 본분이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선한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넷째로, 우리가 선한 열매들을 많이 맺을 때 우리는 더욱 기도의 응답을 확신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인정을 받을 것이다.



9-27절, 사랑의 열매


예수께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열매 맺는 자 되라고 교훈하신 후 그 열매가 서로 사랑하라는 그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임을 말씀하셨다.


[9-11]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 것같이 그도 그들을 사랑하였으니 그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주께서 베푸신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거절하지 말고 받고 그 사랑을 떠나지 말고 그 안에 거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의 사랑 안에 거하셨듯이, 우리도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의 사랑 안에 거하면 그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미움과 싸움은 슬픔을 가져오지만, 사랑은 풍성한 기쁨을 준다. 사랑은 기쁨과 같이간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이라고 말했다(갈 5:22).


[12-15]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주께서는 친히 사랑의 본을 보여주실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이다. 주께서는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주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하면 그의 친구라고 말씀하신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높게 여기셨다. 그는 그들을 종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친구로 여기신다. 그는 그들을 종의 신분에서 친구의 신분으로 높이셨다. 종은 주인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지만, 친구는 어느 정도 안다. 주의 말씀 속에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정도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교훈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 자신이 그런 희생적 참 사랑을 보이실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다. 그는 자신이 그들을 사랑한 것같이 그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우리가 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라면, 우리는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벌레와 같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제는 우리가 그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해야 할 때이다.


[16, 17]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제자들을 부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셨다. 주께서 그들을 택하여 세우셨고 그들이 주를 택한 것이 아니었다. 주께서 그들을 세우신 목적은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즉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사도 바울도 우리의 구원의 목적이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라고 증거했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 성경 교훈의 목적이 있다. 그것은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또 우리에게 이렇게 선한 열매가 많이 맺히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우리의 기도를 더욱 잘 들어주실 것이다(요일 3:21, 22).


[18-21]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을 예고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이 그들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미워하고 핍박했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는 까닭은 그들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택함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했던 그들은 예수께 속한 제자들도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는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다.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듯이, 제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크지 못하다. 그들은 주께서 받으신 미움과 핍박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은 결국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그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2-25]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까닭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했다. 그러나 바로 이 일에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고 그것을 핑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씀하셨고 아무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확실하고 풍성한 증거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한 것은 큰 잘못이었고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었다.


[26, 27]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미워하고 핍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자들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보내실 성령이시다. 그는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의 보혜사 즉 위로자, 중재자, 대언자, 변호자이시다. 성령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했다(고전 12:3). 둘째는 주 예수께서 세우신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전도 활동을 시작하실 때부터 그와 함께 지냄으로써 그의 은혜로운 말씀을 다 들었고 그의 능력의 기적들을 다 본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었다. 이제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발견한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 그의 사랑 안에 거하자. 그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말자. 우리는 어떻게 그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는가? 주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의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다. 우리는 주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주의 사랑 안에 거하자.


둘째로, 우리는 서로 사랑함을 실천하되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자. 예수께서는 친히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는 우리의 친구가 되셨다. 그는 우리도 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의 친구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다른 형제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을 실천하기를 결심하고 실천하자.


셋째로,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것을 각오하자. 세상은 자기에게 속하지 않고 자기와 구별되고 자기로부터 구원을 받은 우리를 미워할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핍박하고 마침내 죽인 것처럼, 예수 믿는 자들도 미워하고 핍박하고 죽이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 그가 친히 가신 그 고난의 길을 피하지 말고 우리가 가야할 길로 알고 묵묵히 그 길을 가자. 우리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말고 오히려 세상을 책망하며 거룩하고 의로운 길을 가자.




16장: 성령의 사역


1-15절, 성령의 사역


[1-4]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앞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낙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을 포기하거나 변절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셨다. 사람들은 그들을 출교시키고 심지어 죽일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더라면 제자들을 핍박하지 않을 것이다. 제자들은 장차 이런 환난과 핍박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낙심치 말고 범죄치 말고 믿음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 섬기는 길에는 고난이 있지만, 성도들은 낙심하거나 범죄하거나 변절하지 말아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그러해야 한다.


[5-7]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주께서 그들을 떠나신다는 말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보혜사 성령께서 그들에게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리우시면 그는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실 것이다.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는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를 나타낸다. 주께서는 성령을 보내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주께서 세상을 떠나지 않으시면 성령께서 오시지 않을 것이나 그가 떠나시면 성령께서 오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함께하시는 일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계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주께서 떠나시고 성령께서 오시는 것은 제자들에게 유익한 일이다.


[8-1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주께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증거하신다. 성령께서는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며 깨닫게 하실 것이다. 첫째로, 성령께서 죄에 대해 책망하시는 것은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그를 믿지 않는 것은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이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책망하시고 깨닫게 하시되, 특히 예수 믿지 않는 죄를 책망하시고 깨닫게 하실 것이다. 둘째로, 성령께서 의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 가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셨고 그 자신이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의가 되셨다. 죄인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의를 깨달아야 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셋째로, 성령께서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으로 이 세상 임금인 마귀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죄인들은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죄로부터,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그리고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사역은 한마디로 죄인들의 죄를 깨우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시는 사역이다.


[12, 13]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영적 깨달음의 정도만큼 진리를 가르쳐주셨고 아직도 많은 부분을 남겨두셨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그는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다. 성경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요 5:39). 성경 진리의 요점은 예수님의 신적 구주되심과 그의 속죄사역이다. 성령께서는 오셔서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그의 속죄사역을 증거하실 것이다. 또 그는 장래의 일, 즉 종말 사건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도 주실 것이다. 그 모든 내용이 신약성경의 내용이다. 우리는 다 성령의 역사로, 성경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로 구원을 받았다. 지금도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로 구원받아야 한다.


[14, 15]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예수께서는 성령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증거하신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그것을 알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 없이 독립적인, 독자적인 일을 하지 않으실 것이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는 주의 말씀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보인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보인다. 하나님의 모든 소유물이 피조물의 것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소유물을 자신의 소유로 여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뿐이시다. 성령께서 오시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알게 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7절에서 이미 "내가 그를[성령을] 너희에게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영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가 바로 사도시대에 교회에 오신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증거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세 구별된 인격은 한 하나님이시다. 그 세 인격이 본질과 본체에 있어서 숫적으로 한 분 하나님이시다. 완전한 신성(神性)을 가지신 세 구별된 인격이 한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성경에 밝히 계시된, 그래서 정통 교회가 역사적으로 믿고 고백해온,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귀한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고난과 핍박이 있고 심지어 순교를 당하는 일이 있으나 그들은 그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범죄치 말고 변절치 말아야 한다. 그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목적이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을 주신 목적이기도 하다.


둘째로, 우리는 성령께서 이미 오셨음을 감사하고 그를 의지해야 한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사도행전 2장이 증거하는 대로 오순절에 세상에 내려오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듯이, 하나님의 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교회 가운데, 성도들의 육체 속에 함께 계신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모시고 사는 것은 성도가 지상에서 누리는 가장 놀라운 복이며 큰 특권이다.


셋째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 성령께서는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세상 사람들을 책망하시며 깨우치시고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사역을 증거하신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며 그를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구원을 받았다. 오늘날도 구원받을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또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바로 알고 바로 믿고 성령의 위로와 도우심 속에서 끝까지 그를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16-33절, 주께서 떠나시지만


[16-19]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이 구절의 해석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성령의 강림을 가리킨다고 본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이 해석은 20절부터 23절까지의 문맥에 적합해 보인다. 다른 이들은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후반부의 말씀을 그의 부활과 성령 강림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 세 경우에 적용할 만한 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가장 적절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는 17절의 말씀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한다'는 말씀의 이유를 보이며, 주께서 죽으심으로 잠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올라가실 것을 의미한다. 주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실 때 회개한 한 강도에게 "내가 진질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4:43).


[20-2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제자들이 애통하며 근심하는 것은 주님의 죽음으로 인한 것일 것이다. 22절과 23절의 내용은 주의 재림 때라기보다 신약시대를 가리킨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뀐 것은 주님의 부활로 인함일 것이다. 복음서는 주님의 부활 후 제자들이 크게 기뻐하였음을 증거한다. 마태복음 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쌔." 요한복음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누가복음 24: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누가복음 24: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제자들은 주님의 죽음으로 인해 잠시 슬퍼할 것이나 주의 부활로 인해 다시 기뻐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기쁨이 성령의 강림으로 더욱 풍성해졌고 또 장차 주의 재림 때에 절정을 이룰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23, 24]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의 날을 가리킬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께 육신적으로 무엇을 구할 수 없을 것이지만,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와 동행하는 특권적 수단이 될 것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제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기도 응답을 받음으로 기쁨이 충만함을 경험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신약 성도들에게 주신 복된 약속이다. 주 예수께서는 육신적으로 우리 곁에 계시지는 않으나 성령으로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는 성령의 도움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고 기도의 응답을 받으므로 기쁨이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다.


[25-27]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제자들이 누릴 기도 응답의 특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또 그가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까닭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그가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주 예수께로 나올 수 있었고 또 그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으나, 우리가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그를 참으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도의 응답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며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28-32]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제자들은 예수께서 모든 것을 아시는 신적 지식을 가지고 계심을 알며 또 그 사실을 통해 그가 하나님께로서 오셨음을 믿는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다 각각 제곳으로 흩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이 보잘 것 없음을 증거하셨다. 인간이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은 너무 미약하다. 조금만 어려운 일이 오면 신자라도 흔들리고 낙망하기 잘한다. 우리의 믿음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조차도 내세우지 말고 모든 안이한 마음을 버리고 오직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야 할 것이다.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세상에는 환난이 많다. 제자들은 곧 유대인들에게 미움과 핍박과 심지어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음으로써 평안과 담대함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길을 통과하며 승리하셨다. 우리도 그의 은혜로 그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이 세상 사는 동안 고난의 길을 통과하며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발견한다. 첫째로, 우리는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자.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고 끝나신 자가 아니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하자. 또 성령 안에서 기뻐하고 또 그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영광의 천국을 바라고 기뻐하자. 세상에는 슬퍼하고 근심할 일들이 많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인해,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그리고 우리 속에 계신 성령으로 인해 항상 기뻐하자.


둘째로, 우리는 주께서 약속하신 기도의 특권을 사용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응답 받음으로 기쁨의 충만함을 누리자.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기도하는 자들은 좋은 것을 받을 것이다. 기도는 성도들의 특권이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자는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여러 가지 종류의 환난과 어려운 일들을 당하지만, 주 안에서, 주의 교훈 안에서, 성령의 위로와 도우심 안에서 평안과 담대함을 누리자. 주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성도들은 주 안에서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다.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으로부터 평안과 담대함을 받자.




17장: 제자들을 위한 기도


1-12절, 제자들을 위한 기도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께서는 어떤 제자의 다락방에서 가진 마지막 유월절 저녁식사 후 제자들에게 여러 말씀으로 교훈하신 후(요 14-16장)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셨다. 그가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며 천국이 하늘에 있는 한 장소임을 나타낸다. 그는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전 3:1).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택한 백성의 죄를 속(贖)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함이었다. 이제 그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죄인들을 위해 죽은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영화롭게 될 것을 내다보셨다. 그것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다 이루시고 실제로 세상의 모든 택자들을 구원하심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2절은 1절에 종속되어 있는데, 다시 번역하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듯이"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그런 권세로 아들을 부활시킴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하시기를 기도하신 것이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는 신적 권세이다. 그것은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버릴 자를 버릴 수 있는 권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롬 9:18).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 목적은 그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데도카스) 자들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를 증거하며 그 선택이 가상적이거나 현재진행적인 것이 아니고 이미 완료된, 확정적인 것임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구원하실 자들을 예정하셨다(엡 1:4, 5). 모든 택자들은 영생에 이를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이다. 죄는 인류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을 영생에 이르도록 구원하신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본절은 영생의 한 결과를 증거하는 것 같다. 3절을 정확히 다시 번역하면, "영생은 이것이니 이는 그들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당신과 당신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영생을 얻은즉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게 되고 또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과 끊어진 채로 사는 것이 사망이요 그를 바로 아는 것이 영생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하라고 주신 일은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과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명하신 일을 이루셨고 다 이루실 것이며 이제 그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짐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것이다.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께서는 탄생하시기 전에 이미 선재(先在)하셨던 자, 아니 창세 전, 곧 영원 전에 이미 존재하셨던 분이시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진 분이시다. 그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가지셨다. 그 영광은 신적 영광이다. 본장 24절은 창세 전에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셨음을 증거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영원한 사랑의 관계이셨다. 삼위일체의 관계는 영원하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나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는 그 신적 영광을 다시 얻으실 것이다.


[6-8]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였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들을 주었다. 또 저들은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셨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이시며 그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가 행하시는 일들이 다 하나님의 일들임을 알았고 믿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대한 참된 지식과 믿음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표시가 된다.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예수께서는 막연히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고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 곧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여기에 선택의 진리가 있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는 말씀은 선택의 진리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인류 중 일부를 선택하셨다는 진리는 성경적 진리이며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세상의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택자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택자들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나타낸다. 신성을 가진 자가 아니고서는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없다.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다"는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께서 신적 구주이심을 알고 그를 인정하고 믿고 경배함으로 그가 영광을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킹제임스: 이제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아니하나 이들은 세상에 있나이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나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주셔서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승천을 앞두고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그의 이름으로 구원하신 제자들을 보전하셔서 하나가 되게 하시기를 기도하셨다. 연합의 본보기는 하나님과 아들의 연합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의 연합은 내면적, 영적, 본질적 연합이다. 택자들 곧 교회의 연합은 그런 친밀한 연합이어야 할 것이다.


첫째로, 교회는 근본적 교리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근본적 교리들은 교회 연합의 기초이다. 어떤 교회연합체이든지 성경에 계시된 기독교 근본교리들 위에서 조직되어야 한다. 근본교리에서 이탈하는 것이 이단이다. 기독교 근본교리들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기적 행하심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 등의 사실들이 있고 그 핵심은 십자가 대속(代贖)이다. 또 이 모든 진리의 기초가 되는 진리는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성에 대한 믿음이다. 성경을 부정하는 이단은 가장 근본적인 이단이다.


둘째로, 교회는 중요한 교리들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성경의 중요한 교리에서 탈선하면 큰 오류이며 그런 오류를 신앙양심적으로 포용하기는 힘들다. 여기에 교파 형성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잘못된 교리가 구원에 본질적 문제가 아니라면, 교회는 그런 자들 혹은 그런 교회들을 정죄하지 말고 세계 교회의 한 지체로 여기며 서로에 대해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셋째로, 교회는 중요하지 않은, 지엽적 교리들에 있어서는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에 대해 포용해야 하며 그런 문제로 분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성도들은 이런 저런 지식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잘 깨닫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라도 그의 영혼을 귀히 여기고 인내와 사랑으로 그를 포용하며 그런 문제에 대해 함께 연구하고 토의함으로써 다 같이 일치된 지식에 이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교회 분열의 문제는 단지 외형적 조직의 분열 문제만이 아니다. 실상 교리적, 정신적 분열이 더 큰 문제이다. 고린도교회의 분파는 조직체적 분열이 아니고 교회 내의 정신적 분열이었다. 고린도전서 1:10,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에베소서 4:2, 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구원하셨고 지키셨고 그러므로 멸망의 자식 외에는 하나도 멸망치 않았다. 멸망의 자식은 불택자, 비택자인 가룟 유다를 가리킨다. 바울은 로마서 9:22에서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며 그 구원은 세상 끝날까지 보전될 것이다. 그러나 불택자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며 가룟 유다처럼 외형적으로 구원받은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교회의 직분을 가졌을지라도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를 다시 한번 더 마음에 새기자.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자들이 있다. 그는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주셨다. 그들의 수는 확정적이다. 그들은 다 영생에 이를 것이다. 그들만 다 영생에 이를 것이다. 우리는 참된 믿음과 순종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된 자임을 확신할 수 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을 다 구원해 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막연히 세상을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고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고 순종하자. 그것이 선택받은 표이다. 택자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고 순종한다. 그들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요한복음 10:26, 27,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대로 교회의 일체성을 지키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일체성은 단순히 외형적, 조직체적 일체가 아니다. 교회의 일체성은 교리적, 사상적 일체이다. 비록 외적, 조직체적 일체가 없어도 우리는 서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교회는 근본교리에 있어서 하나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본적 사실들, 특히 그의 속죄에 대한 교리에 있어서 교회는 일치해야 한다. 또 교회는 중요한 교리에 있어서 하나 되어야 한다. 장로교회는 장로교회의 모든 신조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교파에 대해서도 전체 교회의 한 지체로 인정하고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중요하지 않은, 지엽적 교리들에 있어서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에 대해 포용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그런 문제로 분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잘 깨닫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라도 그 영혼을 귀히 여기고 인내와 사랑으로 그를 포용하며 그런 문제에 대해 함께 연구하고 토의함으로써 바른 지식에 이르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13-26절, 제자들의 현재와 미래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14:2; 16:28) 제자들에게 몇 가지 진리를 확실히 증거하심으로써 그의 기쁨을 제자들 속에 충만히 주시기를 원하셨다. 주께서는 '내 기쁨'이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가지고 계시고 또 친히 주시는 기쁨, 곧 하나님의 기쁨이며 인간의 육신적 조건이나 외적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이다. 주께서는 자신이 떠난다는 말로 근심하며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그 기쁨을 충만히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에게는 핍박이 예상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고 제자들은 그 말씀을 받고 믿어 중생한 새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제자들이 핍박을 받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주께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중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으로 나는 일이다(요 1:13; 3:5). 본절에 '속한다'는 헬라어 구절(에이미 에크)은 근원과 소속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으로 나신 자가 아니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셨고 이와 같이 제자들도 세상에서 나고 세상에 속했던 옛사람을 벗어버렸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 속하는 자들이 되었다. 성도들은 그 근원과 소속이 바뀌었다. 이 말씀은 16절에 반복된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의 내용은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구한 것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구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정한 기간 동안 사는 것이다. 성도들이 속히 천국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일터이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신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악에 빠지지 않는 것, 곧 죄 짓지 않는 것이다. 죄 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거룩하여짐과 온전함이 중요하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14절 하반절의 말씀이 반복되었다. '속한다'는 헬라어(에이미 에크)는 근원과 소속을 나타낸다. 성도는 더 이상 세상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다(요 1:13).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악에 빠지지 않고 실제적 거룩함에 이르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화의 방편이다. 에베소서 5:26, 27, "이[교회]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모데후서 3:16, 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제자들의 사명 곧 신약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마가복음 16:15, 16,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인격은 물론 그의 교훈을 거룩하게 하셨고 제자들은 그의 말씀의 교훈을 통해 거룩함을 얻을 것이다. 신구약 성경은 성도의 성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법이다. 신구약 성경을 주야로 읽고 배우고 묵상하는 자는 점점 거룩하여지고 온전케 될 것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예수께서는 단지 제자들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않으셨고 또한 저희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곧 오늘날 우리들을 포함하여 모든 신약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그는 오늘날도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전통적 헬라어 다수사본대로 다시 번역하면, "이는 저희가 다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어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 곧 신약교회가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 교회가 하나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주께서 말씀하신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되심 같은 하나이다. 그것은 단순히 외형적 일치가 아니다. 그것은 영적, 사상적, 진리적 일치이다. 내면적 일치가 없는 외형적 일치 추구는 위선에 불과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으며 마치 인류 초기에 바벨탑을 쌓은 것과 같은 일에 불과하다(창 11:4).


교회가 하나된 결과는 세상을 향해 일치된 증거를 함으로 세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루어졌다. 신약시대의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일치된 증거를 하였다. 물론 역사상 이단들도 있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이탈한 이단들이 있다. 그러나 근본교리에서 이탈한 이단들을 제외한 수많은 교회들은, 심지어 교파가 달라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속죄사역과 그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증거한다. 교회들의 영적 일치는 두드러진다.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게 주신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특히 그의 완전한 도덕성을 포함한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와 사랑을 은혜로 받은 자들이다. 이제 그들은 그 의와 사랑을 가지고 서로를 대함으로 일치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전통사본대로 다시 번역하면,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은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신적 구주께서 제자들 속에 계심은 그들로 하여금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되게 하려 함이시다. 온전함을 이룬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주심으로 그 의 안에서 완전케 됨을 뜻하는 것 같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일치를 이룬다. 또 이렇게 됨으로써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구주를 보내신 것과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가 주의 영광을 보게 되기를 기도하셨다. 또 그는 자신의 영광이 창세 전에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므로 그에게 주신 영광임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볼 것이다. 천국은 성도에게 기쁨을 주는 소망의 나라이다.


[25, 26]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본문에는 '안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신앙에 있어서 지식은 중요한 요소이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줄 알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고 또 더욱 알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 속에 머물고 예수께서도 친히 영으로 그들 속에 계실 것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하며 동행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속히 죽어 천국에 들어가 쉬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세상에서 악에 빠지지 않고 죄 짓지 않고 살면서 주의 일을 많이 하는 것이다.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마다 거룩한 자 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거룩하여지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우리가 실제로 의로운 자가 되고 온전하여지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다하자.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승한 것이다. 그것은 영혼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일치단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그 사명을 다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자.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곳이다. 예수께서 그곳에 들어가셨다. 우리도 장차 그곳에 들어갈 것이다. 천국은 성도의 최종적 소망이다. 세상은 지나간다. 세상 생활은 일시적이다. 고린도후서 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18장: 잡히심


1-11절, 잡히심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식사와 그 후에 제자들에게 주신 여러 교훈과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의 한 동산으로 가셨다.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 북쪽에서 시작하여 성전이 세워진 언덕과 감람산을 지나 사해로 이어지는 협곡(峽谷)을 가리킨다. 이 시내는 평소에는 물이 없이 메말라 있다가 겨울의 우기(雨期)에 물이 흐르는 '와디'라고 하는 시내이다. 기드론 시내 건너편의 동산은 감람산, 좀더 좁게는 겟세마네 동산이다. 공관복음에는 주께서 그 밤에 거기서 여러 시간, 적어도 약 3시간 기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간적으로 주께서는 그 밤에 간절한 기도를 통해 연약한 마음을 굳세게 하셨다.


[2, 3]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주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신 그곳은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기 때문에 주님을 팔 가룟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가룟 유다가 한 무리의 로마 군인들과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관리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들을 가지고 그곳으로 왔다. 공관복음들은 그들이 '검과 몽둥이'를 가지고 왔다고 증거한다. 그들은 마치 강도라도 잡을 자들처럼 준비하고 왔다. 그 상황은 인간으로서는 누구나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살벌한 분위기이었을 것이다.


[4-6]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신적 구주이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당할 일을 다 아셨다. 그에게는 정확한 예지력(豫知力)이 있으시다. 주께서는 나아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하고 먼저 물으셨다. 그들이 그에게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말했을 때 그는 "내로라" 즉 "내가 그로라"고 말씀하셨다. 그에게는 마음의 안정과 담대함이 있었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자신을 증거하셨다. 잠언 28:1은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고 말했다. 의인에게는 담대함이 있다. 의로우신 예수께는 담대함이 있으셨다. 그를 잡으러 왔던 무리들조차도 '내로라'라는 그의 담대한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질 정도이었다. 그를 잡으려는 자들이 예상할 수 없을 정도의 담대함이 그에게 있었다. 그것은 악한 세상을 살아갈 때 성도들에게도 요구되는 담대함이다.


[7-9]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께서는 다시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고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말했다. 그 때 주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내로라고 말했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아셨고 제자들이 잡히거나 다치거나 실족지 않게 되기를 원하셨다. 그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라는 말씀을 그대로 이루시기를 원하셨다. 주께서는 과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아끼셨다(요 13:1).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것이 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명령하시고 권하시는 사랑이다.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시몬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좀더 용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주님을 체포하려는 악한 무리를 보고 참지 못하고 검을 빼어들어 대제사장의 종을 쳤다. 요한은 귀가 베인 그 종의 이름이 말고라고 증거한다. 요한은 그 종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누가복음은 주께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신 후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고 증거한다(눅 22:51).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마태복음은 주께서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레게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악인들의 악행에 대해 물리적 힘으로 대항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교훈하셨다. 주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시기를,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하셨다(마 5:39, 40). 주께서는 힘이 없으셔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께 구하여 열두 영 곧 7-8만명 되는 천사들을 보내시게 할 수 있으셨다. 그러나 주께서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시는 잔이었다. 그는 그 잔을 받아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 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각오하셨다. 그는 이전에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었다(마 16:24). 그는 이제 그가 교훈하셨던 바를 그 자신이 먼저 본을 보이실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악한 세상을 이기기 위해 담대함을 얻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썼다(고전 16:14). 세상은 예수 믿는 자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다. 성도들은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담대함을 얻을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인간적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신 후 심령의 평안과 담력을 얻으셨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담대함을 얻자. 인간은 심히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시 62:11).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했다(엡 6:10, 11). 또 성도는 실제적인 의로운 삶에서 담대함을 체험할 수 있다. 잠언의 말씀대로,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지만,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읽기와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동행하며 또 실제로 의롭게 살아감으로 담대함을 얻자.


둘째로, 우리는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자.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서신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고 쓰지 않았던가?(고전 13:4, 5).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랑이 참 사랑이며 큰 사랑이다. 주님을 버리지 않고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말했던 제자들은 그 밤에 주님을 보호하지 못하고 다 도망쳐 버릴 것이지만, 주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셨고 배려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자.


셋째로,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을 따르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누구든지 그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고난을 받고 심지어 순교를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그 길을 택하자. 이것이 우리 주 예수께서 가신 길이다. 그는 "아버지의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다(행 20:24). 또 그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했다(딤후 1:8). 사도 베드로도 성도들에게 불 같은 고난과 핍박의 시련이 올 때 이상히 여기지 말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고 선을 행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하라고 교훈했다(벧전 4:12-19).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주를 따르자.



12-27절, 심문받으심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가룟 유다가 데리고 왔던 로마 군인들과 그 지휘관과 유대인들의 관리들은 예수님을 잡아 결박하였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결박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을 결박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거꾸로 된 일이었다. 어떻게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그가 죄인들에게 결박을 당하시는가? 그러나 그러한 일이 역사상 실제로 일어났다. 이것이 악한 세상의 모습이었다.


[13, 14]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그들은 결박한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그들이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고 갔고 대제사장은 공회 앞에서 그를 심문했다고 기록했으나, 요한은 그들이 그를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고 보충적으로 증거하였다. 안나스는 그 자신이 제사장이었고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다. 제사장들은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는 제사장들이 부패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인 그들, 항상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과 교통하므로 백성들보다 더 경건해야 할, 아니 백성들 가운데 가장 경건해야 할 그들이 부패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고 공모하였다. 젊은이들이 혹 믿음이 적고 인격이 부족해서 잘못을 범한다 할지라도 노인들이 바로 서서 바른 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본보여야 할 터인데,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 나이가 상당히 들었을 그는 오히려 이 모든 일을 조종하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대제사장 가야바도 예수를 죽게 하는 것이 유대 백성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공회원들에게 권하던 자이었고 그의 장인도 같은 부류이었다.


[15, 16]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예수께서 결박을 당하여 안나스에게로 끌려갈 때,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한 제자가 예수님을 따랐다. 다른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다(마 26:56). 그러나 베드로와 또 한 제자는, 비록 멀찍이이었지만(마 26:58), 예수님을 따라갔다. 베드로는 인간의 연약성을 가진 자이었지만 그에게는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진실한 마음이 있었다. 베드로와 함께 간 다른 한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었고 그는 예수님과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갔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제자가 요한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본서에서 저자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자신에 대해 증거하였다. 그 제자는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뜰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17, 18]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그 때 베드로에게 시험이 닥쳤다. 시험은 종종 성도가 예상치 못한 때에 닥친다. 사탄은 우리를 주목하며 틈을 노린다. 베드로의 시험은 문 지키는 여종의 질문을 통해 왔다. 그 여종은 베드로에게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질문했다. 그런데 이 갑작스런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베드로는 실패하였다. 그는 "나는 아니라"고 그 여종에게 대답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그로라'는 예수님의 담대함과 너무 대조되는 말과 행동이었다. 베드로는 주님의 염려대로(마 26:41) 그 밤에 깨어 기도하지 못하였다가 마침내 실수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는 계절적으로 초봄이었지만, 아직 밤은 추웠다. 그 밤에 대제사장의 뜰에 있었던 무리들은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고 있었다. 베드로도 자신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한 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19-21]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안나스도 대제사장이었는데, 그는 예수께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해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질문에 대해 직접 대답하는 대신에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성전과 회당들에서 항상 가르치셨고 드러내어 놓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은밀하게 무엇을 말하지 않으셨다. 그의 교훈은 공개적이셨다. 주께서 안나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신 까닭은 그것이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안나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믿지 않고 회개치도 않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이미 예수님을 정죄했고 단지 그 정죄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셨고 그 앞에 비굴하게 아부하거나 육신의 목숨을 구걸하려 하지도 않으셨다.


[22, 23]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예수님의 당당한 말을 듣던 한 관리가 손으로 그를 쳤다. 그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공손하지 않게 말대꾸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을 잘못하셨는가? 잘못하셨다면 그 잘못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는 지적할 만한 잘못이 없으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라고 말하셨다. 누구든지 사람을 정죄하려면 먼저 그의 죄를 확증해야 한다. 죄를 확증하지 않고 남을 정죄하는 것은 그 자체가 큰 잘못이며 큰 악이다. 신명기 19: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출애굽기 23:1, "너는 허망한 풍설[헛된 소문]을 전파하지 말며."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으신 후 예수께서는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보내지셨다. 공관복음은 가야바의 법정에서 되어진 일만 증거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있는 내용은 생략하고 그 전에 안나스 앞에서 되어진 일만 증거한다. 요한은 공관복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고 그 내용을 보충할 의도로 요한복음을 썼을 것이다.


[25-27]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시몬 베드로도 추위를 피하려고 사람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그 때 그는 두 번 더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부정하는 잘못을 범했다. 공관복음들에는 그가 두 번째는 맹세하며 부정했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정했다. 그는 모두 합쳐서 세 번이나 자신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공언했다. 그것은 명백히 큰 잘못이며 큰 죄악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자기를 잡으러 온 자들 앞에서 "내가 그로라"고 담대하게 말씀하신 것과 너무 대조적이다. 베드로의 실패는 곧 우리 모두의 본성의 연약성을 드러내어 준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주를 따르자.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결박을 당하시고 심문을 받으시고 구타를 당하셨다. 하나님이신 그가 사람들에게, 그것도 죄 많은 자들에게 그런 모욕을 당하셨다. 성도들에게도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핍박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딤후 3:12). 그러나 우리는 혹 결박과 구타를 당하여도 낙심치 말고 주를 따르자. 주님이 가신 길을 본받자.


둘째로, 우리는 친구가 우리를 버려도 낙심치 말자.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는 기도하지 않다가 실패하였다. 인간은 너무 연약한 존재이다. 몸도 마음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항상 기도함으로 담대함을 얻자. 비록 우리에게 친구가 없어도, 심지어 모든 사람이 우리를 버려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심을 알고 낙심치 말자.


셋째로, 우리는 항상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자. 세상의 권세자 앞에서 비겁하지 말고 육신의 목숨을 구걸하지 말자. 우리가 항상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동행하며 실제로 의롭게 살 때 우리는 담대함을 얻는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지만,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잠 28:1). 우리는 항상 그렇게 살자.



28-40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28-32]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무지하고 악한 열심이 있었다. 그들은 새벽에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 곧 로마 총독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예수를 정죄하고 죽이려 하는 일에 열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심히 무지하고 악한 열심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들이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정확히 말하면, 유월절 식탁은 그 전날 저녁에 이미 가졌고 무교절 절기의 식탁--에 참여하기 위해 이방인의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였으나, 하나님의 아들을 정죄하고 죽이려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악이었다. 그들은 무지하였든지 아니면 자신들의 이성과 양심을 억누르는 위선자들이었다. 그들이 그를 고소하는 이유를 묻고 그 재판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던 빌라도에게 그들은 이 사람이 사형에 해당하는 행악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넘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열심이 있었으나 그 열심은 무지하고 악하였다.


[33-36]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긍정하시면서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셨다. '속하다'는 헬라어(에이미 에크)는 근원과 소속을 나타내는 말이다. 세상 나라는 순전히 세상에서 나와서 세상에 속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 근원이 다르고 그 소속이 다르다. 그 나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나라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나라이다. 주 예수께서는 바로 그 나라의 왕이시다. 예수 믿는 우리도 세상 나라인 대한민국에 살지만, 이제 우리의 근원과 소속은 대한민국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천국 백성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적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세상의 악한 자들이 그를 대적할 때 그는 세상적 방식으로 악한 자들과 싸우지 않으신다. 그는 이 세계와 거기 거주하는 사람들을 정복하시되 칼과 창으로 하지 않으신다. 그는 세상 나라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신다.


[37, 38]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나라이며 진리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세상 나라는 죄악되고 거짓된 죄인들이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에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고 이기적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가 법이며 진리가 지배하는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는 경건하고 도덕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를 위해 세상에 오셨고 진리에 대해 증거하신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진리에게서 난 자들, 진리에 속한 자들, 곧 중생(重生)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들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믿고 따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고 진리를 듣지 않고 받지 않고 도리어 배척한다.


[38-40] . . .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로마 총독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고소하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다고 증거했다. 또 그는 유월절에 죄수 한 명을 특별사면하는 관례대로 유대인의 왕 예수를 놓아줄 것을 제안한다. 복음서들은 공통적으로 총독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無罪)를 증거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의 제안을 즉시 거절하였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 대신 강도 바라바를 사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강도보다 못한 악인으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무지하고 악한 일이 가능한가? 그러나 역사상 이런 일이 일어났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무지한 열심은 오히려 위험하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정죄하고 죽이고자 하는 데 있어서 열심이 있었다. 그들은 새벽부터 모여 예수를 정죄하였다. 사람이 열심히 산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종교적 열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무조건 열심히 섬긴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무조건 열심히 찬송하고 열심히 기도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일에 있어서 남들보다 더 큰 열심이 있었다. 그러나 잘못된 지식을 가진 열심은 더 큰 악을 만들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잡아 옥에 가두고 죽이기도 한 열심은 열심 없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악이었다. 이방종교인들도 이른 새벽에 일어나 그들의 종교 의식을 행한다. 이단 종파의 신봉자들도 그들의 신념을 위해 열심을 가지는 것 같다. 공산주의자들도 세계 공산화 혹은 온 세계를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로 만드려는 그들의 큰 목표를 향해 열심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열심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열심이 아니다. 지식 있는 열심만이 선하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그 뜻에 일치하는 열심만 선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지한 열심을 버리고 지식 있는 열심을 소원해야 한다. 우선 바른 지식을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성도들의 개인적, 단체적 임무와 사명을 바로 알아야 한다. 여기에 성경 읽기와 성경 배우기의 중요성이 있다. 우리는 먼저 성경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묵상하고 연구해야 하며 하나님과 그 뜻에 대한 바른 지식을 사모해야 한다.


둘째로, 타락한 종교인은 불신자보다 더 나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긴다는 유대 지도자들은 이방인 빌라도보다 더 나빴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예수가 무죄하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알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알았다. 그가 사형을 당할 죄를 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형은 거기에 합당한 큰 악이 전제되어야 한다. 큰 악을 범한 적이 없는 자를 사형시키는 것은 그 자체가 큰 악이다. 만일 종교적 이유 때문에 사형에 합당하다면, 그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반증(反證)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 어떤 재판에서든지 증명이나 반증이 없이 사람을 정죄하는 일은 합당치 않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종교적 외형은 단지 외형에 불과했다. 그것은 위선이었다. 참된 경건은 선한 인격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악을 떠난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며 섬긴다면 거룩하고 선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위선적 신자는 양심적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 위선은 양심을 마비시키는 큰 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종교적 형식을 중시하지 말고 참된 믿음과 도덕성과 내면적 덕을 중시해야 한다. 우리는 진실한 믿음과 변화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신앙생활, 교회생활에서 직분이나 외적 형식보다 백배 중요하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를 믿고 따르는 것은 그의 왕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왕이시다. 그가 통치하는 법은 진리이다. 그의 나라에 들어온 자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섬기며 성경 진리를 절대적 규범으로 지킨다. 경건과 도덕성은 구원받은 모든 자들의 생활원리이다. 신자는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강제적인 삶이 아니고 자발적인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적, 육신적, 물질적 차원의 나라가 아니고 영적, 정신적, 도덕적 차원의 나라이다. 그 나라의 행동지침은 의와 사랑이며 그 나라의 특징은 평안이다. 신약교회는 이 나라의 부분적 성취이다. 그 나라는 장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택한 양들은 이 나라에 들어와 이 나라의 행동지침을 따라 살며 이 나라의 복을 누려야 한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양들은 그를 알고 그를 믿고 그를 따라야 한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하며 그에게 복종하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말씀을 절대규범으로 받아 힘써 지키고 있는가? 여러분은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고 있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참 평안과 형통을 누리고 있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광스런 천국을 고대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자들인가? 우리는 스스로 질문하고 확실하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19장: 십자가에 못박히심


1-16절, 빌라도의 판결


[1-6]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고소 사건을 재판함에 있어서 우유부단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았으나 그를 채찍질하였고 군병들에게 내어주었다. 군병들은 그에게 가시 면류관을 씌웠고 자색옷을 입혔으며 그 앞에 경배하고 손바닥으로 그를 때렸다. 그것은 다 그를 희롱한 것이었다. 빌라도는 이 일을 방치하고 허용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자색옷을 입힌 채 유대인들 앞에 데리고 나오면서 그의 무죄함을 다시 증거하였다.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유대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칠 때 그는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말한 후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고 다시 말했다. 그는 무책임하였다. 그의 말과 행동은 논리일관하지 않고 모순되었다. 그가 참으로 예수님을 죄 없다고 생각했다면 그를 보호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우유부단했고 단호한 처리를 하지 못했다. 그는 정의롭고 용기 있는 재판관이 아니었다.


[7-11]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유대인들이 예수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빌라도는 더욱 두려워했다. 빌라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나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사람 속에는 그런 의식이 어느 정도 다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 들어가 '너는 어디로서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대답하여 주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어도 빌라도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가 깨달았다 할지라도 그는 예수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가 예수를 정죄할 수밖에 없도록 그를 몰아대고 있었다. 빌라도가 예수께 그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다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하나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지 아니하셨더면 그가 자기를 해할 권세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그를 그에게 넘겨준 유대 지도자들의 죄는 더 크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러하였다.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교묘한 꾀에 말려들고 있었다.


[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성을 알았다. 그는 아마 예수께로부터 어떤 두려움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놓으려고 힘썼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에게 이 사람을 놓으면 로마 황제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외쳤다. 그 이유는 자기를 왕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누구나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준다면 가이사에게 불충성하는 것이라고 압박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교묘한 압박이었다. 악한 자들은 악한 일에 놀라운 지혜를 발휘하였다. 그 악한 지혜는 빌라도를 결정적으로 잘못된 판결을 하도록 몰아대었다. 그는 이성과 양심의 판단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총독직의 안정을 구할 것인가라는 갈림길에서 잘못된 길로 이끌리고 있었다.


[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빌라도는 어떤 판결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예수님을 놓을 수 없었고 이 재판을 회피할 수도 없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끌고 나와서 재판석에 앉았다. 사도 요한은 그 재판석의 장소를 '박석,' 히브리말로 '가바다'라고 증거한다. 그것은 그 자신이 빌라도 재판정에 있었던 목격자적 증인임을 암시한다.


[14]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유월절의 예비일'이라는 말은 유월절 전날이라는 뜻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관복음들은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유월절 저녁식사를 하셨다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고(마 26:17-19; 막 14:12, 16; 눅 22:7-16) 요한복음이 다른 날짜 계산법을 사용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유월절의 예비일'이라는 말은 유월절 주간의 예비일 즉 금요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제육시,' 원문에 '제육시경'은 로마 시간으로 6시경 즉 오늘날 시간 계산과 같이 오전 6시경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른 아침부터 재판이 열렸다.


[15, 16]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없이 하라,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다. 그 재판은 공정한 심리와 냉철한 판단과는 거리가 먼 재판이었다. 거기에는 군중의 부르짖음만 있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군중을 선동하는 지혜가 있었다(마 27:20). 또 빌라도가 예수님을 '너희 왕'이라고 표현했을 때 그들은 가이사 외에는 자기들에게 왕이 없다고 말했다. 정말 그들은 하나님의 왕권을 포기한 자들이었다. 빌라도는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빌라도는 이성에 반대되고 양심에 반대되게 판결하였다. 그는 자기 직위의 안정만을 위해 판결하였다. 그는 정의를 행해야 할 재판관의 지위와 권력을 나쁘게 사용하였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심히 악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두어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저 유대 지도자들처럼 악한 지혜자가 되지 말자. 저들은 예수 죽이는 일을 위해 그들의 지혜를 총동원하였다. 그들은 악을 연구한 자들이다. 그들은 빌라도를 궁지에 몰아넣었고 군중을 성공적으로 선동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자. 우리는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한 자가 되자. 로마서 16:19,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둘째로, 우리는 범사에 진리대로, 성경 교훈대로, 또 이성적이게, 양심적이게 행해야 한다. 그것이 의로운 것이다. 그것이 인간다운 것이다. 우리는 빌라도처럼 이성과 양심을 억누르고 악을 택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육신적, 물질적 안정을 위해 이기적이게, 계산적이게 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 이성적, 양심적 판단을 따라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17-30절, 십자가에 달리심


[17]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십자가형을 받는 사형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나갔다고 한다. 예수께서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라는 사형장으로 나가셨다. 다른 복음서들에 보면, 군병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잡아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과 같이가게 하였다(마 27:32; 막 15:21).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셨고 구레네 사람 시몬은 그의 뒤에서 십자가를 같이 지었던 것 같다. 예수님은 육신의 체력상 혼자서 무거운 십자가 형틀을 지실 수 없었던 것 같다.


[18]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쌔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되는 극악한 죄수들처럼 취급되셨다. 그의 좌우에는 큰 죄를 짓고 십자가형을 받는 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역사적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존재했던 십자가형은 로마 시대에는 주로 큰 죄를 지은 노예들에게 적용되었고 로마 시민들에게는 그런 형벌이 제외되었다. 사형수는 땅에 있는 십자가틀 위에 뉘운 채로 양손과 발에 날카로운 못이 박혔고 형틀은 밧줄로 들어올려 곧바로 세워졌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고 말씀하셨다(눅 24:39). 십자가형에 의한 죽음은 오랜 시간을 끌었다. 그것은 심장에서 가장 먼 손과 발에 못을 박으므로 피가 서서히 흘러나와 마침내 죽게 했다. 36시간 전에 죽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어떤 경우는 9일 동안 끈다고 한다.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은 극심했을 것이다.


[19, 20]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들은 그 십자가 위에 그의 죄패가 붙는다고 한다. 예수께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죄패가 붙었다. 그 죄패는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역사상 유대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할 '세상의 구주'이시다. 그의 이름은 단지 한 시대, 한 민족에게만 복된 이름이 아니고 모든 시대, 모든 민족에게 복된 이름이요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21, 22]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죄패에 '유대인들의 왕'이라고 쓰인 말이 마음에 거리끼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야를 죽였다는 말인가? 그들의 양심은 평안치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빌라도가 그것을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쳐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것을 고치기를 원하지 않았다. 빌라도는 처음부터 예수가 사형받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들의 교묘한 요구를 물리치지 못하고 허락했을 뿐이다. 그는 이제 죄패의 글을 고쳐달라는 유대인들의 요청에 동의할 수 없었다.


[23, 24]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취하였다. 예수님을 맡은 군병들은 네 명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넷으로 나누어 하나씩 가졌다. 그의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어서 그들은 제비를 뽑아 그것을 가졌다. 그것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는 일이었다. 시편 22:18에는 이렇게 예언되어 있다. "[그들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십자가 위에서 겉옷과 속옷을 벗기운 채 수치스런 죽음을 죽으셨다.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몇 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원문에는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사이에 '와'라는 접속어가 없다. 그것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가 같은 인물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런 읽기인 것 같다. 다른 복음서들은 많은 여인들이 멀리서 예수님을 보았다고 증거한다(마 27:55; 막 15:41). 그들은 남자 제자들보다 더 용감했던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위하였다.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는 그의 모친 마리아를 가리킨 것 같고(마 13:55),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사도 요한의 모친으로서 마가복음 15:40에 언급된 살로메와 같은 인물인 것 같다.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의 다른 곳에서 네 번이나 나온다. 그는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임이 분명하다. '여자여'라는 호칭은 존경심을 가진 말로 쓰이기도 하였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모친께 자신이 그의 아들임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증거한다. 예수님과 모친과의 인간적 관계는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아들 예수를 보는 모친 마리아는 인간적으로 그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을 것이다. 30년 전, 그가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려갔을 때 시므온이라는 선지가가 마리아에게 칼이 네 마음을 찌를 것이라고 예언하였었다(눅 2:35). 지금 그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서는 고통 중에 요한에게 마리아를 그의 어머니로 모시라고 부탁하신 것 같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도 그의 모친을 배려하셨다. 인간 예수는 육신의 모친에 대한 사랑과 공경심을 끝까지 가지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후 다른 여러 자녀들을 낳았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표현하며(마 1:25 전통사본; 눅 2:7) 또 성경에는 '그의 모친과 동생들(혹은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며 또 성경에는 "주의 형제 야고보"라는 표현도 나오기 때문이다(갈 1:19).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모친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의 부친 요셉은 이미 죽은 상태이었던 것 같다. 또 그가 모친을 왜 동생들에게 부탁하지 않으셨는지는 불명확하지만 그의 동생들은 믿음이 없었고(요 7:5)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돌볼 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영적 관계는 육신적 관계보다 더 낫다.


[28-30]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인간 예수님의 육신적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이 컸을 것이다. "내가 목마르다"는 그의 말씀은 그 고통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육신의 고통을 십자가 위에서 당하셨다. 많은 피를 흘리신 그는 목마르셨다.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조금 마신 후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고 말씀하셨다.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 곧 택자들을 위한 속죄 사역을 다 이루셨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후 그는 돌아가셨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자. 첫째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며 고통과 수치를 감당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자.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위해 죄인처럼 십자가를 지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참으셨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어찌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둘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 당할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자. 주 예수께서 먼저 이 고난의 길을 가셨다. 주께서 우리에게 힘주시면 우리도 그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교훈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다(마 16:24, 25).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죄인 취급을 받는다든지 고통을 당한다든지 수치를 당한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묵묵히 그의 뒤를 따르자.


셋째로,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는 것이었듯이 우리도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만 행하며 이루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믿음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원이며, 둘째 말씀과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화(聖化)이며, 셋째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구원시키는 전도이다. 우리는 예수 믿는 일에 힘쓰고 자신의 성화를 이루기 위해 애쓰고 전도하는 일에 힘쓰자. 사도 바울도 말년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고 믿음을 지켰노라"고 간증했다(딤후 4:7). 또 그는 아킵보에게 "주 안에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썼다(골 4:17). 우리도 우리에게 명하는 하나님의 명령,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직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는 자들이 되자.



31-42절, 예수님의 장례식


[31-33]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예비일은 유월절-무교절 주간의 안식일의 예비일 즉 금요일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요청하기를, 안식일에 죄수들의 시체를 십자가 위에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그 시체들을 치워달라고 했다. 사형수들의 다리를 꺾는 것은 그들이 도망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좌우의 죄수들의 다리를 꺾은 군병들은 예수께 와서 그가 이미 죽은 것을 보고 그의 다리는 꺾지 않았다.


[34, 35]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다리를 꺾는 대신 군병 한 사람이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나왔다. 이것은 목격자의 증언이다. 성경은 목격자들의 진실한 증거들을 기록한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거짓 증인이 아니고 진실한 증인들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다. 못박힌 그의 손과 발에는 많은 피가 흘렀을 것이고 30절의 증거대로 그의 숨은 끊어지셨고 옆구리에 창으로 찔림까지 받으셔서 물과 피를 다 흘리셨으니 인간적으로 그는 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으셨다. 그는 확실히 죽으셨다.


[36, 37]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위의 사실들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두 구절의 성취이었다. 하나는 출애굽기 12:46의 말씀인데, 거기에 보면 유월절 어린양에 대해 "뼈를 꺾지 말라"고 되어 있다.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또 하나는 스가랴 12:10의 말씀인데, 거기에 보면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리라"고 예언되어 있다. 메시야는 창에 찔림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고 그 예언도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 외에도 이사야 53장에는 그가 부자와 함께 묻히겠다고 예언되어 있는데(사 53:9) 그 예언도 그대로 성취되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요 5:39). 또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대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들과 시편에 메시야에 대해 예언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이었다(눅 24:44). 이와 같이 성경은 어떤 사건을 예언하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그것이 성취되었다. 성경의 이러한 성격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한 증거이다. 성경의 여러 예언들은 신기하게도 그대로 성취되었다.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식은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평소에 드러나 있지 않았던 두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나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고, 다른 하나는 니고데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방식으로 그의 일을 행하신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이지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그 사실을 숨기며 은밀히 처신한 자이었다. 다른 복음서들에 의하면, 그는 부자요(마 27:57) 존귀한 공회원이었고(막 15:43; 눅 23:50) 선하고 의로운 자이며 예수님을 정죄한 유대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않았던 자이었고(눅 23:50, 51)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이었다(막 15:43; 눅 23:51). 그는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마가복음 15:43은 그가 "당돌히" 들어가 요청하였다고 표현하였다. 그는 그 시체를 받았고 세마포를 사서(막 15:46) 그것으로 싸서 그것을 자기의 새 무덤에 장사하였다(마 27:60).


[39-42]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예수님의 장례식을 수종든 다른 한 사람은 니고데모이었다. 그는 수년 전에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들었던 자이었다(요 3장).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혹은 알로에) 섞은 것을 100리트라(약 34kg)쯤 가지고 왔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예수님의 시체를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서 골고다 부근의 동산에 있는 요셉의 새 무덤에 두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자. 그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양손과 양발 그리고 옆구리를 통해 물과 피를 다 흘리셨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자.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때에 사람을 일으키시고 보내주셔서 그의 뜻을 다 이루신다. 그에게는 불가능이 없으시다. 그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만 이루자.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성화와 전도와 교회의 건립이다. 우리는 이 일들을 위해 힘쓰자.




20장: 부활하심


1-18절,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함을 증거한다. 첫째는 빈 무덤을 통해서이고 둘째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을 통해서이다.


[1, 2]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안식 후 첫날'이라는 원어는 '주간의 첫날'이라는 뜻이다. 안식일이 지나고 한 주간의 첫째날 곧 일요일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를 둔 무덤에 왔다. 다른 복음서들에 의하면, 다른 여러 여자들도 같이왔다. 2절에,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는 말은 막달라 마리아 외에 다른 여자들이 있음을 암시한다. 다른 복음서들에 의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그것을 준비하여 왔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은 컸고 간절하였다. 다른 복음서들에 의하면, 그 여자들은 무덤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는 것을 보았다. 그가 사도들에게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이 들어가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했음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24장에 의하면, 그들은 모든 사도들에게 그 사실과 또 천사의 증언을 보고하였다. 물론 시몬 베드로와 요한도 사도들 중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는 요한복음 21:24에 의하면 본서를 쓴 자이며 그는 요한임이 분명하다.


[3-5]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누가복음 24:11에 의하면,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허탄한 소리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과 달리 베드로는 무덤으로 즉시 달려갔다. 누가복음 24:12도 그 사실을 증거한다. 본문은 거기에 더하여 사도 요한도 함께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말한다. 요한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무덤에 도착하여 구푸려 세마포가 놓인 것을 보았다.


[6, 7]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시몬 베드로는 뒤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았다. 과연 예수님의 시체는 없었고 단지 그 시체를 쌌던 세마포가 놓여 있었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확실히 증거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부활체의 성격은 육체적이었다. 예수님의 시체는 살아났다. 그 시체를 쌌던 세마포가 놓여 있었다. 그 몸이 다시 사셨으므로 그 세마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더욱이 머리 수건은 개켜 있었다. 이런 사실들은 그의 부활이 단지 영적인 현상이 아님을 증거한다. 십자가 위에서 상하셨던 바로 그 몸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었다. 그의 부활은 확실히 육체적 부활이었다.


[8-10]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하였다. 여자들도 확인하였고 베드로와 요한도 확인하였다. 다른 복음서들에 의하면, 여자들은 그 무덤 속에 예수님의 시체가 없었음을 확인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그 곳에서 두 천사를 보았는데 천사들은 그들에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고 증거하였다. 여인들이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도 뛰어가서 그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하였다. 예수님의 시체를 놓아두었던 무덤이 비었다. 빈 무덤은 부활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시체를 도적질할 능력이 없었다. 그 무덤은 큰 돌로 막혀 있었고 군사들의 경비가 있었다. 예수님의 원수들이 그 시체를 도적질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그의 부활을 확실히 증거한다.


[11-16]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베드로와 요한은 집으로 돌아갔고 막달라 마리아만 남아 있었다. 그 여자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은 물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도 마음이 상한 일인데 그의 시체까지 분실되니 마음이 몹시 슬펐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또한 불신앙의 눈물이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천사들의 증거를 들었을 터인데도 기뻐하지 않고 울었다. 마태복음 28:9에 보면, 여자들은 심지어 길에서도 부활의 주님을 잠시 만났다. 막달라 마리아도 그 중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슬퍼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부르실 때까지도 그를 동산지기인 줄로 알았다. 그러나 믿음과 마음이 연약한 그를 예수께서 찾아주셨다. 그는 그를 사모하며 따르는 자들을 언제나 찾아주신다.


[17,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마태복음 28:9에 보면, 부활하신 주께서는 길에서 여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은 그를 보았고 그의 발을 만졌다. 그러나 그는 혼자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 "나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사람이 만질 수 있는 몸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27절에 보면 주께서는 도마에게 그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체의 성격은 세마포나 머리 수건을 개킬 수 있는 몸이며 사람이 만질 수 있는 몸이었다. 그는 인간의 몸을 가지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인성(人性)을 여전히 증거하셨다. 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고 하나님을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그는 아버지와 동등된 신성(神性)을 가진 자이시지만, 또한 참된 인성(人性)을 가지신 자이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끝으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나의 임무를 주셨다. 그것은 "가서 제자들에게 증거하라"는 임무이었다. 그는 그에게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고 말하라고 했다. 마리아는 주께서 주신 임무대로 가서 그렇게 증거하였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였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실히 증거한다. 본문은 빈 무덤을 통해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다. 예수님의 시체를 둔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사복음서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여 증거하는 바이다. 오늘 본문도 여자들이 그것을 확인했고 베드로와 요한이 그것을 확인했음을 증거한다. 빈 무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한다. 또 부활하신 주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래서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거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신약성경이다. 우리는 이 증거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자.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해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확신할 수 있고 그래야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얻는다. 우리 모두는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아직도 주를 확신치 못한 자가 있다면, 지금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라.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확신하자. 부활하신 주님은 그를 쌌던 세마포를 벗어놓으셨고 그의 머리를 쌌던 수건을 따로 개켜 놓으셨다. 그는 십자가에 상하신 그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 물론 그 몸은 영광스럽게 변화되었지만, 다른 몸이 아니고 바로 그 몸이었다. 그의 몸은 마리아가 만질 수 있는 몸이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여전히 우리를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시고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부르실 수 있는 인간이셨다. 비록 우리가 그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연합의 신비를 다 깨닫지 못하지만, 그는 바로 그런 신비한 신적 구주이시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부활하신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는 임무를 주셨듯이, 오늘날도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가서 나를 증거하라"고 임무를 주신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만인의 구주이심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의(義)가 되시고 영원한 생명이 되심을 증거해야 한다.



19-31절, 제자들에게 두 번 나타나심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 곧 주간의 첫날인 그 날 저녁,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으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셨다. 본문은 그가 문을 열지 않고 들어오셨음을 증거한다. 그의 부활체는 신비한 몸이었다. 물론 그의 몸은 손과 옆구리에 상처가 있었다(20절). 그러나 그의 부활은 단순히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의 몸의 회생(回生)이 아니었다. 그의 몸은 변화된 몸이었다. 그의 부활체는 확실히 장차 우리가 가질 부활체와 같이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몸일 것이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셨다. 유대인들의 위협 속에서 불안과 근심을 가졌던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평강이 필요하였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다. 그 손에는 못자국이, 그 옆구리에는 창자국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상하신 바로 그 몸으로 부활하셨다. 물론 그 몸은 영화롭게 변화되었다. 그는 확실히 부활하셨다. 제자들은 그의 부활을 확인하고 기뻐하였다. 그것은 그가 며칠 전 유월절 식탁 후에 하신 말씀의 성취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너희는 곡하고 애통할 것이나 내가 다시 너희에게 올 것이니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6:17, 20, 22).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다시 말씀하신 후 사명을 주셨다. 그것은 그가 아버지께 받은 사명의 계승이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의 사명은 제자들에게 계승된다. 예수님의 사명은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며 교회의 최대의 임무이다. 병고침이나 기적 행함이 예수님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었듯이, 단순히 선한 사업들, 예를 들어 교육사업, 자선사업, 구제사업 등은 교회의 일차적 사명이나 임무가 아니다. 그것들이 비록 선한 일들일지라도 그것은 교회의 사명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전도이었듯이, 교회의 사명은 전도에, 오직 전도에 있다. 실상, 영혼 구원의 전도는 이웃을 위한 가장 큰 사랑이요 가장 큰 선행이다. 영혼을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건져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주께서 주신 사명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성령을 받는 것은 사명 수행을 위해 필수적이다. 물론 이 말씀은 예언적이다. 이 말씀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성취될 것이다.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내려오셨다(행 2:4).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주께서 명하신 전도의 사명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음으로 능력 있는 전도자들이 될 것이다. 과연 그들은 그렇게 되었다.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구원 운동은 죄사함의 운동이다. 죄가 개인과 사회의 근본적 문제이었다. 복음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는 도리이다. 죄인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누가복음 24:47, "[성경에는]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에베소서 5:26, "이[교회]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4, 25]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예수님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도마는 이성적 생각을 가지고 주의 부활을 의심하였다. 그는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증거하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그 손의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으며 그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그것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오늘날도 도마 같은 교인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여드레는 다시 일요일 곧 주일을 가리킨다. 그 날도 제자들은 문들을 닫고 있었는데 부활하신 주께서는 그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을 복되게 하셨다. 그 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그 날 성령께서 강림하셨다(행 2:1). 그 날 사도 요한은 주께서 재림하시기 직전 마지막 날들에 되어질 일들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계 1:10). 주일은 복된 날이다.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께서는 도마에게 말씀을 건네셨고 믿음의 기회를 주셨다. 주께서는 도마에게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부활은 영이나 정신세계의 현상이 아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세계의 사건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5:13-15,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도마 같은 합리주의자들은 죽은 자의 육체적 부활에 대해 의심하지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요 증인들의 증거의 진실성을 믿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고 말씀하셨다(마 22:29).


[28, 29]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의심 많았던 도마는 예수님을 보고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 그것은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믿음의 고백인 동시에 그의 신적 인격에 대한 신앙고백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부활의 주님을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이 교회 역사요 기독교 확장의 역사이다. 베드로는 그의 첫번째 서신 수신자들에게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썼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그를 믿고 있다. 우리는 그를 본 증인들의 증거의 말씀들에 근거하여 그를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30, 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 제자들의 증거가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그가 행하신 기적들과 부활이 증거한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생을 얻는다. 제자들은 주께 받은 사명을 말로 증거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책을 통해 이루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부활체의 신비를 알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 위에서 상하신 그 손과 그 옆구리를 가진 바로 그 몸이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몸은 닫힌 문을 통과하여 방에 들어오실 수 있는 몸이었다. 단순히 죽은 몸의 회생이 아니고 확실히 영화롭게 변화된 육체이었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자. 그의 손의 못자국과 그의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고 만져보고 믿겠다는 도마 같은 의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제자들의 진실한 증언들을 믿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자.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보지 않고도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을 확인하고 믿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이 되자.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다. 그것은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의 계승이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셨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고 능력을 받아 죄사함의 복음을 만인에게 전파하자. 이 일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복된 일이다. 사람을 영원한 지옥의 불못으로부터 건져내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은 없다.




21장: 세 번째 나타나심


1-14절, 세 번째 나타나심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증거한다. 그것은 그가 디베랴 바다에서 나타나신 사건이었다.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바다 혹은 게네사렛 호수라고도 불리운다. 그 곳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곳이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시몬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부르셨고 그들은 즉시 그물을 버려 두고 그를 좇았다(마 4:18-20). 또 그는 거기서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셨는데 그들도 즉시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그를 따랐다(마 4:21, 22). 갈릴리 바다는 또한 예수께서 많은 무리를 가르치시던 곳이었다(마 4:23).


주께서 부활하신 날 새벽, 천사들은 그의 무덤을 찾아온 여자들에게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고 말했다(마 28:7). 또 그는 길에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8:10). 마태복음 28:16은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의 명하신 산에 이르러 부활하신 주를 보았다고 증거한다. 그 때 주께서는 그들에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사명을 주셨다(마 28:19).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디베랴 바닷가에서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본절은 적어도 일곱 명의 제자를 언급한다. 세베대의 아들들은 요한과 야고보이며 또 다른 제자 둘의 이름은 생략되어 있다. 이 일곱 명은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사건 곧 디베랴 바닷가에서 나타나신 사건의 증인들이었다.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했다. 다른 제자들도 그에게 동의하며 그와 함께 나가서 배에 올랐다. 부활하신 주께서 그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그는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심으로 전도의 사명을 재확인시켜 주셨다(요 20:21). 그러나 그들은 아직 전도의 일을 하지 못했고 할 힘도 없었다. 그들은 고기나 잡으러 배에 올랐다. 그러나 그 밤에 그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시기 위해 그렇게 섭리하셨다.


[4-6]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베드로와 제자들은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나 헛수고를 하였고 날이 새어왔다. 그때 예수께서는 바닷가에 나타나셨다. 그가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먹을 것이 있는가라고 물으셨다. 그들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그의 말대로 그물을 던졌는데, 그들은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했는데, 고기가 이곳에 다 몰려 있었다니! 그리고 저 사람이 어떻게 고기가 있는 곳을 알았는지!


이 놀라운 사건은 수년 전 예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의 사건과 비슷하였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때 시몬의 배를 타시고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셔서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는데 그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시몬은 대답하기를, "선생이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말하며 그물을 내렸다. 그런데 그는 고기를 너무 많이 잡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배에 있는 친구들을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고 하였고 그들은 와서 잡은 고기를 두 배에 가득채웠다. 그때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고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었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거기에 있었다. 이제 본문에 기록된 이 사건은 수년 전 그때의 사건과 비슷하였다.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인 사도 요한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라고 말했다. 시몬 베드로는 그 말을 듣자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의 행동은 그가 주 예수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었는지를 잘 나타낸다. 그는 진실히 주님을 믿고 있었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주께서 부활하신 것을 이미 보았고(눅 24:34) 또 본 다른 제자들의 말도 들었고 그 주님을 다시 보기를 간절히 사모했던 것이 분명하다.


[8, 9]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相距)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와의 거리가 50간 정도밖에 안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왔다. '50간'은 원문에 200규빗이며 약 90미터 정도된다. 그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거기에 숯불이 있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준비해 두신 식탁이었다. 예수께서는 배가 고팠을 제자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 주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과 배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육의 필요를 아신다. 그래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신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들 특히 그의 백성된 자들을 먹이시고 입히실 것은 더욱 확실하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영적인 일들에만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 그는 또한 우리의 육적인 일들에도 관심을 두신다.


[10, 11]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는 방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다.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그물에 가득히 찬 큰 고기가 153마리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고기가 잡혔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53이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많이 주시는 하나님,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다. 그는 하고자 하시는 일을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들은 세상의 일을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또 불확실한 미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이끄실 것이 확실하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뜻대로 살기만 힘쓴다.


[12, 13]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신기한 아침식탁에 앉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주님이신 줄 알았기 때문에 당신이 누구냐고 감히 묻는 자가 없었다. 예수께서는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셨고 생선도 그와 같이 주셨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셔서 먹게 하셨다.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이것은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일이었다.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어 보인다. 고기잡이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이 이전에 했던 세상 일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옛 생활이었고 옛 직업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어부들을 불러서 전도자로 삼으셨었다.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었다(마 4:19, 22). 15절 이하에 나오는 대로, 아침식사 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전도의 사명을 일깨우셨다. 베드로나 제자들은 옛 생활, 옛 직업으로 돌아가서는 안될 자들이다. 주께서는 그들을 전도자로 부르셨었다. 전도는 고기잡이보다 더 큰 일, 더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들은 그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게 하신 것은 그들로 주께서 주신 사명 즉 전도의 일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주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심으로 많은 고기가 잡히게 하셨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남자 장정만 60만명이며 여자들과 아이들을 합하면 족히 200만명이 되었을 그들을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먹이셨다. 그는 그렇게 하실 능력이 충분히 있으신 분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궁핍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면 그들은 전도자의 사명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힘만으로는 한 명도 구원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많은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또 한번의 확증이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는 디베랴 바다에서 나타나셨다. 본문 2절에 언급된 7명의 제자들은 이 사건에 대한 증인들이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그 아침에 신기한 아침식사를 나누었다.


본문은 또한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먹을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심을 증거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숯불과 떡과 생선을 준비하셨다. 그는 그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이 큰 물고기를 153마리나 잡게 하셨다. 그는 그 아침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 주께서는 우리의 영혼만 관심을 가지시지 않고 우리의 육신의 필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신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신의 양식도 주신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바른 믿음으로 살고 죄 짓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본문은 또한 영적인 암시를 남긴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세상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택한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은 참된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모든 성도들은 그 일을 위해 힘써야 한다. 특히 전도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전심전력해야 한다. 주께서는 제자들의 사명을 일깨우시기 위해 그들이 그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 일의 가치를 알고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지나가고 쇠하여지지만 하나님의 일은 든든히 서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영원한 천국의 삶을 누릴 것이다.



15-25절, 내 양을 먹이라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의 관심은 먹는 데 있지 않고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전도자의 사명을 일깨우시는 데 있었다. 아침식사 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전통사본에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말 대신에 '요나의 아들 시몬아'라고 되어 있다. 마태복음 16:17의 '바요나 시몬아'라는 말은 '요나의 아들 시몬아'라는 뜻으로 본문의 전통사본의 읽기와 같다. 옛날 요나가 하나님의 사명을 저버리고 도망쳤듯이 시몬 베드로는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저버리고 고기잡으러 갔다. 그러나 그는 돌이켜 하나님의 일을 힘써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었다(마 16:16; 요 6:69). 또 그는 마지막 유월절 저녁식탁에서 주께서 제자들이 자기를 버릴 것을 말씀하실 때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했고(마 26:33) 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는 그의 단호한 마음을 표현하였다(마 26:35). 그러나 그는 그 밤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었다. 그것은 그의 수치스러운 연약과 실패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연약한 인간이었으나 그의 마음에는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다. 그는 이제 그것을 주님 앞에 고백한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의 고백은 그의 신앙고백이며 그의 사랑의 고백이다.


그의 대답을 들은 주께서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의 사명을 재확인시키는 일이었다. 주께서는 그를 전도자로 부르셨다. 전도와 목양(牧羊)은 하나님의 일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집이다. 교회는 주께서 사랑하셔서 피흘려 사신 백성의 연합체이다. 교회의 구성원인 교인들은 하나님의 양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양이다. 목사와 장로들은 하나님의 양들을 먹이며 양들을 치라고 세우신 자들이다(행 20:28; 벧전 5:1-4). 베드로는 이제 고기잡는 옛 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그는 이제 전도와 목양의 사명을 기억하고 그 일을 위해 바쳐져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16, 17]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셨다. 주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도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 베드로는 세 번째는 근심하며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세 번이나 반복된 주의 질문에서 우리는 그 내용의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가? 우리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주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는 대답을 듣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꼭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바울은 말했다(고전 16:22).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진심으로 사랑해야 마땅하다.


모든 신자들이 다 그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고후 5:14, 15). 그는 또 말하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 8). 우리 모두는 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고 그를 위해 살아야 한다.


또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받으실 때마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목양(牧羊)은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교회와 성도들의 최대의 과제이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며 헌금해야 한다. 또 하나님께서 많은 신실한 전도자들을 일으켜 주시고 세워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한 명의 전도자를 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사랑하시고 사용하시는 종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아울러 전도의 사역, 곧 교회의 사역을 위해 협력하는 모든 직원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하는 자들이다. 마태복음 25:40, 45은 주께서 세우신 전도자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은 곧 주께 한 것이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은 곧 주께 하지 않은 것이라고 증거한다. 또 주께서는 그가 파송하시는 자를 영접하는 자는 주를 영접하는 것이요 그를 대접하는 것은 곧 주를 대접하는 것이며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42).


주께서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받으신 후 목양의 사명을 일깨우신 것은 목양의 일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일들 중에 영혼들을 다루는 일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 세상에서 오만가지의 더러운 질병들을 치료하는 의사들의 일보다 더 위험하고 어려운 일도 없겠지만, 사람의 영혼과 인격의 질병은 육신의 병보다 더 치료하기 어려운 것이다. 교회는 영적인 병자들의 집합소와 같다. 구원은 영적인 병자들이 치료받는 일과 같다. 인간의 죄성(罪性)은 여러 종류의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이다. 그것은 뿌리뽑히지 않는 질병과 같다. 그런 죄인들을 다루며 가르치며 책망하며 위로하며 돌보는 것이 목양이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억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으로만 겨우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죄악된 인생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양들을 사랑해야 하고 사랑한다.


[18, 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께서는 이 말씀에서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죽을 것을 암시하셨다. 초대교회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러 못박혀 순교를 당하였다고 한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그가 주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는 암시이었다. 우리의 사랑하는 주께서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주의 일꾼된 우리는 주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하고 순교를 당할 각오까지 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고(행 20:24), 또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다(딤후 1:8).


고난을 각오하며 사는 것은 단지 전도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세상에는 고난이 있다. 주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다(마 16:2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다(빌 1:29).


[20-22]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주께서는 베드로가 그를 따를 때 다른 이와 비교하거나 다른 이의 일에 관여치 말고 주님만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 즉 만찬석에서 주의 품에 기대었던 그 제자에 대해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하고 주께 물었을 때, 주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대답하셨다. 주의 일꾼들은, 비록 교회의 성결과 화평을 위해 바른 말을 하고 잘못된 일들을 지적하는 일들이 간혹 있으나, 다른 사역자와 비교하거나 경쟁하거나 참견하는 일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각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하면 될 것이다. 교회의 모든 직분자도 다 그런 마음으로 주를 섬기며 충성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남의 일을 상관치 말고 하나님만 바라며 하나님 앞에서만 충성하고 하나님의 명령만 준행해야 할 것이다.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 오해하여 그 제자가 주님의 재림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주의 말씀은 그가 주의 재림 때까지 죽지 않고 살겠다는 뜻이 아니고 주께서 그를 그때까지 머물게 하고자 하실지라도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씀하신 것뿐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이해력은 매우 부족하였다. 사람의 이해력은 매우 제한적인 것 같다.


[24, 25]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주의 사랑하는 그 제자, 만찬석에서 주의 품에 의지하였던 그 제자가 바로 이 책을 기록한 제자이었다. 그는 우리가 아는 대로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다. 이것은 본서에서 그가 자신의 이름을 감춘 겸손한 미덕에서 짐작될 뿐 아니라 초대교회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실하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내용들 중에서 극히 일부분을 선택하여 이 책에 기록하였다.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라는 말씀은 요한 당시의 교회의 공동적 증거이다. 이 구절은 사도 요한의 글에 대한 초대교회의 보충적 증거이다. 초대교회가 증거한 대로 이 책에 기록된 사도 요한의 증거는 다 참된 증거이다. 이것이 성경의 성격이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진실한 증거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주께서는 옛날 베드로에게 질문하셨듯이 우리에게도 질문하실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하는가?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속죄의 은혜를 받은 자마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전도와 목양(牧羊)의 일을 귀히 여기자.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며 주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은 바로 이 일이다. 그것은 교회의 최대의 과제이다. 우리는 이 일을 가장 크게 여기고 이 일을 위해 마음과 물질을 힘써 사용하자. 셋째로, 우리는 주님을 따르자. 주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은 또한 그를 따르는 길이다. 그것이 참된 제자의 삶이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되 주께서 당하신 것과 같은 고난을 각오하며 따라야 하고, 또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다른 사람의 일에 관여치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 앞에서만 충성해야 한다. 이것이 주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바요 오늘 우리에게도 요구하시는 바이다. 주님만 바라보며 그를 따르자.





출처 : 우림과 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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